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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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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8일 09시 04분 등록

기억 꿈 사상 (카를 융 자서전) 두 번 읽기

* 카를 구스타프 융 지음, 옮김, 김영사, 2007.09.03

 

진한 검정색 : 첫 번째 읽기와 중복,  감명 깊은 문장

파란색      : 추가 내용

붉은색     : 느낀 점 (기존+추가)

 

1. ‘인류를() 꿈꿔온 인간(저자에 대하여)

융.JPG

■ 카를 구스타프 융 (1875~1961)

 

나는 신을 압니다.’

 

신을 안다고 확신하는 이 인간은 도대체 누구인가.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는가. 융은 신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믿는다 안 믿는다를 대답하는 대신 신을 안다고 대답했다. 믿는다는 사실보다 분명 한 차원 높은 지적 자존심이다. 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이 자신의 내면에 거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인가. 신의 속성을 안다는 것인가.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는 것인가. 신의 마음을 안다는 것인가. 신이 없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 말인가. 신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말인가. 신을 믿지는 않지만 알고는 있다는 말인가. 신을 믿기도 하고 그런 신을 제대로 알고 있기도 하다는 말인가. 어렵다. 이 사람은 복잡하다는 느낌을 단번에 받는다. 이 책 읽어나가는데 대단한 난관이 있을 것임을 예감한다. 그러나 곧 이어 나오는 그의 프롤로그는 그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준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Selbst : 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나의 저술들은 내 생애의 정류장이라 여겨질 만하다. 그것들은 나의 내적 발달의 표현이다. 무의식 내용을 탐구하는 일은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변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의 생애는 내가 행한 것, 내 정신의 작업이다. 이것들은 하나하나 떼어놓을 수가 없다.’

 

신은 자기 안에 무의식의 형태로 하고 있음을 빼꼼이 밝히고 있는 걸까. 어렵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1875년 스위스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융은 익살과 민담을 들려주던 가난한 농부들과 책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아버지의 서재를 오가며 자랐다. 융은 학문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이 타협점으로 바젤 의과대학을 선택한다. 1900년 공부를 마친 융은 취리히 주 정신의학 대학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한다.

 

융은 그곳에서 정신의 병이 무의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치유의 단서는 무의식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단서에 이를 것 인가. 이때 그에게 프로이트의꿈의 해석은 계시처럼 찾아왔고 융은 곧 프로이트에 빠져든다. 그러나 당시 학계에서 찬밥신세였던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이 꺼려하는 사람이었지만 융은 그의 내면의 이끌림을 성실히 따라가 기꺼이 비주류에 동참한다. 이후 프로이트와의 이별 전까지, 융의 삶은 프로이트에게 경도된다.

 

이후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의문으로 프로이트와의 결별하고 자기 안의 환상과 내적 무의식을 심도 있게 연구한다. 신경증으로 자신을 몰고 가기 직전까지 하는 자신의 내면연구는 인상적이다. 특히, 자기의 어린시절 11살 때의 일을 기억해 내고 돌로 성을 쌓기 시작하는 장면은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하기까지 했다. 자서전인 만큼 그의 생, 사유, 사상은 책의 본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수유너머의 한 연구원이 융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을 아래에 인용한다. 융이 누구인가를 말하는데 이처럼 단적인 예도 없을 듯 하다.

(아래)

이제 제법 희끗한 머리를 가진 의사 융. 그를 만나고 나온 환자. 투덜거린다. “뭐 저런 의사가 다 있어. 진단도 안 내리고, 딱히 처방도 안하고, 그렇다고 안쓰럽다고 위로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상담을 마친 환자들은 뚱하고 불친절한 융에 대해 한번쯤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시 융을 찾았다. 그들은 느꼈다. 의사가 일방적으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법을 하사할 때 얻을 수 없던 것을. 그것은 환자가 의사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며, 자신이 능동적으로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융의 진료실은 여느 진료실과 달랐다. 그곳에는 반쯤 누운 상태에서 의사의 이야기를 편안히 받아들이도록 고안된 환자용 의자도, 그 뒤에서 환자를 은밀히 관찰하는 의사용 의자도 없었다. 대신 의사와 환자가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뿐. 그 의자에 앉아 융은 그저 물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융은 의사로서 말하는 대신 환자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그러고 나면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병의 문제부터 치유 단서까지 찾아내는 것이었다. 병의 심판자로서, 치유의 구원자로서 의사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융은 알았다.

 

융의 성격이 원래 좀 퉁명스러웠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융은 굳이 직업적 친절함으로 그것을 가리지 않았다. 그것은 의사에게 쉽게 의존하는 환자의 성향을 막고, 환자를 독립적인 대화상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의사와 환자는 병이 던져준 수수께끼를 함께 푸는 놀이의 참가자였다. 거기서 길을 만드는 것은 환자의 몫이었고 의사는 조력자일 뿐이다.

오늘날 너무도 병원에 의존해 사는 현대인을 보면 융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긴 안목으로 보아도 유효한 치료란 없습니다. 삶은 언제나 다시금 새롭게 획득되어야 하는 법이지요. 병을 만든 것도, 그 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도, 그리고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십시오!

 

융을 읽으며 유난히 캠벨이 떠올랐다. 캠벨이 융을 그토록 의지했었는지는 알 수 없으되 융의 이야기 곳곳에 캠벨이 어른거렸다. 특히, ‘신화의 힘의 내용은 융의 이야기를 캠벨의 음성으로 들려주는 것 같아서 많은 곳에 인용했다. 융은 캠벨을 되살리는 고마움도 주었다.

 

2. ‘카를 융 자서전_기억 꿈 사상(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 이 책은 융의 제자요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이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p. 8)

 

Ü A. 야페에게 인류를 대표하여 감사의 말을 전한다.

 

□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 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P. 8)

 

□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P. 9)

 

Ü 저 말이 아직은 낯설고 어렵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4세 무렵에 꾼 꿈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대목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P. 9)

 

□ 신을 믿는가? 누군가가 질문했고 수백만의 시청자들은 융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긴장하며 기다렸다.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p. 10)

 

Ü 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이 자신의 내면에 거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인가. 신의 속성을 안다는 것인가.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는 것인가. 신의 마음을 안다는 것인가. 신이 없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 말인가. 신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말인가.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Selbst : 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p. 11)

 

나는 내가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무한한 신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어떤 동물이나 식물 또는 돌에도 대비해 볼 수 없다.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자신이 제어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지배하는 일종의 심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생애에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p. 12)

 

Ü 저 질문 보라. 존재를 단 한번에 무너뜨리는 저 질문 좀 보아라. 답할 수 있기를 원한다.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지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은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 지점도 단지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인간의 생애는 일종의 애매한 실험이다. 그것은 숫자상으로만 보면 거창한 현상이다.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불충분하여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그 자체라 할 만하다. (p. 13)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 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p. 13)

 

Ü 땅속 뿌리 =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

융의 말에 의하면 이런 등식이 성립 될 수도 있겠다.

□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p. 14)

 

나는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공허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p. 14~15)

 

□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p. 15)

 

일생을 사로잡은 꿈, 유년시절

 

□ 나의 기억은 두세 살 적부터 시작된다. (p. 23)

 

내 생애에서 최초라고 할 만한 한 가지 기억,

나는 나무그늘 아래 유모차에 누워 있다. 화창하고 따뜻한 여름날, 하늘은 푸르다. 황금빛 햇살이 초록 나뭇잎들 사이로 비치고 있다. 유모차 덮개는 젖혀 있다. 나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막 눈을 뜨고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나무의 잎사귀와 꽃들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온통 경이롭고 다채롭고 그리고 찬란하다. (p. 23~24)

 

□ 어머니의 오랜 부재로 나는 무척 힘들었다.

그후로 사랑인란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출발하면서 함께 가져가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p. 26)

 

□ 자, 그를 좀 보라구. 저것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야!

나는 그 꿈을 여러 해 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오랜 후에야 비로소 그 기이한 형상이 일종의 남근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 33)

 

□ 그 남근상의 추상적 의미는 그것이 스스로 남근이 발기되듯 수직으로 (남근 발기는 어원적으로 보면 수직이라는 말과 통함) 보좌에 서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요도 입구를 눈으로 해석한 것이라든지 그 위에 있는 듯한 광원 같은 것은 남근상이라는 낱말의 어원을 시사하고 있다. 남근상(phallus)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비슷한 팔로스는 빛나는 찬란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무튼 그 꿈속의 남근상은 보통은 언급되지 않는 지하의 신으로 여겨진다. (p. 34)

 

□ 예수는 전폭적으로 사랑할 만한 대상도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수의 대역인 그 지하의 신이 자꾸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주어진 무시무시한 계시였다. (p. 34~35)

 

Ü 캠벨이 말한다.

 

융 박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어요.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신화의 힘 중에서, p. 379)

 

□ 검은 남자, 사람을 잡아먹는 것, 우연, 회고적인 해석에 대해 헛소리를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느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 이들 점잖고 쓸모 있고 건장한 사람들은 나에게 낙천적인 올챙이들처럼 여겨진다. 그 올챙이들은 아주 얕은 빗물웅덩이에 가득 모여들어 햇볕을 받으며 즐겁게 꼬리치고 있으나 바로 다음날에 웅덩이가 말라버릴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p. 37)

 

Ü 내 사유는 융의 모든 문장에서 유보할 수밖에 없다. 내적 사건을 파악 중이다.

 

□ 나는 종종 그 어둡고 외진 방에 몰래 들어가 그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몇 시간이나 그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아름다움이었다. (p. 39)

 

Ü 자신이 느끼는 자신만의 아름다움. 기쁨, 행복, 즐거움, 신명중요하다.

 

□ 심인성 동기 (p. 44)

 

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단어인 듯 하다.

 

□ 유년시절에 나는 시골학교 학우들과 사귀는 동안 발견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p. 45)

 

Ü 한 개인으로 보자면 이는 좋은 것인가. 공동체로 보자면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인가.

 

나의 밤 기도는 낮을 잘 마감해주고 편안히 밤과 잠으로 인도해 주는 종교의식적인 피난처인 셈이었다. 그러나 낮이 되면 새로운 위험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나 자신과의 불화를 느끼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의 내적 안정이 위협을 받았다. (p. 45~46)

 

□ 그 돌은 나의 돌이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종종 그 돌 위에 앉아 생각의 유희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돌에 앉아 있다. 나는 위에 있고 돌은 밑에 있다. 그런데 돌도 나라고 말하며 내가 여기 이 비탈에 누워 있고 어떤 자가 내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의문이 일어났다.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내가 돌이고 어떤 자가 내 위에 앉아 있단 말인가? (p. 46)

 

Ü 사유의 자기 이탈, 존재의 배타성 또는 존재의 자기화, 어렵기 그지 없다. 돌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고운기가 삼국유사에서 소개한 이야기 생각나 실어둔다.

 

하루 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근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 내가 심취했던 유년시절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었으며 나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계속 굴러가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잃지 않기 위해 그 장소에서 억지로 몸을 돌려야만 했다. (p. 47)

 

□ 종교적인 가르침이 나에게 주입되면서 이것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다.’라는 말들을 듣게 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아주 신비로운 다른 무언가가 있을거야’ (p. 50)

 

Ü 환상은 거창한 것을 생각해 내야만 하는 정신적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미지에 대한 상상과는 조금 다르다.

 

□ 유년시절의 저 유사 성적인 대상이 한층 발전한 것으로 이제는 생명의 숨결, 창조적인 충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 일이 나중에 아프리카 원주민에게서 발견한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P. 52)

 

Ü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말한다.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학창시절)

 

□ 은밀하고 지독한 부러움 (P. 55)

 

Ü 부자인 동급생을 보고 11세의 융이 느낀 감정

 

□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목사요 나는 그보다 더 가난한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구두 바닥은 구멍이 뚫려 젖은 양말을 신은 채 여섯 시간이나 수업을 받으며 앉아 있어야 했다. (P. 56)

 

Ü 현실을 인식해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아프기 시작한다. 종종 현실이 모두인 것처럼 생각해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모두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 어머니가 내 등 뒤에 대고 아빠 엄마의 안부 전하는 것을 잊지 말거라. 코 닦는 것도 잊지 말고. 너 손수건은 챙겼니? 손은 잘 씻었니?

 

내 귀에 다음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 ‘내 신발은 더럽고 손도 깨끗하지 못하다. 손수건도 없고 목덜미도 까맣다.’ (p. 58~59)

 

□ 수는 꽃이나 동물, 화석도 아니었다. 수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헤아림을 통해 생겨나는 수량에 불과했다. 혼란스럽게도 이 수량은 이제 소리를 의미하는 문자로 대체되어 말하자면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더욱 이상하게도 급우들은 이 수들을 다룰 줄 알았으며 자명한 것으로 여겼다. 아무도 나에게 수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못했고 나는 그러한 의문을 조리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나의 어려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p. 60~61)

 

Ü 그러게 말이다. 수란 무엇일까. 인류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한 가장 큰 공로를 수에게 부여해야겠지만 수라는 것이 개념의 상징일 뿐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기가 참 어렵네. 문자와 마찬가지로 개념이 언어가 되어버린 형국이다.

 

연구원 최세린의 칼럼에는 수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 담겨있다. 인용한다.

 

수란 양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해 온 추상적인 개념이다. 수는 물체의 수량 등을 나타내는 것이고, 수를 표시하기 위한 기호가 숫자다. 예를 들어, 사과 한 개, 자동차 한 대, 강아지 한 마리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사실들이나, 이 사실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개념을 뽑아 이를 1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이 사과, 자동차, 강아지는 아니며 또한 위에서 아래로 그어진 선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수의 종류는 자연수, 정수, 유리수, 무리수, 실수, 허수, 복소수 이렇게 있는데, 이 수들은 방정식의 해를 구하기 위해 생겨났다. 자연수는 자연에서 발견한 것이라면 (몇 개인지 수량을 나타내기 위해) 음수는 ‘x+1=0’의 해를 구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루트 2와 같은 숫자는 x^-2=0의 해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또 소크라테스의 대화문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사동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넓이가 2인 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를 구하면?” 그때 사동은 자연수나 유리수 만으로는 한 변의 길이를 구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때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한 변의 길이는 바로루트2’라고 말이다정사각형의 넓이를 알 때 한 변의 길이를 구하기 위해 무리수가 등장한 것이다. 방정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기하학적으로도 설명가능하다. 따라서무조건 외워의 방식보다 수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수의 근원, 즉 기원을 알게 되면 말이다.’

□ 그런데도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격앙시켰던 것은 a=b, b=c이면 a=c가 된다는 그런 공식이었다. 확정된 정의에 의한다면 a b와 다른 것을 가리키므로 별개의 것이며 b와 똑같이 취급될 수 없는 것이었다. C 역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등식을 다루는 경우에는 a=a, b=b 등으로 말해지는 것인데 a=b는 즉각 거짓말이나 속임수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p. 61)

 

□ 만일 내가 학우들처럼 a=b, 혹은 태양=, =고양이 들과 같은 공식들을 갈등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수학이 끝도 없이 나를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집스럽게 가지고 있다. (p. 62)

 

□ 나는 장님 눈을 하고 있는 그리스 신들의 모형을 그대로 그려야만 했고 (p. 63)

 

□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돌 하나, 식물 하나, 그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형용할 수 없는 듯이 여겨졌다. 말하자면 자연의 본질 속으로 숨어들면서 모든 인간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p. 67)

 

□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진지한 하느님은 인류 최초의 부모가 죄를 범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p. 78)

 

하느님은 저 위 높은 곳에서 황금보좌에 앉아 있고 보좌 밑으로부터 거대한 똥덩러리 하나가 화려하게 채색된 새 지붕에 떨어져 지붕을 산산조작내고 대성당의 벽돌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안도감과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p. 80)

 

Ü 파괴본능인가.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 원형의 인간이라는 융의 입장에서는 융 자신이 이런 생각과 사유로 원형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겠다.

 

하느님은 또한 아담과 이브를 그러한 방법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느님은 그들이 복종하는가를 알기 위해 그렇게 했다. (p. 81)

 

Ü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사과를 배어 문 것은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된 그야말로 착하고 무력한 인간의 모습, 다름 아니다. 인류의 시작은 그 시작부터가 한계 지어진 삶이었다.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천 년 동안 살아 있다.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p. 85)

 

Ü 성철이 설파했던 부처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상대성 원리, 원자의 구조 등 대부분의 말이 융이 말하는 위의 문장과 유사하다. 인간은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융이 서문에서도 말했듯 땅속 뿌리 =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를 생각할 때 지금의 융은 돌과의 대화가 가능한 것이겠다. 돌과 동질감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인간

 

□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 누가 놀이까지도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나는 그 놀이를 그만두었다. (p. 87)

 

Ü 선의의 경쟁조차 쌍방에게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다. 모든 경쟁은 불필요하다.

 

□ 실제적인 잘못과 잠재적인 잘못 그 둘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비난들에 대해 특별히 예민했다. 그 비난들이 모두 어느 정도는 급소를 찔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고소 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알리바이 비망록을 자주 작성하기까지 했다. 내가 실제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 참 편했다. 그때는 적어도 무슨 이유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89)

 

Ü 내면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경우라야만 평온이 찾아오는 감정

 

□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있었으며 그때 답을 준 자는 이미 항상 있었고 지금도 항상 있는 존재였다. 그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흘리는 전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p. 96)

 

Ü 융의 이런 관념은 언제나 어렴풋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사유의 전의를 건드린다.

 

□ 진정한 인식은 본능에서 비롯되거나 타인과의 신비로운 교제에 기인한다. 그것은 비개인적인 관조행위를 통해 보는 배후의 눈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p. 101)

 

□ 어찌 그렇게 경솔한 짓을 저질렀소?

경솔한 짓이라니요?

그렇고 말고요, 당신이 늘어놓은 그 이야기 말이오!

그 이야기는 내가 지어낸 것인데요!

 

정말 놀랍게도 내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의 인생사를 낱낱이 이야기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 순간에 내가 했던 이야기 중 한 마디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p. 102)

 

Ü 융은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어떤 일을 갑자기 알게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Oh….my…..god.

 

□ 왜 인간은 그와 일체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와 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 기독교라고 불렀으나 내가 하느님을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은 하느님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p. 108)

 

□ 나에게 그것은 종교가 아니었고 거기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내가 더 이상 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p. 108)

 

□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것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다.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한쪽 면에만 매달려 유혹자와 파괴자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p. 109)

 

Ü !!!! 캠벨이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인가.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데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 하느님은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의 자아였다. 그것은 나 자신이 나의 정신적 신체적 표현방식으로서의 자아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p. 112)

 

Ü 융은 캠벨과 유사하다. 알 수 없는 에너지로 인해 우주는 움직이지만 그 에너지는 우리 사유의 밖에 있어서 가끔씩 그 에너지가 우리가 지닌 윤리, 도덕을 벗어난 일을 벌일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우리만의 시각으로 판단하여 공포의 극을 향하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 너머의 에너지가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나의 의문은 캠벨이 인도의 한 구루를 만나 묻는 질문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천박함이 영혼을 압살하는 지금을아니라고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인가 말이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 뭔가 아닌 지금에 대한 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 하느님이 至善이라면 그가 창조한 세계와 피조물이 왜 이토록 불완전하고 부패하고 비참하단 말인가? 분명히 악마에게 침투당해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마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었다. (p. 116)

 

□ 그 책은 내 마음에 기적의 향유처럼 흘러 들어왔다.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여기에 악마를 진지하게 다루고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방해하는 힘을 가진 적대자와 피로 계약을 맺기까지 한 자가 있구나. (p. 116~117)

 

Ü 융은 드디어 괴테를 만난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의 계약 관계를 심도 있게 바라본다. 불완전하고 어리석고 결핍 투성이인 인간과 그를 만드는 완전한 신, 하느님에 대한 의문을 파우스트를 통해 풀어보려 시도 한다.

 

□ 그 책을 읽고 나는 파우스트가 일종의 철학자였으며 철학에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으로부터 진리를 위한 개방성을 분명히 배웠다는 사실을 앍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철학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었으나 새로운 희망이 내 안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p. 118)

 

□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그토록 숭고한 관념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어느 일정한 수준까지는 이미 발달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p. 119)

 

Ü 철학자의 시선인가. 피조물은 일정한 수준, 신은 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는 그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허용했다는 말이겠다. 이 말이 맞다면 무력해진다.

 

□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예컨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양모를 갉아 먹는 옷좀나방이 다른 옷좀나방들에게 오스트레일리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p. 120)

 

Ü 아주, 아주 적절한 비유다. 신이 보는 인간은 지구면 위의 옷좀나방에 불과한 것이다. 이 또한 무력해 지는구나.

 

나 자신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거기(2의 인격) 있다는 의미심장한 느낌이 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별들과 끝없는 우주의 장엄한 세계의 숨결이 나에게 닿는 것 같았으며 또한 오래전에 죽었으나 아직도 영겁의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의 영혼이 죽었으나 아직도 영겁의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의 영혼이 보이지 않게 몰래 방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급전은 누멘(numen, 신성한 힘)의 후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p. 128)

 

Ü 느껴보자. 어디 한번역시 잡히지 않는다. 이 또한 캠벨에게서 힌트를 하나 얻는다.

 

이 우주에는 수억 개, 수억 갑절이나 되는 열원자로가 흩어진 채 불길을 내뿜고 있어요. 이 열원자로가 바로 별인데 우리 태양은 그런 별 중 하납니다. 그 중 많은 별은 실제로 산산조각이 나면서 우주 저편으로 흩어지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에서 나오는 먼지와 가스에서 수많은 생명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잇는 아득한 우주 저편에서 끊임없이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지 않습니까? 이 초음파는 이른 바 창조의 빅뱅이라는 대폭발의 메아리라더군요. 이런 초음파 중에는 자그마치 18억년 전에 발생한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18억년 동안이나 우주를 가로질러와 이제야 우리에게 들리게 된 것이지요.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 땅바닥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나무를 올려다보기도 했다. 동물처럼 무리를 이루고 짝을 짓고 서로 싸웠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질서 있는 우주 속에 신의 세계 안에 온갖 것이 태어나고 온갖 것이 이미 죽어 있는 영원 속에 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p. 130)

 

□ 항온동물은 우리와 아주 유사하고 우리의 무지를 나누어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 (p. 130)

 

동물들도 우리처럼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불안과 신뢰를 경험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언어, 예리한 의식, 과학 들을 제외한 존재의 온갖 본질적인 요소들을 공유하는 셈이었다. (p. 130)

 

Ü 이들의 원형이 같으므로. 그래 옳은 말이다. 단지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신의 세계가 지상에 나타난 것은 일종의 직접적인 메시지에 의해 식물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치 자기를 관찰하는 자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창조자의 어깨 너머로 그가 어떻게 장난감이나 장식품을 만들고 있는가 사람들이 바라본 것과도 같았다. 이에 비해 인간과 정상적인 동물들은 자립한 신의 분신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발적으로 돌아다니며 서식처를 정할 수 있었다. 그 반대로 식물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장소에 묶여 있었다.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나무들은 특히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화 그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p. 131)

 

Ü 융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거의 완벽한 system을 구현하고 있는 식물계, 어쩌면 가장 진화된 형태의 생명 유지 system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천 년을 넘게 살아가는 구조를 지닌 주목과 언어가 아니라 향기로 의사를 전달하는 꽃,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유기화하여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방법까지

 

□ 맹목적 의지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지성이 그 의지에게 자신의 관념을 내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p. 135)

 

□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에게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p. 138)

 

Ü 신이 자신에게 모두였던 인간, 캬 멋지지 않은가.

 

□ 나 자신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우주에서 하나의 눈으로 여겨졌으나 지상에서는 조약돌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p. 144)

 

그러나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그 음료는 술이므로(p. 147)

 

그래 이것이야말로 세계다. 나의 세계, 고유한 세계요 그 비밀이다. 이곳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 없는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있는 곳이다. (p. 149)

 

Ü 융은 루체른의 리기산에 올라 웅장한 산을 보며 이와 같이 느낀다. 내가 찾아 헤맨 표현이기도 하겠다. 두고두고 새기자.

 

□ 식물은 외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철학적인 경탄을 가지고 바라보아야만 했다.

식물은 기독교 신앙이나 의지의 부정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식물은 분명히 순진무구한 신성한 상태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식물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p. 159)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 결코 따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나의 신조였다. (p. 166)

 

Ü 앞서는 자의 DNA가 있다. 느껴진다.

 

□ 제2의 인격이 우세할 때는 제1의 인격은 제2의 인격에 묻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반대로 제1의 인격은 제2의 인격을 어두운 내적 영역으로 보았다. 2의 인격이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이 마치 세계의 언저리에서 던져져 깜깜한 무한 속으로 소리 없이 가라앉은 하나의 돌멩이 같다는 것이었다. (P. 168)

 

□ 그런데 제2의 인격은 파우스트 속에 인격화된 바와 같이 중세와 은밀한 일체감을 느꼈고 아마도 괴테의 심금을 깊이 울렸을 흘러간 시대의 유산과도 그러한 일체감을 느꼈다. 그러므로 괴테에게도 제2의 인격은 하나의 실재였다. 이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P. 168)

 

Ü 괴테와 융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네들이 바라보는 신의 모습은 유사한 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유사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

 

□ 나의 대부요 보증인은 위대한 괴테 바로 그 자신이었다. (P. 169)

 

□ 나는 제1의 인격으로서 공부, 돈벌기, 책임, 분규, 혼란, 과실, 복종, 패배들을 헤쳐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P. 171)

 

Ü 우리 삶 대부분도 융이 말하는 제1의 인격에 의해 지배 받는다. 1의 인격을 나로부터 때어낸다면 좋을 것이나 그것은 자신을 찾는 일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일일 수도 있다. 1의 인격을 잘 다듬어 제2의 인격에 가까운 인간으로 만드는 작업을 꾸준히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 이러한 혼과 관련하여 오직 분명한 것은 그 역사적인 성격, 즉 시간성의 확장 내지 무시간성이었다. 물론 나는 이 사실에 대해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의 공간적인 존재성에 관해서도 상상을 하지 않았다. (P. 173)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 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P. 175)

 

Ü 집단정신이 인간의 세계라는 원형적인 관계에 대하여 생각과 사유가 보태어지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싶다. 그래서 융은 인류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는가. 그러나 결국 그도 이 사유의 끝은 말하여 질 수 없는 무언가로 맺어버리고 말았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신이라는 존재와 신화에 대하여 그렇게 갈구하는 삶을 살았을 것.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P. 176)

 

Ü 니 안에 모든 해답이 있다던 징겸의 말이 생각난다.

 

□ 유물론 역시 신학과 마찬가지로 믿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다 인식론적 비판이나 경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p. 181)

 

□ 내가 보기에 신앙의 가장 큰 죄는 경험을 앞지르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p. 182)

 

□ 아버지가 꿈속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실재처럼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체험으로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사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다. (p. 186)

 

□ 동물들에 대한 나의 연민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불교적인 몸짓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원초적인 정신적 태도의 바탕, 즉 동물과의 무의식적인 동일시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p. 197)

 

Ü 융은 특히 항온동물에 연민을 느끼고 있다. 나무에게는 아예 인간 너머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 누가 알겠는가? 니체가 내적인 체험과 통찰을 가지고 불행하게도 그것들에 관해 말하고자 했으나 아무에게도 이해 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히 그는 기인이었다. (p. 198)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이 책은 괴테의 파우스트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아주 강렬한 체험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p. 199)

 

□ 나는 소 두 마리가 도깨비마법에 걸려 그 머리들이 동일한 고삐에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한 늙은 농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의 어린 아들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농부가 대답했다.

얘야 그런 건 말하는 게 아니란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서 순진한 사람은 동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작가, 신문기자, 또는 시인 들에게만 그와 같은 무례한 행동을 허용할 뿐이다. (p. 201)

 

Ü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

 

□ 그녀가 죽어가는 최후 몇 달 동안 그녀의 성격들이 하나하나 그녀로부터 분리되어 결국은 두 살짜리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서 마지막 잠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p. 208)

 

□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p. 210)

 

□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 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p. 213)

 

Ü 인격 vs 인격, 사람 인격에 대한 mass

 

□ 나는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다. 정신의학은 정신병이 생겼을 때 이른바 건전한 정신을 엄습하는 생물학적 반응을 조리 있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p. 216)

 

Ü 인간 정신의 해부학.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p. 217)

 

Ü 인간에 대한 이 새로운 정의를 보라. 기가 막히지 않는가.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 무엇이 정신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p. 221)

 

□ 그 결과로 그녀는 14일만에 퇴원할 수 있었으며 다시는 입원하지 않았다. (p. 225)

 

Ü 그녀는 융을 찾아온 환자다. 연상검사를 통해 그녀의 삶에서 굳건히 닫혀있던 살인의 풍경을 융은 끄집어 내었고 살인 사실을 억압함으로 인해 고통 받은 영혼은 그것을 끄집어 냄으로써 치유되었다.

 

□ 그녀는 운명에 의해 충분히 벌을 받았다. (p. 225)

 

□ 의사는 단지 그 비밀스러운 사연을 어떻게 알아내는가를 터득해야만 한다. 의사는 증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적인 재료의 탐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연상검사가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또한 꿈의 해석을 통해서나 환자와 오랫동안 끈기 있게 인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p. 226)

 

Ü 융은 진정한 의사구나.

 

□ 살인범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셈이다.

때로는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그 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p. 235)

 

□ 결정적인 점은 환자 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p. 236)

 

□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이 그 배후에 있었다.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p. 241)

 

Ü 모든 사람은 조금씩의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잠재적 정신병 보균자들이겠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이 신의 광기에서 출발하므로.

 

□ 잠재적 정신병의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p. 249)

 

□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분석. (p. 250)

 

□ 자신의 문제를 다룰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Ü 괘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알지 못하고 말하면 중언부언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면 상대방도 이해하기 어렵다.

 

□ 치료에서 중요한 고비를 맞았을 때 결정적인 것은 의사가 자기 자신을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보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자기 권위로 씌워버리는냐 하는 것이다. (p. 251)

 

Ü 이것은 비단 의사의 입장만이 아니다. 일과 사상, 사유, 가치 등을 이야기할 때에도 적용되겠다. 물리적, 지위적 권위로 밀어 부치는 일이야말로 가장 하수가 하는 일이다.

 

□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p. 253)

 

□ 교황 자신도 고해 신부를 두고 있다. (p. 253)

 

□ 여성들은 대개 뛰어난 직관과 정확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비밀스러운 의향을 간파할 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의 아니마anima 가 꾸미는 음모까지 꿰뚫어볼 줄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남편이 초인이라고 확신하는 부인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p. 254)

 

Ü 그랬구나. 그러니 아내에게는 까불지 말자. 머털도사가 나와 같이 살고 있었구나.

 

□ 내 이마와 뒷머리가 어떤 물체에 맞은 듯한 무지근한 통증 때문에 내가 눈을 떳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음날 환자가 자살했는데 그는 권총으로 그의 뒷머리를 쏘았다. (p. 260)

 

□ 동시성, 고대의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p. 261)

 

Ü 무의식이 본격적으로 융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p. 264)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p. 270)

 

이것은 표면상 확실하고 인위적이나 이차원적인 개념에 불과한 세계를 위하여 원형의 영향과 그 실제적인 체험을 외면하려는 숨은 목적에 이바지 한다. 그 세계는 삶의 진실을 소위 명료한 개념들로 은폐하려고 한다. 개념적인 것으로 옮기는 것은 체험으로부터 실체를 빼앗고 그 대신 단지 이름들만 붙이는 셈이다.

개념에 대해서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라는 안락함이다. (p. 271)

 

□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p. 271)

 

□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p. 272)

 

Ü 그의 삶 또한, 인간애와 연민으로 가득했다. 세계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 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내 옆의 사람, 지구면에 존재하는 인류를 알아가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 억압기제라는 개념을 꿈의 분야에 적용한 점이었다. 환자는 어떤 자극어에 대해서는 연상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응시간이 무척 길어지곤 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러한 연상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적마다 일어났다. (P. 276)

 

□ 네가 그와 같이 프로이트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다면 그건 일종의 사기다. 사람은 인생을 거짓 위에 세울 수 없다. (P. 278)

 

Ü 비주류 위험 학자 프로이트를 앞에 두고 융은 갈등한다. 결국 사람들의 시선을 던지고 자신의 내면을 따라 프로이트를 동반자로 맞는다. 융은 용감하다.

 

□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할 것입니다. 연구를 제한하고 진리를 숨기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나는 경력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P. 278)

 

친애하는 융, 성이론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십시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는 성이론을 가지고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보루 같은 것 말입니다.’

그는 열정에 넘쳐서 말했는데 그 말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해다오! 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P. 281)

 

Ü 프로이트가 융에게 조급하다.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하는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다. 그런건가, 뭐든 조급한 쪽에서 우위를 빼앗기게 되어 있는 건가.

 

□ 보루와 교리 같은 단어들,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다. (P. 281)

 

□ 결국 그는 성욕 역시 내면에서 보면 영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했다.

 

자기가 자신의 가장 나쁜 적이 되어 있는 경우, 그 사람의 신랄함보다 더 지독한 신랄함은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해석의 단조로움, 신비주의에 대한 도피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P. 284)

 

□ 이제 나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니체의 권력원리의 우상화를 보상하는 정신사의 교묘한 책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프로이트 VS 니체 (P. 285)

 

□ 동양에서는 니르드반드바(Nirdvandva : 양쪽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p. 287)

 

Ü 중용이 꼭 이와 같겠다. Dynamic equilibrium point. 니르드반드바, 양쪽의 자유.

 

□ 프로이트는 말했다.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 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때의 그 말이 나의 기억에서 영 잊혀지지 않았다. (p. 295)

 

□ 선사시대의 동굴을 인간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기 전에는 대개 동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원시적인 마음은 동물의 혼의 활동과 가까이 접하고 있다. (p. 299)

 

Ü 인간과 지낸 시간보다 동물과 지낸 시간이 인류를 통틀어 인간에게는 더 길었다.

 

□ 나의 꿈은 이와 같이 일종의 인간정신의 구조적 도식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정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전적으로 비개인적인 성질의 어떤 것을 가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본능의 형태, 즉 원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p. 300)

 

Ü 개인정신의 밑바닥에 있는 선험적이고 집단적인 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

 

□ 나는 고대 신화학과 원시인의 심리학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p. 302)

 

Ü 신화의 힘에서 캠벨은 융의 이런 이야기를 대변하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있다.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캠벨은 융이 말하는 신화와 원시 심리학의 긴밀한 관계를 이렇게 해석한 것이 아닌가.

원시의 삶의 양태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한 모든 병과 삶의 고통은 원시의 삶으로 회귀함으로써 치유된다.

 

□ 프로이트가 이론과 방법을 동일시하고 그것들을 교리화하려는 의도를 밝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와 협력할 수 없었다. (p. 309)

 

□ 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꿈을 무의식과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진 가치를 과거와 망각으로부터 되찾아왔다. (p. 312)

 

내 안의 여인 아니마

 

□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어떤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기독교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솔직히 말해, 아니오! 나는 그 신화 속에 살고 있지 않소.

그럼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인가?

그렇소.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오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너는 어떤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여기에 이르자 내 마음이 편치 않아졌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중단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만 것이었다. (p. 316~317)

 

Ü 나의 신화는 무엇인가. 너는 무엇을 신화로 하여 너의 인생을 꾸려 가는가.

 

□ 무의식의 실제 체험을 통해 나는 이 유물이 결코 죽은 형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정신에 속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다원형설이 발전되어 나왔다. (p. 319)

 

□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열 살이나 열한 살쯤 되었을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벽돌로 집짓는 놀이에 열중했다놀랍게도 이런 기억들이 일종의 감격과 함께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하, 여기에 삶이 있구나!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게 결여되어 있는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성인이 된 남자와 열한 살 소년을 서로 이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그 시절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돌아가 아이의 놀이를 하면서 아이의 삶을 한번 더 살아보는 수 밖에 없었다.

이 순간이 내 운명의 전환점이었다. (p. 320~321)

 

Ü 융은 자신을 찾기 위해 열한 살, 빛나는 삶의 순간을 기억해 내고 그 때의 그 감격으로 돌아가 자신을 다시 바라보려 한다. 그 때 느낌, 의식이 인류의 원시적 삶과의 유사점을 밝혀 내려 한다. 인간 원형을 자신에서부터 찾으려는 노력. 원형을 찾는 것, 자신의 신화를 찾는 것이란 이런 것이구나.

 

□ 내 신화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은 느끼고 있었다. (p. 322)

 

Ü 사람들이 가지 않은 오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서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자신의 길로 선택한 평범한 사람은 먼저 자신의 문제를 풀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자기라는 오지를 풀어 가는 첫 번째 출발지다. 나라는 오지, 나라는 수수께끼, ‘라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라는 사람이 걸어 간 오지의 아름다움을 보여 줄 수 있다.

 

 

□ 나 자신의 체험이 집단의 체험과 어느 정도까지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만 했다. (p. 324)

 

Ü 융은 자신의 꿈에서 1차 세계대전을 예견했다. 앞으로 이뤄질 일을 무의식은 안다는 말인가. 단지 예견이란 말인가. 원시의 삶은 지금 우리의 삶과 온갖 일들을 겪어 봤다는 말인가. 우리는 지금 복제된 삶을 살고 있고 이전의 삶을 반복하는 중인가. 하느님은 무엇인가. 조물주는 뭐 하는가.

 

□ 희붐한 새벽 (p. 329)

 

□ 환상을 붙들기 위해 나는 자주 하강을 상상했다. 한번 깊은 곳에 이르기 위해서 심지어 몇 번이나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그야말로 300미터 깊이까지 내려가 보았다. 그 다음에는 벌써 우주적인 깊이까지 미쳤다. (p. 332)

 

Ü 이거 뭐지?

 

□ 신화에서 뱀은 영웅의 대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영웅은 뱀눈을 가지고 있다든가. 영웅이 죽은 후에 뱀으로 변하여 숭배를 받는다든가. 뱀이 영웅의 어머니라든가 하는 이야기. (p. 334)

 

□ 필레몬과 또 다른 환상의 형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p. 335)

 

□ 나는 결코 인간세계에서 떨어져나온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비슷한 방식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 338)

 

□ 필레몬은 정신적 측면, 즉 이해력이지만 카는 이와 반대로 그리스 연금술의 안트로파리온(일종의 꼬마 난쟁이 요술사) 같은 자연혼이다. (p. 338)

 

□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anima 라고 불렀다. (p. 340)

 

□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p. 341)

 

Ü 그리스 격언

 

□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 나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나의 꿈을 통해 직접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다. (p. 343)

 

Ü 비로소 융은 인간을 능가하게 된 것인가. 원시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무기를 장착했고 이제 신에게 돌진하는 일만 남은 것인가.

 

□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p. 345)

 

□ 나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한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파우스트 제 2부는 문학적 시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파 사상에서 시작하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까지 이어지는 황금사슬의 한 고리다. (p. 346)

 

□ 그 무렵, 물론 나는 이승에 발판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족이며 직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p. 346)

 

Ü 어김없다. 무의식과 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인간임에도 현실의 제약은 따랐다. 신의 일이다.

 

□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p. 346)

 

□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 였다. (p. 347)

 

□ 우리는 우리가 찾던 것을 예루살렘에서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P. 348)

 

□ 이 체험이 있기 얼마 전에 나는 영혼이 내게서 떠나 날아가는 현상을 기록했다. 그것은 나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영혼, 즉 아니마는 무의식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은 死者 집단과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신화적인 죽음의 나라즉 조상의 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 속에서 영혼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영혼이 무의식 또는 죽음의 나라로 되돌아간 셈이 된다. 이것은 원시종족에서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소위 영혼의 분실 현상과 일치한다. (P. 349)

 

Ü 융이 말하는 이 체험은 자신의 가족과 집에서 일어난 유령 사건을 말한다.

 

□ 환상의 이미지 속에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과도 관계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내가 나 자신에게만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그후로 내 인생은 보편성에 속하게 되었다. (P. 350)

 

Ü 철학이 중요한 까닭은 개별적 신화가 밝혀내지 못하는 보편성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나를 알고 난 다음에는 타인과 사회를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철학이 필요한 이유다.

 

□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학문적인 출세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나의 내적 인격 즉 보다 높은 이성의 길을 좇아 무의식과 직면하는 실험, 그 흥미 있는 나의 과제를 서서히 밀고 나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알았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P. 352~353)

 

Ü 융은 제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제 자신이 말한 이승의 발판하나를 버린다. 용기가 없다면 선택하기 힘들었을 지극히 힘들었을 결정이었겠다.

 

□ 만다라는 형성, 변환, 영원한 마음의 영원한 재창조 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즉 인격의 전체성이었다. 모든 것이 잘돼가면 조화로우나 자기기만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P. 356)

 

□ 자기는 나 자신인 동시에 나의 세계인 單子와 같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만다라는 이 단자를 표시하며 정신의 소우주적 성질에 해당했다. (P. 356)

 

□ 영원에 이르는 창, 만다라 (P. 358)

 

□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P. 361)

 

연금술을 발견하다

 

□ 어느 날 밤 그 문헌을 공부하고 있을 때 문득 내가 17세기 안에 갇혔던 꿈이 생각났다. 마침내 나는 그 의미를 파악했다. ‘, 그렇구나!’ 이제 나는 연금술을 처음부터 전부 연구해야 될 운명에 처했구나!’ (p. 371)

 

Ü 연금술에 대해 무지하여 포털을 이용하여 찾아 보았다.

 

비금속(卑金屬)을 인공적 수단으로 귀금속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심리학자 C.G.융은 연금술의 표현형식이 된 심벌리즘(symbolism)에는 인간의 심리적 경향에 호소하는 것이 있고, 이것이 신비적 연금술을 성립시켰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고, 실천적 연금술에도 신비적 성격이 따르고 있었다. 어원적으로 알케미는 아랍어 알키미아 alkimia가 유럽어화(語化)한 것으로, 그 정관사 al을 제외한 어근 kimia는 한 설에 따르면 ‘흑토(黑土)의 나라’, 즉 이집트를 뜻하는 이집트어 캠 khem에서 유래하며, 금속의 용융 ·주조를 뜻하는 그리스어 키마 khyma에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연금술이 헬레니즘의 이집트에서 싹튼 것은 그리스 자연철학의 물질관에 기초하여 금 ·은의 형상을 가열 ·증류 ·승화 등의 수단에 의하여 추출하고 이것을 비금속의 질료에 부여하여 형상 전화를 실현하려는 착상이 이집트의 전통적인 고도한 야금 기술, 합금 ·착색에 의한 금 ·은과 외견상 비슷한 재료를 얻으려는 금속 가공기술에 결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집트,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등 중동지역의 신비주의 관념과, 기술을 주술로서 파악하는 고래의 관념이 그리스 철학과 유착하고, 여기에 덧붙여 천체와 금속을 관련 짓는 점성술 사상도 포섭되어 연금술은 그 발단부터 복잡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연금술의 대표적 저작자로는 BC 2세기쯤 그리스어 책 피자카의 작자 볼로스 데모크리토스, 금속의 화학 변화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긴 3세기의 조시모스 등이 있다. 이 시대에 유리 ·도기를 재료로 하는 증류기(蒸溜器)가 발달하고, 금 ·은의 분리 ·정제 기술이 고도화되어 있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역시 만만치 않은 학문, 기술이다.

 

□ 나는 곧 분석심리학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372)

 

Ü 무의식과 신화, 역사적 관점에서 이들은 일치하였고 자연철학의 물질관으로부터 시작하는 연금술이 또한 동일함을 발견한 것이다. 그 기쁨의 강도는 오르가즘을 뛰어넘었을 듯.

 

□ 괴테는 파우스트를 자신의 주요과업이라 불렀으며 그의 생애는 이 드라마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그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동하는 실체로서 초개인적인 과정이며 원형세계의 위대한 꿈이라는 것을 인상 깊게 지각하게 된다.

, 인격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과제요 목표였다. (p. 373)

 

□ 저서,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는 개인의 세계와의 충돌, 개인과 타인, 개인과 사물의 관계를 다루었다. 또한 의식의 여러 측면, 의식이 세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여러 태도를 논의했다. (p. 375)

 

□ 나는 리비도를 물리적 에너지의 정신적인 유사물이라고 생각했다. (p. 376)

 

□ 그리고 무의식, 각 개인의 경우 그 과정을 꿈이나 환상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집단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이 반영된 표현이 특히 다양한 종교체계와 종교상징의 변환에서 발견된다.

개성화 과정 (p. 378)

 

Ü 人格化

 

□ 목수의 아들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의 구주가 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일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그 시대의 기대를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인간 예수 이외의 그 누구도 그와 같은 메시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p. 382)

 

Ü 융의 이 말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캠벨의 다음 말을 참고하라.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

 

‘내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고 나 또한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했지요? 이때 예수는 그 자리에 있는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가 실재한다는 관점에서 말한 겁니다. 그 다른 존재는 그리스도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의 존재일 수도 있어요. 누구든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살면 그리스도 같을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든 말씀의 메시지를 삶 속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면 곧 그리스도와 동등해질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구절의 의미인 겁니다

 

종교(religion)이라는 말은 렐리기오(religio) , ‘뒤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산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렐리기오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종교의 이미지에 상징으로 나타나 있어요. 상호 연결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상처 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료한다. (p. 388)

 

□ 신학자들은 나를 비난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학사상은 영원한 진리를 다루는 일에 늘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p. 390)

 

□ 여러 신의 힘으로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즉 인간의 세계인식 면에서 창조를 폐기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를 근소하지만 결정적으로 능가한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 (p. 395)

 

Ü 방사능으로 지상의 생물을 날려 버린다든지

 

□ 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 무의식으로부터의 의식의 발달, 그리고 보다 큰 인격, 즉 내적 인간이 각 개인의 삶에 미치는 작용을 다루었다. (p. 396)

 

밑바닥에 도달한 그 순간, 나는 학문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마지막 한계에 부딪혔다. 초월적인 것, 원형 그 자체의 본질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p. 397)

 

Ü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 그곳까지 이르게 된 인간의 감정은 어떠할까. 비트겐슈타인, , 부처, 예수

 

□ 단순해 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p. 405)

 

□ 볼링겐에서는 고요함이 나를 에워싸고 사람은 겸허하기 그지 없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산다.

 

□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이 글은 무지한 자들로부터 경멸당하고 배척되는 연금술사의 돌을 묘사하고 있다. (p. 406~407)

 

□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p. 407)

 

Ü 텔레스포로스, 그리스 신이며 회복의 신이라 하는데 자세한 이야기가 없다.

 

□ 메를린(중세 연금술사 또는 마법사)의 외침, 메를린전설을 보면,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외침을 듣고 있지만 그 뜻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해석하지 못한다고 한다. (p. 408)

 

Ü 융은 세상이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에 대한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다.

 

□ 사람들에게 무의식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인상적인 경험이다. (p. 409)

 

□ 물이 막 끊어오르자 주전자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물과 바람 소리 같은 음률의 흐름이었고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웠다. (p. 410)

 

□ 그것은 고독현상으로 외적인 공허와 정적을 사람들 무리의 이미지로 보상하려는 것이라고 말이다. (p. 413)

 

□ 나는 처음에는 인격의 이분화를 당연히 나 개인의 문제이며 책임으로 느꼈다. 파우스트가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고 나에게 구원과도 같은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런 이분성의 원인을 규명해주지는 않았다. 파우스트의 통찰은 바로 나의 경우에 맞는 것 같았다. (p. 418)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특징들은 그 속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바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로 휘말려 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옛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 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와 어버지의 아버지들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못할수록 우리도 그만큼 더욱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개인의 근원과의 단절이 심화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각 개인은 집단의 한 부분으로 단지 중력의 혼(니체가 말한 집단정신)을 따라 가게 된다.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고 했다. ‘성급함은 마귀에서 나온다.’ (p. 420~422)

 

Ü 신화의 힘에서 소개되었던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편지를 다시 새겨보자.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 이 지방은 이미 3대 문명이 거쳐갔다는 것이었다. 카르타고, 로마, 기독교 문명이 그것이다. (p. 428)

 

Ü 융은 튀니지에 있다.

 

□ 내가 끝없는 시간의 연속과 그 가운데서도 거의 변함이 없는 존재의 모습들로 말미암아 깊은 감명에 여전히 젖어 있을 때 갑자기 내 회중시계가 생각났다. 그리고 유럽인의 가속화된 시간을 떠올렸다.

나는 문득 이 사람들이 사냥꾼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막연한 불안을 느끼며 사냥꾼 냄새를 맡고 있는 사냥감 짐승들처럼 여겨졌다. 그 사냥꾼은 다시 말해 시간의 신으로서 아직 영원을 연상케하는 이들의 시간을 무자비하게 날과 시, 분과 초로 조각조각 잘게 쪼개게 될 것이었다. (p. 430)

 

Ü 시간개념이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신화의 힘을 읽을 때나 신곡을 읽을 때도 시간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시간에 대한 개념조차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량의 상실과 이에 따른 공허를 열차, 기선, 항공기, 로켓과 같은 성과물의 환상으로 보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빠른 속력으로 인해 유럽인으로부터 존재의 지속성을 더욱더 빼앗아가고 더 나아가 유럽인들 속도와 폭발적인 가속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다른 현실로 옮겨 놓는다. (p. 431)

 

Ü 황폐화 되어 가는 지구면, 어서 시간을 느낄 수 없는 곳으로 가자. 시간이 없다.

 

□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강렬함이다. (p. 433)

 

□ 격정적이고 기분대로 살아가며 생 그 자체에 한층 가까이 있으면서도 성찰을 모르는 이러한 인간존재가 우리 안에 있는 저 역사적 층에 강력한 암시효과를 주었다. (p. 436)

 

Ü 사는 대로 살아가는 삶. 인간 원형의 삶일지도.

 

□ 그렇다. 발전에 대한 맹신은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과거로부터 멀리 떼어놓을수록 더욱더 유치한 미래의 꿈에 매달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의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persona: 자아가 외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세계가 바라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를 위하여 이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p. 437)

 

유럽인은 합리적인 특성을 꽤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의 열정을 희생하고 얻은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원시적 인격 부분이 국부적인 지하존재로 떨어지는 운명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p. 438)

 

Ü 유럽인 뿐만이 아니겠다. 지금 이 나라는 지구면에서 가장 영혼을 개무시하는 나라로 전락했다. 하기야 천 년 이상 유교의 덕으로 지배되었던 나라가 이처럼 자본에 미쳐 날 뛰는 모습이 불가사의 하고 돈에 미쳐 배금하던 중국이 사회주의 채택한 지금의 모습 또한 불가사의 하다. 세상은 불가사의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 것인가. 잊혀진 것을 회복할 것인가, 두 가지 가능성을 두고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충분한 이유 없이 다시 그러한 발언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정신구조에서는 단순히 기계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관리되며 전체와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의식은 전체에 대한 조망이 없으므로 대개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사실 확인으로 그쳐야 하며 자기의 그림자와의 충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회답은 앞으로 진전되는 미래의 연구에 맡겨두어야 할 것이다. (p. 439~440)

 

Ü 두 번 읽기에서 자세히 읽어 보자.

두 번을 읽어도 애매하다. 우리 안에서 불쑥 불쑥 일어나는 느낌과 감정, 그리고 갖가지 일들은 과거가 또는 무의식이 나에게 주는 방향성 전환에 대한 신호라는 점. 그것을 의식에 대한 전체 조망 없이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그 점을 잡아 채어 잊혀진 자신을 회복하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사는 삶은 여기서 거두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내가 유럽인으로서 어떤 면이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가를 알면 우리가 가장 큰 문제인 유럽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p. 442)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p. 443)

 

Ü 푸에블로 인디언과 융과의 대화다.

 

□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가 식민지화, 이교도에 대한 복음전도, 문명의 전파 운운하는 것들이 또 하나의 다른 얼굴, 즉 사나운 맹금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p. 444)

 

Ü evangelism은 악이다. 예수를 더럽히는 일이다.

 

□ 옥비에 비아노와 지붕 위에 앉아 있을 때 눈부신 태양이 점점 더 높이 떠올랐는데 그가 태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떠오르는 저것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p. 447)

 

□ 당신은 모든 생명이 산에서 온다고 생각지 않소?

분명 여기서는 모든 생명이 산에서 나왔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으로 명백한 것은 없다. (p. 449)

 

Ü 루체른 리기산에 올라 융이 느꼈던 감회와 다르지 않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세계다. 나의 세계, 고유한 세계요 그 비밀이다. 이곳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 없는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있는 곳이다.’

 

□ 미국인은 우리를 가만놔두지 않는거요? 왜 그들은 우리의 춤을 금하려 하오?

우리는 미국인에 대항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소! (p. 449)

 

Ü 자본의 무식이 영혼을 압살하는 장면이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니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 451)

 

Ü 내가 그 태양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라. 그 의무와 신격을 지니고 평생을 살아가는 숙명을 가졌다 생각하라. 생의 소명, 이것이 신화다.

 

□ 모든 생명은 산에서 온다. 는 것은 그에게는 그대로 직접 다가오는 확신이었다.

 

Ü 신화의 힘에서 소개된 블랙엘크족의 산 개념을 상기하자. Axis mundi!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성스러운 산이라고 한 것은 사우드 다코타에 있는 하아네이 봉우리입니다. 블랙엘크는 그러나 그런 산은 도처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화적 깨달음입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axis mundi’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 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ㅇ뤼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 신과 우리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p. 452)

 

□ 조물주의 손에서 나온 것은 모두 좋다. –루소- (p. 453)

 

Ü 이 말은 음미가 필요하다.

 

□ 기시감(旣視感), 오천 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검은 남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p. 455)

 

Ü 데자뷰라 하지 않던가.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면 실제 전생에서 보았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알고도 지나치고 모르고도 지나친다. 그 지나친 것이 신인 것을 모르고 이건 어떤가. 삼국유사 오대산을 소개하며 나온 이야기다.

 

승려 : 무슨 일로 그렇게 멍하니 계시는가?

자장 : 꿈에 4구 게를 받았으나 산스크리트어라 해석하지 못하고 있소이다.

승려 : 이와 같이 법성을 풀어주고는 이것은 본디 우리 스승 석가모니께서 쓰신 도구들이오. 그대가 잘 지키시오.’

그대 나라의 북쪽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소. 1만명의 문수보살이 거기에 늘 계시지.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용이 나타나 재를 올리고 공양하였더니 알려 주었다.

지난 번 게를 번역해 주던 승려가 곧 문수진신입니다.’

 

이건 또 어떤가.

하루 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근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 (p. 457)

 

□ 인간은 창조와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객관적 실재가 되지 않은 상태라면 그 짐승들은 소리를 들려주지도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하면서 묵묵히 먹고, 새끼를 배고, 죽고, 머리를 끄덕이며 수억만 년이 지나도록 비 존재의 저 깊은 밤 속에서 정처 없이 돌아다닐 것이다. (p. 457)

 

Ü 곰곰이 생각하자. 아득하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리 되었을거라는 말인가. 그러면 우리는 비 존재의 깊은 밤을 돌아다니지 않을 수 있다.

 

□ 여자는 강력한 동업자인 셈이다. 여성의 평등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동반관계가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의 산물이다. (p. 467)

 

나는 백인여성의 남성화가 그녀들의 천연적인 전체성(샴바, 아이, 작은 가축, 자기 집, 그리고 부엌의 불)의 상실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여성의 결핍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현대사회에서 동성애가 맡은 역할은 대단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모성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일부는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번식의 저지!).

 

헤로도토스가 말한 인간과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일찍이 그와 같이 관찰한 적이 없었다. 온갖 마귀의 어머니인 유럽과 나는 수천 킬로미터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귀들이 이곳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전보도, 전화도, 편지도, 방문도 없었다.

나의 해방된 정신력은 큰 기쁨을 안고 태고의 광대한 곳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p. 470)

 

Ü 통찰의 깊이가 남다르다.

 

□ 주여 당신의 손에 나의 영혼을 맡기나이다. (p. 475)

 

□ 그 무렵 나는 마음속에 태초로부터 빛에 대한 동경이 깃들어 있다는 것과 태초의 어둠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는 절실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밤이 오면 모든 것은 빛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깊은 우수의 음조를 띠게 된다. 이것은 원시인의 눈빛에 들어 있고 또한 짐승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짐승의 눈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짐승의 혼인지 혹은 저 태초의 존재가 표현하는 간절한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분위기이며 그곳의 고독에 대한 체험이다. (p. 478)

 

Ü ..아프리카, , 눈빛, 어둠, 태초, 고독

 

□ 그들의 지혜는 그들에게 속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이 나에게 속할 뿐이다. (p. 488)

 

□ 두 농부가 각각 이륜마차를 타고 가다가 좁은 길에서 서로 부딪쳤다.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했는데 그 대신 서로 조심스럽게 공손한 태도로 아두칸 아나트만이라고 중얼거렸다. 이 말은 일시적인 방해일 뿐, 아무런 (개인적인) 감정이 없습니다.’라는 뜻이었다. (p. 489)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 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p. 491)

 

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의 샤워, 스스로를 헌신하여 참여했을 때 가지는 의젓함 그것이 해방이란 말이지

 

□ 저 덧붙여진 음란한 형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다르마(dharma 부처의 가르침, 계율)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무지한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p. 492)

 

Ü 이건 조금 억지이기도 하지만 일면 맞는 말이다. 사랑해서 떠난다는 일맥 한다. 

 

□ 그들의 태고의 기도, 옴 마니 파드메 훔’ (p. 495)

 

Ü (AUM)…태어남,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옴은 사대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 침묵. 옴이 시작되기까지의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옴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옴은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옴송을 통하여 우주와 접촉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정 체험입니다. 관계의 본질에 대한, 다분히 감정이 이입된 상태에서 했던 사고가 내 깨달음을 가능케 한 순간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 부처는 모방의 대상인 모범상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부처 자신의 이념은 약화되었다. 그리스도 모방이 기독교 이념의 발전을 치명적으로 가로 막은 것처럼 말이다. (p. 497)

 

□ 나는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저녁 예불을 경험했다. (p. 502)

 

Ü 나 또한 경험한 적이 있다. 목조 건물에 울려 퍼지던 남성 중창단의 쩌렁쩌렁한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를 말이다.

 

□ 아닙니다.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는 니르바나에 있으므로 그에게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꽃의 아름다움처럼 인생도 그렇게 지나가버리고 말도다. 신이시여, 나와 함께 이 제물의 은덕을 누리소서. 젊은이들이 그렇게 노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도적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p. 502)

 

□ 그녀의 묘비는 내가 그녀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마지막 유물 (p. 507)

 

□남자의 아니마는 현저히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에 깊이 물들어 있다. 선사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남성 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 남성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미 있었던 모든 삶이 아니마다. (p. 507)

 

Ü 융과 페미니즘과는 조금 먼 듯하다.

 

그곳은 여전히 고전시대가 그 장엄함과 비열함을 그대로 지닌 채 숨쉬고 있었다. (p. 510)

 

Ü 로마를 두고 융이 한 말이다. 과연!

 

나에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나 라고 말이다. 나는 이를 테면 남아 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참으로 나라는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었다. 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p. 516)

 

Ü 자신을 객관으로 존재시킬 수 있는 존재, 융은 인간보다 신에게 오히려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을 일찍이 신은 제한해 놓지 않았던가. Limit를 뚫어가는 인간과 limit를 재설정하는 신. 죽음, 영면으로 가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

 

□ 내가 우주공간에 있을 때는 무중력상태였고 나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다 지나가버렸다! (p. 520)

 

□ 그가 원형의 모습으로 나를 만났기 때문에 그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굳게 확신했다. 정말이지 나는 그의 마지막 환자였다. (p. 521)

 

Ü 융의 의사는 융이 우주, 죽음의 문턱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원형의 모습으로 나타나 융이 죽음의 길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 나는 우주공간을 떠다니며 우주의 성 안에서 보호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대한 허공이지만 가능한 모든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원한 지복이었다. ‘이건 너무나 멋지다!’고 나는 생각했다. (p. 521)

 

Ü 만물은 그 생을 다하고 어디로 가는가. 우주는 영원히 피조물을 품는가. 결국,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가 그들이, 그 에너지들이 돌고 돌기 위해 정거장으로 왔다갔다 하며 생을 영원히 반복하는건가.

 

인생이란 그것을 위해 이미 마련된 삼차원의 세계체제 안에서 전개되는 존재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p. 524)

 

Ü 결국 융도 플라톤을 상기하는 건가.

 

□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 상태의 지복이라고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p. 525)

 

□ 감정적인 관계는 강요와 예속으로 부담을 주는 열망의 관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로 말미암아 상대방과 우리 자신이 부자유하게 된다. (p. 526)

 

□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과오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은 자의 길일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건 바른 길이 아니다.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p. 527)

 

□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p. 528)

 

Ü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라. 패배하고도 승리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니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신화적 측면은 오늘날 심히 무시되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이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리하여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 있고 치유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화롯가에 앉아 파이프담배를 피우며 유쾌하게 유령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에 관해서는 확실한 증거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일정한 세계에 살며 그 세계를 통해 우리의 혼과 정신적인 전제가 함께 형성되고 부여된다. 우리는 타고난 구조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와 사고로써 이 세계와 관련을 맺는다.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없는 사변일 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력이며 인간 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그 광채를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p. 533)

 

자신들의 인생이 현존을 넘어서 무한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훨씬 더 이성적으로 잘 살며 더욱 편안해질 것이다. 사람은 수백 년을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이 헛되이 분주하기만 한가? (p. 534)

 

□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 것인가? 나의 가설은 무의식이 이를 테면 꿈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을 단념해야 한다. 인간은 사후의 생에 관해 견해를 짜내거나 묘사하는 데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p. 535)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마치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범위를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p. 536)

 

□ 신화는 과학의 맨 처음 형태다. 내가 사후의 일들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내적 감동으로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 관한 꿈과 신화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을 것이다. (p. 539)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인과론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세계가 그 배후나 그 아래에 놓여 있는 다른 사물질서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그곳에서는 여기와 저기라든지 이전과 이후라든지 하는 구별이 필요 없다. 나는 적어도 우리 정신적 실존의 일부가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도저히 논박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공간도 시간도 없는 절대적인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 같다. (p. 540)

 

Ü 나는 이런 상황이나 형태, 지점 등을 이렇게 글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다. 잠시 잠깐 스쳐가는 이런 생각들을 흘려버리지 않고 붙들고 사유를 계속 거기에 머무르며 생각을 확장해 나가는 이 정신적 활동에 대해 과학의 발견에 맞먹는 위대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닮고 싶지만 경지에 대한 차이가 현격하다.

 

□ 살로메와 엘리야의 환상, 그 두 환상은 그 동안 무시간성이라 말해도 좋을 무의식 속으로 그 자신 속으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자아나 자아의 변화하는 상황과 아무런 접촉 없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의식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p. 544)

 

Ü 이런 경험 불쑥 불쑥 떠오르는 옛 경험, 생각, 환상이 시간을 건너 그대로 넘겨져 올 때가 있다. 이런 거였구나.

 

□ 그러나 죽은 자의 혼령들도 그들이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 그 외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쓴다. (p. 546)

 

□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즉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삼차원세계는 내게는 좌표계처럼 보인다. 저쪽 즉, 무시공간성 속에서는 아마도 여러 측면을 지닌 원형으로서 원형을 둘러싼 규모없는 인식의 구름으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것들이 여기서는 종축과 횡축으로 서로 분리된 채 좌표에 놓이게 된다.

인식은 생성과 마찬가지로 이곳과 저곳 위와 아래, 이전과 이후 같은 대극을 전제로 한다. (p. 547)

 

Ü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보아야 할 대목이다.

 

□ 수학 방정식이 어떤 물리적 현실에 해당하는지 우리가 모르듯이 신화적 현실 또한 어떤 정신적 현실에 해당하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가열된 가스의 교란운동을 다스리는 방정식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꼼꼼하게 조사하기 오래 전에 제시된 것이다. 아주 오랜 옛적부터 어떤 잠재의식적 과정의 진행을 표현하는 신화소가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 551)

 

어딘가에서 이미 도달하게 된 의식성의 수준은 내가 보기에는 죽은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의 상한을 이룬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지상의 삶이 그토록 큰 의미를 지니며 사람이 죽을 때 저편으로 가져가는 것이 그리도 중요한 모양이다. (p. 551)

 

Ü 일생 동안 이루어내는 의식 수준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인가. 그런 건 아닐 터. 내가 이룬 현생의 의식 수준에 따라 전체 윤회의 시간을 결정짓는다는 말인가. 그런 것이 과연 있는 것인가. 사람이 죽어 의식의 성과가 훅 날아가버리게 되면 인간이 축적한 집단 지성의 총량은 진보를 이룰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세계라는 체계 안에서 펼쳐지는 우리 삶이 너무 눈물 겹지 않은가. 융은 말한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 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 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때에만 앞에서 수를 예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p. 551~552)

 

Ü 그래서 이를 알았던 모든 현자들은 자신의 앎의 수준이 겐지스 강의 한 줌 모래알과 같다고 했겠다. , 인간이여 눈물 겹다.

 

□ 혈관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 (p. 554)

 

죽음은 역시 무섭도록 가혹하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아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사건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인 사건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한 인간을 빼앗기고 냉혹한 죽음의 정적만 남는다. 더 이상 어떤 관계성도 맺을 희망이 없다. 모든 다리는 파괴되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하나의 즐거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하나의 즐거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p:556)

 

신화적 상상에서 중간단계가 없다면 정신은 교조주의에 갇혀 정적될 위험성이 있다. 또한, 반대로 신화적인 내용을 고려하는 것이 피암시적인 약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 예감을 인식으로 여기고 환상을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 (p:558)

 

널리 퍼져있는 저승의 신화는 재생에 관한 관념과 표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p. 559)

 

인도인은 우리가 그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기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출생과 죽음의 연속은 끝없는 현상이요 목표도 없이 계속 굴러가는 영원한 운명의 수레바퀴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살고 인식하고 죽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p. 559)

 

서양인의 신화에 대한 갈구는 시작과 목표를 지닌 진화론적 세계상을 요청하게 된다. (p. 560)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 나는 양쪽 다 옳다고 생각한다. 서양인은 외향적인 경향이 강하고 동양인은 내향적인 경향이 강한 듯하다. (p. 560)

 

부처는 인간의 카르마가 개인적인 것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받았다. 두 번 다 그는 이 물음을 피하고 토론하지 않았다. 이 물음은 존재의 환각에서 자기를 해방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부처는 제자들이 니다나(인연)사슬을 명상하는 것, 다시 말해 출생, , 늙음과 죽음, 고통스러운 사건들의 원인과 작용에 대하여 명상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욱 유익하리라고 여겼다. (p. 561)

 

내가 조상들의 인생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의 인생을 다시 구현하고 있단 말인가? 내가 옛날에 한 번 특정한 인격으로 살았고 내세에서 이제 해방을 꾀할 수 있을 만큼 된 것인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부처는 이 물음을 답을 하지 않은 채 남겨놓았다. 그런데 그도 그 물음에 대한 확실한 답을 몰랐다고 짐작된다. 내가 먼 옛날에 살았고 거기서 지금도 여전히 대답할 수 없는 어떤 물음에 부닥쳤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내게 부과된 과제를 풀지 못했으므로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고 말이다. 추측하기로는 내가 죽으면 나의 한 일들이 따라올 것이다. (p. 561)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p. 562)

 

내가 조상 인생의 결과로서 또는 개인적인 전생에서 얻은 카르마로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마도 오늘날 전세계를 잠시도 쉬지 않게 하고 특히 나를 사로잡고 있는 비개인적 원형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신성한 삼위(성부, 성자, 성령)의 장구한 발전, 그 삼위와 여성원리의 대립, 또는 악의 근원, 다시 말해 불완전한 기독교 신의 이미지에 관한 그노시스적인 물음에 여전히 미진한 대답 같은 것들이다. (p. 562)

 

예를 들면 내가 제기하는 물음과 대답이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 카르마를 가진 누군가가(아마도 나 자신이겠지만) 보다 완전한 해답을 주기 위해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어떤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한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나는 수백 년 동안 휴식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니고 있다가 그와 같은 것에 흥미를 느끼는 누군가를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새롭게 과제에 임하여 소득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p. 563)

 

내적 이미지는 개인적인 회고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외적 사건의 기억에만 얽매여 있는 늙은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속에 갇혀 있는 반면, 자신을 성찰하고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는 전진을 위한 후진을 의미하게 된다. (p. 565)

 

그곳에도 그 자체의 방식에 따라 신의 것인 ‘자연’이 있다.

내가 1944년의 환상에서 체험한 바와 같이 육체의 짐을 벗어 버린 상태에서 의식을 지각하는 것은 깊은 희열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도 역시 어둠이 있었고 인간적 체온의 기묘한 소멸이 있었다. 내가 이르렀던 검은 바위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음울했고 아주 딱딱한 화강암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조의 근본에 불완전함이나 근원적 결함이 없다면 어찌하여 창조충동, 완성 된 것에 대한 갈망이 생기겠는가? 어찌하여 신들에게 인간의 창조가 중요했던가? 그리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니다나(인연)사슬의 연속은 무엇인가? 어찌하여 부처가 존재의 고통스러운 환각에 대하여 그것의 공을 설파하고 기독교인이 임박한 세계의 종말을 바라는 것인가? (p. 566)

 

나는 저승에도 역시 어떤 제한이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죽은 혼령은 해방된 상태에서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차츰 차츰 알아갈 뿐이다. (p. 567)

 

고양된 통찰은 다시 몸을 입고 싶은 욕구를 잠재울 것이다. 그러면 삼차원세계의 혼은 소멸되고 불교도들이 니르바나라고 일컫는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카르마가 남아 있어 마무리를 해야 한다면 혼령은 다시 돌아오고 싶은 욕구에 빠지고 도로 삶을 취하게 된다. 심지어 무엇인가 더 완성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p. 567)

 

소위 콤플렉스가 분리되어 나타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콤플렉스 자체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격체의 모습을 띠게 된다. (p. 568)

 

시공간에 속한 세속적 인간과 무시간적 인간, 즉 자기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아주 까다로운 난제를 제기하고 있다. (p. 569)

 

좀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가 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p. 570)

 

그 두 꿈의 뚜렷한 경향은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완전히 뒤바꾸고 무의식을 경험적 인간의 생산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치는 다른쪽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적 존재가 참다운 것이며 우리의 의식세계는 일종의 환각이거나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세워진 하나의 가상적 현실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 속에 있는 동안만 현실로 여겨지는 꿈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분명히 동양의 세계관과 무척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마야(maja : 오직 정신만이 영원하고 물질세계는 환영이며 착각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오래된 신앙)를 믿는 점에서 그러하다. (p. 571)

 

자기인식은 이러한 과정의 정수이며 핵심이다. 동양은 의심할 나위 없이 자기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고대 기독교의 관점에 따르면 자기인식은 신인식(神認識)에 이르는 길이다. (p. 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p. 572)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써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함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p. 572~573)

 

단일성과 무한성은 동의어다. 이것 없이는 무한성을 지각할 수 없다. (p. 573)

 

Ü 신기하게도 유한의 무한성과, 무한의 유한성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과제는 이를 테면 그것과는 정반대로 무의식에서 밀려오는 것에 관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화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의식을 형성해가야 하는 그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p. 574)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악에 더 이상 빠져들어서는 안 되며 선에서 빠져들면 안 된다. 이른바 사람들의 빠져버린 선은 도덕적인 성질을 잃게 된다. 그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빠져버렸으므로 그것이 나쁜 결과로 발전하기 때이다. 중독 대상이 알코올이든 아편이든 또는 이상주의든 그 어떤 형태의 중독이든 똑같이 악에서 나온다. 우리는 선악의 대극에 더 이상 이끌려서는 안 된다. (p. 580)

 

악의 현실성을 인정하게 되면 선은 당연히 두 대극의 한쪽으로 상대화된다. 악도 마찬가지다. 그 둘이 합하여 하나의 역설적인 전체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사실상 선악이 그 절대적인 성질을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것이 판단을 의미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p. 580)

 

윤리적 결단이 요구한다면 버릇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도덕적인 선이라고 알려진 것을 경우에 따라 피하고 악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선악의 대극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 581)

 

교육은 오로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고 각 개인의 사적인 경험에 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이상주의적 관념들이 교육되고 있다. 또한 스스로 그것을 결코 실현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실현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 다만 직책상 그런 것들을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제대로 점검되지 않은 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철저한 자기인식, 즉 자신의 전체성에 대한 최선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만큼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어떤 파렴치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 냉철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전자를 사실로 여기거나 후자를 착각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p. 582)

 

이러한 자기 인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바탕에서 우리가 본능과 마주치게 되는 기층 또는 인간존재의 핵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능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동적 요인으로 우리의 의식의 윤리적 결단이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좌우된다. 그것은 무의식과 그 내용으로 이에 대해서는 어떤 최종적인 판단도 없다. 우리는 그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존재를 인식은 하면서도 붙잡을 수는 없고 그것에 합리적인 한계를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의식을 확장해 주는 학문을 통해서만 자연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와 같이 심화된 자기인식도 학문, 즉 심리학을 필요로 한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광학지식 없이 이른바 손목이나 좋은 의지만으로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오늘날 심리학을 우리의 본성상 필요로 하고 있다. 국가사회주의(나치즘)와 볼셰비즘의 현상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여 멍한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에 관해 알지 못하거나 단지 왜곡된 반쪽 관념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인식을 가졌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p. 583)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p. 583)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 하라’

사람들이 뱀의 지혜를 어디에다 사용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비둘기의 순진함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너희들이 어린이처럼 되지 아니하면…’이라고 했을 때 어린이가 실제로 어떠한가 생각해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승리자로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해 필요한 나귀를 빼앗아오다시피 한 행위를 주님은 어떤 도덕적인 근거로 정당화했는가? 그리고 그후에 아이처럼 기분이 언짢아져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자는 누구인가? 불공평한 청지기 비유에서 어떤 도덕이 성립하는가? (p. 585)

 

사람들은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두렵고 악마적이기까지 한 과학의 성과에서 은밀한 전율과 숨막히는 예감을 느끼고 있지만 어떤 해결책도 알지 못한다. 단지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번에는 아주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인간정신의 중요한 문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p. 586)

만다라, 그것은 자기통합성을 나타내거나 심적 토대의 통합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화적으로 표현하면 인간 안에 육화된 신성의 출현이다. (p. 589)

 

그러한 대립이 처음에는 순전히 개인적인 성질을 띠지만 곧바로 우리는 주관적인 대극이 단지 세계대극의 개별사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된다. 우리의 정신은 세계구조로부터 조성된 것이다. 큰 것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음의 가장 작고 가장 주관적인 것 속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신의 표상은 항상 강력한 맞상대에 대한 내적 경험이 투사된 것이다. (p. 590)

 

과학적 인식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럼으로써 과학은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과학은 정신의 실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정신을 수단으로 사용해야만 인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p. 591)

 

자연의 역사는 먹고 먹히는 수백만 년의 과정을 통한 부수적이고 우연한 종의 변화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약육강식에 관해서는 생물학적으로 정치적인 인류역사가 너무나 많이 보고 해주고 있다. (p. 595)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p. 597)

 

Ü 그러나 버젓이 ‘신학’이라는 이름을 내 걸고 신을 연구하는 학문인 듯 간판을 내건 다음 예수라는 인간을 신격화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다. 인류의 이천 년을 지배해온 신화일 수는 있으나 신학으로 확대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개별 인격은 타인과의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일성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감으로써 반복해서 분열된다. (p. 601)

 

오직 우리가 발설할 수 없는 비밀, 즉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우리가 표현하는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리하여 미친 사람의 범주에 속하는 듯이 보이는) 비밀만이 퇴보를 막아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퇴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p. 603)

 

진정한 사실은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 자신이 거기에 영향을 받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 신을 순수한 무라고 파악한다고 해도 그것은 더 포괄적인 상위원리의 사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는 이전과 똑같이 거기에 매여 있다. (p. 608)

 

의식은 계통발생학적으로나 개체발생학적으로 이차적인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사람들이 언젠가 기어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신체가 수백만 년의 해부학적 전사를 가진 것처럼 정신체계도 그러하다. 그리고 현대인의 신체가 모든 부문에서 이러한 발달의 결과를 나타내고 어느 부분에서나 현재가 있기 전의 단계를 내비치고 있는 것처럼 정신 또한 그러하다. (p. 610)

 

정신은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정신은 절대적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고유한 양극성이 진술의 상대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p. 613)

 

만물유전이기 때문이다. (p. 614)

 

원형적 진술들은 본능의 전제조건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원형적 과정을 실제적으로 고려하면 종교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 종교가 심리학자적인 관찰방식을 감당하는 한에서 말이다. (p. 617)

 

에로스는 우주의 생성원, 창조자, 그리고 모든 의식성의 아버지, 어머니다. 내게는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바울의 조건문이 모든 인식 중에서 최초의 인식이며 신성 그 자체의 진수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라는 구절에 관한 현학적인 해석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 문구는 실성이 복합대극 임을 입증하고 있다. (p. 618~619)

 

그가 천사의 혀로 말할지라도 또는 과학적인 정밀성으로 세포의 생명을 가장 깊은 바탕까지 주의 깊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p. 620)

 

회고

 

사람들이 나를 현명하다거나 지자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p. 623)

 

Ü 겐지스 강의 한 줌 모래알, 해변의 모래에 지나지 않을 인간의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p. 624)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p, 628)

 

Ü 나도 죽기 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간절히…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확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p. 629)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p. 630)

 

Ü 자신이 흐리멍덩하다는 것을 바로 볼 수 있는 인간, 그 경지는 어디인가?

 

3. ‘인류가 꿈꿔온 인간(내가 저자라면)

융에게서 캠벨의 음성이 드리워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다. 비교 신화라는 주제와 무의식의 의학적 접근은 어쩌면 같은 뜻의 다른 말일 지 모른다. 실제 캠벨은 신화의 힘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종종 융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기도 했다. 캠벨은 융이라는 걸출한 정신의학자가 없었다면 그의 비교 신화학은 이처럼 탐스럽지 못했을 거다.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이야기는 유럽을 걱정하며 일갈한 융의 말이었고 옴 마니 밧메 홈의 만유유전의 개념은 두 사람이 고루 나누어 쓰고 있다.

 

그래서 융의 자서전은 대담의 형식과 영웅의 과정으로 구성되는 캠벨의 책의 구성을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A. 야페라는 제자의 문답을 통해 최종 편집된 책이라고 하니 상사성(相似性)이 있다.

 

융의 책은 비록 자서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한 인간의 사유가 어떻게 확장되고 종국에 이르는가를 잘 보여주는 철학의 체계서와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특히 집단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의 펜이 떨리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수유너머의 한 연구원이 말한 융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들어 보자.

 

모든 종()은 자신의 생명을 실현시킬 적합한 방식을 찾아 진화했다. 신체가 그런 진화의 산물이듯, 정신 역시 그렇다. 생명의 힘을 실현한 역사의 표현으로서의 정신. 경험에 앞서, 경험을 산출하는 조건. 삶의 지혜를 담은 온갖 민담과 신화, 종교적 이야기의 생산 공장. 정신은 인간 속의 자연이었고, 삶을 위한 창조적 힘을 담고 있었다. 이것이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이다.

이런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과 의지에 앞서 존재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을 불쾌하게 느낀다. 하지만 불쾌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융은 말한다. 양배추가 똥거름에서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똥거름 냄새가 좀 불쾌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악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융에게 무의식은 그런 똥거름, 선악의 저편에 있는 자연이었다. 성적인 것만으로 환원되기에는 너무도 풍부한 자연!’

 

이 자서전은 융의 기억이 닿은 순간의 맨 처음부터 생의 말에 이르기까지의 사유의 진화에 따라 구성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가장 흔하고 보편적인 구성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생이 경이와 창의로 가득 찼음을 인지하면 단조로운 구성이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융의 자서전에 많은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지루한 유년의 이야기를 감탄으로 이어놓았다. 모든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이맥스로 이어지게는 할 수는 없다. 나에게 이 책의 클라이맥스는 자신이 의사가 되고 난 다음부터 말년 회고에 이르는 시간이다. 그의 사유가 가장 잘 드러나 있으며 철학적 체계와 무의식에 대한 사랑과 예화, 세상에 말하는 융의 목소리가 가장 크고 잘 나타나 있다. 아쉽다면 이 클라이맥스의 배치를 다소 조정했으면 한 바람이다.

 

처음부터 조금씩의 그의 사유와 사상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독자들은 유년 시절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조금 더 배려하며 잘 따라갈 수 있었을 것 같다. 음악으로 치자면 후렴 부분이 마치는 마지막 부분에 집중 배치되어 있어 앞만 듣고 음악의 전체를 판단해 버리는 사람에게는 그의 진수가 닿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리는 불운이 있을 수 있겠다는 말이겠다.

어찌 되었든 그는 인류가 기다려온 영혼이다. 두고두고 이 책을 물려가며 인간 사유의 원형을 깨달아가는 교과서가 되었으면 한다.

나의 책을 구상하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융의 자서전 구성 프레임에 시선이 간다. 그는 그의 자서전을 이렇게 구성했다.

 

* 일생을 사로잡은 꿈 (유년시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학창시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너는 누구냐

자연과 사원

두 인격의 어머니

악의 기원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생활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꿈의 분석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필레몬과의 대화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카르마

*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융합의 신비

*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단일성과 무한성

*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시간의 흐름을 구성의 뼈대로 하되 내용 안에서 내적 경험들을 스스로 분석하며 자신의 사상을 마음껏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 나의 자서전을 쓴다면 어떠한 모습이 될까. 내 첫 책을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으니 자서전에 가까울 수 있겠다. 우선 시간을 뼈대로 삼을 것인가. 맞다. 시간의 흐름은 구성의 근간이 될 것이다. 융과 같이 넓은 인생을 ‘~시절로 나누기는 어려울 것이고, 사건의 발생을 중심으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융이 중간 중간에 자신의 사상을 집어 넣었듯 내 책의 여기 저기에는 내 생각이 들어가겠지. 그리고 내가 사는 모습이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킨 사적 이야기가 포함될 것이다. 융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것은 처음과 끝이다. 처음의 프롤로그에서 거의 이 책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말미에는 그의 평온함이 글 전체에 전해진다. 크게 시작하고 따뜻하게 끝나는 것이다. 시간을 근간으로 삼는 것 외에 주제에 대한 이러한 구성을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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