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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3일 10시 16분 등록

사마천을 이야기 할 때마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딛고''...이 문구를 난 기억한다.

그의 치욕스러움은 궁형에서 비롯된 한 맺힌 역사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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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을 보면 수염이 없는 치욕적인 사진이 대부분이다.

이는 궁형이라는 거세형을 당한 결과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I. 저자에 대하여

그의 일생

출생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등 여러 설이 있으나 기원전 145년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부터 2천140 여년 전이고 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 성은 사마(司馬)이고 이름은 천(遷)이다. 자는 자장(子長)이라 하며,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관직 태사령을 물려받아 태사령으로 복무하였으며 태사공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마천은 20세 때 관청에서 문서의 일을 맡아보는 낭중(郎中)이 되어 한 무제를 수행하게 된다. 기원 전 110년에는 무제의 태산 봉선(封禪)의식을 수행하여 장성 일대와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하였는데, 이 여행에서 견문을 크게 넓혀 훗날 '사기'를 저술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이 봉선의식을 수행하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사망하고 만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볼 때, 사실 사마천의 일생 전체가 사기의 저작을 위해 바쳐진 생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땀과 눈물과 한이 얼룩져 있는 생애의 농축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다음의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 탄생 후 저작 착수 이전까지의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을 닦기 위한 예비기

(2) 38세에 태사령이 되어 사기저술의 준비작업을 하고 이어 실제로 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에 이릉(李陵) 사건에 연루되어 남근거세형인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50세 경 출옥한 후 환관의 수장격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

 

태어난 곳은 하양(夏陽), 지금의 섬서성 한성현의 교외로, 보통 사마판 (司馬坂)이라 불리는 부근이다.(이 근처에 황하의 나루터로 유명한 용문(龍門)이 있어 등용문의 고사가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이 나루터 가까이에 용문산이 있고 그 아래 구릉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부친을 따라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살았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태사(太史:사관)였고 그의 부친 사마담도 학문에 조예가 깊었기에 사마천도 부친에게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가 열 살때 이미 고대문자로 된 경서를 암송할 수 있었고 좌전, 국어, 세본(世本)과 같은 역사문헌을 읽을 수 있었다.

 

선조가 태사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부친은 마침내 한무제 때 태사령에 임명되었다. 수도 장안에 이주한 사마천은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을 스승으로 하여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배웠고, 당시 금문의 대가인 동중서(董仲舒)로부터 공양춘추(公羊春秋)를 배울 기회를 가졌으며 여러 학자들한테도 배웠다.

 

스무 살 되던 해 사마천은 2년간 천하여행에 나섰다. 이 여행은 부친의 강력한 후원하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역사유적을 탐방하여 잊혀진 사람들을 찾고, 사람들을 만나 인정이나 풍속을 이해하는데 여정을 보냈는데 이는 뒷날 사기저술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의 실행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 자신의 여행기를 간략히 기록해 두었다.

스무 살이 되어 남쪽으로 강(江), 회(淮)를 두루 다녔고, 회계산(淮稽山)에 올라보고 우혈(禹穴)을 탐방하였으며......공자의 유풍(遺風)을 보았다..... 양(梁)과 초(楚)를 지나 돌아왔다.

 

 

이 장대한 역정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회음(淮陰)을 답사하여 [회음후열전]을 지었고, 설현(薛縣)에서 자료를 채집하여 [맹산군열전]을 썼으며,

주요인물들의 옛집을 방문하여 많은 일화를 들을 수가 있어 [번역등관열전]을 기록할 수 있었다.

 

장안으로 돌아온 지 얼마 뒤 사마천은 낭중(郎仲)에 임명되어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같은 직위의 동료인 이릉(李陵)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뒷날 사마천의 운명에 커다란 운명을 미친 인물이다.

 

나이 서른 무렵에 사마천은 황제를 수행하여 산천에 제사하고 전국 각지를 유람할 수 있은 기회가 또 한번 주어졌다.

이 여행으로 사마천은 무제가 실시한 대외정책의 실상의 일단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지방에 대한 견문은 뒷날 [화식열전]을 쓸 때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마천은 부친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의 거의 전 지역을 견문할 수 있었다. 한무제가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하던 중 부친이 병을 얻었다. 낙양으로 돌아 온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들었다.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거라. 태사가 되면 내가 저술하고자 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사마담은 자신이 태사령으로서 완수하고자 했던 사기의 저술을 자기를 대신해 끝마치도록 아들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무제 원봉 3년인 기원전 108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직을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37세가 되던 해였다.

사마천은 그 후 역법개정을 맡게 되었고 이 역법개정을 계기로 본격적인 사기저술에 착수하고 작업은 기원전 99년 [이릉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계속되었다.

 

 

사기의 저술은 기원전 104년, 사마천이 그의 나이 42세에 시작되었다.

 

뜻하지 않은 이릉사건으로 이릉을 변호한 것이 무제의 미움을 사 황제를 무고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 일곱살 이었다. 당시 사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돈 오십만냥으로 감형받는 것과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고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궁형을 자청하여 환관이 되었다. 부형(腐刑)이라 불리는 궁형은 사람이 당하는 모욕가운데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궁형을 받은 후 삼년 째 되던 해에 연호가 바뀌어(太始元年) 대사면령으로 옥중에서 석방된 사마천은 중서령에 임명되었고

사기의 집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발분하여 사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가 거의 완성될 무렵인 기원전 91년, 그의 나이 55세에 친구인 임안(任安)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착찹한 심정으로 서한(報任少卿書)을 보내 지난날 자신이 옥에 갇히고 사기를 저술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심경을 고백하였는데, 편지 내용중 有怨言, 下獄死라는 대목이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 처형당했는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다.

사기 완성후 몇 년더 살다가 딸을 출가시키고 나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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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 10:18:48 *.118.21.179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와 내가 저자라면은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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