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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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쟁이의 기억
1.
버스를 놓쳤다. 계속해서 지각이다. 매일 똑같은 정류장에 나는 줄 서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왜 사람들은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 일렬로 서 있는 사람들은 대답도 하나이지 않을까? 나는 더 나은 삶을 소망하며 저 밀림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미래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냄새 나는 똥을 피해가며 겉치레투성이인 높은 곳에 오르려 한다. 스스로가 똥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하나씩 자리가
채워지고, 맨 뒷쪽 가운데 자리가 비었다. 다른 자리보다 높은 위치여서 사람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어느 머리 위에 꽃잎 하나가 앉아
있다. 분홍색 진달래 꽃잎이다. 검은 색 머리는 점점 분홍색으로 물들어 간다. 주변까지 밝아지는 느낌이다. 손을 들어 내 머리 위를 만져 보았다.
내게는 꽃잎이 없었다. 꽃잎이 나를 보고 있다. 한 곳에 매달려 있는 것이 싫증이 나서일까? 나처럼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서 일까? 꽃잎이 내려앉는
모습을 상상했다. 바람이 나무 가지를 흔들고, 꽃잎은 이때다 싶어 날개 짓을 하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사뿐히 인간의 머리 위에 내려 앉았다.
꽃잎은 하나뿐인 생을 매달린 채, 시들어가기 싫다고 말한다. 무임승차다. 버스는 출발했다. 나는 눈을 감고 오래된 기억 속으로 무임승차했다.
2
폐수처리장 토목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능선을 따라
꾸불꾸불 나 있는 길 위로 덤프트럭들이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지나간다. 언덕을 넘어서자 산허리를 깎아 내는 포클레인의 굉음은 숲 속의 숨통을
조금씩 죄고 있었다. 한 낮의 강렬한 태양 빛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컨테이너 사무실은 한증막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앞으로
계속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비교할 수 있는 현장
경험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현장소장은 무언가를 잡기 위해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눈이 시렸다. 문틈, 창문 틈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를 보며 나도 함께 스며나가고 싶었다. 이 소장이 전화를 받았다.
“왜 그래, 인수인계는 해줘야 될 것 아니야, 그냥 그만둬 버리면, 어떡해?”
표정이 굳어있던 이 소장은 나를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흘렸다.
회사에 들어 온지 불과 1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현장근무라니, 입사 후에 일한 것은 전화 받고, 복사만 한 것이 고작이었다. 일에 대한 부담보다도 시골 산속에서 공사가 끝날 때까지 갇혀있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스물다섯의 나는 바지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취업이 힘들었던 IMF시절에 직장을 구했다며 기뻐하시는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현장 근무를 하게 되어서, 매달 더 많은 돈을 보내드릴 수 있다며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현장 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산 속 마을에는 여덟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곳에서 방을 하나 구했다. 지금까지 시골생활을 해 본적 없는 나는 조금씩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닭 울음 소리에 깨어나고, 뒷간에 갈 때면 소와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했다. 책을 보면서 볼일을 보던 느낌과는 다르다. 똥 누는 나도 어색했지만, 나를 보고 있는 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멀뚱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철퍼덕' 소리에 '음메'라고 답한다.
다음날, 전임자 것으로 보이는 허름한 작업복과
흙이 묻어있는 안전모를 쓰고 현장으로 내려갔다. 뜨거운 햇볕에 그을린 얼굴들을 보며 얼마 뒤에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사다리 위에 있는 노란색 안전모를 쓴 작업자가 눈에 들어 왔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몽키 좀 가지고 와” 반말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야, 안 들려 몽키 가지고 오라고” 아무래도 미친 놈 같았다. 현장에서 원숭이를 찾다니...
“몽키, 없는데요.” 대답했다. 노란 안전모가 가슴 치는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사다리에서 내려오더니 주먹을 쥐고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야, 너 발 밑에 있는 이건 뭐냐?, 몽키 삼촌이냐!” 머리위로 주먹이 올라가더니 내리칠 기세였다.
“너 초짜지” 주먹으로 맞는 것보다 가슴이 쓰리고 기분은 더러웠다.
3
그날 저녁, 두고 온 배관도면을 찾기 위해 손전등을 들고 현장으로
내려갔다. 깜깜해진 산 속의 밤은 손전등의 빛을 더욱 환하게 했다. 낮에 보았던 나무들은 더 커진 모습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거친 바람소리는
낮 동안 괴로워했던 산속의 영혼들을 깨우고 있었다. 손전등을 하늘로 비쳐 보았다. 가장 밝은 별에
멈추었다. 불빛이 멀리 보이는 별에게 까지 닿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그만 발을 헛디뎠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몸은 맨홀 구멍 속으로
빠졌다. 무언가에 부딪치고는 허공에 멈추었다. 아랫도리가
나무에 걸치자마자 두 손으로 나무를 잡는 것이다. 불알 두 쪽이 터진 것 같았다. 괜찮은지 만지고 싶었지만, 살기 위해 매달려야 했다. 조금씩 균형을 잡고 나무 위에 걸터 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손전등은 한쪽 벽면을
외롭게 비추고 있었다. 나무가 얼마나 지탱하고 있을지, 손전등의
불빛은 언제까지 나와 함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닥에서 비쳐오는 불빛이었다. 깊이가 가늠되었다. 바닥으로부터 5M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저 아래 쪽의 불빛이라 나에게까지 아주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사물을 분간할 만큼의 빛이었다. 벽면을 비추는 불빛은 바닥에서부터 점점 커져 벽면에 이르러서 큰 원형의 무대를 만들었다. 무대는 넓고, 조명은 드라마틱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무대였다. 관객은 나 혼자가 아닌 것 같았다. 내 머리 위로 수 많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을 쫓아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이내 지치고 말았다. 조금씩 걱정이 밀려들었다. 각목의 양쪽 끝이 제대로 걸쳐 있는지 의심되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희미한 불빛에 비쳐본 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
아래 손전등의 불빛이 약해져 가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벽면에 어떤 동물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렁이일까? 아니 분명 뱀이었다.
느릿느릿, 아주 천천히. 그림자로 봐서는 어린 왕자의
보아뱀처럼 큰 녀석이었다. 망할 놈의 자연은 오싹한 쇼를 연출하고 있었다. 점점 불빛이 사라져가고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뱀이
벽을 타고 올라오는 사실이 있는지, 아니면 과거의 영상에서 그 장면을 보았는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금새 이빨을 드러내고 내게 달려드는 뱀에 대한 환상이 머리 속을 덮쳐버렸다. 어둠 속을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나는 소리 질렀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여기요, 야!" 맨홀 구멍은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고 밖으로 내뱉지 않은 것 같았다. 온갖 나쁜 생각들이 스며들어 왔다. 공포심이 심장을 조여왔다. 순간 지옥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면서 내 안의 두려움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난 이 곳을 나갈 거야, 이 악몽을 헤쳐나갈 거야, 아무리 큰 어려움도 잘 견뎌왔잖아, 지금 이 순간도 기적으로 만들 거야, 나가면 아무리 힘들어도 뭐든 다 할거야, 신이 나와 함께 하고 있잖아."
오히려 뱀의 존재가 다행스러웠다. 살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공포심은 피곤과 절망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게 틀어막고 있었다. 나는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워서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에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거기 누구야" 노란 안전모를 쓴 김반장 목소리였다. 나는 곧 안도감에 휩싸였다. 움츠렸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저려왔던 손은 유연해지고, 머리 속는 기쁨의 단어들이 가득 찼다. 김반장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원숭이 한 마리를 꺼내 주었다.
★ 몽키: 영국에서는 스패너(spanner)라고 하고,
미국에서 몽키렌치(monkey wrench)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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