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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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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0일 10시 41분 등록

사랑하려거든 아르메리나로 가라

 

 

시황과 함께 꺾여버린 사세(社勢)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회복이 더딘 만큼 사주(社主)와 임직원의 스트레스는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더딘 실적과 어려워 지는 재무 환경에 모두가 조급해지고 조급해 할수록 늪에 빠진 발은 더욱 깊이 빨려 들어갔다. 사무실은 전쟁터가 된지 오래였고 동료들은 예민해져 간다. 자금난으로 10년 만에 처음으로 협력업체에 기성이 지급되지 않았다. A4 종이 한 장 쓰기가 눈치 보이는 분위기에 급기야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어렵지 않게 들리는 분위기다.

 

올 여름시칠리아…’

 

미치지 않고서야 이 판국에 시칠리아라니. 시칠리아, 그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이름인가. 애완견의 유전학적 종의 이름 같기도 한 그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몇몇의 생각의 조각들이 깨어지고 튕기고 하며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주어진 여름 휴가 9일도 모두 취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 되는 시기, 거기에 더한 10일의 외유. 그리고 어디라고 했나, 시칠리아? 시이치일리이이아아아? 나를 회사에서 자르든지 역적으로 분류하든지 해라는 말이겠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좋은 놈이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고 마음씨 좋은 팀장님의 허락을 받아내었다. 분에 넘치게 이번 휴가는 19일 동안 보내게 되었다. 휴가가 시작되던 날, 할 수만 있다면 내 책상에 못을 박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두 아이의 아빠다. 8개월 된 두 살배기 딸과 5살 된 남자 아이를 둔 아빠다. 10일 동안 집을 비운다는 말은 아내에게 아이들과 씨름하다 기절해버려라는 얘기다. 아이들은 아직 사람이 아니어서 부모에 대한 배려가 없다. 게다가 천지로 기어 다니기 시작하는 두 살배기와 미운 5살에서 미친 5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큰 아들은 아무리 내 자식이라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하루라도 부모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게 만드는 아이들이다. 마음씨 착한 아내가 백 번 양보해서 내가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10일 동안 아이들을 잘 커버한다 치자. 그러나, 기둥을 뽑아버릴 만큼 큰 돈 400만원, 시칠리아 간답시고 갖다 버릴 400만원은 어찌할 거냐 말이다.

 

나는 운이 좋은 놈이고 행복한 놈이다. 천사 같은 아내를 곁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다짐한다. 아내에게 한번만 더 내 팔자야소리 나오게 만들면 스스로 기절할 방도를 찾기로.

 

일어나 통근버스만 탈 줄 알았던 9년 차 소심한 직장인이 개미 소리를 해가며 얻어낸 2012년 여름 휴가, 항상 어깨에 걸려 있는 피곤을 어쩌지 못하는 34세 남자가 보낼 이탈리아, 못난 남편, 변변치 못한 아빠 노릇만 하다가 곡절 끝에 가게 된 시칠리아, 왼쪽으로 가면 부딪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자빠질 그러나 뒷일 앞일 생각하지 않는 자칭 터프가이가 만들어낼 시칠리아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그녀 없음에 먹먹한 여행

시칠리아에서 내 가슴에 유난히 박힌 건 아르메리나. 그 곳의 느낌을 내 심장에서 빼버릴 수 없다. 특별할 것 없는 여느 시칠리아의 마을 같은 이곳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 아르메리나 얘기를 좀 해야겠다.

 

시칠리아 여행 3일째(전체 일정 중에서는 5일째), 시라쿠사를 떠나는 날 아침, 여행을 한답시고 분주하게 준비는 한다만 제대로 짐 쌀 줄도 모르는 나에게 출발할 적 아내가 건내준 주황색 여행용 캐리어가 시라쿠사의 호텔방에 그녀인 듯 초롬히 앉아 있다. 나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구칠사하던 아내의 목소리가 소리 없이 내 심장에 닿았다가 비누방울처럼 터진다. ‘974’ 캐리어의 비번이다. 퉁명스럽게 나는 되물었었다.

 

974?’

우리가 처음 봤던 해, 4…’

 

순간, 회상하듯 표정이 변하는 그녀의 모습이 나를 열 아홉으로 데려간다.

그녀의 웃는 모습, 찬란하게 빛나는 봄 햇살, 프레쉬맨, 그리고 그녀.

나는 멀리서 친구들과 웃으며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가던 길을 멈추었다. 그녀만 보이고 그녀만 커지고 그녀의 얼굴만 커지고 그녀의 웃는 모습만 내 눈 속을 훅 지나간다. 성난 파도가 점점 커져서 지상에서 우뢰 같은 소리를 내며 깨어지듯 나는 어찌할 수 없는 그녀의 웃음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헤엄을 쳐서 빠져 나와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고 그러지 않았다. 그녀와 사랑하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

 

‘5분 남았다

 

같은 방을 쓰는 승욱이형이 생각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면 혼자 하염없을 뻔 했다. 97 4월에서 다시 오늘로 돌아온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의 야외에 꽤 넓은 수영장이 있어 이때다 싶어 수영하러 뛰어 들었는데 수영장 바닥이 발에 닿지 않아 황망했다. 추억이 현실로 돌아올 때의 황망함과 다르지 않아 무안하지 않다. 어쨌든 오늘은 시라쿠사에서 피아짜 아르메리나로 간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 시칠리아 지도를 한번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이탈리아반도.JPG 

 

시칠리아지도.JPG

(시칠리아, 이탈리아 반도 일부)

 

시칠리아는 이등변 삼각형을 좌로 90도 눕혔다 생각하자. 피아짜 아르메리나는 이 삼각형의 무게 중심이다. 시칠리아는 빨레르모를 시작으로 북쪽 티레니아해를 보며 해안선을 따라 동남쪽 이오니아해를 보고 있는 시라쿠사까지 고속도로가 뚫려있고 정중앙에 위치한 엔나를 거쳐 다시 빨레르모에 이르는 도로가 이 섬의 주요 간선도로다. 피아짜 아르메리나는 중앙의 엔나에서 남쪽으로 약 10km 정도 달리면 다다른다. 가는 길은 완만한 구릉과 끝없이 펼쳐진 밀밭이 운치를 더한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이탈리아 반도의 구두 굽의 코가 맞닿은 곳이 신화 속에서도 등장하는 메시나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 이타카 섬으로 돌아갈 때 이 해협을 어렵사리 지났다.

 

피아짜 아르메리나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 엔나가 눈 앞에 펼쳐 진다. 엔나, 엔나는 시칠리아의 중심이다. 에뜨나가 시칠리아의 심장이라면 엔나는 음부다. 페르세포네가 뛰어 놀다 하데스에게 잡혀 갔던 그 곳. 낮은 구릉과 구릉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그 사이에 밀이 움트는 은밀한 곳이다. 하데스의 땅에서 제 어미의 양분을 받아먹던 태생의 시칠리아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시칠리아는 죽은 신화가 아닌 아직 살아있는 신화를 만날 수 있는 지구상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그 흔적을 잠시 얘기해 보자. 우리는 여기서 잠시 옆길로 샌다.

 

 

神話의 시칠리아

시칠리아는 하데스의 땅이다. 하데스는 지하세계의 신이다. 즉 시칠리아는 지하세계의 신이 지배하는 돌계집 같은 땅인 것이다. 생명이 움트지 못하고 사랑이 있을 법하지 않은 그런 땅이다. 그러나 이 황무지 같은 땅에도 단 한번의 신들의 사랑이 있었다.

 

하데스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 제우스를 도와 티탄족을 정복한 뒤 지하세계를 지배하게 된 죽음의 신이었다. 지하세계의 신이기 때문에 매우 가혹하고 냉정하지만 결코 사악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악마적인 신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는 두려운 존재였다.

 

죽은 영혼이 지하세계로 가려면 저승의 강 스튁스를 건너야 한다. 그 강에는 매우 늙고 고집 센 카론이라는 늙은 사공이 있어 죽은 자의 혼을 은전 한 닢을 받고 강 건너로 실어다 주었다. 강을 건너 저승 입구에 도착하면 문 앞에는 머리가 셋 달린 케르베로스라고 하는 무서운 개가 지키고 있어서 한번 들어간 영혼은 다시는 나올 수 없었다.

 

어두운 지하 세계의 왕답게 하데스는 지상 세계에는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번은 자신의 아내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러 올라갔고 또 한 번은 포세이돈의 쌍둥이 아들을 도우러 퓔로스에 갔다가 헤라클레스의 화살을 어깨에 맞아 치료를 받으러 올라갔을 때였다.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는 하데스가 생애 두 번, 지상으로 올라올 때 쓰던 통로 중의 하나였는데 어느 날 그는 시칠리아의 한 가운데쯤 있는 평원에서 꽃을 따며 놀고 있던 페르세포네를 보게 되고 반하게 된다. 그곳이 엔나다. 그리곤 하데스는 그녀를 단박 안아 지하세상으로 데리고 가서 왕비로 삼게 된다이것이 하데스의 유일한 사랑이었다.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와 결혼하였으나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죽음의 신에게서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또한 요정 멘테와도 관계했는데 페르세포네의 질투와 학대를 견디지 못해 하데스는 그녀를 박하나무로 변하게 해주었다. 오케아노스의 딸 레우케와도 사랑을 하여 그녀를 지하세계로 데려오지만 불사의 몸이 아닌 그녀는 죽고 만다. 슬픔에 잠긴 하데스는 그녀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흰 포플러나무로 변신시켰다.

 

신화를 해석하는 힘은 각자의 몫이다. 시칠리아 여행은 그 힘을 얻는데 제격이다. 그러면 분위기를 이어 페르세포네와 하데스가 등장하는 신화 하나를 더 이야기하자. 신화를 이야기할 때는 와인이 필요하다. 온 몸이 젖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겠다. 이어간다.

 

앞서 얘기한 하데스의 지하세계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데 이 곳을 다녀온 인간이 있다. 모두 여섯 명이다. 이들은 시와 음악의 천재 오르페우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 그리스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 술을 처음 만든 디오니소스,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자 로마를 세운 영웅 아이네이아스, 마지막으로 프쉬케다. 이번 이야기는 아내를 지하에서 데려오기 위해서 페르세포나와 맞짱 뜨던 오르페우스 얘기를 해보자.

 

노래로 데메테르의 딸을 홀리리라.

죽음의 왕도 무너뜨리리라

내 음악으로 그들의 심금을 울려

기필코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부터 되찾아 오리라

 

이 노래는 시인이며 리라의 명수인 오르페우스가 일찍 사별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죽음의 지하세계로 내려가기 전 전의를 다지는 노래다무사이의 아홉 여신 중의 하나인 칼리오페의 아들인 오르페우스는 나무의 님프 에우리디케와 결혼을 했다. 어느 날 에우리디케는 들길을 산책하게 되었는데, 들에서 만나 치근대는 양치기를 피해 달아나다가 뱀에 물려 죽고 말았다.

 

에우리디케를 몹시 그리워하는 오르페우스는 저승세계로 내려간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스틱스 강의 사공 카론을 울리고, 머리가 셋에 꼬리는 뱀의 모습을 하고 저승 입구를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를 달래고, 어두운 하데스의 영토 곳곳을 감미로운 그의 노래로 가득 채웠다. 그 노래는 너무도 감미로워 지하세계에서 벌받고 고통 받는 자들의 영혼조차 그 날 하루 동안만은 기쁨으로 구원 받았다. 마침내 저승의 왕과 왕비도 감동하고 도취하여 인간에게 한 번도 허용되지 않은 특혜를 베풀었다. 하나의 조건과 함께.

하나의 조건,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쉬운 것처럼 보였다.

"네 신부를 데려가라. 그러나 너희 둘이 빛의 세계에 완벽하게 발을 들여 놓기 전까지는 절대 뒤돌아 네 신부를 쳐다보아서는 안된다"

기쁨에 젖어 노래하며 오르페우스는 신부를 데리고 어두운 지하세계를 빠져 나온다. 마침내 그는 햇빛이 쏟아지는 지상세계의 입구를 껑충 뛰어 올라 환희에 가득 차 신부를 향해 뒤돌아선다. 그러다 그는 너무 빨리 몸을 돌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우리디케는 막 햇빛 속으로 발을 옮겨 놓으려는 찰라였으니까. 그녀는 순식간에 넘어져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죽음은 그들을 영원히 갈라놓았다. (‘구본형 칼럼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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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이루려는 순간 하고 날아가버리는 것이 삶이다. 신화는 아직 살아서 자신의 모습과 인간 삶의 모습을 비춘다. 오르페우스가 돌아본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오르페우스의 이 돌아봄의 행동은 나와 그대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궁금하지만 알아서는 안되고 날려가 버릴 것 같지만 돌아보아서는 안 되는 이 생의 딜레마, 아는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돌아보는 순간 나의 것이 아니게 되는 미칠 것 같은 자기기만. 스스로가 기만할 수 밖에 없는 이와 같은 생을 우리는 아쉬워하지 말자. 돌아봐도 될 일이다. 가끔씩 날려버려도우리는 아직도 살아 있지 않은가.

 

왜 나한테 죽음을 얘기하지?’

 

그 시덥잖은 운명이라는 것과 맞짱 뜨던 아킬레우스를 상기하자.

 

 

길을 잃어 비로소 시칠리아를 본다

신화를 멈추고 샜던 길을 다시 바로 잡는다. 우리는 엔나를 벗어나 피아짜 아르메리나로 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고대 로마의 한 별장을 방문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지상 최대의 모자이크가 여전히 말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벗은 여인도 있고 사냥하는 사내도 있다고 한다. 미개함이 살아있고 터프함이 여전히 살아있는 여전히 거친 무엇이겠다. 나와 같은 그곳으로 가보자.

 

가던 길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꼬르륵어디서 많이 듣던 이 소리, 프랑스 앙가주망 앙드레 보나르는 그의 책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이유는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때문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그렇게 명징할 수 없었다. 인간의 진보는 그리 별 것이 아니었다. 배고프고 약하고 모자랐기 때문에 끝까지 완벽할 수 없었던 모든 결핍 때문에 인류는 진보했다. ‘꼬르륵’, 인간이 나아가는 이유다. 그래 밥 먹고 하자.

 

밥 먹으로 나선다. 삐아짜 아르메리나의 거리는 아름다웠다. 천 년도 더 되어 보이는 도로의 바닥과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보도 블록, 그 위를 터덜터덜 거리며 지나는 우아한 자동차, 그 위에서 백색의 빨래를 널고 있는 시칠리아 아지매, 이 풍광들은 하나하나가 나에게 새로웠다. 1년에도 몇 번을 갈아엎는 아스팔트만 보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 곳의 풍경은 갈아엎어진 아스팔트보다 미끈했다. 나는 이 길에 젖고 싶었다. 일행에서 멀어져 홀로 걷고 있음을 알아챈 것은 오래된 육중한 문 앞에서 무뎌진 쇠 빗장을 만져보며 그 소리가 마치 소리 유적과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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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을 잃었다. 낯선 시칠리아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길을 잃은 사태는 나에게 신비했다. 길을 잃고 나니 여기는 나에게 진짜 시칠리아가 되었다. 길을 다시 찾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헤매면 결국, 시칠리아가 나를 품어줄 것만 같았다.

 

너 좋아하잖아, 여기.’

 

아르메리나는 속삭인다. 낯설게 된 아르메리나, 모든 것이 생소해지기 시작한 나에게 시칠리아는 아르메리나고 아르메리나는 시칠리아다. 이제 이 거리가 달리 보인다.

 

쓰러질 것 같고 떨어질 것 같은 벽과 바닥은 그럼에도 사람이 여전히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리도 단단해 보일 수가 없다. 여긴 2500년 전 그리스다. 나는 긴 천을 두르고 끈으로 만들어진 신발을 신고 있다. 제법 더운 날씨에 아랍에서 막 건너와 대중화 되기 시작한 아렌치노를 점심으로 먹는다. 한가한 점심을 마치고 일어나 천을 한번 두른다.

 

아르메리나 골목길.JPG

 

아르메리나의 골목은 아침에 아내의 캐리어를 지켜보던 때의 그 느낌이다. 먹먹해진 시간의 아득함이다. , 이 마을을 사랑하나봐. 사랑이 하고 싶거든 시칠리아로 가라. 시칠리아를 사랑하고 싶거든 우리, 아르메리나로 가자.

 

나는 다시 길을 찾아 버렸다. 그리고 길을 다시 찾은 뒤 느려터진 이태리에서 한국 같이 바쁘게 또 여행하고 있었다.

 

TIP) 점심을 먹었던 식당

이름 : ?

위치 : ?

메뉴 : 아렌치노, 파스타, 이름을 알 수 없는 닭 요리, 와인

가격 : 평균 6유로/음식, 와인 6유로

평가 : 매우 맛난다. 보니시모 (보조개에 검지를 갖다 대고 힘껏 돌리며 말해야 한다)

 

점심.JPG

 

점심2.JPG

 

Villa dei Casale, 박제된 사회

빌라 로마냐 까살레는 가정집, 별장이라는 뜻. 총면적은 3500㎡ 이상이며 기원전 30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존하는 모자이크 방식의 건축물로는 최대의 규모이며 아프리카 양식을 반영한 고대 말기의 대표적인 작례라 한다. 수렵도, 신화 등의 이야기가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고 특히, 비키니 스타일의 수영복을 입은 여성들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건축물의 주인은 황제 막시무아누스(재위 286~305)가 수렵을 위해 산중에 세웠다는 설이 있고 이 곳 대토지 소유자의 집이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그곳에 있을 때의 시간은 오후 1~2.  그렇게 뜨거울 수 없었다. 그늘이 없는 곳에 내 살을 내어 놓으면 쥐포가 불에 탈 때 오그라들던 모습이 곧바로 떠오른다. 그 큰 저택의 모자이크 위로 물을 가득 채워서 방과 방 사이로 수영을 하면 정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왜 모자이크가 발달했을까? 아마 시원한 타일 효과 아니었을까? 정말 수영장처럼 생겼단 말이다. 아니면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다니면 정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다듬어진 방과 복도들. 그리고 지진으로 굴국진 지형이 주는 필수적인 스릴까지!

 

거대한 저택을 소유했던 한 인물. 우리도 군사정권 때 권력을 잡았던 무식한 군바리들이 이 정도의 사택을 소유했었다고 들었다. 분노를 가장한 시기심이 일었다. 더위만큼 회피하고 싶은 사실이었다. 차라리 신전 놀음이라면 그러려니 할 텐데. 나와 똑 같은 사람이 신전보다 더 큰 사택에서 기만적인 신당까지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 사람이 신보다 큰 아이러니를 스스로 연출한 인간. 나는 연신 얼굴에 땀을 닦아냈다. 그래 얼마면 돼, 얼마면? 꽌또 꼬스따? 꽌또 꼬스따?

 

빌라까살레1.JPG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양복 깃에 있는 작은 구멍의 유래. 대접받은 음식을 다 먹고 이를 게워내기 위해 입 안으로 깃털을 넣었었는데, 이 구멍은 그 깃털을 꽂는 구멍이었다고 한다. 이 구멍이 바로 신사의 품격을 상징한다고 하니! 속이 미식거릴 정도로 배부른 느낌을 연상해내곤 기분이 나빠졌다. Gag reflex 를 유발하는 품격 있는 신사라. 초대받지 못하는 고통이 구토의 고통보다 훨씬 컸던 모양이다. 무서운 인간의 사회성.

 

1929년부터 이 고대의 별장은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2천 년 전, 비키니를 입은 여인들의 박제된 모습을 모자이크로 보았다. 굳어진 그들의 아름다움은 과연 누구를 위함이었나 젊은 여자의 미끈한 몸은 2천 년을 건너와 내 앞에 드러났으나 그녀는 이미 박제되고 난 다음이다. 움직이는 지금의 여자가 아닌 것이 나에게는 통한이다. 내 느낌은 에뜨나 화산과 그녀를 겹치고 있었다.

 

빌라까살레2.JPG

 

그녀는 아직 살아 있다. 모든 그리스의 죽어 박제된 돌덩이가 아니라 그녀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산은 흐른 흔적이다. 아직 흐르고 있는 강물의 박제된 모습이다. 그 위에 엎어진 시간들이 숲이다. 자신의 안에서 뜨거움이 제 마음대로 흘러 넘쳐진 열정의 무늬다. 그러므로 대중없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뿜어 냈고 그것이 굳어졌다. 아직 흐르는 강 앞에서는 무참하지만 한번 쏟은 열정의 대가를 묵묵히 치른다. 파에톤의 모습이다.

 

골이 패여지고 마루금이 형성되어진 것에 지리학적 이유와 근거를 들이대지 말자. 우리의 인생이 흐르는 것 강이 흐르고 매미가 우는 것, 어미가 제 자식에게 젖을 빨리는 것을 물리와 생물학적 연구로 그 이유가 밝혀지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에게서 에뜨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뜨겁기 때문이다. 수틀리면 밑도 끝도 없이 제지 않고 터져 버릴 수 있는 뜨거움과 화끈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빌라 까살레의 유적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도 없다. 그저 자신의 흔적을 눈물겹게 보여줄 뿐이다. 그 눈물을 받아 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오직 그들의 무덤 따위나 나 이 땅에 살았소라고 말할 뿐이다. 유적 같은 삶을 살 것이냐? 수 틀리면 터져 버리는 에뜨나의 삶을 살 것이냐?

 

빌라 까살레의 유적을 보고 관계 되지 않는 에뜨나를 떠올리는 걸 보니 어제 에뜨나는 나에게 무척이나 크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시칠리아의 악사, 필리뽀

고민을 멀리 하고 빌라 까살레를 나왔다. 우리를 반기는 건 늙은 악사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칸소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빛나는 태양, 그리고 시칠리아 깐소내의 낭랑한 아코디언 소리. 자연스레 그리로 발길들이 모였고 우리는 젖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춤을 추고 뛰어다녔고 나사를 두 개 풀어 놓고 흐느적거렸다. 멋진 시칠리아의 오후다. 뜨거운 태양, 청량한 깐소내, 신나는 춤. 데카메론 10명의 유희가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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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음악을 선사한 56세의 필리뽀 미노뗄로씨의 음악은 일품이다. 그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밤에는 저수지를 관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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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독일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를 때 수입이 꽤 쏠쏠했으나 지금은 그저 그렇다고 한다. 1 2녀를 둔 가장이다. 노래를 불러 5명의 가족을 건사한다. 여유롭고 당당하고 즐거움이 묻어난다. 우리에게 수많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시칠리아 뜨거운 태양아래 넋을 놓고 즐거웠다. 그의 딸은 미녀다.

 

그곳에서 커피 슬러시가 정말 맛있었다. 먹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하긴 아르메리나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시원한 것 무엇이든 맛있지 않을 수 없으리라. 누군가가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사고 싶다고 하여 슬러시 15, 아이스크림 15개를 시켰다. 그러자 점원이 슬러시를 담기 시작하는데 원래 컵의 3/4를 담던 것을 1/2로 줄여서 담기 시작했다. 아마 남은 분량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항의했지만 그녀는 알았다는 시늉만 하곤 동일한 양을 담아내었다. 나는 타국에서 언성을 높이기 싫어서 재청을 포기하였다. 우리는 길거리 악사의 노래에 맞춰 즐겁게 춤을 추었는데 우리의 팁에 고마워한 악사가 자신의 딸이라며 한 소녀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 소녀는 아까 커피 슬러시를 팔던 그 소녀였다. 나는 아까 나의 냉랭하던 항의의 말을 생각해내곤 미안해졌다. 사람이 한 발짝만 더 가까워지면 절대적으로 보였던 문제들이 야릇하게 돌변하곤 한다.

 

 

필리뽀_그의딸.JPG

 

 

어쨌든 나는 날아가 사랑하리라. 구칠사를 속삭이던 여인이 지금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 나와 함께 있지 않음으로 내 가슴이 먹먹하다.

 

볼라레~ 오오~ 깐따레 오오오오~

 

그날 밤 아르메리나에서 아그리젠또로 왔다. 아그리젠또의 별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붉어진 신전을 보며 밥을 먹었다. 죽은 이의 가는 날 지인들이 모여 시락국을 말아 마시듯 주노의 신전을 앞에 두고 나는 밥을 먹었다. 주노와 나는 그것이 달랐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밥 먹어야 살 수 있는 것. 바로 그 밥에서 행복과 고통이 시작되는데 주노는 신답게 안 먹고도 제 신전을 잘 지키고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불멸이라 했던 신이 신전에도 없고 우리 곁에도 없다. 그러므로 아무 말 하지 않는 신전에서 그녀를 다시 찾을 길은 없다.

 

 

에필로그

열흘, 내가 없어져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 또한 열흘의 시칠리아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가기 전의 일상에 묻힌다. 새벽에 일어났고 검은 양말을 신었고 덜 말린 머리를 하고 출근 버스를 탄다. 시칠리아는 어디에 있는가. 시칠리아도 어쩌지 못하는 일상은 과연 나에게 무엇인가. 그 사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시칠리아를 잘 정제하고 전두엽을 떼어내어 일상이 되었다.

 

이스탄불을 떠나며 보스포러스해협을 똑똑히 보았다. 대륙도 어쩌지 못하는 바다의 명징한 길, 거대한 유럽과 아시아가 그 좁은 해협으로 갈리어지는 사태에 포세이돈도 가이아도 속수무책이었다. 아직 남아 있을 시차에 대한 관성과 피곤한 젯레그에도 출근 하는 놀라움에 대륙을 나누던 그 해협을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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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08.21 17:24:26 *.85.249.182

재용 덕분에 시칠리아를 깊이 있게 알게 되었네.

가슴을 치는 문장들이 많았는데,

'모든 것을 이루려는 순간 하고 날아가버리는 것이 삶이다.

신화는 아직 살아서 자신의 모습과 인간 삶의 모습을 비춘다. '

이 문장이 '나의 신화'를 생각하게 만드네.

아르메리나의 고풍스런 골목길이 눈부시게 아름답게 느껴진다.

맛잇는 음식과 멋진 카페, 여행자로서 최고의 호사를 누리는 것 같다.

기원전 300년 경의 저택,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다.

거리의 악사도 멋지고, 커피 슬러시도 맛있겠고,

재용 덕분에 시칠리아의 맛있는 음식도 먹고 그 분위기에 흠뻑 취할 수 있네.

사진도 넘 좋고 ^^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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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2 17:00:31 *.51.145.193

조악한 글이 멋진 여행을 덮어버릴까 걱정입니다.

누님께서 좋게 평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잘 계셨는지요? 얼른 뵙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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