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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7일 01시 55분 등록

A. 저자조사

 

오비디우스 푸블리우스 나소의 생애와 작품

대부분의 로마 시인들은 로마의 시민이 아니었다. 오비디우스도 이탈리아 반도의 중동부 지방, 로마에서 약 150킬로 떨어진 곳에 살던

펠리니 족 출신이다. 그들은 산간 지방에 살았지만 강단이 있던 백성으로 로마의 통치권을 거부하는 사회전쟁(90-89 BC)을 일으켰고,

 그 결과로 그들은 로마의 시민이 되었다.

 

 

431px-Ovidius_Metamorphosis_-_George_Sandy's_1632_edition.jpg

 

1632년, 조지 샌디가 번역, 런던에서 출판된 오비디우스 시집의 표지 그림.

시인의 영정 주위에 기록된 것은 '오비디우스는 로마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내용.

 

 

 

베르질리우스(70-19? BC), 호라티우스(65-8 BC)와 더불어 문학의 황금기를 구사하던 소위 아우구스투스 시대(31 BC-14 AD)의 3대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는 기원전 43년 펠리니의 술모(오늘날의 술모나)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로마의 혼란기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어(44 BC) 내전이 일어나고, 이듬해 43년에는 카이사르의 추종자 안토니우스가 무티나에서 패전하면서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12년 뒤 옥타비아누스에게 쫓긴 안토니우스가 악티움에서 자살을 하게 된다. 이것은 찢기고 갈라터진 로마에 일인통치하의 대제국을 바치고 소위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 오비디우스는 열두 살이었다.

 

 

이 나이가 되면 로마의 소년들은 문법학교에서 문법, 문장구조, 문학 등의 중등교육을 받았다.

기사계급에 속해 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 형제를 법률가로 출세시키고 싶어서 로마, 아테네 등지에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로마에 가서 당시에 집정관을 지냈고 자칭 문학 애호가였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멧살라 코르비누스를 만나게 된다. 이 인물은 고위층 군인인 데다 실세 정치가여서 티불루스(55-19? BC), 술피치아(여류시인), 프로페르티우스(50? BC-15? BC) 같은 많은 시인들의 후견자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오비디우스에게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셈이었다.

대 시인 호메로스도 가난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의 아버지의 질책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재능을 연마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잠시 공직에 몸을 담은 적도 있지만 결국 시인으로 성공했다.

 

 

당대의 시인들 가운데 베르질리우스(70-19 BC)는 동성애를 했다는 흔적이 있고, 호라티우스(65-8 BC)는 여러 개의 거울이 걸린 침실을 좋아했다고 한다. 티불루스(55-19 BC)와 프로페르티우스(50-16 BC)는 피학대 음란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들 가운데 결혼생활을 한 유일한 시인인 데다가 세 번이나 결혼을 했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시인들 같은 기이한 습성에 젖은 것도 아니다.

 

그는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렇게 되기 위해 애를 썼다.

.<사랑의 기교>나 그의 첫 작품인 <아모레스>의 주제는 물론 사랑이란 공통점이 있다.

사실 사랑이라는 광범위한 내용을 지닌 이 추상명사는 사람마다, 그 용도에 따라서 신의 절대적 사랑에서부터 상대적인 인간 상호간의 사랑과 하등동물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의미하는 바가 천차만별이다.

오비디우스에 있어서 사랑의 개념은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구, 이성에 대한 소유욕을 의미할 뿐이다.

승화된 신의 사랑은 결코 아니다. <아모레스>는 이성과 접하면서 생긴 일, 느낌 등을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시에 담아서 적은 글이다.

 

반면에 <사랑의 기교>는 이성을 성적 파트너로 만드는 방법을 기록한 글이다. 말하자면 연애술이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사랑의 유형은 혼외의 애정이다. 동시대의 시인들 가운데 도덕적인 문제로 처벌을 받은 인물로서는 그가 유일했다는 것은 어쩌면 이 혼외의 사랑을 미화했던 것이 그 원인의 일부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비디우스의 인기는 그가 생존했을 때보다 오히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더욱 높았다.

그 하나의 예로서, <아모레스>에서 그는 아내와의 사랑을 더욱 뜨겁게 만들기 위해 질투심을 유발하도록 권장까지 하고 있다.

그의 사후 근 1200년이 지난 후에 12세기 프랑스의 궁정 신부 안드레아 카펠레누스(불어명은 앙드레 샤플렝)는 그의 저서 <참다운 사랑의 기술과 허튼 사랑의 질책>(범우사의 범우고전선 41로 출판됨)에서 부부간에 사랑을 유지하는 방편의 하나로서 역시 질투심을 이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가 언급한 대로 이 글의 근원이 오비디우스임을 우리들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면

 중세에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던가를 가늠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특권층의 남성들이 하는 대로 16세에 성인식을 행하고 공직생활의 준비를 갖추었다.

 동시에 부친에 의한 첫 번째 강제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에 법적 최하 결혼 연령은 남자가 14세, 여자는 12세였다.

그러나 대개는 남자가 15세에서 18세 사이에 결혼을 했고, 여자는 13세에서 16세 사이가 보통인 시대였다.

그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갔는지 스스로 얘기한 대목은 없다.

 

 

그러나 그가 시인으로 공인을 받고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18세가 그 시기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때 그는 코린나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이것이 나중 세상에 나오면서 <아모레스(사랑놀이)>라는 제목을 얻는다.

코린나가 가상의 인물이냐, 그의 정부냐, 아니면 그의 첫 아내냐를 놓고 여러 가지 설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것들을 증명할만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리고 그는 곧장 로마를 떠나서 그리스 신화의 현장인 소아시아, 그리스, 시칠리아 등지를 2년간 여행을 하게 된다.

그의 작품 구상을 위한 현지답사인 셈이었다. 그 여행을 같이 한 친구가 마체르(<아모레스> 제2권에 등장한다)였다

그는 멧살라의 지원을 받는 시인군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나중에도 두고두고 이 여행을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가 공직에 들어갔던 것도 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였다. 그러나 <아모레스> 제1권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역시 군인이나 다른 공직에 관심이 없었다. 결국 기원전 15년경에 <아모레스>를 출간하게 되면서 시인으로서 그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그 다음 해에 그에게 가장 큰 위기가 왔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공직에 나가지 않으면 상속자의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그를 압박해왔던 것이다. 당시의 젊은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이런 종류의 위협에는 다 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다시 결혼을 했고 거기에서 한 아이를 얻었다. 이 무렵 그의 아버지는 90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결혼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는 20세 정도 연하였지만 세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죽을 때까지 그를 아꼈고 오비디우스 자신도 존경과 신뢰를 보냈다.

 

그가 가장 가까이했던 시인은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43-16 BC)였다. 이 시인도 오비디우스처럼 기사계급의 인물로 공직을 거부하고 시인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었다. 오비디우스가 로마에 유학 왔을 때 그는 이미 그곳 메살라의 문인회에 자리를 잡고 오비디우스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고, 리친나(본명은 호스티아)라는 여성과 사랑을 하는 중이었다. 이 여인이 바로 그의 만가 작품 속에서 친티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고, 오비디우스도 이것을 본받아 작품 <아모레스>에 등장하는 여인을 코린나라고 부른 것 같다.

작품 속에서 이 두 여인의 기능도 흡사하다.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3기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초기의 작품이 이 <아모레스>(20 BC 경)를 비롯하여, 인물 설정과 그의 소설적 소질을 드러내 보이는 유명 여성들의 독백으로 가득 찬 <헤로이데스>(유명여성들의 편지), <얼굴 화장술> 등 초기의 연애시들, 그 중에 기혼여성을 유혹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사랑의 기교>(1 BC), 연이은 <사랑의 치유>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의 중기, 즉 40대에는 보다 원숙한 시들이 발표되었다. 12달의 행사들을 다룬 일종의 세시기인 <파스티>(1월에서 6월까지만 남아있고 나머지 반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유배형을 받았을 때 아직 미완성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신화의 내용을 이용하여 로마의 건국에 연결시킨 대 서사시 <변신> 등이다. 그리고 만년에 흑해로 귀양을 가서 쓴 <비탄>, <흑해에서 띄운 편지> 가 그의 마지막 작품들이다. 그는 10년에 걸친 흑해의 유배생활 중에 예순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두 번의 이혼경력을 가지고 명문 파비우스 가문에서 위에서 말한 세 번째의 아내를 맞았고, 거기에서 딸 페릴라를 얻었다(둘째 아내에게서 얻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쓴 시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마지막 아내를 죽을 때까지 아끼고 사랑했다.

 

그는 지금부터 2000년 전인 8AD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에 따라 흑해 연안의 토미스(오늘날 루마니아의 콘스탄자)에 귀양을 갔고,

수많은 탄원에도 불구하고 말년을 거기에서 맞았다. 황제 편에서 말하는 추방의 원인은 ‘부도덕성’이라고 했지만 그 부도덕이 무엇인지 명백한 근거는 없다. 그런데 오비디우스는 ‘노래와 실수’(<비탄> 207)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래’와 ‘부도덕성’은 아마 그의 초기작품 <사랑의 기교>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상황으로 볼 때 다분히 정치적 계략이 숨어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간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대역사건으로 처형되고 추방된 인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짐작되는 대목이다. 아니면 오비디우스와 같은 해에 추방된 왕가의 여인과 어떤 연애사건이 원인이었다고 추리하는 사람도 있다.(율리아)

 

그의 작품을 대략 순서대로 살펴보면, 그의 초기에는 사랑에 관한 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모레스>(‘여러 가지 사랑’이라는 뜻이지만 역자는 이것을 ‘사랑놀이’라고 번역하였다)만 하더라도 이성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감상,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로이데스>도 사랑을 주제로 남녀가 주고받은 서간문들이다.

 약관의 나이에 쓴 <사랑의 기교>(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필자의 번역본이 있다)도 역시 남녀의 연애술을 읊은 시이다.

그 다음에 <사랑의 기교>와 합본으로 출판한 <사랑의 치유>를 썼지만 이것은 사랑의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을 읊은 일종의 교훈시다.

 

우리에게 2000년 전 풍습을 옛날 그대로 재현시켜주는 우리나라의 세시기(歲時記)와도 같은 <파스티>(달력)가 있다.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반쪽만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면서 후세의 문학,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유명한 <변신>이 발표되었다. 이것의 대 주제는 물론 신과 인간과 자연이 서로 겪는 형상의 변화이지만, 이 작품의 저변에도 어김없이 사랑이라는 주제가 짙게 깔려 있다.

 

오비디우스가 벽지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생활의 고통과 향수, 우정과 적개심, 아내에 대한 사랑과 황제에 대한 탄원 등을 읊은 유배시, <이비스>(따오기), <비탄>, <흑해에서 띄운 편지> 등이 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한 많은 유배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현지에서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 해가 서기 17년이었다.

그 외 작품으로는 <호두나무>, <여자의 얼굴 화장>, <리비아를 위로함> 등이 있다.

 

 

B. 오비디우스가 후세에 끼친 영향

‘「변신(메타모르포세온)」의 목적은 훌륭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즉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책은 없다.’ 하버드의 교수이며 평론가였던 G.L. 킷트리지(1860-1941)는 「메타모르포세온」을 이렇게 평했다. 그리고 편견이 없는 평론가 J. 드라이든(1631-1700)은 ‘켄터베리 이야기」의 작가 G. 초서만이 오비디우스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인물로 칭송할 만하다’고 했을 정도로 이 이야기책은 재미있다는 데에 이이가 있을 수 없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소감은 첫째로 킷트리지의 말처럼 무척 재미가 있었다는 것,

둘째로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셋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인에 있어서이건 서양인에 있어서이건 간에 서로 별 차이가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뜨거운 휴화산의 불처럼, 혹은 싸늘한 지하수처럼 인간 심리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는 것,

넷째로 많은 문학작품에 이 작품이 인유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 등이었다고 어렴풋이 기억된다.

 

오비디우스는 서양의 중세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당시는 모험담이나 로망스를 한창 즐기는 시대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대중과 빠르게 친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 이전에 발표된 그의 애정시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중세의 학자들이나 음유시인들이 이 책을 가까이했음은 물론이고, 그를 그들의 정신적 후견인으로 삼을 정도였다.

 그리고 12세기 영국에서는 「변신」이 문학의 선수 과목으로 지정된 적도 있다.

 

오비디우스는 「변신」을 통해 신화 중에서도 형상의 변화를 대주제로 하는 작품을 구상하였다.

 호메로스의 작품들, 그리스 극작가들의 희곡에 등장하는 신화의 소재 등,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무진장이었다.

그의 최고 걸작인 「변신」은 그가 유배되기 전에 마지막 교정이 남았을 정도로 이미 완성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절망적인 소식을 접한 그는 토미로 떠나기 전에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부본들이 남아 있었던 탓으로 지금의 글이 전하고 있다고 한다.

 

 

C. 오비디우스의 구성

「변신」은 전 15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서사시의 머리를 장식하는 서시(序詩), 즉 천상의 영들에게 바치는 기도문에서 보다시피

작가의 의도는 형상을 바꾼 인간이나 물체의 이야기를 천지의 창조로부터 자기의 시대까지 단절 없이 이어가는 것이었다.

 

제1권의 앞부분,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창조, 대홍수와 새로운 인종의 번식 등, 구약성서의 큰 흐름과 유사한 전개로부터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는, 슬픔, 즐거움, 낭만, 비극, 불륜과 패륜, 애정과 복수, 짝사랑의 서글픔 등, 그리스, 이집트, 혹은 이탈리아, 동방의 신화들을 엮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의 반열에 올리고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짧고 긴 250여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변신」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주인공이 바뀌어가며 진행되는 일종의 장편소설이다. 그래서 독자가 이 책을 손에 들면 어디에서 손을 놓아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14, 15권의 결말 부분에서 보면 이 작품은 하나의 민족 서사시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윤회설과 동물 애호론을 언급한 대목(15권 제2화)에서는 불교 철학을 연상하게 할 만큼 이 작품을 철학의 경지까지 올려놓으려고 했던 작가의 의도가 엿보일 뿐 아니라, 자기의 작품에 대해 끝없는 긍지와 자신감을 피력한 결시(結詩)는 더욱 이 시와 작가를 인상적이게 만든다.

 

 

어쨌든 영어와 여타 언어를 쓰는 최고급의 시인들이 자기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공통의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시인들을 보다 차원 높게 감상하기 위해 이 시인을 가까이 했던 것처럼, 원문 그대로 「변신」과 친근해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바가 없겠지만, 오늘날에는 라틴어라는 것이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의 대학에서도 대부분 그 교과 과정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으니 유감스러운 일이다.

 

오비디우스가 암울하게 생애를 종결하고, 그의 「사랑의 기술」이 금서가 되자,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변신」은 작가 자신의 손에 의해 분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다른 작품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변신」과 「사랑의 기교」 두 작품은 아무런 제약 없이 초기 로마 제국의 독서계에 유포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오비디우스의 인기는 하락을 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 후 기독교의 선교자와 설교사들의 인기가 상승하는 몇 백 년 동안 상대적으로 그의 인기는 하강 곡선을 그린다.

 

 

기독교인들에게 이교적 작가, 특히 시인은 독자의 품행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오비디우스의 작품은, 그 세속적 태도, 올림푸스의 신들의 거리낌 없는 이야기, 상스러운 행동,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즐기는 속된 쾌락 등 때문에, 아무리 매혹적인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들이 풍기는 매혹적 내용 때문에 위험성은 그만큼 더 높은 것이 사실이다.

러나 오비디우스의 작품이 일부 사람들에게 탐탁지 않은 점이 있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복사하여 읽었다.

이교적인 작가의 작품들이 금서가 된다면, 읽을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속과 교회라는 양 세계의 최고 수준의 작품을 읽어서 성서적 작가가 아닌 고전적 작가라 할지라도 전적으로 몽매한 소리만 지껄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 예로써 초기 기독교의 교부 가운데는「변신」을 인용하여 오비디우스가 비록 세속 작가이면서도 우주를 창조한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는 점을 애써 증명한 인물도 있었다. 샤를마뉴 시대에 오르레앙의 주교였던 어떤 이는 오비디우스를 그가 즐겨 읽는 로마의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아, 오비디우스의 작품 중 많은 부분이 시의에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나, 허구라는 외형 밑에 감추어진 많은 진실을 찾을 수 있음을 설명함으로써, 비록 기독교의 신앙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그의 작품을 가까이 해도 좋다는 암시를 주기도 했다.

 

「변신」에는 군데군데 무자비한 복수의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일반 독자가 악영향을 받지 않고 유익하게 읽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번안판이 나온 일도 있었다. 신화의 이야기를 길게 우의적으로 설명한다든지,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를 가능한 한 성서의 이야기와 연관시킨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예를 들면, 천지 창조와 대홍수는 성서의 해석에 훌륭하게 이용될 수 있는 명백한 유사점이 있었기 때문에, 신화에서 훌륭한 교훈을 얻을 수도 있었다.

 

 

오비디우스의 조국이랄 수 있는 이탈이아에서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인 단테가 그에게 찬사를 바치고 있다.

단테는 베르질리우스를 하계의 안내자로 선택했다. 그러는 반면 세속적 시인으로서 오비디우스를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앉혀, 호메로스, 호라치우스, 루카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했다. 단테의 「신곡」에는 오비디우스에 관한 폭넓은 언급과 찬미가 도처에 보인다.

 그는 「변신」을 고대 신화의 주요 전거로 이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뱀으로 변한 다음, 다시 뱀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이중의 변신을 효과적으로 묘사하여 원 저자를 능가하려 하고 있기도 하다(제4권 제8화).

 

 

보카치오 역시 오비디우스에게 이끌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그는 오비디우스의 이야기 중에서 몇 개를 재현하였다.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이야기가 거기에 포함된다.

 

이 작품보다는 오비디우스의 영향이 비교적 적은 「데카메론」에서는 전체적 골격에 있어서, 질병이 가라앉을 때까지 시골 생활의 따분함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서 돌려가며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은 박쿠스의 축제에 참여하러 가고 없는 사이, 유사한 방법으로 미니아스의 딸들이 무료함을 달래는 방법(제4권 제1화)을 연상하게 한다.

 

오비디우스의 인기는 아마 12세기에서 14세기 사이가 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일단 그의 인기가 확립된 후에는, 고전 작가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읽혀진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다소 우의적 해석을 가미하여 이 시기에 번역된 「변신」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번역된 언어도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고 프랑스어 등, 다양하였다. 작가들이 오비디우스를 번역에 의해 알게 되었든, 원서에 의해 알고 있었든, 우화, 예화, 또는 인유로써 그의 영향력 아래 그들의 작품이 풍요로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인들은 고사하고, 르네상스의 미술가, 조각가들도 역시 그의 작품에서 무진장의 영감을 얻었다.

베르니니의 「다프네와 아폴로」, 그리고 지금도 플로렌스의 노변광장에서 고르곤의 머리를 들고 있는 벤베누토 첼리니의 「페르세우스 상」은 오비디우스의 회화적 인물상이 금속이나 석재로 조형화된 단 두 개의 예에 불과하다.

 

 

 

18세기에 이르러 오비디우스는 모든 지식인들에게 고전 연구의 도구였고, 라틴 시의 전형으로서, 고전 인용의 보고(寶庫)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수행했다. 당시의 작가들은 그의 시를 세련된 영시로 옮기기를 즐겼다. 새무얼 가스가 출판한 「드라이든, 애디슨, 가스, 메인워닝, 로우, 포우프, 게이 유스던, 크록설, 기타 대가들의 공역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라는 제목의 번역서가 그 예이다. A. 포우프(1688-1744)는 자기의 문학 수업의 일환으로서 이 작품의 1/4 이상을 번역했다고 한다. 그러나 퇴고를 거듭하여 출판된 것은 겨우 두 개의 이야기, 드리오페의 이야기(제9권 제5화)와 포모나와 베르툼누스의 이야기(제14권 제12화)에 불과했다.

 

 

 

"나의 작품은 완성되었다.

노한 유피테르도, 불도, 칼도, 시간의 날카로운 이빨도 파괴할 수 없으리라. 이제 육신 말고는 내 어떤 것에도 권세를 행사하지 못하는

그 운명의 날이 와서 나의 불확실한 수명을 끝내주기 바라노라.

 

그러나 나는 더 나은 나의 한 부분과 더불어, 죽지 않고, 별보다 더 높이 날아오를 것이며, 나의 이름은 천고에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로마가 정복하여 로마의 힘이 미치는 어느 땅에서도,

나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것이며,

시인의 예언에 조금의 진실이라도 담겨 있다면,

나는 명예롭게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

 

결사에 나오는 오비디우스의 선언을 다른 버전으로 옮겨 보았다.

공부를 시작히여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났고.

그 재미난 이야기를 쓴 사람이 궁금해서 이리저리 뒤지다가

그의 결혼 생활, 그의 아버지등에 대한 개인적  이야기를  다룬 자료를 운좋게 구할 수 있었다.

또 그의 선언대로 그가 긴 세월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도...

 

컬럼은 신화와 전설을 주제로 전시중인 루브르전으로 써 보았다.

몇 주 내내 오비디우스라는 정말 거대한 폭포에 빠져 지낸 시간들이었다.

 

그의 선언에 감사한다.

그는 지금 하늘에서  나는 명예롭게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고

자신의 말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보고 있으려나...?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는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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