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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4일 09시 27분 등록

사기열전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민음사

 

1. 저자에 대해서

 

사마천 (기원전 145?~90년?)

 

 사마천.jpg

 

책의 왼쪽 날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자는 자장이며 섬서성 용문 출신으로 아버지 사마담은 한 무제 때 태사령이었다.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에 와서 동중서와 공안국에게 학문을 배웠다. 20세 때 여행을 시작하여 중국 전역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돌아온 후에는 낭중에 올랐다.

기원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그에게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108년 태사령이 되어 무제를 시종했으며 천제에 제사 드리는 봉선에 참여하고 역법을 개정했다. 부친의 유지를 받들고자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상금궤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했다. 기원전 104년 정식으로 사기 집필을 시작했다.

기원전 99년 이릉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사마천은 홀로 무제 앞에 나아가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옥에 갇힌 그에게 세 가지 형벌 중에 하나를 고를 권리가 주어졌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는 50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이었다.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어 했으나 귀족이 아니었던 그는 그런 거액을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기원전 93년 사마천은 마침내 다시 무제의 곁에 있게 되었다. 이때는 사기의 집필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저자 조사에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누르면서 읽었다. 엄선된, 짧고 쉽고 핵심적인 저자 소개다. 한 사람의 생애의 요약이다. 아마도 이것이 50페이지로 늘여쓴 개인사를 요약해서 1쪽 분량으로 쓰라는 9월 오프수업 과제의 예이리라.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버지도 태사령이었고, 대를 이어 태사령이었다는 것, 20대 초반에 중국 전역을 여행했다는 거, 그리고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20년 만에 완성을 해냈다는 거다. 대를 이어 충성한다는 것은 북한에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요즘 3대 군주는 청담동 며느리 복장의 젊은 퍼스트레이디를 대동하고 군을 시찰중이더라. 학교 교사들 중에서는 2대, 3대 교대에 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 저녁에 나는 부천의 장례식에 갈건데 거기 가면 부모님끼리 교대 동기거나 친구인 젊은 교사를 만날거다. 근데 태사령은 매해 달력을 새로 발행하고 천기를 보아 날을 잡는 직책이었다니 역사서 편찬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서다. 이건 좀 이상하다. 매일 새벽 2시 반에서 3시에 일어나 번역을 했다는 번역자가 해제에서 이것에 대해 써 둔 말이 있다.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저술에 임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한다. 태사령이란 본래 궁중의 예의 제도를 관장하고, 천문 역법에 따라 해가 끝나면 새 역법을 바치며,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길일과 기일을 가려 올리는 직책이다. 따지고 보면 이 직책은 역사 기록과 별반 관련이 없으므로 저술의 직접적인 동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마천은 태사령으로 있으면서 궁궐에 소장된 모든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자료 수집을 위해 유적을 답사할 수 있었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취재할 기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께 무제 곁에서 절대 권력자의 영토 확장 야욕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또한 무제를 수행하면서 각종 성대한 의전 장면이나 열병 의식 및 수렵 활동 등을 통홰서 당시의 시대 정신을 터득하기도 했다. (16p)

 

오호, 자신의 직접적인 업무가 아닌데 한 번 세운 뜻을 끝까지 이뤘다는 말이구나. 궁형이 치욕이라 함은 환관을 만드는 것처럼 강제 거세같은 형벌인가 짐작한다. 확인을 해 보니 역시 그러하다. 사형에 버금가는 극형이었겠지. 능지처참, 부관참시, 삼족을 멸한다, 예전에는 기발하고 잔인한 형벌이 많은 것 같다. 사기에는 반역자를 솥에 삶고 소금에 절인다, 시체를 꺼내서 500대를 쳤다는 말이 나온다. 모터사이클다이어리는 의대생 체 게바라가 친구랑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여행을 하다가 혁명가로 태어난 영화랬지. 기원전 중국 사람, 사마천은 말을 타고 여행을 했을라나?

 

 

저자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사기열전은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900페이지 가깝다. 나는 억지로 1권을 읽었다. 만화로 사기를 접한 이들은 나더러 만화를 읽으라 했다. 중국 고전을 다룬 만화가 많다면서. 그걸 먼저 읽고 나서 본 책을 읽으면 쉽다고들 했다. 황금색 책 뚜껑을 여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중에는 알게 되었다. 어라? 이거 그냥 이야기네. 사람 이야기, 전쟁 이야기. 그래도 누가 언제 무엇을 했고 어쩌고 저쩌고가 지루해질 때가 자주 왔다. 이 책을 쓴 이가 궁형을 당한 상태에서 단지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살아있었다는 얘기를 기억했다. 내가 책을 대하는 태도가 이래서야 하겠나 몸가짐을 조금은 바로 하게 되었다. 오래 가진 못했다. 20년 동안 쓴 책을 일주일에 읽는 게 당연히 무리스럽다. 나는 그가 무엇보다도 우선했던, 책을 써야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건 하늘로부터 받는 사명같은 것일까? 와신상담 고사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사람은 더 대단한 독종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돈받고 하는 일도 아니고, 꼭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사마담, 사마천 2대에 걸쳐 이루어진 일에 대해 존경한다. 

 

2. 내가 저자라면

 

1) 책의 목차와 뼈대에 대하여

 

이 책의 해제에서 옮긴이가 밝혀놓은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사기 130편은 상고 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때까지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여기에는 중국인들이 사이라고 불렀던 주변 이민족의 역사가 포함된다. 이 책은 중국 역사의 전범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섯 부분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더러는 유사한 내용이 겹치는 경우도 있다. 본기는 오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표는 각 시대의 연표로서 역사 발전의 다섯 단계를 나타낸다. 다섯 칸으로 나누어 각 편마다 서문이 있어 그 표에 다루어진 역사에 대한 논평을 간략하게 싣고 있다. 서는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천문학 등과 같은 전장 제도를 기록하고 있어서 한 편의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척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무관의 제왕인 공자와 왕을 칭한 지 6개월만에 만에 망한 진섭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1권 11쪽)

 

인용은 해 놓았지만 저 덩어리를 읽어보고 싶진 않다. 나도 고개짓 설레설레 하고 있는 처지에 누구더러 읽어달라 할 수 없다. 눈의 초점이 흐려지는 것 같고 물 없이 식은 백설기 한 덩어리 우걱우걱 삼키는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막막하다. 이럴 때 우리 할머니는 “야야, 맥힌다. 물 먹어라” 하면서 냉수 사발을 내미셨는데. 한나라 무제 때 사람이라는 사마천. 휴 한숨나네. 이렇게 말한다고 내가 이게 언제쯤인지 가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 대한 상식인지 뭔지 하은주 춘추전국(연한위조제촉오),진수당송원명청 이게 불쑥 생각이 나긴 한다. 뜻도 모르면서 디립다 외운 중국 역대 왕조 이름인가? 장국영이 눈화장 짙은 여인네로 나왔던 영화 패왕별희가 유방과 항우 시절이 배경이랬는데, 탕왕, 걸왕은 또 언제 사람이고, 두 사람 중 누가 짐승 대가리를 가진 반인반수 왕이지? 공자 맹자, 순자, 묵자...자자 돌림 사상가들은 또 언제 사람이더냐?

 

이번에 읽은 사기열전1은 본기, 표, 서, 세가, 열전 중 열전 70편 중 절반 35편이다. 몇 주 후에 연구원 커리큘럼에 사기열전2를 읽을 예정이 있다. 글을 읽어보면 이 글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누구의 고향은 어디고 자는 뭐다.” 자를 밝혀놓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 다음에는 그의 이야기,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가 쓴 편지나 상소문이 길게 인용될 때도 있다. 나는 나라 이름들에서 헤깔리고 있고, 2000년도 더 전에 중국 대륙에 있던 나라가 어떤 연유로 싸웠느니 잃었느니가 현재의 나와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상세한 줄거리에 관심이 안간다. 솔직히 그들이 저 나라를 치자거나 이런저런 계책을 쓰자는 주장을 할 때의 논리적 주장에서는 관심을 잃고 초점이 원거리로 쑥 이동했다가 따옴표 많은 ‘이야기’가 등장하면 다시 근거리 접근하곤 했다. 하지만 대충만 보더라도 사기열전이 맨 마지막에는 “태사공은 이렇게 말했다”로 마무리가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처음엔 태사공이 권위있는 사학자인 줄 알았다. 나중에는 짐작했다. 태사공이 바로 사마천이라는 것을.

 

‘태사공 가라사대’로 엔터키를 치면서 사기열전을 읽다보니 사마천이 어떤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는지가 궁금해진다. 나는 혼자 잠잠히 추측해본다. 그는 기둥이나 병풍 뒤에 숨어서 왕,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지에 받아 적는 사관이 아니었다. 그는 천문을 연구해서 기미를 알고, 매년 달력을 만들고, 길일과 기일을 정하는 태사관이었다. 새로 지은 궁궐 전각의 입택 날짜를 받고, 왕자 아기씨를 갖기 위한 합방 날짜를 받으러 온 환관, 나인들과 의논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합방날짜 장면은 드라마를 너무 본 탓이다. 역사 서술은 그의 직업이 아니었다. 사기의 저술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또 중간에 무제의 정책에 반대해 직언을 했다고 해서 궁형을 받았다. 궁형이 아니라 죽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의 관점은 이미 한 번 죽은 자의 것과 다름이 없었을 거다. 그러고도 살아남은 그는 다른 경우보다 왕, 황제의 권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거다. 오랜 동안 정통파라는 사학자들에게 외면을 당하다가 지금은 동아시아 전체의 고전이 되었다. 그의 책에 그 당시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이리라. 정말 어떤 지는 자료를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2) 장점과 보완점

 

첫째 장점은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거다. 상대적으로 권력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집필되었기 때문이리라. 둘째, 이건 출판사의 배려겠지만 옮긴이의 해제, 장별 해제,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안내가 일목요연하다. 역자의 해제와 장별 해제는 매우 충실하다. 내용은 어렵게 느껴졌다.  

 

보완점으로는 이 책이 어렵게 느껴지는 걸 무마하기 위한 것들이 좀 더 포함되면 어떨까 한다. 안 그래도 고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진입장벽이 낮지 않았다. 막상 읽어보니 이야기인 줄은 알겠다. 우리 팀의 다른 분들은 역자의 북콘서트에 참여하고, 만화책으로 읽는 등 자체적으로 징검다리들을 놓았다. 이런 시도들을 교사인 내 입장에서 보면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독서교육이 되어 있어서 보급형 쉬운 책부터,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들을 점진적으로 읽도록 안내되면 좋을 것 같다. 납작한 밀가루 덩어리가 아니라 버터와 계란, 이스트를 넣고 몇 차례 발효시간을 가져서 여러 겹을 가진 페스츄리를 만들 듯 읽어가면 좋을 것 같다. 이건 누가 보완해야할까? 이 꼭지는 ‘내가 저자라면’ 인데 이건 ‘내가 효율적인 독자가 되려면’ 정도의 제목이면 좋을 듯 하다.

 

3) 감동적인 장절

 

① 자객 섭정의 이야기

 

자신을 알아보는 이에게 목숨을 바친 자객이다. 자객은 누군가를 찔러 죽이는 일이다. 그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건 어머니와 누이를 지키기 위해 백정일을 하면서 부양했다는 거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길 기다려서 자기를 알아보는 이에게 갔고, 혹시나 시집간 누이에게 자신의 행적이 걸림돌이 될까봐 얼굴 가죽을 제 손으로 벗기고 두 눈알을 파서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맨 처음에 보면 섭정이 누군가를 죽이고 숨어사는 처지였다고 나온다. 백정이라는 직업이 천한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왔는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고기를 먹으면서 살아야 하면 짐승을 죽여 먹거리로 장만하는 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청소하는 이도 반드시 필요하고 장례를 치르는 이도 반드시 필요하다. 필요한 일인데도 천하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가지고, 자신이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이들을 끝까지 지켜내는 일은 아름답다. 그렇다고 내가 자객일 자체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킬러는 그래도 좀 멋져보이는건 사실이다. 이것도 드라마와 영화의 영향이다. 연쇄살인범이나 몸 좋고 손 기술 좋은 킬러나 사람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긴 하다.

 

26 자객 열전

 

633 섭정은 지 땅의 심정 마을 사람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제나라로 달아나서 가축 잡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635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섭정의 어머니가 죽었다. 섭정은 장례를 마치고 상복을 벗은 뒤 말했다.

“아, 나는 시장 바닥에서 칼을 들고 짐승을 잡는 백정일 뿐인데 엄중자는 제후의 대신이요, 재상 신분으로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수레를 몰고 찾아와 나와 사귀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내 대우는 너무 했다. 엄중자는 황금 2000냥을 주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수를 축원해 주었다. 내 비록 그 돈은 받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나를 특별히 깊이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어진 사람이 격분하여 원수를 쏘아보면서 나같은 시골뜨기를 가까이하고 믿어주었으니 내 어찌 가만히 있을소나. 또 전날 그가 나를 필요로 하였으나 나는늙은 어머니가 계시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이제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나는 앞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일하리라.”

636 섭정은 칼을 차고 한나라에 이르렀다. 한나라 재상 협루는 마침 관청 당상에 앉아 있었는데 무기를 들고 호위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섭정이 곧장 들어가 계단을 뛰어올라 협루를 찔러 죽이니 주위에 있던 부하들은 크게 혼란스러웠다. 섭정이 고함을 지르며 쳐죽인 사람만 수십 명이 되었다. 그런 뒤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죽었다. 한나라에서는 섭정의 시체를 거두어 시장 바닥에 드러내 놓고 그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637 시장을 오가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였다.

“이 자는 우리 나라의 재상을 죽였기 때문에 왕께서 그 이름과 성을 알려고 1000금을 걸었소. 부인은 이 말을 듣지 못했소? 어찌 일부러 와서 이 자를 안다고 하시오?”

그러자 섭영이 말했다.

“그 말은 들었습니다. 섭정이 오욕을 무릅쓰고 시장 바닥에 몸을 던진 것은 늙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제가 시집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게서 천수를 누리다 돌아가시고 저도 이젠 시집을 갔습니다. 일찍이 엄중자는 동생의 인물됨을 살펴 알고는 곤궁하고 천한 지위에 있는 그와 사귀었으니 그 은택이 매우 두텁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선비는 본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합니다. 섭정은 제가 살아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훼손시켜 이 일에 연루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어찌 제게 닥칠 죽음이 두려워 동생의 장한이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이윽고 하늘을 우러러 큰 소리로 세 번 외치더니 몹시 슬퍼하다가 마침내 섭정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진, 초, 위 나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모두 이렇게 말했다.

“섭정만 위대한 게 아니라 그 누이도 장한 여인이다. 섭정의 누이가 참고 견디는 성격이 아니라 시신이 버려지고 해골이 드러나는 고통을 두려워않고 천리 험한 길을 달려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남매가 함께 한나라 시장 바닥에서 죽음을 맞을 줄 섭정이 미리 알았더라면 감히 엄중자에게 자신을 바치지는 않았으리라. 엄중자도 인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용감한 선비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② 빈객을 거느린 공자들의 이야기

 

맹상군, 신릉군, 신원군, 평원군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각기 나라가 다르다. 이건 좀 독특한 풍속이었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가족이 아닌데 빈객을 상, 중, 하로 나누어 3000명까지 먹여 살리면서 그들에게서 정보와 문화적인 잠재력을 이끌어 냈다. 이건 이를테면 씽크탱크같은 역할이었던 것 같다. 흥미로왔다. 요즘은 이것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박사학위를 가진 우수 인력들이 포진된 연구집단?

 

맹상군은 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5월 5일에 태어났다가 아버지가 이 아이를 키우지 말라고 어머니한테 말했다. 장성해서 아버지와 담판을 뜬다.

 

15. 맹상군 열전

381 하루는 맹상군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참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불빛을 가린 탓에 방안이 어두웠다. 손님은 자신의 음식이 맹상군의 것과 다른 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어둡게 한 줄 알고 기분이 상해서 식사를 하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 맹상군이 일어서서 몸소 자신의 밥그릇을 손님의 것과 비교해 보이자 손님은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일 때문에 선비들이 맹상군에게 많이 모여들었다. 맹상군이 손님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잘 대우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맹상군과 친하다고 생각했다.

 

386 맹상군이 제나라 재상일 때, 그의 가신 위자가 맹상군 대신 봉읍의 조세를 거두었다. 위자는 한 해 동안 세 차례나 오고 갔지만 그 해의 조세 수입을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다. 맹상군이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진 사람이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그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맹상군은 화가 나서 위자를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어떤 사람이 제나라 민왕에게 맹상군을 이렇게 헐뜯었다.

“맹상군이 반란을일으키려 합니다.”

마침 전갑이 민왕을 위협하자 민왕은 속으로 맹상군을 의심했다. 이를 안 맹상군은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전에 위자에게 조세를 빌린 어진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민왕에게 글을 올렸다.

“맹상군은 반란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몸을 바쳐 맹세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궁궐 문 앞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맹상군이 결백함을 밝히려 하였다. 민왕이 깜짝 놀라 맹상군의 행적을 조사해보니 정말로 맹상군은 반란을 꾀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민왕이 다시 맹상군을 불렀지만 맹상군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설 땅에서 조용히 살고자 하였다. 민왕은 이를 허락했다.

 

노중련은 평원군의 빈객이었다. 그가 보낸 편지도 멋있는데 나는 그 편지 내용은 골치 지끈거려서 대충 보느라 논리는 기억못한다. 그의 삶의 태도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23. 노중련, 추양 열전

571 연나라 장군은 노중련의 편지를 읽고서 사흘 동안 흐느껴 울며 망설이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가자니 연나라 왕과 틈이 생겨 죽을까봐 두렵고 제나라에 항복하자니 제나라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기 때문에 항복한 뒤에 치욕을 당할까 두려웠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제나라 왕에게 노중련의 공적을 말하고 그에게 벼슬을 주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노중련은 달아나 어느 바닷가에 숨어 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어 사느니 차라리 가난할망정 세상을 가볍게 내 맘대로 살리라.”

579 노중련은 지향하는 뜻이 대의에 맞지는 않았지만 벼슬도 지위도 없는 처지에서 자신의 뜻을 거리낌없이 말하고 실천하며 제후들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으며, 당대에 자신의 언변을 떨치며 대신들의 권력을 꺾은 점이 훌륭하다. 추양은 말하는 태도가 공손하지는 않았지만 사물을 비유해가며 그 실례를 하나하나 든 점에서 비장함이 있었고, 또 절개를 굽히지 않고 강직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이 열전에 덧붙였다.

 

③ 고통과 치욕의 순간을 견디며 자기만의 업적을 이루어 간 사람들

 

사마천 본인, 중상모략을 당한 후 매를 맞아 갈비뼈와 이가 빠진 채로 멍석에 말려 변소에 버려진 범저, 그런데 빈객들이 그의 몸 위에 오줌을 누는 치욕을 겪은 후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재상이 되었다. 그러고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솜옷을 내어준 정리를 생각해 보복을 참는다.

 

19. 범저, 채택 열전

465 위나라로 돌아온 뒤 수고는 마음 속으로 범저에게 노여움을 품고 범저가 제나라로부터 선물을 받은 일을 위나라 재상에게 말했다. 위나라 재상이라 함은 위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위제이다. 위제는 매우 화를 내면서 사인을 시켜 범저를 매질하게 했다. 범저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가 빠졌다. 범저가 죽은 척하자 나무 발에 둘둘 말아서 변소에 내버려 두었다. 빈객들이 술을 마시다 취하여 벌갈아 가면 그의 몸에 오줌을 누었다. 이는 일부러 그를 모욕하여 나중에 함부로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는 자가 없도록 경계하려고 한 것이다.

 

483 “지금 범숙은 무슨 일을 하고 있소?”

“남의 집에서 날품을 팔고 있습니다.“

수고는 마음속으로 불쌍히 여겨 범저를 자리에 앉혀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범숙이 결국 이렇게 딱한 신세가 되었단 말이오.”

그러고는 자기의 두꺼운 명주 솜옷 한 벌을 내주고...

“네 죄가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수고가 대답했다.

“제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속죄해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지금 내 조상의 묘는 위나라에 있어 위나라를 배반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너는 예전에 내가 제나라와 내통한다고 여겨 나를 위제에게 모함했으니 이것이 네 첫 번째 죄이다. 위제가 나를 욕보이기 위해 변소에 두었을 때 너는 그것을 말리지 않아쓰니 이것이 네 두 번째 죄이다. 위제의 빈객들이 취하여 번걸아 가면 내게 오줌을 누었으나 너는 모르는 척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이다. 그러나 오늘 네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두터운 명주 솜옷을 주면서 옛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를 용서한다.”

 

굴원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글을 남기고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그의 글보다 이 말이 좋았다. 이 말에도 사마천의 입김이 들어있다.

 

24. 굴원, 가생 열전

586 이소란 걱정스러운 일을 만난다.라는 뜻이다.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자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이가 없다.

 

④ 한비자가 말한 유세가의 자세 중 용의 역린 이야기

 

직장에서 Boss를 대할 때, 그리고 다른 이들의 약점을 건드리지 않아야 할 때 유념해야 한다. 나는 곧이곧대로 말하는 면이 있어서 어떨 때 상대의 폭풍 분노를 겪을 때가 있다.

 

85.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한비는 세난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86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높은 이름을 원할 때 높은 이름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87

 

유세자가 아직 군주에게 두터운 신임과 은혜도 입지 않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버리면 설령 그 주장을 실행하여 공을 세우더라도 군주는 그 덕을 잊을 것이며, 그 주장을 실행하지 않아 실패하게 되면 군주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다. 87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읻. 상대방이 자신의 계책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지나간 잘못을 꼬집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된다. 자신의 결정을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워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더라도 그 일의 어려움을 들어 가로막아 서는 안된다. 88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1

 

⑤ 순리대로 일을 풀어가는 지혜로운 말들

 

조괄의 어머니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과는 다르게 아들을 아들로서 본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과 무조건적인 모성과 어떤 게 어머니의 역할일까 궁금하기는 하나 나는 이 어머니의 태도가 생각할 꺼리를 많이 준다. 나의 마음이나 생각을 경작하기 시작하는 이런 풍부한 이야기가 좋다. 보습을 맨 황소처럼 내 마음밭을 마구 갈아댄다. 답은 나중에 나오겠지만 이런 질문을 주는 이야기가 좋다. 정답이 있기 보담은 나에게는 정답인 것을 생각하는 과정이 나를 아름답게 만든다.

 

539 조괄의 어머니가 왕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제 아들을 장군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욍이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조괄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전에 제가 조괄의 아버지를 모실 때 그 무렵 제 아들의 아버지는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여 살리는 이가 수십 명이고, 벗이 된 사람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이나 종싫에서 상으로 내려준 물품은 모두 군대의 벼슬아치나 사대부에게 주고, 출전 명령을 받으면 그날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들은 하루 아침에 장군이 되어 동쪽을 향해 앉아서 부하들의 인사를 받게 되었지만 군대의 벼슬아치 가운데 누구 하나 제 아들을 존경하여 우러러보는 이가 없습니다. 왕께서 내려 주신 돈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자기 집에 감추어 두고 날마다 이익이 될 만한 땅이나 집을 둘러보았다가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어찌 그 아버지와 같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릅니다. 부디 왕께서는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왕께서 굳이 그 아이를 보내시려거든 그 아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저를 그 아이의 죄에 연루시켜 벌을 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왕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인상여는 염파에게서 세 치 혀로 이루어낸 일들에 대해 모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염파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인상여가 지혜롭고, 품이 크다.

 

21. 염파, 인상여 열전

533 상여가 말했다.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강한 진나가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랄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 때문이오. “

염파는 이 말을 듣고 웃옷을 벗고 가시 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빈객으로서 인상여의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했다.

“비천한 저는 상경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고 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벗이 되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입은 은혜라는 말

 

17. 위공자 열전

436 빈객 중 한 사람이 공자에게 말했다.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또 위나라 왕의 명령이라 속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것은 조나라 입장에서는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충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스스로 교만해져 공로가 있다고 하시니, 이는 공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관포지교란 숙어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포숙의 마음의 넓이를 알게 하는 구절이 있다. 이런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2. 관, 안 열전

71 관중은 곤궁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그를 잘 대해 주고 속인 일을 따지지 않았다.

71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쫒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나와 함께 규를 도운) 소흘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런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그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포숙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의 봉록을 받으며 봉읍지를 십여 대 동안 가졌으며 늘 이름 있는 대부의 집안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하였다.

 

손자의 용병술을 짐작하게 하는 면.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물렁해서는 안되고 원칙에는 철저해야 그 원칙에 힘이 실리는구나 생각했다. 손자병법에서 생각나는 것은 36계 줄행랑, 내가 대적하지 못하는 적에게서는 도망가는 것도 훌륭한 병법이라는 것이었지.

 

5. 손자, 오기 열전

108 군령을 따르지 않는 병사에게는 죽음뿐이다.

“군령이 분명하지 않고 명령에 숙달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죄이다.”

그러고는 다시 여러 차례 군령을 되풀이하고 북을 쳐 왼쪽으로 행진하도록 했지만 궁녀들은 역시 깔깔댈 뿐이었다. 손무는 말했다.

“약속이 분명하지 않고 명령에 숙달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죄이지만 군령이 이이 정확해졌는데도 군법에 따르지 않는 것은 사졸들의 죄이다.”

손무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좌우 대장의 목을 베려고 했다. 누대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나라 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들의 목을 베려는 것을 보고는 놀라 급히 사람을 보내 명을 내려 말했다.

“과인은 이미 장군이 용병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쏘. 과인은 이 두 후궁이 없으면 밥을 먹어도 단맛을 모르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그러자 손무는 말했다.

“저는 이미 왕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가 군에 있을 대에는 왕명이라도 받질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무는 결국 두 대장의 목을 베어 군대 안에 돌려 보냈다. 그러고는 그들 다음으로 왕의 총애를 맏는 후궁을 대장으로 삼고 다시 북을 쳤다. 궁녀들은 모두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앞으로, 뒤로, 꿇어앉기, 일어서기 등을 자로 잰 듯 먹줄을 긋듯 정확하게 하며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손무는 전령을 보내 오나라 왕에게 말했다.

“군대는 이미 잘 갖추어졌습니다. 왕께서는 시험삼아 내려오셔서 보십시오. 왕께서 그들을 쓰고자 하신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것입니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도 스승의 말을 듣고 새겨서 행동을 하는 게 중요하구나. 공자의 제자 이야기 중에서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스스로 자신을 촛불처럼 밝혀 들어 빛과 온기를 내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사랑과 인정을 구걸하는 나는 참고할 만한 게 많았다.

 

7. 중니제자열전

150 덕행은 훌륭하나 몹쓸 병에 걸린 역경

염겸은 자가 백우이다. 공자는 그의 덕행을 칭찬했다. 백우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 공자는 문병을 갔다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으며 탄식했다.

“하늘의 운명이구나. 이 사람이 이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 운명이구나.”

 

171 많이 듣고 삼가면 실수가 적다.

전손사는 진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장이며 공자보다 마흔여덟 살 아래다. 자장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많이 듣고 그 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 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훗날 자장이 공자를 따라다니다가 진나라와 채 나라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세상에서 행세할 수 있는 도리를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말이 참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스럽다면 오랑캐 땅에서도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참되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며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않다면 비록 자기 고향일지라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서 있을 때에는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고, 수레에 탔을 때에는 그것이 수레의 가로 막대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장을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자기 허리띠에 적어두었다.

 

183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번수는 자가 자지이며 공자보다 서른여섯 살 아랫니다. 번수가 곡물 심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늙은 농사꾼만 못하다.”

채소 심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채소를 심는 늙은이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번지는 소인이구나.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만 한다면 사방의 백성이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올텐데 농사짓는 법을 배워 어디에 쓰겠는가?”

번지가 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아들이 살인을 했다는데도 자식을 믿어주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요즘 나주 사건의 가해자 가족에 대해 지나치게 보호가 되지 않는 걸 살펴본다. 저렇게 믿어주는 가족, 또는 관계가 있었다면 그가 그리 되지는 않았을 거다.

 

11. 저리자, 감무열전

아들이 살인했다는 말을 듣고 북을 내던진 어머니

314 옛날 효자로 유명한 증삼이 비읍에 있을 때 일입니다. 노나라 사람 가운데 증삼과 이름과 성이 똑같은 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했지만 그 어머니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조금 뒤 또 한 사람이 와서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했지만 그 어머니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조금 뒤 또 한 사람이 와서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했지만 역시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그러나 조금 뒤 또다시 한 사람이 와서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자 그 어머니는 베 짜던 북을 내던지고는 베틀에서 내려와 담을 넘어 달아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어진 증삼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세 사람이나 그를 의심하자 정말인가 싶어 겁을 먹었습니다. 지금 신은 증삼처럼 어질지 못하고 왕께서 신을 믿는 마음도 증삼의 어머니가 아들을 믿는 마음만 못합니다. 또한 신을 의심하는 자가 어디 세 사람뿐이겠습니까? 신은 왕께서 북을 내던진 증삼의 어민처럼 신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321 저는 진나라에서 죄를 짓고 처벌될까 두려워서 도망쳐 나왔지만 몸을 안전하게 둘 만한 곳이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못사는 여자와 잘사는 여자가 함께 길쌈을 하였는데 못사는 여자가 ‘나는 초를 살 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당신의 촛불에는 남는 빛이 있으니 그 남는 빛을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당신의 밝음에 해를 끼치지 않고 나도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저는 곤궁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바야흐로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 아내와 자식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남은 빛으로 그들을 구제해 주십시오.

 

323 감무의 스승인 사거는 하채의 문지기로 크게는 임금을 섬기지 못하고 작게는 가정도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럭저럭 되는대로 사는 미천한 신분이면서 청렴하지 않은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감무는 그런 인물을 묵묵히 따르고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혜왕, 명철한 무왕, 변론에 뛰어난 자의까지도 잘 섬기고 여러 관직을 맡으면서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감무는 참으로 현명한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감무를 진나라 재상으로 추천해서는 안됩니다. 진나라에 현명한 재상이 있으면 초나라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⑥ 때를 알아 기회를 잡는 이들을 보며 때, 또는 놓일 곳을 분별하는 지혜를 생각하다.

 

천리마 꼬리에 묻어갔다고는 하지만 나는 시대의 대격변기를 알아보고 활용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읽고 있으면 과연 나는 지금 어떤 흐름 속에 있는 지 궁금해진다.

 

811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한나라에 대한 공훈은 주공, 소공, 태공망 등에 비할 수 있고,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반역을 꾀했으니 온 집안이 멸망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35. 번, 역, 등, 관 열전

855 노략질을 일삼던 역상

858 위증죄에 연루되어 옥살이한 하후영

862 비단을 팔던 관영

864 신들은 본래 진나라 백성이므로 군사들이 저희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 곁에 있는 이 중에서 기마를 잘 아는 사람을 뽑아 임명하시고, 신들이 그분을 돕도록 해 주십시오.

869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풍현과 패현으로 가서 진나라 때부터 살아온 그곳 노인들을 찾아 소하, 조참, 번쾌, 등공의 옛집과 그들의 평소 사람됨을 물어보았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과는 달랐다. 그들이 칼을 휘두르고 개를 잡고 비단을 팔 때, 어찌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가듯이 한 나라 고조를 만나 한나라 조정에 이름을 날리고 자손들에게까지 은덕을 내리게 될 줄 알았겠는가? 나는 번타광과 교분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고조의 공신들이 처음 일어날 때 상황을 이와 같이 들려 주었다.

 

3.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역자 서문


5. 세계인의 고전 사기는 사마천이 사관인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에 따르고자 궁형의 치욕을 딛고 저술한 통사체 역사서로서 전설의 황제시대로부터 한 무제 때까지 2000년을 아우르고 있다. 사기 중에서도 열전 70권은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 칠웅(진, 한, 위, 제, 초, 연, 조)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6. 예나 지금이나 전쟁만큼 큰 죄악은 없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에는 전쟁이 필요악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는 구 누구도 먼저 평화를 주창할 수 없었다. 모두들 강한 군대를 양성해 부국강병을 꾀하는데 골몰했다. 법가인 상군은 진나라의 효공을 도와 변법을 성공적으로 단행하고 부국강병을 주창하면서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없애는 이전거전의 이론을 제시했다. 이에 맞서 초나라와 위나라는 현장을 중시한 용병가 오기를 등용했고, 제나라는 사마 양저와 손빈 등을 등용하여 세력확장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들과 반대편에 선 자들도 있었다. 왕도 정치를 주장한 맹자를 비롯하여 유가로 대변되는 공자의 제자들은 전쟁을 중단하고 성현의 말씀에 귀 기울이자는 주장을 폈다. 묵자는 전쟁대비용 성을 구축하여 전비를 절감하자고 외친 평화주의자였다. 한 술 더 떠서 도가 일파는 전쟁을 반대하고 무위자연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에는 시대가 각박했고, 혼돈에 차 있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펴는 두 진영이 말이나 글을 통해 다투는 흥미진진한 광경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다.


해제


11. 사기 130편은 상고 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때까지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여기에는 중국인들이 사이라고 불렀던 주변 이민족의 역사가 포함된다. 이 책은 중국 역사의 전범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섯 부분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더러는 유사한 내용이 겹치는 경우도 있다.

본기는 오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표는 각 시대의 연표로서 역사 발전의 다섯 단계를 나타낸다. 다섯 칸으로 나누어 각 편마다 서문이 있어 그 표에 다루어진 역사에 대한 논평을 간략하게 싣고 있다. 서는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천문학 등과 같은 전장 제도를 기록하고 있어서 한 편의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척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무관의 제왕인 공자와 왕을 칭한 지 6개월만에 만에 망한 진섭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13. 사기 이전의 중국의 역사서는 매년 매달 매일의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으니 춘추나 서경 등 거의 모든 역사서가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13. 중국 고대 역사서의 세 가지 편찬 체제인 편년체, 기사본말체, 기전체 가운데 기전체의 효시가 사기이다. 기전체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먼저 시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행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서술하고 제왕이나 제후를 보좌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마천은 자신이 기술하고자 하는 시대의 사회 구조와 그 내부의 발전상, 인물과 사건 및 제도 등 그 사회가 가진 제반 현실에 역사적 해석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통사를 쓰면서도 자신의 시대인 한 대를 다루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료 해석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의 발전적 흐름과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 주었기에, 이 책이 오늘날까지도 지혜로운 삶의 지침서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이다.


16.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전서의 서문 격으로 사기 열전의 맨 마지막에 둔 태사공 자서에 마련되어 있는데 정리하면 이러하다. 첫째, 발분의식의 소산이다. 궁형을 당한 것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구차한 행위가 아니라 글을 지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백이열전에서 천도시비의 질문을 제시한 것은 백이와 숙제의 입장이 마치 자신과 비슷하다는 데서 오는 동류의식을 반영한다. 또는 치욕을 견디고 세인들에게 이름을 떨친 관중이나 오자서, 경포 등에게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여 그들의 전기를 따로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둘째, 역사적 사실의 포폄과 직서이다. 이는 그의 태사공 자서에서도 드러나지만 공자가 춘추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고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여 미언대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춘추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사마천의 생각은 부친 사마담의 견해와 일치되는 것이며,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난 당시에 공자의 사상을 누군가가 계승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비롯되었다.

이 밖에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자격으로 저술에 임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한다. 태사령이란 본래 궁중의 예의 제도를 관장하고, 천문 역법에 따라 해가 끝나면 새 역법을 바치며,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길일과 기일을 가려 올리는 직책이다. 따지고 보면 이 직책은 역사 기록과 별반 관련이 없으므로 저술의 직접적인 동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마천은 태사령으로 있으면서 궁궐에 소장된 모든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자료 수집을 위해 유적을 답사할 수 있었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취재할 기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아버지와 함께 무제 곁에서 절대 권력자의 영토 확장 야욕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또한 무제를 수행하면서 각종 성대한 의전 장면이나 열병 의식 및 수렵 활동 등을 통홰서 당시의 시대 정신을 터득하기도 했다.


21. 사기 열전의 독특한 인물의 선택, 서술 방식은 역사는 결코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24.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25. 사기는 세상에 나오고도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소외된 채 몇 세기를 보내야 했다.


27 사마천의 기술방식이나 자료 선정 방법 등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볼 때, 정말 이 정도로 완벽한 체제를 갖춘 역사서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게 된다. 요컨대 개인적으로 기록한 역사 사기가 후대에 24사의 필두로 거론하게 된 것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까지 이르는 유일한 통사체 역사서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일차적인 이유이다. 도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의 정확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절대 군주 위주로 재편되는 엄혹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성찰 즉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태도가 다른 역사서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사기가 문학서로서의 색채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 백이열전


64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는 제가 일흔 명 중에서 안연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날로 먹었다. 잔인한 잣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는 도대체 그의 어떠한 덕행에 의한 것인가? 이런한 것들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다.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데 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66 백이와 숙제는 비록 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 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2. 관, 안 열전


71 관중은 곤궁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그를 잘 대해 주고 속인 일을 따지지 않았다.


71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쫒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나와 함께 규를 도운) 소흘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런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그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포숙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의 봉록을 받으며 봉읍지를 십여 대 동안 가졌으며 늘 이름 있는 대부의 집안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하였다.


73 관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된다. 임금이 법도를 실천하면 육친이 굳게 결속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강령, 즉 예의, 정의, 깨긋함, 부끄러움이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망한다. 수원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73 관중은 정치를 하며서 재앙이 될 수 있는 일도 복이 되게 하고, 실패할 일도 돌이켜 성공으로 이끌었다.


74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

안영은 제나라 재상이 된 두에는 밥상에 고기 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못하게 하고 첩에게는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또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이 물으면 바르고 신중하게 대답하고, 묻지 않을 때에는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였다. 임금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그 명령을 따르지만 올바르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3. 노자, 한비 열전


81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나는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노자는 도와 덕을 알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데 힘썼다.


83 노자는 하지 않은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했다.


84 관리가 되느니 더러운 시궁창에서 놀리라.

초나라 위왕은 장주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왕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이지요. 그대는 어찌 교제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오?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어.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리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85.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말라


군주는 나라라 평안할 때에는 이름 있는 유학자를 아끼고, 위급할 때에는 갑옷 입고 투구 슨 무사를 등용한다. 86


한비는 세난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86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높은 이름을 원할 때 높은 이름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87


유세자가 아직 군주에게 두터운 신임과 은혜도 입지 않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버리면 설령 그 주장을 실행하여 공을 세우더라도 군주는 그 덕을 잊을 것이며, 그 주장을 실행하지 않아 실패하게 되면 군주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다. 87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읻. 상대방이 자신의 계책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지나간 잘못을 꼬집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된다. 자신의 결정을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워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더라도 그 일의 어려움을 들어 가로막아 서는 안된다.  88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 용이라는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으나, 그 목덜미 아래에 거꾸로 난 한자 길이의 비늘이 있어 이것을 건드린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1



4. 사마, 양저 열전


99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내일 정오에 군문에서 만납시다.”

이튿날 양저는 수레를 빨리 달려 먼저 군영으로 가서 해시계와 물시계를 마련해 놓고 장고를 기다렸다. 원래 장고는 교만한 사람으로 장군이 이미 군영에 가 있으니 감군인 자신은 서두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

양저가 말했다.

“어재서 약속 시간보다 늦었습니까?”

장고는 사과하며 말했다.

“대부들과 친지들이 송별연을 열어주어 지체되었소.”

...

그러고 나서 군정을 불러 물었다.

“군법에는 약속 시간에 대지 못하면 어떻게 하도록 되어 있소?”

군정이 대답했다.

“마땅히 베어야 합니다.”

장고는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 급히 경공에게 이 일을 알리고 사면을 요쳥하였다. 양자는 경공에게 갔던 사람이 돌아오기도 전에 장고의 목을 베어 전군에 돌려 본보기로 삼았다. 한참 뒤 사자가 장고를 사면하라는 부절을 가지고 말을 달려 군영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러자 양저가 말했다.

“장수가 군영에 있을 때에는 왕의 명령도 받들지 않을 수 있소.”

그리고는 군정에게 물었다.

“군영 안에서 말을 달리면 군법에는 어떻게 처리하도록 되어 있소?”

군정이 말했다.

“목을 베어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자는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양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왕의 사자이니 죽일 수는 없소.”

그러고는 그의 마부와 수레 왼쪽의 곁나무와 왼쪽 곁말의 목을 베어 전군에 본보기로 삼았다. 양저는 사자를 보내 왕에게 다시 보고하게 한 뒤 싸움터로 나갔다.


102 병사들을 감동시킨 용병술

양저는 병사들의 막사, 우물, 아궁이, 먹거리를 비롯하여 문병하고 약을 챙겨 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몸소 보살폈다. 또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재물과 양식을 모두 병사들에게 풀고, 자신은 병사들 중에서도 몸이 가장 허약한 병사의 몫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었다. 이로부터 사흘 뒤에 병사들을 다시 순시하자 병든 병사들까지도 모두 앞다투어 싸움터로 나가기를 바랐다. 



5. 손자, 오기 열전


108 군령을 따르지 않는 병사에게는 죽음뿐이다.

“군령이 분명하지 않고 명령에 숙달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죄이다.”

그러고는 다시 여러 차례 군령을 되풀이하고 북을 쳐 왼쪽으로 행진하도록 했지만 궁녀들은 역시 깔깔댈 뿐이었다. 손무는 말했다.

“약속이 분명하지 않고 명령에 숙달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죄이지만 군령이 이이 정확해졌는데도 군법에 따르지 않는 것은 사졸들의 죄이다.”

손무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좌우 대장의 목을 베려고 했다. 누대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나라 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들의 목을 베려는 것을 보고는 놀라 급히 사람을 보내 명을 내려 말했다.

“과인은 이미 장군이 용병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쏘. 과인은 이 두 후궁이 없으면 밥을 먹어도 단맛을 모르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시오.”

그러자 손무는 말했다.

“저는이미 왕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가 군에 있을 대에는 왕명이라도 받질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무는 결국 두 대장의 목을 베어 군대 안에 돌려 보냈다. 그러고는 그들 다음으로 왕의 총애를 맏는 후궁을 대장으로 삼고 다시 북을 쳤다. 궁녀들은 모두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앞으로, 뒤로, 꿇어앉기, 일어서기 등을 자로 잰 듯 먹줄을 긋듯 정확하게 하며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손무는 전령을 보내 오나라 왕에게 말했다.

“군대는 이미 잘 갖추어졌습니다. 왕께서는 시험삼아 내려오셔서 보십시오. 왕께서 그들을 쓰고자 하신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것입니다.”


115 나라의 보배는 험난한 지형이 아니라 임금의 덕행이다.

오기는 장수가 되자 신분이 가장 낮은 병사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잠을 잘 때에도 자리를 깔지 못하게 하고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자기가 먹을 식량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등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한번은 종기 난 병사가 있는데 오기가 그 병사를 위해 고름을 빨아주었다. 병사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는 소리내어 울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다.

“예전에 오공게서 우리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적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공이 지금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이 아이도 어느 때 어디서 죽게 될이지 모릅니다.그래서 소리내어 웁니다.”


118 오기가 물었다.

“이 세가지 점에서 당신은 모두나보다 못한데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요?”

전문이 대답했다.

“왕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신하들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백성은 그분을 믿지 못하고 잇고. 이런 때에 재상자리를 당신에게 맡기겠소. 아니면 내게 맡기겠소?”

오기는 한참동안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맡기겠소.”

전문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보다 윗자리에 있는 까닭이오.”



6. 오자서 열전


127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안고 떠난다.

비무기는 평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오사의 두 아들은 모두 현명하므로 없애지 않으면 초나라의 두통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그들을 불러들이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초나라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왕은 오사에게 사신을 보내 말했다.

“네 두 아들을 불러들이면 살려주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죽일 것이다.”

그러자 오사가 이렇게 말했다.

“오상은 사람됨이 어질어 내가 부르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오운은 사람됨이 고집스럽고 굴욕을 견딜 수 있어 큰일을 해낼 것입니다. 그는 이곳으로 오면 아버지와 자식이 함께 사로잡힐 줄 알고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오면 네 아버지를 살려주겠지만 오지 않으면 당장 죽여버리겠다.”

오상이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자 오운이 말했다.

“초나라에서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아버지를 살려 주려고 해서가 아닙니다. 도망치는 자가 있으면 뒷날의 근심거리가 될까봐 두려워하여 아버지를 볼모로 잡고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가 그곳에 가면 아버지와 자식이 모두 죽게 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에 무슨 보탬이 됩니까? 그곳으로 간다면 원수를 갚을 길조차 사라지게 됩니다. 차라리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가 병력을 빌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이 낫습니다. 함께 죽는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자 오상이 말했다.

“나 여시 그곳으로 가더라도 끝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살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는데 가지 않았다가 나중에 원수도 갚지 못하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싫어서 가려고 한다. 너는 달아나거라. 너는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 죽음을 맞이하겠다.”


136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다.

...월나라 왕 구천은 남은 병사 5000명을 이끌고 회계산에 머물면서 대부 문종을 시켜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에 화해를 청하고, 월나라를 오나라에 바쳐 자신은 오나라 왕의 신하가 되고 자기 아내는 그의 첩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오나라 왕이 이 요청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오자서가 간언했다. “월나라 왕은 아무리 힘든 고통도 잘 견뎌내는 사람입니다. 지금 그를 없애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139 오나라의 태자 백배는 일찍부터 오자서와 사이가 나빴으므로 오자서를 이렇게 헐뜯었다.

“오자서는 고집이 세고 사나우며 정이 없고 시기심이 강합니다. 그는 왕께서 제나라를 치려고 할 때 오자서는 반대했지만 왕께는 결국 제나라를 쳐서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오자서는 자신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원망을 품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다시 제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오자서는 고집스럽게 간언하여 왕께서 병사를 내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오직 오나라가 싸움에 져서 자기 계책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기를 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왕께서 직접 전쟁터로 나가 나라 안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제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오자서는 자신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여 전쟁터로 나가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 삼아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황께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가 재앙을 일으키는 것은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 신이 몰래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오자서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기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에게 맡겨놓았다고 합니다. 오자서는 신하가 된 몸으로 나라 안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밖으로 제후들에게 기대려고 하며, 선왕의 모신이던 자신이 지금은 버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늘 원망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빨리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십시오.”

...

오나라 왕은 사신을 보내 오자서에게 촉루라는 칼을 내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이 칼로 자결하시오.”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아, 참소를 일삼는 신하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왕은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나는 그의 아버지를제후의 우두머리로 만들엇고, 그가 임금이 되기 전 공자들끼리 태자 자리를 놓고 다툴 때 죽음을 무릅쓰고 선왕에게 간해 그를 후계자로 정하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내게 오나라를 나누어 주려고 하였을 때도 나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간사한 신하의 말만 듣고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그러고는 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해라. 아울러 내 눈을 빼내 오나라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해라.”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7. 중니 제자 열전


148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자기로 즐거워 하는 안회

안회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이며 공자보다 서른 살이 적었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바른 예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자는 또 안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질구나. 회여 밥 한 그릇과 물 한바가지로 누추한 뒷골목에 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할 텐데 안회는 자기가 즐겨 하는 바를 바꾸지 않는구나.”

“안회는 배울 때 듣고만 있어 어리석은 것 같지만 물러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내가 가르친 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 안회는 절대로 어리석지 않구나.”

“벼슬에 나가게 되면 토를 실행하고 물러나면 조용히 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와 나뿐이구나.”

안회는 스물아홉살에 머리가 하얗게 세더니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공자는 제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고 소리 내어 울면서 탄식했다.

“내게 안회가 있은 뒤부터 제자들이 나와 더욱 친숙해졌다.”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라는 자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거듭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습니다.”


150 덕행은 훌륭하나 몹쓸 병에 걸린 역경

염겸은 자가 백우이다. 공자는 그의 덕행을 칭찬했다. 백우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 공자는 문병을 갔다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으며 탄식했다.

“하늘의 운명이구나. 이 사람이 이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 운명이구나.”


157 자식은 태어난지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난다.

재여는 자가 자아이며 말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이렇게 물었다.

“부모의 상을 삼 년이나 치르는 것은 너무 길지 않습니까? 군자가 삼 년간 예를 닦지 않는다면 반드시 예는 무너질 것이며, 삼 년 동안 음악을 팽개친다면 음악도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일 년이 지나면 묵은 곡식은 다 없어지고 햇곡식이 익고, 나무를 비며 얻던 불씨도 한 해에 한 번씩 바꿉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상도 일 년이면 됩니다.”

....“그것이 편하면 너는 그렇게 해라. 군자는 부모의 상을 입는 동안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고 듣기 좋은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재여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재여는 참으로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삼 년 상은 세상의 합의된 예의이다.”


164 용맹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왕은 다른 나라의 후대를 끊지 않음으로써 의를 세웁니다.



170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공이 물었다.

“자와 상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는 지나친 데가 있고, 상은 미치지못하는 데가 있다.”

자공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사가 더 낫습니까?”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공자는 자하에게 말했다.

“너는 도에 힘쓰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명성을 좇는 소인의 선비가 되어서는 안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자하는 서하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자식의 주음을 너무 슬퍼하여 소리 높여 울다가 눈이 멀었다.


171 많이 듣고 삼가면 실수가 적다.

전손사는 진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장이며 공자보다 마흔여덟 살 아래다. 자장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많이 듣독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하게 말한다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그 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버리고 그 나머지를 신중히 실행한다면 뉘우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말에 실수가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저절로 얻어진다.”

훗날 자장이 공자를 따라다니다가 진나라와 채 나라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세상에서 행세할 수 있는 도리를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말이 참되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착실하고 조심스럽다면 오랑캐 땅에서도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참되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며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고 조심스럽지 않다면 비록 자기 고향일지라도 행세할 수 없을 것이다. 서 있을 때에는 그것이 눈앞에 어른 거리는 것 같고, 수레에 탔을 때에는 그것이 수레의 가로 막대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장을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하여 자기 허리띠에 적어두었다.


179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똑같다.

안무요는 자가 노이며 안회의 아버지이다. 아버지와 아들이일찍이 각각 때를 달리하여 공자를 섬겼다. 안회가 죽었을 대 안로는 집이 가난하니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제사 지낼 수 있게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잘났든 못났든 저마다 제 자식을 위한다. 그러나 내 아들 공리가 죽었을 때도 내관만 쓰고 외곽은 쓰지 못했다. 내가 수레를 팔아서 아들의 외곽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은 내가 대부가 되어 수레없이 걸어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83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번수는 자가 자지이며 공자보다 서른여섯 살 아랫니다. 버지가 곡물 심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늙은 농사꾼만 못하다.”

채소 심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채소를 심는 늙은이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번지는 소인이구나.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은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만 한다면 사방의 백성이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올텐데 농사짓는 법을배워 어디에 쓰겠는가?”

번지가 인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지란 어떤 것인가를 묻자 공자를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187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무마시가 이 말을 공자에게 전하니 공자가 말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예의이다.”



8. 상군 열전


202 법운 위에서부터 지켜야 한다.

새로운 법령이 백성에게 시행된 지 일 년 만에 진나라 백성 가운데 도성까지 올라와 새 법령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자가 1000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바로 그 무렵 태자가 법을 어기자 위양은 이렇게 말했다.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위에서부터 이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법에 다라 태자를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군주의 뒤를 이을 태자를 처벌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태자의 태부였던 공자 건의 목을 베고 태사 공손고의 이마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 날부터 진나라 백성은 모두 새로운 법령을 지켰다.

법령이 시행된 지 십 년이 되자 진나라 백성은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지 않으며, 산에는 도적이 없고, 집집마다 풍족하며 사람마다 마음이 넉넉했다.


206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조량이 대답했다.

“천 마리의 양가죽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합니다. 천 사람의 아부는 한 사람의 올바른 직언만 못합니다. 주나라 문왕은 신하들의 올바른 직언으로 일어났고, 은나라 주왕은 신하들이 입을 다물어 망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무왕을 잘못됐다고 나무라지 앟는다면 제가 온종일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죽이지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까?”

상군이 말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 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 선생께서 진정으로 하루 종일 바른 말을 해 줄 수만 있다면 나에게 약이 될 것입니다. 나는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려 하는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사양하려 하십니까?”


209 나라의 재상이 되어서는 백성의 이익을 중요한 일로 삼지 않고 큰 궁궐을 세웠으니 그것은 공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태자의 태사와 태부를 죽이고 이마에 먹물을 들이며 무서운 형벌로 백성을 상하게 한 것은 원한을 사고 재앙을 쌓아놓는 일입니다. 당신은 왕의 명령보다도 깊게 백성을 교화시키고 백성은 오아이 명령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당신이 하는 일을 본받습니다. 지금 당신이 세운 제도는 도리를 등지고 당신이 고친 국법은 이치에 어긋나니 이것을 교화라고 볼 수 없습니다.


210 시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잃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은 인심을 얻을만한 행위가 못 됩니다. 당신이 밖으로 나갈 때는 무장한 병사들이 탄 수레 수십 대가 뒤따릅니다. 수레에는 힘세고 신체 건강한 장사가 옆에 타서 수행하며 창을 가진 병사가 양쪽 옆에서 수레와 함께 달립니다. 시경에서는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9. 소진 열전


220 신이 생각하기에 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일을 만들어 백성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됩니다. 백성을 편안히 하는 근본적인 계책은 친하게 사귈 만한 나라를 고르는데 있습니다.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알맞게 고르면 백성은 안정될 수 있고, 사귈 만한 친구 나라를 잘못 고르면 백성은 안정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228 항간의 속담에 ‘차라리 닭 부리가 될 지언정 쇠고리가 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왕께서 서쪽으로 투항하여 팔을 모아 복종해 신하로서 진나라를 섬긴다면 소꼬리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왕께서는 현명하고 군대는 강대한데 오히려 쇠꼬리라는 더러운 이름을 얻게 된다면 왕을 위하는 신으로서는 부끄러울 것입니다.


231 주서에서는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대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섯 나라가 합종으로 친교를 맺고 힘을 합쳐 뜻을 하나로 한다면 강력한 진나라를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희 조나라 왕께서 신을 보내 어리석은 계책을 제시하여 분명하게 약속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왕께서는 조칙을 내려주십시오.

위나라 왕은 대답했다.

“나는 어질지 못하여 일찍이 훌륭한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었소. 지금 당신은 조나라 왕의 조칙을 가지고 나를 가르쳐 주었소. 삼가 나라를 들어 당신 의견을 따르겠소.”


237 초나라 왕이 말했다. “...조정에서 신하들과 상의해도 믿을 만한 대책이 없소. 그래서 나는 자리에 누워도 편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단맛을 알지 못하며, 마음은 달아놓은 깃발처럼 흔들려 의지할 곳이 없었소. 지금 당신이 천하를 하나로 하고 제후들의 힘을 모아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고자 한다면 삼가 나라를 들어 당신 의견을 따르겠소.”


238 부귀하면 우러러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이렇게 하여 여섯 나라는 합종하여 힘을 합치게 되었다. 소진은 합종 맹약의 우두머리가 되고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였다. 소진은 북쪽으로 조나라 왕에게 일의 경과를 보고하러 가는 길에 낙양을 지나게 되었다. 기마와 짐을 실은 수레를 비롯하여 제후들마다 소진을 모실 사자를 보내 주어 전송하는 자가 매우 많이 국왕의 행차에 견줄 만 하였다. 주나라 현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두려워 소진이 지나가는 길을 쓸도록 하고 교외까지 사람을 보내 맞아 위로하게 하였다. 소진의 형제와 아내와 형수가 곁눈으로 볼 뿐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하니 소진이 웃으면서 형수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전에는오만하더니 지금은 공손합니까?”

형수는 몸을 굽혀 기어나와 얼굴을 땅에 대고 사과하며 말했다.

“졔자의 지위가 귀하고 재물이 매우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 이랑만 있었던들 여섯 나라의 재상의 인수를 찬 수 있었을까?”

당시 소진은 천 금을 풀어 일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에 소진은 연나라로 갈 때 다른 사람에게 백 전을 빌려 노자로 삼은 일이 있었는데 부귀해지자 백 금으로 갚았으며, 전날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보답하였다. 그 하인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 보답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소진 앞으로 나와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니 소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았다. 너는 나를 따라 연나라로 갔을 때 역수 가에서 여러 차례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였다. 그때 나는 매우 곤란한 처지라서 나를 깊이 원망했다. 그래서 너에 대한 보답을 맨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너에게도 이제 보답하겠다.”

소진이 여섯 나라와 합종의 약속을 맺고 조나라로 돌아오자 조나라 숙후는 그를 무안군으로 봉하고 곧 합종 약속 문서를 진나라로 보냈다. 그러부터 진나라 군대는 십오 년 동안 감히 함곡관 밖을 넘보지 못했다.


252 지혜로운 자는 일을 처리할 때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꿉니다. 제나라 사람들의 자주색 비단은 질이 나쁜 흰색 비단을 물들인 것이지만 그 값은 열 배나 비싸고 월나라 왕 구천은 일찍이 회계산으로 쫒겨났지만 오히려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일입니다.



10. 장의 열전


275 신이 듣건대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잘 살펴서 계책과 의논을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302 진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찍이 왕께 변장자라는 이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일을 들려드린 사람이 있었습니까? 변장자가 호랑이를 찌르려고 하자 묵고 있던 여관의 심부름하는 아이가 말리면서 ‘호랑이 두 마리가 소를 잡아먹으려 합니다. 먹어봐서 맛이 좋으면 분명히 서로 다툴 것입니다. 다투게 되면 반드시 싸울 테고 서로 싸우게 되면 큰 놈은 상처를 입고 작은 놈은 죽을 것입니다. 상처 입은 놈을 찔러 죽이면 한꺼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았다는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변장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으니 정말 두 호랑이가 싸워서 큰 놈은 상처를 입고 작은 놈은 죽었습니다. 이때 변장자가 상처 입은 놈을 찔러 죽이니 한 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는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가 싸움을 벌인 지 한 해가 넘도록 해결이 나지 않았다면 큰 나라는 타격을 입고 작은 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타격입은 나라를 치면 한꺼번에 둘을 얻는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변장자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것과 같은 일입니다. 신이 왕께 바치는 계책과 초나라 왕을 위해 바치는 계책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혜왕이 말했다. “옳은 말이오” 그러고는 결국 화해시키지 않았다. 정말 큰 나라는 타격을 입고 작은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에 진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크게 쳐부쉈다. 이것은 모두 진진의 계책에서 나왔다.



11. 저리자, 감무열전


아들이 살인했다는 말을 듣고 북을 내던진 어머니

314 옛날 효자로 유명한 증삼이 비읍에 있을 때 일입니다. 노나라 사람 가운데 증삼과 일므과 성이 똑같은 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했지만 그 어머니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조금 뒤 또 한 사람이 와서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했지만 그 어머니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조금 뒤 또 한 사람이 와서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했지만 역시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그러나 조금 뒤 또다시 한 사람이 와서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자 그 어머니는 베 짜던 북을 내던지고는 베틀에서 내려와 담을 넘어 달아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어진 증삼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세 사람이나 그를 의심하자 정말인가 싶어 겁을 먹었습니다. 지금 신은 증삼처럼 어질지 못하고 왕께서 신을 믿는 마음도 증삼의 어머니가 아들을 믿는 마음만 못합니다. 또한 신을 의심하는 자가 어디 세 사람뿐이겠습니까? 신은 왕께서 북을 내던진 증삼의 어민처럼 신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321 저는 진나라에서 죄를 짓고 처벌될까 두려워서 도망쳐 나왔지만 몸을 안전하게 둘 만한 곳이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못사는 여자와 잘사는 여자가 함께 길쌈을 하였는데 못사는 여자가 ‘나는 초를 살 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당신의 촛불에는 남는 빛이 있으니 그 남는 빛을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당신의 밝음에 해를 끼치지 않고 나도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저는 곤궁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바야흐로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 아내와 자식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남은 빛으로 그들을 구제해 주십시오.


323 감무의 스승인 사거는 하채의 문지기로 크게는 임금을 섬기지 못하고 작게는 가정도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럭저럭 되는대로 사는미천한 신분이면서 청렴하지 않은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감무는 그런 인물을 묵묵히 따르고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혜왕, 명철한 무왕, 변론에 뛰어난 자의까지도 잘 섬기고 여러 관직을 맡으면서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감무는 참으로 현명한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감무를 진나라 재상으로 추천해서는 안됩니다. 진나라에 현명한 재상이 있으면 초나라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12. 양후열전


341 소왕 36년에 상국 양후는 객경 조와 상의하여 제나라를 쳐서 강, 수, 두 마을을 빼앗아 도읍을 넓히려고 했다. 이 대 위나라 사람 범저가 스스로를 장록선생이라 하면서 양후가 삼진을 넘어서 제나라를 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비난하고 이 기회를 틈하 자기의 주장을 진나라 소왕에게 말했다. 이에 소왕은 곧바로 범저를등용했다. 범저는 선태후가 제멋대로 정권을 휘두르는 일, 양후가 제후들 사이에서 권세를 떨치는 일, 경양군과 고를군의 무리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왕실보다도 부유한 일 등을 말했다. 이에 소왕도 깨달은 바가 있어 상국 양후를 파면시키고 경양군 등 그 일족을 모두 함곡관 너머 자기들의 봉읍으로 가서 살도록 했다. 양후가 함곡관을 나갈 때 짐수레가 1000대도 넘었다. 양후는 도읍에서 죽어 그곳에 장사되었다. 그 뒤 진나라에서는 도읍을 거두고 군을 두었다.


태사공은 말했다. “양후는 소왕의 친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땅을 넓히고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한때 천하에서 제라 일컫고 천하의 제후들에게 서족을 향해 머리를 숙이게 한 것은 양후의 공적이다. 그러나 그는 부유하고 존귀함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 범저 한 사람의 탄핵으로 신분이 꺽이고 권세를 빼앗겨 근심과 번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왕족의 한 사람이 이렇거늘 하물며 진나라에서 벼슬아치가 된 객경이야 어떠하겠는가?”



13. 백기, 왕전 열전


349 장군 조괄은 직접 정예군을 이끌고 맨 앞에 나가 싸웠으나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마침내 조괄의 군사가 패배하니 병졸 40만 명이 무안군에게 항복했다. 이때 무안군은 이렇게 말했다.

“전에 진나라가 상당을 점령한 일이 있었는데 상당 백성은 진나라로 귀속되기를 싫어허여 조나라로 돌아갔다. 조나라 병사들은 마음을 잘 바꾸기 때문에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뒤에 반란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

백기는 사람들을 속여 모조리 산 채로 땅 속에 묻어 죽이고, 남은 어린아이 240명만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머리가 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자가 이때를 전후로 하여 45만명이나 되었다. 조나라 사람들은 두려워 벌벌 떨었다.


352 “백기는 사는 곳을 옮겨 가면서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고 뼈 있는 말을 했소.”

진나라 왕은 곧 사자를 보내 무안군에게 칼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무안군은 칼을 받아들고 자신의 목을 찌르려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잠시 동안 그렇게 있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속여서 모두 산 채로 땅 속에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그러고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진나라 소왕 50년 11월의 일이다. 그는 죽었지만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가엾게 여겨 마을이 모두 제사를 지내주었다.


357 “그렇지 않소 무릇 세 대에 걸쳐 장군이 된 자는 반드시 싸움에 지게 되오. 반드시 싸움에 지는 것은 무엇때문이겠소?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사람을 죽이고 쳐부순 것이 많아서 그 후손이 상서롭지 못한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오. 이제 오아이는 이미 세 대째 장군이 되었소“  그 뒤 얼마 안 가서 항우가 조나라를 도와 진나라 군대를 쳐 왕이를 사로잡았다. 오아이의 군대는 결국 제후에게 항복했다. 



14. 맹자, 순경 열전


362 이 편은 제목과는 달리 잡가들에 관한 열전이다. 사마천은 음양가와 도가의 학문이 사실상 근본이며 기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가의 위대한 두 스승 맹자와 순자의 사적에 관해서는 짧게 다루고 음양오행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유가보다 상세하게 다루었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 한 무제가 존유의 기치를 내건 지 백여 년이 지났으나 조정에서도 맹자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점을 사마천이 염두에 둔 듯 하다. 그런 면에서 황로사상의 면모가 엿보인다.

맹자는 공자 학설의 단순한 계승자라기 보다는 유가 사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유가사상을 더욱 드러내고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 사람으로 맹자를 이어 유가사상을 더욱 체계화시킨 대표 인물이지만 맹자의 사상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순자가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예’를 기초로 해서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묵자는 유학을 배웠지만 유가학설이 귀족들의 예, 상, 악, 장을 옹호하며 백성을 상하게 한다고 보고 유가의 반대파에 서게 되었다. 묵자가 유가를 집중 공격한 것은 그가 유가의 한 이단적 지파를 대표함을 시사하지만, 그가 논리학에 가지는 관심은 명가를 생겨나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367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이윤은 솥을 짊어지고 요리사가 되어 은나라 탕왕에게 다가가서 힘을 다해 제왕의 일을 이루게 하였고, 배리해도 수레 밑에서 소를 치다가 목공에게 등용되어 목공을 천하의 우두머리로 만들었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는 상대방의 비위를 맞춘 뒤에 바른 길로 가게 했다. 추연의 말은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났지만 그도 소를 친 백리해나 솥을 짊어진 이윤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15. 맹상군열전


378 전영에게는 아들이 사십여 명 있었다. 그 중 천한 첩이 낳은 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5월 5일에 태어났다. 처음에 전영은 첩에게 아이를 키우지 말라고 했지만 첩은 몰래 거두어 길렀다. 문이 장성하자 그 어머니는 문의 형제들을 통해 문과 전영을 만나게 했다. 그러자 전영이 문의 어머니에게 고함을 쳤다.

“내 너에게 이 아이를 버리라고 했는데 감히 키운 것은 무엇때문이냐?”

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어머니 대신 말했다.

“아버님게서 5월에 태어난 아들을 키우지 못하게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전영이 대답했다.

“5월에 태어난 아들은 키가 지게문 높이만큼 자라면 부모에게 해롭다고 하기 때문이다.”

문이 또 물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운명을 하늘로부터 받습니까? 아니면 지게문으로부터 받습니까?”

전영이 대답하지 않자 문이 다시 말했다.

“사람의 운명을 하늘에서 받는다면 아버님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고 운명을 지게문에서 받는다면 지게문을 계속 높이면 그만입니다. 어느 누가 그 지게문 높이를 따라 계속 클 수 있겠습니까?”

...문이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정권을 잡고 제나라 재상이 되어 지금까지 위왕, 선왕, 민왕을 섬겼습니다. 그동안 제나라 땅은 넓어지지 않았는데 아버님 자신은 천만 금이나 되는 부를 쌓았으며, 그러고도 문하에는 어진 사람 한 명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장수의 가문에는 반드시 장수가 있고, 재상의 가문에는 반드시 재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아버님의 후궁들은 아름다룬 비단옷을 질질 끌고 다니지만 선비들은 짧은 바지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하인들과 첩들은 쌀밥과 고기를 실컷 먹고도 남아돌지만 선비들은 쌀겨나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님께서는 쌓아둔 것이 남아돌지만 더욱 많이 쌓아두려고만 할 뿐 나라의 힘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저는 이 점이 이상합니다.”

이 말을 듣고 전영은 문을 높이 사 집안일을 돌보게 하고 빈객 접대하는 일을 맡겼다.


381 하루는 맹상군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참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불빛을 가린 탓에 방안이 어두웠다. 손님은 자신의 음식이 맹상군의 것과 다른 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어둡게 한 줄 알고 기분이 상해서 식사를 하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 맹상군이 일어서서 몸소 자신의 밥그릇을 손님의 것과 비교해 보이자 손님은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일 때문에 선비들이 맹상군에게 많이 모여들었다. 맹상군이 손님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잘 대우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맹상군과 친하다고 생각했다.


386 맹상군이 제나라 재상일 때, 그의 가신 위자가 맹상군 대신 봉읍의 조세를 거두었다. 위자는 한 해 동안 세 차례나 오고 갔지만 그 해의 조세 수입을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다. 맹상군이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진 사람이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그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맹상군은 화가 나서 위자를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어떤 사람이 제나라 민왕에게 맹상군을 이렇게 헐뜯었다.

“맹상군이 반란을일으키려 합니다.”

마침 전갑이 민왕을 위협하자 민왕은 속으로 맹상군을 의심했다. 이를 안 맹상군은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전에 위자에게 조세를 빌린 어진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민왕에게 글을 올렸다.

“맹상군은 반란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몸을 바쳐 맹세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궁궐 문 앞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맹상군이 결백함을 밝히려 하였다. 민왕이 깜짝 놀라 맹상군의 행적을 조사해보니 정말로 맹상군은 반란을 꾀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민왕이 다시 맹상군을 불렀지만 맹상군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설 땅에서 조용히 살고자 하였다. 민왕은 이를 허락했다.


391 긴 칼아 돌아가자 식사에 생선 반찬이 없구나

긴 칼아 돌아가자 나가려 해도 수레가 없구나

긴 칼아 돌아가자, 집이 없구나


맹상군은 풍환을 불러 이일을 부탁했다. “빈객들은 내 어리석음을 모르고 다행히 몸을 맡긴 분이 3000명이나 됩니다. 봉읍의 조세 수입만으로는 도저히 빈객을 대접할 수 없어서 설 땅 사람들에게 이자를 얻으려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설 땅에서는 해마다 조세가 들어오지 않고 백성 대부분이 이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빈객들에게 식사마저 접대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책임지고 돈을 받아주십시오.”


393 술과 소를 많이 마련하지 않고는 돈 빌린 사람을 다 모이게 할 수 없고,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알 수 없습니다. 여유 있는 자에게는 갚을 날짜를 정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차용증서를 십 년 동안 가지고 있어도 이자만 더욱 쌓여갈 분이라 성급하게 독촉하면 바로 달아날 테니 영원히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성급하게 재촉하여 돌려받지 못한다면 위로는 군주가 이익에 눈멀어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꼴이 되고, 아래로는 백성이 빚을 갚지 않으려 군주를 떠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백성을 격려하고 군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차용증서를 불살라 받을 수 없는 빚을 없애 설 땅의 백성이 군주를 가까이하고 군주의 이름을 칭송하게 하려고 한 일입니다.


397 “나는 언제나 빈객들을 좋아하여 그들을 대접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힘썼소. 빈객이 3000명이나 있었음은 선생도 아는 바요. 그러나 빈객들은 내가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자 하루아침에 나를 버리고 떠나가 나를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소. 이제 선생의 힘으로 다시 재상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다른 빈객들은 무슨 낯으로 다시 나를 볼 수 있겠소. 만약 다시 나를 만나려고 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 얼굴에 침을 뱉어 크게 욕을 보이겠소.”

풍환은 이 말을 듣고 말고삐를 매어 놓고 수레에서 내려와 절을 했다. 맹상군도 수레에서 내려와 마주 절하고 말했다.

“선생께서는 빈객들 대신 사과하는 것이오?”

“빈객들 대신 사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결과가 있고, 일에는 당연히 바뀌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선생은 이런 원리를 아십니까? 살아있는 것이 반드시 죽게되는 것은 만물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것은 일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당신은 혹시 아침 일찍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새벽에는 어깨를 맞대면서 앞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어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팔을 휘저으면서 시장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침을 좋아하고 날이 저무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물건이 시장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위를 잃자 빈객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고 해서 선비들을 원망하여 일부러 빈객이들이 오는 걸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객들을 대우하십시오 ” 


 

16. 평원군, 우경 열전


406 평원군이 말했다.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내 빈객으로 삼 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나도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소. 이것은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


410 이동이 평원군에게 말했다.

“한단의 백성은 땔감이 없어서 죽은 사람의 뼈를 때고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 자식을바꾸어 먹고 있으니 위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후궁은 백여 명을 헤아리고 노비들까지 무늬있는 비단옷을 입으며 쌀겨나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합니다. 백성은 가난한데다가 무기까지 바닥나서 나무를 깎아서 창과 화살을 만듭니다. 그런데 당신의 기물과 종, 경 같은 악기는 그대로입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무너뜨린다면 당신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부인과 아랫 사람들을 사졸 사이에 끼워 넣어 같이 일하게 하고 가진 것을 다 푸어 사졸들을 먹이면 위태롭고 고통스런 처지에 놓인 사졸들은 군주의 은혜에 쉽게 감격할 것입니다.”


417 누완이 조나라 왕에게 말하였다.

“공보문백이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병들어죽자 그 죽음을 슬퍼하여 규방에서 스롤 목숨을 끊은 여자가 둘 있었습니다. 문백의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도 소리내어 울지 않았습니다. 문백의 유모가 아들이 죽었는데 소리내어 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하니 어머니는 공자는 어진 사람인데 노라라에서 쫒겨났을 때 내 아들은 쫒겨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아들이 죽으니 그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자가 둘이나 있소 이와 같이 된 것은 반드시 덕 있는 사람에게는 정을 주지 않고 부인들에게는 다정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면 어진 어머니라고 하겠지만, 아내의 입에서 나오면 반드시 질투심이 많은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은 같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듣는 사람의 마음도 바뀝니다.


421 태사공이 말한다. “평원군은 새가 하늘 높이 날 듯이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재능과 지혜가 있는 공자였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했다. 속담에 ‘이익에 사로잡히면 지혜가 흐려진다.’라고 하였다. 평원군은 풍정의 그릇된 말에 빠져 조나라 장평의 사십여만 병사를 산 채로 매장되게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 했다. 우경이 사태를헤아리고 상황을 추측하여 조나라를 위해 꾀한 계획들은 얼마나 주도면밀했던가? 그러나 위제의 불행을 차마 볼 수 없어 결국 대량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우경에게 고통과 근심이 없었다면 책을 지어 후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17. 위공자 열전


427 위나라 공자 무기는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들에게 예의로 대우했다. 선비가 어질든 그렇지 않든 구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어 사귀고, 자기가 부귀하다고 해서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비들은 사방 수천 리에서 앞을 다투어 몰려와 공자에게 몸을 의지하여 빈객이 3000명이나 되었다. 그 무렵 제후들은 공자가 어질고 빈객이 많음을 알고 섣불ㄹㄹ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지 않은 지 십여년이 되었다.


428 신의 빈객 중에 조나라 왕의 은밀한 일까지 정탐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조나라 왕이 하는 일마다 하나하나 신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신은 이번 일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냥을 할 뿐 침략하려 하는 게 아니라고 왕에게 바둑두다 말함) 그 뒤로 왕은 공자가 어질고 능력 있음을 꺼려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428 위나라에 숨어 사는 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후영이다. 그는 나이 칠십에 집이 가난해서 대량성의 이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있었다.


429 제가 들러 만났던 백정 주해는 어진 사람입니다만 세상에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푸줏간 사이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436 빈객 중 한 사람이 공자에게 말했다.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또 위나라 왕의 명령이라 속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것은 조나라 입장에서는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충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스스로 교만해져 공로가 있다고 하시니, 이는 공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18. 춘신군 열전


452 지금 초나라 왕은 병들었는데 회복하기 힘들 듯 합니다. 진나라는 초나라 태자를 돌려보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태자가 돌아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진나라를 정중하게 섬기며 상국의 은혜에 끝없이 고마워할 것입니다. 이것이 동맹국과 가까이하고 만승의 나라에 은덕을 베푸는 일입니다. 만약 돌려보내지 않으면 태자는 함양의 지위도 벼슬도 없는 일개 백성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초나라가 새 태자를 세우면 반드시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동맹국을 잃고 만승의 나라와 화친을 끊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원컨대 상국께서는 이 점을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460 이원은 당신이 있으면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을 원수로 생각하고 오래 전부터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초나라 왕이 죽으면 이우너은 반드시 궁궐로 돌아가 권력을 잡고 당신을 죽여서 입을 막을 것입니다. 이것이 생각지도 않은 재앙입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낭중에 임명하십시오. 초나라 왕이 죽으면 이원은 틀림없이 먼저 궁궐로 들어갈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위하여 이원을 죽이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재앙을 막아낼 수 있는 뜻밖의 인사입니다. 


461 처음에 춘신군의 총애를 받아 임신한 뒤 초나라 왕에게 바쳐진 이원의 누이동생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초나라 유왕이다.


461 태사공은 말했다....마지막에 이원에게 당한 일은 늙어서 사리 판단이 어두워진 탓이리라. 세인의 말에 ‘마땅히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두고 한 말일까?



19. 범저, 채택 열전


465 위나라로 돌아온 뒤 수고는 마음 속으로 범저에게 노여움을 품고 범저가 제나라로부터 선물을 받은 일을 위나라 재상에게 말했다. 위나라 재상이라 함은 위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위제이다. 위제는 매우 화를 내면서 사인을 시켜 범저를 매질하게 했다. 범저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가 빠졌다. 범저가 죽은 척하자 나무 발에 둘둘 말아서 변소에 내버려 두었다. 빈객들이 술을 마시다 취하여 벌갈아 가면 그의 몸에 오줌을 누었다. 이는 일부러 그를 모욕하여 나중에 함부로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는 자가 없도록 경계하려고 한 것이다.


483 “지금 범숙은 무슨 일을 하고 있소?”

“남의 집에서 날품을 팔고 있습니다.“

수고는 마음속으로 불쌍히 여겨 범저를 자리에 앉혀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범숙이 결국 이렇게 딱한 신세가 되었단 말이오.”

그러고는 자기의 두꺼운 명주 솜옷 한 벌을 내주고...

“네 죄가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수고가 대답했다.

“제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속죄해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지금 내 조상의 묘는 위나라에 있어 위나라를 배반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너는 예전에 내가 제나라와 내통한다고 여겨 나를 위제에게 모함했으니 이것이 네 첫 번째 죄이다. 위제가 나를 욕보이기 위해 변소에 두었을 때 너는 그것을 말리지 않아쓰니 이것이 네 두 번째 죄이다. 위제의 빈객들이 취하여 번걸아 가면 내게 오줌을 누었으나 너는 모르는 척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이다. 그러나 오늘 네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두터운 명주 솜옷을 주면서 옛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를 용서한다.”


495 군주가 성스럽고 신하가 어진 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복입니다. 군주가 명철하고 신하가 정직한 것은 나라의 행복입니다. 아버지가 자애롭고 자식이 효성스러우며 남편이 성실하고 아내가 정숙한 것은 가정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비간은 충성스러워도 은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오자서는 지혜로웠지만 오나라를 온전하게 하지 못했으며, 신생은 효성스러워도 진나라는 어지러웠습니다. 이처럼 모두 충신이고 효자이지만 나라가 망하고 집이 어지러워진 까닭은 무엇입니까? 지혜로운 군주와 현명한 아버지가 업어서 충신과 효자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 군주와 아버지를 더러운 사람이라 하여 하찮게 여기고 그 신하와 자식을 가엾게 여겼습니다. 상군과 오기와 대부 종은 신하로서 휼륭했으나 그들의 군주는 훌륭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 세 사람이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은 점을 칭송하지만 어찌 불우하게 죽은 것을 부러워하겠습니까? 만약 죽은 뒤에 충성스럽다는 이름을 얻었다면 미자는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없고, 공자는 성인이라 할 수 없으며, 고나중은 위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이 공과 이름을 세울 때 어찌 완저하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몸과 이름이 모두 온전한 것이 가장 훌륭하며 이름은 남의 모범이 될 만하지만 몸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그 다음이고, 이름은 욕되어도 몸만은 온전한 것이 가장 아래입니다. 


502 제가 듣건대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옛글에 성공했으면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 네 사람이 화를 입었는데도 당신은 어찌 그것을 이어받으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어째서 이 기회에 재상의 인수를 되돌려 어진 사람에게 물려주도록 하고 물러나 바위 밑에서 냇가의 경치를 구경하며 살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백이같이 청렴하다는 이름을 얻고 길이 응후라 불리며 대대로 제후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허유나 연릉의 계자처럼 겸양하는 마음이 있다고 칭찬을 받으며 왕자교나 적송자 같이 오래 살 것입니다. 재앙을 입고 삶을 마치는 것과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낫겠습니까? 당신은 어느 편에 몸을 두려 합니까? 지금 지위를 떠나는게 아까워서 차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반드시 제 네 사람과 같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역경>에 ‘높이 올라간 용에게는 뉘우칠 날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르기만 하고 내려갈 줄 모르며, 펴기만 하고 굽힐 줄 모르고, 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신은 이 점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504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한비자가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옳은 말이다. 범저와 채택은 세상에서 말하는 뛰어난 변사로서 어떤 경우에도 자유자재로 변론할 수 있는 유세가였다. 그러나 각국의 제후에게 유세하여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계책이 졸렬해서가 아니라 유세한 나라들의 힘이 약하고 작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두루 돌아다닌 끝에 진나라로 들어가자 잇달아 경상이 되고 공을 천하에 떨친 것은 참으로 진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의 강하고 약한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선비에게는 역시 우연히 때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사람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두사람도 어려운 때가 없었다면 어째 떨치고 일어날 수가 있었겠는가?



20. 악의 열전


513 신이 듣기에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는 가깝다는 이유로 봉록을 주지 않고 공로가 많은 자에게 상을 주며,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에 맞는 일을 맡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재능을 살펴 관직을 주는 이는 공적을 이루는 군주이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사귀는 이는 이름을 남기는 선비입니다.


515 신이 듣건데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공을 세우면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이름이 남고, 앞을 내다보는 밝은 눈을 가진 선비가 공명을 이루면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에 후세까지 칭송을 받는다고 합니다.  



21. 염파, 인상여 열전


532 염파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나라 장군이 되어 성의 요새나 들에서 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상여는 겨우 혀와 입만을 놀렸을 뿐인데 지위가 나보다 높다. 또 상여는 본래 미천한 출신이니, 나는 부끄러워서 차마 그의 밑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주리라”

상여는 이 말을 듣고 염파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상여는 조회가 있을 때마다 늘 병을 핑계 삼아 염파와 서열을 다투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출할 때도 머릴 염파가 보이면 수레를 끌어 숨어버리기도 했다.


533 상여가 말했다.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강한 진나가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랄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 때문이오. “

염파는 이 말을 듣고 웃옷을 벗고 가시 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빈객으로서 인상여의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했다.

“비천한 저는 상경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하고 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벗이 되었다.  


535 길은 멀고 험한 데다 지역이 좁으므로 그곳에서 싸운다는 것은 쥐 두 마리가 쥐구멍 속에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용감한 장군이 이길 것입니다.


539 조괄의 어머니가 왕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제 아들을 장군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욍이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조괄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전에 제가 조괄의 아버지를 모실 때 그 무렵 제 아들의 아버지는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여 살리는 이가 수십 명이고, 벗이된 사람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이나 종싫에서 상으로 내려준 물품은 모두 군대의 벼슬아치나 사대부에게 주고, 출전 명령을 받으면 그날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들은 하루 아침에 장군이 되어 동쪽을 향해 앉아서 부하들의 인사를 받게되었지만 군대의 벼슬아치 가운데 누구 하나 제 아들을 존경하여 우러러보는 이가 없습니다. 왕께서 내려 주신 돈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자기 집에 감추어 두고 날마다 이익이 될 만한 땅이나 집을 둘러보았다가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어찌 그 아버지와 같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릅니다. 부디 왕께서는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왕께서 굳이 그 아이를 보내시려거든 그 아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저를 그 아이의 죄에 연루시켜 벌을 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왕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545 태사공은 말한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오아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히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22. 전단 열전


554 태사공은 말한다. “용병의 도는 정공법으로 쌍고, 기이한 계책으로 허를 찔러 이기는 것이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기이한 계책을 무궁무진하게 낸다. 기이한 계책과 정공법이 서로 어우러져 쓰이는 것은 마치 끝이 없는 둥근 고리 같다. 대체로 기이한 병법은 처음에는 처녀처럼 약하게 보여 적군이 얕잡아 보고 문을 열어두게 하지만 나중에는 그물을 벗어난  토끼처럼 날래져서 적이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다. 이는 전단의 용법법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555 왕촉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임금을 섬기지 앟고 정조있는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소. 제나라 왕이 내 간언을 듣지 않아서 벼슬을 그만 두고 들에서 밭을 일구고 있지만 나라는 이미 깨어져 망하였고, 나는 나라를 보존시킬 수 없고. 그런데 지금 또 협박을 받아 당신의 장수가 된다면 걸왕을 도와 포악한 행동을 일삼는 것과 같을 것이오. 살아서 의로운 일을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가마솥에 삶겨 죽는 편이 낫소.” 그리고는 마침내 끈으로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는 스스로 꽉 죄어 목숨을 끊었다.



23. 노중련, 추양 열전


563 “선생께서는 저 하인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하인 열 명이 한 사람을 따르는 것은 어찌 힘이 그만 못하고 지혜가 모자라서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주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노중련이 물었다. “허허, 그렇다면 위나라를 진나라에 비교하면 하인같은 존재란 말씀입니까?” 신원연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566 조나라의 평원군은 노중련에게 봉지를 내리려 했지만 노중련은 여러 차례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그래서 평원군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앞으로 나가 천 금을 내놓으면 노중련의 장수를 빌었다. 그러자 노중련이 웃으며 말했다.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입니다. 저는 이런 짓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평원군에게 인사하고 떠나가서는 평생토록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571 연나라 장군은 노중련의 편지를 읽고서 사흘 동안 흐느껴 울며 망설이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가자니 연나라 왕과 틈이 생겨 죽을까봐 두려복 제나라에 항복하자니 제나라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기 때문에 항복한 뒤에 치욕을 당할까 두려웠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제나라 왕에게 노중련의 공적을 말하고 그에게 벼슬을 주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누중련은 달아나 어느 바닷가에 숨어 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부귀로우면서 남에게 얽매어 사느니 차라리 가난할망정 세상을 가볍게 내 맘대로 살리라.”


579 노중련은 지향하는 뜻이 대의에 맞지는 않았지만 벼슬도 지위도 없는 처지에서 자신의 뜻을 거리낌없이 말하고 실천하며 제후들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으며, 당대에 자신의 언변을 떨치며 대신들의 권력을 꺾은 점이 훌륭하다. 추양은 말하는 태도가 공손하지는 않았지만 사물을 비유해가며 그 실례를 하나하나 든 점에서 비장함이 있었고, 또 절개를 굽히지 않고 강직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이 열전에 덧붙였다.

 


24. 굴원, 가생 열전


586 이소란 걱정스러운 일을 만난다.라는 뜻이다.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자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이가 없다.


591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굴원은 강가에 이르러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가를 거닐면서 읊조렸다. 그의 얼굴빛은 꾀죄죄하고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야위었다. 어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닙니까?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쫒겨났소”

어부가 물었다.

“대체로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 스스로 내쫒기는 일을 하셨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이라면 또 그 누가 자신의 깨끗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게 낫지. 또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쓰겠소?”


598 가생은 인사하고 길을 나섰는데 장사라는 곳은 지형이 낮고 습기가 많다는 말을 듣고 자기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더구나 좌천되어 떠나가는 중이므로 마음이 우울하였다. 가생은 상수를 건널 때 부를 지어 굴원을 조문하였는데 그 문장은 이러하다.


602 만물은 변하여

진실로 쉼이 없다.

돌아 흘러서 옮겨 가고

또는 밀어서 돌아간다.

형체와 기운이 끊임없이 도니

변하고 진화하는 것 매미와 같네

그 깊은 이치 끝이 없는데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

재앙이란 복이 의지하는 곳이고

복이란 재앙이 숨어 있는 곳이라.

근심과 기쁨은 같은 문으로 모이고

길함과 흉함은 한곳에 있네.


604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남을 낮추고 자기를 귀하다 하네

통달한 사람은 넓게 보고

무슨 물건이건 한결같이 보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위하여 죽고

열사는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법

권세를 뽐내는 자는 권세 때문에 죽고

평범한 사람은 삶에만 매달리지.

이익에 유혹되고 가난에 쫒기는 무리는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네.

성인은 사물을 굽히지 않고

수많은 변화를 만나도 한결같다네.

세속 일에 구애받는 사람은

우리 속에 갖힌 죄수 같도다.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만물을 버리고

홀로 도와 함께 하누나.



25. 여불위 열전


614 당신은 가난하고 객지에 나와 있어 어버이를 공손히 섬기거나 빈개고가 사귈 힘이 없습니다. 제가 비록 가진 것이 없지만 당신을 위해 1000금을 가지고 서쪽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부인을 섬겨 당신을 후사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616 여불위는 한단의 여러 첩 가우데 외모가 뛰어나고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았는데 그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초는 여불위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일어나 여불위의 장수를 축하하면서 그녀를 달라고 했다. 여불위는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자기 집 재산을 다 기울여 자초를 위해 힘쓰고 있는 까닭은 진기한 재물을 낚으려는 것임을 떠올리고 마침내 그 여자를 바쳤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몸임을 숨기고 만삭이 되어 정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자초는 마침내 그 여자를 부인으로 세웠다.


616 진나라 왕이 즉위한 지 일년 만에 죽자 시호를 효문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태자 자초가 왕이 되니 이 사람이 장양왕이다. 장양왕은 양어머니 화양 부인을 화양 태후라 하고 생모 하희를 높여서 하 태후라 하였다.


618 장양왕이 즉위한 지 삼년만에 죽자 태자 정이 왕위에 올랐다. 정은 여불위를 존중하여 상국으로 삼고 중부라고 불렀다. 진나라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태후가 때때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불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619 진시황이 차츰 장년이 되어 가는데도 태후는 음란한 행동을 그치지 않았다. 여불위는 그것이 발각되어 자기에게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 음경이 큰 노애라는 사람을 몰래 찾아 사인으로 삼고 때때로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며 노애의 음경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달아서 걷게 하였다. 내퉇가 그 소문을 듣게 하여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한 것이다. 태후는 그를 얻고 싶어하였다...그의 수염과 눈썹을 뽑아 환관으로 만들어 마침내 태후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태후는 사사로이 그와 정을 통하여 몹시 사랑하였다.  



26 자객 열전


626 조말로부터 167년이 지낫을 때 오나라에 전제의 사건이 일어났다.


629 그로부터 칠십여 년 뒤에 진나라에 예양의 사건이 일어났다.


631 예물을 바치고 남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고 자기 주인을 섬기는 것일세.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매우 어렵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까닭은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일세.


633 그로부터 사십여년 뒤에 지 땅에서 섭정의 사건이 일어났다.


633 섭정은 지 땅의 심정 마을 사람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제나라로 달아나서 가축 잡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635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섭정의 어머니가 죽었다. 섭정은 장례를 마치고 상복을 벗은 뒤 말했다.

“아, 나는 시장 바닥에서 칼을 들고 짐승을 잡는 백정일 뿐인데 엄중자는 제후의 대신이요, 재상 신분으로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수레를 몰고 찾아와 나와 사귀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내 대우는 너무 했다. 엄중자는 황금 2000냥을 주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수를 축원해 주었다. 내 비록 그 돈은 받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나를 특별히 깊이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어진 사람이 격분하여 원수를 쏘아보면서 나같은 시골뜨기를 가까이하고 믿어주었으니 내 어찌 가만히 있을소나. 또 전날 그가 나를 필요로 하였으나 나는늙은 어머니가 계시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이제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나는 앞으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일하리라.”


636 섭정은 칼을 차고 한나라에 이르렀다. 한나라 재상 협루는 마침 관청 당상에 앉아 있었는데 무기를 들고 호위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섭정이 곧장 들어가 계단을 뛰어올라 협루를 찔러 죽이니 주위에 있던 부하들은 크게 혼란스러웠다. 섭정이 고함을 지르며 쳐죽인 사람만 수십 명이 되었다. 그런 뒤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죽었다. 한나라에서는 섭정의 시체를 거두어 시장 바닥에 드러내 놓고 그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637 시장을 오가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였다.

“이 자는 우리 나라의 재상을 죽였기 때문에 왕께서 그 이름과 성을 알려고 1000금을 걸었소. 부인은 이 말을 듣지 못했소? 어찌 일부러 와서 이 자를 안다고 하시오?”

그러자 섭영이 말했다.

“그 말은 들었습니다. 섭정이 오욕을 무릅쓰고 시장 바닥에 몸을 던진 것은 늙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제가 시집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게서 천수를 누리다 돌아가시고 저도 이젠 시집을 갔습니다. 일찍이 엄중자는 동생의 인물됨을 살펴 알고는 곤궁하고 천한 지위에 있는 그와 사귀었으니 그 은택이 매우 두텁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선비는 본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합니다. 섭정은 제가 살아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훼손시켜 이 일에 연루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어찌 제게 닥칠 죽음이 두려워 동생의 장한이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이윽고 하늘을 우러러 큰 소리로 세 번 외치더니 몹시 슬퍼하다가 마침내 섭정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진, 초, 위 나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모두 이렇게 말했다.

“섭정만 위대한 게 아니라 그 누이도 장한 여인이다. 섭정의 누이가 참고 견디는 성격이 아니라 시신이 버려지고 해골이 드러나는 고통을 두려워않고 천리 험한 길을 달려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남매가 함께 한나라 시장 바닥에서 죽음을 맞을 줄 섭정이 미리 알았더라면 감히 엄중자에게 자신을 바치지는 않았으리라. 엄중자도 인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용감한 선비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643 연나라에 전광선생이라는 분이 계신데 지혜가 깊고 용감하며 침착하니 더불어 상의할만합니다.


645 전광이 말했다. “내가 듣건대 나이 들고 덕 있는 사람은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품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태자께서는 내게 우리가 말한 것은 나라의 큰일이니 선생께서는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태자가 나를 의심한 것입니다. 대체로 일을 행할 때 남에게 의심을 사는 것은 절개 있고 의협심 있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649 “장군의 목을 얻어 진나라 왕에게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진나라 왕은 반드시 기뻐하여 저를 만나 줄 것입니다. 그때 제가 왼손으로는 그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찌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연나라가 업신여김을 당한 것도 씻을 수 있습니다. 장군은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번오기가 한쪽 어깨를 드렁내고 한 손으로 팔을 움켜주니 채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밤낮으로 이를 갈고 가슴을 치며 고대하던 일입니다. 이제 당신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655 진시황은 고점리가 축을 뛰어나게 잘 타는 솜씨를 아까워하여 용서하는 대신 눈을 멀게 했다. 그러고 나서 고점리에게 축을 타게 하였는데 그 소리를 칭찬하지 않는 적은 없었다. 고점리는 축 속에 납덩어리를 감추어 넣었다가 진시황 곁으로 가까이 갔을 때 축을 들어 진시황을 향해 내리쳤지만 맞지 않았다. 진시황은 결국 고점리를 죽였다. 이 일로 인해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제후국에서 온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27. 이사 열전


661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려 있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


669 시황제는 그 제안을 옳다고 여겨 시경, 서경, 제자백가의 책을 몰수하고 모든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천하에 그 누구도 옛것을 끌어들여 지금 세상을 비판하지 못하게 했다.


677 세 사람(막내아들 호해, 이사, 환관 조고)은 공모하여 시황제의 조서를 받은 것처럼 꾸미고, 승상은 시황의 아들 호해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또 맏아들 부소에게 내린 편지를 이렇게 고쳤다.


687 이사가 이 글을 올 리가 2세 황제는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처벌을 더욱더 엄격히 하고 백성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걷는 자를 현명한 관리하고 했다. 그 뒤 길에 다니는 사람 중 절반은 형벌을 받은 자이고, 형벌을 받아 죽은 자가 날마다 시장 바닥에 쌓여갔다. 그리고 사람을 많이 죽인 관리를 충신이라고 했다.


692 조고가 이사를 심문했다. 이사는 붙잡혀 묶인 채 감옥에 갇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아, 슬프구나 도리를 모르는 구주를 위하여 무슨 계책을 세울수 있겠는가? 옛날 하나라 걸왕은 관용봉을 죽이고, 은나라 주왕은 왕자 비간을 죽이고, 오나라 왕 부차는 오자서를 죽였다. 이 세 신하가 어찌 총명하지 않을까마는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은 충성을 다한 군주가 도리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내 지혜는 세 사람만 못하고 2세 황제의 무도함은 걸왕, 주왕, 부차보다도 더하니 내가 충성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은 당연하다. 장차 2세 황제의 다스림이 어찌 어지럽지 않으랴.

지난날 그는 자기 형제를 죽이고 스스로 섰으며 충신을 죽이고 미천한 사람을 존중하며, 아방궁을 짓느라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내가 간언하지 않은 게 아니라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로 옛날 훌륭한 왕들은 음식에 절제가 있었고, 수레나 물건에도 정해진 수가 있었으며, 궁실을 짓는데도 한도가 있었다. 명령을 내려 어떤 일을 하는 경우에도 비용만 들고 백성에게 보탬이 되지 못하는 것은 금하여 오랫동안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형제에게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고도 그 허물을 반성할 줄 모르고, 충신을 죽이고도 다가올 재앙을 생각하지 않으며, 궁궐을 크게 짓느라 천하 백성에게 나쁜 일이 실행되니 천하의 백성은 복종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반역자가 벌써 천하의 절반을 차지했는데도 2세 황제는 아직 깨닫지 못하며 조고를 보좌로 삼고 있으니, 나는 반드시 도적이 함양에 들어오고 고라니와 사슴이 조정에서 노는 꼴을 보게 되겠구나.“


696 이사가 죽고 2세 황제가 조고를 중승상으로 삼자, 크든 작든 모든 일은 조고가 결정했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이 무거운 줄을 알고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했다. 2세 황제가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이것은 사슴이지?”

좌우에 있던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말입니다.”

2세 황제는 놀라서 스스로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태복을 불러 점을 치게 했다. 그러자 태복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봄가을로 교사 지낼 때 종묘 귀신을 모시면서 재계가 석연치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덕을 많이 쌓아 재계를 충분히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2세 황제는 상림원으로 들어가 재계하는 척하고는 실제로는 날마다 새를 잡고 짐승을 사냥하면서 놀았다.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상림원으로 들어오자 2세 황제가 활을 쏘아 그를 죽였다.  



28. 몽염 열전


710 지금까지 신의 집안에는 대대로 마반하려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는데 일이 갑자기 이렇게 된 까닭은 반드시 간사한 신하가 반역을 꾀하여 안으로 군주를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


710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잘못도 없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내 죄는 죽어야 마땅하다. 임조에서 요동까지 장성을 만여리나 쌓았으니 이 공사 도중에 어찌 지맥을 끊어 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 죄로구나. 그러고는 약을 먹고 죽었다.



29. 장이, 진여 열전


716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킨 지 몇 해 지났을 때 장이와 진여가 위나라의 이름있는 선비라는 소문을 듣고 장이에게는 1000금, 진여에게는 500금의 현상금을 걸어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장이와 진여는 이름과 성을 바꾸고, 함께 진으로 가서 어느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끼니를 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문을 지키고 있는데 마을의 관리가 진여에게 잘못이 있다고 매질을 하였다. 진여가 발끈하여 대들려고 하자 장이가 진여의 발을 밟아 그대로 매를 맞게 했다. 관리가 떠나자, 장이는 진여를 뽀나무 아래로 데려가 이렇게 꾸짓었다.

“처음에 나와 그대가 약속한 것이 무엇이오? 지금 하찮은 치욕 때문에 일개 마을관리의 손에 죽으려고 하시오?”

진여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진나라는 조서를 내려 돈을 걸고 이 두 사람을 찾았는데 두 사람은 오히려 문지기 신분으로 마을 안에 조서를 전달하였다.


722 무신은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조왕이 되었다. 그는 진여를 대장군으로 삼고, 장이를 우승상으로 삼았으며, 소소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723 진나라가 아직 망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등의 집안 사람을 모두 죽인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진나라가 생기는 꼴입니다. 그보다는 무신이 왕이 된 것을 축하해주고 하루빨리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를 치는 것이 좋습ㄴ다.


731 한나라 원년 2월에 항우는 제후들을 왕에 봉하였다. 장이는 평소 여러 곳을 다니며 교제의 폭을 넓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천하였고, 항우도 평소 장이가 현명한 인물이라고 들었으므로 조나라를 둘로 나누어 장이를 상상왕으로 세워 신도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진여가 함곡관으로 들어올 때 자기를 따라오지 않았으므로 그가 남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남피 부근의 세 현을 봉읍으로 주었다.


738 장이와 진여는 어진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졋으며 그들의 빈객과 종들까지도 천하의 준걸 아닌 이가 없어서 제각기 살고있는 나라에서 경상의 자리를 얻었다.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빈궁할 때에는 서로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를 지켰으니, 어찌 서로 돌아보고 의심하는일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움켜쥐고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 서로를 멸망시켰다. 예전에는 서로 앙모하여 신뢰함에 성의를 다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배반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권세와 이익만 쫒앗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비록 명예가 높고 빈객이 많았다 해도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태백이나 연릉의 계자와는 상황이 서로 다르다고 하겠다.  


30. 위표, 팽월 열전

31. 경포 열전


755 형벌을 받은 뒤에 왕이 된다.


763 항적이 죽고 천하가 평정되자 황상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 때 황상이 수하의 공적을 깍아내려 이렇게 말했다. "수하는 썩은 선비이다. 천하를 다스리는데 어찌 썩은 선비를 Tm겠는가?"



32. 회음후 열전


775 한신이 성 아래에서 낚시를 하고있는데 무명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 가운데 한 아낙이 한신이 굶주린 것을 알고 밥을 주었는데 빨래를 다할 때까지 수십 일 동안을 그렇게 했다. 한신이 기뻐하며 아낙에게 말했다.

“내 언젠가는 이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소.”

그랬더니 아낙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제 힘으로 살아가지도 못하기에 내가 젊은이를 가엾게 여겨 밥을 드렸을 뿐인데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

회음의 백성 중에서 한신을 업신여기는 한 젊은이가 한신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키는 커서 칼을 잘도 차고 다니지만 마음속으로는 겁쟁이일 것이다.”

그러고는 사람들ㅇ 앞에서 한신을 모욕하면 말했다.

“네놈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를 찌르고, 죽음을 두려워하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

이때 한신은 그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구부려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갔다. 이 일로 해서 시장 사람들이 한결같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779 왕께서는 본래 오만하여 예를 차리지 않으십니다. 지금 대장을 임명하는데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하시니 이것이 바로 한신을 떠나게 한 까닭입니다. 왕께서 그를 대장으로 삼으시려면 좋은 날을 택하여 재계하고 단장을 설치하여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780 천하는 마음을 얻은 자의 몫이다.


783 싸움에 진 장수는 무용을 말하지 않는다.


789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 실수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얻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미친 사람의 말도 가려서 듣는다.  


796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804 그러나 한신은 망설이면서 차마 한나라를 배반하지 못했다. 또 자신이 공이 많으니 한나라가 끝내 제나라를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괴통의 제안을 거절했다. 괴통은 한신이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자, 얼마 안 가서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무당이 되었다.


804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훌륭한 활을 치운다.


809 한신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녀자에게 속은 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여후는 한신의 삼족을 멸하였다.


811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한나라에 대한 공훈은 주공, 소공, 태공망 등에 비할 수 있고,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반역을 꾀했으니 온 집안이 멸망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33. 한신, 노관 열전


827 빈객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변란의 조짐이다.


831 태사공은 말한다.

“한신과 노관은 본래 대대로 덕을 쌓고 착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의 권모술수로 벼슬을 얻고 간사함으로 공을 이루었다. 한나라가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 만났으므로 땅을 갈라 받고 남쪽을 바라보며 고라고 일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 안으로는 지나치게 강해지고 커졌다는 의심을 받았고, 나라 밖으로는 흉노를 원조자로 믿고 기댔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조정과 멀어지고 자신들까지 위태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일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지혜가 다하자 흉노로 달아났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않으랴. 진희는 양나라 사람으로 젊을 때는 위나라 공자 무기를 자주 칭찬하고 흠모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변방을 지킬 때도 빈객들을 불러 모으고 선비들에게 몸을 굽혀 겸손하게 행동했는데 그의 명성이 사실보다 지나쳤다. 그래서 주창이 그를 의심하여 심문까지 하게 되었고, 잘못이 자못 많이 드러났다. 진희는 그 재앙이 자신에게 미칠까봐 두려워 간사한 자의 말을 듣고 마침내 무도한 짓에 빠져들었다. 아 슬프다. 대체로 계책의 설익음과 무르익음과 성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깊구나.



34. 전담 열전


835 왕의 피를 물려받은 이가 왕이 되어야 한다.


836 독사에게 물린 손은 잘라야 한다.


837 독사에게 손을 물리면 손을 자르고 발을 물리면 발을 자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자르지 않으면 몸뚱이마저 해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가, 전각, 전간은 초나라와 조나라에게 손이나 발 같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죽이지 않습니까? 또 진나라가 다시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면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던 자들은 당연히 죽일 테고, 게다가 그 무덤까지 파헤칠 것입니다.


838 원망하는 마음은 반란의 불씨가 된다.


840 평민에서 일어나 번갈아 왕이 된 세 형제


841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35. 번, 역, 등, 관 열전


849 항우는 말했다. “장사로구나” 그러고는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주고 돼지 다리 하나를 내려주었다. 번쾌는 술을 마신 뒤 칼을 뽑아 고기를 잘라서 먹어 치웠다. 항우가 물었다. “더 마실 수 있겠소?”

번쾌가 말했다.

“신은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 잔을 사양하겠습니까? 패공께서는 먼저 관중으로 들어와 함양을 평정한 뒤 패상에서 병사들을 노숙시키며 왕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오늘에 이르러 소인배의 말만 듣고 패공과 틈을 만드셨습니다. 신은 이 일로 천하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왕을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항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패공은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번쾌를 불러 손짓으러 불러내어 그 자리를 떠났다. 군영을 벗어나자 패공은 수레를 그대로 남겨둔 채 혼자 말에 올라 타고 번쾌 등 네 사람은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 패공은 산 아래 샛길을 따라 군영으로 돌아온 뒤 장량을 시켜 항우에게 하과하도록 하였다. 항우도 이것으로 a마음이 흡족하여 패공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이날 번쾌가 군영으로 달려 들어가 항우를 꾸짖지 않았다면 패공은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855 노략질을 일삼던 역상


858 위증죄에 연루되어 옥살이한 하후영


862 비단을 팔던 관영


864 신들은 본래 진나라 백성이므로 군사들이 저희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 곁에 있는 이 중에서 기마를 잘 아는 사람을 뽑아 임명하시고, 신들이 그분을 돕도록 해 주십시오.


869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풍현과 패현으로 가서 진나라 때부터 살아온 그곳 노인들을 찾아 소하, 조참, 번쾌, 등공의 옛집과 그들의  평소 사람됨을 물어보았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과는 달랐다. 그들이 칼을 휘두르고 개를 잡고 비단을 팔 때, 어찌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가듯이 한 나라 고조를 만나 한나라 조정에 이름을 날리고 자손들에게까지 은덕을 내리게 될 줄 알았겠는가? 나는 번타광과 교분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고조의 공신들이 처음 일어날 때 상황을 이와 같이 들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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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 09:36:33 *.114.49.161

제가 어제 내었던 북리뷰는 엉터리였습니다. 

정해진 마감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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