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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4일 11시 55분 등록

백범일지 (올바르게 풀어쓴)

김구 지음 (배경식 풀고 보탬) / 너머북스

 

 

I. 저자에 대하여 / 김구

 

1.jpg

 

김구 (김창수) 독립운동가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자 지도자

출생-사망 1876 8 29

(황해도 해주) - 1949 6 26

김창수

별자리 처녀자리

띠 쥐띠

가족 슬하 2 2

백범 김구 (1876 ~ 1849)

저자 백범 김구는 구한말의 조선 황해도 해주의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 본명은 창수였으나, 후에 본인 스스로 구()로 호는 백범으로 개명한다

 

연보로 읽는 김구의 삶

 

서 기

나이

사 항

비 고

1876

1

7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기동[텃골](현 벽성면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김순영의 외아들로 태어남. 아버지는 빈농으로 당27. 어머니 곽양식의 장녀 곽락원은 당 17. 아명은 창암.

병자.고종13.
일본과 병자수호조약 체결되다
.
안동김씨. 익원공파. 김순영. 자 재하(안동김씨 익원공파 김순영 자재하) 기유생 신축년 12 9일 기일
.
갑신정변 일어나다.

1879

4

천연두를 앎음

1880

5

집안이 강령 삼거리로 이사한다

1884

9

조부상을 당하다.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1887

12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생원을 초빙하여 한문공부를 하다.

1889

14

《통감》《사략》등의 병서를 읽다.

1890

15

학골 정문재의 서당에 통학하며 《당시》《대학》《과문》등을 배우다.

1892

17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
그 후 풍수와 관상공부등을 했고, 병서를 탐독.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라 개명.

1893

18

황해도 도유사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를 만남.

1894

19

팔봉접주로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 이루어지다.

1895

20

신천 안태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했고, 그의 아들 소년 안중근을 만남. 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 거유 고능선의 지도를 받음.
압록강을 건너가 김이언이 지휘하는 의병단에 참가.

을미사변으로 민비 살해되다.

1896

21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 양량을 죽여 국모의 원한을 풀음.
5
2일 일경에 체포되어 인천감리영에 투옥됨
.
감옥에서 《태서신사》《세계지지》등을 읽고 신학문에 눈뜸.

독립협회 결성되다.

1897

22

7월에 사형이 확정되고, 고종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함.

1898

23

3 9일밤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됨.

1899

24

환속하여 고향에 돌아옴.

독립협회 회원 피검.

1900

25

김두래란 이름으로 변명하고 다시 방랑길에 오름.

1901

26

엄친 김순영씨 세상을 떠남(12 9)

1902

27

장연 친척집에서 여옥이라는 처녀와 약혼함.

1903

28

여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에 입교함.
안창호의 영매 신호와 약혼했으나 또 파혼됨.

1904

29

신천 사평동 최준례(해주최씨.당시18)와 결혼함

노일전쟁이 일어남.

1905

30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 준. 이동녕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섬.

을사보호조약 체결됨.

1906

31

해서교육회총감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

초대통감 이등박문옴. 해아밀사사건.

1907

32

장녀 화경 출생.

1908

33

신민회를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움.

1909

34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며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되다. 10월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안중근 의사 사건.

1910

35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참석함.

8 29일 경술합방.

1911

36

1 5일 사내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근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언도받음.

105인 사건.
중국 무창혁명.

1913

38

옥중에서 이름을 구, 호를 백범이라 고침.

1914

39

감형으로 7년의 형기를 끝내고 7월에 가출옥함.

세계 제1차대전 발발.

1916

41

출옥 후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농촌계몽운동에 힘씀.

1917

42

장남 인 출생함.

10월 러시아 혁명.

1919

44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됨.

3.1운동 일어나다.
임시정부수립.

1922

47

차남 신 상해에서 태어남.

중국 5.4 운동.

1923

48

임시정부 내무국장에 취임.

1924

49

1 1일 상해에서 부인 최여사 폐렴으로 세상을 떠남.

1차 국공합작.

1926

51

12월 임시정부의 원수인 국무령에 취임.

6.10 만세 사건.
신간회가 조직됨.

1927

52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위원에 취임.

1928

53

자서전《백범일지》상권의 집필을 시작한다. 3월 이동녕. 이시영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함.

1929

54

5월 자서전《백범일지》를 탈고하다.
재중거류민 단장을 겸임.

7 7일 만보산사건.
만주사변.

1931

56

한인애국단을 조직, 그 단장이 되어 독립투사를 양성함.

1932

57

1 8일 이봉창 일황저격에 실패.
4
29일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함.

상해사변.

1933

58

윤 의사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
가흥에서는 주 애보라는 여사공에 몸을 의탁함
.
중국의 장개석 장군을 만나 친교를 맺고, 낙양 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함.

1934

59

다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

1935

60

11월 가흥에서 임시의정원 비상 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

1936

61

이동녕 등의 동지들과 한국 국민당을 창당.

1937

62

임시정부를 진강에서 장사로 옮김.

지나사변이 터짐.

1938

63

민족주의 삼당 통합 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1개월 동안 입원가료함.

1939

64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로 갔다가 장개석 주석의 도움으로 다시 중경으로 감.
다시 임시정부 주석으로 취임
.
어머니 곽씨부인 인후염으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1940

65

5월 혁명 투쟁 각 단체를 통합, 한국독립당에 집중케 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
군사특파단을 협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 부대 편성에 노력함.

중경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

1941

66

12 9일 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함.

1942

67

7월 임정과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이 체결 공포됨.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에 진력라게 됨.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

1944

69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협서성 서안과 안취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군의 원조로써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

1945

70

2월 임시정부는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함.
장남 인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남
.
11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개인 자격으로 환국함
.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보고 12 28일 이후 반탁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함.

8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
임정의 14개조 당면정책을 발표.

1946

71

2월 비상국민회의가 조직되어 그 총리에 취임.
인천. 마곡사등 전국을 순회
.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의 유골을 효창공원에 봉안.

1947

72

1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주석에 취임.
2차 미. 소공위가 열리자 반탁 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
.
11
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결의안을지지하다. 그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나의소원》을 발표.

1948

73

2 2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
4
19일 남북 협상에 참가차 평양에 감
.
5.10
선거 후부터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힘을 기울임.

5.10 선거

1949

74

6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함.
7
5일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영면함.

1962

3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됨.

 

 

타락한 과거제도에 실망,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7. 11()~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 (),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 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 때에 당시 열에 아홉은 사망하였다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국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채를 서당으로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이후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섭렵했다. 이듬해(1893)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1894년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동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병사를 지휘하여 해주성을 공략,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결심

 

1895년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선생은 연소의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안중근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하루는 고선생이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

 

이에 선생도 비분에 못이겨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고 선생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고 청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하직 인사차 안진사에게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동짓달 초에 고산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에 뒤이은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 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이 선생의 집에 난입하여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는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선생을 쇠사슬로 포박 후 해주옥에 가두었다. 선생은 동년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어 경무관 김윤정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방청을 감시하는 일인 경관 도변(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도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김 경무관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감리사 이재정으로 하여금 직접 심문케 하여 감리사가 심문을 개시코자 함에 선생은 먼저 그를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뜻)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귀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님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 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그러자 감리사, 경무관,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경어를 쓰니 옥 사정들의 대우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에 눈을 떠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사형 직전 고종의 특사로 형집행이 정지되다

 

2.jpg

 

선생은 1897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이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난 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법무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황제의 칙재를 받았다. 황제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문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나아가 임금께 보인 즉 황제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인천에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늦게 되었던들 황제의 명령이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일제의 눈치 때문에 석방이 되지 않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 3 9일 밤 탈옥하여 수원, 목포를 거쳐 함평에 도착, 그곳에서 15일간 묵었다. 그리고 보성, 화순, 순창, 담양을 거쳐 올라와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모든 세상의 잡념이 식은 재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출가(법명: 원종(圓宗)하게 되었던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예불법이며 천수경, 심경을 외우고 보각서장을 배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은신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선생의 본색이 들어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진력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 지었다. 1901 12월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선생이 장연에서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국내사정은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야기시킨 후 ‘한일의정서’, ‘한일협정서’ 등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등 침략의도를 드러냈으며 마침내 1905 11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자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3.jpg

교편 생활 시절의 선생(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 재임 시 광진학교에서 촬영한 것이다

 

상소투쟁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황해도로 내려와 문화권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원을 지냈으며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하였다. 또한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미천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호를 삼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 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다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워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황해도에 선생을 선정하였다. 대표들은 각각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약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 1 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뛰어든 임시정부 활동

 

1919 3 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도착하여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에 몸을 싣고 4일만에(1919. 4. 13) 상해 포동나루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신익희, 윤현진, 서병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나이를 고려하여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경무국장은 농공상국, 지방국, 비서국 등과 함께 내무총장의 보좌기구로써 소관업무는 경찰업무와 도서출판, 저작권 그리고 위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왜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업무도 병행하였다. 같은 해 선생은 서병호, 안정근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이사에 피선되어 활약하였으며 1920 11 9일에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1922 7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의 알력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횡령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생은 안창호, 김덕진, 신익희, 차이석 등 여러 지사들과 동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최선의 방책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의 위기를 타개코자 노력하였다. 또한 1922 10월에는 조상섭, 김인전, 손정도, 양기하 등과 회합하여 조국독립에 필요한 실력준비로 군인양성 및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발기인이 되어 동월 28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열어 이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한국노병회는 한국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쟁비용을 조성하여 독립군과 전쟁비용이 목적한 수준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되, 그 전이라도 국가 또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개시한 때에는 이에 참가하여 출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1923 5월 국민대표회의 윤해, 신숙 등 소수인이 대표회의 이름을 팔아 임시의정원의 직권과 체면을 손상케 하니 동년 6 6일 선생은 내무총장으로부터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 내용은 “소위 만민대표회에서 6 2일 연호 및 국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다. 2, 3차 귀순을 권유하였으나 일향 고집하여 이와 같이 헌법을 제정함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함이다.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유업의 신기를 보유할 직권으로서 소수인의 집회 등 6 2일 이래 일체의 불법행위를 엄금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시 해산을 명한다”라 하였다.

 

동년 12 26일에는 상해교민단 의용대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24 4 9일 국무총리 노백린이 사임하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다가 동월 24일 이동녕이 국무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동년 6 2일에는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6 3 20일 한국노병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동년 12 14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자 윤기섭, 오영선, 이규홍으로 신 내각을 조직한 후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임시 정부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 젊은층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의 심취, 자금난 등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 등을 파견하다

 

1928 3 25일 선생은 이동녕, 안창호,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조소앙, 엄항섭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으며 1929 8 9일 상해교민단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침체에 빠져 있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계의 활성화를 위해,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는 날로 팽창되어가고 있는 일제에 대항해서 싸울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인물난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임시정부로써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특무공작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에 한 몸을 나라에 바칠 애국투사를 선정하여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중요기관을 파괴하고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으며 특무공작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국무위원으로서 재무장의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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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932 1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 의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동경 앵전문 밖에서 일왕을 저격하게 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으며 동년 4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일으켜 일군 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 대장 등 다수의 장성 및 고관들을 폭살케 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장개석 총통을 만나 한인 무관양성소 특설을 협의하다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미국인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던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가흥의 저보성 집으로 피신하여 광동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던 중 1933년에 장개석 주석의 면회요청을 받고 안공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공관에서 장개석을 면회하였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①한국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할 것 ②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③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의 조약을 맺고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하여 한인교관으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역전의 명장들을 교관으로 초빙, 한인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 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민족주의와 공산주의 합작)이란 단체가 구성되어 국무위원 7인 중 5인이 이에 참가하게 되자 임시정부 운영은 매우 곤란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1935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6인이 강소성 가흥에서 의정원 비상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을 보선하니, 선생은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되어 임시정부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이듬해(1936)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일군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으로 옮겼다가 1937년에 다시 장사로 이동하였다. 1938 5월 장사 남목청에서 민족주의 3당 통일회를 개최하고 3당 대표자가 회의를 하던 중 간소배의 사주를 받은 흉한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은 즉사하고 선생은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1개월 동안 입원하여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39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으로 옮긴 뒤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광복군의 국내정진 작전 중 일왕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여 직할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국사특파단을 섬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다시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 11월에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의 일체 활동을 승인하고 무기와 일체 경비 등을 지원해 주기로 하는 대신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을 체결하고, 이어 12 9일에는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본격적으로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 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이른바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을 위한 곤명 주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로서 본토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강소성 정부가 있는 입황(立煌)에 설치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5 8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피나는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자력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동년 11 23일 선생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 1월에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 소 공위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안을 지지하였다. 1948 4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 6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거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문구가 가장 기억남는다.

다시 한번 마음을 진정하고 반성함으로써 냉정한 이성을 회복하여 한결같은 민족적 양심으로 정성 단결하여 다같이 자주통일의 길로 총 진군 할 수 있는 날에 비로소 이 겨레의 앞에는 통일과 자유의 서광이 비칠 것이다.

- [민성(民聲)] (1949. 7)에서 -

 

 

II.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백범일지

 

책을 펴내며 인간 백범의 재발견을 위한 첫 탐사
백범 출간사


상권


인과 신 두 아들에게
「깊이읽기」 비운의 가족사와 눈물겨운 아들 사랑


1.
상놈의 한을 품고 자란 어린 시절

역적의 방계 후손
「깊이읽기」역적의 방계 후손에서경순왕의 후손으로

해주 텃골의 개구쟁이

「깊이읽기」 백범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

『수호지』의 영웅 같은 아버지

「깊이읽기」 만인의 모범이 된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가난 속의 글공부

과거 낙방

「깊이읽기」 과거제도의 문란과 과거 실패의 교훈


2. ‘
아기접주의 꿈과 좌절

열여덟 살의아기접주
「깊이읽기」 백범 일행의 최시형 방문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

「깊이읽기」 해주성 전투의 진실

자중지란

「깊이읽기」 동학 관련 세 가지 미스터리

청계동의 안진사

「깊이읽기」 안중근 집안과의 소중한 인연

평생 스승 후조 고능선

「깊이읽기」 고능선은 누구인가
?

3.
청국 시찰과 단발 의병

망해 가는 나라를 살리는 방법...
책을 펴내며 인간 백범의 재발견을 위한 첫 탐사

 

P7 백범이 백정(白丁)이라는 뜻에서백白’ At를 따고, 범부凡夫’ 라는 뜻에서자를 따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지은 것도 바로 겸허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백정이나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도립국민이 되겠다.”

 

P8 “죽은 고기는 목적이 없지만 산 고기는 가는 목적이 있다. 바라건대 청년들은 물 흐르는 대로 순류하는 죽은 고기가 되지 말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목적 있는 산 고기가 되기를 바란다 .. ‘역수어 정신은 모진 시련과 실패를 딛고 마침내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선 백범 자신의 삶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P10~11백범의 둘째아들 김신 옹의 회고대로아버지는아들을 몰라야 했고, 이들이 아버지를 모르면서 살았떤 가정이백범의 가족이었다. 그러나 김신 옹은 아버지로서의 백범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아버지를 아버지로서보다는 다시없는 스승으로 섬기고싶었다”고 회고하며, 백범을 아버지이기 이전에 인생의 스승으로 존경한다고 말했다.

 

P15 전투를 위한 두 개의 무기는정찰과 도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필자의 새로운 삶의탄생을 알라는 이정표이자, 필자가구상하는 백범학 시리즈의 첫번째 성과이다.

 

백범 출간사

상권

 

P31 어린 자식들에게 한 자의 유서도 남기지 않고 죽으면 너무도 무정할 듯하여 일생 경력을 간단히 적어서 삼가 부탁하오니, 이 몸이 죽어서 땅에 묻힌 뒤에, 곧 자식들이 장성한 뒤에 찾아 전하여 주시면 영원히 감사하겠나이다. 그 이전에는 회사 창고에 간직하시고 세상에 알리지 말아 주옵소서,

 

인과 신 두 아들에게

 

「깊이읽기」 비운의 가족사와 눈물겨운 아들 사랑

 

1. 상놈의 한을 품고 자란 어린 시절

 

P31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흙은 밤 한 톨을 얻어서 감추어둔 꿈을꾸었는데, 그것이 태몽이었다고 늘 말씀하셨다.

 

 

2. ‘아기접주의 꿈과 좌절

P65 과거장에서 겪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그보다 더한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짐승처럼 산기 위해 산다면 몰라도 사람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n뜸이 사라 졌다. 그런데 문득 『상서』 중에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P103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는 너무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의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그러시면 앞으로 갈 길에 대한 모든 것을 선생님 효시는 대로 징 가르쳐주시면 성심을 다해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P104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과, 일을 할 때에는 판단 · 실행 · 계속의 세 단 계로 사업 성취해야 한다는 퉁 의 좋은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다.

 

P105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큰 결점으로 생각한 것은 결단력 의 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은 것이 가히 장부로다.

 

3. 청국 시찰과 단발 의병

P110 '자네가 떠나고 나면 부모님이 외롭고 쓸쓸할 터이니,자네 아버지는, 내가 우리 사랑에 모셔와 이야기나 하고 놀겠네.”

 

P120 호통사들은 중국어 몇 마디를 배워가지고 중국사람에게 붙어서 여자들의 정조를 유린 하고, 돈과 곡식을 강제로 빼앗는 등 못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나는 우연히 어느 중국인의 집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땋은 한 처녀를 보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그 처녀의 부모가 사윗감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을 눈치챈 호통사가 중국인에게 진 빛 대신에 그 처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처녀의 부모를 협박하여 강제로 중국인에게 보낸 것이라고 했다.

 

P140 “내가 장차 몸과 마음을 의지할 만한 사람을 찾느라 허다히 마음을 써서 자네를 만났고, 더욱이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아서 혼사까지 약속한 것인데 이런 괴변이 어디 있겠나! 그러면 혼사는 다시 는 거론하지 않기로 하세.

 

P149 나의 결단력을 북돋워주기 위해 가르쳐주신 교훈 가운 데,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라는 글귀가 생각났다 나는 곧 스스로 묻고 답했다.

 

P162 이틀 만에 해주감옥에 들어갔다. 부모님 두 분 다 해주로 오셨다. 어머님은 밥을 벌어다가 옥바라지를 하셨고, 아버님은 당신이 예전에 자주 하셨듯이 사령청과 영리청 계방을 통해 나를 석방시키려고 했으나, 시절이 예전 같지 않고 사건이 워낙 중대하여 아무 소용이 없었다.

 

4. 치하포 사건과 법정투쟁

 

P169 감옥 안이 매우 불결하고 찌는 듯이 더운 여름철이라 나는 장티푸스〔技斯〕에 걸렸다. 고통이 너무 심해 짧은 생각에 자살하려고 동료 죄수들이 잠든 사이에 이마 위에 손톱으로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 숨이 끊어졌다. 숨이 끊어진 잠깐 동안, {갇 고향으후 가서 평소 친애하던 6촌 동생 창학-지금 이름은 태운-이와 놀았다. 고시에 이르기를, “고향이 늘 눈앞에 아른거려, 굳이 부르지 않았는데 흔이 먼저 가 있도다 라고 했는데, 실로 헛된 말이 아니었다.

 

183 첫번째가 독서 이다. 아버님이 오셔서 『대학』 한 질을 사서 넣어 주셨으므로 매일 대학』올 읽고 외웠다. 인천항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개항된 항구여서, 서구 여러 나라의 외국인과 여행자들 01 없었고, 교회도 설립되어 있었다.

 

P183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문화·경제·도덕·교육·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의 것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 살이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시무 아는 영웅의 할 일이오. 외국 것을 배척하는 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배워서 장래 국가에 큰일을 해야 하오.

 

P184 두번째는 교육이다.

 

P185 세번째는 대서(代書)이다.

 

P187 네번째는 성악(聲樂)이다.

 

5. 방랑과 모색의 시기

P241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는 짐승이나 벌레한테 까지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했다.

 

P241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 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보통양반에게 당한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속에 가득했었다

 

P263 “군자는 알고도 속아줄 수 있다 ('맹자」 「만장(萬章)』 상면에 나오는 구절)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큼 알고도 끝내 피하거나 자취를 감춘다면 그 또한 의롭지 못한 것 이다.

 

P267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지요.”

 

6.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P281 저주하리로다. 해주 석촌의 양반들이여! 자기네가 충신의 자손이니 공신의 자손이니 하며 일반 백성을 소나 말처럼 여기고 노예처럼 대하던 기염은 오늘은 어디에 갔는가!.. 구식 양반은 군주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여도 자자손손이 그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에게 만세토록 복된 음덕을 남길지라. 이 얼마나 훌륭한 양반이냐.

 

P301 그날 민영환이 자결했다(민영환은 1905 11 30일 새벽에 국민과 각 ..;-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 소식을 듣고 몇몇 동 치들과 같이 민영환 댁에 가서 조문을 마치고 큰길로 나올 때였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흰 명주저고리에 갓망건 * 도 없이 맨상투 바람으로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 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면서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누구냐고 묻자 참찬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그이도 나랏

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의분을 못 이겨 자살하려 했던 것이었다.

 

7. 서대문감옥의국사범 강도

P338~339 “우리의 비밀대화를 한순직이 전부 일러바치니 지금부터 밀어 전달을 중단하오.”

과연거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아본다는 말이 맞았다. 처음에 명근 형은 한순직을 용감한 청년이라고 내게 소개 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 꺾이는 사람이 어찌 한순직 혼자뿐이었으랴. 최병식도 밀고하지는 않았으나, 사 실이 아닌 것을 그놈들의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해 거짓으로 대답 한것이 후회되어 스스로 호를 긍허統虛’ (헛된 말과 행동을 삼간다는 뜻)라고 했다.

나는 결심에 결심을 더했다. 나의 혀끝에 사람들의 생사가 달렸음을 깊이 깨달았다.

 

P349 “당신이 나의 무죄를 인정한다면 대접하는 음식을 먹겠지만 만 약 유죄 라고 한다면 먹지 않겠다.”

 

P354 “그러면 언제부터 공대를 하오리까?"

“잘못인 줄 아는 시간부터이다.”

 

P363 나의 심리상태가 체포 전과 후에 크게 바뀐 것을 깨달았다. 십몇년 동안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서 설교하거나 교편을 들고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만 하더라도 작은 일 하나에도 양심을 본위로 삼아서 , 사악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먼저 지신을 꾸짖지 않고 는 감히 남의 잘못을 나무라지 못하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학생들과 친우들 사이에서 충실하다는 신망을 받았고, 모든 일에 지신을 먼저 돌아보고 나서 다른 사람의 행실을 살 피는 것〔推己及人)이 습관이 되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불과 반년 만에 심리상태가 이토록 크게 바뀌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P365 그 왜놈은 관리를 희롱한다며 미친개 모양으로 날뛰면서 죽도록 나를 때렸다. 그러나 왜놈이 나를 뭉우리돌로 인정하는 것만은 참으로 기뻤다. 나는 죽어도 왜놈에 대하여 몽우리돌의 정신을 품고 죽을 것이고, 살아도 붕우리돌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슴깊이 새겼다. 죽는 날까지 마귀 와 같은 왜놈의 이른바 법률이라는 것을 한 푼이라도 파괴할 수만 있다면 과감히 단행하리라. 왜놈 마귀들을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아 보통사람들은 맛보기 어려운 별종생활의 진수를 맛 보리라고 결심했다.

 

P374 “얘야, 나는 네가 경기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P402 ‘내가 국사를 위해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 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 할수없었다.

당시 옥중의 수인들 가운데 이 같은 강도의 인격이 최고였다. 그러므로 왜놈에게 빌붙어 순사나 헌병보조원 등 왜의 관리를 하다 가 감옥에 들어온 A는 감히 수인들 가운데서 머리를 들지 못하 고, 사기 ·절도· 횡령 등의 범죄자도 강도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다. 이 때문에 감옥세계의 권위는 강도가 잡고 있었다.

 

8. 고국 탈출

P411 자식들에게도 아비된 도리를 조금도 못했으니, 내가 아비라 하여 너희들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해 주기도 원치 않는다. 다만 너희들은 사회의 은혜와 보살핌으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스스로 사회의 아들이라는 마음으로 사회를 알고 부모처럼 효도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P421 보통 남편과 아내가 말다툼을 하면 주로 어머님이 자기 아들 편을 드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집은 그 반대이다.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하면 어머님은 무작정 아내의 편을 들면서 나만 몰아 세웠다. 차츰 생활해 보니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나에게 불리한 문제가 생겼다. 그러므로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 번 도 내 마음대로 해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내가 아내의 말에 반대라도 하면 어머님은 대단한 기세로 나무라셨다.

네가 감옥에 들어간 뒤에 네 통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개 있는 행동에 나는 고사하고 네 친구들도 감동했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P429 “어느날 이고 바람 잘 부는 날 두고 보자한다. 나는 겹겹이 둘러서서 싸움 구경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P 431 무오년(1918) 11월에 인f 태어났다(1918년 음력 11 12, 양력 1215) . 인이가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님은 물론이고 여러 친구들이 까들 낳기를 바란 것은 내 나이가 마흔이 넘은데다가 내가 누이 없이 혼자이므로 지식이 없음을 걱정한 때문이다. 인이가 태어나자 김용제는 어머님에게 축하하는 말로, “아주머님, 손자 장가보낼 때는 제가 후행 (혼례 때 신랑이나 신부를 데라고 가는 사람) 갈게요

했다. 김용승 진사가 손수 이름을 지어주었다. 원래 이름을 김인이라고 지었으나 왜의 민적 등록된 까닭에 인으로 고쳤다

 

P443 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면 도무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 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고 궁하면 귀함이 없지만, 나는 귀해져도 궁하고 궁해도 또한 궁한 일생을 지냈다. 국가가 독립하면 삼천리강산이 다 내 것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넓고 큰 지구상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가 가진 것이 없다. 과 거에는 부귀영화를 누릴 욕심으로, 또는 궁핍함을 면해 보려는 생각에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처럼 부질없는 헛된 계산도 많이 해보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하권

 

P447 나는 지난 세월 인물이 모자라고 경험이 부족한 탓에 숱한 과오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것을 진솔하게 기록하여 줌으로써 해외와 고국에 있는 동지들이 거울로 삼아 다시 나오 같은 전철을 밞지 않기를 바란다.

 

P452만인 누가니·에게어떻게 죽는 것이 소원이냐?’고 묻는다면, 나의 가장 큰 소원은 독립한 뒤에 본국에 들어가서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다. 만약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최소한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죽으면, 시체를 아래로 던져 산속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에 떨어지면 물고기들의 뱃속에 장사지내는 것이다.

 

P453 칠십 평생을 되돌아보면, 살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9. 임시정부에 운명을 맡기다

P460 도산은 내가 여러 해 동안 감옥생활을 하여 왜놈의 사정을 잘 알뿐더러 혁명시기에는 인재의 정신을 보고 통용하는 것이라며, 이미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일이니 사양하지 말고 취임하여 업무를 보라고 억지로 권했다. 결국 나는 도산의 뜻대로 경무국장에 취업 했다.

 

P469 "일을 맡기면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사람을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 내 평생 신조이다. 이 신조 때문에 이따금 화를 입으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했는데 , 경호원 한태규 문제도 그러했다. 그는 평양 출신으로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착실하여 7~8년 데리고 있는 동안 안팎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내가 경무국장을 그만둔 뒤에도 그는 경무국에서 일했다. 어느날 계원桂園(노백린의 호 당시 그는 임시정부 국무총리였고 백범은 내무총장이었다) 형이 아침 일찍 내 집에 와서 말했다.

“뒷골목에 젊은 여자 시체가 버려져 있는데 중국인들이 조선사람이라고 떠드니, 가서 알아봅시다.”

같이 가서 살펴보니 명주明珠 시체였다. 명주는 정인과와 황진남 등의 식모로도 일한 적이 있는 신분이 낮은 여자로, 어떻게 상해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젊은 남자들과 좋지 못한 소문도 있었다. 언젠가 한밤중에 한태규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도 청년이 서로 친한 관계가 있나 보다고 생각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P481"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는 말이11\-파 이를 두고 하는 격언일 것이다.

 

10. 살신성인, 이봉창과 윤봉길

P497 “제 나이 이제 서른입니다.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 한들 늙은 생활이 동반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보다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고 싶습니다.” (이봉창)

 

 

P505 트럭에는 전사자의 시체와 부상병들이 가득했다. 트럭의 나무판자 틈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볼 때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정성으로 경의를 표했다. 눈물이 비오 듯 흘러내렸다. 우리는 언제 저들처럼 왜와 피를 흘리면서 싸워 우리 강산을 충성된 피로 물들일 날이 있을까. 눈물이 너무 흘러서 길에서 보는 사람들이 수상하게 볼까 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P508~509 내가 전에 공장 구경을 가서 윤군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는 학식 있는 진실한 청년노동자로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니 살신성인의 크고 의로운 뜻을 품은 의기남아가 아닌가. 나는 감복하여 말했다.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일을 이른다고 했으니 안심하시오.

 

P511 “오늘 홍구에 가서 식장 설치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시라카와도 왔습니다. 제가 그놈의 곁에 섰을 때어떻게 내일까지 기다리나 오늘 폭탄을 가져왔으면 지금 당장 쳐죽일 텐데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나는 윤군에게 이렇게 주의시켰다. “여보, 그게 무슨 말이오. 사냥꾼이 핑이 날아갈 때 쏘아 떨어뜨리는 것이나, 수풀 속에서 자고 있는 사슴은 쏘지 않고 달아날 때에 쏘는 것은 통쾌한 맛을 즐기기 위함이오. 내일 성공할 자신감이 없어 그러시오?

“아닙니다. 오늘 그놈이 내 곁에 선 것을 보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P512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그다지

 

11. 피신과 유랑의 세월

P527 “자네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약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한다고 하였네. 하나 유감인 것은 이운한 정탐꾼도 우리 동포이니 총을 맞고 살아난 것은 왜놈의 총을 맞고 축는 것보다 못하네.”

 

12. 중경시대

 

P568 “통일은 찬성하지만 김약신은 공산주의자요. 만약 선생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통일하는 날이면 우리 미주 교포와 인연은 끊어지는 줄 알고 통일운동을 하시오.”

 

계속편

 

P595 우리 일행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지만 국내 동포들은 임시정부환영회라고 크게 글씨를 태극기와 함께 푸른 하늘에 휘날리며, 수십만 겨레가 모두 나와 대대적인 시가행진을 하니, 말리 해외에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고통을 알고 동정하는 싶었다.

 

13. 해방 전후의 임시정

 

P597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그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고생하면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진실로 지금까지 들이 정성이 아깝고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P599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일제히 애국가를 부르며 우리 임시정부 청사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청년들 이 있었다. 그들은 화북 각지의 왜 군 부대를 탈출하여 부양에 있는 광복군 제3지대로 찾아온 학병청 년들로서, 김학규 지대장이 정부로 보낸 것이다.

이 일은 중경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50여 명의 청년 들을 초청한 환영회가 열렸는데, 중국 각계 인사들로 조직된 중한 문화협회 (1942 10월 중국 국민당 입법원장 손괴를 회장으로 조직된 한국독립운동 지원단체)가 마련한 환영회가 가장 규모가 컸다. 서양 여러 나라의 통신사 기자들과 대사관 직원들도 참석하여 호기심 어린 눈길로 한국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한 청년의 다음과 같은 답변은 큰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말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출전하라는 통지를 받고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더니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이 몰래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이왕이면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 이 말에 따라 일본 군 부대를 탈출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서 오늘 우리 정 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국 인λ}들까지도 큰 감동을 받았다.

 

14. 고국에 돌아와서

 

P620 비행기 에서 내리자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었다. 책보를 메고 줄지어 걸어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동포의 후손들은 왜적의 악정 때문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던 바와는 딴판으로 활발하고 명랑한 기상을 보여주니, 이것은 우리 민족의 장래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기쁨이었다. 그 반면에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이 생활 수준이 처만치 낮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한가지 슬픔이었다.

 

P624 돌아와 속세의 일을 회상해 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 글귀를 보고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니 관연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P632 ‘지난날 나에게서 배웠던 서른 명의 학생 가운데 이 자리 사람이 있으면 나서보라 고 두세 번이나 외쳐보았으나, 한 사람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야 경관과 같이 한 사람이 찾아왔다. “제가 과연 선생님의 제자올시다.” “그러면 나에게서 배운 기억이 나느냐?" “생각납니다.’ “그러면 아까 운동장에 오고도 왜 대답이 없었느냐?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감격의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 미처 대답을 못했습니다.

 

P634 그 옛날

 

나의 소원

 

P636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면, 나는 서슴지 고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 할 것이다.

 

P649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에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이 이번에 당한 보복은 국제적 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III. 내가 저자라면

 

책은 김구 선생의 일생 일대기를 적은 자서전 이기 때문에 글의 구성ㅇ이 시간대별로 구성 되어 있다, 어린 시절 그의 마음에 품고 상았던 "상놈의 한을 품고 자란 어린 시절" 당시 살회적 여건과 사람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주고 있다.
민족의 지도자로 식견을 갖추고 당당히 조국 주권 회복에 앞장 김구 산생의 일대기 편성에 무어라 논할 내요은 별로 없다
.
또한 정리한 기록이 당시 상황과 다른 문헌 속에서도 검증된 내용인지 확인해 주는 과정이 장마다 수록해 놓고 역사적 사건으로 보여주는데 필요한 요소들을 담아 내놓고 있다
.
다만 14 에서 언급하는 '고국에 돌아와서' 에서는 눈물 겨운 동안의 아픔과 설움 그리고 희망찬 조국 건설에 당시 남한 정부가 들어 서는 것에 대한 반대 입장에 서서 오늘날의 대한 민국 건설에 함께 하시지 못한 비운의 삶으로 생을 마감 일은 아쉽게 느껴진다. 최근 발견된 김구와의 이터뷰 기사 내용 백범 김구 선생은 당시 '한민당' 합류하여 남한 정부에 동참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북한의 군사력에 비해 당시 남한 사정이 열악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당시 남한 정부가 존속하기 어렵다는 이유가 들어 있다. 또한 남한 정부에 동참하는 것이 일신상의 안일을 위해 선택하는 처럼 언급한 부분도 있다. 당시 시대적인 인식이 이러했다면, 오늘날 부유한 대한 민국을 상상해 보는 능력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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