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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8일 10시 22분 등록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카를 구스타프 융 / A. 아페 편집, 조성기 옮김

 

 

1. 저자에 대하여

지난 주 조사 참고

http://www.bhgoo.com/2011/index.php?mid=r_review&document_srl=386509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새롭게 들어온 글귀

가장 좋아하게 된 문장

나의 소감 또는 해석

 

 

옮김이 서문

p7 융 자서전에는 어떤 설명도 없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인도어, 스위스 사투리 들이 막바로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카를 융이 여러가지 언어를 구하할 줄 알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부분이다. 나는 언어의 장벽을 얼마나 뛰어 넘고 죽을 수 있을까. 내가 할 줄 아는 말에 대해 생각해 봤다.>>

 

p8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한 마디로 규정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그와 같이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 융 자서전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은 곧 한 인간의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들여다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거나 방법을 모르고 살 경우가 많을 것 같다. 카를 융을 만나게 되고, ‘자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내 삶에 또 다른 전환점을 가져다 줄 것 같다. 서툴고, 아직 뿌옇지만 ‘자기’가 주는 신호를 잘 포착해보고 싶다.

신의 존재를 심리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 저서라고 할 만하다.

 

p9 카를 융은 일생 동안 종교적인 주제에 매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섣불리 신에게 접근했다가는 어떤 위험스런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그렇게 위험스럽긴 하지만 신은 탐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위대한 위험’인 것이다.

카를 융은 죽기 2년 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그때 기자가 융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수백만의 시청자들은 융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긴장하며 기다렸다.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p11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p12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무한한 신성으로부터 떨어져나왔지만, 어떤 동물이나 식물 또는 돌에도 대비해 볼 수 없다.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자신이 제어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지배하는 일종의 심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생애에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터이나, 기껏해봤자 그런 것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인간은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지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은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지점도 단지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읽고 또 읽어봐도 좋은데, 무기력하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심적 과정이라는 것은 곧 마음의 소리, 생각의 흐름을 이야기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고 했다. 신화적 존재. 상징, 은유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그것들? 나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가질 수 없다. 시작이 없고, 목표지점도 막연하게만 제시된 생의 이야기. 어렵다. 그런데 끌린다. 알고 싶다. 포착하고 싶다.

 

p13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엄밀히 말해 나의 생애에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영원한 불멸의 세계가 무상한 세계로 침투했던 사건들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적 체험들을 주로 이야기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나의 꿈과 환상들이 포함된다.

무상(無常)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生滅)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세계에 영원한 불멸의 세계가 침투했던 사건들이 카를 융의 생애에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위에서 읽어왔던 문장과 이어서 생각해 보면 정말 인간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어쩔 수 없는 존재다. 내적 체험도 내가 선택하고 반응하는 것이라고 하기엔 저절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무의식 중에 떠오르는 일들, 생각들, 나의 반응들을 떠올려보니, 내적 체험이든 외적 체험이든 내가 원해서, 조종해서, 지배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많지 않다. 물론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두 개의 체험 모두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자아’에게 ‘자기’에게 영향력이 강하므로 내적 사건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4 내 생애의 외적 사실들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다른 실체와의 만남, 즉 무의식과의 충돌은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거기는 항상 충만하고 풍성하여 다른 모든 것은 그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p14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p15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일생을 사로잡은 꿈 (유년시절)

01 검은 옷을 입은 남자

p25 그때 호수 근처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p26 부모의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암시하는 어두운 전조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1878년의 나의 병은 아마 부모의 일시적인 별거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 무렵 어머니는 여러 달 동안 바젤의 병원에서 지냈는데, 추측컨대 그녀의 병은 결혼생활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당시 어머니 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친척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다. 어머니의 오랜 부재로 나는 무척 힘들었다.

그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출발하면서 함께 가져가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나중에는 인생 초기의 이러한 인상들이 수정되었다. 나는 친구를 믿었다가 그들로 인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p31~33 목사관은 라우펜성 근처에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교회 관리인 농가 뒤쪽으로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중략)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두려움으로 식은 땀에 젖어 있었다.

(남근상 꿈. p34 (꿈 해석)그 남근상의 추상적 의미는, 그것이 스스로 남근이 발기되듯 수직으로 보좌에 서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초원의 구멍은 아마도 무덤을 의미할 것이다. 무덤 그 자체는 일종의 지하사원이고, 그곳의 녹색 커튼은 초원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커튼은 녹색식물로 뒤덮인 지구의 신비를 나타내는 셈이다. 그 양탄자는 붉은 피였다./ 카를 융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던 꿈)

 

p34 아무튼 그 꿈속의 남근상은 보통은 언급되지 않는 지하의 신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나의 젊은시절 내내 그런 의미로 남아 있었는데, 누가 ‘주 예수’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해서 말할 때마다 다시 생각나곤 했다. (중략) p35 그것은 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주어진 무시무시한 계시였다.

 

p36 그 꿈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기묘한 상징적 치장과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라는 놀랄 만한 해석이었다.

 

p37 어린아이에게 익숙한 천진성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모든 멍텅구리는 뭔가 아주 거북스러운 것을 빨리 없애버리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이 ‘검은 남자’ ‘사람을 잡아먹는 것’ ‘우연’ ‘회고적인 해석’에 대해 헛소리를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느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 이들 점잖고 쓸모 있고 건장한 사람들은 나에게 낙천적인 올챙이들처럼 여겨진다. 그 올챙이들은 아주 얕은 빗물 웅덩이에 가득 모여들어 햇볕을 받으며 즐겁게 꼬리치고 있으나 바로 다음날에 웅덩이가 말라버릴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때 무엇이 내 안에서 말을 한 것일까? 누가 뛰어난 문제제기를 표현하는 발언을 한 것일까? 누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함께 섞어, 나의 후반기 생애를 격렬하기 그지없는 폭풍으로 채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제공했단 말인가? 하늘과 땅 양쪽에서 온 그 낯선 손님 이외에 그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 나의 정신적 삶이 무의식적인 출발을 한 것이었다.

 

 

02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p42 그런 시간이면 나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나의 그 ‘원초적 계시(남근상 꿈을 의미함)’와 이 책(<<오르비스 픽투스>>, 그림이 들어 있는 어린이용 라틴어 교재)이 연관되어 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결코 누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정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가 나에게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어머니가 ‘이교도들’이라는 말을 할 때 가벼운 경멸투의 그 어조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의 ‘계시’를 듣는다면 깜짝 놀라며 거부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상처를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를 융이 비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다. 어린아이 같지 않은 생각, 그 생각을 스스로 조절하여 발설하지 않았다는 것이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내가 만약 융과 같이 특별한 꿈을 꾸고, 계시를 받는다면, 나는 커밍아웃을 했을까? 아니면 그냥 현실에서의 삶을 선택하고 잊으려고 햇을까? 아마 후자를 선택했을 것 같다. 하지만 융은 그러지 않았다. 현실에서도 살고, 무의식 세계도 마음껏 누렸다. 엄청난 조절력을 가졌다.

 

p45 그 유년시절에 나는 시골학교 학우들과 사귀는 동안 발견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집에 있을 때와는 달라졌다. 나는 그들과 장난도 치고 집에서는 결코 생각도 못했던 그런 일을 스스로 꾸미기도 했다. 물론 나 혼자 집에 있을 때도 온갖 것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로서는 나의 변화가 학우들의 영향 탓이라고 여겨졌다. 그들은 내가 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다르게 되도록, 어찌해서든지 나를 유혹하거나 강요했다.

 

p47 나 자신의 불확실성은 기묘하고 매혹적인 어둠의 느낌을 동반하고 있었다.

내가 심취했던 유년시절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었으며, 나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계속 굴러가며 점점 더 멀어져가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만 것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잃지 않기 위해 그 장소에서 억지로 몸을 돌려야만 했다.

나는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유년시절의 영원성이 번개와도 같이 내게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이 ‘영원성’이 의미하는 바는 곧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분명해졌다. 나 자신과의 불화와 거대한 세계 속에서의 불확실성은 나로 하여금 그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어떤 조치를 하게 했다.

 

p49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p50 의식의 차원에서는 나는 기독교적 의미로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면서 늘 깎아내리거나 “땅 밑에 있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항상 따라붙었다. 종교적인 가르침이 나에게 주입되면서 “이것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다”라는 말들을 듣게 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아주 신비로운 다른 무언가가 있을거야.’

 

p51 이러한 회상을 함으로써, 전통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의 마음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영혼의 고태적 구성요소가 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나에게 생겼다. 훨씬 나중에 낱낱이 살펴본 아버지의 장서에는 그러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은 한 권도 없었다. 아버지는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음이 입증된 셈이었다.

 

p52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학창시절)

01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p59 여든세 살의 나이에 지난날의 기억들을 적어나가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p60 수학시간에는 심한 불안을 느꼈다. 선생은 대수가 아주 자명하다는 식으로 큰소리를 쳤지만,나는 아직 수 그 자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수는 꽃이나 동물, 화석도 아니었다. 수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헤아림을 통해 생겨나는 수량에 불과했다. 혼란스럽게도 이 수량은 이제 소리를 의미하는 문자로 대체되어, 말하자면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더욱 이상하게도 급우들은 이 수들을 다룰 줄 알았으며, 자명한 것으로 여겼다. 아무도 나에게 수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못했고, 나는 그러한 의문을 조리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나의 어려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수란 양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해 온 추상적인 개념이다. 수는 물체의 수량등을 나타내는 거이고, 수를 표시하기 위한 기호가 숫자다. 예를 들어, 사과 한 개, 자동차 한 대, 강아지 한 마리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사실들이나, 이 사실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개념을 뽑아 이를 1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이 사과, 자동차, 강아지는 아니며 또한 위에서 아래로 그어진 선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수의 종류는 자연수, 정수, 유리수, 무리수, 실수, 허수, 복소수 이렇게 있는데, 이 수들은 방정식의 해를 구하기 위해 생겨났다. 자연수는 자연에서 발견한 것이라면 (몇 개인지 수량을 나타내기 위해) 음수는 ‘x+1=0’의 해를 구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루트 2와 같은 숫자는 x^-2=0의 해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넓이가 2인 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를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결국 그것이 대수적 문제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니, 왠지 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설명해야하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진다. 문명과 수학, 철학과 수학, 수에 대한 꿈 꾸고 싶다. 환상도 보고 싶고)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격앙시켰던 것은 a=b, b=c이면 a=c가 된다는 그런 공식이었다. 확정된 정의에 의한다면, a는 b와 다른 것을 가리키므로 별개의 것이며 b와 똑같이 취급될 수 없는 것이었다. c 역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등식을 다루는 경우에는 a=a, b=b 등으로 말해지는 것인데, a=b는 즉각 거짓말이나 속임수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카를 융이 어렸을 때 느꼈던 감정이길 바란다. 수학은 다른 두개를 같은 것으로 만드는 ‘등가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a와b는 어떤 수 집합에 들어 있는 원소를 뜻한다. 즉 자연수라는 집합에서 a와 b를 꺼낼 것인데, a와b는 모두 자연수 어떤 값이다. 따라서 a가 1이라고 해서 b는 1을 제외한 자연수 중에서 꺼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자연수 전체집합이 후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a=b라는 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지적 도덕성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건 카를 융이 이것은 확정된 정의에 의해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융이 수학을 배우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과 수학적 개념을 피아제가 말하는 ‘평형화’에 성공했다면 조금 달랐을까?)

 

p62 내가 적절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는데도 어찌하여 수학과 관계를 맺지 못했는지, 그것은 한평생 나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수학에 대해 나 자신의 ‘도덕적인’ 의혹은 나로서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p64 1887년 초여름 어느 날, 나는 방과후 12시 무렵 대성당 광장에 서서 같이 학교를 다니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소년이 나를 한 대 때리는 바람에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보도(步道) 경계석에 머리를 부딪쳐 그 충격으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반시간가량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얻어맞는 순간, 번개같이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너는 더 이상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

나는 반쯤만 정신이 멍했는데도 음흉한 공격자에 대한 복수심에서 필요 이상으로 조금 더 그대로 누워 있었다.

p65 어느 의사는 내가 간질병에 걸렸다고 추측했다. 그 무렵 나는 간질병 발작이 어떤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그런 허튼소리를 비웃었다. 하지만 부모는 그 반대로 이전보다 더욱 걱정을 했다.

“그 아이가 만일 불치병에 걸렸다면 끔찍한 일일세. 나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다 써버렸어. 만일 그 아이가 자립해서 살아갈 수 없다면 그 아이는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p65~66 나는 벼락을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현실과의 충돌이었다. ‘아, 그래. 그렇다면 나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쳤다.

그 후 나는 진지한 아이가 되었다. (발작을 3번 이겨내며 공부를 함.)

갑자기 나는 이전 몇 달의 상태보다 나아진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발작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문법책과 연습장을 가지고 매일 공부했다. 몇 주 후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에서도 더 이상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속임수는 끝이 났다! 여기서 나는 신경증(Neurose)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차츰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나를 밀쳐 넘어뜨린 친구에게 나는 한 번도 심하게 화를 내지 않은 것이었다. 그 친구는 이를테면 그 사건에 ‘끼워진’ 것에 불과하며 내편에서 그 사건을 간교하게 조정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p67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신경증은 나의 또 다른 비밀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부끄러운 비밀, 일종의 패배였다. 그럼에도 신경증은 나를 결국 아주 꼼꼼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특히 부지런한 사람이 되게 했다. 그럴 무렵 나는 성실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덕을 보려고 하는 외관상의 성실성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성실이었다.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아침 5시에 일어났다. 때로는 학교에 가기 전에 새벽 3시부터 아침 7시까지 공부한 적도 있다.

 

p67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돌 하나, 식물 하나, 그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형용할 수 없는 듯이 여겨졌다. 그 무렵 나는 자연으로 빠져들면서, 말하자면 자연의 본질 속으로 숨어들면서 모든 인간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02 너는 누구냐?

p68 한순간 갑자기,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 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안개의 벽 같은 것이 나의 등 뒤에 있었고, 그 벽 너머에는 아직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나에게 내가’ 생겨났다. 이전에도 내가 존재하고는 있었으나 모든 일이 단지 우연히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이제 여기 있고, 내가 이제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옆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지금은 ‘내’가 스스로 하고자 한다.

 

p70 그때 몹시 난처하게도 나 자신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수학도 잘 모르고 자신감이 없는 학생이었으나, 다른 하나는 위대한 권위를 지닌 중요한 인물로 경시해서는 안 될 사람이며 그 공장주(집주인을 가리키는 말인 듯함)보다 더 막강하고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18세기에 사는 노인으로, 조임쇠가 있는 신발에 하얀 가발을 쓰고 높고 오목한 뒷바퀴들이 달린 마차를 타고 다녔다. 그 바퀴들 사이에는 좌석 하단부가 용수철과 가죽 띠 위에 얹혀 있었다.

 

p72 그 무렵 나는 종종 1886년을 1786년이라고 쓰곤 했다. 그런 일은 항상 설명하기 힘든 향수(鄕愁)가 동반되면서 일어났다.

p72 즉, 나는 두 시대를 살고 있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결과에 혼란을 느끼고 깊이 숙고하게 되었다.

p72 마침내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어떻든 지금은 작은 학생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고 그의 나이에 맞게 예절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사실들이었다. 나의 다른 측면은 의미가 없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미래를 종종 그리곤 한다. 내가 꿈꾸는 미래, 내가 원하는 미래를 그리곤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를 대면한다. 그러면 나는 행복하다. 그런데 현실에 돌아오면 그런 미래가 지연되고 있고, 도달할 수 없는 먼 미래로만 여겨진다.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측면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 나는 절망하고 만다. 꿈을 꾸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차츰 그 생각이 무너져가고 있다. 갑자기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에 대해 회의감이 몰려온다. ‘전환’이 필요하다. 인내심도 필요하다.)

 

p73 이 세상은 나에게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긴 했으나 막연한 위험과 무의미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p75 그날 밤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금지된 생각이 자꾸만 밀려들어오려고 해서, 나는 그것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후 이틀은 너무나 괴로웠으며, 어머니는 내가 병이 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나는 고백하고 싶은 유혹을 끝까지 물리쳤다. 그런 고백은 부모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줄 것이라는 생각이 그 유혹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p76 ‘지금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 문제가 심각하다! 나는 생각해야만 하다. 그러기 전에 미리 숙고해보아야 한다. 나는 왜 내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생각해야만 하는가? 나는 맹세코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건 분명하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원하는가? 누가 나로 하여금 나 자신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어떤 것을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는가? 이 무서운 의지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왜 내가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를 찬양하고 이 측량할 수 없는 선물에 대해 그분에게 감사하고 있는데, 나는 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한 어떤 일을 생각해야만 하는가? 나는 정말이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생각의 근처에도 감히 다가갈 수 없고 또 감히 다가가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만들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악몽처럼 나에게로 온 것이다. 그런 것들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나와는 무관하게 일어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튼 나는 나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고 하느님이 만든 그대로, 다시 말해 부모님에 의해 이루어진 그대로 세상에 태어났다. 혹시 내 부모가 이런 일을 원했을까? 착한 내 부모는 결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불경스러운 것을 부모가 생각했을 리 없다.’

 

p77 아담과 이브.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진지한 하느님은 인류 최초의 부모가 죄를 범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p78 이와 같은 생각이 나를 지독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하느님 자신이 나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이러한 곤경으로 밀어 넣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방치했다. 나는 하느님이 의도한 대로, 스스로 혼자서 출구를 찾아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이와 관련하여 논쟁이 계속 이어지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의지가 무엇이며 하느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전에는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하느님이야 말로 이런 절망적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p79 내가 안개 속에서 빠져나와 ‘나’를 의식하게 된 대략 그 순간(등교길에서 안개벽 너머 ‘나’를 확인하게 된 그 사건을 가리킴)부터 하느님의 통일성과 위대함, 그리고 초인(超人)성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를 결정적으로 시험삼아 써보려고 하는 존재가 하느님이며,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바르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결국 굴복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문제는 내 영혼의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이었다.

 

p81 인간의 용기를 시험할 때 하느님은 비록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하느님은 용기에 대한 그런 시험에서 악한 어떤 것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도록 당신의 전능함으로 이미 보살피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그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p84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는 이미 그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형성되었다.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내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기 위해 심지어 나쁜 일을 하고 저주받을 일을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원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부디 제발, 그 비밀에 대해 뭔가를 아는 누군가가 어디에 있어야 할 텐데, 어딘가에 진리가 있어야 할 텐데.

(나쁜 일을 하고 저주받을 일을 생각하기를 하느님이 원한다는 사실. 난 이 부분에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전지전능. 창조. 절대주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에 의하면 융이 한 말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은 아버지의 개념이 강하다. 부모와 같다. 그래서 나쁜 사람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야 그러지 않겠느냐는 성경구절이 있다. 좋은 것 주신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구절이다. 신약에 나온다. 그러므로 저주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맞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늘 좋은 것을 주시는데, 우리가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은 저주를 주신 적이 없으신데, 우리가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p84 나는 아버지의 서재를 뒤져 하느님, 삼위일체, 영혼, 의식(意識)들에 관한 책이면 무엇이든 읽어나갔다. 그 책들을 모조리 탐독했으나 그것으로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또다시 ‘이 사람들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루터성서도 읽어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욥기>의 통상적이고 ‘교화적인’ 해석은 나로 하여금 그 책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욥기> 9장 30절 이하, 즉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 (’똥‘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음-옮김이)에 빠지게 하시리니’라는 구절 같은 데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p85 나중에 어머니가 내게 말하기를, 그 무렵 내가 자주 침울해졌다고 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고 그 비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때는 저 돌 위에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복된 평온함이 찾아왔다. 돌이 온갖 의혹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천 년 동안 살아 있다.’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p85 ‘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03 자연과 사원

p87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 되고 믿어야 해.” 나는 생각했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체험, 앎, 믿음. 체험하고, 알면, 믿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융은 믿는 것이 아니고 체험하고 안다고 했다. 신을 믿느냐고 한 질문에 신을 안다고 대답했다는 것은 ‘믿음’과 ‘앎’을 어떤 연속선상에 놓지 않고, 서로 속하는 집합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은 것 같다. 과연 인간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안다. 더 명확한 말인 것 같다. 믿는다는 말보다도 더 강력하고 확정적이다. 융이 사용했던 단어 ‘안다’라는 말을 곱씹어 보게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종교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알 수 있음에 한계가 있기 때문일까?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믿어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 중 진리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아는 것, 그리고 믿는 것. 아는 것이 더 강력한 것일까? 믿는 것이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일까? 갑자기 의문을 갖게 된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말씀이 생각났다.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you and your household.” (행16:31)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체험했던 그들이 하는 말이다. 우린 그것을 글로 볼 수 밖에 없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우리 몫인 것 같다. 그 말씀은 아는 것은 봤기 때문이다. 근데 안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니다. 알지만 믿지 않을 수 있다. 아니다. 알면 믿게 된다. 그것인 진실이라는 것을 알 때 믿을 수 있다. 융은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을까?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p88 내가 비난을 받는 모든 것은 나를 화나게 했으나, 나 자신을 돌아볼 때 그 비난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아주 조금 알고 있었고, 그 조금 알고 있는 것마저 모순되었기 때문에 선한 양심을 가지고는 어떤 비난도 거부할 수 없었다.

 

p89 물론 나는 내적인 불확실성을 외적인 확실성으로 보상했다. 더 나은 표현을 쓰면, 결점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보상했다. 나는 나 자신이 잘못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잘못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임을 발견했다.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p91 나의 전생애에 걸친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간의 대립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 말하는 그런 ‘분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즉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교회는 점점 나에게 괴로운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뻔뻔스럽다고 할 정도로 큰 소리로 하느님에 대해서, 하느님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하느님이 무엇을 행하는지 설교를 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느낌을 갖도록 훈계를 받고, 내가 알기로는 말로 누설해버려서는 안 되는 가장 심오한 내적 확신인 그 비밀을 믿도록 경고 받았다.

 

p92 하느님의 의지는 계시를 통하여 알려진다는 가정하에 항상 설교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반대로 하느님의 의지는 그 어떤 것보다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느님의 의지는 매일매일 탐색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그 정도까지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야만 되는 급박한 이유가 생기면 지체하지 않고 그렇게 할 것이 분명했다. 제1의 인격이 내게 너무 자주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종교적인 계율들이 심지어 하느님의 의지를 대신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느님의 의지는 깜짝 놀랄 만하며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일 수 있는데, 그 계율들은 하느님의 의지를 이해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목적을 위해 있는 듯했다.

그들은 별생각 없이 온갖 모순, 예를 들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여 당연히 인간의 역사를 미리 내다본다는 식의 모순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느님은 인간들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렇게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말도록 금하고, 심지어 지옥불길의 영원한 저주로 벌을 주기까지 한다.

 

p93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는 자기 아들인 나를 이삭처럼 인간제물로 삼아 칼로 찌를 수 있을까? 아니면 불공정한 법정에 내맡겨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아버지는 성서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정말 무시무시할 수도 있는 하느님의 의지를 경우에 따라서는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

p93 내게 일어난 바와 같이, 하느님은 자신의 압도적이고 충격적인 의지를 무력한 인간들에게서 철저히 실현되도록 할 수 있는 존재다.

 

 

04 두 인격의 어머니

p95 그 무렵 나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며 내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p96 그 해답을 나 자신의 고유한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단독자이며 하느님만이 이와 같은 무서운 일을 나에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부터 나는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내 생애에서 그것을 실현해야만 될 것처럼 여겨졌다.

 

p101 ‘진정한 인식’은 본능에서 비롯되거나 타인과의 신비로운 교제에 기인한다. 그것은 비개인적인 관조행위를 통해 보는 ‘배후의 눈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p102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어떤 일을 갑자기 알게 되는 일이 내 생애에서 자주 일어났다. 그 인식은 마치 나 자신의 착상인 것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그것은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으나, 그 목소리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것 같았고 그 상황에 들어맞는 내용을 정확하게 말했다.

 

p104 그때 삼위일체에 관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는 나의 관심을 끄는 뭔가가 있었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 문제였는데, 그 모순이 내 마음을 끌었다. 나는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되는 순간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해결 받지 못한 부분이다. 나도 교회에서 교리 공부를 꽤 하는 편인데,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답은 얻지 못했다. 그저 믿는다. 하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 우리 마음에 오신 분이시다.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내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이론이다.)

 

p108 나는 아버지에 대해 짙은 연민에 사로잡혔다. 아버지의 직업과 그 인생의 비극을 홀연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죽음과 씨름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깊은 심연이 생겼고 끝없이 넓은 그 협곡에 다리가 놓일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p109 사람은 하느님에 관하여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하느님과 대성당에 대한 그런 착상을 스스로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세 살 때 꾸었던 꿈은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나의 의지보다 강한 의지가 그 둘을 나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그럼 자연이 내 안에서 그랬던 것인가? 그러나 자연은 창조주의 의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과 관련하여 악마를 고소해봤자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악마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실재였으며 파괴하는 불이요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이었다.

 

 

05 악의 기원

p111 나는 그(1869년에 간행된 비더만의 <<기독교 교리>>)로부터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견해가 나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종교란 하느님이 나와 함께 이루는 그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하느님 편에서의 행위로 나는 다만 거기에 맡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느님은 나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종교’는 인간 편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과 같이 거의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대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찾기 위해서 하느님에 관해 더 많이 알아야만 했다. 나는 비더만의 <하느님의 본질>이라는 장에서, 하느님은 ‘인간 자아와 유사하게 상상될 수 있는 인격’으로서, 그리고 또한 ‘세계를 포괄하면서 세계를 전적으로 초월하는 고유의 자아’로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115 나 자신은 하느님이 인간이나 짐승이 부당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잔인한 만족감을 느낀다고는 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이 대극의 세계를 창조하여 하나가 다른 것을 잡아먹도록 하고 인생이 죽음으로 향한 탄생이 되도록 의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무의미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자연법칙의 ‘놀라운 조화’라는 것은 가까스로 통제된 혼돈과 거리가 먼 듯이 보였고, 미리 예정된 궤도를 따라 별들이 빛나는 ‘영원한’ 하늘은 단지 질서와 의미도 없는 우연성의 집합처럼 여겨졌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조화로운 성좌는 실제로는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성좌는 단지 임의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았다.

 

 

06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p128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숙고하는 가운데, 내가 이전에 그 금지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할 때 그와 같이 단호하게 강요되었던 그 다른 사념들과 지금 나의 생각들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무렵 나는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사이의 차이점을 잘 보지 못하고, 제2의 인격의 세계를 나 자신의 개인적 세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 자신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거기 있다는 의미심장한 느낌이 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별들과 끝없는 우주의 장엄한 세계의 숨결이 나에게 닿는 것 같았으며, 또한 오래전에 죽었으나 아직도 영겁의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의 영혼이 보이지 않게 몰래 방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급전(急轉)은 누멘(Numen : 신성한 힘)의 후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p130~131 ‘신의 세계’가 지상에 나타난 것은 일종의 직접적인 메시지에 의해 식물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치 자기를 관찰하는 자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창조자의 어깨 너머로, 그가 어떻게 장난감이나 장식품을 만들고 있는가 사람들이 바라본 것과도 같았다. 이에 비해 인간과 ‘정상적인’ 동물들은 자립한 신의 분신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발적으로 돌아다니며 서식처를 정할 수 있었다. 그 반대로 식물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장소에 묶여 있었다.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나무들은 특히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그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나무처럼 살고 싶은 삶. 사부님의 변화 프로젝트의 한 부분이다. 나무. 카를 융은 나무를 신비롭게 여겼고,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나무처럼 사는 삶.

 

p134 나는 쇼펜하우어의 음울한 세계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했으나 그의 문제해결 방법까지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가 사용하는 ‘의지’라는 말이 사실은 신과 창조주를 뜻한다는 것과, 그가 이를 ‘맹목적’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신은 어떤 신성모독에 의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밝고 긍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어둠과 불경스러움도 갖도록 신성모독을 요구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쇼펜하우어의 견해에 대해 거리낌을 갖지 않았다. 나는 그 견해가 사실에 의해 증명된 판단이라고 여겼다.

 

p138 실제로 모든 화급한 문제들은 일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릴 적 비밀이 그러했듯이, 신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내 안에서 두 세계로 나누어진 분리를 지양하려는 나의 노력이 저지되고 마비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보통의 일상적인 존재로부터 무한한 신의 세계로 밀어넣는 사건들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p138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에게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하나님은 전부인가? 모든 것인가? 오늘 예배를 마치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오늘 드린 것은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못됐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라고 했다. 사실 성찬식을 하면서 카를 융 생각이 났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며 무엇인가 느끼고 싶었다. 어떤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축도가 끝나고 나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를 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남아 있었나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건 아니다. 그 기도가 나왔다.

 

 

07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p139 한편으로는 사실에 기초를 둔 진리들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에 강한 흥미를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종교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매료 되었다.

 

p143 나는 제2의 인격을 없애버리려고 노력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학교나 친구들 앞에서는 제2의 인격을 잊을 수 있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도 제2의 인격은 사라졌다.

 

p144 제2의 인격이 임시휴게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나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제2의 인격 안에서 나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을 초월해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천개의 눈을 가진 우주에서 하나의 눈으로 여겨졌으나 지상에서는 조약돌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제1의 인격이 반항하여 자기가 행동하기도 하고 행동을 야기하려고도 했으나, 당분간은 해결할 수 없는 분열에 처해 있었다. 보아하니 나는 기다리면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08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p149 점점 더 새로운 깊고 먼 산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다가 마침내 나는 산꼭대기에 서게 되었다. 산소가 희박한 익숙지 않은 새로운 공기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넓은 조망 가운데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세계다. 나의 세계, 고유한 세계요, 그 비밀이다. 이곳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 없는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있는 곳이다.’

 

p154 대극의 충돌로부터 내 생애 처음으로 체계적인 환상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것은 단편적으로 나타났는데, 내 기억이 맞는 한, 그 환상의 근원은 아마도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준 한 가지 경험에 있는 듯했다.

 

p156 ‘정신’이란 물론 내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아주 희석된 공기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다.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01 파우스타와 요한복음

p168 제2의 인격은 도저히 정의를 내릴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투철한 생명력으로, 태어나고 살고 죽고, 하나이면서 온갖 것이요 인간성의 전체상이었다. 제2의 인격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냉혹할 정도로 분명했으나 무능하고 의욕이 별로 없었다. 제1의 인격의 두텁고 어두운 매개물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바라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제2의 인격은 파우스트 속에 인격화된 바와 같이 중세와 은밀한 일체감을 느꼈고, 아마도 괴테의 심금을 깊이 울렸을 흘러간 시대의 유산과도 그러한 일체감을 느꼈다. 그러므로 괴테에게도 제2의 인격은 하나의 실재였다. 이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그 무렵 다소 충격적으로 깨달은 바지만, <<파우스트>>는 내가 좋아하는 <요한복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p169 <<파우스트>>속에는 내가 직접 공감할 수 있는 뭔가가 생동하고 있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나에게 낯설었는데, 그보다 더 낯선 것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구원자였다. 이에 반해 파우스트는 제2의 인격의 살아 있는 등가물이었으며, 나는 괴테가 그 시대에 제공한 해답이 바로 파우스트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러한 통찰은 나에게 위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안정감과 인류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나는 더이상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나 이를테면 잔인한 자연의 희롱물도 아니었다. 나의 대부요 보증인은 위대한 괴테 바로 그 자신이었다.

 

p170~171 나는 제1의 인격으로서 공부, 돈벌기, 책임, 분규, 혼란, 과실, 복종, 패배 들을 헤쳐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나를 향해 밀려오는 폭풍은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쉼없이 나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것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돌진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잠깐 동안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무서울 정도로 바로 여기에 실재하며,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서 끌고 가버린다.

그 당시 나의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나는 나의 길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외부로, 제한된 세계 속으로, 삼차원의 어둠속으로 이끌려 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p173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게 무의식적이다. 이 가족정신이 전반적으로 동의를 표시할 경우 그것은 일종의 세계확실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정신이 많은 것과 대립하여 스스로 어긋나버리면 세계불확실감이 생겨난다.

 

p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연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이와 같이, 적어도 우리 존재의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부분을 나의 개인적인 용어로 ‘제2의 인격’이라고 일컬었다. 그것인 한낱 개인적인 흥밋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 서양 종교에 의해 입증되었다. 서양 종교는 분명히 말해 이러한 내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2천 년 전부터 내적 인간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려 그 인격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왔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우리 존재의 일부가 수세기에 걸쳐서 살아온 것이라는 카를 융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의 어느 부분이 수세기에 걸쳐서 사라온 것일까? 나의 내적 인간, 내적 인간의 특성은 무엇일까? 나를 나되게 하는 그것일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게 하는 것. 내가 지금 잘 알지 못하지만 나인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나. 그게 나의 내적 인간인 것 같다. 내적 인간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집단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렵다. 그런데 알고 싶다. 나의 제 2의 인격. 그는 누구인가?

 

 

02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p179 아버지는 누군가와 말다툼을 해야만 했으며 가족과 자기 자신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왜 그는 그런 싸움을 모든 피조물의 비밀스러운 창조자이며 세계의 고통에 대해 실제로 책임이 있는 단 한 분인 하느님과 하지 않았을까? 하느님은 불가사의하고 의미 심장하기 그지없는 저 꿈들 중 하나로 아버지에게 대답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느님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에게조차 그런 꿈을 보여주었으며 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p181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들은 강아지처럼 눈먼 벙어리로 태어나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아주 적은 빛만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그 빛이 그들이 더듬어나가는 어둠을 밝혀줄 수는 없다. 그리하여 내가 알고 있는 신학자들 중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을 자신의 눈으로 본 사람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만일 그들이 그 빛을 보았다면 ‘신학적인 종교’를 가르칠 리 만무했다. 그 신학적 종교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신에 대한 체험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주지 않고 믿기만을 요구했다.

 

p181~182 나는 유물론자들이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정의를 믿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쌍한 아버지가 비를 피하려다가 낙숫물을 뒤집어쓴 꼴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신의학자들은 물질에도 인간정신의 특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p183 나는 자연에 관한 진리를, 그것도 중요한 측면에 대해 듣게 될 것이었다. 나는 인간에 관하여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모든 것을 알게 되고,거기에 생물학적인 예외상태, 즉 질병에 대한 지식도 함께 갖추게 될 것이었다.

 

p185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너를 위해서’라는 말이 나에게 몹시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낡은 시대의 한 조각이 돌이킬 수 없이 끝나버린 것을 느꼈다. 다른 한편, 그 무렵 남자다움과 해방감이 조금씩 내 안에서 싹텄다.

 

 

 

03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p192 나는 그리스도를 전면에 내세워 그를 하느님과 인간의 드라마에서 결정적인 유일한 인물로 만드는 견해에 대해 동조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견해는 그리스도가 죽은 후에는 그를 낳았던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대신할 것이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견해와도 전적으로 모순되었다.

두 번 읽으니까 카를 융의 이 말이 이해가 된다. 초핑기아 동아리에서 나와 토론했던 신학생들의 의견에 동조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즉 하느님과 인간의 드라마에서 결정적인 유일한 인물로 예수를 지정하는 것에 동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카를 융이 읽은 성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번역을 봤으며, 주로 언제 읽었을까? 또 누구의 설교를 들으며 자랐고, 어떤 책을 읽었을까? 이 많은 소스들이 달랐어도 카를 융이 도달하게 된 자신만의 사상은 똑같았을까?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만약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과정은 어떠하든지 결과는 같을 것 같다. 그것이 카를 융이 말하는 ‘하느님의 의지’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과정이 다르면 결과도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 손을 들고 싶다.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환경이었으며, 어떤 번역서를 읽고, 언제 읽었고, 반복적인 횟수는 어땠는지, 그밖에 변화 가능한 상황들을 다 고려해 본다면 아마 카를 융의 사상은 조금 달랐을 수도 있겠다. 어느 시대에 태어나고, 누구를 만나며, 어떤 책을 읽는지 등은 우리의 생각과 인생을 다르게 변화 시킬 수 있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집단적 무의식과 (우리 안에 있는 고대적인 요소) 인간의 본질적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이 진리로 아우러질 수 있다면 시대는 달라도 (여기서 말하는 시대란 과학기술, 편리함의 다름이다) 우리는 어느 시대다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과정은 다양해도 결론은 하나인? 내가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나는 누굴 만나도 나의 삶으로 정해진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갑자기 이 부분이 궁금해졌다. 누굴 만나는지에 따라 삶이 바뀐다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p192~193 대학에서 첫해가 지나는 동안 나는 자연과학이 엄청난 분량의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지만 통찰은 아주 빈약한데, 그것도 전문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193 나는 철학 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서 그 어떤 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어디서나 마음은 암암리에 전제되어 있었으나, C.G.카루스의 경우처럼 마음이 언급된 곳에도 마음에 관한 진정한 지식은 없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들릴 수 있는 철학적인 사색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기묘한 관찰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어느 시대나 세계 어느 곳이나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보고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디서나 똑같은 종교적인 전제들이 있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이 경우는 확실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 영혼의 객관적인 형태와 관련있음이 틀림없었다.

 

p197 대개 ‘전문적인’ 철학도들이 가장 격렬하게 니체를 배척했다.

 

p198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니체를 닮을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불안을 느끼며 주춤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킨 그 ‘비밀’에 있어 비슷한 데가 있을지도 몰랐다. 누가 알겠는가? 니체가 내적인 체험과 통찰을 가지고 불행하게도 그것들에 관해 말하고자 했으나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히 그는 기인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그런 사람으로 여겨졌고 자연의 놀림거리라고도 생각되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 자신이 ‘또 하나의’ 니체처럼 인식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p199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이제 나의 제2의 인격은 차라투스트라였다. 물론 이것은 두더지의 훍두둑을 몽블랑산에 비교한 격이긴 하지말 말이다.

 

p200 그는 제2의 인격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에다 그것을 거리낌없이 앞뒤 재지도 않고 밝혀버렸다. 그는 자신이 겪은 황홀경을 함께 느끼고 ‘모든 가치의 전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리라는 유치한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교양있는 속물들을 찾아냈을 뿐이었다. 우스운 비극처럼 니체 자신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알지 못했고, 신들린 사람으로 주변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p201 <<파우스트>>가 나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그 문은 오랫동안 철저하게 닫힌채로 있었다. 나는 소 두 마리가 도깨비마법에 걸려 그 머리들이 동일한 고삐에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한 늙은 농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의 어린 아들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농부가 대답했다. “얘야, 그런건 말하는 게 아니란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 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서 순진한 사람은 동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작가, 신문기자, 또는 시인들에게만 그와 같은 무례한 행동을 허용할 뿐이다. 나는 새로운 관념이나 단지 특이한 측면까지도 오직 사실로써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사실들은 남아 있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책상 밑에 버려져 있지 않고 언젠가 어떤 사람이 그것을 만나게 되고, 그는 자기가 찾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04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p211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나의 확신을 흩뜨려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강물이 합류하여 세차게 흘러가면서 먼 목적지로 나를 가차없이 실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통합된 이중성’이라는 고양된 감정에 힘입어 나는 마법의 파도를 탄 것처럼 시험을 치러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p213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 인격과 치료자 인격간의 대결이다.

 

p217 그 무렵 나는 치료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소위 정상적인 것의 병적인 변형들은 내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정신에 관해 보다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는, 그토록 바라던 가능성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었다.

 

p217 나는 나의 숙명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만큼, 그 정도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자서전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되었어야만 했느냐에 관해 환상을 엮어나간다든지 생애를 위한 변명을 쓰는 그런 잘못 말이다.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01 환자들

p224 아무튼 심리학에는 명백한 진리가 거의 없다.

 

p226 의사는 증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적인 재료의 탐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연상검사가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또한 꿈의 해석을 통해서나 환자와 오랫동안 끈기있게 인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카를 융이 환자를 치료할 때 썼던 방법인 ‘연상검사’를 이 문장에서 캐취할 수 있다. ‘단어 연상검사’는 환자에게 다양한 단어를 들려주고 환자가 이야기하는 단어들을 기록하는 검사이다. 단어를 말하는 속도, 억양, 관련성 등을 다 고려하여 환자의 상태를 파악한다.

 

p231 연상에 관한 연구 덕분에 나는 그후 1909년에 클라크대학으로 초빙되었다. 그 대학에서 나의 연구에 관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나와는 별도로 프로이트도 초빙되었다. 명예 법학박사학위가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졌다.

미국에서 내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역시 연상실험과 심리전기실험 때문이었다.

 

p235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그 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더욱 노력하고, 심혈을 기울이고, 거짓으로 꾸미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더 연구하고, 더 파고들어야, 나만의 책일 될 것 같다. 책을 쓴다는 것은 곧 나를 드러낸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얼마나 공부하고, 생각하고, 노력해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 낱낱이 평가 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카를 융의 생각과는 방향이 조금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p237 나는 정신의학의 주요과제는 병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때까지는 그런 것들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제 전혀 알지도 못하는 분야의 직업에 들어선 셈이었다!

 

p241 나는 정신병에 보편적인 인격심리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우둔하고 감정없이 멍청하게 행동하는 듯한 환자들의 마음 속에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 훨씬 의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p243 겉으로 보게 되면 정신병 환자에게서는 비극적인 붕괴만이 보인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환자 영혼의 다른 측면의 삶을 보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자주 환자의 외관에 속는다.

 

p246 그녀의 환상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소녀시절에 당했던 근친상간으로 인해 그녀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굴욕을 느꼈지만 환상의 세계에서는 고양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소위 신화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근친상간은 전통적으로 왕과 신들의 특권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상태, 즉 정신병이 생기고 말았다. 그녀는 이를테면 지구 밖 세상에 존재하며 인간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멀리 우주공간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날개 달린 악마를 만나게 되었다.

 

p247 그후 나는 정신병 환자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그들의 내적 체험의 의미있는 현상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02 꿈의 분석

p248 정신치료와 분석은 인간 개체가 그러하듯 다양한 법이다. 나는 환자들을 될 수 있는 한 모두 개별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문제의 해결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원칙은 다만 최소한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심리적인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로 뒤집을 수도 있을 때에만 타당한 것이 된다. 나로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해결책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p249 나의 분석에서는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사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보편적인 것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래야 한 인간의 가치를 온전히 다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교사당 학생수는 반드시 줄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의 인생을 위해서도, 인류를 위해서도 말이다.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또 다른 한 인간과 대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석은 일종의 대화이며 여기에 당사자 두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가와 환자는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된다. 의사도 무언가 할 말이 있고 환자도 마찬가지다.

1909년에 나는 이미 잠재적 정신병의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p250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p251 인생의 심각한 위기에서는, 다시 말해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 중대한 순간에는, 암시의 잔꾀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의사는 그 전존재가 도전을 받게 된다.

 

p252 우리는 의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나도 살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야겠다.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그리고 나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해보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p253 꿈은 의식적인 태도에 대한 보상 바로 그것이다.

 

 

03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p259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은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한 부인들은 자신들이 남편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속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p260~261 이러한 경험에서 중요한 점은 원형적인 상황(이 사례에서는 죽음이라는 상황이지만)과 관련하여 종종 관찰되는 전형적인 동시성 현상이다.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이미 그날 저녁 내내 보통 때의 기분하고는 유난히 달리, 이상하게도 마음이 어수선하고 신경이 예민했던 것이다.

 

p264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너무나 좁은 정신적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인격발달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내 삶에 흡족한 내용과 의미는 무엇일까? 나를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요즘 너무 이분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p264 나의 환자들은 대부분 신자가 아니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길 잃은 양들’이 나를 찾아왔다. 오늘날에도 신자는 교회에서 상징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미사나 세례, 그리스도 본받기, 그리고 다른 많은 체험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징의 삶과 체험은 신자의 활발한 참여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은 바로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 주로 신경증 환자에게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한 사례에서 우리는 결여된 부분을 채워주는 상징들을 무의식이 자율적으로 가져오는지 그렇지 않은지 관찰하는 일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에도 상징에 해당하는 꿈이나 환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를 떠안을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된다.

 

p267 내적 체험의 모험, 즉 영적인 모험은 많은 사람에게는 친숙하지 않다. 정신적인 실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파문에 해당한다.

 

p269 행운이든 불행이든 세상의 관심을 끌어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상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혹은 전례가 없는 발전과 재앙을 두루 겪은 사람들을 의사는 만나게 된다. 그들은 대게 다른 사람들이 모든 삶을 바치기까지 끝없이 열광할 만한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능이 기묘하고도 꺼림칙한 정신적인 기질 속에 뿌리박고 있어, 우리는 그것이 천재성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단편적인 발달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사회적 평지에서 사람들이 만나게 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영혼의 자원들이 사실 같지 않은 황당한 상황에서 꽃을 피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p270~271 원형의 신성한 힘의 작용을 자신의 체험으로 인식하지 못한 의사는 치료과정에서 그것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원형의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피해가기 힘들 것이다. 그는 원형을 과대평가하기도 하고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지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있을 뿐 경험적인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p271그 세계는 삶의 진실을 소위 명료한 개념들로 은폐하려고 한다. 개념적인 것으로 옮기는 것은 체험으로부터 실체를 빼앗고 그 대신 단지 이름들만 붙이는 셈이다. 이제는 진실의 자리에 이름들만 들어서게 된다. 개념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라는 안락함이다. 체험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영혼은 개념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사실들 가운데 깃들어 있다. 말만 그럴듯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p272 나의 환자들과 피분석자들은 나를 인간적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여, 그것에 관한 본질적인 것들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심리적 수준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로서는 유명인사들과의 단편적인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01 이론적인 불화

p279 그가 나를 초대하여 1907년 2월 빈에서 우리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오후 1시에 만나 열세 시간 동안이나 그야말로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프로이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당시의 내 경험으로는 그 어떤 사람도 프로이트에 견줄 수 없었다. 그의 태도에는 진부함이 전혀 없었다. 내가 보니 그는 무척 총명하고 예리하며 어느 면에서나 괄목할 만한 사람이었다.

 

p281 “친애하는 융, 성이론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십시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모시오, 우리는 성이론을 가지고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보루(堡壘) 같은 것 말입니다.” 그는 열정에 넘쳐서 말했는데, 그 말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해다오!”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보루’와 ‘교리’와 같은 단어들이었다.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학적 판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게 하는 충격이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과학적 진리는 얼마 동안만 만족스러운 가설이미 모든 시대에 걸친 교리는 아니었다.

 

p283 만일 심리학이 없고 구체적인 대상들만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하나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갖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시 말해 심리학적 경험의 영역에서는 긴박감, 불안증, 강박증 등이 조금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불안과 양심의 가책, 죄책감, 강박증, 무의식성, 본능적 충동 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피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된다.

 

p287 동양에서는 ‘니르드반드바(Nirdvandva : 양쪽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나는 이것을 명심하고 있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p288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이럴진대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이 너무도 적은 심리학적 사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덧없을 정도로 작은 의식이 어떤 것을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02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p295~297 (카를 융의 꿈) 2층집. 2층 로코코양식, 거실. 1층 중세풍, 지하 1층 로마시대, 마지막 동굴 원시문화

 

p298 (꿈 해석) 집은 일종의 마음의 이미지, 즉 그때까지의 무의식의 부가물을 수반하는 당시의 의식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은 나에게 분명했다. 의식은 거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거실은 고풍스러운 양식이었음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1층은 무의식의 제1표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깊이 내려갈수록 풍경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어두워졌다. 동굴 속에서 나는 원시문화의 유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의 내부에 있는 원시인의 세계, 의식이 다다를 수도 없고 해명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선사시대의 동굴을 인간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기 전에는 대개 동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원시적인 마음은 동물의 혼의 활동과 가까이 접하고 있다.

 

p300 나의 꿈은 이와 같이 일종의 인간정신의 구조적 도식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정신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전적으로 ‘비개인적’인 성질의 어떤 것을 가정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딱 들어 맞는’ 것이었다. 그 꿈은 나를 지도해주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것은 세월이 지날수록 처음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정도로까지 확증되었다. 그 꿈은 개인정신의 밑바닥의 있는 선험적이고 집단적인 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였다.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p301~302 나는 고대신화학과 원시인의 심리학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06 나의 전존재는 진부한 생활에 의미를 부여해줄 수도 있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을 찾고 있었다.

 

p308 인간은 어떤 삶의 방식도 그것이 다른 것으로 교환되지 않는 한 버릴 수 없다. 완전히 이성적인 삶의 영위란 경험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대개 불가능하다. 특히 신경증 환자처럼 본성이 그와 같이 비이성적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p310 나는 고독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소위 친구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미리 곰곰이 따져본 점이었다.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것과 나의 확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희생’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통찰로 나는 다시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나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말이다.

 

p311 로이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의 꿈을 무의식과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진 가치를 과거와 망각으로부터 되찾아왔다.

p312 철학적으로 성찰해보면, 오늘날의 문화의식은 무의식개념과 거기에 따르는 결과들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세기가 넘게 무의식과 직면해왔으면서도 말이다. 우리 정신의 존재가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통찰은 여전히 장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내 안의 여인 아니마

01 신화와 환상

p316 오늘날 인간은 어떤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기독교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솔직히 말해, 아니오! 나는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지 않소.” “그럼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인가?” “그렇소.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오.”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너는 어떤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여기에 이르자 내 마음이 편치 않아졌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중단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만 것이었다.

(첫 오프 수업 때 했던 작업이 생각난다. 미네르바와 겨뤘던 이라크네 신화를 뽑았다. 신과 대결해서 지지 않는 실력을 가진 이라크네. 나는 어쩌면 능력이 출중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다. 신과 겨뤄도 지지 않는 능력을 가진 능력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나의 신화다. 나는 과연 내 신화를 완성할 수 있을까? 그럴려면 가장 시급한 것인 ‘굿바이 게으름’이다. 의지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글쓰고, 연구하는 것이 습관화 되야 한다. 매일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지 알면서도 하지 못한다. 실행이 답인데, 답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까? 힘내자!)

 

p327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나 자신을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해야만 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저항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무척 불안하기도 했다.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신과의사로서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02 필레몬과의 대화

p335 필레몬과 또 다른 환상의 형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필레몬은 내가 아닌 다른 힘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환상 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그는 내가 의식에서 생각하지 않은 것들을 말했다.

 

p336 그는 내게 설명하기를, 내가 나의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의 견해로는 그 생각들이 숲속의 짐승이나 방 안에 있는 사람, 공중의 새처럼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당신이 방 안에서 사람들을 본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그 사람들을 만들었다거나 당신이 그 사람들에게 만든 책임이 있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츰 나에게 정신적인 객관성, ‘마음의 진실’을 깨우쳐주었다.

 

p342 그는 자신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의 평가에 의해 살았따.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확신이 흔들렸고 아니마의 속삭임에 마음을 열어놓고 말았다. 아니마의 말은 대게 유혹하는 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교활함을 지니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03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p344 나는 그 많은 환상이 든든한 토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내가 우선 인간적인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현실이란 과학적인 이해를 의미했다. 무의식이 내게 가져다준 통찰을 통해 나는 구체적인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과제의 요점이 되었다.

 

p345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가 삶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면 언어뿐 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p345 나 자신에 대한 실험에서 정신병의 구성요소들을 제시하는 심리적 내용을 정신관의사로서 일일이 추적하게 된 것은 물론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 내용은 사람들이 정신병원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정신병 환자를 치명적인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식 이미지의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합리적인 우리 시대에 사라져버린 신화를 형성하는 환상의 모태이기도 하다. 신화적 환상은 도처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금지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한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 <<파우스트>> 제2부는 문학적 시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파 사상에서 시작하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까지 이어지는 ‘황금사슬(연금술 용어임-옮긴이)’의 한 고리다. 또한 세계의 다른 극점을 향한 탐험여행으로, 대부분 인기가 없고 모호하며 위험하기도 하다.

 

p346 무의식 내용은 나를 정상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족과 내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 사실들이란, 내가 의사면허를 가지고 있고 환자를 도와주어야 하며, 내게는 처와 다섯 아이가 있고 퀴스나흐트 제슈트라세 228번지에 살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그것들은 내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니체처럼 괴기한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가 아님을 날마다 증명해주었다. 니체는 내면의 사상섹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 보다 오히려 내면 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p347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방황하고 침체되어 있던 때이긴 했지만, 내가 체험한 모든 것은 나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됨을 나는 항상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 였다.

카를 융의 굳은 의지를 볼 수 있다. 자신의 환상, 무의식 세계에 도취되지 않고 그것과 현실을 연결하려는 아우르려는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아우르려는 정신. 이분법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고 무의식과 의식의 연결. 현실과 내면세계를 분리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p350 그리하여 죽은 자와의 대화, 즉 ‘일곱 가지 설법’은 내가 세계를 향해서 무의식에 대해 전해줄 이야기에서 일종의 서곡을 이루었다. 무의식의 일반적인 내용에 관한 일종의 배열도식과 해석인 셈이었다.

 

p350 오늘날 내가 과거를 돌이켜보고 환상에 관해 작업하던 시절의 체험을 생각해보면, 그 작업이 소명과도 같이 나를 압도하며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환상이 이미지 속에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과도 관계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내가 나 자신에게만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그후로 내 인생은 보편성에 속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중요하다고 여겨져 찾아본 지식들은 당시 학문에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원초적 체험을 스스로 겪어야 했고, 더 나아가 내가 체험한 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체험은 생명력 없는 주관적 가설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카를 융이 분석심리학의 개척자가 될 수 있었던 근거를 볼 수 있다. 소명과도 같이 압도된 그 무언가. 그때까지 없었던 이론, 체계, 학문이다. 카를 융이 겪어야 했던 많은 사건들이 왜 그에게 일어났는지 조금 이해가 된다. 꿈, 환상, 무의식 세계의 경험, 분열, 프로이트와의 결별 등 그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은 바로 그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그렇게 운명지어졌던 것이다. 제2의 인격과 늘 함께 더불어 살 수 밖에 없었던 날들. 오히려 그에게 그것이 복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말이다. 나는 어떤 분야에서 개척자가 될 수 있을가? 아니면 신과 겨룰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p351 그 무렵 나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로 했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면서 미워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아주 귀중한 보배였다. 내가 그 영혼의 말을 받아쓴 것은 내 존재가 비교적 전체성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p353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이런 일은 내가 학문적 출세를 포기했을 때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늘 겪어왔다.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이자. 그래보자. 그리고 그것을 용기있게 선택해보자.

 

p357 대략 1918~1920년에 나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가 ‘자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직선적 발달은 없고 다만 자기를 중심으로 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단일형의 발달도 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시작단계에서나 있는 일이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이 중심을 향한다. 이와 같은 인식은 내게 확신을 주었고 차츰 내적 평안이 회복되었다.

 

p361 프로이트와 헤어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떨어질 것을 알았다. 그 무렵 프로이트를 넘어서 내가 아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둠속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이럴 때 그런 꿈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은혜의 작용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내가 그 무렵 체험하여 기록한 것을 과학적 작업의 그릇 속에서 추출해내기까지 따지고 보면 45년이나 걸렸다. 젊은이로서 나의 목표는 학문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중에 그 용암의 흐름을 만났고, 그 불길의 열정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원료인 셈이었다. 나의 작업은 그 뜨거운 물질을 우리 시대의 세계관에 접목시키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공한 시도였다. 그 최초의 환상과 꿈은 불에 녹아 흐르는 현무암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단단해져 돌이 되었고, 나는 그 돌을 다듬을 수 있었다.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세부적인 것은 단지 보충하거나 명료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기간에 무의식에서 솟아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

 

연금술을 발견하다

01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p365 우선 나는 내적 체험에 관해 역사에서 예시의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의 가설이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나는가?”하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p372 나는 곧 분석심리학이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의 경험은 나의 경험이었고, 그들의 세계는 어떤 의미로는 나의 세계였다. 이것은 물론 나에게는 바람직한 발견이었다.

이것으로 내 무의식의 심리학은 역사에서 대응물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p373 원초적 이미지와 원형의 본체가 내 연구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고, 역사 없이는 심리학, 특히 무의식의 심리학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373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즉, 인격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과제요 목표였다. 모든 것은 이러한 중심점에서 설명되며 나의 모든 연구는 바로 이 주제와 연관된다.

 

p378 나의 연구에서 본질적인 점은 일찍부터 세계관의 문제에 간여하고, 심리학과 종교적 문제의 대결을 다뤄왔다는 것이다.

 

p382 그 시대에 신적인 카이사르에 의해 구현된 로마제국의 막강한 권력은, 수없이 많은 개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자주적인 삶의 방식과 수없이 많은 개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자주적인 삶의 방식과 정신적인 독립성을 빼앗긴 세계를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개인이나 문화공동체도 비슷한 위협, 즉 대중화의 위험에 처해있다. 그리하여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 재림의 가능성과 거기에 대한 희망이 이미 활발하게 논의되고 환상을 보았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는데, 그것은 구원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이 취한 형태는 과거에서는 비교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고, ‘기술시대’의 전형적인 아이의 모습을 보일 뿐이다. 미확인비행물체(UFO) 현상의 전세계적인 확산 같은 것이 바로 그렇다.

 

02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p388~389 욥은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예표다. 그리스도와 욥은 고통의 관념으로 서로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이며 욥 역시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경우 이 세상의 죄악이 고통의 원인이며, 기독교인의 고통은 거기에 대한 일반적인 응답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죄악은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궁극적으로 그 책임은 이 세상과 죄를 창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숙명적 고뇌를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하느님에게 있다.

 

p390 하지만 신학자들은 자연과학적 사고, 특히 심리학적 사고를 알지 못한다. 분석심리학의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의 진술, 즉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서도 흔히 서로 일치하는 진술이다.

 

p395 여러 신의 힘으로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즉 인간의 세계인식 면에서 창조를 폐기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지상에 있는 온갖 고등생물을 방사능으로 없애버릴 수 있다. 세계 소멸의 관념은 이미 부처에 의해 그 단초를 갖게 되었다. 피할 도리가 없이 노쇠,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은 큰 깨달음으로 끊어진다. 그리하여 존재의 환영은 소멸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은 이미 심상치 않게 가까이 다가온 미래의 문제를 예언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꿈은 인간세계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생각과 징후, 즉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를 근소하지만 결정적으로 능가한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

 

p397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그 글들은 내가 살아온 동시대 세계에 대한 보상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를 융은 다르게 생각했고, 모험의 삶을 살았다. 그 과정이 고독했으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인정받았다.

 

p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奔流)로 휘말려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01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p407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p408 나는 고아, 혼자다. 그런데도 어디서나 발견된다. 나는 하나의 존재, 그러나 나 자신과 대립하는 존재다. 나는 젊은이인 동시에 노인이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물고기처럼 깊은 곳에서 끄집어올려야만 하므로. 아니면 하얀 돌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숲과 산에서 나는 두루 쏘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죽지만 시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돌이 한 말)

 

p413 우리가 내적감각으로 지각하거나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외부의 현실과 자주 상응하게 되는 것을 동시성현상이라고 한다.

 

02 카르마

p420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가장 깊이 움직인 것은 선과 악, 정신과 물질, 빛과 어둠의 대극문제였다.

 

p421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 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는 나의 현재를 지불하고, 미래를 샀다. 그런데 지불한 현재의 삶에도 가치를 부여해야 지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를 위한 투자로 현재를 산다.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려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잘 활용해야 한다. 나는 현재를 살며 미래를 살 것이다. 그게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생각해 낸 나의 삶의 방식이다.

 

여행

01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p431 시계라는 것은 소위 중세 이래로 시간과 그 동의어인 진보가 유럽인에게 슬며시 들어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로부터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짐을 가볍게 하고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점점 더 속력을 올리며 여행을 재촉하고 있다. 그들은 중량의 상실과 이에 따른 공허를 열차, 기선, 항공기, 로켓과 같은 성과물의 환상으로 보상하고 있다. 이런것들은 빠른 속력으로 인해 유럽인으로부터 존재의 지속성을 더욱더 빼앗아가고, 더 나아가 유럽인을 속도와 폭발적인 가속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다른 현실로 옮겨놓는다.

 

p434 나는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무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영역과 살고 있는 현재의 영역에서 살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아무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다. 몇 주 후, 또는 몇 달 후와 같이 그날에 내가 무엇인가를 할 것이라고 정해 놓으면 그 날을 기다리고 상상하며 현재를 산다. 그러다 보면 그 날은 현재가 되어 있고 나는 또 다른 그 날을 생각한다. 그렇게 가까운 미래의 영역, 그리고 현재에 살고 있다. 오늘도 몇 시간 후 알게 될 어떤 결과에 대해 생각하며 타자를 치고 있다.

 

p436 아랍문화와의 만남은 확실히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격정적이고 기분대로 살아가며 생 그 자체에 한층 가까이 있으면서도 성찰을 모르는 이러한 인간존재가 우리 안에 있는 저 역사적 층에 강력한 암시효과를 주었다. 그 역사적 층은 우리가 이제 겨우 극복했거나 최소한 극복했다고 믿고 있는 그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빠져나왔다고 착각하는 어린시절의 낙원과 같아서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또다시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발전에 대한 맹신은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과거로부터 멀리 뗴어놓을수록 더욱더 유치한 미래의 꿈에 매달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p437 어린이 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Persona : 자아가 외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세계가 바라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 - 옮긴이)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한다.

 

 

02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p441 비평의 수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대상의 외부에 관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 관점은 특히 그 성격상 어떤 다른 학문분야보다도 훨씬 주관적인 경향을 가진 심리학적 사항들에 아주 유용하다.

 

p450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있다.

 

p450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나의 이성이 짜낸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다보면 소명이라는 단어 앞에 다다르게 된다. 소명은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신의 창조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근거는 신이 준 소명을 다 하기 위함 아닐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심겨지고, 싹 터지길 바라고 있는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찾지 못해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씨앗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분명히 있다. 알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기회가 왔을 때 도전해 보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해보고, 변화를 주면 좀 더 자신의 소명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 같다. 자신을 관찰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순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p452 우리 기독교 신앙도 그밖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행위나 그 행위의 특수한 형식이 하느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 예를 들면 예배의식이나 기도, 혹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도덕적 행위를 통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제의적 행위는 신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응답이며 반응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이상의 것, 즉 적극적인 ‘실현’, 주술적 강요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 신의 압도적인 작용에 충분히 응답할 수 있으며 반대로 신에게조차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개인을 형이상학적 요소를 지닌 위엄에까지 이르도록 고양하는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03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p457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p464 내가 이 일화를 언급하는 것은 얼마나 미묘한 방식으로 원형에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 세명의 남자가 그렇게 모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나는 이 두명 외에 도 한명의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청했었다. 그러나 그는 여건이 맞지 않아 함께 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것으로 충분히 무의식 혹은 숙명의 배열이 이루어졌다. 삼위일체의 원형이 드러났고, 이러한 원형의 역사에서 언제나 반복하여 나타나듯이, 그것은 네 번째를 불러들였다.


p470 현대사회에서 동성애가 맡은 역할을 대단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모성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일부는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번식의 저지!)이다.

 

p474 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 왜 그들이 손바닥에 입김을 불거나 침을 밷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늘 그렇게 해왔습니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어떤 설명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사실은 그들도 단지 자기들이 그것을 하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행위에서 아무런 의미도 파악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도 또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밝힌다든지 부활절 달걀을 숨긴다든지 할 때처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의식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그 노인은 이것이 모든 종족의 진정한 종교라고 말했다.

 

p483 곧이어 나는 내가 겪은 수많은 경험으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졌다. 수천의 생각이 머릿속을 감돌았다. 새로운 인상들을 받아들이고 한없는 생각의 바다를 포용하는 나의 능력이 쉽게 바닥을 보인 것은 괴롭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든 관찰과 체험의 내적 연관을 확인하기 위해 그것들을 다시 한번 검토해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한 것들은 모두 기록했다.

 

 

04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p488 반면에 나는 소위 ‘성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모두 피했다. 내가 그들을 피한 것은 나 자신의 고유한 진리로 만족해야만 했기 때문이며, 나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성자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진리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나에게 도둑질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들의 지혜는 그들에게 속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이 나에게 속할 뿐이다. 더군다나 유럽에서 나는 동양으로부터 아무것도 차용할 수 없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하고, 나의 내면이 말하는 것이거나 본성이 내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

카를 융은 자신만의 이론, 사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 싶었던 것일까?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였기 때문일까? 나는 현재 많은 고전을 통해 생각하는 방법, 생각의 힘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나만의 생각, 나의 내면이 말하는 것이 새롭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어디선가 읽은 것, 들은 것들이 혼합되어 나의 생각이 된다. 마음이 더 끌리는 것,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나의 생각으로 차용한다. 그런데 카를 융은 달랐다. 그 자신으로 살고, 그의 내면이 말하는 것, 본성이 가져다준 것으로 살았다. 그런데 나도 곧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창조물을 만들려면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p490 이에 반해 나는 자연과 정신의 이미지에 대한 생생한 관찰을 고수하고 싶다. 나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지도 않으며 나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게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이기 때문이다. 자연, 영혼, 그리고 인생은 나에게 활짝 피어난 신성처럼 여겨진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에게 존재의 최고 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나에게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물론 그러한 참여가 나에게 무척 어렵게 여겨지는 경우도 생길 것이고,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헌신할 수 없는 그럴듯한 구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무능’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내가 아마도 본질적인 어떤 것을 단념하고 과제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된다. 나의 부적격성에 대한 이러한 깊은 인식은 적극적인 행위의 결여를 대체한다.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p500 낮이 잊어버린 신화를 밤이 계속 이야기하고, 의식이 평범하게 만들어버리고 우스꽝스럽고 하찮은 것으로 축소시켜버린 그 거대한 모습들을 시인이 다시금 일깨우고 선견지명으로 살려낸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또한 ‘변화된 모양으로’ 사색적인 사람들에 의해 다시 새로 인식되는 법이다. 위대한 과거의 것들은 우리가 착각하듯 죽지 않고 단지 그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모양은 작지만 힘은 강력한’ 위장된 카비르가 새 집으로 옮겨간다.

 

 

05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p505 특히 세례가 실제적인 죽음의 위험과 결부되어 있는 통과의례라는 주목할 만한 견해에 대해 토론했다. 그런 종류의 통과의례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원형적 사고를 통해 표현되는 생명의 위험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와 같이 세례 또한 본래는 적어도 익사의 위험을 암시하는 실제적인 ‘잠김’이었다.

 

p510 1949년 이미 고령에 이르러 내가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로마여행)을 뒤늦게 해보려고 했으나, 차표를 사자마자 나는 기절해버렸다. 그후로 로마여행 계획은 단호히 접어두고 말았다.

카를 융이 로마에 갔으면 어떤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었을까? 시칠리아 여행을 통해 나는 여행의 즐거움, 여행이 주는 행복이 무엇인지 느끼고 왔다. 카를 융이 로마에 갔었다면 그도 그 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에 젖지 않았을까? 괜히 내가 아쉽다.

 

 

환상들

01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p516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나에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나’라고 말이다. ‘나’는 이를테면 남아 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참으로 나라는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잇었다. ‘나(자아)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다.’ 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 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이상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마침내 나 자신 또는 나의 인생이 어떤 것과 역사적으로 관련되어 있는가를 이해하게 되리라 또한 확신했다. 나는 무엇이 내 이전에 있었고 왜 내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내 인생이 어디로 계속 흘러갈 것인지 알게 될 것이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자꾸만 시작도 끝도 없는 역사처럼 여겨졌다. 나는 나 자신이 하나의 역사적 단편, 앞서거나 뒤따르는 본문도 없이 책에서 잘려진 장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의 인생은 긴 사슬에서 가위로 잘려진 것처럼 보였고, 많은 물음은 해답이 없는 채로 남았다. 무슨 이유로 그와 같이 진행되었을까? 왜 나는 그런 가설들을 가지고 왔는가? 나는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 결과가 무엇인가?

 

 

02 융합의 신비

p523~524 나는 낮에는 괴로웠고 신경이 완전히 지쳐 있었다. 온갖 것이 나를 부아나게 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너무나 난폭하며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공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약되어 있으며, 확인할 수 없는 목적에 매여 인위적으로 좁아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진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최면력 같은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것들의 무가치성을 분명히 인식했는데도 말이다. 사실 나는 그때부터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기는 했지만, ‘인생’이란 그것을 위해 이미 마련된 삼차원의 세계체제 안에서 전개되는 존재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존재의 한 단면. 그렇다면 다른 면도 있다는 이야기. 입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른 한 면이 아니라 다른 무수히 많은 면이 있을 수 있다. 셀 수 없고, 면적으로 이야기 하기에도 부족한 새로운 단위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나머지 부분을 어디에서 실현시킬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살면서 최대한 많은 면을 실현시키고 죽어야 할까? 많은 측면을 가진 존재가 유한한 세계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발현해야 할텐데, 자신의 다른 면을 잘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가 최댓값인지 알 수 없다. 근데 우리에게 다른 측면이 있긴 한걸까?

 

p525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 상태의 지복이라고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도 없고 시간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었다. 그 체험은 우선 하나의 상태, 즉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감정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제와 동시에 오늘과 내일 존재한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한 현재이며,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그래도 하나였다. 감정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지나간 일의 결과에 대한 만족이나 실망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총체, 다채로운 전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

 

p527 하지만 사람이 개성화의 길을 가는 중에, 즉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과오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원만해지지(융은 인생에서 ‘완전성’보다 ‘원만성’을 추구하기를 권함) 않을 것이다.

 

p528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옳으냐 그르냐 하는 범주는 항시 존재하지만 그것은 구속력이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존재가 주관적인 평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 또한 존재하는 생각으로서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도 전체성의 현상에 함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01 꿈과 예감

p532 요즈음의 비판적 이성은 다른 많은 신화적 관념뿐만 아니라 사후의 삶에 관한 관념도 없애버린 듯하다. 이런 일이 가능해진 이유는 오늘날 인간이 대부분 오로지 그들의 의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들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만이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p535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을 단념해야 한다. 나는 어떠한 이유로 우주만물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문제를 학문적이거나 지적인 문제에서 제외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거기에 관한 어떤 관념이, 예를 들어 꿈이나 신화적인 전승을 통해 나에게 제공된다면 나는 그것들을 기록해둘 것이다. 심지어 그것으로 하나의 견해를 짜내려고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 견해가 언제나 하나의 가설로 남고, 그것이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궁금증을 이성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위험한 시도이다. 그렇다고 모든 부분을 무턱대고 믿거나 따르거나 선망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나는 인간에게 있는 ‘가설’ 중 ‘진리’가 있다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분별력이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들을 찾을 것 같다. 물론 그 근거들은 과거로부터 올 것이다. 나보다 먼저 깊이 파고들었던 어떤 학자들로부터 올 것이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알려고 하는 것이 스스로를 좁은 세계 안에 가두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부분이다.

 

p536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마치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범위를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02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p545 인간 본성에 제한없는 지식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적절한 시간의 상황에서만 의식에 의해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짐작된다. 그는 아마 여러 해 동안 어떤 것에 대한 예감을 품고 지내다가 나중 어떤 순간에 그것이 참으로 깨달아질 것이다.

 

p549 평면에 입체를 투사하거나 그 반대로 입체에서 사차원의 형태를 구성해내는 것과도 같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 삼차원세계에서 정해진 원리를 이용한다. 수학이 경험을 뛰어넘어 관계에 관한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표상들을 논리적인 원리에 따라 경험적인 자료들, 예컨대 꿈의 진술을 근거로 그려내는 일은 훈련된 상상의 본질에 속한다. 이때 이용되는 방법은 내가 명명했듯이 ‘필수적인 진술’이다.

그것은 꿈의 해석에서 사용하는 확충의 원리로, 단순한 자연수의 표시로써 아주 쉽게 설명될 수 있다.

1은 첫째 수사로서 하나의 단위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단일성’, 하나인 것, 전일, 유일무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것은 수사가 아니라 철학이념이거나 원형이며 신의 속성, 단자다. 인간의 이성이 이런 진술을 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지만 오성은 1이라는 관념과 거기에 포함된 의미에 의해 한정되고 그것에 묶여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위적인 진술이 아니라 1이라는 수의 본질에 의해 결정됨으로써 필수적인 진술이 되는 것이다.

p550 나는 우리 이성의 수학적 진술(본래부터 이미 존재하는) 이외의 다른 진술들도 그 자체를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가리킬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싶다. 나는 그런 진술의 예로서 쉽게 일반적인 동의를 얻거나 눈에 띄게 번번히 출현하는 환상현상과 원형적 모티프를 생각한다.

p551 수학 방정식이 어떤 물리적 현실에 해당하는지 우리가 모르듯이, 신화적 현실 또한 어떤 정신적 현실에 해당하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가열된 가스의 교란운동을 다스리는 방정식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꼼꼼하게 조사하기 오래 전에 제시된 것이다. 아주 오랜 옛적부터 어떤 잠재의식적 과정의 진행을 표현하는 신화소가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부분!!)

 

p551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p555 죽음은 역시 무섭도록 가혹하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아서는 안된다. 물리적인 사건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인 사건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한 인간을 빼앗기고, 냉혹한 죽음의 정적만 남는다. 더이상 어떤 관계성도 맺을 희망이 없다. 모든 다리는 파괴되었다. 사람들이 오래 살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인간은 삶의 한가운데서 저승으로 끌려가고, 쓸모없는 인간은 늙도록 살아남는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이다. 죽음의 야만성과 전횡성은 사람들을 비통하게 만들어, 사람들은 자비로운 하느님도 없고 정의나 선도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하나의 즐거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영원의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결혼이며 융합의 비의다. 영혼은 이를테면 자신에게 결여된 반쪽에 도달하여 통합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의 관들에는 그 희열이 무희들로써 묘사되었고, 에트루리아 무덤들에는 향연으로 표현되어 있다. 경건한 유대 신비주의자 시몬 벤 요카이가 죽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지방에서 만령절에 무덤으로 ‘소풍’을 가는 풍습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죽음이 본래 하나의 축제라는 지각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죽음에 대한 다른 생각. 컬럼에 쓸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주는 유익함, 신선함,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확장된 자아가 될 수 있게 한다. 죽음에 대해서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기쁘다.

 

 

03 단일성과 무한성

p559 우리보다 훨씬 오래되고 무척 분화된 정신문화를 지닌 나라, 즉 인도에서 재생의 관념은, 우리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한 분의 구주가 있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생각이다. 교양있는 인도인은 우리가 그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거기에 신경쓰지 않는다. 동양적 존재의 정신적 특성에 어울리게 출생과 죽음의 연속은 끝없는 현상이요, 목표도 없이 계속 굴러가는 영원한 운명의 수레바퀴로 여겨진다. 사람은 살고 인식하고 죽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오직 부처에 이르러 목표에 관한 관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지상적 존재의 극복인 셈이다.

 

p560 나는 양쪽 다 옳다고 생각한다. 서양인은 외향적인 경향이 강하고 동양인은 내향적인 경향이 강한 듯하다. 서양인은 의미를 투사하여 객체에 의미가 있는 듯이 추정한다. 동양인은 그 의미를 자신 속에서 느낀다. 그런데 의미는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는 법이다.

 

p562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조상이 이미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p571 우리는 무의식의 산물에서 만다라 상징, 즉 통합성을 묘사하는 사위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가 통합성을 묘사할 때 바로 그와 같은 형상들을 사용한다. 우리의 기초는 자아의식, 즉 자아를 중심점으로 하는 빛의 영역이고 그것이 우리의 세계를 표현한다. 거기서 우리는 비밀에 싸인 어둠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런데 그림자 같은 그것의 흔적들이 얼마만큼 우리의 의식에서 야기되는지, 또는 그것이 얼마만큼 고유의 현실성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피상적인 관찰은 의식이 그 원인이 된다는 가정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무의식의 표상들은 의식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 고유의 현실과 자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단지 일종의 주변현상으로만 보고 있다.

 

p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p573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서 경험한다.

 

p574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인간실존의 유일한 의미는 존재 그 자체에 어둠속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무의식이 우리에게 작용하듯 우리 의식의 증거가 무의식에 작용한다는 사실까지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만년의 사상

01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p580 모든 인간 판단의 불완전성은 우리의 견해가 어느 때나 옳은 것이냐 하는 회의가 들게 한다. 우리도 잘못된 판단에 굴복할 수 있다. 우리가 도덕적 평가와 관련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윤리적 문제는 이 사실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선과 악이 상대적이라고 해서 선악이라는 범주가 가치가 없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며 특유한 심리적 결과가 뒤따른다. 다른 데서 내가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행해지거나 의도되거나 생각되는 온갖 잘못은 세계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 마음을 응징할 것이다.

 

p588 심리학적 관점에 한해서 보면, 신의 표상은 심적 토대에서 현시된 것이며 이제 심한 분열의 형태로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열이 세계정치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벌써부터 이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 눈에 띌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원 모양으로 보이는 자발적인 통합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정신 내부의 대극의 합을 묘사하고 있다. 이에 속하는 것으로, 1945년 초기에 시작되어 널리 퍼진 ‘미확인비행물체’에 관한 소문을 들 수 있다.

 

p593 신화는 결국 유일신교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전능하고 선한 신 곁에 영원한 어둠의 적수를 지금까지 두고 있는 (공적으로는 부인된 가운데) 이원론은 포기해야 한다. 신화는 쿠자누스의 철학적인 대극복합과 뵈메의 도덕적 양가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하나의 신에게도 그에게 마땅한 통합성과 대극의 합이 보증될 수 있을 것이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중요한 주장이었음이 느껴진다. 신화는 결국 유일신교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유일신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른가? 이원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보면 유일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처럼도 들린다. 하지만 쿠자누스의 철학적인 대극복합과 뵈메의 도덕적 양가성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해석이 어렵다.

 

p596 우리가 우주에서의 인간실존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하나의 관념을 가진다면, 다시 말해 마음의 통합성, 즉 의식과 무의식의 협력이 이루어지게 하는 근원인 그러한 관념을 가진다면, 신화적 진술에 대한 욕구는 충족되는 셈이다. 무의미는 생의 충만을 방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뜻한다. 의미는 많은 것을 거의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해준다.

 

p597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02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p606 모든 에너지가 대극에서 생성되듯 마음도 역시 활동성의 필수 전제조건으로 내적 양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이미 헤라클레이토스가 인식한 바와 같다.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이 양극성은 모든 생명체에 내재한다. 걸핏하면 깨지기 쉬운 자아의 통일성이 이와 같은 강력한 조건에 직면해 있다.

 

p608 의식보다 먼저 존재하며 의식을 규정하는 원형들은 실제적인 역할로 출현한다. 다시 말해 본능적 의식 토대의 선험적 구조형태로 나타난다. 원형들은 물(物) 자체를 결코 표현하지 않고 단지 형태만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그 형태 속에서 원형을 관조하고 이해한다.

 

p617 원형적 진술들은 본능의 전제조건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진술들은 이성적으로 논증된 것도 아니고 이성적인 반론으로 제거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예전부터 세계상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세계상이란 제리 브륄이 적절하게 명명한 대로 ‘집단표상’인 것이다. 확실히 자아와 그의 의지가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아가 하고자 하는 것은 대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원형적 과정의 자율성과 누민제에 의해 몹시 방해를 받게 된다. 원형적 과정을 실제적으로 고려하면 종교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 종교가

심리학적인 관찰방식을 감당하는 한에서 말이다.

 

03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p618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성찰의 영역 이외에 그보다 더 넓게 뻗어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만큼은 넓은 또 하나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영역에서는 합리적인 이해와 표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은 에로스의 영역이다. 고대의 에로스는 의미심장하게도 일종의 신으로, 그 신성이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해되거나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p620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천사의 혀로 말할지라도” 또는 과학적인 정밀성으로 세포의 생명을 가장 깊은 바탕까지 주의깊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회고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아마도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되었다.

이 부분을 보니 사람이 처한 환경, 받는 교육,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인생이 달라 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결론은 같았을까? 모를일이다.

 

01 비밀로 가득 찬 세계

p623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강)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강물을 길으려면 허리를 얼마만큼은 굽혀야 하는 법이다.

 

p624 나로 하여금 삶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일 것이다. 어쩌면 어릴 적 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내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결정해버렸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모험으로 사는 인생은 고독하다. 그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들은 모험을 선택하지 않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길을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모험이 그닥 위험할 것 같지 않은데 내 주변 사람들은 위험할 것이라고 한다. 나의 선택에 의구심을 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간다. 그게 나의 신념이다. 그리고 결과가 어찌 되든지 나는 그것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고독함을 다른 말로 바꾸면 특별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p625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비밀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는 마음속으로 예상되는 일뿐만 아니라 그외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예기치 못한 일들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들이 바로 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삶은 온전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p627 아마도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동시에 훨씬 덜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다이모니온이 작용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너무 가깝고 너무 멀다. 다이모니온이 잠잠해진 곳에서만 사람들과 중간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02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p628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아마도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p630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지능의 어떤 단계에서도 이 유형이 등장하며, 그것이 늙은 농부든 노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든 동일한 유형이다.

노년이란 그런 것이면서 또한 하나의 제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주 많다. 식물, 동물, 구름, 낮과 밤, 그리고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 등이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 불확실해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화성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그렇다. 마치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세계와 갈라놓았던 저 생소함이 나의 내면세계로 옮겨와서 나 자신에 대한 예기치 않은 낯설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편집자의 말

p633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p637 이러한 긍정과 부정 사이의 갈등은 그가 죽는 날까지 결코 수그러든 적이 없었다. 항상 회의의 찌꺼기가 남아 잇었고, 미래의 독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p639 융은 자기 자신을 그 무엇보다도 의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치료에 있어서 종교적인 태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음이 자율적으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관념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마음이 ‘원래 종교적’이라고 하는 그의 인식과 일치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많은 신경증이 마음의 이와 같은 근본적인 특성을, 특히 인생 후반기에 무시하는 데서 연유하고 있음이 융에 의해 밝혀졌다.

 

p643 “내 생애의 가치가 어떤가 스스로 질문해본다면, 몇 세기의 사상을 놓고 나 자신을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그래, 내 생애도 뭔가 의미가 있구나’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평가한다면 내 생애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말들 가운데 표현된 비개인성과 역사적 연속성의 감정은 융에게 특징적인 것이었다.

 

 

3. 내가 저자라면 (두번 읽기)

 처음 읽었을 때는 읽는 것만으로도 기뻤다면 두 번째 읽을 때는 더 깊이 내용을 이해하고 싶었다. 물론 어느 부분 해결된 것도 있지만 아직도 이해 못한 부분이 더 많기도 하다. 몇 년 뒤에 다시 읽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카를 융의 책에는 잘 모르는 단어가 가끔 나오는데, 각주를 달아 주었으면 이해하는데 더 쉬웠을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책은 사상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들에게 주는 정신적, 영적 영향력이 크다. 나도 나의 생각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됐다. 물론 아직 정확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소화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융합의 신비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에 내가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나도 내적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싶다. 다른 자서전과 달리 그의 자서전은 분석심리학적이다. 그래서 매력적이고 그렇게 쓰고 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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