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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7일 10시 5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사기열전2, 70편에는 태사공 자서가 있다. 스스로 저자를 소개하고 있다. 1권을 읽으며 저자 조사를 할 때 세 가지가 눈에 띄었다. 20세 때 중국을 여행했다는 것, 아버지를 이어 태사령이었고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역사서를 저술했다는 것, 또하나는 역사서를 마무리 하기 위해 죽음이 아니라 궁형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여행과 울분에 대한 것이 있어 옮겨놓는다.   

 

874 사마천의 각지 여행

사마천은 용문에서 태어나 황하 북쪽과 용문산 남쪽 기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 열 살 때 옛날 문헌을 암송했으며 스무 살 때는 남쪽으로 장강과 회하를 유력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 임금이 죽어서 들어갔다는 동굴을 탐험하고 순 임금이 매장된 구의산도 살펴보았으며 원수와 상수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였다. 그러다가 북쪽으로 문수와 사수를 건너 제나라와 노나라의 구소에서 학업을 닦고 공자가 남긴 풍속을 살펴보았으며 추현과 역산에서는 향사를 살펴보았다. 파현, 설현, 팽성 등에서 재앙과 곤란을 겪고 양나라와 초나라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사마천은 관직에 나가 낭중이 되어서 칙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파와 촉 남쪽 지역을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공과 작과 곤명을 공략하고 돌아와서 다시 명을 받들었다.

 

사마천이 여행한 곳이 어딘가 궁금했다. 그렇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알 수가 없으니 ㅠㅠ

 

881 마음 속에 맺힌 울분을  토로하기위해 <사기>를 짓는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그는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시경> <서경>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쫒거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촤천되어 세상에 <여람>을 전했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 <고분> 두 편을 남겼다. <>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도당()부터 인지(한나라 무제가 기린을 얻어 발모양을 주조한 것을 말함)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서술하였다. 기록은 황제부터 시작된다.

 

그도 다른 이들의 일을 통해 힘을 얻었구나.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와 목차에 대해

 

사기열전 70편 중 후반 35편은 한무제 근한으로 오고 있다.

 

사기열전 1권을 읽을 때보다 수월히 2권 뚜껑을 열었다. 1권 때는 머리맡에 모셔놓고 재우고, 운동용 모래주머니럼 그냥 들고 다니는 며칠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단도직입했다. 만화를 읽거나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보급판을 읽은 것도 아니었는데 1권을 개발새발 읽었어도 그게 내게 사전경험, 선행조직자(이게 어디서 튀어나온 단어일까? , 교육학 용어다!)가 되어주었다. 고맙고 신기하다. 사기열전이 사람들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라비안나이트나 그리스로마신화 같은 이야기. 근데 실제로 살았고, 중국사람 사마천에 의해 선택되고 해석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900페이지 두께의 황금빛 표지에 겁을 덜 먹게 된다.

 

나는 이번에 페이지 수 만으로 하면 300페이지 다른 책을 읽는 게 나았을 지 모른다. 마감을 어기며 북리뷰를 2주 연속 냈다. 2주만 그런 건 아니다. 장거리 출퇴근자가 매일 늑장 부리다 제 집 앞 전철을 잡으려고 닫히는 문에다 핸드백이나 손, 발끝을 밀어넣는 식이 반복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찌 볼 건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모양이 더 계속되면 내가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눈치는 어찌나 보는 지. ‘미안합니다. 그만 두겠습니다해야할 것 같다. 이 과정을 벌린 자체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도 할 수 있고, 나도 모두가 지켜야 하는 원칙을 존중한다는 증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도 900페이지 가까운 사기열전 2를 펼쳐든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은 집에 있고, 다른 책은 일부러 서점에 나가서 사와야하기 때문이다. 작년에 7기 연구원들에게 소개하는 인류의 스승들 이름, 그리고 여러 번 읽게 하는 책을 발표했을 때 사두었다. 난중일기, 고운기 삼국유사, 김용규 신과 함께 금장 사기열전 2권도 함께 배달되었다. 이유는 잊어먹었는데 그 책들은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연구원에 적을 두고, 지켜보고 함께 하는 분들이 있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사기열전 2권을 내가 혼자서 읽을 것 같지 않았다. 내 서가에서 읽히지 않은 채 헌 책으로 열패감과 함께 묵어가리라.

 

이 책을 읽지 않아도 평생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 없을 거다. 지금처럼 할 일이 많은 나이가 아니라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한다. 지금 읽음의 모습, 기록이 유치하다 해도 그 역시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좌충우돌로 기억되리라. 1권 때와는 달리 2권은 번역자가 각 장 마다 써둔 해제를 꼼꼼히 읽는다. 이 장은 누구 이야기고, 다른 장 어디와 연관해서 읽으라 안내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40 계포, 난포 열전의 해제 중 일부다.

 

계포는 항우의 용감한 장수로 여러 차례 유방을 곤경에 빠뜨렸다. 항우가 멸망한 뒤 유방이 현상금을 내걸고 그를 체포하려 했으므로 복양의 주씨라는 사람 집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주씨는 이 사실을 두려워하여 그를 노비로 구며 주가에 팔았다. 주가는 계포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밭 창고에 숨겨놓고 낙양으로 수레를 달려 등공을 만나 고조에게 계포를 용서하도록 설득하여 혐의를 풀어주었다. 113p

난포는 팽월과 친구 사이다. 고조는 여후가 팽월을 참소하자 그를 죽여 낙양의 성문 아래에 목을 내걸고는 그를 보러 오는 자기 있으면 즉시 체포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난포는 서슬 퍼런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서 살펴보았으니 친구에 대한 그의 깊은 우정을 엿볼 수 있다. 고조는 그 의리를 장하게 여겨 사면하였다. 113p

이 편은 [오자서 열전] [염파, 인상여 열전]을 참조하며 읽어야 한다. 113p

 

해제만을 읽고 대략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맨 뒤의 장인 70편에는 <사기> 머리말에 해당하는 해제가 있다. 사마천이 직접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간단하여 내용을 짐작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서 이 해제들이 나는 더 유용했다. 다음과 같다.   

 

 

36 장 승상 열전     한나라 초기 승상 장창, 주창, 신도가의 이야기

37 역생, 육고 열전   한나라 고조의 모신 역이기, 육고, 초나라 모신 주적의 이야기

38 , , 괴성 열전  고조의 이류가신 3 사람의 이야기

39 유경, 숙손통 열전 한나라 건국초기 정권안정에 기여한 유경, 숙손통의 이야기

40 계포, 난포 열전   - 의리를 보아 고조가 무혐의 해준 계포와 난포의 이야기  

 

41 원앙, 조조열전    - 강직한 간언을 하다 죽임을 당한 원앙, 조조 의 이야기

42 장석지, 풍당 열전 문제에게 직간하는 신하 장서지, 풍당 의 이야기

43 만석, 장숙 열전   - 군주에게 올바로 처신한 만석군, 장석, 위관, 직불의, 주인 의 이야기

44 전숙 열전         - 전숙과 전숙의 아들인 전인, 임안의 이야기

45 편작, 창공 열전   -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명의 편작과 창공의 이야기, 처방전 이야기

 

46 오왕 비 열전      - 반란을 일으켰던 한나라 초기 제후 오왕 비의 이야기

47 위기, 무안후 열전 세 봉건 귀족 위기후 두영, 무안후 전분, 관부 세 사람의 전기

48 한장유 열전       - 관리였던 한장유의 이야기

49 이장군 열전       - 한나라 경제, 무제 때 장수 이광의 전기

50 흉노 열전         - 한나라 무제의 강경 정벌 정책 대상이었던 북쪽 흉노족 이야기

 

51 위장군, 표기 열전 흉노정벌에 공이 있던 위청 장군, 곽거병 및 16명의 장군 이야기

52 평진후, 주보 열전 공손홍, 주보언의 전기에 사상적으로 일관되는 서악과 엄안을 보탬

53 남월 열전        - 소수민족 남월의 한무제까지의 중국과의 교류 이야기  

54 동월 열전        - 소수민족 동월의 한무제까지의 중국과의 교류 이야기

55 조선 열전        - 소수민족 동이로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에 대한 이야기

 

56 서남이 열전      - 중국의 서남쪽 운남성, 귀주성, 사천성 지역 부락국가와의 교류 이야기

57 사마상여 열전    - 무제의 서남이 정책을 지지했던 문인 사마상여의 글 몇 개와 전기

58 회남, 형산 열전   - 모반을 일으켰다 주살된 한무제의 아들 유장, 그의 아들 유안의 이야기

59 순리 열전         - 주대 봉건국가에서 활약한 순리(청관) 다섯 명의 전기

60 , 정 열전       - 무제 때 순리 급암, 정당시의 이야기

 

61 유림 열전        - 유가 53명의 이야기

62 혹리 열전        - 가혹하게 법을 집행한 관리 12(그 중 10명이 무제 때 사람)의 이야기

63 대원 열전        - 지금의 우즈베크 공화국인 대원의 정벌과 서역과의 교류 이야기

64 유협 열전        - 곽해 등 대표적인 서민 협객의 이야기

65 영행 열전        - 한나라 쇠망기의 외척, 환관의 이야기

 

66 골계 열전        - 재치가 있던 골계가 손우곤, 우맹, 우전 세 명의 열전

67 일자 열전        - 육상(천상)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치는 사람 일자의 이야기

68 귀책 열전        - 거북 껍질과 시초로 점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

69 화식 열전       - 재산을 늘리는 방법으로는 상업이 최고

70 태사공 자서     - <사기> 전체의 머리말, 저자가 하는 자기 소개

 

 

2)   장점과 보완점

 

(1)   사람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본다.

 

장점으로는 한 사람의 장점과 약점이 동시에 서술되어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온전한 위인과 완벽한 악인은 없을 듯 하다. 이런 식의 서술이 저자의 깨어있음, 치우치지 않음, 공평함의 증거인 듯 하다. 이런 걸 입체적으로 보는 것이리라. 틱낱한 스님의 명상책을 읽었다. 그는 말했다. 삶은 고통이지만 또 한편 기쁨과 경이로움이라고. 그게 동시에 존재하는 걸 보는 게 있는 그대로 보는 거라고 했다. 삶의 순간, 사람에 대해서도 이렇게 보아야 할 거다. 웃긴 이야기를 할 때 말하는 본인이 먼저 웃어버리면 이쪽은 싱거워진다. 감동적인 이야기도 화자가 먼저 들떠버리면 전해지는 감동은 줄거나 호들갑 속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 같다. 국자가 국 맛을 몰라도 되지 않겠나? 슬프고 억울하고 통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기를 고르게 보여주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그래도 강직한 사마천의 성품이 묻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혹리로서 비판하면서도 그의 청렴함을 인정하는 예화를 보여준다. 또 직언을 했던 승상이 늙어서 이빨 빠진 후 유모를 둔 이야기를 덧붙였다. 대를 물리는 봉토를 하사 받은 늙고 부유하고 지체높은 남자가 어른에게는 하등 영양가가 없는 젖을 그 어린 여자의 갓난아이와 나눠 먹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에 대해 양가감정이 든다.   

 

46 장창은 승상을 그만 둔 뒤 늙어서 이가 다 빠져 젖을 먹고 살았는데, 반드시 나이 어린 여자를 유모로 삼았다. 장창은 처와 첩이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아기를 가진 적이 있는 여자에게는 두 번 다시 애정을 주지 않았다. 그는 백 살 남짓까지 살다가 죽었다.

 

(2)   중국의 역사인데 흉노, 조선족, 대원, 남월, 동월  등 소수민족을 아우르고 점치는 법까지 말한다.

 

(3)   각 장의 소제목 중 매력적인 것이 많다.

 

책을 읽기 전에 목차를 읽었다. 한 열전 당 5~10개 정도의 소제목이 있다. 누가 써 넣은 걸까? 사마천 본인일까? 역자일까? 미리 계획된 설계도일까? 매력적이고 호기심이 살살 일어나는 소제목이 많이 보인다. V 표를 해본다. 무찔러 드는 소제목을 타이핑을 하다 보니 고전에서 삶의 지혜를 찾으려 드는기본적인 자세를 내가 갖고 있음이 읽힌다. 그것의 해답 하나는 될 경구의 형태다. 이야기의 제목처럼 함축적이다. 시인이 싯구를 가다듬듯 제목을 다듬어야 하는 거구나.

 

내가 쓰게 될 책을 읽을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책을 접할 것 같다. 책의 표지를 구경하고, 왼날개의 저자 소개를 읽어서 이 저자가 이 주제를 다룰 만한 사람인지를 가늠하겠지. 저자 소개에서는 프로필의 전문성이 훌륭한 경우에도 끌리지만 독특하게 개성적인 저자 소개에도 나는 끌린다. 머리말을 읽는다. 머리말에서 책의 내용과 저자의 취지, 그리고 대략의 장별 내용을 저자가 직접 리뷰해놓는다. 그리고 목차를 죽 흝는다. 거기서 매력적인 소제목을 골라서 듬성듬성 골라 읽는다. 여기까지는 서점 가판대나 도서관 열람실 서가 앞에 서서 하는 행동이다. 취사독서한 부분이 마음에 들고, 더 알고 싶으면 그 책을 사거나 빌린다. 요즘은 이 책을 굳이 살 필요가 있는 지 그냥 빌리거나 서서 후루룩 읽고 말 건지를 더 오래 생각한다. 학문적이고 어려운 거라고 구입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의무독서는 교과서만으로 충분하다. 즐거움을 주거나 유익을 주든가, 정성이 든 손바느질 작은 주머니나 팬시문구처럼 무작정 지니고 싶든가. 내가 당면해서 골몰하고 있는 주제의 책인데 정성이 든 책은 애정이 많이 간다. 마음을 비끄러매려고 하지만 마음은 의무나 제도가 아니라 편안하고 즐거운 데로 간다. 내 마음을 끈 소제목들은 이랬다.

 

36 장 승상 열전     한나라 초기 승상 장창, 주창, 신도가의 이야기

관리는 회계 관리에 뛰어나야 한다.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창

조정의 예절은 엄격해야 한다.

 

37 역생, 육고 열전   한나라 고조의 모신 역이기, 육고, 초나라 모신 주적의 이야기

선비를 만나기 위한 자세

순리를 저버리면 재앙이 닥친다.

한번 사귀면 끝까지 의리를 지킨다.

 

38 , , 괴성 열전  고조의 이류가신 3 사람의 이야기

궁궐 청소를 관리하던 근홉

 

39 유경, 숙손통 열전 한나라 건국초기 정권안정에 기여한 유경, 숙손통의 이야기

급소를 쳐야 확실하게 승리한다.

적에게는 자신의 장점을 과장하여 드러낸다.

근본을 튼튼히 하라

중요한 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

 

40 계포, 난포 열전   - 의리를 보아 고조가 무혐의 해준 계포와 난포의 이야기 

천하를 가진 자는 사사로운 원한을 앞세우면 안된다.

황금 백 근 보다 계포의 말 한 마디가 더 낫다.

 

41 원앙, 조조열전    - 강직한 간언을 하다 죽임을 당한 원앙, 조조 의 이야기

높고 낮음에 질서가 있어야 화목하다

노름꾼도 사귈 만한 가치가 있다.

 

42 장석지, 풍당 열전 문제에게 직간하는 신하 장서지, 풍당 의 이야기

탐나는 물건이 있으면 무덤 속까지 도둑이 든다.

내 버선을 매어 주시오

 

43 만석, 장숙 열전   - 군주에게 올바로 처신한 만석군, 장석, 위관, 직불의, 주인 의 이야기

어려울 때 지나치게 신중하면 해가 된다.

아랫사람이 잘못하면 윗사람이 책임지라.

 

44 전숙 열전         - 전숙과 전숙의 아들인 전인, 임안의 이야기

어진 사람은 지친 병사를 전쟁터로 내몰지 않는다.

변상은 잘못한 사람이 직접해야 효과가 있다.

왕과 신하는 위험도 함께 해야 한다

 

45 편작, 창공 열전   -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명의 편작과 창공의 이야기, 처방전 이야기

살 수 있는 사람을 살려낼 뿐이다.

질병은 징후가 나타날 때 고쳐야 한다.

고칠 수 없는 병 여섯 가지

잘 키운 딸이 여러 사내아이보다 더 낫다

환자에 따라 치료법이 다르다

 

46 오왕 비 열전      - 반란을 일으켰던 한나라 초기 제후 오왕 비의 이야기

천하를 위해서는 한 사람을 버리라

정말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가

 

47 위기, 무안후 열전 세 봉건 귀족 위기후 두영, 무안후 전분, 관부 세 사람의 전기

긴급할 때는 겸양만이 능사가 아니다

원망하는 마음은 작은 일에서 싹튼다.

대장부는 귓속말을 삼간다.

가지가 기둥보다 크면 부러진다.

 

48 한장유 열전       - 관리였던 한장유의 이야기

 

49 이장군 열전       - 한나라 경제, 무제 때 장수 이광의 전기

항복한 자를 죽이면 화가 닥친다.

 

50 흉노 열전         - 한나라 무제의 강경 정벌 정책 대상이었던 북쪽 흉노족 이야기

하늘과 땅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어린애가 어찌 천자를 상대하겠는가?

 

51 위장군, 표기 열전 흉노정벌에 공이 있던 위청 장군, 곽거병 및 16명의 장군 이야기

종으로 태어났지만 귀상인 위청

 

52 평진후, 주보 열전 공손홍, 주보언의 전기에 사상적으로 일관되는 서악과 엄안을 보탬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남을 다스릴 수 있다.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면 위태로워진다.

선조가 쌓은 음덕은 후손이 받는다.

 

53 남월 열전        - 소수민족 남월의 한무제까지의 중국과의 교류 이야기 

두 영웅은 함께 있지 못한다.

 

54 동월 열전        - 소수민족 동월의 한무제까지의 중국과의 교류 이야기

55 조선 열전        - 소수민족 동이로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에 대한 이야기

56 서남이 열전      - 중국의 서남쪽 운남성, 귀주성, 사천성 지역 부락국가와의 교류 이야기

 

57 사마상여 열전    - 무제의 서남이 정책을 지지했던 문인 사마상여의 글 몇 개와 전기

거문고 연주로 여자를 사로잡는다

이미 정해진 일을 두고는 다투지 않는다.

새는 하늘에 있는데 덤불만 살핀다.

 

58 회남, 형산 열전   - 모반을 일으켰다 주살된 한무제의 아들 유장, 그의 아들 유안의 이야기

원통하게 죽은 어머니를 위해 살인한다.

형제는 베 한 자도 같이 입어야 한다.

안정된 때 일으키는 반란은 실패한다.

편애는 불화를 낳고, 불화는 나라를 망친다.

 

59 순리 열전         - 주대 봉건국가에서 활약한 순리(청관) 다섯 명의 전기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

효를 좇다가 불충한다

 

60 , 정 열전       - 무제 때 순리 급암, 정당시의 이야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주는 자가 참된 관리이다.

장작을 쌓아올리듯 신하를 등용한다.

윗사람의 허물을 기워주는 사람이고 싶다.

손님은 겸손과 정성으로 접대하라

 

61 유림 열전        - 유가 53명의 이야기

간을 먹지 않아도 고기 맛을 알 수 있다.

 

62 혹리 열전        - 가혹하게 법을 집행한 관리 12(그 중 10명이 무제 때 사람)의 이야기

비첩을 잃으면 다시 얻으면 그만이다

작은 일을 충실하게 하여 큰 일을 한 감선

 

63 대원 열전        - 지금의 우즈베크 공화국인 대원의 정벌과 서역과의 교류 이야기

먼 곳에 있는 자보다 가까이 있는 자에게 기대라

 

64 유협 열전        - 곽해 등 대표적인 서민 협객의 이야기

 

65 영행 열전        - 한나라 쇠망기의 외척, 환관의 이야기

힘써 농사짓는 것보다 풍년을 만나는 것이 낫다

 

66 골계 열전        - 재치가 있던 골계가 손우곤, 우맹, 우전 세 명의 열전

삼년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는 무슨 새일까?

말을 임금의 예로 장사 지낸다.

우스갯소리도 이치에 맞으면 가치가 있다.

따오기를 잃은 자의 변명

 

67 일자 열전        - 육상(천상)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치는 사람 일자의 이야기

맞는 땅이 아니면 심어도 나지 않는다.

 

68 귀책 열전        - 거북 껍질과 시초로 점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

신령스러운 거북은 길흉을 알지만 그 뼈는 말린다.

 

69 화식 열전       - 재산을 늘리는 방법으로는 상업이 최고

입고 먹는 것이 다스림의 근원이다.

물건과 돈은 흐르는 물처럼 유통시켜야 한다.

시세 변동에 따라 새처럼 민첩하게 사고팔라

 

70 태사공 자서     - <사기> 전체의 머리말, 저자가 하는 자기 소개

 

(4)   보완점이라기 보담은 궁금한 점 편지의 출처는?

 

흉노족 왕인 선우에게 한나라 대신이 보내는 편지가 실려 있다. 나는 이 편지가 사마천의 상상력에 의한 재구성인지, 태사령이었던 그가 궁중도서관, 전국을 자유로이 다니며 접근한 자료에 근거한 건지 궁금했다. 내가 저자라면 그 편지나 글의 출처를 밝힐 것이다. 아니면 습득 경로라도.

 

3) 감동적인 장절

 

(1)   남의 왕이 된 자에게 남의 신하된 자가 해야할 역할

 

잔인하고 광포했던 한 무제에게 직언하다가 궁형을 받은 사마천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한다. 그렇더라고 이 책이 2000년 이상을 거슬러 인류의 고전이 된 건 세월과 사람의 검증을 마쳤다고 본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다루고 있는 직간, 간언하는 신하처럼 직장에서 만나는 Boss나 상사에게 나도 말을 해도 되나 어쩌나 고민해 본다. 나의 의견이나 판단이 현명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Boss에게 신뢰를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나? 그럼 지금 나의 행동은 무엇을 따를까 하는 관점에서 직간하는 신하와 황제의 이야기를 읽는다. 최근에 직장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떠올리면서 해법을 찾는다.     

 

(2)   사마천의 강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마천의 입김이 느껴진다고 해제에서 밝힌 두 장이 있다. 무제의 잔인하고 지나치게 강경한 형벌 적용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의 인생을 들어 알고 있기 때문에 연결시킬 수있다. 

 

(3)   골계열전의 웃기면서도 교훈적인 이야기

 

(4)   사마천의 자기 이야기 – 70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36 장 승상 열전

 

해제

36 한나라 때는 아버지의 공덕이나 황제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승상이나 왕후를 책봉했지 결코 재능에 따라 적재적소에 임명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수록된 장창, 주창, 신도가 등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아부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직간으로 의를 지킨 인물들이다. 고조가 태자 효혜를 폐위시키고 조나라 왕 여의를 태자로 삼으려 하자, 주창이 직언을 하고 고조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이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관리는 회계관리에 뛰어나야 한다.

 

37 그 뒤 장창은 죄를 지어 목이 베이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옷을 벗겨 처형대에 엎어 놓았는데 몸집이 크고 살이 쪄 박속같이 희었다. 이때 왕릉이 장창의 모습을 보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패공에게 풀어주도록 부탁해 목이 베이지 않게 했다.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창

 

39 주창은 강직한 성격으로 거침없이 바른말을 했기 때문에 소화와 조삼을 비롯하여 모든 신하가 그에게 몸을 굽혀 두려워했다. 주창은 일찍이 고제가 한가롭게 쉬고 있을 때 어떤 일을 말씀드리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마침 고제가 척희를 끌어안고 있어서 주창은 뒤돌아 달아났다. 고제가 뒤쫒아와 붙잡더니 주창의 목을 타고 올라앉아 물었다.

나는 어떤 임금이냐?”

주창이 고개를 고쳐세우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걸 임금이나 주 임금과 다를바 없는 폭군이십니다.”

황제는 웃음을 떠트렸지만 이 일로 해서 주창을 더욱 꺼리게 되었다. 고제가 태자를 폐위시키고 척희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자 신하들이 강력히 반대했지만 아무도 고제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39 “신은 입으로는 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분명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태자를 폐위시키려고 하시지만 단연코 신은 폐하의 명령을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황제는 흔연히 웃었다. 

 

41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요는 고조를 모시게 되었다. 하루는 고조가 마음이 울적해져 혼자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지만 신하들은 황제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를 몰랐. 그런데 조요가 나아가 공손히 물었다.

폐하께서 울적해 하시는 까닭은 조나라 왕이 어리고 척희와 여후의 사이가 좋지 않아, 황제께서 돌아가신 뒤에 조나라 왕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41 “폐하께서는 다만 조나라 왕을 위하여 지위가 높고 성품이 강직하고 세력있는 신하이면서도 여후와 태자와 신하들이 평소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인물을 재상으로 두시면 될 것입니다.”

 

42 고조가 말했다. 

그것이 좌천이라는 것은 나도 아오. 하지만 조나라 왕의 앞날을 혼자 걱정하다 보니 공이 아니면 적임자가 없고. 어쩔 수 없으니 내키지 않더라도 그대가 가 주어야겠소.”

   

정상에 오른 자에게는 내리막길이 있을 뿐이다.

 

45 장창은 본래 책을 좋아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고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특히 음악과 역법에 뛰어났다. 장창은 안국후 왕릉의 은덕을 잊지 않고 귀한 신분이 된 뒤에도 언제나 왕릉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장창은 왕릉이 죽은 뒤에 승상이 되었지만, 한가할 때면 제일 먼저 왕릉의 부인을 찾아가 음식을 올린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내가 은혜를 잊지 말아야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46 장창은 승상을 그만 둔 뒤 늙어서 이가 다 빠져 젖을 먹고 살았는데, 반드시 나이 어린 여자를 유모로 삼았다. 장창은 처와 첩이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아기를 가진 적이 있는 여자에게는 두 번 다시 애정을 주지 않았다. 그는 백 살 남짓까지 살다가 죽었다.

이런 에피소드는 상당히 다양한 느낌을 준다.

 

조정의 예절은 엄격해야 한다.

 

47 문제는 등통의 집에서 연회를 즐길 만큼 그를 몹시 총애하였다. 하루는 승상이 조회를 들어갔는데 등통이 황제 곁에 붙어서 승상을 대하는 예절이 느슨하였다. 승상은 일을 다 보고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신하를 총애하여 그를 부귀하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조정에서의 예절은 엄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도가는 조회를 마치고 승상부로 돌아와 등통을 승상부로 소환하는 격서를 만들어 오지 않으면 등통의 목을 베겠다고 했다등통은 승상부에 이르자 관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신도가는 태연하게 앉은 채 짐짓 예의를 차리지 않고 꾸짖었다.

조정은 고 황제의 조정이거늘 등통너는 하찮은 신하 신분으로 어전을 희롱하였다. 이는 불경죄로 참형을 받아 마땅하다. 형리는 지금 당장 그를 참형에 처하라.”

등통이 머리를 땅에 찧으며 빌어 피범벅이 되었지만 신도가는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효문제는 승상이 등통을 충비히 욕보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사자에게 부절을 들려 보내 등통을 부르게 하였다.

나도 등통처럼 할 때가 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Boss를 대할 때 상관을 넘어서 친하기도 한다.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해얄 지를 알려준다.   

 

절차보다 행동이 앞서야 할 때가 있다.

 

49 날이 밝아 승상이 내사 조조의 목을 베도록 주청하자 경제는 이렇게 말했다.

조조가 문을 낸 곳은 진짜 종묘의 담이 아니고 바깥 담으로 다른 관리들이 그 안에서 살았소. 또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으니 조조에게는 죄가 없소.”

 

50 태사공은 말했다.

“…주창은 나무처럼 질박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임오는 옛날에 옥살이한 여후를 보호한 은덕으로 인해 여후에게 쓰였다. 신도가는 강직하여 지조를 굳게 지켰다고 말할 수 있으나 제왕학이 없어 소하, 조삼, 진형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한대 승상 차천추, 위현, 위상, 병길, 황패. 위현성, 광형

 

51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관상쟁이에게 그들의 관상도 보게했다. 관상쟁이는 둘째 아들 현성을 보더니 말했다. “이 아들은 귀한 상으로 틀림없이 열후에 봉해질 것입니다.”

 

56 승상 광형은 동해군 사람으로 책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박사로부터 시경을 전수받았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남의 머슴살이로 생계를 이어 나갔으며 재주가 변변치 못하여 여러 차례 관리 시험을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하다가 아홉 번 만에 겨우 병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경서 실력이 부족하여 갑과, 을과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하였으므로 경학에 정통할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는 평원군의 문학 졸사로 보직을 받아으나 몇 년 동안은 군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어사가 그를 수도로 불러들여 봉록 백석의 관리로 삼았고, 뒤에 추천하여 낭중이 되게 하였으며, 이어서 박사라는 보직을 받게 되었고, 태자 소부가 되어 효원제를 섬겼다. 효원제는 시경을 좋아하였으므로 광형을 광록훈으로 삼아 궁궐 안에 머물면서 스승이 되어 황제 주위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천자는 그 옆에 앉아 강의를 듣고 매우 흡족해 하였다. 그래서 그는 날이 갈수록 존경을 받는 귀한 신분이 되었다. 어사대부 정홍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자 광형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일 년 남짓하여 위 승상이 죽자 광형이 이어 승상이 되었고, 낙안후에 봉해졌다. 그는 십 년 동안 장안의 성문에 나가 지방관이 되는 일 없이 승상 벼슬에 올랐다. 이 어찌 때를 만난 운명이 아니겠는가?

재주가 떨어져도 때에 따라, 또는 여건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한다.

 

 

37 역생, 육고 열전

 

해제

59 이 편은 변설로 고조의 모신이 된 역이기, 육고, 그리고 초나라의 모사 주건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59 이 편은 <사기> [여태후 본기]와 함께 읽어볼 필요가 있다. 왕국유와 고힐강은 이 편을 지은 이가 사마천이 아니라 사마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62 그 기병이 말했다.

패공은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관을 쓴 선비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그 관을 빼앗아 그 안에 오줌을 누곤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말할 때마다 목청 높여 선비를 욕합니다. 선비 신분으로 그에게 유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63 “진실로 사람들을 모으고 의병들을 합쳐서 무도한 진나라를 쳐없애고자 하신다면 걸터앉은 자세로 나이든 사람을 만나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패공은 발 씻던 것을 그만두고 일어나 의관을 바로 하고 역생을 상석에 앉힌 뒤 사과하였다.

 

63 역생이 대답했다.

당신은 오합지졸을 모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둬들였지만 만 명이 채 못 됩니다. 이 정도 병력으로 강한 진나라에 쳐들어가는 것을 호랑이 입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진류현은 천하의 요충지이자 사바응로 통하는 길목으로 교통이 편하며 지금 성안에는 많은 식량을 쌓아놓고 있습니다. 소인은 진류현의 현령과 친분이 있으니 신을 사신으로 보내 주시면 그가 당신께 투항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현령이 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은 군대를 일으켜 그곳을 치십시오. 신은 성안에서 대응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실력자를 찾아가서 계책을 말한 후 그걸 그가 채택하면 사신이 되든가 장군이 된다. 이게 이 시대에 인재를 들어 쓰는 방법인듯????

 

왕노릇 하는 자는 백성을 하늘처럼 여긴다.

 

64 역생이 이렇게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의 일을 이룰 수 있고,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왕의 일을 이룰 수 없다. 왕 노릇 하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라고 합니다. …초나라 군대가 형양을 함락시키고도 오창을 굳게 지키지 않고 오히려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면서 죄를 지어 변방으로 쫒겨나 병사가 된 자들에게 성고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한나라를 돕는 것입니다. ...또 두 영웅은 함께 설 수 없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오랫동안 맞서 싸우면서 승자와 패자를 분명하게 결정짓지 않는다면 백성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천하는 동요할 것이며, 농부를 쟁기를 버리고 길쌈하는 여인들은 베틀에서 내려와 천하의 민심이 불안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당신은 즉시 군대를 다시 진격시켜 형양을 탈환하고 오창의 식량을 손에 넣은 뒤 성고의 요충지를 막아 태행산으로 가는 길을 끊고 비호의 입구를 막고 백마 나루터를 지킴으로써 제후들에게 실력을 과시하고 유리한 지형으로 적을 누르고 있는 형세임을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천하는 돌아갈 곳을 알게 될 것입니다.”

 

 

66. “왕께서는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돌아갈 지 아십니까?”

역생이 대답했다. “한나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항왕은 약속을 어겼다는 악명과 의제를 죽여 의리를 저버렸다는 죄를 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공로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는 잊는 일이 없습니다. 싸워 이겨도 상을 주지 않고 성을 함락시켜도 봉읍을 주지 않습니다….천하 사람들은 그에게 반기를 들었고, 어진 사람과 재능있는 선비들은 그를 원망하며 그를 위하여 일하여 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나라는 이미 오창의 곡식을 차지 하였으며 성고의 요새를 막고 백마 나루터를 지키며, 태행산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비호의 어귀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천하의 제후들 중에서 뒤늦게 한나라 왕에게 항복하는 자는 먼저 멸망할 것입니다. 왕께서 서둘러 한나라 왕에게 항복한다면 제나라의 사직은 지킬 수 있지만 한나라 왕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선 채로 멸망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순리를 저버리면 재앙이 닥친다.

 

말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하여 말 타고 다스릴 수는 없다.

 

72 육생은 황제 앞에 나아가 말할 때마다 <시경> <상서>를 인용했다. 그러자 고조는 육고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 등에 올라타 천하를 얻었소. 어찌 <시경> <상서> 따위를 쓰겠소.”

그러자 육생이 말했다.

말 등에 올라타 천하를 얻었다고 하여 어찌 말 등에 올라타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옛날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무력으로 정권을 얻었지만 민심에 순응하여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와 같이 문과 무를 함께 쓰는 것이 나라를 길이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옛날 오나라 왕 부차와 지백은 무력을 지나치게 쓴 탓에 멸망하였고 진나라는 형법만을 쓰고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조씨는 멸망한 것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인의를 행하고 옛 성인을 본받았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조는 육생의 말이 못마땅했지만 부끄러워하는 낯빛을 하고 육생에게 말했다.

나를 위하여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또 고대 국가들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글을 지어 올리시오.”

그래서 육생은 국가 존망의 징후에 대해서 대략 서술하여 모두 열세 편을 지었다. 그가 한 편 한 편 지어 올릴 때마다 고조는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곁에 있던 사람도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 책을 <신어>라고 하였다.

 

74 육생은 언제나 말 네 마리가 끄는 안거를 타고 노래하고 춤추고 거문고를 타는 시종 열 명을 데리고 다녔으며 백 금이나 하는 값비싼 칼을 차고 다녔다. 그는 여러 아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하자. 내가 너희 집에 가면 너희는 내가 데려간 사람과 말에게 술과 음식을 주도록 해라. 열흘 동안 실컷 놀고 즐기다가 다음 아들 집으로 가겠다. 그러다가 내가 죽는 집에서 보검과 수레와 말, 그리고 시종들을 갖도록 해라. 일년 동안 고가도 다른 집에 들러 빈객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너희 집에 들러는 것은 고작 두세 번 정도일 것이다. 너무 자주 보면 반갑지 않을 테니 오래 묵어 너희를 귀찮게 하지는 않겠다.

리어왕과 똑 같은 생각이네. 육생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모두 미리 나누어주는 실수는 하지 않았겠지.

 

한번 사귀면 끝까지 의리를 지킨다.

 

77 평원군은 말재주가 뛰어나고 엄격하며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이다. 그는 장안에서 살았는데 구차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의리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자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벽양후 심이기는 행실은 바르지 않지만 여 태후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 무렵 벽양후는 평원군과 사귀고 싶어했으나 평원군은 그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평원군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육고는 전부터 평원군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문상을 하러 갔다. 그런데 평원군은 집이 가난하여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상복과 장례 도구를 빌려오려 하고 있었다. 육고는 평원군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 준 뒤 벽양후를 찾아가서 축하하며 말했다.

평원군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벽양후가 말했다.

평원군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어째서 나에게 축하합니까?”

육고가 말했다.

전날 당신이 평원군과 사귀려고 했지만, 평원군이 의리를 지키며 당신과 사귀지 않은 것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어머니께서 죽었으니 당신이 진실로 정성을 다해 후하게 조의를 표한다면 그는 당신을 위하여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벽양후는 백 금을 들고 가서 조의금으로 냈다. 열후와 귀인들도 벽양후의 체면을 보아 조의금을 보냈으므로 500금이나 되었다.

 

사람을 생김새로 판단하면 인재를 잃기 쉽다.

 

81 그러자 역생은 눈을 부릅뜨고 칼을 만지며 사자에게 호통을 쳤다.

빨리 들어가서 패공께 나는 고양의 술꾼이지 선비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81 역생이 들어와 패공에게 읍하고 말했다.

당신은 고생이 많으십니다. 옷을 따가운 햇빛에 조이고 관을 비바람에 적셔 가며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도와 의롭지 못한 진나라를 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찌하여 자신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신은 천하의 큰 일에 대한 계책을 가지고 뵈려고 하는데 나는 지금 천하를 평정하는 일로 바쁘기 때문에 아직 선비를 만날 틈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싱은 천하의 큰일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려고 하면서 생김새로 그 사람을 판단하니 천하의 재능있는 선비를 잃을 것입니다. 또 신은 당신 지혜가 신만 못하고 용맹도 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천하의 큰 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신을 만나보려 하지 않는다면 신은 당신이 인재를 잃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38 , , 괴성 열전

 

해제

85 이 편은 한나라 고조 곁에서 보좌한 신하 세 명에 관한 전기를 다룬 것이다. 이들은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그 영달이 극에 달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들이 고귀한 인명을 살상했다고 하여 높이 평가하지 않으니 2류 인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태사공 자서 에서는 진한 시대의 일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이 편을 지었다고 하는데 사실상 이 편은 너무 간략하다. 사마천이 이렇게 의도한 데에는 풍자의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진한 시대의 사적은 이미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열전에서 나와 있으므로 주설 같은 평범한 인물의 열전에 삽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마천은 한신 같은 위대한 공신이 고조에게 피설당하고 [영행 열전]에나 들어가야 할 주설 같은 자가 제후에 봉해진 것을 한탄한 것이다. <대학> 첫머리에 나와 있듯이,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신 修身 이야 말로 근본이기 때문이다.

 

패공의 가신이었던 부관

궁궐 청소를 하던 근흡

고조의 참승이었던 주설

 

 

39 유경, 숙손통 열전

 

해제

93 유경과 숙손통은 한나라 건국 초에 유방을 도와 시국을 안정시키고 제도를 만들었으며 정권을 튼튼히 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사마천이 그들의 열전을 설정한 까닭은 그들의 시대적 역할을 긍정한 것이다.

 

93 이 편은 다른 열정과는 달리 문학성이 두드러져 여러 수사 기교와 형상성이 돋보인다.

 

급소를 쳐야 확실하게 승리한다.

 

97 일흔번 큰 싸움을 하였고 일흔 번 작은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천하 백성의 간과 골을 땅에 바르고, 아버지와 자식의 뼈가 함께 들판에 뒹구는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소리가 끊임없고 부상당한 사람들은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97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치지 않고서는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함곡관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하고 진나라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천하의 목을 조르고 그 등을 치는 일입니다.

 

적에게는 자신의 장점을 과장하여 드러낸다.

 

99 두 나라가 싸우려 할 때는 상대편에게 자신들의 장점을 과장하여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신은 흉노에 가서 여위고 비적 마른 가축과 늙고 야한 병사들만을 보았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자기들의 단점을 보여주고 기병을 숨겨 두었다가 숭리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흉노를 치면 안됩니다. (유경à한 고조)    

 

100 유경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만일 본처 (여후) 소생 맏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많은 예물을 내려준다면 그는 한나라가 본처 소생의 맏공주를 보내고 예물이 많은 것을 보고 오랑캐일지라도 반드시 공주를 존중하여 연지(흉노 왕후의 칭호)로 삼고 공주께서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선우의 대를 잇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나라의 많은 예물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한나라에는 언제나 남아돌지만 그들에게는 귀한 물건을 폐하께서 자주 보내주면서 그때마다 변사를 보내 예절을 가르치면 묵돌은 살아서는 폐하의 사위가 되고 죽으면 폐하의 외손이 선우가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외손자가 감히 외할아버지와 대등한 예를 취하려는 경우를 들어보셨습니까? 이렇게 하면 군대를 내어 싸우는 일 없이 그들을 서서히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맏공주를 보낼 수 없어 종실이나 후궁의 딸을 봅아 공주라고 속여 보내신다면 그도 눈치를 채고 그녀를 귀하게 여겨 가까이하지 않을 테니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호랑이 입을 빠져나온다.

 

104 숙손통은 한나라 왕이 자신의 선비 차림새를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초나라의 짧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자 한나라 왕은 기뻐해다. 숙손통이 한나라 왕에게 항복하였을 때 그를 따르던 선비와 제자는 백 명이 넘었다. 그러나 숙손통은 그들을 한나라 왕에게 추천하여 벼슬길을 열어주지 않고 도적이나 장사치만을 추천하여 채용되게 하였다.

지금 한나라 왕은 화살과 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하는 다투고 있는데 여러분이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적장의 목을 베고 적기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한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믿고 기다리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선비와 천하를 얻지는 못해도 이룬 것을 지킬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

 

109 한나라 12년에 고조가 태자를 조나라 왕 여의로 바꾸려 하자 숙손통은 황제에게 간언하였다.

옛날 진나라 선공은 여희를 사랑하여 태자를 폐하고 해제를 태자로 세웠습니다만 진나라는 이로 인하여 수십 년 동안 어지러웠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또 진나라는 부소를 태자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고가 황제의 명령을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워 스스로 조상의 제사를 끊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직접 보신 일입니다. 지금의 태자께서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것은 천하 사람이 다 아는 일입니다. 또한 여후께서는 폐하와 고생을 같이 하셨는데 어찌 여후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폐하게서 굳이 적자를 폐하고 어린 여의를 태자로 세우고 싶다면 신을 먼저 죽여 이 땅을 제 목의 피로 더럽히십시오.”

고조는 이 말을 듣고 생각했다.

공은 그만하시오. 나는 농담을 했을 뿐이오.”

그러자 숙손통이 말했다.

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한 번 흔들리면 천하가 흔들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하를 가지고 농담을 하실 수 있습니까?”

고조가 말했다.

나는 공의 말대로 하겠소.”

그 뒤 황제는 연회를 열었을 때 유후 장량이 초대한 빈객들이 태자를 따라와 만나는 것을 보고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두 줄에 눈길이 머문다. 그런데 이 왕은 어째서 같은 아들 사이에서 이리도 혼란하는가? 그 아들들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 아들들에 대한 사랑의 차이 때문인가?

 

112 너무 곧은 것은 굽어 보이고, 길은 본래 꾸불꾸불하다.

 

 

40 계포, 난포 열전

 

해제

113 계포는 항우의 용감한 장수로 여러 차례 유방을 곤경에 빠뜨렸다. 항우가 멸망한 뒤 유방이 현상금을 내걸고 그를 체포하려 했으므로 복양의 주씨라는 사람 집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주씨는 이 사실을 두려워하여 그를 노비로 구며 주가에 팔았다. 주가는 계포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밭 창고에 숨겨놓고 낙양으로 수레를 달려 등공을 만나 고조에게 계포를 용서하도록 설득하여 혐의를 풀어주었다.

 

113 난포는 팽월과 친구 사이다. 고조는 여후가 팽월을 참소하자 그를 죽여 낙양의 성문 아래에 목을 내걸고는 그를 보러 오는 자기 있으면 즉시 체포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난포는 서슬 퍼런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서 살펴보았으니 친구에 대한 그의 깊은 우정을 엿볼 수 있다. 고조는 그 의리를 장하게 여겨 사면하였다.

 

113 이 편은 [오자서 열전] [염파, 인상여 열전]을 참조하며 읽어야 한다. 

 

천하를 가진 자는 사사로운 원한을 앞세우면 안된다.

 

115 “한나라에서 현상금을 걸고 장군을 급히 찾고 있으니 자취를 더듬어 곧 저희 집까지 들이닥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제 말을 들어주신다면 제가 감히 계책을 올리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붙잡히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십시오.”

계포는 주씨의 계책을 듣기로 하였다. 그래서 주씨는 노예처럼 계포의 머리를 깎고 칼을 채우고 까칠까칠한 베옷을 입힌 뒤 광류거(물건을 운반하는 수레) 속에 넣어 자기 집 하인 수십 명과 함께 노나라의 주가에게 팔았다. 주가는 마음 속으로 그가 계포인 줄 알면서도 사들여 밭에 두고 자기 아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밭일은 이 종의 말을 듣고 하고, 반드시 그와 같이 식사를 해라.”

 

116 신하는 저마다 자기 군주를 위해 일합니다. 계포가 항우를 위해 일한 것은 그 자신이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항우의 신하라면 다 죽어야 합니까? 지금 황상께서는 이제 막 천하를 얻으셨는데 자신의 사사로운 원한으로 한 사람을 찾고 있으니, 어찌 천하 사람들에게 황상의 도량이 좁다는 것을 보이신단 말입니까? 더구나 계포 같은 어진 사람을 한나라가 현상금까지 걸고 이렇게 급히 찾는다면 계포는 북족 흉노로 달아나든가 남쪽 월나라로 달아날 것입니다. 이는 장사를 꺼려서 적국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오자서가 초나라 평왕의 묘를 파헤쳐 그 시신을 매질한 것과 같은 원인을 만드는 일입니다. 당신은 어째서 이 일을 조용히 황상께 말씀드리지 않으십니까?  

 

아부가 천하를 뒤엎을 수 있다.

소신 껏 행동하라

황금 백 근보다 계포의 말 한마디가 더 낫다.

의협심 있는 계심

충성을 다하지 않은 신하의 종말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

 

123 난포는 제나라에서 돌아오자 팽월의 머리 앞에서 사신으로 갔던 일을 아뢰고 제사를 지내며 통곡하였다. 관리가 난포를 체포하고 그 사실을 고조에게 아룄다.

네 놈도 팽월과 같이 모반하였느냐? 내가 그놈의 머리를 거두지 못하도록 했거늘 네 놈만이 제사 지내주고 통곡하니 팽월과 함께 모반한 것이 분명하다. 저 놈을 빨리 삶아 죽여라.”

관리가 그를 잡아 끓는 물로 데려가려는데 난포가 돌아보며 말했다.

한 마디만 하고 죽게 해 주십시오.”

 

123 “폐하께서 팽성에서 곤경에 처하고 형양현과 성고읍 사이에서 패하셨을 때 항왕이 서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은 팽왕이 양나라 땅을 지키면서 한나라와 힘을 합쳐 초나라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때 팽왕이 한쪽으로 치우쳐 초나라 편을 들었다면 한나라가 깨졌을 것이고, 한나라 편을 들었다면 초나라가 깨졌을 것입니다. 또 해하 싸움에서도 팽왕이 참가하지 않았다면 항우를 멸망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천하가 평정된 뒤 팽왕은 부절을 나누어 받고 봉토를 받았으며 또한 이것을 자손 대대로 전하려고 하였스비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는 양나라에서 한 차례 군대를 모을 때 팽왕이 병들어 나가지 못하자 모반했다고 의심하였습니다. 그 증거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아주 작은 안건을 가지고 가혹하게 그를 죽이고 가족까지 멸하셨습니다. 신은 공신들 스스로 위험을 느껴 떨까 염려스럽습니다. 이제 팽왕이 이미 죽었으니 신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삶아 죽이십시오.”

결국 고조는 즉시 난포의 죄를 용서하고 도위로 삼았다. 

 

치욕을 참아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125 태사공이 말했다.

“…그가 형벌을 받아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으니 얼마나 그 자신을 낮춘 것인가! 그는 분명 자기 재능에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치욕을 받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 재능을 펼칠 곳이 있기를 바랐으며, 결국 한나라의 명장이 되었던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진실로 자기 죽음을 귀중히 여긴다. 저 비첩이나 천한 사람이 분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없고, 그들이 바라는 것을 실현할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

자기 얘기를 하고 있구나. 그도 견디기 힘들었을 때는 역사 속 인물의 경우를 보면서 견디었구나. 나는 사마천을 생각하면

 

 

41 원앙, 조조열전

 

해제

128 원앙은 강직한 성품으로 간언을 일삼은 인물이다. 그의 간언은 황제의 귀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강후, 조동, 조조, 양왕 등 정적이 적지 않았다. 그는 결국 양왕이 보낸 자객의 손에 죽었으니 너무 강하면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인가 보다. 그러나 간언하는 신하가 없으면 왕은 바른 길로 가지 못하게 된다. 강후가 승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도 그의 간언에 기인했다. 환관 조동 역시 마찬가지다.

 

128 조조는 지혜주머니로 불리며 경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경제는 조조를 무척 아꼈으나 일곱 나라가 모반했을 때 조조의 처신과 계책을 문제 삼아 저잣거리에서 그를 죽였다.

 

128 이 편은 [상군열전]과 관련이 있으므로 함께 읽어 볼 만하다.

 

130 원앙이 말했다.

강후는 공신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사직의 신하는 아닙니다. 사직의 신하란 그 군주가 살아있을 때는 같이 살고 죽을 때는 같이 죽어야합니다….승상은 교만한 기색이고 폐하께선 겸양하고 계시니 이는 신하와 군주가 예를 잃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폐하게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그 뒤로 황상은 조회 때마다 더욱 정중하면서도 위엄 있는 태도를 취하였고, 승상은 그럴수록 두려워하게 되었다. 얼마 뒤에 강후가 원앙을 원망하며 말하였다.

나는 네 형과 친한 사이인데 네가 조정에서 감히 나를 헐뜯다니…”

그러나 원앙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131 폐하께서는 평소에 교만한 회남왕을 조금도 제지하지 않았는데 이 지경이 이른 지그 갑자기 그를 꺾으려 하고 있습니다. 회남왕은 사람됨이 강직하여 가는 도중에 안개와 이슬을 만나 죽기라도 한다면 폐하께서는 결국 천하를 가졌으면서도 아우를 포용하지 못하여 죽였다는 오명을 쓰게 될텐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31 폐하께서는 스스로 마음을 너그럽게 하십시오. 이는 지난 날이니 후회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세상에서 뛰어난 행적이 세 가지가 있으니 이런 일로 명예에 손상을 입지는 않을 것입니다.

 

132 “폐하께서 대나라에 계실 때 태후께서는 병석에 계신지 삼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때 폐하게서는 잠도 주무시지 않고 옷고름도 풀지 않으시고 탕약도 친히 맛보신 뒤에 태후께 올리셨습니다. 증삼 같은 서민 신분으로도 이런 일을 하기 어려웠는데 폐하께서는 황제신분으로 실천하셨으니 증삼보다 훨씬 뛰어난 효자십니다. 또한 여씨 일족들이 정권을 잡고 대신들이 정치를 휘두르고 있을 대 폐하께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나라에서 엿서 대의 수레를 타고 수도로 달려오셨으니 비록 용맹한 맹분과 하육이라고 해도 폐하께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대나라 왕의 저택에서 서쪽으로 천자 자리를 두 번 사양하셨고, 남쪽으로 천자 자리를 세 번이나 양보하셨습니다. 허유도 단 한 번 양보하였는데 다섯번이나 사양하셨으니 허유보다 네 번이나 더 하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희남왕을 귀양 보낸 것도 그가 허물을 스스로 반성하여 고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담당 관리들이 그를 잘못 보살폈기 때문에 병들어 죽은 것입니다.”

황상은 이 말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회남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으니 폐하께서 하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재앙의 싹은 미리 자른다.

부잣집 아들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다.

높고 낮음에 질서가 있어야 화목하다.

 

135 황제가 상림원으로 나들이 하러 갔을 때 두 황후와 신부인도 따라갔다. 궁궐에서 이 두 사람은 항상 같은 자리를 하고 앉았다. 낭서장이 자리를 같이 마련하자 원앙은 신 부인의 자리를 당겨 아래로 내렸다. 신부인은 기분이 상하여 앉으려 하지 않았고, 황제도 화가 나서 일어나 궁궐로 돌아가려 하였다. 원앙이 곧바로 황제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신이 듣건대 높고 낮음에 질서가 정해지면 위아래가 모두 화목하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황후를 세우셨으니 신부인은 겨우 첩에 지나지 않습니다. 첩과 처가 어찌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것이 높고 낮음이 질서를 잃는 근본이 됩니다. 만일 폐하께서 신부인을 총애하신다면 많은 상을 내리십시오. 지금 폐하께서 신부인을 위해 하는 행동은 도리어 화를 부르는 원인이 됩니다. 폐하께서는 인체의 일을 보지 못하셨는지요?”

황제가 기뻐하며 신부인을 불러 이 말을 들려주자, 신부인은 원앙에게 황금 쉰 근을 내렸다.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 재앙이 닥친다.

 

은정을 베풀면 반드시 보답받는다.

140 전에 원앙이 오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언제나 따라다니던 종사 한 명이 원앙의 시녀와 몰래 사랑을 나누었지만 원앙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대했다. 어떤 사람이 종사에게 말했다.

재상께서는 당신이 시녀와 정을 나눈 일을 알고 있소.”

그는 즉시 달아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직접 원앙이 말을 달려 뒤쫒아가서 데리고 돌아와 그 시녀를 주고 다시 종사로 삼았다. 그런데 원앙이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사방으로 에워싸여 감시를 받게 되었을 때, 마침 그 종사가 원앙을 감시하는 교위사마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옷가지와 물건을 죄다 팔아서 독한 술 두 섬을 샀다. 때마침 그날은 날씨가 추운 데다가 병사들은 굶주리고 목말랐으므로 취하도록 술을 마셨고, 서남쪽 구석을 지키던 병사들은 모두 술에 취해 쓰러져 잠이 들었다…..원앙은 놀라며 거절하며 말했다.

당신은 다행히 부모님께서 살아계시니, 내 일로 인하여 당신에게 누를 끼칠 수 없소.”

사마가 말했다. “공께서는 어서 달아나십시오. 저도 달아나 부모님을 피신시키면 될텐데 공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노름꾼도 사귈 만한 가치가 있다.

142 극맹은 노름꾼이기는 하나 그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장례에 참석한 손님의 수레가 천 대도 넘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위급한 경우가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급한 처지에 놓여 찾아가서 문을 두드릴 때 부모님이 계시다는 핑계로 도와줄 수 없다고 하거나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따돌리지 않고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계심과 극맹뿐입니다. 지금 당신은 언제나 말탄 시종 몇 명을 데리고 다니지만 일단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찌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자객도 원앙의 덕에 감화된다. 종묘 사직을 위하다 죽은 조조

제후들의 세력이 강해지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린다.   

 

 

42 장석지, 풍당 열전

 

해제

151 이 편은 한나라 문제 때의 강직한 신하 장석지와 풍당의 전기이다. 장석지는 정위라는 관직에 올라 법을 공정하게 적용하고 직간하였으며, 풍당은 문제에게 장수기용에 대해 간언하였다. 예로부터 아첨하는 신하는 많아도 직간하는 신하는 적으므로 군주는 날로 오만해지고 자기 허물을 알지 못하니 그 피해가 컸다.

 

151 문제는 이들의 직간을 받아들여 말년에는 과실이 줄고 결국에는 현군으로 평가받았다.

 

말재주만으로 사람을 임명해서는 안된다.

탐나는 물건이 있으면 무덤 속까지 도둑이 든다.

공정한 법만이 신뢰를 얻는다.

내 버선을 매어 주시오

전쟁은 왕이 아니라 장수가 하는 것이다.

 

공정한 법만이 신뢰를 얻는다.

158 “저는 장안현 사람인데 청도계엄이 들리기에 다리 밑에 숨어 있었습니다. 한참이 지나 폐하께서 이미 지나가신 줄 알고 나왔다가 수레와 기병을 보고 달아났을 뿐입니다.”

정위는 심문을 끝내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을 범하였으므로 그 죄는 벌금형에 해당된다고 판결하였다. 문제는 화를 내며 말하였다.

이 놈이 직접 내 말을 놀라게 했소. 내 말이 온순하기 망정이지 다른 말 같았으며 나를 떨어뜨려 다치게 하였을 것이오. 그런데 정위는 그놈의 죄가 벌금형에 해당된다고 말하시오?”

장석지가 말했다.

법이란 황제와 천하 사람들이 다 같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법에 의하면 이와 같이 하면 되는데 고쳐서 더 무거운 벌로 다스린다면 백성이 법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황상께서 그 자리에서 그를 베러 버리라고 하셨으면 그만입니다. 지금 그를 이미 정위에게 넘기셨습니다. 정위는 천하의 법을 공정하게 다스리는 자인대 한쪽으로 기울면 천하의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다 제각기 법을 무겁게도  하고 가볍게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은 그들의 손과 발을 어디에 두겠습니까? 폐하게서는 이점을 분명하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내 버선을 매어 주시오

160 “내 버선이 풀어졌군.”

장석지는 꿇어앉아 버선을 매어주었다.

그 뒤 어떤 사람이 양생에게 물었다.

어째서 조정에서 장정위에게 끓어앉아 당신 버선을 매도록 모욕을 주셨습니까?”

왕생이 말했다.

나는 늙고 비천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장정위에게 보탬이 될 길이 없었소. 장정위는 지금 천하의 명신이므로 나는 잠시 꿇어앉아 내 버선을 매도록 욕을 보임으로써 그의 명성을 높여 주려고 한 것이오.”

공경들은 이 말을 듣고 왕생을 현명하다고 하고 장 정위를 존경했다.  

 

전쟁은 왕이 아니라 장수가 하는 것이다.

162 풍당이 말했다.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염파나 이목을 얻더라도 쓰실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폐하의 법이 지나치게 엄격해서 상이 몹시 인색하고 벌은 너무 무겁습니다. 운중 태수 위상이 위에 전공을 보고할 때 적군의 목을 벤 숫자가 여섯이 차이 난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그를 형리에게 넘겨 작위를 박탈하고 징역에 처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폐하께서는 염파나 이목을 얻더라도 쓰실 수 없습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어 거슬리는 말씀을 올렸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문제는 기뻐하였다. 그날로 풍당을 시켜 부절을 가지고 가서 위상을 다시 풀어주고 다시 운중 태수로 임명하고, 아울러 풍당을 거기도위로 삼아 중위와 각 군과 국의 전차 부대를 맡도록 하였다.

 

 

43 만석, 장숙 열전

 

해제

167 이 편은 만석군과 장숙을 합쳐 열전을 만들고, 여기에 위관, 직불의, 주인 등 세 사람의 사적을 덧붙여 실은 것이다.

 

 

167 만석꾼과 그의 네 아들 모두 2000석의 관리로서 충성심과 근면함으로 구경이 되어 한 가문이 만석을 받아 만석꾼이라는 호를 얻었다. 이들은 당시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군주에게 올바르게 처신하여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예의바르고 삼가는 태도가 부귀를 따르게 한다.

획수 하나가 모자라도 안된다

어려운 때 지나치게 신중하면 해가 된다.

아랫사람이 잘못하면 윗사람이 책임지라

구태여 결백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

직접 보고 사람을 평가하라

죄를 다스림에 마음 속 정이 우러나와야 한다.

 

어려운 때 지나치게 신중하면 해가 된다.

175 원봉 4년 중에 관종에 200만 명의 유민이 발생했는데, 그중 호적 없는 사람이 40만 명이나 되었으므로 공경 대신들은 상의 끝에 유민들을 변경 부근으로 옮겨 귀양보내기로 뜻을 모아 주청하였다. 황상은 승상이 늙은 데다가 지나치게 신중하므로 이 일을 함께 논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승상에게 휴가를 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어사대부 이하의 관리를 의론에 참여시켜 주청한 내용을 조사하였다. 승상은 자기가 맡은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신은 총애를 받아 승상 직책을 맡았으나 어리석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성곽과 창고는 텅 비었고, 백성 가운데 떠도는 자가 많아졌으므로 그 죄는 마땅히 엄벌에 처해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는 차마 법에 따라 신을 처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승상과 후의 인을 돌려드리고 물러남으로써 현명한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그러자 황상은 이렇게 말했다.

창고는 텅 비고 백성은 먹을 것이 없어 떠돌고 있는데 그대가 그들을 변경으로 옮길 것을 주청한 일로 해서 민심을 더 동요되고 불안해졌소. 이처럼 위태로운 사태를 만들어놓고 벼슬을 그만둔다니 그대는 이 어려움을 누구에게 떠넘기려는 것이오?”

황상이 조서를 내려 석경을 꾸짖자 석경은 매우 부끄러워하고 다시 조정으로 나가 일을 보았다

이 황제는 누구일까? 황제가 무척 지혜롭고 돈후하다. P175에서는 원봉 4이런 말이 나온다. 누구일까?  

 

직접 보고 사람을 평가하라

180 낭중령 주문은 이름이 인이며 그 조상은 원래 임성 사람이었다. 그는 의술로 황상을 만나게 되었다….주인은 사람됨이 신중하고 입이 무거워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는 일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낡을 대로 낡은 기운 옷과 때에 찌든 속옷을 입으며 빨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제의 총애를 받아 경제의 침실 안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며 후궁에서 저속한 연극이 공연될 때도 그 곁에 있었다. 주인은 경제가 죽을 때까지 낭중령으로 있었으나 끝내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말한 적이 없었다. 황상이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쁨을 물으면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그 사람을 살피십시오.”

그는 이처럼 다른 사람을 헐뜯으려고 하지 않았다.

 

 

44 전숙 열전

 

해제

185 ‘저 선생이 말한다부분 앞까지는 사마천이 썼고, 그 뒷부분은 저선생이 가필한 것으로 양자의 서술 방향이 서로 다르다. 사마천은 전숙의 의리와 현명함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 저소손은 전숙의 아들 전인과 임안에 중점을 두어 저술하고 있다. 

 

끝까지 윗사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어진 사람은 지친 병사를 전쟁터로 내몰지 않는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으면 차라리 덮어 버려라

변상은 잘못한 사람이 직접 해야 효과가 있다.

왕과 신하는 위험도 함께 해야 한다.

달은 차면 기운다.

 

187 전숙은 사람됨이 엄격하고 청렴하여 스스로를 아끼면서 사람들과 왕래하고 사귀기를 좋아했다.

 

어진 사람은 지친 병사를 전쟁터로 내몰지 않는다.

189 효문제는 즉위하자 전숙을 불러 물어보았다.

공은 세상의 덕망있는 사람을 아시오?”

전숙이 대답했다.

신이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

황상이 말했다.

그대가 장자이니 당연히 알 것이오.”

전숙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옛날에 운중 군수였던 맹서가 장자입니다.”

당시 맹서는 흉노가 변경으로 크게 쳐들어와 약탈하였을 때 운중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 죄를 물어 파면된 상태였다. 그래서 황상이 말했다.

선제께서 맹서를 운중 군수로 두신 지가 십년이 넘었는데 맹서는 흉노의 침입을 단 한 차례로 지켜내지 못했고 이유도 없이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오. 장자가 어찌 본래 사람이나 죽이는 자이겠소? 그대는 무슨 근거로 맹서를 장자라 하시오?”

전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맹서를 장자라고 하는 까닭입니다. 관고 등이 모반을 꾀하였을 때 황상께서는 조서를 내려 조나라에서 감히 조나라 왕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삼족을 멸하겠다라고 했습니다. 맹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목에 칼을 쓰고 노예 차림으로 조나라 왕 장오를 수행하여 장오가 가는 곳이면 어디라도 가서 그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섬기려고 하였는데 어찌 자신이 장차 운중군수가 될 줄 알았겠습니까? 당시 한나라와 초나라가 대치하고 있어 병사들은 지쳐 있었습니다. 흉노의 묵돌은 북이를 정복하자 마자 중국의 변병으로 쳐들어와 해를 끼쳤습니다. 맹서는 병사들이 지치고 고달파하는 것을 알고 차마 나가서 싸우라고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앞을 다투어 성벽을 지키며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그 모습은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는 것 같고 동생이 형을 위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맹서거 어찌 일부러 그들을 내몰아 싸우도록 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맹서를 장자라고 하는 까닭입니다.”

이 말을 듣고 황상이 말했다.

“”어질구나 맹서여

그러고는 다시 맹서를 불러 운중군수로 삼았다. 

 

변상은 잘못한 사람이 직접 해야 효과가 있다.

192 “왕은 그대들의 군주가 아니더냐? 어찌 감히 너희 군주를 직접 제소할 수 있느냐?”

노나라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하면 중부의 돈을 내어 재상에게 변제해주도록 하였다. 그러자 재상이 말했다.

왕께서 직접 빼앗은 것을 저더러 돌려주라고 하시니, 그러면 왕은 나쁜 일을 하시고 저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저는 변상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이리하여 노나라 왕은 즉시 모두 되돌려 주었다.

 

201 (1) 한나라 원제와 성제 연간의 박사 저소손이다. 사마천이 죽은 뒤 <사기>의 몇 부분이 그에 의해 보충되었는데 그의 보충은 <사기>의 가치를 크게 훼손시킬 정도로 타당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45 편작, 창공 열전

 

해제

203 이 편은 명의 편작과 창공 두 사람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의 편작은 전설적인 의사로 일컬어졌다. 편작은 침구와 탕약 두 가지 모두에 뛰어났으며, 창공은 편작에 비견되는 명의였다. 편작은 진나라의 태의령 이혜가 시기하여 보낸 사람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창공은 편작의 불행한 최후를 보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문제 때 하옥되어 죄를 받았으나 사람이 처신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수 있다. 이 편은 창공의 처방을 위주로 서술하고 있는데 위로는 편작으로부터 한의학의 원류를 기술하여 의학 변천의 흐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203 [일자열전] [귀책열전]과 서로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함께 읽으면 좋다.

 

명의 편작의 탄생

혈맥이 막혀 있으나 근심할 것은 없다.

살 수 있는 사람을 살려낼 뿐이다.

질병은 징후가 나타날 때 고쳐야 한다.

고칠 수 없는 병 여섯가지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의사가 돼라

잘 키운 딸이 여러 사내아이보다 더 낫다.

얼굴색만으로 병을 진단한다.

서툰 의사는 음양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환자에 따라 치료법이 다르다

순우의와 스승 양경의 관계

순우의의 의술 전수자들

경맥과 난맥 / 중양 / 산증 / 열병 / 풍단 / 소단 / 유적하 / 동풍 / 풍궐흉만 / 산기 / 열궐 / 충치 / 해산 / 비장의 기가 상한다. / / 신비 / 신맥 / 요하 / 동풍 / 번음맥 / / 답풍 / 모산/

 

명의 편작의 탄생

205 장상군은 객사를 드나든 지 열흘 남짓 되었을 때 가만히 편작을 불러 마주 앉아 조용히 말했다.

나는 비밀스럽게 전해 오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늙어 그대에게 전해 주고 싶으니 그대는 누설하지 마시오.”

편작이 말했다.

삼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상군은 품속에서 약을 꺼내 편작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약을 땅에 떨어지지 않은 물에 타서 마신 뒤 삼십 일이 지나면 반드시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오.”

그러고는 비밀스럽게 전해 오는 의서를 꺼내 모두 편작에게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으니 보통 사람은 아닌듯 하다. 편작이 장상군의 말대로 약을 먹은 지 삽십 일이 지나자 담장 너머 저편에 숨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러한 능력으로 환자를 보니 오장 속 질병의 뿌리가 훤히 보이므로 겉으로는 맥을 짚어 진찰하는 척만 할 뿐이었다.

편작은 아마 직관적인 의사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신기에 가까운 그의 능력에 대한 찬탄이 들어있다. 

 

질병은 징후가 나타날 때 고쳐야 한다.

213 닷새 뒤에 편작은 또 환후를 만났는데 멀리서 쳐다보기만 하고 그냥 물러나왔다. 환후가 사람을 보내서 그 까닭을 묻자 편작은 이렇게 대답했다.

명이 피부에 있을 대는 탕약과 고약으로 고칠수 있고, 혈맥에 있을 ㄸ내느 쇠침과 돌침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장과 위에 있을 때는 약술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골수에 들어가면 사명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병이 골수까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닷새 후에 환후는 몸에 병이 들었으므로 사람을 보내 편작을 불렀지만 편작은 이미 자리를 피해 떠난 뒤였다. 

 

고칠 수 없는 병 여섯 가지

214 고칠 수 없는 여섯 가지 병이 있다. 교만하고 방자하여 병의 원리를 논하지 않는 것이 첫번째 불치병이고, 몸을 가벼이 여기고 재물이 아까워 병을 치료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불치병이며, 입고 먹는 것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세 번째 불치병이고, 음과 양이 함께 있어 오장의 기가 불안정한 것이 네번째 불치병이다. 몸이 극도로 허약하여 약을 먹을 수 없는 것이 다섯 번째 불치병이고,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이 여섯번째 불치병이다. 이러한 것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치료하기 매우 어렵다. 

 

238 환자가 곡기를 잘 먹으면 죽을 날짜를 연장시킬 수 있고, 곡기를 잘 먹지 않으면 죽을 날짜를 앞당긴다.

 

238 병을 요양하는 데 고요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자들은 아래로 피를 쏟고 죽고, 번잡하고 밝은 곳을 좋아하는 자는 피를 토하고 죽는다

 

245 맥법에도 나이 스물에는 혈맥이 왕성하므로 달리는 것이 좋고, 서른에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이 좋고, 마흔에는 편안히 앉아 쉬는 것이 좋고 쉰 살에는 편안히 누워있는 것이 좋고, 예순 살이 넘으면 원기를 깊이 감추어 두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46 오왕 비 열전

 

해제

253 나라를 빼앗으면 군주가 되고 물건을 빼앗으면 도둑이 된다는 말이 있다. 혁명이란 쉽게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신하가 군주를 죽이면 대부분 민심은 등을 돌리게 마련이다. 물론 탕왕과 무왕은 걸왕과 주왕의 폭정에 반기를 들었지만 이윤과 여상이라는 명재상의 보필이 있었기에 혁명이 가능했다. 세상 사람들은 한나라 초기 제후였던 오왕 비를 평하여 반란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들이 경제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에게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경제는 제후의 봉토를 줄이는 데만 열을 올렸으니 오왕 비의 원망은 더욱 심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오왕의 혁명은 성고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악평이 더해졌으니 세속에서는 시비에 대한 논란만이 있을 뿐이다. 

 

이 편은 [회남, 형산 열전]과 자매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원앙, 조조 열전]과도 연관된다.

 

모반의 상이 있는 유비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한다

이익을 같이 하는 자는 서로를 위하여 죽는다

제후국에 보내는 편지

천하를 위해서는 한 사람을 버리라

적군을 지치게 만들라

혼자 군사를 통솔하는 오왕

정말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가

권모에 앞장서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

 

256 오나라는 예장군에서 구리가 생산되므로 유비는 천하의 망명자들을 불러 모아 몰래 돈을 만들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래서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아도 나라 사람이 넉넉했다.

 

263 한편 제나라 왕은 동맹에 가입한 것을 후회하여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약속을 어겼다.

 

266 초나라 원왕의 아들과 회남의 세 왕께서는 십여 년 동안이나 머리 감고 발 씻는 것조차 하지 않을 만큼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하루아침에 조정을 등지려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미움과 원한을 마음에 품으면 산이 금속 병을 부식시키듯 먼저 나를 상하게 하는 것 같다. 내 마음과 오장육부를 상하게 하여 병을 키운다. 이 사람은 십년 동안 씻었으니 무좀에 충치에 청결하지 못해서 오는 각종 면역력 약화의 질병을 가졌겠구나.  

 

273 오나라에는 보병이 많은데 보병에게는 험난한 지형이 유리합니다. 한나라 군대에는 전차와 기병이 많은데 기병에게는 평탄한 땅이 유리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지나가는 성읍 중에서 손에 넣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재빨리 서쪽으로 가서 낙양의 무기고를 점령하고 오창의 양곡을 먹으면서 산하의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47 위기, 무안후 열전

 

해제

285 이 편은 위기후 두영, 무안후 전분, 관부 세 사람의 전기를 합쳐 놓은 것이다.

 

285 사마천은 이 편을 통해 봉건 통치 계층의 내부 모순을 생동감 있게 표현함으로써 봉건귀족들의 교만과 잔인함과 알력을 드러냈다. 또한 그는 이 편에 등장하는 세 주요 인물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선명하게 대비시켜 서술했다.

 

긴급한 때에는 겸양만이 능사가 아니다

악을 포용해야 자리를 보존한다

동병상련

원망하는 마음은 작은 일에서 싹튼다

대장부는 귓속말을 삼가야 한다

가지가 기둥보다 크면 부러진다

 

 

289 적복은 위기후를 축하한 뒤 이어서 조의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군후께서는 천성이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십니다. 지금 착한 사람들이 군후를 칭송하였기 때문에 승상에 오르신 것입니다. 군후께서는 악한 것을 미워하지만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이 많으며, 이들은 또 장차 군후를 헐뜯을 것입니다. 군후께서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다 같이 끌어안는다면 다행히 지위를 오래 보전하실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곧 비방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293 당시 군법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종군한 경우 한 사람이라도 전사하면 남은 한 사람은 유해와 함께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관부는 아버지의 유해를 따라 똘아가려고 하지 않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의 왕이든 장군이든 목을 베어 아버지 원수를 갚게 해 주십시오.”

집에 남아서 기다리는 가족들도 이 분기를 기뻐했을까? 군법은 이유가 있다.   

 

원망하는 마음은 작은 일에서 싹튼다

295 한번은 관부가 상중에 있으면서 승상을 찾은 적이 있는데 승상은 별 생각없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중유와 함께 위기후를 만나려고 하는데 마침 중유는 상중이군요.”

관부가 말했다. “…장군게서는 내일 아침 일찍 오십시오.”

무안후가 허락하자 관부는 무안후에게 말한 대로 위기후에게 자세히 말했다. 위기후는 아내와 함께 술과 고기를 많이 사고 밤새도록 집안 청소를 하며 새벽 무렵에야 접대 준비를 마쳤다. 날이 밝자 사람을 시켜 나가 승상을 맞이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낮이 되도록 승상은 오지 않았다. 위기후가 관부에게 말했다.

승상이 잊은 거 아니오?”

관부는 언짢아하며 말했다.

나는 상중인데도 그이 요청에 응했소. 그는 마땅히 와야 했소.”

관부는 수레를 타고 몸소 승상을 맞이하러 나갔다. 승상은 전날 농담으로 관부에게 승낙하였을 뿐 사실 갈 생각이 없었다…..그리고 수레를 타고 가기는 했으나 또 너무 유유자적하여 가므로 관부는 더욱 화가 났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관부는 일어나 춤을 춘 뒤 승상에게 춤을 추도록 권하였다. 승상이 일어나지 않자 관부는 앉은자리에서 승상을 능멸하는 말을 하였다.

 

일찍이 위기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을 때 내가 살려주었다. 나는 위기를 섬길 때 안된다고 한 일없이 다 잘해 주었다. 그런데 어찌 몇 고랑의 밭을 아낀단 말인가? 또 관부는 무엇 때문에 참견하는가? 내 다시는 밭을 요구하지 않겠다.” 무안후는 이 일로 관기와 위기후를 몹시 원망하였다.

내 이야기로구나. 이 어그러진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305 원광 5 10월에 관부와 그 일족은 모두 처형되었다. 위기후는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소식을 듣고 분에 못 이겨 중풍에 걸렸으며 굶어 죽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위기후를 죽일 뜻은 없다는 말을 듣고 위기후는 다시 음식을 먹고 병을 치료하였다.

금산사에 갖혀 아들을 욕하며 등창이 난 견훤이랑 분에 못이겨 중풍에 걸린 위기후나 모두 자신의 대단한 분노와 화의 피해를 입고 있다. 이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 두번째 화살, 세번째 화살, 네 번째, 다섯번째분노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채널링해서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을건가? 아아아 괴롭다.

 

 

48 한장유 열전

 

해제

309 한장유는 성격이 복잡하고 독특한 사람이다. 그는 재물 욕심이 많고 일찍이 전분에게 뇌물을 주어 관직을 옮긴 흠이 있으나 자기보다 현명하고 청렴한 인사들을 추천하여 극심한 권력 투쟁 속에서 살아남았다. 어찌 보면 봉건주의 사회에서 범려나 장량처럼 청빈하고 고결한 선비만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한나라 무제는 한장유를 재능과 지략이 출중하여 나라의 큰 그릇으로 쓸 만하다고 보고 승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수레에서 떨어져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 그만 두었다.

 

불꺼진 재라도 다시 타오른다

천하를 사사로이 다스려서는 안된다

흉노와의 화친 문제

사람 하나를 얻는 것도 하늘의 뜻이다

한안국이 추천한 사람들

 

311 양나라 효왕은 한나라 경제와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었는데 두 태후는 그를 사랑하여 몸소 청해서 효왕이 직접 재상과 2000석 녹을 받는 관리를 둘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효왕은 들어가고 나가는 것과 노는 것이 천자를 뛰어넘었다. 천자는 이 소문을 듣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49 이장군 열전

 

해제

325 이광은 한나라 경제, 무제 때의 장수로 사냥하던 중 풀더미 속 바위를 호랑이로 잘못 알고 쏜 화살이 바위를 뚫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는 전한 시대에 흉노와 칠십여 차례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워 흉노로부터 비장군으로까지 불렸다. 그는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하여 행군 도중에 부하들이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으면 그들에게 먼저 물을 먹이고 음식을 주었다. 이 때문에 부하들은 이광을 위해 죽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그의 전공에 비하면 벼슬벼 보잘 것 없이 구경에 불과했다. 특히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일부러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게 하여 결국 궁지에 몰아놓는 데서 봉건 사회의 폐단이 여실히 드러난다.

 

사마천은 한편으로는 이 장군의 재능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의 불행에 깊은 동정심을 보여 행간마다 비분강개 마음을 나타내었다. 이 편은 서사적 표현과 비유로 이광을 품평하고 있으나 문체는 소박하고 꾸민 흔적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독자가 받는 감명의 폭은 깊다.  

 

때를 만나지 못한 이광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오라

돌에 박힌 화살

위기가 닥치면 침착하라

항복한 자를 죽이면 화가 닥친다

이광의 세 아들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

 

333 어느날 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풀숲에 있는 돌을 호랑이로 잘못 보고 활을 쏘았더니 그 화살촉이 돌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세히 보니 돌덩어리였으므로 한 번 더 쏘았으나 화살촉이 박혀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333 이광은 청렴하여 상을 받으면 그것을 번번이 부하들에게 나눠 주고 음식도 군사들과 함께 먹었다. 이광은 죽을 때까지 사십 여년에 걸쳐 봉록 2000석을 받는 관직에 있었으나 집에는 남아있는 재물이 없었으며, 끝까지 집안의 재산에 대해서는 말하는 일이 없었다.

 

334 군사를 인솔할 때 식량과 물이 부족한 곳에서 물을 보아도 병졸들이 물을 다 마시기 전에는 물에 가까이 가지 않았으며, 병졸들이 음식을 다 먹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음식을 먹었다. 이렇듯 사람들에게 관대하면서 까다롭지는 않아 병졸들은 그에게 지휘 받기를 좋아했다.

 

337 이광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농서군 태수로 있을 때 강족이 모반한 일이 있소. 나는 그들을 달래 항복을 권했소. 항복한 자가 800여 명이었는데 그들을 속여 같은 날에 다 죽였소. 지금까지 그 일을 매우 후회하고 있소. 지금까지 크게 후회되는 일은 이것 하나뿐이오.”

왕삭이 말했다.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큰 화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군께서 후가 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339 이광은 자기 막부로 돌아와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흉노와 칠십여 차례 크고 작은 싸움을 했다. 이제 다행히도 대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선우의 군사와 맞서 싸우려고 했는데 대장군이 내 부서를 옮겨 길을 멀리 돌아가게 하였고, 더욱이 길을 잃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천명이 아니겠는가? 내 나이 예순이 넘었으니 지금에 와서 도필리의 심문에 대답할 수는 없다.”

그리고 칼을 빼어서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50 흉노 열전

 

해제

345 본래 흉노는 하후의 후예로서 한나라와 동족인데, 한나라에 따르지 않고 북방 초원으로 쫒겨나 사냥과 목축을 하면서 점차 한나라와 멀어졌다. 이들은 식량이 부족해서 자주 남침하므로 한나라의 골칫거리였다. 한나라 무제의 흉노 정벌 정책은 중국의 정치와 역사 면에서 보면 강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그의 지나친 강경책에 대해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대원과 두 월나라를 정벌하고 서남쪽의 이족을 친 것도 따지고 보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함이다.

 

무제가 측은지심을 가지고 흉노를 남쪽으로 불러 편안한 삶을 보장해 주었다면 감화될 수 있었을 거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중국은 남장 지역 인구가 상당히 적어 수천 리나 되는 옥토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무제는 언제나 지존의 위치에 있으면서 항복한 적들도 그 씨족을 면할 정도로 가혹한 인물이었다.

 

양계초가 [흉노열전] <사기>의 십대 명편 중 하나라고 한 것은 흉노라는 이족에 대한 사마천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편은 [대원 열전], [조선 열전], [남월 열전], [서남이 열전], [동월 열전]과 비교해 가면 읽어야 한다. 또한 한나라와 흉노의 전반적인 상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위장군, 표기 열전], [한장유 열전], [이장군 열전], [평준서] 등도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된다.  

 

흉노의 풍습

훙노의 계보

묵돌 선우의 지략

흉노와의 화친 정책

증항열의 배반과 한나라의 근심거리

하늘과 땅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마읍 사건

흉노와 한나라의 지리한 싸움

어린애가 어찌 천자를 상대하겠는가

 

347 그들은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녀서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농사를 짓지도 않았다. ..어린아이도 양을 타고 활시위를 당겨 새나 쥐를 쏠 줄 알고, 좀 더 자라면 여우나 토끼를 잡아 먹을 것으로 썼다. 남자는 활을 당길 만한 힘이 있으면 모두 무장 기병이 되었다.

 

348 모든 사람이 가축의 살코기는 먹고 그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거나 침구로 썼다. 장정들이 살지고 맛있는 고기를 먹고 노인은 그 나머지를 먹었다. 건장한 자를 소중하게 여기고 노약자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354 새와 짐승을 사냥하러 나가 자신의 명저긍로 맞힌 곳을 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별안간 목을 베었다. 그 뒤 묵돌은 명적으로 자기 애마를 쏘았다. 좌우에서 감히 쏘지 않는 자가 있자 묵돌은 자기 애마를 쏘지 않는 자를 그 자리에서 베어 죽였다. 조금 뒤 다시 자기 애첩을 향해 명적을 날렸는데 좌우 군사들 중에서 겁이 나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그들도 목을 베어 죽였다. 얼마 뒤 사냥하러 나가 명적으로 선우의 명마를 쏘았는데 곁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그 말을 쏘았다. 묵돌은 그의 좌우에 있는 자들이 모두 쓸만하게 된 것을 알고 그 아버지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하러 나갔을 때 명적으로 두만을 쏘았다. 그러자 그 부하들도 모두 명적이 맞힌 곳을 따라 두만 선우를 쏘아 죽였다. 묵돌은 그의 계모와 아우 및 자기를 따르지 않는 대신을 모조리 죽이고 스스로 서서 선우가 되었다.

 

357 선우는 매일 아침 군영에서 나와 일출을 보고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보고 절하였다.

 

360 한나라 고제는 고민 끝에 유경을 시켜 종실의 공주를 선우의 연지로 삼게 하고 해마다 흉노에게 일정량의 무명, 비단, , 쌀 같은 식품을 보내주어 형제 나라가 되기로 약속했다.

 

365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군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강한 이유는 먹고 입는 것이 한나라와 달라 한나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속을 바꾸어 한나라의 물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흉노가 한나라 물자의 10분의 2를 채 쓰기도 전에 흉노 백성은 한나라에 귀속될 것입니다. 한나라 비단과 무명을 얻어 옷을 지어 입고 말을 타고 풀이나 가시덤불을 달려보십시오. 웃옷과 바지는 모두 찢어져 못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에게 비단옷이나 무명옷이 털옷이나 가죽옷만큼 완벽하지도 튼튼하지도 못함을 보이십시오. 또 한나라의 먹거리를 얻게 되면 모두 버려서 그것들이 젖과 유제품의 편리함과 맛만 못함을 보이십시오.

식량안보에 대해 말하고 있다.

 

366 당신네 한나라 풍습에도 주둔군이 수비를 위해 종군하여 떠나려 할 때 그의 늙은 어버이는 자신의 따뜻하고 두터운 옷을 벗어주고 영양 많고 맛있는 음식을 갈라 주어 보내지 않소?

 

366 흉노는 분명 전투를 일삼는 종족이오. 늙고 약한 사람이 싸울 수는 없소. 그래서 영양 많고 맛있는 음식은 건장한 사람들에게 먹이는 것이오. 이렇게 하여 스스로를 지키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것이오. 이것을 두고 어떻게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고 하겠소?

 

367 아버지, 아들, , 동생이 죽으면 그들의 아내를 맞아들여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대가 끊길까 염려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흉노는 어지러워져도 한 핏줄의 종족을 세울 수 있는 것이오.

 

380 그 뒤로 흉노는멀리 달아나서 사막 남쪽에는 흉노의 왕정이 없었다. 한나라는 황하를 건너 삭방군 서쪽으로부터 영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관개용 물길을 내고 밭 관리관을 두니 그곳에 머무는 관리와 병졸은 5,6만이나 되었으며 점차 흉노 땅을 잠식하여 흉노의 옛 영토 북쪽에 접하게 되었다. 

 

 

51 위장군, 표기 열전

 

해제

400 이 편은 한대의 명장 위청과 과거병 두 사람의 사적 외에도 한나라 무제의 흉노 정벌에 공을 세운 공손하를 비롯하여 열여섯 명을 덧 붙인다. 따라서 이 편은 무제가 흉노를 정벌한 공적의 명부인 셈이다.

 

400 흉노와 한나라의 관계에 대한 대책 중에서 무제는 만리장성에 만족하지 않고 흉노 깊숙이 쳐들어가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을 썼는데, 위청과 곽거병은 무제의 이러한 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충복이었다.

 

사마천은 무제가 젊고 재능이 출중한 위청과 곽거병을 파격적으로 기용하여 나라의 안정을 꾀한 부분을 높이 칭송하면서도 무제 딸의 간통사실을 직접 서술하여 그가 집안 하나도 엄히 다스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것을 질타하였다. 또한 위청과 곽거병이 무제의 외척이었기에 드러나는 귀족적인 모습을 곳곳에서 비판하였ㄷ. 여기서도 사마천은 이들의 공적과 허물을 서술함에 공정한 태도를 견지하여 실록 정신을 보여준다.

 

[평준서], [흉노열전]과 함께 읽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종으로 태어났지만 귀상인 위청

흉노 토벌과 그 성과

신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면 안된다.

권세를 좆아 움직인다.

패기만만한 곽거병과 날개꺽인 위청

장수와 그 비장들

 

393 대장군 위청은 평양현 사람이다. 그 아버지 정계는 관리가 되어 평양후의 집에서 일하다가 평양후의 첩 위온과 남몰래 정을 나눠 청을 낳았다.

 

393 위청은 평양후의 가복으로 있다가 젊을 때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위청의 아버지는 그에게 양 치는 일을 시켰다. 본처 자식은 모두 위청을 종으로 취급하고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

 

396 원삭 원년 봄에 위 부인이 아들을 낳아 황후가 되었다.

 

402 이 무렵 왕부인이 천자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영승이라는 자가 대장군을 설득했다.

장군께서 아직 공이 많지 않은데 만 호의 식읍을 받고 세 아들 모두 후에 봉해진 까닭은 오직 위 황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왕부인이 총애를 받고 있는데 그 일족은 부귀하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장꾼께서 받은 천 금을 바쳐 왕부인의 부모님을 축수해 드리십시오.”

대장군은 그 말을 받아들여 500금으로 축수했다. 천자가 이 소문을 듣고 대장군에게 물으니 대장군이 사실대로 말했다. 천자는 영승을 동해군 도위로 삼았다.

 

411 표기장군은 사람됨이 과묵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고 기백이 있어 과감하게 일을 했다. 천자는 일찍이 그에게 손자, 오자의 병법을 가르치려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옛날 병법을 배울 것까지는 없습니다.”

천자가 그를 위하여 저택을 마련해놓고 가서 보도록 하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흉노가 아직 망하지 않았으니 집은 소용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천자는 그를 더욱 더 소중히 여기고 아꼈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에 천자의 시중이 되고 존귀해져서 사병들을 잘 살필 줄 몰랐다. 그가 전쟁터에 나갔을 때 천자가 그를 위하여 태관을 시켜 수레 수십 대 분의 식품을 보내 주었는데, 돌아온 뒤 물품 수레에는 좋은 쌀과 고기가 남아 버릴 정도였지만 병사들 중에는 굶주린 자가 있었다. 그가 요새 밖에 있을 때 병사들은 식량이 모자라 어떤 병사는 기력이 쇠한 나머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표기장군은 오히려 당에 줄을 그어 구역을 정해두고 공차기를 즐겼다. 그에게는 이와 비슷한 일이 많았다. 대장군은 사람됨이 어질고 선량하며 겸손하고 양보심이 있고 부드러워 천자의 환심을 샀지만 세상에서는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도 이런 면이 있다. 특히 보조선생님과의 관계에서 그러하다.

 

 

52 평진후, 주보 열전

 

해제

421 이편은 공손홍과 주보언 두 사람의 전기를 기록하고, 사상적으로 일관되는 서악과 엄안 두 사람을 덧붙였다.

 

공손홍은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 계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지극한 효자였다. 향리에서 그를 문학으로 천거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여 했고, 항상 베로 만든 옷을 걸치고 채식으로 일관할 정도로 검소했다. 무제는 이러한 공손홍을 뽑아 유학을 장려하여 학관을 힘쓰게 하였고, 주보언을 뽑아 제후들에게 사사로운 원한이 있던 유사를 포용하여 제후들을 다스리는데 썼다.

 

당시 사람들은 공손홍을 곡학아세라는 말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흉노정벌 정책에 대한 지지와 민생에 대한 관심 등으로 인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공손홍이 흉노를 정벌해야 하다는 기본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므로 사마천은 이 열전을 [위장군, 표기열전] [남월 열전] [서남이열전] 사이에 끼워 넣었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열전의 쉰두번 째인 이 편부터 쉰 여덟번째인 [회남, 형산 열전]까지 일곱 편이 한나라 무제 때의 영토 개척과 관련된 신하들의 전기라는 점이다. 공손홍은 통서남이를 주장한 반면, 사마상여는 이를 반대하였으므로 [남월 열전], [동월 열전], [조선 열전], [서남이 열전]을 두 열전 사이에 끼워 넣어 무제 때 흉노정벌 문제를 놓고 벌어진 사상 논쟁을 반영하였다. 

 

면직되었다가 다시 추천받는다

신분 차이를 무너뜨리면 안된다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남을 다스릴 수 있다

싸움을 즐기는 자에게는 멸망만이 찾아온다.

천하의 근심은 토붕에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강약을 조절하라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면 위태로워진다.

선조가 쌓은 음덕을 후손이 받는다

인재를 발굴하는 과정

 

428 , , 용 이 세 가지는 천하에 변하지 않는 덕으로 그것을 실행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르므로 실행에 힘쓰는 것은 인에 가깝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까우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에 가깝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알면 스스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알게 되고, 스스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안 뒤라야 남을 다스릴 줄 알게 됩니다. 천하에는 자기 자신도 다스릴 수 없으면서 남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백대가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는 원리입니다.

 

440 그들은 모두 공작이나 후작의 후손도 아니고 장관의 아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 한자 한 치의 조그마한 세력도 없이 거리에서 일어나 갈래 진 창을 잡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모의하지 않았지만 함께 일어났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함께 모였으며, 점거한 지역이 점점 커지고 넓어져서 패왕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당시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진나라가 천자의 귀한 자리에 있었고, 천하를 소유할 만큼 부유했으면서도 후손이 끊기고 조상의 제사조차 끊어지게 된 것은 전쟁을 지나치게 일삼은 데서 비롯된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주나라는 약해서 천하를 잃었고, 진나라는 강해서 천하를 잃었습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바꾸지 못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이제 남이를 부르고 야랑을 조정으로 즐어와 복속하게 하고 강북을 항복시키고 예주를 공략하고 성읍을 세우며 흉노 땅으로 깊숙이 쳐들어가 농성을 불태우려고 합니다. 논의하는 자들은 이것을 좋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남의 신하된 자의 이익은 될 지언정 천하를 위한 좋은 계책은 아닙니다. 지금 중국은 개짖는 소리에 놀랄 일이 없을 만큼 태평스러운데 나라 밖 먼 곳의 수비에 얽매여 국가를 황폐시키는 것은 백성을 자식처럼 여겨야 하는 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끝없는 육망을 실천하기 위해서 마음껏 행동하여 흉노와 원한을 맺는 것은 변경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화가 맺혀 풀어지지 않고 전쟁이 그쳤는가 하면 다시 일어나, 가까이 있는 자는 걱정하고, 괴로움을 겪을 것이며 멀리 있는 자는 놀랄 테니 이것은 천하를 오래도록 지탱하는 길이 아닙니다.

지금 천하는 갑옷을 단단히 입고 칼을 갈며 화살을 바로잡고 활줄을 매며 군량을 나름에 쉴 새가 없으니, 이것은 천하 사람이 다 우려하는 바입니다. 대체로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변란이 일어나고 일이 복잡해 지면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지금 바깥 군의 땅이 천리쯤 되고 줄지어 있는 성이 수십 개나 되어 형세로 속박하고 토지로 제어하여 제후들을 위협하는데 이것은 공실의 이익이 아닙니다. 옛날 제나라와 진나라가 멸망한 까닭은 공실은 낮아지고 쇠약해진 반면 육경이 매우 성대해졌기 때문입니다. 또 최근에 진나라가 멸망한 까닭을 살펴보면 그 법령이 지나치게 엄하고 욕심이 커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447 성대하게 다스려 진다는 것은 덕망있는 정치를 널리 펼쳤다는 것이다. 덕행에는 검소함보다 높은 것이 없다. 검소함으로 풍속과 백성을 교화시키면 존비의 질서가 서고 골육간의 정이 두터워져 다툼의 근원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집이 넉넉해져 형벌을 필요없게 만드는 근본이다. 그렇게 되도록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53 남월 열전

 

해제

453 남월은 진시황 때 중국에 귀속된 지역이다. 진시황 13년에 조타를 남해 용천의 우두머리로 임명했으나 진나라 말기에 중원이 혼란스러워지자 조타가 스스로 왕이라 부르며 다섯 대에 걸쳐 구십삼 년을 내려오다가 한무제 원정 6 (기원전 222)에 다시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453 이는 한나라가 영토상 단일 중국을 시도한 것이다. 이 편은 조타가 나라를 세우는 과정 및 진나라 말부터 무제에 이르기까지 중원과 남월의 관계를 자세히 서술하여 진귀한 사료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453 중국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로서 중국 민족의 역사는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역사였다. 그러나 유가의 정통 사상은 일관되게 이하지변 夷夏之辨 오랑캐와 중국의 구분정책을 고수하여 사방의 만족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폄하시켰다. 이런 점에서 사마천이 소수민족을 각 편으로 구분하여 서술한 것은 소수민족의 존재를 인정한 것으로, 당시의 대한족주의라는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보면 매우 독특하다.

 

남월의 성립과정

두 영웅은 함께 있지 못한다

남월이 한나라에 예속되어야 하는 까닭

 

462 남월왕은 어린 데다 태후는 중국인으로서 일찍이 안국소계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던 터라 그가 사신으로 오자 다시 몰래 정을 통했다 .남월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태후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54 동월 열전

 

해제

469 동월은 남월의 동쪽 지역, 지금의 족건성 지방에 있던 나라로 민월이라고도 한다.

 

469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왕을 없애고 군으로 개편하였는데 그 후 진나라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틈을 타 이들도 반기를 들었다. 한나라가 진나라를 멸하고 무저를 민월왕에 봉하고 요를 동해왕에 봉하였는데, 이 두 사람이 다스리던 나라를 동월이라 한다.

 

사마천은 동월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조상의 휼륭한 덕행에 역사를 의지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마천은 동월의 오랜 존속에 감탄한다. 찬에서 월나라가 소수민족이면서도 대대로 공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지배층의 도덕 원칙에서 비롯되며, 특히 우임금이 남긴 공적때문이라고 한 부분은 [항우 본기] [월 세가] [경포 열전] 등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부분과 통한다. 이는 사마천이 중앙집권의 대통일 사상을 견지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천자는 모든 나라를 자식처럼 여긴다

텅빈 동월 땅

 

472 힘으로 월나라를 도울 수 없고 덕으로 월나라를 덮을 수 없는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477 군리에게 조서를 내려 그곳 백성을 모두 장강과 회수 사이로 옮겨 살게 했다. 동월 땅은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

 

 

55 조선 열전

 

해제

479 이 편에서 조선은 곧 동이로서 그 선조가 기자라는 설에 입각하여 기술하고 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책봉하였는데 기자는 주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자손을 사십여 대에 전하였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연나라가 진번을 치니 조선은 연나라에 귀속되었다가 연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하자 요동의 변방으로 들어갔다. 한나라 초에 조선에서 변란이 일어나 위만이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며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평양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의 왕검성으로 옛날에는 조선이라 일컬었다. 위만이 죽고 손자 우거가 왕이 되려고 하자 한나라 무제는 공격하여 우거를 죽이고 조선을 한나라에 복속시켜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이 편에서 사마천은 위만의 역할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위만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해 삼국유사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거기서는 뭐라 그랬지? 지금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는 조선을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다루고 있는 듯 하다. 이게 동북광정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왜 중국은 동북공정이라고 하여 한국의 역사를 제 나라로 편입시키려 하지? 그래서 얻어지는 이익이 있으니까 그러리라.

 

조선의 탄생과정

조선 침공과 한사군 설치

 

 

56 서남이 열전

 

해제

489 서남이란 서이와 남이를 포함하며 지금의 운남성, 귀주성, 사천성 등 중국의 서남쪽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문화적으로 황무지였다. 이들은 소수민족으로 분류되어 북방의 흉노처럼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서남이는 평소에 한나라를 침범하는 일 없이 벽지에서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면 평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 무제는 영토를 넓혀 위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양쪽 모두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사실상 서남이는 다양한 민족이 뒤섞이고 부락이 많아 하나의 정체성 있는 국가로서 한나라와 관계를 설정한 것이 아니고, 각 부락 국가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한나라와 오갔다. 

 

서남이의 풍속

서남이 공격

화친 정책과 그 성과

 

496 전왕은 한나라 사자에게 말했다.

한나라와 우리 나라 중 어느 쪽이 더 큰가?”

야랑후도 이와 같이 물어보았다. 길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저마다 한 주의 군주라고 여기고 한나라의 넓고 큼을 몰랐다. 사신들은 돌아와 전을 큰나라로서 가까이 하여 귀속시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천자는 그 말에 유의했다.

좁은 자기 나라만 구경한 이가 이렇게 묻는구나. 내 모습도 이러하다. 세계화는 말로만 떠드는 일이고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없지 않나?

 

 

57 사마상여 열전

 

해제

499 사마상여는 일찍이 탁왕손의 집에 있다가 그 딸 문군을 꾀어 함께 달아나 살 정도로 경박한 인물이다. 그는 인상여의 인물됨을 흠모하여 정치에 깊이 참여하고 싶었지만 그의 재능은 정치 무대가 아니라 문학 방면에서 큰 빛을 드러냈다. 교만하고 화려한 문사와 신선술을 좋아한 한나라 무제는 사마상여의 [상림부], [대인부] 등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했다.

 

499 이 편이 [서남이 열전] 뒤에 놓이게 된 것은 사마상여가 무제의 서남이 정책을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즉 사마상여는 촉을 거쳐 서쪽 중앙아시아로 나가는 도로를 건설하려던 무제의 정책에 반대한 촉의 부로들에게 글을 쓸 정도로 무제를 옹호했던 것이다.

 

거문고 연주로 여자를 사로잡는다.

유렵부 : 향략이 지나치면 백성이 설 곳이 없어진다.

사람의 도량이 어찌 이리도 다른가

이미 정해진 일을 두고는 다투지 않는다

새는 하늘에 있는데 덤불만 살핀다

앞을 내다보는 자는 미리 막는다

찾는 이 없는 진2세의 무덤

대인부 ; 천자가 그리는 선인의 모습

봉선서

사마상여의 글은 내 취향은 아니었다.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사마상여와 과부 문군의 연애담이다.

 

502~504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때 임공의 현령이 앞으로 나가 거문고를 주며 말했다.

가만히 들으니 장경께서는 거문고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직접 듣고 싶습니다.”

사마상여는 극구 사양하다가 그를 위하여 한두 곡 연주하였다. 이 때 탁왕손에게는 과부가 된 지 얼마 안되는 문군 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상여는 현령과 서로 매우 존종하는 체 하고 거문고에 의지하여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로 했던 것이다. 상여가 임공으로 갈 때 거마를 뒤따르게 하엿는데 그 행동이 조용하고 의젓하며 아름답고 품위가 있었다. 사마상여가 탁씨 집에서 슬을 마시며 거문고를 탈 때 문군은 문틈으로 그를 엿보고 마음이 끌려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와 부부가 될 수 없을까봐 염려하였다. 한 참 뒤에 연회가 끝나자 상여는 사람을 시켜서 문군의 시종에게 후한 선물을 주어 자기 마음을 은근히 전했다. 그러자 문군은 그날 밤에 상여에게로 도망쳐 나왔다. 상여는 곧바로 그녀와 함께 성도로 돌아왔는데 그의 집은 네 벽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탁왕손은 몹시 화가 나서 말했다.

딸은 아주 쓸모가 없다. 나는 차마 죽이지는 못하지만 재산을 한 푼도 나눠주지 않겠다.”

사람들 중에는 왕손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자도 있었지만 왕손은 끝내 듣지 않았다. 문군은 그러한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견디지 못하여 이렇게 말했다.

장경, 함께 임공으로 갑시다. 형제들에게 돈을 빌리면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무엇때문에 이렇게까지 스스로 고생을 해야 합니까?” ….

 

534 상여는 말은 어눌하나 글을 잘 지었다. 그는 평소 소갈증을 앓았으나 탁문군과 결혼하여 재물이 넉넉하였다. 

 

 

58 회남, 형산 열전

 

해제

549 이 편은 한나라 고조의 막내아들 유장과 그 아들 유안의 일을 서술한 것이다. 두 사람은 모반을 꾀하다 주살되었으므로 세가에 들어가지 못하고 열전에 끼어들게 되었다.

 

549 사마천은 유장과 유안을 선명하게 대비시켜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부정적인 인물됨을 부각시키려 했다. 이 점에서 [오왕 비 열전]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가령 유장은 법을 자주 어기더니 결국 모반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여 죽은 데 반해, 유안은 책읽기와 음악을 좋아하고 백성을 보살피며 결단력 있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원통하게 죽은 어머니를 위해 살인한다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은 반역의 시초이다

형제는 베 한자도 같이 입어야 한다

여왕의 세 아들

혜성 출현은 반란의 징조이다

꿈틀대는 반역 음모

왕이 천하를 버리지 천하가 왕을 버리는 일은 없다

안정된 때 일으키는 반란은 실패한다

재앙은 알 수 있지만 복은 알수 없다.

모반할 마음을 품은 신하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편애는 불화를 낳고 불화는 나라를 망친다.

 

558 그러고는 굶어 죽었다.

 

559 원앙이 말하였다.

승상과 어사의 목을 베어 천하에 사과하면 됩니다.

황제는 곧 승상과 어사에게 명하여 각 현에서 회남왕을 호성하면서 수레의 봉한 문을 열지 않은 자, 음식을 보낸 자, 시중을 든 사람을 모조리 잡아들여 고문하고 모두 기시의 형벌로 다스렸다. 그리고 열후의 예로서 회남왕을 옹현에 묻고 그 무덤을 지키는 서른 호를 두었다. 효문제 8년에 황제는 회남왕을 가엾게 여겼다. 회남왕에게는 아들이 모두 네 명 있었는데 모두 나이가 7,8세로 어렸다. 각각 후로 봉하였다.

 

559 백성이 회남의 여왕을 위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베 한자도 꿰매어 함께 입을 수 있고

곡식 한 말도 찧어 나눌 수 있는데

형제 두 사람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네

 

583 형산왕과 회남왕 형제는 서로 상대방을 책망하고 원망하여 예절을 잃었고, 사이가 좋지 못했다. 형산왕은 회남왕이 반역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역시 빈객들과 결탁하여 대책을 세우려고 하였다. 회남왕에게 병합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587 왕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효는 먼저 자수했기 때문에 그 죄를 용서해 주었으나 왕의 시녀와 간통한 일로 기시에 처해졌다. 왕후 서래도 이전의 왕후 승서를 고술로 죽게 한 대 대한 벌을 받았고 태자 상도 왕응ㄹ 고발한 불효죄를 물어 기시되었다. 형산왕과 함께 모반을 꾀한 사람은 모두 멸족되고 나라는 없어져 형산군이 되었다. 

 

 

59 순리 열전

 

해제

589 순리란 법을 근본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로서 청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순리의 특징은 우선 자신이 청렴하고 법을 엄격히 집행하며 양민을 보호하고 간악한 행위는 반드시 응징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나라를 다스릴 때 우선 법령과 형벌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 법령과 형벌이 제정된 두에는 순리의 집행 태도에 따라 사회의 안위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이 편에서 서술하고 있는 순리 다섯 명은 모두 주대의 봉건국가에서 활동한 훌륭한 인물이고, 62 [혹리 열전]에 보이는 혹리 열두 명은 모두 한나라 경제와 무제 때 인물인데 그 중에서 열 명이 무제 시대에 살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열전을 둔 작자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법령을 자주 내리면 혼란이 일어난다

백성에게 안식처를 준 자산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

효를 좇다가 불충한다

잘못된 판결은 책임져야 한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

594 공의휴는 노나라 박사였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노나라 재상이 되었다. 법을 준수하고 이치를 따르며 바꾸는 일이 없으므로 모든 관리가 스스로 올바르게 되었다. 남의 녹을 먹는 자는 일반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못하게 하고, 많은 봉록을 받는 자는 사소한 것도 받지 못하게 했다. 어떤 빈객이 재상에서 생선을 보내왔으나 받지 않았다. 다른 빈객이 말했다.

재상께서 생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생선을 보내왔는데 무엇 때문에 받지 않으십니까?”

재상이 말했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았소. 지금 나는 재상 벼슬에 있으니 나 스스로 생선을 살 수 있소. 그런데 지금 생선을 받고 벼슬에서 쫒겨난다면 누가 다시 나에게 생선을 보내 주겠소. 그래서 받지 않은 것이오.”

자기 집 채소밭의  야채를 먹어보니 맛이 좋자 그 채소밭의 채소를 뽑아 버렸고, 또 자기 집에서 짜는 베가 좋은 것을 보자 당장 뻬짜는 여자를 돌려보내고 그 베틀을 불살라 버리고는 말했다.

농부와 장인과 베 짜는 여자가 그들이 만든 물건을 어디가 팔 수 있겠는가?”

박완서씨 야채, 땅집, 산문집<호미>

 

효를 좇다가 불충한다

595 석사는 초나라 소왕의 재상이었다. 그는 건실하고 정지갛고 청렴하여 아첨하거나 권세를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다. 현을 순시하는 도중에 살인사건을 만나게 되었다. 재상이 범인을 찾아가 보니 바로 자기 아버지였다. 재상은 아버지를 놓아주고 돌아와 자진해서 옥에 갇힌 뒤 사람을 시켜 왕에게 이렇게 아뢰도록 했다.

살인자는 신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처형하여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불효이고, 법을 무시하고 죄를 용서한 것은 불충입니다.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왕이 말했다.

범인을 뒤쫓아 갔지만 잡지 못한 것이니 벌을 받는다는 것은 옳지 않소. 그대는 전과 다름없이 맡은 일에 힘쓰시오.”

석사가 말했다.

자기 아버지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고, 군주의 법을 지켜고 받들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 왕께서 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임금의 은혜이지만, 벌을 받아 죽는 것은 신하로서의 직분입니다.”

그러고는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생각할 꺼리를 많이 주는 이야기

 

60 , 정 열전

 

해제

599 이 편은 급암과 정당시 두 사람의 전을 합친 것인데, 둘 다 황로 사상을 숭상하여 구경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은 호걸다운 기질이 있었고, 청렴하여 직간하기를 좋아하며 오랫동안 자리에 있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었다. 그들의 권세가 기울자 빈객 수도 줄어들었다. 특히 찬에서 사마천의 비분강개한 어투는 당시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띤 것으로서 적공의 말은 극치이다. 물론 두 사람의 의기는 비슷하지만 성품과 행실은 다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열전의 여러 편에 기록된 급암과 이광은 무제 때 쌍벽을 이룬 문신과 무신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광을 봉하기 어려웠던 것은 알지만 급암을 쓰기 어려웠던 것은 모르고 있다. 사마천은 직각하기를 좋아하는 급암의 성격을 무제, 무안후, 장조, 장탕 등과 관련시켜 여러 각도에서 다룸으로써 사직의 신하임을 분명히 했다. 아울러 무제가 마음 속으로는 큰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인의를 실시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묘사하여 최고 권력자의 위선과 사회적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려 하였ㄷ.

 

이 편이 [순리 열전] 바로 뒤에 놓이게 된 것은 급암과 정당시도 무제 때의 순리였기 때문이다. 이 편은 [혹리 열전], [유림 열전], [평진후, 주보 열전]과 같이 읽어야 한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자가 참된 관리이다

사직의 신하 급암

장작을 쌓아올리듯 신하를 등용한다

잎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를 상하게 한다

윗사람의 허물을 기워주는 사람이고 싶다

손님은 겸손과 정성으로 접대하라

 

602 급암은 사람됨이 거만하고 예의가 없으며 사람을 앞에 두고 공격하여 남의 허물을 용서할 줄 몰랐다. 자기와 뜻이 맞는 사람은 우대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마주 보는 것조차 싫어했다. 이 때문에 선비들도 그를 잘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학문을 좋아하고 의협심이 있으며 기개와 지조를 중시했고, 집안에 있을 때도 품행이 바르고 깨끗하였으며, 직간하기를 좋아하여 여러 차례 천자를 무안하게 했다. 언제나 부백과 원앙의 인물됨을 흠모했다.  

직간만이 능사가 아니구나. 나도 이런 이는 불편하다.

 

604 효무제가 말했다.

급암은 어떤 인물이요?”

장조가 말했다.

급암에게 어떤 관직을 맡겨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군주를 보필할 경우 기존 왕조의 제업을 지키며 다른 사람이 유혹해도 가지 않고 배척해도 떠나지 않을 사람으로, 옛날의 맹분이나 하육 같은 자라도 마음을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제가 말했다.

그렇소 옛날에 사직지신이 있었는데 급암 같은 사람이 그에 가까울 것이오.”

급암 같은 사람의 쓰임새. 이것도 지혜다. 사람을 생긴 모양 대로 적재적소에 쓰는 것

 

608 폐하께서 신하들을 등용하는 것은 땔나무를 쌓아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뒤에 온 사람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61 유림 열전

 

해제

617 이 편은 사마천이 제창한 교육사 열전으로 편폭은 간략하여 겨우 3411자에 불과하지만 규모에 체제는 오히려 한 폭의 전기로서 유학의 발전사 및 전승 관계를 통하여 고금의 유림 인물 쉰 세 명을 기술하고있다. 물론 한대에 오경을 전술한 경사 열 명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이 열전은 첫 머리에서 보듯이 공자가 제창한 유학에 대한 총결의 의미가 강하다. 다라서 [공자 세가] [중니 제자 열전]과 함께 읽으면 좋다.

 

유림 쉰세명 중에서 서른아홉 명이 한대의 유가인데 무제 때 인물이 많다. 이는 사마천이 무제의 유가적 교육정책을 긍정했음을 의미한다.

 

[유경, 숙손통 열전], [평진후, 주보 열전], [유협 열전]과 함께 읽어 보기를 권한다.

 

유학의 역사적 발전과정

식견 있는 학자를 등용하여 뜻을 이룬다

바른 정치는 힘써 노력하는데 있다.

간을 먹지 않아도 고기 맛을 알 수 있다

 

620 공자가 죽은 뒤 칠십여 제자는 각국으로 흩어져 제후들에게 유세하였는데 크중 크게 된 자는 제후의 사부나 경상이 되었고 작게 된 자는 사대부의 친구가 되어 가르쳤으며, 어떤 이는 숨어 살며 벼슬에 나오지 않았다.

 

620 진나라 말기에 이르자 <시경> <서경>을 불살라 버리고 학자들을 구덩이에 매장했다. 이때부터 육예는 없어지게 되었다. 그 뒤 진승이 왕이 되자 노나라의 여러 선비가 공자의 예기를 가지고가 진나라에 귀순했다.

 

628 효경제가 말했다. “고기를 먹을 때 말의 간을 먹지 않았다고 하여 고기 맛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는다. 학문을 논하는 자가 탕왕과 무왕이 천명을 받은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 어리석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쟁을 멈추었다. 이 뒤로는 학자들 사이에 천명과 시해에 대해 밝히려는 자가 없었다.

 

631 예관은 가난하여 생활비가 없으므로 늘 다른 제자들의 밥짓는 일을 맡아하고 때로는 틈틈이 날품팔이를 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해결했다. 그는 일을 다닐 때도 언제나 경서를 가지고 가서 쉴 때마다 꺼내 외고 익혔다. 그 뒤 시험 성적에 따라 정위의 사에 임명되었다….예관은 사람됨이 온후하고 선량하고 청렴하여 지혜롭고 지조가 있으며 제 분수를 알았다. 글도 잘 지어 상소문을 잘 쓰고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는 재치가 있었으나, 입으로는 자기 의견을 명확히 발표하는 능력이 없었다. 장탕은 그를 덕망있는 자로 여기고 자주 칭찬했다.    

 

 

62 혹리 열전

 

해제

637 이 편은 서한 전기에 살았던 포악한 관리 열 두 명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는데, 한나라 무제 때의 관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물론 혹리가 춘추시대에는 없고 한대에만 있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열두 명 중 열 명이 무제 때 제직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무제가 중앙집권을 강조하면서 관리가 민중 위에 군림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무제가 혹리를 많이 등용한 것은 부호나 상인, 귀척 등에게 타격을 입힘으로써 소금과 철의 전매 정책과 평준과 균수 등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황권을 강화하고 전쟁비용을 충당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법 적용이 지나치게 엄하여 도적이 들끓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 편 서문에서 공자와 노자의 말을 인용하여 예의와 도덕의 중요한 작용을 천명한 것은 사마천의 반폭정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다만 논찬에서 혹리 가운데 청렴하게 공적인 일을 처리하고 법을 집행함에 아부하지 않는 자도 있었다는 점만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법령이 늘수록 도둑은 많아진다.

비첩을 잃으면 다시 얻으면 그만이다

혹리에서 거부로 변신한 영성

냉혹하고 교만한 주양유

견지법을 만든 조우

군주의 마음을 좇아 법을 집행한 장탕

법을 곧이곧대로 운용한 의종

교활한 관리들의 약점을 이용한 왕온서

작은 일을 충실하게 하여 큰 일을 한 감선

법을 그때그때 적절하게 적용한 두주

 

639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바로잡으면 백성은 형벌을 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바로잡으면 부끄러움을 알고 바르게 살아간다.”

노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상덕은 덕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덕을 지니게 되고,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므로 덕을 지니지 못한다. 법령이 늘수록 도둑은 많아진다.”

 

639 태사공은 말한다.

당시 관리들은 불은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것처럼 정치를 조급하게 했다.

 

647 하루는 아버지가 외출하고 어린 장탕이 집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와 주기 고기를 훔쳐간 것을 알고 노하여 장탕을 매질하였다. 장탕은 쥐구멍을 파 고기를 훔친 쥐와 먹다 남은 고깃덩이를 찾아냈다. 그런 다음 쥐를 탄핵하여 매질하고 영장을 발부하여 진술서를 만들고, 신문하고 논고하는 절차를 만들고, 신문하고 논고하는 절차를 밟아 쥐를 체포하고, 그 고기를 압수하였다. 판결문을 갖춘 다음 대청 아래에서 책형에 처했다. 그 아버지는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고 아들이 만든 판결문을 읽어보니 마치 노련한 형리가 작성한 것과 같으므로 몹시 놀랐다. 그래서 판결문 작성법을 배우도록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장탕은 장안의 관리가 되어 오랫동안 근무했다.

나고 났다. 어릴 때 아이들이 노는 걸 보고서 아이들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보면 좋겠다. 장애학생들의 재능을 어찌 알아볼까? 그리고 어찌 꽃피우나? 그런 직업과 연결을 지울 수 있어야 하는데.

 

665 운제는 죄인을 처형하는 일에는 고귀한 신분이나 외척을 가리지 않았다. 관내 도위로 전임된 뒤로는 영성보다도 더 냉혹하다는 평판이 났다. 황제는 그를 유능하다고 보고 중위로 승진시켰으나 관리와 백성의 생활은 더욱 고달파졌다.

사마천은 황제를 비판하고 있다.

 

668 여전히 도적을 단속할 수 없자 광록 대부 범곤과 좌, 우내사 및 구경 장덕 등에게 수의를 입고 절과 호부를 가지고 병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치도록 했다. 이때 머리를 벤 것이 많은 경우에는 만여 급에 달했다. 또 도적들에게 정보를 주거나 음식물을 제공한 자도 법령에 따라 주살했다. 이 법에 연좌된 자는 각군에 걸쳐 있었는데 만은 경우에는 수천 명이나 되었다. 몇 년 뒤에는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잡았지만 흩어져 달아난 졸개들은 또 다시 무리를 이루어 산천의 가파른 곳에 기대어 관병에게 맞서고 언제나 무리를 지어 살아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침명법을 만들어 이렇게 말했다.

도둑떼가 일어났는데도 발견하지 않거나 발견하더라도 전원을 체포하지 못하면 2000석의 고관에서 말단 관리까지 모두 사형에 처한다.”

이러한 법이 제정된 뒤로 하급 관리들은 처형될까 두려워 도적이 있어도 감히 적발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체포하지 못하면 자신이 형벌을 받게 되고 군부에 누를 끼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군부에서도 적발하지 않으므로 도적들을 차차 더 불어났다. 관리들은 위아래가 서로 숨겨 도둑이 없다는 허위 문서를 만들어 법에 저촉되는 것을 피했다. 

 

 

63 대원 열전

 

해제

677 대원은 고대 서역의 나라 이름으로 지금은 우즈베크 공화국 내의 한 분지인데 백성은 주로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며 상업에도 뛰어났다. 한나라 무제가 대원을 정벌하게 된 것은 한혈마라는 유명한 말이 생산되기 때문이라는 설과, 자신이 총애하던 이부인의 오빠 이광리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677 이 편은 대원 정벌을 주축으로 하여 한나라 왕조가 서역 여러 나라와 왕래하던 모습을 적고 있다. 그 중에서 무제 때 장건이 두 차례 서역에 사자로 나갔을 때의 일에 치중하여 서술하고, 이광리가 대원을 정벌하게 되는 과정 등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한나라 왕조의 서역 개척은 중국의 지리적, 문화적 통일을 보다 확장시키고 동서의 경제와 문화 교류 및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서역은 동서의 큰 문명도시인 장안과 로마를 이어주는 경유지였기 때문이다.

 

서역의 문을 두드린다

서역 국가들의 풍속

오손과 교역을 개척한다

말을 구하러 떠나는 사신들이 줄을 잇는다

사신의 자질이 떨어지면 국가 위상도 떨어진다

먼 곳에 있는 자보다 가까이 있는 자에게 기대라

말 때문에 일어난 전쟁

 

691 오손에 보낸 한나라 사신이 오손의 남쪽으로 나가 대원 및 대월지와 잇달아 왕래하니 오손은 두려워져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면서 한나라 옹주와 결혼하여 형제 나라가 되기를 청하였다. 천자가 신하들을 불러 모아 의논하니 모두 이렇게 말하였다.

반드시 먼저 폐백을 받은 뒤에 옹주를 보내셔야 합니다.”

처음에 천자가 역서를 펴서 점을 치니 이렇게 나왔다.

신마가 서북쪽에서 올 것입니다.”

 

693 많은 것을 말한 자에게는 부절을 주어 정사로 삼고 적게 말한 자는 부사로 삼았다. 이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가 서로 다투어 이를 본떠서 말했다.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모두 가난한 집 자식으로 조정에서 외국으로 보내는 물건들을 사사로이 가로채 헐값으로 외국에 팔아넘겨 그 이익을 차지하려 들었다.

 

697 대원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는 포도로 술을 만들었는데 부자는 만여 석의 술을 저장해놓기도 했고, 오래된 것은 수십 년 지났지만 부패하지 않았다. 이곳 풍속은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고 말은 목숙을 좋아했다.

서역 사람들도 포도주를 마시나보다.

 

702 한나라가 대원을 치는 까닭은 우리 왕 무과가 좋은 말을 감춰 두고 한나라 사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제 무과왕을 죽이고 좋은 말을 내놓으면 한나라 군대는 분명히 포위를 풀 것이다. 만약 포위를 풀지 않으면 그때 가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64 유협 열전

 

해제

709 유협이 사회 저층의 피압박자인가, 아니면 통치 계급의 흉포한 행위를 도와주는 자인가하는 문제는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사마천은 유협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한 부류는 통치계층의 악행을 도와주어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자이고, 다른 한 부류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위험에 빠진 백성을 구해 줌으로써 정의의 편에 선 자이다.

 

709 유협의 출현은 봉건사회 법제의 와해를 의미하며, 보통 사람이 분노를 표현하는 한 형식인 셈이다.

 

709 [유협 열전]은 사마천 개인의 도덕관 전체를 반영한 것으로 적잖이 비판받기도 한다. 그의 가치관은 향촌의 민간 질서를 주도하는 유협의 세계를 인정하며, 유가적 명분이나 이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유협의 인정이라는 한계를 드러낸다.

유협이 뭘까? 본문을 읽어보면 시칠리아 여행과 관련해 보았던 <대부> 영화의 대부와 매우 비슷하다. 대신 죽여주고, 원수를 갚아주고, 개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선비와 유협의 차이

바람과 기세 중 어떤 것이 먼져였을까

대표적인 서민 협객

 

711 한비자는 유자는 문으로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은 무로 금령을 범한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선비와 협객 둘 다 비난한 것이다.

 

711 지금 유협의 경우는 그 행위가 비록 정의에 부합되지는 않아도 그들의 말에 믿음이 있고 행동은 과감하며 한번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해 실천하고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닥친 위급함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생사와 존망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뽐내지 않고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713 요컨대 구체적인 성과와 신의를 지키는 점에서 본다면 협객의 정의를 또 어찌 경시할 수 있겠는가?

 

714 내가 들은 바로는 한나라가 일어난 뒤로 주가, 전중, 왕공, 극맹, 곽해 같은 협객이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당시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도 했으나 개인의 품덕, 청렴, 겸양 면에서는 칭찬할 만하다.

 

716 극맹은 노름을 좋아하고 소년처럼 장난기가 많았다. 그 어머니가 죽었을 때 먼 곳에서 문상하러 온 수레가 대략 1000대나 되었다. 그렇지만 극맹이 죽은 뒤 그의 집에는 십 금의 재산도 남아있지 않았다.

 

720 위청장군이 곽해를 위해 황제에게 진언했다.

곽해는 집이 가난해서 이주 대상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평민이면서도 장군이 부탁할 정도의 권력을 가졌다면 그 집이 가난하다고는 할 수 없소.”

마침내 곽해의 집도 옮겨 가게 되었다. 이때 그를 전송하는 사람들이 낸 전별금만도 1000만여 전이나 되었다.

 

 

65 영행 열전

 

해제

723 한나라가 쇠망해 가는 모습을 보면 환관과 외척이 큰 역할을 했다. 이 편은 여색이나 남색을 통하여 권력에 빌붙어 영달을 꾀하던 환관과 외척들을 기술하여 최고 권력층 주변 인물들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사람의 애증은 때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지만 군주는 더욱 심했다. 한나라 문제는 총애하던 들통에게 구리광산을 주어 마음대로 동전을 주조하게 했으나 말년에는 비녀 하나 지니지 못했다. 무제는 이연년을 총애하여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들 정도였으나 그의 여동생이 죽자 그 총애도 순식간에 식어 버렸으니, 애증의 변화는 마치 손바닥 뒤집기와 같다. 이들은 구주의 은총을 입고 있어도 시시각각 변하는 군주의 마음과 동료들의 음모 등으로 인해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이들에 대한 수많은 집단의 반대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힘써 농사짓는 것보다 풍년을 만나는 것이 낫다

효문제의 총신 등통

효무제의 총신 한언

효무제의 총신 이연년

 

725 세속에 이러한 말이 있다.

힘써 농사짓는 것이 풍년을 만나는 것만 못하고, 정성껏 섬기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추는 것만 못하다.”

 

725 옛날에는 미색을 가지고 사랑을 받는 자가 많았다.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 고조는 매우 사납고 강직한 성품이지만 적이라는 소년은 아첨하여 사랑을 받았고, 효혜제 때에는 굉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이 두 소년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게 아니고 순종과 아첨으로 총애를 받아 황제와 함께 자고 일어나며 생활했다. 공경은 모두 이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올렸다….이 두 사람은 섬기던 황제가 죽은 뒤에도 그들을 모시기 위해 능이 있는 안릉으로 집을 옮겨 살았다.

일종의 동성애 관계? 왜 재능이 없어. 사랑받는 것도 재능이구만. 그리고 황제가 죽은 뒤에도 그 무덤 가에 살았다는 건 그들 사이에 사랑과 의리가 있었다는 거다.   

 

727 문제가 일찍이 종기를 앓았는데 등통은 황제를 위해 늘 종기의 고름을 빨아내었다. 어느날 문제는 마음이 편치 못하므로 등통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나를 사랑하느냐?
등통이 대답했다.

물론 태자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태자가 문병하러 들어오자 문제는 태자에게 고름을 빨아내게 했다. 얼마 뒤 태자는 등통이 황제를 위해 늘 종기의 고름을 빨아낸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부끄러우면서도 이로 인해 등통을 미워하게 되었다.

 

  

66 골계 열전

 

해제

733 ‘골계란 재치가 있어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 편은 골계 인물인 손우곤, 우맹, 우전 세 명의 열전으로 앞의 두 사람은 진한 대의 하급 계층이며, 측히 순우곤은 죄인과 동일시되는 데릴사위 출신이다. 골계가는 대부분 왜소하고 외모도 빼어나지 못하며 지위도 없지만 기지와 해학이 넘쳐 반어법과 풍자에 뛰어났다. 그래서 그들이 말을 하면 치밀던 화도 가라앉고 포악한 군주가 웃는 가운데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등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사마천은 이들의 혜안을 논하면서 찬미했다.  

 

육예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힘이 있다.

삼 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는 무슨 새일까?

적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바라면 가능할까?

사물은 극도에 이르면 쇠한다

말을 임금의 예로 장사지낸다

청렴한 관리도 할 것이 못된다

우스갯소리도 이치에 맞으면 가치가 있다

자주 뒤돌아보아 연민의 정을 일으키라

조정 안에서 세상을 피해 산다

때가 다르면 할 일도 다르다

추아가 나타나면 먼 곳의 나라가 투항해 온다

새가 죽으려 하면 우는 소리가 애달프다

남루한 옷 속에 있는 보화를 찾으라

따오기를 잃은 자의 변명

군자는 서로 좋은 말을 보낸다.

서문표의 지혜

어진 사람이 만든 법식은 바꾸면 안된다

 

삼 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는 무슨 새일까?

736 제나라 위왕 때 일이다. 위왕은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음탕하게 놀며 밤새도록 술 마시기를 즐겨, 술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정치를 경대부에게 맡겨 버렸다. 그리하여 문무백관들은 물란해지고 제후들이 동시에 침략하여 나라의 존망이 아침저녁으로 절박한 지경에 놓였다. 그런데도 주위 신하 가운데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순우곤이 위왕에게 이런 수수께끼를 냈다.

나라 안에 큰 새가 있는데 대궐 뜰에 멈추어 있으면서 삼 년이 지나도록 날지도 울지도 않고 있습니다. 왕께서는 이것이 어떤 새인지 아십니까?”

왕이 대답했다.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 번 날았다 하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울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 번 울었다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말을 임금의 예로 장사지낸다

741 우맹이 말했다.

청컨대 대왕을 위하여 육축의 예로 장사 지내십시오. 부뚜막을 바깥 널로 삼고 구리로 만든 솥을 속 널로 삼아 생강과 대추를 섞어 목란을 때어 볏짚으로 제사 지내고 타오르는 불빛으로 옷을 입혀 이것을 사람의 창자 속에서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자주 뒤돌아보아 연민의 정을 일으키라

747 효무제는 어린 시절 동무후의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는데 장년이 되어 그녀를 대유모라 불렀다. 유모는 대체로 한 달에 두 번 궁궐로 들어왔다.

 

748 곽사인이 말했다.

들어가 작별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면서 자주 뒤를 돌아보시오.”

유모는 곽사인이 시키는 대로 작별인사를 하고 물러날 때 걸음을 빨리 옮기면서 자주 돌아보았다. 그러자 곽사인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허허, 이 노파가 어찌하여 빨리 가지 않지. 폐하께서는 장년이 되셨는데, 아직도 그대의 젖을 먹어야만 사실 줄로 아는가!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돌아다보는가?”

이리하여 황제는 유모를 불쌍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옮겨 살지 않게 하고, 유모를 비방하고 헐뜯는 자들을 귀양 보냈다.

 

조정 안에서 세상을 피해 산다

750 동박삭이 궁궐 안을 거닐 고 있을 때 어떤 낭관이 그에게 말했다.

선생을 모두 미치광이라고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이른 바 조정 안에서 속세를 피하고 있는 것이오. 옛날 사람들은 깊은 숲속에서 속세를 피했소.”

 

세속에 묻혀 살며

세상을 금마문에서 피한다

궁중 안은 세상을 피하고

몸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데

하필 깊은 산골의

쑥대 움막 아래랴

 

759 그가 빈곤할 때는 사람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더니 존귀해지자 앞을 다투어 돌아와 따랐다. 속담에 말을 감정할 때에는 여윈 것 때문에 실수하고, 선비를 감정할 때에는 가난 때문에 잘못 본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67 일자 열전

 

해제

769 일자란 육상(천상)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치는 사람으로 복서와는 차이가 있으나 비슷한 부류로 보면 된다. 한나라 때 특히 점이 성행하여 이들은 태복이라는 직책을 맡아 제왕 곁에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였다. 저소손이 보충한 데서도 나타나듯 한 나라 무제가 며느리를 맞이하는데 이들을 불러 점을 치게 하니 제각기 다른 점괘가 나와 결국에는 오행에 근거하여 무제 스스로가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열전은 연이은 [귀책열전]과 뗄 수 없는 편이다….문사가 조잡한 것은 사실이며 [귀책열전]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복자는 어떤 사람인가

맞는 땅이 아니면 심어도 나지 않는다

 

781 효무제 때 점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아무 날에 며느리를 맞이해도 좋은 지 물었습니다. 오행가(음양오행으로 점치는 사람)는 좋다고 대답하고, 감여가(풍수가)는 안된다고 하면, 건제가(십이신점가)는 불길하다고 하고, 총진가(12진과 오행을 서로 연관시켜 점치는 사람)는 아주 흉하다고 하며, 역가(역법에 근거하여 점치는 사람)은 조금 흉하다고 하고, 천인가(천인의 감응을 가지고 점치는 사람)은 조금 길하다고 하고, 태일가(자연 만물의 변화를 보고 점치는 사람으로 태을가 라고도 함)는 아주 길하다고 하며 논쟁을 벌여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황제에게 사실대로 아뢰니 모든 상서롭지 못한 것을 피하기 위해 꾀하는 데는 오행을 위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오행에 따라 태어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모순 고사처럼 재미있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하나? 효무제가 선택했으리라. 그의 마음을 따라간거지. 

 

 

68 귀책 열전

 

783 [귀책 열전]은 앞의 [일자 열전]과 매미의 두 날개처럼 자매를 이루는 편으로서 거북 껍질과 시초로 점치는 것을 말한다.

 

이 편도 사마천이 쓴 것은 한나라 때 이미 없어지고 겨우 논찬 부분만 있다. 현존하는 것은 모두 저소손이 보충한 것이다. 이 편을 통해 사마천의 관점과 점치는 방법 및 그 변천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50 페이지나 되는 이 편은 읽는데 흥미가 없었다. 지루했다. 거북 머리가 움츠러 들고 다리가 구부러 지는 것으로 환자의 병이나 다른 것을 점치는 것은 현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골문자나 구지가가 생각이 났다. 간단히 점치는 시기나 방법 정도만 알아두려 한다.  

 

복서의 역사와 효험

시초와 명귀의 조건

신귀의 영묘함

신령스러운 거북은 덕을 쌓은 자에게만 내린다

신령스러운 거북은 길흉을 알지만 그 뼈는 말린다

거북의 모양

점을 금하는 때

점치는 원칙

징조를 보고 판단하는 힘

 

810 점치면 안되는 때는 자, , 술시다. 이때는 점을 쳐도 안되고 거북을 죽여서도 안된다. 만일 한 낮이나 일식이나 해질녘에 점을 치면 거북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 신 일에는 거북을 죽여도 되고 거북의 등딱지를 벗겨도 된다.

 

 

69 화식 열전

 

해제

835 이 편은 춘추 말기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상공업으로 치부한 사람들의 활동을 다룬 것으로 이 시기 상공업 발전의 면모를 볼 수 있어 화식 貨殖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는 재산, 은 불어난다는 뜻으로 재산을 늘리는 방법을 말한다. 이 열전의 서론 부분은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 능력이 사회 생활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고 있어 명분보다는 실질을 택하여 빈천함을 수치로 여길 만큼 강한 어조로 일관했다.

사마천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분업은 사회경제 생활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상업을 의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로 보고 농업, 공업과 함게 모든 직업을 중시하는 진보적 면모를 보였다. 적어도 중농억상 重農抑商 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 있다.

 

입고 먹는 것이 다스림의 근본이다

부잣집 아들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

물건과 돈은 흐르는 물처럼 유통시켜야 한다

세력을 얻어 더욱 세상에 드러난다

시세 변동에 다라 새처럼 민첩하게 사고팔라

목자와 과부가 천자에게 대우받을 수 있는 이유

물자와 지역, 그리고 사람의 상호관계

부귀해지려는 몸부림

부를 얻는 데는 상업이 최상이다

부유해지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다

 

837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극히 잘 다스려지는 시대는 이웃 나라까지 바라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은 제각기 자신들의 음식을 달게 먹고, 자기 나라의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자기 나라의 습속을 편히 여기고, 자신들의 일을 즐기며,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 근대의 풍속을 돌이키고 백성의 귀와 눈을 막으려 한다면 아마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

 

839 주서에는 농부가 생산하지 않으면 식량이 모자라고, 장인이 물건을 제대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제품이 부족하고, 장사치가 물건을 팔지 않으면 삼보(식량, 제품, 자재)의 유통이 끊어진다. 어부나 사냥꾼이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으면 자재가 모자른다. 자재가 모자라면 산과 택지는 개척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 네 가지는 백성이 입고 먹는 것의 근본이다. 이 근원이 크면 백성은 부유해지고 그 근원이 작으면 백성은 가난해진다. 이 네 가지는 위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아래로는 가정을 부유하게 한다. 빈부의 도란 빼앗거나 안겨 주어서 되는 게 아니고, 교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은 부유해지고 모자라는 사람은 가난한 것이다.

 

840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고 한 것이다. 예라는 것은 재산이 있는 데서 생겨나고 없는 데서는 사라진다. 그런 까닭에 군자가 부유하면 덕을 즐겨 실천하고 소인이 부유하면 자기 능력에 닿는 일을 한다. 못은 깊어야 고기가 있고, 산은 깊어야 짐승이 오가며, 사람은 부유해야만 인의를 따른다. 부유한 사람이 세력을 얻으면 세상에 더욱 드러나고 세력을 잃으면 빈객들이 갈 곳이 없어져 따르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만이 나라에서 더욱 심하다.

 

842 비쌀 대로 비싸지면 헐값으로 돌아오고 쌀 대로 싸지면 비싼 값으로 되돌아갑니다. 값이 비싸면 오물을 배설하듯 내다 팔고, 값이 싸면 구슬을 손에 넣듯이 사들여야 합니다. 물건과 돈은 흐르는 물처럼 원활하게 유통시켜야 합니다.

 

852 대체로 천하에는 물자가 적은 곳도 있고 많은 곳도 있다. 백성의 풍속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산동에서는 바닷소금을 먹고, 산서에서는 호수 소금을 먹으며, 영남과 사북은 원래 소금을 생산하는 곳이 있다. 물자와 사람의 관계는 대체로 이와 같다.

이것을 총괄해보면 초나라와 월나라는 땅은 넓지만 사람이 드물고 쌀밥에 생선국을 먹는다. 어떤 곳에서는 마른 풀을 태워 밭을 갈고, 논에 물을 대어 김을 매고, 초목의 열매와 소라나 조개 등이 장사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 지형상 먹을 것이 풍부하여 굶주릴 염려가 없으므로 백성은 게으르고 그럭저럭 살아가며 재산을 모으지 않아 가난한 사람이 많다. 이 때문에 강수와 회수 남쪽에는 굶주리는 사람도 없지만 천 금을 가진 부잣집도 없다.

기수와 사수 북쪽 지역은 옥곡과 뽕과 삼을 심고 육축을 기르기에 알맞다. 그러나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 데다 수해와 가뭄이 잦다. 그곳 사람들은 저축을 즐긴다. 그러므로 진, , , 노에 서는 농사를 권장하고 농민을 소중히 여긴다. 삼하와 완과 진의 땅도 이와 같으나 상업에도 힘을 기울인다. 제나라와 조나라 지역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를 부리고 기회를 보아 이익을 잡으려 하며, 연나라와 대나라는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 양점에서 힘쓴다.

 

860 제나라 풍속에는 노예를 업신여기는데 조간만은 노예를 사랑하고 귀하게 대했다. 사람들은 사납고 교활한 노예를 싫어하지만 조간은 그런 자를 발탁하여 생선과 소금 장사를 시켜 이익을 얻었다.

 

863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볼 대 부유해지는 데에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진다. 천금의 부자는 한 도읍의 군주에 맞먹고 거만 금을 가진 부자는 왕과 즐거움을 같이 한다. 그들이야말로 어찌 이른바 소봉이라고 할 만한 자들인가 아닌가 

 

 

70 태사공 자서

 

해제

866 태자공 자서는 열전의 마지막 편으로 들어가 있지만 사실은 <사기> 전체의 머리말에 해당한다. 요즘은 저자 머리말을 맨 앞에 놓지만 예전에는 끄트머리에 두었다. 그런데 <사기> [태사공 자서]가 다른 책의 머리말과는 달리 유독 중요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단순히 전체적인 집필 동기와 구성 체제 등을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안 내력과 학문적 배경 및 경력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사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태사공 자서]에는 <사기> 130편에 대한 간단한 해제가 붙어 있어 이것만 읽어보아도 <사기> 전체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짐작할 수 있다.

 

전문은 7812자로 이루어졌는데 순서대로 보면 1) 사마천의 가계, 2) 사마씨 부자의 육가요지론 3) 사마천의 청년시절과 부친의 죽음 및 태사령이 된 자신 4) 사마천이 아버지의 유언을 받드는 과정 5) 사마천과 후수의 <춘추> 논쟁 6) 사마천이 궁형을 받고 발분해서 글을 쓰게된 동기 7) <사기> 전편의 해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제자백가로 일컬어지는 육가에 대한 견해는 당시 학문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향후 중국 문화가 이런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발전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사마천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력으로 머리말을 썼다. 따라서 이러한 사마천의 입장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가 재해석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마천의 인간적 면모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현실에 냉정한 실증주의자의 면모도 아울러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뼈대있는 집안의 내력

천하의 이치는 하나인데 제각기 길을 간다

사마천의 각지 여행

사마담의 유언을 받든다

사마천과 호수의 <춘추> 논쟁

마음 속에 맺힌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사기>를 짓는다

열두 본기 해제

십표 해제

팔서 해제

삼십 세가 해제

칠십 열전 해제

 

874 사마천의 각지 여행

사마천은 용문에서 태어나 황하 북쪽과 용문산 남쪽 기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 열 살 때 옛날 문헌을 암송했으며 스무 살 때는 남쪽으로 장강과 회하를 유력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 임금이 죽어서 들어갔다는 동굴을 탐험하고 순 임금이 매장된 구의산도 살펴보았으며 원수와 상수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였다. 그러다가 북쪽으로 문수와 사수를 건너 제나라와 노나라의 구소에서 학업을 닦고 공자가 남긴 풍속을 살펴보았으며 추현과 역산에서는 향사를 살펴보았다. 파현, 설현, 팽성 등에서 재앙과 곤란을 겪고 양나라와 초나라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사마천은 관직에 나가 낭중이 되어서 칙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파와 촉 남쪽 지역을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공과 작과 곤명을 공략하고 돌아와서 다시 명을 받들었다.

사마천이 여행한 곳이 어딘가 궁금했다. 그렇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알 수가 없으니 ㅠㅠ

 

881 마음 속에 맺힌 울분을  토로하기위해 <사기>를 짓는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그는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시경> <서경>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쫒거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를 남겼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촤천되어 세상에 <여람>을 전했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 <고분> 두 편을 남겼다. <>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도당()부터 인지(한나라 무제가 기린을 얻어 발모양을 주조한 것을 말함)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서술하였다. 기록은 황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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