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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8일 03시 5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

 

융은 자신의 이론을분석심리학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프로이트의정신분석학이나 블로일러의심층심리학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융은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차원의집단무의식이 있다고 보고 인간의 마음은 여러 층으로 나뉜다. 우선 의식에 해당하는 자아가 있고, 그 아래에 개인 무의식(그림자)과 집단무의식(‘아니마아니무스’ ‘원형이 있는 곳)이 있고 마음의 맨 한가운데에 바로자기가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한마디로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라고 규정했다. 자기실현(Selfstverwirklichung)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부분에 있는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자기의 소리가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자기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그와 같이자기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이 융 자서전의 중심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대표작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황금꽃의 비밀> <정신의 에너지에 대하여> <심리학과 종교> <심리학과 연금술> <아이온> <욥에의 화답> <인간과 상징>

 

융이 말하는 본인의 자서전에 대하여

 

나의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의 생애는 외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빈약한 편이다. 나는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공허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기억, , 사상15)

 

<카를 융 기억 꿈 사상>이 책은 융의 제자요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으므로 거의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융 자신이 죽은 후에 출간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86세의 나이로 죽은 다음해인 1962년에 출간됨.

 

스위스 북동부 캐스빌에서 개신교 개혁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남. 융 가문은 본래 독일 마인츠에서 살았지만 할아버지(의사)때에 스위스 바젤로 이사하여 이후로 스위스 국적을 갖게 되었다. 융은 바젤 근교의 클라인 휘닝겐에서 성장했고 11세때에 바젤의 김나지움에 입학해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1985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바젤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취리히대학교 부설 병원에서 환자의 심리분석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정신치료법을 확립.

 

융은 어린시절부터 예민한 기질의 소유자였고 심령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거짓으로 신경증을 일츠켜서 학교를 빼먹기도 했으며 자신이 두가지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신앙에 대한 회의로 부친과 갈등을 빚기도 하고 특이한 꿈과 환상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훗날 그의 인생에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함.

 

1896년 부친사망으로 융은 대학에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의무를 맡아야했다. 1900년 의사자격시험을 앞두고 정신의학자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예빙의 책을 읽다가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 이때까지 정신의학은 아직 개척중인 분야였으며 정규과목으로 편입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음.

 

1903년 융은 엠마 라우센바흐와 결혼. 스위스에서도 손꼽히는 시계 제조업자의 딸인 엠마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서 융의 연구에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엠마는 훗날 프로이트와 서신을 교환하고 정신분석가로 활동할 만큼 지적이고 명석했기 때문에 유에게는 이상적인 배주자겸 동료 노릇을 해 주었다. 1905년 융은 취리히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더욱 명성이 높아짐.

 

독자적인 정신의학 이론의 전개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913년 취리히 의과대학에서 사임.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일시적인 고립에 빠져들었다. 융은방향상실 상태인 동시에완전히 허공에 떠 있는 느낌으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에 몰두. 이 시기에 불가사의한 신비현상을 체험했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는 대규모 재앙에 대한 환상을 보았으며 유령을 목격하거나 의미심장한 꿈을 꾸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때부터 융은 영지주의와 연금술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무의식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또 다른 인격의 목소리를 듣고 만다라를 치료의 도구로 응용하기도 했다.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작업을 수행했고, 그 부산물로 여러 권의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기록을 얻게 됨. 한 친구는융은 그 자신이 걸어 다니는 정신병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병원의 최고 의사이기도 했다.”라고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의사이면서 신비체험자였던 그는 과학의 방법만으로는 쉽게 규명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가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다고 확신했다.

 

융의 이론에 담겨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중 물리학자 볼프강 파올리는 융과 함께동시성이론을 연구했고,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와 조지프 캠벨은 융의 이론을 종교와 신화 연구에 적용하여 대중화 시켰다. 정신과의 임상 치료에서부터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융의 이론은 오늘날까지 자주 논의되고 또 설득력을 얻고 있다. 누구보다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본 인물이어서 세월이 갈수록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년

1922년 취리히 호수인근 볼링켄마을에 땅을 구입하고 수도 전기등 편의시설 없이 소박하게 별장을 짓는다. 설계, 공사를 직접참여하여 33년간이 증축을 하여 볼링켄별장을 얻는다. 그는 말년에 이곳에서 주로 기거했다.

1939년 융은 프로이트의 사망소식을 듣고프로이트라는 이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신사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추모사를 발표. 당시는 나치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로 나치 동조자라는 비난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인 내용이다. 1961년 튀스나흐트의 자택에서 사망. 융의 묘비에는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자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프로이트와 융의 결별에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사상이 다른점이지 않았을까.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의 근거를 둔 이론, 문화와 사상에 관심을 넓혀가는 반면 융은 정신분열증 연구에 근거를 두었다. 그들은 존경과 우정에서 시작하여 사상적 갈등을 거치고 결국 결별과 반목으로 마무리된다. 융이 프로이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갈등과 결별의 이유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에 근거를 둔 이론과 정신분열증 연구에 근거를 둔 융의 이론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프로이트와 만났을 당시에 이미 융은 중견학자였다. 국내외에서 수많은 환자와 손님이 찾아왔고 취리히 의대에서는 재학생 이외의 일반인 수강생도 많아 강의실은 초만원이었다. 두 사람은 19 년 차이이다. 나이차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학자 대 학자의 입장에서 교우할 수 있었다. 1906-1913까지 서신을 교환했으며 1907년 빈으로 찾아가 프로이트를 처음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첫만남에서 13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함. 프로이트 입장에서 융은 비유대인으로 유대인위주의 정신분석 운동에 대한 오해를 줄일 수도 있었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지닌 장점도 있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운동에서 융을 2인자로 인정하려는 의향이 드러냈지만 두 사람은 점차 입장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그 중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은 프로이트의 성 이론에 대한 융의 비판이었다. 프로이트의 어린 시절의 성적외상(트라우마)에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융으로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1909년 두 사람은 미국을 동행하게 되는데 이 여행이 결별을 가속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융은 프로이트가진리보다는 개인의 권위를 더욱 앞세운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프로이트의 이론이 일종의 도그마와 개인숭배로 변질되었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꼈다. 프로이트 역시 융이 종교나 신비주의 같은 미심쩍은고대의 잔재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불만을 느낌. 1910년 융은 국제 정신분석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됨.

1913년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된다. 그 후로 프로이트는 융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피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결별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는 증언이 있다. 융 역시 프로이트의 사상에서 받은 영향을 기꺼이 인정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없었더라면 나는 (심리학 분야의 여러 문제에 대한)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의견>

자서전이라고하지만 그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내적사건들의 연결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어릴때부터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장기에 한번쯤은 겪을법한 예민한 시기를 그는 좌충우돌 심하게 겪으면서 자랐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에피소드로 소개되어 있지만 몇번의 걸친 작문과제에서의 선생과의 마찰을 볼 때면 자신이 관심이 있는 부분에서는 최대한의 기량을 나타내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은 마음을 많이 쓰지 않았던 것도 타인의 시선에 좌지우지 되는 성격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평범하지 않았기에 출세의 길을 버리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리라. 대학시절에 아버지의 사망은 궁핍함으로 다가왔지만 그것에 흔들리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 결혼은 부유한 집안의 여자를 만나 평생 일과 돈이 엮이는 어려움은 없이 살았다. 내가 살고 있는 여기는(21세기) 융이 살았던 그때보다 정신병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훨씬 많다. 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는 그리 좋은 행로는 아닌듯하다. 모든 것이 스마트해지는 세상에서 인간만 스마트해지지 못하고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기차를 타면 바깥풍경이 뒤로 밀려난다. 달리는 것은 기차인데 배경은 가만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세계에 고속열차가 깔리고있다. 우리의 영혼이 그 속도를 따라 갈 수 있나. 따라가야 하나 싶다. 물리적인 속도는 빨라지지만 사람은 느려져야하는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많은 어려움을 토로하는 지인들을 본다. 그들의 삶에 무엇이 잘못되어 그 고통을 감내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원인이 있다는 생각도 떨칠 수가 없다. 융은 이야기한다. 우연은 없다고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고 말이다. ….그 원인을 자신 안에서 찾는 현명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과의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내가 공중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353) 자신의 내면에 변화를 감지하고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는 융.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예나 권력을 놓기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융은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본 것이 틀림없다. 자기탐구는 이럴 때 쓸려고 하는 것이지 싶다. 나도 2012년 자기탐구 과제를 잘 해낼 수 있을까……..몇 해전 엠마뉘엘 수녀자서전을 읽었는데, 81세에 책을 쓰기 시작하여 98세 이르기까지 수정, 보완하여 생에 최초이자 최후의 책을 준비. 사후출간을 원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사후에 책은 출판되었다. 그녀는 ‘100살입니다. 이제야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한세기를 살다간 사람으로 카이로의 넝마주이라고 불리던 그녀이다. 누구보다 낮은 곳에서 몸으로 사랑을 실천해 보인 우리시대의 신화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생을 정리하면서 그것도 사전에 출간되기를 꺼려 사후에 출간을 약속하고 넘겨주었다는 원고이다. 너도 나도 자신의 생을 광고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광고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삶이 자유롭지 못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라는 추측을 할 뿐 진실로 어떤 이유에서 사후출간을 원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융은 어린시절부터 경험한 강렬한 꿈과 환상 등 자신의 신비한 경험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연구하면서 신화와 역사 연금술 등에 심리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여기에서 집단무의식이론이 나왔는데 이 개념은 원형이론과 결합되어 종교심리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융의 업적은 오늘날 심리학뿐 아니라 종교와 문학 등 인문 전분야의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도 자서전을 쓰기를 꺼려했다. 이 기록도 타인의 손을 빌려 적었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이유로 자서전 출간을 거부했다. 그래서 였을까. 사후에 출간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동의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된다고 했다. 단지 여름 동안 만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으로 생을 지탱하고 뿌리는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식물처럼.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 하루살이 같은 덧없는 현상이 자신의 인생이라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다간 사람들도 스스로는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고 누군가에게 내세울만한 생이라는 자부심을 갖기에는 역부족인가보다. 세인의 평가나 타인의 목소리에 결코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프로이드와 융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있었다. 물론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의 세계가 다르고 그들의 꿈 이야기 중 몇 가지는 흥미를 끌기는 했었다.

 

참조 :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A.야페 편집/김영사/조성기 옮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Popup.nhn?contents_id=6234&is_print=Y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2850&mobile&categoryId=305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833635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두 번 읽기 추가 글

두 번 읽기 느낌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11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selbst: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 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제 나이 83세에 나는 내 생애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일을 감행하게 되었다. 나는 단지 직접적인 진술,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야기들이 사실 그대로인가 하는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나의옛이야기, ‘나의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12 나는 내가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인간은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지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은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지점도 단지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13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엄밀히 말해 나의 생애에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영원한 불멸의 세계가 무상(無常)한 세계로 침투했던 사건들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적 체험들을 주로 이야기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나의 꿈과 환상들이 포함된다. 그것들은 동시에 나의 과학적인 작업에서 원재료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글거리는 현무암 용암류와도 같아서 그것으로부터 가공될 돌이 결정(結晶)되어 나오는 법이다.

 

14 나의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일생을 사로잡은 꿈, 유년시절

 

그러나 낮이 되면 새로운 위험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나 자신과 불화를 느끼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26 어머니의 오랜 부재로 나는 무척 힘들었다. 그 후로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출발하면서 함께 가져가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나중에는 인생 초기에 이러한 인상들이 수정되었다. 나는 친구를 믿었다가 그들로 인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27 햇살을 나뭇잎들 사이로 빛나고 누렇게 물든 잎들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31-33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초의 꿈을 우연히 꾸었다. 그 꿈은 이럴 테면 일생 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그때 나는 서너 살이었다. 목사관은 라우펜성 근처에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교회 관리인의 농가 뒤쪽으로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꿈에서 나는 그 초원에 서 있었다. 한 순간 나는 거기서 테두리가 쳐져 있는 컴컴한 직사각형 구멍이 땅바닥에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전에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그 구멍으로 다가가서 그 아래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돌계단이 저 밑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무서운 마음으로 머뭇거리면서 나는 아래로 내려갔다. 밑바닥에는 녹색커튼으로 가려진 둥근 아치형 문이 하나 있었다. 그 커튼은 방직된 직물이나 수놓은 비단을 만든 듯 크고 묵직하여 무척 호화로워 보였다. 그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나는 커튼을 옆으로 밀어젖혔다. 희미한 빛 가운데 길이 10미터가량 되는 장방형 방이 눈에 들어왔다. 둥근 천장은 돌들로 꾸며져 있었고 바닥 역시 포석들로 뎦여 있었다. 중앙에는 붉은 양탄자가 입구에서 낮은 단까지 깔려 있었다. 단 위에는 말할 수 없이 화려한 황금보좌가 놓여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붉은 방석이 보좌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웅장한 보좌로 동화 속 임금의 보좌 그대로였다! 그 위에 무언가가 서 있었다. 그것은 천장에 거의 닿을 정도로 거대한 형상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나무기둥인 줄 알았다. 그 직경은 50~60센티미터가량 되고 높이는 4~5미터쯤 되었다. 그 형상은 기묘하게 조립되어 있었다. 피부와 살아 있는 살로 만들어졌으며, 꼭대기에는 얼굴도 머리칼도 없는 둥근 공 모양의 머리 비슷한 것이 붙어 있었다. 다만 정수리에 눈이 하나 있었는데, 그 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위쪽만 응시하고 있었다. 창문도 없고 빛도 들어오지 않는데 방은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그 형상의 머리 위에는 어떤 밝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형상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도 어느 순간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보좌에서 내려와 나에게 기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려움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 견딜 수 없는 순간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바깥에서인 듯 위에서 들려왔다. 어머니가 외쳤다. “, 그를 좀 보라구. 저것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34 초원의 구멍은 아마도 무덤을 의미할 것이다. 무덤 그 자체는 일종의 지하사원이고, 그곳의 녹색커튼은 초원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커튼은 녹색식물로 뒤덮인 지구의 신비를 나타내는 셈이다. 그 양탄자는 붉은 피였다.

 

37 , 이들 점잖고 쓸모 있고 건장한 사람들은 나에게 낙천적인 올챙이들처럼 여겨진다. 그 올챙이들은 아주 얕은 빗물 웅덩이에 가득 모여들어 햇볕을 받으며 즐겁게 꼬리치고 있으나 바로 다음날에 웅덩이가 말라버릴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42 나는 나만의 방식을 혼자서 놀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무엇을 하면서 놀았는지 기억할 수는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나는 놀이에 열중했고 노는 동안에 누가 지켜보거나 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45 ‘황금빛 햇살이 초록 나뭇잎들 사이로 비치고 있는밝은 대낮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차츰 인식해가고 있었다.

 

48 그 무렵 나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사용하는, 래커칠을 한 노란 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작은 자물쇠가 붙어 있었다. 그 자의 끝부분에 나는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나는 검정 구두를 신은 길이 6센티미터쯤 되는 성인 남자 인형를 새겼다. 인형을 잉크로 까맣게 칠할 수 자에서 잘라내 필통에 넣어두었다. 그 속에는 내가 인형을 위해서 만든 작은 침대도 들어 있었다. 나는 모직옷감 조각으로 인형의 상의까지 만들어주었다. 그 인형 옆에 라인강에서 주워온 매끄럽고 길쭉한 검은 돌을 놓아두었다. 그 돌은 아래쪽과 위쪽을 나누어 다채롭게 물감을 칠했다. 오랫동안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돌이었다. 그것은 인형의 돌이 되었다.

 

49 거기 들보 위로 기어올라가 필통을 열고 그 인형과 그 돌을 바라보곤 했다.

 

새로운 종이두루마리 하나를 보탠다는 것은 항상 엄숙한 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이러한 행위의 의미 또는 그와 같은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결코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비밀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가 자문해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로운 일이었다. 이와 같이 비밀을 소유한다는 것은 당시 나의 성격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것을 내 이른 소년시절의 본질적인 요소, 즉 내게는 가장 뜻 깊은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유년시절의 남근상 꿈에 대해서도 누구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제수이트 역시 말해서는 안 되는 신비로운 영역에 속했다. 돌과 함께 있었던 그 작은 나무인형은 아직 무의식적이며 유치하긴 하나 그 비밀을 형상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50 의식의 차원에서 나는 기독교적 의미로 종교적이었다.

 

52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학창시절

 

나는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56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목사요 나는 그보다 더 가난한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구도 바닥은 구멍이 뚫려, 젖은 양말을 신은 채 여섯 시간이나 수업을 받으며 앉아 있어야 했다.

 

59 여든세 살의 나이에 지난날의 기억들을 적어나가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주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65 부모는 여러 의사를 찾아가 상담했다. 의사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빈터투어에 있는 친척들에게 보내 휴가를 지내도록 했다. 거기에는 나에게 끝없는 황홀감을 안겨준 기차역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은 이전 그대로였다.

 

66 모든 속임수는 끝이 났다! 여기서 나는 신경증(Neurose)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차츰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나를 밀쳐 넘어뜨린 친구에게 나는 한 번도 심하게 화를 내지 않은 것이었다. 그 친구는 이를 테면 그 사건에 끼워진것에 불과하며 내 편에서 그 사건을 간교하게 조정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자 자신에게 분노했고 동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옳지 않은 일을 했으며 나 자신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그 후로 부모님이 나를 염려한다거나 동정하는 어조로 나에게 말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67 나는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돌 하나, 식물 하나, 그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형용할 수 없는 듯이 여겨졌다. 그 무렵 나는 자연으로 빠져들면서, 말하자면 자연의 본질 속으로 숨어들면서 모든 인간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68 전에는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옆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지금은가 스스로 하고자 한다.

 

70 그때 몹시 난처하게도 나 자신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수학도 잘 모르고 자신감이 없는 학생이었으나, 다른 하나는 위대한 권위를 지닌 중요한 인물로 경시해서는 안 될 사람이며 그 공장주보다 더 막강하고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74 가장 무서운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 죄를 짓는 자는 저주를 받아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76 그런 고백은 부모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줄 것이라는 생각이 그 유혹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78 하느님의 의지가 무엇이며 하느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전에는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하느님이야말로 이런 절망적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81 인간의 용기를 시험할 때 하느님은 비록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83 나의 청년시절 전체는 그 비밀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비밀로 인하여 나는 거의 참을 수 없는 고독에 빠졌다. 오늘날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 그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낸 것이 하나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는 이미 그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형성되었다.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85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 천 년 동안 살아 있다.’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87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 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 되고 믿어야 해.”나는 생각했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는 체념한 듯 몸을 돌렸다.

종교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조건 없는 믿음이라고.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 누가 놀이까지도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나는 그 놀이를 그만두었다.

 

89 심지어 내가 고소를 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알리바이 비망록을 자주 작성하기까지 했다. 내가 실제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 참 편했다. 그때는 적어도 무슨 이유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90 인간들은 우스꽝스러운 의상을 걸치고 비열함과 어리석음, 허영심, 위선과 혐오스러운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91 나의 전생애에 걸친 제1의 인경과 제2의 인격 간의 대립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 말하는 그런분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2의 인격은 내 생애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2의 인격은 전형적인 형상인데도 대개 의식이 가진 이해력으로는 사람이 제2의 인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92 하느님의 의지는 매일매일 탐색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느님은 인간들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렇게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말도록 금하고, 심지어 지옥불길의 영원한 저주로 벌을 주기까지 한다. 악마는 오랫동안 내 생각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내게 악마는 힘센 사람의 집을 지키는 못된 경비견처럼 여겨졌다.

 

97 나는 어머니 역시 두 개의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하나는 악의 없고 인간적이었으며, 거기에 반해 또 하나는 으스스했다. 그것은 가끔씩만 나타났으나 그럴 때마다 예기치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럴 때 어머니는 독백을 하듯 말했으나 내게는 유용한 말들이었고, 보통 내 가장 깊은 곳을 찔렀기 때문에 나는 할말을 잃곤 했다

 

100 어머니의 두 인격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유년시절에 어머니에 대해 불안한 꿈들을 꾸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녀는 낮에는 사랑스러운 어머니였으나 밤에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했다. 그 시간 어머니는 이상한 동물이기도 한 예언자처럼, 곰의 동굴에 사는 여사제처럼 보였다. 고태적이고 잔인했다. 진리와 자연과도 같이 잔인했다. 그때 어머니는 내가 자연의 마음(인간 본성에서 솟아나는 것으로, 본성 고유의 지혜를 의미하며 사물을 거침없이 말하는 특징이 있다)이라고 불러왔던 그것의 화신이었다.

 

진정한 인식은 본능에서 비롯되거나 타인과의 신비로운 교제에 기인한다. 그것은 비개인적인 관조행위를 통해 보는 배후의 눈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103 나는 어머니를 한정된 범위에서만 신뢰하게 되었고, 그러자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이제는 어머니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104 그때 삼위일체에 관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는 나의 관심을 끄는 뭔가가 있었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 문제였는데, 그 모순이 내 마음을 끌었다. 나는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되는 순간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 순간이 다가왔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삼위일체교리를 공부할 차례구나. 하지만 이 부분은 넘어가기로 하자. 사실 이 대목은 잘 모른다.”나는 한편 아버지의 정직성에 감탄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깊이 실망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삼위일체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111 종교란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3 나에게는 자아라는 요소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측면 즉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든 저런 형태든 자아는 뭔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자아는 또한 온갖 자기기만과 오해, 기분 감정, 열정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아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훨씬 많이 겪었다. 자아는 유치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이기적이고 고집이 세며, 애정결핍이며, 탐욕스럽고 공정하지 못하며, 민감하고 게으르며, 무책임하며 그의 나쁜 것들 투성이였다. 유감스럽게도 자아는 덕과 재능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덕과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게 되면 시샘하면서도 경탄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본질을 이런 자아와 유사하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123 독서는 재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기분전환이 되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제2의 인격이 야기한 그 작업(독서인 듯?)은 나를 점점 더 침울하게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문제의 영역에서 나는 단지 굳게 잠긴 문들만 만났고, 어떤 문이 우연히 열렸다 해도 나는 결국 실망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딴 사람들은 정말 모두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나는 완전히 혼자라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그 문제에 관해 나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어디서도 대화의 접촉점을 찾을 수 없었고, 그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소외감과 불신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 것들도 나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왜 학식있는 책들 가운데 여기에 관한 것은 없단 말인가? 내가 그런 경험을 한 유일한 인간이란 말인가? 왜 내가 그 유일한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가? 내가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빛과 어둠은 비록 중압감을 주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이해될 수 있는 사실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28 나의 비탄과 분노는 위협적으로 말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때 내가 이미 이전에 나 자신 안에서 여러 번 관찰했던 어떤 일이 일어났다. 마치 시끄러운 공간에서 방음문을 닫아버린 것과도 같이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은 냉정한 호기심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너는 흥분하고 있구나. 물론 그 선생은 너의 천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다. 다시 말해 너와 똑같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도 너와 마찬가지로 의심 많은 사람인 것이다. 너는 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믿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며 소박하고 한눈에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좋아하거나 호기심이 있는 부분에 대하여 열심히 정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보통은 한 두 가지 혹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력이나 배경을 보고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듯하다. 대부분은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고, 또는 잘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우를 범한다. 나도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내가 상대에게 이해 받지 못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흥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상대에게 마음의 문은 닫혀버린다. 문을 닫고 돌아서버린 사람과는 왠만해선 그 문으로 교통하기는 어려운듯하다. 이는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닫아버린 나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130 나는 항온동물이면 모두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와 아주 유사하고 우리의 무지를 나누어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그 동물들을 좋아했던 것은 그것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혼을 가지고 있으며, 내가 믿기로는 우리가 그 동물들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물들도 우리처럼 기쁨과 슬픔, 사람과 미움,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불안과 신뢰를 경험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언어, 예리한 의식, 과학 들을 제외한 존재의 온갖 본질적인 요소들을 공유하는 셈이었다. 나는 그 제외된 요소들을 인습대로 경탄해 마지않았지만, 인간들을 신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고 벗어나게 하여 동물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타락으로 이끌 가능성이 그 요소들에 있음을 발견했다. 동물들은 사랑스럽고 충직하며 변덕스럽지 않고 믿을 만하였으나, 인간들은 나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동물이라고는 사람 말고는 손을 댈 수 없는 사람이 나였다. 따뜻한 체온이 왜 그렇게 낯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지난해 작은아이(1)가 동물을 원했다. 고양이를 이야기하다가 강아지를 이야기하다가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우리집 구성원 중에는 나를 제외하면 강아지를 모두 좋아한다. 사실 내가 집에서 늘 있는 사람이 아니니 상관이 덜하기도 했다. 아이와의 협상결과 강아지를 사주면 오락을 안 하기로 하고서 강아지 한 마리를 들였다. 털이 많이 빠지지 않고 사람에게 살갑다는 종을 골랐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주말에 남편과 아이 나 이렇게 갔다. 남편이 보아두었다는 강아지는 커다란 집에 친구도 없이 혼자 있었다. 조금 낑낑거렸던 것 같다. 그것이 울고 있는 것인지는 그 당시는 나는 몰랐다.  집에 강아지 식구를 늘리고 분주해졌다. 집도 만들어주고 배변을 가리게 하기 위하여 준비도 하고 첫날밤은 아이가 계속 울어댔다. 낯설은 환경 탓이었으리라. 다음날도 조금 울다가 바로 적응을 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미순이다. 촌스러운 여자아이 이름으로 내가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막내딸로 불렀다. 강아지를 집에 들일 때만해도 나는 그 곁에 가지도 않을 것이니 아들과 남편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하기로 했는데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미순이의 일거수 일투족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사람이 나고 들 때면 쪼르륵 달려와서 배웅을 하고 맞이하고 하면서 꼬리를 흔들어댔다. 언제나 사람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동물은 강아지 말고는 없는 듯하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은 사랑을 하고 남을 배려하고 마음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한다. 사람의 이런 행위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마음으로 동할 때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강아지가 무뇌는 아닌듯하다. 다만 강아지란 동물은 사람과 그렇게 관계 맺어진 역할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끔 사람도 변덕스럽지 않은 경우를 본다. 태산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누군가에게 늘 에너지를 주고 편안한 사람. 융은 말한다. ‘인간들은 나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라고 어제 인터넷 포털에 한 유명 연예인의 자살소동이 뉴스화되었다.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회사에서는 사태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고 정작 본인은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늘 생각을 해본다. 과연 자신의 이해와 별개로 타인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를….

 

131 인간과정상적인동물들은 자립한 신의 분신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발적으로 돌아다니며 서식처를 정할 수 있었다. 그 반대로 식물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장소에 묶여 있었다.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나무들은 특히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이와 같은 인상은 내가 고딕양식의 대성당들을 알게 됐을 때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데 거기서는 우주의 무한함, 의미와 무의미의 혼돈, 주관 없는 의도성과 기계적인 법칙의 혼란 들이 돌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돌은 존재의 끝없는 신비, 영혼의 진수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나는 돌과 나 자신이 서로 유사하다고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 그 양쪽에 다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나무와 풀 바위 가장 잘 어울리는 자연의 조화이다. 동물적인 삶을 사는 것도 식물적인 삶을 사는 것도 바위와 같이 같은 자리에서 바람과 비에 깎이고 씻기면서 변형되어 가는 것도 어쩌면 그 안에 깃든 영혼의 자기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스스로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식물의 삶도 좋다. 그리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자신의 안온함을 위하여 생존을 위하여 열심인 동물적인 삶도 필요하다. 이제는 점차 식물에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이를 먹음인가. 철이 듦인가. 자연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 옴인가.

 

133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큰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이것들을 다른 모든 사람은 거의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으며, 항상 조화와 이해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에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 철학자가 나왔다. 그는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창조의 섭리나 피조물의 조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류역사의 고통스러운 과정과 자연의 잔인성에는 일종의 결함, 즉 세계창조의지의 맹목성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135 지성은 인간 마음의 기능으로, 마치 한 아이가 태양의 눈이 멀기를 기대하면서 태양을 향해 들고 있는 지극히 작은 거울 한 조각과도 같다.

 

136 행복과 불행은 용돈의 액수보다 더 깊은 원인에 의해 좌우되었다. 나는 이전보다 더 많은 더 좋은 친구를 얻었다. 내 발을 받쳐주는 훨씬 든든한 기반을 느끼며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갖게 되었다.

 

이번에도 나의 흥미를 불러 일으킨 작문 주제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그 작문을 특별히 공을 들여 썼고 나의 문체를 아주 면밀하게 다듬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선생은 그 작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융의 작문이 있는데, 아주 훌륭한 작문이긴 하지만 너무 쉽게 내갈겨 써서 진지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성의 없는 태도로는 인생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거야. 인생이란 진지함과 성실성, 노동과 노력이 요구되는 법이야. D군의 작문을 보라구. 그건 너의 작문만큼 우수하지는 않지만 그 대신 정직하고 성실하며 근면해. 그것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길이란 말이야.”

성공하는 인생이란 그림이 각자에게 있다. 융의 선생도 그런 기준이 보편적인 사람인듯하다. 타인의 기준에 맞는 인생에서는 진지하게 노력하는 성실성 대단히 중요한 성공의 키이다. 진지하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이룰 확률은 희박하다. 융의 과제를 바라보는 선생의 눈도 진지하지 못함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쉬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깊이가 더 있는 법이다. 어쩌면 학생의 신분에서 탁월한 실력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많은 부분이다.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있지는 않지만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주변구성원은 많이 중요하다. 선택권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양육상태가 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을 보면 누군가의 책임을 논하지 전에 인간이란 존재가 세상에 떨어져서 한 평생을 살아가는 여정은 매우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이다. 가끔 타인의 인생을 보며 어디에서 어떤 매듭을 잘 못 묶어서 그럴까. 또는 어떤 선택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생각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138 그 후 나는 학우들과 있을 때는 이런비밀스러운 사안들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어른들 중에서는 나를 허풍쟁이나 사기꾼으로 보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내 안에서 두 세계로 나누어진 분리를 지양하려는 나의 노력이 저지되고 마비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보통의 일상적인 존재로부터 무한한 신의 세계로 밀어 넣는 사건들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40 자연과학에서는 의미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었고, 종교학에서는 경험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었다. 자연과학은 제1의 인격의 정신적 욕구에 아주 잘 부합하였고, 그에 반해서 인문학이나 역사과목은 제2의 인격을 위한 일종의 유익한 시청각수업인 셈이었다.

 

142 나는 친척어른과 그의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때마다 불편해지게 되었다. 습성화된 양심의 가책으로 목요일은 나에게 액운의 날이었다. 나는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안정되고 편안한 이런 세계에서 점점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이따금 떨어지는, 정신적으로 감흥을 일으키는 물방울들을 갈급해 했지만 말이다. 나 자신이 성실치 못해 버림을 받은 듯이 여겨졌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너는 속이는 자다. 너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너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 그들이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확고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가난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종교가 동시에 보수를 받는 직업이라고 해서, 또한 하느님 자신이 어떻게 한 인간을 영적인 세계질서로부터 떼어내 신성모독을 하도록 저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를 받아들이고 그 것을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만 해.” 물론 이런 노력이 지금까지 제대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144 세속적인 사람들은 물론 그다지 고결하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훨씬 호감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지녔고 신자들보다 더 사교적이고 명랑하고 따뜻하면서 진실했다.

 

145 그 무렵 누가 나에게 무엇이 될 생각이냐고 물으면 나는 문헌학자가 되려 한다고 대답하면서 속으로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고고학을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가시간, 특히 방학기간이면 집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어머니에게 달려가서심심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고 푸념하던 시기는 오래 전에 지나갔다. 언제나 방학은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굉장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적어도 여름이면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작셀른에서 휴가를 보내느라 집을 떠나 있었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시기에는 곁에 누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못할 때가 많다. 혼자 있는 시간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아마도 융은 아버지의 종교관과 부딪히는 부분이 없지 않았을 테니 아버지가 떠난 집안에 방학이 오면 즐거움이 배가되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시간이었지 싶다.

 

147 증류주 제조장을 방문해서 술을 시음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고전의 구절이 문자 그대로 실현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그 음료는 술이므로……………

 

나는 다양한 작은 술잔에 너무나 고무되어 예기치 않았던, 전혀 새로운 의식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안과 밖이 따로 없고 나와 타인, 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조심스러움과 소심함도 없었다. 땅과 하늘, 세계와 그 안에서기고 날고’, 돌고, 올라가고, 떨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 좋게 의기양양하게 술에 취했다. 그것은 마치 환희에 넘치는 깊은 생각의 바다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격렬한 파도의 너울거림 때문에 나는 눈과 손과 발로써 모든 단단한 대상을 부여잡고 출렁이는 거리에서, 기울어지는 집과 나무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만 했다. 나는 생각했다. ‘굉장하구나, 단지 유감스럽게도 약간 도가 지나쳤을 뿐인데.’이 경험의 결과는 괴로운 편이었으나 그것은 아름다움과 감각에 대한 하나의 발견과 예감으로 남았다.

 

149 아버지가 차표를 내 손에 쥐어주면서 말했다. “너는 혼자라도 리기산 꼭대기까지 올라 갈 수 있다. 나는 여기 남아 있겠다. 두 사람 다 올라가려면 차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말이야. 조심하고 어디서나 떨어지지 않도록 해라.”

나는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웅장하고 높은 산! 그 산은 아득한 유년시절에 바라보았던 그 불타오르는 듯한 산들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나는 사실 성인남자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이번 여행을 위해 대나무지팡이와 영국식 경마기수모자를 샀는데, 그것은 세계여행에 걸맞은 것들이었다. 이제 나는 이 어마어마한 산에 와 있다! 나는 산과 나 둘 중에서 어느 편이 더 큰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엄청난 연기와 소리를 뿜어내면서 그 경이로운 기관차가 아찔하게 높은 산꼭대기로 흔들거리며 나를 실어올렸다. 점점 더 새로운 깊고 먼 산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다가 마침내 나는 산꼭대기에 서게 되었다. 산소가 희박한 익숙지 않은 새로운 공기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넓은 조망 가운데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세계다. 나의 세계, 고유한 세계요, 그 비밀이다. 이곳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없는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있는 곳이다.’ 거대한 낭떠러지들이 있어서 나는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곳은 엄숙했고 사람들은 정중하고 조용히 처신해야만 했다. 그들은 신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신의 세계가 현실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여행은 아버지가 일찍이 나에게 준 것들 중에서 가장 값지고 가장 좋은 선물이었다. 이때 받은 인상이 너무나 깊었으므로 그 뒤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배경이 되는 순간이 있다. 가끔은 사람이 그런 경우도 있고 가끔은 특정한 순간이 마음에 꽂히는 경우도 있다. 전후에 많은 사정들이 있었겠지만 모든 것이 잊혀지고 한 순간만 마음속에 살아서 펄떡이는 것을 본다. 융에게는 이날의 여행이 그런 기억 중 하나인듯하다. 아버지와 관련하여.

 

그러나 제1의 인격 역시 이 여행에서 자기가 바라는 바를 얻었다. 그가 받은 인상들이 대부분의 내 생애 동안 항상 생생하게 남아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성숙하고 독립된 존재로 여겼다. 나는 딱딱한 검은 모자를 쓰고 비싼 산책용 지팡이를 들고, 사람을 압도하는 아주 우아한 루체른부두의 호텔 테라스나 비츠나우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에서, 아침햇살에 빛나는 줄무늬 차양 아래 하얀 보가 덮인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누런 버터와 갖가지 잼을 바른 크루아상을 먹으면서, 긴 여름날을 보내기 위한 휴가계획을 세운다. 커피를 마신 후에는 들뜨지 않고 차분한 걸음걸이로 기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그 기선은 사람들을 고트하르트 쪽으로 데려가 꼭대기에 반짝이는 빙하가 덮여 있는 거대한 산들의 기슭으로 실어다 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수십 년 동안 내가 과로로 피곤해져 휴식처를 찾으려고 할 적마다 되살아나곤 했다. 사실 나는 이런 멋진 여행을 하리라 항상 되풀이해서 스스로 다짐했지만 한 번도 그 다짐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휴식을 생각할 때 그리는 그림. 그곳에 함께 있는 차가 늘 커피이다. 왜일까 생각해보면 커피가 가지고 있는 진한 맛. 그리고 쓴맛. 인생의 맛과 어우러지는 맛이라서? 피로를 녹여줄 카페인의 함량이 있어서. 어쨌든 커다란 대청마루에 정갈한 다기를 놓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마시는 차는 왠지 명상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에너지를 채우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에너지를 쓰는 행위라는 느낌이다. 반하여 전망이 좋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는 좋은 음료중의 하나임은 분명한 듯. 아쉬운 점은 한번도 그 다짐을 지키기 못했다는 융의 말이다. 그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강박일까. 짧지 않은 생을 살다가 의사이면서 학자인 그가 여유가 없었다고 하면 마음의 여유가 없었겠지. 행하지 못하는 사유는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151 아버지가 나에게 특히 사랑스럽게 여겨진 것은 바로 그의 결점과 부족함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 어떻게 사람이 성자와 함께 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 성자는 은둔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은둔처는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생각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여겼다. 즉 가족들은 한 집에 살고 나는 다른 곳, 집에서 약간 떨어진 막사에 사는 것 말이다. 나는 그 오두막에 수많은 책과 책상을 갖다 놓고, 불을 피워 밤을 굽기도 하고 불 위에 삼각받침에 수프통을 걸어놓을 것이다. 성스러운 은둔자로서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 대신 나 자신만의 개인예배처를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이 성자처럼 살기를 때론 바라지만 정작 성자하고는 살지 못할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숨막히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결혼의 형태도 이렇게 진화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형태가 진화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니

개인예배처를 갖는 것은 아주 좋겠다. 예배라고 해봐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의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 또 다른 존재의 신과 교통하는 행위. 모든 자연에 마음을 여는 행위를 하는 곳으로.

 

153 그녀는 외떨어진 순진무구한 세상에 살고 있고, 나는 창조의 화려함과 잔혹함 속에 타락한 이 현실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이 만남은 외견상 전혀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어서, 이 만남은 며칠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길가의 기념비처럼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그 무렵 내 인생은 서로 연관되지 않는 개별적인 경험들로 이루어지는 그런 천진한 상태에 있었다. 누가 보아도 외견은 평범하고 무의미한데 나만 상태가 다른 경험을 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경험인데. 특별하고 오래가는 기억들이 있다. 죽음에 가까이 가면 어떤 것이 이런 느낌으로 남아있을까 궁금해짐.

 

158 식물도 나의 관심을 끌긴 했으나 그건 과학적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식물은 뽑아서 말라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오직 성장하여 꽃을 피우는 데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숨겨진 비밀스러운 의미, 일종의 신의 뜻이었다. 식물은 외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철학적인 경탄을 가지고 바라보아야만 했다. 생물학자들이 식물에 대해 말하는 것은 흥미있기는 했으나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분명히 설명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식물은 기독교 신앙이나 의지의 부정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식물은 분명히 순진무구한 신성한 상태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식물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었다. 여기에 반해 곤충은 일정의 변성식물, 즉 변조된 꽃이요 열매였다. 곤충은 감히 기묘한 발이나 가늘고 긴 다리로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꽃잎이나 꽃받침처럼 생긴 날개로 여기저기 날아다니면서 식물의 해충 노릇을 해댔다. 이러한 불법적인 행위로 인하여 곤충은 집단처형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특히 쌍무늬바구미나 유충들이 그러한 응징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존재에 대한 동정은 오직 항온동물에 국한되었다. 개구리 두꺼비만은 그것들이 인간과 닮았다고 해서 변온동물에서 제외되었다. 등뼈가 없고 마디가 있는 몸은 딱딱한 외골격으로 싸여있는 동물을 곤충이라고 한다.

식물과 동물. 사람이 동물이라 동물의 생리에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겠지. 식물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일은 어렵지만 조금씩 흥미를 갖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의 삶이 특별히 의도되었다면 그것은 신의 세계이다. 조물주의 세계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키가 어디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겠지. 나는 여기까지만 생각하게 된다. 더 심오하게 들어가서 카오스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지는 않은 듯하다.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자연이 있다. 우주의 세계….이 책을 읽다가 달을 보게 되었다. 늦은 밤 심오한 책을 읽으려니 마음이 딱 잡히지 않아서였다.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보니 검푸른 하늘이 보인다. 파랗던 하늘은 검게 하얗던 구름은 검푸르게 그리고 그곳에 자태가 고운 달이 있었다. 다 보여주는 것보다 조금 덜 보여주고 가려주는 것이 훨씬 섹시하다. 그날의 달도 그랬다. 구름 속에 안겼다가 나왔다가 마치 푸른 초원을 달리다가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숨바꼭질하는 연인들처럼. 달과 구름의 유희가 그날 그랬다. 아름다운 연애장면을 마음에 담아놓은 하루였음.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나는 궁핍한 시절을 굳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시절에는 하챦은 물건까지도 아끼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는 언젠가 여송연 한 통을 선물로 받은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왕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요즘 내게 온 현실이 그렇다. 굳이 많이 궁핍하다고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겠다. 다만 나는 그렇다는 것이다. 밥벌이의 구분이 확실한 나 같은 사람은 내가 가난하면 가난한 것이다. 늘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요 몇 달은 궁핍을 생각하게 하고 밥벌이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시간을 할애한다. 이유를 살펴보니 내가 내려놓은 밥벌이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거다.

 

167 1의 인격의 눈으로 바라본 나라는 인간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보통수준의 재능을 갖춘 청년으로, 허황된 야심과 세련되지 못한 거친 기질, 모호한 태도 들을 지니고 있었다. 즉시 천진난만할 정도로 흥분하는가 하면, 또 금방 변덕스럽게 유치한 실망에 빠지기도 했다. 깊은 내적인 본질로는 세상에 등을 돌린 반계몽주의자였다. 2의 인격은 제1의 인격을 까다롭고 배은망덕한 도덕적과제, 종결되어야 할 일종의 숙제로 여겼다. 이런 과제는 일련의 결정으로 인하여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 결점이란 때때로 부리는 게으름, 의기소침, 침울, 아무도 가치를 두지 않는 이념이나 사물들에 대한 어리석은 열광, 혼자 착각하는 우정, 좁은 마음. 편견 우둔함. 타인에 대한 이해부족, 세계관에 대한 모호성과 혼란 기독교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독교인이 아닌 것도 아닌 이중성 등이 있다.

 

170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그 형체가 브로켄의 유령(높은 산에서 비쳐오는 햇빛으로 관찰자의 그림자가 짙은 안개 속에 비쳐보이는 현상)임을 즉각 알아차렸다. 그것은 소용돌이치는 안개가 내가 들고 가는 불빛으로 비친 나 자신의 그림자였다. 나는 또한 그 작은 등불이 나의 의식이라는 것과 그것이 내가 지닌 유일한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의 인식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보물이었다. 그것은 어둠의 힘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약했으나 그래도 하나의 빛이었고 나의 유일한 빛이었다. 나 자신의 인식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보물밖에서 찾을 수 있는 보물은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것이 인간이지 싶은데. 그것이 반딧불만한 밝기의 빛이라도 말이다.

 

그때 나는 제1의 인격이 빛을 운반하는 자이며 제2의 인격은 그림자처럼 제1의 인격을 따라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과제는 그 빛을 지키고 그 투철한 생명력(2의 인격)’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었다. 그쪽은 다른 종류의 금지된 빛의 영역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푹풍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으며, 폭풍은 끝없는 어둠의 세계로 나를 떠밀어 넣으려고 기를 썼다. 그 어둠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의미심장한 비밀의 표피만을 지각할 뿐이었다. 나는 제1의 인격으로서 공부 돈 벌기 책임 분규 혼란 과실 복종 패배 들을 헤쳐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나를 향해 밀려오는 폭풍은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쉼 없이 나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것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살아 가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돌진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잠깐 동안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무서울 정도로 바로 여기에 실재하며,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서 끌고 가버린다.

 

171 그 당시 나의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나는 나의 길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외부로, 제한된 세계 속으로, 삼차원의 어둠 속으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아담이 일찍이 이런 방식으로 낙원을 떠난 것으로 여겨졌다. 낙원은 아담에게 유령이 되어버렸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돌밭을 경작해야만 하는 그곳에 빛이 있었다.

 

172 2의 인격은 사실 일종의유령이었다. 세계의 어둠에 맞설 만큼 힘이 커진 혼이었다.

 

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 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의무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더 크다.

 

176 서양 종교는 분명히 말해 이러한 내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2천년 전부터 내적 인간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려 그 인격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왔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

 

179 아버지는 누군가와 말다툼을 해야만 했으며 가족과 자기 자신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왜 그는 그런 싸움을 모든 피조물의 비밀스러운 창조자이며 세계의 고통에 대해 실제로 책임이 있는 단 한 분인 하느님과 하지 않았을까? 하느님은 불가사의하고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저 꿈들 중 하나로 아버지에게 대답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 보는 것. 가끔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지난해 겨울 일본여행 때 어떤 멤버가 하던 말이 기억난다. 그분은 큰 일을 결정하기 전에 여행에 동참했노라고 말을 하면서 명상후일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저녁 노천온천탕에 앉아 맞은편에 떨어지는 하얀 폭포를 보고 있는데 그곳에서 색다른 물체를 보았다고 했다. 그 모습을 설명했는데 나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라 열심히 듣지도 않았고 기억하지도 않았지만 분명 그 여행에서 자신에게 하느님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오셨던 것 같다고 했다.

 

200 그는(니체) 자신이 겪은 황홀경을 함께 느끼고 모든 가치의 전도顚倒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리라는 유치한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교양 있는 속물들을 찾아냈을 뿐이었다. 우스운 비극처럼 니체 자신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201 <파우스트>가 나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그 문은 오랫동안 철저하게 닫힌 채로 있었다. 나는 소 두 마리가 도깨비마법에 걸려 그 머리들이 동일한 고삐에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한 늙은 농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가 어린 아들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농부가 대답했다. “얘야, 그런 건 말하는 게 아니란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서 순진한 사람은 동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작가, 신문기자, 또는 시인 들에게만 그와 같은 무례한 행동을 허용할 뿐이다. 나는 새로운 관념이나 단지 특이한 측면까지도 오직 사실로써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사실들은 남아 있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책상 밑에 버려져 있지 않고 언젠가 어던 사람이 그것을 만나게 되고 그는 자기가 찾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나는 더 나은 방법이 정말 없어 사실들을 제시하는 대신 말만 늘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사실들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중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전보다 더 경험주의로 치우치게 되었다. 나는 철학자들을 좋지 않게 여겼다. 철학자들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정작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해야 할 때는 침묵해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언제 어디선가 다이아몬드계곡을 지나온 것도 같은데 내가 가지고 온 광석포본이 자갈돌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들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나 자신까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맞는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남대문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서울에서 실재로 남대문을 본 사람과의 말다툼에 대한 비유가 있다. 어느 날 서울을 다녀간 촌 사람이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를 하다가 남대문에 문지방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문에 문지방이 없는 것이 어디 있느냐며 그를 몰아세우고 남대문은 문지방이 없는 건 사실이니 우기기고 있었는데 숫자에 밀려서 도저히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누구나 그렇게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다른 깨달음이 있어서 이야기를 하면 십중팔구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일수 있다. 다수가 가는 길이 옳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 아니겠나 싶다. 보통의 사람들은 다수가 가는 길로 가야 심적으로 안전하다. 홀로 또는 소수가 다른 길을 택하기는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역사는 진행되기도 하지만 다수의 횡포로 소수가 자기이야기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의 행태이다.

 

210 정신의학자는 이상한 사람들 이었는데, 나 또한 곧 나 자신의 경험으로 그러한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나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게 되었다.”정신의학 교과서들이 다소 주관적인 특색을 띠는 것은 아마도 그 분야의 특이성과 학문 형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몇 줄 더 나가자 저자는 정신병을 인격의 병이라 일컫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가슴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신의학에서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흐름이 합류하여 그 합해진 물의 힘으로 스스로 물길을 내어 흘러갈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내가 사방으로 찾아 헤매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경험의 장이 있었다.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이때 친구들의 반응을 융은 이렇게 적었다. 친구들은 놀라고 의아해하며 나를 바보로 여겼다. 내가 내과의사로서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정신의학 같은 하챦은 것과 바꿔버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는 누구나 당연히 잡으려고 하며 나에게도 무척 유혹적이었다.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누구도 어떤 것도 나의 확신을 흩뜨려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강물이 합류하여 세차게 흘러가면서 먼 목적지로 나를 가차없이 실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 ‘통합된 이중성이라는 고양된 감정에 힘입어 나는 마법의 파도를 탄 것처럼 시험을 치러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211)

 

과제를 하다 점심으로 먹은 짜장면의 후유증인가 졸음이 밀려와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잠깐 사이에 꿈을 꾸었다. 어떤 모임이었는지 기억은 없고 누구와 함께였는지도 기억이 없는데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돌아오는 오프수업의 과제가 책의 대략의 프레임을 짜는 것인데 줄곧 생각을 하다 보니 그 연장선에서 꾸어진 꿈인듯하다.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 나눔 인듯한데 누군가가 나를 지명했다. 나는 머릿속에 뱅뱅도는 생각이 언어가 되어 나와야 하는데 꿈속에서도 꿈을 꾸고 있었는지 비몽사몽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정신을 가다듬어 글을 쓰겠노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글인지에 관하여는 명확하게 답을 하지 못한듯하다. 그냥 잡글현재 그러고 있는 중이다라고만 했다. 남편이 나를 깨운다. 일어나보니 과제를 하던 컴은 시끄러운 소리를 계속 내고 있다. 우리집 컴이 상태가 별로인데 오늘따라 아이가 노트북을 좀 달라하여 탱크소리만큼 큰 소음을 내는 데스크탑으로 작업중이다. 자신의 관심분야의 공부를 할 수 있는 전공에 그것에 대해 적절한 단어로 설명되어 있는 텍스트를 보고 흥분을 하는 융이 눈에 선하다.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의사로서 생계를 해결해야하는 당면과제를 안고 있던 융으로서는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삶이다. 자신의 호기심에 따라 관심도에 따른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일. 누구나 하지 못하는 일이라서 더욱 위대해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 그러지 못할까. 그만큼 현실을 떨치고 일어설 만큼 용기가 없어서 이다. 욕심이 욕망이 많아서이다. 융은 그렇게 결정한 정신과의사 일을 잡고 평생을 살았다. 물론 그의 삶에 그림자가 없었던 것도 험난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제 한세기를 건너뛰어 학문의 한 분야를 개척한 학자로 의사로 남아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나쁘지 않다고 토로할 만큼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겨놓은 사람이다. 

 

213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그런데 치료자 인격이라는 것도 병든 인격과 마찬가지로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정신의학의 두 축 의사와 환자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관계이다. 상처받은 자만이 치료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정신의학에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인체해부가 외과의사의 필수요소 인 것도 사람의 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과 실제상황을 알아야 매스를 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실제로 정신과 의사는 자신이 정신적 결함을 딛고 극복해본 경우가 많다고 하고 환자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아픔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214 그녀는(고모) 헤아리기 어려운 환상의 세계와 현실로 돌아올 줄 모르는 추억의 세계에 깊이 잠겨 있는 듯했다.

 

취리히와 세계의 관계는 정시적이 아니라 상업적인 것이었다.

 

215 내가 바젤을 떠난다는 것은 어머니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아픔을 덜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어머니도 용감하게 감당해냈다.

어린시절 아버지와의 원만한 결혼생활이 이루지지 못해 어머니의 부재가 불리한 조건이었다는 융의 표현이 있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랬지만 아들을 떠나 보내는 부분의 어머니는 용감하고 현명한 어머니로 보인다. 상대의존적 사람의 특징은 배우자나 자녀나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데 다행인 부분이다.

 

216 반년 동안 나는 정신병원 생활과 그 정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나 자신을 수도원 벽 안에 가두고는, 정신의학적인 사고방식을 익히려고<정신의학잡지>50권을 처음부터 통독했다. 나는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다. 정신의학은 정신병이 생겼을 때 이른바 건전한 정신을 엄습하는 생물학적 반응을 조리 있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나의 전공 동료들도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존재들로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 후 몇 년에 걸쳐 스위스의 동료들의 유전적 배경에 대한 은밀하면서도 교육적인 통계자료들을 작성했다. 그 작업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계발뿐만 아니라 정신의학적 반응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되었다. 내가 연구에 몰두하고 스스로를 밀실로 몰아넣는 바람에 동료들로부터 멀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정신의학이 나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지 정신의학의 정신을 익히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물론 알지 못했다. 그 무렵 나는 치료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소위 정상적인 것의 병적인 변형들은 내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정신에 관해 보다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는 그토록 바라던 가능성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제 아래 정신의학자로서 나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나의 객관적 생애에서 기인한 주관적 실험이었다.

 

217 나는 나의 숙명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만큼, 그 정도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자서전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되었어야만 했느냐에 관해 환상을 엮어 나간다 든지 생애를 위한 변명을 쓰는 그런 잘못 말이다.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221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의 중심주제로 삼은 것은 무엇이 정신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가?”하는 화급한 의문이었다.

 

224 심리학에는 명백한 진리가 거의 없다.

 

235 그녀는 살인범이었으나 거기에 더하여 그녀 자신을 또한 살해했다. 그런 죄를 범한 자는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살인범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셈이다. 누가 죄를 범하고 잡히면 그는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게 된다. 누가 도덕적 지각 없이 몰래 죄를 짓고 발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사례에서 보여주듯이 벌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그 죄를 알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하울링이라는 영화에서 보면 늑대 개를 훈련하여 복수를 하는 줄거리가 있었다. 꼭 특수한 훈련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동물이나 식물은 살아있다. 그들에게도 에너지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지 싶다. 제도가 만들어놓은 형벌이 아니더라도 사람 스스로가 가지는 양심이란 것이 있으니 당연하기는 하다. 언제부턴가 현실의 범법이 아니면 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아진 것 같기는 하다. 숫자로 이야기되는 성장이 꼭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성숙시키는 것은 더욱 아닌듯하다. 

 

241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243 겉으로 보게 되면 정신병 환자에게서는 비극적인 붕괴만이 보인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환자 영혼의 다른 측면의 삶을 보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자주 환자의 외관에 속는다.

 

248 정신치료와 분석은 인간 개체가 그러하듯 다양한 법이다. 나는 환자들을 될 수 있는 한 모두 개별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문제의 해결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원칙은 다만 최소한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살아온 삶이 다르고 타고난 DNA가 다르고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니 당연한 설정이다. 세상에서 보편적인 원칙으로 대하기 어려운 유일한 생명체가 사람아닐까 싶다. 자신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249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또 다른 한 인간과 대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석은 일종의 대화이며 여기서 당사자 두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가와 서로 마주보며 앉게 된다. 의사도 무언가 할 말이 있고 환자도 마찬가지다.

 

250 의사는 모든 이론적인 전제에 매이지 않고, 환자를 실제로 충동질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필요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론의 증명이 아니라, 환자가 자기 자신을 한 개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총체적인 관점을 참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의사는 그러한 관점을 습득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의학교육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인간 마음의 지평은 의사 상담실의 시야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 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오늘 날에는 예전과는 달리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이 자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각 개인과 다수의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정신의 변이(變異)는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가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면 수소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조건은 이른바 교육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룰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교육분석에서 의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환자도 이를 배우지 못한다. 의사가 배워 알지 못한 마음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환자 역시 마음의 한 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분석에서 의사가 개념체계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의사는 피분석자로서 분석이 바로 자기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교육분석은 실제적인 삶의 한 부분이지 무조건 암기하여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교육분석에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나 치료자는 나중에 그에 대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환자를 충동질하는 무엇을 알기 위한 도구는 아주 많다. 약물의 힘을 일부 빌린다 하더라고 근본적인 치유는 환자스스로 하는 것이다. 좋은 의사를 만나고 환자의 에너지가 생길 때 비로소 정신과치료는 마무리가 되는 듯하다. 현실에서는 병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완치되는 경우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고, 다만 자신의 증후를 알고 스스로 감내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더하고 덜한 상태의 반복이지 싶다. 완전한 치유가 힘든 이유 중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을 충동질하는 그 무엇이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은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쳐도 주변의 또 다른 인연이 그를 살기 힘들게 할 수도 있으니까.

 

251 인생의 심각한 위기에서는, 다시 말해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 중대한 순간에는, 암시의 잔꾀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의사는 그 전존재가 도전을 받게 된다.

 

253 꿈은 의식적인 태도에 대한 보상 바로 그것이다.

 

의사는 그 자신이 고통을 당할 경우에만 효과를 얻는 법이다.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최적의 정신과 의사는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는 의사이다.

 

여성들은 대개 뛰어난 직관과 정확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비밀스러운 의향을 간파할 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의 아니마(Anima)가 꾸미는 음모까지 꿰뚫어볼 줄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그렇게 때문에 자기 남편이 초인招人이라고 확신하는 부인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254 당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259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이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한 부인들은 자신들이 남편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자신에게 전속으로 속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아서라기보다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의 부재이지 싶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감, 자존감이 낮아서이지 싶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에 의해 자신이 흔들리는 경우가 적다. 흔들리더라도 다시 자신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타인에 의지하고 그 의지는 사랑이라는 허울을 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잘 살아가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자신의 배낭을 스스로 메고 먼 길을 갈수 있는 사람. 이제는 꼭 남편에게 부인의 질투심이 문제가 아니라 부부사이에 일어나는 집착은 대부분 자존감이 낮아서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264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인격발달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소유에서 오는 충족감은 잠시이다. 또한 한도가 없기도 하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도 나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도 더 아름다운 신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무수히 많다. 어떤 것도 모든 것에서 내가 최고가 될 수는 없다. 마음 한 번 바꾸는 일인데 잘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경증의 원인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어떤 것도 마음밖에 있는 것은 없다.

 

270 우리 시대에 이와 같이 마음의 분열로 희생된 자들은 단지스스로 택한 신경증 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표면적인 증상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벌어져 있는 틈이 메워지는 순간 사라진다.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벌어진 틈은 무엇으로 메워야하는가. 누가 메우는가. 무의식은 어찌할 수 없으니 자아의 성장이 관건이겠다.

 

271 영혼은 개념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사실들 가운데 깃들어 있다. 말만 그러듯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일종의 구획심리학을 계발한다. 감정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지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경증을 앓고 있다. 지식인이 배은망덕의 환자가 되는 것은 지식과 자아의 성장이 같은 크기로 성장하지 못해서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것은 사실 많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으로 지켜야할 도리에 해당하는 것은 지식으로 알아지는 수준이 아니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수준이면 모두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행하는 것은 별개이니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거다.

 

272 몇몇 피분석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제자가 되었으며 내 생각을 세상에 소개하고 지지해 주었다. 그들 중에는 수십 년 동안 우정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다. 나의 환자들과 피분석자들은 나를 인간적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여, 그것에 관한 본질적인 것들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심리적 수준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로서는 유명인사들과의 단편적인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눈을 두려워한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의미이겠다. 보는 눈이 많으니 진짜 자신을 드러내놓을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겠지. 인간이 행복하다는 것은 가면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니라 모두를 벗어낼 수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일텐데 많은 유명인사들은 그것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떤면에서는 삶은, 생은 공평한 부분도 많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그 세계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나 자신의 세계였으며

프로이드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나의 전 존재는 진부한 생활에 의미를 부여해줄 수도 있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을 찾고 있었다.

 

276 연상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적마다 일어났다.

 

277 나는 제2의 인격의 소리를 들었다. “네가 그와 같이 프로이트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다면, 그건 일종의 사기다. 사람은 인생을 거짓 위에 세울 수 없다.인생도 거짓 위에 세울 수 없지만 사랑도 거짓으로 할 수 없다.  왠만하면 숨길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이고 단거리 경주가 아닌 장거리경주에서는 거짓이 진실에게 패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이건 어떤 종교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나온 길은 모두 흔적이 남게 마련이어서 벌어지는 일인듯하다.

 

280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학적 판단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융이 프로이트와 헤어지게 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프로이트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사람은 타인의 권위에 굴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에게도 적응하지 못하는 듯. 두 사람은 비슷한 기질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287 동양에서는 ‘니르드반드바(Nirdvandva:양쪽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나는 이것을 명심하고 있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를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너무도 적은 심리학적인 사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덧없을 정도로 작은 의식이 어떤 것을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의미와 무의미 사이. 사람의 마음만큼 예민한 것은 없다. 마음의 진동추가 움직이는 원리. 거리. 누가 알겠는가. 자신밖에 모르는 일이지. 외견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 마음이 꽂혀 모든 길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무엇이 있어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이것도 행위자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어있을까?

 

295 (프로이트)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 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때의 그 말이 나의 기억에서 영 잊혀지지 않았다. 그 말 속에 이미 우리 관계의 종말이 예시된 셈이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웠다.

권위는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논리를 모르고 있었더란 말인가. 프로이트가

 

295 그 꿈이 처음으로 나로 하여금 ‘집단무의식’개념을 생각하도록 했으며, 나의 책<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의 서곡을 이룬 셈이었다. 그 꿈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어느 낯선 2층집에 있었다. 그것은 ‘나의 집’이었다. 나는 2층에 있었는데 그곳은 로코코양식의 훌륭한 고가구들이 갖추어진 일종의 거실이었다. 벽에는 값진 옛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 나는 이 집이 정말 내 집일까 의아해하면서도 ‘나쁘지는 않군’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아래층이 어떤 모양으로 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층계를 거쳐 1층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는 더 오래된 온갖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이 집의 1층 이 부분은 15-16세기의 물건들로 꾸며져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가구들은 중세풍이었고 마룻바닥에는 빨간 벽돌이 깔려 있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편이었다. 나는 “이제부터 정말 집 전체를 둘러보아야겠군”하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다녀 보았다. 그러다가 육중한 문과 마주쳐 그 문을 열었다. 그 뒤에서 지하실로 통하는 돌계단을 발견했다. 나는 돌 계단을 내려가 아름다운 천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아주 고풍스러워 보였다. 나는 벽을 조사하다가 일반적으로 쓰이는 석재 사이에서 벽돌층을 발견했다. 그 벽돌들은 모르타르에 묻혀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자마자 벽이 로마시대 것임을 알았다. 이쯤 되자 나의 흥미는 더해갔다. 나는 마룻바닥을 더욱 면밀히 조사했다. 마룻바닥은 석판으로 되어 있었다. 그중 한 개의 석판에 고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그 고리를 잡아당기자 석판이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그 밑으로도 아래쪽으로 향하는 좁은 돌계단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또 그 돌계단을 내려가 바위를 뚫어 만든 나지막한 동굴로 들어섰다. 바닥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 먼지더미 속에 원시문화의 유물들처럼 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깨진 도자기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나는 매우 오래된 것이 분명한 반쯤 삭아버린 두개골 두 개를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외적사건과 내적사건을 적고 동일한지 다른지, 왜 다른지를 적으라는 과제 때문에 정신 없어 할 때 들려준 이야기이다. 융의 꿈. 프로이트와의 만남에서 융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프로이트의 내면을 융을 꽤뚫고 있다. 프로이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답을 하기도 한다. 이 꿈에 대한 스스로의 분석은 ‘1층은 무의식의 제1표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깊이 내려갈수록 풍경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어두워졌다. 동굴 속에서 나는 원시문화의 유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의 내부에 있는 원시인의 세계, 의식이 다다를 수도 없고 해명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선사시대의 동굴을 인간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기 전에는 대게 동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원시적인 마음은 동물의 혼의 활동과 가까이 접하고 있다.’<298>

 

300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식물이 가능한 한 자라나려 하고 동물이 가능한 한 먹이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똑같이 꿈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생명의 형태들은 우리의 눈을 속이려고 하지 않으나, 우리 자신이 근시안이어서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지 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301 고대신화학과 원시인의 심리학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후자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하도록 이끌었다.

신화도 모두 인간의 이야기이고 세상에 인간이 온 이후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가는 몇 안되는 생명체이니 그 모든 것이 한곳에 녹아있을 것이다.

 

304 나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프로이트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고, 솔직히 말해 이기적인 태도로 그의 풍부한 경험을 나누어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단히 솔직한 고백이다. 융의 성격은 현실주의자였지 싶다. 비록 신경증적인 병세가 없지는 않았지만 지극히 현실주의자여서 자신이 무엇을 잃고 얻는 것에 대한 기준은 잘 가지고 살다간 의사라고 보여진다.

 

310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후 나의 모든 친구나 친지들은 나를 떠나갔다. 사람들은 나의 책을 쓰레기라고 내놓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었고, 이것으로 사태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 오직 리클린과 메더 둘만이 내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나는 고독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프로이트의 영향력이 그만큼 큰 상황이었고 융의 정신분석학은 다분히 신비주의로 치부될 수 있는 정황이다. 아직 융은 프로이트와 비교하여 대 학자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니. 사람들의 인심은 늘 이렇다.

 

내 안의 여인 아니마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졎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316 오늘날 인간은 어떤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기독교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솔직히 말해, 아니오! 나는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지 않소.” “그럼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인가?” “그렇고.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너는 어떤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여기에 이르자 내 마음이 편치 않아졌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중단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만 것이었다.

 

322 내 후반기 인생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거나 돌을 다루었다.

 

335 필레몬과 또 다른 환상의 형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338 “영혼의 구루도 있습니다.”그가 이어서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구루로 삼지만, 늘 영혼을 구루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41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 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엣 그리스 격언을 따른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나는 차츰 내 생각과 그 소리의 내용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예를 들어 그녀가 내가 쓰는 글에 진부한 내용을 삽입하려고 하는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맞아요.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느꼈소.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거기에 매여 있을 의무는 없어요. 무엇 때문에 그 따위 굴욕을 당한단 말이오?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 내용을 구별하는 일이다. 무의식 내용은 이를 테면 격리를 시켜야 한다.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그 내용을 인격화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그 인격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343 나는 내면의 이미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나의 꿈을 통해 직접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다.

 

345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가 삶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면 언어뿐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삶이 가지는 다양한 것을 일대일로 표현하거나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없다.

 

346 환상에 관한 작업을 하던 바로 그 무렵, 물론 나는 이승에 발판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족이며 직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낯선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으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다. 가족과 직업은 내가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기반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은 내가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임을 증명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는 것과 지나온 다리를 불사르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물러설 곳을 보고 움직이는 사람의 행동에는 다분히 현실을 떠날 수 없다. 융의 경우는 가족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다. 가족의 의미에는 재력이라는 의미도 함께 있다. 그이 처는 스위스의 대단한 재력가집안이고 결혼전의 경우는 다르지만 결혼후의 경우는 융에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부인의 힘이 매우 지대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보여진다.

 

349 무의식은 신화적인 ‘죽음의 나라’, 즉 조상의 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 속에서 영혼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영혼이 무의식 또는 죽음의 나라로 되돌아간 셈이 된다. 이것은 원시종족에서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소위 ‘영혼의 분실’현상과 일치한다.

 

351 사람들은 이미지들이 그대로 떠오르도록 하면서 거기에 대해 무척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고심하지 않는다. 거기서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352 자신의 인식을 윤리적 의미로 바라보지 않는 자는 권력원리에 빠지게 된다.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난 내용들은 나를 이를 테면 벙어리로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형상화하지도 못했다.

 

353 나는 심사 숙고한 끝에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과의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내가 공중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여러 면에서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실은 하챦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다른 것이 중요한 법이다.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이런 일은 내가 학문적 출세를 포기했을 때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늘 겪어왔다.

 

354 내가 교수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나 자신을 비롯하여 아무도 아직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가운데 나는 뼈저린 외로움을 느꼈다.

세상과의 교통이 없으면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더 정신적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임.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다는 것이 사람의 존재이유 중 하나임의 반증.

 

356 만다라가 참으로 무슨 의미인지 나는 차츰 깨달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자가’, 즉 인격의 전체성이었다. 모든 것이 잘 돼가면 조화로우나 자기기만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357 만다라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모든 것. 내가 걸어온 모든 길, 나의 모든 발걸음이 하나의 점, 즉 중심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다라가 중심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모든 길의 표현이다. 그것은 중심을 향한 길, 즉 개성화의 길이다.

 

359 나는 거멓게 그을린 어느 더러운 도시에 있었다. 어두운 겨울밤 비가 내렸다. 그곳은 리버풀이었다. 나는 여섯 명 정도 되는 스위스 사람과 함께 어두운 거리를 걸어갔다. 내 느낌으로 우리는 바다 쪽 항구에서 올라오고 있었고 실제 도시는 절벽 위에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로 올라갔다. 그것은 내게 바젤을 생각나게 했는데, 아래쪽에 시장이 있었고 죽은 자의 골목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거기에 베드로광장과 큼직한 베드로교회가 있었다. 꼭대기에 이르자 가로등 불빛에 어렴풋이 비치고 있는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많은 거리가 합쳐지고 있었다. 도시의 여러 지역은 그 광장 주변에 방사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둥근 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었다. 주위가 온통 비와 안개 연기 그리고 드문드문 불빛이 보이는 어둠속에 묻혀 있었지만, 그 작은 섬만은 빛나고 있었다. 그 섬 위에 단 한 그루 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것을 불그스름한 꽃들이 가득 달린 목련나무였다. 그 나무는 햇빛을 받고 서 있으면서 동시에 빛의 원천인 것 같았다. 내 동반자들은 지독한 날씨를 탓하기만 했지 그 나무는 아마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리버풀에 사는 또 다른 스위스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여기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놀라워했다. 나는 꽃이 핀 나무와 햇빛에 빛나는 섬이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그가 왜 여기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겠다그러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의 한 부분에 대해 한마디만 더 보충해야겠다. 그 도시의 구역들은 하나하나 중심점이 있고 거기서 방사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중심점은 커다란 가로등에 비친 작은 광장이었는데, 그것은 그 섬의 축소형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다른 스위스 사람이 이러한 이차적인 중심에서 가까운 지역에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 꿈은 당시 나의 상황을 나타내주었다. 아직도 나는 비에 적어 번질거리는 희끄무레한 노란색 비옷이 눈에 선하다. 모든 것이 매우 불쾌하고 어둡고 우중충했다. 그 무렵의 내 기분과 똑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 것이 아닌 아름다움의 환상을 보았고 그로 인해 비로소 살 수 있게 되었다. 리버풀은 생명의 못이다. (리버는 독일어에서 간에 해당하는 leber와 발음이 비슷하다)은 옛날식으로 생각하면 생명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1927년 만다라를 나타내는 꿈이야기이다.

 

361 프로이트와 헤어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떨어질 것을 알았다. 그 무렵 프로이트를 넘어서 내가 아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둠속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연금술을 발견하다

연금술을 배워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무의식 내용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의해

정신의 변환과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67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의 변환과정, 즉 개성화였다.

 

371 내가 연금술적 사고과정의 미궁에서 실을 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손에 실을 쥐어주는 아리아드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테세우스를 위하여 건네준 아리아드네의 실. 그것은 한 남자를 살리는 길이었고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여 젊은 그리스의 남녀를 구하는 길이었다. 삶의 미궁에서 헤메일 때 건네 받은 그 실이 아리아드네의 실이 될지는 또 살아봐야 아는 것이다.

 

373 원초적 이미지와 원형의 본체가 내 연구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고, 역사 없이는 심리학, 특히 무의식의 심리학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75 유형에 관한 책은 한 인간의 모든 판단은 그의 유형에 의해 제약되며 모든 관점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융의 인간유형에 관한 구분은 후일 mbti로 발전하여 지금도 널리 애용되고 있다. 사람의 기질을 몇 가지 유형으로 모두 구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많은 도구 중에 유용성이 어느 정도 인정받은 것은 사실인가보다.

 

376 나는 리비도를 물리적 에너지의 정신적인 유사물이라고 생각했다.

 

377 나는 인간의 본능을 에너지과정의 여러 표현으로 여기며, 열이나 빛 들과 유사한 힘으로 본다.

 

378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변화과정에 대한 연구와 연금술의 상징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는 ‘개성화과정’이라는 내 심리학의 중심개념에 이르게 되었다.

 

381 그가 살던 시대의 집단적 심성은 그 당시 형성되었던 원형, 즉 안트로포스의 원초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 유대인 예언자에게 집중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388 상처 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유한다.

 

394 인간은 신적인 소명 앞에서도 결행을 유보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유를 위협하는 자를 위협할 수 없다면 그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적인 소명 앞에서도 결행을 유보한다는 의미는 자유를 제한 받아서가 아니라결행을 한다는 비장함의 부족 아닐까.

 

397 초월적인 것, 원형 그 자체의 본질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해낼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로 휘말려 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401 학문적 탐구를 통해 나는 차츰 나의 환상과 무의식 내용의 토대를 세울 수 있었다. 단어나 종이만으로는 그리 충분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나는 가장 깊은 생각과 나자신의 인식 들을 이를 테면 돌에 표현하거난 돌로써 고백해야 했다. 내가 손수 볼링켄에 지은 탑이 그 일의 시작이었다. 이건 일종의 의식행위아닐까.

 

405 나는 전기를 쓰지 않고 벽난로와 화덕에 손수 불을 지핀다. 저녁에는 엣날 등잔에 불을 붙인다. 수도도 없어 나는 펌프로 직접 물을 긷는다. 장작을 패고 음식을 요리한다. 이런 단순한 일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어려운 일이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해야 하는 일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그것을 만들어 내는 소수의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두뇌를 쓰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점점 할 일이 없어진다. 일터가 사라진다. 그것을 알고 그리 발전을 외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높고 깊어지면 단순하게 살아도 외롭지 않은 것이 인간이다.

 

406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 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407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419 나는 환생을 믿지는 않았지만 인도 사람들이 카르마라고 부르는 개념은 본능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하나에서 하나가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환생이 카르마와 동의어가 되지는 않으나 결국 카르마에 의해 이생과 연결되는 다른 생이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

 

420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서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특징들은 그 속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여행

내가 끝없는 시간의 연속과 그 가운데서도

거의 변함이 없는 존재의 모습들로 말미암아 깊은 감명에

여전히 젖어 있을 때 갑자기 내 회중시계가 생각났다.

그리고 유럽인의 가속화된 시간을 떠올랐다.

 

421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서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상들의 특징들은 그 속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바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奔流)로 휘말려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위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옛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함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 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들의 설명이 아닐까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래를 당겨서 살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한 불안 초조에 시달릴 이유도 없다. 현재에 있지 않은 것을 담보로 살아가는 삶이 불안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그것이 가지고 올 최악의 순간을 생각하며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란 생각자체를 놓아야 함이다.

 

431 우리가 사하라로 들어갈수록 나는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느낌을 받았고, 심지어 시간이 거꾸로 가도록 위협당하고 있는 듯했다. 열기가 진동하며 점점 높아지는 바람에 나는 그만 몽롱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오아시스 초입의 야자나무와 집에 이르자 모든 것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보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숙소에서 집 앞의 여러 가지 낯선 소음을 잠을 깼다. 그곳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는데 지난밤에는 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람들과 낙타, 버새와 당나귀들로 붐볐다. 낙타는 끙끙거리며 연일 이어지는 불쾌감을 갖가지 음조로 알리고 있었다. 당나귀도 귀에 거슬리게 시끄러운 소리를 질러댔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흥분하여 소리지르고 몸짓을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들은 거칠고 별로 믿음직하지는 않았다.

현재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법은 오아시스를 만나면 일단 물을 마셔라. 오아시스의 존재이유는 사람들의 쉼터이고 살림터이다.

 

434 나는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사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무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융의 의식을 깨우는 꿈은 어린시절부터 시작된다. 이는 꿈을 통한 정신분석학의 한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어떤 시그널이었을텐데,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과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볼 수 있는 사람의 차이

 

437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와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Persona:자아가 외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세계가 바라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누구는 페르소나가 몇 개나 된다고 했다. 진정한 나를 찾기위하여 페르소나와 친해져야 하나보다. 나의 페르소나는 어떤 것일까. 어떤 방법으로 찾아지는 것인지 알아봐야겠음.

 

439 ‘하지만 위험이 있는 곳에 또한 구원이 싹튼다’는 휠덜린의 말이 그런 상황에서 자주 떠올랐다.

 

살아 있는 정신구조에서는 단순히 기계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관리되며 전체와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의식은 전체에 대한 조망이 없으므로 대개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사실확인으로 그쳐야 하며, ‘자기의 그림자’와의 충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회답은 앞으로 진전되는 미래의 연구에 맡겨두어야 할 것이다.

 

443 나는 그에게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고?“우리는 여기서 생각하고.”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는 오래 생각에 잠겼다.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가 진정한 백인의 모습을 나에게 묘사해준 셈이었다.

두뇌와 심장의 차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세상에서 제일 길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둘의 거리가 그리도 멀게 된 원인에 대하여….머릿속에는 계산기가 있다. 고성능 컴퓨터. 고성능 컴을 잠시 쉬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살아있는 영혼의 활동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가끔 너무나 분명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다른 결정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한다. 그것의 동인은 무엇인가. 사랑일텐데, 사랑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여 가슴속에 사랑을 품을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겠음. 이건 다분히 상대적이다.

 

448 나는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내가 얻은 유일한 대답은 “태양은 신이오.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있소”라는 것뿐이었다.

 

451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지식이 쌓여감에 따라 두뇌가 발달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씌어지는 또는 스스로 뒤집어쓰는 페르소나가 몇 개나 될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의 본 모습을 모르니 신화처럼 살수 없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산에서 온다’는 것은 그에게는 그대로 직접 다가오는 확신이었다.

산은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리기도 한다.

 

453 조물주의 손에서 나온 것은 모두 좋다. _루소

 

457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470 나와 나의 여행 동반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깊은 고통을 동시에 지닌 아프리카 원시세계를 문이 닫히기 전에 체험하는 행운을 누렸다. 우리의 야영지생활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 중 하나였다. 사업에서 멀리 떠나 인생살이에 오염되지 않고 죄책감도 없이, 나는 아직도 원시 그대로인 땅에서 신의 평화를 만끽했다. 나는 헤로도토스가 말한 인간과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일찍이 그와 같이 관찰한 적이 없었다. 온갖마귀의 어머니인 유럽과 나는 수천 킬로미터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귀들이 이곳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전보도 전화도 편지도 방문도 없었다! 그것이 부기슈 심리학 탐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였다. 나의 해방된 정신력은 큰 기쁨을 안고 태고의 광대한 곳으로 역류(逆流)하고 있었다.

융은 분명 21세기, 스마트한 세상에서 살았다면 부적응자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마귀(전보, 전화, 편지,방문)들의 영향권이 미치지 않음을 이리도 좋아하는데.

 

471 나는 표현수단이 빈곤했으므로 말을 간단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491 나에게 존재의 최고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나에게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492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카르마를 먼저 갚지 않고 어떻게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겠습니까? 저 덧붙여진 음란한 형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다르마(Dharma:부처의 가르침, 계율)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무지한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에 스스로 깨우쳐서 행하지 않는 것이 좋기는 하나 그 정도의 내공이 있다면 중독으로 빠져들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반대로 중독상태를 더 유지하는 것. 스스로 바닥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방법도 있다. 허우적대다 보면 우리는 다리를 뻗어보지 않아서 바닥인줄 모르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505 그런 종류의 통과의례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원형적 사고를 통해 표현되는 생명의 위험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와 같이 세례 또한 본래는 적어도 익사의 위험을 암시하는 실제적인 ‘잠김’이었다.

 

환상들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제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527 사람이 개성화의 길을 가는 중에, 즉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과오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원만해지지(융은 인생에서 ‘완전성’보다는 ‘원만성’을 추구하기를 권함)않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과오나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는 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은 자의 길일 것이다. 걱정꺼리가 사라지는 날. 그날이 죽음이 오는 날이라고 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커다란 근심거리가 아닌 경우에도 근심을 할 수도 있고 삶의 무게를 짓누를 만큼 힘든 고비도 넘긴다. 무엇이든 기꺼이 감수한다는 마음가짐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힘이 된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내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531 내가 저승과 사후(死後)의 삶에 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기억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그 속에서 내가 살았고 나를 뒤흔들어 놓았던 이미지요 생각들이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내 저작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엄밀히 말해 내 저작들은 이승과 저승의 조화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려는 늘 새로워지는 시도였다.

 

532 선입견은 정신적인 삶이 풍성하게 나타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손상을 입힌다.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보는 우리의 기질상 선입견이란 것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가끔은 풍요로운 정신이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하지.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533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신화적 측면은 오늘날 심히 무시되고 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리하여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치유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화롯가에 앉아 파이프담배를 피우며 유쾌하게 유령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도 같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융이란 정신과 의사가 살아낸 살다간 인생이 담겨져있는 이 책은 사실은 많은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과연 이것도 나의 어떤 부분을 지금 치유하고 있는 것일까.

 

534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인생이 현존을 넘어서 무한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일만년을 구름 위에 앉아 하프를 켜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멋진 광경이 될 것이다.

 

536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동시성현상과 예언적인 꿈, 예감들을 생각해보라! 과대평가된 이성과 독재국가 거세된 욕망을 모두 같은 공간에서 상존?

 

539 신화는 과학의 맨 처음 형태다. 내가 사후의 일들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내적 감동으로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 관한 꿈과 신화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을 것이다.

 

546 자기들이 구하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찾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서 돌아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죽은 자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551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555 죽음은 역시 무섭도록 가혹하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아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사건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인 사건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한 인간을 빼앗기고, 냉혹한 죽음의 정적만 남는다. 더 이상 어떤 관계성도 맺을 희망이 없다. 모든 다리는 파괴되었다. 사람들이 오래 살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인간은 삶의 한가운데서 저승으로 끌려가고, 쓸모 없는 인간은 늙도록 살아남는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이다. 죽음의 야만성과 전횡성은 사람들을 비통하게 만들어, 사람들은 자비로운 하느님도 없고 정의나 선도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른다.

신의 존재 유무가 너무나 간단하면 신비함이 없어지지 않겠나사람들이 오래 살았으면 사는 사람은(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 쓸모 없는 인간이란(나를 괴롭히는 사람) 이도 모두 살아있는 내가 기준인 삶이다.

 

560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 나는 양쪽 다 옳다고 생각한다. 서양인은 외향적인 경향이 강하고 동양인은 내향적인 경향이 강한 듯하다. 서양인은 의미를 투사하여 객체에 의미가 있는 듯이 추정한다. 동양인은 그 의미를 자신 속에서 느낀다. 그런데 의미는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는 법이다. 나는 부처의 의미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내가 기독교에 심취하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이다,

 

564 우리가 이곳(저승)에서도 이어지는 삶을 가정한다면, 우리는 정신적인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삶은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570 그가 깨어난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챦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재능이나 나의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작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서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오로지 삶의 공간을 넓히고 합리적인 지식을 어찌해서든지 증가시키는 데만 관심을 두는 시기에는 자신의 단일성과 유한성을 의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단일성과 유한성은 동의어다. 이것 없이는 무한성을 지각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의식화라는 것도 없다. 단지 군중과 정치권력의 열광에서 표출되는 그런 것과의 망상적 동일시가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마음 안에 있고 가장 큰 제약도 자기자신임을 자각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닌듯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만년의 사상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577 이론은 나의 삶에 속한 존재형태이며 삶의 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일과 마찬가지로 내게 꼭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직접  쓴 챕터이다. ‘만년의 사상

 

578 천사들은 특이한 종류의 무리다. 그들은 바로 그들 자체일 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영혼이 없는 존재로서 그들 주인의 생각과 직관 외에 다른 것은 나타낼 수 없다.

 

581 하지만 윤리적 결단이 요구한다면, 버릇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도덕적인 선이라고 알려진 것을 경우에 따라 피하고 악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선악의 대극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582 오늘날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철저한 자기인식, 즉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최선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만큼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어떤 파렴치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지 냉철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전자를 사실로 여기거나 후자를 착각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두 가지 다 기능성으로서는 진실이다. 사람이 원래 그래야 하듯이, 자기기만과 자기착각에 빠지지 않고 살고자 한다면 전자나 후자를 완전히 모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이러한 종류의 인식과는 거의 절망적일 정도로 아주 먼 거리에 있다. 많은 현대인이 더욱 깊이 자기인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정녕 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자기인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바탕에서 우리가 본능과 마주치게 되는 기층 또는 인간존재의 핵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능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동적요인으로 우리 의식의 윤리적 결단이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좌우된다. 그것은 무의식과 그 내용으로 이에 대해서는 어떤 최종적인 판단도 없다. 우리는 그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존재를 인식은 하면서도 붙잡을 수는 없고 그것에 합리적인 한계를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의식을 확장해주는 학문을 통해서만 자연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와 같이 심화된 자기인식도 학문, 즉 심리학을 필요로 한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광학지식 없이 이른바 손목이나 좋은 의지만으로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583 타고난 순진성으로 어느 정치가가 선언하기를 자기는 ‘악의 상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584 악은 오늘날 가시적인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인류의 반은 궁리하여 그럴듯하게 꾸며낸 신조에 의지하고, 나머지 반은 상황에 대처하는 신화의 결핍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588 늘 그렇듯이 사람들은 그와 동시에 인간정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50년도 더 지난 이전(1918)에 나는 집단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중심상징으로 보이는 이와 비슷한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만다라 상징이다.

 

590 우리의 정신은 세계구조로부터 조성된 것이다. 큰 것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음의 가장 작고 가장 주관적인 것 속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신의 표상은 항상 강력한 맞상대에 대한 내적 경험이 투사된 것이다.

 

592 그의 자아는 내부적으로 ‘신’으로 대체되며 신은 외부적으로 인간이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과 상응한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593 신에 대한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관념은 전지전능하고 한없이 자비로운 아버지요 세상의 창조주다.

 

594 인간은 성찰하는 정신 덕분에 동물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며, 그는 인간 본성이 특히 의식의 발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그의 정신을 통하여 증명한다. 의식의 발달을 통하여 그는 자연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세계의 현존을 인식하며 이를 테면 창조주를 입증한다. 이로써 세계는 현상이 된다. 의식적인 성찰 없이는 그렇게 될 수 없는 법이다.

 

596 통찰이 생기지 않는다면 사색은 의미가 없다. 사색은 예컨대 물병자리시대의 경우처럼 객관적 자료가 있는 곳에서만 의미가 있다.

 

597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종의 ‘신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신과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방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연발생적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강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모두 이간적이며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영감’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영감’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착상’이 우리가 궁리해낸 경과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로 스며들어왔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선인식(先認識)에 속하는 꿈을 우리가 다루면서 어떻게 꿈을 자신의 이성의 작용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그 꿈이 일종의 예지 혹은 원견(遠見:멀리까지 내다본다는 의미)을 의미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닥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견디느라 고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각한 불확실성에 내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신의 경우 대극의 복합으로서 의미심장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다시 말해 진실과 허구, 선과 악이 다 될 수 있다.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타자의 의지가 표현되고 있는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형성된 재료, 즉 인간의 생각과 언어, 인간의 관념과 온갖 편견이다. 그러므로 그가 미숙한 심리학적 사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관련시키고, 모든 것은 자신의 의도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는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성으로 그는 자기 분야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 자신이 무엇인지도 안다고 추정한다.

 

599 이미 주어졌기에 임의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는 자신의 근본과 기원을 대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단계에 비로소 이르게 된다.

 

600 남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개인을 보호하는 데는 지키고자 하거나 지켜야 하는 비밀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

 

602 공동체의 비밀에 정통한 사람이 미분화된 집단성에서 옆길로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 역시 외로운 오솔길에서 어떤 이유로도 누설해서는 안 되고 누설할 수도 없는 비밀을 필요로 한다. 이런 종류의 비밀은 그로 하여금 개인적인 계획 속에 고립되기를 강요한다. 참으로 많은 개인이 이러한 고립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들은 신경증 환자들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부득이 숨바꼭질을 하면서 어느 것 하나도 진실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보통 개인적인 목표를 집단적 동화의 필요성 때문에 희생시키며, 그러기 위해 주변의 온갖 견해와 확신 이상들을 부추긴다. 게다가 이러한 것들에 대한 합리적인 반론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우리가 발설할 수 없는 비밀, 즉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우리가 표현하는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리하여 미친 사람의 범주에 속하는 듯이 보이는)비밀만이 퇴보를 막아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퇴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비밀의 필요성, 고립의 견딤.

 

603 아마도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할 만한 가장 고유한 영역에서 생애 처음으로 보다 강하고 낯선 존재를 대면하게 될 것이다.

 

604 개인적인 목표를 따르면서도 집단성에 보조를 맞추려는 자는 누구나 신경증적인 사람이 된다.

 

607 자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호조치의 도움으로 수천 년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아라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모든 대극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현상은 뜨거운 것과 찬 것, 높은 것과 깊은 것의 충돌 등에서 시작되는 에너지론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의식된 정신생활의 기초가 되는 에너지는 이런 현상들보다 먼저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의식적이다.

 

608 원형들은 물()자체를 결코 표현하지 않고 단지 형태만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그 형태 속에서 원형응 관조하고 이해한다.

 

610 어린아이의 정신은 전의식상태에서 결코 백지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개성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게다가 온갖 특수한 인간적 본능들을 갖추고 있고, 또한 보다 고급스러운 기능들의 선험적 토대를 갖추고 있다.

 

611 ‘개인적인 다이모니온’ 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심리학적인 정황을 적절하게 표현한 셈이다. 그리고 그 다이모니온이 우리를 사로잡은 곳을 원형이라는 개념으로 고쳐서 더 상세히 표현하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 생명의 원천으로 다가갈 뿐이다.

 

612 마음의 역동성 밑바닥에 양극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넒은 의미의 대극문제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을 모두 포괄하는 심리학적인 토론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점들은 당연히 전문분야의 독자적인 특징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심리적인 문제제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여기서는 더 이상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고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학적근거와 의미에서 고찰되는 것이다.

 

615 우리의 인지능력으로 모든 존재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618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성찰의 영역 이외에 그보다 더 넓게 뻗어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만큼은 넓은 또 하나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영역에서 는 합리적인 이해와 표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은 에로스의 영역이다. 고대의 에로스는 의미심장하게도 일종의 신으로, 그 신성이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해되거나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합리적인 이해와 표현으로 파악할 수 없는 영역. 에로스.

 

에로스는 우주의 생성원, 창조자, 그리고 모든 의식성의 아버지요 어머니다.

 

619 여기서 문제는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 가장 먼 것과 가장 가까운 것, 가장 높은 것과 가장 깊은 것인데,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결코 언급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언어도 이 모순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부분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은 항상 너무 과하거나 너무 부족하다. 왜냐하면 오직 전체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린도전서>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듯에서 우주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따옴표 속에 넣은 것은 그 말이 단지 열망, 선호, 총애, 소원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개체보다 우월한 전체, 하나인 것,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부분으로서의 인간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전체에 압도당하고 있다. 그는 찬성하거나 분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그 속에 갇혀 있고 에워싸여 있다. 언제나 그는 거기에 좌우되며 그것에 기인하고 있다.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은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천사의 혀로 말할지라도"또는 과학적인 정밀성으로 세포의 생명을 가장 깊은 바탕까지 주의 깊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그는 사랑에다 온갖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 붙일 수 있겠지만 그는 단지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질 뿐이다. 그가 한줌의 지혜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며 미지를 미지라고, 즉 신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함, 불완전성, 그리고 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과 오류사이에서 선택의 자유를 증언하는 것이다.

 

회고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아마도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되었다.

 

 

623 사람들은 나를 현명하다거나 지자(知者)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 강물이 아니다.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그들은 대게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강물을 길으려면 허리를 얼마만큼은 굽혀야 하는 법이다.

 

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고독은 주변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주변에 마음을 열면 고독의 자리는 없어지고 만다.

 

626 나는 계속 나아가야 했다. 나는 나의 환자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에 대해 참을성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내적인 법칙을 다라야 했다. 나에게 부과된 그 원칙은 내게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 법칙을 항상 따른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일관성있게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멋진 말이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일관성 있게만 살아갈 것인가?

 

629나는 나 자신에 관해 놀라고 실망하고 기뻐한다. 나는 슬퍼하고 낙심하고 열광한다. 또한 나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것의 합을 계산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떤 결정적인 가치나 무가치를 확증할 입장이 못 된다. 나는 내 자신과 내 이생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630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또한 인생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가지고 있지 않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여 전투에서 이겼으면 하고 마음 졸이며 희망하고 있다.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깊이가 있어야 자신이 현명하지 못하고 명석하지 못함을 알게 되는구나. 왠만하면 자신이 잘 났다고 사는 사람들이 보통인데.

 

3. 내가 저자라면

 

뼈대와 목차

 

서문/자서전 문학의 백미

프롤로그/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일생을 사로잡은 꿈, 유년시절

검은 곳을 입은 남자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학창시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너는 누구냐?

자연과 사원

두 인격의 어머니

악의 기원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음의 세계로!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정신의학에서 실을 찾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꿈의 분석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필레몬과의 대화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카르마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살마들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융합의 신비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단일성과 무한성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그런데 사람이 없으면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편집자의 말/A. 야폐

카를 구스타프 융 분석심리학 개념 및 용어

찾아보기

 

유년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 만년의 사상편을 직접 작성했고 나머지는 질문과 답을 적어내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처음에는 모든 내용을 질문과 답을 통하여 저자가 내용을 정리했으나 나중에 융이 읽고 고치는 과정에서 스스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하여 직접쓴 형태이다. 말을 하고 받아 적고 질문을 하고 답을 하고 이런 과정에서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아마도 스스로는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었나보다. 82세의 고령에 작업을 시작하여 사망하기까지 계속한 작업이다. 융은 이야기한 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서전은 출간할 수 없다라고. 그렇다 보통사람들은 보통사람의 눈으로 본다. 그 눈높이에 맞지 않으면 대단히 어려운 글이 된다. 융은 이야기한다. ‘내가 그토록 애를 써서 상세히 표현한 것을 짧은 형태의 글로 내놓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출판을 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아마도 나 같은 일반독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그가 평생 연구하고 글로 표현하느라 애쓴 흔적들을 제대로 읽어주지 못할까봐? 이런 우려였다면 그의 우려가 맞는 가보다. 융의 기억 꿈 사상은 내게는 참으로 어려운 책이었다. 두 번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 책을 이해할 정도가 될려면  관련 다른 공부를 많이 하고 난 후에라야 가능하겠다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기억이 내적기억이고 꿈과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를 풀었다. 쉽게 읽히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만년의 사상편은 융과 저자가 해 놓은 글을 다시 읽고 끼워넣은 장이라고 했다. 평생을 몇 장으로 압축해놓은 그의 사상편인 것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사랑에 관한 글이 있다.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서 그는 자서전 어디에도 자신의 사랑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은 듯하다. 현실에서는 연인관계를 유지한 여인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빠진듯하기도 하고.

자신의 문집에도 넣지 말아달라는 주문을 한 책이니 융은 스스로 고립시키고 그것을 견디는 힘은 대단했던 의사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텍스트는 시간흐름에 따라 구성되어있다. 중간중간 연도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지 그의 인생초기 사건들을 기록한 부분도 어느 한 부분 성인이 아니라는 느낌은 전해지지 않는다. 신화와 과학과 신학과 정신분석학을 아우르는 평생의 업적이 녹아난 작품이다. 보편적인 자서전이라고 하면 시간흐름이든 사건중심이든 보편적인 외적사건들의 나열이 더 많을 것이다. 누군가 이런 부분이 미진한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영화도 만들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체험과 정신세계에 대한 지식이 많아져야 다른 형태의 자서전에 대한 아이디어도 생기지 싶다. 지금은 불가이다.

 

감동적 장절

 

287 동양에서는 ‘니르드반드바(Nirdvandva:양쪽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나는 이것을 명심하고 있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를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너무도 적은 심리학적인 사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덧없을 정도로 작은 의식이 어떤 것을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의미와 무의미 사이. 사람의 마음만큼 예민한 것은 없다. 마음의 진동추가 움직이는 원리. 거리. 누가 알겠는가. 자신밖에 모르는 일이지. 외견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 마음이 꽂혀 모든 길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무엇이 있어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이것도 행위자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어있을까?

 

295 그 꿈이 처음으로 나로 하여금 ‘집단무의식’개념을 생각하도록 했으며, 나의 책<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의 서곡을 이룬 셈이었다. 그 꿈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어느 낯선 2층집에 있었다. 그것은 ‘나의 집’이었다. 나는 2층에 있었는데 그곳은 로코코양식의 훌륭한 고가구들이 갖추어진 일종의 거실이었다. 벽에는 값진 옛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 나는 이 집이 정말 내 집일까 의아해하면서도 ‘나쁘지는 않군’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아래층이 어떤 모양으로 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층계를 거쳐 1층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는 더 오래된 온갖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이 집의 1층 이 부분은 15-16세기의 물건들로 꾸며져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가구들은 중세풍이었고 마룻바닥에는 빨간 벽돌이 깔려 있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편이었다. 나는 “이제부터 정말 집 전체를 둘러보아야겠군”하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다녀 \보았다. 그러다가 육중한 문과 마주쳐 그 문을 열었다. 그 뒤에서 지하실로 통하는 돌계단을 발견했다. 나는 돌 계단을 내려가 아름다운 천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아주 고풍스러워 보였다. 나는 벽을 조사하다가 일반적으로 쓰이는 석재 사이에서 벽돌층을 발견했다. 그 벽돌들은 모르타르에 묻혀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자마자 벽이 로마시대 것임을 알았다. 이쯤 되자 나의 흥미는 더해갔다. 나는 마룻바닥을 더욱 면밀히 조사했다. 마룻바닥은 석판으로 되어 있었다. 그중 한 개의 석판에 고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그 고리를 잡아당기자 석판이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그 밑으로도 아래쪽으로 향하는 좁은 돌계단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또 그 돌계단을 내려가 바위를 뚫어 만든 나지막한 동굴로 들어섰다. 바닥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 먼지더미 속에 원시문화의 유물들처럼 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깨진 도자기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나는 매우 오래된 것이 분명한 반쯤 삭아버린 두개골 두 개를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300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식물이 가능한 한 자라나려 하고 동물이 가능한 한 먹이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똑같이 꿈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생명의 형태들은 우리의 눈을 속이려고 하지 않으나, 우리 자신이 근시안이어서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지 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353 나는 심사 숙고한 끝에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과의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내가 공중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길, 현실의 많은 부분을 충족시켜주는 길을 두고 자신이 하고 싶고 열정을 쏟고 싶은 길로 들어서는 것. 시간을 투자하고 나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순간이 온다. 그때까지 견딜 수 있는 근기가 있으면 한번 해보는 거다.

 

443 나는 그에게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고?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고.”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는 오래 생각에 잠겼다.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가 진정한 백인의 모습을 나에게 묘사해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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