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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3일 22시 11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충무공 이순신은 소위 "난세의 영웅"이라는 보편적 양식에 적합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의 대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어깨에 홀로 매고 전진한 자이다. Power of one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이끌어내었기에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영웅이 느낀 부담감과 고통, 그리고 떨치고 일어나는 용기와 의지를 보게 되면 영웅은 겉이 아닌 안에서 정의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1545년 태어났다.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찍 두 형을 여읜 까닭에 이순신은 그 식솔들도 모두 거두어 들이며 장남 역할을 하였다.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는데 세 아들이 전쟁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전쟁 놀이를 좋아하였으며, 동네에서 같이 자라 후에 재상이 된 류성룡에 의하면 평소 대장 되기를 희망할 정도로 꿈이 당찬 사람이었다. 그와 류성룡의 관계는 임진왜란 당시 중추적 네트워크였으며, 이 두 사람이 공존하며 서로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에 대전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성(京城)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종(成宗) 때 사람 이거의 자손인데, 직사(職事)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천거했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 1 27일 기사 중에서

 

 

그러나 이순신의 무관 데뷔는 늦은 감이 있다. 그는 28살 때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는데 시험에서 말에서 떨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미 낙마로 낙방이 확실시되었지만 그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상처 부위를 묶고 나머지 시험을 치러내었다. 이 일화는 이순신이 한 차원 높은 가치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32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로도 10개월이 다 되도록 보직을 받지 못했으나 미련하리만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했다. 얼핏 보면 어리석고 아둔하게 여겨질 수 있을 만큼 약은 구석이 없다. 이런 고지식함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특성으로 왜 그가 영웅적 행적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그와 동시에 그의 융통성 없음은 많은 이들의 질투와 시기를 야기하였다. 특히 같은 무사로서 해전에 참전하여 협동해야 할 원균에 대해서 이순신은 원칙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원한을 품었으며 마침내 그가 백의종군하게 되는 빌미로 작용하였다. 원균과의 갈등은 난중일기에서도 주요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균을 평가절하하면서도 그가 왜적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우면 매우 기쁘다는 표현을 쓰고 있을 정도로 사적인 감정을 투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쪽같이 한결 같은 품성도 사람 간의 관계에서는 약점으로 작용될 수 있다. 실제로 이순신은 원균 이외에도 중상과 모략을 끊임 없이 받았고, 그 때마다 뜻 있는 의로운 자들에 의해서 겨우 겨우 위기를 모면하곤 하였다.

 

이순신의 탁월한 인품을 드러내는 수많은 일화 중, 결정적인 것은 그가 백의종군 상태에서 왕의 명을 받고 기꺼이 인솔권을 받은 것이다. 중국 역사의 여러 인물을 다룬 사기열전에서는 왕에게 사랑받다가 좌천되었던 영웅들이 다시 부름을 받게 되었을 때에는 병을 핑계로 종사에 관여하지 않는 수동적 복수를 행하는 것을 매우 많이 볼 수 있다. , 자신이 옳고 자신이 인재임을 알아봐주지 못한 세상을 탓하며 스스로 세상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대의를 보았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돌보지 않고 민족을 먼저 생각하였다. 영웅이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영웅의 업적을 이루어낼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 위기는 결국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벗어날 것인 것, 벗어나지 않을 것인가? 이순신은 사사로운 것을 무시하고 큰 그림을 봄으로써 위기를 위기로 만들지 않았다.

 

두 번째 일화는, 명량 해전의 일화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대패하여 조선의 해군은 상황이 매우 열악하였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에서 당장 사용 가능한 배가 12척이었으며 국가에서도 사실상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이순신에게 육군으로 종군하라고 명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승전을 예고하며 전투에 임하였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위기의 리더십이다. 전투에 나서기 전 이미 새파랗게 질린 군사들을 독려하고 다독이며 용기를 심어준다. 그의 탁월한 전략은 용기의 근거가 되어 더욱 자신감 있게 전투에 임하게 하였다.

 

p.447 이순신은 완전한 승산이 서기 전까지는 절대로 적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장계에 표현된 만전지계이다. 승전이 확실할지라도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고려했다. 그러나 일단 작전이 수립되면 철저히 강력한 공격으로 백전 백승의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 나서기 전에 왕에게 했던 말처럼 승리를 확신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난중일기에서 명량 해전 이후, 이는 하늘이 내려주신 행운이다- 라고 기록하며 감격해 하였다. , "완전한 승산"이 있는 게임이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12척의 배를 끌고 나갔던 것은 이 전투가 국가의 명운이 걸린 반드시 치뤄야 하는 숙명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순신이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기습공격이 우려되는 가토 기요사마의 함대 공격을 하지 않은 것, 그리고 원균의 부산진으로 군사를 보내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이순신은 전투의 성격과 상황을 면밀히 파악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전해야 하는 전투에는 과감히 칼을 뽑았다. 그는 우리 쪽의 피해도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되는 부산포 해전에서 다른 장수들이 공격을 꺼리고 있을 때 "조선 수군이 만약 여기서 적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물러서면 적은 틀림없이 조선 수군도 별 수 없다며 멸시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공격을 주장하였다. 이 전투에서 30명이 사망하고 논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여 이순신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이 해전 이후 왜군은 서진 전략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강철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난중일기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중압감으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로 얻은 병으로 신음하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에서 참된 영웅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순신이 배설이나 기타 많은 장군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려움과 공포에 잠식되지 않고 떨치고 일어난 것, 그리고 사사로운 억울함보다 나라의 대의를 먼저 생각한 것에서 진정한 영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난중일기

 

 

è 충무공과 윈스턴 처칠의 비교?

 

19 공무를 하찮게 여기고, 제 몸만 살찌우려 들며 이처럼 돌보지 않으니, 앞날의 일을 알만 하다.

 

23 이날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è 거북선에 대한 첫 언급

 

27 흐리다.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에 북쪽 봉우리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까아지른 외딴 섬인지라 사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무척 근심이 된다.

è 유비무환

 

31 몸이 불편하여 아침 내내 누워 앓다가 저녁 나절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è 상당히 오랜 기간을 아파한다. 막중한 책임과 시대의 심각성이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난 것도 있겠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할까? 땀을 많이 흘리고 코피를 쏟은 것을 보면 백혈병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평상시에 전투복을 벗지 않았다는 점, 몸이 아플 때에도 열을 내어 땀을 빼는 것을 치료로 생각했다는 점, 코피를 쏟을 때 극히 심한 스트레스 요인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다.

 

36 10시쯤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장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40 먼동이 틀 때 출항했다.

è 시적 표현

 

41 화살을 맞은 자는 헤아릴 수 없었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했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è 자신의 증상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일기에 쓰다.

 

43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서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è 우수사 이억기가 배를 몰고 나타났기 떄문에

 

52 이렇게 큰 적을 맞아 무찌르는 일로 모인 자리에 술에 만취하여 이렇게 되니 그 인물됨이야 말로 다할 수 없고 원통하고 분함을 이길 수가 없다.

è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것을 대단히 경계한다. 일기 내내.

 

65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나라를 위해 걱정이 많은 중에 일마다 이러니 더욱 한심스러워 눈물이 흘러내렸다.

 

68 "송시랑이 수군의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정탐병 양보를 보냈는데, 수군이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한이 없다"고 했다.

 

82 바다 위의 달을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는구나

물과 하늘이 한 가지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갑자기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때리누나

è 이순신의 시적 감각, 문학적 소양

 

83 "두치 나루의 적의 일은 헛소문이요, 광양 사람들이 왜놈옷으로 갈아입고 저희들끼리 서로 난리를 일으켰다"고 말하니 원통하고 분함을 이길 수가 없다.

è 힘들다고 적으로 별하는 "창의성"에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91 몸이 몹시 불편해서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이경복에게 장계를 지니고 가라고 내보냈다.

 

102 아침밥을 먹은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이라도 떠난다는 뜻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è 대단한 어머니

 

104 전윤이 "수군을 거창으로 붙잡아 왔는데 듣기로는 원수사가 방해하려 한다"고 말하니 우습다. 예전부터 이렇게 남의 공을 시기했으니 한탄해도 어찌하겠는가.

 

105 영남 우수사 원균이 군관을 보내어 "경상좌도에 있는 왜적 300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고 보고했다. 정말 기쁜 일이다.

è 원균 자체에게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뻐할 일에는 진심으로 기뻐함.

è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대의만 본다.

 

107 저물녘에 비가 오더니 밤새 내렸다. 전투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è 저무는 시간대, 비에 상관없이 전투배 만드는 일정을 그대로 진행시킨다.

 

109 또 어떤 미인히 홀로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è 꿈에서도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è 악마는 항상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111 그에게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들었는지, 백성들이 굶어서 서로 잡아 먹는다고 하는데 앞으로 어찌하면 살 수 있을지" 물었다.

 

112 작은 이익을 보고 공격하다가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기회를 엿보아서 무찔러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117 그 패문을 가져와서 보니, 명나라 도사 담종인이 '왜적을 치지 말라'고 한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했다.

 

123-124

우수사(이억기), 경상 수사(원균), 충청 수사(구사직)가 함께 왔다. 술잔이 3순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은 일부러 술에 취한 척하면서 미친 듯 날뛰며 억지소리를 해대니, 순무어사도 무척 괴이쩍어 했다. 그 의도하는 바가 심히 의심쩍다.

 

129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정신이 아득하기가 취하여 꿈속에 있는 듯하니 멍청한 듯도 하고 미친 듯도 하다.

 

132 비가 오다. 충청 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서 돌아갔다. 소비포 권관도 왔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마음은 오죽 답답하랴.

 

135 김산과 그 처자 등 3명이 돌림병으로 죽었다. 세 해 동안이나 눈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사람들이 하룻저녁에 죽어 가다니 몹시 참혹하다.

 

143 '재상 류성룡이 죽었다는 부음이 순변사(이일)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고 했다. 이것은 류 재상을 시기하는 자가 그를 비방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 것이니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이날 저녁에는 마음이 몹시 어지러웠다. 홀로 텅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속 생각을 스스로 이길 수가 없었다. 근심 때문에 더욱 괴로우니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류 재상과 뜻이 맞지 않는다면 나랏일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151 원균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균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했다. 우습다. 가지고 간 술을 마시자고 청해서 8순배를 돌렸다. 원수사가 몹시 취해 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니 박종남과 윤담이 와서 보았다.

è 원균에게 이순신은 라이벌로서 평소 열등의식을 조장할 것이다. 그런 대상이 혼을 내니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앙심을 풀었을 것이다.

 

152 활을 쏘았다.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었다.

è 난중 일기의 (주관적으로 뽑은) 압권 best 5

 

153-154 이날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판가름 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라의 사적이 이 지경이니 다른 일은 생각할 수 없다.

 

155 새벽에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기만 하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는 임금의 밀지가 들어왔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었는데 그럴 리는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적이 험하고 수비가 견고한 곳에 굳게 막아 자키고 있으니 경솔히 나아가 칠 수 없는 것 뿐이다.

è 선조는 이순신을 믿지 못함. 믿음의 미덕.

 

159 새벽에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지만 비는 잠깐 그쳤다.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 냈다. 꿈에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오다가 눈앞에 와서 주춤 섰는데,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났지만 나만은 우뚝 서서 끝까지 그것을 구경하니 참으로 장쾌했다.

è 혼자 비전을 보는 외로움

 

170 저녁에 윤련이 왔는데 그의 누이동생이 보낸 편지를 가져 왔다. 그 편지에는 망녕된 말이 많아 우스웠다. 버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부모를 잃은 아이 셋이 끝내 기대어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밤의 달빛이 낮과도 같으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뒤척이다 밤을 샜다.

 

175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무심결에 눈물이 흘렀다.

 

181 내가 홀로 바라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남들에게도 보게 했지만, 남들은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사이에 그 용은 벽 사이로 들어와 그림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즐거이 감상하는데 빛과 형상이 움직이니 이채롭고 웅장하다 할 만했다.

 

186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3년 동안이나 군대를 내보냈지만 끝내 효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내어서 바다 건너 부산에 진영을 설치하려고 한다. 3 11일 베다를 건너 오기로 벌써 정해졌다'는 투행해 온 왜놈들의 말을 전했다.

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첫 언급

 

195 아침에 원수(권율)의 계본과 기씨와 이씨 등 두 사람의 공초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도 없이 망령되게 아뢴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그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런 지경인데도 원수의 지위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괴이한 일이다.

 

201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붓는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을 뿐인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서는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엥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 있을 뿐이다.

è 자아 성찰에 엄격함

 

204 저녁에 원수의 군관 이희삼이 '조형도가 수군 한 사람에 양식 5홉씩, 7홉씩이라고 거짓으로 꾸며 장계를 올렸다'는 임금의 교지를 받들고 이곳으로 왔다. 인간의 일이란 참으로 놀랍다. 천지에 어지 이처럼 속이는 일이 있단 말인가.

è 의로운 분노

 

208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다. 슬픈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저녁나절에 활 10순을 소고, 또 무쇠로 만든 철전으로 5, 편전으로 3순을 쏘았다.

è 효의 감상에 젖지만, 상관없이 수련할 것을 계속한다.

 

209 그런데 그대는 적과 마주 진치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의 명령도 없이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도리를 벗어난 말을 지껄이고 또 몇번이나 사사로이 편지를 통하여 적의 기세를 높이고 적에게 아첨하였을 뿐더러, 수호/강화의 이야기가 명나라에까지 미쳐 부끄럽게 하여 사이를 갈라놓음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도다.

è 선조의 경상 우병사(김응서)에게 내린 교지 타인에게 내린 교지의 내용을 지나치게 정확하게 알고 있다. 어찌된 까닭일까? 선조가 전쟁 통에 번민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런 영향이 이순신에게도 미쳤을 듯.

 

217 저녁 나절에 나는 김응서와 같이 촉석루에 이르러 장병들이 패전하여 죽은 곳을 보았는데, 비통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223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같이 하더니

오늘 밤 이 달 아래서 술 한 잔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져야만 하리

 

226 일찍 새로 지은 다락에 올라가 대청에 흙ㅇ르 바르는데, 그 일을 투항해 온 왜놈들에게 시켰다.

 

236 몸이 불편하여 밤새 신음했다. 거제 현령(안위)와 안골포 만호 우수가 와서 "왜적들이 물러갈 뜻이 없는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하응구도 왔다.

è 신체화 증상

 

237 맑다. 바람이 세게 불다.

è 단 한 줄의 일기. 시적이다.

è 명료한 장군의 의식과 상황의 위급함이 절묘하게 대비된 듯하다.

 

243 새벽2시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어느 한곳에 당도하여 영의정(류성룡)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동안 둘 다 의관을 벗어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다가 끝내는 가슴속에 품고 있던 억울한 사정까지 토로했다.

è 지음.

è 처음부터 자신의 억울한 사정부터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다움.

è 류성룡이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었다.

 

247 순찰사가 나와 활쏘기를 겨루다가 7푼을 졌는데, 무안스러운 빛이 없지 않았으니 우습다. 군관 3명도 모두 졌다. 밤이 되자 술에 취해 돌아가는 우스웠다.

è 평소 갈고 닭은 실력

 

250 적량 만호 고여우가 큰 매를 팔에 얹고 왔는데 오른쪽 발가락이 모두 얼어 비틀어졌으니 어찌하겠는가. 저녁 9시쯤 잠깐 땀을 흘렸다.

è 이순신의 형상화. 고매한 동물인 매이지만 겨울을 맞아 지금은 발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 발로 주인의 팔에 앉아 있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253 이날 밤 달빛이 낮과 같고 물결 빛은 비단결과 같았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들 수가 없었다. 하인들은 밤이 다하도록 취하여 노래를 불렀다.

è 위기 속에서 예술적 정취 감상

 

253 봄날의 나른한 기운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è 때는 전쟁이건만 봄은 여전히 찾아온다.

 

259 새벽 3시쯤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밥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만나 다시 그 잘못된 부분을 말하니 우수사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리하여 술자리를 만들고는 매우 취하여 돌아갔다.

è 진심어린 사과에 대한 너그러운 용서

 

262 논하지 않아도 될 일을 감히 하는 듯하니 몹시 한스럽다.

è ???

 

268 이날 아침 난에몬에게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뻐서 뛸 지경이지만 아직 믿을 수는 없다. 이 말은 일찍부터 퍼져 있었지만 아직 정확한 기별이 온 적은 없다.

è 1598 9월에 사망하였으므로 거짓이다.

 

277 새벽꿈에 태어난 지 대여섯 달밖에 안 된 어린 애를 몸소 안았다가 내려놓았다.

è 소중한 것을 다루다.

è 최근에 우리나라 역사를 읽었다.

è 자신이 잘해낸다면 민족의 역사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지나친 확대해석?

 

283 샙겨꿈에 어떤 사람이 먼 곳으로 화살을 쏘았다. 또 어떤 사람은 발로 갓을 차서 부수었다. 스스로 이 꿈을 점쳐 보니 멀리 활을 쏜 것은 적이 멀리 달아나는 것이고, 발로 갓을 부순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발로 찼으니 이는 적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모두 왜적을 소탕할 징조이다.

è 꿈의 해석처럼 해석하고 있다. 징조가 아니고 자신의 욕망이라는 점만 다르다.

 

292 새로이 갠 하늘의 달빛이 아주 밝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땀을 흘렸다.

 

296 종일 노를 바삐 저어 밤 10시쯤에 어머니 앞에 이르니, 어머니께서는 흰 머리카락이 무성하신데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신다. 숨쉬는 기력이 매우 약하니 아침저녁을 보전하기가 힘드시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밤새 위로하며 기쁘게 해 드렸더니 그 마음이 풀어지셨다.

è 정말 엄청난 효자다.

 

곁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침 진지를 드시게 하니 대단히 기뻐하시는 빛이다.

è 난 낯 간지러워서 결코 못할 짓이다.

 

311 (옥에서 풀려난 후)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니 마다할 수가 없어 억지로 마시고 매우 취해버렸다. 영공 이순신이 술병째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 류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이상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è 그만큼 많은 이들이 이순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311 새벽꿈이 매우 어지러워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덕이를 불러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을 불러 이야기 했다.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 취한 것도 같고 미친 것도 같아 마음을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이란 말인가. 편찮으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느라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을 보내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314 홍 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갯바위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가슴 찢어지는 듯한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è 참 안타까운 광경. 아들의 옥고 때문에 마음을 상한 어머니의 죽음.

è 이순신은 자신이 옥에서 나와 사람들을 만날 때의 심경은 덤덤하게 그리면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자세히 그리고 있다.

è 영웅의 서사시에서 위기에 해당하는 부분.

 

315 비는 퍼붓는데 나는 기력이 다한 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울부짖으며 다만 어서 죽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 천지에 나 같은 운명이 어디 또 있으랴!

 

322 신홍수가 와서 보았는데 원균에 대한 점을 쳤더니 첫 점괘가 수뢰둔인데 천풍구로 변했으니 그 쓰임이 본체를 이기는 것이어서 매우 흉하다.

è 그 쓰임이 본체를 이기는 것 : 실존주의적 냄새가 난다. 어떤 사상에 근거를 둔 것일까? 궁금.

 

325 안팎이 모두 외물의 많고 적음을 따져 죄의 경중을 다진다니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흔히 하는 말로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혼도 살아나게 한다'는 것인가.

 

328 비가 오다. 아침에 출발하려 했으니 비가 이렇게 오니 쭈그려 앉아서 걱정하고 있을 때 흥양에서 도원수 군관 류흥이 와서는 길이 더나지 못할 정도라고 해서 그대로 계속 묵었다.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 먹었다는 말을 듣고 종들을 매로 때리고 나서 밥 지은 쌀을 돌려주었다.

è 매우 엄격한 윤리.

 

332 아들 열과 이원룡을 불러 책을 만들어 변시(이순신의 어머니와 할머니 집안인 초계 변씨) 집안 족보를 쓰게 했다.

 

335 아침에 초계 군수가 연포탕을 마련하여 와서 권하는데, 오만한 빛이 많이 있었다.

è 이순신이 눈치 챈 그 온만함은 어떻게 드러났을까?

 

336 새벽에 순천의 종 윤복이 인사를 하기에 곤장 50대를 때렸다.

è ??? 이렇게만 봐서는 전혀 알 수 없다.

 

343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고 전했다. 이를 듣고서 통곡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원수(권율)가 와서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오전 10시까지 이야기를 했으나 뜻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바닷가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 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매우 기뻐했다.

è 칠천량 해전

è 이순신의 대응 방법. 직접 보아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정보 수집의 중요성을 알고 있음. 적극적으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상황 타개를 위해 노력함.

 

344 경상 수사(배설)은 도망가 보이지 않고,

è 공포심에 지다.

 

347 이날 밤 꿈에 명을 받들 조짐이 있었다.

è 사기에서는 한 번 좌천되고 나면 다시 부를 때,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이순신은 기꺼이 명을 받들 준비를 하고 있다.

 

350 일찍 출불하여 낙안군에 이르렀더니 관사, 곳간의 곡식, 병기가 모두 불타 사라졌다. 관리와 고을 백성들이 눈물 흘리지 않고 말하는 자가 없었다. 점심밥을 먹고 길을 떠나 10리쯤 되는 곳에 이르니 길가에 노인들이 줄지어 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쳤다. 받지 않으려 하니 울면서 억지로 준다.

è 백성들이 이순신을 따르기가 이와 같았다.

è 이순신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일기에는 언급이 없다.

 

354 새벽에 관란이 일어나 몹시 아팠다. 몸이 차가워서 그런 걸로 여기고 소주를 마셨더니 얼마 뒤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밤새 앉아서 날을 샜다.

è 아파서만 술을 거하게 마신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고통스러우리라. 상황의 부담감.

 

358 "오늘밤 반드시 야습이 있을 것이니 각 장수들은 미리 알고 그것에 대비하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에 따를 것이다." 거듭 밝혀 타이르고 끝냈다.

 

361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맡아 지키면 1000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지금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각각의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을 어긴다면 곧장 군율에 따라 다스려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è 12척의 배로 왜군을 무찔러야 하는 상황

 

364 이번 일은 실로 하늘이 주신 행운이다.

è 명량해전에서 이긴 후에. 겸허하게 받아들임.

 

370-271 막내아들의 꿈.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다 해도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까! 너를 따라 죽어 함께 통곡하고 싶지나 너의 형과 누이, 어미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참고 연명하고 있으나, 내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아 울부짖을 따름이다.

 

372 저물녘에 한 되도 넘게 코피를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을 하다가 눈물이 흐르니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이승에서 영혼이 되어 마침내 불효가 여기까지 으를 줄을 어찌 알았으랴! 비통한 마음 찢어지는 듯하여 억누를 수가 없다.

è 스트레스로 혈압이 올라 코피가 터진 것 같기도 하고

 

377 이날 자정쯤 꿈에 아들 면의 죽음 모습을 보고는 통곡했다.

 

382 고기반찬의 하사

è 오히려 더욱 슬픔. "마음이 비통하다."

 

390-391 여러 물건을 받은 기록

è 전쟁을 본격화 하기 위해서 군수물자를 모으는 것 같다.

 

이순신의 생애

 

403 그 가운데서도 조선술/항해술/함재화포/해전술에 이르기까지 해군의 종합적인 전통을 세운 사람은 국난을 한 몸으로 막아낸 이순신 장군이다.

 

410 이순신은 한 발로 일어서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긴 뒤 상처 부위를 묶고 나머지 시험을 마쳤다. 비록 낙방했으나,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è 이순신의 성품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

 

415- 416 질투와 시기는 끊이지 않았다. … 그 즈음 전라도 도사인 조헌이 붓을 들고 있다가 기꺼이 쓰지 않으며 "이 아무개가 백성들을 통솔하고 군사를 다스리는 것에서는 전라도에서 으뜸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비록 다른 여러 진을 하하에 둘지언정 이 아무개의 등급을 깎아내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해서 마침내 그만두었다.

 

418 적들이 달아나는데 이순신이 이운룡과 함께 뒤쫓아가 사로잡힌 우리 군사 60여 명을 도로 빼앗아서 돌아왔다. 이날 이순신도 오랑캐 화살에 왼쪽 넓적다리를 다쳤으나 부하들이 놀랄까 싶어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아버렸다.

 

420 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태인현 현감까지 겸하게 되었다. 이때 태인은 오랫동안 현감 자리가 비어 있어 처리되지 않은 공문이 쌓여 있었는데 이순신은 이를 단시일 안에 처리했다. 그러자 태인현 백성들은 아에 이순신을 태인현감으로 임명해 달라고 상소까지 올렸다.

 

436 그 당시 국법에는 적군의 목으 베어 온 자에게만 상을 내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목을 베는 대신에 적을 쏘아라! 적의 목이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을 명중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힘써 싸우는 것은 내가 똑똑히 보고 있다."

444 왜선이 그런 모양새를 이루자, 조선 수군은 재빨리 뱃머리를 돌려 마치 학의 날개처럼 왜군을 좌우에서 에워쌌다. 이것이 바로 학익진 대형이었다. 학익진법은 고도로 훈련된 정예함대만이 펼칠 수 있는 작전으로 기동성은 놀라웠다. 영국의 전 해군 중장 발라드는 이순신 함대의 기동성에 대해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 기동이 아주 간단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잘 훈련된 해군 장교만이 이 작전을 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446 영국의 전쟁 역사가인 헐버트는 이렇게 감탄했다.

"이 해전은 한국에서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본 침략군에게 사형 선고를 낼니 것이었다."

 

447 이순신은 완전한 승산이 서기 전까지는 절대로 적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장계에 표현된 만전지계이다. 승전이 확실할지라도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고려했다. 그러나 일단 작전이 수립되면 철저히 강력한 공격으로 백전 백승의 전투를 수행했다.

 

448 그런 적을 공격하려면 조선 수군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다른 장수들은 부산포에 깊이 들어가 공격하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원균/이억기에게 "조선 수군이 만약 여기서 적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물러서면 적은 틀림없이 조선 수군도 별 수 없다며 멸시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독전기를 높이 올렸다.

 

452 피란민으 모두 이곳으로 모였고, 외딴 섬이던 한산도는 바다의 요새가 되고 조병창이 되었다.

 

454 1596 10월 이순신은 어머니를 한산도로 모시고 와 생신잔치를 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다시는 살아서 어머니를 뵙지 못했다.

 

455 이때 이순신은 염병에 걸려 병세가 자못 위중했지만 오히려 하루도 눕지 않고 예전처럼 사무를 보았다. 이런 부담과 갈등, 병으로 아픈 몸에 더해서 한 뜻으로 왜적을 무찔러야 할 원균과의 반목의 수위도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원균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전략을 세우고 작전을 펼쳤으며, 조정으로 자신의 주장을 아뢰는 장계를 써서 올리기도 했다.

 

456 싸움을 어떻게든 피하고자 화친을 드러내놓고 떠들어대는 asudsk라 군의 압력, 선조의 조선 수군에 대한 큰 기대, 원균과의 반목 등 사면초가 속에서 이순신은 어쩔 수 없이 거제도 장문포로 출전하게 된다.

 

457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따랐지만 바닷길이 험난하고 일본 수군의 복병에 의한 기습공격을 경계해서 군사작전을 신중히 결정했다. 이에 조정은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왜군함대를 요격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하고 그 이유로 이순신에게서 수군통제사란 직책을 박탈하고 옥에 가두엇다. 이는 왜군 첩자 요시라의 간계에 말려든 모함이었다.

 

458 이 즈음 선조는 이순신아 발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어떻게든 이순신을 제거할 궁리를 하고 있었던 차에 왜군의 간계는 선조의 결정을 앞당기고 계획을 추동할 수 있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è 임금 역시 소인배였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에 더 큰 우선순위를 두었다.

è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였을 때, 그가 협조적이지 않게 되는 순간 가장 큰 적이 된다.

 

459 우의정 정탁의 상소문

è 이순신을 적극 옹호하고 싶지만 선조의 마음을 거스릴까봐 적당히 옹호하고 있다. 이런 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니.

 

462 칠천량 해전에 대한 설명

è 이 해전에서 원균은 전사하였으나, 난중일기에는 그 내용이 없다. 원균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거나 언급을 회피할 정도로 싫었거나. 그러나 이순신의 성품으로 보아 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è 원균의 그릇이 너무 작아 이순신의 강직함을 자신에 대한 위협과 멸시로 느끼고 그에게 해꼬지를 해온 것이다.

 

466 선조의 편지(이순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다시 싸워줄 것을 요청함)

è 선조가 사람을 보는 눈이 없음

è 이순신의 드라마를 보면서, 어르신들이 가장 짜증내던 부분이다. 왜 우리나라 역사에서는(비단 우리 나라 역사의 특성은 아니겠으나) 끊임없이 의심하고 남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특히 임금 된 자가 가장 충성스럽고 능력있는 신하를 경계하는 것을 보고 실망들을 많이 하시더라.

 

467 이순신이 전선을 수습할 때 조정에서는 수군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뒤 육지로 올라가 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이순신은 이 명령을 받은 그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해서 하여 싸우면 기필코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는 굳은 결전의지가 담긴 장계를 올려, 수군의 폐지를 결단코 반대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전선 12척으로 왜군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것은 무모한 선택이었다.

è 안타깝고 미안한, 그리고 대단히 감동적인 어록

 

467 그 동안 왜군에 대한 심한 공포감으로 괴로워하던 경상 우수사 배설이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최고위 지휘관이 전쟁터에서 적군에 대해 겁을 먹고 달아난 것은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고, 군졸들의 사기는 크게 위축되었다.

 

469 때마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왜군은 조류 때문에 뒤로 밀려났고 상황은 한순간에 반전되엇다.

 

474 명나라 군사의 횡포 때문에 그 처벌 권한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한 이순신

 

476 이순신이 이 싸움이 마지막 싸움이 도리 것을 알고 있었다. 명나라 도독 진린은 '천문을 살폈더니 동방의 대장별이 희미하게 빛이 바래고 있다'며 이순신에게 제갈량처럼 하늘에 기도할 것을 권한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è 왜 전사하였는가? 여기에 대해서 책에서는 섣부른 해석을 하지 않고 있지만, 이순신의 반역을 걱정했던 선조가 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이순신은 반드시 누명을 쓰고 살해당하며 3족이 멸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므로 자신이 전쟁터에서 죽음으로써 영웅으로 추대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이를 주변의 정세에 밝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닐 수도 있고) 그의 죽음에 대한 논란은 그의 사후 직후부터 이어지던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자살이 아니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 의견들이 많이 나온다.

 

476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라.

이순신은 이 유언을 남기고 54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과연 동방의 대장별이 바다에 떨어졌던 것이다. 적을 섬멸할 마지막 싸움의 절정에서 그는 숨을 거두었다. 이 죽음을 안 사람은 회와 완, 몸종 김이 세 사람뿐이었다.

è 많이 회자되어, 오히려 코믹한 소재로도 쓰이는 어록. 그러나 정황 설명과 함께 들으니 눈물이 흐를 만큼 감동적이다. 그 전쟁통에서 장군을 가리는 방패를 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 애가 끓을 것이다.

 

477 진린은 통곡하다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세 번이나 쓰러졌다.

 

478 선조는 이때 내린 제문에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시킨 것이 자신의 험루임을 밝힌 뒤 이순신이 전사한 것에 대한 깊고 간절한 유감을 나타내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481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며 싸웠던 여러 해전에서 보이는 전술의 비결은 계속적인 상황 판단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척후를 사방에 파견해서 끊임없이 적의 동태를 살피고 아울러 이에 대처할 작전을 치밀하게 꾸몄다. 그는 평소에는 물론, 잠자리에서도 지휘할 때 쓰는 북을 베고 선잠을 잤으며 군복을 벗어 본 일이 없다.

 

 

 

 

 

 

 

 

 

 

 

 

 

 

 

 

 

 

 

 

내가 저자라면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왜 썼을까?

 

이 일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조 25(1592) 조선을 침략하던 당시에 쓰여지기 시작하여 충무공이 전사하기 이틀 전까지 쓰여진 것이다. 일기는 1 1일에 쓰여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한 것이 4월이므로 3개월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를 보았을 때, 일본 침략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군비를 정비하고 있던 이순신은 1 1일을 맞아 전쟁 전의 일지를 써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일지에는 목적이 중요하다. 충무공이 일지를 공개할 목적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상당히 솔직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또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는 쓰여있지 않다. 가령, [1596 3 9일 개(여종의 이름)와 같이 잤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그저 취해서 대청에서 엎어져 자면서 옆에 같이 여종도 있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성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설령 후자라 하더라도 당시의 분위기가 종과의 관계가 용납되는 상황이었다면 이를 일기에 쓰는 것에 그리 거리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일화 중, 정읍현감 시절 전라도 도사 조대중과 주고 받은 편지가 수색 대상으로 압수되었을 때, 금부도사는 이순신을 위해 그 편지 내용을 뽑아버리려고 하였다. 이순신은 "그 편지는 서로 안부를 묻는 것뿐이었고. 설사 그것 때문에 내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이미 수색한 물건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사사로이 뽑아 버리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오."라고 말했다. 만약 이순신은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 난중일기가 수색당할 가능성을 아주 배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동시에 비슷한 상황에 대해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난중일기는 "큰 무리가 안가는 선에서 솔직하게" 쓴 일기일 것이다.

훗날 난중일기의 편찬 사업에서 일부 삭제된 내용이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은 정국을 비판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사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일기라 할지라도 언급을 자제하였다. 그가 처음 옥에서 풀려나와 일기를 쓴 것을 보면, 자신을 배알하러 온 사람들을 열거하고 그들이 자신에게 연거푸 술을 권하였다는 내용만 있을 뿐 심회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다만 그 후 며칠 동안 어머니의 부고 등 악재가 겹치면서 심경을 토로할 명분이 생기자 폭발적으로 비운을 한탄한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 윤리관에 맞춰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은 여과없이 표현하지만, 아내가 아플 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짤막한 언급만이 있을 뿐이며 심지어 정세가 이러하니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쓰기도 하였다. 그가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일기에서조차 사사로운 감정의 표현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노라 버나클과 주고 받은 편지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것은 시대의 반영이기도 함과 동시에 사람의 인품이 드러냄과 드러내지 않음의 윤곽선을 그린 것으로, 독자는 그 그림자 놀이를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일기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모닝 페이지와 비교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순신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도 상세히 써두었다. 징조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경우에는 그 내용도 같이 써두었다. 그의 내면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장군이 거의 전쟁 와중에도 거의 매일 같이 일기를 썼다는 점이 큰 귀감이 된다. 모닝 페이지를 작성하는 사람들에게 이순신의 존재는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을 것 같다. 그가 매일 활을 쏘고 일기를 썼듯이 나 역시 매일 의학을 공부하고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이순신에 대한 사견 덧붙여,

 

1. 전쟁 속에서 윤리적 감성을 무디게 하지 않고 유지하였던 것이 신기하다.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전쟁에 익숙해지면 쌓여있는 시체를 보아도 무상해지게 되며 탈감작 상태가 된다.

 

2. 이순신의 성품에 대한 열등감. 무서울 정도다. 비교 하면서 일주일 내내 우울하였다. 내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동시에 그 고지식할 정도의 정바름에 답답함을 느꼈다. 마치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면서 온 몸을 긁게 되는 것처럼.

 

3. "죽으려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공을 생각하는 자는 얻지 못할 것이고, 생각하지 않는 자는 얻을 것이다."

 

4. 충무공 이순신은 최고의 영웅이지만 그만큼 회자가 많이 되어 정작 실존은 공중으로 붕 - 떠버린 느낌이 많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를 피부로 만난 듯했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나는 결코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나 역시 나만의 방식과 철학으로 대업을 이룰 수 있기 바란다. 사람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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