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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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여섯 번째 출산을 했습니다. 딱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벌써 젖을 뗄 시간이 다가온 듯 합니다. 녀석의 출산 횟수가 늘수록 몸도 늙어가는 모습을 봐야 하고, 그것이 안쓰러워서 새 생명의 탄생을 무한정 반기지 못하고 있는 나를 봅니다. 나는 언젠가 결국 ‘산’, ‘바다’와 이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슬픔과 허전함이 꽤나 묵직할 테고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기에, 더 본질적으로는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가 있으므로 나는 ‘개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한 달 보름쯤 전 어느날부터 바다는 사흘간 내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녀석이 새끼를 낳았구나 짐작했으나 애써 어느 장소에 새끼를 낳았는지는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개 집에 새끼를 낳지는 않았습니다. 지난 번처럼 손님방인 자자산방 아궁이나 마루 밑이 아닐까 짐작을 해보았지만 그곳을 수색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흘 째 되는 날 바다는 몸을 추스렸는지 백오산방 마루에 잠시 나타나서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사라졌습니다. 내게 밥을 가져다 놓을 장소를 알려주고 싶어서 였을 것입니다.
녀석을 따라갔습니다. 바다는 놀랍게도 자자산방 뒤에 대충 쌓아놓은 석축 뒤편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나는 석축 위에 집지을 때 쓰고 남은 합판과 목재를 올려놓았고 그 위를 천막으로 덮어놓았었습니다. 녀석은 그것을 지붕으로 삼았고 석축과 흙 사이의 뒷 공간 깊숙한 공간을 산실로 삼았던 것입니다. 자연 동굴을 찾아낸 것입니다. 오뉴월의 뜨거움을 피하기에 그곳보다 좋은 장소가 없었습니다. 비를 가릴 합판과 천막까지도 고려했으니 바다는 정말 똑똑한 엄마였습니다. 나는 녀석이 드나드는 입구 풀섶에다 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여름의 무더위를 피하면서 새끼들을 부양하더니 자식들을 독립시킬 시간이 다가오자 사흘 전에는 ‘숲학교 오래된 미래’의 마루 밑으로 새끼들을 물어 옮겨 놓았습니다. 숲학교에 자주 머무는 내게 이제 이유식을 먹여야 한다고 시위를 벌이는 것입니다.
바다는 이제 인간에게 의존하는 삶과 야생의 삶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며 살고 있습니다. 길들여진 삶의 틀을 깨고 녀석은 개가 할 수 있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로운 삶의 최대 영역을 확보한 모습입니다. 개로 사는 삶에 물이 오른 모습입니다. 발정이 찾아오자 ‘산’을 노련하게 약올리던 모습, 그리고 때에 이르자 ‘산’을 능숙한 체위로 받아들이던 모습, 주인이 제공한 개 집보다는 야생 토굴을 출산지로 정한 모습 등에서 녀석이 얼마나 생식활동을 물 흐르듯 해내는지 감탄하게 됩니다. 양육 역시 마찬가지, 태풍이 몰고 온 거대한 비가 출산처로 흘러들자 녀석은 자자산방 마루로 새끼 두 마리를 물어 피신시켰고, 이제 젖을 뗄 때가 되자 주인에게 시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지극히 노련한 모습입니다.
작년부터 ‘바다’는 매년 한 두 마리의 고라니와 십여마리의 토끼를 잡아 먹고 있습니다. ‘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땅에 굴을 파고 묻어두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바다’는 어떻게 저렇게 노련해 지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어떻게 할 때 물오른 삶을 살 수 있는 걸까요? 그녀의 방법론은 조금씩 탐험의 경계를 넓혀가는 것이었습니다. ‘산’이 오직 주인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충성을 보일 때, ‘바다’는 ‘도꼬다이’ 활동을 하면서 주인과 야생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들었고 조금씩 경계를 넓혀갔습니다. 탐험 속에서 그녀는 하나하나 깨치는 순간을 만났을 것입니다. 부쩍 바다의 경지가 부러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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