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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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상
9월이다. 그럼에도 여름은 마지막 힘을 다해 대지를 달군다. 가을이 나태해졌다. 서둘러 움직일 땐 8월 말경부터 제 시작을 준비하고 우리 사는 곳곳에 시그널을 뿌리더니 올해는 9월 중순을 힘겹게 넘기고 두어 번의 태풍을 보내고 나서야 뒤늦게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다. 수년 전부터였을까. 나는 이맘때 거르지 않고 가을앓이를 한다. 햇살 좋은 날, 구름 그림자가 푸른 산에 선명하게 찍힌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누렇게 물든 가을 논을 지날 때 입은 반쯤 열려있다. 급기야 낙엽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 길 한 중간에 드러누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앓이를 한다. 너무나 사랑하면 이별을 예감한다 했는가. 나는 오매불망하던 가을을 버선 발로 맞으며 또한 가을 감을 아쉬워 하는 중이다.
이 가을, 밖이 황홀하여 사무실이 잔인하다. 일하다 말고 점심시간에 아내를 불러내었다. 오고 가는 시간을 지하면 기껏해야 30여분 남짓한 점심을 같이 하려 김해에 있는 아내를 진해로 불렀다. 도시락 싸 들고 산중턱을 꾸역꾸역 올라가 진해만을 바라보며 앉았다, 드러누웠다, 발을 까딱거렸다 한다. 아내와 나는 생각했다. 이 가을을 잡아두는 방법은 없을까. 아니라면 이 몹쓸 ‘가을병’을 다스리는 약은 없을까. 농담 삼아 말한다. 모든 병, 이 가을로 인해 씻어지니 병이 약이 되고 약은 병이 되었다. 이 나라에 그나마 발붙이고 사는 이유는 가을이라는 환장할 계절 때문이니 이 시간을 제대로 즐기면 일년은 견딜 수 있을 것. 점심시간은 그리 짧을 수 없었다. 인생은 길고 점심시간은 짧다. 아니다. 인생은 짧고 점심시간은 더 짧다. 아내를 배웅하고 그녀 난 자리가 허전해 한동안 일은 못하고 해맑은 그녀 웃음만 모니터에 가득하다. 가을 든 자리가 그녀 난 자리를 더 허전하게 했다.
지구가 열병이라도 앓는 듯 지난 여름은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뜨거움에 속수무책이던 시간들이 누그러지고 이제 가을을 맞는다. 사람 나이로 치자면 서른 넷의 언저리다. 만고 내 생각이겠다. 여름도 겨울도 아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청춘도 늙음도 아니며 그렇다고 새로 시작하기도 무언가를 마무리하기도 뭣하면서 패기가 충만하지도 또 원숙하지도 못한 그야말로 서른네 살, 단테 식으로는 인생 반 고비의 언저리다. 그런데 어중간하고 흐릿하고 희미하고 어정쩡한, 좋지만은 않은 가을의 속성이 왜 내 마음을 잡아 끌고 있는 걸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가을에 열광하는가. 곧 떨어질 잎, 원래 제 색을 버리고 변해버린 잎을 두고 황홀해하는 이유는 무언가.
모든 쓰러져 가는 것들의 마지막은 쓰리다. 애처롭다.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이 땅에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명징한 사실을 처음으로 깊이 알아가게 되는 때가 가을이고 서른 중반과 마흔 사이의 계절이라 생각 했다. 청춘이 마지막 힘을 다해 다시 한번 솟구쳐 보지만 그 뜨거움은 예전만 못하다. 결국 세상에 맞추어가기 시작하고 자신을 변색 또는 탈색하여 제 잎을 떨구어 버리는 비열한 지혜까지 갖추게 되는 때다.
그러나, 가을의 붉음 속에는 자신을 태우는 자기발화 식의 내적 뜨거움이 있다. 이 뜨거움의 근원은 알기 어렵다. 절대 온도는 예전만 못할 지 모른다. 남들이 볼 때 미지근 하더라도 제 자신은 뜨거운 것이다. 이제야 존재를 깨달아 가는 이들의 조용한 악다구니다. 안으로는 고막이 터질 듯한 진동으로 살을 찢어놓지만 밖으로는 은은하고 웅장한 선율을 흘러내는 관악기와 같은 시간이다. 이제 막, 생의 유한성을 깨달은 자들이 남은 자유를 처절하게 외치는 시간이고 감추어 놓은 자신의 색을 꼭 한번 세상에 뿌려보리라는 열망을 드러내는 시간이다.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위해 ‘존재를 그만 두는’ 붉은 용기다. 그것은 살아온 용기가 아니라 살아갈 뜨거움이다. 어쨌든 그들은 뜨겁다.
그렇게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곧 사라질 붉음이 나를 열광하게 한다. 그 열광의 일주일을 나는 백범과 함께 했다. 장황한 내 가을의 가치를 백범과 함께 했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가을과 백범은 내 안에서 단번에 등가가 되었다. 쓰러져 갈 희미한 국운에 자신의 뜨거움을 불어넣고 마지막 자유를 꿈 꾼 것은 이런 가을류의 힘이겠다. 준엄한 인간의 삶 앞에서 나는 고개 숙였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독립 투사는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불러내어 내 박약한 자유의지를 그의 음성으로 꾸짖는다. ‘니 안에 있는 꽃도 피우지 못하느냐!’, ‘그 열망, 가지고는 있는 게냐!’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헤드셋을 끼고 빈 교실에서 재용의 글을 읽어요.
5교시만 하고 애들은 모두 돌아갔고,
오늘은 동호인의 날이어서 공식적으로 저는 5분 전에 샘들과 영화보러 나갔습니다.
재용의 글 속에 아름다운 구절이 많이 있어요. 음미하며 읽었어요.
가을이 나태해졌다.
이 가을, 밖이 황홀하여 사무실이 잔인하다.
오고 가는 시간을 지하면 기껏해야 30여분 남짓한 점심을 같이 하려 김해에 있는 아내를 진해로 불렀다. 도시락 싸 들고 산중턱을 꾸역꾸역 올라가 진해만을 바라보며 앉았다, 드러누웠다, 발을 까딱거렸다 한다. 아내와 나는 생각했다. 이 가을을 잡아두는 방법은 없을까. 아니라면 이 몹쓸 ‘가을병’을 다스리는 약은 없을까.
아, 나도 가을 바람 들고 싶어라. 좋은 사람과 소풍 가고 싶어라. 사람을 설레게 하는 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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