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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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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4일 08시 49분 등록

백범일지

* 백범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07.25

 

1. ‘범부이길 원했던 나라의 수장(저자에 대하여)

 백범1.JPG

■ 백범 김구(1876~1949)

 

나는 그에게 반했다. 그의 실천력에 반했고 행동과 말이 이리도 같을 수 있는 인간을 보아 반했다. 개인과 사회를 뛰어넘는 헌신에 반했고 사람의 생명을 이렇게 값지게 쓰여질 수 있는 전범이 되는 것에 반했다. 일본 순사를 찌르기 전, 내면의 갈등은 헥토르가 아킬레우스 앞에서 고민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음에 놀랐고 초지일관 생을 관통하는 나라 사랑에 놀랐다.

 

이 책은 자서전이므로 책 자체의 내용이 저자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 출생에 대한 내용과 아주 짤막한 저자 소개를 하도록 하고 깊이 있는 내용은 책의 내용을 심도 있게 소개하여 저자에 대한 파악을 대신하기로 한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7. 11()~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 (),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 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 때에 당시 열에 아홉은 사망하였다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국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책의 내용과 함께 자세히 저자를 소개하기로 한다.

 

 

2. ‘백범 자서전(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모든 쓰러져 가는 것의 마지막은 쓰리고 애처롭다.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그리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기 때문이다. 어엿한 나라 하나 가져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 과도 정부가 나라 일으키는 일에 힘쓰는 것은 온당한 일이고 보편적 일이어야 한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그러한 것과 같이

 

□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p. 13)

 

Ü 그는 유서를 대신하여 이 자서전을 쓴다 했다. 그리하여 글은 결연하다.

 

□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p. 14)

 

Ü 백범의 사상적 지평을 바로 알 수 있는 문장이다. 그는 주체적 합일을 갈구했다. 신탁과 반탁이 으르렁대던 때, 사상의 잠식이 아닌 외세의 물리적 침략이 본격화 되던 때 우리는 백범과 같은 사람을 품고 있었다. 결국, 우리 스스로 백범을 버리긴 했지만

 

□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p. 15)

 

□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p. 15)

 

Ü 숙연해진다. 한 사람의 생애가 사회를 넘어서고 국가를 초월하고 있다.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 삼종조부 : 너 이 녀석, 돈 가지고 어디 가느냐

창수(백범) : 떡 사 먹으로 가요

삼종조부 : 네 아비가 보면 큰 매 맞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p. 26)

 

Ü 백범은 개구쟁이였다.

 

□ 그런데 사람을 구타하면 맞은 자를 때린 자의 집에 떠메어다가 눕혀두고 생사 여부를 기다리는 것이 그 시대 지방 관습이었다. 때문에 우리집에는 한 달에도 몇 번씩 거의 죽게 된 사람, 전신이 피투성이 된 사람이 사랑방에 누워 있을 때가 있었다. (p. 27)

 

Ü 백범의 아버지는 대단한 반골기질을 타고 나신 분이다. 멋지다.

 

□ 아버님은 양반들에게 잘 해주던 다른 존위들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가혹하게 공전을 거두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부담하실지언정 가혹하게 하지 않으셨다. (p. 28)

 

Ü 아버님은 강한 자에게 강하였고 약한 자에게 약하였다. 이것이 중용이다. Dynamic equilibrium point.

 

□ 준영 삼촌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식구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종증조부 주최로 가족회의를 열어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준영 삼촌의 발뒤꿈치를 잘랐다. (p. 29)

 

Ü 가족이라는 모습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은 치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매우 뼈저리다. 흔히 가부장적이라는 권위가 가장 예쁜 모습을 하고 가족을 지배하던 때였다.

 

□ 선생님이 집에 와서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목놓아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작별하고 나서도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였다. (p. 31)

 

Ü 이런 세상이었구나.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짠함

 

2. 시련의 사회진출

 

□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p. 39)

 

Ü 백범을 위대하게 만드는 일차적 도약 지점은 바로 여기다.

 

□ 동학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 백성이 되어 장래 참주인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p. 42)

 

Ü 동학이 백범의 마음을 끌기 시작한다.

 

□ 남도지방의 각 관청에서 동학당을 체포하여 압박하는 반면, 고부에서는 전봉준이 벌써 병사를 일으켰습니다.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 선생의 말은 동원령이었다. (p. 46)

 

Ü 각주) 이것은 1894 9월 전봉준 주도의 동학농민군 제2차 봉기를 의미한다.

 

□ 최고회의는 기회를 보아 나에게 동학 접주의 감투를 벗기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나에게서 병권을 박탈하자는 야심이 아니요 나의 몸을 보전케 하려는 방책이었다. (p. 52)

 

□ 진사는 아들 셋 있었는데 맏아들은 중근으로 당년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p. 57)

 

Ü 안중근과 백범, 세기의 만남이다.

 

□ 당시 조정 대관들 중에 글로써 항쟁하던 자들도 처음에는 안진사를 악평하였지만 얼굴만 마주 대하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경외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p. 58)

 

Ü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라 불리는 사람의 카리스마다.

 

□ 선생님이 이처럼 저를 너그럽게 받아주시지만 소생이 어찌 감당할 만한 재질이 있겠습니까?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p. 61)

 

가지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p. 64)

 

Ü 스승 고능선이 백범에게 힘주어 설명한 말이다. 훗날 일본 순사를 처단할 때 이 말을 기억하곤 거침없이 단행하게 된다.

 

□ 나라는 망하는데 국내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산림학자들도 한탄하고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구국의 경륜도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p. 65)

 

Ü 지적은 정확했다.

 

3. 질풍 노도의 청년기

 

□ 강동 어떤 시장에서 하룻밤 지내다가 칠십 노인 주정뱅이에게 이유 없이 매를 맞았다. 한신이 회음의 시정잡배에게 당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서로 위로하였다. (p. 69)

 

Ü 사마천의 사기는 이래서 위대하다. 위대함이 위대함을 보고 큰다.

 

한 젊은이 : 네가 비록 키는 커서 칼을 잘도 차고 다니지만 마음속으로는 겁쟁이일 것이다. 네 놈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를 찌르고 죽음을 두려워 하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

한신 : 그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구부려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갔다.

 

□ 산은 들이 좁을까 저어하여 저 멀리 솟아 있고

물은 배 가는 것이 두려워 얕게도 흐르는구나 (p. 70)

 

□ 조선의 사대물이라 함은 경주의 인경(에밀레종)과 은진 미륵, 연산의 쇠솥, 함흥의 장승을 이르는 것이다. 이태조가 세웠다는 함흥의 낙민루도 구경하였다. (p. 71)

 

□ 우리 동포는 단 한 집뿐인데 남자 주인은 변발에 중국 복장으로 통화현 군대에서 복무한다 하고 아낙네들은 전부 한복 차림이었다. 이 사람은 당시 명칭으로 호통사였다. (p. 74)

 

Ü데르수 우잘라라는 책이 생각이 났다. 시호테 알린을 품고 살았던 그 천진함.

 

□ 근처 동네의 강씨, 이씨들은 조상님의 뼈를 사고 파는 죽은 양반들이지만 너는 스스로 마음을 수양하고 몸으로 실행하여 살아 있는 양반이 되겠다고 하던 것 등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p. 86)

 

□ 지금 당장 머리를 깎아야 한다면 깎기까지라도 할 의향을 가졌노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고선생은 두말 않고 절교를 표시하였다.

진사, 오늘부터 끊네.’ (p. 87)

 

Ü 단발령을 수용하는 안진사와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고능선의 대화다.

 

□ 단발령을 피하려고 시골로나 산골로 숨어 들어가는 백성들의 원성이 길을 가득 메운 것을 목격하고 나는 머리끝까지 분기가 가득하였다. (p. 90)

 

□ 각주) 을미사변의 참극이 있은 지 3개월 만인 1895 11월 김홍집내각이 국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단발령을 선포하자 전국 각지에서 몸을 지키자는 보형의병이 일어났다. 이어 고종은 러시아 영사관으로 피신하고 (아관파천), 김홍집, 어윤중 등은 살해되고 갑오내각이 붕괴하였다. 뒤이어 이범진, 이완용, 윤치호 등을 중심으로 한 친러 내각이 등장하여 단발령을 철회하였다. 백범은 안주에서 아관파천, 내각 교체, 단발령지령 등의 소식을 듣고 청나라로 가려던 거사 계획을 바꾸었다. (p. 91)

 

□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 그렇다.

,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p. 94)

 

Ü 한 인물의 이 역사적인 도약의 순간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3천년 전 아킬레우스를 앞에 둔 헥토르의 자문자답과 비교해 보자.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유를 감히 비교하며 음미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것이다.

 

여기서 맞서 싸우면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성으로 들어가버리면 되지 않을까? 아킬레우스에게 애원하고 싶다. 아니, 그냥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고 포로가 되고 싶다. 트로이아의 이름으로 화해를 청하면 어떨까?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헥토르는 침묵 가운데서 이런 생각들을 했다. 화해의 조건은 뭐가 좋을까? 궁리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무슨 미친 짓이고 비겁한 생각인가.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그리스인 이야기 중에서)

 

□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p. 100)

 

Ü 생을 자신의 신념으로 초연히 버릴 수 있을 때 사람을 도약한다.

 

□ 나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내 옆에 앉아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가 없었다. 이창매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 나와 나를 보고 너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책망하는 듯싶었다. (p. 103)

 

Ü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요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 불서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p. 106)

 

□ 본인은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신하된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몽백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였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는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p. 108~109)

 

Ü 말과 행동이 같다…. 이러한 세계에 한 때 우리는 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백범은 지금 왜인을 죽인 죄로 심문 받는 중에 심문하는 관리를 보고 호통치고 있다. 관리는 얼굴이 붉어진다.

 

□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15)

 

□ 그 당시 감옥 규칙이 낮잠은 허락하는 대신 밤중에는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밤새도록 죄수들에게 소리나 옛이야기를 시키곤 하였는데 이유는 야간에 잠을 재우면 잠든 틈을 타서 도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온갖 시조와 여창지름, 남창지름, 적벽가, 가세타령, 개구리타령 등을 배워서 죄수들과 같이 소리를 하며 지냈다. (p. 118)

 

Ü 세상에 이렇게 멋지고 인간적인 감옥이 있었다이 시대를 계속 감탄하고 있다.

 

□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p. 126)

 

Ü 백범의 출옥을 위해 자금원이 되어준 김경득이 보낸 편지다.

 

□ 나를 무한정 놓아주지 않는데도 옥에서 죽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당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이 우리 국법에 범죄행위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왜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 힘이 부족해서였다.

내가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 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 하다가 탈옥하기로 결심하였다. (p. 128)

 

Ü 또 한번의 자문자답이다.

 

4. 방랑과 모색

 

□ 볏짚을 깔고 볏짚을 덮고 볏짚을 베고 누으니 인천감옥 특별방에서 2년 동안 지내던 연극의 1막이 내리고 지금은 방앗간 잠으로 제2막이 열리는구나 (p. 135~136)

 

□ 넛출지게 (p. 136)

 

Ü 각주) 넌출지다. 고어. 넌출은 등, 다래, 칡 따위의 길게 뻗어나가 늘어진 줄기. 넌출지다는 넌출처럼 치렁치렁 늘어지다는 뜻. 여기서는 소리가 넌출처럼 끊어지지 않고 길게 늘어나는 것을 의미함

 

□ 내가 일시 운수 불길하여 (p. 137)

 

□ 자기 매부 진선전이 무주읍에 살고 있는데 부자일 뿐 아니라 그 읍이 한적하고 깊숙한 곳이니 그리 가서 세월 기다림이 좋을 것 같다 하며 소개 편지 한 장 써 주었다. 다음날 아침에 공군과 작별하고 무주로 길을 떠났다. (p. 142)

 

Ü 이 세계는 인간 세상의 원형인 듯 하다.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 서로가 서로의 나고 죽음의 연민을 연대 하는 듯 하다.

 

□ 마곡사 (p. 146)

 

Ü 각주) 이곳은 물과 산의 형세가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 정감록 등에서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현재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다.

 

□ 노상의 행인들이 주막에서 먹는 음식값도 한 끼에 최하가 5, 6푼인데 하루 품삯이 밥 한 상 값의 반액에도 못 미치면 혼자 살림도 유지해 나가기 어렵거든 하물며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어찌 생활 하겠소? (p. 148)

 

Ü 이와 같은 분배의 갈등은 기 천 년을 지나온 인간의 버릴 수 없는 습속인 모양이다.

 

□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간다. (p. 152)

 

Ü 백범은 마곡사에서 중이 되기로 결심한다.

마곡사.JPG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 들어가 법명 원종으로 출가하게 된다. 사진은 마곡사의 모습

 

□ 급기야는 아들이 있는 곳까지 따라 오셨는데 와서 보니 돌중놈이 되어 있었다. 세 식구가 다시 만나니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여 서로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p. 158)

 

□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p. 165)

 

Ü 백범을 가진 이 사회는 행복하나 백범은 그리 편치 않다. 그러나 한 개인의 차원 높은 의식의 도약 지점을 보아가는 우리는 그의 어기찬 인생이 멋지기만 하다.

 

□ 학동 30여 명과 부형들이 몰려와서 남문통 길이 다 메어지도록 모여 전별을 해주었다. 그 동안 나는 성심을 다하여 가르쳤을 뿐 아니라 단 한 푼의 수업료도 받지 않았다. (p. 172)

 

□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p. 173)

 

□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金龜)라하고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p. 174)

 

□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저 대양 건너에 사는 각 나라에는 제법 국가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공자, 맹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달된 법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계속 오랑캐, 오랑캐 하면서 배척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히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공맹에게서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p. 178)

 

Ü 일견 옳은 말이지만 단정 짓는 것은 금물이다. 스승 고능선은 조금 속이 상했다.

 

□ 머리털은 곧 피가 만든 것이요, 피는 곧 음식이 소화되어 만들어진 정액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라날 수 없습니다. 설사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매우 크고 훌륭한 상투를 위에 얹었다 손 치더라도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p. 179)

 

Ü 이것은 유물론에 가깝다. 당시 사유로는 획기적일 수 있다. 생각이 깨어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행동은 물론 그 사유를 따르니 이 사람은 능히 위대함에 이를 수 있겠다.

 

□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p. 180)

 

Ü 이미 그는 개인을 벗어나 사회와 공동체를 위한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살아서 나라 꼬라지를 본다면 과연 발전된 나라 만들었다고 복락을 볼 수 있으려나. 발전을 발전이되 모두를 위한 발전이 아니라면 퇴보만 못하다.

 

□ 우리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른 것도 이런 절박한 지경에서 하신 일이었는데 내가 또 단지한다면 어머님의 마음이 상하실 터이다.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 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p. 181)

 

Ü oh my god. 지상에서 유례 찾기 힘든 이 관계는 구한 말, 이 나라 부모와 자식 사이다.

 

□ 아내의 조건,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p. 183)

 

□ 우리나라의 관리가 다 김선생 같으면 백성이 고통이 없겠다. (p. 190)

 

Ü 갑자기 든 난데없는 생각. 주변을 극히 제한해 나가며 가족과 회사, 연구원 생활을 하는데 집중하는 것은 인간 세상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마땅한 삶은 아니다. 나서라. 나가라.

 

□ 을사년(1905, 30)에 이른바 신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p. 193)

 

Ü 왜는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하고 조선은 본격적인 구국활동이 시작된다.

 

□ 왜 순사가 칼을 뽑아 들었다청년이 맨손으로 달려들어왜놈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사람들은 기와조각을 던지며…(p. 195)

 

Ü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며 지극히 충심을 다해 감행한다. 그런 사람들이 살던 세상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 인민의 애국사사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이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p. 196)

 

Ü 교육자 김구로 살아간다.

 

□ 작은 아버지 : 너 같은 난봉꾼을 누가 도와주어서 그렇게 사느냐?

김구 : 작은 아버지 보시기에 저의 난봉은 위험하지만 난봉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게지요 (p. 202)

 

Ü 항상 이러하다. 어떻게 위대함을 가까울수록 알아보기 힘든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가치와 진가를 보기 어렵다. 눈을 크게 뜨는 연습을 하는 수 밖에

 

□ 여하튼 양반의 세력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당당한 그 양반들이 보잘것없는 상놈 하나 접대하기에 힘이 딸려 애쓰는 것을 볼 때 더욱 가련하였다. 만일 양반이 살아나 국가가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더 받더라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어났다.

 

내 집안이 상놈 중의 상놈이지만 그대는 양반 중의 상놈이니 상놈이기는 마찬가지라 생각되었다. (p. 203)

 

□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p. 204)

광진학교.JPG

교편 생활 시절의 선생(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 재임 시 광진학교에서 촬영한 것이다

 

□ 이토 히로부미가 한인 은치안에게 피살되었다는 신문을 보았다. 안응칠, 곧 안중근으로 명백하게 신문에 기재되었다. (p. 208)

 

□ 뉘가 알았으랴 그가 며칠 후 경성 이현에서 군밤장수로 가장하고서 충천하는 의기를 품고 이완용을 저격하여 조선 천지를 진동하게 할 이재명 의사인 줄을. 그는 먼저 인력거를 끄는 차부를 죽이고 이완용의 생명은 다 빼앗지 못하고 체포되어 순국하였던 것이다. (p. 213)

 

Ü 초개와 같이 생명을 버리는 자들의 의기는 과연 무엇일까. 김구는 자신이 의거 전 총을 쓰지 못하게 했던 것을 훗날 후회한다.

 

□ 장래 대규모의 전쟁을 하려면 인재 양성이 없고는 성공을 기약할 수 없고 일시적인 격발로는 5일은 커녕 3일도 기약하기 어려우니 분기를 참고 다수 청년을 북쪽 지대로 데려가 군사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당장 급한 일 (p. 217)

 

Ü 백범은 앞을 보고 있다.

 

□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 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한다. (p. 220)

 

Ü 어려울 때 힘들 때 백범의 롤모델은 지나간 역사에서 캐어낸 인간의 위대함이었다.

 

□ 그러고 보니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각처 한인 형사와 고등정탐까지도 그 양심에 애국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사회에서 나를 이같이 동정해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한 숨까지 동지를 위하여 분투하고 원수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p. 225)

 

□ 나의 생명은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 (p. 225)

 

□ 일본 순사 : 네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으려 하지만 여러 놈의 입에서 네 죄가 발각되었으니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때려 죽이리라.

김구 : 나를 논밭의 자갈돌로 알고 파내려는 그대들의 노고보다 파내어지는 나의 고통이 더욱 심하니 내가 자결하는 것을 보라!

 

나는 머리를 기둥에 들이받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여러 놈들이 인공호흡을 하고 얼굴에 냉수를 끼얹어서 정신이 돌아왔다. (p. 226)

 

Ü 이 야만의 시대에 아름다운 세계가 겁탈 당하는 광경이다.

 

□ 왜놈이 신문하는 법 1. 가혹한 고문 2. 굶기는 것 3. 온화한 수단(회유)

 

□ 나는 신체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달아매고 때릴 때는 박태보가 보습 단근질 당할 때에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한 구절을 암송하였다.

 

겨울철이라 그리하는지 겉옷만 벗기고 양직 속옷은 입힌 채로 결박하고 때릴 때 속옷을 입어서 아프지 않으니 속옷을 다 벗고 맞겠다.’며 매번 알몸으로 매를 받아서 살이 벗겨질 뿐 아니라 온전한 살가죽이라곤 없었다.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짐승의 본능만 남는 것이 아닐까 (p. 227~228)

 

Ü 아 인간이여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는가. 가늠할 수도 없다.

 

□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p. 238~239)

 

Ü 냉철한 낙관이다.

 

□ 옛날 의병은 네가 보는 바와 같이 무식한 것들이니 국가에 대한 의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나 너는 일찍이 고후조에게 의리가 무엇인지 가까이서 배웠고 그이에게서 배운 금언 중에 삼척동자라도 개나 양을 가리켜 절을 시키면 반드시 크게 노하며 불응한다는 말을 강단에서 신성한 제2세 국민에게 연설하던 네가 머리를 숙여 왜놈 간수에게 예를 다 하느냐? 네가 암송하는 고인의 시 가운데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p. 244)

 

Ü 스스로에게 다그치고 있다.

 

□ 김좌진은 침착하고 굳세며 용감한 청년으로 국사를 위하여 무슨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는데 친애의 정을 서로 표하였다. 점차로 옥중에도 생활의 취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p. 245

 

□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p. 247)

 

Ü 이 모든 상황과 관계, 심정들이 모두 이 한 문장에서 울어댄다.

 

□ 감식, 이 점에 대하여 나는 깊이 연구하였다. 표면으로 나도 붉은 옷을 입은 복역수이나 정신상으로 나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 왜놈의 이른바 신부민이 아니고 나의 정신으로나 죽으나 사나 당당한 대한의 애국자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왜놈의 법률을 복종치 않는 실제 사실이 있어야만 내가 살이 있는 본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하루 한 끼 혹 두 끼 사식을 먹으니 밥이 부족하여 애쓰는 수인들을 먹이고도 나는 한 끼라도 자양분 있는 음식을 먹는 셈이다. (p. 249)

 

Ü 사유는 이렇게 확장되고 도약한다.

 

□ 봉충이 (p. 251)

 

Ü 한 쪽의 크기가 다른 짝짝이

 

□ 잠이 깊이 들 때 보면 서로 키스하고 자는 자가 많고 약한 사람은 솟구쳐 올라 사람 위에서 잠을 자다 밑에 등 자에게 몰리어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날을 밝히는 것이 옥중의 하룻밤이다. (p. 252)

 

Ü 핍진하고 고되다. 힘들었을 터.

 

□ 그리하여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p. 254)

 

Ü 인도주의, 평화주의, 계량주의

 

□ 강원도 근거를 둔 자들의 기관 명의는 목단설, 삼남에 있는 기관은 추설 (p. 259)

 

Ü 조직폭력의 기원이다.

 

□ 그 자격자란 것은 1.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2. 아래가 맑고 3. 담력이 강실할 것. 4. 성품이 침착할 것. (p. 261)

 

□ 위 아래 이빨로 칼끝을 힘껏 물라. 네가 하늘을 쳐다 보아라. 땅을 내려다 보아라. 나를 보아라. ‘너는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사람을 안즉 확실히 우리의 동지로 인정한다.’ 라고 선고합니다. (p. 262)

 

Ü 조폭 입단식의 모습이다. 책에서 나오는 북대는 오늘날의 양아치와 같겠다.

 

□ 일본의 눈에는 도인권이가 죄인이라 하나 신의 눈에는 일본인의 죄인 될지도 알 수 없다. (p. 265)

 

Ü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선악의 시각차이로 인한 비극적 장면이 있다.

 

크레온 : 네가, 거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네가 그런 짓을 했느냐 안 했느냐?

안티고네 : 했어요. 안 했다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인간의 어떤 생각도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신들 앞에서 인간의 법을 어긴 죄인일 수는 없어요. 나는 그런 운명을 당한 것이 조금도 괴롭지 않아요. 그보다 나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죽었는데도 장례도 치러 주지 못한 채로 버려 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슴 아픈 일이지요. 이번 일로는 괴롭지 않아요. 내가 이번에 한 일을 어리석게 보신다면, 어리석은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는지도 모르지요

 

□ 구를 구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 (p. 267)

 

Ü B급 인민이라도 되고자 하는 자기검열. 몇 번의 깊은 자문자답으로 인간은 이렇게 위대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백범은 보여준다.

 

7세 미만의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 하더라. (P. 273)

 

Ü 출옥 후 백범은 그렇게 사랑한 딸이 죽기 전 했던 유언을 듣는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 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행은 나는 고사하고 너의 친구들이 감동하였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P. 275)

 

Ü 백범 어머니의 말씀이다.

 

□ 바라는 바지만 감히 청하지 못하는 (固所顧不敢請) (p. 278)

 

□ 그대가 빈손으로 왔으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나 뇌물을 가지고 와서 요청하면 그 말부터 듣지 않을 터인즉 물건을 도로 가져가고 후일 다시 빈속으로 와서 말하시오 (p. 279)

 

Ü 대가성 가치에 대처하는 자세, 제발 배워라

 

□ 소작인의 준수 규칙

- 도박하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허락하지 않음

- 학령 아동을 입학시키는 자는 소작지 중 가장 좋은 논 두 마지기씩을 더해 줌

- 학령 아동이 있는데 입학시키지 않는 자는 소작지 중 좋은 논 두 마지기를 도로 회수함

- 농업에 근실한 성적이 있는 자는 조사하여 추수시 곡물을 상으로 줌 (p. 279)

 

Ü 명징하고 적확한 규칙이다.

 

□ 어린 딸아이 은경이가 사망하고 처형 역시 사망하여 그 땅 공동묘지에 매장 하였다. (p. 281)

 

Ü 짤막하다. 그래서 무섭다. 결기가 느껴지는 행간을 읽는다.

 

□ 기미년 (己未年 1919, 44) 2월이 돌아왔다. 청천벽력과 같이 경성 탑동공원에서는 독립만세 소리가 일었다. (p. 282)

 

Ü 역사적인 날이다.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 그때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나는 내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그후 안창호 동지는 미주로부터 상해로 건너와서 내무총장으로 취임하고

나는 안씨에게 정부의 문지기를 청원하였다. 이유는 종전에 본국에 있을 때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순사 시험과목을 혼자 시험쳐 본 결과 합격하기 어려움을 알았던 스스로의 경험과 허영을 탐하여 실무에 소홀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p. 285)

 

Ü 겸손을 넘어선 냉철한 자기 인식

 

□ 그간 아내는 신이를 해산한 후 낙상으로 인해 폐렴에 걸려 몇 년을 고생하다. 상해 보륭의원에서 진찰 받고 역시 서양 시설을 갖춘 홍구 폐병원에 격리, 입원하게 되었다. 나와는 보륭의원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였고 민국 6(1924, 49) 1 1일 홍구 폐병원에서 영원의 길을 떠났다. 나는 아내를 불란서 조계 숭산로 경찰서 후면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p. 287)


최준례묻엄.JPG

백범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맏아들 김인, 둘째 아들 김신(왼쪽), ‘최준례 여사 무덤

한글학자 김두봉이 한글로 묘비명을 썼다.

 

Ü 안타깝고 억울하고 애처롭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의 삶

 

□ 민국 8년 어머님은 신이를 데리고 고국으로 가셨다. 민국 9년 인이까지 보내라는 어머님 명령에 의하여 환국시키고 상해에는 나 혼자 외롭게 남았다. (p. 288)

 

Ü 행간에 느껴지는 그의 고독은 차마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무엇이 아니었을 것

 

□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p. 289)

 

□ 너희들의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p. 289)

 

Ü 딸에게 써둔 作名辭.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실존시켜 주는 것은 자신이 아닌 타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스스로 입신하여 양명하는 일을 자신의 업적으로 여기는 일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와 나를 둘러싼 존재들의 가치를 폄하시키는, 깨달음의 부재인 것이다. 깨달음의 시작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그 외소한 우주 속에서 외치는 작은 이야기들을 잘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너는 타인이 불러주는 너의 이름의 뜻을 깊이 새겨 을 행복과 감사로 살아가라.’

 

□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님에게 너무도 죄송하여 내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p. 290)

 

Ü 한 인간의 엄숙함이 이를 수 있는 끝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백범을 읽어야 한다. 위정자들은 그에게서 나라 사랑하라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책을 읽히겠으나 그들의 의도는 정확히 빗나간다. 그토록 바랬던 백범의 복락을 생각하면 이 나라에 발 붙이고 있는 것을 자랑은 커녕 오히려 증오해야 마땅하다. 물질에 무너져가는 공동체를 보고 백범은 비분강개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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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앞 중앙)과 한인애국단원 사진(1932년으로 추정

 

하권

 

□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날마다 늙어가고 병드니 상해시대를 죽자꾸나 시대라 한다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 하겠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p.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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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중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생의 모습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p. 298)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p. 307)

 

Ü 내 신조로도 삼을 만하다

 

□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p. 309)

 

Ü 잗다란 이념에 의한 대립과 반목이 시작되겠다. 이념 앞에 대의가 무너지는 사태를 백범은 안타깝고 목도하였을 것이다.

 

□ 백범 :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의 지휘, 명령을 받지 않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

이동휘 : 불가능하오

백범 :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제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p. 310)

 

Ü 확고한 운동관을 가지고 있다. 곧 민족자결주의가 백범의 의중을 떠받칠 것.

 

□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 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로 주창하였다. (p. 313)

 

Ü 이념이란 이렇게 허망하고 허술하다. 이념의 본질을 좇은 것이 아니라 강한 힘 앞에 기대고 있었던 거였다.

 

□ 신흥학교 시절 이후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히려 김일성 등 무장부대가 의연히 산악지대에 의거하여 엄존하고 있다. 이들이 압록, 두만을 넘나들며 왜병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을 하고 러시아의 후원도 받았기 때문이다. (p. 315)

 

Ü 한 때 이 땅에서 머리에 뿔이 달려 있다고 믿게 하였던 김일성은 독립투사였다. 그것도 가장 승률이 높았고 가열차게 진행되었던 전선에서의 수장이었다.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정치력과 군사를 이끄는 지도력은 높이 평가한다.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p. 323)

 

Ü 과연 그는 사람들의 영원한 사랑과 기쁨을 주는 쾌락을 맛보았다. 죽어서 영원히 산 사람이다.

 

□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p. 326)

 

Ü 사기에는 사마양저열전에 양저라는 장군이 나온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목숨을 바친 예다.

예전에 오공께서 우리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적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공이 지금도 또 제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었으니 이 아이도 어느 때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여불위열전에 이런 말도 있다. ‘!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얼굴을 단장한다

 

이봉창은 백범에게 이와 같음을 느꼈다.

 

□ 그리고 사진관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p. 326)

 

1 8일 신문에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하였다.’

정신적으로는 우리 한인이 일본의 신성불가침인 천황을 죽였으며 이것은 한인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은 것을 세계만방에 확실히 보여주는 증명이니 족히 성공으로 칠 수 있다고 하였다. (p. 327)

 

□ 그러던 어느 날 동포 박진의 종품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 있는 윤봉길 군이 홍구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다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동경 사건과 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p. 331)

 

Ü 윤봉길과 백범의 운명 같은 만남. 역사적인 만남.

 

□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 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p. 336)

 

Ü 이와 같은 이야기와 글을 함부로 읽어서야 되겠는가. 무릎을 꿇어 앉는다.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4.29 사건 발생 이후 왜는 나의 목에 제1차로 20만 원의 현상금을 붙였고 제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해주둔군 사령부 3부 합작으로 현상금 60만 원을 내걸었다. (p. 342)

 

□ 주매신 이야기 (p. 345~346)

 

□ 저씨 부인은 굽 높은 신을 신고 7~8월 불볕 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었다.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하여 만대 자손에게 전해 줄 마음이 간절하였다. (p. 348)

 

□ 우리나라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 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p. 352)

 

□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고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 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馬克思)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p. 353)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 나의 남경생활도 점점 위험해졌다. 왜구가 나의 족적이 남경에 있다는 냄새를 맡고 상해에서 암살대를 남경으로 파견한다는 보도를 접했다. (p. 360)

 

□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p. 362)

 

Ü 백범은 안중근 의사의 아내를 지키려 했다.

 

□ 나는 상해에서 민국 6 (1924) 1 1일 상처하였다. 처는 신을 낳은 후 몸이 채 튼튼치 못하였을 때 영경방 10 2층에서 어머님께 세숫물을 버려 달라고 하기가 황송했는지 세숫대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실족하여 층계에서 굴렀다. 그 후 늑막염이 폐병이 되어서 홍구 서양인이 경영하는 폐병원에서 사망하였다. (p. 363)

 

Ü 삶의 아픔이다. 이런 아픔을 견디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살아보아야 할까. 그만 두어야 할까. 슬프다.

 

□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p. 367)

 

□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에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p. 371)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 통일은 찬성하나,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요. 선생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통일하는 날, 우리 미국 교포와는 인연이 끊어지는 줄 알고 통일운동을 하시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약산과 상의한 결과 연명선언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민족운동이 필요하다고 발표하였다. (p. 378)

 

Ü 김약산은 누구인가.

 

독립운동가. 일명 김약산(金若山)·최임(崔林). 경남 밀양 사람. 1913년 서울 중앙학교 2학년에 편입, 중퇴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16년 천진(天津) 덕화학당에 입학했으나 폐교로 귀국했다. 18년 남경(南京) 금륭대학에 입학했다가 중단하고, 21년 만주 길림(吉林)에서 의열단을 조직, 테러·파괴활동에 의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24 5월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27년 북벌(北伐)에 참가했으며, 29년 북경에 레닌정치연구소라는 정치학교를 세운데 이어 32년 남경에 조선군관학교를 세웠다. 35년 조선민족혁명당, 38년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같은 해 10월 남경이 점령당한 후 중경(重慶)으로 가 임시정부 군정부장·광복군 부사령을 지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48 8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고, 같은 해 9월부터 52 5월까지 국가검열상을 지냈으며, 그 후 노동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맡았다. 58 9월 해임, 실각했다.

 

□ 장개석 장군은 김구의 광복군 계획을 흔쾌히 허락한다는 회신이 도착하였다. (p. 382)

 

Ü 이 때 김일성의 외교 라인과 거취가 궁금해진다. 이러저러한 search로 한홍구 역사학과 교수가 구한말부터 김일성의 독립운동사에 일가견 있으신 분인 것을 알았다. 한번 알아볼 일이다.

 

□ 봉빈은 비록 여성이나 총명, 과감하여 전시공작의 효과와 능률이 중국방면에까지 널리 알려져 칭찬을 받았으며 봉빈 자신도 항상 자기가 경이적인 공헌을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어 장래가 촉망되는 바이다. (p. 386)

 

Ü 이 여성에 호기심이 간다. 얼개를 맞추어 보면 영화 한편의 소재가 될 법도 하다.

 

6. 해방 전후의 대륙

 

□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p. 395)

 

Ü 이 눈물 나는 전경은 광복 직전 국내 침투 작전에 참여 하려 일본군에서 빠져나와 광복군으로 합류한 국내 진격 1진과 백범과의 만남이다.

 

□ 금일 금시로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은 시작되었다. (p. 396)

 

□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p. 398~399)

 

□ 우리 광복군은 계획하였던 자기 임무를 달성치 못하고 전쟁이 끝나 실망낙담하는 분위기에 잠기었고 반면 미국 교관과 군인들은 매우 기뻐하며 질서가 문란한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p. 399)

 

□ 한번은 적기 야습이 있어서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구경하기 위하여 침대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나섰다. 마침 하늘을 바라보니 비행기가 비둘기떼같이 날아오는 중 돌연 벽력이 진동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내 침실의 천장이 무너져 내가 누웠던 침대를 덮었다. (p. 403)

 

Ü 하늘은 살릴 사람을 살린다.

 

□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구절을 문인의 글재주로만 생각하였다. 그랬는데 그날 교장구에 나가 광경을 살펴보니 들것으로 방공호에 산재한 시체를 수집하는데 어린 아이 시체는 들 것 하나에 2,3명씩 어른은 한 명씩 모아서 쌓으니 과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문구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쓰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 405)

 

□ 중경에서 우리가 6~7년씩이나 거주하다 큰 아들 인이도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 (p. 406)

 

Ü 자식의 죽음 앞에 이리도 간결해 질 수 있는 것이다.

 

□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 (p. 408)

 

Ü 안중근의 아들이다. , 역사여.

 

7. 조국에 돌아와서

 

□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심정으로 상공에 높이 떠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늙은 몸을 자동차에 의지하고 차창으로 좌우를 바라보며 서울에 도착하니 의구한 산천도 나를 반겨주는 듯했다. (p. 409)

 

48년 전 무심히 보았던 글귀를 금일 자세히 보니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却來觀世間)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如夢中事)

 

라고 되어 있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p. 412)

 

Ü 해방 후 돌아와 마곡사에 가서 느낀 백범의 감회다.

 

□ 진해는 원래 조선의 요새지로 해군의 근거지일 뿐만 아니라 각종 해산물이 풍부히 생산되는 곳이었다. (p. 415)

 

□ 과거사를 잠깐 토론하며 만나고 헤어지는 예를 마치었다. (p. 416)

 

□ 김해에 도착하니 때마침 수로왕릉의 추향이었다. 김씨와 허씨가 다수 모인 자리에서 참배 준비로 나에게 사모각대를 갖추어 주었다. 이로 인해 출생 후 처음으로 사모와 각대를 차리고 참석, 배알하였다. (p. 417)

 

Ü 내 살았던 곳에 모두 백범의 자취가 있었다.

 

□ 눈짐작으로 어머님이 앉으셨던 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 옛날 나를 따라오시던 어머님 얼굴만은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여 쏟아지는 옛추억의 눈물을 금할 길 없었다. 중경에서 운명하실 때,

나의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시던 어머님 최후의 말씀을 생각하니 그것이 이날 이 자리에 모자가 같이 옛이야기를 하지 못할 줄 예측하시고 하신 말씀 같아 슬픈 마음을 진정키 어려웠다. (p. 421)

 

나의 소원

 

□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p. 423)

 

□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p. 424)

 

Ü 고운기가 쓴 삼국유사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짤막한 감상만 도입한다.

박제상이 첩보원 같은 신분으로 일본에 들어가고 왕자를 구출한 다음 모진 고문을 받으며 끝내 목숨을 잃는 사건의 전말, 거기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쪽에 있다.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연의 기술에서 그것은 더 명료해진다.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p. 425)

 

□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p. 425)

 

□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p. 426)

 

□ 나의 정치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p. 427)

 

Ü 사회적 이념의 개념을 명징하게 풀이한다. 지금 우리 나라는 자유가 없다해도 되겠다. 백범의 입장에서라면 말이다. 아 백범아.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p. 429)

 

Ü 주옥이다.

 

□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p. 430)

 

Ü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교육 정책 입안자들과 자녀를 둔 부모는 백범의 교육관을 한번이라도 곱씹어 보고 따라보자.

 

□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p. 43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인류의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p. 431)

 

Ü 모두 주옥이다. 빠뜨릴 말이 없다.

 

□ 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p. 432)

 

Ü 결국 우리는 저지르지 않았다. 분단의 이별이 시간이 너무 길다.

 

□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p. 432)

 

□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p. 432)

 

Ü 박애란 이런 것.

 

□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 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p. 433)

 

환국_영결식.JPG

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1945.11.3, 맨 앞줄 가운데가 선생)과 선생의 영결식 장면(1949.7.5, 서울운동장)

 

 

3. ‘이 땅의 人民意識 지침서(내가 저자라면)

 

우연찮게도 백범의 고향은 내가 철이 들고 제일 처음 접한 소설의 주인공 장길산과 같다. 장길산이 실존인물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실존한 것으로 믿고 있다. 백범의 기록은 제 자신이 직접 써놓고 후대에 전해지기를 바랐던 자서전이므로 실존인물이기도 하거니와 기록해둔 대부분의 사건들은 사실에 가깝다. 두 사람 모두 황해도 해주 구월산 자락에서 드라마틱한 인생을 출발한다는 것이 같다. 그러나 이것 외에 유사성은 눈에 띄게 많다.

 

우선 백범의 기록은 장길산에 표현된 풍성한 내 모국어다. 두 기록 모두 내 모국어의 풍경을 풍성하게 했다. 또한 불의와 약자에 대한 시선을 바로 보게 했다. 백범의 기록과 장길산은 정의의 설계도를 내장하고 있었다. 소설 속 장길산은 서얼 출신의 보잘것없는 광대다. 백범은 몰락한 양반 집안의 후손으로 상놈의 취급을 받는 천한 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꼭 같이 시대의 어려움에 봉착한다. 장길산은 조선왕조의 중후반기, 잦은 난으로 궁핍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전국에서 세를 규합하여 탐관오리를 벌한다. 백범은 을사늑약으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다. 그리고 두 인물 모두 미륵세상의 도래라는 오지 않을 그들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연민을 느끼고 연대해야 함을 느낀다. 나는 그네들에 눈물을 흘리기도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며 흠뻑 젖어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난 뒤 중국의 혁명가 노신이 한 말을 기억해 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앞서는 자의 괴로움과 외로움, 책임감, 강인함, 두려움을 상상했다. 그리고 나에게 자문한다. 너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느냐? 부끄럽다.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나 백범은 후세 사람들에게 이러한 자괴를 염두에 두고 자신을 기록하진 않았을 것이다. 희망을 가지리라.

내가 굳이 장길산과 백범의 상사점을 말하는 이유는 백범의 기록을 충분히 소설화 시킬 수 있으며 장길산을 능히 기록화 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데 대한 가능성이다. 서로의 기록 영역을 혼합하면 제대로 된 민중지침서하나가 나올 것 같은 생각에서다. 이 삼투압 같은 작업을 내가 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다. 능력이 되질 않는다. 백범을 이야기하자.

 

백범의 기록은 역사적이다. 그야말로 역사의 중간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들의 기록으로 그러하고 개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 이리도 위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그러하다.

인간의 삶, 그 일생보다 드라마틱한 역사는 없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삶의 고비와 모퉁이에서 한 차원 높은 사유를 통해 도약해 나가며 결국 위기의 나라를 구하는 인물이 된 백범의 일생은 한 편의 영화다.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필부의 삶들이 모두 잊혀져 갔으나 백범과 같은 이 왜 없겠는가.

그들의 삶 또한 값지고 영화롭다. 일찍이 접하지 못했던 사유의 도약 순간과 엄격한 자기검열, 냉철한 자기인식, 객관적인 사유, 균형잡힌 정치 의식, 그는 나라의 보배였다. 그가 내 사는 이 땅에서 단 한번 리더였다는 사실만으로 오늘 우리는 어처구니 없는 지금의 리더 모습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나와 같은 언어를 쓰고 나와 같은 땅에 살았으며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리더가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우리는 오늘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의 준엄한 삶 앞에서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다.

구성에 대한 지적은 그만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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