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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4일 03시 03분 등록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고정일 역해 /동서문화사


한산도 야음(夜吟)  -이순신-


한 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저자에 대하여 1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8월 을사사화 일어났음.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1576년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1590년(선조 23)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밑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였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亂中日記)》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 충렬사 팔사품(통영 충렬사 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저자에 대하여 2

을사(乙巳年, 1545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이 해에 인종이 왕위에 올랏다. 인종은 8개워란에 세사응ㄹ 떠났다. 이어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미 무오년, 갑자년, 기묘년에 잔혹한 사화가 중앙 정치무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개혁과 수구, 훈구와 사림은 공존못할 적대관계로 부딪혔다.


16세기 사림 지식인들의 마음 속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와 도학적 정의의 길은 선명하게 보였다. 아름다운 길이었고, 피에 젖은 길이었다. 그 시대는 선명히 보이는 그 길로 걸어갈 수 없엇다. 그 시대는 그 분명한 길로 현실을 몰아갈 수 엇었다. 현실과 가치 사이에서 지식인의 세상은 피마다가 되엇다. 김종직, 조광조의 문하는 모두 도륙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산천에 유랑했다.

이순신이 태어나던 해에 을사사화가 있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외었다. 이순신의 아버지 정은 벼슬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유년은 가난했다.

소년시절에 충남아산으로 주거를 옮겼다. 아산은 이순신의 외가 마을이었다. 이주 동기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서울에서의 생활고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산시절, 소년 이순신의 영웅적 덕성과 언행이 이분(李芬, 이순신의 조카)이 지은 <행록(行錄)>에 전한다.


병자년(丙子年 1576년) 공의 나이 서른둘

이해 2월에 식년무과에 급제하고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권관(종팔품)으로 부임했다. 이순신의 최초의 공직생활은 육군 초급 장교로서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엣 시작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 장교시절 이순신은 <함경도 일기>라는 진중일기를 남겻다. 초서체로 쓰여진 이 책은 지금 아산 현충사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매일매일 진중일기를 쓰는 그의 기록정신은 말년의 <난중일기>까지 이어진다.


경진년(庚辰年 1580년) 공의 나이 서른여섯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만호(종팔품)로 부임했다. 최초로 수군의 초급 지휘관이 되었다.

발포진은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이다. 발포는 전라 좌수영(여수0휘하의 다섯 개 해안기지 중의 하나였다.


병술년(丙戌年 1586년) 공의 나이 마흔둘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전근했다. 이때 이순신의 품계는 종사품이엇다. 이듬해 이순신은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녹둔도는 함경도 경성군의 북쪽 끝 두만강 어귀의 작은 섬이다. 여기는 여진족과 대치하던 요새였다.

함경도 국경에 근무하던 때, 이순신은 적장 율지내와 그의 무리들을 유인작전으로 생포했다.


경인(庚寅年, 1590년) 공의 나이 마흔여섯

이순신에 대한 인사발령은 극심한 파행을 보엿다. 1589년 연말에 이순신은 정읍 현감(종육품0에 임명되엇다.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590년 7월에 이순신은 고사리진의 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엇다. 병마첨절제사는 육군의 일선 지휘관으로 종삼품의 자리였다. 시간원은 이 임명에 반대했고, 이순신은 부임하지 못햇다. 이순신의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 반대의 한 이유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이순신은 정삼품으로 승진되어 만포진 수준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시간원은 다시 반대했고, 이순신은 다시 부임하지 못햇다. 발령은 취소되었다.

1591년 2월에 조정은 이순신을 진도 군수로 발령했다. 사간원은 반대했다. 이순신은 부임하지 못햇다. 조정은 이순신을 가리포 수군첨절사로 변경 발령했다. 사간원은 또 반대했다. 이순신은 부임하지 못햇다.

이 혼란스런 인사 파행은 조선 대신들 간의 권력투쟁과 당쟁의 여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공의 나이 마흔일곱

이해 2월 13일,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정삼품0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여수 좌수영에 부임했다. 좌수사는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역 사령관이었다.

이순신이 부임한 뒤 많은 배를 새로 만들었고 또 거북선을 건조하였으므로 임진년 개전 때의 좌수영 수군 무력은 이보다 훨씬 더 강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조선 조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의기미를 감지하고 있엇다. 조선조정은 일본 정권의 핵심부에 직접 닿는 정보의 선이 없엇다. 통신사 두절된 지는 이미 백년이 넘었다.

1590년 3월에 보낸 통신사 3명이 1591년 3월에 복명햇다. 복명의 내용은 엇갈렷다. 황윤길은 일본이 독 쳐들어올 것이니 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햇다.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같은 대전쟁을 수행할 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보고했다. 조정은 김성일의 보고를 따랐다.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김성일은 동인이엇다.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에게 말한다.

“나는 싸우면 지는 일이 없고, 치면 빼앗지 못하는 일이 없다. 나는 명나라로 쳐들어가서 명나라 4백여 주를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바꾸고 억만 년쯤 일본제국의 정치를 시행하려 한다. 먼 나라의 작은 섬이나, 뒤늦게 따라오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공의 나이 마흔여덟

4월 12일에 여수 좌수영에서 거북선에 올라 총통을 시험발사했다.

4월 13일 전쟁은 시작되었다. 일본 전함 7백여척이 부산포에 내습.

4월 14일 새벽 5시부터 적들은 상륙작전을 개시.

4월 14일 부산이 함락.

4월 15일 동래성이 무너졌다.

4월 17일 기장, 양산이 무너졌다.

4월 18일 언양이 무너졌다.

4월 19일 김해가 무너졋다.

4월 28일 신립은 충주 남한강에서 대패. 조선군의 방어선은 완젆 붕괴.

4월 30일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향했다.

5월 2일 서울이 함락.

5월 4일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함대는 첫 번째로 출전.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함류.

5월 7일 이순신은 옥포만에서 적선 26척을 전명시켰다.

5월 8일 적진포에서 적선 11척을 격파.

5월 9일 함대는 좌수영 모항으로 귀환했다. 좌수영에 돌아와서 이순신은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이 의주로 피난간 사실을 알고 통곡. 임금의 환도는 의주에서 서울까지 10개월이 걸렷다. 환도 행차는 전선의 진퇴를 따라 이동했으므로 많은 시간이 걸렷다. 피난길에서 임금은 지방관아나 지방 관리들의 집에 기거했다.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 피난 조정의 대궐이엇다.


옥포만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이었고, 최초의 승전이었다. 적을 향해 돌격할 때 이순신은 실전 경험이 없는 장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햇다.

“너희는 경거망동하지 마라. 너희는 태산과 같이 진중하라.”


5월 29일 새벽 판옥전선 23척으로 다시 출정.이 싸움에서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

5월 29일 사천 선창에서 교전 중 이순신은 왼편어깨에 적탄을 맞앗다. 총알은 관통되어 등으로 뚫고 나갔다.

그 무렵 류성용에게 본ㄴ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싸울 때 스스로 조심하지 못하여 적의 탄환을 맞았습니다. 사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뼈를 깊이 상했습니다.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으니, 상처가 곪아서 진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바닷물로 씻어내고 늘 뽕나무 잿물을 바르고 있지만 아직도 쾌차하지 못해 민망하옵니다. 징변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백성들은 다투어 달아나고 있습니다. 민심의 흩어짐에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것을 무엇으로 수습하리까.


또 이분의 <행록>은 이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날 공은 적탄을 맞았다.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 공은 활을 놓지 않고 계속 독전하엿다. 싸움이 끝난 뒤 칼끝으로 살을 쪼개고 탄환을 꺼냈다. 깊이가 두어 치였다. 사람들의 공의 부상을 알고 놀랐다. 공은 웃고 이야기하며 태연하였다.....”


7월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을 점령하고 눌어붙어 있었다. 고니시가 이주의 조선임금에게 편지를 보냈다. 류성용의 <징비록(懲毖)錄>에 이 편지를 전한다.

  “일본 수군 10만이 또 서해를 건너오고 있소이다. 알 수 없구나! 대왕의 수레는 이제 또 어디로 가려는가.”


계사년(癸巳年 1593년) 공의 나이 마흔아홉

7월 14일 한산도로 수영을 옮겼다. 수영을 옮기던 날 몸이 많이 아팠다. 이보다 며칠 전에 군율은 행주산성에서 크게 이겼다.

8월 1일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전라, 경상, 충청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수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1593~ 1594년에 이르는 2년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갓다. 2년 동안 흉년이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엇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공의 나이 쉰셋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원균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을 체포하기 직전 조저에서 벌어진 어전 회의에서 임그9선조0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하고 있는가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이순신을 용서할 수는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해군의 선봉을 갈아야겟다.

이순신을 털끝만치도 용서할 수 없다.(선조실록 1597년 1월 23~1월 27일)


3월 4일 이순신을 압송하는 함거는 2월 26일 한산도를 떠나 3월 4일 서울에 도착햇다.

3월 13일 선조는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렷다.

조정은 이순신의 혐의를 이증하지 못햇다. 이순신은 한 차례 고문을 받고 4월 1일 출옥해서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4월 13일 백의종군의 남행길에 모친상을 당했다. 

7월 16일 원균의 하대는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햇다. 조선 전함 3백 척 이상이 깨어졌고, 사도 수군은 전멸되었다. 경상해안 일대가 다시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우너균, 이억기, 최호가 전사햇다.

7월 23일 조정은 상중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9월 16일 이순신은 명량에서 크게 이겻다. 전선 12척으로 적의 배 330척과 맞섰다. 적선              33척이 깨어졌고, 나머지는 도주햇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면이 충남아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햇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공의 나이 쉰넷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엇다.

2월 17일 고금도로 진영을 옮겻다. 철수하는 적의 주력 쪽으로 바싹 다가가려는 이동이엇다.

7월 16일 전린이 지휘하는 명 수군 5백여척이 고금도로 들어와 이순신 함대와 합류했다.

11월 19일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졋다.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 (김훈소설 <칼의 울음>에서 발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반드시 죽으려는 자는 살고 반드시 살려는 자는 죽는다’ 명량으로 나아가기 직전에 이순신이 쓴 휘호의 내용이다. 명량에서 이순신은 죽음을 거슬러서 삶에 닿는다. (김훈)


****<난중일기>의 의의

  이순신은 단순한 무장만이 아니라 정치가이며 외교가, 과학자 또한 탁월한 문학가였다. 그가 남긴 시와 문장, 장계, 편지 등 어느 한 가지도  그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귀한 것은 임진왜란 7년 동안 전쟁 중에 기록한 일기이다. 이순신 사후 200년이 지나서 정조 때 이순신의 시문과 저작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행적과 관련 문서들을 집대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충무공전서>이며, 그 속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난중일기>이다.

이 난중일기는 7년 1604일의기록으로 생사를 다투던 전쟁 중의 일기이다. 그 내용이 이순신의 진중 생활과 국정에 대한 솔직한 기록, 비밀스런 군사 계책,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안부 기록, 부하들의 상벌 기록 등 광범위한 기록이어서 임진왜란 전체 역사를 연구할 때 가장 정확한 사료가 되면서도 그 문장이 간결하고도 진실해서 충효신의의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글이다.(고정일 글 중에서)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문장들

<임진년 3월>

**** 3월 28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부를 보았다.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모조리 다 맞고 2순은 4번 맞고, 3순은 3번 맞았다.

참고)5순은 25발인데, 그 가운데 25발을 맞췄고, 2순은 10발로 그 가운데 4발, 3순은 15발로 그 가운데 3발을 맞췄으니 모두 50발 가운데 32발을 맞췄다는 뜻임.(32P)


<계사년 2월>

*****2월 22일: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샛바람이 세게 불다. 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하므로 출항해서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멎는 듯하므로 재촉하여 옹천에 이르러 삼혜와 의능 두 승장(僧將)과 의병 성응지를 제포로 보내어 곧 뭍에 내리는 체하게 하고 또 우도의 여러 장수들의 배들도 시우너치 않은 배들을 골라서 동쪽으로 보내어 곧 뭍에 내리는 체하게 했더니 왜적들이 허둥지둥 도망친다. 이 틈을 타서 모든 배를 몰아 곧바로 무찌르니 적들은 배 2척이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갑자기 들어가다 얕은 곳에 좌초되어 공격을 받은 것은 참으로 원통하고 분하다. (54P)


<갑오년 6월>

***6월 11일: 맑다. 더위에 쇠라도 녹을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갔다. 작별하는 마음이 근심스럽다. 텅빈 추녀 아래 홀로 앉아 있으니 그 심정을 이겨낼 길이 없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더 심해지니 근심이 더해졌다. 층청 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서 함께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오래도록 앉아 있다가 헤어졌다. (136P)


<갑오년 7월>

***7월 13일: 비가 오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떤지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임금을 뵙는 것과 같다는 점쾌가 나왔다. 매우 길하다. 다시 쳐보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것과 같다는 점괘가 나왔다. 두 점쾌 모두 길하니 마음이 약간 편해졌다.

또 류재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점쾌가 나왔다. 다시 쳐보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점괘가 나왓다. 매우 길하다. 비가 저녁 내내 내렸다. 홀로 앉은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비가 내릴지 갤지를 점쳤더니 뱀이 독을 토해내는 것과 같다는 점괘가 나왓다. 앞으로 큰 비가 내릴 듯하니 농사일이 매우 걱정된다. 밤에 비가 퍼붓는 듯이 내렸다. (143P)

☆☆☆어떻게 점을 쳤는지 궁금하다. 주역을 보고 쳤을 것 같다.


<갑오년 8월>


***** 8월 30일: 원균수사의 하는 일이 매우 해괴하다. 나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니, 천년을 두고서 한탄할 일이다.<154P>


<갑오년 9월>

****9월 3일 : 비가 조금 내렸다. 새벽에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설 바라보기만 하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는 임금의 밀지가 들어왓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았는데 그럴 리는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나날을 보내고 잇지만 적이 험하고 수비가 견고한 곳에 굳게 막아 지키고 있으니 경솔히 나아가 칠 수 없는 것 뿐이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은 어지럽지만 안으로 구해낼 길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밤 10시쯤 마침 홍양 현감이 내가 홀로 앉아 있음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155P)

☆☆☆초등학교 때 이순신의 시 중 ‘긴 칼 옆에 차고 홀로  앉아 ....이렇게 시작하는 시가 있었다.  그 시가 문득 생각나다. 일인자는  고독하고 슬슬하고 외롭다.


*****9월 20일 : 새벽에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지만 비는 잠간 그쳤다.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 냈다. 꿈에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오다가 눈앞에 와서 주춤섰는데,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났지만 나만은 우뚝 서서 끝까지 그것을 구경하니 참으로 장쾌햇다. 이것은 왜놈들이 화친을 구걸하다가 자멸할 것을 나타내는 조짐이다. 또한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름을 받을 조짐이다. (159P)

☆☆☆이순신은 꿈을 잘 꾸고 꿈풀이도 잘하고, 꿈이 잘 맞다. 예언력과 예지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활쏘기를 통해서 정신수양과 집중력 훈련을 했을 것이고(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어떤 사람보다도 예지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 해상 전투에서도 통찰력이 있어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을미년 3월>

****3월 23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세 조방장 및 우후와 함께 걸어서 앞산 봉우리에 오르니, 삼면에서 바라보이는 앞이 막히지 않고 길은 북쪽으로 트여 있다. 과녁을 세우고 자리를 닦고 거기에 앉아 있다가 종일토록 돌아올 것을 잊었다. (188P)


***3월 27일: 맑다. 밥을 먹은 뒤에 우수사(이억기)가 이곳에 와서 종일 활을 쏘았다.(189P)


***3월 28일: 맑다. 활 10순을 쏘았다. 저녁나절에도 사도 첨사가 와서 “각 포구의 병부를 순찰사의 공문에 따라 각 포구에 직접 나누어 주었다.”고 보고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189P)

☆☆☆이순신은 장군의 위치에 있는데도 날마다 활쏘기를 한다. 이러한 연마가 있어서인지  전투에서 이순신의 활은 백발백중이었다. 가수 조용필도 날마다 노래를 연습한다고 했다. 아마추어는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면 만족하는데, 프로는 최고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실력을 연마하여 향상시킨다. 이것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점인 아닌가 싶다. 안주하면 바로 추락이고 멸망이다.


<을미년 5월>

***5월 15일 :궂은비가 그치지 않아 아주 가까운 거리도 분간할 수 없다. 새벽에 꾼 꿈이 어수선했다. 어머니 소식을 못 들은 지 이레나 되니 속이 타고 걱정된다. 조카 해가 잘 갔는지도 궁금하다.(198P)


***5월 29일 :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붓는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을 뿐인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 있을 뿐이다. (201P)


<을미년 9월>

*****9월 14일: 맑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부를 보았다.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같이 와서 이별 술잔을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수사 선거이와 작별할 때 짧은 시를 지어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같이 하더니

오늘 밤 이 달 아래서 술 한 잔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져야만 하리. (222P)


<을미년 11월>

****11월 1일 : 원흉(경상우수사 원균)이 보낸 답장도 가지고 왔는데, 몹시도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 속이는 말들이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 사이에 원균처럼 흉악하고 망령된 이는 없을 것이다. (230P)

☆☆☆<난중일기>내내 원균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적고 있다. 강직하고 정도만 걷는 이순신에게는 가까이에 두고 보기 힘든 사람이었겠다.


<병신년 2월>

****2월 14일 : 저녁에 물을 부엌가로 끌어들여 물 긷는 길을 편리하게 했다. 이 날 밤 바다 위에 뜬 달이 낮처럼 밝았고, 물결의 빛은 마치 비단결같앗다. 홀로 높은 누각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밤이 길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홍양의 게향유사 송상문이 와서 쌀과 벼를 합해 7섬을 바쳤다. (252P)


<병신년 4월>

****4월 19일 : 맑다. 습열(濕熱)로 생긴 병 때문에 20여 군데에 침을 맞았다. 그러자 몸에 열이 나고 답답하여 종일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268P)

☆☆☆일기장에 보면 아픈 날이 참으로 많다. 대부분 일기의 말미에는 ‘밤새도록 땀을 흘렸다’로 맺고 있다. 그 병명이 습열임을 알 수 있다.


<병신년 8월>

****8월 4일 : 맑고 샛바람이 세게 불다. 아들 회와 면, 조카 완 등이 아내의 생일에 술잔을 올리기 위해 나갔다. 정사립은 휴가를 받아서 갓다. 늦게까지 수루에 앉아 아이들을 보내며 바라보느라 몸이 상하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느지막이 대청으로 나가 활 몇 순을 쏠 때 몸이 매우 불편해져서 그만두고 안으로 들어왓더니 몸이 꽁꽁 언 거북이 같아서 곧바로 두꺼운 옷을 입고 땀을 냈다. 저물녁에 경상 수사가 와서 문병을 하고 갔다. 밤에는 그 고통이 낮보다 곱절이 되어 밤새 신음했다.(290~291P)


****8월 10일 : 맑다. 아침에 충청 우후가 문명을 왓다가 그대로 조방장과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송한련에게 그물을 만들 날삼(생마生麻) 40근을 주어서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한참 동안이나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엇다. 느지막이 두 조방장 및 충청 우후를 불러다가 상화떡을 같이 맛보았다. 저녁에 체찰사에게 갈 공문에 관인을 찍었다. 어두워지니 달빛은 비단 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 갈래여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 10시쯤 방으로 들어갔다.

참고)상화떡: 밀가루를 누룩이나 막걸리 따위로 반죽하여 부풀려 꿀과 팥으로 만든 소를 넣고 빚어 시루에 찐 떡. 보통 유월 유둣날이나 칠월칠석날 먹음.

☆☆☆ 쌍화떡과  상화떡이 아마 같은 것이라 생각. 고려 속요 중에 ‘쌍화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쌍화떡을 파는 가게이다. 고려 때는 쌍화떡이라 부르는 것을 조선 때에는 상화떡으로 부르게 되었나 보다. ‘쌍화점’영화도 볼만하다.

<병신년 9월>

****9월 8일 : 맑다. 아침 밥상에 고기반찬이 나왔으나 나라 제삿날(세조제사)이라 먹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감목관이 있는 곳으로 갔더니 감목관은 영광 군수와 함께 있었다. 무더기로 핀 국화꽃 사이에서 술을 마셨다. (301P)

☆☆☆국화꽃 사이에서 마시는 술은 얼마나 맛있을까.


<정유년 4월>

***1월 1일부터 3월 말까지의 일기는 빠져 있음.

참고)원균의 모함과 왜인의 이간책으로 이순신은 2월 26일 한산도에서 포박되어 3월4일 서울에서 하옥되엇음. 선조는 이순신을 국문하여 죽여야 한다고 햇지만 여러 대신들이 상소문을 올려 이순신 구명운동에 나섬. 4월 1일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나왔고 이날부터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함.(311P)

☆☆☆3개월동안 투옥되었던 이순신에게는 이 부분은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그것도 가장 혹한의 겨울에 옥중생활을 했으니 얼마나 참혹하고 당황스러웠을까?


***4월 1일 :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레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과 분, 아들 울이 윤사행, 원경과 더불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보았다. 지사가 돌아갓다가 저녁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니 마다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마시고 매우 취해버렸다. .....술에 취해 온 몸에 땀이 흘렀다. (311P)

☆☆☆옥중에서 나온 날, 그 참담함을 이루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주 담담하게 하루의 일상을 써내려간 그의 글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4월 5일 : 맑다.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에 이르렀다. 초목은 거듭 일어난 들불을 겪더니 불에 타고 말라서 참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무덤 아래서 절하고 곡하다가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햇다. 저녁에 내려와 외가로 가서 사당에 절하고 조카 뇌(蕾)의 집으로 가서 조상의 사당에 곡하며 절햇다. 저녁에 본가에 도착하여 장인과 장모의 신위(神位) 앞에서 절했다. 그리고 작은 형(이요신)과 아우 여필(이우신)부인의 사당에도 갓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마음이 평온하지가 않았다. (312P)


***4월 13일 맑다. 일찍 아침밥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하러 가려고 바닷가로 나가는 길에 홍 찰방의 집에 들러 잠깐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냇을 적에는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없엇다.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햇다. 곧 갯바위(아산시 인주면 해암)로 달려가니 배는 벌서 와 있었다. 가슴 찢어지는 듯한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4월 15일 맑다. 느지막이 입관했다. 오송수가 직접 온갖 일을 도맡아 초상치르는 것을 도아주니 뼈가 가루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천안군수가 들어와 상여를 준비해 주고, 전경복 씨가 날마다 마음을 다하여 상복만드는 일 등을 돌보아 주니 슬픈 가운데서도 고마운 마으을 어찌 말로 다하랴! (314P)

***4월 16일 궂은 비가 오다.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며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는데 나는 기력이 다한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울부짖으며 다만 어서 죽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제일 꼭대기에서 지하로 일순간 떨어졌다가 살아난 이순신의 몇 달간의 행적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트가 따로 없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슬픔은 하늘과 땅에 닿고도 남는다. 죽고 싶은 심정 그 마음이 내 세포마다 들어온다.


***4월 17일 맑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 와서 어서 가자고 다그쳤다.


***4월 18일 종일 비가 오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금수의 집으로 물러나왔다.


***4월 19일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울며 하직햇다. 어지할고 어찌할 꼬! 천지에 나같은 운명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즉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먼저 조상의 사당에 아뢰고 금곡의 강선전 집 앞에 이르러 강정과 강영수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을 했다.

☆☆☆이순신은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였기에 능히 이것을 이겨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유년 5월>

****5월 5일 :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나 떨어진 땅끝 모퉁이에서 종군하느라고 어머니 영연(靈筵)을 멀리 떠나 장례도 못 지내고 곡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갚음을 당하는가!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하다. 다만 때를 잘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백의종군 하느라 어머니의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때를 잘못 만났다고 하지만, 난세에 태어나 나라를 구하고 그 이름 지금까지 칭송으로 자자하니 조선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다.


***5월 6일 : 맑다.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보앗다. 서로 붙잡고 통곡을 하며 “장례를 다 치르기도 전에 천 리 박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이 일은 누가 주관하겟는가. 통곡한들 어찌한단 말이냐”고 말하셧다. 두 형님의 넋이 천리까지 따라와 이렇게 걱정하고 계시니 비통한 마음이 끊임없다. 날마다 꿈이 어지럽도록 이 영혼들이 말없이 걱정해 주고 있으니 그 애통함이 더욱 깊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도 애통한 마음에 눈물이 굳어 피가 될 지경이지만 하늘은 아득하기만 하고 나의 외로움은 돌보지 않는다. 어찌 한 시라도 빨리 죽지 못하는 것인가. 느지막이 능성 현령 이계명이 와서 보고 돌아갔는데 그 또한 상중에 벼슬한 사람이다.....한산도에서 돌아와 원균의 흉악한 소행을 많이 이야기했다....우수사가 편지를 보내 조문했다.(320P)

☆☆☆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꿈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예지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책임감과 고도의 집중력과  분석력이 만든 통찰의 결과이다.


 ****5월 8일 : 활 만드는 장인인 이지가 돌아갔다. 이날 새벽에 사나운 호랑이를 잡아 죽여서 그 가죽을 휘두르는 꿈을 꾸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는 모르겠다.

원균이 편지를 보내 조문했는데 이는 원수 (권율)의 명령이었다. 이경신이 한산도에서 왔으며 원균의 흉악한 일을 많이 이야기했다. 또한 “원균은 자신이 데려온 서리를 곡식사오라는 구실로 육지에 보내놓고 그 서리의 아내를 사사로이 참하려 했는데, 그 아내가 악을 쓰며 따르지 않고 박으로 나와 큰소리를 질렀다”고 말했다.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니 이 도한 운수이다.

뇌물을 실은 그의 짐이 서울 가는 길에 끝없이 이어지고, 나를 헐뜯는 일은 날마다 심해지니 때를 못 만난 것을 내 스스로 한탄할 뿐이다.

☆☆☆원균의 못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이다. 남의 아내를 탐하려하고, 부적축재를 한 탐관오리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순신의 일기에 의해서 원균의 행적이 남아있으니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거짓으로 일기를 쓸 인품의 소유자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와서 이순신에게 와서 원균의 악행을 토로하고 보고했다.

또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으나 다행히 구명운동으로 살아나왔으니 그의 죄는 하늘에 미치고도 남는다.


***5월 12일 : 신홍수가 와서 보았는데 원균에 대한 점을 쳤더니 첫 점괘가 수뢰둔(水雷, 屯,비가 내리고 천둥이 진동하는 상. 널리 형통하나 험난함) 인데 천풍구(天風姤, 하나의 음이 다섯 개의 양을 떠받치고 있는 상. 여자가 지나치게 거센 괘로서 흉함 )로 변했으니 그 쓰임이 본체를 이기는 것이어서 매우 흉하다.

☆☆☆원균의 점괘를 보니 죽을 상이다.


<정유년 7월>

*****7월 21일 :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하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다. 경상 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이 보러왔기에 패하던 때의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는 먼저 달아났고, 여러 장수들도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서 이렇게 되었다.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의 살점을 먹고 싶은 지경이다.”라고 말햇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 안위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새벽 2시가 지나도록 전혀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344P)

☆☆☆대장이 적을 보고 달아났으니 부하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원망과 분노는 하늘을 치를 듯하다. 이런 졸렬한 원균이 조선의 해군을 대표하는 장군이라니 그를 임명한 조정의 잘못이 크다. 인재를 잘 뽑는 이가 정치를 잘 하는 사람이며 경영을 잘하는 사람이다.


<정유년 8월>

****8월 19일 : 맑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수사 배설은 교설을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골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영리(營吏)를 곤장으로 때렸다. 회령포 만호 민정붕이 그의 전투배에서 받은 물건을 사사로이 피란민 위덕의 등에게 준 죄로 곤장 20대를 치게 했다.

☆☆☆수사 배설은 원균과 함께 자주 일기에 등장하는데,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도 등장한다.

조선 때에는 조금의 잘못을 하여도 곤장으로 다스리니 법이 엄격함을 알 수 있다. 정부의 녹을 먹는 관리, 즉 공무원들은 이렇게 다스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정유년 9월>

****9월 15일 : 맑다. 조수를 따라 여러 배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들어가 거기서 머물렀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이상한 조짐이 많았다.


***9월 16일 : 맑다. 망을 보던 군사가 아침 일찍 나와서 “적선이 무려 200여 척이 울돌목을 거쳐 곧장 우리 진영을 향하여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상세히 밝혀 약속하고서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상선이 홀로 적선 가운데에서 대포와 화살을 비바람처럼 쏘았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볼 뿐 나아가지 않으니 일ㅇ 앞으로 어찌될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며 ‘적의배가 비록 1000척이라도 우리 배에는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니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을 쏘아라“하고서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1마장쯤 떨어져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간 곳이 묘연했다.

나는 배를 돌려 안위의 배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군관 무리들도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대니 적선 2척이 흔적도 없이 무너졌다. 매우 다행이다. 에워싸고 있던 적선 30척도 부딪쳐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쳐들어오지 않았다. 그곳에 배를 대려고 했으나 물이 빠져서 배를 대기에 알맞지 않았으므로 건너편 포구가로 진영을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당사도로 옮겨가 배를 대고 밤을 보냈다.

☆☆☆ 노량진 해전의 전투장면을 알 수 있다. 아주 사실적으로 잘 그려놓고 있어 이순신장군의 문장실력도 알 수 있다. 문과 무를 겸비한 보기 드문 장군이라 칭송받아 온 것을 <난중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유년 10월>


****** 10월 11일 ; 저녁에는 날씨가 봄처럼 따듯하여 아지랑이가 허공에 피어오르니 비가 올 조짐이 많이 보였다. 초저녁에 달빛이 비단결과 같아 홀로 봉창에 앉아 있으니 품은 생각이 만 갈래이다. 밤 10시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자정쯤 비가 내렸다. 이날 우수가 군량선을 타고 있는 자의 무릎뼈를 심하게 때렸다고 하니 놀랍다. (369P)


****10월 14일 : 맑다. 새벽 2시쯤 꿈을 꾸엇다. 꿈속에서 내가 말을 타고 언덕을 오르는데 말이 발을 헛디디어 냇물 가운데로 덜어졌으나 쓰러지지는 않고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고 있는 형상이 보이다가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는 알 수 없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있어 면(세째 아들)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있다 해도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까! 너를 따라 죽어 함께 통곡하고 싶지만 너의 형과 누이, 어미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참고 연명하고 있으나, 내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이날 밤 10시쯤 비가 왔다. (370~371P)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세째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는 장면이다. 사형을 면하고 옥에서 나와 백의종군에서 시작하여 통제사가 되기는 했지만, 이순신은 이미 그 예전 사람이 아니다. 일기의 내용도 자신의 슬픈 심정을 토로한 것이 많고 글의 길이도 많이 길어졌다.  이렇듯 마음이 심란한 이순신장군에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막내아들의 죽음 등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슬픈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장면을 읽는데 눈물이 나왔다. 울고 싶어서 소리 내어 읽었더니 더 슬퍼졌다.


****10월 16일 : 맑다. 내일은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도 없어 염전에서 일하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371P)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 라는 글에 가슴이 찡하다.

****10월 19일 : 맑다. 저물녁에 한 되도 넘게 코피를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을 하다가 눈물이 흐르니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이승에서 영혼이 되어 마침내 불효가 여기가지 이를 줄을 어찌 알았으랴! 비통한 마음 찢어지는 듯하여 억누를 수가 없다. (372P)


****10월 29일 : 맑다. 새벽 2시쯤 첫 나팔을 불고 출항하여 목표로 향하는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샛바람이 조금 불었다. 목포에 이르러 보화도에 정박하니 북서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보니 땅의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진영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374P)


***10월 30일 : 선비 집안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을 해질녁에 목을 베어 걸었다.

☆☆☆조선시대에는 강간범을 사형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선비집안 즉 양반집안의 처녀를 강간했기에 사형에 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회법도 굉장히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정유년 12월>

****12월 5일 : 맑다. 공로를 세운 여러 장수들에게 상과 직첩(職帖, 벼슬 임명장)을 나누어 주엇다.

도원수의 군관이 임금의 유지를 받들고 왔는데,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상제(喪制)라 하여 고기를 먹지 않으니 여러 장수들이 안타깝게 여긴다고 했다. 사사로운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랏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도 전쟁에 나아가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라고 말햇다. 전쟁할 때의 용맹은 소찬(素饌, 고기나 생선이 없는 반찬)d나 먹는 기운 없는 자가 해날 수는 없다. 경은 내 뜻을 헤아려서 개소(開素, 예전 상례에서 상복을 입는 기간에는 고기가 든 음식을 먹지 않다가 그 기간이 끝나고 다시 먹는 것.)하여 방편을 좇도록 하라’고 하면서 고기반찬을 하사하셨다. 마음이 더욱 비통하다.

☆☆☆선조는 원균의 모함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순신을 사형에 처하려 한 사람이다. 그런데 고기를 하사하여 상중이지만 먹어야 한다고 위로하니 읽는 이도 분노가 차오른다. 이순신의 비통함이 가슴 절절하게 다가온다.


<정유년 12월>

***12월 30일 : 입춘. 눈보라가 어지럽게 치고 추위가 몹시 심하다. 배 조방장이 와서 보았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보았다. 그러나 평산포 만호와 영등포 만호는 오지 않았다. 부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오늘밤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인 그믐밤이니 비통한 생각이 한결 더하다. (385P)


<무술년 11월>

***11월 8일 : 명나라 도독부를 방문해서 위로연을 베풀어 주고 어두워져서 돌아왔다. 조금 있으니 도독(전린)이 만나고자 하므로 곧 나갔더니 “순천 왜교)의 적들이 초열흘 사이에 철수하여 물러난다는 기별이 육지에서 왔으니 빨리 진군하여 돌아가는 적들의 길을 끊어 막으라”고 했다. (398P)


****11월 17일 : 어제 복병장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놈의 중선 하나가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보고 한산도 앞바다까지 좇아가니 왜적들은 언덕을 의지하고 뭍으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사람에게 빼앗기고서 빈손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399P)

☆☆☆<난중일기>는 여기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은  11월 19일에 전사했다.

김훈 소설 <칼의 울음>에서는 이순신의 죽음 직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비벼지면서 멀어져 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엇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도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 이 세상에 남겨놓고.....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388P)”




이순신 그 격동의 생애-고정일 정리


<이순신 탄생>

****우리의 선조 가운데 바다를 무대로 활동한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크 많다. 신라의 장보고와 고려의 김방경, 조선의 이순신 등은 역사에 용명이 길이 빛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조선술, 항해술, 함재화포, 해전술에 이르기까지 해군의 종합적인 전통을 세운 사람은 국난을 한 몸으로 막아낸 이순신 장군이다. (403P)


***<행록(行錄>에는 이순신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어머니 변씨가 이순신을 낳을 때 시아버지인 이백록이 꿈에 나타나 ‘이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마땅히 순신이라 하라’고 일러주었으며 순신이 태어났을 때 점쟁이가 찾아와 “이 아이는 쉰 살이 되면 북방의 대장이 도리 것이오” 라고 일러 주었다고도 한다. (404P)


***이순신의 이름은 신(臣)자 돌림에다가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임금인 ‘순(舜)을 따 순신이라 지었다. (404P)

***맏형 희신과 둘째형 요신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이순신은 30대부터 두 형님 집안의 가장(家長)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 부임할 때 조카들까지 부임지로 데려갔다.

☆☆☆이순신의 따뜻하고 집안과 가정을 아끼는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이순신은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는데 셋째아들 면은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에 본가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열여섯 살에 전사했다. 서자 훈(薰)은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신(藎)은 정묘호란 때 전사했다.


****맏형 희신의 둘째아들 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천으로 피란갔다가 그곳 부사 한강 정구에게 글공부를 배웠다. 그 뒤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활동했다. 오늘날 이순신의 행적을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모두 그가 지은 <행록>이 전해 오는 덕분이다. (404P)


<전쟁놀이를 즐기던 소년 순신>

***,행록.에 따르면 소년 순신은 어릴 적 이웃 아이들과 더불어 언제나 전쟁놀이를 즐겼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순신을 대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순신은 늘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녔으며 마을의 어른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곧장 화살을 겨누는 통에 마을 사람들이 두렵게 여겨, 그의 집 앞 지나다니기를 꺼렸다고 한다. (406P)


***나중에 선조에게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은 임진왜란 당시 훌륭한 재상으로 조선 정국을 주도하던 류성룡이다. 선조는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어떤 인물이냐고 묻자, 류성룡은 이렇게 답했다.

  “이순신은 한 동네 사람이어서 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평상시 대장되기를 희망했습니다. 또 성품이 강인하고 굳세어 남에게 굽힐 줄 모릅니다.”

불우한 군인생활만을 되풀이하던 이순신을 정읍현감에 기용하고 또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살 천거한 것도 류성룡이었다. (406P)


***명종10년(1555)즈음에 아산으로 이사한 뒤 이순신은 사대부 집안의 가풍을 따라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문학적 자질은 <난중일기>와 그 밖의 여러 시문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명종 20년(1565) 이순신은 혼인을 했다. 아내 방씨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달이었다. 방시는 현숙하고 영리했다. 혼인할 때 방씨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방씨의 아버지는 활을 잘 쏘기로 널ㄹ 알려진 사람이다. 방씨와 혼인한 뒤 이순신은 무관 출신 장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스물두 살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닦기 시작했다. (407P)


<늦깎이로 시작한 무과급제 도전>

***이순신은 붓을 놓고 칼을 선택햇다. 성격이 원래 활달하고 호방했지만, 그보다는 집안 형편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비록 무신의 길을 선택햇지만 올곧은 정신은 그대로 지니고 있엇다. 그가 처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화 한 토막이 <행록>에 적혀 있다.


  “병인년 겨울 비로소 무예를 배웠는데 팔 힘과 말타고 활쏘기에는 따라올 이가 없엇다. 공의 성품이 뜻이 높아 남에게 굽실거리지 않아서 같이 배우는 무사들이 종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하며 서로를 놀리면서도, 오로지 공에게는 감히  너나들이하지 모사고 언제나 높이고 공경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순신이 얼마나 진지한 몸가짐으로 무에를 닦았는지 알 수 있다. 몸집은 보통 사람보다 큰 편이었으며 힘도 세고 말도 잘 타는 무인으로서의 위용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409P)


****스물여덟 살 되던 선조 5년(1572) 8월, 무예를 닦은 지 7년 만에 훈련원 별과(別科)에 응시했다. 이순신은 비록 본격적인 무예 수업을 늦깎이로 시작했지만, 이 정도면 합격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기사시험을 볼 때 적에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이 고꾸라지면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지만 이순신은 한 발로 일어서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긴 뒤 사처 부위를 묶고 나머지 시허을 마쳣다. 비록 낙방했으나,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410P)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배운 대목이다.


***선조 8년(1576)2월 나이 32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식년무과에 급제했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7년 전이었다. 정규 무인을 뽑는 식년무과는 3년마다 한 번씩 시행했는데, 당시 합격자는 모두 28명이었다. 이순신은 병과 4등으로 합격했다.

☆☆☆식년 무과는 3년마다 한 번씩 시행되는 시험이다. 조금 늦게 무관으로 나아갔다.

***조숙한 천재는 아니었지만 궁술에 뛰어났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병법에도 통달했고, 지략이 뛰어난 대기만성형 무인이었다. (410P)


<변방 하급관리 시적>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했지만 10개월이 다 되도록 보직이 주어지지 않앗다. 인품과 실력은 남보다 뛰어났지만 아무런 벼슬자리도 내려지지 않자 이를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제때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이순신에게 은근히 높은 벼슬아치를 찾아가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권세가에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나이가 세상에 태어나 쓰이면 충성으로써 목숨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는다면 들에 나가 밭갈이를 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면서 묵묵히 기다렸다. 22년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줄곧 이런 정신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실했다. (412P)


***오로지 정의롭게 살다가 죽는 것이 무인의 정신이요, 정의를 실천하는 것만이 선비가 지켜야 할 덕목이며, 올곧게 살아가는 길만이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412P)


***3년의 권관 임기를 무사히 마친 이순신은 선조 12년(1579) 2월 서울에 있는 훈련원 봉사로 승진 전보되었다. 훈련원에서는 군사들의 인사, 시험, 훈련, 교육 등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이순신은 인사 업무를 주로 보았는데 종종 상관으로부터 인사청탁과 함께 은근한 압력을 받았고 동료들로부터의 청탁도 심심찮게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정해진 규정대로 일을 처리했고 어떤 사람의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413P)


***어느 날 직속상관인 병조정랑 서익이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한 사람을 순서를 무시하고 참군으로 벼락출세시키고자 하기에 이순신이 담당관으로서 허락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에 있는 사람을 순서를 무시하고 벼락출세시키면 마땅히 올라가야 할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게 될 테니 이는 공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규 또한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햇다.

서익은 크게 화가 났지만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413P)


***이순신은 훈련원에 부임한지 겨우 8개월만인 10월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전출되엇다. <경국대전>에는 일단 봉사 직책을 맡으면 2년 임기를 채운 뒤 다른 곳으로 진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순신의 전출은 법규를 어긴 것이었으며 보복성 좌천 인사혔다. (414P)


****이곳에서(충청 병영)도 이순신은 아주 검소하게 매사에 절약하고 청빈하게 생활했다. 그 즈음 생활에 대해 <행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거처하는 방에는 다른 아무 것도 두지 않았고, 다만 옷과 이불뿐이었다. 부묌을 뵈러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남은 양식을 반드시 거두어 들여서는 담당 군사를 불러 그것을 돌려 주었는데, 병마절도사가 듣고서 그를 아끼고 공경햇다.” (414P)


***1582년 5월 관직을 제수(除授)하는 명을 받아서 이순신은 훈련원으로 복직했다. 재상인 류전이 이순신이 좋은 화살통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활쏘기 시험을 핑계로 이순신을 불러 그것을 달라고 했다. 이에 이순신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화살통을 나아가 바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대감께서 받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할 것이며, 소인이 드리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화살통 하나 때문에 대감과 소인이 모두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니 재상이 “그대 말이 옳다”라고 말햇다. (416P)

☆☆☆재상이 달라고 하는데도 완곡한 말로써 거부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선조 20년 (1587)8월이다. 녹둔도, 둔전관 일도 함께 하게 되엇다. 그곳은 조사노에서 동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외딴섬인데다 수비군사가 적어 이를 걱정한 이순신은 병마절도사 이일에게 여러 번 군사를 늘려달라고 청햇으나 병마절도사는 듣지 않았다.

9월에 적이 관연 군사를 몰고 와서 이순신이 있는 곳의 목책을 둘러싸는데, 붉은 모전(毛氈)으로 만든 옷을 입은 자 몇 사람이 앞장서서 지휘하며 달려오므로 이순신이 활을 당겨 그들을 연달아 쏘아 맞히자 모두 땅에 스러졌다. 적들이 달아나는데 이순신이 뒤쫓아가 사로잡힌 우리 군사 60여명을 도로 빼앗아서 돌아왔다. 이날 이순신도 오랑캐 화살에 왼쪽 넓적다리를 다쳤으나 부하들이 놀랄까 싶어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아버렸다.

그러나 이번 일로 자신이 처벌될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이순신을 죽여 입을 막음으로써 죄를 면하려 구를 구속해서 형벌을 내리려 했다. 이순신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 병사의 군관 선거이가 본시 이순신과 친한 사이라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햇다.

“술을 마시고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정색을 하며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데 술을 마신들 무엇하겠습니까?”라고 말햇다.

“그럼 술은 마시지 않더라도 물은 마시지요.”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물은 왜 미시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들어갔다. 병마절도사가 패전(敗戰)할 즈음의 상황에 대해 진술하라고 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절했다.

“제가 거느린 병력이 많지 앟아서 군사를 늘려달라고 여러 번 청했으나 병사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고운이 여기 있으니 조저에서 만약 이 뜻을 알면 죄가 저에게 있지 않을 것이고 또 제가 힘껏 사워서 적을 물리치고 쫓아가서 우리 사람들을 되찾아왔는데 패군으로 따지려는 것이 옳단 말입니까?”

말소리나 몸가짐은 조금도 떨지 않으니 병마절도사가 한동안 답을 하지 못하고 가두기만 햇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이 “이 아무개는 싸움에 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평복으로 종군해서 공을 세우도록 했으며 선조 21년 2월 여진족의 시전부락 정벌에서 공을 세워 특사를 받고 같은 해 6월 귀가해서 휴양하게 되엇다. (418~420P)

☆☆☆자신에 대해 어디서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옳고 그름을 따져 발론할 수 있는 기개가 놀랍다.


<전라좌수사로 발탁된 이순신>

***정여립 모반사건에 조금이라도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세상사람이 모두 기피하고 있는 대에 연루된 사람을 옥으로 찾아가고 또 수사관을 꾸짖는 것은 보통 사람은 하기 힘든 일로서 그는 이처럼 강한 의리와 불굴의 신념을 가진 인간이었다, (421P)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 3품)로 승진되어 정읍네서 곧장 임지로 부임했다. 이순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어렸을 적 친구 죄의정 겸 이조판서 류성룡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서였다. 이순신의 마흔일곱 살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1년 전이다.(422P)


****거북선은 지붕 도는 덮개 역할을 하는 나무로 만든 두거운 귀배판이 갑판 윗부분을 덮었으며 그 위에 좁은 통로를 내고는 나머지 부분에는 송곳을 꽂음으로써 왜적들이 배로 뛰어들어 접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물(船首)에는 용 아가리를 만들어 총구멍으로 삼았고, 고물(船尾)에도 총구멍이 있었으며 왼쪽과 오른쪽 뱃전에도 6개 총구멍이 있어서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배의 전체적인 생김새가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서 ‘거북선’이라고 불렀다. 보통 때에는 돛과 노로 항해하며 전투시에는 배 위에 멍석을 덮어서 철송곳을 가리고는 적의 함대 사이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큰 화력으로 적선을 공격했다. 적선에 부딪쳐도 거북선은 안전했으며 적이 백병전을 하려고 뛰어오려면 철송곳에 찔려 죽었다. 그러므로 일본군들은 거북선을 장님배(盲船)라고 겁을 내었다. 거북선은 실로 16세기 세계유일의 불침함(不沈艦)이었다 (423~424P)


****공무를 본 날은 주로 송곳과 순시, 활쏘기, 대포쏘기, 거북선 건조 등 군기 점검과 훈련, 부정 비리 조시와 같은 일을 했다. 이로 미루어 이순신은 군기 점검과 훈련을 위해 모든 정력을 쏟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24P)


임진왜란 일어나다, 이순신의 활약

<왜군의 첫 출정>

***16세기 일본 사회는 약 100년동안 전국시대였다. 그리고 포르투갈, 에스파냐 등 서양 세력의 동진에 따라 서양문물이 끊임없이 전래되었다. 특히 포르투갈인들의 내항으로 철포(鐵砲, 조총)가 전래되어 종래 사무라이로 이루어진 전문 전투집단보다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집단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전국시대 통일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추진되엇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완성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5년 백고나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고나백이 되고나서 대외침략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국내의 공이 있는 여러 장군들과 막대한 군사력을 소모하고 자기 위치를 반석같이 궁ㄷ히는데 온 정력을 쏟았다. 기나긴 전쟁으로 하극상의 기충은 천하를 휩쓸었고 내전은 끝났지만 여러 장군들은 건재했다. 이를 두려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생각 끝에 이 강대한 군사를 외국 곧 조선으로 출병시킴으로써 자연히 소모하고 가능하면 명나라까지도 치고자 했다. (426P)


<이순신을 향한 불신과 모략>


***선조 26년(1593년) 8월부터 명나라의 경략 유정은 강화회담을 진행하기 위해 왜군을 공격하지 말도록 압력을 넣었다.

다음해 3월 명나라의 도사 담종인이 왜적과 화친하는 일로 명나라를 떠나 웅천 적진에 이르러 이순신에게 패문(牌文)을 보내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보내왔다.

이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왜적이라는 것들은 믿음이 없어서 화친을 하고자 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나는 조선의 신하이기에 도의상 한 하늘을 이고 살 수는 없다.”는 답신을 보냇다.

이순신은 염병(染病)에 걸려 병세가 자못 위중했지만 오히려 하루도 눕지 않고 예전처럼 사무를 보았다. 이런 부담과 갈등, 병으로 아픈 몸에 더해서 한 뜻으로 왜적을 무찔러야 할 원균과의 반목의 수위도 정도를 넘어서고 있엇다. 원균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전략을 세우고 작전을 펼쳤으며 조정으로 자신의 주장을 아뢰는 장계를 서서 올리기도 했다. (455P)


<서우로 압송되는 이순신>

***원균은 이순신과의 불화 끝에 육군으로 진출된 뒤에도 해상방위전략에 대한 의견을 조정에 직접 건의하고 왜군을 자신이 소탕하고 말겟다는 뜻을 밝혓다.

지루한 전쟁 속에서 고심하던 조정에서는 원균에게 통제사를  맡길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따랐지만 바닷길이 험난하고 일본 수군의 복병에 의한 기습공격을 경계해서 군사작전을 신중히 결정했다. 이에 조정은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왜군함대를 요격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하고 그 이유로 이순신에게서 수군통제사란 직책을 박탈하고 옥에 가두었다. 이는 왜군 첩자 오시라의 간계에 말려든 모함이었다. (457P)


***이즈음 선조는 이순신이 반란을 일으키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어떻게든 이순신을 제거할 궁리를 하고 있었던 차에 왜군의 간계는 선조의 결정을 앞당기고 계획을 추동할 수 있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선조 30년 2월 6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 체포령을 내리는 동시에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했다. (458P)

☆☆☆나는 조선의 임금 중 선조만큼 어리석은 이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임금은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기에 유능한 신하가 반란을 일으킬까 항상 경계한다. 만인에게 칭송받고 해상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이순신이 반란을 일으킬까 내심 항상 경계했었다. 리더는 인재를 보는 안목이 그 사람의 앞날을 결정짓는 것 같다.


***이순신은 1597년 2월 26일 마침내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3월 4일 의금부에 구속되었다. 26일 한산도는 통곡의 도가니였다. 이순신이 함거에 실려 가는 길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몰려나와 “사또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어찌 합니까?”라고 울부짖었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제 나라의 장래는 끝이다“라고 탄식했다. (458P)


***선조 30년 3월 13일 비망기에서 선조가 말한 이순신의 4가지 죄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정을 속인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

둘째,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

셋째, 남의 공로를 가로채 남을 무함한 죄

넷째,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거리낌)이 없는 죄.(458P)


***사형을 겨우 면한 이순신은 4월 1일 출옥해서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출옥일부터 이순신은 다시 일기를 썼다. 옥고를 치르며 망가진 몸을 추스릴 틈도 없이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옥에서 나온 지 12일 만에 모친상을 당햇다. 하지만 아산에 잠시 들러 입관만 지켜본 뒤 다시 나라를 위해 길을 떠나갈 수 밖에 없었다. (460P)


<무너진 조선 수군>

***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은 종래 자신이 주장했던 수군의 단독 해상작전이 실제로는 의미없는 작전임을 잘 알고 잇엇다. 따라서 그는 이순신이 평소 주장하던 곳과 궤를 같이하는 수륙병진작전을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수군단독 부산원정책을 수립했다.

...도원수 군율은 7월 4일 출전 때 원균이 직접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해 그 휘하의 박영남을 불러 앞뒤사정을 다그치며 원균이 직접 출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원균은 계속 출전을 기피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곤장형을 내렸고, 선전관으로 하여금 그의 출전을 강력하게 독촉햇다....통제사 원균이 전사했다. (461~465P)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이순신은 8월 2일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 징조가 보이더니 바로 다음날 선전관 양호가 삼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한다는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이순신의 예지력에 또 한 번 놀란다. 나도 이런 예지력을 갖고 싶다.

“지난 번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에게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또한 사람의 꾀가 어질지 못한데서 비롯된 일이었거니와 오늘 이처럼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제 특별히 그대를 상복 입은 채로 기용하며 또한 그대를 백의에서 뽑아 다시 옛날처럼 전라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니 그대는 근무지에 도착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이순신은 이제 명예회복을 한 것이다. 어머니가 홧병으로 돌아가셨으니 가슴에 얼마나 한이 남을까?


<13척이 거둔 기적>

***이순신은 이 명령을 받은 그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해서 하여 싸우면 기필코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는 굳은 결전의자가 담긴 장계를 올려 수군의 폐지를 결단코 반대했다. (467P)


****왜선 31척이 순식간에 격파되었고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던 왜군 대장 마다시의 목을 베어 돛대 끝에 걸었다. 이순신은 이날의 소감을 <난중일기>에 “이번 일은 실로 하늘이 주신 행운이었다”고  적었다.

이날 명량에서의 큰 승리는 정유재란 발발로 수세에 몰렷던 조선과 명나라의 일대 반격의 예고편이었다. (469P)


<통제영을 고금도로 옮기다>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 다음날 통제사 이순신은 영암에 잇는 친척 감역 현건에게 편지를 띄웠다.


“어제 이곳에 도착햇습니다. 게신 고을과는 그리 멀지 않아 혹시 소식을 들을 길도 있으려니 햇더니만 마침 보내 주신 안부의 글을 받앗습니다.

저는 진중에 오랫동안  있어 수염과 머리가 모두 희어져서 다음날 서로 만나면 전일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어제 진영을 고금도로 옮겼는데 순천의 왜적과는 100리 사이의 진이라 걱정스런 형상을 다 적을 수 없습니다.”


이순신은 원래 말수가 적고 잘 웃지도 않았다. 용모는 근엄하고 도를 닦는 선비 같았으나 그 속은 담력으로 가득햇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인 이순신이 49세 때 그의 머리에는 흰 머리카락이 열 오라기 정도 있었는데, 5년 뒤 고금도에 머물던 시절에는 흰수염에 흰 머리카락이엇다. 밤에도 진중에서는 갑옷을 벗지 않으며 전투에 나아가서는 용맹한 장군이었지만 그의 몸은 쇠약해져 갔다. 인간으로서의 고뇌도 많았으며 옥고를 치르면서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밤낮으로 전략을 세우고 죽음을 눈앞에 둔 싸움을 치르는 동안 그는 흰 머리카락만 늘어났던 것이다. (472P)


<나라 위해 목숨 바친 마지막 대전>

***이순신은 이 싸움이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을 알고 있엇다. 명나라 도독 전린은 ‘천문을 살폈더니 동방의 대장별이 희미하게 빛이 바래고 있다’며 이순신에게 제갈량처럼 한르에 기도할 것을 구너한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잇ㄴ신은 한 마디로 거절햇다.

“나는 충성이 무후(제갈량0만 봇하고,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재주가 무후만 못하며 세 가지가 다 무후만 못하니 비록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한들 하늘이 어찌 들어줄 리가 있겠습니까?”

  다음 날 19일 새벽 2시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노량 앞마다에 이르러 일제히 포문을 열고 기습하는 것을 시작으로 치열한 노량해전이 벌어졌다.

싸움이 한창 치열해져 있을 때 왜선과 수십 번 접전하며 독전(督戰)을 하고 있던 이순신은 왼편 가슴에 날아오는 유탄을 맞았다. 흘러 나오는 피를 보면서도 그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활을 쥐고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조용히 명령햇다.

‘저 방패로 나를 가려라.“

그리고 그는 조용히 유언햇다.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이순신은 이 유언을 남기도 54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과연 동방의 대장별이 바다에 떨어졌던 것이다. (476P)


<순국한 이순신, 그 뒤의 일들>

****1598년 11우러 19일 남해 관음포에서 벌엊ㄴ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 전쟁은 디디어 막을 내렷다.

진린은 통고하다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세 번이나 쓰러졌다 위기 때마다 자신을 구출해 주었기에 그의 슬픔은 더욱 컸다. 비보를 들은 수군들은 모두 먹던 고기를 내던지고 통곡했고 바닷가 백성들도 자신의 부모를 잃은 것처럼 통곡했다.

이순신이 전사한 뒤 조정에서는 그를 우의정으로 추증하고 예관을 파견해서 제사를 지냇다. 선조는 이대 내린 제문에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시킨 것이 자신의 허물임을 밝힌 뒤 이순신이 전사한 것에 대한 깊고 간절한 유감을 나타내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478P)

***정조 17년 이순신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이순신의 신도비를 세울 것을 명하고 자신이 직접 신도비의 비명을 짓는  한편, 이순신의 탁월한 공적과 충절을 기려 후손에게 공사를 감독하도록 했다.


내가 작가라면

이순신의 문장은 수사를 배제한다. 그는 매일매일 바다의 날씨를 꼼꼼이 살폈고 적과 아군의 형편을 기록햇다. 그의 글은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그의 기록 정신은 치열하다. 그는 빠뜨리지 않고 그는 중언부언하지 않았다.(김훈)

이순신의 일기는 전쟁을 기록한 일기이며 그것도 진중에서 쓴 글이라는 것이 더욱 의미가 크다. 이순신은 기록의 중요성을 크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달픈 심정을,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픈 심정을 낱낱이 기록해 놓았다.

일기의 내용을 보면 울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인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많고, 해전술에 대한 것도 많아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하루에 활쏘기를 몇 번했는지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서 이순신의 집념과 끈기, 한 번 마음을 정하면 꼭해내고야 마는 정신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맑음’ 딱 이렇게 씌여진 날도 많다. 누락된 부분도 있지만, 거르지 않고 꾸준히 계속해서 써내려간 것 또한 <난중일기>의 강점이다.

내가 일기를 쓰지 않은 것은 제법 오래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일기를 잘 써서 학기말, 학년말 때마다 ‘일기상’을 받았다. 모란꽃이 그려진 일기장이 지금도 생각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명애 담임선생은 일기검사를 하고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돌려주는 일이 더러 있었다. 이명애선생과 같은 동료인 우리 고모 말에 의하면 “애 일기장이 아니라 어른 일기를 읽는 것 같고 재미있다‘고 하더란다. 그때도 일기장에 꽤 정성을 들인 것 같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도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일기를 썼다.

대학교에 진학하고서는 더욱더 일기를 열심히 썼다. 일기장은 나의 모든 것을 떨어놓는 그런 장이었다. 결혼을 할 때 일기장을 친정집에 두고 왔는데, 집수리를 하면서 어머니는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박스에 넣어 놓은 것이 무엇인지 몰라 불태워버렸다는 어머니.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결혼 후에도 일기장을 쓰긴 썼는데  어느 날부터 일기 쓰는 것을 게을리 하였다.

몇 년 전부터 새해가 되면 일기장을 마련하지만  며칠을 쓰고 나서는 그만 쓰곤 했다. 그만큼 게을러졋다는 증거이다. 나는 일기를 문학적으로 좀 잘 쓰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다.

이제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는 날마다 한 꼭지의 수필을 쓴다는 마음으로 일상 속에서  글감을 길어올려 쓰는 것이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쓰기가 힘들 수도 있다.

둘째는 날마다 있었던 일을 적는 것이다. 말하자면 간략하게 일지를 적듯이 쓰는 것이다.

셋째는 일기를 그림으로 적는 것이다. 그림일기, 그림에 소질만 있다면 그림일기를 쓰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그 밑에 간략하게 글을 적는 형식. 아니면 인터넷으로 글을 쓴다면 세계의 명화중 자신의 마음과 일치하는 그림, 혹은 마음에 드는 그림을 불러와서 일기를 쓰는 것이다.

넷째는 사진일기이다. 일상을 사진 찍어서 날마다 쓰는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스마트 폰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이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서 하든 꾸준히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일이든 10년만 한다면 장인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당장 시작해야지.


겹쳐서 같이 읽은 책 -김훈 소설 <칼의 울음>

<칼의 울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엇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햇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랏다.

저무는 해가 마지막 노을에 반짝이던 물비늘을 걷어가면 바다는 캄캄하게 어두워갔고, 밀물로 달려들어 해안 단애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어두 a속에서 뒤채었다. 시선은 어둠의 절벽 앞에서 꺾여지고 목측으로 가늠할 수 없는 수평선 너머 캄캄한 물마루 쪽 바다로부터 산더미 같은 총포와 창검으로 무장한 적의 함대는 또다시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21~22P)


<안개 속의 살구꽃>

바다를 건너오는 바람은 늘 산맥처럼 출렁거렷다. 겨울이면 병영 담벽에 걸어놓은 시래기가 토담에 쓸렷고 푸고에 묶인 배들은 밤새 바람에 비꺾거렷다. 바람이 몰려가 버린 빈 자리에 밀물로 달려드는 파도소리가 가득 찼다. 바람의 끝자락에 실려 환청인가, 누에고치에서 실 풀려나오는 소리가 파도에 실려서 수평선을 건너오는 소리 같기도 햇다. 메뚜기떼가 풀섶에서 서걱대는 소리 같기도 했고, 먼 곳에서 쥐떼가 씻나락을 까먹는 소리 같기도 햇다. 그 소리는 환청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또렷했지만 들리는가 싶으면 물소리에 묻혀버렸고 몰려가는 바람의 뒤 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바람이 잠들고 달빛 스민 바다가 기름처럼 조용한 밤에도 사각사각 그 종잡을 수 없는 소리는 수평선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식은 땀의 한기에서 깨어나는 새벽의 환청이 밤이나 낮이나 나를 따라다니는 모양이엇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흔들어 그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떨쳐내면 다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그 소리는 되살아났다.


<칼과 달과 몸>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인 k를 이길 수 잇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임진년 개전 이래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믿었다기보다는 그렇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숨막혓다. 좀더 정직하게 말해보자. 사실 나는 무인된 자의 마지막 사치로서 k의 생애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랏다. 바다에서 나의 무(武)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사치는 성립할 수 없었다. 바다에서 나의 위치는 늘 적과 맞물려 돌아갔다.

 다시 내 앞에 펼쳐진 바다에서 적의 조건도 보이지 않앗다. 가을빛이 스러져가는 바다는 차가웠고 외마디로 짖어대는 새들의 울음은 멀었다.


<비린 안개의 추억>

****봄에는 바다의 아침 안개가 일찍 삭았다. 물위에서 낮게 뜬 안개는 순하고 가벼웠다. 바람이 몰아가지 않아도 멀리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아침 햇살이 스미면 안개는 섬 사이를 디처럼 흘러서 먼바다로 몰려갔다.  해가 수평선을 딛고 물 위로 올라서면 해 뜨는 쪽으로 몰려간 안개의 띠들은 분홍빛 꼬리를 길게 끌면서 사라졌다. 걷히는 안개 너머로 먼 섬은 붉었고 가까운 섬은 푸르렀다.

새벽 순찰 길에 안개 속으로 배를 저어가면서 봄바다의 비린내는 온몸에 감겼다. 나는 차고 비린 새벽안개를 몸속 깊이 들이마셨다. 안개의 입자들이 허파 속으로 스몄다. 그 비린내는 새로운 시간의 비린내였다. 새로운 시간은 먼바다로부터 새벽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듯 했다. (262P)


<들리지 않는 사랑의 노래>

****갑작 왼족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렷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전부터 내 몸속ㅇ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갓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겼다.

-지금 사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엇다.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사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북을... 계속... 울려라. 관음포....멀었느냐?

난전은 계속 중이었다. 싸움의 뒤쪽 아득한 바다 위에서 노을에 어둠이 스치고 있었다. 적선을 태우는 불길이 바다 곳곳에서 일었다. 등판으로 배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적군들은 관음포를 향해 저어가고 있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비벼지면서 멀어져 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엇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도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 이 세상에 남겨놓고.....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3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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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4 03:06:03 *.85.249.182

<난중일기>를 읽는 내내 '사부님께서는 왜 이 책을 필독서로 선택했을까'를 생각했다.

장군 이순신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알게 된 것이 무척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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