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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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재동
팔레르모에서 1시간 걸리는 체팔루로 이동한다. 자기 소개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시네마 천국 영화를 보기로 했다. 점심을 여기서 자유식으로 먹는단다. 다들 식당에서 처음으로 개별적으로 선택, 주문해서 먹을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있는 듯 하다. 외국을 여행하면서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고생하면 여행이 즐겁지 않다. 반대로 음식이 입에 맞으면 여행이 수월하고 흥미진진하다. 나는 인도와 중국의 향신료가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보름 남짓했던 그 여행동안 설사병에 걸려서 정로환을 반병쯤 털어 먹고 얼굴이 반쪽이 되어서 인천공항에 도착했었지. 이번에도 사전파티에 갔을 때 한국의 음식을 비상식략으로 누룽지, 컵라면, 햇반, 고추장, 김, 장아찌 같은 것들을 좀 준비하라고 여행 준비물 리스트에 적혀있었다. 나는 미숫가루 한 봉지와 유기농설탕만 한 봉다리 달랑 싸왔다. 비오는 날이나 기분이 꿀꿀한 날에는 치즈가 듬뿍든 피자와 파스타를 먹으면 기분이 풀리곤 했다. 그러니 피자와 파스타의 고향 이탈리아로 가는데 웬 비상식량, 노 프러블럼 했다. 원조 피자와 원조 파스타를 먹어보리라, 백 배 천 배는 아니어도 음식 때문에 여행이 어려워지지는 없으리라 안심했다.
우리가 대절한 관광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은 집이 팔레르모에 있는 주세페였다. 주세페는 이탈리아에서는 흔한 이름인가 보다. 로마를 하루 다닐 때 운전했던 이도 주세페였는데 시칠리아의 운전도 주세페가 한다. 그는 50대인 듯 하다. 그도 젊을 때는 시내버스, 도시에서 도시를 운행하고 나서 터미널 근처 여관이나 호텔에서 자야하는 장거리 고속버스, 회사 통근 버스를 운전했을까? 관광버스는 스쿨버스 운전처럼 주세페 나이의 운전하는 이에게 어울린다. 팔레르모에서 이탈리아 아침인사 ‘본 조르노’로 그를 맞았다. 일주일 출장을 우리와 같이 다니는 거로구나. 주세페가 한국에서 유럽 DVD 시스템에 맞게 사간 시네마 천국을 틀어준다. 한국에서 유럽방식 DVD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시청지하상가의 서울음향사다. 우리 팀의 부지런한 막내 세린이 구해왔다. 고맙다. 비디오는 운전기사 옆 맨 앞 정면 중앙과 가운데 문 옆에 달린 2개의 모니터에서 나온다. 이탈리아의 관광버스는 문이 두개다. 우리나라 시내버스처럼 가운데에 작은 문이 하나 더 달렸다. 진짜 이탈리아 시내버스는 문이 세 개. 의자는 45개에서 50개인데 32명이 여행하는 우리 일행들은 한 의자에 한 사람이 앉는 경우도 있고 두 명이서 앉고 짐들을 뒤의 의자에 겹쳐 부려놓기도 했다. 안전벨트를 매라는 권유는 별로 없었다. 유럽은 운전기사가 하루 12시간 이상을 운전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지켜야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차지를 내야 한다고 했다. 아마 운전기사에게 주는 시간외근무, 초과근무 수당인 듯 하다. 그리고 몇 시간 운전하면 반드시 휴식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좋은 시스템인 듯 하다.
시칠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권유받은 영화는 모두 세 가지였다.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는데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본 고전, 시네마 천국, 그랑블루, 대부시리즈다. 시칠리아 작은 섬을 배경으로 많이도 만들어졌구나. 내가 시칠리아로 여행을 간다고 하니 케이블 TV에서 3주 연속 방영해주는 대부시리즈를 보느라 잠잘 시간을 놓쳐서 밤을 새다시피하고 다음 날 출근했다고 이야기를 해 주는 이가 있었다. 그는 그 우연의 일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 했지만 나는 겉으로 ‘그렇군요. 빙긋’ 속으로 ‘열대야가 심했나보군요’ 하고 말았다. 그에게 대부, 영어로 the godfather 라니 아니 갱스터의 두목이 신부님도 아니고 godfather라는 이름이 너무 거창하잖아? 그렇다. 나는 대부시리즈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 1부는 1972년 내가 태어나던 해에 만들어졌다. 2부는 1974년, 3부는 ???? 년에 만들어졌다. 말론 브란도와 알 파치노의 이름은 들었다. 알 파치노와의 첫 만남은 여인의 향기에서다. 대부 1편에 젊은 알 파치노가 있더라. 시칠리아에 가면 어느 기념품 상점에서나 말론브란도의 얼굴이 박힌 티셔츠를 볼 수 있다. 내가 그 영화를 보았더라면 말론 브란도에게 분명히 반했을 거고, 말론 브란도 셔츠가 눈에 쏙 들어와서 꼭 사다주었을텐데 나는 대부를 보지 못한 채로 시칠리아로 갔다. 만약 그에게 말론 브란도의 얼굴이 찍힌 검정 티셔츠를 사다 주었으면 많이 기뻐했을 것 같다. 5유로에서 10유로 사이에 팔리고 있었다. 그는 그 영화를 처음이 아니라 몇 번째 보고 있었다. 그에게 시칠리아는 대부의 시칠리아였다. 갱스터의 고향 시칠리아, 이 문구를 어디서 봤더라? 급하게 여행팀에게 준 안내책자를 뒤적거린다. 연구원 여름여행을 시칠리아로 가는 이유를 말하던 구본형사부님의 글에서다.
로마는 인류의 왼쪽 젖가슴이다.
그러니 그곳을 빠뜨릴 수 없다.
누군가 오른쪽 젖가슴은 어딘가 묻는다.
물을 필요가 없다.
그곳은 자신이 태어난 조국이다.
시칠리아는 변방이다.
그리스인들이 고대부터 자신을 넓혀온 확장된 자아다.
원시의 체모가 자라는 신화의 땅이고,
로마보다 더 은밀한 곳이다.
화산 에트나가 아직도 폭발하는 곳이고
갱스터들의 고향이다.
바로 변경연 당신과 너무도 닮은 곳이다.
어떻게 안 가볼 수가 있겠는가!
도대체 시칠리아가 어떤 곳이길래 변방이라고 하는 걸까?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1787년 시칠리아를 여행한 괴테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기행>에서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는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박제씨는 <신화의 섬 시칠리아>에서 ‘섬은 잘 보관된 보물상자와 같고 그대로 굳어버린 화석과도 같다. 오랜 세월 시칠리아에는 갖가지 문명이 좁은 울타리 안에 빼곡히 모였다. 외부와의 연락이 잦지 않아 한 번 들어온 문명은 고스란히 남았다. 바다와 하늘과 산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 어디 이곳 뿐일까 만은 문명의 향기가 이처럼 달콤하고 매혹적인 곳이 또 어디 있으랴’ 소설가 김영하씨는 <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에서 ‘시칠리아에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생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나무,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 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 머리의 처녀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예전에 로마와 피렌체, 베니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내가 꿈꾸던 이탈리아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영화나 관광엽서, 여행사의 팜플릿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것들은 모두 시칠리아에 있었다.’ 여기에 거론된 책 제목들이 시칠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어보려고 책을 검색할 때 뜨는 이름들이다. 여기에 더한 다면 김영하씨가 저 책을 쓰기 전에 여행 다큐를 찍는 방송사에서 처음으로 시칠리아를 갔을 때 만든 그 여행다큐를 봄 직하다. 우리 팀에 방송사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런 자료에 대한 접근을 수월히 생각하는 이가 있었다. 그이가 찾아내 돌린 영상물은 ‘하늘에서 본 세계, 시칠리아’, KBS 1 '걸어서 세계속으로' 시칠리아편, 등인데 영화를 보지 않은 이유와 같은 이유 - 업무 쳐내느라 바빠 등에서 콩이 튄다, 여행을 처음 가니까 뭘 공부하고 가얄지 모르겠다, 읽어야 할 의무 북리뷰만으로도 벅차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그냥 마음 편하게 놀고 싶다 놀고 싶다 놀고 싶다 - 로 건성건성으로 보거나 건너뛰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 했던가?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하면 된다고, 첫 눈에 반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겠냐며, 나는 다른 이들의 감격에 숟가락만 얹어 얻어 먹어 보겠노라 대책없는 거지 근성도 좀 부렸다.
1988에 개봉된 시네마 천국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는 팔라죠 아드리노다. 1993에 개봉된 그랑블루는 타오르미나,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가 연기했던 대부의 성은 콜리오네였고 그건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 이름이다. 영화에 보면 말론 브란도가 연기했던 돈 콜리오네가 시실리에서 이민온 걸로 나온다. ebs의 영화 소개하는 대담프로그램으로 ‘시네마천국’이 쓰이더라. 이 영화는 30년 전에는 특정 영화의 제목이면서 그 영화 속 영화관의 이름인 고유명사였다가 지금은 보통명사처럼 진화한 것 같다.
시네마천국의 토토는 실제로 그 마을에 살던 소년이 캐스팅된 거였다. 토토가 살던 집, 영화 속 토토와 알프레도가 거닐던 광장의 분수대, 꾸벅꾸벅 조는 맹랑하고 귀여운 복사 조무랭이로 늙은 신부님을 곤란하게 하던 성당, 엘레나를 기다리던 거리가 관광명소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시네마천국 촬영에 얽힌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단다. 그런데 영화를 촬영하던 당시에도 그 마을에는 극장이 없었다고 한다. 극장이 있었는데 그 극장의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극장 따위는 없었단다. 여기까지는 ebs에서 만든 여행물 ‘걸어서 세계’에서 본 내용이다.
영화를 다시 보기 전에도 기억하고 있는 게 있었다. 내 머릿속 저장본의 유입경로는 오래전 20대에 주말의 명화 시간이다. 주말의 명화는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에 했는데 음악이 요상하게 나른해서 로고음악이 돌아가는 동안 잠이 스르륵 들곤 했었다. 시골 동네에 필름 영사기를 돌리는 극장이 하나 있고 그 극장의 영사기 기사였던 늙수그레한 알프레도와 단짝인 까무잡잡한 소년 토토의 얼굴, 소년이 할아버지의 자전거 앞에 타고서 황량하면서도 건조하고 햇빛이 많은 들판 사이로 난 길을 가는 장면은 아마도 포스터의 그림이었나? 이티가 소년의 자전거 바구니에 올라 타고 별빛을 가리키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과 토토가 노인의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깔깔거리며 들판 어딘가를 가리키는 장면은 쌍둥이처럼 헤깔렸다. 엔리꼬 모네꼬네의 영화 ost 또한 아련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것이었고, 시골사는 나의 귀에도 익숙한 것이니 굉장히 유명한 거였나보다. 필름 영화의 야한 부분을 성당의 신부님이 잘라내면 안타까와하거나 화를 냈었던 사람들과 풍기문란이라면 종을 딸랑딸랑 흔드는 신부님 장면도 남아있다. 나에게 시네마천국은 영화에 대한 영화로 남아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장면이 있었지?
영화를 다시 본다. 한편에 600원을 내고 다운로드 받아서 헤드셋을 끼고 노트북으로 집에서 본다. 어릴 때 보지 못했던 금시초문의 장면들이 생경스러울 만큼 수두룩빽빽하다. 나이 들어서 보니까 내 나이에 볼 수 있는 것이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영화의 시점이다. 토토는 이미 중년의 어른 남자다. 로마에서 성공한 영화감독으로 살고 있는 50대 초반의 토토에게 어머니가 전화를 해서 알프레도의 부음을 전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하고 있었다. 시칠리아로 돌아가는 길을 시작하면서 과거로 갔다가 장례식을 하는 장면을 통해 현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의 과거와 현재가 만난다. 어린 토토보다 중년의 토토에게 감정이입을 해 가면서 영화를 보았다.
그는 3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운전하는 뒤로 로마의 오래된 건물이 지나감으로써 그가 살고 있는 도시가 로마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비행기로 1시간 거리였지만 어머니와 누이가 집을 고치도록 돈을 보내기는 하면서도 직접 찾아온 적은 없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알프레도 영감이 그에게 이 곳을 떠나라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리 아버지같은 사람이고, 그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해도 그의 말 한 마디에 그런 결심을 했을까? 토토가 다시 돌아가지 않은, 못한 이유는 그가 못 잊을 사랑을 했고, 그녀가, 아니 사랑이 그를 버리고 떠났다는 상처때문이었다. 아니 저 내용이 처음 볼 때부터 있었단 말이야? 나는 영화가 새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놀랐다. 중년 남자나 여자가 리셋이 필요할 때, 고향으로 돌아갈 때, 돌아가야만 할 때의 간증이나 지도, 매뉴얼 하나를 정독하듯이 영화를 본다. 뭐야? 지금 나의 상황과 비슷한 거잖아. 나는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먼 곳으로 떠나 왔지. 당분간 더 멀리로 떠날 생각이지. 당분간은 얼마가 될까? 알지 못한다.
전쟁에 나갔던 남편은 전사했고 토토와 여동생을 데리고 남편을 기다리는 젊은 엄마는 자주 화를 낸다. 필름이 가연성인 걸 모르는 토토가 아버지의 사진과 함께 필름을 넣어둔 쿠키통을 난로 옆에 두는 바람에 집에 불이 났을 때, 너 땜에 여동생이 죽을 뻔 하지 않았냐며 성당에서 돌아오는 아들아이 엉덩이를 팡팡 두들기며 잡는 모습에서 살기 힘들고 절망적인 여자의 힘듬을 느낄 수 있다. 그 자리에 있던 알프레도도 그걸 읽는다. 또 그는 타다 남은 아빠의 사진을 보면서 토토가 얼마나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는 지 소년의 마음도 읽어낸다. 두 사람 모두를 연민한다. 알프레도의 연민은 평생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영화를 돌리면서 봤던 영화를 또 보고 또 보고 또 보느라 대사를 외워버린 영화 일이 준 걸까? 그런 연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쉬지 못하면서도 영화를 통해 위로받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자신의 위로와 행복을 채집해 섭취하게 되었을까? 토토는 영화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리고 ‘영화’는 역시나 외로운 사람이면서 영화를 사랑하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인 알프레도의 인간미, 전쟁에서 상실한 진짜 아버지를 대체하는 양부의 역할을 다해낸 이의 토토에 대한 깊은 사랑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다. 토토를 귀에 쏙 드는 말로 위로한 다음 ‘그건 00의 대사야’ 라는 멋진 대사를 침으로써 토토의 영화에 대한 갈증과 사랑을 증폭시킨다. 토토에게 떠나라 말할 때의 멋진 말에 대해 토토는 이 스승에게 묻는다. “그건 어디에 나오는 대사예요?” 알프레도는 대답한다. 누구의 대사도 아니다, 그건 나의 대사야, 영화는 삶과 다르다, 삶이 훨씬 어렵다.
토토는 장례식 기간동안 그의 잃어버린 모든 것과 한꺼번에 재회한다. 영화관 시네마천국과 얽힌 추억, 어머니와 여동생 가족,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사랑.
어머니는 토토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다른 여자가 받았는데 그 여자들 중에서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한 목소리는 한 명도 없었다고, 그런데도 마치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척 전화통화를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아들이 자신처럼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지고지순하다고 표현하는 이런 류의 사랑을 하는 건 좋은 점도 있지만 외로운 거라고 말하는 어머니는 아들의 가슴 속에 못 이룬 사랑이 들어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영사기 기사를 쫒아 다니고, 가연성이 높은 필름 때문에 집에 불이 난 적이 있고, 화재사고로 장님이 된 알프레도의 후임으로 영사 기사 일을 할 때, 단 한 번도 아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아들은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고만 기억하는데 사실은 엄마는 아들이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고, 아들이 방에 들어가고 나면 살금살금 나와서 문을 잠그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어머니를 버렸다는 말에, 어머니는 말한다. 나는 항상 네가 하는 일을 옳게 생각해왔다고. 저녁마다 대문 빗장을 잠그면서도 아들을 기다렸음을 말한다. 그는 30년간 이 곳에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사실은 어머니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음을, 어머니는 그와 한번도 헤어져있지 않았음을 안다. 그를 놓치 않았고, 그를 이해했던 어머니의 사랑으로 인해 그와 어머니의 끈은 늘 이어져 있었던 셈이다.
토토가 알프레도의 말에 정말로 떠날 결심을 했던 건 엘레나와의 일 때문이었다. 엘레나가 말없이 그를 버리고 떠나버렸다는 상처가 있었다. 그가 청춘과 장년기 30년 동안 여러 여자를 만났지만 마음을 주지 못했고, 결혼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돌아와서 우연히 스쿠터를 타고 가는 엘레나를 닮은 아가씨를 만난다. 엘레나의 푸른 눈을 가진 처녀가 누구와 차를 타고 갔는지를 보고 전화번호부를 뒤져 연락처를 알아내어 못잊을 첫사랑 그녀와 통화를 한다. 눈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의 여성이 된 엘레나는 토토와의 사랑을 방해하던 아버지가 정한 정혼자가 아니라 대학에서 다시 만난 남자와 결혼해서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하느냐고, 과거는 그냥 과거로 묻어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추억의 그 장소에서 재회한다. 그들은 약속한 적이 없다. 그들이 만날 수 없었던 이유를 거기서 듣는다. 징집된 토토가 보낸 수많은 편지는 엘레나 아버지에 의해 본인에게 전달이 되지 못했다. 엘레나는 감금당했었고, 이사가는 대신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달라고 애원해서 아버지가 아래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를 만나러 시네마천국에 왔었다고 말한다. 그 시간을 같이 도망가는 기회로 삼을 작정이었다. 마침 토토는 거기 없었고 알프레도만 있었다. 알프레도는 한 사랑이 가면 다른 사랑이 온다고 정염의 불은 재만 남기는 거라고 말을 해주고 엘레나더러 떠나라고 말한다. 토토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지만 엘레나는 할 수 있다고 알프레도는 말한다. 엘레나는 그러기로 했지만 알프레도가 장님인 걸 생각하고 토토가 보길 바라며 영화의 라벨을 뜯는 메모지 뒷면에 사랑의 맹세와 함께 자신이 이사가는 집 주소를 남긴다. 그걸 토토는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토토는 엘레나가 그를 버리고 말없이 떠났다고 믿었다. 다시 사람을 못 만난 토토와 달리 엘레나는 다시 찾아온 사랑을 받아들여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추억의 장소, 바닷가 선착장의 차에서 재회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안고 키스한다. 아마도 나는 그들이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것 같다. 다시 만날 수 있냐고, 당연히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한 토토의 제안에 엘레나는 말한다. ‘여기서 멈추는게 최고의 해피엔딩이다. 우리가 그렇게 재회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중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토토는 시네마천국이 있던 건물이 폭파된다는 걸 알프레도 영감의 장례식 즈음에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먼지 쌓인 그 건물을 뒤져 엘레나의 메모를 찾아낸다. 어떤 운명의 어긋남으로 사랑을 잃었지만 그가 생각한 것처럼 사랑이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은 커다란 치유를 주었다.
상대의 아름다움에 말을 잃어버리고, 눈을 뗄 수 없었던 첫사랑의 순간에도 엘레나는 아름다웠지만 중년의 그녀도, 아버지가 기다리는 동안에 극장에 와서 메모를 적는 당찬 처녀인 그녀도,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에 다음 사랑을 하고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아 기른 그녀도, 저런 식으로 어른의 재회를 가질 수 있는 그녀도, 이쯤에서 멈추어야한다는, 사랑을 하면서도 현실을 인정하는 그녀도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주도적인 여성이지 않은가? 토토는 로마로 알프레도 영감이 남긴 선물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건 영화를 검열하던 성당 신부의 방울소리가 날 때마다 잘라두었던 키스신 필름을 모아 붙인 것이었다. 키스신은 바로 사랑의 장면이지 않은가? 토토는 30년만의 시칠리아 여행을 통해 영화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 젖줄, 사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가족의 사랑, 그가 잃어버린 것을 만나고 그것들과 연결되어 돌아왔다. 어쩌면 토토는 알프레도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지나간 사랑을 잘 마무리하고 사랑을 안은 채 떠나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엘레나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을 안은 채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별스럽게 울면서 영화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이번 시칠리아 여행의 주제는 자꾸자꾸 한 깔때기, 사랑으로 흘러가는 걸까? 거참 이상도 하네.
영화감독 토토는 헤파이스투스가 아닐까?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아픔이 지속되는, 만나지 못한 30년 동안 세월에도 그대로 그의 가슴 속에서 살아 있었다. 그는 여러 여자를 만났지만 사랑을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가슴 속 열정을 연료삼아 쉼없이 성실하게 일하며 많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는 또한 의식적으로 두 가지 사랑의 근원에서 스스로 떠났다. 추방시켰다. 바로 어머니의 사랑과 대리 아버지였던 알프레도의 사랑이다. 알프레도는 토토를 알았다. 토토가 엘레나와의 사랑을 얻어 이 소읍에 머물면 영사 기사에 머물게 되리라는 걸, 그러나 그 사랑에서 추방당하면 한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그 사랑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을 거다. 에트나 화산이 있는 시칠리아 섬에서 화산 아래 용광로가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아름다운 것들,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삶을 편리하게 또는 풍요롭게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어내는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투스를 생각한다. 헤라가 집어던졌다는 말처럼 헤파이스투스도 어머니에게 버림받았고, 제우스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그 분노를 자신을 파괴하는데 사용한 게 아니라 창조적인 일을 하는데 사용했다.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했던 신화는 또 있다 바로 하데스다. 정식으로 구혼하는 게 아니라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방식을 선택할 만큼 사랑에 서툰 하데스는 저승의 왕이었다. 그도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 반면 그 두 신들의 상대인 여신들은 여러 애인을 두었고 들락날락했다. 시칠리아는 정열적이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두 남신들과 비스무리한 면을 가진 섬인가 보다.
시네마천국 영화에서 시칠리아의 선인장, 햇빛, 밀밭, 바다를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노출 과잉의 햇빛 많은 화면이 보인다. 탤레비젼 키드였기 때문에 극장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는 나에 비해 영화감독이 된 이들에게는 영화나 극장과의 연애담이 많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사랑 이야기를 버무리고 있다.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연인에 대한 사랑. 떠나는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영화를 사랑하듯 네 일을 사랑해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 라고 말했다. 토토는 그렇게 했다. 두 사람의 영화 사랑, 그 예술 장르와의 연애담이 이 영화에는 강가 조약돌처럼 흔하다. ‘이 광장은 내 것이야’라고 외치며 다니는 노숙인은 어린 토토의 장면에도 나오고 나이든 토토의 장면에도 지나간다. 비닐봉지를 여러 개 든 현대 노숙인의 모습이 지날 때 토토에게는 오히려 익숙해서 고마운 존재였다. 알프레도의 장례식 행렬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알아보며 눈인사를 나눈다. 벌거벗은 여배우를 보며 객석에 앉아 일제히 수음을 하는 십대소년들, 아기 젖을 물린 채 화면을 향해 넋을 놓고 몰입해 있는 새댁, 하도 여러번 봐서 대사를 외우는 할아버지, 극장을 근거지로 먹고 살면서 소년들의 첫경험 상대가 되어준 작부(토토의 첫경험도 이 여자와 있었는데 그건 극장의 객석 앞이었고, 영화 포스터가 깔려있었다. 그녀는 소년이 어른 남자가 된 걸 축하해주었다.), 신부님은 종을 쳐서 야한 장면을 잘랐는데 토토가 떠난다니 기차역까지 배웅하러 달려나왔다. 거기는 기차를 배에 실어 나르는 메시나해협이었는지 모른다. 빵을 사오라고 돈을 주어보냈는데 영화를 보느라 밤 늦도록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화가 난 아이엄마에게 돈을 주웠다며 거짓말로 덮어주고, 영사기가 돌아가는 덥고 답답한 곳에서 휴일없이 일하면서도 그걸 보고 웃고 울면서 고단한 삶을 위로받는 이들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시네마 천국의 배경이 왜 하필 시칠리아이었을까? 그 섬은 토토가 떠난 후 30년동안 토토의 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처럼 사람들이 그리는 고향의 이미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칠리아는 유럽 사람들에게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나는 기대했다. 누군가의 고향으로 여행을 간다는 건, 그가 자란 개울과 다닌 학교와 거리를 같이 걷는 건 로맨틱하다. 또 이곳은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는 곳이다. 두 개나 그리스극장이 있는 섬이거든. 시라쿠사와 타오르미나다. 타오르미나의 그리스극장은 현재도 연극제가 열린다고 읽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공감하면서 삶의 굴곡진 사연들을 헹구고 위로하는 분위기에 익숙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곳은 그리스가 아니라 유럽대륙에서 외따로 떨어지고 변화가 적어서 화석처럼 여러 가지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섬 시칠리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비극이 도시국가 시민의 훌륭한 교육매체였듯이 영화는 소년에게 부모이며, 즐거움이며 삶에 대해 배우는 학교였다.
실제 도시와 영화 속 도시에 상상을 하다 스르륵 졸음에 빠지면서 버스에 실려실려 모르는 곳으로 갔다. 이번 단체 여행의 정해진 루트에 시네마 천국의 그 도시, 알바니아 난민이 세웠다는 팔라죠 아드리나는 포함되지 않았다. 단체여행의 아쉬운 점이다. 만약 자유여행을 왔으면 거기 들렀을 거다. 토토의 성당, 분수대가 있는 광장, 처녀를 기다리던 20대 청년이 앉았던 바로 그 거리의 테라스를 직접 보지 못했다. 나폴리에서 탄 배는 팔레르모 항구에 닿았고, 시칠리아 주도인 커다란 도시의 전래시장 부치리아를 후다닥 둘러보고, 커피와 빵으로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고 떠난 터라 배도 고팠다. 아직 시칠리아 섬에서 보이는 지중해가 어떤 물빛인지는 아무런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사 오기 전 내 집에 10년간 걸려있던 그랑블루 판넬에서 보던 공장에서 찍은 파랑색, 3개의 컬러 버틀을 골라내면 나의 상태를 읽어주던 컬러테리피스트에게 내가 골라 내민 것은 아쿠아블루와 민트색이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이는 나에게 뭔가를 시작하려는 때라고 말해주었지. 또 다른 두 개의 병은 하나는 자기사랑, 하나는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마지막 병을 고른 이들이 색채 테라피스트 훈련코스를 이수하러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었지. 그 컬러 버틀, 그리고 동양의 나폴리라는 통영에서 보던 물빛이 나의 예상답안이었다.
버스가 소읍을 지나는데 아까부터 나는 창을 향해 자꾸 카메라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뭐랄까? 딱히 꼬집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대도시 팔레르모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 곳이 그냥 마음에 들었다. 뒤에 앉은 이에게 나는 성급하고 경박하고 즉흥적인 말투로 팔랑팔랑 말했다. 저는요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여기가 좋아요. 나무 상자채 세워서 전시해놓은 과일 가게의 과일 색깔은 파스텔톤이 아니라 선명한 비비드색이다. 샐러드용 야채, 양상추인지는 잎이 아니라 뿌리 쪽이 위에 가도록 상자에 담겨져 전시되어 있고, 가지, 토마토, 호박, 노란색 멜론과 수박, 복숭아들은 모양을 알아보겠다. 2층 테라스마다 두 개의 쪽문 밖에 빨래를 펄럭이게 하는 바람과 너무나도 많은 햇빛이 튀어 오르고, 바쁘지 않은 사람들의 표정이 한적하고 안온하다. 가로수가 온통 꽃나무다. 화분에 작게 기르던 자주색 부겐빌리아도 이 곳에서는 담장을 넘는 나무로 거대하게 자라고 있다. 뭐랄까? 부유한 것 같지 않은데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을 보는 느낌, 자식에게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건강하게 편안하게 자라길 진심으로 원하며 햇빛을 쏟아 붓듯이 거칠 것 없는 사랑을 쏟아 기르는 집 아이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말로는 건강과 화목을 최우선 가치라고 하지만 이건 공식적이고 표피적인 가훈이고 실제로는 성취를 우선하는 경우도 참 많은데 말이다. 나는 지금 누굴 비판하고 있는 거지? 어떤 걸 원하고 있는 거지?
버스를 도시 입구 해안도로 길에 세워주었다. 단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잠투정하는 어린애처럼 아씨, 위험하고 불편하게 시리 찻길에 세워 주냐 잠결에 투덜거렸다. 시네마천국에서 토토와 엘레나가 톱으로 뜯어내어 샐러드 접시로 썼던 선인장들이 보인다. 그것들의 빨간 열매들이 과일가게에 나와 있었지. 선잠이 깨면서 눈이 번쩍 뜨인다. 지중해는 햇빛이 강하다더니 그 말이 진짜네. 너무 밝다. 썬그라스를 꺼내어 썼다. 썬그라스 쓴 게 어색하고 쑥스럽다. 이 썬그라스는 이태 전 여름에 라섹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길에 인천의 오래된 안과 1층 안경점에서 사서 일주일 쓰고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이었다. 개학식날 썬그라스를 쓰고 출근했더니 교감님이 ‘우와, 방학동안 세련되어 졌는데’라고 말해서 다음날부터는 손 챙으로 만든 손바닥만한 그늘 아래에서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맨 얼굴로 출근했었다. 얼굴 큰 사람에게 모자와 썬그라스는 좀 멋쩍은 도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모자도 꺼내 썼다. 파랑색 모자다. 이번 여행을 위한 기획 쇼핑을 두 번 했다. 열흘 전에 큰 맘 먹고 노쓰페이스에 가서 이 모자 하나를 신용카드로 샀다. 그 모자를 쓰고 대부를 봤다고 말하던 이와 청평사에 갔었다. 파랑색 모자라니, 너무 튀잖아, 꼭 대선 선거운동원 단체 복장 같지 않아요? 아 대선이 언제라고 했지요? 박근혜씨하고 누가 나올 것 같은가요? 대선 자원봉사자라고 말은 하면서 돈 받고 출근해서 전단지 돌리고 트로트를 개사한 노래에 맞춰 차 앞에서 춤추는 사람 말이예요. 새누리당은 빨강색을 주로 입으니까 한 제1야당 색깔 쯤 되는 것 같죠? 아유 엄청 촌스러워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 모든 설레발 뒤에는 ‘그런데 나는 이 색깔이 좋아요.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나 쇼핑 무지 싫어하고 잘 못하거든요. 나의 백만년만의 쇼핑을 지지해주세요. 어차피 무를 수도 없고 무르지도 않을 거거든요. 그냥 잘했어요 라고 말해주세요’ 라는 게 생략되어 있다. 상대가 ‘괜찮아요. 자기가 좋아하며 되는 거지요’라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사실 자체에 충실한 이 사람은 ‘모자는 무난한 색이 무난하긴 하죠’ 라고 했다. 그 바람에 급 소심해진 나는 라푸마에 가서 흰색 모자를 하나 더 샀다.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시칠리아에 왔다. 그러니까 흰색 모자는 스페어다. 나는 흰색 모자 대신에 파랑색 모자를 꺼내 쓴 거다. 나는 그게 더 좋다. 작은 등산 배낭에 등산모자까지 쓰고 나니 영락없는 등산복 차림이 된다. 아, 한국 사람들이 해외에서 등산복 갖춰 입고 다니는 거 엄청 촌스러운 일이랬는데 어쩌지? 달달달달. 나는 그 모자의 좋은 점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파랑색을 사랑하고, 저 지중해 바다와도 어울리고, 챙이 넓어서 목까지 가려주고, 흡수성 통기성 뛰어나서 머리에 땀도안차고, 외국은 남이 어떻게 입고 다니는 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하고, 어쩌고 저쩌고. 나는 참 살기에 불편한 인종이다.
거긴 작은 소읍, 체팔루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포인트였다. 한국의 밥그릇이 아니라 파스타나 샐러드처럼 국물없는 음식을 담아먹는 넓찍하고 조금 속이 꺼진 보울처럼 완만하게 둥그런 만이 내려다보이고 밝은 빛의 대리석 건물들이 바닷가에 밀집해 있다. 하얀 모래가 보이는 바닷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점이 보인다. 저 멀리 반짝이는 수평선 근처 호의 오른쪽 끝에는 산 아래, 십자가 첨탑을 이고 있는 성당이 있었다. 대략 저런 모습들이 이 근처 도시들의 대표 풍경일 듯 하다. 시네마천국이 촬영된 도시의 사진도 이것과 비슷했었다. 나는 바다에게 깜짝 놀라서 거대한 문화충격을 받는 사람처럼 멍하니 쳐다보았다. 거기에 그 바다가 있었다. 얕은 쪽의 색깔은 옅고 조금 깊은 곳은 짙었다. 맑고 깨끗하다는 게 단박 알아졌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 아, 아, 저 바다에 나를 던지고 싶다. 나를 튀기고 싶다. 저기 뛰어들고 싶다. 내 몸으로 저걸 경험하고 싶다, 바다로 가자, 어서어서 바다로 가자는 강한 열망이 올라왔다. 다들 셔터를 눌러대며 감탄사를 보탠다. 머리는 바다쪽으로 향한 채 다운타운까지 일행들이 같이 걸어갔다. 바람이 많은지 테라스의 빨래들이 펄럭이고 있다. 나는 카페 앞의 식물 화분과 테이블, 테라스의 화분과 빨래들을 찍으며 간다. 그 빨래들이 지중해의 바람을 내게 보여준다. 빨래 잘 마르겠다. 바람과 햇볕에 말린 뽀송거리는 시트 위에서 자면 기분 정말 좋겠다. 그렇게 말린 깔깔한 수건도 참 기분 좋지. 수영복을 입고서 비치원피스를 입고 조리를 신은 사람들, 핫팬츠를 입은 사람들, 피부나 몸매가 그닥 좋지 않아도 끈다리 원피스로 상반신을 거의 드러낸 여자들이 거리를 지나다닌다. 나는 오션월드나 캐러비안 베이 지하철 광고지에 나올 수 있는 이십대의 모델급 여자들만 비키니를 입는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이다. 비키니가 아니라 랩스커트와 다른 배를 가리는 것까지 4 피스를 입는게 상식인 줄 안다. 근데 뭐야, 나보다 키가 작고, 누가 봐도 비만에, 배가 출렁거리고, 심지어 나이 들어서 축 쳐진 뱃살을 가진 여자들조차 손바닥 조각 같은 비키니를 입고 있다. 보는 내가 눈을 어디 둬야할지 모르겠더니 맨 그런 사람들 뿐이니 눈이 좀 적응을 해가는 것 같다. 유럽 사람들은 자기 몸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없이 편안해 한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근데 나는 그 구절을 어디서 읽었지? 아하, 김형경씨 <사람풍경>에서지. 심리여행에세이라는 기괴한 부제를 단 책이었다. 그녀는 정신분석을 2년 받은 후에 집을 팔아서 세계여행을 떠났다. 목까지 올라오는 옷의 마지막 단추까지 잠궈야 편안했고, 자신의 팔과 다리가 드러난 옷을 입지 못했던 그녀가 하와이쯤을 지나면서는 랩스커트에 속이 거의 비치는 옷을 입었다 했던가? 그걸 훌훌 풀어서 바닷가에서 등을 다 드러내고 썬탠을 했다든가,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처럼. 여행을 통해서 그 점에서 많이 자유로와 졌다고 했던가?
사진 콩두
점심을 거기서 먹고,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라고 했다. 어떤 팀은 로카산에 올라가고, 어떤 팀은 성당으로 가고, 어떤 팀은 도시의 좁다란 골목을 헤매고, 어떤 팀은 수영을 하고, 어떤 팀은 음식을 여유있게 시켜서 바다 보이는 식당에 앉아 지중해를 보면서 쉬기로 했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해놓고 화덕에서 피자를 굽는 시간동안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기에는 마음 너무너무 급했다. 바다 수영이 하고 싶었다. 아니지 그냥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거다. 나는 수영을 배운 적이 없고 할 줄 모른다. 어릴 적 냇가에서 개헤엄은 쳤지. 아마 바다에 가도 나는 떠있기는 할테지. 뒤로 누워서 몸에 힘을 빼고 귀를 뒤로 젖히면 모든 몸은 물에 뜨거든. 이전에 나는 단 한번도 바다 수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쿠아블루라고 불러야할까? 민트색이라고 불러야할까? 그 물빛은 나를 자꾸 매혹하고 있었다. 설마 빠져 죽기야 하겠어? 아까 오면서 보니까 열 살 남짓 어린 애들도 놀고 있고 바닷가에 앉아 노는 사람들도 많았어. 바위에 앉아 발만 담그는 거 말고 풍덩 들어가고 싶어. 이런 거였어? 시칠리아 바다가 이런 거였어? 지중해가 이런 거였어? 하지만 나는 용기 없는 사람. 못 저지르는 사람. 말없이 확 한다면 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무당벌레나 개미에게 기생하는 진딧물처럼 찰싹 붙어야겠다며 두리번거리는 내 레이다에 들어온 사람이 재용이었다. 나는 재용에게 같이 수영하러 가자고 꼬드겼다. 재용, 재용, 재용 바다에 가자. 바다에 가서 수영하자. 재용은 수영복을 가지고 오지 않았단다. 특유의 어눌한 말씨로 한다는 것도 아니고 안한다는 것도 아닌 대답을 한다. 나는 같이 하자는 말로 알아듣고 안심한다.
우리는 일단 사부님, 한젤리타와 함께 거리를 헤맨다. 종횡무진 아무 길로나 막 다닌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서 마음 내키는 방향으로 턴을 하면 한 사람이 지날 수 있을 것 같은 좁은 골목이 다시 나온다. 좌우로 3층이나 4층의 높이 집이 있다. 나는 절벽같은 그 좁은 골목에서는 좀 숨이 막혔다. 골목의 끝에 바다가 보이고 스쿠터가 세워져 있고, 길거리 성모상에 바치는 꽃이 놓여져 있는 턱이 보이는 데는 괜찮다. 그렇게 좁은 골목의 모습에 앞 사람에게 대고 사진을 찍었다. 거기서 한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을 만났다. 어이쿠, 점심 먹나보다. 식사 때에 남의 집에 와서 미안하네. 나는 얼른 눈길을 피하며 몸을 옹그리고 지나했다. 내 공간을 누군가가 들어와서 쳐다보면 싫을 것 같아서다. 미안했다. 그런데 그 쪽에서도 문을 잠그거나 집안에서 먹는게 아니라 골목과 집 앞의 공간에 그냥 식탁을 갖다 놓은 거네. 나중에 같이 갔던 한젤리타 이야기를 들으니 그는 나처럼 눈길을 거둔 게 아니라 찬찬히 보았나 보다. 그 집의 가장과 눈이 마주쳤고, 이 쪽에서 씩 웃으니 상대도 선하고 밝은 웃음을 보내더라 한다. 그는 그 짧은 와중에 식탁에 놓인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도 보았다. 빵과 샐러드, 올리브 오일, 파스타, 그리고 토마토였단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들과 딸이 앉아 있었단다. 전해 듣고 상상하는 풍경이 그림 같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그 장면을 본 모두는 그 식탁에 끼어 앉고 싶었단다.
나는 그동안 여행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수학여행류의 여행, 과정에 반드시 요구되는 여행만 해 보았다. 여행은 어쩐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의 반대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일을 하면 생산을 하고, 돈이 생긴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 놀러 다니는 거고 돈을 써야 한다. 언제나 여행은 일보다 하위 개념이라고 생각해왔다. 이건 일년 삼백육십오일 할 일이 있는 농촌에서 자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생각해온 것이 아닐까? 나는 부모님 옆에서 열아홉살까지 살았다. 내가 거기 살 동안에 보는 모습은 늘 그랬다. 그분들도 중년 이후에는 다니기 시작했다. 자식들이 거의 대학을 마칠 즈음부터다. 그래봐야 첫 아이를(나다) 스물 둘, 막내를 서른 둘에 낳았으니 두 사람 모두 오십대 중반이다. 여행이라기 보담은 친가와 외가 부모님 사촌들 친목계에서 집집이 돌아가면서 준비하는 가족모임이다. 그이들에게 복날에 계곡 물놀이 나가서 보신탕을 먹이려고 엄마는 해마다 개를 키웠다. 같은 동네 동갑내기 여덟 부부로 구성된 친목계의 1박2일의 부부동반 모임도 있었다. 겨울이면 면사무소에서 하는 장구교실, 노래교실, 댄스교실에 다니고, 면사무소에서 조직해 운영하는 등산모임에서도 제법 부부가 같이 다녔는데 엄마의 관절염이 심해지면서 접은 것 같다. 등산복은 모두 그때 산 것들이다. 대부분의 여행은 동네 누집 자식이 결혼식을 하는 관광버스로 올라갔다 내려가는 길의 술 한 잔 마시고 부르는 노래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할 일, 즉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를 시키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인생의 훨씬 우선되는 가치고, 그 할 일이 끝이 나야 놀러 다닐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이 생기고, 여행의 동반자는 부부여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이탈리아 여행을 간다는 나에게 ‘팔자 좋다’고 한 마디 하셨다. 내 여자친구들이 이십대에 결혼해서 아이들을 거의 중학교를 보내려고 하는데 나는 출산은 커녕 결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생 미필자로 여긴다. 공식적인 할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돈을 들여서 놀고 있는. 혼나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니는 것의 비용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좀 의아스럽다기 보담 화가 났다는 게 맞는 말이다. 여행에 대한 엄마의 생각은 내 속에 든 그동안의 생각을 대변하는 거겠지.
이번 여행에 가족 단위로 온 이들이 몇 팀 있었다. 나로서는 매우 낮선 풍경이다. 이것도 문화충격을 준다. 4인 가족이 벌써 몇 년째 이 여행의 일원으로 움직이는 가족을 보며 ‘한 번 움직이려면 매년 1500만원은 들겠구나. 아마도 돈을 많이 버나보다. 부럽다.’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혹시나 그 생각이 내 눈빛이나 태도로 상대에게 바코드처럼 읽힐까봐 눈길을 서둘러 피한다. 4번째 온다는 40대 부부는 10대 풍광 속에 부부가 함께 여행을 다니는 장면이 있어서 그런단다. 두 번째 온다는 부부는 아마도 오십대인 듯 했다. 누가 그랬지? 여행은 돈이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라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고, 특히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시도할 수 있다고. 나는 학교에서 방학식날 전직원이 어디로 차를 맞춰서 당일치기든 1박2일이든 떠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따라는 가지만 가기 싫어서 갈까 말까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건 여행을 가장한 업무의 연장이지 않나? 교사로 12년 살았고 그 안에 24번의 방학이 있었는데도 여행을 떠나질 않았으니 여행을 좋아하는 쪽은 아닌 게 분명하다. 여행 사전 모임에서 자신을 여행포비아라고 표현했다.
7월 20일에 방학을 했을 때 내 몸은 방광염, 질염, 구내염 염증 부자인데다가 나한테 과한 요구를 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공격성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려니 과했던 것 같다. 이 여행을 합숙훈련 쯤으로 생각한 면이 있었다. 나는 여행이 에너지를 충전할 거라는 걸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은근히 걱정이 되어서 여행을 가서는 그동안 비축한 에너지를 쓸 작정을 하고서 가기 전에 작정하고 잘 먹고 잘 자야겠다고 결심했다. 여러 날을 꼼짝 안하고 쉬었다.
자기 사랑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8월 연구원 오프수업은 여행지의 밤마다 이루어지는 거였다. 남의 사랑이야기를 듣고 내 사랑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피드백을 잘 해주는 것이 중요할테지. 사랑에 관해서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게 나의 치명적인 약점인데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할 건가 대단히 난감하였다. 실제로 여행을 와서 보니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이야기 자체보다 내가 일찍 잠드는 게 익숙해서 자정을 훨씬 넘겨가며 이루어지는 수업에서 거의 졸다 자는 것이었다. 근데 사랑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것은 내 안에서 그 부분에 대한 많은 것을 살펴보는 좋은 계기가 되어 주었다.
여행을 함께 가는 일행 중 몇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친했거나 관계가 좋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소원해진 사람들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지낼 것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들과는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친해질 필요는 없다. 나는 여자 연구원들 6명과 돌아가면서 룸메이트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모닝페이지 카페를 만들었던 로이스님이 변경연 연수여행을 기획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 여행에 내가 동행할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로이스님이 몇 년 전에 언젠가 내가 그 여행에 함께 할 거라고 믿는다고 하셨다. 힝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내가 자진해서 다른 연구원이 가는 여행에 동참할 리는 없지만 연구원이 되었으니 그 과정의 커리큘럼으로 이걸 하는 한 동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 그녀의 여행에 함께 하게 될런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왕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니 이왕이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며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의 여러 가지 행동을 보게 되기를 바랬다. 무엇이든 첫 경험은 그걸 의무로 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보담은 좋아해서 즐기는 사람들과 하는 것이 백배 천배 좋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여행 동안 꼭 하고 싶었던 일을 적어 보았었다. 여행이 싫다면서도 열 가지나 되었다. 할 일이 많으니 그 중 한 두개 할까 말까 하다는 걸 알면서도 스트레스를 좀 받았다.
1) 에트나 화산에서 화산지대 물가인 나의 문명을 세우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
2) 타오르미나 여행기 공동작업을 통해 웨버님과 친해지기
3) 시칠리아에 대한 신화, 책, 영상 보기, 사전파티 참석하기
4) 하루의 로마 자유 관광날에는 머무는 여행을 하면서 하루키씨나 김영하씨처럼 글을 쓰기
5) 노트북으로 개인사를 50페이지로 늘이기
6) 채부동 잔치집의 잔치국수의 맛을 전도해주신 밥잘 선생님 근방에서 바다 수영하기
7)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에서 지혜의 여신 아야 소피아를 만나는 시간 가지기
8) 나의 아침활동을 계속 유지하고, 10일 내내 사부님과 같이 아침활동 하기
9) 환경보호를 위한 사소한 실천을 하는 여행
10) 함께 잠을 자면서 다른 연구원들을 더 느껴보기
그 골목 식사의 가족 앞에서 나는 여행객이었다. 정착민 가족에게 비추어 내가 여행과 여행객을 보던 시선을 살펴본 셈이네. 뭐 그리 거창하고 힘들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이 정착민이고 내가 여행객일 때가 있고, 내가 정착민이고 내 곳으로 여행오는 이들도 있는 거지. 그 주인남자처럼 환한 얼굴로 웃어주면 되는 거지. 꼭 침해니 뭐니 하는 건 과한 듯 하다.
좁은 골목은 점 넓은 골목으로 통했다. 세일 중인 가게에는 saldi 라는 글자가 붙어있고 세일율을 붙여놓았다. 사부님은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불쑥 신발가게에 들어가 신발을 신어 본다. 그 뒤로 세 명의 팔기 연구원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간다. 그의 행동에는 어떤 의도나 암시가 없다. 그는 그저 여행을 즐기고 있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졸졸졸 따라가면서 좀 불안하다.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 이런 상태가 머쓱하다. 신발은 질이 좋아보인다. 이태리제니 오죽하겠어? 내가 아는 많은 명품들이 이태리가 고향이잖아? 뭐 알고 있지? 명품? 잘 모르지. 나는 그래도 루이비똥, 구찌, 프라다는 안다. 가지고 있는 건 없지. 짝퉁 가방도 없지. 왜 없어? 그냥. 똑같은 가방 들고 다니는 게 나는 좀 어색해. 가방이나 구두 선물을 여자들이 좋아한다는데 잘 모르겠어.
성당 앞까지 가며 사진을 찍었다. 오렌지 나무와 포도덩굴 아래에 있는 노천카페를 사진 찍고, 골목과 테라스를 찍다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조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골목길,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올 것 같은 골목길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골목길이 내게 해주는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가운데에 둥근 화분이 놓여있다. 이건 길을 갈 때 오른쪽과 왼쪽 어딘가로 통행하라는 규칙이 여기에 있다는 의미일거라도 나는 생각한다. 길거리 턱에 놓인 성모상과 거기 바쳐진 싱싱한 국화를 보면서 어느 성녀의 축일이 지난 지가 얼마 안되었나보다. 아니면 인도의 신상 마다 아침에 노랗고 주황색의 꽃을 바치는 것처럼 이 근처 집 어딘가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날마다 꽃을 한 송이씩 올리는 지도 모르지. 스쿠터가 세워진 걸 보면서 그 스쿠터로 할 수 있는 일, 시장에서 야채를 사오고, 바다로 수영하러 가고, 뒤에 누군가를 태우고 어딜 다녀오는 걸 상상해본다.
배가 고프다. 어디 가볍게 토마토소스를 넣어볶은 야채와 치즈가 듬뿍 이태리 샌드위치나 빵을 먹을 수 있는 데는 없나 두리번거린다. 나는 후딱 가볍게 먹고, 아니면 싸들고 수영을 하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지금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가도 좋을 것 같다. 가볍고 잘 마르는 옷을 입고 왔다. 속옷까지도 면 옷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영을 한 20분만 하고 손수건으로 잘 두드려 말리면 금방 마를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자연스레 재용과 일행이 되었다. 재용이 일단 젤라또를 하나 사자 한다. 날이 너무 덥다. 한 40도는 될 것 같다. 고온다습한 한국에 있었으면 아주 돌아가시게 후덥지근할텐데 바람이 불고, 습도가 높지 않아 그렇게 덥게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손가락질로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벽에 씌어진 대로 돈을 주었다. 동전이 어떤 게 얼마짜리인 줄을 잘 모르니까 손바닥에 올려놓고 주인 여자가 집어가게 했다. 빵에다 넣어주기도 하는데 콘, 컵을 고를 수 있다. 두 가지 맛을 골랐고 2.5 유로였다. 작은 스푼을 꽂아준다. 아 맛있고 시원하다. 아이스크림 집 앞은 수영복 매장이었다. 나는 매장에 들어가서 민트색 비키니를 본다. 컵이 엄청나게 크다. 나는 스몰 스몰, 80A나 어쩌면 AA거든요. 물어보고 싶지만 한국의 속옷 사이즈 재는 법과 유럽이 다른 것 같다. 내 눈에 드는 것은 단 하나였다. 처음 정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왜냐면 민트색 비키니를 입고 수영하는데 매우 행복했던 꿈을 꾼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을 기억하면서 언젠가 내가 비키니를 사면 꼭 민트색을 사리라 했었다. 민트색과 옥색 원피스, 그리고 진주와 옥색 구슬이 번갈아가며 나오는 목걸이도 여러 번 꿈에서 보았다. 그 색들은 나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직접 입어보면 알게되겠지 생각했었다. 엄두를 못 내서 다시 놓고 나왔다. 한참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내려가다가 아무래도 안되겠다, 비키니를 입어봐야겠다고 말했더니 재용이 따라왔다. 그가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정말로 쇼핑이 어렵다. 마트 가는 걸 가족행사로 여기는 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필요한 것만 후다닥 사오고, 잘 사지 않는다. 그가 영어로 사이즈를 물으니까 영어를 하는 점원이 천천히 손짓을 섞어 3단 장식장에서 맨 위는 스몰, 가운데 미디움, 아래 빅이라고 말해준다. 나는 아까 내가 찜해둔 것이 스몰이어서 다행스럽다. 아랫 것은 사지 않았다. 너무 작더란 말이지. 내가 가지고 온 검정 수영복 바지와 입어도 어울릴 것 같다. 계산을 하고 후다닥 나오려는데 재용이 입어보라고 한다. 입어보고 사도 되나 나는 코알라 눈이 되어서 한참 망설이며 살핀다. 입어보는 공간은 두 군데였다. 어떤 남자가 아내와 두 딸이 비키니 고르는 걸 보아주고 있었다. 한 여자당 대략 대여섯 벌의 수영복을 가지고 커튼 안쪽 방으로 들어가면 그걸 입고서 커튼을 걷고 나온다. 그 남자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물어본다. 자기 이거 괜찮아? 좀 죄는 것 같지? 색깔은 예쁘고 편해, 아까 게 나아 지금 게 나아? 이런 대화들이 오고가는 것 같았다. 엄마가 들어가면 딸들이 번갈아 가면서 나온다. 한참을 그렇게 한다. 그 남자는 집안 여자들이 입어본 후 건네는 수영복을 밖에서 들고 서 있다. 나는 남자의 인내에 감탄한다. 그리고 남자의 의견과 상관없이 여자들은 자기가 마음이 풀릴 때까지 입어보는 시간을 가진 후, 좋아하는 디자인을 고를 거라는 걸 안다. 엄마와 두 딸 모두 비키니를 입어보고 있다. 그녀는 내가 보고 있는데 편안하다. 그녀가 편안히 몸을 드러내고, 비키니를 입어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편안해지는 것 같다. 내가 15분 이상 잠잠히 기다리니 점원이 그 집 식구들을 한 부스로 몰고 나를 위해 부스 하나를 비워준다. 나는 얼른 들어가서 입어보았다. 잘 맞는 것 같아 바로 입고 나왔다. 당장 윗도리만 벗어놓고 바다로 들어가야 하니까. 재용이 그 때까지 수영복 가게 앞에 앉아 있다. 고마웠다. 50% 세일해서 샀다. 비싼 것은 아니었다.
재용은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다. 어쩌지? 나더러 누님, 오늘 이후에 수영할 일정이 많이 있어요. 지금 들어가면 식사는 언제 하지요? 젖은 옷을 어떻게 말리구요. 말리는 품새다. 가는 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로카산에 다녀온 이들, 8명이 맛있게 먹었는데 95유로밖에 안 되더라면서 싼 물가에 만족해하는 이들을 만났다. 하나같이 자기들이 선택한 자유여행방식 덕분에 재미있어진 것 같다. 나는 수영, 수영, 수영 생각뿐이었다. 재용과 세린, 웨버님은 식사를 주문하러 갔다. 그들은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길가 식당, 차들도 별로 다니지 않는 길가의 나무 그늘에 마련된 식당에서 바다를 보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따근한 이태리 음식과 시원한 음료와 파스타를 먹을 거라고 한다. 나는 혼자 내려갔다.
사진 : 신재동
샌달을 신고 물 가까이 간 후 벗었다. 아얏, 돌들이 굉장히 날카롭다. 다시 샌달을 주워신었다. 윗옷과 모자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까 사입은 민트색 비키니가 드러난다. 이제 보니 이 비키니는 평소 입는 속옷과 모양이 비슷하다 다만 가슴 중앙에 여러 색깔의 장식이 달렸다. 내 목걸이 지갑 속의 여권과 돈을 잃어버리면 어떻해? 그렇다고 목걸이 지갑을 목에 건채 수영할 수는 없잖아. 벗어놓는다. 훔쳐갈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집결시간이 30분 정도밖에 안 남아있다. 지금 수영한대도 20분 정도 밖에 못하는데 그거라고 할까 말까 마음이 복잡하다. 저 멀리 웃통을 벗은 남자가 한 사람 커다란 물병을 가진 채 내려오다가 그늘에 앉아 자리를 잡고 눕는다. 그는 인도 고행자처럼 머리카락이 길다. 나는 첨벙 뛰어들지는 못하고 일단 다리 아래를 잠글 수 있는 데서 걸어본다. 물이 적당히 기분좋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그 다음에는 샌달을 벗어놓고 물 속에 첨벙 뛰어들었다. 머리를 내놓고 앞다리가 아니라 손을 발발발 움직여 게헤엄을 친다. 그러다 벌렁 드러누워서 물에 떠 있었다. 그러다 뒤집었는데 발이 안 닿는 곳이면 나는 화들짝 겁을 집어먹고 몸부림을 치거나 바위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물을 먹었다. 물은 짰다. 꽃소금 탄 밍밍한 짠 맛이 아니라 천일염 탄 좀 풍부한 짠 맛이다. 손바닥과 발바닥에 상처를 입었다. 안 빠질려고 온 힘을 다해 덥석 짚은 이 바위가 너무 날카로와서인 듯 하다. 처음보는 바다풀도 수상쩍었다. 그래서 여기서 수영을 하라고 안했구나, 다음번에 수영을 하라고 우리를 풀어놓는 곳은 아마도 모래가 있어서 발이 안다치는 곳이려니 했다. 물로 씻으니 피가 계속 베어 나오고 있다. 소금물이니 소독되고 괜찮아.
잠시 후에 레몬이 왔다. 그녀는 다른데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위에서 보고 있다가 바닷가에서 자란 그녀답게, 바다를 보고 뛰어들고 싶을 때 확 뛰어들려고 온거다. 그녀는 수영복을 입지 않았다. 윗옷만 벗고 청반바지를 입은 채 뛰어든다. 그녀도 수영을 할 줄 알아서 바다가 자신 있어서 뛰어든 것 같진 않다. 또 얼만큼 깊이인지 발을 내려 가늠하겠다며 섰다가 한 키를 넘는 것에 놀라서 소금물을 제법 먹었고 나처럼 손발을 날카로운 화산석 바위에 베인 것 같았다. 이 상처는 여행 내내 낫지를 않았다. 며칠은 상처연고를 바른 후 밴드를 붙이고 다녔다. 우리는 전우애 같은 걸 느꼈다. 함께 물 속에서 허부적거리면서 굉장히 고양된 상태가 된다. 그 고양됨은 어디서 온 걸까? 이 바다가 특별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이 바다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우리를 끌었기 때문에, 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물을 만났기 때문일까? 그럴 거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자신이 원하는 그것에 첨벙 뛰어들었고 그걸 스스로 굉장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는 거다. 얼마나 소중한 느낌인지 모른다.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소한 것일테지만 나같은 사람에게는 작은 모험이고 승리다. 나만의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되었구나. 이 도시 이름을 기억해야겠다. 체팔루, 체팔루, 체팔루, 체팔루. 내가 환장하게 아름다운 지중해로 덥석 뛰어든 곳. 내 몸은 이 바다의 느낌과 함께, 나의 기쁨을 구근처럼 저장하리라. 내 몸 속에 보존되어 있다가 언젠가 부화되어 기어나올 거다. 손발과 마음에 상처를 입더라도, 누군가의 비난을 받더라도 훌쩍 뛰어들어야 할 때가 있음을,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나만의 여행은 시작되었음을 내 몸이 기억할 거라는 거에 의심이 안된다. 여행은 달리기처럼 삶의 좋은 은유라지. 근데 내가 못 뛰어들고 있는 바다는 어딜까? 가장 큰 건 내게는 사랑이었지. 그리고 싸움 또는 분노에도 못 뛰어들지. 무서워서 에둘러 피하거나 눌러두지. 두 가지 중요한 열정을 나는 쓰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지.
체팔루 바다로 뛰어든다는 건 일종의 선언이다. 나의 바다로 첨벙 투신하겠다는 함성이다. 수영을 배운 뒤로 미루지 않고 지금! 여기서! 물 좀 먹고, 생채기 좀 나더라도! 남의 시선 상관없이! 사실 남의 시선이란 것이 실재한다기 보담 늘 나를 막는 나의 시선일테지.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건가 하는 걸 늘 신경쓴다는 건 참 피곤하고 답답하고 가여운 일이다. 잘했어요. 콩두씨, 콩두씨의 바다, 삶, 몸으로 하는 사랑과 일로 오늘처럼 앞으로도 뛰어들어주어요. 바다수영은 어렵다면 어려운 일인데 쉽다면 쉬운 일이기도 했어. 날카로운 화산석에 발을 베일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에 부주의하게 팍팍 디디고 짚어서 피를 냈듯이 그런 상처들이 날 수 있겠지. 몰라서 입은 상처들. 그런데 생각해봐. 어떤 일이 있을지 다 알고 갈 수는 없잖아? 안내되지 않았다고 번번이 화를 낼 수도 없고 그걸 다 공부할 수도 없잖아? 그런 상처없이 아까 망설이던 순간에 그냥 밥 먹으러 간 것과 지금 생채기 난 손으로 수영을 하는 것과 어떤 게 더 좋아? 어떤 네 모습이 더 사랑스러워? 더 자랑스러워? 당연히 수영을 하는 쪽이지. 후회하지 않아. 난 이게 좋아. 이런 내가 너무너무 좋아. 좋아 죽겄어. 미쳐버리게 사랑스러워. 아주 홀딱 반하겠어. 고맙기까지 하다구. 쉬 흥분하는 경박하고 자아도취적인 나는 제 해석에 감동해서 눈물도 몇 방울 찔끔 났다.
수영 시간은 겨우 30분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승리감을 안고 식사를 하는 이들 곁으로 다가갔다. 아까 지나간 웨버님, 세린, 재용이 막 받은 음식을 한 포크씩 입에 넣어준다. 맛있다. 여기도 역시 피클이 없네. 이태리 식당은 어디든 피클이 없나보다. 파스타가 피클을 대동하지 않는다고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야겠네. 와인도 따라 마신다. 이것도 맛있다. 해외여행 경험이 훨씬 많은 나라는 카페에다가 짐을 맡겨 놓고 그 앞 바다에서 수영을 한 다음에 카페로 가서 음료수를 사 마시고 그 집 화장실에서 간단한 샤워까지 하고 돌아왔다. 그녀는 스노쿨링 도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다 속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나는 바닷물 안에서 눈 뜰 생각은 또 못해보았다. 이렇게 우리 세 명이 체팔루 바다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원기를 회복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험담을 가지고 차에 올랐다. 조금씩 이 여행이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콩두의 즐거운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콩두와 비슷한 점은 '나도 몸에 대해 많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
몸매가 좋지 않으면 몸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이유로 나는
짧은 치마, 민소매는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어.
다리를 가리는 월남치마. 한여름에도 반팔은 커녕 팔꿈치까지 오는 블라우스.
그러니 비키니는 생각도 못해. 몸매가 드러나는 옷은 함부로 입어서는
안된다는 고루하고 보수적인 생각들이 나를 여러가지로 옭아매는 것 같아.
푸른 바다를 싫컨보았겠다.
콩두의 바다, 온 몸으로 바다를 만끽한 콩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