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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8일 02시 26분 등록
 

사기열전 2

사마천 지음/ 김원중옮김/ 민음사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중국 역사학의 아버지)

저는 천하의 산실된 구문(舊聞)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 그러나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과 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이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마천, ‘임안에게 보낸 편지’(報任安書) 중에서)

 시대적 전환의 한 가운데에 처한 역사가 사마천

오랜 분열의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시킨 진(秦) 제국은 강권통치에 바탕을 둔 급격한 통일책이 실패로 돌아가며 무너졌다. 최후의 승자 한(漢) 고조 유방은 진 제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파란을 피하고 안정에 치중했다. 무위(無爲)를 중시하는 황노(黃老)사상이 전한(前漢) 초기를 특징짓는 이념이었다. 제7대 황제 무제(武帝) 유철(劉徹, 재위 기원전 141~87)은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무제는 흉노를 비롯한 주변 민족들을 공격, 압박하고 서방 교통로를 확보했으며 국내 제후의 권력을 사실상 소멸시키고 민간의 유력자들을 억압하며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이 국가 재정 위기를 초래하자 소금과 철에 대한 전매 제도를 시행하고 증세를 단행함으로써 백성의 부담이 무거워졌다. 무제는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시키면서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고, 유교를 국가공식이념으로 중시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법가사상에 바탕을 두어 통치했다.

 무제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등용된 인물들은 지방에서 추천된 인재들 가운데 황제 자신이 선발한 새로운 관료 집단이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른 개인적 판단을 중시하며 법률의 유연한 적용을 지향하던 예전의 통치방식 대신 법률을 엄정하게 적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 사상적 변화를 무제 시대의 관료로서 직접 겪은 사마천은 새로운 전환의 시기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면서 먼 과거로부터 무제 시대에 이르는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 지역까지 포괄하는 역사, 곧 [태사공서(太史公書)]를 서술했다. (후한 시대부터 [사기(史記)]로 불림)

 [사기]의 체제, 중국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세계질서관

당나라 사마정의 ‘사기색은(索隱)’, 장수절의 ‘사기정의(正義)’, 송나라 배인의 ‘사기집해(集解)’가 적혀 있다. 이 세 가지 중요하고 기본적인 주석을 일러 삼가주(三家註)라 한다. <출처: Wikipedia>

 이른바 기전체(紀傳體)의 통사(通史)인 [사기]는 130권, 52만 6,500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체제는 지배자 또는 지배 왕조의 일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본기(本紀) 12권, 연표와 월표를 구사하며 다양한 사항의 변화를 포착하여 보여주는 표(表) 10권, 정치사가 미처 포괄하지 못한 문화, 제도, 경제, 교통, 제사 등에 걸친 사항을 다룬 서(書) 8권, 제후 왕들과 그에 준한다고 판단한 인물들의(예컨대 ‘공자세가’) 역사와 전기를 다룬 세가(世家) 30권, 다양한 분야에 걸친 주목할 만한 개인들의 일대기와 주변 민족들의 역사를(예컨대 ‘조선전’) 다룬 열전(列傳) 70권 등이다. 또한 각 편이 끝날 때마다 ‘태사공왈’로 시작하는 사마천 자신의 짧은 평론이 실려 있다.

[사기]의 체제에서 본기, 세가, 열전은 그 순서대로 하나의 위계적 동심원을 이룬다. 어떤 의미에서 [사기]의 체제는 중국의 황제, 제후 왕, 그리고 개인과 주변 민족으로 구성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 세계질서관 그 자체인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중화(中華) 중심주의적 세계관 또는 화이(華夷) 이분법적 틀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예컨대 그는 흉노에 대해 ‘음습하고 불길한 땅에 사는 호전적인 야만인’으로 지목하며 오랑캐로 규정했다. 이에 관하여 건국 이래 지속적으로 흉노의 압박에 밀리다가 드디어 황제국가의 이념, 즉 하늘 아래 만방이 모두 황제 일인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는 이념을 현실에서 추구할 수 있게 된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살았다는 점도 감안해볼 수 있겠다.

치욕 속에서도 굳게 지킨 역사가로서의 사명감

사마천은 제6대 황제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기원전 145. 다른 주장도 있음)에 오늘날의 섬서(陝西) 성 한성(韓城)현에서 태어났다. 10살 무렵 고문(古文)을 깨우치고 10대 초부터 강남, 강북의 여러 지방을 두루 편력한 뒤 산동과 하남을 거쳐 수도 장안에 들어가 낭중에 임명됐다. 이후 황제의 명으로 사천 지방에서 운남의 곤명까지 여행을 하는 등 중국 각지를 돌며 특히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많은 곳을 방문했다. 이러한 경험이 [사기] 편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결코 문헌자료만 파고드는 책상물림의 역사가가 아니었다.

기원전 110년 무제가 천지(天地)에 제를 거행하는 봉선(封禪) 의식을 위해 태산을 방문했을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고 황실 전적을 관리하는 태사령(太史令) 벼슬에 있던 아버지 사마담은 낙양 땅에 머물다가 봉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를 깊이 한스럽게 여긴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운남에서 급히 돌아온 사마천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역사서 편찬의 꿈을 잇고자 결심했다. 3년 상을 치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황실의 장서를 이용하여 역사서 편찬에 착수했다. 기원전 99년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마천은 이릉의 입장을 변호하다가 투옥되어 이듬해 궁형, 즉 생식기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았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사마천은 그러나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굳건히 하며 편찬 작업에 전념했다.

사마천의 역사관, 왕조의 성쇠(盛衰)와 문명의 순환

사마천이 역사를 쓸 때 늘 모범으로 의식했던 것은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춘추(春秋)]였다. [춘추]는 공자의 고국 노나라의 연대기에 바탕을 둔 텍스트로, 역사상 사건과 인물에 대한 가치 판단을 미묘하면서도 간결한 필치로 보여준다. 사마천 당시에는 공양학파의 [춘추] 해석이 가장 유력했는데, 공양학파의 대표적 인물 동중서(董仲舒)에게 배운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사상을 담으려 했다. 이에 따라 [사기]는 단순히 역사 사실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현실 사회에 대한 사마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이다. 엄정한 현실 비판을 통해 사마천은 자신의 이상(理想)을 드러내려 했다.

사마천은 각 왕조의 역사를 최전성기에서 쇠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중도에 일시적인 중흥기가 있기는 하지만 성(盛)에서 쇠(衰)로 하강선을 그린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탁월하고 영웅적인 인물이 나라를 세우고, 우둔하고 무능력한 황제에 의해 쇠락의 길을 걷다가 폭군에 의해 멸망하는 패턴이 하(夏), 은(殷), 주(周), 이른바 삼대(三代) 왕조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왕조 성쇠의 요인이 황제 한 사람의 도덕적 기질과 능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사마천은 하, 은, 주의 정치와 문화의 특질을 각각 충(忠), 경(敬), 문(文)으로 파악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퇴락하면서 그 각각이 야(野. 조야함), 귀(鬼. 미신), 시(僿. 경박함, 허식) 등으로 변했다고 판단했다.

요컨대 하는 충에서 야로, 은은 경에서 귀로, 주는 문에서 시로 변화한 역사라는 점에서 그 내용은 달라도 패턴은 같다고 본 것이다. 결국 전(前) 왕조의 퇴락하고 부패하는 정치와 문화 상황을 다른 이념으로 대체시킴으로써 극도의 쇠락에서 극도의 번성으로 극적 전환을 이루는 것이 왕조 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관에 따른다면 왕조의 교체는 단순한 왕가(王家)의 교체로만 볼 수는 없으며 정치와 문명의 양식과 본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역사적 요청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이 된다. 사마천은 삼대(三代) 순환설과 함께 문질(文質) 교대설도 언급했다. 문(문화적 꾸밈, 세련됨)과 질(조야함, 질박함)이라는 상반되는 특질이 교대로 출현한다는 것으로, 문명의 전체적 특성 전환을 말한다는 점에서 삼대 순환설과 궤를 같이한다. 역사를 문명적 순환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이후 중국의 역사관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하늘의 도(天道)는 과연 옳은가 그른가?, 유교적 세계관과 질서에 대한 의문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려는 것을 만류하는 간언을 하다가 용납되지 않자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먹다가 굶어죽었다는 백이와 숙제의 일을 기록한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의 심경과 생각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도(天道)는 사사롭지 않고 늘 착한 이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그들은 행실이 그토록 고결해도 굶어죽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안연이라 했지만, 안연은 자주 궁핍하여 굶주리다가 끝내 요절했다. … 극악무도한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 먹었으며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포악방자하게 천하를 횡행했지만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 이른바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是邪非邪)?”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적군에 투항한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이라는 치욕을 당한 사마천 자신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을 철학적,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도덕과 행복의 관계 문제에 해당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도덕과 행복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의 도, 하늘의 이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한다. 인과응보의 내세관을 지닌 불교나, 공과를 심판하는 하늘의 주재자가 있는 도교라면, 도덕적으로 살면서 불행을 당한 이는 내세에서 복락을 누린다고 답할 수 있겠지만,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념에 따른 천도(天道)는 도덕과 행복의 일치 문제에 대한 답이 궁하다. 천도에 대한 사마천의 의문은 유교적 예교 질서 자체에 대한 의문을 함축하고 있다.

 <표정훈 (저술가, 번역가>작성/ 출처 네이버 캐스트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문장들

36. 장승상열전

***한나라 초기 황제 곁에서 보좌하면서 제국의 기틀을 이바지한 승상과 어사대부에 관한 열전이다. 한나라 때는 아버지의 공덕이나 황제의 사사로움 감정에 의해 승상이나 황후를 책봉햇지만 결코 재능에 다라 적재적소에 이명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수록된 장창, 주창, 신도가 등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아부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직간으로 의(義)를 지킨 인물들이다.


37. 역생 육가열전

****고조의 모신이 된 역이기와 육가, 그리고 초나라의 모사 주건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역이기는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제나라 왕과 재상을 설득하여 제나라의 성 칠십여개를 손아귀에 넣을 만큼 담력과 지력과 말솜씨를 겸비한 인물이다.

육가는 진한 시대의 저명한 책사로서 고조의 참모가 되어 태중대부 지위가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두 차레에 걸쳐 남월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남월왕 위타가 한나라를 섬기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59P)


왕노릇하는 자는 백성을 하늘처럼 여긴다

****“신이 듣건대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의 일을 이룰 수 있고,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왕의 일을 이룰 수 없다. 왕 노릇하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64P)


***역생이 제나라 왕에게 말했다.

“왕께서 천하의 마음이 어디로 돌아갈지를 아신다면 제나라를 보존할 수 잇지만 천하의 마음이 어디로 돌아갈지를 모르신다면 제나라를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나라 왕이 물었다.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돌아가겠소?”

역생이 답햇다.

“한나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제나라 왕이 말했다.

“선생께서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시오.”

역생이 대답했다.

“한나라 왕과 항왕은 힘을 합쳐 서쪽으로 나아가 진나라를 치면서 먼저 함양으로 들어가는 자가 욍이 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한나라왕이 먼저 함양으로 들어갓지만 항왕은 약속을 어기고 함양을 주지 않고 한중 지역으 와으로 삼았습니다. 게다가 항왕은 의제를 내쫓아 죽였습니다.......

한나라는 성을 차지하면 그곳의 장수를 후로 봉하고 재물을 얻으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천하 사람들과 이익을 함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웅, 호걸, 현인, 재사들이 모두 한나라 왕에게 기꺼이 쓰이고자 합니다. 제후들의 군사가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며, 촉나라와 한나라의 곡식을 실은 배가 나란히 장강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왕은 약속을 어겼다는 악명과 의제를 죽여 의리를 저버렷다는 죄를 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공로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는 잊는 일이 없습니다. 싸워 이겨도 상을 주지 않고 성을 함락시켜도 봉읍을 주지 않습니다. 또 항씨의 일족이 아니면 중요한 자리에 앉을 수 없으며, 사람을 봉하기 위해서 후의 인(印)을 새겨 넣고도 아까워 손에서 닳아 없어질 때까지 주지 못합니다. 성을 공격하여 재물을 얻어도 샇아 두기만 할 뿐 상으로 주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은 그에게 반기를 들었고, 어진 사람과 재능있는 선비들은 그를 원망하며 그를 위하여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선비들이 한나라 왕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앉아서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천하의 제후들 중에서 뒤늦게 한나라 왕에게 항복하는 자는 먼저 멸망할 것입니다. 왕께서 서둘러 한나라 왕에게 항복한다면 제나라의 사직은 지킬 수  있지만, 한나라 왕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선 채로 멸망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66~68P)

☆☆☆기업하는 이들도 한왕과 항왕의 에피소드를 귀기울여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말 타고 천하를 얻었다 하여 말 타고 다스릴 수는 없다

***육생(육가)은 황제 앞에 나아가 말할 때마다 <시경>과 <상서>를 인용햇다. 그러자 고조는 육가를 꾸짖으며 말햇다.

“나는 말 등에 올라타 천하를 얻었소. 어찌 <시경>과 <상서> 따위를 쓰겠소.”

그러자 육생이 말했다.

“말 등에 올라타 천하를 얻었다고 하여 어찌 말 등에 올라타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옛날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무력으로 정권을 얻엇지만 민심에 순응하여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와 같이 문(文)과 무(武)를 함께 쓰는 것이 나라를 길이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옛날 오나라 왕 부차와 지백은 무력을 지나치게 쓴 탓에 멸망하였고 진나라는 형법만을 쓰고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조씨는 멸망한 것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 한 뒤에 인의를 행하고 옛 성인을 본받았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73P)

☆☆☆말등에 올라타고 있을 수록 자신을 겸허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생김새로 판단하면 인재를 잃기 쉽다

***역생은 군문 앞까지 가서 명함을 내밀고 이렇게 말했다.

“......패공을 뵙고서 천하의 큰일에 대한 계책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자가 들어가서 아뢰자 발을 씻고 있던 패공은 사자에게 물었다.

“정중히 거절하고 ‘나는 지금 천하를 평정하는 일로 바쁘기 때문에 선비를 만날 틈이 없다’라고 전해라.”

그러자 역생은 눈을 부릅뜨고 칼을 만지며 사자에게 호통을 쳤다.

“빨리 들어가서 패공께 나는 고양의 술꾼이지 선비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역생이 들어와 패공에게 읍하고 말했다.

“당신은 고생이 많으십니다. 옷을 따가운 햇빛에 쪼이고 관을 비바람에 적셔 가며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도와 의롭지 못한 진나라를 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찌하여 자신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신은 천하의 큰일에 대한 계책을 가지고 뵈려고 했는데, ‘나는 지금 천하를 평정하는 일로 바쁘기 때문에 선비를 아직 만날 틈이 없다’라고 하셧습니다. 당신은 천하의 큰일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려고 하면서 생김새로 그 사람을 판단하니 천하의 재능있는 선비들을 잃을 것입니다. 또 신은 당신 지혜가 신만 못하고 용맹도 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천하의 큰일을 이루고자 하면서 신을 만나보러 하지 않는다면 신은 당신이 인재를 잃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패공은 사과하며 말했다.

“아까는 선생의 차림새가 거창하다는 말만 들었는데 이제 선생의 마음을 알았소.”

그러고는 역생을 맞아들여 자리에 앉힌 뒤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병법을 물었다.

☆☆☆자신에 대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세상은 몰라준다. 안으로 실력을 쌓았으면 자신을 세상에 쓰일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제 2의 인생을 위하여 새로운 일을 하려는 사람들, 특히 면접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면접을 보러갔을 때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면접관은 차별화해서 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인재라고 믿는 그 마음엔 그만큼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38. 부, 근, 괴성 열전

이 편은 한나라 고조 곁에서 보좌한 신하 세 명에 관한 전기를 다룬 것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양릉 후 부관과 신무후 근흡은 모두 높은 직위에 올랐다. 이들은 고조를 따라 신동에서 일어나 항우를 치고 명장을 죽였으며 적군을 깨드리고 성을 함락시킨 것이 수십차레이지만 곤욕을 치른 일이 없엇으니 이 또한 하늘이 내린 복이다.

괴성후 주설은 마음이 곧고 바르며 의지가 견고하여 의심받은 일이 없었다. 고제가 직접 싸움터로 나갈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마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는 것과 같았다고 하니, 성실하고 정이 깊은 군자라고 할 수 있겠다.“(92P)


39. 유경, 숙손통 열전

유경과 숙손통은 한나라 건국 초기에 유방을 도와 시국을 안정시키고 제도를 만들었으며 정권을 튼튼히 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사마천이 그들의 열전을 설정한 까닭은 그들의 시대적 역할을 긍정한 것이다.

고조는 천하를 평정하자 낙양에 도읍을 정하여 주나라 왕실과 융성함을 다투고자 했다. 그러나 유경은 주나라는 이미 덕화(德化)로 성공했고 한나라는 패도롤 천하를 얻었으니 결코 주나라에 비유해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간언했다.

숙손통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아 진나라 때는 박사를 지냇다가 항량과 항우를 따랐으며 항우가 패방한 뒤에는 유방에게 투항했다. 그는 한나라 초기의 대유학자다운 면모를 보엿고 조정의 예의 제도에 정통하였다. (91P)


선비와 천하를 얻지는 못해도 이룬 것을 지킬 수는 있다

***하나날 5년에 천하를 모두 손에 넣자 제후들이 다같이 정도에 모여 한나라 왕을 황제로 추대했는데, 숙손통이 그 의식의 예절 및 군주와 신하의 직책상 호칭을 정하였다. 고조는 진나라의 복잡한 의례를 모두 없애고 간편하고 쉽게 만들었다.

숙손통이 말햇다.

“선비들은 함께 나아가 천하를 얻기는 어렵지만 이루어진 사업을 함께 지킬 수는 있습니다. 바라건대 노나라의 선비들을 불러들여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정하도록 해 주십시오.”

고조가 말했다.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소?”

숙손통이 말햇다.

“예법이란 것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다라 간략하게 할 수도 있고, 꾸밀 수도 있습니다. 바라건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법을 합쳐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도록 해 주십시오.”

고조가 말했다.

“한번 만들어 보시오. 그러나 사람들이 알기 쉽게 하고, 내가 실천할 수 있도록 고려해서 만드시오.”(108P)


태사공은 말한다.

“옛말에 ‘천금의 갖옷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털만으로 만들어 진것이 아니고 높은 누대의 서까래는 한 그루의 나뭇가지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하, 은, 주 세대의 성대함은 선비 한 명의 지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진시로 이와 같구나.

고조는 미천한 신분에서 떨쳐 일어나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계책과 용병술이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경의 수레 끄는 가로막대를 내던지고 도읍을 옮기도록 역설하여 만대의 편안함을 이루었으니 지혜라는 것이 어찌 한 사람의 전유물일 수 있겠는가?

숙손통은 세상에서 쓰이기를 바라고 당시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하여 의례를 제정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를 시세의 변화에 맞추어 바꿔서 마침내 한나라 유학의 종정이 되었다. ‘너무 곧은 것은 굽어 보이고 길은 본래 꾸불꾸불하다’라고 한 것은 이런 것을 말한 것이다.

참고) ‘너무 곧은 것은 굽어 보이고 길은 본래 꾸불꾸불하다’ 이 말은 <노자>45장에 나온다. 숙손통이 곧은 마음과 강직한 성품으로 일하면서도 그 본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가슴 깊숙이 숨겨두며, 형세를 보고 변화에 응하면서 황제 마음에 들게 말을 하여 수월하게 자기 의도대로 일한 것을 칭찬한 것이다. (112P)


40. 계포, 난포 열전

계포는 항우의 용감한 장수로 여러 차례 유방을 곤경에 빠뜨렸다. 항우가 멸망한 뒤 유바잉 현상금을 내걸고 그를 체포하려 햇으므로 복양의 주시라는 사람 집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주시는 이 사실을 두려워하여 그를 노비로 꾸며 주가에게 팔았다. 주가는 계포의 인물된\a을 알아보고는 밭 차고에 숨겨놓고 낙양으로 수례를 달려 등공을 마난 고조에게 계포를 용서하도록 설득하여 혐의를 풀어주었다.

난포는 팽월과 친구 사이다. 고조는 여후가 팽월을 참소하자 그를 죽여 낙양의 성문 아래에 목을 내걸고는 그를 보러 오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체포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난포는 서슬 퍼런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서 살펴보았으니 친구에 대한 그의 깊은 우정을 엿볼 수 있다. 고조는 그 의를 장하게 여겨 사면하였다.

사마천이 굽힘으로써 뜻을 펼친 게포와 죽음을 무릎쓰고 의를 좇아 이름을 얻은 나포를 합쳐 놓은 것은 다른 길을 통해 뜻하는 바를 이루는 경우를 선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함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 두 사람의 경우를 들어 자가 자신의 인생관과 생사관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113P)


치욕을 참아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난포는 효문제 때 연나라 재상이 되었다가 장군까지 이르렀다. 난포는 드러내 놓고 말했다.

“힘들 때 치욕을 참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고, 부귀할 때 듯대로 하지 못하면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일찍이 치욕을 참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고 부귀할 때 뜻대로 하지 못하면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125P)


***태사공은 말한다.

‘항우가 기개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계포는 용감함으로 나라에서 이름을 드날렸으며,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서 적군을 소멸하고 적기를 빼앗았으므로 장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형벌을 받고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으니 얼마나 그 자신을 낮춘 것인가! 그는 분명 자기 재능을 펼친 곳이 있기를 바랐으며 결국 한나라의 명장이 되었던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진실로 자기 죽음을 귀중히 여긴다. 저 비첩이나 천한 사람이 분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없고, 그들이 바라는 것을 실현할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125P)


41. 원앙 조조열전

원앙은 강직한 성품으로 간언을 일삼은 인물이다. 그의 간언은 황제의 귀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강후, 조동, 조조, 양왕 등 정적이 적지 않았다. 그는 결국 양왕이 보낸 자객의 손에 죽었으니 너무 강하면 천수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인가 보다.

조조는 지혜주머니로 불리며 경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경제는 조조를 매우 아꼈으나 일곱 나라가 모반했을 때 조조의 처신과 계책을 문제 삼아 저잣거리에서 그를 죽였다. 예로부터 무도한 임금이 많아지면 성현은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기자의 은둔살이나 접여의 미치광이 노릇, 범려와 장량의 은둔이 그러했으니 조조가 모반에 관여하지 않고 분수를 지키며 살았더라면 천수를 누렸을 것이다. (127P)


부잣집 아들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다

****문제가 패릉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달려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때 원앙은 타고 있던 말을 황제의 수레 옆에 대고는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황제가 말했다.

“장군은 두렵소?”

원앙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천금을 가진 부잣집 아들은 마루 긑에 앉지 않고 백금을 가진 부잣집 아들은 난간에 기대어 서지 않으며 현명한 군주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페하께서는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달려 험준한 산비탈을 내려가시려고 하는데, 만일 말이 놀라 수레가 부숴지기라도 한다면 페하깨서는 자신을 가볍게 여긴 것이라 치더라도 종묘와 태후는 무슨 낯으로 대하시겠습니까?”

그래서 황제는 달리려는 생각을 거두었다. (134P)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 재앙이 닥친다

***원앙이 말했다.

“.....페하께서는 대(代)에서 오신 이래로 조회를 할 때 낭관이 상소를 올리면 용련(황제나 황후가 타는 수레)을 멈추고 받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견 중에서 쓸모없는 것은 버리고 쓸만한 것은 받아들이시면서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천하의 어진 선비를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페하께서는 날마다 듣지 못했던 것을 들으시고 일찍이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어 날이 갈수록 지헤로워졌습니다. 그런데 공께서는 스스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림으로서 날로 더욱더 어리석어지고 게십니다. 현명한 군주가 어리석은 승상을 문책하신면 공이 화를 받을 날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승상은 이 말을 듣고 원아에게 두 번이나 절하고 말했다.

“나는 미천한 시골사람이라 아는 것이 없으니 장군께서 가르쳐주시면 다행이겠소.”


노름꾼도 사귈만한 가치가 있다

***낙양의 극맹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원앙의 집에 들른 적이 잇는데 원앙이 그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러자 안릉의 어떤 부자가 원앙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극맹이 노름꾼이라고 들었는데, 장군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그런 사람과 가깝게 사귀십니까?”

원앙이 말했다.

“극맹은 노름군이기는 하나, 그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장례에 참석한 손님의 수레가 천 대도 넘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위급한 경우가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하루 아침에 급한 처지에 놓여 찾아가서 문을 두들릴 때 부모님이 계시다는 핑계로 도와줄 수 없다고 하거나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따돌리지 않고 천하 사람들에 우러러보며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계심과 극맹뿐입니다. 지금 당신은 언제나 말 탄 시종 몇 명을 데리고 다니지만 일단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찌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원앙은 그 부자를 꾸짖고 왕래하지 않았다. (142~143P)


종묘 사직을 위하다 죽은 조조(鼂鏪)

****조조는 사람됨이 준엄하고 강직하며 냉정했다. 효문제 때는 <상서>를 배운 사람이 없었다. 태상은 조조를 복생의 집으로 보내 그것을 배워오도록 했다. 조조는 뒤어난 말재주로 태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태자궁에서는 지혜주머니로 불렀다.

효문제 때 그는 제후들의 봉토를 줄이는 문제와 개정해야 할 법령에 대해서 수십 번 글을 올렸다. 효문제는 조조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탁월한 재능만은 인정하여 중대부로 승진시켰다. 당시 태자는 조조의 계책에 찬성햇지만 원앙을 비롯한 여러 공신 중에는 조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144~145P)

참고)상서(尙書):한대(漢代) 이전까지는 '서(書)'라고 불렸는데, 이후 유가사상의 지위가 상승됨에 따라 소중한 경전이라는 뜻을 포함시켜 한대(漢代)에는 《상서(尙書)》라 하였으며, 송대(宋代)에 와서 《서경(書經)》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상서》와 《서경》 두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우(虞),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역사적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서가 분서갱유로 소실되자 한(漢) 문제(文帝) 때 진(秦)에서 박사를 지낸 복생(伏生)이 상서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한 왕실에서 유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조조(晁錯)를 보내 배워오게 했다. 복생은 조조에게 29편의 상서를 전해주었고 조조는 상서를 당시의 문자체, 즉 금문으로 받아썼는데, 이것이 바로 금문상서이다.


****조조는 어사대부로 승진한 뒤 제후들 가운데 죄를 짓거나 허물이 있는 자의 봉토를 줄이고 변방에 있는 군을 몰수하도록 주청하였다.

조조가 개정한 법령은 삼십 장(章)이나 되었는데 제후들은 한결같이 반대하며 조조를 미워하였다. 조조의 아버지가 그 소문을 듣고 영천에서 올라와 조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즉위하실 때부터 네가 권력을 쥐고 정사를 처리하면서 제후들의 봉토를 줄이고 다른 사람의 골육 사이를 멀어지게 하여 너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자가 많다.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조조가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햇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는 존졍을 받을 수 없고 종묘는 편안하지 못합니다.”

조조의 아버지가 말했다.

“유시는 편안해졌지만 조시는 위태로워졌으니 나는 너를 떠나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고는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귾었다. 그는 주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재앙이 나에게까지 이르는 것을 나는 차마 볼 수 없다.”

그가 죽은 지 십여 일만에 오나라와 초나라 등 일곱 나라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조조를 죽인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때 두영과 원앙이 조정으로 나아가 황제를 설득하니 황제는 조조에게 조복(朝服)을 입히고 동쪽 저자에서 그 목을 베도록 명령했다. (146~147P)

☆☆☆일을 도모함에 있어 남의 원한을 사면서까지 하지 않아야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자신의 위태로움도 모르고 물불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간 목숨을 잃을 수가 있다.

그래서 개혁은 힘들고 많은 위험변수를 안고 있는 것이다. 조조는 자신의 지위를 믿고 변혁을 꾀하다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


제후들의 세력이 강해지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린다

***등공이 경제(효문제의 아들)에게 말했다.

‘조조는 제후들의 세력이 강대해지면 통제할 수 없을 까 봐 염려하여 그들의 봉토를 줄이도록 요청해 나라의 존엄을 높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만세에 걸친 이익을 도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겨우 시행되었을 때 조조는 느닷없이 극형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안으로는 충성스러운 신하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제후들을 위해서 그들의 원수를 갚아 준 골입니다. 신은 그것이 폐하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경제는 한동안 아무 말없이 있다가 말했다.

“공의  말이 옳소. 나도 후회스럽소.”(148P)


***태사공은 말한다.

조조는 가령으로 있을 때부터 여러차례 나랏일에 관한 의견을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법을 많이 고쳤다.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대 서둘러 해결하지 않고 사사로운 원한을 갚으려다가 도리어 자기 몸을 망치고 말았다. 옛말에 “옛것을 바꾸고 습관화된 도리(常)를 어지럽히는 자는 죽지 않으면 망한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조조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149P)


42. 장석지, 풍당열전

이 편은 한나라 문제 때의 강직한 신하 장석지와 풍당의 전기이다. 장석지는 문제 때 정위라는 관직에 올라 법을 공정하게 적용하고 직간하였으며, 풍당은 문제에게 장수기용에 대해 간언하였다.

예로부터 아첨하는 신하는 많아도 직간하는 신하는 적으므로 군주는 날로 오만해지고 자기 허물을 알지 못하니 그 피해가 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들의 직간을 받아들여 말년에는 과실이 주고 결국에는 현군으로 평가받았다. (151P)


탐나는 물건이 있으면 무덤 속까지도 도둑이 든다

***“만일 그 속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넣어둔다면 남산(南山)으로 겉관을 만들고 쇠를 녹여 틈을 막을지라도 꺼낼 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넣지 않는다면 돌로 만든 관을 쓰지 않더라도 무슨 걱정을 하겟습니까?” (157P)


공정한 법만이 신뢰를 얻는다

***정위는 임금이 행차하는 길을 범하였으므로 그 죄는 벌금형에 해당된다고 판결하였다. 효문제는 화를 내며 말햇다.

“이놈이 직접 내 말을 놀라게 했소. 내 말이 온순하였기 망정이지 다른 말 같았으면 나를 떨어뜨려 다치게 하였을 것이오. 그런데 정위는 그놈의 죄가 벌금형에 해당된다고 말하시오?”

장석지가 말했다.

“법이란 황제와 천하 사람들이 다 같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법에 의하면 이와 같이 하면 되는데 고쳐서 더 무거운 벌로 다스린다면 백성이 법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황상께서 그 자리에서 그를 베어 버리라고 하셨으면 그만입니다.

정위는 천하의 법을 공정하게 다스리는 자리인데 한쪽으로 기울면 천하의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다 제각기 법을 무겁게도 하고 가볍게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은 그들의 손과 발을 어느 곳에 두겠습니까?“(158P)

☆☆☆이미 한나라 때부터 법은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임금에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특권층에게 많은 면죄부를 주고 있다. 법이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데 나라가 어떻게 바로 서겠는가? 부호들과 권력층에게 특혜를 준다면 힘없는 서민들은 법에 기댈 수가 없다. 경제사범 혹은 정치사범들 중에는 들어갈 때는 걸어서 들어가는데, 얼마 후에 보면 휠체어를 타고 법정을 나온다. 우리나라만의 특이한 풍경이다.


43. 만석, 장숙열전

장숙은 문제, 경제, 무제  세 대를 섬겨 어사대부까지 올랐다. 여기에 위관, 직불의, 주인(周仁) 등 세 사람의 사적을 덧붙여 실은 것이다.

이들은 당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군주에게 올바르게 처신하여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167P)


직접 보고 사람을 평가하라

****낭중령 주문은 이름이 인(仁)이며 그 조상은 원래 임성사람이었다. 그는 의술로 황상을 만나게 되었다. 주인(周仁)은 사람됨이 신중하고 입이 무거워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는 일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낡을대로 낡은 기운 옷과 때에 찌든 속옷을 입으며 빨려고 하지 않았다. 주인은 경제가 죽을 때까지 낭중령으로 있었으나 끝내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말한 적이 없었다. 황상이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쁨을 물으면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그 사람을 살피십시오.”

그는 이처럼 다른 사람을 헐뜯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하므로 경제는 직접 그 집을 두 차례나 찾아갔다. 황상이 매우 많은 물건을 주었지만 언제나 사양하며 감히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제후와 신하들이 보내주는 선물도 끝내 받지 않았다.

무제는 즉위하여 그가 선제의 신하이므로 중하게 여겼다. (180~181P)


44. 전숙열전

끝가지 윗사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어진 사람은 지친 병사를 전쟁터로 내몰지 않는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으면 차라리 덮어 버려라


달은 차면 기운다

***조우가 말했다.

“장군의 문하에는 반드시 장군급의 인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옛말에 ‘그  군을 알지 못하면 그가 부리는 사람을 보고, 그 아들을 알지 못하면 그 아들이 사귀는 벗을 보라’고 했습니다.” (197P)


***대체로 달은 차면 기울고 사물은 성하면 쇠락하는 것이 세상 이치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알고 뒤로 물러설 줄 모르며 오래도록 부귀의 형세에 있으면 화가 쌓여 동티가 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범려는 월나라를 떠났고 물러나 관직과 직위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은 후세까지 전해져 만세에 이르도록 잊혀지지 않으니 어찌  그를 따를 수 있겠는가!(200P)


45. 편작, 창공열전

명의 편작과 창공 두 사람은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편작은 전설적인 의사로 일컬어졌다. 편작은 침구와 탕약 두 가지 모두에 뛰어났으며 창공은 편작에 비견되는 명의였다.

편작은 진나라의 태의령 이혜가 시기하여 보낸 사람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창공은 편작의 불행한 최후를 보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203P)


명의 편작의 탄생

**** 편작(篇鵲)은 발해군 막읍사람으로 성은 진(秦)이고 이름은 월인이다. 그는 젊을 때 다른 사람이 운영하는 여관의 관리인으로 있었다. 객사에 장상군이라는 자가 와 머물곤했느네, 편작은 그를 특이한 인물로 여겨 언제나 정중하게 대하였다. 장상군도 편작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장상군은 객사를 드나든지 열흘 남짓 되었을 때 가만히 편작을 불러 마주 앉아 조용히 말햇다.

‘나는 비밀스럽게 전해오는 의술을 가지고 잇는데 이제 늙어 그대에게 전해주고 싶으니 그대는 누설하지 마시오.“

장상군은 품속에서 약을 꺼내 편작에게 주며 말햇다.

“이 약을 당에 떨어지지 않은 물에 타서 마신 뒤 삼십일이 지나면 반드시 사물을 꿰둟어 볼 수 있을 것이오.”

그러고는 비밀스럽게 전해오는 의서를 꺼내 편작에게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으니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다. 편작이 장상군의 말대로 약을 먹은 지 삼십일이 지나자 담장 너머 저 편에 숨어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러한 능력으로 환자를 보니 오장 속 질병의 뿌리가 훤히 보이므로 겉으로는 맥을 짚어 진찰하는 척만 할 뿐이었다.

그는 의원이 되어 제나라에 머물기도 하고 조나라에 머물기도 하였는데, 조나라에 있을 때 편작으로 일컬어졌다. (205~206P)


혈맥이 막혀 있으나 근심할 것은 없다

***진나라 소공 때 대부(大夫) 조간자가 병이 들었다. 닷새동안이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자 대부들은 다 이를 염려하여 편작을 불렀다. 편작이 조간자의 병세를 살피고 나서 말했다.

“혈맥이 막혀있지만 당신은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옛날 진나라 목공도 일찍이 이러한 증세로 일주일 동안 앓은 뒤 깨어나신 적이 있습니다. 목공께서 정신이 드신 날, 공손지와 자여에게 말햇다. ‘나는 천제(天帝)가 계신 곳에  갔는데, 정말 즐거웠소. 내가 오랜 시간 머물렀던 까닭은 마침 배울 것이 있었기 때문이오. 천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소. 진(晉)나라는 장차 크게 혼란스러워져 다섯 대 동안 평안치 못할 것이다. (206P)


살 수 있는 사람을 살려 낼 뿐이다

****편작은 괵(虢)나라로 갓는데, 마치 괵나라 태자가 죽었다. 편작은 괵나라의 궁궐 문 앞으로 가서 중서자(태자의 교육을 담당함)에게 물었다.

“죽은 대가 언제입니까?”

“닭이 울때부터 지금 사이입니다.”

편작이 또 물었다.

“입관(入棺)은 했습니까?”

‘아직 안 했습니다. 죽은지 반나절도 안 되어서요.“

편작이 말했다.

“저는 재나라 발해의 진월사람입니다. 태자가 불행히도 죽었닥 하는데 제가 태자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중서자가 말했다.

“선생을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편작은 말했다.

“내가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환자의 맥을 짚고 안색을 살피고 목소리를 듣고 몸 상태를 살펴보는 등의 일을 하지 않고도 언 부위에 질병이 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환자의 양(陽)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음(陰)에 관한 증상을 미루어 알 T 있고, 호나자의 음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양에 관한 증상을 알 수 있습니다. 몸속의 병은 겉으로 나타나므로 천리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경우가 아주 많으며 감추려해도 감출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제 말을 진실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안으로 들어가 태자를 살펴보십시오, 태자의 귀에서는 소리가 나고 코는 벌름거리고 있을 것이며 양쪽 넓적다리를 타고 음부에 이르면 당연히 아직 따듯한 기운이 느껴질 겁니다.”

중서자는 바로 궁궐로 들어가 괵나라 임금에게 편작의 말을 알렸다.

편작은 임금에게 말했다.

“태자의 병과 같은 것을 시궐(尸厥, 피가 위로 올라와 정신이 혼미해져 가사 상태에 빠지는 병)이라고 합니다. 음기가 파괴되고 양기가 끊겨 혈색이 사라지고 맥이 어지러워지므로 몸이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양기가 음기 속으로 들어가 오장을 누르는 자는 살지만 음기가 양기 속으로 들어가 오장을 누르는 자는 죽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은 모두 오장의 기가 몸속에서 거구로 치솟을 때 갑자기 일어납니다. 훌륭한 의사는 이것을 치료하지만 서툰 의사는 의심하여 믿지 않습니다.”

편작은 제자 자양에게 숫돌이 침을 갈게 한 뒤 그것으로 몸 살갗에 있는 삼양과 오회를 질렀다. 그로부터 조금 뒤 태자가 깨어났다. 음과 양의 기운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 일로 하여 세상 사람들은 몯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닥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편작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는 못한다. 이는 내가 스스로 살 수 있는 사람을 일어날 수 있도록 한 것 뿐이다.”(210~212p)


질병은 징후가 나타날 때 고쳐야 한다


고칠 수 없는 여섯 가지 병

****성인으로 하여금 질병의 징후를 미리 알게 하여 훌륭한 의사에게 일찍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질병은 치유될 수 있다. 고칠 수 없는 여섯 가지 병이 있다.

교만하고 방자하여 병의 원리를 논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불치병이다.

몸을 가벼이 여기고 재물이 아까워 병을 치료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불치명이다.

입고 먹는 것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세 번째 불치명이다.

음과 양이 함께 있어 오장의 기가 불안정한 것이 네 번째 불치병이다.

몸이 극도로 허약하여 약을 먹을 수 없는 것이 다섯 번째 불치병이다.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이 여섯 번째 불치명이다. 이러한 것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치료하기 매우 어렵다. (214p)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의사가 돼라

***편작의 이름은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편작은 한단을 지나갈 때 그곳에서 부인들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의사가 되었고, 낙양을 지날 때는 주나라 사람들이 노인을 공경한다는 말을 듣고 귓병과 눈병과 중풍 등 노인병 의사가 되었다. 함양으로 들어올 때는 진(秦)나라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소아과 의사가 되어 각 지역 사람들의 풍속에 맞추어 의료과목을 바꾸었다.

진나라의 태의령(의약 행정의 최고 담당자)이혜는 자신의 의술이 편작만 못함을 알고 사람을 보내 편작을 찔러 죽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세상에서 맥법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편작의 이론과 방법을 따르고 있다. (215p)


***태창공이야기

환자에 다라 치료법이 다르다

***황상이 물었다.

“병을 진찰하여 생사의 시기를 예측하지만 맞지 않을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이오?”

순우의가 말했다.

“그것은 모두 환자가 음식과 기뻐하고 성내는 것에 절도를 잃었거나, 먹으면 안되는 약을 먹었거나 해서는 안되는 침을 맞거나 뜸을 떴기 때문에 예측한 생사의 시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때에 죽는 것입니다.”(244p)


48. 한 장유 열전

한 장유(한안국)는 성격이 복잡하고 독특한 사람이다. 그는 재물 욕심이 많고 전분에게 뇌물을 주어 관직을 옮긴 흠이 있으나 자기보다 현명하고 청렴한 인사들을 추천하여 극심한 권력 투쟁 속에서 살아남았다. 한나라 무제는 한 장유를 재능과 지략이 출중하여 나라의 큰그릇으로 쓸만하다고 보고 승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수레에서 떨어져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한 장유는 그후 지위도 낮아지고 소원시되어 우울한 여생을 보내다 죽었다. (309p)


흉노와의 화친문제

**** 한안국이 말했다.

"강력한 쇠뇌도 끝에 가서는 아주 얇은 노나라의 비단조차 뚫을 수 없고, 회오리바람도 그 마지막 힘은 가벼운 기러기 털조차 움직일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강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끝에 가서 힘이 쇠약해지기 때문입니다. 흉노를 치는 것은 불리하니 화친하는 편이 낫습니다."(317p)


49. 이장군 열전

이광은 한나라 경제, 무제 때의 장수로 사냥하던 중 풀더미 속 바위를 호랑이로 잘못 알고 쏜 화살이 바위를 뚫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는 전한 시대에 흉노와 칠십여 차례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워 흉노로부터 비(飛)장군으로까지 불렀다.

그는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하여 행군 도중에 부하들이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으면 그들에게 먹이고 물을 먹이고 음식을 주었다. 이 대문에 부하들은 이 광을 위해 죽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사마천은 한편으로는 이 장군의 재능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의 불행에 깊은 동정을 보여 행간마다 비분강개한 마음을 나타내었다. (325p)


돌에 박힌 화살

***어느 날 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풀숲에 있는 돌을 호랑이로 잘못보고 활을 쏘았더니 그 화살촉이 돌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세히 보니 돌덩어리이므로 한 번 더 쏘았으나 화살촉이 박혀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333p)


****이광은 청렴하여 상을 받으면 그것을 번번이 부하들에게 나눠 중고, 음식도 군사들과 함께 먹었다. 이광은 죽을 때까지 사십여 년에 걸쳐 봉록 2000석을 받는 관직에 있었으나 집에는 남아있는 재물이 없었으며, 끝까지 집안의 재산에 대해서는 말하는 일이 없었다.

이광은 말을 더듬고 말수가 적었으며, 다른 사람과 한가하게 있을 때는 땅바닥에 진형을 그려놓고 또 땅의 넓고 좁은 것을 재어 표적을 만든 뒤 활을 쏘아 누가 멀고 가까운가를 비교하여 내기 술을 마시곤 하였다. 이처럼 활소기를 즐거움으로 삼다가 일생을 마쳤다. (334p)


***태사공은 말했다.

“전해오는 말에 ‘자기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며 작 몸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아마 이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 장군(이광)을 본 적이 있는데 시골 사람처럼 투박하고 소탈하며 말도 잘하지 못했다. 그가 죽던 날 그를 알든 모르든 세상 사람 모두가 슬퍼했으니, 그 충실한 마음시가 정녕 사대부의 신뢰를 얻은 것인가?

속담에 ‘복숭아나 오얏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밑에는 샛길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소한 것이지만 큰 이치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343p)


50. 흉노열전

한나라 무제의 흉노 정벌 정책은 중국의 정치와 역사 면에서 보면 강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본래 무제는 언제나 지존의 위치에 있으면서 항복한 적들도 그 시족을 멸할 정도로 가혹한 인물이었다. (345p)


묵돌 선우의 지략

***그들의 법에는 평상시 칼을 칼집에서 한 자 이상 봅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하는 자는 그 가족과 재산을 다 빼앗으며 가벼운 죄가 있는 자는 알형(軋刑, 칼로 얼굴을 가르거나 수레바퀴 밑으로 몸을 넣어 벼를 부수는 형벌)에 처하고, 큰 죄를 지은 자는 사형에 처했다. 옥에 가두는 것은 길어도 열흘을 넘지 않았으며, 죄수는 온 나라를 통틀어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357P)


*****선우는 매일 아침 군영에서 나와 일출을 보고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보고 절했다. 앉는 자리는 왼쪽을 높이 여기고 북쪽을 향해서 앉았다. 날은 무일(戊日)과 기일(己日)을 길일로 쳐 소중히 여겻다. 장례식에는 관, 곽, 금, 은, 옷, 갖옷이 있을 뿐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는 일은 없으며 상복도 입지 않았다. 선우가 죽으면 가까이서 사랑을 받던 신하나 애첩을 순장했는데, 많을 때는 수천 수백 명에 이르기도 했다. 전쟁을 일으킬 때는 별과 달의 상태를 보았다. 즉 달이 차고 커지면 공격하여 싸우고 달이 이지러지면 후퇴했다. (357~358P)


***적을 공격하여 목을 베건 포로를 잡은 자에게는 술 한 잔을 상으로 내리고 노획품은 그것을 얻은 사람에게 주었다. 포로를 잡은 때는 그 잡은 사람이 노비로 삼았다. 그래서 싸울 대는 사람들마다 자기 이익을 좇아 교묘히 적을 유인하여 일망타진하였다. 그들은 적을 발견하면 새처럼 모여들어 이익을 다투었다. 싸움에서 죽은 자를 거두어 수레에 태워 온 자에게는 죽은 자의 재산을 모두 가질 수 있게 했다. (358P)

☆☆☆흉노족들은 싸움 잘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뒤로 활을 쏘는 사람들이며 용맹하다. 그들이 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에 임하는 것은 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물질적으로 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임을 이제야 알았다. 내개 전쟁에서의 전리품은 국가에 귀속되며 일부만이 계급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흉노의 군법은 많이 다르다. 선우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다. 개인의 부와 직결되어 있으며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움에 임한다는 것을, 그리고 부유해지고 싶은 사람은 평소에도 활쏘기, 말타기 등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쌓아놓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효문제는 후원 2년에 사신을 시켜 흉노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한나라와 흉노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대등한 나라입니다. 흉노는 북쪽 땅에 자리잡고 있어 춥고 무서운 냉기가 일찍 내리기 때문에 관리에게 명령하여 선우에게 해마다 일정량의 차조, 누룩, 황금, 비단, 무명 및 그 박의 물건들을 보내게 했습니다.

지금 천하는 아주 평화로우며 백성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짐과 선우는 백성의 부모입니다. 짐이 듣건대 하늘은 한쪽으로 치우쳐 덮지 않으며, 땅은 한쪽으로 치우쳐 싣지 않는다고 합니다. 짐과 선우는 모두 지난날의 하찮은 일들은 흘러 보내고 대도를 걸으며 과거 나밧던 것을 제거하고 자욱한 앞날에 대한 계책을 세워 두 나라의 백성을 한 집안 자식처럼 대하고 모든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래로는 물고기나 자라에 미치고  위로는 나는 새에 이르기까지 발로 걷고 입으로 숨쉬며 꿈틀거리는 것까지도 편안하고 이익을 얻게 하여 위험으로부터 피하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싶습니다. 오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이 하늘의 도입니다. 다 함께 지난 일을 잊읍시다.“ (371P)

☆☆☆흉노족이라 하여 무시하고 멸시했지만, 그들의 힘이 강대하여 약탈과 전쟁을 일삼으니 효문제는 화친정책을 썼다. 아주 공경하게 쓴 편지를 통해 흉노가 한나라에게 얼마나 골치덩어리 였는지를 알 수 있다. 흉노족 때문에 국력의 손실도 컸지만, 그만큼 한나라는 강대해졌다. 대원의 천리마를 구하여 흉노족과의 전재에 대비하였고, 가장 큰 것은 장건에 의한 ‘실크로드 개척’이라 할 수 있다.

나에게 해롭게 하는 사람이 알고 보면 선지식이 될 수 있다.


어린애가 어찌 천자를 상대하겠는가

***한나라는 이사장군 이광리에게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주천군으로 나가 천산(天山)에서 우현왕을 치도록 했다. 이사장군은 흉노의 수급과 포로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던 중 흉노에게 크게 포위되어 거의 벗어날 수 없게 되엇다.

그로부터 이 년 뒤 다시 이사장군에게 기병 6만 명과 보병 10만명을 거느리고 삭방군으로 출동하게 했다....흉노는 이 소식을 듣자 처자식과 재산을 모두 멀리 여오수 북쪽으로 대피시킨 뒤 선우가 기병 10만명을 이끌고 여오수 남쪽에서 이사장군과 집전을 벌였다. 이사장군은 사움을 그만두고 돌이오려 했지만 선우와 열흘 넘게 계속 싸운데다가 자기 가족들이 무고(巫蠱, 무술로 남을 죽이는 미신의 하나)의 사건으로 몰살되엇다는 소식을 듣고 이끌고 있던 군사들과 함께 투항했다....조서를 내려 태의령 수단을 체포했다. 그는 이사장군의 가족이 몰살된 것을 말하여 이광리가 흉노에 투항하게 했기 때문이다. (388~389P)


****기도위 이릉에게 보병과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거연 북쪽으로 1000여리가지 나가 선우와 부딪쳐 싸우도록 했는데, 이릉이 적군 1만여 명을 살상하였다. 병력과 식량이 다 덜어져 전투태세를 풀고 돌아오려 했으나 흉노가 이릉을 에워쌌으므로 그는 흉노에게 투항했다. 그의 병사는 거의 전멸하고 한나라로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400명이었다. 선우는 이릉을 존중하여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388~389P)

☆☆☆한나라의 뛰어난 명장 이사장군과 이릉은 흉노족에게 투항함으로서 그 끝을 맺었다.


51. 위장군, 표기 열전

이 편은 무제가 흉노를 정벌한 공적인 명부인 셈이다. 위청은 무제와 같은 나이로 일곱 차례 정벌에 나서 적군 5만여 명의 머리를 얻었고, 곽거병은 청년 장군으로 네 번의 싸움에서 적군 11만여 명의 머리를 얻었으니 두 사람의 공적은 상당했다.

흉노와 한나라의 관계에 대한 대책 중에서 무제는 만리장성에 만족하지 않고 흉노 깊숙이 쳐들어가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을 섰는데, 위청과 곽거병은 무제의 이러한 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충복이었다.

사마천은 무제가 젊고 재능이 출중한 위청과 곽거병을 파격적으로 기용하여 나라의 안정을 꾀한 부분을 높이 칭송하면서도 무제 딸의 간통 사실을 직접 서술하여 그가 집안 하나도 엄히 다스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가혹한 것을 질타하였다. (391P)


패기만만한 곽거병과 날개 꺾인 위청

***표기장군은 사람됨이 과묵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고 기백이 있어 과감하게 일을 했다. 천자는 일찍이 그에게 손자 오자의 병법을 가르치려 한 적이 있는데, 그대 그는 이렇게 말햇다.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옛날 병법을 배울 것까지는 없습니다.”

천자가 그를 위하여 저택을 마련해 놓고 가서 보도록 하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흉노가 아직 망하지 않았으니 집은 소용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천자는 그를 더욱더 소중히 여기고 아꼈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에 천자의 시중이 되고 존귀해져서 사병들을 잘 살필 줄 몰랐다.

그가 전쟁터에 나갔을때 천자가 그를 위하여 태관을 시켜 수레 수십대 분의 식품을 보내 주었는데, 돌아온 뒤 물품수레에는 좋은 살과 고기가 남아 버릴 정도였지만 병사들 중에는 굶주린 자가 있었다. 그가 요새 밖에 있을 때 병사들은 식량이 모자라 어던 병사는 기력이 쇠한 나머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표기장군은 오히려 땅에 줄을 그어 구역을 정해놓고 공차기를 즐겼다. 그에게는 이와 비슷한 일이 많았다. 대장군은 사람됨이 어질고 선량하며 겸손하고 양보심이 있고 부드러워 천자의 환심을 샀지만 세상에서는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  (411~412P)


52. 평진후,  주보열전

공손홍은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 계모 슬하에서 자랏으나 지극한 효자였다. 향이레서 그를 문학으로 천거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려했고, 항상 베로 만든 옷을 걸치고 채식으로 일관할 정도로 검소했다.

무제는 이러한 공손홍을 뽑아 유학을 장려하여 학관을 힘쓰게 하였고, 주보언을 뽑아 제후들에게 사사로운 원한이 있던 유사를 포용하여 제후들을 다스리는데 섯다. 당시 사람들은 공손홍을 곡학아세(曲學阿世)라는 말로 평가하기도 했다. (421P)


싸움을 즐기는 자에게는 멸망만이 찾아온다

***“신이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간절한 충고를 미워하지 않고 널리 의견을 들어보고 충성된 신하는 감히 가혹한 벌을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간언하므로 일에 실책이 없고 공을 만세에 전한다고 합니다. 지금 소신은 충성심을 감추거나 죽음을 피하지 않고 어리석은 계책을 말씀드립니다.

<사마법>에 “나라가 크더라도 싸움을 좋아하면 반드시 멸망하고, 천하가 태평하더라도 전쟁을 잊고 있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라고 했습니다. 천하가 태평스러운데도 군대가 개선할 때 연주하던 음악을 연주하고, 제후들이 봄에 수(蒐)라는 사냥을 하고, 가을에 선(獮)이라는 사냥을 하며, 제후들이 봄에 군대를 정비하고 가을에 군사를 훈련시키는 까닭은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고 무기는 흉기이며, 싸움은 작은 일입니다. 옛날 군주는 한 번 화를 내면 반드시 시체를 뒹굴게 하고 피를 보았기 때문에 영명한 군주는 이런 일을 신중하게 했습니다. 대체로 싸워 이기는 데에 힘을 쏟고 하부로 무력을 쓰는 자 치고 후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431P)


시대 변화에 다라 강약을 조절하라

***그때 진나라가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부세를 줄이고 부역을 덜어주고, 인의를 존중하고, 구너세와 이익을 가볍게 여기며, 독실하고 돈후한 것을 숭상하고, 교활한 지혜를 나쁘게 여기고, 좋지 못한 풍속을 바꿔서 천하를 교화시켰더라면 대대로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교를 실천하지 않고 옛날 습관대로 교활한 지혜와 권세와 이익을 쫓는 자를 끌어다 쓰고, 독실하고 돈후하며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자는 물리치며 법은 엄중하고 정치는 준엄했습니다. (438P)


55. 조선 열전

조선은 곧 동이(東夷)로서 그 선조가 기자라는 설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잇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책봉했는데, 기자는 주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자손을 사십여 대에 전하였다. 한나라 무제는 공격하여 우거를 죽이고 조선을 한나라에 복속시켜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이 편에서 사마천은 위만의 역할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479P)


57. 사마상여 열전

사마상여는 일찍이 탁왕손의 집에 있다가 그 딸 문군을 꾀어 함께 달아나 살 정도로 경박한 인물이다. 그는 인상여의 인물됨을 흠모하여 정치에 깊이 참여하고 싶었지만 그의 재능은 정치 무대가 아니라 문학 방면에서 큰 빛을 드러냈다.

교만하고 화려한 문사와 신선 술을 좋아한 한나라 무제는 사마상여의 <상림부>,  <대인부>등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했다. 사마상여는 그 시대의 웅대한 기상을 표현하면서도 정치상의 득실과 긴밀하게 연계시켜 풍간하려고 힘썼다.


새는 하늘에 있는데 덤불만 살핀다

***대체로 세상에는 반드시 비범한 인물이 있은 뒤라야 비범한 일이 있고, 비범한 일이 있은 뒤라야 비범한 공이 있게 됩니다. 비범함이란 본래 평범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은 비범한 일의 시초를 알기 어렵고 두려워하낟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성공하면 천하가 비로소 편안해집니다. (530P)

****어진 군주가 즉위하면 어찌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며 문자에 얽매이고 습속에 매이고 구습을 따라 하며 그 시대의 의견 듣기만을 좋아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숭고하고 원대한 것을 생각하고 사업을 열어 법통을 세워 사방의 이적을 끌어안는 일에 힘써 대업을 천지와 나란히 하려고 합니다. 천하의 안과 팔방 밖까지 물이 스며들어 넘쳐흐르는 것과 같아 생명을 가진 생물 중에 군자의 은택으로 윤택하지 않은 자가 있다면 어진 군주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531P)


앞을 내다보는 자는 미리 막는다

****대개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자는 일이 싹트기 전에 미리 알고 지혜가 있는 자는 위험이 나타나나기 전에 피합니다. 재앙이란 본래 대부분 드러나지 않고 미묘한 곳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속담에도 ‘집에 천금을 쌓아 놓으면 그 집 자식들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535P)

☆☆☆재앙이란 본래 대부분 드러나지 않고 미묘한 곳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곳에서 나타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인부: 천자가 그리는 선인의 모습

****상여는 효문원의 영으로 제수되었다. 천자는 이미 <자허부>를 훌륭하다고 평가했는데, 상여는 천자가 신선의 도를 좋아함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상림의 일은 아름답다고 하기에 부족합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신은 일찍이 <대인부>를 지으려 했으나 아직 오나성하지 못하였으니 칭컨대 오나성하여 바치겠습니다. (537P)


***오하(五河)를 넘어 염화산을 지나 약수에 배를 띄워 지나가고 작은 주(洲)를 건넌다. 사막을 건너 총령산에서 쉬며 물장난을 친다. 여와에게 비파를 타게 하고 풍이(馮夷)에게 춤추게 한다. 때때로 아득히 어두워지고 그늘이라도 지면 병예를 불러 풍백(風伯)을 벌주고 우사에게 형벌을 내린다. 서쪽으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곤륜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장 삼위산으로 달려간다.


58. 회남, 형상 열전


왕이 천하를 버리지 천하가 왕을 버리는 일은 없다

***‘귀가 밝은 사람은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고 눈이 밝은 사람은 형상이 없는 형상을 본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모든 행동에 만전을 기합니다.



안정된 때 일으키는 반란은 실패한다

****회남왕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오피에게 물었다.

“한나라 조정은 잘 다스려지고 있소? 아니면 어지럽소?”

오피가 말했다.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왕은 마음 속으로 탐탁치 않게 여기며 오피에게 물었다.

“공은 무엇으로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고 말하시오?”

오피가 대답했다.

“신이 가만히 조정의 정치를 살펴보니 군주와 신하의 의(義), 아버지와 아들의 친(親), 남편과 아내의 별(別), 어른과 어린아이의 서(序)가 모두 그 도리를 얻었고, 황제의 모든 행동은 옛 도리를 따르고 있으며 풍속과 기강에도 빠진 것이 없습니다. 많은 물건을 실은 부유한 장사치들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도 길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573P)


재앙은 알 수 있지만 복은 알 수 없다

***왕이 말햇다.

“진승과 오광은 송곳을 세울 만한 아주 좁은 땅조차 없었으나 1000명의 무리를 모아 대택에서 일어나 팔을 휘두르며 크게 외치자 천하가 호응했고 서쪽으로 나아가 희수에 이르렀을 때에는 군사 120만명을 가지게 되었소. 지금 우리나라는 비록 작기는 하지만 정예 군사만도 10만여 명이나 되오.....그런데 경은 어째서 재앙만 있고 복이 없다고 하시오?”


59. 순리열전

순리란 법을 근본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로서 청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순리의 특징은 우선 자신이 청렴하고 법을 엄격히 집행하며 양민을 보호하고 간악한 행위는 반드시 응징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나라를 다스릴 때 우선 법령과 형벌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 법령과 형벌이 제정된 뒤에는 순리의 집행 태도에 따라 사회의 안위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

***공의휴는 노나라 박사였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노나라 재상이 되었다. 법을 준수하고 이치를 따르며 바꾸는 일이 없으므로 모든 관리가 스스로 올바르게 되었다. 남의 녹을 먹는 자는 일반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못하게 하고, 많은 봉록을 받는 자는 사소한 것도 받지 못하게 했다. 어떤 빈객이 재상에게 생선을 보내왔으나 받지 않았다. 다른 빈객이 말했다.

“재상께서 생선을 좋아하신다는 말을 듣고 생선을 보내왔는데 무엇 때문에 받지 않으십니까?”

재상이 말했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았소. 지금 나는 재상 벼슬에 있으니 나 스스로 생선을 살 수 있소. 그런데 지금 생선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난다면 누가 다시 나에게 생선을 보내 주겠소. 그래서 받지 않은 것이오.”

자기 집 채소밭의 야채를 먹어보니 맛이 좋자 그 채소밭의 채소를 뽑아버렸고, 또 자기 집에서 짜는 베가 좋은 것을 보자 당장 베짜는 여자를 돌려보내고 그 베틀을 불살라 버리고는 말했다.

“농부와 장인과 베 짜는 여자가 그들이 만든 물건을 어디에 팔 수 있겠는가?”(594~595P)


60. 급, 정 열전

이 편은 급암과 정당시 두 사람의 전을 합한 것인데, 둘 다 황로 사상을 숭상하여 구경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은 호걸다운 기질이 있고 청렴하며 직간하기를 좋아하여 오랫동안 자리에 있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었다. 그들의 권세가 기울자 빈객 수도 줄어들었다.

열전의 여러 편에 기록된 급암과 이광은 무제 때 쌍벽을 이룬 문신과 무신이다. (599P)


장작을 쌓아올리듯 신하를 등용한다

***회남왕은 모반하려 할 때 급암을 꺼려 이렇게 말했다

“급암은 직간하기 좋아하고 절개를 지켜 의리에 죽는 인물이니 옳지 못한 일로 그를 유혹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승상 공손홍을 설득하는 일은 뚜껑을 열고 낙엽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쉽다.” (607P)


****태사공은 말한다.

“급암이나 정당시 같은 현명한 사람도 세력이 있을 때는 빈객이 열 배로 늘었다가 세력을 잃으니 그렇지 못했다. 하물며 보통 사람이야 어떠하랴? 하규의 적공은 이렇게 말햇다.

‘처음 내가 정위가 되었을 때는 빈객이 문 앞에 가득 찼지만 파면되자 문 박에 참새 잡는 그물을 쳐도 될 정도였다. 내가 다시 정위가 되자 빈객들은 예전처럼 모여들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문에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데 사귀는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으로써 사귀는 모습을 알며, 한 번 귀했다가 한 번 천해짐으로써 사귀는 참된 정을 알게 된다.”라고 크게 써 붙였다. 급암이나 정당시에게도 이런한 말이 해당된다니 슬픈 일이로구나.

☆☆☆물질과 권력을 따라 사람들은 모이고 흩어진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잇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별로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진정한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이 힘들다.


61. 유림열전

사마천은 공자와 육경을 지극히 존중하여 공자를 소왕(素王)으로 보고 육경이야말로 당시 왕의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고 여겼다. (617P)


유학의 역사적 발전과정

***공자는 칠십여 군주를 찾아가 쓰이기를 바랐으나 받아주는 군주가 없었다. 공자는 ‘만일 나를 써주는 군주가 있다면 일 년 안에 성과를 올릴 것이다’ 라고 했다. 서쪽으로 사냥을 가서 기린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내 도는 다했다’라며 탄식했다.

그래서 노나라 사관의 기록을 바탕으로 <춘추>를 지어 포폄(襃貶)을 기탁하는 법을 세웠다. <춘추>는 언사가 정미하여 듯이 깊고 넓어 후세학자는 대부분 이것을 본받아 썼다.

공자가 죽은 뒤 칠십여 제자는 각국으로 흩어져 제후들에게 유세하였는데 그중 크게 된자는 제후의 사부나 경상이 되었고 작게 된 자는 사대부의 친구가 되어 가르쳤으며 어떤 이는 숨어 살며 벼슬에 나오지 않았다. 자로는 위나라에 있었고 자장은 진나라에 있었고, 자공은 제나라에서 일생을 마쳤다. (619~620P)

☆☆☆공자는 자신의 학문에 대해 자신감이 넘친다. 자신의 학문이 정치에 반영된다면 일 년 안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확신을 한다. 이런 자신감 넘치는 공자의 학문을 70여 군주가 써주지 않았다고 하니 공자도 한 나라의 녹을 먹을 팔자는 아닌가 보다. 어지간히도 돈과 권력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하지만 이천년도 넘는 동안 공자의 학문은 크게 대접받아왔으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는가?



간을 먹지 않아도 고기 맛을 알 수 있다

****황생이 말했다.

“관은 해져도 반드시 머리에 쓰고 신발은 새것이라도 반드시 발에 신습니다. 무엇때문이겟습니까? 위아래의 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628P)

***효경제가 말햇다.

“고기를 먹을 때 말의 간을 먹지 않았다고 하여 고기 맛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는다. 학문을 논하는 자가 탕왕과 무왕이 천명을 받은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 어리석다고는 하지 않는다.”


62. 혹리열전

이 편은 서한 전기에 살았던 포악한 관리 열 두명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는데, 한나라 무제 때의 관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편 서문에서 공자와 노자의 말을 인용하여 예의와 도덕의 중요한 작용을 천명한 것은 사마천의 반폭정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637P)


법령이 늘수록 도둑은 많아진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바로 잡으면 백성은 형벌을 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바로 잡으면 부끄러움을 알고 바르게 살아간다.”

노자는 또 이렇게 말햇다.

“상덕은 덕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덕을 지니게 되고,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므로 덕을 지니지 못한다. 법령이 늘수록 도둑은 많아진다.” (639P)


***태사공은 말한다.

“법령이란 다스림의 도구일 뿐 백성의 맑고 탁함을 다스리는 근원은 아니다. 옛날 진에는 천하의 법망이 치밀했으나 간사함과 거짓의 싹이 움트듯 일어나 극도에 이르러 법에 저촉시키려는 관리와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백성의 혼란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관리들은 불을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것처럼 정치를 조급하게 했다.

공자는 ‘송사를 처리하는 일은 나도 남과 다를 것이 업지만, 나는 송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도 있다’라고 했다. 노자도 ‘하찮은 인간은 도를 듣고 크게 웃기만 할 뿐 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허튼소리가 아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모난 것을 깨뜨려 둥글게 만들고 조각한 장식을 깎아 소박하게 만들며 법망은 배를 집어삼킬만한 큰 물고기도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너그럽게 했다. 그렇게 하니 관리들의 통치는 순수하고 단순하여 간악한 데로 빠지지 않고 백성은 잘 다스려지는 데에 편안함을 느꼈다. 이상으로 살펴보면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은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게 아니라 도덕에 있다.(639~640P)

☆☆☆단단하게 조으면 더 효울적으로 운영될 것 같지만 그와는 반대다. 자율성을 중요시할 때 기업은 발전하는 것이다. 나라 역시 법령이 많고 사회가 엄격하면 민심은 각박해지고 결국은 혁명이 일어난다.


비첩을 잃으면 다시 얻으면 그만이다

***효경제 때에는 조조가 법을 각박하고도 가혹하게 만들고 법가의 술책을 운영하여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오, 초 등 일곱 나라의 난은 조조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일어난 것이며 조조는 결국 처형되었다.


군주의 마음을 쫓아 법을 집행한 장탕

****장탕은 두현 사람으로 그 아버지는 장안의 현승이었다.

장탕이 입조하여 사안을 보고할 때나 국가 재정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호아제는 해가 저물어도 식사마저 잊은 채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승상은 그저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 천하의 중대한 일은 모두 장탕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백성은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하여 소요를 일으켰고, 국가의 새 정책도 그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간악한 관리들은 서로 침탈하고 핍박하므로 준엄하게 다스렸다. 별 효과가 없자 위로 공경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탕을 지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장탕이 병들었을 때 황제가 몸소 문병까지 갈 만큼 그는 황제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651~652P)

☆☆☆군주의 마음에만 들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벼슬에 있는 사람은 아첨꾼일 뿐이지,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아니다.


63. 대원열전

대원은 고대 서역의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내이 한 분지인데 백성은 주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며 상업에도 뛰어났다. 한나라 무제가 대원을 정벌하게 된 것은 한혈마라는 유명한 말이 생산되기 때문이라는 설과 자신이 총해하던 이부인의 오빠 이광리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한나라의 왕조의 서역 개척은 중국의 지리적 문화적 통일을 보다 확장시키고 동서의 경제와 문화 교류 및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서역은 동서의 큰 문명 도시인 장안과 로마를 이어주는 경유지였기 때문이다. (677P)


말을 구하러 떠나는 사신들이 줄을 잇는다

****오손의 훌륭한 말을 얻어 ‘천마’라 이름하였다. 그런데 대원의 한혈말을 얻고 보니 더욱 건장하므로 오손의 말을 ‘서극’으로 고치고 대원의 말을 ‘천마(天馬)’라고 했다. 천자가 대원의 말을 좋아하므로 말을 구하러 가는 사신이 줄을 이었다. (691P)


먼 곳에 있는 자보다 가까이 있는 자에게 기대라

***한나라 사신은 황하의 원류를 찾아냈다. 황하의 원류는 우전에서 시작되고 그 산에는 옥석이 많으므로 이것을 캐어 가지고 돌아왔다. 천자는 옛날 도서를 참고하여 황하가 시작되는 이 산을 곤륜산이라 했다.


말 때문에 일어난 전쟁

***천자는 이사성에 이르러 좋은 말을 얻어 올 것을 기대하였으므로 이사장군이라 불렀다.

☆☆☆한 무제는 한혈마에 거의 열광했다.



65. 영행열전

자기 노력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어 급속히 떨어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나라가 쇠망해 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환관과 외척이 큰 역할을 했다. (723P)


효무제의 총신 한언

효무제의 총신 이연년

***태사공이 말한다.

“심하구나. 사랑과 미움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이 마자하의 행적은 후세사람들에게 아첨으로 총애를 받는 자의 운명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 일은 백세 뒤에도 이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마자하: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에게 총애를 받던 신하이다. 그가 한창 영공에게 총애를 받을 때는 법을 어기고 임금의 수레를 몰아 박으로 나가고 먹던 복숭아를 임금에게 주어도 칭찬을 받았지만 총애를 잃은 뒤로는 오히려 이러한 행동들로 인하여 죽게 되엇다. (731P)


66. 골계(滑稽)열전

골계란 재치가 있어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 편은 골게 인물인 순우곤, 우맹, 우전 세 명의 열전이다. 골계가는 대부분 왜소하고 외모도 빼어나지 못하며 지위도 없지만 기지와 해학이 넘쳐 반어법과 풍자에 뛰어났다. (733P)


육예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힘이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햇다.

‘육경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같은 작용을 한다. <예기>는 인간의 행동을 절도 있게 하고, <악경>은 인간의 마음을 조화롭게 하며, <서경.은 사실을 말하고 <시경.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하며, <역경>은 천지의 기묘한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춘추>는 간단하지만 심오한 말로 큰 뜻을 이야기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내사공은 말한다.

‘천도는 넓고 넓다. 어지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은미한 말 속에도 이치에 맞는 것이 있어 이것으로 얽힌 것을 풀 수 있다.“(735P)


적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바라면 가능할까

****순우곤이 말햇다.

지금 신이 동쪽에서 오는 길에 길가에서 풍작을 비는 사람을 보앗는데 돼지 발 하나와 술 한 잔을 손에 들고 이렇게 빌었습니다.


높은 밭에서는 광주리에 넘치고

낮은 밭에서는 수레에 가득 차게

오곡이 풍성하게 익어

우리 집이 넘쳐 나게 해 주십시오


신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처럼 적으면서 원하는 바가 그처럼 큰 것을 보앗기 때문에 웃었습니다. (737~738P)


사물은 극도에 이르면 쇠한다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 라고 하는데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사물이란 지나치면 안되며, 지나치면 반드시 쇠합니다.


남루한 옷 속에 있는 보화를 찾으라

***동곽은 이른바 남루한 옷을 입고 보화를 품은 자이다. 그가 빈곤할 때는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존귀해지자 앞을 다투어 돌아와 따랐다. 속담에 “말을 감정할 때에는 여윈 것 때문에 실수하고 선비를 감정할 대는 가난 때문에 잘못 본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외모에 속기에 일쑤다. 크고 화려하고 빛나는 것에 마음을 주다보면 이미 속은 것이다.


군자는 서로 좋은 말(言)을 보낸다

***전해오는 말에 “아름다운 말(言)은 남에게 팔만하고, 고귀한 행실은 자기를 남보다 빼어나게 한다.”

“군자는 서로 좋은 말(言)을 보내고 소인은 서로 재물을 보낸다”라고 했다.

☆☆☆아름다운 말은 마음에 향기를 불러온다.

군자가 되려면 서로 좋은 말, 덕담을 많이 해야겠다.


67. 일자열전

일자란 육상 천상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치는 사람으로 복서와는 차이가 있으나 비슷한 부류로 보면 된다. 한날 때 특히 점이 성행하여 이들은 태복(太卜)이라는 직책을 맡아 제왕 곁에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였다. (769P)


복자(卜者)는 어떤 사람인가

***복희씨가 팔쾌를 만들고, 주나라 문왕이 부연하여 364효를 만듦으로써 천하가 바로 다스려졌습니다. 월나라 왕 구천은 문왕의 팔쾌를 본받아 점을 쳐서 적국을 깨뜨려 천하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복서가 어찌 이치를 거스른다고 하겠습니까?(776P)

☆☆☆21세기에도 정치시즌이 되면 정치인들이 점집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이다. 맞을 확률은 항상 반반이다. 그러니 점쟁이들이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도란 높을수록 더욱 편하지만 권세는 높을수록 더욱 위태롭다. 혁혁한 권세를 가진 자리에 있으면 몸을 망치는 날이 오게 마련이다. 점을 쳐서 정확하지 않은 일이 있어도 복채를 빼앗기는 일은 없지만, 임금을 위해 꾀한 것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몸 둘 것이 없다.

서로간의 거리는 멀어 머리에 쓰는 관과 발에 신는 신의 차이만큼이다. 이것은 바로 노자가 무명은 만물의 처음이다 하고 말한 것이다.


68. 귀책열전

고대 중국인의 의식세계는 우주 자연을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생명적인 기를 포괄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같은 원칙 위에서 전문적인 점술 이론을 발전시키고 점술가라는 전문 직업인마저 배출하였던 것이다. (783P)


신귀의 영묘함

****왕이 군대를 일으켜 장수를 내보낼 때에는 반드시 종묘의 단상에서 거북딱지를 끊어 길흉을 점친다. 지금 고묘 안에는 귀실이 있는데 그 안에 귀갑을 신보로 보관해 두고 있다.

☆☆☆거북이의 등껍질로 점을 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그것에 의존해 국가의 일을 결정했으니 시절 흐름을 따를 뿐이다.


69. 화식(貨殖)열전

이 편은 춘추말기부터 한나라 초기가지 상공업으로 치부한 사람들의 활동을 다룬 것으로 이 시기 상공업 발전의 면모를 볼 수 있어 화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화(貨)는 재산, 식(殖)은 불어나다는 뜻으로 재산을 늘리는 방법을 말한다. 이 열전의 서론 부분은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 능력이 사회생활에서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어 명분보다는 실질을 택하여 빈천함을 수치로 여길만큼 강한 어조로 일관했다.

사마천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분업은 사회경제 생활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상업을 의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로 보고 농업, 공업과 함께 모든 직업을 중시하는 진보적 면모를 보였다. 적어도 그는 중농억상(重農抑商)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 있다. (835P)


입고 먹는 것이 다스림의 근원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햇다.

"지극히 잘 다스려지는 시대는 이웃 나라까리 바라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은 재각기 자신들의 음식을 달게 먹고, 자기 나라의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자기 나라의 습속을 편히 여기고 자신들의 일을 즐기며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 근대의 풍속을 돌이키고 백성의 귀와 눈을 막으려 한다면 아마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837P)


*****태사공은 말한다

“귀와 눈은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다운 모습을 한껏 즐기려 하고, 입은 소와 양 따위의 좋은 맛을 다 보려 하며, 몸은 편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마음은 권세와 유능하다는 영예를 자랑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풍속은 백성의 마음속까지 파고든 지 이미 오래여서 미묘한 이론을 가지고 집집마다 깨우치려 해도 도저히 교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을 이용하여 이R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또 그다음은 백성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고, 가장 정치를 못하는 것은 재산을 가지고 백성과 다투는 것이다. (837P)

농부는 먹을 것을 생산하고 어부와 사냥꾼은 물건을 공급하고 기술자는 이것으로 물건을 만들고 장사꾼은 이것을 유통시킨다.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 능력에 따라 그 힘을 다해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러므로 물건 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값이 비싸다는 것은 사질 조짐이다. 각자가 그 생업에 힘쓰고 즐겁게 일하는 것이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아 물건은 부르지 않아도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절로 모여들고 구하지 않아도 백성이 만들어 낸다. 이야말로 어찌 도와 부합하지 않으며, 자연법칙의 징험이 아니겠는가?(837P)

<주서(周書>에 ‘농부가 생산하지 않으면 식량이 모자라고 장인이 물건을 제대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제품이 부족하고 장사치가 물건을 팔지 않으면 삼보(三寶, 식량, 제품, 자재)의 유통이 끊어진다. 어부나 사냥꾼이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으면 자재가 모자란다. 자재가 모자라면 산과 택지는 개척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 네 가지는 백성이 입고 먹는 것의 근원이다. 그 근원이 크면 백성은 부유해지고 그 근원이 작으면 백성은 가난해진다. 이 네가지는 위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아래로는 가정을 부유하게 한다. 빈부의 도란 빼앗거나 안겨 주어서 되는게 아니고 교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은 부유해지고 모자라는 사람은 가난한 것이다.(839P)


부잣집 아들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

****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라고 한 것이다. 예라는 것은 재산이 있는 데서 생겨나고 없는 데서 사라진다. 그런 까닭에 군자가 부유하면 덕을 즐겨 실천하고 소인이 부유하면 자기 능력에 닿는 일을 한다. 못은 깊어야 고기가 있고, 산은 깊어야 짐승이 오가며 사람은 부유해야만 인의를 다른다. 부유한 사람이 세력을 얻으면, 세상에 더욱 드러나고 세력을 잃으면 빈객들이 갈 곳이 없어져 다르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만이 나라에서 더욱 심하다. 속담에 ‘천금을 가진 부잣집 아들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빈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하 사람은 모두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여들고 모두 이익을 위해 분명히 떠난다’라고 하는 것이다. (840P)


물건과 돈은 흐르는 물처럼 유통시켜야 한다

***엣날 월나라 왕 구천은 회계산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범려와 계연을 기용했다. 게연은 이렇게 말햇다.

‘전쟁이 있을 것을 알면 미리 방비해야 하고 때와 스임을 알면 그때 필요한 물건을 알게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분명하게 알면 모든 재물의 실정을 알 수 있습니다.(841P)


****쌀값이 비싸도 팔십 전을 넘지 않고, 사도 삼십 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하면 농민과 상인이 다 함께 이롭습니다. 쌀값을 안정시키고 물자를 고르게 유통시켜 관문이나 시장에 물건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길입니다. (841P)


***물자를 서로 교역하는데 상하기 쉬운 것을 팔지 않고 남겨 두면 안되고 물건을 쌓아두고 비싸질 때까지 오래 기다리면 안됩니다. 물건이 남아도는지 모자라는지를 살펴보면 그것이 귀한지 천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살 대로 비싸지면 헐값으로 돌아오고 쌀대로 싸지면 비싼 값으로 되돌아갑니다. 값이 비싸면 오물을 배설하듯이 내다팔고, 값이 싸면 구슬을 손에 넣듯이 사들여야 합니다. 물건과 돈은 흐르는 물처럼 원활하게 유통시켜야 합니다. (842P)


세력을 얻어 더욱 세상에 드러난다

****자공은 공자에게 배운 뒤 물러나 위나라에서 벼슬하고 조나라와 노나라 사이에서 물자를 샇아 두기도 하고, 팔기도 하여 재산을 모앗다. 공자의 칠십여 재자 중에서 자공이 가장 부유했다. 원헌은 술지게미나 살겨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녀서 후미진 뒷골목에 숨어 살았다. 자공느 사두마차를 타고 기마 행렬을 거느리며 비단을 페백으로 들고 제후들을 찾아가므로 가는 곳마다 오아들이 몸소 뜰까지 내려와 대등한 예로 맞이하지 않느자 가 없엇다. 대체로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자공이 공자를 모시고 다니며 도왔기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세력을 얻어 더욱 세상에 드러나는 일’ 아니겟는가? (843P)


시세 변동에 따라 새처럼 민첩하게 사고 팔라

****백규는 주나라 사람이다. 백규는 시세의 변동을 살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백규는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때는 사들이고 세상사람들이 사들일 때는 팔아넘겼다. 풍년이 들면 곡식은 사들이고 실과 옻은 파며, 흉년이 들어 누에고치가 나돌면 비단과 풀솜을 사들이고 곡식을 내다 팔았다.

돈을 불리려면 값싼 곡식을 사들이고 수호가을 늘리려면 좋은 종자를 섰다. 거친 음식을 달게 먹고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시기를 보아 나아가는 데는 마치 사나운 짐승이나 새처럼 재빨랐다. 그는 이렇게 말햇다.

“나는 산업을 운영할 때 마치 이윤과 여상이 계책을 괴하고 손자와 오자가 군사를 쓰고 상앙이 법을 시행하는 것과 같이 한다. 그런 까닭에 임기웅변하는 지혜가 없거나 일을 결단하는 용기가 없거나 주고받는 어짊이 없거나 지킬 바를 끝까지 지킬 수 없는 사람이면 내 방법을 배우고 싶어해도 끝까지 가르쳐 주지 않겠다.” (844~845P)


물자와 지역, 그리고 사람의 상호관계

****한나라가 일어나 천하를 통일하고 관문과 다리를 개방하고 산림과 소택의 나무를 베고 고기를 잡지 못하게 한 금령을 느슨하게 하였다. 다라서 부상(富商)과 대상(大商)들이 천하를 두루 다니게 되어 교역하는 물건이 유통되지 않는게 없으므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나라는 지방의 호걸들과 제후국의 권문세족들을 경사(經師)로 옮겨 살게 했다. 한나라는 장안에 도읍을 정했다. 장안 주변에 여러 개의 능침(陵寢)이 있으므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들었다. 땅이 좁고 사람이 많으므로 그곳 백성은 약아져서 장사를 일삼았다. (846~847P)


부귀해지려는 몸부림

***어진 사람이 묘당에서 도모하고 조정에서는 논의하며 신의를 지켜 절개에 죽고 동굴 속에서 숨어 사는 선비가 높은 명성을 얻으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은 다 부귀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청렴한 벼슬아치도 시간이 오래되면 더욱 부유해지고 공정한 장사꾼도 마침내 부유해진다. 부라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라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얻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건장한 병사가 전쟁에서 성을 공격할 때 먼저 오르고 적진을 점령하여 적군을 물리치며 적장을 베고 깃발을 빼앗으며,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끓는 물과 불의 어려움도 피하지 않는 것은 큰 상을 받기 위해서이다.

한가하게 노니는 공자들이 관과 칼을 장식하고 수레와 말을 줄지어 따르게 하는 것도 부귀를 과시하기 위함이다. 의사나 도사 그 밖의 여러 가지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이 노심초사하며 자신의 재능을 다하려는 것은 막대한 보수를 얻기 위해서이다. 벼슬아치가 글을 교묘하게 꾸며 법을 농간하고 도장과 문서를 위조하여 자신들에게 내려질 형벌마저 피하지 않는 것은 뇌물을 탐닉하기 때문이다. 농 공 상들이 저축하고 이익을 늘리는 것은 부를 구하고 재산을 불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혜와 능력을 다해 온 힘을 기울여서 남에게 재물을 넘겨주는 일은 엇을ㄹ 뿐이다.(853~855P)


***일 년을 살려거든 곡식을 심고, 십 년을 살려거든 나무를 심으려 백년을 살려거든 덕을 베풀어야 한다. 억이란 인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855P)


부를 얻는 데는 상업이 최상이다

****만일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고 처자식은 연약하며 세시가 되어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지 못하고, 가족이 모여 음식을 먹지 못하며 옷을 입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우면서도 이러한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비할 곳이 없을 만큼 못난 사람이다. 그래서 재물이 없는 사람은 힘서 일하고 재물이 조금있는 사람은 지혜를 짜내고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이익을 좇아 시간을 다툰다. 이것이 그 대강이다. (856P)


***생활을 꾸려 나감에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수입을 얻으려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 힘쓰는 바이다. 그러므로 농업으로 부를 얻는 것을 으뜸이라 하고 상업으로 부를 얻는 것은 그 다음이며, 간사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부를 얻는 것이 가장 저급하다. 동굴 속에 숨어사는 선비의 괴상한 행동도 없으면서 오랫동안 가난하고 천하게 살며 인의를 말하는 것만 글기는 것도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857P)


***대체로 일반 백성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며, 천 배 많으면 그의 일을 해주고, 만배 많으면 그 하인이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 대체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에는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못하며 비단에 수를 놓는 것이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말단의 생업인 상업이 가난한 사람이 부를 얻는 길임을 말한다. (857P)


부유해지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다

***촉 땅의 탁씨는 조상이 조나라 사람이다. 탁씨는 철을 캐고 제련하여 부자가 되었다.

완 당 공씨의 조상은 양나라 사람이다. 공씨는 철 제련을 직업으로 삼았다.

제나라 풍속에는 노예를 업신여기는데 조간만은 노예를 사랑하고 귀하게 대했다. 사람들은 사납고 교활한 노에를 싫어하지만 조간은 그런 자를 발탁하여 생선과 소금 장사를 시켜 이익을 얻었다.

선곡의 임시 조상은 독도(督道)의 창고 관리였다. 진(秦)나라가 싸움에서 졌을 때 호걸은 모두 앞을 다투어 금과 은과 옥을 차지했으나 임씨만은 창고의 곡식을 굴속에 감추어 두었다. 그 뒤 초나라와 한나라가 형양에서 대치하자 백성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릴 수없이 쌀 한 섬값이 1만전까지 뛰었다. 호걸들이 차지했던 금과 은과 옥은 모두 그의 것이 되어 부유해졌다. 부유한 사람들이 사치를 다툴 때 임씨는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농사와 목축에 힘썼다. 사람들은 밭과 가축을 살 때 싼 것만을 택하지만 임씨만은 값은 비싸도 질이 좋은 것을 골랐다. 이리하여 임시는 여러 대 동안 부유했다. (858~861P)


***대체로 아껴쓰고 부지런한 것은 생업을 다스리는 바른 길이다. 그렇지만 부자가 된 사람은 반드시 기이한 방법을 사용했다. 행상은 남자에게는 천한 일이지만 옹낙성은 그것으로 부자가 되었다. 연지(臙脂)를 파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옹백은 극서으로 천 금을 얻었고, 술장사는 하잖은 일이지만 장씨는 그것으로 천만금을 얻었다. 칼을 가는 것은 보잘 것 없는 기술이지만 질시는 그것으로써 제후들처럼 반찬 솥을 늘어놓고 식사를 했다. 양의 위를 삶아 말려 파는 것은 단순하고 하찮은 일이지만 탁씨는 그것으로 기마행렬을 거느리고 다녔다. 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대단치 않은 의술이지만 장리는 그것으로써 종을 쳐서 하인을 부르게 되엇다. 이는 모두 한 가지 일에 전심한 결과이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부유해지는 데에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진다. 천금의 부자는 한 도읍의 군주와 맞먹고, 거만금을 가진 부자는 왕과 즐거움을 같이 한다. (862~863P)


70. 태사공 자서

<태사공 자서>는 열전의 마지막 편으로 들어가 있지만 사실은 <사기>전체의 머리말에 해당한다. 요즘은 저자 머리말을 맨 앞에 놓지만 예전에는 끄트머리에 두었다.


마음속에 맺힌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사기>를 짓는다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입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그는 물러나 깊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시경>과 <서경 >의 뜻이 은미하고 말이 간략한 것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펼쳐 보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주나라 문왕)은 유리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 >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 >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 >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멀어 <국어 >를 남겻다. 손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 >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세상에 <여람(呂覽),여시춘추 >을 전했으며 한비는 진나라에 갇혀 <세난 >과 <고분 > 두 편을 남겼다. <시 >300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이다. (881~882P)


내가 저자라면

<사기열전>은 전반부는 흥미 전진했다. 내가 알고 있는 인물들도 많았고, 한 사람 한사람의 열전이라 재미있엇다. 그런데 후반부는 나라에 대한 언급도 많았기에 한 개인의 열전보다는 재미가 덜했다 내가 저자라면 책을 펴낼 때 인물과 나라는 분리해서 다른 두 권의 책으로 엮었을 것 같다.

사마천은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느라 꽤 힘들었을 것 같다. <혹리열전>, <유협열전>, <영행열전>, <골계열전>, <일자열전>등은 그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기는 하나 독자들이 이 방대한 것을 읽어내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힘들다.

우리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열웅들의 열전인데 사마천은 미천한 사람부터  해서 임금과 궁궐과 정치권과 조금이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다 언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마천은 영웅에 한정되지 않고 당양한 계층을 언급한 것이 훌륭한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어내어야 한다는 것은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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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Review [2] 학이시습 2012.10.02 4821
1626 # 22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file [3] 샐리올리브 2012.10.02 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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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 [고전읽기]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2] 미옥 2012.10.04 14928
1622 #23. 기억 꿈 사상_카를 융_Review_두번째 [1] 한젤리타 2012.10.07 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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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 회상, 꿈 그리고 사상 2 레몬 2012.10.08 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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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 [두번 읽기]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세린 2012.10.08 2662
1614 기억 꿈 사상. (두번읽기) file 학이시습 2012.10.08 3164
1613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 한 데까지 올림. 이번 주는 쉬겠습니다. [1] 레몬 2012.10.16 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