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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8일 09시 27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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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편지>라는 책을 통해 카잔차키스의 다양한 모습을 훔쳐볼 수 있다. 카잔차키스와 42세 때 만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했던 부인 엘레니 카잔차키스가 직접 저술하고 편집한 이 책은,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작품에 대한 애착,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섬세한 시선으로 잘 보여준다.

 

1911년, 그는 두 살 연상의 여자 친구였던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결혼했다. 그녀는 카잔차키스와 함께 아테네 대학 인문학부 학생이며 등단한 작가이기도 했다. 카잔차키스는 법학을 전공했는데, 서로가 작가의 길을 가려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에게 있어서 문학은 공통된 화제였다.

 

엘레니에 의하면,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아름다운 머리에 즉흥적인 대화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녀는 자기와 비슷한 기호의 작가와 문학 비평가와, 화가로 이루어진 ‘집단’을 거느린 리더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었다. 여러 분야에서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작품을 쓰던 작가인 그녀는 그리스의 좌익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고한다. 그들은 결혼 생활 이후 얼마 안 있어 별거를 하였으며, 독립심과 자부심이 강했던 그녀는 카잔차키스와의 별거 기간 동안 다른 상대와 동거를 하던 상황이었다고 기록한다. 사실, 그들도 결혼하기 4년 전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동거의 시작은 졸업을 앞두고 떠난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그녀의 강하고 독립적인 성격 때문에 결혼당시, 아버지가 상당히 반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아버지의 강한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함께 파리로 유학을 가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문하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결혼은 1924년, 그의 나이 42세까지 지속되었으며, 1926년 이혼하고 15년간의 결혼생활을 마쳤다. 갈라테아는 이혼 이후에도 ‘갈라테아 카잔차키’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가 두 번째 부인이 된 엘레니 사미우를 만난 것은 그들의 결혼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지만, 정작 결혼식을 올린 것은 21년 후인 1945년, 그의 나이 63세때 였다. 사실, 엘레니는 카잔차키스가 방대한 작품을 완성하도록 격려하고 협조해 주었고, 충실한 동료이자 협조자였다. 엘레니는 그가 <오디세이아>를 구상하던 당시에 만났으며, 이혼 이후, 프랑스어로 쓴 소설 <토다 라바>, <돌의 정원>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된 <그리스인 조르바>, 그의 최대의 역작인 <오디세이아>, 가장 논쟁적인 대표작인 <회후의 유혹>과 <미할리스 대장>, 그의 종교적 관점에 불을 지핀 희곡 <붓다>, <성자 프란체스코> 그리고 그의 기행문 <일본, 중국 기행> <영국 기행> <러시아 기행>의 대부분을 함께 써내려갔다.

 

그들이 결혼 하던 당시, 그는 그리스의 정무 장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을 하지 않은 채 18년간을 함께 보낸 후, 결혼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18년이 지난 21년이 되어서야 결혼에 이른 그들은, 그만큼 모든 일을 신중하게 처리했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미덕은 각 작품에 대해 작가가 어떠한 의도로 씌여졌는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오디세이아>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기술한다.

 

“.. <오디세이아>는 시적인 형태와 사상적인 내용의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성취할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차원을 의미하고, 영혼을 섬기기 위해서 바친 평생의 노력을 보여줍니다.

 

17음절의 운율 15음절의 고전적 또는 현대적 그리스 운율에 익숙해진 시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운율은 나에게는 너무 낡았다고 느껴졌으며, 생명의 숨길이 결여되었고, 그래서 보다 깊고 보다 폭 넓은 호흡을 창조하기를 갈망하면서 그것을 질식시키는 한계점을 깨뜨리기 위해서 갈망하고, 투쟁하고, 괴로워하는 불 같은 현대의 정신력을 담는 능력이 없어졌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추가된 두 음절은 예기치 않았던 폭과 웅장함을, 그리고 동시에 절제된 격렬함을 서사시에 부여합니다..“(p. 822)

 

그는 노벨상에 대해서 그의 부인인 엘리나 사미우와 함께 공동 추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절대로 나 혼자 추천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두 사람다 추천이 되어야 하며, 아니면 나는 나 혼자만의 수상을 거부합니다...” (p. 825)

 

그리고, 그가 시도했으나 격렬한 반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파우스트 제 3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는 이제 그것을 얼마 동안 내 책상에 놓아두겠고, 얼마 전부터 나를 괴롭혀 온 비극 <파우스트 제3부>를 시작할 생각인데- 이것은 괴테의 <파우스트>하고는 완전히 달라서, 역할이 거의 뒤바뀌다시피 했으며, 경탄을 자아내는 본래 주인공들과 내가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아주 힘든 작품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나는 떳떳한 작품을 만들어 놓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케케묵고 익숙한 주제, 익숙한 전설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옛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었던가요? 그들은 어떤 특정한 내용에서 주제를 끌어냈고, 그 내용을 새롭게 단장해서 보다 깊고 확대된 의미를 부여했을 따름입니다. 가능하다면 나도 이제 <파우스트>를 가지고 같은 시도를 해볼 생각입니다. 신의 도움이 함께하기를!” (p.853)

 

그의 가장 논쟁적인 작품이며, 가톨릭에서 금서 목록으로 지정된 <최후의 유혹>은 다음과 같이 읇조린다.

 

“.. 나는 서양의 위대한 기독교 문명 밑에 깔린 거룩한 신화를 새롭게 보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그리스도의 생애>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교회와 모든 사제복을 걸친 기독교의 성직자가 그의 모습을 왜곡해가면서 덧붙인 거짓말과 왜소함을 - 그런 군더더기들을 - 벗겨 버린 그리스도의 진수를 쟁생시키려는 힘들고, 성스럽고, 창조적인 노력입니다.

 

내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원고의 여기저기 얼룩이 났습니다. 복음서에서 전하는 그런 식으로는 그리스도가 절대로 남겼을 리가 없는 가르침들을 나는 보충했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어울리는 숭고하고도 자비로운 종료로 얘기들을 끝냈습니다. 그가 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휘들을 나는 그의 입을 통해서 전했는데, 만일 그의 정신적인 힘과 순수성을 제자들이 지녔더라면 그리스고다 틀림없이 그런 말을 했다고 전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봐도 시와, 동물과 식물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영혼에 대한 자신감과, 의지를 밝히는 빛으로 충만합니다. (p.884)

 

1952년과 57년, 그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52년 한표 차이로 노벨 문학상을 놓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수상자는 그와 친분이 있었던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였다. 그의 노벨상은 유력한 것으로 점쳐졌으나, <최후의 유혹>와 <미할레스 대장>의 논란 속에 종료계와, 크레타 본국의 반발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품과 작가에 상을 수여한 후폭풍에 대한 부담으로 수여를 하지 않았다는 의견들이 있다.

 

50이라는 나이에 그는 제임스 조이스처럼 그의 민족이 지닌, 창조하지 않은 의식을 만들어 내는, 상상력의 사제가 되려는, 스스로 유일한 의무라고 간주했던 사명에 모든 정력을 바쳤다. 그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동양의 단순성과 감정의 짙은 표현력을 그대로 간직하는 한편, 세련된 서양의 사상을 맞아들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또 그다음에 발발한 그리스 내전을 겪으며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때문에 망명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프랑스에 정착한 뒤로는 모든 정력을 창작에 바쳤다. 이때 완성한 작품이 <수난>, <최후의 유혹>, <성자 프란체스코>이다.

 

70세가 된 그는 세균감염으로 인해 오른쪽 시력을 잃게 된다.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혔던 안면습진으로 중년 이후부터 고생을 했는데, 림프샘에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판명이 났다. 림프샘 이상으로 인해, 그는 지속적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결국, 71세때, 그의 병명은 림프성 백혈병 진단을 받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그는 부인과 함께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광저우를 방문하고, 동시에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백혈병 진단을 받은 그에게 있어서 장시간 비행기 여행은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최후의 유혹>의 논란 속에 그는 그리스로 입국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마지막 치료를 독일 프라이부르크 병원에서 받게 된다. 1951년 완성된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에 출간 불허처분을 받아서 대중들에게 읽힐 기회가 없다가 195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리스 왕실의 도움으로 출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크레타 정부는 그의 유해를 안치하기를 거부하고, 결국 아테네에 안치된다. 그러나 크레타인의 극심한 반대로 그의 유해는 결국, 그의 고향에 묻히게 된다.

 

그의 죽음에 대해 노벨 문학상 작가인 카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카잔차키스야말로 나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의 묘지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IP *.216.38.18

프로필 이미지
2012.09.28 17:13:21 *.226.201.52
그리 나쁜 남자는 아니었군요. ㅋ
아니 그의 여자들이 일방적으로 선택을 기다리기만 하는 인형들이 아니었다는 점에 안심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
프로필 이미지
2012.09.28 18:46:44 *.216.38.18

그러게요.. 그리고 자식에 대한 언급은 어느 문헌에도 찾아볼 수 가 없네요.

 

결국, <그리스인 조르바>는 작가가 쓴 작품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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