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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일 08시 21분 등록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의 창시자

 

1875년 스위스 북동부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위스 바젤 대학 의학부를 나온 뒤 취리히 대학 의학부 정신과의 오이겐 블로일러 교수 문하에 들어갔다. 그곳의 교수직에 있으면서 단어연상검사를 연구하여 '콤플렉스'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정신분열증의 심리적 이해와 이에 대한 정신치료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이 당시 프로이트 학설에 접하여 한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프로이트의 초기학설인 성욕중심설의 부적절함을 비판하여 독자적으로 무의식세계를 탐구하여 분석심리학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기자신의 무의식과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분석작업을 통해서 얻은 방대한 경험자료를 토대로, 원시종족의 심성과 여러 문화권의 신화, 민담,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종교현상들을 비교 고찰한 결과, 인간심성에는 자아의식과 개인적 특성을 가진 무의식 너머에 의식의 뿌리이며 정신활동의 원천이고 인류 보편의 원초적 행동 유형인 많은 원형(原型)들로 이루어진 집단적 무의식의 층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의 일방성을 자율적으로 보상하고 개체로 하여금 통일된 전체를 실현케 하는 핵심적인 능력을 갖춘 원형 즉, 자기원형이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의 학설은 병리적 현상의 이해와 치료뿐 아니라 이른 바 건강한 사람의 마음의 뿌리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고 모든 인간의 자기통찰을 돕는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 시대적 문화, 사회적 현상의 심리적 배경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신학, 신화, 민담학, 민족학, 종교심리학, 에술, 문학은 물론 물리, 수학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왔다.

 

융은 심혼(心魂)의 의사(Seelenarzt)로서 자기실현의 가설을 몸소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20세기 유럽이 낳은 정신 과학자 중에서 동양사상(東洋思想)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함으로써 동서(東西)에 다리를 놓았으며, 새 천년(千年)에 인류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한 사람이다.

 

 

 

 

 

 

 

 

 

 

 

 

 

 

 

 

기억 꿈 사상

 

카를 융

 

자서전 문학의 백미

 

8 이 책의 특징은 야페가 쓴 서문의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è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내면에 신경 쓰는 것보다 외면에 귀 기울이는 것이 더욱 가치 있다는 뜻. 이 책의 제목은 샤를 보들레르의 [내면일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외면 = 답사, 내면 = 탄식, 탄식하며 자기연민과 자기애에 빠져드는 것보다 외면을 살피는 것이 더욱 가치 있다는 주장.

 

9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시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그와 같이 '자기'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이 융자서전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10 융은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섣불리 신에게 접근했다가는 어떤 위험스런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그렇게 위험스럽긴 하지만 신은 탐구해볼 만 한 가치가 있는 '위대한 위험'인 것이다.

è 융이 수학의 equivalence 부호 (=)에 대해 의문을 가졌듯이 용어는 항상 필요충분한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위대한 위험은 곧 신인가?

 

10 관악산 기슭에서

è 이 표현이 마음에 안 든다. 너무 내가 띠꺼운 존재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역자는 서울대 법대 출신인데 지금은 숭실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는 이 동네에 살아서 잘 안다. 숭실대와 서울대는 가깝다. 정말로 역자는 관악산 기슭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관악산을 거론하는 것은 자신의 출신 대학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자랑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그가 현재 몸담고 있는 곳이 서울대라면 상관 없지만 그 곳은 자신이 "떠나 온" 곳이다. 작은 단서에서 역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오해일 수도 있지만).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è ???

 

11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이부영 번역)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è 융이 이 책을 시작한 첫 마디로, 생애에 대한 단 한 줄의 정의이다. 융의 정신의학과 생애를 한 문장으로 함축한다. 책의 첫 마디의 중요성

è 융은 "나의 생애"라고 말하였지만, 이는 일반 개인의 생애를 의미하기도 함(His life, He = man).

è 두 역자의 번역이 완전히 다르다.

조성기 : 무의식이 주체가 아니다. 주체가 없다. 무엇이 자기 실현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부영 : 무의식이 주체다. 무의식은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실현한다. 마치 이기적 유전자에서 DNA가 번식하기 위해 인간 신체를 활용하는 것처럼.

이부영의 번역이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뒤이어 나오는 내용이,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이기 때문이다.

 

è 그래서 결국, 이부영의 역서로 책을 바꾸었다.=_= (이하 이부영 역서)

 

19 내적인 경지에서 본 우리들의 존재, 인간이 그 영원히 본질적인 성질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 그것은 오직 신화로써 묘사될 수 있다. 신화는 보다 개성적이며 과학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삶을 묘사한다. 과학은 평균 개념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데, 이것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한 개인의 특유한 인생이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어렵다.

è 매우 필요한 발언이었다. 의학은 자연과학의 한 분지로 보는 경향이 강하므로 의사이자 정신분석의인 구스타프 융이 왜 과학이 아닌 신화를 도구로 선택하였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20 다른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끝없는 신격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짐승과도, 어떤 식물과 어떤 돌과도 대질시킬 수가 없다. 오직 신화적 실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자신에 관한 어떤 결정적인 의견을 가질 수 있겠는가.

è "완벽한 남자"에 관한 소설을 준비 중이다. 소위 피그말리온의 딜레마다. 상상 속에서(혹은 상상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는 조건을 관념적으로 걸어버리면 그만이다) 이데아를 만든다. 그런데 이 이데아를 실재로 만들어 버리는 순간, 이데아는 소멸한다. 처음에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람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그 개인의 개성과 특이성을 알아갈 수 밖에 없다. 코 옆에 점이 있다든지, 다리가 짧다든지, 말을 더듬는다. 피그말리온이 사람이 되는 순간, 그의 남편은 피그말리온의 장점도 아니고 단점도 아닌 무엇인가 "이데아스럽지 않은" 개성을 알게 된다. 그는 유일무이한 "" 사람이 된다. 대질시켜 평가할 잣대가 소멸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모두 "신격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 그러므로 어떤 "결정적 의견"은 불가능하다.

è 신화적/실재/란 무엇인가? 신화는 과학보다 조금 더 개성이 허용되는 일반성을 띈다. 그러므로 "구형을 상정하고 이론을 개진하는" 폭력적인 일반성의 과학보다 신화로 인간을 설명해야 하며, 또한 이상이 아닌 실재로 설명되어야 한다.

 

20 인간은 하나의 정신적 과정이다. 인간은 그 과정을 지배하지 못한다. 지배한다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지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나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아무런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è 현대 심리학의 대표적 주제. 인간의 사고는 떠다니는 다양한 사고 중 그저 Catch되는 것일 뿐.

è 인간은할 수 없다 - 는 결론은 무력한 비관주의자의 주장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급진적인 선언은 수많은 맹목적 긍정론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이 말은 마치 어떤 인생이 가치 있는 것인지 판단 내릴 근거가 없다 - 는 말과 동일하게 들린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모든 것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è 사실 과학이 발전의 새 국면을 맞으면서 이런 사조도 많이 역전된 감이 있다. 궁금한 것은 "결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는 것이다. "결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 명제가 "대전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적인 참.

 

20 나는 인생이 자신의 뿌리를 통해서 살아가는 식물과 같다고 생각해 왔다. 식물 고유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뿌리에 숨어 있다. 땅 위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여름 동안만 지탱한단. 그리고는 말라 버린다. 하루살이 같은 현상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공허한 인상을 얻게 된다. 그러나 나는 영원한 변환 속에서도 살아서 지속되는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은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꽃이다. 꽃은 사라진다. 그러나 뿌리는 계속된다.

è 이 것은 엄청난 논쟁거리다. 꽃과 뿌리의 논쟁.

è 융은 "원형"의 개념을 발견(발명?)한 사람이다. 한 개인은 뿌리를 토대로 꽃을 한 번 피우거나 피우지 않고 죽는다. 우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너무나 일시적으로 불충분하며 무엇이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바로 기적"인 한 개인의 인생을 공허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꽃에게 뿌리는 무슨 의미인가? 꽃은 뿌리를 생각해야 하는가?

è 뿌리가 "살아서 지속"된다는 표현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물론 뿌리는 살아있다. 인류의 문화, 중심가치, 문명 등은 "살아" 있다. 동시에 이는 한 개인이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식물이 아니다! 우리는 통째로 죽는다. 만약 꽃과 뿌리의 뇌가 따로 존재한다면 꽃은 과연 뿌리를 보면서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일생이 꽃의 피고 짐을 의미한다면 인간은 뿌리가 아니라 꽃이다. 꽃은 자신과 다른 뇌(다른 자아)를 가진 뿌리를 보며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뿌리는 그저, 살아가는 수단일 뿐이다.

è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뿌리로 파고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꽃을 터뜨리고 장렬하게 전사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삶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두 개의 양식이다. 젊음을 태워(희생하여) 상아탑의 벽돌 하나가 되는 자와 말 그대로 젊음을 불태우는 자.

 

è 융이 말한 뿌리와 꽃은 다음의 뜻이다.

21 사실 내게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사건들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주로 내적인 체험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의 꿈과 명상들이 이에 속한다.

è 그런데 왜 불멸은 가치를 획득하느냔 말이다. 불멸은 가치인가? 뿌리는 왜 가치인가?

è 나는 그 이유가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궁금하다!!!!!!! 답을 알았던 것도 같은데 잊었다!

è 다이아몬드와 꽃을 비교하면 우위를 결정할 수 없다.

è 뿌리와 꽃을 비교한다면뿌리는 또 다른 꽃을 피울 수 있으니 뿌리가 더욱 가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식물이 아니고 한 번 죽으면 개인의 삶은 종결되기 때문에 식물과 비교할 수 없다.

è 조셉 캠벨이 말한 "살아있는 경험"은 융이 말한 "불멸의 무한한 세계"와 완전히 상충하지 않은가? 캠벨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행위보다 "삶의 경험" 그 자체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그의 주장에는 모순이 없다. 그런데 융은 앞서서 "인간은 인생과 자신에 대한 아무런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하면서 "불멸의 무한한 세계"를 뿌리라고 부르며 추종하고 있다. 이건 모순이다.

è 나는 또한 융이 "여행, 인간, 환경 같은 것에 관한 다른 추억"들을 내적 사건보다 하수로 두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융은 외부에서 자극 받지 않고 어떻게 내면을 키워갈 수 있는가?

 

21 내 인생은 외부 사건의 면에서는 빈곤하다. 나는 거기 관해 많이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만 말하면 공허하며 본질을 잃은 것 같이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내적인 현상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의 인생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런 내적인 현상을 다루고 있다.

è 무슨 말인지는 이해된다. 아마 융은 자신이 굳이 외부 사건을 다 겪지 않아도 자신이 겪는 일부 사건, 그리고 간접 경험(즉 인간들의 삶에서 수집되는 자료)을 토대로 본질을 산출해내는 과정이 의미가 있다고 본 듯하다.

è 왜 이리도 본질에 연연하는 것일까? p20에서 "인생이란 하나의 어설픈 실험이다. 그것은 다만 숫자상으로만 거창한 현상이다. 그것은 너무나 일시적으로 불충분하며 무엇이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바로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미 젊은 의학도일 때 이 사실을 절감했다. 내가 조기에 파괴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인 듯싶다."고 하였다. 융은 삶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본질에 매달린 것 같다.

è 어설픈 실험을 하면서 인생을 보내봤자 허무할 뿐이다. 그러므로 본질(=뿌리, 진리)에 매달려야 한다. 구도자의 길. 절에 들어가는 사람의 마음. 그런데 본질은 왜 가치가 있나? 가치 있다고 느낄 주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본질에 우선한다.

è 그것을 자신의 특이성으로 내세운 것에서 우월감이 느껴진다. 내가 본질을 중시했다는 것이 내 "특이성"이라고 말하다니 기막힌 말장난이다. 인간은 개인이 경험한 역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è 평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기 전 5분이 불행한 사람과 평생 고통스러웠지만 죽기 전 5분이 행복한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인가? 답은, 외적/내적 경험의 중용. 뻔한 대답.

 

2장 소년시절

 

23 정말로 융은 2,3살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우유의 맛을 처음 자각한 추억.

 

26 어머니가 들려 주기를, 내가 일하는 아이와 함께 라인 폭포 다리에서 노이하우젠 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넘어져 난간 아래로 한 발이 미끌어졌다고 한다. 그 소녀는 마지막 순간에 나를 붙잡고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무의식적인 자살충동이나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숙명적인 저항을 가리키는 것들이다.

è 삶에 대한 숙명적인 저항 : 처음에 이 부분을 잘못 해석해서 "삶의 숙명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했다. 조성기와 이부영의 번역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자살이라는 것은 "생의 의지에 대한 저항"이므로 삶의 숙명에 대한 저항이 맞지 않을까?

è 삶에 저항하는 것은 숙명적이다. 삶에 저항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삶을 생의 의지로 해석할 경우 모두 자살해야 한다(이 에피소드는 자살 충동에 관한 것이므로 삶을 생의 의지로 해석). 만약 삶을 운명으로 해석할 경우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숙명이라는 뜻인데,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자살 충동이 이는가? 정확하지 않다.

 

31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지하의 대역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내게 나타난 무시무시한 계시였다.

è 나를 믿어라. 안 믿으면 지옥 간다. 불신지옥. 절대선을 가정해두면 절대악도 있기 마련. 게다가 절대선을 어기면 벌이 있다. 목사 집안 아들내미의 항문기에 예수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당시 분명 교육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꿈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그 특이한 상징적인 구성과 "사람 잡아먹는 것"이라는 놀랄 만한 해석이었다. 아이들의 유령으로서의 "사람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지하의 황금의 왕좌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è p32 종교의식에 대한 논평 가운데 한 대목이 비로소 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성찬의 상징 가운데 식인의 기본 주제에 관해 말한 것이었다.

è 먹는 것, 고기를 먹는다. 더욱 힘 센 자가 있다. 이 자는 사람을 먹을 수 있다. - 고 사고하는 것이 특수성을 띌까? 먹는 행위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며 통조림만을 먹는 것이 아니라면 돼지를 잡듯이 사람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38 불장난 - 조로아스터 교 같다.

 

38 돌과 나 - 물아일체. 꽃과 뿌리는 물아일체?

 

39 곽에 담은 작은 나무형상과 돌 à 41 그 작은 남자는 고대 그리스의 작은 외투를 입은 신, 텔레스포로스로서 많은 옛날 그림 속에 아스클레피우스 신 옆에 서서 그에게 책두루미를 읽어 주고 있는 신이다.

 

41 이런 기억의 재현을 통하여 나는 처음으로 문화적 전통과 상관없이 개별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고태적인 영혼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3장 학창시절

 

44 나는 어머니가 또다시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저질렀다고 확신했다.

내 여동생의 돌연한 출연은 내게 막연한 불신감을 남겼고 이로 인해 내 호기심과 관찰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무언가 유감스러운 것이 이 출생과 결부된다는 나의 추측은 뒷날 어머니가 보여준 의심쩍은 반응에 의해 증명되었다.

 

45 어머니는 내가 누구를 방문한다든지 초대받아 갈 대는 내 등 뒤에서 온갖 충고를 퍼붓는 기분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보통 때보다 좋은 옷을 입고 반질반질하게 닦은 구두를 신었을 뿐 아니라 내가 앞으로 할 일과 내가 여러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등 뒤에서 나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는 것을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것이므로 나는 굴욕을 느꼈다. "아빠 엄마의 안부 전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코 닦는 것을 잊어선 안 돼. 너 손수건 가졌니? 손 씻었어?" 등등. 내가 이미 자애심과 자부심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나무랄 데 없이 보이기 위해 잘 배려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나의 자아 팽창에 수반된 열등감을 세상에 폭로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라고 느꼈다.

 

 

집 안에서 울리는 벨소리는 내 귀에 마치 커다란 액운처럼 울렸다. 나는 마치 달려 내려온 강아지처럼 소심하고 불안했다. 어머니가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미리 "똑바로" 예습시켰을 때는 더욱 심했다. '내 신은 더럽다. 내 손도 더럽다. 나는 손수건을 안 가졌다. 내 목은 까맣다.' 내 귀에 이런 소리가 울렸다. 그러면 나는 반항심에서 부모님의 안부를 전하지 않거나, 필요 이상으로 고집을 부리거나, 부끄럼을 탔다. 상황이 아주 악화될 때면 나는 다락에 있는 비밀의 보배를 생각해 냈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사람의 기품을 다시 되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내가 허전함을 느낄 때면 저 돌과 예복과 원형모자를 쓴 작은 남자의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è 그 남자는 "가치"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것은 사람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숙명적인 가치에의 추종 때문일지도 모른다. 융이 인형남자를 창조한 것처럼.

 

46 남근상의 신에 관한 꿈은 나의 최초의 커다란 비밀이었다.

è 나는 비밀이라는 것을 간직해 본 적이 있다. 사촌 오빠들의 성추행 사건과 같은 없었으면 했던 과거의 이야기. 이 사건은 나 자신에게도 비밀이었으면 하는 사실이었고 가장 깊은 의식 속에 묻어두려고 했던 것이다. 융처럼 몰래 즐겨 꺼내보지만 남들과 공유하고 싶지는 않은 것 - 전혀 다른 속성의 비밀 - , 어떤 기전에 의해서일까? 마치 비밀의 화원과 같이. 남들에 의해 훼손되는 것이 두려운? 신성함?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비밀" 그 자체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è "비밀의 종류"에 관한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47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a=b이고 b=c이니, 그러므로 a=c라는 공식이었다. 엄격히 정의해서 a b와 같이 취급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을 의미해야 한다. c는 말할 것도 없다. 만일에 모두 동일하다면 a=a, b=b라고 해야지 a=b라는 것은 곧장 거짓말이나 속임수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던 것이다.

 

48 그러나 내 무능에 대한 불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거대함 앞에서의 내 존재의 하잘 것 없음에 나의 마음은 불쾌감뿐 아니라 은밀한 일종의 회의에 사로잡혀 학교를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학교에 가야 할 때가 오기만 하면 기절하는 일이 생겼다. 또 부모가 학교숙제를 끝내도록 재촉하면 비슷한 발작이 일어났다. 반년 이상이나 나는 학교를 멀리하였다. 그것은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 무엇보다도 나는 신비로운 세계 속에 깊이 빠질 수 있었다. 나무들, , , 짐승들, 내 아버지의 서재 등이 이에 속했다. 이 모든 것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이 세계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하여 가벼운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내 시간을 방랑하며, 읽고, 수집하고, 놀이를 하는 것으로 빈둥빈둥 보냈다. 그러나 나는 그러면서 결코 행복하지 않았고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è 나는 학창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워서 TV를 보곤 했다. 특별히 생산적인 활동을 했던 기억은 없다. 늘 죄책감을 느꼈다. 내 능력을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의 생활을 알지 못했고 계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안에서부터 무너져갔다.

 

50 나는 방문객이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 아들은 좀 어떤가?" 아버지는 대답하기를 ", 언짢은 일이야. 의사들은 어디가 나쁜지 몰라. 간질이라고들 생각해. 그 애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면 끔직한 일이야. 나는 내 재산을 좀 없앴지. 그 애가 평생 돈을 벌 수 없게 된다면 그 애는 어떻게 되겠나?"

 

★★★★★★★★★★

나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현실과의 충돌이었다. ', 그러니 일해야겠구나.' 이 생각이 머리를 쳤다. 이때부터 나는 진지한 아이가 되었다. 나는 조용히 빠져 나와 아버지의 서재로 가서 내 라틴어 문법책을 꺼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10분 뒤에 기절발작이 있었다. 나는 거의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몇 분 뒤에 나아져서 다시 계속 공부했다.

'망할 것, 기절 같은 건 없다.' 나는 이렇게 내게 말하며 뜻한 바를 계속하였다. 그것은 15분쯤 계속 되고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첫 번 것처럼 이것도 지나갔다. '이제야 비로소 정말 일하라!' 나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30분 뒤에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나는 굽히지 않고 발작이 극복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한 시간 더 공부했다. 갑자기 여러 달 전보다도 더 기분이 좋아졌다. 발작은 실제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았고 이때부터 나는 매일 문법책과 학교 노트를 가지고 공부했다. 몇 주일 뒤에 나는 다시 학교에 갔다. 거기서도 더 이상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마술은 사라졌다. 나는 이것으로 무엇이 노이로제인지를 배웠다.

è 회피하는 대상과 정면 승부하기

è 대단히 인상적인 에피소드

 

★★★★★★★★★★★

(이어서) 차츰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생기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모든 불명예스러운 사건을 조종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때린 그 급우에게 한 번도 심각하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이를 테면 "도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속에서는 악마 같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것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통분하였고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수치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나에게 옳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이며 내 자신에게 웃음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무도 잘못이 없다. 내 자신이 저주스런 도망병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부모님이 나에 대한 근심을 표시하거나 측은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 때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51 노이로제는 또 하나의 나의 비밀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굴욕적인 비밀이며 하나의 패배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나를 철저하게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특히 부지런한 성격으로 변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성실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렇게 해서 무슨 덕을 보려는 외견상의 성실성이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성실성이었다. 규칙적으로 다섯 시에 일어나 공부하였고, 새벽 세 시부터 일어나 일곱 시까지 학교 가기 전에 공부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è 너무 부럽다. 내가 아직도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나로 하여금 길을 빗나가게 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정,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놀라움에 찬 것이었고 나는 그 속에 나를 심화시키고자 했다. 돌 하나, 식물 하나, 모두가 생명에 찬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자연 속에 빠졌었고, 이를테면 자연의 본질 속에 숨어들어 모든 인간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

그 당시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체험을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클라인휴닝겐에서 바젤로 가는 긴 등교 길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한 순간, 나는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엄청난 감동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을 느꼈다. 나는 등 뒤에는 마치 안개의 벽과도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그 순간, 나에게 내가 생겨난 것이다. 전에도 나는 존재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여기 있다. 여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전에는 그것이 나와 함께 행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하고자 했다. 내게는 이 체험이 엄청나게 중요하고도 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권위자"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당시, 외상성 신경증에 걸렸던 그 여러 달 동안 어린 시절 다락 안에 두었던 보배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내가 그 때 그것을 기억했다면 이미 그 당시 그 보배가 나의 마음에 일으킨 가치감정과 나의 그 당시의 권위감정이 비슷하다는 사실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가죽통에 대한 모든 추억은 그 당시 소실되어 있었다.

è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찾지 않았다.

è 권위가 외부 환경에 대한 인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생겨났다. 내 안에 있는 권위자와 이분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è 니체의 "초인"과 닮은 점이 있을까?

è 매우 감동적이다.

 

52 나는 내가 바로 그가 금한 것을 저질렀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힐난은 지극히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뚱뚱한, 교양 없는 멍청이가 나를 감히 모욕하다니 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나를, 했을 때의 나는 그저 성장한 나에 그치지 않고 무척 중요한 권위자요, 지위와 위엄을 지닌 한 나이 든 남자요, 존경과 외경의 대상으로서의 나였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과 너무도 기괴한 대조를 이루어서 나는 문득 내 분노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이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넌 누구냐? 넌 마치 네가 뭐가 되기나 한 것처럼 반응하는구나! 다른 사람이 옳다는 것을 잘 알면서! 넌 이제 열 두살 밖에 안 된 학생이고 그는 아버지인 데다 세력 있고 돈 많은 남자이고 집을 두 채나 갖고 여러 마리의 훌륭한 말을 가지고 있어."

그러나 내가 사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당황하였다.  하나는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확신이 없는 학생이며, 다른 하나는 중요하고 위대한 귄위의 소유자인 한 남자로서 아무도 농담을 걸기를 허용치 않는 남자, 제조업자보다도 강하고 영향력 있는 남자였다. 그는 18세기에 살며 조임쇠가 있는 구두를 신고, 흰 가발을 쓰고, 높고 오목한 뒷바퀴와 그 사이에 용수철과 가죽테두리에 차체가 걸린 마차를 타고 다니는 늙은 남자였다.

è 인격의 분리 순간. 1의 인격, 그리고 제2의 인격

è 나의 경우가 기가 막힐 정도로 상통한다! 나는 항상 L을 생각해왔었다. 키가 크고 흑발이며 파리할 정도로 창백한 미남이자 천재인 인물이다. 나는 항상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뤄내는 L을 상상해 왔었다. 그러나 전에 융이 말한 것처럼 자신 안의 권위자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56 나는 이 아름다운 광경에 큰 감동에 젖은 책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은 아름답다. 교회는 아름답다. 신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푸른 하늘 위에 황금의 왕좌 위에 앉아 있다. 그리고 …' 생각이 이에 미치자 생각에 큰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는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치 온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다만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는 생각뿐이었다. 뭔가 두려운 것이,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 근처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무엇이 있었다. 왜 안 되는가? 네가 큰 죄를 저지를 것이니까. 무엇이 큰 죄악이냐? 살인? 아니야. 그것일 리가 없어. 가장 큰 죄는 성령에 반하는 것이다.

 

57 사흘째 되는 밤에는 괴로움이 너무나 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어지러운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또다시 뮌스터 성당과 사랑하는 하나님 생각에 사로잡혔다. 거의 그 이상의 생각을 할 뻔했다! 내 저항력이 감소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불안하여 식은 땀을 흘렸다. 잠을 떨쳐버리려고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이제 오는구나. 이제는 문제가 심각하다! 나는 생각해야 한다.

 

 

58 신은 분명 아담과 에바를 설득하도록 할 목적으로 뱀을 만들었다. 전지전능한 신이 모든 것을 그렇게 설정해서 최초의 부모가 죄악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죄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신의 의도였다.

이런 생각이 나의 가장 최악의 고뇌를 해소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신 자신이 나를 이런 상태에 빠뜨렸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죄를 지으라는 의도를 가졌는지, 짓지 말라는 생각을 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구원을 위한 기도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은 나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에 갖다 넣고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뜻대로 혼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로써 새로운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을 하라는 것인가, 하지 말라는 것인가?"

è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맹목적인 사랑의 신"이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의지를 가진 신"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런데 융은 결코 신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저 상황 속에 내버려 두는 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고민하여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신을 믿고자 하는 자는 신을 발견할 것이며 믿고자 하지 않는 자는 신을 죽일 것이다.

 

59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전에는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이와 같은 절망적인 난관을 마련한 근원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상스럽게도 나는 마귀가 내게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 마귀는 신 앞에서는 어땠든 맥을 못쓰는 존재였다. 안개 속에서 빠져나와 자아를 확립한 순간부터 신의 통일성, 위대함, 그리고 초인성은 내 환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에게 결정적인 시험을 내리는 것이 신이며 모든 것이 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내가 결국 양보하도록 강요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문제는 나의 영원한 영혼의 구제이기 때문이다.

 

60 내 신앙과 깨우침이 지옥과 저주로써 나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데도 신이 과연 내가 그의 뜻을 지킬 수 있는지를 보고자 함일까?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다시금 똑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신은 분명히 내가 용기를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한다면 그는 내게 은혜와 구원을 줄 것이다.'

나는 마치 지옥의 불 속에 뛰어들 듯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생각이 우러나오도록 하였다. 그러자 내 눈앞에는 그 아름다움 뮌스터가 서 있었다. 그 위에 푸른 하늘이 있고 신은 황금의 왕좌에, 아득히 높은 세계에 앉아 계시고 그 왕좌 밑에서 엄청난 배설물이 그 화려한 새 교회 지붕 위로 떨어져 그것을 부수고 교회의 벽을 산산이 갈라놓았다.

è 신의 배설물?

è 교회는 허상에 불과하다. 신의 존재가 확립되자 교회가 붕괴되었다.

 

그래, 이것이었구나. 나는 굉장히 마음이 가벼워지며 말할 수 없는 해탈감을 느꼈다. 기다렸던 저주 대신에 은혜가 내 위에 내렸다. 이로써 내가 일찍이 느끼지 못한 말할 수 없는 축복감에 젖었다. 행복과 감사의 마음이 북받쳐 나는 울었다. 나는 내가 그의 가혹한 준엄함에 쓰러진 뒤에 이 지혜와 신의 자애에 감싸이게 되었음을 감사했다. 이것은 하나의 깨달음의 체험이었다. 이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이 내게 분명해졌다. 내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나는 경험하였다. 그것은 신의 의지이다. 아버지는 최선의 이유와 가장 깊은 신앙심에서 이 신의 의지에 저항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모든 것을 치유하며 모든 것을 이해시키는 은혜의 기적도 체험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성서의 계율을 행동규범으로 삼았다. 그는 성서에 쓰여 있는 대로, 그의 조상들이 가르쳐 준 대로 신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는 직접적인 신을, 성경과 교회 위에 자유롭게 전능한 힘을 가지고 서 있는 신, 인간에게 그의 자유를 호소하며, 그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확신을 신의 요청을 무조건 충족시키기 위해서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신을 알고 있지 않았다. 신은 인간의 용기를 시험하는 데 있어 전통의 영향을 받기를 거부한다.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이미 그의 전능한 힘으로 그런 용기의 시험에서 정말 악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잘 보살필 것이다. 사람이 신의 의지를 충족시키면 그는 바른 길을 간다는 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신은 또한 아담과 에바를 그들이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그들이 순종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 신은 또한 내가 종교적인 전통에 따라 거부하고 싶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순종심은 내게 은혜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체험 이래로 무엇이 신의 은혜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신에 의탁되어 있음을 경험했고 중요한 것은 다른 아무것도 아닌 그의 뜻을 충족시키는 것임을 경험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나를 내맡긴 셈이 된다. 그 당시 나의 진정한 책임이 시작되었다. 내가 생각해야 했던 생각은 내게는 끔찍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생각과 함께 신은 무서운 것일 수 있다는 예감이 내 속에서 눈을 떴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무서운 비밀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것이 불안에 찬 음울한 일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 인생에 그늘을 던졌다. 나는 자주 생각에 잠기는 사람이 되었다.

è 초등학교 재학 시절 나를 괴롭혔던 것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당시 나의 결론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답을 알기 위해 일단 공부해야 하고 살아 보아야 한는 모순된 결론이었는데 이 결론 덕분에 어쨌든 나의 마음은 편해졌다. 훗날, 내가 생의 의지를 가진 이유는 1(존재) 0(소멸)의 이진법을 통한 진화 과정 중에 나에게 "우연히" 내재하게 된 습성에 불과하며 내가 스스로 죽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일어난 일"일 뿐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코 신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융이 신의 의지에 대한 온갖 의문과 고민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신기하다. 가장 간단한 답을 놓아두고 우회한다는 생각이 든다. 신을 죽이고 인간 스스로 신이 되어 우뚝 설 때 진정한 독립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

è 인간은 신 없이는 생의 허무함을 이겨낼 수 없는가? 신이 상징하는 것. 상징으로서의 신.

è 생명체의 "생의 의지"는 진화론의 산물인데, "신의 의지"는 무엇의 산물인가? 어째서 신이 탄생하게 되었는가?

è 적어도 융은 신의 개념을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부모로 설정하지 않았다. 전지전능의 대명제를 설정하여 기독교적 신보다 더 우위에 놓인 신을 생각해내었다.

 

61-62 나는 그 체험을 통해 또한 내 열등성을 감득하였다. 나는 내가 마귀나 돼지 등 어떤 흉측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내 아버지의 성서를 몰래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약간의 만족감을 느끼며 나는 복음서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한 부분을 읽었다. 그리하여 바로 그 흉측한,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선택된 사람임을 발견하였다.내 열등감이 크면 클수록 신의 은혜는 더욱 끝없이 보였다.

 

63 어머니의 가족 중에는 여섯 명의 목사가 있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뿐 아니라 그의 두 형제도 목사였다. 그래서 나는 많은 종교적인 대화화 시학적 토론과 설교를 들었다. 그때마다 언제나 이런 기분이었다. '그래, 그래. 그건 참 좋아. 그렇지만 그것이 신비로움과 어떤 관계에 있지? 그것은 은혜의 비밀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대들은 그것을 몰라. 그대들은 신이 나로 하여금 그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기 위하여 심지어 부당한 것을 하게 하고 저주받을 일을 생각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몰라."

è 융은 신비로움의 끝에 진정한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몽땅 삼켜 버리다시피 했지만 더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여러 차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도 모르는구나!" 나는 내 아버지가 지니고 있는 루터의 성경도 읽었다. 불행히도 욥기의 통상적이고 교화적인 해석이 내가 이 책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기서 내가 위로를 받았을 것이었다. 9 30절에 "내가 비록 눈 녹은 물로 나를 씻더라도그대는 나를 곧 똥 속에 담글 것이다."라고 쓰여 있는 것이었다.

è L에 관한 소설에서, L이 어느 책에도 증명되지 않은 것을 발견해낸 후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세계를 넘어서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충격을 그려보자. 융의 체험과 연계하여서.

è 욥기에 관해서는 대학 채플 시간에 처음 알게 되었다. 처음 접한 당시에도 나는 굉장한 의문이 들어서 그 결론을 흥미롭게 기다렸는데 대학 측에서는 어떠한 시원한 결론도 내려주지 않았다. 나는 의문만을 체득한 채 자리를 나왔고 종교의 불완전함만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신이 존재하지만 "죄 짓지 않고도 불행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종교는 어떠한 해석을 내릴 것인가? 이 끔찍한 모순에 대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일찍 잃은 부모가 "신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을 때, "신이 당신의 아들을 너무 사랑하여 먼저 데려가셨다."라는 말이 과연 위로가 될 수 있는가? C.S. 루이스는 신은 전지전능하지만 모든 이의 자유의지를 돌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불행으로 이끌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개진하였다. 그의 기독교 변증론을 읽으면서 신을 옹립하기 위해 그토록 정교하고 처절하게 "궤변의 성"을 쌓는다는 인상이 강했지만, 그의 변증론은 말이 되긴 하였다.

 

어머니는 뒷날 내게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 우울했었다고 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나는 비밀을 생각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때 저 돌 위에 앉는 것이 내 마음에 이상한 축복된 편안감을 안겨 주었다. 돌이 온갖 의혹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종식되었다. '돌은 아무런 의심도, 자기를 표현하고 알리고자 하는 아무런 충동도 갖지 않는다. 그러면서 수천 년을 영원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 자신은 이에 비해서 단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마치 급하게 불타올랐다가 꺼져 버리는 불길처럼 온갖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나의 감정의 총화이며, 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타자영원한 시간 속의 이었다

è 돌과 물아일체를 즐기던 융에게 돌이 상징하는 것은 신적 가치이다. 필통각 속의 남자가 가지고 있던 돌도 마찬가지.

 

64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참 넌 언제나 생각하려 드는구나. 사람은 새악하지 말고 믿어야 해.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니다. 우리는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 "내게 그 믿음을 주십시오." 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양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체념한 듯 돌아앉았다.

è 결국 "생의 경험"을 말한 조셉 캠벨과 같은 결론에 당도하는가?

 

67 1호와 제2혼 인격 사이의 대항은 내 전 생애를 통해서 진행되었거니와 그 것은 통상적인 의학적 의미에서의 "해리"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누구에게서나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종교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제2, "내적 인간"에 대해 언급해왔다.

 

나의 생애에서 제2호는 주역을 연출해 왔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안에서부터 내게 접근하고자 한느 것에 길을 열어 주려고 애써왔다. 2호는 하나의 전형적인 상이지만 대개 의식이 가지고 있는 이해력으로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68 그러나 내게는 이와는 반대로 신의 의지란 가장 알 수 없는 것인 듯했다. 나는 신의 의지란 우리가 매일매일 탐색해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è 무신론 : 그거야,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지를 알 수 없다.

 

69 만일에 알고 있었다면 이 핵심적인 문제를 거룩한 두려움으로 다룰 것이며 이미 내가 경험했듯이 그의 강력한 충격적인 의지를, 의지할 데 없는 인간에게서 철저히 실현하려는 신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만으로도 벌써 그 문제에 두려움으로 임했을 것이다. 신의 의지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 자 가운데 신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켰는지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었겠는가?

è 스티브 잡스 : Believe something, your gut, destiny, karma, whatever… They haven't let me down. Connecting a dot looking forward (X) looking backward (O)

è 신의 의지는 우리에게 "불행을 찾아서" 떠나게 만든다.

 

아 너무 쓸게 많아!!!!!

 

70 내 인생의 결정적인 사건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당시 모든 책임이 내게 있으며 내 인생의 숙명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내게 달렸다는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하도록 되어 있다는 나의 확신을 아무도 나로부터 빼앗을 수 없었다. 이래서 흔히 온갖 중대한 일에서 인간과 더불어가 아니라 오직 신과 더불어 있다는 느낌을 나에게 주었다. 언제나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 나는 구체적인 시간 너머에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있었다. 그리고 회답을 준 ""는 언제나 거기 있었고 언제나 거기 있는 ""였다. "타자"와의 대화는 나의 가장 깊은 체험으로서 한편으로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최고의 희열이었다.

 

74 나는 이러한 고태적인 성질을 내 마음속에서도 발견한다. 그것은 나에게 인간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는 소인을 부여하였데, 그것이 반드시 편안감만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어떤 것을 인지하기 싫으면 물론 내 스스로를 속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진정한 인식"은 본능에 기인한다. 혹은 타자와의 신비적 융합에 그 토대를 둔다. 그것은 "뒷면의 눈"이라 할 수 있다. 그 눈은 비개인적인 관조의 행위를 통하여 본다.

 

79 성찬식에 참여한 다른 사람에게서도 나는 겉잡을 수 없는 회의라든가 엄청난 감동, 넘쳐흐르는 은혜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었는데 이런 것들은 나에게는 바로 신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융합도 합일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구와 하나가 되는 것인가? 예수와? 그는 1860년 전에 죽은 한 인간이지 않은가. 왜 사람들이 그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교라 부르지만 그것은 모두 내가 경험한 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에 대해서 사람인 예수가 신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이 분명했다. 그는 신의 사랑과 자애를 좋은 아버지의 속성처럼 가르친 뒤에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에서 회의에 빠졌다. 그러니까 그는 신의 무서움을 인식했던 것이다.

 

80 ‘오직 하나의 신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신은 인간적이 아니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위대함은 바로 인간적이 아닌 것이 에게 미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인자하면서 동시에 무섭다.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커다란 위협이며 사람들이 그 앞에서 자신을 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외곬으로 의 사랑과 자애에 매달림으로써 유혹자와 파멸자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 한다. 예수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를 가르치고 있다.

è 이 문장은 치명적으로 중의적이다! 신에게서 국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려 한다. 왜냐하면 고통 역시 신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81 비더만의 <기독교 도그마론> 나는 그로부터 종교가 인간이 신에 대하여 독자적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반대의견을 자극했다. 왜냐하면 나는 종교가 신이 나와 더불어 하는 것으로 알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편에서 하는 행위이며 나는 그 행위에 덮어놓고 위임되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는 나보다 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의 종교는 바로 신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를 알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가 별로 알지 못하는 신과 같은 존재와 그렇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è 리처드 도킨스와 융은 일정 수준 동일한 주장을 하는 셈이다. 인격신은 없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인격의 신은 없다. 신은 초월적이다(만약 존재한다면). 그러므로 인간의 인격을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격 없는 대상과 intimacy를 형성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그것은 얻는 이득이 있거나 두렵거나 그런 이유 때문에 섬기는 것이다. 신은 낯선 존재다.

 

82 인격이란 것도 하나의 성격일 것이다. 성격이란 저것과 다른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일정한 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이 모든 것이라면 어찌하여 는 남과 구별되는 성격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 “가 하나의 성격을 가졌다면 는 다만 주관적인, 제약된 세계의 자아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성격, 어떤 종류의 인격을 는 가졌는가? 모든 것은 거기에 달렸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와 관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84 나 자신도 신이 인간과 동물이 겪는 무고한 고통을 보고 잔인한 쾌감을 느끼고 있다고는 가정하지 안았다. 그러나 가 대극의 세계를 창조하여 하나가 다른 것을 잡아먹고 삶이 죽기 위한 탄생이도록 기도했다는 생각이 결코 무의미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자연법칙의 놀랄만한 조화란 내게는 겨우 억제된 자연의 혼돈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고 영원한별의 세계와 그 항로는 질서도 의미도 없는 우연성의 축적에 불과한 것으로 내게는 보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하던 별의 이미지들은 아무것도 실제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인공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았다.

è 현재의 자연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진화론과 지동설과 같은 각종 과학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만든 신의 의도가 가장 최선의 것을 지향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에서도 진화는 과정이었을 뿐 최선의 설계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 논거의 대표주자가 바로 최재천 교수이다. 오늘 방송에서 최 교수는 척추동물의 조상이 멍게류와 비슷하였고 멍게가 빛을 받아들이는 센서는 Radiation 형태의 신경다발이 수렴한 것으로 망막이 신경다발의 뒤쪽에 위치하는 불편한 설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 우연성의 축적의 불과한 것이다.

 

만일 신이 최고의 선이라면 어찌하여 의 세계 의 피조물이 그토록 불완전하며, 그토록 타락했으며, 그렇게 가련한가?

 

84 그러나 언젠가, 어디엔가 나처럼 진리를 찾으며,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이 세상의 고통에 찬 현실을 부인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내 어머니가, 즉 그녀의 제2의 인격이 아무 서두도 없이 느닷없이 내게 넌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 보았어야 했다라고 말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우리에게는 최신판의 훌륭한 괴테 전집이 있다. 나는 거기서 <파우스트>를 찾아냈다. 내 마음에 마치 기적의 향유가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한 인간이 있어 마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완전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신의 의도를 방해하는 이 적수와 혈맹을 맺기까지 한다고 생각했다.

è 이 시기 사상의 특징일까? 나는 무척 궁금하다. 남자 두 사람의 대립이 존재한다.

괴테 : 파우스트와 메피스토

헤르만 헤세 : 데미안과 싱클레어

: 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 L K

 

그리고 한 쪽은 계도의 대상이 되고 다른 한 쪽은 상징이 된다. 상징이 되는 쪽은 선과 악을 모두 가지고 있거나 악을 보여줌으로써(메피스토) 선만이 가치를 상징하는 세상을 양분한다. 데미안 역시 악을 긍정한다. 융은 제2의 인격을 통해 악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신학적 탐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나의 소설에서 L 역시 도덕성을 초월하여 삶을 실험하고 싶어하는 자다. K L에 의해 충격을 받고 세계관이 변화한다.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것!

 

87 신의 현존은 우리의 증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나는 어째서 신을 확신하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물론 나에게 이에 관하여 온갖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나를 설복할 수 없었다. 나의 관념은 결코 그런 남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관념이나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을 상상하고 깊이 숙고하고 그 뒤에 믿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내게 언제나 의심쩍은 것으로 보였고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진실이라고 믿은 적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예수님 이야기를 그 배경으로 내게 암시된 보다도 더 강하게 으로서 믿기를 강요했다. 그런데 어째서 신이 내게 자명한 것이 되었는가? 어째서 이 철학자들은 신이 마치 기왓장이 머리에 떨어지듯 자명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신이 하나의 관념이며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다든다 없다든가 하는 인위적인 가정인 듯 설명하려 드는가?

è 그럼 도대체 왜 믿냔 말이다! 융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냥 안다. 예전에 헬렌 켈러에게 신의 존재를 설명해주자,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누구나 알다시피 그녀는 시각과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è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 줄 아는가? 나는 신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신이 존재할 필요성을 알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설은 이 것이다.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과 결여된 사람 간에는 유전적인 차이가 있다. 이것은 마치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태어날 때부터 성향이 정해진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해당 사람이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앙심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면 신의 존재를 처음부터 믿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모태 신앙의 집안에 태어나 목사직을 강요 받는다 할지라도 결국 신을 받들지 못하고 가문의 탕아가 되는 것이다.

è 신은 증명되지 않는다는 말은 무책임하다! C.S. 루이스는 왜 각광받는가? 그는 신학적 변증법을 그럴싸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몰래 갈등하고 있다. 신을 믿는다. 그런데 정말 신이 있는가? 그들이 신앙적으로 갈등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비밀이다.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알게할 증거이다.

è 결국 리처드 도킨스가 신이 없음을 증명하고, 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있다고 믿으며 이 논거를 수립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것은 취향상의 문제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신이 있다고 믿는 자에게는 있을 것이고, 없다고 믿는 자에게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신은 있긴 있다.

 

87 나는 철학자들인 틀림없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가정이며 사람들이 토론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묘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극도고 불만이었던 것은 내가 그 속에서 신의 은밀한 행위에 관해 아무런 견해도, 설명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특수한 철학적 관심과 관조의 대상으로 가치가 있는 일일 텐데도 말이다.

è 신을 확신하게 된 융의 개인적인 체험들. 나도 그게 미치도록 궁금하다. 도대체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될 그런 경험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설사 기적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양자역학적 확률의 예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는 과학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겠지.

 

95 기독교적 스콜라 철학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성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주지주의는 사막처럼 생명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이들이 모두 영접하지 못했고 진정으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을 논리적 곡예로서 억지로 획득하려 든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의 믿음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체험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è 누구나 자신이 찾아낸 논리의 결론을 사랑한다. 특히 감정적 체험과 결부되면 다른 이들이 침해할 수 없는 신적 권위를 논리에 부여하게 된다. 융이 말하는 신적 체험에 동의할 수 없다. 논리의 성을 쌓지 않고 신에게 도달할 수 없다. 신이 감정이 아닌 이상, 증명되어야 한다. 증명의 방식이 이성이 아닐 지언정 이성으로 이해되는 어떠한 창의성을 보여주어도 상관없다. 증명할 수 없으나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95 그런데 나의 탐구과정에서 얻은 커다란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처음으로 세계의 고통을 말한 사람이었다. 우리를 혼란과 고뇌와 악으로 그는 처음으로 절박하게 여실히 둘러싸고 있는 이 고통의 세계를 다른 사람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고 언제나 조화와 이해 속에서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마침내 세계가 반드시 최선의 것으로만 만들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용기를 가진 자가 있었다. 그는 창조의 최고의 자비와 최고의 지혜를 지닌 하늘의 뜻을 말하지도 않았고 피조물의 조화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인류 역사의 고통에 찬 과정과 자연의 잔인성에는 하나의 결함이 그 밑바닥에 놓여 있으며, 이는 다시 말해 세계창조의 의지의 맹목성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96 (이어) 쇼펜하우어의 음산한 세계상은 나의 전적인 찬성을 얻었지만 그의 문제 해결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의지"가 신이며 창조주를 뜻하는 것임은 분명했고 그는 이를 "맹목"이라 규정하였다. 나의 경험으로는 신은 어떠한 신성모독에 의해서도 상처를 입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로 그런 모독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이 밝고 긍정적인 측면뿐 아니라 어둡고 배신적인 측면도 갖도록 요구함을 나는 알고 있었으므로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내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사실로써 증명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만큼 맹목의 의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지성이 그 을 내보여야 한다는 그의 설은 나를 더욱 실망시켰다. 의지가 맹목이면 어떻게 그것이 이 상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이 이를 볼 수 있다 해도 어째서 이를 통하여 되돌아서도록 의지를 움직일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 상이란 의지에게, 바로 그 의지가 원하는 바를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성이란 무엇이었던가? 그는 인간의 마음의 기능이요, 거울이 아니라 미소한 거울 조각으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태양을 향해 돌면서 태양이 그것으로 눈멀기를 기대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è 의지()는 맹목적으로 의지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상을 볼 겨를이 없다.

è 설사 의지()이 이 상을 보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수정할 이유도 없다.

è , 쇼펜하우어는 융의 대전제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융의 대전제는 곧 신이다. 신은 제멋대로 전지전능하다.

 

96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특히 순수이성비판을 고생해 가며 읽었다. 쇼펜하우어의 학문적 체계의 근본결함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니 읽은 보람이 있었다. 즉 그는 단순한 누메논, "사물 그 자체"를 실체화하고 그 성질을 규정하려고 형이상학적 진술 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인식론을 읽은 결과 얻은 발견으로서 이 인식론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적인" 세계상보다도 더 큰 깨우침을 준 만큼 내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è 실체는 형이상학으로 진술될 수 없다. 달을 손으로 가리키다.

 

98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감상적인 속성을 지는 것이 아니었다. "신의 세계"는 모든 "초인적인 것", 눈부신 , 심연의 어둠, 시공의 무한대가 지닌 차가운 무관심, 비합리적인 우연의 세계의 무시무시한 기괴함이 속해 있었다. ""은 나에게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나를 감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è 신의 세계의 속성 : 모두 맞는 말인데 이를 표현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수식어가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단순화시키는 것에서 미를 찾는 과학도로서 왠지 거부감이 인다. 초인적인 것, 빛과 어둠을 모두 포괄하는 것, 무한대, 우연.

è 신의 세계는 다만 존재할 뿐, 교훈적인 것이 아니므로 감화의 도구가 될 수 없다. 그것 자체가 이미 편중적이다. 또한 미학적인 감화를 뜻한다 하더라도 아름다움보다도 신은 더 상위에 있으므로 아름다울 필요도 없다.

 

100 반대로 나의 제1의 성격은 당시의 학문적 유물론에 완전히 빠져 버린 나의 아직 빈약한 자연과학적 지식과 더불어 결연히 전진하고 있었다. 이 제1의 성격은 내 주위의 아무도 이해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인 <순수이성비판>과 역사의 증언으로써 그저 간신히 그 전진이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è 이러한 분리가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1의 성격은 자연과학적 유물론을 습득하고 있고 제2의 성격은 신의 속성을 탐구하고 있다.

è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과학자들을 많이 본다. 리처드 도킨스는 위대한 과학자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들은 사회적으로 신앙이 있는 척 했을 뿐, 근본적으로 무신론자였다고 주장하였다.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말할 때 신은 그저 상징일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모든 과학자가 무신론자인 것은 아니며 분명히 신앙과 과학을 무리없이 같이 가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들 역시 융처럼 인격을 분리시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영역을 분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별 생각이 없는 것일까? 늦가을 강가의 얼음장처럼 얇고 부실한 논리의 벽을 만들어 둔 채 그저 두 영역을 정리해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융이 말한 것처럼, 그저 "신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도로 생각하면서.

è 한 사람이 두 개의 모순된 입장을 진심으로 견지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이를 위해서는 인격을 분리해야 하는가? 인격의 분리를 필수불가결인가?

 

101 이런 도덕적인 갈등(결코 자연과학과 신의 존재 사이의 모순을 의미하지 않음)이 내 마음속에서 날카롭게 심해지자 제2의 성격은 내게 점점 더 불쾌하고 위태로운 것이 되어 이 사실을 내 자신에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나의 제2의 성격을 없애 버리고자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학교에서, 나의 친구들 앞에서는 잊을 수 있었고 자연과학을 공부할 때는 그것이 사라졌지만, 내가 집에 혼자 있거나 자연 속에 있기만 하면 쇼펜하우어와 칸트가 그 위대한 "신의 세계"와 더불어 다시 강력하게 나타났다. 나의 자연과학적 지식도 그 속에 내포되어 그 위대한 신의 세계의 회화를 색채와 형상으로 채웠다.

è 오히려 자연과학적 지식이 신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How?

 

105 그래, 이것이다. 이것이 나의 세계, 내 고유의 세계요 신비의 세계다. 여기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 없는 의문도 없다. 물음을 던질 필요도 없이 그저 그렇게 있는 세계이다.

è 이것이 융이 신을 믿는 방식. 물음을 던질 필요 없는 신의 실존

 

108 이와 같은 대극 사이의 충돌로부터 나의 인생의 첫 번째 체계적인 환상이 태어나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것은 단편적으로 나타났는데 아마도 그 근원은 내가 기억하는 한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준 한 체험에 있었던 듯하다.

세찬 북서풍의 라인강에 거품을 머금은 파도를 일으키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 가는 길은 강가를 지나갔다. 나는 거기서 별안간 북쪽에서 커다란 야거리돛을 단 배가 폭풍을 받으며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게는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다. 라인강 위의 돛단배! 그것이 나의 환상에 날개를 달았다. 즉 급류가 아닌 알자스 지방을 덮은 호수였다면 거기서 우리는 요트나 큰 기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젤은 항구였을 것이고 우리는 바닷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다른 시간과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살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김나지움돔 없을 것이다. 긴 등굣길도 없을 것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고 나의 인생을 스스로 구성해 갈 것이다.

 

이후 도시를 형성하는 환상

 

……

 

이런 일에 골몰하는 것이 나의 여가를 2년 이상이나 채웠고 이 시간에 나의 자연과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연구취향이 제2의 성격의 희생 아래 강화되었다.

è 이 때의 환상을, 융은 훗날 자신의 집을 지을 때 활용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집을 만든다(근대적인 물건은 거의 없어서 옛 영혼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전혀 낯섬을 느끼질 않을 만한 공간). 여기에서 여러 집필 활동을 한다.

è 1성격이 묵묵히 자연에 대한 연구 방식을 습득한 후 제2의 성격과 융합되어 최종적인 융의 사상을 만들어내었다.

 

내가 실제 사물을 잘 알지 못하는 한, 거기에 관해 깊이 생각해 잠길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4장 대학시절

 

114 이 기회에 나는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시대와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사람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어야 했다. 모든 나의 친우들의 마음이 이러한 필요성으로 채워져 있고 전혀 그 밖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è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친구들은 지나치게 현실에 잘 학습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재수 시절 아직까지도 나 혼자만이 학문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내 자신이 촌스럽게 여겨졌다. 어떤 면에서 현실을 모른다는 것은 미성숙하였음을 의미하였다.

 

115 그래서 나는 결국 의학공부를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자기의 인생을 이와 같은 타협으로 시작해서는 좋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별로 기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다시는 취소하기 어려운 결단을 내림으로써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è 내가 의대를 가기로 하였을 때는, 진로의 종류가 특별히 내 인생을 다르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 작용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고집을 포기하였다는 것이 곧 나의 성숙 - 최소한 긍정적 변화 - 를 의미한다고 느꼈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16 1호 성격과 제2호 성격의 설명

 

현상에 대한 어리석은 열광! è 표현!

 

2호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정의할 만한 성격이랄 수 없는 것으로 하나의 비타 페락타(Vita peracta, 투철한 생명력), 태어나고 살고 죽고 온갖 것이 하나 속에 들은 인간 성격의 총람이며 스스로 무정할 만큼 분명하지만 무능하고 의욕이 별로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간절히 스스로를 제1호의 밀집된 어두운 매개물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었다.

è 내 생각에 융의 제2 성격은 나의 L과 비슷한 구석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L을 상상해왔는데, 그는 아름다운 외모를 한 천재 남자이다. 그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모두 이룰 줄 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남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전제 하에 융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è 왜 의욕이 없는가? 왜냐하면, 평생 생각해 왔기 때문에 신선할 것이 없다. 내가 L을 생각할 때 쾌감을 느끼지만 L은 늘 있어왔기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과 설렘은 없다. 또한 L은 수줍은 것이다. 비록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 할지라도 나를 관객으로 하여 L을 등장시킬 때 굳이 자랑스러울 이유는 없다. 그러나 L을 생각하는 것은 즐겁고 중독성이 있다. 그러므로 L은 항상 등장하고자 한다.

è 실체가 될 수 없으므로 무능하다.

è 비타 페락타 : 투철한 생명력. 생의 의지가 아닌 생명력을 의미한다. 생의 의지는 자칫 저속한 의미일 수 있으나, 생명력이란 곧 경쟁력을 의미한다. 나의 L은 내가 추구하는 모든 우수한 성향을 다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투철한 생명력이다.

è 도대체 무엇이라고 정의할 만한 성격이랄 수 없는, 인간 성격의 총람 : 왜냐하면 내가 경험하면서 순간 순간 마음에 드는 특질을 모두 L에게 쏟아붓기 때문이다.

è 이런 제2 성격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 같다. 여성의 경우, 여성성의 인격이 제2의 성격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대부분 로맨틱한 환상을 가미하고 있다. 가령, 남성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지만 이를 유예하는 여성상 등. 자신을 투사시킬 신화적 존재를 만드는데 표현하자면 아바타와 같다.

è 보편적 현상이라는 근거 : 순정만화에서 - 만화가 이미라는 어떤 만화책을 그리더라도 항상 주인공으로 서지원과 이슬비를 그린다. 이들 중 이슬비는 이미라의 제2 성격이다. 만화가 원수연의 만화 풀하우스에서 주인공 엘리는 원수연의 제2 성격이다. 나는 원수연의 프로필 사진에서 그녀가 만화 주인공 엘리와 똑 같은 헤어 스타일을 한 것을 보고 놀랐다. 원수연 그 자신은 이 동일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지나치게 민망한 것이었다.

è 어린이들은 만화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대부분의 만화 주인공은 초인이다.

 

117 이 무렵 나는 잊을 수 없는 꿈을 꾸었다. 폭풍, 안개, 작은 등불, 등불을 살려야 함, 무엇인가 나를 뒤따름, 검은 형체, 알고 보니 빛에 의한 나의 그림자. 그것은 소용돌이치는 안개에 내가 내 앞에 들고 있던 등불 때문에 생긴 내 자신의 그림자였다. 나는 또한 그 작은 등불이 나의 의식이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내가 지니고 있는 유일한 빛이다. 내 자신의 인식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유일하고도 위대한 보배이다. 그것은 저 어둠의 힘에 비하면 끝없이 작고 약하나 빛임에는 틀림없고 나의 유일한 빛이었다.

이 꿈은 나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었다. 이제 나는 1호가 빛을 나르는 자였음을, 그리고 2호가 마치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과제는 빛을 보존하는 일이며 금지된 다른 종류의 빛의 나라임에 틀림없는 "투철한 생명력"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를 뒤로 밀어붙이려는 폭풍에 저항해서 나는 앞으로 전진해야 했다. 폭풍은 나를 숨은 비밀의 표면 밖에는 아무것도 지각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나는 제1호로서 대학의 학업 속으로, 돈을 버는 일에, 의존, 착종, 혼란, 실수, 굴복과 패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나를 향해 불어 닥친 폭풍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는, 그러나 동시에 끊임없이 그리고 직접 내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탐욕스럽게 끌어들이며 오직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힘만이 잠시 그 힘을 제어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엄청난 현실성을 지니고 현재에 살아 있어 충분한 해답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자를 끌고 가버린다.

è 1의 성격은 인식()을 나르는 융의 실존이다. 2 성격은 제1 성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왜냐하면 그림자) 매우 큰 덩치를 가지고 있다. , 실제의 융보다 더 커보인다. 융이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융은 이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에 당도하였다. 이제는 먹고 살 생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제2 성격은 허상이다. 2성격은 아무리 "투철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이제 폭풍을 향해 맞서 싸워야 한다. 폭풍은 인식을 꺼뜨릴 수 있는데 꺼지게 되면 융은 영원히 제2의 성격이 만드는 어두운 그림자와 과거와 어둠에 묻히게 된다. 즉 방향을 상실하게 되며 어두운 자궁과도 같은 자기 만족과 상상의 세계 속으로 퇴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융은 깨어있는 채로 폭풍을 뚫고 나가야 한다. 여기서 폭풍이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2의 성격의 세계는 정적이다. 2의 성격은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며 연속성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제2의 성격은 늙지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다. 융은 돛을 단 배가 폭풍 속에서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첫 번째 환상을 생각해냈다. 이 환상 속에서 융의 세계는 잔잔한 호수이다. 2의 성격의 세상이다. 융은 바로 자신이 도피할 수 있는 정신적 별장을 지었던 것이다. 언제? 고단하게 강을 거슬러 오르는 돛단배를 본 후에. 그러나 이제는 "엄청난 현실성"을 지니고 "현재에 살아 있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였다.

è 인식이 꺼지면 곧 어둠 / 그런데 융은 폭풍이 자신을 어둠으로 인도한다고 하여 어둠이라는 심상을 중복하여 사용하였다. 폭풍이 인도하는 어둠은 폭풍 그 자체의 속성으로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광폭한 우연의 세계(1 성격의 세계)를 의미함.

 

그 당시 나의 세계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나의 길이 어쩔 수 없이 외부로, 제약된 것으로, 3차원 세계의 어둠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인식했다. 아담이 그 옛날 이런 식으로 천국의 낙원을 버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낙원은 그에게 유령이 되어 버렸고 그의 이마에 땀을 흘리며 돌밭을 가는 곳에 빛이 있었다.

è 조셉 캠벨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힌다. 아담과 에바는 에덴의 동산(빛의 동산)에서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삶으로 진입하였다.

è 융 개인이 스스로 낙원을 짓고 낙원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아 에덴의 동산이 상징하는 바는 한 사람의 개인사에서 완전하게 되풀이되는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에덴의 동산은 창세기가 아니라 인간의 성장 과정 매뉴얼이다.

 

119 나는 제2호를 내 등 뒤에 남겨 두어야 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를 내 앞에 부인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자해행위이며 게다가 꿈의 출처를 설명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될 것이다. 2호가 꿈의 생성과 관계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고 그가 보다 높은 지능을 필요로 했음은 쉽게 믿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 자신은 점점 제1호와 일체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 상태는 이보다 훨씬 범위가 큰 제2호의 단순한 일부임이 판명되었으며 제2호와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다. 2호는 사실 "유령," 즉 그 힘이 세계의 암흑에 필적하게 된 혼이었다. 이것을 예전에는 몰랐다. 그리고 내가 과거를 뒤돌아보고 확인한 바대로 그 당시 그것은 느낌으로는 이미 어쩔 수 없이 의식되고 있었지만 아직 불분명했다.

è 굉장한 부분이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è 내가 생각한 L의 심상과 매우 동일하다! 암흑에 필적해야 한다. 힘이란 곧 암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아브락삭스에 대해 설명할 때, 그리고 내가 L을 가장 매력적인 존재로 그려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은 암흑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윤리를 초월한 힘.

 

120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소인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오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알게 된다. … 소년 시절에 이미 나에게 엄습했던 특이한 "종교적" 관념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심상으로 그것은 나의 양친의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121 우리 인간은 우리 고유의 개인적인 생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 우리는 고도의 집단정신의 대변자요, 제물이요, 또한 그 추진자인데 이 집단정신은 수백 년의 수명을 지닌 것이다. 우리는 물론 우리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살았다고 평생을 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주로 세계 극장의 장에 선 무언의 역할자였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일수록 그 영향은 더욱 커진다.

è 무의식적일수록 영향이 더욱 커진다. ? 의식하지 못하므로 조작할 수도 의지로 피할 수도 없다.

è 꽃와 뿌리의 딜레마에 대한 힌트를 던지고 있다. 수백 년의 집단 정신에 우리가 차지하는 역할에 대하여. 그러나 아직은 논리가 미흡하다. 융은 뒤에서 기가 막힐 정도로 획기적인 주장을 한다. 어떻게 꽃이 뿌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무의식은 죽음과 닿은 세계를 의미하므로 무의식으로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삶을 살면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의 생을 살 수 있다.

è 조셉 캠벨이 말한 순간 속의 영원.

 

그렇게 우리 존재의 일부는 최소한 수백 년을 살고 있다. 그것은 내가 사적으로 2라 이름하였던 부분이다. 그가 결코 개인적인 흥밋거리가 아님은 우리 서구의 종교가 증명해 주고 있다. 서구의 종교는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내적 인간으로 방향을 돌려서 벌써 2000년 이래 진지하게 그 내적 인간을 의식표층에 올려 놓고 그 인격주의를 알려주고자 시도하였던 것이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안의 사람 속에 진리가 들어 있다!"

è 정보이론과의 관련성. 전에 한 번 이야기 한 적 있듯이,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DNA가 주체이며 인간의 몸은 DNA의 의지가 그저 빌려 쓰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정보 이론으로 확장하자면, 인간은 정보의 수단으로서 정보가 전달되는 위한 도구(대변자요, 제물이요, 또한 그 추진자)로 사용된다. , 인간이 자신의 정보를 남긴다면(결국 DNA도 염기서열의 정보지만 여기서는 포괄적인 의미의 정보) 그는 번식에 성공한 것이고 번식에 성공한다는 것은 영원히 산다는 뜻이 된다.

è 왜 융은 영원성을 제2호에게 부여하였는가? 2호는 제1호의 허상(내적 인간)이자 슈퍼히로이다. 그는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성질을 가진다. 천재로서 천재적인 업적을 남기는 것이다.

è L은 늙지 않는다. 마치 하이랜더 증후군에 걸린 것처럼.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시는 정신분열증을 앓으면서 자신의 친구들을 만들어 낸다. 존 내시는 이 친구들이 늙지도 성장하지도 않는 것을 깨닫고 병식을 획득한다. L K의 정신분열적 허상일까? 그래서 늙지 않게 설정한 후, 그 차이를 K가 깨닫게 되면서 K L을 죽이기 위해 나서게 되는 것? 어떻게 전개해 나갈지 구상해 봐야겠다.

 

122 나는 그(아버지)가 자기의 상황에 대하여 투사처럼 대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기회를 포착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è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뒤에 융의 아버지와 비슷한 케이스가 나온다. 기업을 소유한 어머니 밑에서 일하는 유능한 아들.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데 이 고리를 끊어주자 처음에는 매우 화를 내었지만 결국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이 때 융은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123 아버지가 온갖 경험 중에서도 가장 명백한 신의 체험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나에게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적어도 인식론에 관해서 우리가 이런 인식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아무런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이와 마찬가지로 명백한 것이었다.

è 나는 그 융의 "신의 체험"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진다. 그가 말한 신의 체험이라는 것이, 내가 읽은 것이 맞다면 그저 신의 특성에 관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낸 사건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이는 그 스스로 변증법을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융의 결론, 신은 항상 우호적이지 않은데 그 이유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인간을 내던지고 그가 그 상황을 이겨낸다면 그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다). , 신이 있다는 대전제하에 발생하는 모순(신의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각박한 것)을 스스로 해결한 것이다. , 처음부터 신이 있다는 가정에 의문을 품은 적이 없다!

 

124 아버지는 또한 우스꽝스러운 정신과 의사의 유물주의 앞에서 자기를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유물주의라는 것도 바로 신학과 똑같이 믿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나는 이 양자에 모두 인식 비판이나 체험이 결여되어 있다고 확신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정신의학자가 뇌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물질"이 존재하며 "공기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인상을 받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내가 의학을 공부한다면 절대로 유물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여러 경고와 일치된다.

è 유물론 :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론, 이 학설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에서 비롯하였으며, 근대의 기계적, 자연 과학적 또는 변븡법적 유물론에 이르렀다. [네이버 사전]

è 나는 매우 화가 난다. 유물론은 이론일 뿐이다. 그리고 세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유물론을 누가 믿는가? 믿는 것은 오로지 망할 신도들 뿐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의리를 수반하는, 저버렸을 때 처벌과 죄책감을 감수해야 하는 맹목적인, 생각, 즉 망상이 아니던가? 나는 내 동생이 이 따위 주장을 하는 것을 듣고 기가 막혔던 경험이 있다. "언니가 말하는 그 과학이라는 것도 결국 믿어야 하는 것 아니야? 그게 그거야." 그게 말이 되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 무리수가 있다.

1. 정신적인 것과 신의 존재를 어물쩍 동일시하는 것. 신은 정신과 등가가 아니다.

2. 유물론을 과학과 동일시 하는 것.

과학이란 과학적 사고능력을 의미하며 이는 결코 정신의 배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연성과 객관성이 확립되는 모든 것을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과학은 오히려 엄밀한 정신력의 승리다. 과학이론은 단 한계의 확실한 반증이 성립하면 가차없이 폐기된다. 그리곤 연단에서 기존의 이론 주창자와 새로운 이론 주창자가 우정의 악수를 할 수 있는 것인 바로 과학이란 말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신의 이름을 걸고 수 만명의 목숨을 살해하는 전쟁을 할 수 있는 종교의 맹목적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

 

127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 지금 죽은 거야." 그것은 이런 뜻으로 들렸다. '너희는 서로 이해하지 못했어. 그는 네게 짐이 될 수 있었을 거야.' 이런 견해는 나의 어머니의 제2호와 일치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이 몹시 가슴에 사무쳤다. 나는 이제 한 조각 낡은 시대가 어쩔 수 없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è 2의 성격에 대하여. 어머니의 제2의 성격 : 삶을 영위하는 일반적인 인격이 제1의 성격이라면, 평소와는 달리 "가오를 잡는" 인격이 바로 제2의 성격이다. 융의 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가오를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저러한 말을 한 것이다.

è 이 역시 매우 일반적이다.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이영애가 떠나간 후 슬퍼한다. 이 때 유지태에게 그의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손자야, 떠나간 버스와 여자는 잡는 게 아니란다." 이게 바로 유지태 할머니의 제2의 성격이다.

è The old must die for the new. : 낡은 것은 새로운 것으로 반드시 대체된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신화와 상통한다.

 

131 리츌의 신학은 당시의 화젯거리였다. 그 역사적 견해와 무엇보다 철도열차와의 비유는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 라츌은 배열된 철도열차의 비유를 쓰고 있다. 뒤에서 기관차가 충격을 주면 이 충격이 전체 열차를 앞으로 나가게 한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동인이 수세기를 간다는 것이다.

è 근본적인 것, 절대적인 것은 언제든지 탄생하고 소멸하며 영원하다. 그런데 철도열차와 같은 동인으로 이어진다면 우연히 이 추세가 끊겨버릴 때 역사도 정지한다.

 

132 나는 대학시절 첫해 동안 나는 자연과학이 무한한 지식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그것이 줄 수 있는 통찰은 극히 적고 그것도 주로 전문적인 성질을 띠고 있을 뿐임을 발견했다.

è 결코 그렇지 않다. 당시 융의 시절은 자연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이다. 과학의 발전을 토대로 가치관의 대 변혁이 예고되는 마당에 단 한 해 동안 공부한 자연과학을 토대로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자만이다. 전문적인 지식이란, 의학처럼 실용성을 위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데 마치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자연과학의 전문지식은 궁극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와 같은 것이다. 더욱 정교하고 세세한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개발된 것들로, 결코 통찰의 합목적성을 벗어나는 것들이 아니다.

 

철학 강의를 통하여 나는 그 저변에는 심리적인 것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없었다.

è 일부 맞는 말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기시하여 주장된 과학의 반과학주의(결코 비과학주의가 아님)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학적 사실이 심리에 의해 자지우지 된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양자역학은 이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결론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è 융의 철학이야 말로 정말 "엄청난 구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대한 구라이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융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위태롭게 지상 위에 발을 대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133 유령이 왜 있어서는 안되는가? 무엇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디서 안단 말인가?

è 이 문제야말로 융이 말한 심리적 문제이다. 융은 왜 유령이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è 차라리 식물도 생각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믿을 만하다. 단지 아직 증명할 도구가 개발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식물이 아니니까 마치 7차원을 상상해야 하는 것처럼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쉽지 않다.

è 그러나 유령이라는 것은 너무 뻔하다. 우리는 유령을 과학이 과학으로 불리기 전부터 생각해왔다. 이토록 오랜 역사를 가진 관념이 아직까지 실체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유령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의 반증이다. 유령이 있다는 것이 줄기차게 주장되어 온 이유는, 누군가가 유령을 "보고" "듣고" 어떻게든 "체험" 했다고 주장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감으로 체험되는 사실이 개연성을 가지고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차라리 유령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열외로 분류라도 하겠다.

 

136 차라투스투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고 제2호는 나의 차라투스트라였다.

è 다시금

니체 - 차라쿠스투라

괴테 - 파우스트

헤세 - 데미안

- 2

 

137 다른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의 현상 앞에서 당황했다기보다 면역되어 있었다.

è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융은 니체가 세상에 나서서 이해 받기를 바랐다는 점이 어리석다고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나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려하게 매질 당하는 것이 바로 그의 명예가 될 것이다. 외면은 매질보다 더욱 참기 힘든 고통이었는데, 그 고통 역시 훗날 니체를 비운의 천재로 장식해주었다.

è 사상이 준비되면 세상에 나와야 한다. 늦을수록 누군가가 명예를 가로채버릴 테니까. 결코 세상은 먼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절한 때란 없다.

 

143 몇 줄 건너 저자는 정신병을 인격의 병이라고 불렀다. 이 때 갑자기 내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일어서서 숨을 쉬었다. 나는 강한 흥분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게 정신의학 이외에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번개같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직 이곳에서 나의 관심의 두 가지 흐름이 합류할 수 있었고 그 합친 경사가 그 자체의 강 밑바닥을 팔 수 있었다. 이곳에 생물학적/정신적 사실에 관한 경험의 공동의 분야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사방에서 찾았지만 찾지 못했던 것이다. 마침내 여기에 자연과 영혼의 충돌이 현실사건으로 화하는 장소가 있었다.

è 사명을 깨닫는 순간.

è 사실 부러운 순간이기도 하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였으나 융 만큼 강렬하진 않았고, 정신과를 전공하게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융의 책을 읽은 후, 융과 같은 사고의 지향점이 곧 정신과 의사의 보편적인 지향점이라면, 나는 정신과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기합리화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어보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분명 마음 속에서 끌어오르는 부조리를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일단 융의 이 책부터 심한 반발감과 자괴감을 유발하였을 것이다. 내가 정신과를 전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의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148 정신의학잡지 50권을 첫 권부터 읽어내려감으로써 정신의학의 사고방식을 알고자 했다.

è 나 역시 방사선종양학과의 잡지가 있을텐데 찾아봐야겠다.

 

149 내게는 내 자신을 이토록 노출시켜 나의 숙명을 엄격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할 만한 능력도 없고 또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이 곧잘 빠지기 쉬운 잘못을 나 또한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 어떻게 되었어야 했느냐에 관해서 하나의 환상을 엮어 내든가, 아니면 "생애를 위한 변경"을 적는 일 따위가 그것이다. 사람이란 결국 하나의 사상으로 스스로 평가되는 것이기보다 잘 되었듯 못 되었든 다른 사람의 판단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다.

è 융이 정신과 의사가 된 과정에 대하여. 소명을 관조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소명을 자기합리화한다는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그 부담감을 덜어주는 문단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판단은 별로 중요치 않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지나친 자기 합리화가 스스로 거북하게 여겨진다면 소명을 진단하고 솔직하게 시인하는 편이 좋다. 내가 이 길을 가게 된 것은 이런 점이 잘 맞고 이런 점은 잘 맞지 않았는데 최종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등.

 

5장 정신의학적 활동

 

여러 케이스가 나오는데 흥미롭다.

 

158 그러나 그는 자시의 화려한 지위를 희생할 결심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자리를 주선해 준 어머니에게 매달린 채 있었다. 언제나 그가 그녀와 함께 있거나 그녀의 간섭을 받게 될 때마다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감정을 마비시키거나 그것을 없애려고 했다. 사실 그는 그 어머니의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빠져나오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의 본능에 거역해서 편안하고 넉넉한 생활에 자신을 떠맡기고 있었다.

è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에서 경질된 후, 새롭게 재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è 편안하고 넉넉한 생활이 본능이 아니라는 표현이 특이하다. 본능이란 용어가 적절할까?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와 편안하고자 하는 욕구 중 어느 것이 본능에 더욱 가까운가? 더욱 동물적인 것은 후자인 것 같지 않나?

 

161 임상적 진단은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방향감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환자를 도와주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것은 환자의 "역사"를 묻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찾아내고 오직 거기서 의사의 치료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è 사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è 최근 정신의학은 약물학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의 경우에는 잘 모르겠다. 이 병에 걸려보질 않아서. 이 병은 대표적인 "미친 병"인데, 그래서 "당연하게도" 정신과 영역에 있지만 사실은 매우 생리학적인 병으로 이해되고 있다. , 약을 먹으면 낫는다. 약이 곧 치료이지 정신분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고 있다. TED의 한 강연에서 정신분열증을 앓아온 예일대 법대 출신의 법대 교수가 자신이 정신 분석을 일주일에 5회씩 꾸준히 들어왔다는 말을 할 때 경악하였다. 엄청난 돈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울증에 관한 경험 때문에 기존의 입장을 조금 수정하였다. 우울증 역시 약물이 매우 잘 듣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대학에서 우울증 약을 몇 개월 복용하면 드라마틱하게 호전된다는 케이스를 많이 접한다. 물론 심한 케이스도 많으며 재발을 주의해야 하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러나 대개 우울증은 정신의 감기로 감기약을 처방하듯 우울증약을 처방하여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우울증으로 약을 복용한 적이 있었는데, 내 스스로 약물 신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약물 치료가 그리 큰 효과를 보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나는 최근까지도 약물 효과가 좋았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좋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약을 먹는 행위 자체가 우울증을 유발하였다. 나를 치료했던 것은 데일 카네기의 책이다.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꿈으로써 우울증의 근본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시 우울증의 주 증상인 비관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하루 하루를 살아라."라는 데일 카네기의 격언을 읽고 바로 증상이 좋아졌다.

 

그래도 약물 치료가 중요하긴 하다. 다만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의 히스토리가 중요하다는 융의 주장에 동의한다.

 

163 그 당시 나는 이른바 "조발성 치매"의 심리적 근원을 처음으로 어렴풋이 예감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모든 정력을 정신병의 의미관련을 찾는 데 바쳤다.

è 융의 시도는 반쪽 성공인 것 같다. 모든 정신병에서 의미관련을 찾을 수도 없고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치료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융이 지금 하려는 것은 결국 "진단"일 뿐이다. 정신병은 다른 과의 질병과 달리 원인으로 진단명을 내리는 경우가 드물다.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증세로 진단명을 매기는 경우가 많은데 융은 여기에 비과학적이긴 하지만 "의미관련"을 찾아내어 질병의 원인에 입각한 진단명을 새로 매기는 것 뿐이다. 치료를 위해 원인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원인을 안다고 반드시 치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정신분열증의 정확한 원인을 모르지만 치료법은 알고 있다. 게다가 실성한 여자가 정말로 구두장이에게 실연 당했기 때문에 실성한 것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지나치게 비과학적이며 의학적 목적의식도 희미하다. 단지 개인적인 취미라고 여겨진다.

 

167 이때 갑자기 날개가 걷혀지더니 한 초속적인 아름다운 남자가 그녀 앞에 섰다. 그는 그녀를 냉혹하게 움켜잡으며 그녀를 그의 날개팔로 감쌌다. 그래서 그녀는 칼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흡혈귀의 눈초리라 홀려 버려서 꼼짝도 못했으니 칼로 찌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땅에서 들어올려서 함께 날아가 버렸다.
è 여자들은 새로운 남자(새로움 = 두려움)에 끌린다. 또한 두려움을 유발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è 트와일라잇 :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이야기

 

168 어린 소녀로서 근친상간의 고통을 당했던 그녀는 이승의 눈으로는 멸시 받는 느낌이었으나 환상의 세계에서는 자신을 높이게 되었다.

è 그런데 사실 환상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누구나 환상을 가지고 있다. 정상인이나 환자나. 단지 미쳤다는 이유 만으로 그 환자의 환상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è 만약 융이 말하는 정신병이 환자들이 자신의 환상 속으로 도망쳐버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면, 융의 치료란 이런 것이다. 1의 성격과 제2의 성격 중, 2의 성격의 세계로 도피한 자들을 제1의 성격으로 소환해내어 현실의 삶을 살게 하는 것.

 

175 그 아이는 요강 위에 앉아 있었는데 똥을 몸에 칠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공포에 질려 소리치며 잠에서 깨었다. 나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잠재성 정신병자였던 것이다! 내가 그를 꿈에서 현실로 끌어내려고 시도할 때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나는 그 꿈을 될 수 있는 대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묘사해야 했다.

è 자신에게 정신병이 도지기 전에 전조 증상을 느끼는가? 신기하다.

 

★★★★★★★★★★★★★★

181 나는 사람들이 인생의 물음에 대한 불충분한 또는 그릇된 해답에 안주하고 있을 때 노이로제에 걸리는 것을 자주 보아왔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 결혼, 명성 그리고 외적인 명예와 돈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불행하며 신경증적인데 그들이 찾던 것을 얻었을 때도 또한 여전히 그러하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나게 협소한 정신적 시야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생은 충분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이 보다 포괄적인 인격으로 발전할 수 있을 때, 대개 노이로제는 없어진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언제나 인간의 "발전"이라는 관념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186 심혼이란 개념 속에 있지 않고 행위와 사실 속에 살아 있다.

 

6장 지그문트 프로이트

 

193 나는 그(프로이트)의 가설을 논리적으로 추구하면 결국 문화에 대한 파괴적인 판단에 도달되지 않겠느냐 하는 반론을 제기했다. à 여기에 대해 프로이트는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그건 운명의 저주입니다. 거기에 대항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è 나는 프로이트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가 문화를 한 번 깨부수었기 때문에 새롭게 재창조되었다. 성이 우리 의식의 기저를 형성한다는 것은 지당한 생각이다. 우리의 존재 양식을 생각해보라. 생존 본능과 번식 본능

 

è 전반적으로 융이 프로이트에게 지나치게 악의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융은 애써 부인하고 있지만 객관성을 상실하고 있다. 융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엄정하게 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p193에서 프로이트가 자신의 성학설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자신의 명성의 꽃이 될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감정적으로 냉정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감정적 동요와 그에 따른 프로이트의 표현이 곧 성학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집착할만한 과학적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융은 지나친 불필요함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시기의 프로이트는 융을 친구로 보고 자신의 속내를 너무 드러낸 것 같다.

 

è 내가 융의 프로이트 챕터를 보고 느낀 점은, 사람이 타인을 얼마나 심하게 오해할 수 있으며 자신이 오해한 바를 객관성과 겸손함의 이름으로 맹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나마 융이 객관적 사실을 꽤 있는 그대로 기술하였기에 나는 프로이트의 입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처음에 프로이트는 융이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속내를 감정을 포함하여 모두 드러내었다. 그러나 융은 의뭉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에게 적대적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프로이트는 융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한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이 사실을 융에게 직접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융의 적대적 감정은 공공연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아마 프로이트라는 사람 개인에 대한 공격은 아니었을지언정, 그의 이론에 대한 공격성이었다. 실제로 융은 프로이트의 생각과 다른 논문을 출판하였고 이를 빌미로 프로이트와 절교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였다. 이 예를 마치 융은 프로이트의 옹졸함을 스스로 간파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 간의 interaction 을 고려해야 한다. 프로이트에게 융의 적대감은 질릴만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자연과학자들처럼 자신들의 사고를 객관성의 토대 위에 차려놓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면 서로 경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발견하는 것이며, 엄청난 "구라"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è 사실 무의식의 발견을 프로이트에게 선점 당한 후발 정신분석가들은 프로이트를 부정하고 그를 넘어서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결국 프로이트 학설의 변주에 불과할 뿐이었다. 융 스스로도 인정하였듯이 융은 프로이트를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른 융의 주장은 매우 적반하장이다. 프로이트를 존경하는 듯이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를 질투하며 왜곡되게 생각하고 (융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므로 의도적이라고 보긴 힘들다.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보고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사실 옹졸한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 자신은 그의 학설을 발전시킨 사람이므로 프로이트가 자신과 절교하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è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국 자신이 주창한 이론을 토대로 더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아류의 정신분석가가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자신의 인격을 의심하며 적개심을 저변에 깔고 있기 때문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특히나 초반에는 진심으로 친구라 생각하여 자신의 속내를 모두 말하였던 자가 실은 적개심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을 때(그가 "죽음"에 대해 말할 때면 그가 나를 죽이려고 든다 - 고 여겨질 만큼 표피로 체감되는 적개심) 어떻게 그런 작자와 절교를 선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è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예전에 친구들과 미팅을 한 적이 있다. 3:3 미팅이었는데, 주선자인 여자친구는 그 남자들 중 한 명(B)과 나를 이어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팅 장소에서 본 그 남자B는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고 나는 겨우 자리를 지키고 나왔다. 그런 후, 주선자에게 "그 남자분이 정말 멋지기는 한데 키가 작아서 잘 안될 것 같다."라고 핑계를 대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 미팅에 나왔던 다른 여자 A와 마음이 맞아서 사귀게 되었다. 이 때 이 여자A는 나에게 무척 미안해 했다. 그래서 B와 자신이 사귀는 것을 몇 개월 간 비밀로 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결코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 당시 나는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겨서 잘 지내고 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 B와의 연애가 나에게 밝혀지자 나에게 불필요하게 거듭 사과하여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나는 A B의 기분을 생각하여 놀라는 척 해주었고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A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그 미팅 자리에서 남들(나를 포함)이 보여주지 못한 명석함을 보여주어 B가 자신에게 반하였다는 것이다. , 그녀는 미팅 자리에서 나를 능가하는 매력을 펼쳐서 원래 남자 A의 짝으로 내정되어 있던 나를 제치고 A를 획득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지만 잠자코 있었다. A는 자신의 우월감을 충족시켜주는 이 인연을 끝까지 유지하였고 결국 A B는 결혼까지 하였다. 내 생각에 A는 죽을 때까지 나에 대해서 "미팅에서 나의 남자를 가지려고 하였으나 끝내 나에게 빼앗긴 루저"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융이 프로이트를 그렇게 추억하듯이.

 

201 프로이트는 여러 번 나를 그의 후계자로 보고 있다는 암시를 준 일이 있다. 이런 암시는 내게는 괴로운 것이었다.

 

202 "내 권위의 손상을 무릅쓸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순간 그는 바로 그 권위를 잃었다. 그의 이 말은 내 뇌리에 박혔다. 나로서는 그 말 속에 우리의 교분의 종말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적인 권위를 진실보다 위에 두고 있었다.

è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하는가? 프로이트 개인의 사생활을 밝히는 것이 보편적인 진실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 결국 가십만을 양상할 뿐이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겠다는 것이 어째서 진실에 대한 호도인가? 여기서 프로이트가 권위라는 말을 쓰지 않고 내 사생활이라고 하였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인가?

è 프로이트는 융을 믿지 않은 것뿐이다. 프로이트는 옳았다. 융은 프로이트를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있다. 진실을 말했더라면 융은 자신의 저술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운운하며 직접 다루지는 않을지 몰라도 결국 말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예시를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융은 프로이트의 권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친구라고 한다 해도 이런 말을 쓰지는 않을 것 같다.

è 사실 융이 프로이트에 대해 쓴 부분을 읽는 것이 상당히 거북했다. 내가 프로이트에게 감정이입을 너무 한 것일까?

 

206 꿈은 우리를 속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귀가 우리를 속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프로이트를 알기 훨씬 전에 나는 무의식과 꿈의 직접표현을 자연 그대로의 과정으로 간주하였다.

è 반대인 것 같지만, 잘 뜯어보면 프로이트 학설의 동어반복이다. 프로이트는 꿈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인데, 프로이트는 꿈에서 억제되어 있던 무의식이 풀려나온다고 하였다. 융의 용어로 쓰자면 "자연 그대로"일 테다. 융이 꿈이 우리를 속인다 - 는 말을 한 근거는 꿈의 "꿈작업"에 있다. 꿈작업이란, 직시하기에는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은 무의식을 적당히 돌려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꿈작업을 하는 대상이 꿈인가, 아니면 의식인가? 당연히 의식이 꿈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è 나의 소설 L K에게도 이 둘의 관계를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L = 프로이트

K =

L K에게 선의를 가지고 있고 K에게 자신의 지식을 모두 전수하지만 K L을 능가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끊임없이 L을 의심한다. 결국 K의 지적 제동에는 감정적 배경이 깔려있다는 것을 깨달은 L K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관계의 핵심은, K L에 대한 자신의 감정적 투사를 사실로서 맹신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야 한다.

 

 

7장 무의식과의 대면


220
무의식의 충동에 내맡기기로 하였다. 제일 처음 머리에 떠오른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

이 순간이 나의 숙명의 전환점이었다. 끝없는 주저 끝에 결국 나는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놀이를 하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데는 결코 적지 않은 체념과 자기 비하의 괴로운 체험이 따랐다.

è 이 놀이는, 알겠지만 융이 어린 시절 꿈꾸던 제2 성격의 세상이다. 맑은 호숫가. 시간이 정체된 영원한 곳.

è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단지 이름으로만 알던 인물들이 사실 얼마나 특수한 사람들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난중일기를 읽고 이순신을 인간으로 만나게 되었듯이.

 

225 감정을 상으로 번역하는 것, 즉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상들을 성공적으로 발견함에 따라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è 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진리의 모호함. 불편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융은 내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P227-229

è 융의 환상 - 매우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심상과 의미가 융합될 때 온다.

 

228 즉 자기의 의지를 영웅적으로 관철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의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도 그와 같은 것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는 그 이상 가능하지 않다. 꿈은 지그프리드로서 구체화된 영웅의 태도는 나에게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살해되어야 했던 것이다.

è 이번 내 칼럼 주제와 반대되는군. 결국, 나는 책에서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살해 행위 뒤에 나는 거센 동정심을 느꼈다. 마치 내 자신이 총에 맞은 것처럼. 이 속에 나의 영웅과의 남 모르는 동일시와 인간이 그의 이상과 자기 의식의 태도를 희생시키도록 강요도리 때 경험하는 고통과의 동일시가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영웅적 이상과의 동일시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거기에 순종해야 할 자아 - 의지보다도 높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è 그래도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지 알기 전까지는 자신의 의지대로 가야지. 의지가 항상 승리할 수는 없다는 것은 태고의 상식이다.

 

è , 영원한 것이 위대한가?

영원한 것들은 현재를 영원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천리마 위에 올라 탄 생쥐처럼. 죽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물리적 시간의 영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 속의 영원"을 의미한다. "죽으면 끝"이라는 급진적인 현세주의자(나 같은)라 할지라도 현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가 "영원한 가치"들이라면 추구할 필요가 있다.

융은 대표적인 도구로 "무의식"을 들었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은 곧 죽음을 의미하거나 죽음을 이어주는 도구인데, 생과 죽음이 연결되기 때문에 결국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다.

 

230 노인과 소녀의 결합

è 특이하군. 여기서 처음 보았다.

 

231 필레몬과 다른 환상은 나에게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그 스스로의 고유한 삶을 지니고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è 나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꿈 속에서 나는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진실과 지혜를 처음 말하는 대상과 마주하였고 그 때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꿈은 분명히 내가 꾸고 있는데 어떻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꿈 속의 상대가 말할 수 있는가?

è 굉장한 충격이었는데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도 충격이다. 융의 책 덕분에 과거의 경험이 되살아났다.

è 이 책은 미친 책 같다!

 

232 필레몬과의 대화에서 나와 나의 사고의 객체와의 차이가 분명해졌다. 또한 그는 나에게 이를테면 객관적인 자세를 취했다. 나는 내 속에 내가 알지 못하고 내가 생각지 않은 것들을 말할 수 잇고 심지어 나에게 적대적인 것들까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함을 이해했다.

심리학적으로 필레몬은 탁월한 통찰을 표현했다. 그는 나에게 신비로운 상이었다. 어떤 때는 그가 거의 신체를 지닌 실체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와 뜰을 오르내렸다.

è 대단히 아름다운 광경이다.

 

233 영혼의 구루도 있지요. 그는 덧붙여 말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구루로 삼지만 언제나 혼을 구루로 삼는 사람들이 있지요.

 

233 필레몬은 마비된 발을 지녔지만 날개 달린 혼이고 반면 카는 일종의 토귀, 혹은 금속귀를 묘사하고 있었다. 필레몬은 영적 측면, 의미지만 카는 이와 반대로 그리스 연금술의 안트로파리온 같은 자연령이었는데 이것을 나는 물론 당시에는 잘 몰랐다. 카는 모든 것을 현실화하는 바로 그것이지만 물총새의 영, 즉 의미를 베일로 둘러싸거나 그것을 아름다움, 영원한 반사광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è 의미가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베일과 대치가 필요하다.

 

234 내가 나의 환상을 적을 무렵나는 한 번 이렇게 자문하였다. "도대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내가 하는 일이 학문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 그것은 무엇이냐?" 이때 내 속에서 하나의 소리가 말했다. "이것은 예술이다." 나는 무척 놀랐다.

è 나는 예술이라는 말에 극적 희열을 느꼈다. 예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 융이 부정하였듯이 예술 그 자체는 아니다. 예술은 융의 작업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자유롭고 가벼운 그릇이다. 예술로 치부하는 것은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의 결핍을 보여준다. 대충 생각한 것이다.

è 융이 말한대로 "자연"인가? 융은 자연을 지나치게 좋아한다. 자연도 너무 넓다. 그냥 "정신" 아닌가?

 

238 삶을 대치할만큼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사실이 내게는 분명해졌다. … 왜냐하면 나는 전 세계가 아닌 이 세계, 이 생활을 원했던 것이다.

 

241 변칙적인 것이 없는 세계란 얼마나 황량한 것이랴!

 

246 만약 우리가 내적인 인격이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쓰라림은 사라져 버린다.

 

248 만다라 = 영원한 재창조

 

252 이 꿈은 그 당시의 나의 상황을 표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내게는 비에 젖어서 번질번질하는 회황색의 비옷이 눈에 선하다. 모든 것이 극도로 불쾌했고 깜깜하고 불투명했다. 그러나 나는 초속적인 아름다움의 환상을 보았고 비로소 나는 살 수 가 있었던 것이다. 리버풀은 "삶의 못"이다. "Liver"는 옛날 관점에 따르면 생명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è Liver + pool : Liver의 어원 연결 ~ Live 살다.

 

이 꿈의 체험은 나로 하여금 구극의느낌을 갖게 하였다. 나는 이곳에 삶의 목표가 묘사되고 있음을 보았다. 중앙이 그 목표이다. 인간은 중앙을 넘어서 갈 수 없다. 이 꿈을 통해서 나는 자기가 질서와 의미의 원리이며 원형임을 이해했다. 그 속에 병을 치유하는 기능이 들어 있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서 나는 나의 개인적 신화의 첫 힌트를 얻었다.

 

8장 나의 저작이 이루어지기까지

 

260 나는 연금술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상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264 내가 심리학을 위해서 하고자 한 것은 자연과학 영역에서 일반적인 에너지론이 성립되듯 그러한 통일성을 심리학에서도 형성하는 것이었다. ……

이를 테면 현대 물리학자가 모든 힘을 열에서만 유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자 역시 모든 본능을 성이나 권력의 개념 아래서만 분류할 수 없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초기에 행한 오류였다. 그는 뒤에 이를 자아본능이라는 가정으로 수정했고 더 뒤에 그는 초자아에 실질적인 최고의 힘을 부여했다.

è 이 설명이 전부라면, 나는 융의 가설 설정이 rough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단순하게 자연과학의 결과를 답습하였다. 에너지의 형태가 여러 개니 본능의 종류도 여러 개다. 단지 비유인 것인지 아니면 대전제와 전제의 관계인지

è 인간의 심리학은 자연의 속성과 달리 이미 "인간"이라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심리는 인간의 진화와 발생학에 근거를 두고 가설을 설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가 심리의 근간을 ""에 둔 것은 매우 적절한 가설 설정이었다. 이것을 무분별하게 종류 확장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 하나 검증이 필요하다.

 

265 비로소 나는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 자아의 무의식의 내용에 대한 관계에 의해서 정신의 변환과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è 변환과 발전. 종적 시간에 따른 일련의 "과정"이다.

 

266 그리스도와 연금술의 중심개념인 돌 사이의 유비성

è 그리스도의 중심개념이 돌인가? 어디에서 그런 내용이 나오지?

 

268 시대정신, UFO

 

273 하늘의 왕국을 위해서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è 직접적 표현이 아니며, 믿기 위해 뇌를 거세시켜 버린 사람을 의미.

 

274 욥은 일종의 그리스도의 선행형이었다.

è 완전히 이해된다.

 

욥은 신이 어떤 의미에서 신에 반해서 그의 편에 있어 주기를 기대한다.

 

278 자유를 위협하는 자를 위협할 수 없다면 그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9장 성탑

 

291 왜냐하면 자연은 조화롭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무섭도록 모순에 찬 혼돈인 것이다.

 

296 그러므로 장애의 원인은 사적인 환경에서 찾을 게 아니라 집단적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정신요법은 지금까지 이 문제를 너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298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이원성은 함께 내 자신 속에 들어와 하나의 사람이 되었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10장 여행

 

307 그러나 그 의식은 반성을 모른다.

è 아르키메데스와 비슷하다.

 

314 우리가 믿기로는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오.

나는 그에게 왜 백인이 모두 미친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지요."

 

317 태양은 신이다.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있다.

è 인디언의 입장에서 이는 옳은 것이다. 우리가 태양의 과학적 실체를 안다는 것이 태양의 신격화에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아마 신을 증명하게 된다면 신 역시 죽을 것이다.

 

330 그러나 원시사회는 무의식적인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로써 조절되고 있다. 이 양자는 매우 잘 충족되고 있다. 이렇나 무의식적인 질서는 한 번 장애가 일어나면 곧장 무너지고 만다. 그 때는 오직 의식의 작용에 의해서만 그 장애가 보상될 수 있고 또한 보상되어야 한다.

 

338 매우 아름다운 일출 광경

è 이렇게 밖에 쓸 시간이 없다.;;; 첫 햇빛의 거창한 분사.

 

343 꿈의 이와 같은 특이한 태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람들이 이미 겪은 경험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싸움터의 병사들은 전쟁에 관해서 거의 꿈을 꾸지 않고 고향에 관해 더 많은 꿈을 꾸었다. 정신과 군의관들은 어떤 남자가 전쟁의 관경을 너무 많이 꾸게 되면 그를 전선에서 빼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왜냐하면 외부로부터 오는 인상에 대항해서 아무런 정신적 저항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346 인도에서 성자를 만나는 것을 피함. 자신의 입장이 정해지지 않아서. 내게 속하는 것은 오직 내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뿐이다.

 

352 붓다와 그리스도의 비교

 

353 그대들은 신들이다! 요한 10:34

è 그리스도 모방의 한계

 

11장 환상들

 

366 나는 매우 실망했다.

è 죽음에 실패하여 실망함.

 

374 병을 앓은 뒤에 나는 비로소 자기의 숙명에 대하여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일어날 때도 좌절하지 않는 하나의 자아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자아, 참을 수 있고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있는 자아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또한 승리를 체험한다.

 

12장 죽음 뒤의 삶에 관하여

 

376 합리주의와 공리공론주의는 우리들의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한다.

 

377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인생이 현재를 넘어서 무제한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들은 이성적으로 살며 마음 편하게 잘 지내게 된다.

 

378 나의 가설은 우리가 무의식, 즉 꿈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è 알 듯도 하지만, 나는 사실 왜 무의식이 죽음과 연관되는지 모르겠다.

 

379 무의식과 신화를 우리가 의식화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삶을 통합할 수 있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 지배하에서는 개인이 빈곤해진다.

è 무의식과 신화가 곧 삶의 의미인가? 삶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 중요한 것이라는 조셉 캠벨의 주장이 더욱 명확하다.

 

385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나로부터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진짜 힘들어 죽겠다.

389 그러므로 나는 우리의 지성의 수학적 진술 이외의 다른 진술도 그 자신을 넘어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가리키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다. 나는 그런 표현의 예로서 일반적인 동의를 누리거나 무척 빈번히 출현되는 것을 특성으로 하는 상상형성이나 원형적 주제를 들고 싶다.

è 수학적 진술은 과학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수학과 수학적 진술은 다르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수학적 진술로 다룰 수 있다. 수학적 진술이란 그저 용어이자 도구일 뿐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만약 그러하다고 가정하자."라고 수학적으로는 얼마든지 표현 가능한 것이다.

 

396 재생의 관념과 뗄 수 없는 것은 카르마의 관념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한 인간의 카르마가 개인적인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397 나의 실존의 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하나의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바구어 말해서 내 자신이 하나의 물음이며, 이를 세계를 향하여 제기하고 있고 나는 나의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의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401 어떤 영혼은 삼차원적 실존의 상태를 "영원한" 존재보다 더 축복받은 존재로 느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그 영혼이 얼마나 그의 인간실존의 완전성 또는 불완전성을 저승으로 가지고 갔느냐에 달린 듯하다.

è 나의 경우에 해당한다.

è 융은 사고가 엄밀하지 못한 것 같다. 왜 일부 사람들에게 삼차원적 실존의 상태가 더 중요할까? 왜냐하면, 이들의 대전제는 저승이 없다는 것이 대전제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끝이다.

 

407 무의식에서 엄습해 오는 것에 관해서 무의식인 채 있ㅇ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 그의 과제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단순한 현존의 어둠에 불을 붙이는 것은 인간실존의 유일한 의미이다. 심지어 무의식이 우리에게 작용하듯 우리의 의식의 증가가 무의식에 작용하고 있음을 가정할 수 있다.

è 말을 어렵게 하려고 보면 어불설성을 만들어내게 된다. 현존의 어둠에 불을 붙이는 행위 = 이것이 바로 의미를 찾는 행위이므로, 의미를 찾는 일이 유일한 의미이다. 라는 이상한 말이 되어버린다.

 

13장 만년의 사상

 

411 인간이 판단하는 모든 것이 완전치 못하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견해가 늘 옳은옳은 것이 대한 회의를 갖게 한다. 우리도 잘못된 판단에 사로잡힐 수 있다. 윤리적 문제는 다만 우리가 도덕적인 평가에 불확실하게 느끼는 한 영향을 입는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412 어떤 것도 윤리적 결단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는 없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선악의 대극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è 유연한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418 그러므로 신의 상은 언제나 강력한 대자에 대한 내적인 경험의 투사이다.

 

422 약육강식에 대해서는 생물학적, 정치적 인류사에 너무나 많이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정신의 역사 다른 면을 보인다. 여기서는 성찰하는 의식의 기적, 2의 우주창생이 끼어든다. 의식의 의미는 너무나 커서 모든 무시무시한, 겉보기에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생물학적 사건 속의 어딘가에 의미의 요소가 숨어서 마침내 이것이 온혈동물과 분화된 뇌의 단계로 이르는 길을 우연처럼 발견했으리라는 추측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의도되거나 예견된 것이 아니라 "어두운 충동"에서 예감되고, 감득되고 탐지된 것이라 추측된다.

è 융의 오류 : 매우 비슷한 오류를 나는 하나 알고 있다. 바로, 진공에 관한 오류이다. 진공관이 처음 만들어 졌을 때 어떤 사람들은 진공관 안이 비어있다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반드시 어떤 물질이 채워져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è 정신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정신이 생겨나나?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겠지. 융은 여기서 헷갈려 하고 있다. : 정신이란, 이진법의 진화이다.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이들 사이에는 어떤 의도도 의지도 없다. 단지 존재한 것만 계속 존재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존재의 거듭승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은 어떤 성향을 가진 것들만 존재하게 된다. 존재의 속성, 이것이 발전되면 정신처럼 "보인다." 최초의 정신은 살고자 하는 정신. 그리고 이것이 결국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된다. 여기에는 어떤 기적도 필요없다.

è 고무적인 것은 융이 정신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신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24 또한 구약시대의 욥이 이미 터득하였듯이 본능이 우리를 도와주러 오고 신이 신에 대항하여 우리를 지지해 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è 신의 정신분열은 곧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 아닌가?

 

428 즉 개인적인 목표를 따르면서 동시에 집단성에 적응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경증적인 사람이 된다.

 

434 방사선 치료가 경우에 따라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 의사에게는 흥미를 끄는 사실이지만 반드시 물리학자의 관심을 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방사선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의학자가 그에게 방사선 투시의 해롭고 유익한 성질에 주의를 환기한다고 해서 그의 의복을 꿰매듯 그의 일에 쓸데없이 간여한다고 생각지도 않을 것이다.

 

435 생각해 낼 수 잇는 모든 이야기된 것들은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è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물질 이전에 정신이 우선한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지각해서 물질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è 융이 정확히 어떤 철학 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정신은 결코 자신을 뛰어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절대적 진리를 설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 고유한 양극성이 그의 주장의 상대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436
경험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나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정신적(영적)"이라 부르는 그런 존재형태의 지식도, 인식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과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거기 관해 믿는다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다. 나는 나의 무지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원형이 효력있게 작용하고 있음이 증명되는 한, 비록 내가 그 진정한 성질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나에게 진실이며 실재하는 것이다.

 

4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베일 뒤에서 우리에게 작용해 오고 영향을 주고 있으나 파악되지 않은 절대적 객체가 존재한다고 전제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아무런 현실적인 확인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경우, 특히 정신현상에서 그런 전제는 가능하다.

è 융은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논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è 이 논리를 나는 리처드 파인만의 전기에서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어린 나이의 리처드 파인만도 이 논리를 반박할 줄 알았다. 우리가 상대적 우위를 확인할 수 있고, 절대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절대적인 것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다.

 

14장 회고

 

446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십중팔구 양쪽이 다 진실이다. 즉 일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며 전투에서 이기리라는 애타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è 이 책에서 가장 의미있는 문장 중 하나이다.

 

447 내가 나에 관해서 불확실해지면 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밀감이 더욱 커진다. 그렇다. 내게는 마치 나를 이 세계에서 그토록 오래 유리했던 저 낯설음이 나의 내면세계로 옮겨와서 내 자신과의 예기치 않은 생소함을 나에게 현시한 것처럼 생각된다.

è 깨달음 끝에 낯선 나를 만난다.

è 학문의 끝에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 만큼이나 충격적이군.

 

 

 

 

 

 

 

 

 

 

 

 

 

 

 

 

 

 

 

 

 

 

 

내가 저자라면

 

자서전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책의 큰 구성 순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6장의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따로 다룬 부분에서 유독 프로이트의 영향력을 크게 느낄 수 있다. 그만큼 프로이트는 융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융은 대개 프로이트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그 비판의 강도는 학문적인 수준을 떠나서 프로이트가 살아 있었더라면 분명히 소송을 걸만한 인격적인 부분의 경계까지 건드리고 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나라면 함께 학문을 연구한 동료를 보호하려고 할 것 같다.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아서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없지만. 내가 아쉬워한 것은 만약 융이 프로이트를 전적으로 보듬었더라면 그는 정신을 분석해낸 천재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경지에 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책의 사상과 풍광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유독 프로이트의 장만 제외한다면.

 

저자에 대한 애정이 있을 때, 책의 내용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융이 아집을 버리고 보다 한 차원 높은 관용을 보여주었을 때 독자도 융을 더욱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내용의 개진은 물 흐르듯 하다. 책의 내용이 매우 훌륭하고 충격적 일만큼 창의적이다. 그러나 좀 두서가 없다.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융 스스로 발췌하여 네모 박스로 정리하거나 했더라면 더욱 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웠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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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19:07:05 *.154.223.199

하하하 레몬의 빨간 글씨!

 

이 책을 정말 좋아했나봐요. 레몬 생각을 많이 적어놓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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