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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1일 11시 56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

고운기 글 / 양진 사진 / 현암사 /2002년 초판, 개정 4 2009

 

 

1.   저자에 대하여

 

1)     일연스님에 대하여

 

이 책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에서는 이 곳 저곳을 다니며 인간 일연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삼국유사를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걸 조각조각 모아 꿰매어 보면 이렇다.

 

1206년에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군(지금의 압량면)에서 태어났다. 원효와 고향이 같다. 속성은 김이었고, 이름은 견명(見明)이었다. 열아홉살 아직 꽃피지 않은 나이에 그를 낳은 어머니는 아들이 출가한 후 96세까지 혼자 살았다. 아홉살 되던 해 전라도 광주의 무량사로 취학했다. 강원도 양양의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출가한 것은 1219년 그가 14세였다. 진전사는 신라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아홉 산문의 하나였던 가지산문에 속해있었다. 그는 왕명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는 산문의 적이기에 평생 이 파에 속한 승려로 살다 갔다. 승려로서의 처음 이름은 회연 (晦然)이었다. 22세에 승려들이 과거 시험인 선불장에 나가 합격할 때까지 이 절에 머물렀다. 일연의 비문에는 이 시기를 여기에서 여러 사찰을 돌며 공부하는데 명성이 대단했다. 같은 도반들은 구산사선의 우두머리가 되리라고 예상했다.’라고 나와 있다. 이후 몽고 전란기의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도 수도생활을 계속하여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등의 직급에 차례대로 올랐다. 그는 자기 생활에 충실했다.

 

일연 비문에서는 그가 깨달음을 경험한 때를 1236년 그의 나이 31세였다고 알려준다. 한 해 전 가을 일연은 몽고군의 침입을 피해 경상도 달성군의 비슬산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가장 피해가 컸다는 몽고군의 3차 침입시기였다. 마흔 네 살에는 당대의 실력자 정안이 남해의 개인집을 내놓고 정림사를 만들었는데 그 곳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야흐로 불교계의 지도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왕명을 받들어 불교행사를 주관하고, <충편조동오위>를 저술했다.

 

일연이라는 이름은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이었고, 불교의 이름은 회연이라 지어 밝음과 어두움을 대조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 다음에 자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 그러다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 자를 넣었다. 1281,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명실상부한 한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것이다.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지 않는 운수행각으로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을 하는 동안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모았다. 503년간 강화도로 옮긴 왕궁 가까운 곳에서 왕을 모시고 있었다. 영일만에서 가까운 포항 오어사라는 작은 절에 찾아든 것은 환갑을 바라보던 나이였다. 1290년경에 삼국유사를 썼다. 참고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1145 (고려 인종 23). 삼국유사 안에 도화녀와 비형랑 같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도 승려신분에 걸림없이 기록하였다. 여든이 가까운 일연은 국사의 자리를 버리고 고향 근처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나이는 일연의 나이로 79세였다.

 

삼국유사에 적혀있는 저자 이름은 수식어가 매우 길다. ‘국존 조계종 가지산하 인각사 주지 원경충조 대선사 일연 찬국존은 국사와 같은 말이다. 군위 인각사는 일연이 마지막으로 주석했던 절이고, 원경충조는 일연이 죽은 다음에 나라에서 내려준 시호이고, 대선사는 고려시대 승려의 위계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다.    

 

 

2)     일연스님에 대한 개인적 평가

 

저자인 고운기씨는 삼국유사가 나오는 배경에 대해 한 꼭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문에 익숙해졌고 변방이었던 원나라가 한족을 몰아내고 중국을 차지한 것, 무신정변으로 사람들이 일종의 시각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그래서 사대주의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시점이었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그가 스님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관료들의 중국중심 사대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읽어 가다보면 그가 스님의 행적을 성실하게 걸었고, 국사급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도 한다. 고려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유지해서 스님이 천민의 지위에 있었던 조선시대에 비해 그는 고려시대 스님, 게다가 고려를 개국한지 겨우 150년 지난 시절의 스님이었다. 그가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한 때는 육십이 넘은 때였다. 원숙한 원로의 모습이었다. 요즘 뉴스에서 통일교 후계자로 떠오르는 문형진목사에 대해 듣는다. 하버드대학교 비교종교학 석사라는 그의 이력을 읽다가 일연스님을 생각한다. 이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그 시대의 엘리트였을 것 같다. 김부식은 사마천의 <사기>를 본받아서 <삼국사기>를 저술했다. 그런데 유사이래로부터 한 무제까지의 중국역사를 기록했던 사마천과 어찌보면 일연스님이 더 비슷한 것 같다. 역사서술을 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과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3)     고운기씨에 대하여

 

책 왼쪽 날개에는 이렇게 나온다.

 

196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삼국유사 관련 연구서로 <일연을 묻는다><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삼국사기 열전>을 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등 세 권의 시집을 선보였다. 1999년부터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연구원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시가를 비교 연구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4)     고운기씨에 대한 개인적 평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헌사 형식의 저자서문을 읽다가 나는 궁금해졌다. 거기에는 혁명가 손문이 자신을 묵게 해준 시골집 촌부에게 준 두 줄 시가 나온다. 이십 년 가까이 삼국유사를 맴돌았던 고운기씨가 13세기 무렵 이 땅에 살았던 혁명가, 일연스님이 자신에게 던져준 화두와 같은 것이라 했다.  자신에게도 닥쳤던 안위와 감고의 세월을 곱씹는 동안 세상 보는 눈이 조금 열렸고 그 때문에 그 혁명가의 화두 또한 보였다 말한다. 그에게 왔던 안위와 감고의 거친 세월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그래서 만약 내가 그를 직접 만난다면 이걸 물어보고 싶다.

 

첫째, 말하지 못하고 머금고 있어야 하는 어떤 것이 선생님의 인생에 있었는지, 그 시기에 삼국유사 읽기가 그에게 그걸 헤치고 나오는 힘이 어떻게 되었는지요?

둘째, 일본에 연구교수로 가계셨다. 거기서도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를 해서 책을 내셨다. 일본에서 삼국유사를 가지고 간행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우리 나라 말고 다른 나라에서 뭣하러 삼국유사를 연구합니까? 그들에게 이 책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셋째, 한 가지 책이 한 사람 일생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이 책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넷째는 내가 그에게 물어볼 게 아니라 내가 그에게 대답해야할 것 같다. 그는 안위와 감고의 거친 세월 피와 살이 되는 어떤 기제를 찾아서 뒷사람들에게 남겨주었는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들 하고 있는 지를 이 땅의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 그가 머리말에서 던진 질문에 대해서 이 땅의 사람 중에서 저요? 저 말인가요?” 하면서 대답을 해야할 것 같다. 그러자면 이런 식으로 읽지 말고 더 열심히 읽고 더 성실히 해야하는데 자신이 답답하고 한심하다.  

 

5)     양진씨에 대하여

 

책 왼쪽 날개의 사진가 소개다. 이게 9월 오프수업 과제였다. 그러니까 몇 년에 어디서 태어났는 지를 적어야하나보다.

 

1966년 대전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사진 동아리 연영회에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고,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담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1991년부터 삼국유사 이야기에 나오는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기록한 사진으로 <일연을 묻는다> <길 위의 삼국유사>를 출판했고, 2006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사진에 담긴 그곳, 거기 묻어둔 그리움이라는 주제로 삼국유사 사진을 엮은 개인전을 열었다. 애 책의 해설도 그가 썼다. 

 

6)     양진씨에 대한 개인적 평가

 

나는 고운기씨와 양진씨가 연세대학교에서 만난 지인일까? 아니면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시리즈를 만들려는 기획을 한 현암사가 발굴해낸 사람일까? 우연히 삼국유사를 전공하여 연구하는 국문학자와 그곳을 답사하는 사진가가 만날걸까 궁금했다. 특별한 주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삼국유사의 장소를 찾아 다닌 지가 10년이 넘는다는 사진 아래 깨알같이 적힌 설명을 읽는다. 이제는 사라진 지명을 찾아 산을 오르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꽃이라도 찍어내려오는 그의 정성을 보면서 이 책 읽기가 훨씬 즐거워졌고, 어려운 삼국유사가 만만해졌다. 고운기씨와 더불어 양진씨의 수고 덕분이다. 고맙다.  

 

 

2.   내가 저자라면

 

     1)     목차 및 뼈대

 

원 삼국유사의 목차와 고운기씨가 선택한 목차에 차이가 있다. 그런데 큰 목차는 같았다.

 

삼국유사는 전체가 [왕력 王曆], [기이 紀異], [흥법 興法], [탑상 塔像], ], [의해 義解], [신주 神呪], [감통 感通], [피은 避隱], [효선 孝善] 이렇게 9개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력]은 연대기로 삼국유사 전체 기술의 기반이 된다. [기이]편은 서문에서 밝힌 대로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을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 지 모르나 수록하겠다고 한다. 단군신화가 처음으로 문서상에 기록되게 되었다. 기이편에서는 한 조를 한 왕과 그 왕대의 특징적인 사건 하나를 묶어서 기술해나갔다. [흥법] 이하의 편에서는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했다. (7)

 

삼국유사에 실린 전체 조목 수는 약 140여 개다. (9)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는 본문을 읽어가며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었다. 140개의 조목은 40개로 묶는 동안 순서가 바뀐 것이 있다. 삼국사기와 면밀히 비교하고 승전을 참고하여 서술했다. 10세기까지의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 일연이란 인물에 의해 재구성되었음을 유념하라고 일러두고 있다. 더불어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고 상상력이 가미된 부분이 있음도 덧붙이고 있다. (10)

 

고운기씨의 보급판이 있어 좋았다. 2005년에 나온 보급판을 먼저 읽었다. 논술을 준비하는 중고등학생과 고전 읽기를 시작하는 대학생을 위해 편집한 보급판은 칼라화보를 빼고 원책과 본문내용은 똑같았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본 내용이다. V는 보급판에 포함된 내용이다. 보급판의 소제목들은 더 아름답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었다.  

 

머리말

V들어가며

 

기이

V이 땅의 첫 나라 단군신화가 여기 있다.

V고구려와 북방계

V신라와 남방계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V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V밤에 찾아오는 손님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V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V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권력의 끝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V첫 성전환증 환자

V왕이 되는 자

나라가 망하는 징조

지는 해 뜨는 해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V견휜, 비운의 영웅

신비의 왕조 가야   

 

흥법

불교로 보는 역사

V순교의 흰 꽃 이차돈

탑상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V노힐부득과 달달박박

V낙산사의 힘

의해

운문사 이야기

V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의상, 화엄의 마루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신주

V밀교의 한 자락

감통

V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V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피은

V숨어 사는 이의 멋

효선

불교가 보는 효도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 혼미 속의 출구

 

2)     장점 및 보완점

 

장점은 첫째, 10여년간 삼국유사의 현장을 답사해서 찍은 양진씨의 칼라 화보가 독서의 흥미를 돋우었다.

 

둘째, 삼국유사의 원문으로 안내하는 고운기씨의 일화, 배경설명이 좋았다. 김유신과 김춘추, 가야민족과 신라민족의 결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문희와 연결시킨다든지, 일본의 프로레슬러 히미코와 연오랑 세오녀를 연결시키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어릴 때 시험문제에서 틀린 이야기를 하면서 삼국史기와 삼국유事를 구분한다든지 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도입부의 농담도 다 계획적으로 하고 있는 듯 했다.

 

셋째, 삼국사기로가 아니라 삼국유사로 신화로 내려오던 옛 일부터 고대국가가 된 이후의 사연들을 읽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 하다. 중국의 <사기>가 역사서술이 본업이 아니었고, 무제에게 직언을 하다가 죽음과 마찬가지인 형벌을 받은 사마천에 의해 씌어진 것처럼, 삼국유사가 사대주의의 대상인 중국이나 중앙권력과 상관이 없고, 사유재산과 가족을 갖지 않은 일연 노스님에 의해 씌어져 다양한 인간군상을 좀 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김부식은 <사기>를 배운다는 의미로 이름마저 <삼국사기>라고 지었는데 이건 좀 아이러니한 것 같다. 이것은 고운기씨가 삼국유사를 안내하며 유지한 시각이기도 하다.     

 

보완점으로는 연오랑세오녀를 히미코랑 연결시키는 것처럼 이전의 것과 연결된 현재의 문화적인 트랜드를 읽는 게 좀 더 들어오면 재미있을 것 같다.

 

3)     감동적인 장절

 

    고운기씨 서문 : 손문 이야기에서 화두를 받았다는 구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차이를 저자 경험에서 가지고 옴

 

    절에 다니면서 스님에게서 아름답게 듣던 옛 이야기 몇 개

 

    단군신화에서 웅녀, 또는 곰부족의 주도성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가 원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거였구나 알게 되는 이야기들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혁명의 나그네가 되어 떠돌던 손문이 광동성 궁벽진 어느 후원자의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빈손의 그는 사례 대신 글 한 폭을 남기고 떠났다.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그런가? 나는 타국의 조그만 연구실에서 손문의 이 글을 곱씹었다. 내 감히 혁명가 쪽에 선다는 말 아니다. 그 글을 받은 어느 촌부가 되어, 그렇게 쓴 혁명가의 속내를 헤아리겠노라고. 거기에는 정녕 안위와 감고의 어느 한 쪽이 아닌, 슬픔과 기쁨의 정반합으로 이르게 되는 변증법적 합일의 세계가 있다. 벌써 이십년 가까이 나는 삼국유사를 맴돌았다. 이는 분명코 13세기 무렵 이땅에 살았던 한 혁명가가 내게 던져 준 화두였다.

 

삼국유사를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에다 비유해 본 적이 있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나는 여기 서툰 요리사로 나섰다. 그래서 조금 요리가 되었다면 그 공을 앞서 내보인 손문의 글에 돌리겠다. 내게도 닥쳤던 안위와 감고의 세월을 곱씹어 보는 동안 세상 보는 눈이 조금 열렸

, 그 때문에 내 혁명가의 화두 또한 보이기 시작했기에 그렇다. 혁명가는 그 스스로 안위와 감고의 거친 세월 속에서, 도리어 피와 살이 되는 어떤 기제를 찾아 뒷사람에게 남겨 주었던 것 같다. 나는 그 틀에 기대어 삼국유사 읽기의 한 방법을 내놓은 것인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들어가며

 

3 나는 앞서 두 가지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했다. 어쨎거나 이 두 가지 사실은 삼국유사를 이해해 들어가는 중요한 단서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은 분명한 차이가 사()와 사()에 있다는 점

 

5 삼국유사는 전체가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이렇게 9개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편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해 나가겠지만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의 왕력, 준역사서로서의 기이,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의 여러 편으로 삼대분해 볼 수 있다.

 

5 기이편은 그 서문에서 밝힌 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의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 지 모르나 굳이 수록하겠다는 것, 그래서 단군신화가 처음으로 문서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기이 편에서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한 조를 한 왕과 그 왕대의 특징적인 사건 하나를 묶어서 기술해 나간 점이다.

 

8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 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8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책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조선 중종 때 간행된 것인데, 이 때의 연호를 따서 정덕본이라 부른다.

 

8 근세에 들어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 도쿄대학의 배인본 삼국유사가 그것이다. 이는 간다본과 도쿠가와본을 저본으로 한 것인데, 이 두 책이 일본에서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일본군 장수 한 사람이 퇴각하면서 수많은 종류의 책을 가지고 갔는데 거기 이 두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말한 정덕본 중의 하나인 이 두 책은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불충분한 삼국유사였다.

 

 

이 땅의 첫 나라

뿌리를 찾았던 첫 세대의 상징

세 부분으로 된 고조선조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위만조선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함께 읽어야할 이유

 

12 10세기부터의 고려사회는 중국적 유교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유려한 한문으로 집필된 삼국사기의 첫머리에 단군은 실리지 못했고 세월은 150여 년을 흘러야 했다. 그 사이 사회가 변했다. 정권 담당자도 바뀌고, 크나큰 나라 몽고와 20여 년에 걸친 전쟁도 겪었다. 곤고한 세월이었다. 그 쓰디쓴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은 셈이다. 승려 출신의 일연 같은 이가 삼국사기와는 다른 책을 편찬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다만 거기에도 무한정한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큰 나라야 제 일을 제 방식대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한편 비애스러운 그러나 풍부한 이야기의 세계가 거기서 만들어 진다.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한편 즐겁기도 하다.

 

14 단군신화가 실린 삼국유사의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제목은 기이 편의 고조선 조다. 이 조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편의 책에서 인용했다. 첫번째 부분은 위서라는 책에서 인용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000년 전쯤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는데, 요 임금과 같은 때이다.”

 

15 두번째 부분은 고기에서 인용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몸통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는 다시 세 대목으로 나뉜다. 먼저 환웅이 세상으로 내려온 이야기

 

[옛날 환국의 아들 환웅은 하늘 아래 사람이사는 세상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자식을 뜻을 알고 아래로 세 봉우리가 솟은 태백산을 굽어보니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의 증표 세 개를 주고, 가서 다스리도록 하였다.

환웅은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 곳을 일러 신시라 하였고, 스스로를 환웅천왕이라고 불렀다. 풍백, 우사, 그리고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운명, 질병, 형법, 선악을 주관하는 등 무릇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보고, 세상에 있으며 교화를 베풀었다.]

 

16 그가 추구한 궁극의 이상은 한 마디로 잘 나타나 있다.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곧 홍익인간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국의 생각을 보여주는 말이다.

 

16 그 때 곰과 호랑이가 굴에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늘 환웅 신에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빌었다. 환웅 신은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날을 주고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아라.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게야라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는 받아서 그것을 먹고 21일동안 꺼렸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제대로 꺼리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곰 아가씨는 누구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다. 잉태하고 싶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혼인하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 불렀다.

 

18 곰은 뜻한 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 단군을 낳게 되는 과정까지 유심히 읽다 보면 재미있게도 곰이 세운 치밀한 계획에 환웅이 한 발 한 발 말려들더니, 드디어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곰은 여자가 되는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호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하나의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단군은 그렇듯 현명한 곰 부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고 태어나 이 땅의 첫 왕이 되었다.

 

18 아사달의 위치 : 연구자들은 일연이 말한 개성 동족을 대체로 구월산이라 보고 있다. 특히 구월산에는 삼성당이라는 제각이 있는데, 여기서는 환인, 환웅, 단군의 세 성인을 제사지낸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자들은 아사달이 요동 쪽에 있다고 보면서 고조선의 범위를 무척 크게 잡아놓고 있다.

 

19 단군은 어떻게 1500년을 살았을까? : 17세기에 쓰여졌다는 <규원사화> 자체가 위서일 가능성이 높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다. 다만 단군 한 사람이 1500년동안 다스린 게 아니라 그의 계보가 이어져 나간 것이라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았고, 그래서 자료도 없이 궁색하나마 이런 이름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21 우리는 먼저 단군 신화의 성격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곧 신화 중에서도 단군 신화는 창세 신화인가 아니면 건국신화인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신화는 건국신화이다.

 

24 왜 민족의 주체성이던가? 어떻게 민족이라는 각성이 가능했던가? 잘 알려져 있듯이 몽고는 중국의 변방에서 일어나 중국 본토를 삼키고, 거기에 나라를 세운 최초의 민족이다. 중국이 자주 변방의 침입을 받자 그 근심을 덜려고 만리장성도 쌓았지만 전체를 송두리째 내놓은 적은 없었다. 북위가 안방을 차지하는 기간이 200여 년이라 해도 한족의 중국은 남쪽에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천자의 나라며 그러기에 모든 변방은 중국에 복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중국인에게 아니 우리나라 같은 옆 민족에게까지 강고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체가 무너졌다. 아니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중국의 자존심을 하루아침에 땅바닥에 떨어뜨린 몽고의 원 건국, 남의 불행한 일에 잘됐다고 박수칠 일은 아니지만, 한편 변방의 나라들로서는 숨통이 트일 일도 되었다.

 

28 앞서 나는 고조선조와 위만조선 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한다 했다. 그럴 까닭이 충분하다. 기자조선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고, 죽은 자식 무엇 만지듯 있지도 않은 인용처를 대가면서 단군을 그려낸 일연의 의도를 알자면, 열쇠는 이 위만조선 조에 있다.

 

29 두 가지 의문을 종합해 보면 위만이 조선 출신의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일찍이 중국의 전국시대에 연나라는 기자가 다스리고 있던 조선 지역을 복속시켰다. 조선의 유민들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을 터인데, 위만처럼 연나라의 본토에 들어가 자리잡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연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그 틈으 타서 옛 땅을 회복해 조선인만의 나라를 재건했다고 보는 것이다.

 

29 약간의 억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했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

 

 33 여기까지 위만조선의 건국과 멸망, 그리고 한사군의 설치과정은 중국 쪽 사료 <전한서>에 의거해 있다. 이것이 앞서 고조선과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다. 신빙성을 높이자면 가급적 중국 쪽 사료를 내세워야 한다.

 

고구려와 북방계

 

한반도의 전국시대와 삼국의 정립

동명왕 기사, 사기와 유사의 차이점

동명성왕의 위대한 탄생

북방계의 다른 흐름, 백제의 성립

 

35 조선의 시대, 곧 고조선과 위만조선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여러 나라가 군웅할거 하는 시대를맞는다.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물리친 자리에 이른바 4군을 두는 때와 같이 하는 시기인데 나는 이것을 앞서 한반도판 전국시대라 부르기로 했다.

 

35 우리는 여기서 삼국사기가 단군조선부터 여러 부족국가를 무시한 것이 사대주의적 역사관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김부식과 관찬 사학자들의 관심은 책의 표제대로 신라, 고구려 백제 3나라의 역사만을 충실히 쓰는데만 있었다.

 

36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말하듯이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반도의 고대 왕권 국가가 위 세 나라 밖에 업음이 자명하다.

율령반포가 고대 왕권국가의 시작임-à자신의 율령을 갖는 것이 자기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이에게 중요한 일임.

 

37 기이편의 북부여 조를 보자

[전한서에서는 선제, 신작 3년은 임술년(기원전 59)인데 4 8일에 하늘님이 흘승골성에 내려와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도읍을 정한 다음 왕이라 불렀다. 나라의 이름은 북부여요, 스스로 해모수라고 불렀다.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였는데 해라는 글자를 성으로 삼았다. 부루왕은 뒤에 옥황상제 곧 하늘님 해모수의 명을 받들어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왕이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라 하였으니 곧 고구려의 시초이다.] 역시 고기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37 도읍을 옮긴 사실과 고구려 동명왕과의 관련성은 다음 동부여조를 읽어보아야 분명해진다. 일연은 이 부분을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북부여 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이 꿈을 꾸었는데 하늘님이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내 자손을 시켜서 이 곳에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너는 이 곳을 피하여라.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이라 이름 붙인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니 왕도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유하여 도읍을 그 곳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37 부루는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손을 얻고자 하였다.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마주서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부루가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 보라 하니, 금빛 나는 두꺼비 모양의 아이가 있었다. 부루는 기뻐하며 이는 곧 하늘이 내게 주신 귀한 자식이 아니겠는가?” 하고 거두어 길렀다. 이름은 금와였다.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는데 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아 왕이 되었고 다음은 태자 대소에게 이어졌다. 그렇게 이러지기는 해도 왠지 부루의 후손들이 왜소해져 가는 느낌이다.

 

39 고구려조

……“나는 하백의 딸이요, 이름은 유화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나와 노닐 때에 한 남자가 자신은 하늘님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신산의 아래 압록강변에 있는 집안으로 꾀어 관계를 맺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절차도 없이 남자를 따라갔다 꾸짖으시고 이 곳에 가두었습니다.” 금와는 이를 기이히 여겨 방안에 깊이 가두었다. 그런데 햇빛이 비추자 몸을 움직여 피하게 했으나, 해 그림자가 또 좇아와 비추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거니와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은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는데 다들 먹지 않았고, 또 길거리에 버렸는데 소나 말이 피해 갔으며, 들판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들이 덮어주었다.

왕이 쪼개보려 했으나 깰 수도 없어 결국 어미에게 돌려 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듯한 데 두었더니 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었다. 골격과 겉모습이 헌걸차고 우뚝했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헌칠하여 비상했고,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이면 백 명중이었다. 세간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했으므로, 이를 가지고 이름을 지었다.    

 

42 일연은 고주몽의 탄생기 뒤에 주림전의 제 21권에서 인용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첨부해 놓았다. ‘ 옛날 염품리왕을 모시던 계집종이 아이를 가졌는데 점쟁이가점을 치더니 귀한 인물이라 꼭 왕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내 자식이 아니니라 죽여야겠다고 하자 종이 말하였다. ‘기운이 하늘로부터 온 까닭에 내가 잉태를한 것입니다.” 아들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하여 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핥아주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말이 젖을 먹여 주었다. 그리하여 죽지 않고 부여의 왕이 되었다.” 그러면서 동명왕이 졸본부여의 왕이 되었음을 이른다. 이는 졸본부여가 또한 북부여의 다른 도읍인 까닭에 부여왕이라 부른 것이다. 영품리는 곧 부루왕의 다른 이름이다. 

 

43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신화는 다음에 살펴볼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와 비슷하다. 다만 주몽은 하늘님으로 이어지는 부계와 신이한 존재로서 모계를 두로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난생 설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첫 출발의 의미를 문학저긍로까지 보이게 하는 이 표현은 곧 그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하다.

 

44 왕은 주몽에게 말 기르는 일을 시켰다. 주몽은 그 가운데 좋은 말을 알아보고는 먹이를 줄여 비쩍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지게 하였다. 왕은 살진 말을 타고 마른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아들들이 여러 신하와 함께 해코지를 하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서 일러 주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너에게 해코지를 하려 하는구나. 네 재주로 친다면 어디 가든 되지 않겠느냐? 빨리 대처하려무나.”

이에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을 친구 삼아 길을 떠났다. 엄수에 이르러 물을 바라보고, ‘나는 하늘님의 아들이오, 하백의 손자이다. 오늘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데 쫒아오는 자가 다가오니 어찌하리라고 말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다 건넌 다음에는 다리를 풀어버려 추격하던 말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48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를 인용한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인데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여의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다름은 온조였다. 이들은 나중에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때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48 주몽이 북부여를 떠나기 전에 이미 아들을 하나 낳았었다. 아들은 신표를 남겨두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오고, 그가 고구려의 2대 유리왕이 된다.

 

49 그런 다음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서 충실히 인용하고 있다.

 

비류와 온조가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지금의 서울이다. 형제는 부아악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의견이 갈렸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기대로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에 큰 바다가 막혀 잇습니다 .이만큼 하늘이 내린 요새와 땅이 주는 이득이 큰 곳을 얻기 어렵지요.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하들의 이런 간청에도 비류는 듣지 않았다.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다. 한편 동생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열 명의 신하가 보필을 하게 되어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이 때가 바로 신라로는 박혁거세왕 39 (기원전 18)이다. 

 

신라와 남방계

 

남방문화 속의 신라

신라 여섯 부족은 또다른 오리지널

혁거세 탄생, 또 하나의 이야기

선도산 신모에서 나타나는 신라 왕실의 성격

 

57 일연이 쓰고 있는 혁거세 탄생 신화를 보자

 

전한의 지절 원년은 임자년(기원전 69)인데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족의 시조들이 각각 자세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강변 위에서 모여 논의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다스리려 하나 백성을 이끌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제멋대로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지요. 어찌 덕을 갖춘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두지 않습니까?”

그런 다음 높은 곳에 올라 남쪽으로 양산을 바라보니, 그 아래 나정 곁에 이상스런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고, 흰 말 한 마리가 무릎 꿇어 절을 하는 모습을 나타났다.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이 하나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울었다.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 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도 이상하게 여겨, 동천에서 몸을 씻어 주었다. 몸은 광채를 띠고, 날짐승 물짐승이 춤을 추었으며,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이 때문에 혁거세라 이름을 지었다. 왕 위에 올라서는 거슬한이라 하였다.

 

58 이 때 사람들이 다투어 경하 드리고는 이제 천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을 갖춘 여자를 찾아 임금의 배필로 삼아야겠네라고 말하였다. 이 날 사량리의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 어린 계집아이를 낳았다. 몸매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았다. 월성의 북천으로 데려가 씻겼더니 그 부리가 발락 곧 떨어져 나갔다. 이 때문에 그 냇물의 이름을 발천이라 하였다. 남산의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짓고 이 두 성스런 아이를 받들어 모셨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생겼는데 알이 표주박과 같아, 마을 사람들이 표주박을 박이라고 한 데 따라 성을 박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태어난 곳 우물의 이름으로 이름을 붙였다. 두 성인의 나이 열 세 살에 이르렀다. 오봉 원년은 갑자년 (기원전 57)인데, 사내아이를 세워 왕으로 삼고 이어 계집아이는 왕후로 삼았다.

 

62 혁거세 탄생에 대하여 일연은 같은 삼국유사 안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적어놓았다. 감통 편의 첫 이야기인 선도성모가 불사를 즐기다조에서다. 이 이야기는 본디 지혜라는 비구니가 불사를 일으켰다가 힘에 부쳐 끝까지 못하고 있는데, 꿈에 선도산의 신모가 나타나 도와주어 일을 마쳤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신모는 서연산, 선도산에서 오래 머물며 나라를 지키고 도왔거니와 신령스런 이적이 무척 많았는데 나라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세운 혁거세와 그 부인도 낳았다고 한다.

 

66 선도산 성모는 누구이며 어떻게 보아야할까? 우리는 이 대답을 위해 우리들의 민간신앙에 묻어 있는 신모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의 여신 신화 성모천왕 전승과 성거산의 여신정승이다. 먼저 지리산의 성모천왕 이야기다. 갑자기 산 개울이 배도 오지 않는데 넘쳐흘렀다. 한 스님이 이상히 여겨 천왕봉 꼭데기에 올라가 보자 그곳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딸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 이 같은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다 이를 무조신화라 한다.

 

66 성거산은 개성 근처의 우병현에 있다. 여기서 호경이 여신의 도움으로 산의 대왕이 되는 과정은 혁거세가 선도산 신모에게서 태어나 왕위에 오르는 과정과 무척이나 닮았다. 한 쪽이 부부관계라면 한쪽이 모자관계라는 것이 다르면 다른 점이다.

 

67 무당의 탄생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리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게다가 선도산 신모는 불사를 도운 일로 자연스럽게 불교와 습합되고 있다.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시골 출신의 벼락 출세

치아 많은 이가 된 왕의 자리

탈해의 등장

탈해왕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

탈해왕의 고민

 

72 노례왕은 유리왕이라고도 부른다. 고구려의 2대 왕도 유리왕이지만 발음은 같되 한자가 다르다. 아버지 남해왕을 이어 제 3대 왕이 되었다. 기원전 24년의 일이다. 노례왕은 못내 그자리가 불편한 모양이다 매부인 탈해 때문이다. 어느 모로 보나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에다 매부에게 왕위가 간다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듯 하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 여기서 저 유명한 떡을 물어 치아의 숫자를 세 보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음은 기이 편의 제 3대 노례왕 조에 묘사된 장면이다.

 

박노례 닛금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하였다. 탈해가 무릇 덕 잇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에서 비롯되었다.

 

74 내기는 기실 이번 차례에 오르지 않으려는 꾀에 불과하다. 왕의 사위까지 되었지만 탈해로서는 서라벌이 아직도 남의 동네다. 뭔가 자신의 기반을 확실히 닦은 다음 굳건한 위치에서 왕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노례왕은 왕위에 올라 34년을 살았다. 탈해로서는 차례를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다.

 

76 간사스럽지만 꾀를 내기로 하였다. 집 곁에다 숫돌과 숯을 몰래 묻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집에 가 짐짓 꾸짓는 투로 말했다.

이 곳은 우리 선조때 집이오.”

호공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말다툼이 일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자 관아에 아뢰었다. 관리가 물었다.

무엇으로 네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우리집이 본디 대장간을 했는데 잠시 다른 지방에 가 있는 사이 남이 들어와 산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따라 해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탈해는 이 집을 차지해 살게 되었다.

 

77 이런 저런 일이 겹치자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큰 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는데 이 사람이 아니부인이었다.

 

80 기이 편 맨 마지막 가락국기 조에서 수로와 탈해가 만난다.

 

이 때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뜻밖에 임신을 했는데 달이 차서는 알을 낳았다. 이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으니 그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키가 석 자에다 머리 둘레가 한 자나 되었다. 그가 바닷길을 따라와 거침없이 대궐로 가서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늘이 나를 명해 왕위에 오르게 하고, 나아가 나라 안을 안정시키며 백성들을 편안케 하도록 했다. 그러니 어찌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그대에게 자리를 주겠느냐? 또 어찌 감히 우리 나라와 우리 백성들을 네게 맡기겠느냐?”

그렇다면 술법으로 겨뤄보는 것이 좋겠소.”

왕이 좋다고 말했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 매가 되자 왕이 변해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가 참새로 변하자 왕은 새매로 변했다. 이 사이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 또한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탈해가 엎드려 항복했다.

내가 술법으로 다투는 마당에 매가 되자 독수리가 되었고, 참새가 되자 새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목숨을 보전한 것은 죽이기를 싫어하는 성인의 어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렵겠습니다.”

그는 곧 절하며 하직하고 나가버렸다.

 

82 탈해는 여섯 부족의 신임을 얻기에 그 근본이 너무 약했다. 그런 어려움을 물리치는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나마 그가 타고난 재주에다 출중한 지략을 갖투었기에 가능했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일본의 여자 프로레슬러 히미코

고대 일본의 여왕 히미코

히미코와 같은 시대의 연오랑 세오녀

해와 달을 섬긴 사람들의 이야기

아름다운 설화 속의 정령

 

90 히미코라는 이름을 삼국사기에서 다시본다. 신라본기의 아달라왕 조 20(서기 173)왜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인사했다는 짤막한 기록이다. 여기서 비미호는 하자가 조금 다를 뿐 히미코다.

 

90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지의 왜인전에서 풀린다. 그 무렵 일본은 성무왕의 시대지만 지방에는 3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서 있었다. 히미코가 다스리는 나라는 야마일국이다. 그는 여왕이었다. 비록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나 가장 강성했다고 하고, 238년에는 위나라에까지 사신을보낼 정도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낸 지 60여년 뒤의 일이다. 같은 히미코인지 아니면 히미코가 왕을 일컫는 일반명사인지는 의문이어도 실재하는 나라요 왕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겠다.

 

91 일본에서 히미코 신드롬이 벌어졌다느 이야기도 소개했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오래도록 남성에 복종하며 살아온 일본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찾고 자기의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적인 인물이 여왕 히미코라는 것이었다. 프로레슬러 히미코도 그 무렵에 이 같은 분위기를 타고 생겼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1993년에 일본을 방문한 불가리아의 어떤 여성 초능력 치료사가 히미코의조상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지금 학계에서는 거의 수용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그가 내세우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주장에 대한 근거가 중요하군. 그런데 이런 문화적 트랜드와 역사를 연결하는 시각이 참신하다. 재미있다. 이런 걸 더 많이 알고 싶다.

 

96 일연은 승려다. 승려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이라고 한다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한가지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은 점이다.

 

96 일연이 영일에서 가까운 오어사라는 자그마한 절을 찾아든 것은 환갑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에 앞서 그는 강화도로 옮긴 오아궁 가까운 절에서 왕을 모시고 있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분주했다. 그러기에 낙향은 본연의 승려 생활로 돌아가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96 영일은 한자어로 뜻을 풀었을 때 해를 맞는 고장이다. 동네 이름에서부터 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법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신라와 일본의 교통에서 영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연히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 두가지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나온 것이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다.

 

97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 별 곧 일월성신이다.

 

98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령이었다.

 

101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아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일본어와 비슷하게 들리는 한국어

일본에 간 신라 왕자 천일창

박제상 사건으로 터진 감정의 폭발

박제상, 그 빛나는 충혼의 인물

일본에 대한 적개심

 

107 실제 일본열도에 단일국가로서 고대 왕조가 성립된 때를 대개 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그 이전은 각 지역마다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삼국사기와 같은 우리쪽 역사서는 이를 통칭하여 왜라고 불렀던 것 같다.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왜는 친교를 하고 어떤 왜는 침공을 했다.

 

107 일본 <고사기> 에는 천일창이라는 신라 왕자를 소개하고 있다.

 

신라에 어떤 늪이 하나 있었는데 그 늪 가까운 곳에서 신분이 낮은 여자 한 사람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 무지개와 같은 햇빛이 여자의 음부를 비추고 있었다. 한 남자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 이윽고 여자는 태기가 있어 출산을 했는데, 붉은 구슬이었다. 남자는 구슬을 달라고 하여 허리에 차고 다녔다. 하루는 남자가 산골짜기에서 일하는 인부들에게 주려고 소에다 밥을 싣고 가다 마침 왕자를 만났는데 왕자를 그 남자가 소를 잡아먹으려 으슥한 산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했다. 사정을 말했지만 왕자는 곧이 들으려 하지 않았고 결국 남자는 자기가 차고 있던 구슬을 내놓고서야 위기를 모면했다.

왕자가 돌아와 구슬을 마루 곁에다 두었더니 구슬은 곧 아름다운 여자로 변했다. 왕자는 이 여자와 결혼했다. 여자는 정성스레 왕자를 모셨는데 왕자는 늘 거만하고 꾸중만 했다. 이에 여자는 자신이 왕자의 부인이 될 만하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바다 건너 제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왕자는 곧 여자의 뒤를 쫒아 바다를 건넜지만 여자의 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웃한 항구에 내려 그 곳의 여자와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일본서기>에서는 이 일이 벌어진 해를 기원전 27년으로 적고 있다. 신가 혁거세왕 31년이다. 왕자의 이름은 천일창, 여자가 바다를 건너 돌아간 곳은 나니와, 지금의 오사카다.

 

109 내물와 37(392)에 왕은 나중 실성왕이 되는 조카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실성은 10년 만에 돌아오게 되지만 이로 인해 삼촌인 내물왕에게 앙심을 품는다. 이듬해 내물왕이 죽고 실성왕이 등극하였다. 실서왕은 그 해에 왜와 우호조약을 맺고 내물왕의 둘째 아들 곧 사촌 동생인 미사흔을 볼모로 보낸다. 내물왕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11년에는 고구려에 내물왕의 셋째 아들 복호마저 볼모로 보내고 만다. 그런데 내물왕의 큰 아들인 눌지왕이 실성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동생들이 그리웠다. 지하에서 눈감지 못하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동생들을 데려와야했다. 2 (418) , 드디어 박세상이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데리고 돌아오고, 가을에는 왜에 들어가 미사흔을 도망가게 한다. 제상 자신은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다.

 

118 고구려 사람들은 화살촉을 뽑아 내고 쏘는 시늉만 한 데 비해 발바닥 거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게 하는 왜왕의 고문은 처참하기만 하다. 이렇듯 처참한 장면을 집어넣는 일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연합군의 1차 정벌이 충렬왕 즉위년(1274)이고 2차 정벌이 5 (1279)이다. 일연은 충렬왕이 즉위한 해부터 왕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2차 정벌 때는 경주 행재소에 와 있는 왕을 곁에서 모셨고, 두 차례의 정벌 사업이 끝날 즈음, 개성으로 돌아가는 왕을 따라가서 국사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나이 77세 때의 일이다. 삼국유사는 이 무렵을 전후로 씌어졌다.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비록 고려가 자원하여 벌인 것이 아닌, 몽고의 눈치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다고는 하나, 전쟁은 전쟁이었다. 고려는 개국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전쟁을 벌려야 하는 이 황당한 교류로 인하여 새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였고,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하지 않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거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

 

야래자 설화의 전통

복사꽃처럼 어여쁜 여자

사람을 돕는 귀신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 밤손님

 

120 설화문학에서 말하는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 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들어야 하는 운명이다.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데 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126 “네가 예전에 응낙한 바 있지? 네 남편이 없으니 이제 되겠느냐?”

여자는 가벼이 응낙하고 부모에게 아뢰었다.

군왕의 뜻이니 어찌 이를 피하겠느냐?”

여자의 부모는 딸을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진지)왕은 7일간 머물렀다. 늘 다섯 빛깔의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이 지난 다음 홀연 자취를 감추고 여자는 그로 인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출산을 하려할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남자 아이 하나를 낳아 이름을 비형이라 하였다.

 

130 진평대왕은 그가 매우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길렀다.  나이가 열다섯에 이르러 집사로 명령하였다.

…“네가 귀신들과 논다는데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고랑에 다리를 만들어 보아라.”

비형랑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그 무리들에게 하룻밤에 돌을 다듬어 다리를 만들게 했다. 그래서 다리 이름이 귀교이다.

 

134 기이 편의 후백제와 견훤조에서다.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얼굴이 단정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부렀다.  

 

135 백제 무왕의 탄생설화와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커다란 지렁이와 연못의 용은 어떤 유사성이 있다. 전형적인 야래자 설화인 것이다.

 

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불교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내고

토착신앙, 불교, 그리고 화랑

신라의 호국불교적 성격

외교가 중요하다는 사실

 

143 내전의 분수승으로 대표되는 불교에 대한 고위 관료들의 적대감이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편지를 바친 노인의 존재가 전통적인 세력을 대표한다고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법흥왕을 이은 진흥왕대의 꾸준한 노력이 차차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해 간다. 특히 진흥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15세여서 태후가 대신 정치하였는데, 태후는 곧 법흥왕의 외손자 입종갈문왕의 부인으로, 세상을 마칠 때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었다고 일연은 진흥왕 조에 적고 있다.

 

145 풍월도를 앞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집안 남자 가운데 행실이 바른 자를 뽑고 화랑이라 하도록 했다. 거기 처음 추대된 국선이 설원랑이었다. 무리의 우두머리를 여자에서 남자로 바꾼 점이 눈에 띠지만 기본적인 취지나 수련 방법은 원화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불교가 스며들어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연이 보이고자 했던 부분은 이것이다.

 

150 나는 앞서 불국토 사상, 본지수적 등의 용어로 신라 불교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 같은 성격은 자연스레 호국불교 쪽으로 흘러간다. …원광이 화랑들을 위해 지어준 세속오계는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오,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오,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이를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추억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통일의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

꿈을 사서 얻은 행운

민족의 결혼

진골 출신 왕의 탄생

화려한 무대 뒤의 여인

 

162 이에 여자들과 함께 들어가니 문득 신의 형상으로 나타나 말하였다. “우리는 나림, 헐레, 골화 등 세 군데의 호국신이다. 지금 적국 사람이 그대를 꾀어 이끌었으나, 그대가 모르고 나아감으로 우리가 그대를 머물게 하도록 여기에 이르렀노라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유신은 이를 듣고 놀라 엎드려 두 번 절하고 나와 골화관에서 잤다.

 

162 이에 쥐 한 마리를 상자 속에 숨겨 두고 이것이 어떤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이는 틀림없이 쥐이려니와 그 숨쉬는 것이 여덟이라 하자, 이를 가지고 헛소리라 하여 참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 사람은 죽은 다음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곧 참형에 처하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일곱 마리를 배고 있었다. 그래서 앞서 한 말이 맞았음을 알았다. 그 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169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두 편의 소설 중 하나가 <민족의 결혼>이다. 최재서는 이 소설에서 김유신이 의도적으로 자기 동생을 김춘추와 결혼시키려 한 것으로 그려나갔다. 그것은 분명 앞에서 소개한 일연의 기록을 참고할 때 사실에 기초했다 할 수 있다. 그 곳에서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결혼이 불가능할 것을 안 유신의 아버지 서현공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유신의 갈등이 매우 확대되어 자세히 묘사된다. 사실 김춘추가 신라의 그렇고 그런 귀족으로머물 사람이면 두 사람의 결혼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춘추는 여자인 선덕과 진덕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당시 성골 왕실에서 다시 남자 왕을 추대하고자 할 때 가장 유력시되는 후보였다. 그런 그가 본래 신라 사람도 아닌 가야 출신 지방 관리의 딸과 결혼한다면 스스로 왕위를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문무왕 법민

사천왕사로 지켜낸 땅

더할 수 없는 선물, 만파식적

만파식적은 어디로 갔을까?

 

178 문무왕 법민은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앞서 잠시 그런 분위기를 비췄으나 문희 이전에 춘추에게 자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가야국 출신의 어머니에게 뿌리를 두고 태어난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법민은 줄곧 당나라에 머물며 외교적인 업무에 종사하는데, 이는 국내에서 당할 정치적 견제를 피하고 당나라 조정과의 친분을 쌓아 등극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는 김춘추나 김유신의 뜻도 들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185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 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일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는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들 변함없어 보인다.

 

187 산의 모양새가 마치 거북의 머리 같은데 그 위의 대나무 한 그루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휼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189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어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권력의 끝

 

토사구팽, 그 비정한 원칙

김씨 성을 가진 첫 왕

효소왕대의 죽지랑

임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196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 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 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197 혜공왕 때였다. 대력 14년은 기미년(779)인데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의 무덤에서  일더니 거기서 장군과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뒤따라 갑옷에다 무기를 든 40여 명이 좇아 나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얼마 있다 능 안에서 크게 우는 소리처럼 울리고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197 김유신은 문무왕 13(673)에 죽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이 달성된 5년 뒤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 이 사건이 벌어졌다. 죽어서도 100년동안 김유신의 자손들은 그 영화를 누렸으되 언제나 가시방석이었다.

 

201 죽현릉의 주인공이 바로 미추왕임이 드러났다.

 

210 이 일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211 더욱이 죽지랑은 성골,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특별한 집안 출신일뿐만 아니라 삼국 통일의 전쟁터를 숱하게 누빈 역전의 영웅이다. 그런 그에게 아간 벼슬아치가 대들고 있다.

 

211 그것은 바로 화랑 출신들의 투사구팽이다. 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과 그의 아들 신문왕을 거쳐 효소왕이 이르면 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왕비를 둘 두었던 왕

3대에 걸친 출궁사건

왕의 이혼 위자료는 얼마?

꽃과 여인 그리고 사랑의 노래

함께 부르는 노래의 힘

동해 바다, 그리고 국도 7호선

 

219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끝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은 바로 그 반역의 칼날에 목숨마저 잃는다. 신문왕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는 반역의 칼날, 그것은 김춘추 직계 후손의 쓸쓸한 종말을 가져왔다.

 

 

220 성덕왕의 출궁 사건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발견해 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성덕왕 조 15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서려있다.

 

성정왕후를 내보내면서 비단 500, 200, 1만 석, 집 한 채를 내려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 저택을 사서 주었다.

 

224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수로부인이다. 그의 아름다운 용모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이 조의 마지막에 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들에게 끌려갔다고 적은 데서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미색을 갖춘 여자였으니 혈기왕성한 청장년만이 그녀에게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 사는 초라한 노인까지도 어떻게 하든 그에게 잘 보여 점수 좀 따려고 설친다.

 

226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꽃을 꺾어 바치는 노인의 다음 행동이다. 자긍심을 가지고 부인 앞에선 노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은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228 다만 세상을 살며 경험해 터득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같다. 그가 알려준 방법은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이라 표현되어 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첫 성전환증 환자

 

일연이 그리는 경덕왕의 존재

아들을 바랐던 왕

재앙을 극복하는 길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

최후의 시도

여자 같은 남자

 

235 경덕왕에게는 비원이 있었다. 아들을 얻어 자신의 뒤를 이를 일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첫 왕비를 출궁시키고 두 번째 왕비까지 맞았건만 경덕왕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237 표훈이 하늘님께 아뢰고 돌아와 왕에게 대답했다.

하늘님께서 딸은 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주시오.”

표훈이 다시 이를 하늘님께 청하자 말하였다.

한다면 할 수 있노라.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져.”

표훈이 내려가려 하자 하늘님이 다시 불렀다.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

 

239 토함산은 예로부터 경주를 감싸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산 가운데 하나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러 오는 이들이 많지만 그 안에는 감춰진 보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토함산 동쪽 자락에 있는 장항리 절터다.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번듯한 탑이나 불상이 남아있는 것도 아닌데 꼭꼭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은 그런 곳이다. 반쯤 부서진 오층탑에 새겨진 인왕상, 내 사진으로는 이 인왕상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낼 수 없다.

 

241 제망매가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242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이면서 시인으로서 월명사가 택한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249 어린 왕은 여자아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였다. 도사 무리들과 놀았으므로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되는 자

야심가의 등장

왕이 되느냐 죽느냐

꼼꼼하면서도 과감했던 왕

왕이 되는 자의 금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254 왕이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십이현금을 끼고 천관사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256 일본의 문경왕이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러갔다. 그러면서 사신을 시켜 금 50냥을 내고 그 피리를 보자고 했다. 왕이 말했다.  

짐도 웃대의 진평왕 때 있었다고 들었을 뿐이오. 지금은 어디 있는 지 모르오

다음해 7월 다시 일본 왕은 사신에게 금 1000냥을 보내며 청하였다.

과인이 신기한 물건을 보고 돌려주려 합니다. “

원성왕은 저번처럼 사양하면서 은 3000냥을 그 사신에게 내려주었다.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하게 하였다.

 

261 원성왕 이후 신라 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왕의 자리를 놓고 벌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란 결국 정권을 잡고자 하는 진골 귀족 계급간의 골육상쟁이었는데 특히 소성왕부터 헌안왕까지 9 6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살해되면서 혼란은 극에 달한다. 여삼의 말대로 원성왕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형제간에 죽고 죽이며 오른 왕위가 그 무슨 영화였을까? 그런 싸움 때문에라도 헌안왕은 자신의 대에서 비극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무엇보다도 덕을 갖춘 후사를 세우리라 결심했고, 그래서 왕이 된 이가 경문왕이었다.

 

264 경문황을 따르는 부하 가운데 범교사는 그에게 목숨을 건 제안을 하고 있다. 결국 그것이 경문왕의 즉위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다.

제가 말씀드린 좋은 일이 지금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 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셨음이 셋째입니다.”

 

266 유복해 보이는 경문왕에게도 겉으로 보아 뜻하지 않은 내면이 있었다.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쫒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길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는구나. 막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매번 침상에선 혀를 날름거리며 가슴 가득 덮었다.

 

267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뿐만 아니라 부인도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

 

달도 차면 기운다.

이른 눈으로 상징한 것

권력다툼 속에 인재는 죽고

빛나는 조연, 처용

나라가 망하는 징조

 

271 기이편 신라사 마감, 이른눈조.

 

40대 애장왕 마지막 해는 무자년(808)인데 8 15일에 눈이 내렸다. 41대 헌덕왕 원화 13년은 무술년(818)년인데 3 14일에 눈이 많이 내렸다. 46대 문성왕 기미년 (839) 5 19일에 눈이 많이 왔으며, 천지가 어둡고 깜깜해졌다.

 

272 이는 어떤 메시지를 표면에 내세우기 보담 객관적 사실만 나열해놓고 읽는 이들에게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기술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상징하는 가는 명약하다. 자연의 이상 변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뜻은 그것이 사람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이겠지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경고에 있을 것이다. 

 

276 염장은 한때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지금의 완도, 진도, 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의 일으킨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요충지였으므로 여기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해상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서 더욱 안타깝다.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281 낯선 서울 땅에 와서 헤매다 제 처가 역신과 동침하는 현장을 목격해야 하는 불행한 사나이의 노래다. …앞서 말한 무속적인 것 외에도 지방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방호족의 자식을 서울에 볼모로 잡아두는 기인제도가 신라에 있었거니와 왕이 울산에 간 것이 모종의 정치적 사건 때문이라면 일이 해결되고 난 다음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기인제도의 볼모다.

 

 

지는 해 뜨는 해

 

마지막 희생자

준비되는 새 나라

김부대왕이라는 칭호

비운의 왕자

천 년 사직은 막을 내리고

 

287 신라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백경화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수도인 경주가 통일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289 하늘이 감옥을 흔들었다는 대목은 사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당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아무리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사피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니,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297 대체로 포석정은 고대왕권 국가에서는 왕의 연회 장소가 제사의 장소를 겸하고 있음을 일본의 경우에도 쉽게 발견된다포석정의 기묘한 굴곡은 거북을 닮아 있고, 거북은 영생불사의 신선 사상과 연결되며, 거기에 물을 흘려보내는 구조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세상의 어떤 순조로운 흐름을 기원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02 경순왕이 항복할 때 향기롭게 장식된 마차가 30여리를 가득채우고 태조는 바깥까지 나가 맞이하여 동쪽 한 구역의 궁을 내려주었으며 큰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두 아들의 출가는 한층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버지인 경순왕은 새 나라 고려의 부마가 되어 40여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아쉬운 백제의 역사

백제 고도의 대표는 부여가 아니다

따뜻했을 것 같은 백제의 풍속

곤자왕자로부터 시작하는 백제와 일본의 왕계

백제가 어떻게 일본 왕실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일본의 독립선언

 

309 정말 백제의 고도가 부여일까? 물론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아 120년이나 지냈고, 거기서 나라의 최후를 맞이했으니 중요하기는 하겠다. 웅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본다면 이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311 웅진, 부여 천도 뒤의 백제 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319 507년에 즉위하는 계체왕이 다름 아닌 무녕왕과 형제관임을 밝히는 유물이 나왔다. 바로 인물화상경이다. 청동으로 만든 이 거울은 1914년 일본의 오사카 근처 와카야마 현의 한 신사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국보로 지정되어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기 503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거울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남제왕과 사마가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사마가 남동생인 왕을 위해 만들어 보낸다는 내용이다. 수수께끼는 1971년에 와서야 풀렸다. 사마는 무녕왕의 이름이었다.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이 이름을 적은 묘지석이 나왔다.

 

325 왕실로만 놓고 본다면 일본은 분명히 백제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7세기 후반에 들어 중주국 백제가 멸망했다. 어느 정도 힘이 쌓이면 내심 독립할 요량이었던 일본 왕실로는 어쩌면 복음과 같은 소식이었을 지 모른다. 백제가 망할 무렵, 일본의 구원군은 적시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 싸우려는 시늉만 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325 중주국 백제의 멸망후 7년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선언으로 보인다. 

 

326 사실 그 이후 일본 왕실에서 백제의 흔적 지우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14세기에는 신황정통기에서는 8세기 말 환무왕이 일본과 삼한은 같은 종족이라고 적은 책들을 불태웠다고 했다….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맹랑한 눈에 맹랑한 자가 보인다.

한편의 완벽한 드라마

미륵보살 쟁탈전 속의 선화공주

 

329 일연이 적고 있는 남쪽 연못가의 용이 사실을 비유한 것이라면 용은 왕위에 오르기 전의 법왕일 것이다. 왕족이긴 하나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닌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 여자는 떳떳이 자신을 드러내 놓고 살지 못했으리라. 더욱이 과부의 신분으로 말이다.

 

335 일연이 쓴 무왕조를 사실로 보아 무왕의 출생이나 왕위 등극의 과정을 설명하자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법왕이 아직 왕자일 때 그것도 등극과는 서열이 먼 상태에서 만난 여염집 여자 더욱이 과부에게서 얻은 아들을 떳떳이 자기 집 안으로 거두지 않았을 것이고, 왕위계승은 큰아들이 아니라 누구든 뛰어든 왕자가 차지하는 당시 관례로 보아, 어떻든 왕족인데다 비범한 서동의 발군으로 곧 그것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점 인정된다.

 

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낸 오왕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345 백제에 주재하던 미륵보살을 신라에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진다. 나는 그 부분을 앞서 신라의 화랑 제도 성립과 관련해 소개한 바 있다. 바로 미륵선화와 l미시랑 그리고 진자사 조의 미륵선화다.

 

 

견휜, 비운의 영웅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

3대에 걸친 물고 물리는 불화

호랑이가 키운 아이

편지로 싸운 한 판

가엾은 완산 아이

라이벌에게 의지한 마지막 생애

 

352 견훤에게는 망해가는 신라보다 더한 강적이 있었다. 바로 북쪽의 왕건이었다. 왕건이 철원경에서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353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휜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353 왕건이 연패하는 중인데도 신라에서는 고려와 화친하고 더 나아가 나라를 맡기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됨됨이가 견훤처럼 사나운 사람보다 온순하고 정이 많기로 왕건이 그들의 뒤를 잘 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중국과 남한 어디에 붙을 건가 결정하는 것도 북한 지배권력이 어느 쪽이 자기네 뒤를 잘 봐줄 건지를 보고 결정할 수 있다.

 

359 어쨎건 큰아들 신검에게 왕위가 가지 않을 것임은 분명했다. 여기서 큰아들이 아버지를 절간에 가두는 반역사건이 일어났다. 밑의 두 동생과 합작한 것이었는데 모든 일의 계략은 이찬 능환이 했다. 청태 2년 을미년 (935)의 일이었다. 견훤은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 되었고 금강은 죽임을 당했으며,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361 왕건은 그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당한 배신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온 이 노장이 도착하자 자기보다 10년 위라고 해서 그를 높여 상보라고 했다. 상보는 경순왕에게도 주었던 직함이었다. 이 와중에도 살길을 찾은 이는 용케 그 길을 간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견훤의 사위 영규다.

 

363 왕건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다만 능환만은 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다. 신하된 도리에 마땅히 이래야 한단 말이야 하고 목을 쳤다.

 

363 견훤이 울화가 나서 등창이 생긴 것이 바로 그때였는지 잘 모르겠다그 때가 언제인들 무슨 상관이랴? 따지고 보면 자식을 원수로 여겨 죽이지 못하는 것을 분통해 하고, 치사한 목숨 부지하다 등창이 나서 제 명을 재촉한 사람의 생애다. 실제로 그 지경까지 되었을까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신비의 왕조, 가야

 

인멸된 가야사

왕의 밀월여행은 4일간?

바사석탑으로 풀어보는 왕후의 정체

슬픈 수로왕의 그림자

 

364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기에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된 베스트 3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겠는가?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은 단군신화, 향가, 가락국기 이 세가지에다 점을 찍었다그런데 왜 가락국기일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 전하는 가야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400년 가까이 존속된 나라의 역사치고는 철저히 외면되어 있다.   

 

365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는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다.

 

375 왕이처음 신부를 맞으러 나간 날이 7 27일 나흘을 보낸 다음 8 1일에 궁궐로 돌아왔다고 가락국기는 전한다. 두 사람의 꿈 같은 밀월여행은 짧기만 하다.

 

382 김춘추와 문희 민족의 결혼이 낳은 아들 문무왕, 삼국통일을 완성한 그는 신라와 가야 두 민족 간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그러기에 민족간 결합에 의욕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민족간은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신념과 경험을 가진 그라면 나아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세 나라를 한 나라로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 지 모른다. 

 

불교로 보는 역사

 

흥법 편의 성격

이 땅에 처음 온 승려 순도

백제에 이른 마라난타

상상력, 사실 이상의 사실

큰 나무의 인고

완고한 신라사회 속에 뿌린 불교의 씨

 

385 이조는 모두 여섯 개의 조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경위를 설명하는 조 세 개, 그리고 그 이후의 전개과정 가운데 특이한 사례를 하나씩 각가 들어 놓은 세 조

 

386 흥법은 곧 흥국이었다.

 

392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배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398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영리한 봄의 신 재주도 많아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법흥왕 이전에는 불교는 없었는가?

이차돈에 대한 일연의 관심

순교자의 마음

아도의 본마음을 이룬 성자

그 후, 백제와 고구려의 불교

 

401 비처왕 다음은 지증왕이고 그 다음이 법흥왕이다. 그러나 비처왕과 법흥왕 사이가 불과 15년이다. 아마도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전적으로 그 개인의 신심에서 나온 것만은 아닐 터였다. 공인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가도 한몫 거들지 않았을까?

 

407 어떤 자료를 받아들였는가의 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더니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는 대목은 어디에나 있다 붉은 피가 아니라 흰 젖이었다는 이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며 흰 젖은 부처님의 감응을 말하는 것이었다

 

411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황룡사의 돌무더기

황룡사는 어떤 절이었는가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정말 아육왕이 보낸 것일까?

황룡사 구층탑의 경우

그 안타까운 최후

 

417 황룡사는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 아닌 마음 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425 아쇼카왕은 지독히 못생겼다. ..콤플렉스가 많은 왕이었다. 못생긴 얼굴에 형의 자리를 빼았았다는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뻗어나와 결국 가상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잘생긴 사람을 들여보내 죽이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430 <찰주기>에는 철로된 받침대가 높이가 42척이고, 그 아래로 183척이다고 적었을 뿐이다. 전체 높이가 225척이라는 말인데 학계에서는 요즘의 단위로 70m라고 추정한다. ..얼마만한 건축 기술을 가졌기에 20층 아파트 높이의 탑을 세울 수 있었을까?

 

435 파손된 이유는 낙뢰였다.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일연과 오대산 그리고 문수보살

중국의 오대산과 한국의 오대산

오대산과 오만 진신이 된 까닭

눈물의 태자

학의 깃털이 가르쳐 준 것

 

440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고 한다. ..깨달음이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또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데 부모라고도 했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문수도 성불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문수 신앙은 대체롤 이런 문수 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48 문수보살은 매일 아침 서른 여섯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일이나열한다. (이걸 써두세요.)

 

452 신효거사, 충청도 공주 사람인 그는 유동보살의 화신이라 불리웠는데 세속에서는 어머니를 정성스레 모시는 효자였던가 보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를 않았으므로 고기를 구하러 나가는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들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쏘았다. 그 중 한 마리가 깃털 하나를 떨어뜨리고 가 버렸다. 거사가 깃털을 집어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이 모두 짐승들로 보였다. 그런 까닭에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렸다.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금대암에서 보낸 하룻밤

의지할 데 없는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인식

중생사에 얽힌 이야기

고려까지 이어지는 중생사의 이야기

일연의 생애와 그 반영으로서의 삼국유사

 

456 마음의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458 무릎이 헐도록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고 빌어 두노라

일천 개 손 일천 개 눈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라

한 개사 적이 헐어 주시려는가

아 나에게 끼치신다면

어디에 쓸 자비라고 클고 (천수대비가 분황사 천수대비 맹인 아이가 눈을 뜨다 조)

 

465 최은함은 피난길에 백일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안고 중생사의 대비상 앞에 와서 빌었다. “이웃 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니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갓난아이가 거듭 중하오니 함께 살아나갈 수 없습니다. 진실로 대성께서 주신 아이라면 바라건대 부처님의 힘을 빌려 이 아이를 키워주시고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눈물을 쏟으며 비통하게 세 번을 울면서 세 번을 아뢰고, 강보에 싸서 부처가 앉은 자리 아래 감추고 하염없이 돌아보며 갔다고 일연은 적고 있다. 보름이 지났다. 사태가 진정되어 아이를 찾으러 와 보니 피부가 마치 새로 목욕한 아이 같고, 몸이 반들반들하며 입 언저리에서는 젖 냄새가 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선연한 광경들을 어찌 글로 다 그릴 수 있을까? 비통함과 놀라움이 교차하는 곡진한 장면장면들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흰 달이 비추는 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사람

저물 무렵에 나타난 아리따운 여인

밤부터 아침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발톱 하나 칠하지 못한 만큼의 차이

 

472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뜻 깊은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탑상 편의 남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조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나는 이조가 일연과 일연의 문학 그리고 삼국유사를 이해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480여자의 정체는 여기 와서야 밝혀진다.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시험삼아 두 사람을 방문했던 것이다. 거기에 박박은 보기좋게 나가떨어졌지만 부득은 합격한 셈이다.

 

481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쫒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러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헌신인지도 모른다.

 

484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지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485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엔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낙산사의 힘

 

담으로 쌓아서라도 지켜야 할 곳

진신의 친견담과 조신

의상과 원효의 거리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의 꿈

 

488 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낙산사는 그렇게 성스러움의 정화를 느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495 참으로 치밀하고 정성을 들인 노력 후에 얻은 만남이다. 그런 노력으로 얻지 못할 무엇이 있겠는가 웅변하는 듯 하다. 나는 이것을 치밀하고 정성스런 만남이라고 명명한다.

 

505 조신은 승려이기는 하지만 수행을 본업으로 하는 이판승이 아니라 행정적인 업무를 보는 사판승으로 보인다. 그가 강릉 쪽에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강릉 태수의 딸을 보고 조신은 한눈에 반하고 만다. (조신설화를 적어두시오. 특히 그의 아내가 헤어지자고 하는 말)

 

 

운문사 이야기

 

의해 편에 들인 공력

원광부터 시작한 까닭

원광과 신

세속오계와 운문사

운문사 그 아름다운 이름

 

513 의해 편에다 들인 일연의 이 같은노심초사가 승려로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결과만은 아니다. 우리는 삼국사기의 열전에 승려가 단 한 사람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는다. 원효도 의상도 없다. 아마 일연에게는 이것이 못내 아쉬운 한 가지였으리라. 삼국시대를 특히 신라 중심으로 기술한다고 했을 때 몇몇 승려들의 역할과 업적은 불교의 그것을 떠나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쉬움은 크다.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의해 편의 여러 기록들은 삼국사기의 이런 단점들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도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514 원광은 중국에 유학하여 불교의 진수를 체득해 온 해동의 처음 사람이었다.

 

525 보양과 함께 왔다는 서해 용의 아들 이목은 누구일까? 용의 아들이라니 같은 용이겠지만 이목이라는 이름을 우린 발음대로 한다면 이무기처럼 들린다. 지금은 용이 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뱀을 이무기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아직 어린 용을 이무기라고 불렀던 것일까?

 

527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 원효

일연이 가장 잘 알았던 사람

바보 같은 원효

문 닫힌 분황사에서 추억하는 원효

 

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이라고.

 

531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537 원효가 이미 계를 범한 이후 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어느 날 우연히 배우들이 가지고 노는 커다란 박을 얻었는데 모양이 괴이하여 그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었다. 화엄경에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 가기 길로 나고 죽는다는 대목을 가지고 무애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시켰다. 일찍이 이것을 지니고 모든 마을 모든 부락을 돌며 노래하고 춤추며 다녔는데 노래로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를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며 독 짓는 옹이장이에다 원숭이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다.

 

543 감통 편의 광덕과 엄장조에서 광덕의 처에게 꾸지람을 들은 엄장이 대오각성하고 찾아가는 사람이 원효다.원효는대체로 낮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의 친구였고, 우리는 이런 장면들에서 바보같은 원효가 진정 바보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546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끝까지 곁에서 지켰던 모양이다. 그러다 입적하니 그것으로 얼굴상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의상, 화엄의 마루

 

해골 바가지도 무섭지 않은 사람

의상이 중국에 간 해에 걸린 수수께끼

의상도 이미 의상이었다.

의상이 화엄을 전하다.

종남산과 태백산이 똑 같은 봄

 

556 이순의 나이를 맞은 큰스님 지엄의 눈에 의상은 준비된 큰 재목이었다. 그에게 부지런히 화엄의 묘의를 가르쳤다는 그 다음 구절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563 의상이 귀국한 해는 670년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의상 비문에서는 671년이라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의상을 몰래 보내 소식을 전했다는 말은 없다. 일연이 어디서 참고하고 썼는지는 모르지만 의상의 귀국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보인다. 본디 의상은 김씨 집안의 귀족 출신이다.

 

565 산둥반도의 등주에 발을 디딘 의상은 생계를 꾸릴 탁발길에 선묘라는 아가씨를 만난다. 선묘는 수려한 의상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 뜨거운 정을 품는다. 그러나 의상의 마음은 철석같다.끝내 선묘는 의상이 불심으로 감동되고 불법에 귀의하기로 한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인도에 대한 상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인도로 간 여러 스님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571 그 성스러운 땅에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발을 디뎠다는 사실을 삼국유사는 우리에게 고스란히전해준다. 바로 의해 편의 인도로 간여러 스님들 조다. 예컨대 신라 사람 아리나발마,

 

574 해동의 작은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에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577 일연이 이 조에 부친 찬은 추도사에 가깝다.

 

천축 길 하늘 너무 만첩 산인데

가련타 순례자들 힘써 오르네

외로운 배 달빛 타고몇 번이나 떠나갔건만

이제껏 구름 따라 한 석장 돌아옴을 보지 못했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삼대에 걸쳐 이어지는 계보

두 가지로 실린 진표의 전기

일연이 지닌 점찰 신앙에 대한 애착

두번째 전기에서 구체화되는 미륵보살

뼈를 묻은 자리에 솟아난 소나무

심지가 스승을 잇다

 

582 진표로부터 시작하여 영심과 심지로 이어지는 사제간의 계보에 눈이 뜨인다. 일연은 이 세 사람을 그리는데 세 조나 할애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의 손으로 지금 전라북도를 대표할 금산사, 충청북도를 대표할 법주사, 경상북도를 대표할 동화사가 만들어지거나 커졌다.

 

591 점찰경. 무극은 진표가 스승 숭제법사로부터 나와 수행에 들어간 것으로 적었다.

쌀 스무 말을 쪄서 말려 양식 삼아 보안현으로 가 변산의 불사의암에 들어갔다. 다섯 홉 쌀이 하루치 먹을 양인데 거기서 한 홉은 덜어내 쥐를 먹였다….

 

596 세 사람이 수행하는 방법은 스스의 그것과 방불하다. 제 몸을 버리는 용맹스런 정진과 참회 그것이야말로 진표가 한 수행의 핵심 아니던가?

 

밀교의 한 자락

 

어떤 사람이 승려가 되었는가

신라의 밀교 승려

첫 밀교 승려 밀본

혜통과 용의 질긴 싸움

명랑의 신인종

603 출가의 동기를 밝히는 가운데서도 가장 내 마음을 치는 이야기가 다음의 경우다. 주인공은 신라의 승례 혜통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하였다.

 

605 신주 편에서 소개하는 밀본, 혜통, 명랑 세 사람의 밀교승들은 모두 주문을 외워 어떤 어려움을 물리치고 있다.   

 

613 혜통은 속에서 울컥했으나 말은 하지 못하고 뜨락 앞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마가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났다. 삼장이 듣고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상처가 이전처럼 아물었는데 왕자 무늬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래서 호를 왕화상이라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불교적 정신이 바탕된 사회

옥면이 염불해서 서방정토 가다

광덕과 엄장

선율이 살아 돌아오다

 

621 40대 애장왕 때였다. 승려 정수는 황룡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어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623 바로 감통 편은 이 같은 이야기로 누벼진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삼국유사 9개 편 가운데 여기를 가장 즐겨 읽는다. 이름 없이 살다간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불교를 매개로 진하게 펼펴져 있기 때문이다.  

 

624 마당 양쪽에 장대가 서 있었다. 욱면은 새끼줄로 양쪽 손을 뚫어 장대위에 연결하고 양쪽을 왔다갔다하며 있는 힘을 다했다. 그 때 천사가 공중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욱면 처자는 법당으로 올라가 염불하라.”

절에 모인 사람들이 이를 듣고 권하니, 욱면은 법당에 올라 순서에 따라 열심히 염불했다.

 

625 아랑곳 하지 않고 제 일을 마친다음 잠을 줄여가며 예불에 온 힘을 기울이는 욱면의 모습에서 이 이야기의 진수는 나온다. 일연은 욱면을 소재로 찬을 남겨놓고 있다.

 

서편 이웃 오랜 절엔 불들이 밝았는데

방아 찧고 오노라면 밤은 금새 이경

하늘에서 내린 소리 부처를 이루게 했네

손바닥을 줄로 꿰어 육신을 잊었으니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절과 호랑이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이어지는 신도징의 이야기

호랑이는 호랑이의 굴로

 

643 어쨎건 죽을 목숨, 사랑하는 이의 손으로 최후를 맞겠다는 것, 다소 유미주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한 번 죽음으로 여러 이익이 돌아온다는 말에, 사랑하는 이의 주검을 팔아 한 세상 잘살아 보자 요행을 바라겠냐는 김현도 묵묵히 따를 수 밖에 없다. 처녀 호랑이의 바람은 단 하나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달라는 것인데 이로 인해 절에는 호원사라는 이름이 붙고, 그래서 이 이야기가 사철 연기 설화로 분류된다.

 

644 산 속에서 세 오빠 악한 짓 견딜 수 없어

꽃다운 입에선 대신 죽겠노라 한 마디

의리의 소중함 몇 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러럼

 

아름다운 시다. 무슨 설명을 더 붙이랴.

 

649 돌아가는 길에 함께 처가를 찾아갔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지극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울다가 문득 벽 모서리에 걸려 있는 호랑이 껍질을 보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몰랐구나.”

곧 가져다 입자 호랑이로 변해 울부짖고는 땅을 할퀴며 문을 박차더니 나가 버렸다. 신도징은 놀라서 피했다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그 길을 찾아 나섰다. 숲을 바라보며 크게 울기를 몇 일, 끝내 어디로 갔는 지 찾을 수 없었다.

 

신도징의 아내는 바로 사람 아닌 호랑이였던 것이다.

 

651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킨 것 보다 짐승이면서 사람보다 더한 마음씨를 지닌 처녀 호랑이에게 오히려 사람인 김현이 감동된 것이 더 크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다시,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

바위 속으로 숨은 뜻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세상

경흥이 우연히 성인을 만나다

저무는 사회 속의 고민

 

653 자리가 파할 무렵 왕은 내심 거만하게 다짐해 두었다. 짐짓 놀라는 목소리였다고 일연은 적고 있다.

어디 가서 임금이 손수 베푼 음식을 먹었다 하지 말게.”

그러자 이 초라한 스님에게서 나온 놀라운 한 마디

임금께서도 진신석가께 공양하였다고 말씀하지 마소서.”

 

656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 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성인을 만나는가? 의상 스님과 같이 치밀하고 정성스런 사람이 만날 것이며 효소왕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은 만남이다. 그 만남을 뒤에라도 만남인 줄 알면 그렇다. 효소왕은 그것을 알았기에 부랴부랴 그 뒤를 쫒아갔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절을 짓고 공양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그런 만남이 우리에게는 더 많고, 또 소중하지 않은가

 

666 한 거사가 차림새는 초라한데 손에 지팡이를 잡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하마대에 와서 쉬고 있었다. 위에서 보니 광주리 안에 마른 물고기가 담겨 있었다. 시중 들던 이가 비아냥 거리면 말했다.

자네는 승복을 입고도 어찌 건드려선 안 될 물건을 지니고 있는가?”

산 고기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도 있는데, 아무 장터에나 파는 마른 물고기 좀 등에 졌기로서니 뭐가 꺼릴 게 있다는 말이오?”

 

 

숨어 사는 이의 멋

 

숨어 사는 것의 뜻

혜현이 고요함을 구하다

낭지와 포산의 두 성인

양손 스트레이트에 나가떨어진 연회

 

671 사찰은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으로 나눠보지만 고려시대까지 두 가지 사찰은 비슷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672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의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673 불교적 인식의 숨음과 드러남을 이해하자면 보다 복잡한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675 산중에 고요히 앉아 생애를 마쳤는데(혜현) 석실에 갖다 둔 시신에서 오직 혀만 붉게 남아 있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숨어 산 이의 마지막이 그렇게 신이로웠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리라.

 

678 나는 이미 출간된 책에서 이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었다. (일연을 묻는다. 2006, 현암사)

 

686 장바닥에서는 어진 이가 오래 숨기 어렵고

주머니 속의 송곳도 한 번 드러나면 감추기 어렵네

뜰 아래 푸른 연꽃 때문에 그르친 것이지

구름과 산이 깊이 않아서 아니라네

 

 

불교가 보는 효도

 

효심의 결정편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두 세상을 산 사람

진정 스님, 일연의 초상화

 

690 손순이 아이를 묻다

흥덕왕 때였다. 손순이라는 이는 모량리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며, 곡식을 받아 늙은 어머니를 모셨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이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매번 할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것이었다. 손순이 이를 곤란하게 여기고 아내더러 말했다.

아이는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잡수실 것을 뺏어버리니 어머니가 너무 배고파하시는구료. 이 아이를 묻어 어머니가 배부르도록 해야겠소.”

그러고서 아이를 업고 취산의 북꽃 교외로 나갔다.

 

691 지은은 삼국사기에도 소개된, 효도에 관해서라면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눈먼 어머니를 위해 동냥을 해다가 봉양하는 지은이. 어느 흉년이 든 해, 더 이상 빌어먹을 수 없어 남의 집에 몸을 판다. 아마도 노비로 들어갔거나 젊은 처녀이니 그 이상의 정도까지 해서 쌀을 얻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머니가 예전에는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누그럽고 편했는데 이즈음은 향기나는 좋은 밥인데도 턱 걸리며, 찌르는 듯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어떤 일이냐? 고 물었지요. 여자가 사실대로 말하자 어머니는 통곡하고 여자도 탄식할 밖에요. 다만 배불리 모시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편하게 못해 드린 것이었습니다.”

 

701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 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어머님은 많이 늙으셔서 오직 제가 옆에서 지켜야 합니다. 이 일을 놓고 출가라니요? 어찌 차마 그러겠어요?”

아니다. 나를 위한다고 출가를 못하다니. 그건 나를 지옥 구덩이에 빠뜨리는 일이야 비록 살아서 삼뢰칠정으로 나를 모신들 어찌 효도라 하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 앞에서 옷과 밥을 빌어도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정말 내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향가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 하나

어떻게 무엇을 노래하였는가?

향가 최고의 작품,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노동요의 원조 공덕가

호쾌한 기상이 서린 노래, 융천사의 혜성가

충성심과 이기주의의 사이, 신충의 원가

깨달음의 더할 데 없는 경지, 영재의 우적가

 

704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우리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했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에 대해 비록 편린으로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오직 햠국유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향가 하나에 머물지 않고 10세기 이전의 시가에 대해서 그렇다. 책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일연, 혼미 속의 출구

 

괴승 시비

일연의 생애

본질 앞에서 수정해야할 방편

표면적 전범과 이면적 전범

혼미 속에서 찾는 출구

725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인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739 신라 사회는 고대 삼국시대에서도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재래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던 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 들어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았다.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들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741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물론 승려이기에 그가 보여 준 행적은 일반적인 경우의 충격적인 것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승려의 신분 안에서도 분명 예외적이었다. 그러기에 누카리야와 같은 학자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을 법한데 이는 한마디로 사회사적 배경을 무시한 결론이다.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 양진

 

742 칠백쪽을 넘나드는 책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책에 깊이 감명받은 사람이거나,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누군가일 게다. 그도저도 아니면 책 뒤의 ISBN 코드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흔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고, 어쨎거나 그 간의 내력을 조금 풀어놔야겠다.

 

742 강의실보다 더 자주 들르던 술집에서 고운기 선배의 제안으로 시작된 삼국유사 사진찍기는 어느덧 십 년을 넘겼다.

 

743 다시 읽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소중한 한 가지, 사랑을 담아내고 싶었다. 황룡사 터를 배경으로 하얀 당간지주에 서린 원효의 고독한 사랑, 점점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부석사 석등에 묻어 있는 사랑, 몸통만 남은 깨진 불상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촌노의 손끝에 실린 욱면의 순박한 사랑, 낭산 너머로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먼발치에서 까치발로 서성대는 익모초에 담긴 지귀의 짝사랑..이런 저런 사랑을 찾아다니다 며칠 만에 집에돌아오면 초롱롱한 아이들과 아내는 내가 사진에 담으려고 했던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찍어온 평범한 사진에도 무한대의 감동을 보이며 힘을 실어주는 것도 아내와 딸의 몫이었다.

 

744 지금 나는 사진 찍기와는 조금 떨어진 일을 하며 지낸다. 그래도 사진찍기는 참 재미있다. 내가 즐기는 것 가운데 가장 신나는 놀이다.  의상의 몇 편 되지 않는 저술을 평한 일연의 글처럼 솥 안의 국 맛을 책임지는 특별한 한 점 고기같은 사진 말들기, 희망사항이다.

 

744 이 책이 히트치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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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09:56:16 *.114.49.161

저는 이번 주에도 마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화요일 12시 마감인데 완성된 것은 수요일 10시에 올렸습니다.

반복되어서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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