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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3일 14시 28분 등록

 

카잔차키스는 1883년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레타의 농민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는 나중에 그리스 정교회의 금서가 된 <미할리스대장>에서 미할리스 대장 역으로 이상화 되었는데, 농민이자 자신의 가게를 경영했다. 아버지는 그의 책 <미할리스 대장>에 ‘강건한 체력에 원시적인 본능을 가졌으며, 비사교적이고 과묵한 남자’ 로 묘사된다. 카잔차키스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무서워했고, 신앙심이 깊고 순종적인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으로 기록한다.

 

 1897년 크레타에 반란이 일어나고, 크레타 섬의 많은 가족들은 낙소스 섬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그는 프란체스코 수사들이 운영하는 성 십자가 프랑스 학교를 2년 동안 다니면서, 프랑스어와 라틴어,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이 학교에서 그는 유럽 문학, 특히 프랑스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그는 고등학교때 영어와 독일어를 독학으로 배웠다. 그는 매우 성적이 뛰어났으며,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람들은 그를 추기경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아테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대학생 신분으로 아테네의 대표적인 신문인 <아크로폴리스>에서 ‘아크리타스’라는 필명으로 칼럼에 기고하게 된다.

 

대학시절, 그는 첫 번째 에세이 <병든 시대>를 발표하고, ‘카르마 니르바메라‘는 필명으로 처녀작 <뱀과 백합>을 출판한다. 이 책은 일기형식으로 쓴 로맨스 중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당시 비평가와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이 책은 젊은 예술가의 열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주인공인 애인인 소녀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백합꽃이 가득한 밀실에서 꽃향기에 도취된 채 동반 자살한다. 이러한 ’사랑의 죽음‘을 통해 그들은 완전한 의사소통을 하며 마지막 밤을 보낸다.

 

1907년,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신춘문예’에 희곡 <동이 트면>이 당선된다. 이 작품은 당선 후 아테네에서 공연이 되는데, 문단에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시동생과 사랑에 빠진 여성의 곤경을 그린 작품이었던 것이다. 극중의 여주인공은 이혼을 하지않고 자살을 선택한다. 당시 여성의 ‘자살’ 선택권에 관한 논란과, ‘근친상간’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이 젊은 작가에게 찬반을 일으켰다.

 

그는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는데, 이 여행을 계기로 그녀와 동거 시간을 거쳐 결혼에 이르고, 1926년에 이혼한다.

 

그는, 이후 바로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학교시절부터 프랑스어를 배워 익혔기에 언어에는 별 지장이 없었겠지만, 크라타 섬에서 온 농부의 자식으로서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음은 자명하다. 그는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문하에서 니체에 대해서 연구하게 된다. 1908년 그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권력의 철학> 이라는 제목으로 93페이지짜리 박사 논문을 썼고, 그 논문이 아테네 대학교 법과 대학에서 통과 되었으며, 1909년 이라클리온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아테네 신문과 잡지의 통신원으로 일하면서 1909년 아테네 잡지에 출판된 철학 에세이 <과학은 파산하였는가>를 출간하였고, 1909년부터 2년간 민중 문학 잡지인 <누마스>에 페트로스 픨로레이티스‘라는 필명으로 첫 번째 소설 <부서진 영혼>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파리에 유학한 한 무리의 그리스 학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왠지 주인공이 그 자전적 분신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주인공 오레스테스 아스테리아데스는 고상한 꿈을 꾸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려는 의지력이 부족한 이상주의자이다. 현실 생활과 맞서는 이상적이고 순진한 그의 투쟁은 파멸을 초래하고 만다. 그의 비극적 종말에는 상냥하지만 나약한 여자친구와, 과거의 영광과 향수에 짓눌린 교수 고르기아스가 동참한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나열과 배경설명으로 3부작의 1부가 연재된다. 이 상징적 소설은 그러나, 미완으로 마무리한다.

 

그는 발칸전쟁에 자원 입대하여 엘레우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 집무실에 배속받는다. 여기서 그는 총리 비서의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된다. 1911년부터 1915년까지 그는 윌리엄 제임스, 니체, 에커만, 레장, 메테를링크, 다윈, 부흐너, 베르그송의 주요 저서들을 번역했고, 페식스 출판사를 위해 플라톤의 <대화> 6편을 번역했으며, 그의 아내와 학교 교과서를 집필한다.

 

그는 시인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와 함께 그리스의 고대 및 현대 성지를 체계적으로 순례한다. 이 두 사람은 이 여행을 통해 받은 인상과 사실을 바탕으로 후에 그리스-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많은 작품을 남기는 초석을 이룬다. 이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엮어 <모레아 기행>이라는 책으로 묶어낸다.

 

이후, 그는 기오르고스 조르바와 함께 마니에 인접한 광산을 운영하게 된다.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이때 알게 된 조르바의 행동과 대화를 바탕으로 구상화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아이디어를 얻게 되고, 이 소서릉 통해 조르바를 ‘불멸의 자유인’으로 재창조한다. 광산 사업이 실패 한뒤 그는 스위스의 취리히로 이동한다.

 

그는 공공복지부의 장관으로 행정가로 변신한다. 그는 그리스 난민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난민문제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이 를 후에 <수난> 이라는 소설롤 남기게 된다.

 

1920년대, 그는 집중적으로 불교를 비롯한 동양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비극 <붓다>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며, 이 소설을 쓰면서 그는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전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는 패전 이후의 가난한 독일, 터어키의 재난으로 피 흘리는 그리스, 그리고 프랑스의 문학적, 철학적 사상으로 인해, 자유로운 영혼에 물들게 된다. 그는 베를린에 머물러 있는 동안 폴란드와 독일의 젊은 유태계 사회주의자와 지식인 서클에 가입하게 된다. 이 그룹에서 그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존재를 알게된다. 그는 ‘초공산주의 사상’ 즉, 공산주의를 초원하는 사회 이론을 개발하는 등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그는 인민과의 돈독한 유대를 강조한 레닌을 존경했지만, 마르크스적 유물론에는 반대했다. 그는 공산주의의 관료주의와 비인간적인 수량과 통계를 철저히 반대하고, 창조적 행동에 대한 인간의 헌신을 강조하였다. <신을 구하는 자>라는 책에서 그는 초공산주의 이론을 표현하였는데, 금욕주의자의 정신적인 수련서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의 대표작인 <오디세이아>에서 구체화 되는데, 이 책을 쓰는 13년 동안, 그는 두 권의 프랑스어 소설인 <토다 라바>와 <돌의 정원>을 발표하고, 네 권의 여행서와 여러 권의 희곡 - <리디오 리디아>, 네 편의 대본, 과 40여편의 아동용 고전, 엘레프테루다키스 대박가 사전과 신문과 잡지에 지속적으로 기사들을 기고한다. 또 한편으로는 단테의 <신곡>과 괴테의 <파우스트> 그리고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시와 스페인의 서정 시인들의 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3년간의 긴 작업 끝에 완성한 <오디세이아> 이후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영국을 방문하고, 그리스가 나치에 점령되었던 기간 내내 에기나 섬에서 은둔하는 기간 동안 <그리스인 조르바>를 집필했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외르겐센의 <성 프란체스모의 생애> 등을 번역했다.

 

그는 1945년, 그이 작품을 완성하도록 늘 그와 함께 작업했던 문학작업의 동료였던 엘레니 사미우와 결혼했다. 그녀는 19세기 그리스의 계몽적인 과학자였던 아펠툴리스 교수의 손녀였다. 결혼과 동시에 그들은 영국문화원의 방문초청을 받아 영국으로 떠났는데, 이후, 1957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그리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1947년 유네스코 고전 번역부의 고위관직에 있기도 하였으며, 이후, 프랑스령 리비에라에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 앙티브에 정착하여, 여기에서 그의 후기 작품인 <수난>, <미할리스 대장>, <최후의 유혹>, <성자 프란체스코>와 그의 자서전인 <영혼의 자서전>을 집필했다.

 

1953년, 백혈병에 걸린 그는 사망할 때 까지 고통을 받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병원에서 하일마이어 교수에게 치료를 받았다. 그는 중국과 일본 여행에서 귀국한 직후인 1957년 10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책 <일본, 중국 기행>에서 그는 1930년데 중반의 일본의 군국주의적 팽창을 꿈꾸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는 모습에 어두운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이 책의 몇몇 장면은 그가 프랑스어로 쓴 소설 <돌의 정원>에 삽입되기도 하였다. 1958년에 발간된 <일본, 중국기행>4판 에는 에필로그가 추가되었다. 에필로그에는 카잔차키스의 마지막 노트, <20년 후>라는 제목으로 중국에 대해 글을 쓰겠다는 계획들이 담겨있다. 이 책에는 1957년 그의 부인인 엘레니 카잔차키스가 그 노트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달아서 그때의 정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려준다. 에필로그가 추가된 증보판으로 1962년 아테네에서 출판되었다.

 

1957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결코 짧지 않은 삶을 살면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그의 삶은 나이를 더해갈수록 점점 더 세상으로 나아가는 삶이었다. 그가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평가받는 이유이다. 활동가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사뭇 엇갈리기도 한다. 그는 민족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터키와의 뿌리 깊은 증오심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평가에서부터, 종교적 관념이 전혀없는 무신 괘변론자 라는 평가까지 다양하다.

 

문학적인 평가에서도 카잔차키스는 아마도 일반 독자의 평가와 문학평론가의 평가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작가일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500만부 이상 팔렸으며, 생전에 독자들과 긴밀한 소통을 유지했고, 다양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멘토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늘 실험적 언어와 새로운 문학 기법을 추구하였다. 그의 글은 쉽고 간결하며 이야기를 엮어내는데 주력하지만은 않았다. 늘, ‘자유’와 ‘민족’의식을 강조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도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줄곧 문학 비평가들과 독자들로 하여금 힐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르바’에서 보여주는 과다한 감정과 비논리적인 멜로구성, 키치적인 소재, 때로는 은근한 자아도취, 자기과시욕 등이 대체적인 비난의 내용이다. 그의 비종교적인 성향으로 인해 그의 문학은 ‘종교를 재료로 쓴 화재적인 소설’ 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문학적 논란을 덮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고전 탐독과 재창조능력에 있다. 모순으로 들리겠지만, 카잔차키스는 현대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작가라기 보다는 과거의 언어로 현재를 다시 불러들이는 주술의 작가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오늘날 동서를 막론하고 그가 많은 독자층을 갖고 있는 이유는, 그의 슬과 삶을 통해 우리의 무미건조해진 현대의 일상을 충만한 의미로 채우고 싶어하는 삶에 목마른 현대인들의 갈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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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3 17:35:12 *.226.201.43
그럼 세번 결혼한 셈이네요.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져요. 이런 남편과 아버지를 두었던 이들의 삶이 몹시 궁금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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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3 23:38:20 *.196.214.182

흐흐흐. 한번 이혼하고 두번 결혼한 셈이죠^^

그러게요... 저 또한 가족관계가 궁금합니다. 일단 가족관계에 대한 리서치를 한번 해보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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