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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1일 10시 29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 양진 사진

 

1. 저자에 대하여

<고운기 글>

삼국유사를 쓴 저자는 ‘일연’이다.(일연에 대한 부분은 2. 내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중간중간 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를 쓴 저자는 고운기다. 그는 1961년 12월에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한양대학교 교수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으로 데뷔했다.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2001년)을 시작으로 줄곧 삼국유사에 관한 글쓰기를 해온 고운기 교수는 올해 ‘신화 리더십을 말하다’를 냈다. 신라 건국신화의 주인공 박혁거세를 비롯해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열한 명의 인물을 통해 그들이 어떤 리더십을 가졌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고운기 교수는 “삼국유사를 쓴 일연(1206~1289)은 현장감각과 정치감각, 균형감각 등 세 가지 감각이 탁월한 역사가였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 그가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을 낸 해애 한 말이다그 책은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15권으로 예정된 시리즈는 삼국유사에 상상력을 덧붙여 독자들이 역사서에 쉽게 다가가도록 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첫 권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에서는 삼국유사가 임진왜란 때 전리품이 돼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최남선에 의해 새롭게 알려지는 과정을 담았다. 고 교수는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 역사, 문화 연구는 많은 데 비해 정작 텍스트로연구한 경우는 드물다”며 삼국유사에 천착하는 이유라고 했다.

고 교수는 삼국유사를 “한믽고의 정체성과 뿌리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책”이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꼽는다. 우리가 이번에 읽은 책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를 통해 삼국유사 읽기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그는 계속해서 삼국유사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길 위의 삼국유사’, ‘일연을 묻는다’등 잇달아 펴냈다.

그가 지은 책으로는 ‘신화 리더십을 말하다’,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삼국 유사 글쓰기 감각’ 등 시집과 함께 낸 책들이 다수 있다.

 

<양진 사진>

사진 작가 양진은 1966년 대전에처 태어났다. 연세대 금속공학과 졸업하고 고운기씨와 함께 ‘삼국유사’ 등의 사진 작업을 했다. 사람과 자연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봄이면 경주 남산 부처바위 앞에 피었을 산벚꽃이 눈에 아른거리고, 가을이면 무장사 터로 오르는 오솔길의 낙엽 소리며 물소리가 귓가에 맴돈다고 한다. 덩그렇게 작은 탑만 하나 남은 옛 절터, 그게 그거 같은 마애불들을 무어 그리 볼 게 있느냐며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숨겨 놓은 애인을 만나러 밤길을 달려가는 마음으로8 하루하루 떠난다고 한다. 찾아가는 유적지의 화려했던 모습은 대개 기록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터에서만 느껴지는 생기를 즐긴다. 빈 공간을 채워 주는 자연에 외경심을 느끼며, 바로 그 자리를 콕 찍을 수 있었던 옛 사람들의 혜안에 놀라워한다.사진에는 그런 생명의 기운을 담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사진을 보며 당장이라도 그 곳에 가고 싶었다. 이번 추석엔 허락한다면 통영에 가려던 것을 멈추고, 월정사에 다녀올까 싶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머리말

安危他日終須杖(안위타일종수장)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甘苦來時要共嘗(감고내시요공상)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들어가며

p2~3 『삼국사기』의 ‘사’는 사(史)이고 『삼국유사』의 ‘사’는 사(事)라는 사실은 중학교에 올라와서 틀리는 문제였다.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感發)시키는 촉진제다.

 

p4 도저히 일어나리라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고정관념이 깨진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된다.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이념의 틀은 우리에게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p5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 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그가 승려였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유학을 기본으로 하는 선비들이야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고 한들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 주는 데 반해,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전체가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 이렇게 9개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편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해 나가겠지만,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 「왕력」, 준(準)역사서로서 「기이」,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의 여러 편으로 삼대분(三大分) 해 볼 수 있다.

 

p10 저자인 일연이 이 책에 들인 애정은 특별한 것이어서, 그의 생애와 저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삼국유사』 본체를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이 땅의 첫 나라

p11 모두가 아는 ‘개천절 노래’의 첫 구절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고 쓴 이는 20세기에 들어 위당 정인보선생이다. 지금은 흔한 생각이 되고 말았지만, 일연이 살았던 13세기의 사람들이야말로, 그 샘과 뿌리를 단군이라고 본 아마도 첫 세대였던가 한다. 누구나 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에 자못 중요하게 쳐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 등재, 그것도 첫머리에 자리잡은 일이 그렇다.

 

p12 그 쓰디쓴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은 셈이다.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큰 나라야 제일을 제 방식대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p16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p17 혹시 그 100일 동안 3과 7이 돌아오는 날짜를 꺼리라는 말은 아닐까? 아니면 3과 7 그리고 그 반복은 완전 숫자로, 곧 ‘온 날’을 의미하고, 그것은 100일이 요즈음과 같은 숫자가 아니라 ‘온 날’로 보았을 때 서로 통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네 민간 신앙에서 3과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데서 자주 쓰이고, 꺼린다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식에서 특별히 조심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p21 ‘세상’이 아니라 ‘나라’다. 기독교 『성서』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비롯한 세상의 온갖 것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다르다.

처음 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왔을 때 그 곳에는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묶어 나라를 이룩하고 다스리는 제도가 없었을 뿐이다. 비록 그가 첫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단군이 나오고, 단군은 곧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되었다.

 

p22 다시 말하지만, 일연의 단군에 대한 관심은 신화로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p23 모방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는 하나 지나치면 부작용이 따른다.

(어떤 일을 하든지, 지나친 것은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p24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p33 이렇듯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위만조선까지 조선의 시대는 강력한 한나라의 침공 앞에서 막을 내린다.

 

p34 우리가 『삼국유사』의 첫 부분을 대할 때 유의할 점이 여기에 있다. 일연이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이 땅의 첫 나라인 조선에 관한 대부분을 갈무리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 북방계

p37 먼저 북방계의 흐름이다. 이 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로 흘러간다.

동명왕이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卒本扶餘)라 하였으니,

곧 고구려의 시초이다.

 

p43 그러나 이런 난생 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첫 출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까지 보이게 하는 이 표현은 곧 그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p44 왕은 주몽에게 말 기르는 일을 시켰다. 주몽은 그 가운데 좋은 말을 알아 보고는 먹이를 줄여 비쩍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지게 하였다. 왕은 살진 말을 타고, 마른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아들들이 여러 신하와 함께 해코지를 하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서 일러 주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너에게 해코지를 하려 하는구나. 네 재주로 친다면 어디 가든 되지 않겠느냐? 빨리 대처하려무나.”

이에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을 친구로 삼아 길을 떠났다. 엄수에 이르러 물을 바라보고, ‘나는 하늘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이다. 오늘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데, 쫓아오는 자는 다가오니 어찌하리’라고 말하자, 물고기와 자리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다 건넌 다음에는 다리를 풀어버려 추격하던 말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잏나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신화의 힘』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신라와 남방계

p64 “어떤 이는 ‘서술(西述) 성모가 낳은 바’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선도 성모를 찬양하는 중국 사람의 시에,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열었네’라는 말이 이것이다.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내 알영을 낳았다는 것도 서술 성모가 나타낸 바가 아닐까?”

 

p66 먼저 지리산의 성모천왕 이야기다. 갑자기 산 개울이 비도 오지 않는데 넘쳐흘렀다. 한 스님이 이상히 여겨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가 보자, 그 곳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했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 짝이 될 인연을 만나려 오줌을 눈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딸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 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

이 같은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 주는 이야기다. 이를 무조 신화라 한다.

 

p69 [신라라는 이름]

일연은 신라라는 나라 이름에 대해, “서라벌(徐羅伐) 또 서벌(徐伐)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사라(斯羅) 또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서벌이 나중에 서울로 바뀌어 나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p72 탈해는 누구일까? 용성국은 어디일까? 박씨에 의해 대가 이어지는 초기 신라 왕실에서, 갑자기 거기서 벗어나 탈해를 왕으로 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관한 이야기의 이면에서 우리는 아직 안정되지 못한 신라 왕실의 고민과, 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욕망의 그림자를 읽게 된다. 온갖 신격화로 치장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거둬내면 더욱 그렇다.

 

p73 박노례 닛금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탈해가, “무릇 덕 있는 자리 이(齒)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p78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p86 머나 먼 이역(異域), 아니 어느 시골 마을에서 올라 와 입신양명(立身揚名)한 탈해. 우리는 여기서 탈해가 비록 왕위에 오르고 그 후손들이 석(昔)씨 성으로 몇 차례 더 왕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기존의 세력에 둘러싸여 늘 불안해 했던 것 같은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권력의 자리란 차지하기도 이어 나가기도 어려운 것인가? 탈해의 고민이 깊었음은 분명하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p95 이렇게 혼란스럽고 빈약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료가 미비한 탓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신라 초기의 왕실이 그만큼 안정되어 있지 못함을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시기의 기록을 여기저기서 따와 한 줄로 꿰기란 위험한 일이다.

자신이 조사한 부분이 일부 첨가되기는 한다. 그런데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에 와서 처음으로 일연은 『삼국사기』를 떠나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는데, 매우 자신만만한 태도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p96 일연은 승려다.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雲水)행각(行脚)이라고 한다. 일연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 없었고,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 사회가 그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르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또한 그의 이 같은 관심과 실천 속에 모아진 것으로 본다. 그런 이야기일수록 일연의 붓끝은 힘을 얻는다.

영일은 한자어로 뜻을 풀었을 때 해를 맞는 고장이다.

 

p98 일관이 이르기를 ‘일월지정(日月之精)’이라 했다. ‘정’을 편의상 ‘정령’이라 번역했는데, 이 의미에 주목해 보자. 해와 달은 빛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 없듯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면 쓸모 없는 물건이 된다. 그러나 빛이 있다고 다 보는가? ‘눈 뜬 소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본다는 것은 그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p100 일본의 경우, 해에 관한한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해가 먼저 뜨기는 신라보다 오히려 그 쪽이니, 그들이 7세기 들어 자기들의 나라 이름을 왜(倭)에서 일본으로 고친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p109 가까운 사이라고 함부로 대하다 보면 틀어지기 마련이다. 왜의 잦은 침략을 받은 신라로서는 더 이상 그들을 가까이 하기 힘든 존재로 굳혀 갔으리라 보인다.

 

p110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p111 박제상, 그 빛나는 충혼의 인물

만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한다 하지 못할 것이오, 죽고 사는 것을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비록 불초한 몸이오나 명령을 받들면 행하겠습니다.“

 

p112 그대로 읽어 마음에 간직할 밖에 아무러 췌사(贅辭)가 필요치 않다.

(*췌사 : 군더더기를 말함, 불필요한 것을 하소연하다)

 

p115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

p116 나라의 일이며 충성이 중한들, 목숨을 내놓은 값은 무엇으로 갚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119 일연의 눈은 보다 더 크고 궁극적인 데로 향하여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도 걸리게 했다는 점만 유의하기로 하자.

 

밤에 찾아오는 손님

p120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설화 문학에서 말하는 하나의 유형 중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 들어야 할 운명이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 데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도화녀와 비형랑’조는 전형적인 야래자 유형의 설화다. 아니 그 원조다.

 

p125 봄꽃이라면 뭐든 아름답다 하나 복사꽃을 따를 만할까? 희다면 희고 붉다면 붉은 꽃, 그 두 가지 빛이 어우러져 먼 데서 보면 뾰족하게 이제 막 피어나는 소녀의 맑고 붉은 볼을 연상시키는 꽃이다. 그것은 도연명이 묘사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이상향을 장식한 꽃이기도 하였다. 도화량은 그렇게 어여쁜 여자였던가 보다.

복사꽃처럼 어여쁜 이 여자는 유부녀가 지켜야 할 도리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왕이라 한들 그 앞에서 떳떳이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있다. 죽음이라도 흔연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인데, 그토록 당당한 모습을 지닌 여자도 아름답지만, 한마디 농담으로 계면쩍은 분위기를 수습한 왕이 그대로 여자를 보내 주는 것도 인상적이다.

 

p130 비형은 그런 영웅 중의 한 사람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던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p134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造化)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p139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이제 법사를 생각하니 오직 이 곳에 있을 만하오. 그러나 자리(自利)만 행하고 이타(利他)의 공이 없으면, 지금에는 높은 이름을 떨치지 못할 것이요,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오. 어찌 중국에 들어가 불법을 얻어 이 나라의 미혹한 백성들을 인도하지 않으시오?” 라고 말한다.

 

p141 한 사상, 더욱이 종교가 한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절대 시간을 계산하기 어렵지만, 민간에 퍼져 있는 초보적 종교 형태의 전통과 힘이 강했던 것이 신라이기에, 다른 두 나라에 비한다면 어려움은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

 

p144 그러나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p149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헤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

일연은 어떤 이의 말이라 하면서, “미(未)는 미(弥)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시(尸)는 력(力)과 모양이 서로 가깝다. 그렇게 매우 닮은 것을 응용해 해매게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만 감은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 인연이 있기에 자주 나타나 보이셨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는 미시를 분명히 불교적 존재로서 미륵으로 보려는 뜻일 것이다. 그런 한편, “지금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미륵선화’라고 부른다”는 말도 함께 붙여 놓아, 도교적 민간 신앙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p150~152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하 ㄹ수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세속오게를 주노라. 첫재,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두르재,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이를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원광은 본디 귀족 출신이므로 유학에도 소양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만든 세속오계에서 유교의 오륜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지만, 승려의 입장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인륜 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신라 불교다.

원광 이후 신라 불교를 일으킨 삼총사라면 역시 자장․원효․의상이다.

 

p153 한반도의 한 쪽에 치우쳐 농토도 넓지 않을 분만 아니라, 바다 건너서는 일본으로부터 안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다. 시련 속에서 연단되는 것일까, 그같이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살아나갈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몸부림쳤는지도 모르겠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린 것이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넘보겠소.”

이 말은 이내 고구려 쪽에 전해졌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좋은 관계를 맺게 되고, 백제는 이를 원망하였다. 백제의 침공에는 이런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p158 처음에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 자주색 ․ 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된 모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앗을 세 되 보내 주었다. 왕이 꽃을 그린 그림을 보더니,

“이곷은 분명 향기가 없을 것이오.”

하고, 뜰에 씨앗을 심어라 하였다. 꽃이 피고 열매 맺기까지 기다려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신하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왕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 고 답한다. 꽃에 냄새가 있고 없음을 따지기 전에 이런 에피소드를 보고 있자면, 선덕왕이 여성이기에 좀더 부드럽게 당나라와의 교유를 이어 나갈 수 있었겠다 싶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p167 사실을 더 그럴듯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배경에 깔리면 그 사실은 더 힘을 얻는 법이다.

 

p169 그래서 유신은 신라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가 신분이 높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고 관직에 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국민에다 이민 4세의 신분적 제약은 좀체 지워지지 않아던 것 같다. 유신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p173 사실 김유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은 누구에게도 견줄 바 아니다. 힘으로 안 되면 지략으로, 지략으로 모자라면 신술을 써서라도 주어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그였다.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p178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말할 때면 언제나 태종 무열왕 김춘수와 태대각간 김유신을 들지만,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왕 법민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백제가 멸망한 663년이 문무왕 3년이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 문무왕 8년이다.

 

p184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면서 화장을 하라고 유언한다. 이 대목은 다분히 김부식의 손에 의해 유교적으로 치장된 것이다. 결국은 불교식 장례를 명한 것인데, 일연은 문무왕의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짐은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소. 그래서 불법을 높이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

“용은 짐승인데 어찌 하시렵니까?”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 되었소. 만약 악한 업보 때문에 짐승으로 태어나더라도 짐이 평소에 가진 생각과 맞는다오.”

 

p185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나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것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들 변함 없어 보인다.

 

p187 그러나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p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일연은 마지막에 이렇게 첨가한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p195 만파식적의 이야기는 원성왕(785~798년) 때 한 번 더 나온다. 왕의 아버지 효양 대각간이 만파식적을 아들에게 넘겨 주었는데, 이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터이 받았고, 그 덕이 멀리 빛났다”는 대목이다.

 

권력의 끝

p196 사마천의 <<사기>>에 ‘교토사주구팽’ 곧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그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 아마 사마천의 시대부터 변함없는, 비정의 극치를 달리는 원칙이다. 권불십년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p204 전쟁이 끝난 시대가 안정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다른 데로 흘러갔다. 그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패으이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p212 그러나 이 또한 김유신의 경우처럼 사후약방문에 불과할 뿐이다. 이미 사회에 흐르는 분위기는 저만치 먼저 가고 있고, 조정의 권력자 또한 그것을 암암리에 조장하면서, 슬슬 여론의 눈치나 보려는 계산된 엄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새으이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p222 사실 성덕왕은 3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비록 왕비 마저 바꿔야 하는 권력 투쟁의 한가운데서 몸살을 알았지만, 그만한 기간을 왕위에 있자면 나름대로 제왕의 철학과 덕망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연은 <기이>편의 ‘성덕왕’ 조에서 다음 세가지로 그의 36년간을 정리했다.

 

p223 수로부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느 연인과는 다른 특이한 매력을 풍긴다. 그것은 약간 ‘공주병’에 걸린 듯한 푼수 끼가 보이면서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한 개성 때문이다.

 

p226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다.

“옛 사람의 말에,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저 바다의 방자한 놈이라도 어찌 뭇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다가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대로 따랐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 나와 바쳤다.

 

p228 ‘강원도의 힘’이 아니라 한마디로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언문에서 ‘중구삭금’이라 표현되어 있다. ‘중구’란 곧 오늘날의 여론, 또는 민중의 소리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힘이 저 신물의 가공할 위세를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은 그렇게 힘을 모을 방법을 노래로 권하였다.

 

p229 정치란 예나 이제나 같은 모양이고, 그것이 핍진한 현실임을 누군들 부인하랴.

거기에 비해 수로부인은 얼마나 다른 여자인지 모른다.

 

p233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첫 성전환증 환자

p237 표훈이 내려가려 하자 하늘님이 다시 불렀다.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였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

표훈이 와서 하늘님의 말씀을 깨우쳐 아뢰자 왕이 말하였다.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

이 때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다. 왕은 무척 기뻤다.

 

p241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이 시를 썼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구태여 요란을 떨지 않는 것이 진정성에 가까운 법이다.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p242 다만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이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바람은 다름 아닌 ‘이른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시의 핵심이리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는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할지라도 심금을 울릴 일 아니겠는가.

 

p247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내가 태평하려면, 나답게!)

 

왕이 되는 자

p256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 어찌 북천의 물 때문 만이었을까? 명분을 중요시 여기던 시절의 한 삽화일 뿐 왕의 자리에 오르는 자의 치밀한 계산은 늘 그 밑에 깔려 있다.

 

p261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 같은 예를 고려조에 와서 공민왕, 조선조에 와서 영-정조 같은 이에게서 다시 확인된다. 신라의 원성왕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왕이었다.

 

p266 때로 까닭을 설명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것이 사람이요 사람이 만들어가는 역사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

p269 달도 차면 기운다

한 집안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듯이, 나라도 흥하고 망하는 데 절대적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을지언정, 한번 일어나면 한번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대체로 흥망성쇠를 유전하기 마련이다. 과학적 증명이나 운수소관을 따지기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둥근 달은 가득 찬 것입니다. 찼으니 이지러지지요. 새로 돋는 달이라는 것은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점 차 오르지요.”

“둥근 달은 번성한 것이요 새로 돋는 달은 미미합니다. 아마도 우리 나라는 번성하고, 신라는 매우 미미하다는 뜻이겠지요.”

(두가지 해석)

 

p270 딴에는 정직하고자 애쓴 보람 없이 비명횡사하고 말았지만 어련히 그렇게 진행될 일에 토를 단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소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p271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보다 실로 더 억울한 일은 따로 있다.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제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p272 시절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되, 어지러운 세상은 뜻밖에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 잠겨 간다.

 

p277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p280 그런데 역사적으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역시 처용이라는 인물이다. 헌강왕을 따라 경주로 간 시골 출신의 이 젊은 청년이, 모두에 호사의 극치를 달리는 것으로 묘사된 도시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생활했을까? 높은 벼슬에 어여쁜 부인까지 생겼어도 청년의 마음은 동해 바다 검푸른 빛에서 하나도 떠나지 못한 듯하다.

 

p286 그러나 기미를 보아 사리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지는 해 뜨는 해

p288 그러나 돌이켜 보면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p289 사필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p290 나라가 열 번 일어나고 열 번 넘어져도 해는 매일매일 떠서 서쪽으로 지고, 매녀 ㄴ가을이면 어김없이 제자리에서 익모초는 피어난다. (사진)

 

p294 일연이 경순왕에 대해 적는 것을 끝으로 <기이>편에서 신라관계 기사는 막을 내린다. 어느 왕조의 긑이 그렇지 않겠는가만, 신라 천 년 사직의 종언은 더욱 쓸쓸하고 비참하기만 하다

 

p299 천 년을 이어온 신라는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면서 끝을 맺는다. 찬란하게 꽃피웠던 서라벌의 문화도 이제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경주 미틴사 터)

 

p301 “나라가 서로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위태롭기가 이 같으니 판세를 보아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미 강해지지도 못하거니와 약해질 것도 없어. 무고한 백성들의 살이 으깨지는 것만은 내 차마 할 수 없구나.”

 

p302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 왕조 사회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백성의 힘이다.

 

p305 ‘서리리’는 <<시경>> 왕풍에 나오는 노래, 망한 주나라의 신하가 옛 서울을 지나다 그 곳에 메기장 밭으로 변해 버린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는 것인데, 신화의 노래는 그마저 없어졌으니, 천 년 사직은 말 뿐이요 무상하기만 하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p311 일연은 한산을 지금의 경기도 광주, 북한성을 지금의 양주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곧 한강을 끼고 북으로는 양주에서부터 가운데는 위례성 그리고 남으로는 광주까지가 500여년 동안 백제의 도읍징ㅆ다.

백제의 대표적인 도읍은 한강 유역 곧 지금의 서울이다.

 

p326 사실 그 이후 일본의 왕실에서 백제의 흔적 지우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14세기에 나온 <<신황정통기>>에서는 8세기 말 환무왕이 일본과 삼한은 같은 종족이라고 적은 책들을 불태웠다고 썼다. 한일동족설을 연구한 홍 교수는 이 대목을 보고 놀랐다고 했지만, 흔적 지우기로 친다면야 이보다 더 한 일도 있었고, 지워질 것도 아닌 바에 저들이 줄기차게 되풀이하는 비슷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p327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민요에서는 그것을 참요 곧 예언의 노래 일종으로 보는데,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일의 흐름을 바꿔놓기 십상이었다.

 

p336~337 하루는 왕이 세 딸을 모아 놓고 누구의 덕으로 행복하게 사느냐고 물었다. 위의 두 딸은 아버지 덕이라고 말했으나,막내딸은 자기가 타고난 복이라고 말해, 화가 난 왕에게 버림을 받았다. 공주는 가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는데, 가난한 남자는 돈의 가치를 공주에게서 배워, 결국 두 사람은 큰 부자가 된다. 왕은 막내딸의 말이 맞았음을 알았다.

 

p337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나 전파되기 마련이고,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야기가 서로 비슷한 경우마저 있기도 하다.

 

견훤, 비운의 영웅

p348 그래서 견훤은 이 조의 사실상 주인공인 왕건을 빛내 주는 훌륭한 조연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p353 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p353~354 됨됨이가 견훤처럼 사나운 사람보다 온순하고 정이 많기로, 왕건이 그들의 뒤를 잘 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p354 이는 마치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고, 메추라기가 새매의 날개를 펼치는 것과 같소. 분명 사람들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 사직이 폐허가 될 것이오.

 

p356 “토끼와 사냥개가 둘 다 지치면 마침내 놀림을 받게 되고,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 보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p357 그러나 허물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그 때 가서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오.

왕건이 보낸 답장은 훨씬 부드러우면서 자신의 의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싸움에서도 성과가 없었던 것만이 아님을 예시해 보이고, 무엇보다 의리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신라 왕이 지지해 준 것처럼, 명분은 이미 결정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p362 뙤약볕 모래사장에서 자라난 풀잎 한 포기를 보며 견훤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없이 의지 하나로 나라를 일으켰던 가엾은 완산 아이는 후백제 마흔다섯 해라는 ㅉ랍은 기록만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부여 금강)

 

p363 그 때가 언제인들 무슨 상관이랴? 따지고 보면 자식을 원수로 여겨 죽이지 못하는 것을 분통해 하고, 치사한 목숨 부지하다 등창이나서 제 명을 재촉한 사람의 생애다. 실제로 그 지경까지 되었을까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신비의 왕조, 가야

p369 가야는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곳은 완충지였다. 신라와 백제가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일본열도에서 몰려온 또는 모렬갈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가야의 역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일연의 손에 의해 거둬들여진 이 짧은 기록 하나가 전부다.

 

p378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절에는 어느 곳에나 탑을 세운다. 그 탑의 의미가 여러 가지나, 절을 고해에 떠가는 배로 비유한다면 탑은 여기 왕후가 싣고 왔다는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p379~381 ‘가락국기’의 본디 지은이는 마지막에 명을 지어 노래했거니와, 거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고

오직 한결같이 정밀했네

길 가던 나그네는 길을 사양하고

농사꾼은 밭 갈기를 양보해

사방이 모두 편안해지고

모든 백성이 태평성대를 맞았네

이윽고 풀잎의 이슬이 마르는 것처럼

장수하던 나이를 보전치 못해

천지의 기운이 변해지고

조야가 모두 슬퍼했네

그 발자취 금과 같았고

그 명성 옥 소리처럼 떨쳤네

 

불교로 보는 역사 <흥법> 편

p385 보고 들은 것과 몸소 체험한 것이 일체를 이루는 부분이기에 그랬으리라

 

p386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전래 경위만이 아니라 일연이 가진 역사 의식의 일단을 읽게 된다.

그렇다면 이 땅에 가장 먼저 온 승려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순도다. 이어서 아도가 오는데, 일연은 <흥법>편의 ‘순도가 고구려에 오다’ 조에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를 인용해 순도와 아도를 소개하고 있다.

 

p388 어쨌거나 서기 372년은 이 땅에 처음 승려가 이른 해로, 초문사와 이불란사는 처음 만들어진 절로 특별히 기록될 만하다.

 

p389 그러나 대륙과 연결된 큰 나라를 경영하는 고구려라면 어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굳이 막거나 감시할 만큼 자잘하지는 않았으리라.

고구려에 첫 승려가 온 지 꼭 12년 뒤, 백제에도 중국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러 온다. 이 재미있는 이름의 뜻을 일연은 동학이라 풀어 놓고 있다. 그러나 백제에의 불교 전파에 대한 사실적 기록 또한 일연은 <흥법>편의 ‘마라난타가 백제 불교를 열다’조에 <<삼국사기>>를 빌려 적었다.

 

p390 5호 16국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전진과는 달리 백제에는 가장 남쪽의 진나라로부터 불교가 왔다. 이 같은 사실은 이후 백제 불교의 성격을 말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p394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어쩌면 우람한 줄기에 무성한 가지를 뻗는 나무는 쉽게 부리내리지 못하는지 모른다. 그렇듯 신라에 불교가 자리잡기까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p396 일연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소개된 시기를 눌지왕 때 잡고 있다. 묵호자 이야기에 나오는 연대다.

그렇다면 묵호자는 누구인가? 일연은 이를 아도의 별명으로 보고 있다. 결국 아도는 374년에 고구려에 왔다가 3,40년 뒤 신라까지 이르렀다는 말이 된다.

 

p398 신라 불교는 처음부터 순교자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교의 전통은 면면하다. 이로부터 뒷날 100여 년이 흐른 다음, 법흥왕이 불교를 세우자했을 때도 이차돈의 순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가? 불교의 큰 나무, 신라의 인고는 만만치 않았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p402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 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p405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릴 것이요, 피를 뿌려 목숨을 재촉할지라도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 뜻이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있는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이리요. 네가 비록 공덕을 쌓고자 하나 내가 죄를 피하는 게 낫지.”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 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도다.”

 

p406 ‘살을 베어 저울로 단다’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시비왕이 고행을 할 때였다. 메추라기가 매에게 쫓겨 시비왕의 품으로 들어왔다. 왕은 메추라기도 살려야겠고 매도 굶길 수 없으므로, 자기 살을 메추라기의 몸만큼 베어서 저울에 달아 매에게 먹였다. 정녕 법흥왕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p411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탑상>

(여기, 꼭 가보고 싶다.)

 

p417 그렇다. 호아룡사는 옛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 아닌 마음 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호아료사 터에 한 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 보아야 한다. 그 분지에 지상의 낙원을 이루고 살았던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p421 굳이 이유를 찾으면 <탑상>편의 성격상 그랬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소개할 <탑상>편은 기본적으로 탑과 불상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부분이고, 거기에 경전과 사리가 추가된다. 이것들은 불교의 신앙 대상으로 만들고 떠받들어졌다. 그에 비한다면 절 자체에 대한 소개는 무척 미미하다. 절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여기처럼 어떤 까닭으로 절이 만들어졌는지 연기담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그 규모와 구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빠진다. 이는 황룡사만이 아닌 다른 절의경우도 마찬가지다.

 

p423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니, 일찍이 되지 않으리라 알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그렇다”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p428 ‘아쇼카의 기념주’라 불리는 이 유명한 조각기둥은 불교 미술의 출발이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무렵의 불교는 소승 불교에서 대승 불교로 나아간다. 대승은 대중을 상대로 전도해야 하므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신앙의 대상을 만들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p431 황룡사 구층탑의 높이는 약 7,80m쯤 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20층 아파트보다도 높은 셈이니, 그저 서라벌 어디에서도 훤히 보였을 것 같다는 정도로 밖에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황룡사탑을 세우면서 사리함을 넣고 기둥을 세웠던 심초석의 크기도 내 키보다 크다. (경주 황룡사 터)

 

p434 구층탑을 찬한 시에서,

이에 올라 보라, 어찌 구한 만의 항복을 보겠는가

비로소 천지가 평화로움을 깨닫겠네

라고 노래한다.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p438 1206년 생인 일연이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출가한 것은 1219년 곧 14세 때였다. 그리고 22세에 승려들의 과거 시험인 선불장에 나가 합격할 때까지 이 절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시기를 전해주는 일연 비문의 기사를 읽어 볼 필요가 있다 .

여기에서 여러 사찰을 돌며 공부하는데 명성이 대단했다. 같은 도반들은 구산사선의 우두머리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일연이 깨달음을 경험한 때를 비문은 1236년 그의 나이 31세였다고 알려 주고 있다.

 

p440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 한다.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p441 우리 나라의 오대상은 바로 이 같은 배경을 가진 오대산이 그대로 넘어 온 것이다. (중국)

 

p444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p450 보천이 흘린 눈물은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니라. 도의 경지에 맛을 본 이가 세속으로 돌아가기 싫어했을 뿐이니, 신하들을 따라 왕궁으로 가야 하는 효명이 못내 아쉬운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p454 눈에 대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이게 했다는 학의 깃털은 곧 그를 출가로 이끄는 방편이었다. 그리고 그 깃털의 진짜 주인은 오대산의 다섯 성중이요, 그 가운데서도 문수보살이었으리라. 처음부터 그에게는 문수보살의 계도가 걸려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여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러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p456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p458~459 무릎이 헐도록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벌고 벌어 두노라

일천 개 손 일천 개 눈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둘 없는 ㅐㄴ라

한 개사 적이 헐어 주시려는가

아, 나에게 끼치신다면

어디에 쓸 자비라고 큰고.

 

p469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을 하나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에서의 일만이 아니다. 미물이라는 짐승에게서도, 일연은 끊지 못할 어떤 인연과 정을 발견한다.

 

p470 나는 이 대목이 모두 놀라웠다. 한낱 짐승으로도 자비를 아는 짐승이며, 욕심을 내자면 한없는 인간으로도 깨우침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 어우러진 장면 장면들이다. 꿩이나 그 새끼 몇 마리를 살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살린 어떤 메커니즘이 중요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그런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p472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 가장 뜻 깊은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p473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급빛 보살이 된다.

 

p476 부처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는다’는 말은 평범 속의 비범이다.

 

p478 부득은 놀라며 말했다. “이 곳은 여자가 와서 더럽힐 곳은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보살해으이 하나이지요. 하물며 깊은 산골에 날마저 저물었으니 어떻게 소홀히 대하리요.” 부득과 박박이 갈라지는 극명한 지점이다. 박박은 하나만 생각했다면 부득은 최소한 둘 이상을 생각한 것이다.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

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낙산사의 힘

p488 본격적인 낙산사의 경내라고 할 사천왕문부터 금당까지는 담이 둘러쳐 있다. 특이한 공법으로 무척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담은, 옛 모습 그대로 전해지는 금당 뒷부분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다른 큰 절에 비해 그다지 넓지 않은 경내가 이 담으로 인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는가 싶다.

‘담을 쌓다’라고 말하면 흔히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뭔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립의 의미를 넘어, 제 주장에만 골똘한 고집쟁이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그러나 절 주변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으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

 

p489 원효, 의상, 법일.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쟁쟁한 스님의 일화를 간직한 낙산사는 생각보다 작은 절이다. 사천왕문을 지나 본당인 원통보전까지 기껏해야 백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p499 굴산사가 있는 지금의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는 다름 아닌 범일의 고향이었다. 여기 재궁마을의 우물가 학 바위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이 여자는 표주박에 해가 담긴 물을 마시고 와서 잉태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범일이다.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신약성서>>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p504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의 꿈

세상살이의 헛됨을 비유하는 말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단지몽, 중국의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나온 이야기다. 밥이 끓는 솥단지 앞에서 따뜻한 불을 쬐다 잠깐 잠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사는 온갖 영고성쇠가 한솥밥 끓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p507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쯤에서 헤어지자 합니다.

 

p508 일연이 임종을 한, 지금 경상북도 군위군의 인각사 앞에 일연 시비를 세운 것은 지난 1985년, 거기 이 시가 새겨졌다.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 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

 

운문사 이야기

p509 지금부터는 「의해」편의 이야기들을 다섯 제목으로 나누어 소개하려고 한다. 이 편에는 원광을 비롯하여 고명한 승려들의 전기를 담고 있는데, 우선 그 성격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p513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p514 일연ㅇ느 그 선두에 원광을 두고 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일연은 원광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의론을 붙였는데, 그 첫 문장에 “우너종 곧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킨 다음 비로소 나루와 다리는 놓았으나 진리의 집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리의 집을 가장 먼저 지은 이는 누구인가? 일연은 그를 원광이라 생각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가 중국에 유학하여 불교의 진수를 체득해 온 해동의 처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p522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다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남의 신하가 된 몸’이란 곧 현실 ㅈ어치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임을 가리킨다.

 

p527 일연은 761세가 되던 해 마치 자신의 마지막 거처로 삼으려는 듯 왕명을 받는 형식으로 이 절에 이른다. 그 때 운문사는 일연이 속한 가지산파의 절이었다. 일연보다 100여 년 전, 왕사에 책봉되었던 학일 스님이 머물렀던 곳, 학일도 가지산파의 승려였다. 거기서 일연은 5년의 세월을 보냈다.

p528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p530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보이더라도 부분만 보인다. 그가 그린 어느 한 부분만 보이고, 그가 한 말의 어느 한 부분만 들린다. 그래서 원효에 대해서는 가지가지 이야기가 난무한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

 

p531 신라뿐만 아니라 세게의 위인이라 치켜세운 원효에게 결정적인 흠이라면 파게요 그것은 인간적 고뇌라 말하는 춘원의 저변에는 사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p533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 준 사람이다.

 

p534 마구간의 거친 짚단 위에서 태어났다는 아기 예수를 연상해도 좋겠다. 거기는 스스로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고도 이르는 민중의 자리 그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성인이건 그 민중의 자리로부터 위대한 생애를 펼치지 않았던가?

 

p537 『화엄경』에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 가지 길로 나고 죽는다”는 대목을 가지고 무애라 이름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시켰다. 일찍이 이것을 지니고 모든 마을 모든 부락을 돌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다녔는데, 노래로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를,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며 독 짓는 옹기장이에다 원숭이 무리들가지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다.ㅣ

 

p538 나는 애써 그의 행동 저변에 있는 의미를 민중적 신앙의 한 단면으로 해석하였지만, 실수도 한 번으로 족하지, 비슷한 일이 계속되면 변명도 궁색해지는 법이다.

 

p545 한마디로 말하면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불교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의상, 화엄의 마루

p551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p552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

 

p563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이 가득 덮인 언덕에 금을 그어 ‘이게 성곽이다’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함부로 넘지 못할 것이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복을 난루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아무리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p564 그러나 역시 그가 한 활동의 본령이라면 불교의 포교였다. 사찰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특히 화엄의 오묘한 진리를 펼치는 데 그의 생애를 전부 바쳤던 것 같다.

 

p565 원효가 현실주의라면 의상은 교조주의다. 원효의 현실주의를 앞서 소개했거니와 의상의 교조주의 또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결코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닌 까닭이다.

 

p568 국난을 구하고, 부석사 같은 큰절을 지으며 화엄종을 전한 의상의 활동은 실로 눈부시다. 불도를 닦기로 맹서한 이후 그는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직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처의 화신이라고 했다. 일연이 의상을 법사라고 부른 까닭도 이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법사란 말속에는 의상의교조적 신앙 태도가 함의된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 할 게야.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만한 일이 아니지.”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p570 다만 한 가지, 흰두 문화라는 큰 틀에서 그것이 길들여진 것이건 아니건 지금 그들이 사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거기 부렁누 부분이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와 정말로 달리 사는 모습에 대한 문화적 충격이었으리라. 우리가 지금 너무 모질게 살고 있어서 그것은 더욱 선명했겠고.

p571 인류가 가장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귿르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준다.(인도)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

 

p574 해동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p576 순례자의 마음인들 범인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 하나일까? 혜초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 마리 없어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한편 인도인들이 해동 사람들을 일컬어 ‘계귀’라 한다는 재미있는 구절이 마지막 부분에 있다.

 

p580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도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맥없이 스러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 않았던 순례자들을, 일연은 아름답고도 슬프게 추도하는 것이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p590 어떤 사람은 ‘『점찰경』이 번역한 사람 그리고 때와 장소를 모르니 의심스럽다’고 하지만, 이 또한 삼베를 붙들고 황금을 버리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저 경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깊고 정밀해서, 더럽고 흠난 것을 깨끗이 하고 게으른 사람을 분발시키기로 이만한 경전이 없다. 그래서 이름도 대승참이고, 또 육근이 모인 데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래서 개원과 정원사이에 나온 두 석교록에 정장으로 편입되었다.

 

p594 “어인 까닭에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스님은 어디서 온 분이시오?”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중이오.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암에 들어가 미륵보살과 지장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과 간자를 받았소. 새로운 절을 짓고 오래도록 수도할 많나 곳을 찾아올 밖에요. 이 소들이 겉은 우둔하나 속은 밝은 모양이오. 내가 받은 게법이 매우 중요함을 알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지요.”

“짐승도 믿는 마음이 이럴진대 하물며 내가 사람이 되어서 어찌 무심할꼬?”

 

p596 세 사람이 수행하는 방법은 스승의 그것과 방불하다. 제 몸을 버리는 용맹스런 정진과 참회, 그것이야말로 진표가 한 수생의 핵심 아니던가?

 

p597 제자들은 그 옛날 스스잉 표시해 둔 길상초가 자란 곳을 찾아 절을 짓고, 스승을 불러 점찰법회를 열었다. 절 이름을 길상사라 했는데 지금은 법주사를 말한다.

 

밀교의 한 자락

p60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일믕르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운명적으로 인생의 신고를 겪엇거나, 일부러라도 겪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거나, 사람이 이를 수 있는 무상의 경지를 추구해 가자는 데 더 철저하다면 철저한 것이 밀교다. 그러기에 출가담도 금나큼 더 극적인 것일까?

 

평범한 속에서도 진리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래서 깨달은 무사으이 존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불교의 출가자들 속에 연면히 내려오는 출가의 동기를 소중히 여기자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 동기 하나로 깨달음은 단박에 몰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p616 일연의 혜통에 대한 평가는 극진하다. “이제 화상이 무외를 제대로 배워와, 속세를 두루 돌며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교화시킴은 물론 운명을 보는 밝음으로 절을 지어 원망을 씻어 주니, 밀교의 바람이 여기에서 크게 떨쳤다”는 논평은 물론이려니와,

 

산 복숭아 시냇가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

오솔길에 봄이 깊자 양쪽 언덕에 꽃이 피었네

그대가 우연히 수달을 잡았던 인연으로

나쁜 용은 서울 밖으로 멀리 쫓게 되었네

 

라는 찬은, 뼈만 남은 수달이 제 새끼 있는 곳으로 가 있는 것을 보고 출가한 혜통의 인생에 불교가 어떻게 심어져 있는지 보여 주고, 살구 꽃 같은 그의 생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찬미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감통>

p621 지금부터는 세 번에 걸쳐 「감통」편의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삼국유사』의 9개 편 중에 일곱 번째인 「감통」편은 기본적으로 「의해」편과 성격이 비슷하다. ‘감통’이라는 요엉도 중국의 고승전에 나오지만, 승려들이나 불교신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데에서 그렇다. 다만 여기 나오는 승려나 신도들은 고승이라기 보다 다소 평범한 사람들이다. 더러 고스으이 반열에 올릴 만한 승려도 전기로서 엮어져 있지 않다.

 

p623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 우너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잡혔음을, 우리는 이 같은 짤막한 삽화에서 읽을 수 있다.

여분의 옷 한 벌 없이 살아가는 한 승려가, 돌아가 덮을 이부자리 하나 없는 처지에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주고 알몸으로 달려가거니와, 그 순간이 바로 신라 사회의 고갱이였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p632 아미타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기야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과 현실의 삶에 고단하게 매인 사람은 마지막의 자리가 서로 멀다. 그러나 엄장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내였다. 늦게나마 생각을 바꾸고 성실히 수행하여 마침내는 친구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p640 봄바람과 함께 사랑도 오는 것일까? 김현이라는 청년은 밤 깊도록 혼자 쉬지 않고 탑돌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 처녀가 나타나 염불하며 따라 돌았다. 절에 남은 사람은 오직 둘뿐, 시쳇말로 그들은 단박에 눈이 맞았고, 탑돌이가 끝나자 가려진 곳으로 ㄷ르어가 정을 통했다고, 일연은 쓰고 있다.

 

p643 “사람이 사람과 사귀는 것은 누구나 아는 도리이지만, 사람과 짐승이면서 사귐은 정녕 특별한 일이네. 이제 조용해졌으니 진실로 하늘에서 내려준 다행일세. 차마 어떻게 배필로 맞은 이의 주검을 팔아 한 세상 벼슬이나 얻을 요행을 삼겠나?”

 

어쨌건 죽을 목숨, 사랑하는 이의 손으로 최후를 맞겠다는 것. 다소 유미주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겠지만, 한 번 죽음으로 여러 이익이 돌아온다는 말에, 사랑하는 이의 주검을 팔아 한 세상 잘살아 보자 요행을 바라겠냐는 김현도 묵묵히 다를 수밖에 없다.

 

p648 부부의 정 깊으나

산중에 둔 뜻 깊어만 가고

세월이 변하거든 백년가약 그 마음

두려웠네, 저버릴까봐.

 

p651 일연은 말한다. “호랑이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해쳤으나, 좋은 처방으로 잘 이끌어 주어서 그 사람들을 치료했다. 짐스잉라도 인자한 마음씀이 저와 같으니, 이제 사람이면서 짐승만 못한 이들은 어찌하리”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p656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저긍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가,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켜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성인을 만나는가? 의상 스님과 같이 치밀하고 정성스런 사람이 만날 것이며 효소왕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p659 “세월의 탓도 있겠지만 흐릿한 선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나머지는 불상을 보러 온 사람이 완성시키라는 조각가의 배려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멋진 해석이다.

(경주 남산을 보고 프랑스 사진 작가 한사람이 한 말)

 

p660 옛날 계빈에 큰스님 한 분 있었다. 아란야법을 하며 일왕사에 이르렀다. 절에서는 큰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그의 옷차림이 초췌한 것을 보고, 문을 닫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온 것이다. 문지기가 보더니 막지 않고 들여보냈다.

자리를 차지한 다음,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이 나오면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이 물었다.

“어째 그러시오?”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대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

촌철살인의 예화다.

 

p667 저무는 사회 속의 고민

사실 경흥의 이야기 속에는 일연 자신의 고민이 숨어 있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오나성한 시점은 국사의 자리에서 물러 나와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로 보인다. 13세기 후반, 고려 사회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숨어 사는 이의 멋 「피은」

p671 대체로 승려들의 삶이란 피세은거 자체다. 출가가 벌써 이세상의 인연을 일정 부분 끊는 것이고, 산중의 절에 들어가 세상과는 다른 삶을 영위하는 일이니, 자연스럽게 숨어 사는 모양새가 되지 않는가? 그런데도 『삼국유사』안에 다시 ‘피은’이라는 제목의 편을 만들고, 그런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까지 우리 사회에서 불교의 역할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그때까지의 불교는 사회의 전면에 나서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p672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솢우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겟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p674 헛된 명성을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의 줌고을 끌고자 하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p684 숨는다는 것은 오히려 잘난 척 하는 데 불과하다. 연회는 거기서 자신도 모르게 제 속마음을 들켰기에 불쾌했는지도 모른다.

 

p685 연회 스님, 까불더니만 정통으로 맞았군. 그리고 그 미소 뒤에 다가오는 깨달음.

 

p686 숨되 숨는 것이 아니요, 드러나되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불교의 변증법적 피은의 논리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논리대로 쓰여진 일연의 찬은 재미있다.

 

장바닥에서는 어진 이가 오래 숨기 어렵고

주머니 속의 송곳도 한 번 드러나면 감추기 어렵네

뜰 아래 푸른 연꽃 때문에 그르친 것이지

구름과 산이 깊지 않아서 아니라네.

 

결국 연회는 왕의 사신이 찾아오자 “제 업으로 받아야 할 줄 알고, 부르심대로 궁궐로 가서 국사에 임명되었다”고, 일연은 마지막에 쓰고 있다.

 

불교가 보는 효도

p688 도 다른 하나는 일연 개인이 가지고 있는 깊은 효심이다. 그의 생애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무척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일연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 지금 그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추정해 들어가는 일연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는 너무도 분명히 나타나 있어 췌언이 필요치 않다.

p692 그것은 인간에게 닥치는 거대한 싷머이고, 시험 앞에 굴하지 않도록 연단시키는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 관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시험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던 아브라함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갈 많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

 

p699 복을 빌어 받되 받은 다음에는 제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영특한 대성으로서야 자기가 잘 판단해 큰복을 받았으니, 모든 복이 제 한일의 결과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의기양양하게 들판에 나가 사냥을 즐기며, 들어온 복을 한껏 누리자고 기꺼워하기도 했겠다. 그런 그에게 따끔한 경고가 내려온다. 대성이 거칠 것 없이 죽인 토함산의 곰 한 마리. 그것이 귀신으로 나타나, 이불이 온통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꾼 대성의 흉측한 꿈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살아온 날을 다시 돌아보니 마음에 느기는 것이 생겼다는데, 불국사와 석굴암은 그런 마음의 돌이킴으로 탄생했다. 석불사가 지금의 석굴암이다.

 

p703 세속의 인연을 가르기란 그렇게도 질긴 것이지만, 진정의 마음은 못내 아프기만 하다.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p704 향가란 어떤 노래인가?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화하여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p711 향가 최고의 작품,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라으이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니시오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이 노래는 바로 경덕왕을 감동시켰던 향가다. 경덕왕은 이 시로 인해 충담사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향가의 전편이 전해지지 않지만,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이 노래는 최고의 작품에서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p718 충성심과 이기주의의 사이, 신충의 「원가」

좋은 잣은

가을이 와도 쉬지지 않는다네

너 어찌 잊겠느냐

우러르던 낯이 계셨는데

달 그림자는 옛 못에

흐르는 물결을 애처로워 하는구나

모습은 바라보지만

세상 모두 아쉽기만 할 뿐

(후구는 잃어버림)

 

p720 세속의 명예와 권력이 좋다고는 하나 인생의 무상함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으랴. 경덕왕 22년, 신충은 두 친구와 더불어 벼슬을 그만두고, 산으로 들어가 절을 지어 그 곳에 거처하며, 임금을 위해 복을 빌었다. 신충이 지은 이 절은 지금 경남 산청의 지리산 자락에 터만 남아 있는 단속사다.

 

일연, 혼미 속의 출구

p725 일연의 생애

일연은 1206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이었으며 이름은 견명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홀어머니의 손에 양육되었는데, 아홉 살 나던 해 전라도 광주의 무량사로 취학한 것도 이런 사정에서 기인하지 않나 싶다.

처음에는 다만 공부를 하기 위해 갔던 무량사에서 인연이 되어 일연은 열네 살이 되던 해 설악산의 진전사로 가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진전사는 신라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아홉 선문의 하나였던 가지산문에 속해 있었으니, 그는 여기서 산문이 결정되었고, 오앙명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는 산문의 적이었기에 평생을 이 파에 속한 승려로 살다 갔다.

(중략) 일연이라는 이름은 그의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로는 개명의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다. 다만 옛 사람들의 작명 관습으로 보아, 세속에서의 이름과 승려가 되어 처음 가진 이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이름ㅇ르 만년에 고쳤다. 이 개명에는 놀랍고도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p733 새로운 시대상을 창출한다는 명제 앞에서 다른 산문의 경전을 해석하는 일이나 다른 ㅅ나문의 고승을 스승으로 삼는 일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거기에 가르침의 본질이 있다면 가서 배워야 하고, 그 업적을 널리 현창하여야 하는 일이다.

 

p734 일연에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이 보다 구체화되는 것은 『삼국유사』의 편찬이다. 내욎거으로 불어닥쳤던 거대한 변화의 조류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사고방식의 해체를 가져왔는데, 『삼국유사』는 그같이 변화된 모습을 담는 그릇이었다.

 

p736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때면, 괴이한 힘이나 자자분한 귀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때에, 부명에 맞는다든지 도록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변화를 타고 큰 틀을 잡아 나라를 일으킨다.

 

p741 가치 있는 것과 나아갈 향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 보수주의로의 회귀였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 사회의 그런 성격이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 손을 들기 어렵게 한다.

 

 

3. 내가 저자라면

내가 저자라면 『삼국유사』를 대중에게 어떻게 전달 할 수 있었을까? 두께는 두꺼웠지만 어렵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자 고운기씨는 성공한 것 같다. 나도 청소년을 위한 책을 써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엔 어려운 수학 관련 역사, 철학, 인문서적들을 재미있게 풀어내줘야 한다. 하지만 원전에 손상이 가지 않게, 특히 수학의 역사가 잘못 전달되는 일 없게 진실을 진실하게 이야기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본 책은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처음에 차례 부분을 볼 때는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아 힘들었는데, 내용을 읽고나니 제목 하나하나가 이해가 됐다. 이 부분은 차례를 보고 책을 사는 사람들을 좀 더 배려해야 하는 붑누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원전을 번역해서 실어줬다기 보다 독자가 궁금해 할 것 같은 질문을 저자가 하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교하여 설명해줬다는 점이다. 물론 깊이 있게 들어가는 느낌은 없었지만, 『삼국유사』를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이 10년 전에 나와 그런지 편집에서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삼국유사』의 순서에 따라 차례를 정했으므로 중간에 간지를 넣고 어느 부분에서 나온 것인지 표시를 해준다면 독자가 훨씬 더 분별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쓸 책을 구성해 본다면 아마 나는 역사적 순서 또는 수학의 영역으로 부분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수학에서 가장 오래 된 역사를 가진 것은 바로 ‘수’이다. ‘수’의 기원부터 다룰 수 있겠다. 그런데 사실 수의 기원은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중학생이 배우는 수학의 영역은 총 6가지 인데, ‘수와 연산, 문자와 식, 함수, 확률, 통계, 도형’ 이다. 이것을 하나씩 한권으로 만들어 구성할지, 아니면 6항목은 한 권에 다 실을지는 내용의 양을 봐서 결정할 일일 것 같다. 주제가 정해지고 나니 이것저것 구상을 하게 된다. 또 철학자 순서대로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수학, 플라톤이 말한 수학, 피타고라스 학파가 말한 수학처럼 구성을 해 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고운기씨의 책은 『삼국유사』라는 기존의 책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의 순서에 맞춰 차례를 구성한 것은 아주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교 역사시간에 배우는 것 이외 역사적 장소를 사진으로 함께 실어주는 생동감을 더해졌다. 무엇보다 그 사진을 보고, 또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보고 싶은 곳들이 손에 꼽힌다는 것도 책읽기의 즐거움을 더해준 것 같다. 내 책에도 학생들이 보고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이나 삽화가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그 당시 수학적 발견을 이룩하게 된 배경을 되는 사진, 고민하는 수학자들, 발견 당시의 기쁨과 즐거움들이 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책의 차례를 집적 써보면서 어떻게 방대한 양의 내용을 차례차례 잘 정돈할 수 있었는지 느껴본다.

 

차례

머리말

들어가며-2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_ 11

고구려와 북방계 _ 35

신라와 남방계 _ 53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_ 70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_ 88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_ 103

밤에 찾아오는 손님 _ 120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_ 139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_ 159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_ 178

권력의 끝 _ 196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_ 214

첫 성전환증 환자 _ 234

왕이 되는 자 _ 252

나라가 망하는 징조 _ 269

지는 해 뜨는 해 _ 289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_ 307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_ 327

견훤, 비운의 영웅 _ 347

신비의 왕조, 가야 _ 364

 

흥법(興法)

불교로 보는 역사 _ 385

순교의 흰 꽃 이차돈 _ 400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_ 416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_ 437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_ 455

노힐붇그과 달달박박 _ 472

낙산사의 힘 _ 487

 

의해(義解)

운문사 이야기 _ 509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_ 530

의상, 화엄의 마루 _ 549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_ 569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_ 581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_ 603

 

감통(感通)

평범한 살마의 감동적인 이야기 - 621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_ 637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_ 653

 

피은(避隱)

숨어 사는 이의 멋 _ 671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_ 687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_ 704

일연, 혼미 속의 출구 _ 723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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