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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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쟁이의 기억_서문 ☜ Click
7
나는 샤워실에서
몸을 문질렀다. 비누 절반을 써버렸다. 얼룩은 씻겨내려 갔지만, 냄새는 그대로였다. 뜨거운 수증기가 샤워실을 빈틈없이 채웠다. 창가에 붙어있던 거미줄에 물방울이 맺혔다. 창문을 열자 문틈으로
수증기가 빠져나갔다. 그녀가 건네준 하얀 수건에 얼굴을 비비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거미줄이 반짝거렸다. 물방울이 맺힌 거미줄이
이상했다. 육각형으로 만들어진 거미줄 안쪽에 어떤 글자 모양이 보였다.
분명 글자였다.
'하라'
앞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뚫어지게 보았다. 똥을 뒤집어 쓰고부터 정신까지 혼미해진 것 같았다. 거미의 모습은 없었다. 머리를 흔들고 또 쳐다봐도 더 선명하게 보일
뿐이다. 어릴 적부터 바닥문양이나 욕실 타일의 알 수 없는 얼룩을 보면서 동물을 연상시키고
했었다. 하지만 글자모양은 처음이었다.
"똥쟁아 그만
씻고 나와라, 나도 똥물 튀었어" 그리고는 샤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장님, 저기 거미줄 보이세요"
"응, 보여"
"거미줄에
글자 같은 거 안 보이세요?" 김반장은 고개를 몇 번 흔들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몸에 똥칠하더니
맛이 갔구나"
"나가봐, 인애씨 집에 데려다 줘야지"
"아..., 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은 것 일까? 아니면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아직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내고, 새 옷을 꺼내 입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그녀가 사무실의 주인인 것 같았다.
"제가 타
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서요"
그녀는 커피믹스
윗부분을 잘라내고는 종이컵에 털어 넣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올랐다. 평상시 커피믹스 포장지로 대충 휘젓는
나와는 달랐다. 스푼으로 천천히 젓는 그녀의 모습은 여자였다. 종이컵을
건네 받을 때, 그녀의 손이 닿았다. 그 때까지 좋았다. 종이컵 속의 커피색깔을 보자, 속이 울렁거려서는 책상 위에
커피를 놓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놈의 똥이 문제였다. 커피
색깔이 몸의 기억을 자극한 것이다. 똥물 맞는 모습에다, 벌거벗은
몸까지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다 입으로 내뿜는 모습까지. 한심했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못 볼 것만 계속 보여드려서요"
"아니요, 괜히 제가 와서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커피 향기를
뒤로 하고, 사무실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에 그녀와 함께 탔다. 그리고
시동을 켰다.
"혹시, 문화여고에 다니세요?"
"네, 수학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녀의 똥이
내 머리 위에 떨어진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녀의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집 앞에
와서 시동을 끄자, 상대방 음성이 들렸다. 남자 목소리였다.
"인애야, 지금 어디야" 다정했다.
그녀의 남자친구.
"누구 만나고
집에 도착했어, 들어가서 전화할께" 그녀는 종료버튼을
누르고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덕분에 많은 것을 보고 배웠어요"
"본 것은
기억에서 지워버리세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알았어요,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이번엔 손을 가리지 않고 웃었다. 이뻤다.
8
그녀가 문을
닫는 모습 뒤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헤드라이트를 켰다.
가로등이 없는 산길이어서, 천천히 올라갔다. 나무들
사이에 짜여진 거미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샤워실 창문에서 보았던 거미줄이 생각났다.
"무엇을 '하라'는
거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문득 성경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네가 무엇을 하는지 안다면 복이
있을 것이다.'
똥 세례를 맞고 나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좀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이젠 '똥쟁이'라는 말이 낯설지가 않다. 나는 폐수처리장에서 미생물을 키우고 있다. 똥을 분해하는 미생물이다. 매일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 극미의 세계다. 미생물은 보이지 않는다. 감추어져 있다. 흙 속에서, 똥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보석처럼 값지다. 그들이 없다면 세상은 온통 쓰레기더미, 똥물로 넘쳐나겠지. 땅 속 깊이, 보이지 않는 뿌리가 나무를 지배하는 것처럼 극미의 세계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현장에 도착해서, 그 날 하지 못했던 업무를 마무리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처리장에
폐수분해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미생물 반응조에서 샘플을 떠서 실험실로 가져왔다. 미생물 상태를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했다.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초점을 맞췄다. 조금씩 꿈틀대는 미생물
모습이 보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보았던 왕뱀 퓌톤이 현미경 속에 나타났다. 그들은 주변의 생명들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폐수가 분해되는 초기 단계에 흔히 볼 수 있는 거대 미생물이다. 혼돈의 시기에 태어난 그들은 탐욕스럽게 먹이를 찾아 다닌다. 현미경
렌즈로 빛을 비추자, 삼킨 먹이들이 몸 속에서 분해되고 있다. 그들은
현미경 렌즈 너머의 나의 존재를 느끼고 있을까? 물과 빛, 그리고
먹이를 주는 나의 존재는 그들에게 신(神)이다. 신화 속 인간들이 태양을 신(神)으로 섬긴 것처럼 말이다.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은 미생물과 닮았다. 비록 나는 첨단 장비의 힘을 빌어 미생물의 세계를 보고 있지만, 고대 인간은 무의식 속에서 그들을 상상했다. 그들 중에 분명 미생물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자가 신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원화된 세계,
대극의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자다. 아니면 미생물을 현실의 세계로 불러들일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는 자다.
현미경 초점을
옆으로 움직이자, 똥 덩어리에 붙어사는 미생물이 나타났다. 그들은
유기물 덩어리에 붙어서 자란다. 그리고 지나가는 먹이를 끊임없이 빨아 들인다. 시간이 지나면, 수 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 모양이 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암소로 변한 이오를 지키는, 눈이 백 개 달린 아르고스의
모습과 닮았다.
미생물과
유기물이 균형을 이루는 시기가 되면, 자유의지를 가진 미생물이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아스피디스카(Aspidisca)다. 폐수처리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존재는 곧 깨끗한 물을
볼 수 있는 신호이며, 상징이다. 그 동안 온갖 탐욕의 영혼들과
싸워서 이긴 승리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유영하며 먹이를 찾아 다닌다. 그는 혼돈과 고난의 시간을 이겨낸 영웅의 모습이다. 나는 그의 출현을
매일 기다렸다.
눈을 떼려는 순간, 아스피디스카의 모습이 보였다. 왕뱀 퓌톤이 나올 때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나타난 것이다. 현미경 손잡이를 잡고 그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그가 멈췄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천천히 확대시켰다. 앉아 있는 모습이 여느 때 움직임과는 다르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현미경 너머의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의 날개 위에 올라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와 하나된 느낌이다.
오랜 시간
관찰해서일까? 눈이 아팠다. 몇 번씩 눈을 깜박거리며, 손등으로 눈 주위를 문질렀다. 다시 현미경을 보았다.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뜨거운 빛으로 수분과 함께 증발되었을까? 아니면, 내 눈 속으로 들어 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