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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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나 산 Mount Etna
Memento Mori, Carpe Diem 죽음을 기억하라, 현재를 즐겨라.
에트나를 향해 출발한 버스 안에서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낭독한 후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오늘 살아있는 화산 에트나로 갑니다.’ ‘눈 속에 갇혀 죽으나 불에 타 죽으나 마찬가지다.’
멋진 말로 운을 띄운 스승은 그 곳을 다녀온 후 에트나라는 시를 지었다.
에트나 -구본형-
이곳은 속이 타올라 참지 못하고
소리쳐 부르며 밖으로 치솟은 나의 내면
안 밖이 뒤집힌 곳
비옥한 검은 화산재가 사막의 모래 언덕처럼
부드러운 굴곡으로 누운 여인 같은 곳
지하의 하에스가 바위틈으로 어느 날 시칠리아를 굽어보다가
엔나의 평원을 거닐며 꽃을 따던 여인에게 달려가
단박 품에 안고 땅 속으로 꺼져 버린 곳(주1)
가서 보니 에트나는 지하세상이 하늘을 만나는 곳
아직도 여전히 불과 연기로
오, 단 한번의 눈길이 영원한 사랑이 되었으니
사랑에는 두 번이 없는 법 미래도 없는 법
오직 지금 여기 한번 뿐
다시 에트나를 찾아 올 것이라 여기지 마라
여기서 사랑의 묘약을 살 수 있다 여기지 마라
오직 가슴 속에 죽은 듯 잠복한 불길을 스스로 살려낼 때
삶이 사랑임을 알게 되리니
비로소 화산재가 더없이 비옥한 풍요임을 알게 되리라
아래 녁에 사는 사람들이 으르렁거리는 화산을 떠나지 않고
일생을 여기서 바치는 이유는 용암이 덮치는 위험보다
사랑으로 활활 탄 재가 불러오는 풍요가 더 좋기 때문
나도 아노니 사랑은 용암처럼 위험하지만
사랑에 검게 타지 않은 인생은 쓸모없는 불모지
왜 하데스가 플루톤으로 불렸는지
그리고 왜 플루톤이 부유한 자라는 뜻인지(주2)
나는 에트나에 서서
삼천 미터가 넘는 바람을 맞고 알게 되나니
* 주 1 시칠리아는 그리스 신화 속 지하세계의 신인 하데스의 땅입니다.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는 하데스가 가끔 지상으로 올라올 때 쓰던 통로 중의 하나 였지요. 어느 날 그는 시칠리아의 한 가운데 쯤 있는 엔나의 평원에서 꽃을 따며 놀고 있던 페르세포네를 보게 되고 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단박 안아 지하세상으로 데리고 가서 왕비로 삼게 되지요. 이것이 하데스의 유일한 사랑이었습니다.
* 주 2 그리스 인들은 하데스를 풀루톤이라고 불렀지요. '보이지 않는 자' 라는 뜻을 가진 하데스라는 말을 잘못 입에 올렸다가 저승사자가 잡아갈 까 두려워서 였답니다. 그대신 '풍요로운 자' 라는 뜻의 플루톤라는 별칭으로 불렀지요.
나는 증권회사 브로커이다. 증권회사 31년차 이고, CFP(국제재무설계사)이다. 같은 일을 이만큼 하면 달인의 경지에 있어야 한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늘 새롭다. 무엇이 문제일까. 새롭기만 하면 괜찮다. 어설프기까지 하다. ‘나이 성별 학력 종교 상관하지 않습니다. 함께 놀고 공부하고 사랑하고픈 사람을 원합니다.’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이하 변경연)의 연구원모집 안내문이다. 늦은 나이에 스승을 구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해외연수는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지원서를 내고 한 달 동안 테스트를 거쳐 면접여행을 하고 시작한 변경연의 연구원이다. 이제 왠 만한 두께의 책은 시시해 보이는 연구원생활이 반년을 지났다. 시시해 보인다는 것은 실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 년 동안 여러분들의 선생이 될 책들입니다. 스승의 공지에 나타난 책들은 이름은 익히 들어온 고전중의 고전들이지만 정작 그 책을 읽어본 적은 없는 책들이었다. 스승은 말씀하신다. ‘고전의 정의는 누구나 잘 아는 책이지만 읽어본 적은 없는 책이 고전이다’ 농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내게는 맞는 이야기였다. 어쩜 이렇게 읽어본 책이 없을까 싶다. 2권이 읽었던 책이고 나머지는 처음이다. 물론 이름을 처음 듣는 책도 있다. 일주일에 한 권씩 읽어야 하는 책들의 기본두께는 베스트셀러의 2배 이상이다. 빼곡한 글씨와 난해한 내용들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재미난 소설을 읽어도 한 장이 지나가면 앞장이 생각나지 않을 꺾어진 나이이다. 이것이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8월은 노는 달입니다. 해외연수라는 명목이지만 여름휴가이다. 긴 여름휴가. 아침 일찍부터 일을 시작하고 모니터 앞에 붙어 있어야 하는 일을 하는 증권회사 브로커에게는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휴가일정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 안 좋은 생각이라고 자신을 이해시킨다. 동료들은 부러워하지만 속으로는 욕을 할 것이다. 나도 안다. 그래도 인생은 내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겠다. 매일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니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시칠리아가 우리의 목적지이다. 연수라는 제목에 걸맞게 우리는 여행기를 쓰기로 했다. 각자 역할분담을 하고 사전 정보수집을 했다. 신화의 땅이자 괴테, 모파상이 여행기를 남겼을 만큼 매력적인 섬이다. 괴테는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 이탈리아를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고, 모파상은 지병인 우울증 때문에 시칠리아를 여행했다고 했다. 신전이 있으니 신화가 있고, 그리스의 고대도시가 있으니 그들의 이야기가 살아 있을 것이다. 에트나의 선물인 비옥한 땅이 있어 밀 생산이 많았고, 고대로부터 많은 나라의 탐욕의 땅이 되었던 곳이다.
두 편의 영화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시네마천국과 그랑블루이다.
시네마 천국은 1956년 시칠리아 팔레르모 외곽의 작은 마을 ‘바게리아’에서 태어난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작품이다. 성공한 영화감독인 중년의 토토. 그의 어린 시절 스승과 첫 사랑 여자, 떠나온 고향. 절대 돌아오지 말라던 스승의 말에 따라 삼십년을 떠났던 고향에서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 스승 알프레도의 사망소식이다. 알프레도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중년의 토토는 유년시절의 추억 속으로 들어간다. 성공한 중년 남성의 늦은 귀가. 불 꺼진 침실. 그곳에 잠자고 있는 한 여자. 당신 어머니가 나를 다른 여자인줄 알고 있어서 그냥 그런척하며 통화를 했다는 여자의 말. 알프레도가 친척이예요? 이 물음은 여자는 남자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반증이다.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 더블침대에서 남자는 오른편으로 돌아눕는다. 어린 토토로 돌아간다. 시칠리아의 체팔루가 토토의 어린 시절 무대가 된 곳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뤽 베송 감독의 그랑블루. 그리스의 작은 어촌 출신인 자크는 아버지가 잠수 사고로 죽은 뒤 바다와 돌고래를 가족으로 여기며 외롭게 성장한다. 그에게는 엔조라는 친구가 있어 둘은 잠수 실력을 겨루며 우정을 다져간다. 성인이 된 자크는 오랫 만에 엔조와 재회하고, 프리다이버 챔피언인 그의 초청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엔조와 자크 두 바다사나이들의 삶. 조안나라는 뉴욕태생 여자와의 사랑이야기. 그리스의 작은 어촌 마을의 촬영지가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이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8세기에 시칠리아의해안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2500년 전 그리스인들이 건설했던 도시의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시칠리아이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돌고래가 가족인 남자 쟈크, 뉴욕여자와의 사랑 프리다이버로서의 삶이 영화의 내용이다. 어린 쟈크는 삼촌에게 '엄마는 왜 떠나셨어요?' 묻는다. '또 그소리' '네 엄마는 떠난게 아냐. 단지 미국으로 돌아갔을 뿐이야. 거기가 집이니까. 여자들이란 다 그런거야. 종잡을 수가 없지. 바다처럼.' 쟈크의 엄마는 뉴욕이 고향인 여자였다. 쟈크가 사랑하게 되는 조안나라는 여자도 뉴욕여자이다. 돌고래가 가족이라고 소개하며 흐느끼는 쟈크, 남자에게 가족은 돌고래와 푸른 바다이다. 이 낯선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조안나. 서로의 감정을 알게 되고,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한 후 여자가 잠든 사이 남자는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돌고래와 바다를 희롱하며 밤새도록 놀다 온 남자가 해변가 바위에 쪼그리고 잠자는 여자를 발견한다. 여자도 눈을 뜬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적당한 단어를 찾고 있는 듯한 남자의 눈빛과 이 남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어 막막해 하는 여자의 눈빛이 마주친다. 여자는 할말을 찾았다. 여자는 말한다. ‘뉴욕으로 돌아갈래. 그곳에는 나의 일이 있고 나의 친구가 있어’ 남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고작 남자가 한 것이라고는 여자의 짐을 기차역까지 옮겨주는 일이다. 여자와 남자는 다른 행성에서 온 인간임이 분명하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남자도 아닌데 왜 이 남자의 눈빛이 더 잘 이해되는 것일까. 이상하다. 타오르미나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면 이해가 될까?
토토의 사랑과 알프레도, 쟈크의 뉴욕여자와 푸른 바다, 돌고래를 마음에 품고 로마에서 나폴리로 향했다. 나폴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신이사(우리의 여행가이드)는 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를 설명하고, 소소한 에피소드를 이야기 한다. 한번은 친구들과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경찰에게 걸렸단다. 음주운전자에게 이탈리아 경찰이 한 이야기는 ‘행복하니?’ 였단다. ‘이탈리아는 이런 나라이다’ 를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비유가 있을까? 우리 버스는 나폴리항에 도착했다. 한때는 세계3대 미항 중에 하나였던 나폴리. 길가의 낡은 아파트베란다에는 빨래가 널려있고, 길가에는 쓰레기와 노숙자가 눈에 띈다. 한때의 영화가 있었던 도시는 나를 반기는 듯 반기지 않는 듯 했다. 이곳에서 야간 훼리를 타고 우리는 시칠리아로 갈 것이다. 모두 승선을 하고 방을 배정 받았다. 각자의 위치로 짐을 끌고 간다. 오늘은 콩두가 룸메이트이다. 바다가 보이는 쪽의 방을 예약해 주었다. 비용을 조금 더 지불했으리라. 이층침대가 있는 객실이다. 네 명이 정원인 가보다. 콩두는 이층침대를 접었고 나는 그냥 두었다. 침대를 보니 눕고 싶어졌다. 벌러덩 한번 누워본다. 이곳이 배인지 육지인지 알 길이 없다. 콩두는 들고 온 변신이야기를 읽고 있다. 훼리가 항구를 떠나 망망대해에 다다를 즈음 우리는 갑판으로 올라갔다. 연구원의 연수여행은 놀면서도 매일 수업을 한다. 하루를 삼일처럼 열심히 놀고 밤이면 모여서 자신의 사랑이야기 하는 것이 우리의 수업이다. 여행 중에 하는 수업의 내용이 왜 굳이 사랑이야기여야 하느냐고 여쭈었더니, 미스토리50장을 쓰는데 사랑이야기가 빠지면 젤 중요한 것이 몽빵 바져버리는 것이라고 하신다. 시칠리아 팔레르모로 향하는 훼리의 갑판에서 내 이야기를 했다. 수업을 마친 우리는 담요를 바닥에 깔고 머리는 맞대고 다리는 자유롭게 누웠다. 북두칠성을 찾았고 카시오페이아 자리를 찾았다. 두 별자리는 잘 찾는데 다른 별자리는 잘 못 찾는다. 어렴풋이 은하수도 보인다. 아침에 도착한 팔레르모 막시모광장 앞 노천카페에서 아침을 먹었다. 간단하게 빵과 커피라고 하더니 탁자에 배달된 빵은 놀라웠다. 담백하기는커녕 색색깔의 빵이었는데 보기에도 당도가 높아 보였다. 한입을 베어 물고 더 이상 먹지 못했다. 카페 아메리카노는 맛있었다. 고향(?)에서 먹던 엑스프레소 농도로 보통의 커피잔 가득 나왔다. 처음으로 맛보는 시칠리아의 빵은 별로였고 커피는 좋았다.
집을 나선지 네번째 되는 날이다. 팔레르모항에 들어오면서 눈으로 에트나를 찾았다. 어디에도 에트나는 없었다. 에트나는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3,0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어서 시칠리아에 들어서면 어느 곳에서나 뾰족한 산이 연기를 내 뿜고 있는 살아있는 에트나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삼각형의 섬 중앙에 에트나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내 속 어딘가에 그런 정보가 들어 있어서일 게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종종 빗나가는 것을 본다. 자동차운전을 하다가도 가끔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한다. 내 기억을 네비게이션 삼아 운전할 때가 있다. 여지없이 다른 길로 들어서지만 다음에 또 같은 상황을 만든다. 나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것. 많은 오류를 범하는 지름길이다. 보이지 않는 에트나를 통한 배움이다. 노천카페에서 이탈리아식으로 아침을 먹고 시네마천국의 도시 체팔루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모르는 사람들과의 여행에서 필수코스는 자기소개이다. 매번 하는 거지만 매번 낯선 것 또한 사실이다. 특별한 말을 하고 싶지만 하고 나면 늘 신통치 못하다. 휴대폰을 뒤져보니 시가 메모되어 있다. 시나 한 수 읽고 들어와야겠다 생각을 하고, ‘일년에 한번은 울어버려야 한다….울어서 무엇이 될 수 없듯이 채워서 될 것 또한 없으리’ 최 옥 시인의 장마라는 시를 선택했다. 시어들은 아름답고 슬프다. 집을 떠나온 사람들의 마음도 아름답고 슬프다. 시와 함께 자기소개를 하고 나니 내일부터 아침을 시로 여는 임무가 주어졌다. 연구원 입학여행 때 읊었던 시가 생각났다는 선배의 의견이 반영된 제안인듯하다.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어서 그러마고 했다. 그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인터넷검색을 했다. 시칠리아라는 곳이 인터넷환경이 좋은 곳이 아닌가 보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도 인터넷이 작동하지 않았다. 몇 달 전에 외웠던 시가 가물거려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 기억력의 한계를 실감한다.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생각하다가 불현듯 빨간 노트가 생각났다. 일기장 겸 메모장 모닝페이지 온갖 것을 기록하는 노트였다. 노트를 뒤적거리며 적혀있는 글들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왠지 어딘가에 시가 적혀있을 것 같았다. 감동적인 글이나 시를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 나를 믿으며, 이곳 어딘가에 보물을 숨겨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참 뒤적이다 보니 한계령을 위한 연가,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내가 백석이 되어, 등등. 입학여행을 준비하며 지하철에서 외우겠노라고 적어서 들고 다녔던 것이 그곳에 있었다. 급한 마음이 풀리고 나니 이제는 외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빨간 노트를 들고 타오르미나 해변으로 나갔다. 시를 외우고 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수영을 하다가 뭍으로 나오고 있었다. 노트를 덮고 그분과 산책을 했다. 낯선 땅에서의 동행. 일상적인 대화가 진행되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어떤지, 어제 수업은 잘 했는지..등등 함께 해변을 거닐다 숙소로 돌아왔다. 시를 외워서 낭독하겠다는 깜찍한 생각은 접었다.
오늘은 살아있는 산 에트나를 가는 날이다. 시뻘건 용암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산이다. ‘한 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가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로 시작하는 시가 좋겠다. 한계령휴게소에 서면 아름다운 내설악 능선이 보인다. 눈 덮힌 내설악을 보면서 ‘한계령을 위한 연가’ 쯤은 읊어줘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지난 겨울 삶과 죽음을 넘다 들던 설악은 살아있음을 내게 알려주었다. 시뻘건 피를 토해내어야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영하30도의 매서움도 내 키쯤은 흔적도 없이 삼켜버릴 정도로 쌓여 있는 눈도 살아있음의 표시였다. 고요히 엎드린 산을 휘 젖고 걸었던 한 인간에 대한 살아있음의 표시였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 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가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낮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곱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곱터들이
고라니와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문정희
같은 산이지만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있는 산에 가는 날에 어울리는 시라는 생각을 했다. 혹자는 살아있는 화산이 위험하다고 걱정을 하는 듯 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이지만 이왕이면 행복하게 죽었으면 좋겠다. 오늘 나는 행복하고 그래서 에트나에 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에트나산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약250만년 전에 화산활동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사상 200번 넘게 폭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 분화의 기록으로 가장 오래 된 것은 BC693년 에트나화산의 분화이다. 높이는 유동적이다.(화산활동이 활발하여 고도가 일정치 않음) 우리가 방문할 때는 3,345M라고 적혀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3,350M, 위키백과에는 3,320M) 산기슭의 둘레는 160KM. 바닥면적은1,190km2에 이른다. 점성이 낮은 현무암질 용암을 분출하고 있다. 화산이 분출해낸 칼륨(K). 인(P)같은 물질들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다. 화산재를 이용한 찜질은 체내의 독소를 제거하고 피부를 소독하기도 하고 유황머드는 골관절염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산은 매력적인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재 전세계 인구의 10%정도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활화산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다.
화산(Volcano)은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 불카누스(Vulcanus)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헤파이스토스(불카누스)는 얼굴이 못생기고 절름발이였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기술, 대장장이, 장인, 공예가, 조각가, 금속, 야금, 불의 신이다.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아내이다. 자력으로 성공한 노력형의 신이다. 바람둥이 제우스와 본처인 헤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이 서자들에 비해 모두 함량미달인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가 절름발이인 이유는 두 가지로 전해진다. 하나는 선천적인 이유인데 헤라가 자신이 낳은 아이가 장애와 흉측한 외모를 가진 것을 보고 올림포스 산에서 그를 던져버렸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제우스의 바람기에 화가 난 헤라가 제우스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헤파이스투스가 어머니 헤라의 편을 들자 화가 난 제우스가 그를 걷어차서 렘노스 섬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그 사고로 다리는 불구가 되고 얼굴은 다쳐서 추해졌다. 그의 뛰어난 손재주로 다리를 만들어 붙였지만 절름발이로 지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자신의 손재주를 이용해 신들의 화려한 장비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모자와 샌들.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아가멤논의 지휘봉, 아릴레우스의 갑옷, 헤라클레스의 청동 딱따기, 헬리오스의 전차, 에로스의 활과 화살, 제우스의 번개 등이 그의 작품이다. 또한 신들이 인간에게 선물로 준 최초의 여자 판도라와 그녀의 항아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심한 두통으로 괴로워하는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미네르바)의 출생을 도운 것도 그이다. 신화는 애트나가 대장장이신인 헤파이스투스의 작업장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티폰 신이다. 그는 강하고 무서우며 거대하다. 영어의 태풍(Typhoon)의 어원이다. 머리에서 허벅지까지는 인간이었지만 머리대신에 100개의 용의 머리와 눈에서 번갯불과 불꽃을 내뿜을 수 있고, 대퇴부에서는 아래로 똬리를 튼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온몸을 뒤덥고 있는 깃털과 날개는 항상 그 자신이 일으키는 격렬한 폭풍 때문에 휘날리고 있다. 그의 어깨는 하늘에 닿고 100개의 머리는 별에 닿으며 두 팔을 벌리면 오른손은 유럽 왼손은 아시아에 닿는다고 한다. 그가 날개를 펼치면 태양빛을 가려 세계가 어둠에 잠식된다고도 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신들의 지배자 자리에 오르자 이에 분노하여 크로노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타르타로스와 관계를 맺어 마지막 자식인 티폰을 낳았다. 일설은 제우스가 바람을 피운 것에 복수하기 위해 헤라가 크로노스로부터 받은 알에서 태어나 델포이의 큰 뱀 파이톤에 의해 키워졌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티폰은 무럭무럭 커 가면서 힘이 생기자 제우스를 물리치기 위해 올림포스 산으로 진군하였다. 올림포스 신들은 전부 이집트로 도망갔으나 전쟁의 신 아테나가 자리를 지키고 제우스를 비웃자 올림포스로 돌아온다.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준 번개로 티폰신을 제압하고 에트나산을 던져 티폰을 산밑에 가둬버렸다. 고대 사람들은 에트나산의 분화는 티폰이 움직이기 때문이다라고 믿었다.
신들 중에 제일 못생긴 헤파이스토스가 가장 아름다운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맞게 된 연유는 올림포스 신들이 티탄족과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제우스는 티탄족을 무찌를 수 있게 해주는 자에게 신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헤파이스토스는 번개를 만들어 제우스에게 바침으로 티탄족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제우스는 그에 대한 대가로 헤파이스토스에게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맞게 해준다. 그러나 그는 대장간 일을 핑개로 아프로디테와 함께 하지 않고 아프로디테는 못생긴 남편을 두고 미남인 아레스(전쟁의 신)와 밀회를 즐긴다. 아레스도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다. 그는 얼굴은 미남이었으나 성격이 좋지 않아 동료신들과 부모도 싫어하는 신이었다.
한편 헤파이스토스는 트로이전쟁 때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대장간을 찾아온 아테나에게 반한다. 그녀는 얼굴은 못생기고 장애가 있었지만 아레스와 달리 마음씨가 따뜻한 헤파이스토스에게 반하여 결혼을 하고 아들 4명을 낳는다.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이 된 에릭토니우스는 그들의 아들 중 한 명이다. 아버지를 닮아 다리가 불편하였지만 손재주를 물려받아 네 마리 말이 끄는 이륜차를 발명하였다 한다.
신중의 신인 제우스의 적자들이 함량미달인 것, 신들 중에 제일 못생긴 헤파이스토스가 가장 아름다운 미의 신 아프로디테를 부인으로 맞은 것, 그런 부인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남자,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테나가 헤파이스토스와 사랑을 하게 되는 것, 아이러니한 것이 삶인가 보다. 신화는 인간의 이야기이고 인간의 이야기가 신화이니 말이다.
곳곳에 불을 놓아 까맣게 타 들어간 밭과 밀을 베어내고 밀집을 싼 포장재의 둥근 원기둥은 농촌에서 보던 벼농사의 흔적과 같다. 밀을 밀어낸 노란 밀밭, 곳곳에 서 있는 올리브나무, 선인장이 모자이크같이 조화를 이루는 능선을 돌아 돌아 에트나의 품속으로 들어간다.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인간이 두 발로 걷는 방법. 헬리곱터를 타고 정상으로 접근하는 방법. 케이블카나 리프트, 자동차, 산악자전거 등 탈것을 타고 일정구간을 오르는 방법, 타인의 도움을 받아 오르는 방법. 오늘 우리가 택한 방법은 대형버스주차장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중간에 산악지프를 갈아타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 65유로를 지불했다. 교통수단과 가이드비용이 포함된 금액이다. 원화로 9만원가량이다. 누구는 이 금액을 툴툴댔다고 했다. 나는 해외에서 사용하는 돈을 원화로 환산하는 버릇이 없다. 언젠가 일본여행에서 배운 것이다. 물 한 병, 밥 한 그릇을 사먹어도 우리보다 10배가 비싼 가격이었다.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드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가이드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그들의 월급을 비교해주며 현지사정에 따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율이란 것이 그 나라의 경제규모와 상태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 우리 것으로 환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였다. 생각의 회로가 작동하는 원리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무 생각 없이 에트나를 보고 싶으면 비용을 지불한다. 나 같은 단순쟁이가 좋은 때도 많다. 버스는 일행을 주차장에 쏟아내었다. 사방이 검고 붉다. 일행 중 세 명이 산에 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죽기 전에 책을 한 권 꼭 써야 한다는 분과 산에 올라봐야 화산재밖에 더 먹겠느냐고 이야기하던 친구다. 이 친구를 생각해보니 죽음의 경계를 몇 번 넘나들었던 경험 때문에 내재된 두려움의 잔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다른 한 친구는 산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고 쇼핑에 관심이 많다. 이들도 주차장까지는 왔으니 반은 온 것이다. 내려올 산을 올라가는 것. 지근거리 (至近距離) 로 다가가는 사람과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는 사람의 차이이다. 바라보기는 매 한가지다. 거리의 경제학에서는 가까울수록 꼭 좋은 것은 아니다. 그만큼의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다.
주차장이 있는 곳이 해발 1,900M
버스에서 내려서 화장실을 보고 매표소 앞에 몇 시까지 모여라 하고 가이드는 티켓을 구매하러 갔다. 화장실은 50센트를 받았다. 줄이 길다. 경험에 의하면 산을 오를 때는 땀이 나서 화장실 가고 싶은 생각이 많이 나지 않는다. 화장실은 가지 않기로 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꿀을 팔고 있다. 온통 시커먼 화산석뿐인데 좀 의아했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많이 올라왔다. 큰 산이니 당연히 꽃과 벌이 있겠지 싶었다. 다양한 종류의 꿀이 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는 일회용 스푼에 종류별로 꿀을 맛보라고 자꾸만 떠서 준다.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많이 살 것도 아닌데 싶었다. 하나만 사야지 생각하고 작은아이가 좋아할 것 같은 피스타치오 꿀을 주문했다. 견과류 쨈을 좋아하는 아이이다. 작은 꿀 병 하나를 받아 들고 배낭이 큰 재용이에게 맡겼다.
해발1,900M 버스주차장에서 팔고 있는 꿀들.
다른 일행들은 화장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케이블카 매표소를 향해 걸어갔다. 시칠리아는 어디나 작렬 (炸裂) 하는 태양이 있다. 나무그늘을 찾아 서서 기다리다 보니 일행이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표를 사는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매표소 입구에 바글바글하다. 매표소 건물 안, 왼쪽 벽에 에트나산 등산로가 그려진 그림이 붙어있다. 휴대폰 카메라에 한 장 담았다.
케이블카는 6명이 정원이다. 이태리어는 잘 모르겠고 그림은 세 명씩 균형을 잘 맞추어서 앉으라고 그려진 듯하다. 타고 보니 균형을 맞춰서 앉았다. 케이블카가 출발한다. 창문은 한쪽에만 나 있다. 양쪽에 창문이 있으면 맞바람이 불어서 시원할거라고 일행이 이야기를 한다. 조금 따뜻했다. 아래를 쳐다보니 노란꽃들이 보인다. 콩두는 이를 보고 검은 몸 위에 노란 꽃들이 납작 엎드렸다고 표현했다.
케이블카 아래로 바라다 보이는 노란꽃무리.
커다란 해파리가 엎어져 있는 듯이 둥그렇게 둥그렇게 노란 꽃들이 피어있다. 본래는 그런 모양이 아니었을 것이다. 야생화가 지천인 꽃밭이었을 텐데 에트나의 심술이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용암이 흐른 자리는 검은 화산석으로 남았고 그들이 침범하지 못한 곳에 생명이 자란 것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화장실이 보인다. 여기는 공짜다. 버스주차장에서 안 가길 잘했다고 생각하니 행복하다. 50센트의 행복. 공짜의 행복인가? 얼른 화장실을 다녀와서 산악지프를 타는 곳으로 갔다. 이십여 명이 함께 탔다.
옆꾸리를 찌르던 콩두
콩두가 내 옆자리다. 자동차는 직선으로 오르지 못한다. 빙글 빙글 돌면서 올라간다.
얼마쯤 올라왔을까 콩두가 옆구리를 찌른다. 걸어가고 싶다고 한다. 시간이 어떨지 모르니 한번 물어봐라 했더니 낯가림 심한 처자는 나보러 물어보란다. 할 수 없다. 내가 개런티Guarantee한 인생이니 물어봐 주는 수밖에.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난색을 표한다. 다음목적지까지 알아서 올 테면 그렇게 하라는 식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린다. 콩두는 뭐라고 하는지 혼자서 궁시렁거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 목적지에 다다랐다.
눈앞에 봉우리 세 개가 보인다. 왼쪽봉우리 분화구에서는 연기 피어 오르고 있고 오른쪽 봉우리에는 이끼류가 자라고 있는지 초록색이 보인다. 분화구 안에 시뻘건 용암을 볼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사진에는 용암을 떠서 장신구를 만드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는데…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에트나의 따뜻한 품속으로 들어왔구나. 연인의 품처럼 에트나는 따뜻하게 나를 반겨주었고 상쾌한 바람으로 우리를 안아주었다. 바닥은 따뜻하고 햇살을 강렬한데 바람은 시원했다. 깍아 지른 바위산을 오르다 보면 바위와 푸른 하늘만 보인다. 자세히 보면 주변에 야생화가 보인다. 높은 산의 꽃들은 키가 작다. 나처럼 작다. 벌들은 작은 꽃이 좋아서 붕붕 거릴 것이다. 에트나에는 검은 흙과 푸른 하늘과 유황가스가 있었다.
노란 꽃과 노란 나비가 있었다.
오르페우스가 놓쳐버린 에우리디케가 있었다.
지상과 지하세계의 경계인 듯 빨려 들어 갈 것 같은 분화구. 수증기가 올라온다.
버스에서 내리자 산 정상에 있는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한다. 빨간 바람막이를 입은 잘생긴 이태리남자다. 머리는 반짝반짝 벗겨졌다. 우리는 어미닭을 따라다니는 병아리들처럼 가이드를 따라 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천상의 가이드와 지상의 가이드(빨간 바람막이와 크로스 백)
검은 선 위의 점점이 사람이다.
잘 따라가던 스승이 걸음을 멈춘다. 이곳에서 와인을 한잔 하고 싶다고 하신다. 가이드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마시자고 한다. 이번에는 스승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난색을 표하는 가이드에게 여기서 꼭 마셔야 한다며 와인병을 딴다.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와인쇼핑을 하던 스승이 생각났다. 와인을 많이 좋아하시는 구나 싶었는데 이것을 위한 준비였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시칠리아의 뜨거운 햇볕이 길러낸 Etna Rosso를 한 모금 마셨다. 거칠고 강렬했다.
센스쟁이 스승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
스승께 여쭈었다. 왜 이곳에서 마셔야 했는지? 산 아래를 굽어볼 수 있고 사막 같은 능선이 잘 보이는 지점이어서 였다고 한다. 뷰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구나…혼자 생각한다.
산은 내려오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다. 다시 제자리에 섰다. 올라 올 때 못한 놀이를 다시 시도한다. 케이블카 정류장까지 5킬로, 하산길이니 한 시간은 걸리지 않겠다. 다른 사람들 점심식사 마치는 시간까지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동의를 얻었다. 콩두와 내가 이야기할 때는 난색을 표하던 사람들이 스승이 동행을 하자 한 사람 두 사람 일행이 늘어난다. 팔팔이 모두가 함께 걸었다.
여인의 속살을 느끼려는 듯 신을 벗는다. 삼십 년 묵은 무좀이 낫을 것 같다! 며 좋아하신다. 나도 따라 벗었다. 에트나의 속살은 따끈했다 바닥은 뜨겁고 따갑다. 화산석을 밟는 소리가 사그락거린다. 경쾌하다. 걷다 보니 발바닥이 뾰족거려서 걷기가 힘들다. 우리는 다시 문명의 혜택을 받기로 한다. 깊은 산을 걷다 보면 온 몸에 열이 조금씩 올라간다. 달아오른 몸에 차가운 물 한 방울이면 세포들이 살아난다. 에트나를 걸어 내려오며 생각이 났다. 몽골에서도 그랬고 지리산에서도 그랬었지. 호텔에서는 1유로 관광지에서는 2.5유로. 2.5유로를 주고 산 물이 배낭옆에 꽂혀있다. 70%는 마시고 30%가 남았다. 저걸 마셔버리나 아니면 내 몸에게 줄까 생각했다. 물병 마개를 풀었다. 머리를 숙이고 뒷목에다 딱 한 모금만큼 주었다. 온몸에 세포들이 살아난다. 재밌다. 신났다. 이 신나는 놀이를 누구와 함께 경험할까 생각하다가 선택했다. 콩두, 스승님, 재용 모두 괴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이건 온몸을 혹사시켜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몸이 물을 필요로 하는 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을 입으로 마신다. 몸으로 마시는 물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는 듯 하다. .
연구원의 막내다. 이 여인은 열애 중이다. 지금 이 여인의 가슴은 퀴클롭스의 사랑처럼 활활 타 오르는 가 보다. 연신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적고 ‘사랑해’를 적는다. 벌써 몇 번째 인지 모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있는 곳. 사랑이 있어야 하는 자리 맞다. 좋겠다. 샘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는 두 남자의 질투와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갈라테아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바다 님프 혹은 물의 신 네레우스와 도리스의 딸로 말해지며 시실리 남부 해변에서 뛰놀았다고 한다. 그녀는 상당히 매력적인 소녀여서 두 명의 구애자가 있었다. 젊고 다정한 연인 아키스와 난폭한 거인 구혼자 키클롭스였다. 그녀는 아키스를 선택했고 거절당한 키클롭스는 처음에는 피리로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질투에 미치고 만다. 그의 사랑은 에트나 화산이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듯이 뜨거웠다.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는 질투와 분노를 참지 못해 손에 잡히는 대로 큰 바위를 집어 들어 해안가로 마구 던졌다. 시칠리아의 암석지형 해안가는 그때 던진 암석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삼각관계의 원형에 관한 신화이다.
다시는 너를 찾지 않으리라. 내 오늘 너와 함께 사랑을 나누었으니 행복하였네라. 사랑에는 내일이 없는 법이니.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여인과 언제든지 활화산의 준비가 되어있는 나는 에트나에게 작별을 고했다.
내려와서 보니 빨간 지름길이 있었다. 우리는 빨간 길로 내려오지 않았다. 하얀 길로 내려왔다. 아니다. 하얀 길로도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의 길을 만들며 내려왔다. 화산재와 화산석을 마구마구 발로 차며 내려왔다. 신나는 놀이 한판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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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의 길수님 사진 무척 궁금했는데,
에트나를 읽고 나니 이해되었어요.
멋진 능선이네요.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선과 악 이렇게 이분법적 사고를 하게 만드는
사진 아니 산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에트나산엔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품지 않은 사람은 올라가서는 안되는 산으로 이해됩니다.
뜻뜻미지근하게 사는 사람은 에트나산이 거부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열정 , 정열에 관해서는 우리 팔팔이들이 으뜸이니 두 발 벌려 환영하였을 것 같네요.
페리를 타고 이동하는 그 시간들도 덩달아 좋았어요.
뱃멀리는 안했을 까 이런 걱정도 조금 했고요.
하데스가 산다고 여기기엔 길수님의 유려하고 섬세한 글 때문에 연결하기가 어렵네요.
글의 힘, 문장의 힘이 느껴집니다.
에트나산에서 마시는 한 잔의 와인, 낭만 그 자체네요.
좋은 글 읽게해주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