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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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치 모닝페이지 다시 읽기
상자에서 3년 치를 꺼내왔다. 쓰고서 그냥 쌓아두고 다시 읽지 않았다. 천일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자기사랑에 대해 쓰겠다는 작정은 실패했다. 며칠 하지 못했다. 꾸준히 한 건 모닝페이지와 108배였다. 두 가지를 하고서 한 시간을 더 내는 게 힘들었다. 안 쓴 걸 썼다고 할 수 없는데 난감하네. 이걸 자기사랑 실천이라고 우겨야 할까? 모닝페이지 안에 자기사랑에 대한 내용이 있을래나? 없으면 천일간의 자기사랑 시즌2를 다시 출발해야 하나? 모르겠다. 읽어봐야 알겠다. 하긴, 연구원에서 그것에 대해 책을 쓰는 이 시간이 시즌2겠다. 후속 과정이면서 업그레이드 상급 코스. 되든 말든 맨땅에 헤딩을 계속 했기 때문에 인제 제 길로 들어선 건지도 모른다. 책을 쓰면서 내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가서 검색해서 제목만 출력해 책꽂이에 꽂아둔 ‘마흔’과 ‘자기사랑’ 키워드의 책들을 정말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올해 책 읽는 습관을 들이다 스르륵 그렇게 되길 나는 소망한다.
노트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천 원짜리 줄공책에 쓰다가 2천원, 3천원짜리 좀 두꺼운 걸로 바뀌었다. 천 원짜리 공책은 얇다래서 출퇴근 가방에 넣어 다니기에 좋았다. 중간에 무지 노트를 한 동안 썼네. 요즘은 3천원짜리 하드표지 다이소 공책을 쓴다. 표지가 현란하다. 에펠탑과 영국 성곽, 분홍 하트와 붉은 땡땡이,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춤추고 꽃잎들이 피어난다. 유치찬란 소녀 취향, 나 상당히 좋아한다. 문구사에서 저 노트들을 만지작거리며 즐거워했던 게 몇 번이었나? 지난 주 17일은 월급날이었다. 지하상가에서 0.38 중성펜 한 다스(는 7천원)와 각각 다른 색 이쁜 펜 다섯 자루를 사왔다. 행복했다. 월급날 나에게 선물을 주는 세레모니다. 2011년에 양이 확 늘었다. 왜 그렇지? 처음에는 왼쪽과 오른쪽을 빽빽이 채워서 썼는데 2011년부터는 오른쪽에만 쓰고 왼쪽에는 안 썼다. 왼쪽에 이런저런 잡념을 쓰거나 비워둔다. 그게 내게 더 맞는 방식이었나 보다. 언제부터 내 얘기를 듣는 이가 등장하더니, rose maria sister로 이름이 붙었다. 2011년부터는 꿈일기를 분리했고, 손바닥만한 손그림 스케치북이 한 권 끼어들었다. 손그림은 그리다 말다 한다. 앞으로 계속하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스스로 진화하고 있구나.
모닝페이지는 줄리아 카메론의 책 <아티스트 웨이>에서 창조성을 회복하기 원하는 이들에게 권한 두 가지 도구 중 하나다. 창조성에 대한 줄리아 카메론의 개념이 멋지다. 그건 천부인권처럼 그냥 타고나는 거고, 내가 저작자가 아니라 도구라고 사고한다. 받아 적는단다. 모닝페이지는 일종의 명상이어서 ‘쓴다’가 아니라 ‘한다’고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손으로 3페이지를 쓴다. 그냥 쓴다. 이게 좌청룡이라면 우백호는 아티스트 데이트다. 주마다 혼자서 2시간 휴식을 취하는 건데 나는 이걸 ‘혼자 놀기’로 이해했다. 줄리아 카메론은 이걸 송신기와 수신기로 비유했다. 모닝페이지를 통해 송신하고 아티스트 데이트를 통해 수신한다는데 이건 뭔 소린지 모른다. 암튼 내 경우에는 모닝페이지를 창조성이나 글쓰기 때문에 시작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콕 집어 말하기는 싫지만 나의 애정결핍, 정서불안에 대한 민간처방약쯤으로 생각했다. 기분 좋아지기 위해서 썼다.
모닝페이지를 정식으로 시작한 것은 2008년 6월 29일이다. 구본형 변경연 연구원이었던 로이스님이 만든 네이버카페와 인연이 되었다. 지원서를 보내놓고, 오리엔테이션에 읽고 오라는 책을 사러 그 날로 영풍문고에 갔다. 경당 출판사의 <아티스트 웨이> 책이 없다. 파란색 표지의 <비스니스맨을 위한 아티스트 웨이>를 대신 사왔다. 읽으려 드니 안 읽힌다. 체험 없이 읽으려니 그런가? (이 책은 내내 안 읽히다가 4년 뒤인 올해 처음 읽었다.) 배송되어 온 <아티스트 웨이> 책을 대충 읽었고, 모임에 갔다. 12주를 그 모임과 같이 했다. 알코올 금주자의 AAA 같은 일종의 자조모임이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강남, 삼청동 카페를 순례했다. 나는 처음 가봤다. 모인 사람들은 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매력적인 이들이 많았다. 그러고 나서는 혼자서 하는게 수월했다. 처음에 함께 해준 이들이 없었다면 이걸 습관들이지 못했을 거다. 낯선 것을 시도할 때는 일정 기간 밀어가서 맛을 보는 게 중요한데 이 때 같이 하는 이들이 있으면 반은 거저 먹는 것 같다. 몸으로 좋은 느낌을 경험을 하고 나니 다시 하고 싶어졌고 스스로 노력하게 되었다. 남보다 여건이 좋았던 게 있다. 초등 교사니까 출퇴근 시간이 예측가능한 직장이다. 야근이 없고, 2교대, 3교대 근무자가 아니다. 남들은 아이 기르느라 바쁜 30대를 나는 단촐히 지냈다. 하지만 나의 30대도 안 바쁜 건 아니었다.
한참 뒤에 알았다. 내가 모닝페이지, 그리고 <아티스트 웨이>와 구면이었다는 걸. 내 인생의 멘토 현경의 <미래에서 온 편지> 27쪽에 이런 말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무엇을 하기 전에 누구를 만나기 전에 너 자신에게 가장 순수한 시간, Virgin Time을 주도록 해. 30분이나 1시간쯤 매일 쓰도록 해. 이렇게 매일 쓰다보면 너의 삶의 패턴이 지도처럼 보이게 되지. 이모는 이것을 <예술가의 길>이라는 책에서 배웠어.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 그런데 되지 못한 사람들을 예술가로 재활시키는 책이었어. 이러한 시간과 에너지를 매일 나에게 주는 것은 마치 근사한 선물을 매일 아침 받는 기분이지’
그 구절을 읽고 근사한 선물을 매일 아침 받는 기분이라는 말에 혹해서 바로 virgin diary를 시작했다. 2004년 말이었다. 해보니 근사한 선물 받는다는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안가 흐지 부지 되었다. 모닝페이지와 한참 동행하고 나서야 이게 기억났고, ‘예술가로 재활시키는 책’이라는 말이 ‘artist's way'를 가리킨다는 걸 알았다. 신기했다.
소설가 하루키씨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매일 10km를 한 달에 26일 이상 달리고, 1년에 한 번은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는 러너다. 자기가 마라톤을 하게 된 건 달리기가 맞는 운동이어서 그런 거지 대단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고 했다. 3년치 노트 사진을 보면서 내게 대단한 의지가 있다고 할까봐 겁난다. 사실이 아니다. 스스로 가진 척 하면 사기다. 나는 변덕이 죽끓듯 한다, 뒷심 약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모닝페이지가 내게 주는 즐거움과 유익이 커서 계속 할 수 있었다. 일어나자 마자 진한 커피를 한 잔 깡소주처럼 부어넣고 카페인에 알딸딸 취한 상태에서 휘갈겨 쓴다. 막 털어놓다보면 그토록 소원했던 것, "뭐 했어?"라고 내게 물어주고 내 얘기를 잠잠히 들어주는 상대가 생겼구나 싶으다. 나는 원래 경박하고 입이 싼데 말할 상대가 없었다. 모닝페이지에다 내 경험, 생각과 느낌을 가감없이 털어놓으면 속이 시원하다. 이성이 잠 덜 깼을 때 이야기하다 보니 가릴 수가 없다. 좋고 싫음을 솔직하게 말한다. 분노와 폭력, 험담과 섹스에 대한 생각까지, 모든 이들을 그와 그녀로 바꿔서 가감없이 이야기 한다. 개구리와 뱀, 두꺼비와 시궁창 뻘을 뱉어낸다. 좋아죽겠다고, 몸서리가 나게 싫다고 호들갑을 떤다. 누가 이걸 들었으면 나에게 병원환자복이나 감방죄수복이 어울린다 할 것 같다. 잡념깡통을 한 캔 따 쏟으면 머리속 압력과 가슴폭 풍속이 잦아든다. 좀 순해지고 착해지는 것 같다. 내 안에 이런 게 다 들었다. 모닝페이지를 3쪽 하는데 보통 45분에서 1시간 걸린다. 끝나면 주변을 정리정돈하고 버린다. 이건 이 활동이 내게 에너지를 주었다는 증거다. 정리가 나는 제일 어렵다.
매일 쓰는 즐거움과 함께 둘 만의 특별한 추억이 고였다. 내 방에서 지내다가 다른 이들과 같이 지내야할 때가 있다. 명절에 고향집에 내려갈 때, 가끔 친구나 친척집에 다니러 갈 때, 직원여행이나 연수를 떠났을 때. 특별한 에피소드가 만들어진다. 설날 새벽에, 전날 전기 후라이팬을 꺼내놓고 둘러앉아 부친 부침개와 비닐을 열어둔 증편과 삶아서 물에 담궈둔 고사리와 나물꺼리들 사이에서 쓴다. 쓰다 보면 엄마가 나물을 볶으러 나오신다. 수련을 떠난 절에서는 화장실에서 쓴다. 여름에는 나방들이 날아드는 푸새식, 자연건조식 변소에서, 겨울에는 하얗게 언 새벽달을 보면서 새로 지은 화장실에서 썼다. 왕겨 고물을 묻힌 똥들이 나를 올려다 본다. 기어다니는 애벌레에서 날개 달린 존재로 환골탈태하려 용쓰는 건 나비만이 아니다. 나비는 꽃들에게 희망이 된다는데 파리와 나방은 누구에게 희망이 될까? 엉뚱 잡념을 적는다. 친구들과 영화 보고, 술집에서 3,4차를 가며 밤새며 논 날은 헤롱거리는 상태로 24시간 롯데리아나 찻집에 앉아, 쓰기 위해 쓴다. 인도여행 카필라성 근처에서는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면서 여우울음소리가 들리던 복도에서 쓴다. 장거리출퇴근하면서는 일단 달려서 전철에 탄 후 서서 쓴다. 영안실에서 밤을 새워야 했을 때는 영안실 위로 올라가면 병원 원무과 대기 의자가 있다. 모텔에서 쓸 때가 있었다. 종이나 펜이 없을 때 얻고 조달하고 찢어 쓴 것도 재미있었다.
아티스트데이트는 취약하다. 나는 원조 방안퉁수다. 일 주일에 한 번씩 집 밖을 나가야 하는 것이, 뭘 해야하는게 불쾌하기 보담 불편하다. 2009년에 한 것들은 생애 최초로 네일샾에 가서 매니큐어 바르기, 혼자 집근처 극장에서 영화보고 쌀국수 먹기, 가로수가 아름답다는 화랑대역 찾아가기, 예술의 전당 근처 어정거리기,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건너편 오래된 찻집가기, 한강유람선 타기, 서초에서 사당까지 우면산 산길 걷기, 피부관리실 가기, 영화공간 주안에서 혼자 앉아서 예술영화 보며 졸기 같은 걸 했다. 그 와중에 혼자서 식당을 찾아가는 게 좀 익숙해졌다.
2010년에는 팥죽 끓이기, 시접 바느질해서 시트 만들기, 혼자 식당에서 삼겹살 먹기, 삼청동 한옥집에서 자기, 사복경찰에게 인사하며 청와대 앞길 달리기를 했고, 2011년에는 분갈이하기, 부평 아웃백에서 만원 할인 티켓 탕진하면서 책 한 권 읽기, 카페에서 읽기, 공원에서 노을 보기, 황해도 소놀음굿 보기, 10km 마라톤대회 4번과 하프 2번을 달렸다. 점점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알아지면서도 아티스트 데이트의 실천은 모닝페이지보다 백 배는 어려웠다. 2012년에는 아티스트 데이트는 완전히 잊고 지냈다. 1년은 52주인데 아티스트 데이트는 역시 30%를 하지 못하는구나. (여기에다가 정확한 횟수를 넣는게 좋을 것 같다. 기록된 걸 헤아려서. 블로그에 기록해둔 게 있다.)
아티스트 데이트를 다시 시작하면서 예전에 써둔 것을 읽어나가보자. 다시 읽다보면 뭔가 알아지는 게 있으려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무엇을 하기 전에 누구를 만나기 전에
너 자신에게 가장 순수한 시간, Virgin Time을 주도록 해.
30분이나 1시간쯤 매일 쓰도록 해. 이렇게 매일 쓰다보면
너의 삶의 패턴이 지도처럼 보이게 되지.'
내 마음에 쏙 들어오는 글귀입니다.
나를 위한 'Virgin time' 그 시간 동안, 모닝페이지.
요즈음엔 타이핑을 치는데, 누님글 읽으면서 예전에 아침마다
손글씨 쓰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감동이
나를 키워준 것 같습니다.
저도 집에서가 아니라 낯선 곳에서 모닝페이지를 쓸 때 느낌은
더욱 짜릿했던 것 같습니다.
줄리아카메론이 말했던 송신과 수신이 바로 낯선 곳에서 쓰는
모닝페이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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