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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3일 21시 58분 등록

난중일기

-.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 민음사, 2011

 

 

■ 저자에 대하여 - 이순신

 

1. ()을 숭상한 시대에 무()를 선택하다. (1545 ~ 1572)

 이순신은 1545(인종1) 4 28일에 서울 중구 건천동에서 이정(본관;덕수)과 초계 변씨 사이의 4 1여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백록이 중종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충을 겪은 후 아버지 정은 벼슬을 외면하고 살았다. 권력의 변방인이 된 아버지 이정은 아예 서울을 떠나 아내 변씨(본관;초계)의 친정이 있는 아신의 백암리, 현재 현충사가 있는 방화산 기슭으로 이사하였다.

 두 형과 함께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하던 이순신은 22세 겨울부터 무술을 익히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많은 비중을 두어 무예를 연마해 나갔다. 그가 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화에 연루되었던 가문의 배경과 장인 방진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학문에 전혀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그의 문장을 보면 학문도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강직한 성품으로 온갖 시련을 겪게 되나 그 안에서 단련되고 성장한다. (1573 ~ 1583)

 28세에 첫 번째로 무과에 응시한 이순신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4년 후에 다시 도전하여 병과 4등으로 급제하였고, 그해 12월에 한남 삼수 동구비보의 권관(요즈음의 소위)에 임명되었다.

 3년의 임기를 오지에서 보낸 그는 35세에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 봉사로 재직했다. 그는 공과 사가 분명하고 권력에 줄을 대거나 상관에게 아부할 줄 몰랐다. 그러한 강직한 성격은 그에게 온갖 시련을 가져다 준다. 어려운 시기에 당시 이조 판사였던 율곡 이이의 부름에도 같은 덕수 이씨 문중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렇듯 맑은 사람이어서 그에게는 어떠한 배경도 없었다. 함경북도 경원군의 권관에 다시 임명되어, 1583 10월에는 여진족 추장 울지내를 잡는 공을 세웠으나, 포상은커녕 알아주는 이조차 없었다. 오히려 이 일로 북병사 김우서의 모함을 받았을 뿐이다.

 

3. 인재를 알아본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되다.(1584 ~ 1591)

 1583 11 15일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변방에 고립되어 있는 그에게 이듬해 1월에야 부고가 전해졌다. 그는 곧 고행으로 돌아와 3년상을 치렀다. 탈상을 마치자 사복시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16일 만에 조산보(함경북도 경흥군)만호로 임명되었는데, 이 일은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입으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생기자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을 명 받는다. 첫 번째 백의 종군이었다.

 1588 1월 백의종군이 해제되었고, 6월에 서울로 돌아와 지내다가 이듬해 2월 전라감사 이광의 부름을 받는다. 군관 겸 조방장 자리였는데 이것이 상관에게 인정받는 첫 무대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정읍 현감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이 진도 군수로 발령 받은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 2월이었으나, 임지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가리포(완도) 첨사, 전라좌수사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승진의 단계를 무시한 이러한 발탁은 유성룡이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 13, 그의 운명과 나라의 운명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자리인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부임하게 된다.

 

4.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인간 이순신이었다. (1592 ~ 1597)

 47세 때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되어 왜의 침략에 대비, 병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제작한다.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이순신도 왕명에 따라 참전한다. 경상도 옥포ㆍ합포ㆍ적진포해전에서 왜선 수십 척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였고, 이듬해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공을 세우지만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중 원균이 죽고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다. 그리고 곧이어 치른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열세 척의 배로 왜선 백삼십여 척과 싸워 섬멸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1598년 퇴각하는 왜군을 맞닥뜨려 싸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그는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5. 저자에 대한 평가

 이순신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탁월한 전략가이자 온갖 고난에 맞서 지혜롭게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이다. 하지만 <난중일기>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공직에서는 엄격했지만, 가족에 대한 심정,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읽는 내내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매 장마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은 빠지지 않았으며, 직접 어머니를 찾아 뵙고 밤새 기쁘게 해드리는 그의 모습은 현재의 나를 고개 숙이게 했다. 자식에 대한 사랑 역시 여느 부모와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병약한 막내 아들 면이 왜구의 만행으로 죽자 창자가 끓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는 아비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1957 10 14)

 일반적인 사람들은 국가보다는 자신의 가족을 우선시 하지만, 그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나랏일이 먼저였다. 자신의 몸 역시 아끼지 않았다. 총탄에 맞아 제대로 치유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으로 전장을 지휘하였다. 또한 두 차례의 걸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자리에서 그저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이순신의 강인함은 그를 따르는 모든 부하들에게도 전해져, 혼연일체가 되어 적진에서 왜놈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사기열전을 보면, 적의 모함이나 조작한 소문에 의해 패전을 한 영웅들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외부에서 들리는 어떠한 소식에도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소문에도 듣고도 기뻐하기보다는,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면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였다.(1596 4 19). '왜적이 출물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에도 부화 뇌동하지 말 것을 강조하면서 소문을 퍼뜨린 자의 목을 베어 효시함으로써 동요를 가라앉혔다.(1597 8 25). 그는 전쟁에 있어서 심리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 중에 뒤에서 지휘하지 않고, 항상 선두에서 군사들을 독려했다. 명량해전에서 적선 133척이 우리 배를 포위했을 때, 대장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환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 대지만 여러 배들은 진군하지 않아 사태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겁에 질려 있을 있기에, 부드럽게 타이르며 '적이 비록 1,000천이라도 감히 곧바로 우리 배에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사력을 다해 적을 쏘아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뱃전에 서서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하고 다시 불러, '군법에 죽으려느냐, 물러가면 살 듯 싶으냐'라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전투에 임하였다.(1597 9 16)

 마지막으로 <난중일기>을 써 내려간 그의 문장력과 직접 지은 시조를 보면, 당대 어떠한 문인보다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꾸준히 일기를 적으면서, 전쟁에 임하는 자신의 의지를 바로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상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치밀한 전략을 구상했을 것이다. 이렇게 <난중일기>을 읽으면서 매일 쓰는 일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깨닫게 되었다.

 

6. 출저

 

난중일기(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서해문집, 2004)

평역 난중일기(이순신 원저, 김경수 편저, 행복한 책일기, 2004)

http://seungsek.wo.to/technote/read.cgi?board=apply&y_number=53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5 인류의 역사 변해도 만고 불변의 진리가 항상 존재하듯이 어느 시대든 이상적 사회를 위한 도리의 추구는 항상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은 국가의 보전과 민족의 안녕을 위해 올바른 의식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한 시대의 인물이 후대에 길이 기억 되어 존경을 받는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의 도리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우리가 오늘날 첨단 과학이 발달한 문명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4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나라를 위해 지대한 공을 세운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5~6 국난 극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가며 항상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로 전쟁에 임했으니, 전쟁 대비에 만전을 기한 결과, 왜란(1592) 발생 후 옥포해전을 비롯한 당포.한산도.명량 등의 해전을 지휘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에 대한 신속 정확한 대비와 파악으로 작전하는 모습에서 충무공의 철저한 유비무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6 난중일기란 바로 그 당시에 충무공이 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기록한 진중일기다. 임진년(1592) 1 1일부터 무술년(1598) 11 17일까지 7년 동안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6~7 충무공이 무관 출신의 장수로서 이러한 일기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문인적 기질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난중일기』는 그의 문력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한다.

 

10 그때 유성룡이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한다고고 천거하여 전라좌도수사에 임명하게 되었다.

 

10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에 부임하여 왜적의 내침에 대비하여 무기를 정비하고 거북선 제조에 착수, 왜구를 막기 위해 수군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해상과 육지전을 모두 대비해야 한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듬해 임진년(1592) 327일에는 새로 만든 거북선에서 대포를 쏘는 시험도 하였다. 드디어 4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은 20여 만 명을 동원하여 배로 대마도로부터 온 바다를 뒤덮고 몰려오는데 이를 바라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10 이순신은 임진년 5 7일 옥포해전에서 왜적과 첫 교전을 벌여 왜선을 분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후에도 승전의 기세를 잃지 않아 수년에 걸친 당포.한산도.명량 등의 여러 해전에서도 전공을 세울 수가 있었다. 무려 7년 동안의 일이었는데, 난중일기』란 바로 그 기간에 진영 중에 있으면서 기록한 진중 일기인 것이다.

 

10 곧 임진년 11일부터 무술년 1117일까지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날도 있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기록하였다.

 

11 이처럼 이순신은 항상 미리 대비하는 정신으로 생활하였다. 임진년부터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긴 일기는 물론 나중을 위해 개인적으로 작성한 비망 기록이지만, 내용을 주로 일신(一身)보다는 국가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11 항시 전투가 따르는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항상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에 수십 차례의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3 난중일기』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내용, 공문을 발송한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형한 사건, 장계를 올린 일 등이며, 그중에는 장계 초안 및 서간문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간간이 삽입되어 있다. (「임진.계사.갑오일기」)또한 공사간(公私間) 인사 문제와 가족에 대한 안부 걱정, 그리고 진중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고 한탄 등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간혹 시와 문을 지어 적기도 하였고, 예 시문과 병서를 인용한 글과 이순신 자신의 별호인 일심(一心)을 연습한 낙서도 있으며, 명나라 장수의 이름과 그들로부터 받은 물품 목록도 적혀 잇다.

 

14 정유년(1597)은 이순신에게 있어 고난과 아픔의 시련이 연속된 한 해였다. 그는 정유일기I」4 13일에서 모친의 상사(商事)로 매우 애통하여 다 적지 못하고 뒤에 대강 추록한다.”고 하였다. 제때에 글을 다 적지 못한다는 말에는 그 상시의 상황이 매우 급박함을 암시하고 있다.

 

15 노산 이은상은 『정유일기』에 대해 본시 충무공 자신이 왜 그렇게 다시 쓰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앞 책에 간지가 잘못 적혀 있는 것과, 또 내용에 있어서도 뒤의 것이 앞의 책보다 비교적 좀 더 많이 적힌 것 등을 보아, 혹시 공()이 시간의 여유를 타서 기억을 되살려 가며 새로 한번 더 적어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정유일기」의 필기상태만 보아도 유난히 심하게 흘려 잇거나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된 부분이 많다. 이는 당시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투옥되었다가 다시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는 중에 또다시 모친상까지 당한 악순환의 상황에서 기록한 것임을 짐작게한다.

 

21 정조는 임자년 윤음에서 우리나라를 재건하게 한 황은을 길이 생각하고 우리나라 충신에게 미치어 빗머리에 전자를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 “요즘 이충무유사를 읽으면 노량해전을 회상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다리를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을 하게 된다. (중략) 충무가 남긴 사적을 요즘 내각에 명하여 전서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활자로 인쇄되거든 그 한 본을 이 충렬사에 간직해 두면서 제사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32 조선의 문화는 그 연원이 매우 오래되었고 탁월한 것이 적지 않지만, 학술적 견지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편찬한 역사서 중에 볼 만한 것이 없다. 또 고기록, 고문서 기타 사료로 될만한 문헌류가 해가 감에 따라 인멸되어 가고 잇는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49 1일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51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쳤다. 우후, 가수가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 많다.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의 쇄석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52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안개비가 잠깐 뿌리다가 늦게 갰다.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이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 이몽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새 봄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54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사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는 일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우리나라가 일본과 더불어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하였으니, 그 흉포하고 패악함은 참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통사들은 이미 잡아 가두었다 한다. 해괴하고 분통함을 참을 수 없다.

 

55 순찰을 떠나 백야곶의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 부사 권준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성도 왔다. 비 온 뒤라 산꽃이 활짝 피었는데 빼어난 경치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저물녘에 이목구미에 가서 배를 타고 여도에 이르니 영주 현감과 여도 권관이 나와서 맞았다. 방비를 검열하였다. 흥양 현감은 내일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먼저 갔다.

 

55 늦게 출발하여 영주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던 영주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던 영주도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58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다행이다.

 

63 해 질 무렵에 영남 우수사가 보낸 통첩에, “왜선 구십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적 삼백오십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각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 병마사(최원), 우수사(이억기)에게 공문을 보냈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65 “큰 적들이 치열하게 몰아쳐 와 그 앞을 대적할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를 타고 마구 달리는 모양이 마치 무인 지경에 든 것 같다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지원해 달라는 일로 장계 올리기를 청한다고 했다.

 

69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려고 비내리듯 화살을 쏘아 대니,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왜장의 머리를 벤 것이 모두 일곱 급이고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로 올라가 달아나니, 남은 수효가 매우 적었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71 28일 맑음. 새벽에 앉아 꿈을 기억해 보니, 처음에는 흉한 것 같았으니 도리어 길한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

 

71 일본은 해중지역에 살고 있어서 비록 추운 겨울을 만나도 바람이 오히려 따뜻하여 장정들은 짧은 소매 옷만 걸치고 긴 옷에 겹주름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이제 흉적들이 오랫동안 남의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4풍토에 익숙지 않아 한겨울 추위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2 우리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다행인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운송하는 것이 모두 이 도에 달려 있고, 적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하는 것도 이 도를 위한 계책에 달렸습니다.

 

73 종사와 도성도 보전할 수 없게 되어 이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노라면 애통한 마음은 불에 타고 칼에 베이는 것 같습니다.

 

75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계책으로는, 먼저 전례를 따라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 한 다음 차츰 조사하고 밝히어 군사와 백성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이 가장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75 국가가 호남과는 마치 제나라의 거, 즉묵과 같은 것이니, 이는 바로 온몸에 폐질이 있는 자가 구원하기 어려운 다리 하나만을 겨우 간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83 얼마 후 진도의 상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는 짓을 말로 다할 수 없다. 매우 통분하다. 이 때문에 수사(원균)을 꾸짖었는데 한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원균)때문이다. 돛을 펴고 소진포로 돌아와서 잤다. 아산에서 놔와 분의 편지가 웅천 진영에 왔고, 어머님의 편지도 왔다.

 

86 온종일 비가 왔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87 포로로 잡혀갔던 사천 여인 한 명을 빼앗아 왔다. 칠천량에서 잤다.

 

87 아침 식사 후에 출항하여 사량으로 향했다. 낙안 사람이 행재소에서 와 전언하기를 명나라 군사들이 이미 개성까지 왔는데, 연일 비가 와서 길이 질어 행군하기가 어려우므로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서울로 들어 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88 저물녘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퍼부었다.

 

17 거센 바람이 종일 불었다. 우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모양이 형편없으니 우습다.

 

88 거센 바람이 종일 불었다. 우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모양이 형편없으니 우습다.

 

89 아래 관청에 내릴 공문

 

이제 섬 오랑캐가 일으킨 변란은 천고에도 들어 보지 못한 바이고 역사에도 전해진 적이 없는 일이었다. 영해의 여러 성들은 적의 위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졌으며, 각 진의 크고 작은 장수들도 모두 뒤로 물러나 움츠리고 산골의 쥐새끼처럼 숨어 버렸다.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연이어 삼경(三京, 평양, 개성, 한양)이 함락되었다.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가 풍진을 입어 이 년간 폐허가 되니……

 

89 약속한 일. 천고에도 들어 보지 못한 흉변이 우리 동방예의지국에 갑자기 닥쳐왔다. (그러나 인심이 견고하지 못한 상황에 왜적이 삼경을 함락하자,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적병을 겨우 근경에서 대하기만 해도 그들의 위세를 보고는 먼저 무너지니, 모든 군량을 나르는 길이 왜구를 돕는 밑바탕이 되어 버렸다.) 영해의 여러 성들은 적의 위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지니, 적이 석권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91 가뭄이 너무 심하고 강의 여울도 매우 얕아져 적에게만 도움 되는 형세이니, 천지신명께서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분한 마음을 품고도 할 말을 못하니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93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차라리 우선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을 늦추고 한 번이라도 휴가를 얻게 해 준다면 인심이 필시 이러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정예한 수군과 잡색군중에 자원하는 자를 모집하여 이들로 하여금 힘을 기르도록 휴가를 가게 하였고, 8월초에는 모두 거느리고 사또 앞에 달려가 지휘를 받으며 죽음으로써 결전하고자 합니다.

 

95 가뭄과 더위가 이토록 심하여 강여울도 매우 먙아져서 더욱 적을 도와주게 되었으니, 마침내 독한 왜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는 것은 촛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따름이며,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96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앞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쳐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까지도 차도가 없어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으니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98 그러나 교전할 때 스스로 조심하지 않아 적의 철환을 맞았는데,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일 값옷을 착용하여 헌 상처가 뭉그러지고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있으며, 밤낮을 잊고서 혹은 뽕나무 잿물로 혹은 바닷물로 씻어 보았지만, 아직 차도가 없으니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100~101 대선 일곱 척, 중선 다섯 척에 깃발을 잔뜩 곶고서 날뛰며 소리치고 있거늘, 이에 거북선으로 하여금 돌진케 하여 천자(天字), 지자(地字)총통을 연이어 쏘아 대고, 여러 배들이 동시에 함께 진격하여 화살과 탄환을 쏘기를 바람과 비처럼 마구 퍼부었습니다. 적의 무리가 후퇴하여 달아나다가 화살을 맞고 물에 빠졌는데, 혹 몸을 끌고 산으로 오르는 자가 부지기수이며, 왜군과 왜장의 머리를 많이 베었고 배는 남김없이 다 분멸하였습니다.

 

103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 나랏일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전라도에 새로 온 관찰사와 원수조차도 군관을 보내어 연해에 있는 수군의 양식을 쌓아 둔 곳간을 털어 싣고 가고 있습니다.

 

105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

 

106 떠나려 할 때쯤 발포의 도망간 수군을 처형했다. 순천의 이방에게는 급히 군무에 나아갈 일을 하지 않았기에 바로 회부하여 처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108 이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닭이 울고서야 선잠이 들었다.

 

108 그들에게서 피난간 임금님의 사정과 명나라 군사들의 소행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108 영남 우수사 원평중이 와서 술주정이 심하기가 차마 말할 수 없으니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의 거짓된 짓을 차마 말로 할 수 없었다.

 

108 아침에 낙안 군수 신호가 와서 만났다. 조금 뒤에 윤동구가 그이 대장 원균이 올린 장계의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의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09 영남 우수사가 군관을 보내 진양의 보고서를 가져와 보이니, 내용은 이 제독이 지금 충주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과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불어 마음이 또한 어지러웠다.

 

109 고성 현령이 군관을 보내 문안하고, 또 약술과 소고기 음식 한 꼬치와 꿀통을 보냈다고 한다.상중이라 받아 두는 것이 미안하지만, 간절한 심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되돌려 보낼 수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113 아침에 통역관 표헌에게 다시 오라고 청하여 명나라 장수가 행하려는 바를 물었다. 그런데 명나라 장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만 한다고 하였다.  

 

115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기에 병사의 공문을 통해서 나누어 보내라고 하니, 그는 공문도 내는 것을 심히 못마땅해하고 무리한 말만 많이 했다. 가소롭다. 명나라의 배신이 보낸 화공 무기인 화전 천오백서른 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니 그 잔꾀는 심히 다 말로 할 수가 없다.

 

115 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옆에 댔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하였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 수사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120 명나라 사람 왕경과 이요가 와서 수군이 얼마나 강성한지를 살폈다. 그들을 통하여 이 제독(이여송)이 나아가 토벌하지 않아서 명나라 조정으로 문책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과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개탄스러운 것이 많았다.

 

129 사도 첨사(김완)가 되돌아와서 하는 말이, “두치 나루의 적에 관한 일은 헛소문이고, 광양 사람들이 왜군 옷으로 갈아 입고 저희들끼리 서로 장난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순천과 낙안은 이미 분탕질당하였다고 하니 통분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저녁에 오수성이 광양에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광양의 적에 관한 일은 모두 진주와 그 고을 사람들이 그런 흉계를 짜낸 것이다. 고을의 창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마을은 텅 비어 종일 돌아다녀도 한 사람도 없으니, 순천이 가장 심하고 낙안이 그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130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134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들 염의 아픈 데가 종기가 생겨 침으로 쨌더니 고름이 흘러나왔는데, 며칠만 더 늦었어도 치료하기 어려울 뻔했다.”고 한다. 매우 놀랍고 한탄스러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생기가 났다고 하니, 당행임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의사 정종의 은혜가 매우 크다.

 

136 아침에 아들 회가 들어와서 어머님이 편안하심을 알게 되고, 또 염의 병도 나아진 것을 알게 되니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139 꿈에 적의 형상이 보였다. 그래서 새벽에 각 도의 대장에게 알려서 바깥바다로 나가 진을 치게 하였다. 해질 무렵에 한산도 안쪽 바다로 돌아왔다.

 

139 원 수사가 왔다. 음흉하고 속이는 말을 많이 했다. 몹시 해괴하다.

 

142~143 하나, 오랑캐의 근성은 경박하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하다.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결사의 마음을 품고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므로, 아군의(정예하게 훈련되지 않은)겁에 질린 무리들은 일시에 놀라 달아나니, 그래서야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할 수 있겠는가.

 

143 하나, 정철총통은 전쟁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작하는 묘법을 잘 알지 못한다. 이제야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 내어 조총을 만들어 내니, 왜군의 총통과 비교해도 가장 기묘하다.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사격을 시험하고자 잘되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음은 이미 그 묘법을 얻었기 때문이다. 도내에서는 같은 모양으로 넉넉히 만들어 내도록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려서 알리게 하였다.

하나, 지난해부터 변란이 일어난 뒤로 수군이 적과의 접전을 수십 차례나 자주 가졌는데, 큰 바다에서 교전할 때면 저 왜적들은 무너져 파괴되지 않는 적이 없었고, 우리는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143 나랏일이 다급한 날에

    누가 곽리의 충성을 바치리오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 이루려 함인데

    회복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네

    관산의 달 아래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신하들이여! 오늘 이후에도

    여전히 또다시 동과 서로 다투겠는가

 

144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내리는 데 마음을 다했는지의 여부를 기회와 사정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먼저 진격을 외쳐 서로 다투어 돌진하여 싸우게 되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처자를 돌아보고 살기를 탐하여 중도에서 빠지는 자가 있었고, 혹은 공로와 이익을 탐하여 승패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 들어 마침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몸을 죽게 하는 재앙을 만든 자가 있었다.

 

144 칼날 휘두르며 이르니 그 형세가 비바람과 같아 흉도의 남은 넋들도 달아나 숨고…..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하는 마음 그지없네.

 

145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145 사직의 존엄한 신령에 힘입어 겨우 작은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초월하여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지닌 몸이지만 세운 공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하였고, 입으로는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145 한창 명나라 군사의 거마 소리를 기다리느라 하루를 일 년같이 여겼지만, 적을 쳐서 무찌르지 않고 화친을 위주로 하여 우선 흉악한 무리를 퇴각만 시키고 우리나라가 수년 동안 침입 당한 치욕을 씻지 못했으니, 하늘에까지 미친 분함과 수치가 더욱 간절하다.

 

145 임금의 수레는 서쪽으로 가고 종사는 폐허가 되니 사방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기운을 빼앗기어 백성들의 희망도 절로 끊어졌다.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만 몸소 시석을 무릅쓰고 나아가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어서 몸을 바쳐 나라에 은혜를 갚으려는데, 지금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46 유기는 문에 땔나무를 쌓아 두고는 파수꾼에게 경계하기를, “빠져나가다가 불리해지거든 즉시 내 집을 불사르고 적의 손에 들어가게 하지 말라.”

 

151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두 명이 원 수사의 진영에서 와서 적의 정세를 상세히 이야기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152 저녁에 종 허산이 술병을 훔치다가 붙잡혔기에 곤장을 쳤다.

 

153 어머니의 편지와 아우 여필의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천만다행이다.

 

160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는 것이었다.

 

171 술이 세 순배 돌자 원수사가 거짓으로 술 취한 체하고 광기를 마구 부려 무리한 말을 해 대니, 순무어사가 그 괴이함을 이루 다 말하지 못했다. 원수사가 의도하는 것이 매우 흉악했다. 삼가 현감이 돌아갔다.

 

176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멍하기가 취중이고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176 비가 종일 걷히지 않았다. 아들 회가 바다로 나간 것이 걱정된다.

 

179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180 저녁에 겸사복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내용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예전의 폐습을 모두 바꾸라.”는 것이었다. 통탄하는 마음 어찌 다하랴.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하면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182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가는데 이별하는 심회가 그윽하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정을 스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183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했다. 또 아내의 언문 편지에는 아들 면이 더위 먹은 증세로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마음이 애타고 답답하다.

 

188 유 상(柳相,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음이 순변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유 정승으로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다. 이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 상이 만약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189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되어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유 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한 것이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189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삼대처럼 내리니 지붕이 새어 마른 데가 없어서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점괘에서 얻은 그대로니 참으로 절묘하다.

 

195 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 여자들에게 떡과 음식물을 이고 오게 한 일로 경상 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을 처벌했다.

 

197~198 원수(권율)가 정오에 사천에 와서 군관을 보내 대화를 청하기에 곤양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무르는 사천 현감(기직남)의 처소로 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간의 인사를 마치고서 함께 이야기 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었다. 원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가소로웠다. 가지고 간 술을 마시자고 청하여 여덟 순을 돌렸는데, 원수가 몹시 취하여 자리를 파하였다.

 

200 아침에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보냈다.

 

200~201 이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201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였다.

 

202 새벽에 비밀 유지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삼 년 동안 해상에서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다만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 때문에 가볍게 나아가지 않을 뿐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위태롭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205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 보니,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눈앞으로 달려와서 멈췄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흔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구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상이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이는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207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 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첫 점은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는 것이었고, 다시 점을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208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자리 잡고서 나오지 않았다. 누각을 높이 세우고 양쪽 봉우리에 보루를 쌓고는 조금도 나와서 항전하려 하지 않았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육지로 내려가 도망쳤다. 빈 배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칠전량에서 밤을 지냈다.

 

211 새벽 꿈에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면서 육혈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쳤다. 말을 전해 준 자는 그 이름이 김 서신이라고 하는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한 꿈이었다.

216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음양이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라고 할 만하다.

 

219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 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219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222    쓸쓸이 바라보며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흐르네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누구에게 능히 평정을 맡기리오

        배를 몰던 몇 해의 계책은

        이제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 몰아낸 곽자의 사모하네

 

        비바람을 몰아치는 밤

        마음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슬픈 마음은 쓸개가 찢기고

        쓰라린 가슴은 살을 에는 듯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흐르네

        쓰라린 가슴은 쓸개가 잘리고

        슬픈 마음은 살을 에는 듯

        산하가 참혹한 빛을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태평세월 이백 년에

        화려한 문물은 삼천 가지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평정을 맡길 인재 없도다

        여러 해 바다 막을 계책 세우노라니

        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을 몰아낸 곽자의 사모하네

 

227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237 전라좌도에 있는 왜적의 형세와 투항한 왜군이 보고한 내용을 전하였다. 그 내용은 풍신수길이 삼 년 동안 군사들을 내보냈지만 끝내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내어 바다를 건너와 부산에다 진영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3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했다.”는 것이었다.

 

245 아침에 원수(권율)의 계본과 기, 이씨 두 사람의 공초(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같은 원수의 지위에 눌러앉을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일기초)

 

250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부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뛰어넘어서 분에 넘쳤다. 몸이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251 탐후선이 오지 않아 어머니의 안부를 알 수 없었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났다.

 

255 오늘이 권언경 영공의 생일이라고 해서,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도 몹시 취했다. 거문고 소리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256 내일은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이신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일기초)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57 “나라의 재앙이 참혹하고 원수가 사직에 남아 있어서 귀신의 부끄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온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사한 기운을 재빨리 쓸어 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는 분통함을 모두 절감하고 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가 팔을 걷고 절치 부심하며 그놈의 그 살을 찢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하여진 진을 치고 잇는 장수로서 조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도리에 어긋난 말을 지껄이는가. 또 누차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높여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호, 강화하자는 말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 까지 들리게 해서 치욕을 끼치고 사이가 벌어지게 했음에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도다.

 

258 김응서란 어떠한 사람이기에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만약 쓸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263 저녁에 표신을 가진 선전관 이광후가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원수가 삼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곧장 적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밤새도록 이야기하였다.

 

267 군사 오천사백여든 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저녁에 상봉에 올라 적진이 있는 곳과 적이 다니는 길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바람이 몹시 험하게 불었다. 밤을 틈타 도로 내려왔다.

 

270 북방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했더니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

    한잔 술 오늘 밤 달빛 아래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의 슬픈 정만 남으리

 

279 아버님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혼자 앉아서 그리워하는 생각에 품은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288 항복한 왜인 다섯 명이 들어왔기에 온 연유를 물으니, “저희 장수가 성질이 포악하고 일을 부리는 것이 고되어 도망 나와 투항했습니다.”라고 했다.

 

288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쳤더니, ‘군왕을 만나 본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와 모두 길한 괘라고 기뻐하였다.

 

289 이날 바람이 자고 날씨가 따뜻했다. 이날 저녁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없었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번잡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홍수를 불러서 피리 부는 소리를 듣다가 밤 이경에 잠들었다.

 

294 초저녁에 어란 만호가 견내량의 복병한 곳으로부터 와서 보고하기를, “부산의 왜놈 세 명이 성주에서 투항한 사람을 거느리고 복병한 곳에 와서 장사를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장흥 부사에게 전령하게 내일 새벽에 가서 보고 타일러 쫓으라.”고 하였다. 이 왜적들이 어찌 물건을 팔고자 하겠는가. 우리의 허실을 엿보기 위한 것이 틀림없다.

 

309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종일 퍼부어 잠시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저녁 내내 수루에 기대었는데 품은 마음이 점차 언짢아졌다. 머리를 한참 동안 빗었다. 낮에 땀이 옷을 적셨는데 밤에는 옷 두 겹이 젖고 다시 방바닥까지 흘렀다.

 

312 아침에 암행어사가 들어온다는 기별을 들었기에 수사 이하 모두가 포구로 나가서 기다렸다. 조붕이 와서 만났다. 그 모습을 보니 오랫동안 학질을 앓아서 무척 야위었다. 매우 안쓰러웠다. 늦게 암행어사가 들어와서 내려앉아 함께 이야기하다가 촛불을 밝히고 헤어졌다.

 

313 이날 아침에 남녀문을 통해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 말은 벌써부터 퍼졌었지만, 아직은 확실한 기별이 오지 않았다.

 

317 초저녁 무렵 총통과 숯을 넣어 둔 창고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 이는 감독관들이 새로 받은 숯을 쌓을 때 조심하지 않고 묵은 불씨를 살피지 않아서 이러한 재난이 있게 한 것이다.

 

328 새벽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쏜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삿갓을 발로 차서 부순 것은 삿갓이 머리에 써야 할 것이나 발로 걷어채인 것이니, 이는 적의 괴수에 대한 것으로서 왜적을 모조리 무찌를 징조라 하겠다.

 

329 어두울 무렵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많이 벌였다. 장수된 자로서 좌시할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마당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330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둑들이 도발하여 홍산 현감 윤영현이 붙잡히고, 서천 군수 박진국도 끌려 들어갔다고 한다. 바깥 도둑도 아직 없애지 못했는데, 안의 도둑들이 이러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331 이날 아들 회가 방자 수에게 곤장을 쳤다고 하기에 아들을 뜰 아래에 붙들어다가 잘 타일렀다.

 

334 맑았으나 동풍이 세게 불었다. 아들 회가 면, 조카 완 등과 함께 아내의 생일에 헌수잔을 올릴 일로 떠나갔다. 정선도 나가고 정사립은 휴가를 얻어서 갔다. 늦게 수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느라 몸 상하는 줄도 몰랐다. 늦게 대청으로 나가 활 몇 순을 쏘다가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활 쏘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오니, 몸은 언 거북이처럼 움츠러들기에 바로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냈다. 저물녘 경상 수사가 와서 문병하고 갔다. 밤의 통증이 낮보다 배로 심하여 신음하며 밤을 보냈다.

 

341 종일 노를 바삐 저어 이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려 마음을 풀어 드렸다.

 

341 어머니 곁에서 모시고 아침밥을 올리니 기뻐하시는 빛이 가득했다 늦게 하직을 고하고 본영으로 왔다. 유시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하였다.

 

342 남방산에 함께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한도의 요충지다. 그렇지만 이곳은 형세가 지극히 외롭고 위태롭기에 부득이 이진으로 옮겨 합하였다. 병영에 도착하였다. 원 공의 흉악한 행동은 여기에 적지 않겠다.

 

344 아침 식사에 쇠고기 반찬이 올랐는데 나라 제삿날(세조의 제사)이라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346 이중익이 군색하고 급하다는 말을 많이 하므로 내 옷을 벗어 주었다. 종일 이야기 했다.

 

346 저물녘 관청에 이르니 두 조카딸이 나와 앉아 있어서 오랫동안 못 본 회포를 풀었다. 다시 작은 정자로 나와서 현감, 여러 조카들과 함께 밤이 깊도록 이야기 했다.

 

356~357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보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찌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361 아침에 둘째아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열의 음은 열()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362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되는 천애의 땅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받는 것인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에도 같은 것이 없을 터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364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니, 이는 곧 원수(권율)의 명령이었다.

 

364 원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78 내가 들어가 보니 원수는 원균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데, “통제사(원균)의 일은 흉악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소. 그는 조정에 청하여 안골과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 어떤 마음이겠소? 일이 끌어 미루고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에 불과한 것이오.

 

390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399 아마도 밤의 습격이 있을 것 같았다. 이경에 적선이 포를 쏘면서 밤에 습격해 오자,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먹은 것 같으므로 다시 엄하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연거푸 포를 쏘니 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하고 삼경에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400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려 이백여척의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잇는 곳으로 향해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상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 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하고 말했다.

 

401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 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고 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과 교전하는 사이를 곧장 들어가니, 적장의 배와 다른 두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고, 안위의 격군 일고여덟 명은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니 거의 구할 수 없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 대고 내가 탄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대어 적선 두 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404 , 슬프도다. 그때가 어느 때인데, ()은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 했던가. 인신이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다른 길은 없다.

 

415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어머님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불편해하였다.

 

416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고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18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라고 말하였다.

 

418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당 마다시입니다.”라고고 말했다. 내가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었다.

 

424 사경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에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은 형상이 보이는 듯하다가 깨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424~425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보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두 글 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하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425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이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435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진(지 전쟁 진터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진에서의 용감함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법에도 경(, 원칙)과 권(, 방편)이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고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권도를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446 나의 임무는 곧 각 장병들이 배를 통솔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으니, 각 관병들은 격분하여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곧장 왜선에 돌진하여 불태우고 여남은 척을 끌어냈는데, 왜적은 산성 위에서 총포가 이미 다하여 관병이 승리하였다.

 

448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의 왜교의 적들이 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먹자.”고 하였다.

 

449 왜의 중간 배 한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다.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는 인간 이순신의 일기다.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일기의 형태는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글을 적고 있다. 누군가 나의 일기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정작 써야 할 이야기는 남겨 두지 않는 것이 나의 일기다. 하지만, 그는 세부적인 감정까지도 담아냈다. 가족의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동료에 대한 불만까지도 기록했다.

 이순신은 이러한 일기를 쓰면서 매일 전쟁에 임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또한, 기상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면서 치밀한 전략을 구상하고 필요한 물자를 생각했다. 꿈과 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앞으로 발생되는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까지 철저히 했다. 이렇게 그는 글을 쓰면서 모든 감정을 다스리고, 전쟁을 성실히 준비했다.

 내가 만약 저자라면, 과연 전쟁 중에 이순신 장군처럼 매일 일기를 썼을까?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 현재 독자의 입장에서 편안하게 그의 일기를 읽었지만, 일기를 쓰고 있을 당시를 생각하면서, 나도 똑같이 일기를 쓴다면 매일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감정들만 나열되지 않을까. '저자라면'이라는 생각보다 앞으로 저자가 되기 위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는 그의 습관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 안에 나의 특별한 꿈과 그에 대한 생각들도 채워가야겠다.

 현재 내가 몸 담고 있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식품안전 전문가라고 하지만, 단순히 발생되는 일에 대한 처리에만 급급하다. 업무기록 또한 전무하다. 매일 일상의 업무를 일기처럼 기록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작성해보면 어떨까? 새로운 전문영역을 발견해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난중일기>가 개인의 일기지만, 역사적인 가치는 엄청나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밝혀준 등불이었으며, 일기에 담겨진 그의 정신은 한민족의 열정을 상징하고 있다. 단지 일기를 남기는 것에 대한 의미보다는 일상의 느낌들을 적으면서, 하루 동안의 내 생활을 반성하고 긍정적인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쓰면서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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