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비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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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순결은 흰색이라 더러워지고 쉽고, 사랑은 핑크색이란 바래기 쉽지만
우정은 무색이란 영원하리' 라는 작가 불명의 時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우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떠올릴 때면,
유안진님의 수필인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의 내용과 함께
'관포지교'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고,
또 신달자님의 '우정의 지팡이'라는 수필 내용이 등이 생각난다.
* 관포지교의 정확한 의미를 몰라서 여기에 검색한 결과를 옮겨본다.
관포지교(管鮑之交)
한자 뜻과 음
대롱 관, 어물 포, 갈 지, 사귈 교.
풀이
管中(관중)과 鮑叔牙(포숙아) 사이와 같은 사귐. 齊(제)나라 때 관중과 포숙아가 賤(천)했을 때부터 富貴(부귀)하게 된 뒤까지 우정이 두터웠다는 옛일에서 유래된 고사성어. 市勢(시세)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 서로 信賴(신뢰)하고 가깝고 변치 않는 우정.
유래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사이었습니다. 후에 관중은 명재상(名宰相)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 그가 명재상이 되기까지는 친구였던 포숙의 공이 지대했습니다. 관중이 말년에 포숙에 대한 칭송의 말을 남겼는데, 그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내가 어릴 적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할 때, 이익의 분배를 내가 포숙보다 더 많이 가져갔는데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주었기 때문이었고, 벼슬 길에 올라 많은 실수로 사람들은 나를 어리석다고 했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고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아주었다. 또한 내가 포숙아와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내가 세 번이나 도망을 치자 사람들은 나를 비겁하다고 질책했지만 포숙아는 내가 집에 연로한 어머님이 게시기 때문이라고 알아 주었고, 또 나와 포숙아가 제나라의 두 공자인 규(糾)와 소백(小伯)의 사부가 되었다가 내란에서 공자 규를 모시던 내가 공자 소백에게 패하여 참수형의 위기에서 포숙아의 설득으로 목숨을 구하고 오히려 재상의 자리까지 나에게 물려주어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나를 알아주었다.
결국 나를 나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지식iN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 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과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 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우정의 지팡이 - 신달자
나는 여자는 무조건 지적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친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무조건 이성적인 여자,
무조건 냉철한 판단으로 한치의 실수도 없이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구를
나는 징그럽게 생각한다.
품위와 교양을 앞세우고 아린 가슴의 아픔을 절대로 친구 앞에 내색하는 법이 없고
친구의 속마음을 알 것 없다는 태도로 문을 꽝꽝 닫아 버리는 차가운 친구를
나는 섬뜩하게 생각한다.
완전한 척하는 친구도 나는 달가와하지 않는다. 완전함이란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도덕 규율 예의 운운하면서
그 자체가 상대방을 불안하고 불쾌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친구는 답답하다.
아이큐를 따지는 친구, 천재나 지능을 자랑거리고 삼으며
자기 오만에 빠져 있는 친구는 자가용을 가지고 뽐내는 친구와 같이 불쌍해 보인다.
나는 약간은 어리석은 친구가 좋다, 조금은 모르는 것도 있는 친구,
조금은 감정이 지나쳐 연속극을 보며 핑그르르 눈물이 도는
한심한 구석도 지니고 있는 친구가 더 좋다.
조금은 어리둥절해서 어려운 사람과 마주한 식탁에서 몇알의 밥알을 흘리거나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실수도 할 수 있는 친구가 더 마음을 끈다.
말하자면 정이 있는 친구,
내가 얼굴빛이 조금 어두워 보이면 괴로운 일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서
자기의 바쁜 일을 뒤로 미루고 나와 함께 같이 있어 주는 친구가 있을 때
나는 인간에게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마워한다.
감동이 없는 친구는 싫다.
외로울 때 전화를 했는데 " 왜?" 라고 메마른 반응을 보이는 친구는
어쩐지 뒤로 물러서게 된다.
감정에 인색한 친구도 무섭다.
나는 치부에 가까운 상처나 부끄러운 가정 사정이나
당치도 않은 사람에 대한 흠모 따위까지 속속들이 비밀 주머니를 풀어 놓는데도
너무나 차분하게 듣기만 하면서 인생의 선배인 듯 냉정히 이성을 지키는 친구는
얄미운 데서 그치지 않고 배신감까지 가지게 한다.
정의 교환을 감정 소모로 생각하는 그런 친구는 정의 구두쇠일 것이다.
돈을 너무 따지는 친구, 돈에 너무 감각이 없는 친구도 싫다.
내가 오늘은 샀으니 내일은 네 차례라고 못을 박는 친구나
누가 돈을 해결했는지 늘상 묵묵부답 몸만 왔다갔다 하는 친구도
편안하게 보이지 않는다.
좋은 사이란 그런 껄끄러운 문제가 도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내가 주고 있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므로 미안해 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므로.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은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을
다른 사람이 금싸라기 땅을 백 평쯤 갖는 것과 같은 기쁨과 행복을 가진다.
나는 그러한 환상적인 논리를 아름다운 인생관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좋은 친구와 만나고 있을 때는 번쩍거리는 반지를 낀 여자, 빌딩의 주인,
한 나라의 왕 앞에서도 으스댈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찾아보기 힘든 것이 희생 정신이라도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사랑이 없다라는 말을 둘러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 혹은 그런 말에 "암 그렇지 그래"하고 동조하는 사람이 있을 때
나는 슬퍼진다.
절망적이다라는 말을 적절하게 그 순간에 나는 사용한다.
흐르고 있는 전류처럼 언제나 감정이 통하고 있는 친구를 갖는 것은
그같은 친구를 갖고자 하는 욕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친구의 즐거움과 기쁨을 자신의 이익으로 생각하며
친구로부터 받은 고통과 불편을 선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새끼손가락만한 우정이라도 갖게 된다.
늘 만난다고 해서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며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관계가 결속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실된 친구는 어느 한 부분에만 속해 있어서
어느 한 시간에만 필요한 존재가 아니므로
전신(全身)과 전영혼의 교류이며 영원의 끝까지 동행하게 된다.
내가 약간은 어리석고 가능한 감정을 존중하고
되도록 정깊은 친구를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판단이 흐리고 감상으로 의무를 소홀히 하고 정에 치우쳐
자신을 허약하게 하여 누가 봐도 못나고 청승맞은 여자가 좋다는 것은 아니다.
무릇 21세기를 향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에 있어서
가장 우리가 범하기 쉬운 오류는 철저하게 개인 승리를 위한 이기심과
형식적인 인간 관계라고 감히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인간은 이미 고독하게 사는 것이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주변에 함께 기쁨을 같이 할 친구가 없고
축배의 잔을 들 진심어린 감동의 친구가 없다면
그 개인 승리는 어디다 쓸 것인가.
서로서로가 아름다움과 희망의 싹을 발견할 눈이 되어 준다면
아무도 모르게 외롭게 쓰러져 가고 있는 친구의 지팡이 노릇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젊었을 때는 팔짱을 낄 팔이 되고
늙음에 가서는 몸을 기댈 지팡이가 되어 주는 친구.
우리의 우정이 그와 같다면
우리는 서로 친구를 예술가로 창조케 하는 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리라.
"바쁘다, 우정에 머물 시간이 없다"라고 하면서 목적만 향해 달리는 친구는
결국 목적에 희생당하고 만다.
우선 그런 친구를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내줄 시간이 없을 것이다
천 사람 중의 한 사람- 루디아드 키플링
천 사람 중의 한 사람은
형제보다 더 가까이 네 곁에 머물 것이다.
생의 절반을 바쳐서라도 그런 사람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너를 발견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구백아흔아홉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대로
너를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그 천 번째 사람은 언제까지나 너의 친구로 남으리라.
세상 모두가 너에게 등을 돌릴지라도.
그 만남은 목적이나 겉으로 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너를 위한 진정한 만남이 되리라.
천 사람 중의 구백아흔아홉 사람은 떠나갈 것이다.
너의 표정과 행동에 따라, 또는 네가 무엇을 이루는가에 따라.
그러나 네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너를 발견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문제가 아니리라.
그 천 번째 사람이 언제나 너와 함께 물 위를 헤엄치고
물속으로도 기꺼이 가라앉을 것이기에.
때로 그가 너의 지갑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넌 더 많이 그의 지갑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많은 이유를 대지 않고서도.
그리고 날마다 산책길에서 웃으며 만나리라.
마치 서로 빌려 준 돈 따위는 없다는 듯이.
구백아흔아홉 사람은 거래할 때마다 담보를 요구하리라.
하지만 천 번째 사람은
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
너의 진실한 감정을 그에게는 보여 줄 수 있으므로.
그의 잘못이 너의 잘못이고,
그의 올바름이 곧 너의 올바름이 되리라.
태양이 비칠 때나 눈비가 내릴 때나.
구백아흔아홉 사람은 모욕과 비웃음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천 번째 사람은 언제나 네 곁에 있으리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