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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3일 04시 26분 등록
 

사기열전-사마천

사마천 지음/김원중옮김/ 민음사


저자에 대하여

<태사공 자서>에서 발췌

***뼈대 있는 집안의 내력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과 여의 후손들에게 계속 천문과 지리를 맡게하여 하(夏)와 상(商)에 까지 이르렀으니, 중과 여는 대대로 천문과 지리를 주관한 것이다. 그런데 주나라 선왕 때에 이르러 그 후손들은 관직을 잃어 사마씨(司馬氏)가 되엇다. 사마씨는 대대로 주나라 역사를 관장하였다. 주나라 혜왕과 양왕 사이에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가게 되었으며, 진나라의 중군인 수회가 진(秦)나라로 달아나 버리자 사마씨는 소량(少梁)으로 들어갔다.

 주)사마는 관직이름으로 시대에 따라 그 맡은 일이 달랐다. 사마는 본래 군사나 군수품 등을 관장했는데 때로는 사관(史官)일까지 겸했다.)가 되었다.

*****사마담이 사마천을 낳다

사마담은 한나라의 태사공(太史公)이 되엇다. 사마담은 당도(唐都)에게 천문에 고나한 것을 배우고, 양하에게 주역을 전수받고 황자에게 도가의 견해를 배웠다.

태사공은 이미 천문을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백성을 다스리지는 않았다. 그에게 아들이 있는데 천(遷)이라고 했다.


****사마천의 일대기

기원전145년 사마천 출생

   섬서성 한성현 용문에서 태어남

기원전 140년 사마천 6세, 한무제가 즉위

  용문산을 가로 지르는 황하 남안에서 밭 갈고 양과 소를 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냄

기원전 137년 사마천 9세

     사마천이 오래된 벗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저는 어릴 적에 특출한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성년이 되어서도 고을에서 칭찬받는 젊은이가 못 되었습니다.”

사마천 당시에는 효렴(孝廉)제도가 있었다. 인품이 훌륭하다거나 특이한 재능이 있는 자들을 중앙 정부에 추천하여 관역을 수여하는 제도가 있었다. 아마도 사마천은 추천받지 못하였나 보다.

기원전 136년 사마천 10세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마천 당시의 서체는 대개 예서(隸書)였는데 그 이전의 서체는 전서(篆書)였다. 전서로 씌어진 책을 일반적으로 고문이라 불렀다. 사마천이 훗날 참고했던 고문 경서는 <상서>를 비롯하여 <시경>, <세본>, <춘추>, <좌전>, <국어>, <논어>, <제자적> 등이다. 

기원전 127년 사마천 19세 장안 근처로 이주

주경야독하면서 십대를 보내다가 19세 되던 해 아버지가 근무하던 수도 장안 근처로 이주.

기원전 126년 사마천 20세. 장기간에 걸쳐 여행을 떠나다

우선 남쪽으로 양자강과 회수 지역으로 내려갓다가 회계산에 올라 우임금이 죽어서 들어갓다는 동굴을 탐험했다. 그리고 구의산에 들러 순임금의 묘소를 살폈다. 이어서 배를 타고 원강, 상강 유역을 돌았는데, 이 지역은 초나라 말기 정치가이자 문학가인 굴원의 포부와 좌절이 서린 곳이다.

그 다음은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산동성으로 들어가 춘추전국시대 학술계의 성지였던 제나라와 노나라 지역을 살폈다. <공자세가>를 비롯하여 <중니제자열전>, <유림열전>, <노장신한열전>, <맹자순경열전>등 학술사상과 관련된 내용을 작성할 때 이 지역을 답사했던 기억이 당연히 떠올랐을 것이다. 진제국이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패구너을 다툴 당시 군웅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실현, 파현, 팽성 부근을 답사할 때는 재앙과 곤란을 겪었다. 추현(鄒縣)과 역산(嶧山)에서는 향사(지방장관이 봄과 가을에 한 차레씩 일반 백성과 만날 때 시행한 활쏘기 의식)를 살펴보았다. 양나라와 초나라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행기간은 최소한 1~2년 길면 2~3년은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버지 사마담은 왜 사마천을 장거리 배낭여행을 보냈을까? 훗날 사마천에게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하여 미리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때의 체험이 <사기열전>을 쓸때 큰 도움이 되엇으리라.

기원전 123년 사마천 27세 낭중(郎中)에 임용

장거리 여행에서 돌아온 사마천은 낭중에 임용되었다.

참고1) 사마천은 박사 제자로서 시험을 거쳐 낭중에 임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2)한무제는 민간의 장서를 국가에 헌납토록 권장했고 국립도서관을 짓고 필사관리를 두었다. “세상에 숨겨져 있던 전적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태사공 앞으로 수집되었다”고 사마천은 적고 있다.

기원전 111년 사마천 35세 낭중으로 정벌대에 참여

 사마천은 황제의 비서관 낭중의 신분으로  한무제의 칙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파와 촉 남쪽 지역을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공과 작과 곤명을 공략하고 돌아와서 다시 명을 받들었다.

기원전 110년 사마천 36세 아버지 사마담 작고, 아버지의 우언을 받들다

한무제는 비로소 호아실의 봉선의식을 행하였는데, 사마담은 주남(周南)에 머물러 있어 그 의식에 참여하여 받들 수 없으므로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들 사마천이 대마침 <파촉평정>의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므로 황하와 낙수의 중간에서 아버지를 만나 뵐 수 있었다. 사마담은 아들 손을 잡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은 주나라 왕실의 태사관이었다. 일찍이 아주 먼 옛날 우임금과 하 임금에게서 공명을 드러낸 이래로 천문에 관한 일을 주관해 왔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중도에 솨락하더니 나에게서 끊어지고 마는 것인가? 너는 다시 태사가 되어 우리 조상이 하던 일을 이어야 한다. 지금 천자께서 천년의 대통을 이어받아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하고 있는데도 내가 따라가지 못한 것은 분명 천명이로다! 천명이로다!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라. 태사가 되거든 내가 논하여 저술하려고 했던 바를 잊지 말아라. 무릇 효도란 부모를 섬기는데서 시작하며, 그 다음은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마지막은 자신을 내세우는데 있다. 후세에 이름을 떨침으로써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으뜸이다......확린 이래로 지금가지 400여년 동안 제후들은 서로 아우르려하고 사관의 기록들은 내버려지고 끊어졌다. 이제 한나라가 흥기하여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고 현명한 군주와 어진 임금과 충성스런 신하와 정의를 보고 죽는 선비가 나왔다. 그러나 내가 태사가 되고도 이들을 논하여 기록하지 못해 천하의 역사 문헌을 폐기하였구나. 나는 이것이 매우 두렵다. 너는 이점을 염두에 두거라.”

사마천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소자가 영민하지는 못하나 아버님께서 순서대로 정리해 두신 옛문헌을 빠짐없이 모두 논술하겠습니다.”

태사공이 세상을 떠난지 삼 년 만에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어 사관의 기록과 황실도서관인 석실, 금궤에 보관한 책들을 꺼내 모았다.

“선친께서 ‘주공이 세상을 떠난지 500년이 지나 공자가 있고, 공자가 죽은 뒤 지금에 이르기까지 500년이 되었으니 다시 밝은 세상을 이어받고 <역전>을 바로잡고 <춘추>를 이어받고 <시>, <서>, <예>, <악>의 근본을 밝히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선친의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그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드는 사마천의 뜻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다.


기원전 108년 사마천 38세 태사령에 임용

  이 해 6월에 태사령에 임용되었다. 이때부터 사마천은 국가도서관의 각종 서적 및 파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유고를 기초로 하여 <사기>저술에 착수했을 것이다.

참고)태사령은 우러급 6백석에 불과한 말직이었지만 , 그 당시 중요한 국가적 행사, 이를테면 천문관측, 역법 개정 및 각종 국가차원의 제사를 주관햇고 아울러 황제의 의문점을 풀어주는 고문 역할도 하였다.

기원전 101년 사마천 45세 태사령 재직

대원을 정벌했던 이광리가 한혈마를 구해왔다. 한무제는 기쁜 마음에 <서극천마지기>를 지어 불렀다.

기원전 99년 사마천 47세 태사령 재직 중 이릉사건으로 수감됨

한무제 때는 흉노족이 골칫거리였다. 이광리가 기병 3만을 이끌고 주천(酒泉)을 떠나 흉노 우현왕과 기련산에서 접전하여 흉노족의 목 1만 두를 베었다. 함께 출전했던 이릉은 보병 5천명을 이끌고 거연 북방 1천리를 달려 흉노족 수장 선우의 3만 기병과 격돌하ㅕ 선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리면서 지원부대마저 끊기자 결국 투항하고 말았다. 소식이 전해지자 한무제는 격노했고 문무백관들은 한결같이 이릉을 비난했다. 한무제는 유독 입을 다물고 있던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릉과는 고향친구라고 함) 사마천은 한무제의 기분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이릉을 최선을 다했으며 투항한 것도 나중에 기회를 엿봐 한 제국에 보답하려는 끗’이라고 아뢰었다.

이 말은 한무제의 오해를 샀다. 이릉을 변호하면서 한무제의 대흉노정벌 및 한무제의 처형과  이광리의 출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발언으로 한무제는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고 허튼소리로 황제를 우롱한 죄는 극형이었다.

기원전 98년 사마천 48세 태사령 재직 중 이릉사건으로 궁형을 자청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 중이었으므로 살아남기 위하여 궁형(宮刑)을 자청했고 재가를 받아 궁형에 처해졌다.

사마천은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엇구나.”

그는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햇다.

“대체로 <시경>과 <서경>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주나라 문왕)은 유리(里)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陳)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이 세상에 <여씨춘추>를 전했으며 한비는 진(秦)나라에 갇혀 <세난(說難)>과 <고분(孤憤)> 두 편을 남겼다. <시>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후의 생활을 <보임안서>에 이렇게 고백했다.

   “간장은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꼬이고, 집에 있을 때는 멍하여 뭔가 잃어버린 듯, 길을 나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망망했으며, 궁형을 상기할 때마다 식은땀이 흘러 옷을 흥건하게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 내가 궁형을 당한 이후로 그 힘든 세월들을 어떻게 묵묵히 버텨왔는지 그 과정과 심경을 밝히겠다. 나 자신은 얼마든지 친구를 위하여 죽을 수 있지만 그러나 <사기>가 아직 미완성이므로 나는 지금 <사기>를 위하여 구차하게 연명하는 신세, 내 목숨을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다. 요컨대 내가 당한 것 그리고 자네가 당한 것 등 모든 시시비비는 우리 생전에 옳고 그름이 모두 밝혀지기는 무방하므로 우리 모두가 죽고 세월이 흐른 뒤 후세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세.”

사마천은 절대 권력 앞에서 몇 마디 삐끗한 죄로 궁형에 처해졌던 비극적 인물이었으며 그런 비극을ㄹ <사기>저술로 승화시킨 불굴의 정신은 그 이후 암울한 시대에 많은 인물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기원전 97년 사마천 49세 중서령 재직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후 중서령알자(中書令謁者)에 임용되었다.

중서령알자는 황제의 비서실장에 해당한다.

기원전 89년 사마천 55세 중서령 재직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 “황제(黃帝)씨로부터 지금까지 기록하여 10표, 12본기, 8서, 30세가, 70열전, 도합 130편이 되었다”고 밝혔다. 이를 미루어 이미 <사기>는 설령 초고라 할지라도 탈고한 것이며 사마천은 임무를 완성한 셈이다.

“<사기>를 쓰던 도중에 궁형을 당햇습니다. 저로서는 <사기>가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이 너무 아쉬워 궁형을 당하면서도 꾹 참았던 것입니다. 제가 이 책을 완성하여 안전한 곳에 소장하고 또한 지기에게 전해줄 수 만 있다면 예전의 그 수모를 만회한 것이므로 설령 천만 번 죽임을 당한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이렇게 임안에게 말했다.

기원전 86년 사마천 60세 사망(60세 사망은 추측이다)

어떤 이는 <사기>를 완성하고 나서 자살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대가 57세쯤)

사마천의 묘지는 지금의 성서성 한성현 지천진 사마파에 있다.


****사마천이 쓴 ‘칠십열전’ 해제

  말세에는 모두 이익을 다투지만 오직 저들(백이와 숙제)만은 의를 지키느라 바빴다.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 죽으니 천하가 그들을 칭송했다. <백이열전>을 지었다.

  안자는 검소하고 이오(관중)는 사치스러웠다. 제나라 환공은 관중의 보좌로 패자가 되었고 경공은 안자를 써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 <관, 안열전>제 2를 지었다.

  이이(노자)는 무위(無爲)로써 스스로 자연스럽게 변하고 청정으로써 스스로 바르게 하엿다. 한비는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고 형세와 이치에 따랐다. <노 장 신 한열전> 제 3을 지었다.

옛날부터 제왕은 모두 <사마법>이 있었는데 양저(穰苴)가 이것을 부연하여 밝혓다. <사마 양저 열전> 제 4를 지었다.

 신(信)과 염(廉)과 인(仁)과 용(勇)이 없으면 병법을 전하거나 검술을 논할 수 없으며, 도(道)와 부합해야 안으로는 몸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변화에 순응할 수 있기에 군자는 덕을 기른다. <손자 오기 열전>제 5를 지었다.

  오건9초나라 평왕의 태자)이 참소를 당하여 그 재앙이 태부 오사에게까지 미쳤다. 오상은 아버지를 구하려 했고 오운(오자서0은 오나라로 달아낫다. <오자서 열전> 제 6을 지었다.

  공자는 문덕을 저술하고 제자들은 학문을 일으켜 모두 제후들의 스승이 되었다. 인을 숭상하고 의를 권장했다. <중니제자 열전> 제 7을 지었다.

  상앙은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서 치국의 법술을 밝혀 효공을 강대한 패자로 만들었으니 진나라는 후세에도 그 법을 따랐다. <상군 열전>제 8을 지었다.

   천하는 여섯 나라가 연횡하는 것과 진(秦)나라의 탐욕을 걱정하였는데 소진이 제후들을 붙들어 주고 합종을 맹약함으로써 탐욕스럽고 강대한 진나라를 눌럿다. <소진 열전>제 9를 지었다.

  여섯나라는 이미 맹약을 하여 화친했으나 장의는 주장(연횡설)을 밝힘으로써 재후들을 흩어지게 햇다. 그래서 <장의 열전> 제 10을 지었다.

  진(秦)나라가 동쪽 당을 차지하여 재후들의 패자가 된 것은 저리자와 감무의 책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리자 감무 열전> 제 11을 지었다.

  황하와 화산을 장악하고 대량을 포위하여 제후들이 손을 잡고 진나라를 받들게 한 것은 위염의 공이다. <양후 열전>제 12를 지었다.

  남쪽으로 초나라의 언과 영을 함락시키고 북쪽으로 조나라의 장평을 깨뜨리고 마침내 한단을 초위한 것은 무안군과 백기가 장수로 있을 때이고 또 형(초나라)을 무찌르고 조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왕전의 계책이다.  <백기 왕전 열전> 제 13을 지었다.

  맹자는 유가와 묵가의 유문(遺文)을 섭렵하고 예의의 기강을 밝혔으며 양나라 헤왕이 이익을 추구하는 단서를 끊었다. 순경은 지난날의 흥망을 열거했다.  <맹자 순경 열전> 제 14를 지었다.

  맹상군은 빈객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반갑게 맞았으므로 사람들은 설(薛)땅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제나라를 위하여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았다. <맹상군 열전>제 15를 지었다.

   조나라의 평원군은 풍정과 서로 권모(權謀)를 다투고 초나라로 가서 한단의 포위를 풀고 조나라의 군주를 다시 제후가 되게 했다. <평원군 우경열전>제 16을 지었다.

  부귀한 몸으로서 빈천한 선비에게 몸을 낮추고 어진 선비로서 하찮은 사람에게 굽히는 일은 오직 신릉군만이 할 수 있다. <위공자 열전> 제17을 지었다.

  몸을 던져 가면서 군주를 따라 마침내 강한 진(秦)나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유세객들을 시켜 남쪽 초나라로 달아나게 한 것은 황헐의 충의였다. <춘신군 열전> 제 18을 지었다.

  위제(위나라 재상)에게 받은 치욕을 참아내고 강한 진(秦)나라의 손아귀에서 신임을 받아 위세를 떨쳤으며 어진 사람을 추천하여 자리를 양보한 사람이 둘 있다. <범저 채택 열전> 제 19를 지었다.

  장수가 되어 계책을 실천하고 다섯 나라의 군사를 연합하여 약한 연나라를 위해 강한 제나라에 원수를 갚아 그 선군의 치욕을 씻었다. <악의 열전>제 20을 지었다.

  인상여는 강한 진나라에게는 자기 생각을 펼치고 염파에게는 몸을 굽혀 그 군주를 위함으로써 한결같이 제후의 존경을 받았다. <염파 인상여 열전> 제 21을 지었다.

  제나라 민왕은 수도 임치를 잃고 거읍으로 달아났지만, 전단은 즉목을 굳게 지키며 기겁을 깨뜨려 달아나게 함으로써 드디어 제나라의 사직을 보존하였다. <전단 열전> 제 22를 지었다.

  궤변을 늘어놓아 진(秦)나라에 포위된 성의 근심을 풀고 작위나 봉록을 가볍게 여기고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을 즐겼다. <노중련 추앙열전>제 23을 지었다.

   문장을 지어 풍자하여 간언하고 유사한 비유를 들어 의(義)를 논한 것으로는 <이소>가 있다. <굴원 가생 열전>제 24를 지었다.

  진나라의 자초와 우호관계를 맺고 제후들이 다투어 진(秦)나라를 섬기도록 하였다. <여불위 열전> 제 25를 지었다.

  조말(曹沫)의 비수로 노나라는 잃었던 땅을 되찾고 제나라는 제후들에게 그 신의를 밝혔다. 예양은 의(義)를 지켜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자객열전> 제 26을 지었다.

   그 계획을 분명히 하고 시대의 추이에 따라 진나라를 추존하여 진나라가 해내(海內)를 통일하도록 한 것은 전적으로 이사의 힘이었다. <이사열전> 제 27을 지었다.

  진나라를 위해 땅을 개척하고 인구를 늘려 북쪽으로는 흉노를 무찌르고 황하를 따라 요새를 만들었으며 산에 의지하여 방비를 튼튼히 함으로써 유중현을 건설했다. <몽염 열전> 제 28을 지었다.

   조나라를 평정하고 상산(常山)에 요새를 만들어 하내를 넓히고 초나라의 권세를 약화시켜 한나라 왕의 신의를 천하에 드러냈다. <장이 진여열전> 제 29를 지었다.

   위표는 서하와 상당의 군사를 거두어 한나라 왕을 따라 팽성에 이르렀다. 팽월은 양나라를 침략하여 항우를 괴롭혔다. <위표 팽월 열전> 제 30을 지었다.

  경포가 회남 땅을 가지고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돌아가니, 한나라는 그를 이요하여 초나라의 대사마 주은을 맞아들여 마침내 항우를 해하에서 무찔렀다. <경포열전> 제 31을 지었다.

  초나라 군대가 경과 삭 사이에서 한나라를 압박할 때 한신은 위나라와 조나라를 저명하고 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하여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함으로써 항우를 멸망시켰다. <회음후 열전> 제 32를 지었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공과 낙 사이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한왕 신(信)은 한(漢)나라를 위해 영천을 평정하고 노관은 항우의 식량 보급로를 끊었다. <한신 노관 열전>제 33을 지었다.

  제후들이 항왕을 배반했지만 오직 제나라만이 성양에서 항우와 싸웠다. 한나라 군대가 그 틈을 타서 사잇길로 팽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담 열전>제 34를 지었다.

 성을 공격하고 들판에서 싸워 공을 세우고 돌아와 보고하는 데에는 번쾌와 역상이 유능하엿다. 채찍을 들어 병마를 지휘한 공이 있고 또 한나라 왕과 더불어 위기를 벗어난 적도 있었다.  <번 역 열전> 제 35를 지었다.


****사마천의 글쓰기

1)사마천은 사건을 조리있게 기록하거나 인물을 생동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감성적인 문체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단 <백이열전>만 읽어봐도 ‘원망’을 기본 축으로 삼고 층층이 맞물린 문단 구성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진하게 말하면서 종횡무진 필력을 휘두르는 사마천을 만날 수 있다. 사마천이 인물을 묘사하면 해당인물이 지면에 약동한다. 명나라 때 문학가 모곤(茅坤)은 아래와 같이 평가햇다.


“사람들이 <유협열전>을 읽으면 곧 죽음을 가볍게 여기려고 하고, <굴원가생열전>을 읽으면 곧 눈물이 쏟아지려 하고, <장자열전>, <노중련열전>을 읽으면 곧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려 하고, <이장군열전>을 읽으면 당장이라도 전투에 나서려 하고, <만석군열전>을 읽으면 허리가 절로 숙여지려 하고, <위공자열전>및 <평원군열전>을 읽으면 곧 식객을 양성하려고 한다.”

사마천의 필력을 짐작케 하는 글이다. <사기>의 인물처럼 행동하고 싶도록 사건을 절묘하게 기록하고 인물이 생동하도록 묘사햇다는 뜻이다.

2) 사마천은 전형적 인물을 만들어내는데 천재적이며 또한 그러한 전형적 인물을 통하여 사회의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생동적인 인물묘사나 사건모사만을 가지고 <사기>의 문학성을 논하는 것은 부족하다.

3)<사기>의 이야기가 흥미전진한 이유는 사마천의 글발이나 말발이 훌륭한 탓도 물론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전형적인 인물을 통하여 사회와 역사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에 독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훌륭한 역사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봐도 위대한 사실주의적 작가라고 할 수 있다.

4) <사기> 전체 내용의 절반 이상은 한나라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사기>가 비록 황제(黃帝)부터 한무제까지 약 3천년에 걸친 통사이긴 하지만 사마천은 당대사 위주로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대사 위주로 쓰려고 했던 것은 과거를 위하여 과거를 기록했던 것은 아니다. 현실에 유용한 극히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예로 들어가며 <사기>를 썼던 것이다.

5)사마천의 문장은 후세작가들이 모범으로 삼았으며 특히 문자에서 단연 최고봉이라 할 당송팔대가 -당나라 송나라때의 여덟 명의 대작가들이 바로 이 <사기>를 극력 추천햇다.

6),사기>는 후세 소설 창작에도 영향을 미쳐 당나라 때의 전기 작품은 그 형식이나 서술 방식에 잇어서 사마천의 인물묘사및 서사 방식을 대폭 참고한 흔적이 역력하다.

-사기. 중국을 이해하는 첫 번째 코드/이인호지음-


******김원중이 쓴 해제

사마천이 <사기>를 잘 쓸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어려서 집에서 공부하다가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에 와서 당시 경학 대사인 동중서와 공안국에게 고문을 배웠다. 20세 때 여행을 시작하여 중국전역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돌아온 후에는 낭중에 올랐다. 또다시 무제를 따라 순행하면서 거의 온 나라를 주유했다.

어디를 가든지 고적을 탐방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사마천이 낙양에서 아버지와 만낫을 때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고서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고 당부한 뒤 세상을 떠났다. 사마담  사후 3년이 지나 무제 원봉 3년에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어 무제를 시종하면서 천제에 제사지내는 봉선에 참여하기도 하고 역법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금궤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하면서 4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끝에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에 정식으로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14~15P)

사마천은 태사령으로 있으면서 궁궐에 소장된 모든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자료수집을 위하여 유적을 답사할 수 있었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을 취재할 기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게 무제 곁에서 절대 권력자의 영토확장 야욕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직접 눈으로 보앗다. 또한 무제를 수행하면서 각종 성대한 의전 장면이나 열병의식 및 수렵활동 등을 통해 당시의 시대 정신을 터득하기도 했다. (17P)

☆☆☆사마천 부자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잡아서 인류 역사의 고전을 남겼다. 낭중이나 태사령이라는 벼슬은 그다지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닌 그런 직위였지만, 부자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했다. 만약 월급이 적다고 불평하면서 일을 햇다면 이런 대작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자신에게 주어졋다면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자신이 노력하면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떤 것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사기열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사기>130편 가운데 인물 전기로 구성된 것이 112편인데, 이중에서 57편이 비극적인 인물의 이름으로 판명을 삼았다. 그리고 20여 편은 비극적인 인물로 표제를 삼지는 않았으나, 따져보면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나머지 70여편에도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편에서 비운의 인물이 등장한다. 격동의 시대를 약 120여명이라는 비운의 인물을 통해 그려 냈으니 결국 사마천에게는 ‘비극’이야말로 아닌 게 아니라 시대의 표정이었던 셈이다. (18~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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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09.03 04:30:09 *.85.249.18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문장들은 첨부하였습니다.

<사기열전>에 취하여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영양가 높은 음식을 폭풍 흡입한 탓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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