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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9일 19시 38분 등록
 

1. 느린 길을 걷다, 나와 닮은 신을 만나다.  

 

 길에는 여러 가지 시간들이 있다. 느린 시간일수록 사람을 걷게 만든다. 그 길을 걸으면서 나를 찾기도 한다. 시라쿠사의 길은 느린 시간이다. 고대 신화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숨결을 느끼면서 느림을 만끽한다. 나를 돌아보며 그 길과 하나가 되어 본다. 순간, 시라쿠사는 나에게 걸어 들어왔다.

 

   에트나 산을 내려와 시라쿠사를 향했다. 휴게소에 들렀다. 주유소와 붙어있는 휴게소에는 간단한 음식과 기념품을 주로 팔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휴게소를 나오려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가 이태리 말로 소리쳤다. 지나오면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 움찔했다. 하지만 자신의 옷을 두 손으로 가리키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붉은 체크무늬 반팔 셔츠였다. 아무리 봐도 내가 입은 옷이랑 똑같았다. 그의 옆에 있던 아내와 딸도 함께 앉아 활짝 웃는다.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쳐다봐도 상표만 틀릴 뿐 똑같은 옷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창피하게 생각하면서, 반갑다는 생각보다는 외면하려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이처럼 시실리아 사람들은 동질성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낸다. 그에 대한 표현도 적극적이다. 낯선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구 반대편에 나와 생각이 닮은 생각을 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또 다른 내가 어느 시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비록 살아가는 방식은 틀리겠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나보다 삶이 적극적이다. 가족과 함께 환하게 웃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가 건넨 손을 잡으며, 시칠리아 사람들의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함께 나눈 웃음에서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영화 <대부> 한 장면처럼 패밀리에 대한 끈끈한 사랑이었다.

 

 이전까지 아직은 낯선 곳이라는 생각에 시칠리아 사람들에 대한 거리감이 있었지만, 금새 경계를 풀고는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여행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신이 잠깐 인간의 모습으로 나를 만난 것이 아닐까? 조금씩 신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다.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2. 그리스 극장의 비밀

 

 고고학 공원에 들어서자, 그리스 극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히에론 2세가 BC 3세기에 건설한 극장은 뜨거운 태양 빛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관객 자리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 너머로 지중해 바다가 펼쳐져 있다. 먼 곳에서 가져온 자재로 건설한 극장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석회암층을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 동안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채꼴 모양의 그리스 극장은 무대를 중심으로 230도 내외의 각을 이루며 객석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형태는 광장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를 중심으로 청중이 모여 둘러싸는 인파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때문에 시각적 불편함이 다소 있으나, 그리스 극장에서는 어느 위치에 있어도 중심 공간과 객석의 배치가 자연스럽다. 무대 중앙에 서서 박수를 쳐보자, 극장 상단 끝에 있는 사람들도 들었다면서 박수를 친다. 이렇게 음이 전달하는 소리의 각도와 객석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각도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스 극장을 걸어 올라가면서 비밀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석회암 계단 사이에 있는 그늘진 곳에 구멍 속이었다. 그 안에는 이름 모를 풀이 자라고 있었고, 뜨거운 여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초록들이 눈부셨다. 그 틈 사이로 초록은 여름을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그늘진 공간에 몸을 기울이고, 노래 소리를 듣는다. 눈을 감고 들어 본다.

 바다 넘어 석양이 질 무렵, 극장에는 어느새 관객들로 둘러 쌓이고, 무대 중앙에서 배우들의 노래가 들린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에서 코로스의 노래 소리다.

 

 ", 덧없음은 세상의 인간사, 행복하다는 것도 알고 보면 그림자와 같은 것. 또한 운이 나쁘다 해도 젖은 걸레로 한두 번 훔치면 당장에 지워질 그림과 다를 바 없어요."

 

 이렇게 그리스 극장의 석회암 계단들은 배우들의 노래 소리와 자연의 소리를 함께 녹음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찾는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이 곳에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석회암 돌 계단 틈 사이의 구멍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리고, 눈을 감고 들어보자.

 

 최근에 과학자들도 그리스 극장의 비밀을 풀어냈다. 1 4천명이나 되는 청중이 배우와 악사들의 소리를 확성장치 없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던 비밀이 풀린 것이다. 그 비밀은 내가 발견한 석회암 계단에 숨어 있었다. 이 석회암 계단들은 청중의 웅성거림과 같은 저주파를 흡수해 배경 소음을 줄이는 여과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고주파를 청중석으로 반사해 효과를 증폭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계단식 청중석의 굴곡진 표면이 소리를 잡는 천연의 덫 기능을 했던 셈이다.

 

 

3.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리스 극장 언덕 위쪽으로 동굴처럼 되어 있어 채석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스 시대, 신전이나 구시가의 건물을 세우기 위해 돌을 채취했던 곳이다. 시라쿠사인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아테네의 오랜 포위공격(BC 415~413)을 견뎌내면서 아테네 침략군을 물리쳤다. 그 때 사로잡힌 아테네 포로들이 7년간 노역을 하면서 노예로 팔려간 곳이기도 하다. 1693년의 대지진 전에는 하늘을 찌를듯한 거대한 바위가 있어 '바위 천정' 같았으며, 이것을 본 화가 카라바조가 '천국의 채석장'이라고 이름 붙였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로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벽면을 쳐다 보는 순간, 살아있는 도마뱀의 모습을 보였다. 도마뱀은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알리듯이 움직임과 멈춤을 반복했다. 카메라로 그 움직임을 쫓아갔다. 내가 그늘진 이 곳으로 들어온 것처럼 도마뱀도 뜨거운 태양이 힘겨워서 일까? 어느새 돌 구멍 사이로 들어갔다. 그런데 몸은 다 들어가지 않고 꼬리만 내 놓고 있다.

 

 구멍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꼬리만 내어놓는 모습이 나의 모습과 닮았다. 누군가에게 알듯 말듯하게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놓지 못하고 일부분만 내 놓고 있다. 그리고, 영혼은 구멍에 꽉 끼어버린 채 어둠 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나는 소리 없이 손을 움직인다. 그리고 닳을 듯 말듯 꼬리를 잡아보려 하지만, 어느새 도마뱀은 구멍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채석한 뒤에 생긴 갱도의 빈 구멍들은 죄수, 포로들의 감옥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어두운 구멍들 사이로 초록 덩쿨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바닥까지 길게 뻗는 그들의 생명력은 그 당시 감옥에서 생을 이어나간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낯선 땅에서 앞날을 알 수 없는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무언가에 의지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것은 풀 한 포기, 도마뱀, 동굴 안쪽으로 비쳐지는 햇살 한 조각이었을 것이다. 채석장 안쪽으로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 소리에서 그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그늘에서 나와 햇살이 쏟아지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태양과 마주하면서 큰 숨을 들이쉰다. 구멍 속에 끼어있던 내 영혼은 살아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느낀다.

 

 

4. 나의 노래를 부르다.

 

 천국의 채석장에서 가장 특이한 모양을 가진 동굴이 있다. '디오니소스의 귀'라는 곳이다. 이 곳도 한때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음향 효과가 뛰어나서, 감옥으로 사용될 당시에는 동굴 밖에서 갇혀 있는 죄수들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귀 모양의 동굴로 발걸음으로 옮길 때마다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깊이 65미터까지 돌아가면서 깊어진다.

 

 함께 동행한 동료들과 '사랑해 당신을' 불렀다. 동굴 안에서 부르는 노래는 공명이 되어 울려 나갔다. 우리 안의 작은 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의 마음까지 담아내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 동굴이었다.

 

 어둠 속에서 노래 부르던 추억이 떠올랐다. 건설현장에 있는 맨홀 구멍에 빠진 기억이다. 야간 현장을 순찰하다가 6M깊이의 구멍으로 떨어졌다. 무언가에 부딪치고는 비명소리와 함께 허공에 멈추었다. 아랫도리가 정확히 각목에 걸쳤다. 불알 두 쪽이 터진 것 같았다. 괜찮은지 만지고 싶었지만, 살기 위해 매달려야 했다. 조금씩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손전등은 한쪽 벽면을 외롭게 비추고 있었다. 각목이 얼마나 지탱하고 있을지, 손전등의 불빛은 언제까지 나와 함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닥에서 비쳐오는 불빛이었다. 나는 천천히 노래를 불렀다. 잠들지 않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 나의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노래했다. 어두운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나의 소리는 고요하면서 힘이 있었다. 그리고, 벽면을 비추고 있던 불빛을 바라보면서 무대 위에 서 있는 나를 상상했다. 현실에서 바동바동 거리며 살아 가는 모습이 아닌, 내 삶의 무대에 우뚝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비록 어둡고 죽음과 직면한 두려운 순간이었지만, 불빛을 보면서 희망을 노래했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라고 다짐했었다.

 

 그 때의 바램을 담아 '디오니소스의 귀'에서 노래를 불렀다. 함께 부르는 이들과 하나가 되었다. 동굴 안은 어둡다는 느낌대신 평온과 따뜻함으로 채워졌다. 서로의 마음 속에 불빛이 하나 둘 밝혀졌다.

 

 

5. 잃어버린 동료를 찾아서

 

 고고학 공원에서 마지막으로 로마 원형 경기장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스 극장이 연극을 위한 것이라면 로마식 원형 경기장은 인간의 탐욕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 인들이 연극을 보면서 이성과 철학으로 비극을 즐겼다면, 로마인들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과의 사투를 보면서 피로 얼룩진 비극을 만끽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처음부터 혼자 떨어져서 걸어오던 동료 여자가 오지 않았다. 간신히 전화 통화가 되어서 현재 위치를 물어보았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흩어져서, 우리가 다녀온 유적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안테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주변에 대한 정보가 없는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태리어에 능숙한 사람과 연결해서 물어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조금 전 채석장에서 보았던 도마뱀처럼 자신의 꼬리만 내어 놓은 채 어둠 속에서 자신을 찾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어두운 구멍으로 깊이 들어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지중해의 태양은 정말 뜨거웠다. 땀에 흠뻑 젖은 우리는 차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반대편 입구를 한참 지나서야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길게 뻗는 도마뱀 꼬리가 연상되어서 웃음이 나왔다. 안도와 기쁨의 웃음이었다. 차에 올라탄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비극과 희극이 교차한 하루였다.

 

 그녀에게 왜 길을 잃었는지 물어보았지만,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속상해했다. 아마도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사랑의 신 '에로스'가 그녀의 눈을 탐욕으로 멀게 했을까? 더워서 비키니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이태리 여자들에게 나 또한,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 말이다. 내가 만약 길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했을까? 뒷걸음치며 구멍에서 빠져 나왔을까? 아니면 어두운 구멍으로 깊이 들어가 버렸을까? 8,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6. 신과 인간들의 영원한 안식처 '오르티기아 섬'

 

 시라쿠사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바닥에 박혀 있는 검은 색 돌들은 오랜 시간으로 표면이 부드러웠다. 짧은 다리를 건너 오르티기아 섬에 도착했다. 시라쿠사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먼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수없이 그림으로 보았던 아레투사의 샘을 찾았다. 샘 가운데 자라고 있는 식물은 민물에서 자란다고 하는 파피루스다. 샘 안쪽에 유유히 헤엄치는 백조를 바라보면서 아레투사를 떠올려본다.

 

 "아레투사,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느냐? 아레투사,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느냐?" 알몸으로 도망치는 그녀를 향해 강의 신 알페이오스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노한 알페이오스는 아레투사를 뒤쫓았고, 아레투사는 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아르테미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르테미스가 두꺼운 구름으로 아레투사의 몸을 가려주지만, 그녀의 몸은 서서히 물로 변하면서 오리티기아 섬에 이르러서 샘이 되었다.

 

 지질학적으로 샘 아래는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비록 신화 속의 아레투사는 샘의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내고 있지만, 내면에는 바다로 흘러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강의 운명이다.

 

 난폭한 살인자로 불리며, 위험한 삶을 살았던 화가 '카라바조'가 도망쳐 온 것도 시라쿠사였다. 그의 작품은 빛과 그림자를 교차시켜면서 인간의 영혼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기존의 틀을 과감히 깨틀어버린 그의 천재성은 천박하다는 이유로 비난 받으며, 남루한 옷차림으로 도시를 떠돌게 된다. 살인을 저지르면서 시라쿠사로 피난 온 카라바조는 그 곳에서 '성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그리게 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눈빛은 그의 삶만큼이나 강렬하다. 분명 카라바조도 아레투사의 샘에서 오리티기아 항구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오리티기아 섬은 신과 인간들의 영원한 안식처다. 항구 쪽으로 걸어 내려가자, 좁은 골목길 너머로 보이는 푸른 바다가 나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바다가 육지를 품고 있는 형상이 '육지 가운데 있는 바다'라는 지중해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바다를 품에 안은 자가 세상을 지배했듯이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오리티기아 항구에서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바다를 품에 안아 본다.

 

 

7. 여행의 모든 즐거움이 숨어 있는 곳 '오르티기아 섬'  

 

 오르티기아 섬에는 수 많은 즐거움이 숨어 있었다. 먼저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아폴론 신전의 유적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신전의 왼편을 따라 길게 늘어선 형형색색의 옷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고 있었다. 공중에 가득 걸어 옷들은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나의 동료들을 유혹했다. 가격은 웃옷 한 벌 당 3유로. 원피스는 5유로. 착한 가격이었다. 옷들을 골라 들고 신이 나서 걸어오는 모습이 어린 소녀들 모습 같았다.

 

 광장으로 걸어 올라가자, 아르키메데스 분수가 보인다. '유레카'를 외치며 욕조에서 뛰어나간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난 곳이다. 거리에는 그의 이름을 딴 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분수의 이름에도 그의 이름이 지어진 것을 보면서 시라쿠사 사람들의 그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시라쿠사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그의 노력 때문이 아닐까?

 

 잠시 눈을 돌려 좁은 골목길을 바라보면 조금 전 보았던 오르티기아 항이 보인다. 어두운 골목을 푸른 바다가 비쳐주고 있었다. 이렇게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카메라에 담아 보지만, 이미 눈 속에 들어온 장면들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메라에 찍힌 장면들을 확인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쫓아갔다. 잠시 뒤에 고개를 들자, 넓은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피아자 델 두오모'라는 대성당 광장이었다. 이 성당은 7세기 그리스 신전 위에 세워졌다. 성당이라기 보다는 신전의 모습처럼 아름다웠다. 성당 건너편 카페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노을에 비친 성당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앉아 여유로움을 즐기고 싶었지만, 배가 고팠다. 순간, '여행의 즐거움은 보는 것보다 먹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을 지나 좁을 길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카페, 벽면에 걸린 대형스크린 앞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이탈리아 수구 대표팀을 응원하러 시라쿠사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축구, 배구등 구기 종목에 열정적인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와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카페들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들어간 'OSTERIA CAPPELLINE'라는 카페 작은 미술관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시라쿠사 여자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친구들과 환하게 웃는 모습, 임신한 모습, 썬글라스를 낀 채로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정겨웠다.

 

 카페의 야외식당 손님은 우리 뿐이었다. 2000cc 맥주와 피자, 라자냐를 주문했다. 여행의 피로를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날려버렸다. 그런데 멀찌감치 앉아 계셨던 어느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올 때부터 우리를 주시하고 계셨다. 손님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카페를 운영하는 형제의 어머니였다. <대부>의 말론 브란도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시라쿠사를 방문한다면 큰 길에 줄지어 서 있는 카페보다 이렇게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한적하고, 옛 건물로 둘러싸인 식당에 가보길 권하고 싶다. 진정한 시칠리아의 맛과 정겨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오리티기아 섬에는 여행의 모든 즐거움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보는 즐거움은 오르티기항에서 바라보는 지중해 바다의 모습이다. 사는 즐거움은 합리적인 가격들 때문이다. 그리고 먹는 즐거움은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찾을 수 있었다.

 

 

8. 시라쿠사를 떠나며

 

 나의 고향은 경남 양산에 있는 월래 바닷가다. 지금 그 곳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낸 나는 외국 기술자들의 자녀들과 바닷가에서 함께 뛰어 놀았다. 푸른 눈, 금발 머리를 가진 아이들과 함께 자라서인지 그들의 모습은 친숙했다. 마치 오랜 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오리티기아 항에서 지는 노을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바다를 떠올린다. 모든 바다색깔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 보면서 순수했던 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물들여 본다. 물장구를 치며 바다로 걸어가는 아이가 보인다. 나처럼 온 몸을 붉게 물들이며 걸어간다. 나는 카메라 셧터를 눌렀다. 노을과 아이의 순수한 모습을 잡았지만,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오리티기아 섬에만 맡을 수 있는 바다내음을 담아내지 못해 아쉬웠다.

 

 8월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신화가 숨쉬는 시라쿠사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 극장에서 초록들의 여름 노래 소리를 들었으며, 도마뱀의 움직임을 쫓으며 나의 현실을 바라보기도 했다. 디오니소스의 귀에서 울려 퍼지는 나의 음성을 들으며 내 삶의 주인공은 ''라는 사실을 발견하며 '더욱 더 뜨겁게 삶을 사랑하리라' 다짐했다 . 그리고, 아레투사의 샘에서 카라바조의 강렬한 작품을 떠올리면서, '생각의 틀을 깨고 의식의 흐름대로 느낌이 가는대로 글을 써보리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오리티기아 섬에서 여행의 온갖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나는 아그리젠토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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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20:15:51 *.194.37.13

드디어, 시칠리아 여행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일단 제가 맡은 '시라쿠사'에 대한 부분만 올렸습니다. 다음으로

올라오는 팔팔이 연구원들의 글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해주신 사부님과 선배님, 지인분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앞으로도 팔팔이들을 열심히

지켜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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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21:58:00 *.70.23.50
우앙. 생생한 여행기 너무 좋네요. 여행 자료 만들면서 익숙한곳은 마치 저도 갔다온 듯한 느낌이 들어서 더욱 좋아요. 감사합니다~!^^ 다른분들의 여행기도 기대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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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23:59:31 *.2.60.81

감사합니다, 미나 선배님~^^ 이번 여행준비할 때, 누님 자료 많이 참고했습니다.

선배님 자료가 있었기에, 저희 여행이 더 즐거웠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여행의 첫 시작을 열어 주셔서 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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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01:06:14 *.38.222.35

헐... 누님? 이라뇻! 저한테 누님이라 하신건 아니겠죠?(라고 여쭙지만.. 제 댓글에 댓글을 다셨으니..;;... OTL)

제가 한참(?) 동생인뎅...ㅜㅜ... 저의 무슨 앞길을 막으시려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ㅋㅋ..

 

걍 편하게 '미나야' 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ㅎㅎ..^^

 

어쨌든.. 제가 만든 자료.(물론 로이스님이 자료를 거의 주신걸 저는 그저 짜집기했을 뿐이지만요... ^^;;헤헤)가 도움이 되셨다니 저는 그저 뿌듯할 따름입니다. 여행 같이 가지 못한것이 무척 아쉽지만요... 그래도 이렇게 생생한 여행기 덕에 이후에라도 함께할 수 있어 너무 즐겁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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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01:21:26 *.2.60.133

선배님, 죄송합니다. 저희 동기중에 누님들이 많아서...

이를 어찌할까요? 제가 나중에 꼭 밥 사도록 하겠습니다!!!

연락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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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08:44:12 *.196.23.76

ㅋㅋㅋㅋㅋㅋㅋㅋ

미나 선배는 저랑 레몬이랑 동갑이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엄청 재밌는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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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12:35:28 *.38.222.35

내말이... 이런 퐝당한 상황이라니...

 

참.. 세린님... 이준과 저는 선배후배 이런거 다 집어치우고 친구로 편하게 지내기로 했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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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15:05:20 *.196.23.76

ㅋㅋ 그럼 나도 집어치우는 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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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12:34:09 *.38.222.35

연락 기다리겠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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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08.19 23:25:46 *.85.249.182

시칠리아의 ' 시라쿠사 ' 너무 잘 읽었어.

사진도 좋고, 문장도 좋고 흠뻑 빠져들게 만드네.

내가 지금 시라쿠사의 어느 골목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괜히 가슴이 설레는 느낌이란다.

시라쿠사는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디오니소스의 귀' 라는 이름의 동굴은  호기심을 일으키고,

작은 카페에서 마시는 맥주도 맛있겠다.

승욱이 고향이 월래라고 하니 너무 좋아.

중고등하교 때 내 친구가 외갖집이 월래라면서 방학때마다 내려가곤했지.

바다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서 부러워했는데.^^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이 넘 좋아. 소개해줘서 독자들에게 지적 만족감을 주고 있단다.

근데 여행갔다오자마자 이렇게 긴 글을 척척 써내게 하는 사부님도 대단하시지만,

그렇다고 척척 써내는 팔팔이들은 더 대단해.

좋은 책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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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00:54:31 *.2.60.81

누님께서 해주신 조언대로 열심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댓글을 적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팔팔이중에 누님처럼 좋은 작가분이 계셔서 넘 든든합니다.

 

나중에 오프수업때 제 고향 '월래바닷가'에 대해 이야기 나눠요,

누님한테 좋은 이야기거리가 많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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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00:48:49 *.161.240.251

잘 다녀왔는지, 어떤 재미난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후기로 남겼구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

시칠리아 여행을 상상해보며..

 

조만간 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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