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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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두 얼굴
『난중일기』를 읽기 전, 나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의 일기를 읽어보니 그는 가족에 대한 걱정, 나라에 대한 근심, 원균을 미워하고, 몸이 자주 아팠던 사람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장군의 겉모습과는 다른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장군이 왜이러나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니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으며, 그 안에 서로 다른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두 얼굴 이상의 얼굴을 가질 수 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며, 몸의 건강상태와 정신상태에 따라 다르다.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서도 다른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겉과 속의 측면으로 보자면 두 얼굴일 수 있겠다. 좋을 때와 나쁠 때로, 기쁠때와 슬플때로 보자면 인간이 두 얼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바로 수학도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지난 주에 ‘내가 왜 수학을 배웠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 생각은 한계점이 있었다. 나의 생각 말고, 전문가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교육과정 해설서를 펼쳤다. 총론에는 수학의 성격 및 수학 교육의 목적, 수학 교육의 방향 등 수학 교육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배경 설명이 되어 있다. 오늘은 그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자.
총론 첫 페이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수학은 인류가 문명화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로 발전시킨 학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은 삶의 필요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격을 가지기도 한다.’ 첫 페이지에 나온 이 문단으로부터 나는 이제껏 간과하고 있던 수학의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됐다. 학생들이 수학을 왜 배우냐고 질문했을 때 나의 답이 짧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삶의 필요말고 다른 부분을 염두해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인 측면만 생각하다 보니 충분한 근거를 들어 배움의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삶의 필요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학의 성격은 어떤 성격일까? 수학의 어원을 따져 물어 그 첫 단추를 끼워보자.
우선 수학은 한자로 數學이다. 이 단어를 글자 그대로 옮겨 놓는다면 수에 관한 학문 또는 수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 Mathematics는 수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다. Mathematics는 라틴어 mathematicus에서 유래하였고, 이는 그리스어 mathematikos에서 유래하였다. 이와 비슷한 단어로 mathematekoi는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과학의 연구와 자기 인식에 몰두한 피타고라스의 뛰어난 제자들을 일컫는데 쓰인 말이다. 이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즉 영어 Mathematics는 ‘일반적인 배움’ 또는 ‘학식이 있는’을 의미하는 mathema와 ‘배우다’를 의미하는 manthanein에서 유래하였다. 즉 수학은 단순히 수나 도형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학문 또는 학식’이나 ‘배움의 과학’ 또는 ‘학문을 하는 방법’ 등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수학의 어원을 살펴보는 작업은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수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좁은 시각을 넓혀준다. 단순히 수나 도형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수학은 배움의 과학이었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이렇게 수학에 대해 넓은 시각을 갖게 해준 곳은 바로 고대 그리스다. 고대의 다른 문명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수학, 특히 기하학을 발전시킨 고대 그리스를 말하지 않고는 수학에 대해 논하기 어렵다. 고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또는 중국 등에서도 상당한 수준에서 도형의 성질을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기하학적 명제를 증명한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즉,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과 다른 고대 문명의 기하학 사이의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증명’에 있다. 기원전 6세기경 탈레스가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가 같다’는 명제를 증명했다는 기록이 전해졌는데, 다른 고대 문명에서는 이 명제를 알고 사용한데 그쳤다면 그리스 문명에서는 이 명제를 증명하고 있다. 다른 나라는 눈으로 본 사실을 그대로 믿고 활용했다면 그리스 인들은 ‘눈으로 본 사실’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두 밑각의 크기가 비슷한 것인지 정확히 같은 것인지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단 한 경우의 이등변삼격형의 성질을 눈으로 본 것으로는 모든 이등변삼각형에서 그러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고대인들과 다르게 생각했다. 이 부분에서 그들이 현대의 수학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남아 있게 된 이유다. 현대 사회에서는 ‘창조성’이 부각되고 있다.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두 마리 있는데, 그들은 미니핀과 요크셔테리어가 합쳐져 새로운 품종이 되었다. 이제까지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품종! 난 그들을 보고 전혀 다른 분야가 잘 융합되면 새롭고, 좋은 품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하는 청소년과 수학 그리고 인문학을 융합시키는 작업도 그런 작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또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캐취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창조적인 작업이 된다. 노력의 결과로 나오는 성과는 새로운 개념이 되거나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또는 정신적 도야에 발판이 될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고대 그리스 인들은 후자의 작업을 한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명’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수학의 한 면을 차지하게 됐다. 실용적인 측면만 가지고는 수학을 모두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해결해 준 이들도 그들이다. 수학의 영역이 넓다는 것은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자부심을 갖게 한다.
그리스의 기하학은 도형의 성질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에는 틀림없지만 단순히 도형의 성질을 찾고 응용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논리적으로 일관되고 타당한 방식으로 그 이전에 증명된 명제들을 이어서 주어진 도형의 성질을 증명하는 학문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리-연역적 방식을 취하고 있는 그리스의 기하학은 다른 문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식을 증명하는 엄밀한 방식을 보여준다. 즉, 그리스의 기하학은 다른 문명에서는 요구하지 않는 지식을 찾고 확인하는 방식 중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엄밀한 방식을 창조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유클리드의 ‘원론’과 같은 논증 기하학에서 발견되는 공리-연역적 방식은 인간이 지금까지 만들어 낸 지식을 확인하는 방법 중 가장 엄밀한 것이며, 이 방식을 19세기 현대 추상 수학을 만드는 기본 정신이 된다. 현대 추상 수학은 어떤 의미에서 기하학 이외의 미적분, 산술, 확률 등과 같은 여러 수학 분야를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처럼 엄밀하게 만들고자 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학은 인간의 문명화된 삶의 필요에 의하여 생겨난 학문임과 동시에 유클리드의 ‘원론’과 같은 순수 수학은 직접적인 삶의 필요와는 다른 논리적 엄밀성 또는 학문적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학은 실용적 측면과 순수 학문적 측면의 서로 다른 두 성격이 공존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수학 교육의 목적에 대한 관점 또한 서로 다른 두 개의 관점으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목적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이어 설명하기로 하자.
오늘 정리한 바와 같이 나는 내가 먼저 수학의 두 얼굴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그 두 부분을 인정해주면 우리는 수학을 왜 배우는지에 대해, 수학이 우리 삶에 왜 필요한지에 대해 타당한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만약 그의 두 얼굴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우린 늘 한쪽 얼굴만 보고, 그의 다른 면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수학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학문을 잘 할 수도 없게 된다. 수학을 깊이있게 알고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수학의 두 얼굴을 인정해주자. 그리고 우리가 잘 알지 못했지만,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진리를 명료하게 증명해 준 고대 그리스인들의 창조적 작업에 관심을 가져보자. 나는 고대 그리스 인들의 창조적 작업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리들을 엄밀하게 증명해 주었으므로 머리숙여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들 덕분에 인간들이 학문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됐으며, 더 똑똑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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