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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4일 08시 13분 등록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표준영정.jpg

(장우성 1953년 작. 충남 아산 현충사 소장)

 

 

낯이 익다. 어디서 만났지? 생각났다! 저 표준영정보다 더 유명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두 가지, 100원 동전과 광화문 광장의 동상이다. 광화문 광장에는 세종대왕의 동상도 있다. 두 분 사이를 달리기 했고, 이번 여름에는 잔치국수를 먹고 오는 길에 앞에서 놀았다 

 

 

 

광화문이순신장군동상.jpg  사본 -사진 324.jpg

 

 

책 왼날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자는 여해(汝諧) ,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22세에 무인이 될 것을 결심하여 무예를 닦기 시작했으나 28세 때 응시한 훈련원 별과 시험에서 낙마하여 실격되었고 32세가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관직에 오른 뒤에도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다 47세 때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되어 왜의 침략에 대비, 병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제작한다.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이순신도 왕명에 따라 침전한다. 경상도 옥포, 합포, 적진포해전에서 왜선 수십 척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였고 이듬해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이 후에도 크고 작은 군공을 세우지만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중 원균이 죽고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용된다. 그리고 곧이어 치른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열세 척의 배로 왜선 백삼십여 척과 싸워 섬멸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1598년 퇴각하는 왜군을 맞닥뜨려 싸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그는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정조 19(1795) 왕명으로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순신의 유고집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되었다.

 

궁금한 점을 몇 가지 메모했다. 첫째 호 여해, 시호 충무는 무슨 뜻일까? 남의 이름에 관심이 많다. 둘째 22세에 무인이 되겠다 결심하고 무예를 닦기 시작해 32세에 무과에 합격했다. 시작이 늦다. 계기가 뭘까? 셋째, 파직과 복직을 왜 반복했지? 넷째, 원균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순신을 모함했을까? 다른 자료를 읽어본다. 네이버캐스트 김범씨 글을 주로 참고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칼의 노래는 읽지 못했다. 내가 작년에 난중일기를 사둔 건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1톤 농사트럭 앞에 있던 책이다. 이건 나에게 아버지의 책이다. 난중일기는 토지전집 21권과 함께 주문했다. 이건 엄마의 책이다. 내가 책 읽는 걸 엄마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너는 책을 많이 읽는데 토지 읽어봤나? 나는 읽어봤다." 고 하셨다. 엄마가 나에게 한 유일한 책이야기다. 두 분의 책을 읽고 남도여행을 가리라. 그리고 넘어서리라 했었다. 나는 네이버캐스트만 죽자고 베낀다.

 

 

1)    그의 이름에 담긴 뜻 충성스런 신하

 

이순신은 조선 인종 1(1545) 3 8일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신()’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무인이 된 과정 – 10년 문, 10년 무 공부

 

이순신은 서울에서 성장하다가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에서 생활한다. 서울에 있는 동안 3살 차이인 유성룡과 사귀었다. 유성룡은 “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선조실록] 선조 30 1 27)”고 선조(宣祖)에게 아뢸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 기억에 따라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인상 깊게 회고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그 뒤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이 있던 강릉(江陵)이라는 것이다.

 

그 뒤 1565(명종 20)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렇게 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그동안 이순신은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는 이런 학업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서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는 유성룡의 회고는 이때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선조 5)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3)    파직과 복직을 반복한 사연 전공과 입 바른 소리 때문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시작되었다. 그는 1576(선조 9) 2월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 31세였으며,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일생 전체가 그러했지만, 이때부터 부침이 심하고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이었고,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만기를 채운 뒤 1579(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8)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5)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가 반대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4)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때의 사건이었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그러나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7)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6)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이순신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3)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 2월 진도군수(4)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3)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3)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4)    원균은 왜 이순신을 괴롭혔을까? – 알 수 없다.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 1592(선조 25) 4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 2)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 22). 개전 두 달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 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 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만한 고난이 닥친 것은 1597(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그 날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 아들 울(-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이순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4 13). 그는 나흘 동안(4 16~19)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이때의 일기, 특히 맨 마지막 구절은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마음을 느끼게 한다.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中方浦)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 16)과 전주(8 25)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 3).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그는 명량(鳴梁)해전에 나아갔고(9 16),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그때 그의 마음과 자세는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글씨에 담겨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속히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이순신의 절망과 피로는 셋째 아들 이면의 죽음으로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수많은 죽음을 집행했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52세의 아버지는 다시 한번 통곡했다.

 

(10) 14일 신미. 맑았다. ····· 저녁에 사람이 천안(天安)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정신 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뉘게 의지한단 말인가. 부르짖으며 슬퍼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거대한 전란과 그 전란의 가장 중심에 있던 인물의 생애는 동시에 끝났다. 1598(선조 31) 11 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되었다. 그뒤 구국의 명장을 국가에서 추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604(선조 37) 선무(宣武) 1등공신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책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정조 17)에는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고 2년 뒤에는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그는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한 사람을 한 두 가지 모습으로 말할 수 는 없다. 그는 인간적으로 존경스런 사람이다.  

 

 

*자료출처

<난증일기> 민음사

네이버 캐스트의 내용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210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 및 목차

 

7년 일기가 해, , 날짜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임진년(1592), 계사년(1593), 갑오년(1594), 을미년(1595), 병신년(1596), 정유년(1597), 무술년(1598)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씌어져서 그가 전사할 때까지 계속된다. 어떤 해는 몇 달씩 빠져있다. 대부분 1일부터 30일까지 적혀있다. ‘맑음단 한 단어, 또는 ‘1일 맑음. 망궐례를 행했다. 낮에 활 열순을 쏘았다한 줄 일 때도 있지만 빠지지 않고 쓰려고 했다. 매일, 순서대로 쓴다는 일기의 특성 때문에 특별한 목차와 뼈대는 없다. 옮긴이의 머리말과 해제가 앞에 붙여져있다. 내가 읽은 책은 교감완역이라는 부제가 달린 민음사 것이다. 뒤에 교감기와 한자 본문이 달려있다. 전체 850여 페이지 중 본문은 450쪽이다. 

 

2)   장점 및 보완점

 

첫번째 장점, 한 인물의 일기이므로 한 사람의 여러 가지 면을 볼 수 있다. 그 다양한 면을 합쳐서 사람인 걸 알게된다. 효자, 전쟁영웅 군인으로서의 모습만 강조되어 알려졌다. 읽어보니 달빛 밝은 날 잠 못이루고 수루에 올라 밤을 새고, 분개하여 미워하고, 길 떠난 자식을 근심하고, 활을 쏘고, 꿈 이야기를 적고 있다. 술에 취해 토를 하고 몸이 아파 매일 목욕하러 간 것도 있다.

 

두번째 장점, 전란 중에 군인이 매일 쓴 일기이므로 전쟁의 다양한 모습이 들어있다. 전투 장면만 있는게 아니라 장수들이 모여 내기 활쏘기를 하고 종정도 놀이를 한다.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둔전을 경작하고, 옷을 마르고 메주를 쑨다. 공문을 작성해 올리고 병선 관리를 잘 못한 관리를 문초한다. 피난민을 본다. 이순신이 이런 일기를 남길 수 있는 것은 그는 군인이었지만 무인훈련 전에 문인 훈련이 10년 가량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 20살에 혼인하고 나서부터 무인 되는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31살에 급제를 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직업군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직업 안에서만 보이는 풍경을 쓰거나 이야기를 하는 건 무척 재미있는 세상 공부, 사람살이 공부일 듯 하다.  

 

세번째 장점, 누군가가 매일 쓴 일기를 읽어보니 일상의 기록의 중요함을 알겠다. 전란의 와중에 먹을 갈아 매일 초서체로 쓴 것을 읽는 감격과 황송함이 컸다. 한 단어를 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한다. 문득문득 아무것도 아닌 내용의 한 줄에 감동해서 울었다.    

 

보완점으로는 일기만 읽어서는 연표에 해당하는 일을 알 수가 없었다. 해당 인물에 대한 것도 그렇고, 전쟁에 대한 것도 그랬다. 이건 보충자료로 보완해 주어야 할 듯 하다. 그래서 만약 일기형식의 구성을 택해 책을 쓴다면,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한편 이런 덩어리 부분을 보완하여라 하리라. 이순신장군이 위대한 사람이고 임진왜란이라는 두 번 있지 않은 일을 배경으로 한 일기임을 알고서 읽기 시작하는 일기였지만 다른 형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으리라. 옮긴이 노승석씨는 난중일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여서 그의 해제가 도움이 되었다. 해제는 학문적인 글이었다. 난중일기를 읽고, 인간 이순신을 만나고 그의 삶에 비추어 나의 삶을 읽고 변화시키려는 이에게 그리 자세한 자투리 사항보다는 혹해서 훅 가게 하는 꼬시는 말이 좋을 것 같다.

 

3)   감동적인 장절

 

(1)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았는데 남아서 끝까지 장례를 집전하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 하는 장면 (정유년 4월의 일기)을 거의 전부 타이핑했다. 눈물이 많이 났다.  

 

9일 맑음. 동네 사람들이 각기 술병을 갖고 와서 멀리 가는 이의 심정을 위로해 주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홍군우는 창을 하고 이 별좌도 창을 하였다. 나는 창을 들어도 즐겁지 않았다. 금부도사는 술을 잘 마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 355

 

11일 맑음 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말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서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종을 보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 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 356

 

12일 맑음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어머니께서 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시며, 9일 위아랫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안흥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고 했다.

 

13일 맑음 아침 일찍 식사 후에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의 길로 나갔다. 도중에 홍찰방 집에 들러 잠깐 이야기 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냈을 때는 배가 왔다는 소식이 없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의 집에 왔다는 것을 듣고 홍찰방과는 작별하고 홍백의 집에 이르렀다.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후에 대강 적었다. – 357

 

14일 맑음. 홍 찰방, 이 별좌가 들어와서 곡하고 관을 짰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준비해 왔는데 조금도 흠난 데가 없다고 햇다.

 

15일 맑음. 늦게 입관하였다. 아버님의 친구 오종수가 정성을 다해 상을 치르게 해 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지 못하겠다. 관에 대해서만은 서운함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 군수가 들어와서 행상을 준비해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상복 만드는 일 등에 성심을 다해 주니 슬프고 감사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

 

16일 궂은 비가 왔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천안 군수가 돌아갔다.

 

18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고개도 내밀지 못하고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19일 맑음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지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노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하직을 아뢰었다. 금곡의 강선전의 집 앞에 당도하니, 강정, 강영수 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을 하였다. 또 보산원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와 있어서 냇가에서 말에서 내려 쉬고 갔다. 임천 군수 한술은 한양에 가서 중시를 보고 오는데 앞길을 지나다 내가 가는 것을 듣고 들어와 주문하고 갔다. 아들 회, , 울과 조카 해, 분 완 및 주부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왔다. 원인남도 와서 만나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에 도착하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20일 맑음. 공주 정천동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 이산에 가니 고을 원이 극진히 대접했다. 관아 동헌에서 잤다. 김덕장이 우연히 와서 만났고, 금부도사도 와서 만났다.

 

(2)   막내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접하는 아버지의 일기를 읽으며 나도 따라 울었다.

 

14일 사경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에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은 형상이 보이는 듯 하다가 깨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듣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봉에 통곡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 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424

 

(3)   활 열 순을 쏘았다고 이런 저런 사연 속에서도 꼬박꼬박 자기 훈련 내용을 적고 있다.

 

(4)   전투에 임해서 보고 들은 것을 쓴 이만이 전할 수 있는 전투장면이 아슬아슬하다. 장군의 통솔력이 뛰어나다.

 

16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부르며 말하기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ㄷ.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을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령하니, 한꺼번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기어가며 다투어 올라갔다. 이에 안위와 그 배에 탄 구사들이 각기 죽을 힘을 다해서 혹 몽둥이를 들어가 혹 긴 창을 잡거나 혹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난격하였다. 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기운이 다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어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사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잇달아 와서 협력하여 적을 쏘아 죽이니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넣은 붉은 비단 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가 각기 지자,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어 적선 서른한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서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의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살이 매우 험하고 바람도 역품으로 불며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이었다. – 419

 

(5)   여러 꿈 이야기

 

이순신 장군의 꿈이야기를 거의 다 타이핑했나보다. 매일 쓰다보면 꿈을 쓸 수 밖에 없었을 거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어. 나의 꿈작업에 대해 위로받고 지지받는다. 이순신장군의 꿈에 나도 투사를 해 보고 싶다. 따로 인용하지는 않는다.  

 

(6)   망궐례를 매달 1일과 15일에 했다는 말. 이건 스님이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예불을 모시는 것과 비슷한 의례다. 그에게는 임금에 대한 충성은 거의 종교이고 신념이었다. 이름대로 사는 것 같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의 동상을 세운 이가 주로 종교적인 조각을 많이 만들던 이라는 것도 비슷한 것 같다.

 

(7)   전쟁 상황의 일반 백성들의 어려움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들

 

 

(8)   매일 일상을 기록했기에 알게되는 전쟁을 구성하는 수많은 일상사들이 흥미로왔다. 군복 마름질, 띠풀 베는 배가 섬으로 들어갔고, 부하 장수가 좋아지내는 여자가 들어왔고, 명절에 제사음식을 나누고, 목수를 불러서 2년생 나무를 베러 갔고, 지휘선을 그을리고, 도망가는 이를 목을 베어 효시한다. 나랏 제삿날이라 공무를 쉰 것, 풍신수길의 부음을 들은 날, 활쏘기

 

(9)   한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본다. 그는 많이 아팠고, 아산의 아내와 부안의 첩이 있었고(이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니 많이 어린 듯 하다) 어머니를 염려했고, 원수사에 대해 분개했고, 강직하게 일을 처리했고, 달밝은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 이순신을 연구한 학자들의 정성   

 

옮긴이 노승석씨의 서문에서 한 구절

 

6 난중일기란 바로 그 당시의 충무공이 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기록한 진중일기다. 임진년(1592) 1 1일부터 무술년(1598) 11 17일까지 7년 동안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짜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일기 내용에 그의 전반적인 활약상이 담겨 있는데, 가족과 관계된 일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며 느낀 심중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데, 무능한 조정에 대한 탄식과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국난 극복에 대한 강한 염원 등을 서슴없이 드러냈었다. 충무공이 무관 출신의 장수로서 이러한 일기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문인적 기질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난중일기는 그의 문력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한다.

 

옮긴이의 해제에서 몇  구절

 

11 후대인들이 일기 문학 작품 중에서도 특히 난중일기를 대표작으로 손꼽는 이유는 결코 임진왜란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순신의 유일한 저작이라는 사실에 더해 작자 자신이 7년 동안 전쟁을 직접 체험하며 남긴 사실 기록이라는 점을 더욱 중요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14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있어 고난과 아픔의 시련이 연속한 한 해였다. 그는 정유일기1) 4 13일에서 모친의 상사로 매우 애통하여 다 적지 못하고 뒤에 대강 추록한다.’고 하였다. 제때에 글을 다 적지 못한다는 말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 매우 급박함을 암시하고 있다….이는 당시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투옥되었다가 다시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는 중에 또다시 모친상까지 당한 악순환의 상황에서 기록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역자 서문

 

5 만일 한 시대의 인물이 후대에 길이 기억되어 존경을 받는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의 도리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이순신을 4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나라를 위해 지대한 공을 세운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국난 극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항상 필사즉생의 각오로 전쟁에 임했으니, 진정한 구국의 명장이었다.

 

6 난중일기란 바로 그 당시의 충무공이 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기록한 진중일기다. 임진년(1592) 1 1일부터 무술년(1598) 11 17일까지 7년 동안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짜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일기 내용에 그의 전반적인 활약상이 담겨 있는데, 가족과 관계된 일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며 느낀 심중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데, 무능한 조정에 대한 탄식과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국난 극복에 대한 강한 염원 등을 서슴없이 드러냈었다. 충무공이 무관 출신의 장수로서 이러한 일기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문인적 기질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난중일기는 그의 문력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한다.

 

7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직접 초서체로 작성한 것이다. 알아보기 어렵게 흘려 있어서 후대에 해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해제

 

10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지금의 여수)에 부임하여 왜적의 내침에 대비하여 무기를 정비하고 거북선 제조에 착수, 왜구를 막기 위해 수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해상과 육지전을 모두 대비해야 한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듬해 임진년(1592) 3 27일에는 새로 만든 거북선에서 대포를 쏘는 시험도 하였다.

 

10 4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은 20여 만 명을 동원하여 배로 대마도로부터 온 바다를 뒤덮고 몰려오는데 이를 바라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10 그처럼 성실하고 면밀하게 작성된 일기에는 특이한 점도 발견된다. 예로 전쟁은 임진년 4 13일에 일어났지만 전서본 난중일기에는 1 1일자부터 적혀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순신이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년에 귀선을 만들고 군대를 정비한 것처럼 일기도 전쟁에 미리 대비하여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1 임진년부터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긴 일기는 물론 나중을 위해 개인적으로 작성한 비망 기록이지만 내용은 주로 일신보다는 국가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항시 전투가 따르는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항상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에 수십 차례의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1 후대인들이 일기 문학 작품 중에서도 특히 난중일기를 대표작으로 손꼽는 이유는 결코 임진왜란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순신의 유일한 저작이라는 사실에 더해 작자 자신이 7년 동안 전쟁을 직접 체험하며 남긴 사실 기록이라는 점을 더욱 중요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읽었다. 일기작가, 편지작가에 대한 책을 읽었다. 이오덕선생님의 책에서 자기 일기를 출판한 아이의 이야기를 읽었다. 구본형 사부님의 <일상의 황홀>도 읽었다. 일기가 쓰고 싶어졌지. 이 책도 그러하다.

 

13 난중 일기 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내용, 공문을 발송한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형한 사건, 장계를 올린 일 등이며, 그 중에는 장계 초안 및 서간문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간간이 삽입되어 있다. (임진, 계사, 갑오 일기) 또한 공사간의 인사 문제와 한탄 등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간혹 시와 문을 지어 적기도 했고, 옛 시문과 병서를 인용한 글과 이순신 자신의 별호인 일심을 연습한 낙서도 있으며, 명나라 장수의 이름과 그들로부터 받은 품목 목록도 적혀 있다.

 

13 아래의 표를 보면 큰 전쟁이 일어난 해에는 일기 분량이 일정하지 않고 누락이 심한 반면 큰 전쟁이 없었던 해는 비교적 일정하게 이어져 있다.

 

14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있어 고난과 아픔의 시련이 연속한 한 해였다. 그는 정유일기1) 4 13일에서 모친의 상사로 매우 애통하여 다 적지 못하고 뒤에 대강 추록한다.’고 하였다. 제때에 글을 다 적지 못한다는 말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 매우 급박함을 암시하고 있다….이는 당시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투옥되었다가 다시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는 중에 또다시 모친상까지 당한 악순환의 상황에서 기록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16 <충무공유사>는 이순신과 관련된 내용을 적은, 전사년, 전사자 미상의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이충무공 종가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거승로 현재는 현충사 유물전시관에 초고본 난중일기와 함께 소장되어 있다. 이 기관 관계자의 기록에 의하면 언제 누가 기록했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충무공 가문과 관계있는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짐작한다고 하였다.

 

19 전서본을 만들 때 삭제한 내용으로 추정되는 을미일기가 들어있다는 점이다.…지금까지의 난중일기가 전쟁 상황을 위주로 한 기록이었다면 이것은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내용을 위주로 적은 것이다. 특히 상관과 동료에 대한 불만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내용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해준다.

 

21 정조는 임자년(1792) 윤음에서 우리나라를 재건하게 한 황은을 길이 생각하고 우리나라 충신에게 미치어 빗머리에 전자를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요즘 이충무공유사를 읽으면 노량해전을 회상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다리를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을 하게 된다.(중략) 충무가 남긴 사적을 요즘 내각에 명하여 전서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활자로 인쇄되거든 그 한 본을 이 충렬사에 간직해 두면서 제사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임진년 (1592)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51 1 16…..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쳤다. 우후, 가수(임시 관리)가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 만하다.

병선 수리 류 일꺼리로, 나도 곤장 맞을 짓이 있나 살펴본다. 몇 가지 짚이네.

 

21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감목관이 와서 잤다.

 

22일 맑음. 아침에 광양현감 어영담이 와서 인사했다.

 

2 5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 열여덟 순을 쏘았다.

 

6일 맑았지만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편지 두 통이 왔다.

 

8일 맑았지만 또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이날 거북선에 쓸 돛베 스물아홉 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을 쏘았다.

 

23일 흐림. 늦게 배가 출발하여 발포에 이르자, 역풍이 세차 배가 갈 수 없었다. 간신히 성머리에 대고는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갔다. 비가 크게 내려 일행들이 우왕좌왕 하다가 꽃비에 흠뻑 젖었다.

꽃비에 흠뻑 젖었다는 말이 운치 있다.

 

24일 가랑비가 산에 가득히 내려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마북산 아래 사량에 이르러 배를 타고 노질을 재촉했다. 사도에 이르니 흥양현감이 벌써 와 있었다. 전전을 점검하고 나니 날이 저물어, 그대로 머물러 잤다.

 

3 2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승군 백 명이 돌을 주웠다.

 

4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다행이다.

 

6일 맑음. 아침 식사를 한 후 나가 앉아 군기를 점검하니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가 대부분 깨지고 훼손되어 제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색리, 궁장, 감고 등을 논죄하였다.

유비무환, 나도 이렇게 논죄당할 꺼리가 많다. 내가 직장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서 꼼꼼하지 못하고, 필요한 소모품이 넉넉히 준비되어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1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아침 내내 누워 앓다가 늦게야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무과에 급제한 장군이라고 매우 튼튼한 몸을 가진 게 아니었다. 술을 먹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아침 내내 누워 앓을 만큼 아픈 약골이신듯.

 

4 3일 맑음. 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 62

 

4, 맑았다 늦게 비가 조금 내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 62

한 줄 일기에 감동한다. 이 한 줄이 하루의 기록이다. 그는 전쟁 중에 붓으로 먹을 갈아서 이걸 썼다. 한 줄이라도 쓰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쓰기가 아니라 정신력의 문제다.   

 

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늦게 여필이 떠나갔다. 홀로 객창 아래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 63

 

14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 열 순을 쏘았다. - 63

한 줄짜리 일기에 감동한다. 22세에 무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32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전쟁 중에도 꾸준히 활을 쏘고 있다. 열 순은 얼만큼 쏘았다는 걸까? 열 순 쏘았다는 말이 반복된다.  

 

15일 맑음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 63

나라 제삿날이 많았을텐데 그날이 공휴일인가? 이순신장군이 자체적으로 정한 공휴일인가?

 

5 2일 왜적의 소식을 한 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군기 등의 물자가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오시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 군수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아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이 날 저녁의 군호는 용호라 하고 복병은 산수라 했다. - 66

 

3이날 여도 수준 황옥천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도망갔는데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내다 걸었다. – 67

 

29일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 원균이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 와 있어서 함께 상의했다. 왜적이 정박한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 했다. 바로 그곳에 가 보았더니 왜인들은 이미 뭍으로 올라가서 산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배는 산봉우리 밑에 줄지어 매 놓았는데 항전하는 태세가 재빠르도 견고했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들은 무서워서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활꾼과 격군 중에서도 탄환을 맞은 사람이 많았다. 적선 열세 척을 불태우고 물러나왔다. – 68

전쟁 장면이 그려진다. 무섭다.  

 

6 2우리 배가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서만 하였다. 배 위에는 누각을 꾸몄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오듯 마구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었고, 모조리 섬멸하여 남겨 두지 않았다. – 68

이 장면이 선명히 그려진다. 본 것을 그대로 썼다.  

 

3고성 등지로 고 보니 우리 순사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여 울분을 느끼며 하룻밤 머물러 자고 왔다. – 69

 

5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려고 비 내리듯이 화살을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 헤어릴 수 없을 정도였다. 왜장의 머리를 벤 것이 모두 일곱 급이고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로 올라가 달아나니, 남은 수효가 매우 적었다. 우릴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 69

 

8 24일 맑음. 아침밥은 객사 동헌에서 정영공과 같이 먹고 곧바로 침벽정으로 옮겼다. 우수사와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정 조방장도 함께 했다. 신시(오후 4시경)에 배를 출발시켜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삼경(자정 무렵)에 달빛 아래 배를 몰아 사천 모사랑포에 이르니 동녁은 벌써 밝아 왔지만, 새벽안개가 사방에 끼어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 71

 

27저물녁에 제포, 서원포를 건너니, 밤은 벌써 이경이 되었다. 서풍이 차갑게 부니, 나그네의 심사가 편하지 않았다. 이날밤은 꿈자리도 많이 어지러웠다.

28일 맑음. 새벽에 앉아 꿈을 기억해보니, 처음에는 흉한 것 같았으나 도리어 길한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 – 71

오호, 일기에 꿈을 적었다. 일기에는 꿈을 적게 마련인 듯. 꿈은 1시간이면 휘발되어 기억이 안난다. 새벽에 잠을 설쳤다는 말이 많다. 새벽에 일기를 쓰는 날이 많았을 거다.

 

71 일본은 해중 지역에 살고 있어서 비록 추운 겨울을 만나도 바람이 오히려 따뜻하여 장정들은 짧은 소매 옷만 걸치고 긴 옷에 겹주름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이제 흉적들이 오랫동안 남의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풍토에 익숙지 않아 한겨울 추위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내기 어려워할 뿐 아니라, 군량이 이미 다함에 기력 또한 다하였으니, 이 기회를 틈타 급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왕실을 재건하는 일이 바로 이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한 해가 바뀌려 하는데도 아직 적음 섬멸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 합니다.

옷에 겹주름을 하지 않았다는 건 두 겹 옷이 아니라는 말 같다. 임진왜란, 2차 세계대전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적이 많다. 이런 걸 어려운 책 말고 만화책으로 읽어보고 싶다.

 

72 군사들이 늙고 중도에서 굶주림과 추위가 한꺼번에 닥쳐와 과반수가 패주했습니다. 혹 패주하지 않은 자가 있어도 기근과 동상이 너무 심하여 사망하는 일이 연이었는데, 큰 고을의 경우는 삼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강성한 사람을 가려내 진압할 날을 정하고 출정을 독촉하니, 한 도가 소동하였습니다. 게다가 소모사가 내려와서 남아 있는 군사들을 징발하고, 각 진영과 포구에 방군을 나누고 여러 고을의 수병들도 그 정한 기일 내에 뽑아서 충원하니, 한 도가 소동하여 행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도를 보전하기가 어려운 것은 뻔한 일이니, 길에서 통곡하고 있으며

 

74 각 고을에 죽은 자가 자손이 모두 끊어진 경우에는 도목장에서 제외하라고 공문을 보냈습니다.

 

75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계책으로는 먼저 전례를 따라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 한 다음 차츰 조사하고 밝히어 군사와 백성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가장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계사년 (1593)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한 마음 그지 없네

 

 

 

77 계사년 2월은 대길하다

2월 일기를 대길하다고 시작한다. 점을 치나보다. 혼자서 주역 괘를 뽑아보든지.

 

3명부에 오른 격군 팔십여 명이 도망갔다고 보고하면서도 뇌물을 많이 받고 붙잡아 오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군관 이봉수, 정사립 등을 몰래 파견하여 칠십여 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어 주고, 김호걸, 김수남 등을 그날로 처형했다. – 78

 

5보성 군수는 밤새워 육로로 달려왔다. 뜰 아래에 붙잡아놓고 기일 어긴 죄를 추국하여 문초하니 순찰사와 도사 등이 명나라 군사를 접대하는 차사원으로서 강진, 해남 등의 관청에 불려 갔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역시 공무이므로 그 대장, 도훈도 그리고 색리 등을 나무랐다. 이날 저녁에 서울에서 온 벗 이언형과 전별하는 술자리를 가졌다. – 78

 

79 ..두 차례 유인했으나 우리 수군에 이미 겁을 먹고는 나올 듯하다가 돌아가 버려 끝내 잡아 섬멸하지 못하였다. 참으로 통분한 일이다. – 79

 

11일 흐림. 군사를 쉬게 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22매우 통분하였다. 이 때문에 수사(원균)를 꾸짖었는데 한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원균) 때문이다. 돛을 펴고 소진포로 돌아와서 잤다.

원균은 어떤 인물일까?

 

84 원수사는 그 흉악하고 음험함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양미 아흔 되로 자염(말갈기)을 바꾸어 보냈다.

? 이게 뭐지?

 

28경상 수사의 군관과 가덕 참사의 사후선 두 척이 섬 사이를 들락날락하는데 그 하는 꼴이 황당하므로 묶어서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가 크게 화를 냈다. 그의 본뜻은 군관을 보내어 어부가 건진 사람의 머리들을 찾아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초경에 아들 염이 왔다. 사회랑에서 잤다. - 85

어부가 건진 사람의 머리를 왜 찾아낼까? 이총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일본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와서 사람들의 귀를 베어갔고, 그걸로 만든 무덤이라고 했다. 그 생각이 난다.

 

30일 종일 비가 내렸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3 2일 온종일 비가 왔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 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 86

심난하다고 적고 있다. 일기여서 가능하겠지. 간략하다. 하지만 이런 모습에 정이 간다. 광화문 광장, 큰 칼 찬 동상으로만 보다가 이렇게 읽으니 인간적이다.

 

8일 맑음. 한산도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나니, 광양현감, 낙안군수, 방답 첨사 등이 왔다. 방답 첨사와 광양 현감은 술과 안주를 넉넉히 준비해 왔고, 우수사도 왔다. 어란포 만호도 소고기로 만든 음식 몇 가지를 보내왔다. 저녁에 비가 왔다. – 87

 

12식후에 우수사의 임시 머무는 방에서 바둑을 두었다. 광양 현감이 술을 마련해 가져왔다. 삼경에 비가 왔다.

전쟁 중에도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고, 소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이런 일상이 기록이 재미있다. 언제든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  

 

15일 맑음. ..여러 장수들이 관덕정에서 활을 쏘는데 우리 편 장수들이 이긴 것이 예순여섯 분이다. 그래서 우수사가 떡과 술을 장만하여 왔다. – 88

내기를 해서 술과 떡을 진 편에서 내고 있는 듯 하다. 군대에서 족구 말고 활 쏘기 내기를 했네. 

 

89 약속한 일 천고에도 들어보지 못한 융변이 우리 동방예의지국에 갑자기 닥쳐왔다. (그러나 인심이 견고하지 못한 상황에 왜적이 삼경을 함락하자,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적병을 겨우 근경에서 대하기만 해도 그들의 위세를 보고는 무너지니 모든 군량을 나르는 길이 왜구를 돕는 밑바탕이 되어 버렸다) 영해의 여러 성들은 적의 위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지니, 적이 석권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임금님의 수레는 서쪽으로 옮겨가고 백성은 짓밟힛고 살육을 당했으며 연이어 삼경이 함락되고 중사가 폐허가 되니 오직 우리 삼도 수군은 의리를 떨쳐 죽음을 바치려 하지 않는 이가 없건만 기회가 알맞지 않아 뜻한 바람을 펴지 못하였다.

 

91 가뭄이 너무 심하고 강의 여울도 매우 얕아져 적에게만 도움 되는 형세이니 천지신명께서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분한 마음을 품고도 할 말을 못하니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전에 안부편지를 받았으나 탄환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93 요즘 도내의 인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후퇴시킨 뒤로 군대의 사정은 근심에 괴로워하고 원망하여 바로 군사를 징발하는 명령을 내릴지라도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와 같음이 있으니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차라리 우선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을 늦추고 한번이라도 휴가를 얻게 해 준다면 인심은 필시 이러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95 혹심한 더위에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삼가 사모하는 마음 간절할 따름입니다. 전날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가물과 더위가 이토록 심하여 강여울도 매우 얕아져서 더욱 적을 도와주게 되었으니, 마침내 독한 왜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는 것은 촛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습니다.

 

96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쳐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까지도 차도가 없어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으니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98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일 갑옷을 착용하여 헌 상처가 뭉그러지고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있으며, 밤낮을 잊고서 혹은 뽕나무 잿물로 혹은 바닷물로 씻어 보았지만 아직 차도가 없으니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지금 나는, 반복해서 쓰고 있는 편지 초안을 읽고 있다. 편지마다 조금씩 자신의 상태를 묘사한다. 합쳐서 읽으니 상황을 알 것 같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의 문체가 마음에 든다. 강건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보고 듣고 한 일을 쓰고 있다. 문장이 길지 않다. 신뢰가 간다. 이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을 상상한다.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쳤다. 연일 갑옷을 착용하여 헌 상처가 뭉그러지고 고름이 줄줄 흐른다. 옷을 입지 못한다. 밤낮을 잊고서 혹은 뽕나무 잿물로 혹은 바닷물로 씻고 온갖 약재를 쓰고 있지만 차도가 없다. 편지의 초안을 여러번 쓰고 있다.   

 

100 나랏일에 힘쓴다는 이 한 가지 일은 지금에 급무이지만 몸의 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북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따름입니다.

 

103 전라도에 새로 운 관찰사와 원수 조차도 군관을 보내어 연해에 있는 수군의 양식을 쌓아둔 곳간을 털어 싣고 가고 있습니다.

 

5

104 9 17일 대포에서 세 섬지기를 타작하여 백서른세 섬 다섯 말이 나왔다.

나는 뭣 하러 이런 구절에 밑줄을 긋고 있을까? 만약 이순신이 이런 걸 기록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 당시 그 밭에서 세 섬지기에 백서른 세 섬 다섯 말이 나오는 걸 어찌 알겠나? 일상을 담담히 기록하는 일의 중요성을 읽는다. 

 

104 글로 적기를 생각했으나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이어 적는다.

 

1일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 105

2일 맑음. 선전관 이춘영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도망가는 적을 막고 죽이라는 것이었다.

 

4일 말음.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

어른 생신 때 잔을 올리는 이유가 건강과 장수를 비는 의미인가보다. 나도 잊지 말고 올려야할텐데 이런데 너무 소홀하구나.  

 

5일 맑음. 선전관 이순일이 영남에서 돌아왔기에 아침밥을 대접했다. – 105

영남에서 그가 돌아온 것을 상관이 알고 있다. 그리고 와서 상관이랑 같은 상에 앉아 아침을 먹어도 그는 알 수 있으리라. 이 상관이 자신의 노고를 알고 있고, 또 작은 성의를 보여 마음을 표현하고 있음을.

 

13..이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이 치밀었다.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닭이 울고서야 선잠이 들었다. – 108

 

14 ..동시에 선전관 영산령 예윤이 또 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들에게서 피난간 임금님의 사정과 명나라 군사들의 소행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나는 우수사(이억기)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대화하며 술을 여러 잔 마셨는데, 영남 우수사 원평중이 와서 술주정이 심하기가 차마 말할 수 없으니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16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신음하던 중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오래 체류하는 것은 반드시 교묘한 계책을 내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 109

 

17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과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통분하고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불어 마음이 또한 어지러웠다. 고성 현령이 군관을 보내 문안하고, 또 약술과 쇠고기 음식 한 꼬치와 꿀통을 보냈다고 한다. 상중이라 받아 두는 것이 미안하지만 간절한 심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되돌려 보낼 수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109

, 소고기 음식 한 꼬치, 꿀통을 보낸 간절한 마음이 무엇일까? 상중에는 왜 좋은 음식을 먹지 않은 걸까? 이것이 옛 사람들의 상실에 대한 대처법인 듯 하다. 3년상을 둔 이유에 대해 사기열전에서 공자는 어머니가 젖 먹여 길러 사람 꼴을 내는 게 3년이라고 대답했다.

 

18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를 하고 나니 몸이 조금 편안해진 듯 하다. 종 목년이 해포에서 왔는데 이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답장을 써서 미역 다섯 동과 함께 집으로 보냈다. - 110

 

19윤봉사와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여러 장수들이 애써 권하기에 몸이 불편해도 억지로 먼저 고기 맛을 보게 되니, 더욱 더 비통하다. – 110

 

순천 부사가 소고기 등 일곱 가지 먹을 것을 보내왔다. – 110

 

22오후에 칠천량으로 배를 옮겨 대고 접대의 예를 문의할 일로 나대용을 내보냈다. 저녁에 방답이 와서 명나라 사람 접대하는 일에 대해서 말했다. – 112

 

26송한련이 탄 협선은 발포 배에 부딪쳐 부서진 곳이 많다고 한다고 한다. 늦은 아침에 경상 우수사가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나친 말이 많으니 가소롭다. – 114

 

30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옆에 댔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였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 수사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윤봉사가 일 때문에 본영으로 돌아갔다가 군량미 열네 섬을 싣고 왔다.

현령이면 군수쯤 되는 벼슬인가보다. 아내는 남아서 집과 제사와 자식들을 지킬 테니 같이 노는 여자인가 보다. 그 이들에 대한 이순신의 비판이 준열하다. 강직하다. 

 

6

1일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의 편지도 왔는데 평안하시다고 한다. 정말 다행이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도 함께 왔다. 명나라에서 온 관원 양보가 왜놈의 물건을 보고 기뻐 날뛰었다더니, 왜놈의 말안장 하나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 116

임진왜란 당시 중국은 명나라. 일본과 어떤 상태? 이런 거 궁금할 때 읽을 정말로 간단한 역사책 한 권 있으면 좋겠다. 300페이지 이내,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쉬운 역사책

 

충청 수사와 함께 조용히 이야기하고 저녁밥을 대접했다. 그 편에 들으니 황정욱, 이영이 강가에 나가서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날은 맑았다. - 116

 

2강용수도 왔기에 식량 다섯 말을 주어서 보냈다. – 116

실명을 일기에 사용했다. 난중일기 뒤에 있는 주에는 실명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내가 직장에서 있었던 일, 개인적으로 있었던 일을 일기식으로 기록할 때 그의 실명을 사용한다면 개인의 비밀을 너무 가볍게 다룰 수도 있다. 나의 프라이버시도 있고.  

 

저녁에 송아지를 잡아서 나누어 먹었다. – 116

 

3. 새벽에 맑더니 늦게 큰 비가 내렸다. 상선에 연기를 그을리기 위해 좌별선에 옮겨 탔다. 막활쏘기를 하려는데 비가 많이 왔다. 온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앉을 만한 마른 곳이 없었다. 한심스럽다.

 

각도의 군마가 기껏해야 오천을 넘지 못하고, 군량도 거의 다 떨어졌다고 한다. 적도들의 독기는 날로 더하는 데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하랴. 초경에 상선으로 돌아와 침실로 갔다.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 117

 

5일 종일토록 비가 쏟아져 사람들이 머리조차 내밀지 못했다.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저물녁부터 바람이 불더니 매우 거세져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이홍명이 왔다가 저녁식사 후에 돌아갔다. 경상 수사가 웅천의 적들이 혹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면서 공문을 보내어 토벌하자고 하였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문장이 마음에 들어 밑줄

 

8..광양 현감이 소고기를 내와서 함께 먹었다.

 

옥과의 향소는 전년부터 군사를 다스리는 일을 신중히 하지 않은 탓에 결원을 많이 내어 백여 명에 이르렀는데도 매양 거짓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오늘은 사형에 처하여 효시했다.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웠다.

9일 맑음. 수십 일 내린 궂은비가 비로소 개니,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개고기를 바쳤다. 몸이 불편한 것 같아 하루 종일 배에 누워 있었다.

 

11.. 비가 오다 개다 했다. - 119

 

12, 비가 오다개다 했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꺼리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종일 혼자 앉아 있었는데, 사량 만호가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이 구절을 읽고 출근하려 세수하다 세면대 위 거울을 보고 흰 머리를 몇 개 뽑았다. 저절로 날 때부터 흰 것이 자라고 있다. 나도 그럴 나이지. 하지만 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뽑은 건 아니었다. 같은 걸 가지고 다른 걸 생각한다. 이순신은 어머님을 떠올렸다. 

 

14가리포 첨사에게 오기를 청하여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광양현감은 노루고기를 내왔다. 

조찬모임

 

26순천의 군량 백쉰 섬 아홉 말을 받아 의능의 배에 실었다. – 124

이런 게 날마다 기록한 이에게 듣는 당시의 사정이다. 싸움만 한 게 아니라 군량미를 싣는다.

 

28그래서 진을 이끌고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니 적도들은 우리 군사들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 파도와 바람이 거꾸로 밀려와 들어올 수가 없어 머물러 밤을 지내고 사경에 불을도에 도착했다.

 

7

1. 맑음. 인종의 제삿날이다. 밤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고 홀로 뜸 밑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1.잠을 못자는 일이 제법 많다. 아파서 밤을 새는 일도 많다.

2.박정희대통령때 이순신장군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졌던가? 전두환대통령 때 더 그랬나? 군인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게 언제였지? 나라를 생각하여 밤잠을 못자던 이순신장군을 통해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잘 모른다. 궁금하다.   

 

2초저녁에 원연, 원식이 여기에 와서 군중의 일을 극도로 말하니 참으로 우습다.

우습다 를 외우자고 밑줄

 

8남해를 왕래하던 사람인 조붕을 통해 적이 광양을 친다 하여 광양 사람들이 이미 관청과 창고를 불질렀다.”는 말을 들었다. 그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 130

왜 그랬을까?

 

자기 고을인 산성 창고의 곡식을 남김없이 나누어주고 게포에 흰콩과 중간콩을 함께 마흔 섬을 보냈다고 했다. 또 행주성의 대첩을 전했다 .초경에 우수사가 청하기에 그의 배로 가보았더니 가리포의 영공이 몇 가지의 먹음직스런 음식물을 차려놓았다. - 130

배로 찾아간 게 재미있다. 흰퐁과 중간콩 마흔섬을 보냈다는 건 그냥 수다처럼 전하는 업무보고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 130

 

16일 아침에 맑다가 늦게 흐리더니 저녁에 소나기가 와서 농사에 대한 바람에 흡족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17일 비가 내렸다. 몸이 많이 불편하였다.

18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했다.

이 사람은 몸이 자주 아프다. 아픈게 3일이나 간다.

 

19저녁에 전주에서 피살된 장병들의 명부를 광양현감이 보내왔는데, 이를 보니 비참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 131

피살된 명부를 보고 원통해 하는 장수. 나도 그런 장수 아래서 싸우는 게 낫다. 그런데 전쟁에서는 반드시 양쪽에서 모두 피살된 명부가 생긴다. 눈물 흘리는 이들이 많다.  

 

22아들 울이 들어와서 어머님이 평안하시고 아들 염의 차도가 있다고 자세히 말했다. – 132

 

29일 새벽 꿈에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간 사내아이를 얻을 징조다.

 

흥양 현감은 학질을 앓아서 돌아갔고, 남은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어서다. 방답 첨사는 복병할 일로 돌아갔다. 본영의 탐후인이 와서 아들 염의 병이 차도가 없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다.

학질 : 말라리아

 

8

1일 맑음. 새벽꿈에 큰 대궐에 이르렀는데, 그 모습이 서울과 같고 기이한 일이 많았다. 영상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임금님의 파천하신 일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뿌리며 탄식하는데 적의 형세는 이미 종식되었다고 말했다. 서로 일을 논의할 즈음 좌우의 사람들이 무수히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아침에 우후가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 133

 

아침부터 아들 염의 병도 어떠한지 모르는데다 적을 소탕하는 일도 늦어지고 마음의 병도 침중하여 밖으로 나가 마음을 풀고자 하였다.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들 염의 아픈 데가 종기가 생겨 침으로 쨌더니 고름이 흘러나왔는데 며칠만 더 늦었어도 치료하기 어려울 뻔 했다.”고 한다. 매우 놀랍고 한탄스러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생기가 났다고 하니 다행임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라. 의사 정종의 은혜가 매우 크다. – 134

아픈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멀리 떨어져 있고, 전쟁 중이라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태.

 

10우영공(이억기)이 청하여 그의 배로 갔더니 해남 현감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러나 몸이 불편하여 간신히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왔다.

11. 늦게 소나기가 쏟아지고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 136

 

12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신음했다. 식은땀이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 137

 

13. 본영에서 온 공문을 작성해서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배의 뜸 아래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 137

 

14일 방답 첨사가 제사 음식을 갖추어 왔다. 우수사와 충청수사와 부천 부사도 와서 함께 먹었다.

전쟁 중이라도 이런 일이 있군.

 

16. 광양현감이 명절 음식을 갖추어 왔다. – 137

명절을 쇤다. 전쟁 중에도. 이 의례가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그러니 추석, 설에는 그냥 참석하는게 좋겠다.

제만춘을 불러서 문초하니 분한사연들이 많이 있었다. 종일 의논하고 헤어졌다. 초경이 되기 전에 돌아와 상선에 탔다. 이날 밤 달빛은 대낮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아 회포를 견디기 어려웠다. – 138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은 밤에 배 위나, 바닷가에 있으면 잠을 못 잔다. 이 사람은.  

이런 곳에 나도 머물고 싶다. 아름다움이 자극하는 회포를 알고 싶다.

 

25. 맑음. 꿈에 적의 형상이 보였다. 그래서 새벽에 각 도의 대장에게 알려서 바깥바다로 나가 진을 치게 하였다.

 

26흥양 현감도 와서 명절 제사 음식을 대접하는데 원 공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였다. – 139

술 마시고 주정하는 걸 싫어한다.

 

30일 맑음. 원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했다. 참으로 음흉하다가 할 만하다. 그가 거느린 배 스물다섯 척은 모두 다 내보내고 다만 칠팔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다 이따위다.

 

9

 

2남해현령(기효근)이 제찰사에게 질책을 받았는데 공손치 못하다는 이유로 불려간 것을 전하였다. 참 우스운 일이다. 기효근의 형편없음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3순찰사(이정암)의 공문이 왔는데 무릇 군사의 일가족들에 관한 일은 일체 간섭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새로 부임하여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 140

새로 부임하여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조처에 의해 그르칠 일이 많다. 공립학교 교사들은 옮긴 첫 해는 그 학교 분위기에 적응한다. 2,3년 차에 나름 열심히 일한다. 4년 차에는 마무리한다. 공립학교 교사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정도일까? 해야 할 일에서 빵구를 내지 않고, 민폐안끼치면서 뭔가에 내가 뛰어나야 한다. 나는 벌써 공립학교 특수학급 교사 12년차이다. 복지관에서의 시간제, 임시직, 전일제 경력까지 합치면 15년이다. 이제 이대로는 계속할 수 없는 때에 이르렀다. 구본형 사부님은 43살에 다시 시작했다. 나는 올해 41살이다. 남은 2년 동안 어떤 터닝포인트가 있을 수 있을 건가? 안식년이 필요한가?

 

올해 3번째 학교를 마무리 한 후 내년에는 새로운 임지로 간다. 특수학교로 내신 내볼까 고민한다. 어제 일산의 좋은 학교 박람회에 가서 특수학교 부분만 보았다. 인천의 세 특수학교 중 두 개, 연일과 인혜에서 부스를 만들어 나왔다. 작년에는 미추홀이 나왔다. 미추홀에 계시던 내가 마음으로 멘토, 역할모델로 생각하는 교감님이 연일부스 앞에 계시더라. 그분이 없으니 이런데 참여하지 않은 거다. 나는 그 분 계신 데로 갈까 어쩔까 잠시 생각했다. 손님이 계셔서 인사하지는 못하고 왔다. 그 분이 교장이 되면 분명 특수교육의 가장 큰 과제, 학령기를 마친 장애가진 이들의 직업재활을 위한 현재의 대책, 거점학교나 학교기업을 시도할 거다. 아직 인천에는 학교기업이 없다. 그 어려운 일에 도전해서 벌릴 관리자와 그 일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교사, 또는 실무진이 합쳐질 때 실현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고민을 할 때 필살기 책에서 읽은 개념이 마음에 든다. 현업과 천직 사이의 가교를 스스로건설하기, 현업의 업무를 분석해서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면서 그 업에서도 중요한 일을 4~5가지 골라서 업무 시간의 50%를 투자하기, 그 시간이 10, 1만시간이 쌓이면 성과가 난다. 그 일에 관해서는 자신이 탁월하게 해야 한다.

 

나는 몇 가지를 생각했다.

 

l  단일사례연구 : 교육청 안의 통합교육사례연구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내가 재미있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 특수교육의 꽃이라는 IEP(individualized education plan)의 연장이다. 현재는 통합교육 세팅이니까 한 해에 한 학생, 한 담임선생님과 협력해서 매년 한 편씩 내기. 지금까지 2편 내었고 1편 상을 받았다. 근데 1편은 시도가 의미였고, 상받은 1편은 같이 하기로 한 분이 워낙 뛰어났고, 그 분이 거의 다했다. 내가 혼자서 주도적으로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

l  현장연구 : 특수교육총연합회 전국 특수교사들과 하기

지역사회를 같이 살아가는 장애학생들과 일반학생들의 우정형성을 위한 장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어차피 한 학교에 4년 있게 되고, 특수교사는 한 학생을 거의 3년 아니면 4년 보게 되니까 3년 이상의 장기계획을 꾸려서 해 볼 수 있다. 계발활동을 통해 시도. 1번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연구부장님을 고생시켰지만 t검증이 뭔지도 모르면서 한 거.

l  교육복지 업무

-       학교를 배경으로 해서 가족지원프로그램을 지역사회 기관과 연계해서 해 내기

l  아이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내부에서 보기

이건 잘 할 수 있고,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나가야할 지는 모르겠다. 연구원에서 읽고 쓰기를 하고, 나를 대상으로 단일사례연구를 하듯 첫 책을 쓰는 것도 나는 이 일을 하는 연습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을 관찰하고, 좋게 만드는 것, 내 직업을 통해 하는 것

  

교사에게는 수업이 주업무인데 수업에서 뭔가 장기가 있어야 한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나의 민폐업무 ; 곡 필요한 일인데 중간치기도 관리가 안되는 것, 나도 이것땜에 죽겠고, 남들도 나땜에 돌아가실라 한다. ㅠㅠ

시간 맞추기

예산 집행

페이퍼 웍 계획 공지

학부모와 관계는 좋은데 계획성, 체계성, 일을 알리면서 홍보하면서 하는데 많이 떨어진다.

갈등 해결에 취약함

 

 

..에게 편지를 쓰고 전복으로 정을 표하여 보냈다. – 141

 

저녁때 탐후선을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오지 않았다. 해가 저무니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서 창문을 닫지 않고 잤더니 바람을 많이 쐬어 머리가 몹시 아플 것 같다. 걱정스럽다. - 141

 

오랑캐의 근성은 경박하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하다.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결사의 마음을 품고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므로, 아군의 (정예하게 훈련되지 않은) 겁에 질린 무리들은 일시에 놀라 달아나니, 그래서야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할 수 있겠는가. – 143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내리는데 마음을 다했는지의 여부를 기회와 사정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먼저 진격을 외쳐 서로 다투어 돌진하여 싸우게 되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처자를 돌아보고 살기를 탐하여 중도에서 빠지는 자가 있었고, 혹은 공로와 이익을 탐하여 승패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들어 마침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몸을 죽게 하는 재앙을 만든 자가 있었다. – 144

그럼 이 말을 뒤집으면 장수가 사랑하는 처자를 돌아보지 않고, 살기를 탐하지 않고, 공로와 이익을 가리지 않고 지혜롭게 하면(논공행상에 공평하면) 병사들의 마음을 얻겠고 싸움에 힘이 실리겠다. 두 가지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할 테니. 

 

 

 

갑오년 (1594)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1일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서도 다행한 일이다.

 

3.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해 질 무렵 관아에 들어가서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11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를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바로 고음천에 도착하였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과 함께 갔다. 어머님께 가서 배알하려 하니 어머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시었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 하니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 148 

 

12일 맑음. 아침 식사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르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 149 

 

19소비포 권관(이영남)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들의 사부와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어 간다는 말을 들었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원수사, 공여수, 이극성 들이 서로 눈독 들인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했다고 한다. – 150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자, , 권력남용에서 자유로우면 깨끗하다.

 

20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춥기가 살을 에듯 하였다. 각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 151

 

병들어 죽은 사람들을 거두어 장사 지내려고 임무를 맡을 사람으로 녹도 만호(송여종)을 정하여 보냈다. – 151

 

21일 아침에 본영의 격군 칠백마흔 두 명에게 술을 먹였다저녁에 녹도 만호가 와서 보고하는데 병들어 죽은 이백 열네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고 한다.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두 명이 원수사의 진영에 와서 적의 정세를 상세히 이야기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녹도 만호가 병들어 죽은 이백열일곱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고 했다. – 151

 

아침에 산역하는 일로 목수 마흔 한 명을 송득일이 거느리고 갔다. – 151

목수들도 전쟁에 동원되었구나.

 

원수사의 군관 양밀이 제주 판관의 편지와 말안장과 해산물, , 유자 등을 가지고 왔기에 바로 어머니께 보냈다. – 153

해산물, , 유자는 나이든 분께 보내기에 좋은 선물

 

늦게 원식이 서울로 올라간다고 왔기에 술을 대접해 보냈다. – 153

 

몸이 불편하여 저녁 내내 누워서 신음했다. 큰 바람과 파도로 배들을 고정하지 못하여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2

 

1일 맑음. 늦게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3일 맑음. 새벽 꿈에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식후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날이 저물어서 군막으로 내려갔다.

이게 내 꿈이라면 말은 나인데 어느 쪽 눈이 멀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맹목은 위험하다. 두 눈으로 동시에 보면서 해야한다. 왼눈과 오른눈 모두. 

 

5일 맑음. 새벽꿈에 좋은 말을 타고 곧장 바위가 첩첩인 큰 산마루로 올라가니 산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이 있어 자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깨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이 있어 자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깨었다. 그것이 무슨 징후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서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어두울 무렵 흥양 현감과 김방제가 유자 서른 개를 가져왔는데 금방 딴 것 같았다. – 157

 

어머니와 홍군우, 이숙도, 강인중 등에게 문안 편지를 써서 조카 분이 가는 편에 부쳤다. – 157

 

158 바다의 달빛이 맑고 상쾌하여 잠들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 158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는데 돼지고기를 가져왔다. – 158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 참담한 상황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물었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 순을 쏘았다. – 158

장군은 무인이기에 전쟁 중인데도 활 쏘기를 연습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면 감동받는다

하루키씨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쓰다가, 7시면 달리러 나간다. 거의 매일 달린다. 거의 매일 오전에는 글을 쓰며 보낸다. 집중을 하루에 5시간 정도 할 수 있고, 가장 집중력이 높은 시간에 글을 쓴다. 이런 패턴을 가진 전업작가들이 많다.     

 

무군사의 공문을 가져왔는데 시위하는데 쓸 긴 창 수십 자루를 만들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날 동궁이 추고한 것에 대한 답변을 써 보냈다. – 158

 

아침에 미조항 첨사(김승룡)가 와서 만났다. 술 석 잔을 권하고서 보냈다. 종사관의 공문 세 건을 작성하여 보냈다. 식후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니 경상 우수사가 와서 만났다. 술 열 잔에 취하여 말에 광기가 많았으니 우스운 일이다. – 159

낮술을 하시는구나.

 

161 암행어사 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한 난리는 생각지 않고 다만 눈앞의 임시방편에만 힘쓰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고 변명하는 말만 들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위하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3

 

수군이 많이 잡아오지 못한 일로 그의 수사(원균)가 매질을 하고 또 발바닥까지 치려고 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 164

 

6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7일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 패문에 대한 답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글 모양을 이루지 못했다

8일 맑음. 병세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고통스러웠다.

9일 맑음. 기운이 좀 나은 듯하므로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아프긴 해도 다른 증세는 없었다.

10일 맑음. 병세가 차츰 덜했지만 열기가 치올라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11일 큰비가 종일 내리다가 어두울 무렵에 개었다. 병세가 훨씬 덜하고 열도 내리니 참으로 다행이다.

12몸이 매우 불편했다.

13..몸은 차츰 나아지는 것 같으나 기력이 매우 쇠하였다. ..

14..몸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상쾌하지 못했다종일 몸이 불편했다.

15.   종일 신음했다.

16. 몸이 매우 불편했다.

17일 몸이 상쾌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18일 몸이 몹시 불쾌했다.

19일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20일 맑음. 몸이 불편하다

21일 맑음. 몸이 불편하다

22일 맑음. 몸이 약간 나아진 것 같다.

23일 맑음. 몸이 여전히 불편하였다.

24일 맑음 몸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25일 늦게 활터 정자에 올라갔는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숙소로 내려왔다. - 168

한 달 내내 아프다고 적고 있다. 이게 왜 마음에 무찔러 들어서 타이핑을 하는 걸까? 이 말을 장군은 일기에만 적고 다른 이들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 있었을까? 종일 누워 신음한 날 일어나 먹을 갈아 초서로 일기장에 아팠다고 쓰는 것 말고 자신을 위로하는 일을 더 했을까? 쓰는 것은 이야기하는 거고, 이야기 하는 건 통증을 줄여준다. 에스키모들은 눈의 하얀색을 가리키는 단어를 다른 이보다 더 많이 갖고 있다. 아프다는 상태를 표현하는 이순신장군의 여러 말을 읽는다. 이 사람도 지병이 있어서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몸이 많이 아픈 이들은 자신의 아픔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정신, 마음이 출렁거리는 이들도 자신을 관찰한다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문명이다. , 마음, 정신, 습관 모두 관찰이 가능하다. 개인들을 읽는 게 재미있으면 그걸 읽고, 추세 읽기가 즐거우면 거기 눈독을 들이면 된다.

 

난중일기를 읽다 보면 나도 일기를 쓰고 싶다. 나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다. 건조한 듯 담백한 문체가 좋다. 이런 식이 되겠지  

 

2012 9 21일 금요일.

 

하늘이 쾌청했다. 7 50분 출근. 어제 저녁에 S 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해서 할아버지가 어제 밤에 돌아가셨다 전했었다. 아이가 며칠 학교에 못온다고 담임샘한테도 알려달라고 한다. 우리 교실에서 받을 아이가 없는 날. 아이가 열이 올라서 설사를 계속하는데 어쩌나, 장애가 있는 그 집 아이들 둘 다 아프다. 그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장례식 자리에 장애있는 이 자매도 참석을 시키면 좋겠는데 그런 배려를 해주실까? 보이지 않고 지능제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이 할아버지와 작별하는 시간을 갖도록, 태어날 때부터 10년 이상 외할아버지와 같이 산 손녀의 자리에 있도록 배려해주면 좋겠지만 남의 일에 지나친 간섭이라 여겨져 잠잠히 있었다. “어머님 수고많으셨어요.”라고만 했다. 근무시간 전에 읽으려던 난중일기를 읽지 않고 보조샘에게 어제 순대국집에서 들은 이야기에 대한 잡념을 나눴다. 1시간 동안 서서 이야기를 했다. 동학년협의시간에 문상을 가야하냐고 물어보니 샘들이 보통은 아이들 가족들의 장례식에 교사는 참석하지 않는다 대답했다. 소식에 6학년 아이들은 그림일기를 모두 할아버지 돌아가신 걸로 썼다. 한 아이는 할머니, 아빠, 고모, 사촌들 이름, , 동생이 버스 타고 갔어요. 할아버지 뼈 있었어요. 꽃 꽂았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가 영구차, 화장터 라는 이름을 몰라도 거기 있었고, 납골당에 꽃을 바치는 손자의 자리에 있었다는 걸 읽는다. 옆에서 우리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방이 비었다고 말한다. 종일 아랫배가 간질간질 했고, 더럽고, 시끄럽고, 정리가 안되어 있는 것, 신경을 긁는 졸림을 당할 때 아랫배가 더 콕콕 쑤셨다. 뒷 머리 당기고, 귀 따끔거린다. 급식 먹을 때 4학년 두 아이를 나란히 앉히고 건너편에서 먹었다. 우유를 마셔서 먹을 생각이 전혀 없는 아이가 서리태콩밥을 가지고 나에게 칭찬과 관심을 요구한다. 들들 볶이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읽혔지만 나는 아이가 내 쪽으로 자꾸 내미는 콩밥 숟갈을 모른 척했다. 아이는 1숟갈 먹고 만다. 내가 받아주었으면 3숟갈은 먹었겠지만 오늘은 못하겠다. 옆의 아이가 잘먹어서 칭찬해주니 그 아이를 쿡쿡 찌른다. 이 아이는 기분이 상했는지 내 손을 잡고 교실로 돌아오면서 제 턱을 내 손등에 쿡쿡 찌른다. 말을 못할 때는 자기 이마를 찧어 자해를 했다고 했다. 여러 아이를 기르는 엄마들의 힘듬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금요일 오후에는 두 아이가 복지관에 가고, 한 아이는 결석이어서 수업이 일찍 끝나는 게 고맙다. 그래도 이번 주에 27시간을 꽉 채워서 한 시간도 공강 없이 수업했다. 6학년 아이들도 지쳐 해서 마지막 시간에 대청소를 했다. 특수학교 실과 보충교재에서 스티커를 붙이며 연습한 대로 청소기, 긴 빗자루, 손걸레를 썼다. 수업시간에 다루니 아이들이 더 도구를 잘 다루는 것 같다. 이런 공부가 더 유용하다. 재활용 쓰레기와 20리터 봉투를 급식실 뒤에 두 아이와 들고 갔다. 한 아이가 대단히 재미있고 보람 있어 했다. 2시 출장 달고 일산 킨텍스 좋은 학교 박람회 갔다. 담주 계획 입력하라는 교무부장님 전화가 와서 달려가 다시 컴을 켰다. 이세일선생이 운전하고 4명이 타고 갔다. 기념 사진 2장 찍고 그들은 돌아갔다. 어린이집에 애기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특수학교 전만 봤다. 2층 중식당 앞에서 아메리카노 마시며 4시간 동안 난중일기를 220쪽 읽었다. 택시 타고 마두역 와서 3000번 타고 자면서 부평 왔다. 전철로 돌아오니 늦었지만 금요일 오후의 피곤이 많이 풀려있다. 몸은 여전히 지쳐있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의 피곤이 풀려 있다. 책 읽다가 소매로 눈을 찍으며 좀 울어서 그런가? 료까들은 잘 들어간 것 같다. 아부지한테 전화했다. 그사람에게 보내는 사과는 내가 보내는 선물이라고 하지 않고, 현금을 내게 직접 준 이가 있어서 내 이름으로 계좌이체하겠다고 했다. 그가 어떤 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이건 내가 아버지한테 사서 보내는 내 선물이지 아부지가 보내는 건 아니라고 말해두었다. 이래 놓고도 또 내가 퍼주나 안달복달 했었다. 내게는 사과가 최고의 선물이다. 식용유나 비누세트보다 이게 낫다. 안동 올케가 전화해서 담주에 올거냐 묻는다. 엄마가 팔을 다쳐서 명절 전과 떡을 사자 한다. 나는 모르겠다, 의논해서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4

 

3일 오늘 여제를 지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천팔십 동이를 먹였다.

4일 늦게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장흥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종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5일 흐림, 새벽에 최천보가 세상을 떠났다. 

6일 막음. 별시 보는 과거시험장을 열었다.

전쟁 중 한 줄짜리 며칠이 비빔밥 같은 인생사를 고루 보여주는 듯 하다.

 

25일 맑음. 새벽부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고통스러웠다.

26일 맑음 통증이 극히 심하여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27일 통증이 잠시 그쳤다.

28일 기력을 차려 아픈 증세가 많이 덜했다.

 

5

 

발포 만호(황정록)가 떡을 만들어 보내왔다. – 175

오후에 원수사가 왜군 세 명을 붙잡아 왔기에 문초해 보니, 온갖 속임수를 쓰므로 원 수사로 하여금 목을 베고 보고케 했다. 우수사도 왔다.술을 세 순배 돌린 다음자리를 피하고 돌아갔다. – 176

7일 기운이 편안한 것 같다. 침 열여섯 군데를 맞았다.

 

9일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멍하기가 취중이고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하다. – 176

 

온종일 홀로 앉았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었다. - 178

 

21일 배가 계속 내렸다. 웅천 현감, 소비포 권관이 와서 종정도 놀이를 했다. - 178

종정도 놀이 나도 해 본적 있다. 이 놀이 이름을 읽으니 전쟁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22일 오는 29일이 장모의 제삿날이라, 아들 회와 면을 내보내고 계집종들도 내보냈다. – 178

 

6

 

나는 몸이 불편하여 일찍 돌아와 누워서 청청 수사와 배문길이 장기를 두어 내기하는 것을 구경했다. – 180

 

저녁에 겸사복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내용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예전의 폐습을 모두 바꾸라.”는 것이었다. 통탄하는 마음을 어찌 다하랴.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하여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 181

 

밤이 깊은데 해의 피리소리와 영수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들으면서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10. 더위가 찌는 듯 하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11일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가는데 이별하는 심회가 그윽하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정을 스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저녁 바람이 몹시 사나와져 걱정이 더욱더 심해졌다. 충청수사가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헤어졌다. – 182

달빛 아래 물가에서 피리나 거문고 소리를 들어보고 싶어지네

 

이날 밤 소나기가 흡족하게 내리니 어찌 하늘이 백성을 가엾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했다. 또 아내의 언문 편지에는 아들 면이 더위 먹은 증세로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마음이 애타고 답답하다. – 183

 

7

 

3일 맑음 충청 수사와 순천 부사가 활을 쏘았다. 웅천 현감 이운룡이 휴가를 신고하고 미조항으로 돌아갔다. 음란한 계집을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 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저녁에 새로 지은 다락에 나가 보았다.

 

밤 이경 말에 소나기가 세차게 내렸는데 빗발이 삼대 같아서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 187

 

10아침에 들으니 아들 면의 병이 다시 심해지고 또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고 하므로 울과 심약 신경황, 정사립, 배응록 등을 함께 보냈다. – 188

 

11일 궂은비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부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울이 가는데 어려울 것 같아 많이 염려되었고, 또 면의 병이 어떠한지 궁금하였다. 장계의 초고를 직접 고쳐 주었다. …오후에 군관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봉학도 함께 활을 쏘았다. 윤언침이 점검 받으러 왔기에 점심을 먹여 돌려보냈다.

자식들이 길을 떠나면 많이 염려한다. 집에 병들어 아픈 아이가 누워 있다. 그는 태생적으로 강건하고 강한 사람이 아니라 낭중지추를 다듬듯 자신을 다독이고 계속 노력해간다. 정진한다. 

 

12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또 면의 병세가 중하다고 하였다. 몹시 애타는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유상(유성룡) 부음이 순변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 훼방하는 것이라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 상이 만약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 188

병든 자식, 유성룡 정승에 대한 걱정과 번민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그도 항상 강했던 게 아니었다. 이순신장군에게서 위로 받는다. 그러니 나도 소심함, 안달복달 있어도 되고, 힘들 때 계속 숨어 울어도 된다. 이것만 내 인성 바구니에 든 게 아니다. 그걸로 어느 방향을 향해 가고, 무엇을 만들어 내고, 얼만큼 행복한가가 중요하다.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되어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유 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한 것이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비가 올 것인가 갤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것이다.

점을 쳐서 고민하는 것을 알아보고 있다.

 

14충청 수사와 순천 부사를 불러서 장기를 두게 하고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근심이 있으니 어찌 조금인들 편안하랴! – 189

 

19..점심을 올린 뒤에 경상 원수사가 혼자서 술 한 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지만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우스웠다. – 191

 

21저녁에 소비포 만호가 와서 보고는 하는 말이 기한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원수사에게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고 한다. 몹시 해괴한 일이다. 우수사가 군량 스무 섬을 빌려 갔다. – 193

요새 학교폭력이 문제다. 학교폭력에 대처하는 연수를 받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교사가 참고자료로 내어놓을 수 있는 것 중 일지가 들어간다. 만약 우수사가 군량 스무 섬을 빌려갔다이런 식의 붓으로 쓴 일기가 남아있다면 그건 중요한 증거가 된다. 학교 일도 마찬가지다. 그저께도 학부모가 교사를 경찰에 고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급하게 만든 것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  

 

22..저물녁에 수루에 올라가 밤이 되어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 193

 

24일 맑음 여러 가지 장계를 직접 봉했다. 충청수사가 우수사, 가리포 첨사와 함께 와서 만나고 활을 쏘았다.

 

25아침식사를 하고서 충청 수사, 수천 부사 등과 함께 우수사에게로 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크게 취해 돌아와서 밤새도록 토했다. 

 

27,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밤의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는데 이것은 매우 길한 조짐이라고 했다. ..나는 몸이 불편하여 조금 마셨는데 역시 좋지 않았다.

 

8

 

2초하루 자시에 꿈을 꾸린 부안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 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쫒아 버렸다.

 

4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 여자들에게 떡과 음식을 이고 오게 한 일로 경상 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을 처벌했다. 화살장이 박옥이 와서 대나무를 가져갔다.

이런 구절도 나는 재미있다. 여자들에게 떡과 음식을 이고 오게 했대.  

 

14왜선 한 척이 춘원포에 머물러 정박하였기에 뜻하지 않게 엄습하였더니 왜놈들은 배를 버리고 달아나서 우리나라 남녀 열다섯 명을 빼앗아 데려오고 적선도 빼앗아 왔다. – 197

 

원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수사는 머리를 들지못하였다. 가소로웠다. 가지고 간 술을 마시자고 청하여 여덟 순을 돌렸는데 원수가 몹시 취하여 자리를 파하였다. – 198

 

27. 우수사가 가리포 첨사, 장흥부사, 임치 첨사, 우후 및 충청 우후와 함께 와서 활을 쏘는데, 흥양 현감이 술을 내놓았다. 아침에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보냈다. – 200

전장에 있는데 3 1녀를 데리고 있는 아내가 위중하다니 그 마음이 어떠할까?

 

28아들 회가 편히 잘 갔는 지 몰라서 몹시 염려되었다. ..원수의 장계로 인해 문책하는 글이 내려왔는데 급히 올린 장계에 오해가 많았던 것이다. – 200

 

도둑 세 명 중에 장손은 곤장 백대를 치고 얼굴에 도 자를 새겨 넣었다. 해남 현감이 들어왔는데 의병장 성응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참으로 슬프다. – 200

 

30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김양간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평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하는 듯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수사의 일은 매우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곤양 군수가 병으로 돌아갔는데 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더욱 아쉬웠다. 이경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 201  

이 하루의 일기에 그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이 많이 들어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빠졌다.

 

9

 

1일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 보니, “종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와 어떤 소식이 올 것인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을 소식을 들을 징조다.

글자로 점을 쳤다는데 뭐로 했을까? 주역을 가지고 점을 많이들 쳤다. 동시성, 우연의 원리를 활용한 이런 것들이 많았다.

 

2일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다고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였다. 매우 걱정스럽다.

 

순천부사가 진에 있을 때 거제로 부하들을 사냥 보냈는데 모두 다 적에게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사정을 전혀 보고하지 않은 것이 몹시 해괴하다. 그래서 편지로 쓸 때 그것을 지적하여 보냈다. – 203

 

이날 밤 꿈 속에서 아이를 보았는데, 경의 어미가 아들을 낳을 징조다. – 205

경의 어미는 부안의 첩인가보다. 성웅 이순신의 글을 감동해서 읽다가 공식적으로 11처제를 채택하는 현재와는 다른 이런 제도를 사용하는 그를 보면 문화충격 같은 걸 받는다.

 

20. 새벽바람이 그치지 않았으나 비가 잠깐 그쳤다.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보니,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눈앞으로 달려와서 멈췄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흔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구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상이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이는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21일 맑음. 아침에 활터 정자에 나가 앉아 공문을 작성하여 보내고 늦게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순천부사, 충청수사와 종일 이야기했다. 어두울 무렵 여러 장수들에게 뛰어넘기를 하게 하고, 또 군사들에게는 씨름으로 겨루게 하였다.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 206

전라도 사투리 순천부사, 충청도 사투리 충청수사, 서울 말씨 이순신의 대화가 어떨까 상상해보니 재미있다. 

 

24일 맑으나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엇다. 아침에 대청에 앉아 공무를 보았다. 아침밥은 충청 수사와 함께 먹었다. 오늘 호의를 나누어 주었는데 좌도에는 누런 옷 아홉 벌, 우도에는 붉은 옷 열 벌, 경상도에는 검은 옷 네 벌이었다. – 207

 

10

 

10..맑음. 아침에 나가 장계 초고를 수정했다. ..이날 밤 두 가지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11일 맑음. 아침에 몸이 불편했다. 아침에 충청수사가 와서 만났다. 공문을 작성하고 일찍 방에 들어가 잤다.

12일 맑음. 아침에 장계 초안을 수정하였다비변사의 공문에 의하여 원수가 쥐가죽으로 만든 남바위(귀가리개)를 좌도에 열다섯 개, 우도에 열 개, 경상도에 열 개, 충청도에 다섯 개로 나우어 보냈다.

쥐가죽은 뭐지? 찍찍 거리는 그 쥐돌이인가. 누가 쓰지? 추운데 힘들겠다.

 

14일 맑음.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면서 육혈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쳤다. 말을 전해 준 자는 그 이름이 김서신(書信)이라고 하는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꿈이다.

15일 맑음. 박춘양이 장계를 가지고 갔다.

한 줄이나 멋지다. 한 줄이라도 매일매일 쓴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다.

 

19. 바람이 순조롭지 못했다.

 

20일 작별한 뒤에 대청에 올라 앉았더니 우수사가 와서 보고하고 돌아갔다. 공문을 작성할 일 때문에 나갔다고 생각된다.

21..영등포 만호가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그에게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기에 데려오라고 일러 보냈다.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22초경에 영등포 만호가 그 아이놈을 데리고 왔다. 심부름시키려고 머무르게 하여 재웠다.

23..그 아이가 아프다고 했다저녁에 그 아이를 보내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 아이를 데려오도록 한 사연은 자세히 적혀있지 않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29일 서풍이 불어 춥기가 살을 에는 듯 하였다.   

 

11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 214

 

11일 동짓날이라 11월 중임에도 새벽에 망궐례를 드린 뒤에 군사들에게 팥죽을 먹였다. – 215

임진왜란 때도 팥죽을 먹었구나. 이제 주 5일 수업을 하면서 겨울방학식이 12 31일은 되어야 시작된다. 아이들과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곤 한다. 이젠 동지를 기념해야겠다. 크리스마스 기념하는 생크림케잌 만들기도 재미있지만 동지를 기념하는 팥죽 쑤기도 재미있을 것 같다. 특수아동들은 생알심을 즐거이 비빌 수 있다. 이게 젤 쉬운 요리다. 만들어서 집에 보내든 해야겠다.

 

견내량에서 고기잡이를 한 사람 스물네 명에게 곤장을 쳤다. – 216

 

저녁에 윤련이 자기 누이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망언이 많아서 우스웠다.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유아된 세 자식이 끝내 의지하여 돌아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15일은 아버지 제삿날이라 밖에 나가지 않았다. 밤에 달빛이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누이의 편지는 연애편지? 나의 상상이 지나치다. 하하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어머님의 체후가 예전처럼 평안하시다고 한다. 매우 다행이다. 상주의 사촌누이의 편지와 그 아들 윤엽이 본영에 와서 보낸 편지를 읽어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 못했다. – 216 

잘 우시는 우리 장군님. 남자들도 잘 우는데 그걸 드러내지 못하니 참 어렵다. 남자들이 불쌍하다.

 

저녁에 이 경복이 자기 소실과 함께 들어왔다. – 217

전쟁 중에도 소실을 데리고 다니는 이도 있었구나. 그런데 나는 집에 갖혀서 살림 사는 것보다 전쟁터를 다니며 보는 게 덜 답답했을 것 같다.

 

25일 흐렸다. 새벽꿈에 이일과 서로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였다.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때를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고 구태여 음탕한 계집을 두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 밖의 집에 멋대로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생각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또 수군 각 관청과 포구에 육전의 병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라고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했다. 기지개 켜고 일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26 소한. 맑고 따뜻했다. 방에 들어앉아 공무를 보지 않았다. 이날 메주 열 섬을 쑤었다. – 218

1594 갑오년 소한 날씨가 어떠했는지, 메주를 얼마나 쑤었는지 누가 알겠나? 오로지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날이 기억되어졌다. 나는 한 줄짜리 난중일기의 기록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받곤 했다. 초서체는 흘림 글자라 알고 있다. 붓으로 일기를 쓰는 이 전란 중 장군의 모습에서 엄청난 성실성과 진실성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을 남김으로써 그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을거다. 안네프랑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열네살이었다. 이 소녀의 일기가 세계대전을 말해준다.일상을 기록하는 일의 중요함에 감동한다. 모두가 할 이야기가 있을 거다. 군인은 군인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살림 사는 이들은 살림사는 대로,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그걸 기록으로 남기면 남기지 않는 때와는 매우 달라진다. 메주 열 섬을 많은 이들이 이해 겨울 쑤었겠지만 이 메주 열 섬은 다른 집 것과 다르다. 기록되었기 때문. 나도 일상을 쓰고 싶다. 난중일기를 읽어가면서 드는 충동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 219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 219

 

기름먹인 부채 오백아흔 자루에서 7 10일 순변사에게 열 자루를 보냈다. 옷칠한 부채 쉰여덟 자루에서 다섯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냈다. 부채 쉰 자루에서 열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냈다. 갈모 마흔 개, 손칼 삼백스뭀 자루, 육장부 두 개, 들기름 먹인 종이 다섯 권, 기름 먹인 종이 다섯 권을 본영으로 가져왔다. ..부시 일흔 냥은 이미 명나라 장수에게 주었다. – 224

이런 낯선 단어가 재미있다. 들기름 먹인 종이, 옷칠한 부채라니 너무 귀엽다. 통영에는 옻칠 박물관이 있다. 통영에는 이순신장군이 삼도에서 모아들인 장인들이 남아서 많은 수공품을 만들었고, 그 전통이 이어져 훌륭한 가구장, 수공예 장인들이 많다 들었다.

 

삶은 대로서 약간 무거운 것이 쉰 개, 상품죽 열한 개, 약간 가벼운 대 쉰 세 개가 좋은 품질이다. 가볍고 작은 대 마흔 여덟 개에서 서른 개를 충청 병사에게 보냈다. - 224

 

 

 

병신년 (1596)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

 

 

1

 

5일 맑음. 공문을 작성하였다. 조카 봉과 아들 울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이다. 밤새도록 온갖 생각들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박이 내리고 동풍이 불었다. 식후에 순천부사, 흥양현감, 고성현감, 웅천 현감, 영등포 만호가 와서 이야기했다. 고성 현감은 새 배 만들 것을 감독할 일로 보고하고 돌아갔다. - 228

 

삼경에 꿈을 꾸니 선군께서 와서 부탁하기를 “13일에 회를 초례하여 장가보내는 데 알맞지 않은 것 같구나. 나흘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는 완전히 평소 때와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일기초) - 229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이경명과 장기를 두었다. 장흥부사가 와서 만났다.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지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쓴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롭다. 오늘이 바로 회가 전안하는 날이니,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 230

 

2

 

1일 맑고 바람이 불었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보성 군수의 기한어긴 죄를 처벌하고, 도망쳤던 왜군 두 명을 처형했다. - - 232

기한 어긴 죄는 나는 매우 자주 처벌받아야 한다. 곤장을 맞을래나?

 

9일 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걸렸는데 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홀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다른 이들도 보게 했지만 남들은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화룡이 되어 있었고, 내가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완상하는데 그 빛과 형상의 움직임이 기이하다고 할 만했다. 기이한 상서로움이 많은 것 같기에 적었다 (일기초) – 233

난중일기를 읽다가 꿈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거의 타이핑을 한다. 장군님께 꿈투사를 하고 싶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일기를 적는 이들은 꿈 이야기를 쓰기 마련이고, 내가 비정상이 아니라는 증거이기 때문인 듯

 

지휘선을 연기로 그을렸다. – 234

 

3

 

1일 맑음 삼도의 겨울을 지낸 군사들을 모아 임금님께서 하사하신 무명을 나누어 주었다. – 236

상을 받네. 군사들이 좋아했을래나?

 

13일 흐리고 큰 바람이 불었다. 아침에 박자윤(박종남) 영공을 불러서 밥을 함께 먹었다. 저녁 식사 후에 조형도가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오늘 군량을 계산하여 표를 붙였다. 충청 우후가 급히 보고하기를 수사 이계정이 불을 내고 물에 빠져 죽었으며, 군관과 격군 도합 백사십여 명이 불에 타 죽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 238

 

권동지와 장기를 두었는데 권준이 이겼다.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했는데 닭이 울어서야 열이 조금 내리고 땀이 흐르지 않았다. – 239

 

4

 

4일 맑음. 아침에 경상수가(배설)가 활쏘기를 청하기에 권, 박 두 조방장과 함께 배를 타고 경상 수사에게 갔다. 전라 수사가 이미 와 있었다. 같이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 241

 

16일 종일 큰 비가 왔다. 비가 흡족히 오니, 올해 농사는 풍년일 것을 점칠 수 있다. – 242

 

아침에 납채하는 글을 쓰고 조카 해의 합근(혼례) 용품을 함께 갖추었다. – 243

 

20일 늦게 우수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이영남이 장계 회답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남해 현령을 효시하라고 했다. – 243

 

23일 남풍이 세게 불어 배를 운항 할 수 없어 나가서 누대 위에 앉아 공무를 보았다.

 

24일 맑음 이른 아침에 아들 울과 조카 뇌, 완을 어머니 생신에 상 차리는 일로 내어 보냈다. 오시에 강천석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도망한 왜놈 망기시로가 우거진 풀 숲 속에 엎드려 있다가 붙잡혔고, 왜인 한 놈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곧 망기시로를 압송해 오게 하고 삼도에 나누어 맡긴 항봉한 왜놈들을 모두 불러 곧바로 모리를 베라고 명했다. 망기시로는 조금도 난색없이 죽으러 왔다. 참으로 독한 놈이었다. – 244

우리 입장에서는 독하고 징한 놈, 그들 입장에서는 애국자

 

30일 맑음. 활 순을 쏘았다. 아침에 원수(권율)의 계본과 기, 이씨 두 사람의 공초(죄인의 진술) 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눌러 앉을 수 있을 것인가. 괴이하다. (일기초)

권율은 자기 상관인가? 누구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5

 

4. 맑음. 오늘이 어머님의 생신인데, 몸소 나아가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멀리 바다에 앉았으니, 가슴에 품은 생각을 어찌 다 말하랴. 늦게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245

이런 심난한 날에도 홀로 나가 활을 쏘고 있다. 존경스럽다. 

 

몸이 춥고 불편해서 앓다가 토하고 잤다. – 246

 

15일 궂은 비가 개지 않아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새벽 꿈이 몹시 심란했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신지 소식을 듣지 못한 지가 벌써 이레나 되니 몹시 애가 타고 걱정이 된다. 또 조카 해가 잘 갔는지 모르겠다. 아침식사 후에 나가 공무를 보니 광양의 김두검이 복병으로 나갔을 때 순천과 광양의 두 수령에게서 이중으로 월급을 받은 일 때문에 벌로써 수군으로 나왔는데 칼도 안 차고 활도 안 차고서 무척 오만을 떨기에 곤장 일흔 대를 쳤다. 늦게 우수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몹시 취하여 돌아갔다. – 247

이중 월급을 받는 경우라. 원칙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전쟁 중이라고 해서 난리 답게 원칙을 흐트러트린 게 아니라 적용했다.

 

16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은 평안하시다고는 하지만 아내는 불이 난 뒤로 심기가 많이 상하여 천식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매우 걱정이 된다. …활 열 순을 쏘았는데 동지 권준이 잘 맞추었다. – 248

 

17, ..늦게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박, 권 두 조방장이 잘 맞추었다. 오늘 쇳물을 부어 소금 굽는가마솥 하나를 만들었다. - 248

그에게 활 열 순이 기본 하루의 연습량인 듯 하다. 나에게 활 열 순은 무엇일까? 몸이 아파도, 가족의 일로 속을 끓이고, 이런 저런 일 속에서도 해 나갈 활 열 순. 이게 바로 웅덩이를 채우면서 가는 자기 원칙의 부분이다. 운동 효과를 보려면 30분씩 주 3회 이상은 해야한다. 이건 건강을 위해서 해야하는 일, 그런데 만약 그걸로 먹고 살자면 1만 시간을 해야한다. 아버지는 섹스폰을 부는데 섹스폰 강습자가 1000시간은 불어야 소리가 난다고 말했단다. 삶의 흐름을 바꾸는 터닝포인트의 원리 이야기를 사부님은 입학여행을 갔던 아우라지의 물굽이를 가리키면서 해주셨다. 거기는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었다. 그 이야기를 회상해본다.

 

웅덩이를 만나면 채워서 넘쳐라, 자신의 진로를 막는 것과 싸우지 마라, 자기 원칙을 지키며 돌아가라, 채우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

 

이순신은 활 열 순을 쏘았다. 그리고 날마다 일기를 썼다. 자기 원칙을 지켰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십일조와 주일성수와 비슷한 개념의 일이 내게는 뭐지?

 

하고 싶은 건 모닝페이지, 아침정진, 그리고 정신 맑은 새벽과 아침에 일정 시간을 아침에 읽고, 정신집중 안되는 저녁에는 타이핑을 하는 것. 2학기 때는 좀더 안정적으로 그리고 성실하게 읽고 싶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만큼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6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사실인지를 살펴보니, 그렇게 한다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워 우선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기로 하고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세 조방장과 사도첨사, 방답 첨사, 여도 만호, 녹도 만호가 활열다섯 순을 쏘았다. 탐후선이 오지 않아 어머니의 안부를 알 수 없었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났다. – 251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였고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고 종일 고통스러워했다. 종 경이 들어왔는데 그 편에 어머니께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았다. 매우 다행이다. – 251

 

조형도가 무고하여 장계하되 수군 한 명에게 날마다 식량 다섯 홉, 물 일곱 홉씩을 준다고 했다니, 인간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놀랍다. 천지간에 어찌 이처럼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저물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 252

 

12일 가랑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아들 울이 들어왔는데 그 편에 어머니의 병환이 좀 덜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아흔(실제 여든 한 살)의 노인이 이렇게 위험한 증세(이질)에 걸리셨으니 염려가 되고 또 눈물이 난다. – 253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이런 효자가 되었을까/ 네이버캐스트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이 있던 강릉(江陵)이 된 것이 있다.”

 

 

거의 아이가 10살 정도 될 때까지 친정에서 살았다. 그러니 아이가 어릴 때 어머니와 이원동체로 살았을 테니 외가는 어머니가 가장 편안한 환경이었을 거고, 더불어 아이도 편안했으리라. 요새는 결혼식을 하자니 남자들의 집에 대한 부담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 많던데 거기서 처음 이걸 읽었다. 모계사회로 회귀한다는 요즘이 이것과 관련이 많네. 

 

오늘이 권언경 영공의 생일이라고 해서, 국수를 먹고, 술이 몹시 취했다. 거문고 소리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 255

생일날 국수를 먹었구나. 역사가 오래되었구나. 잔칫날, 생일날, 가토날 먹는 국수. 국수 중에 주특기 한 개만 있으면 좋겠다. 잔치국수나 칼국수?

 

7

 

1일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제삿날(인종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고 홀로 누대에 기대고 있었다. 내일은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이신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일기초)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 256

 

이경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기는 하나 밥맛이 쓰시다고 한다. 매우 걱정이다. – 256

매우 위독한 그의 아내의 안부는 여기 적지 않고 있다. 아들이 와서 분명 아내, 제 어머니의 안부 역시 전했을텐데. 이상하다. 내가 그의 아내를 대신해 섭섭해 한다.  

 

8

 

11일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종 한경도 본영으로 갓다. 배영수, 김응겸이 활쏘기를 겨루었는데 김응겸이 이겼다. – 263

 

15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이날 삼도의 사수와 본도의 잡색군에게 음식을 먹이고 종일 여러 장수들과 함께 술에 취했다. 이날 밤 희미한 달빛이 수루를 비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

로맨티스트 장군님. 전쟁이 아니었어도 가을 좀 심히 타셨겠다.

 

16일 궂은비가 개지 않고 하루 종일 부슬부슬 내렸다. 마음이 몹시 어지러웠다. 두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했다.

 

27일 맑음 군사 오천사백여든 명에게 음식을 먹였다. 저녁에 상봉에 올라 적진이 있는 곳와 적이 다니는 길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바람이 몹시 험하게 불었다. 밤을 틈타 도로 내려왔다.

28일 맑음. 이른 아침에 체찰사와 부사, 종사관과 함께 수루 위에 앉아 여러 가지 폐단을 논했다. 식사 전에 배로 내려와서 배를 몰고 나갔다.

 

9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천이백여든세 명에게 밥을 먹이고서 끌어내리게 했다. – 268

일을 시키기 전에 먼저 잘 먹여서. 동원된 사람이 많은 걸 보니 일이 많았나보다.  

 

경상수사가 와서 만나고 청하여 종일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아우 여필, 아들 울 들이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어 몹시 걱정되었다. – 268

 

12일 흐림, 아침에  충청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오기를 청하여 함께 아침밥을 먹고 늦게 헤어져 돌아왔다. 저녁에 경상 수사가 우후, 정항과 함께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헤어졌다. 저녁에 경상 수사가 우후 및 정항과 함께 술을 가지고 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헤어졌다. – 269

 

선수사와 이별할 때 짧은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이 시를 비단에 적었다. - 270

 

북방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했더니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

한잔 술 오늘 밤 달빛 아래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이 슬픈 정만 남으리

 

17일 식후에 서울에 편지를 써보냈다. 김희번이 장계를 가지고 떠났다. 유자 서른 개를 영의정에게 보냈다. – 271

 

웅천사람으로 포로가 되었던 박록수, 김희수가 와서 인사하고 아울러 적의 정세를 말해 주기에 무명 한 필씩을 나눠 주어 보냈다. – 271

 

25일 맑음. 미시에 녹도의 하인이 불을 내 대청과 다락방에까지 불길이 번져 모두 타 버렸다. 군량과 화약, 군기 등의 창고에는 불길이 미치지 않았으나, 다락 아래에 있던 장전, 편전, 이백여 개가 모두 타 버렸으니 한탄스럽다. 사경에 배에서 내렸다. 이른 아침에 목욕소에 이르러 식사 후 목욕을 하고 배에 올랐다. 음식을 조리할 때 미시였는데 녹도의 하인이 불을 내어 대청과 다락방까지 불길이 닿아 모두 타 버렸다. (일기초) – 272

 

10

 

오늘 회의 생일이다. 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추어 주도록 예방에 당부하였다. (일기초) – 273

 

16일 맑음. 새벽에 새로 지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우수사, 임치 첨사, 목포 만호 등이 왔다. 그대로 새 다락방에서 잤다. – 274

 

이날 밤 바람은 몹시도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은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는데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 275

 

21일 이설이 휴가를 신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바람이 몹시 싸늘하여 잠을 이룰 수 없기에 공태원을 불러 왜적의 정세를 물었다. – 275

 

28일 맑음. 경상 우후가 와서 만났다. 띠풀을 베러 갔던 배가 들어왔다. 밤에 비가 오고 우레가 치는 것이 여름철의 기상변화와 같으니 괴상한 일이다. – 276

전쟁 중에 띠풀도 베어야하는구나. 온라인게임 이순신게임에서도 나아가 전투만 하는게 아니라 군량미도 하고 고기도 잡고, 띠풀도 베고, 칼도 가는 프로그램이 들어갔으려나?   

 

11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 277

 

6일 맑음. 송희립이 들어왔다. 베어온 띠풀 사백 동과 생칡 백동을 실어왔다. – 278

 

11일 새벽에 선조 임금의 탄신을 축하하는 예를 드렸다. – 278

 

13일 맑음. 도양장에서 거둔 벼와 콩이 팔백스무 섬이었다. – 278

 

15일 맑음. 아버님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혼자 앉아서 그리워하는 생각에 품은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 279

 

22일 맑음. 새벽에 동짓날의 임금께 하례를 고하는 숙배를 올렸다. – 279

 

항복한 왜놈 여덟 명과 그들을 데리고 온 김탁 등 두 명이 함께 왔기에 술을 먹였다. 김탁 등에게는 각각 무영 한 필씩을 주어 보냈다. – 280

무명 한 필이 어느 정도의 포상금일까?

 

27일 김응겸이 이년생 나무를 베어 올 일로 목수 다섯 명을 데리고 갔다. – 280

 

28조카들과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야기하였다.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이 날은 장인의 기일이기도 하여 종일토록 나가지 않았다. – 281

장인의 제삿날은 기억하고, 첩의 아버지의 제삿날은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12

 

1일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2일 맑음 거제 현령, 당포 만호, 곡포 만호 등이 와서 만났다. 술을 먹여 취해서 돌아갔다.

 

6일 늦게 경상 수사가 와서 만났다. 저녁에 아들 울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 282

 

19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나가 공무를 보고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다 먹인 뒤 체찰사가 떠나고, 나도 배로 내려왔다. 바람이 몹시 사나워 배를 몰 수 없었다. 그대로 머물러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 283

 

 

병신년(1596)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

 

 

1

1. 맑음. 사경 초에 어머님 앞에 들어가 배알하였다. 늦게 남양 아저씨와 신사과가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에 어머니께 하직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몹시 심란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4송한련, 송한 등이 말하기를 청어 천여 두름을 잡아다 널었는데, 통제사께서 행차하신 뒤에 잡은 것이 천팔백여 두름이나 됩니다라고했다. 비가 몹시 퍼부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 286

 

6. 비가 계속 내렸다. 오수가 청어 천삼백열 두름을, 박춘양은 칠백여든일곱 두름을 바쳤는데,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리기로 했다. 황득중은 이백두 두름을 바쳤다. 종일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군량 오백여 섬을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7. 맑음. 이른 아침에 이영남과 좋아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이 치근거리기에 피해 왔는데, 바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 287

이런 걸 왜 장군에게 와서 말하지?

 

8. 맑음. 입춘인데도 날씨가 몹시 차가워 매서운 한겨울 같다. 아침에 우우후와 방답 첨사를 불러 함께 약식을 먹었다. 아침일찍 항복한 왜인 다섯 명이 들어왔기에 온 연유를 물으니, “저희 장수가 성질이 포악하고 일을 부리는 것이 고되어 도망나와 투항했습니다.” 라고 했다 .그들이 가진 크고 작은 칼들을 거두어 수루 위에 두었다. 그러나 실은 부산에 있던 왜적이 아니고 가덕도에 있는 심안돈의 부하라고 하였다. – 288

 

12일 맑았으나 서풍이 세게 불어 추위가 갑절 더했다. 사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영의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 다 의관을 벗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놓았다. 얼마 후 비바람이 억세게 퍼붓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를 되풀이하며 걱정하다가 말할 바를 알지 못했다. 일찍이 들으니 영의정이 천식이 심하게 걸렸다고 했는데 잘 나았는지 모르겠다. 척자점을 쳐 보니 바람을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을 들을 지 점쳤더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이 괘는 매우 좋다. - 289 

 

이날 저녁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없었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번잡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흥수를 불러서 피리 부는 소리를 듣다가 밤 이경에 잠들었다. – 290

 

15일 맑고 따뜻하다. 사경 말에 망궐례를 행했다. 아침에 낙안, 흥양 현감을 불러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늦게 대청으로 나가 공문을 작성하여 나누어 보내고 항복한 왜인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 290

 

18일 맑음. 아침부터 종일 군복을 마름질 했다. – 291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군복을 마름질하고 메주를 쑨다. 몸 안좋은 날 낮잠을 자고, 그리고 사람이 죽는다. 어디나 사람의 자잘한 일상이 펼쳐진다. 어디에도 덩어리 사건은 없다.  

 

20일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피곤하여 낮잠을 잠깐 잤다. 미시에 메주 만드는 것을 끝내고 부뚜막에 들여놓았다. 낙안 군수가 와서 둔전에서 거둔 벼를 실어왔다고 고했다. – 291

 

22이날 밤은 바람이 거세니 아이들이 들어오는 데 고생스러울까 염려되었다. – 292

 

28일 맑음. 늦게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오시에 순찰사가 와서 활을 쏘고 함께 이야기했다. 순찰사가 나와 상대하여 활쏘기를 하여 일곱 푼을 졌는데, 섭섭한 기색이 없지 않았다. 우스웠다. 군관 세 명도 다 졌다. 밤이 되어서 취하여 돌아갔다. 우스웠다.

29일 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 식사 후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순찰사와 함께 조용히 이야기했다. 오후에 활을 쏘았는데, 순찰사가 아홉 푼을 지고 김대복이 활쏘기에서 독보하였다. 피리 소리를 듣다가 삼경에 헤어지고 진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사도에서 화약을 훔친 자가 도망갔다. - 293 

 

2

 

3혼자 앉아서 자식이 떠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침에 장계를 수정했다.

 

5. 아침에 흐리더니 늦게 갰다. 사도 첨사와 장흥 부사가 일찍 왔기에 아침을 함께 먹었다. 식후에 권숙이 와서 돌아가겠다고 고하므로 종이와 먹 두개, 패도를 주어 보냈다. 늦게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는 음식을 먹이고, 겸하여 활도 소고 풍악도 울려서 취한 뒤에 자리를 파하였다. 웅천 현감이 손인갑이 사용한 구물을 가져왔기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야금 몇 곡조를 들었다. ..우수사의 편지가 왔는데 약속한 기한을 늦추자고 하니, 우습고도 한심스러웠다. – 295

 

6..송한련이 숭어를 잡아 와서 여도 첨사, 낙안 군수, 흥양 현감을 불러 같이 먹었다. 적량 만호 고여우가 큰 매를 안고 왔으나 오른쪽 발가락이 다 얼어서 문드러졌으니 어찌하겠는가. 초경에 잠깐 땀을 냈다. – 295

 

8..아침에 벚나무 껍질을 마름질했다. 늦게 손인갑과 좋아지내던 여인이 들어왔다. – 296

벚나무 껍질은 왜 마르고, 그가 좋아지내던 여인이 들어온 걸 왜 일기에 적었을까?

 

12..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 부사와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두울 무렵 헤어졌다. 어린아이가 초경에 돌아갔다. - 297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13제주 목사에게 답장을 보내는데 청어, 대구, 화살대, 곶감, 삼색부채를 봉해서 보냈다. – 297

 

14일 맑음 늦게 나가 공무를 보고 장계 초안을 수정했다. 동북의 계향유사 김덕린이 와서 인사했다. 경상수사가 쑥떡과 초 한 쌍을 보내왔다. 새로 지은 곳간에 지붕을 잇고는 낙안군수와 녹도 만호 등을 불러서 떡을 먹었다. 조금 있으니 강진 현감이 와서 인사하기에 위로하고 술을 마시게 했다. 저녁에 물을 부엌가로 끌어들여 물긷는 일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 이날 밤 바다의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 빛은 비단결 같았다. 혼자서 높은 수루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흥양 유사 송상문이 와서 쌀과 벼를 합해 일곱 섬을 바쳤다. – 297

떡을 누가 보냈고 누구랑 나눠 먹었다는 게 왜 이리 정답냐? 매일 적은 일기가 아니라면 기록되지 않았을 일이다.  

 

둔전에서 받아들인 벼 이백서른 섬을 다시 담아 백아흔여덟 섬으로 바로잡으니 서른두 섬이 줄었다고 했다. 낙안 군수에게 이별주를 대접해서 보냈다. – 302

 

3

 

15일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가리포 첨사, 방답 첨사, 녹도 만호가 와서 참석했고, 우수사와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다. 늦게 경상 수사가 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취해서 돌아갔는데, 그때 아랫방에서 덕이와 사담을 나눴다고 한다. 이날 저녁에 바다 위의 달빛이 어슴푸레하였다. 몸이 노곤하여 밤새도록 식은땀이 흘렀다. 삼경에 비가 몹시 왔다. 낮에는 노곤하여 머리를 빗었는데 수시로 식은땀이 흘렀다. 삼경이 비가 몹시 왔다. 낮에는 노곤하여 머리를 빗었는데 수시로 땀이 흘렀다. – 307

많이 자주 아프다. 머리는 참빗과 얼개빗으로 빗고 긴 머리에 상투를 틀었겠구나.

 

16일 비가 퍼붓듯이 쏟아져 종일 그치지 않았다. 진시에 동남풍이 세게 불어 지붕이 걷힌 곳이 많았고 창문의 종이가 떨어져 비가 방 안으로 흩뿌려서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다. 오시에 바람이 그쳤다. 저녁에 군관을 불러와서 술을 먹였다. 삼경 말에 비가 잠시 그쳤다. 어제처럼 땀이 흘렀다. – 307

 

17일 흐리다가 종일 가랑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늦게 나주 판관이 보러 왔기에 술에 취하도록 먹여 보냈다. 어두울 무렵에 박자방이 들어왔다. 이날 밤에 식은땀이 등을 적셔서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까지 젖었다. 몸이 불편했다. – 307

이부자리까지 다 젖을 만큼 땀을 많이 흘리고 있다. 식은땀

 

4

 

19일 맑음. 습열 때문에 침 이십여 곳을 맞았더니 몸에 번열이 나는 것 같아 종일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어두울 무렵 영등포 만호가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종 목년과 금화, 풍진 등이 와서 인사했다. 이날 아침에 남녀문을 통해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 말은 벌써부터 퍼졌었지만 아직은 확실한 기별이 오지 않았다. – 314

 

21일 맑음 아침식사 후에 경상도의 진으로 가는 길에 우수사의 진에 들러 경상 수사의 초청에 함께 갔다. 종일 활을 쏘고 잔뜩 취해서 돌아왔다. 신 조방장은 병으로 자기 집에 돌아갔다. 영인이 왔다. – 314

 

25일 또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물이 너무 뜨거워서 오래 있지 못하고 도로 나왔다.

26일 식후에 목욕했다

27저녁에 목욕을 한 차례 했다.

28일 아침과 저녁 두 차례 목욕했다.

29일 저녁에 한 번 목욕했다.

30일 저녁에 한 번 목욕했다….. 315

매일 목욕했다고 적고 있다. 몸이 나빠서 그런 것 같다.

 

5

 

6일 아침에 흐렸다가 늦게 큰비가 왔다. 농민의 소망을 흡족하게 채워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비가 오기 전에 활 대여섯 순을 쏘았다. 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초저녁 무렵 총통과 숯을 넣어 둔 창고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 이는 감독관들이 새로 받은 숯을 쌓을 때 조심하지 않고 묵은 불씨를 살피지 않아서 이러한 재난이 있게 한 것이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울과 김대복이 배를 함께 타고 나갔다. 비가 크게 쏟아졌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앉아서 걱정했다. - 317

걱정이 참 많은 양반이다. 걱정 때문에 밤잠을 못 잔다는 말을 여러 번 읽었다.

 

24일 아침에 날이 흐려 비올 징후가 많았다.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저녁에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부산 허내은만의 고목이 들어왔다. 좌도 각 진영의 왜군들이 모두 철수하여 떠나고 부산의 왜군만 남았다고 했다. 명나라 수석 사신이 갈려서 새로 정해진 사람이 온다는 기별이 22일 부사에게 왔다.고 한다. 허내은만은 술쌀 열 말, 소금 한 곡을 보내주고 진력하여 정보를 잘 탐지하라고 했다. 어두울 무렵 비가오더니 밤새도록 퍼부었다. 박옥, 옥지, 무재 등이 화살대 백쉰 개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 (땀이 잠시 흘렀다) - 320

 

6

 

3일 흐림 아침에 제포 만호 성천유가 교서에 숙배했다. 김양간이 농사짓는 소를 싣고 떠났다. 새벽꿈에 어린아이가 태어난 지 겨우 대여섯 달 밖에 안되었는데 직접 안았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금갑도 만호가 와서 만났다.

 

4일 맑음 식후에 나가 공무를 보았는데 가리포 첨사, 임치 첨사, 목포 만호, 남도포 만호, 충청 우후 및 홍주 판관 등이 왔다. 활 일곱 순을 쏘았다. 우수사가 와서 다시 과녁을 그리고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취해서 헤어졌다. – 322

 

7

 

16일 새벽에 비가 오다가 늦게 갰다. 북쪽으로 퇫마루 세 칸을 만들었다. 이날 충청도 홍주의 격군으로서 신평에 사는 사노비 엇복이 도망하다가 붙잡혀 수금되었기에 처형하여 효시하였다. 사천과 하동의 두 현감이 왔다. 늦게 활을 쏜 것이 세 번 관통하였다. 이날 저녁 바다의 달빛이 지극히 밝아서 혼자 수루 위에 기대었다. 이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 330

노비들이 살기에는 전쟁이나 평화 때나 비슷한 듯

 

21..옥포에는 배 만드는데 쓸 양식이 없다고 하므로 체찰사에 관계된 군량 스무 말을 주고, 웅천과 당진포에서 배 만들 쇠 열다섯 근을 함께 주었다. 이날 아들 회가 방자(하인) 수에게 곤장을 쳤다고 하기에 아들을 뜰 아래로 붙들어다가 잘 타일렀다. 이경에 땀이 줄줄 흘렀다. 통신사가 청하는 표범 가죽을 가지고 오도록 배를 본영으로 보냈다. – 331

 

22일 맑았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종일 나가지 않았다. 홀로 수루 위에 앉아 있었다. – 331

이런 날도 있구나. 나는 비오는 날 출렁출렁하는데 이 양반은 달빛이 밝은 날 출렁출렁한다. 사람마다 출렁거릴 때가 있다. 그래도 되는구나. 이런게 남의 일기를 읽는 즐거움인가? 그가 나름 업적을 남긴 이여서 그런가?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8

 

4일 맑았으나 동풍이 세게 불었다. 아들 회가 면, 조카 완 등과 함께 아내의 생일에 헌수잔을 올릴 일로 떠나갔다. 정선도 나가고 정사립은 휴가를 얻어서 갔다. 늦게 수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느라 몸 상하는 줄도 몰랐다. 늦게 대청으로 나가 활 몇 순을 쏘다가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활 쏘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오니 몸은 언 거북이처럼 움츠러들기에 바로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냈다. 저물녘 경상 수사가 와서 문병하고 갔다. 밤의 통증이 낮보다 배로 심하여 신음하며 밤을 보냈다. – 334

5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가리포 첨사가 와서 만났다. – 334

 

8

 

4일 비가 계속 내렸다. 이날 밤 이경에 땀이 흘렀다.  

5일 맑음. 사청에 가서 아이들이 말달리고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하천수가 체찰사에게 갔다. – 339

 

7일 맑음. 아침에 아산의 종 백시가 들어왔다. 가을보리의 소출이 마흔세 섬이고, 봄보리는 서른다섯 섬이며, 어미(생선과 바꾼 쌀)는 모두 열두 섬 네 말인데, 또 일곱 섬 열 말이 나고, 또 네 섬이 났다고 했다. 이날 늦게 나가 공무를 보고 소지를 작성하여 보냈다. – 340

전쟁으로 집을 떠난 지 오래인데, 아산 집의 일년 소출을 가장이 보고 받고 있다.

 

12일 맑음. 종일 노를 바삐 저어 이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여 기쁘게 해 드려 마음을 풀어 드렸다.

13일 맑음. 어머니 곁에서 모시고 아침밥을 올리니 기뻐하시는 빛이 가득했다. 늦게 하직을 고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유시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하였다. - 341 

 

9

 

8일 맑음. 아침 식사에 쇠고기 반찬이 올랐는데 나라 제삿날9세조의 제사)이라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아침을 먹은 뒤 길에 올라 감목관에게 갔더니 감목관과 영광 군수가 함께 있었다.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저물녁에 동산원에 와서 말에 여물을 먹이고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에 이르니 여덟 살 된 이공헌의 딸이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과 함께 들어와서 알현했다. 공헌을 생각하니 참담한 심경을 이를 말할 수 없었다. 수경은 길에 버려진 것을 이염의 집에서 데려다가 기른 아이이다. – 345

이런 아픈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10

 

1일 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새벽에 망궐레를 행했다. 식후에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신사과가 임시 거처하는 곳에 들렀다가 몹시 취해서 돌아왔다.

2일 맑았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배가 다니지 못했다. 청어잡이 배가 들어왔다.

3일 맑음 새벽에 배를 돌려 어머니를 모시고 일행과 함께 배에 올라 본영(여수)으로 돌아와서 종일토록 모시니 이 역시 다행한 일이었다. 흥양 현감이 술을 가지고 왔다.

어머니를 배에 태워서 모시고 다니고 있다.

 

4일 맑음. 식후에 객사 동헌에 나가 종일 공무를 보았다. 저녁에 남해 현령이 자기 첩을 데리고 왔다.

근데 왜 남의 첩이 들어온 이야기를 일기에 썼을까? 상관에게 바쳐 자게 했나?

 

9일 맑음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하루 종일 어머니를 모셧다. 내일 진중으로 돌아갈 일로 어머니께서는 다소 서운해하는 빛을 띠었다. - 349

 

고기를 잡아서 군량을 계속 지원함. - 350

 

 

 

정유년1 (1597)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4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4월의 일기를 거의 전부 타이핑했다. 눈물이 많이 났다.

 

9일 맑음. 동네 사람들이 각기 술병을 갖고 와서 멀리 가는 이의 심정을 위로해 주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홍군우는 창을 하고 이 별좌도 창을 하였다. 나는 창을 들어도 즐겁지 않았다. 금부도사는 술을 잘 마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 355

 

11일 맑음 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말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서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종을 보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 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 356

 

12일 맑음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어머니께서 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시며, 9일 위아랫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안흥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고 했다.

 

13일 맑음 아침 일찍 식사 후에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의 길로 나갔다. 도중에 홍찰방 집에 들러 잠깐 이야기 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냈을 때는 배가 왔다는 소식이 없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의 집에 왔다는 것을 듣고 홍찰방과는 작별하고 홍백의 집에 이르렀다.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후에 대강 적었다. – 357

 

14일 맑음. 홍 찰방, 이 별좌가 들어와서 곡하고 관을 짰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준비해 왔는데 조금도 흠난 데가 없다고 햇다.

 

15일 맑음. 늦게 입관하였다. 아버님의 친구 오종수가 정성을 다해 상을 치르게 해 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지 못하겠다. 관에 대해서만은 서운함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 군수가 들어와서 행상을 준비해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상복 만드는 일 등에 성심을 다해 주니 슬프고 감사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

 

16일 궂은 비가 왔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천안 군수가 돌아갔다.

 

18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고개도 내밀지 못하고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19일 맑음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지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노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하직을 아뢰었다. 금곡의 강선전의 집 앞에 당도하니, 강정, 강영수 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을 하였다. 또 보산원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와 있어서 냇가에서 말에서 내려 쉬고 갔다. 임천 군수 한술은 한양에 가서 중시를 보고 오는데 앞길을 지나다 내가 가는 것을 듣고 들어와 주문하고 갔다. 아들 회, , 울과 조카 해, 분 완 및 주부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왔다. 원인남도 와서 만나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에 도착하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20일 맑음. 공주 정천동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 이산에 가니 고을 원이 극진히 대접했다. 관아 동헌에서 잤다. 김덕장이 우연히 와서 만났고, 금부도사도 와서 만났다.

 

21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은원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 오려고 배로 은진포에 왔다고 하는데, 그의 행적이 매우 괴상하고 거짓되었다. 저녁에 여산 관노의 집에서 잤다. 한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5

 

2남원의 종 끝돌이가 아산 집에서 와서 어머님의 영연이 평안하시다고 전하고 똥 변유현은 무사히 식구들을 거느리고 금곡에 도착했다고 전하였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잇으니 비통함을 어찌 견디랴 – 361

 

3..아침에 아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열 의 음은 열 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 361

 

6일 맑음.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통곡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주관한다는 말인가.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와서 이토록 근심하고 애달파한 것이니 비통함이 그치지 않는다. 또 남원의 추수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형님들이 혼령이 말없이 걱정하여 주는 터라 애통함이 더욱 간절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원통한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가. 왜 어서 죽지 않는 것인가. – 363

 

13일 맑음. 어젯밤에 부사가 이르기를 상사가 보낸 편지에 영공(원균)의 일에 대해 많이 탄식했

다고 한다. 늦게 정사준이 떡을 만들어 왔다. 순천 부사가 노자를 보내 주어 매우 미안하였다. - 365

 

20체찰사가 내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조금 있다가 또다시 사람을 보내 일찍이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비로소 듣고 놀랍고애도하는 마음에 군관을 보내 조문한다.” 고 하였다. – 367

 

21과천의 죄수 안홍제 등이 이상공에게 말과 스무 살 난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한다. 안은 본디 죽을 죄도 아닌데 여러 번 형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 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 바 백전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는 것이리라. – 368

 

24..체찰사가 군간 이지각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이에 경사우도의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나 방도가 없으니, 본 대로 그려 보내 주기를 바란다고 진언하므로, 나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대강 그려 보냈다. 저녁에 비가 크게 쏟아졌다. – 369

 

25일 비가 내렸다.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다가 비 때문에 가지않고 혼자 시골집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떠오르는 생각이 만가지다 슬픔과 그리움이 어떠하겠는가. – 369

                                          

26..비가 퍼붓듯이 왔다. 말을 쉬게 했어도 길을 가기 어려워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악양 이정란의 집에 당도했는데 문을 닫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 집 뒤에 기와집이 있어서 종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찾았으나 모두 만나지 못하여 잠시 쉬었다가 돌아왔다. 이정란의 집은 김덕령의 아우 덕린이 빌려 입주하고 있다. 나는 아들 열을 시켜 억지로 청하게 하여 들어가 잤다. 행장이 다 젖었다.

슬프다.

 

27일 흐리다 갠 것이 반반이다.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렸다. – 370

 

6

 

10일 맑음. 아침에 가리말, 워라말, 간자짐라 유짐말, 등의 네 말의 편자가 떨어진  것을 갈아 박았다. ..어릴 때 죽마고우 서철이 합천 땅 동면 율진에 사는데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만났다. 아이 때 이름은 서갈박지였는데 음식을 대접해서 보냈다. – 374

 

11..어제 저녁 종사관과 이야기할 때 변흥백의 종 춘이가 집안 편지를 가지고 와서 어머님의 영연이 평안하신 것을 전한 것을 알았다. 사무친 애통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는가아들 열이 곽란을 앓아 밤새도록 신음하는데 애태우며 고민한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랴. 닭이 울어서야 조금 덜하여 잠이 들었다. 이날 아침 한산도의 여러 곳에 갈 편지 열네 장을 썼다. 경의 모친이 보낸 편지 내용에 말하기가 매우 괴롭다며 도둑이 또 일어났다고 하였다. 작은 워라말이 먹지를 않으니 이는 더위를 먹은 탓이다. – 375

 

16. 맑음 종일 혼자 앉아 있었는데 와서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 376

 

17아침 식사 후에 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많이 말했다. – 377

 

25..다시 무씨를 심도록 했다저녁에 종 경이 한산도에서 돌아왔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랍고 슬픈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놀라서 탄식할 따름이다. 적 한 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으니, 통탄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가 있겠는가. 거제 현감이 사람을 보내 미역을 실어 보냈다. – 380  

나는 어찌하여 무씨를 심었다는 것에 감동하는가 이 어려움의 와중에서 무씨 심은 하찮은 일을 기록해놓는 성실함 때문이다.

 

26..집안의 위아래 분들이 모두 평안보중한데 다만 석 달이나 가물어서 농사가 끝장나고 가망이 없다고 하였다 장사날은 7 27일로 미루어 택했다가 다시 8 4일로 택일했다고 했다. - 381

 

7

 

3일 맑음.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뼛속에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더욱 심해졌다. 제사에 쓸 유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늦게 정읍의 군사 이량, 최언환, 건순 등 세 사람을 심부름 시키라고 보내왔다. – 383

 

9일 맑음. 내일아들 열을 아산으로 보내려고 제사에서 슬 과일을 봉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늦게 윤감, 문보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열과 변 주부 등이 돌아가는 것을 술로 전별하였다. 이 밤은 달빛이 대낮같이 밝으니 어머니를 그리며 슬피 우느라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385

 

10일 맑음. 새벽에 열과 변존서를 보낼 일로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일찍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여 떠나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구례에서 구해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염려된다. 열 등이 막 떠나자 황종사관이 와서 한참동안 이야기했다. 늦게 서철이 와서 만났다. 정상명이 말의 뱃대끈을 종이로 만들기를 마쳤다. 저녁에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어머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더욱 심하여 밤이 깊도록 잠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 385

 

홍공은 자기 아버지의 병으로 종군을 원치 않아 나에게 팔이 아프다고 핑계를 댔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 386

 

16늦게 변의정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는데, 그 꼴이 형편없어 어리석고 용렬해 보였다. 궁벽한 촌에 사는 사람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을 지켜서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리라. 이 역시 소박하고 순후한 모습이다. 이날 낮에 이희남에게 칼을 갈게 했는데 매우 예리하여 적장의 맨머리를 벨 수 있을 것이다. 소나기가 급히 쏟아졌다. 아들 열이 떠나가는데 고될 것을 많이 걱정하여 침묵의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 – 387

 

29..늦게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군사는 모두 말이 없고 활과  화살도 없어 쓸모가 없었다. 매우 한탄스러웠다. - 392 

 

8

 

3저물녘 구례현에 이르니, 온 경내가 쓸쓸했다. 성 북문 밖 전날 묵었던 주인집에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이 바로 와서 만났는데 곡식까지 지고 왔으며, 손응남은 때 이른 감을 바쳤다. – 393

 

5일 맑음 아침식사 뒤에 옥과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찼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말에서 내려서 앉아 타일렀다. 현에 들어갈 때 이기남 부자를 만나 함께 현에 이르니, 정사준, 정사립이 마중 나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옥과 현감은 처음에는 병을 핑계 삼아 나오지 않더니 얼마 뒤 나와서 만났다. 붙잡아다가 처벌하려고 했기 때문에 보러 나온 거이다. – 393

 

19회령포 만호 민중붕이 그 전선에서 받은 물건을 사사로이 피란민 위덕의 등에게 준 되로 곤장 스무 대를 쳤다. – 398

 

21일 맑음. 날이 새기 전에 곽란이 나서 심하게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하여 소주를 마셨더니 얼마 뒤 인사불성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앉아서 밤을 세웠다.

22일 맑음 곽란이 심해져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23일 맑음. 통증이 매우 심해져 배에 머무르기가 불편하여 배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에서 나와 육지에서 잤다.

24일 맑음. 일찍 아침에 도괘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 마다 텅 비었다. 바다 가운데서 잤다.

25. 맑음 그대로 어란포에 머물렀다. 아침 식사를 할 때 당포의 포작이 방목하던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헛소문을 퍼뜨리되 왜적이 왔다. 왜적이 왔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임을 암고 헛소문을 낸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게 하니, 군중의 의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 397

 

10

 

2. 맑음. 아들 회가 집안사람들의 생사를 알아볼 일로 올라갔다 홀로 배 위에 앉으니 심회가 만 갈래였다. - 403

 

 

 

정유년2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8

 

9일 일찍 출발하여 낙안군에 이르니 관사와 창고의 곡식과 병기가 모두 타 버렸다. 관리와 촌민들도 눈물 흘리며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점심 식사 후에 길에 올라 십 리쯤 되는 곳에 이르니 길가에 노인들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군 조양창에 이르니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창고의 곡식은 봉해 둔 채 그대로였다. 군관 네 명을 시켜 맡아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이미 피난 가고 없었다. – 409

 

17일 맑음. 이른 새벽에 길에 올라 백사정에 이르러 말을 쉬게 했다. 군영구미에 이르니 온 경내가 이미 무인지경이었다. 수사 배설이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 사람들이 많은 군량을 임의대로 훔쳐 다른 곳으로 가져갔기에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날이 벌써 저물어 그대로 머물러 잤다. 배설이 약속을 어긴 것이 서운하였다. - 411

 

21일 맑음. 사경에 곽란이 일어났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여 소주를 마시고 치료하려 하였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구토를 여남은 차례  하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 411

22일 맑음.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용변도 보지 못했다.

23일 맑음 병세가 매우 위중해져 배에 머무르기가 불편하였다. 실제로 전쟁터도 아니기에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잤다.

24..낮에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이미 비었다. 바다 가운데서 잤다. - 412

 

9

 

4일 맑았으나 북풍이 세게 불었다. 배가 고정해 있지 않아 각 배들을 겨우 보전했ㄷ. – 413

 

9일 이날은 곧 9(중양절)이다. 일 년 중의 명절이므로 내비록 복중의 사람이지만 여러 장수와 병졸들에게는 먹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주에서 온 소 다섯 마리를 녹도, 안골포 두 만호에게 주어 장병들에게 먹이도록 지시했다. – 415

 

10일 맑음 적선이 멀리 도망갔다.

11. 흐리고 비올 징후가 있었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어머님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불편해하였다. – 415

 

15일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그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명법이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로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 416

전투 시작 전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16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부르며 말하기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ㄷ.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을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령하니, 한꺼번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기어가며 다투어 올라갔다. 이에 안위와 그 배에 탄 구사들이 각기 죽을 힘을 다해서 혹 몽둥이를 들어가 혹 긴 창을 잡거나 혹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난격하였다. 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기운이 다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어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사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잇달아 와서 협력하여 적을 쏘아 죽이니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넣은 붉은 비단 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가 각기 지자,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어 적선 서른한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서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의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살이 매우 험하고 바람도 역품으로 불며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이었다. – 419

전투장명이 아슬아슬하다. 장군의 통솔력이 뛰어나다.

 

24일 몸이 불편하여 신음했다.

25일 이날 밤은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 땀이 온 몸을 적셨다.

26일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10

 

1. 아들 회를 보내서 제 어머니도 보고 여러 집안 사람의 생사도 알아오게 하였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여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의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아산 고향 집이 이미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 421

2.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 지 알 수가 없다. 내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하랴. – 421

 

14일 사경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에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은 형상이 보이는 듯 하다가 깨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듣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봉에 통곡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 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424

 

16..막내아들 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통곡하지도 못했다. – 425

 

19일 새벽꿈에 고향집의 종 진이 내려왔는데 죽은 아들이 생각나서 통곡을 하였다. …어두울 무렵 코피가 한 되 남짓 흘렀다. 밤에 앉아  생각하느라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오. 이제는 영령이 되었으니 끝내 불효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어찌 알랴.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함을 억누를 수 없다. - 426

 

대장장이 허막동을 나주로 보내려고 초경에 종을 시켜 불렀더니 배가 아프다고햇다. 전마의 떨어진 편자를 고쳐 박았다. – 428

 

충청 우후가 편지를 보내고 또 홍시 한 접을 보내왔다. - 428

 

11

 

1미시에 북풍이 크게불어 뱃사람들이 추위에 괴로워했다. 나도 선실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더니 마음이 무척 편치가 않아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 일 년 같았다.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저녁에 불풍이 세게 불어서 밤새도록 배가 흔들려 사람이 안정할 수 없었다. 땀이 나서 몸을 적셨다. – 430

 

23일 바람이 세고 눈도 많이 왔다. 이날 승첩한 장계를 썼다. 저녁에 얼음이 얼었다고 하다. 아산의 집으로 편지를 쓰려고 하니 눈물을 거둘 수가 없었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12

 

영암의 항병장 유장춘이 적을 토벌한 사연을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쉰 대를 쳤다. 홍산 현감 윤영현, 김종려, 백진남, 정수 등이 와서 만났다. 이경에 몸이 땀에 젖었다. 북풍이 세게 불었다. – 435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에 선전관을 통해서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쫓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진진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진에서의 용감함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법에도 경(원칙)과 권(방편)ㅇ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고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권도(방편)을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유지와 함께 고기반찬을 하사하셨는데 마음은 더욱 비통하였다. 해남의 강간, 약탈한 죄인들을 함평에서 자세히 심문했다. – 436

 

25일 눈이 내렸다. 아침에 열이 돌아갔는데 제 어머니의 병 때문이다. -437

 

30일 입춘이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추위가 몹시 심했다오늘밤은 한 해를 마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 438

 

 

무술년 (1598)

나의 임무는 철수하라고 호령함인데 앞에 있는 배들의 함성이

하늘에까지 울리고 대포 소리는 우레와 같아서 호령을 듣지 못하였다.

 

무술년 7 24일 복병장 녹도 만호 송여종이 전함 여덟 척을 거두다가 적선 열한 척을 절이도에서 만나서 여섯 척을 통째로 포획하여 적군의 머리 예순아홉 급을 베고 용기를 발휘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 (일기초) – 443

 

도독이 화를 내어 서천 만호 및 홍주 대장과 한산대장에게 각각 곤장 일곱 대씩 치고, 금갑도 만호, 제포 만호, 회령포 만호에게도 함께 곤장을 열다섯 대씩 쳤다. -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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