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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6일 10시 15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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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는 우리나라 문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대학교 김재혁 교수의 책 <릴케와 한국의 시인들>을 보면, 릴케가 우리나라의 시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상세히 설명되어있다. 그 중에 몇 가지만을 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에 릴케 수용 초창기에는 직접 전달 된 것이 아니라, 일본어로 옮겨진 릴케가 우리나라에 전달 된 형태였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가 윤동주와 김춘수이다. 1930년대와 40년대 일본어 번역판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라는 그의 이름이 정확히 명시되어있으며, 김춘수의 경우, 몇몇 에세이에 그가 일본의 고서점에서 릴케의 시집을 사 보고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는 고백을 했다.

 

일본어를 통한 릴케가 아닌, 독일어에서 우리나라로 직접적으로 소개 된 것은 1930년대 박용철에 의해서였다. 그는 일본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는 <삼천리문학>이라는 문학동인지에 릴케의 시를 번역하여 소개했다.

 

릴케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때문이었다. 릴케의 문학에 내재되어있던 주제, 즉, 시대적 혼란 속에서 불안을 느낀 인간 존재의 실존적 상황이 당시 우리나라 시인들에게 공감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김춘수, 전봉건, 박양균에 의해서 이 시기에 작품들에 릴케의 시 세계가 녹아들어있다.

 

결정적으로 릴케가 우리나라 문단을 강타한 것은 바로 김수영 시인에 의해서 이다. 김수영시인은 하이데거가 쓴 릴케론인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 (Wozu Dichter?)>의 열렬한 칭송자였는데, 이 문장을 거의 암송 할 수 있을 만큼 읽었으며, 최근에 부인이었던 김현경 여사의 인터뷰에 의하면, 김수영 시인의 무덤에 바로 이 책을 넣어주었다고 한다. 어쨌건, 김수영 시인에 의해서 이 책은 1960년대 시인을 꿈던 사람에게는 이 책이 필독서였다.

 

김재혁이 쓴 책에는 흥미로운 비교가 있어서 눈길을 끈다. 너무나도 유명한 윤동주의 시, <서시>를 보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김재혁에 의하면 이 시에 있어서의 저자의 태도 즉, 도덕적 결의를 넘어선 종교적 신앙 고백의 차원으로 승화된 다짐은 릴케의 시 <강림절>에서도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겨울 숲에 바람이 휘몰아쳐

목동처럼 눈꽃송이를 몰아댄다,

전나무들은 모두들 저희들이 곧

경건하게 촉불로 밝혀질 것임을 예감하고

바깥쪽을 향해 귀 기울인다. 하얀길을 향해

나뭇가지를 힘껏 뻗고

바람을 맞아, 영광의

그 한 밤을 향해 자라오른다.

 

 

이 시 역시 릴케의 시집 <강림절>의 ‘서시’에 해당하는 시이다. 이 시를 통해 그들은 말한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풍경 속으로 나 있는 ‘길’이, 각각의 문학청년이 구도자적으로 따라가야 할 인생행로이며, 그 행로는 윤동주에게서는 ‘나’로, 릴케의 시에서는 ‘전나무’로 변용되어 있으며, 둘 다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구도자의 길을 가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고.

릴케의 이름이 명시된 그의 시, <별 헤는 밤을 보자>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쟘」 「라이너․마리아․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윤동주 <별헤는 밤>

 

이 시는 릴케의 다음의 시와 유사성을 보인다.

 

낮이 고요히 잠에 빠지면

나는 사람들 멀리 거닌다.

넓은 들판에 깨어 있는 건

나와 창백한 별뿐이다.

빛으로 짜인 별의 눈동자가

나의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저 하늘 높이 저 별은

여기 나처럼 외롭구나...

 --- <릴케 전집 1>, 115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구체적인 시어의 문제들이 어떤지는 여기에서 논하지 말자. 각자. 시를 읽고 느끼는 점들이 상이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윤동주나 릴케나 둘 다 하늘을 우러러 겸허한 자세로 이 세상의 보잘것 없는 사물들을 향해 허리를 구부리는 자세, 그리고 경건성과 유토피아와 길의 개념은 두 시인의 공통된 화재이다.

 

자. 그럼 이제 김춘수로 넘어가자. 김춘수의 경우, 좀 더 적극적으로 릴케의 사상을 인용한다. 그의 시, <릴케의 장(章)>을 보자.

 

세계(世界)의 무슨 화염(火焰)에도 데이지 않는

천사(天使)들의 순금(純金)의 팔에 이끌리어

자라가는 신(神)들,

어떤 신(神)은

입에서 눈에서 코에서

돋쳐나는 암흑(暗黑)의 밤의 손톱으로

제 살을 할퀴어서 피를 내지만

살점에서 흐르는 피의 한 방울이

다른 신(神)에 있어서는

다시 없는 의미(意味)의 향료(香料)가 되는 것을

라이너어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천사(天使)들이 겨울에도 얼지 않는 손으로

나무에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죽어간 소년(少年)의 등 뒤에서

또 하나의 작은 심장(心臟)이 살아나는 것을,

라이너어 마리아 릴케

당신의 눈은 보고 있다.

하늘에서

죽음의 재는 떨어지는데

이제사 열리는 채롱의 문(門)으로

믿음이 없는 새는

어떤 몸짓의 날개를 치며 날아야 하는가를.

 

그는 앞의 시와 같이 '릴케'라는 직접적인 이용을 하면서 시 창작을 하기도 하였지만, <릴케와 천사>, <릴케적 실존>, <릴케와 나의 시>와 같은 글들을 통해 그가 릴케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릴케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

 -- <릴케 전집 2>, 185

 

사실 시인 자신이 직접쓴 <묘비명>보다 깊은 개인적 고백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쓴 글이기에 <묘비명>에는 죽음에 대한 시인의 견해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릴케가 이 글을 썼을 당시 그는 병이 많이 진척된 상태속에 있었으며, 그로인해 정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은 그의 시적 삶을 이끈 사유 전반이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다음은 그의 묘비명에서 시상을 얻은 김춘수의 작품을 보자. 제목은 릴케의 묘비명과 유사하다.

 

<장미, 순수한 모순>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다만

눈을 감고 있다.

바다 밑에도 하늘 위에도 있는

시간, 발에 차이는

지천으로 많은 시간.

시간을 보지 않으려고 장미는

눈을 감고 있다.

언제 뜰까?

눈을.

시간이 어디론가 제가 갈 데를 다 가고 나면

그때 장미는 눈을 뜨며

시들어 갈까.

 

김춘수는 자아의 존재를 '장미'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장미라는 대상 속에 투영시켜 자기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시를 통해 그는 실제의 장미를 본 것이 아니라 그의 관념 속에 남아있는 장미와 릴케의 <묘비명>을 염두해 둔 것으로 풀이된다. 이 시를 통해 결국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생무상이다. '행방'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면서 이미 장미의 덧없음을 내세운다. 화려함 뒤에 오는 피할 수 없는 무상감이 뚜렷하다. 김춘수가 여러 곳의 관념으로부터 탈피를 하려고 하지만, 늘 관념의 테두리 안에 있음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이는 릴케의 그것과 은연중에 닮아있다고 짐작해도 좋겠다. 김춘수의 문학이 릴케 쪽으로 끌린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 외에 김현승, 전봉건, 김수영 등도 적극적으로 그를 수용하였다. 먼저 릴케의 <가을날>과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를 비교해 보자.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릴케 전집 1. <가을 날 >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사람을 채우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의 기도>

 

어떠한가.

놀랄만큼 유사하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언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

 

김재혁의 표현에 따르자면, 한국에서의 릴케의 의미는 때로는 박용철의 경우처럼 시적 창작 과정을 모범으로서, 또한 김춘수의 경우에서처럼 시인적 실존과 시적 변용의 구현자로서, 그리고 김현승의 경우처럼 시인으로서 절대고독을 추구해 간 하나의 전형으로서, 기대의 요구에 따라 그리고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며 이루어졌다고 한다. 릴케는 그때마다 하나의 프리즘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이에게 나름의 빛을 반사시켜주었다고 한다.

 

릴케의 삶은 오직 하나, '문학과 예술'에 바쳐진 삶이었다. 그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아닌 예술에 그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러기에 논란의 여지도있으나,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의 순수한 예술 세계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었다. 즉, 독일어로 씌여진 그의 시가 일본을 거쳐 한국의 시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것이다. 바로 그가 추구했던 순수한 작가 정신이 언어를 넘어 전 세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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