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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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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3일 11시 02분 등록

나는 친절하지 않으련다.

 

며칠 째 말을 듣지 않는 노트북을 물끄러미 노려보고 있다. 이 요상한 물건은 제 주인의 조그만 불친절을 이유로 자신의 기능을 모두 닫아버린 상태다. 답답하다. 자신의 메모리에 내 추억을 한 움큼 쥐고 있기 때문에 확 바꿔버릴 수도 두드려 팰 수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사과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이다.

 

원인을 추측컨대 자기를 이용한 다음, 이별의 인사치레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인 듯 하다. 종료한다는 사전 예고 없이 굳바이 전원을 꺼버린 적이 있었고 (아마 내가 작업을 하다 딴짓하는 사이 평소 이 물건에 매우 관심을 보였던 아들 녀석이 굵고 큰 버튼을 몇 번 눌렀던 모양이다.) 그러기로 예의 없는 주인 앞에서  이렇게 시위 중인 것이다. 자신을 막 다루었다고 다리에 힘을 주고 꿈쩍하지 않는 모습이 나로선 매우 볼 성 사납다.

 

이유는 또 있다. 이 친구는 지난 10일간의 시칠리아 여행에서 캐리어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외부의 충격만 빈번했고 주인의 배려를 기대했겠지만 주인은 다시 쥐어박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더구나 이탈리아 땅에서 전원을 켜보는 영광을 얻지 못했고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한동안 습한 날씨에 책상 끄트머리에 방치되었었는데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다. 실소를 금치 못할 지경이지만 어이가 없는 중에도 이내 나는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이제는 나도 함부로 이 물건을 대할 수 없는 것이 이 利器가 담보하고 있는 내 추억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큰 걸 알지만 이건 너무 크다. 큰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을숙도에서 보낸 아내와의 즐거운 한때, 내 아이가 처음으로 세상을 볼 때, 기차길 옆에서 한가롭게 보낸 가을의 풍경, 겨울에 눈 싸움하며 즐거워하고 비료포대를 타고 미끄러지며 지었던 눈부신 웃음, 에베레스트 정상을 등정한 다음 날 떨어지던 캠프2의 석양이루 말할 수 없는 가족사와 내 추억이 그 놈(이쯤 되니 막말이 나온다)의 메모리를 빌려 쓰고 있었다. 근본없는 利器중에 하나일 뿐임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거 본이 아니게 문명에 적응 못하는 돈키호테류의 인간으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

 

경배했어야 했나. 그러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친절했어야 했나. 내 추억을 보관해 주니만큼 사람보다 더 받들었어야 했나. 그랬어야 했나. 애초에 대들지를 말았어야 했나. 원래 주종관계가 아니라 동반자의 관계였어야 했나. 이제 노트북조차 친절하지 못한 내 성격을 두고 바꾸라 종용하나. 나는 사과하지 않으련다. 너 없이 잘 살았다. 사진 없던 시절에도 인간은 잘 살았다. 너의 화려한 비주얼과 과학적인 혜택도 좋지만 너 없이 나 잘 살 수 있다. 아니 더 행복하게 살수 있다. 사진을 다시 못 본다는 건 뼈아프다. 어쩌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저장된 사진을 모두 날려버리고 나니 아쉬움도 크지만 이제 너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나는 충만하다. 내 생긴 대로 살 것이다.

 

조금은 불친절하고 무식하고 비도덕적으로 살더라도 그런 결핍이 나인 것을. 어디 나만 이런 결핍과 열등으로 무장되어 있다니? 그렇지도 않거니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자람과 아픈 구석 서너 개 안고 살아간다. 제 모습대로 살아가면 그 뿐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친구들이 돋보였던 건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도 사기를 지어냈다. 신이기는 하다만 헤파이스토스는 절름발이 추남이지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삼았다. 어디 사람에만 결핍이 있었을까. 그리스는 문명전체에 울리는 꼬르륵 소리 때문에 바다점령이 시작되었고 이는 제 문명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풍요롭게 한 추동력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는 척박한 땅은 모조리 자기내 차지였으나 천하의 비옥한 땅으로 모조리 취한 제일의 통일 왕국을 건설했다.

 

추억으로 남을 사진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니 이상하리만치 용감해진다. 모든 것을 버린 자의 근거 없는 광기, 이제는 다시 채울 일만 남았다는 알 수 없는 희망, 이제부터는 비로소 생긴 대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세상에 대한 자신감. 때를 맞추어 태사공이 쓴 史記列傳에는 이런 말이 있었는데 2 5백 년을 넘어와 내 심장에 강하게 내리 꽂힌다.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겠다.’

 

IP *.51.145.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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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 11:39:14 *.118.21.179

사마천은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사기를 지어낼 수 있는 발분을 얻은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재용아..

네 글은 마치 네가 글을 읽을 때 처럼 읽히는구나.

좀 어눌한 것 같지만 그 속에 있는 예리함으로 가끔 우리 가슴을 후벼파버리지...

 

때가 되면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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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 15:36:23 *.51.145.193

저도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사는 그 때가 올까요......?

만약 그때가 온다면...

빨레르모 막시모 광장에서 그윽했던 그 눈빛의 덕이 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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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09.04 10:52:58 *.85.249.182

먼저 사진파일을 몽땅 날려 버린 것에 대해

애도의 뜻을 전한다.

그것 어떤 느낌인지 알아.  머리속이 텅 비는 느낌!

나도 얼마나 전에 사용 중에 불꽃이 번쩍 일면서 외장하드가 안 나오는거야.

내 전세산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다 날라갓다 생각하고 슬퍼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어

다행히도 서비스센타에 가서 살려내기는 했어.

날아간 파일 복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어.

결핍, 풍요는 결핍으로부터 온다는 글 마음에 와 닿아.

사마천과 헤파이토스의 연결이 멋지다.

입체적으로 쓴 글 좋았어.

재용이의 생각도 항상 다면적이고 글도 다면적이라

읽는 사람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쥐. 때로는 아프게 말이야.

결핍을 결핍으로 생각지 않는 사람은 발전도 없는 것 같아.

결핍을 화두로 삼아 나를 공부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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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 17:45:35 *.51.145.193

제 결핍은 다른 사람의 것 보다 유난히 커보여 자격지심에서

여러 말을 쏟은 것 같습니다.ㅋㅋ

언제가 스승님이 '거울에 간 금'을 얘기 하셨는데 이 글을 쓰면서 아차 싶더군요.

거울에 간 금은 이어붙일 수는 있지만 흔적은 지울 수 없는데 제 결핍의 모습이

꼭 그 짝입니다.^^ 저도 좀 더 연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허리는 괜찮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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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 13:05:57 *.37.15.130

정말, 다 날아가버린거야? 어떻하니!!! 서류들이야 그렇다지만,

가족사진들은 어떻하니?

그러게, 이번 여행 때, 한 번이라도 꺼내서 시칠리아 밤 공기를

마시게 해줄걸 그랬다.  나도 공감하는 건, 전자제품도 주인의 기운을

계속 원하는 것 같아. 친해지지 않으면 내가 힘들때가 있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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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 17:49:03 *.51.145.193

그러게요 행님, 행님께서 글 쓰실 때 같이 일어나 썼어야 했는데...

모두가 제 게으른 버릇 탓입니다. ㅋㅋㅋ

그 친구와 나는 지금 서로 삐진 상태라 서로 대면대면 하고 있습니다.^^

기계랑 싸우는 속좁은 인간^^.

언젠가는 제가 사과해야 되겠지요?ㅋㅋㅋㅋ

행님, 보고시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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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 20:32:43 *.39.134.221

기계에게 삐쳐있는 인간을 처음보는 것은 아닌데

곁에서 보고 있으니 재밌기는 하다...ㅋㅋ

노트북을 지중해까지 가지고 가서 왜 한번도 안 꺼냈을까?

사실 나는 이것이 궁금해.

 

무생물에 감정이입이 가능한 사내이니...에베레스트도 가고 계곡타기도 할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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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09.05 00:19:24 *.85.249.182

무생물에 감정이입이 가능한 사내! 멋진 표현이다.

그런 사내와 우린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 무슨 행운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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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5 17:19:32 *.114.49.161

핸펀 주소록을 날리고, 노트북의 저장된 사진을 날리고...

뭔가 새롭게 시작되는, 판이 바꾸어지는 때????

수몰지에다 과거를 몽땅 두고 이주하는 이들처럼.

누군가의 댓글로 달아둔 재용의 글

 "누가 내 마음의 역린 좀 건드려 건드려 건드려"가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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