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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6일 07시 24분 등록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

-. 김용규 지음

-. 휴머니스트, 2011

 

 

■ 저자에 대하여 - 김용규

 

1.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철학자

 

 그는 동국대 철학과를 다녔다. 불교에 관심이 많아 들어가게 되었지만, 정작 공부한 것은 서양철학이다. 독일로 건너가 하이데거가 교수와 총장으로 있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대중과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철학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길에서 지나가는 젊은이를 붙잡고자네 어디 가는가?’라고 말을 붙이며 철학이 시작했듯이 결국 철학이라는 것은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을 집필하는 이유도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폭넓은 만남을 위해서다.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시대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가치라는 말이 매우 애매하고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모든 가치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주간조선 인터뷰 내용중>

 

2. 시를 사랑하는 철학자

 

 그는 인류문화 초창기에는 시와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다고 한다. 시와 철학이 갈라진 것은 플라톤부터이며, 플라톤은국가론이란 책에서 이상국가에서 시를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철학의 역할까지 맡고 있는 시를 퇴출하지 않고는 철학을 올바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플라톤이 분리한 것을 하이데거가 다시 합치는 되는데,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존재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형이상학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이다. 그는 시인들을 진리를 파악하는 사람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이데거 말대로 존재의 진리를 듣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인이라면 철학자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 숨 쉬고 사는 삶의 터전에서 시가 저절로 우러나온다고 했으며, 그건 고요한 울림으로 들리는데 제일 먼저 예민하게 듣는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했다.

 

3. 인문주의를 지향하는 철학자

 

 그는 이 책에서 철학과 신학을 문학, 역사, 미술, 음악 등과 아울러 한편의 대서사시가 되는 '철학 내러티브'를 창안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에 나 자신을 온전히 실현하려면 보편적 가치(자유, 평등, 박애, 정의 등)에 대한 생각과 그것이 스며든 문화 예술적 감수성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고민하고 추구해온 사람들의 이론을 살려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와 가치 있는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다.

 

4.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멘토자

 

 가능하면 '책에 대한 책'보다는 ''을 읽어라. 삶이 곧 책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책을 써야 한다. 가치 있는 삶을 고민해야 한다. 어디든 간에 보편적인 가치에 자신을 잡아 매라. 거기에 내 삶을 내 던지라. 그렇게 가치 있는 글을 쓰라. 작가가 되고 싶으면 작가처럼 써라. 작가처럼 쓰면 작가가 되고, 지망생처럼 쓰면 지망생이 됩니다. '누구라면 지금,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라. 칸트가 지금 다시 쓴다면 어떻게 쓸까? 를 고민해라. 책은 저자의 최선이자 모든 것이다. '삶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라! <7기 선배들과의 대화중에>

 

6. 참고자료

   -. 주간조선 인터뷰(최준석 편집장, 2011.12.12)

   -. 땡칠이 7월 특강 '작가란 무엇인가'(정리 양경수 선배)

   -.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김용규 지음, 휴머니스트. 2010)

 

 

■ 내가 저자라면 

 

 내 나이 26살 때, 신에 대한 마음의 문이 열렸다. 문득 책을 읽다가 감동적인 구절에서 멈추었다. 등줄기에 전율이 느껴지면서, 떠오른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었구나,어떤 존재가 내 곁에 있었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책 제목도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였다. 이처럼 나에게 신은 어느 순간,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서 존재자체로 다가왔다. 뒤늦게 가진 존재의 깨달음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이 책의 저자는 ''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동안 내가 궁금했던 ''의 대한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읽었던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와 깊이를 더해주었다.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창조론', '삼위일체', '유일신'는 수용하는 힘든 상징적인 의미들이었다. 하지만, 서양문명의 거장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듯이 알기 쉽게 풀어냈다. 이미 마음속에 존재했던 생각들을 흔들어 깨워주었으며, 신선한 바람을 불어주어 깊게 숨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아직 신에 대한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책을 처음 본 순간, 두께에 압도당하게 되고, ''이라는 거대한 벽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꺼내 놓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다시 한 번 언급하면서 처음과 시작을 아우르고 있다. 마치 신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영원 속에서 확실하게 인식하듯이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동시에 직관하고 있었다.

 이 책은 신의 섭리를 통해서 저자의 의지보다는 신실한 기도와 간구로 신께서 구성해 놓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전에 항상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나의 글도 인간의 불완전한 삶을 담아내면서, 스스로를 구원받고 세상이 밝고 환해지도록, 그 분의 뜻대로 만들어지길 기도한다. 신의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드신 것처럼, 내 마음에 좋은 생각들이 흘러 넘쳐서 자연스럽게 글이 창조되도록 간구한다.

 이 책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기도' '시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주었다. 힘들게 나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조금은 신에게 의지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

 

"기도로 신의 섭리를 깨닫고 자기 체념으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욥이나 하박국이나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시간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태양의 회전운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 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은 마음 안에 있고 마음과 하나지요. 그러므로 항상 흘러가는 것 같지만 전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언제나 아직은 오지 않은 것 같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지요"

 

 신에 대해 의지하고 복종 한다고 해서 자신이 약해지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과 세상에 대한 긍정으로 바라보게 하고, 죽음까지도 기쁘게 맞이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1부 신이란 무엇인가?

 

22 다양한 방향으로 몸을 비튼 기묘한 자세인데도 자연스러움과 우아함을 잃지 않은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인물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천재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비로소 알아차렸지요.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든 이들은 인간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이 화가의 찬미가 신에게 바치는 장엄한 미사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27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신의 모습입니다. 과연 신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신과 관련해 여느 것과는 달리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할까요?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27 독일의 현대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이란 모든 것에 침투하는 바람, 때로는 조용한 숨결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신은 남성이나 여성이 아니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닙니다. 도무지 어떤 감각적 형상도 갖고 있지 않지요.

 

31 사람이란 항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법입니다. 밀턴의 사려 깊은 경고는 사실상 무시되었고, 그의 탁월한 묘사는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신을 의인화하는 데 뚜렷한 공헌을 하고 말았습니다.

 

33 그렇다면 미켈란젤로가 그린 신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사실 이 노인은 히브리인들의 성서에 나오는 야훼(YHWH)’가 아닙니다. 그리스인들의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지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피테르라는 라틴어로 부르던, 이 그리스 신들의 왕을 거리낌 없이 야훼와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일인데요, 그 한 예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인 단테의 <신곡>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35 오늘날 우리로서는 유피테르를 모독한 카파네우스가 왜 그리스인들의 저승인 하데스에 있지 않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에서 벌을 받는지, 또 왜 베르길리우스가 유피테르에게 반항하는 카파네웃그에게 아직도 야훼를 경멸한다고 꾸짖는지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이런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지요. 왜 그랬을까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35 당신도 알다시피, 르네상스란 재탄생또는 부활이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 .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양식이 드러내는 특징이지요.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인 야훼를 로마인들의 신인 유피테르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켰고, 미켈란젤로는 성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라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를 그리스.로마인들의 정신과 기법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36 따라서 그들이 신에게 인간의 육체를 부여한 것은 신들을 폄하했다기보다 인간의 육체를 그만큼 신성시했다고 보아야 하지요. 정말이냐고요? 그럼요! 이를 증명할 만한 매우 인상적인 증거들이 남아 있습니다.

 

37 핀다로스는 신과 인간이 크기와 힘에서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종족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지요.

 

37 대부분 철학자이기도 했던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축제일은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마음껏 감상하고 예찬할 수 있는 기회였지요.

 

38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인들은 청소년들이 평소 입는 옷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옷이 몸의 발육이나 아름다움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이는 곳이 없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요즘의 비키니처럼 더 많이 노출되도록 디자인했지요. 특히 소녀들은 가볍고 짧은 옷을 즐겨 입었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엉덩이를 내보이는 처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41그리스인들이 인간의 육체를 신성화했다고는 해도, 단순히 육체의 자연적 아름다움에만 매혹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언급한 이데아의 미곧 우리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열렬히 추구했습니다.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 인간 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41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썼습니다. 감각의 미는 그들 작품에 자연스러움을 심어 주었고, 이데아의 미는 숭고함을 보탰지요. 그들은 인체를 조각할 때 수학적 비례, 조화, 균형을 지나치리만큼 엄격히 따졌습니다. 또 이마와 코를 일직선으로 만들어, 우리가 보기에는 오히려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예요. 한마디로 말해 인간답게 묘사하되 동시에 이상화하는 것을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이 견지한 최고의 규칙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바로 이러한 정신과 규칙을 애써 물려받았지요.

 

43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론>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 또 라파엘로는 부유한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의 로마 별장인 빌라 파르네시나의 방 벽에 프레스코와 <갈라테이아의 승리>를 그릴 때 이렇게 고백했지요.  참으로 여성들에게는 묘사하고 싶은 미가 드물기 때문에 나는 상상 속에 있는 어떤 이념을 이용한다.”

44 에로스는 우리의 영혼을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향하게 하는 혼의 전향을 가져오고,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을 향한 동정을 하게 하지요.

 

45 보세요! 이렇듯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감각적이거나 육체적인 사랑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갯짓이고 상징적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이로써 에로스 자신도 신적 존재가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르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56 이처럼 매우 독특한 신론에서 그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 안에 존재하며, 그에 의해 인도되는 피조물로서의 모든 인간은 당연히 그의 말과 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교리가 자연스레 파생된 것이지요. 그래야만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선하게 이루어져 그것을 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역하며 반드시 파멸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나 자기 파멸을 인간은 벌이라는 형태로 경험하게 되지요.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이렇나 주장의 부단한 반복입니다.

 

59 이렇듯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히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63    ……포이보스 아폴론이 그의 사제의 기도를 듣고

      마음속으로 노하여 활과 양쪽에 뚜껑이 닫힌 화살 통을

 어깨에 메고 올림포스 정상에서 달려 내려갔다. 그가

움직일 때 성난 그의 어깨 위에서는 화살들이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가 다가가는 모습은 마치 밤이 다가가는 것 같았다.

      그가 함선들에게 떨어진 곳에서 앉아 화살을 날려 보내자

      그의 은궁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일었다.

      그는 처음에 노새들과 날랜 개들을 공격했고

      다음에는 사람들을 향해 날카로운 화살들을 쏘아 댔다.

      그리하자 시신들을 태우는 수많은 장작더미가 쉼 없이 타올랐다.

 

2부 신은 존재다

 

75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해 오던 질문, 신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 째로 신이 어떤 식으로 있지 않은지, 둘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지, 셋째로는 신이 어떤 식으로 이름이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75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신은 있는 자또는 존재자체라는 것이지요. 그는 8세기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가 한 다음 말을 인용해서 자신의 뜻을 더욱 분명히 했습니다.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 이 명칭,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79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사랑스러운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다음 구절이 나오지요.

 

      나의 원수인 것은 다만 당신의 이름뿐:

      , 다른 이름이 되어 주세요.

      하지만 이름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여전히 향기로운 걸.

      로미오는 로미오로 불리지 않아도

      그가 지닌 고결함은 그대로인걸.

      , 로미오.

      그대의 이름을 버리고

      대신 내 모든 것을 가져가세요.

 

81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86 그럼에도 신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를 이름 지어 부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어렵게 알아낸 신의 이름이 야훼지요. 이제 곧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존재입니다. 그래서 만일 신에게 본질이 있어야 한다면 --- 따라서 신에게도 이름이 있어야 한다면 --- 그것은 오직 존재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가 신을 가리키는 그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 라고 말한 이유이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모든 피조물은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지만 신의 본질은 그의 존재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까닭입니다.

 

89 같은 말을 독일의 현대신학자 에버하르트 윙엘은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가 그에 관하여 말하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명칭 위에 머물러 있다라고, 보다 종교적으로 표현했지요. 또한 당신도 잘 아는 독일의 문호 괴테는 걸작 <파우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문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누가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겠소?

    누가 고백할 수 있겠소,

    나는 그를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느낀다고 해서

    누가 감히 발설할 수 있겠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만물을 포괄하는 자,

    만물을 보존하는 자,

    그는 당신을, 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괄하고 보존하고 있지 않소?”
92
히브리어 모세는 물에서 이끌어낸 이라는 뜻이에요(출애굽기 2:10). 이 아이가 자라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옵니다.

 

92~93 알고 보면 참으로 놀라운 뜻이 담긴 신의 대답은 그리스어로 된 최초의 구약성서 <70인 역>에서 나는 있는 자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탁월한 번역이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때 존재와 존재물이 혼동 될 수 있는 즉 존재가 곧 실체라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가 본의 아니게 스며들어 히브리어 표현의 근본적 의미를 변질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있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에흐예있는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93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가 곧 실체다. 예컨대 플라톤의 존재인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 형상은 개개의 사물들에게 그것을 그것이게끔하는 그것의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실체다. 그래서 플라톤.아리스트텔레스 이후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라는 개념에는 항상 본질이 붙어 다니며, 그 결과 본질과 존재가 함께 있는 존재물과 혼동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존재물과 같지만,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와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하지 않고 존재자체라고 구분해서 부른 것은 그런 이유다.

 

93 기독교 교리란 기독굘르 다른 이교도들의 사상과 내부 이단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를 구별하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교리는 그 발생부터가 이미 배타적이거나 방어적인 성격을 띤다. 이에 비해 기독교 사상이란 기독교 교리보다 폭넓은 의미로서 기독교적 삶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상과 다양한 주장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신학과 교리의 발생.인정.진행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94~95 요컨대 신은 이 말을 통해 자신이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임을 알린 것이지요. 따라서 에흐예 아세로 에흐예라는 신의 자기계시를 히브리 원어가 가진 의미에 좀 더 가깝게 번역하자면 나는 있는 자다가 아닌, ‘나는 있음이다여야 하고요, 설사 철학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나는 존재자다가 아니라 나는 존재다가 되어야 합니다.

 

95 성서에 여호화로 표기되는 야훼(YHWH)’’라는 네 철자 이름이 바로 에흐예 아세로 에흐예”, 이 문장과 관련됩니다. 모세에게 나는 존재다라고 밝힌 직후 신은 야훼가 자신의 영원한 이름이며 칭호”(출애굽기 3:15)라고 선포했지요. 구약학 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성서에 6823회나 쓰인 야훼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해석은 그는 있다’, ‘그는 존재한다또는 그는 현존한다입니다.

 

97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이며, ‘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면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복음 20:15)라고 했던 의심 많은 도마의 애달픈 고백을 보세요. 여기서 우리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보다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존재물을, 다시 말해 신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요. 기독교에서는 이 같은 우리의 성향을 죄성이라고 부르지만, , 우리는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간절히 내 손을 그 옆구리에넣어 보고 싶은가요! 당신은 그렇지 않나요?

 

99 신이 모세에게 자신을 밝힌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신이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창세기 3:19)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흐예 아세로 에흐예라는 신의 대답이 가진 진정한 의미예요!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101 하나님의 존재는 존재자체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다른 것들과 나란히 잇는, 또는 다른 것들의 위에 있는, 한 존재의 실존으로 이해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라면 하나님은 유한성 특히 공간과 실체의 범주에 속한다. 비록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거나 가장 힘 있는 존재라는 의미로 가장 높은 자라고 불린다고 해도 이 같은 상홍은 변하지 않는다.

 

106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그는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인식과 존재는 동일하다라고도 주장했지요.

 

이처럼 존재비존재그리고 진리거짓을 이분법적으로 날카롭게 구분한 일,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서양철학사에 남긴 공적입니다.

 

109 천국에서 단테를 인도하던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의 영혼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물과 불과 공기와 흙을 본다.

     그것들의 혼합물은 모두 썩어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들도 분명 신이 지으신 것,

     이 말들이 사실이라면

     그것들도 썩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하지만 아니랍니다. 들이시오. 천사와 그대가 있는 이곳,

     진실한 천국은 지금 있는 그 상태대로

 

     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었답니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말한 원소들과

     그 혼합물들은 신이 창조한 힘에 의해 불완전한 존재로 형성되었지요.

이 시구들은 영원불변한 천상의 세계와 썩어 오래가지 못하는 지상의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그 이유를 다분히 신플라톤주의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는 그 출처부터 다르며, 하나는 완전한 존재지만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110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서양문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하고 흥미롭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계승한 플라톤은 불변하는 실체인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고,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확장했지요.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 있습니다. 들어있음을 통해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은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받게 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까지 얻게 됩니다. 한마디로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부여하는 실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 책상으로 존재하고 그 이름이 책상인 것은 그 사물 안에 책상의 이데아가 들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112 단테는 <신곡>에서 이 같은 플라톤의 분여이론을 시인의 감성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했어요.

 

    이러한 수동적 밀랍과 이 밀랍에 형태를

    능동적으로 부여하는 작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데아의 각인을 받아 스스로 빛나는 정도에 차이가 있으니

    그 때문에 같은 종류의 나무들이라도

    더 좋거나 더 나쁘거나 하는 열매가 생기고

    같은 인간이지만 각기 다른 (선한)품성을 타고나지요.

 

그리스 철학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이 가진 이분법적 경직성과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가진 탁월함 덕분이었습니다.

 

114 신인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우주만물에 본질존재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끈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116 플라톤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 더 많은 이데아를 분유해서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안 변한다는 것, 더 완전하다는 것, 더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당연히 그에 대한 지식도 더 많은 진를 포함하게 됩니다. 즉 이미지 사물 수학적 대상 이데아의 순서로 올라갈수록 더 변함이 없고 완전하며 단일하지요. 따라서 이들 각각에 대한 지식도 예술 자연과학 수학 철학의 순서로 올라갈수록 더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128 탁월한 천재였지만 프랑스대혁명 이전에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는 이런 글도 있습니다.

조건의 불평등이 무질서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물이 동등하게 완벽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클로씨가, 왜 바위가 나뭇잎들로 장식되어 있지 않으며, 왜 개미가 공작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만일 평등이 어느 곳에서나 요구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 대해, 시종은 주인에 대해 평등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 할 것이다.

 

128~129 아마 당신은 조금 놀랄지 모르지만, 근대 계몽주의의 선구자로서 민주주의의 길을 닦은 장 자크 마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치기도 했던 그는 <에밀>에서 존재의 대연쇄를 근거로 이렇게 주장했지요. “, 인간이여! 그대의 존재를 그대 안에 한정시켜라. 그리하면 결코 더는 비참해지지 않으리라. 존재의 대연쇄에서 자연이 당신에게 할당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 그리하면 아무도 당신에게 그곳에서 떠나라고 강요하지 않으리라.”

 

132~133 그가 말하는 유출은 마치 빛이 발광체의 주위로 번지듯이, 뜨거운 물체가 주변으로 열을 퍼뜨리듯이, 향기가 그 주변으로 퍼져 나가듯이 매우 신비롭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태양이 빛을 발하지만 어두워지지 않고 샘물이 시냇물을 흘려보내지만 마르지 않은 것처럼 일자의 유출은 일자 자신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지요. 플로티노스는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고,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라고도 설명했습니다.

 

135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이 정신에서 영혼이 유출되는데요, 그 원리는 일자에서 정신이 유출될 때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 정신이 변함없이 그대로인 채 영혼이 유출되지요. 여기서 영혼이란 흔히 말하듯 불멸의 실체라기보다는 정신 안에 있는 형상이 현실화되어는 현실화의 원리이자 운동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영혼에 의해 무생물.식물.동물.인간 등등 모든 물질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136 물질세계를 생산해 낼 때, 영혼은 정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들이 물질 안에서 가시적 형태로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종의 촉매 작용입니다. 이를 플로티노스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따라서 만약 영혼이 어떤 행위가 아니고 합리적 원리라면 그것은 성찰이다.

 

137 그 선의 힘(성령)으로 자신의 빛(형상(이데아(idea))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 들에게 비추고 있소.

 

이 시구들은 <신곡>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만물을 청조하는가를 설명하는 내용 중 일부입니다.  아퀴나스가 말하는 성부, 성자, 성령이 플로티노스에게는 각각 일자, 정신, 영혼인데요,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자신의 빛(형상)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들에게 비추고 있소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에서 거울에 비추듯이라는 표현을 보세요. 그게바로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영혼의 성찰’, 곧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영혼의 작용입니다. 어때요? 멋진 비유 아닌가요?

 

144 보만에 의하면, 그리스 언어가 정지적인 데 반해 히브리언어는 역동적 성격을 갖고 있지요. 특히 동사가 그런데요, 히브리어는 동사는 항상 ‘~하다라는 뜻 외에 ‘~하게 되다’, ‘~하게 하다라는 역동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어요. 예컨대 노하다라는 동사에는 노하게 되다노하게 하다를 함께 뜻하지요.

 

144 히브리어로 존재를 의미하는 동사는 하야입니다. 당연히 이 말도 정지적 개념인 있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그 역동적 개념인 있게 되다또는 있게 하다라는 의미를 함께 지니지요. 특히 이 말이 신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경우에는 현존하다라는 의미뿐 아니라 생성하다작용하다라는 사역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146 한마디로 야훼라는 신의 이름과 h˚ay˚a는 구분될 수 없으며, h˚ay˚ad의 동적 의미가 곧 히브리인들이 이해한 존재의 속성이라는 말이지요. 이처럼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한 것인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실재입니다.

 

148 특히 인격은 끊임없는 생성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작용하는 존재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다이달로스의 미궁을 바져나갈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거기 들어 있거든요.

 

148 존재는 생성 작용할 때에만 존재일 수 있고, 불변하는 것은 변화할 때에만 불변할 수 있다니!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듯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한 걸까요?

 

150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시간화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적으로파악했지요.

 

150 당신도 아마 사진작가들이 카메라 앵글의 노출시간을 길게 해서 변화하는 대상을 촬영한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진들을 보면, 예를 들어 노출시간을 길게 해서 도시의 밤거리를 촬영한 야경 사진에는 달리는 자동차들의 후미등 불빛이 하나로 이어져 기다란 붉은 선으로 나타나지요. 또는 꿀을 따먹기 위해 허공의 한곳에 머물며 재빠르게 날갯짓하는 벌새의 모습을 노출시간을 길게 해서 촬영한 사진에서는 벌새의 빠른 날갯짓들이 하나로 이어져 마치 합죽선을 펼쳐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 같은 사진들이 바로 비록 일정 시간 안에서지만변화하는 대상을 탈시간화해서 불변(정지)하는 대상으로 보여 주는 것이지요.

 

151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불변하는 존재란 변화하는 존재의 시간 밖에서의 모습또는 탈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바로 그런 예이지요.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변화하는 존재란 불변하는 존재의 시간안에서의 모습또는 시간화된 모습일 뿐입니다. 예컨대 그들의 신 야훼가 바로 그렇지요.

 

152 a) 병든 사람이 나았다.

    b) 나은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c) 그러므로 병든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이 논증은 철수는 남자다. 남자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철수는 사람이다와 같은 바버라삼단논법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잇지요. 형식적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결론은 궤변이에요. 원인이 뭘까요? 그리스적 사유 형식을 대변하는 논리학에는 시간 개념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위의 논중을 다음과 같이 바꿔 보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요.

 

a)     t1에 병든 삶이 t2에 나았다.

b)    나은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c)     그러므로 t1에 병든 사람은 t2에 건강한 사람이다.

 

153 우리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종교가 만나 형성된 기독교와 그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서양문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재적소에서 그때마다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즉 그리스적 사유를 시간화하거나 히브리적 사유를 탈시간화하는 별도의 작업 –- 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되돌아갈까요?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153 근대 서구 지성인들이 활발한 토론을 벌이던 논제들 가운데 하나인 신은 영원히 안식하느냐 아니면 부단히 활동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하 기독교적 대답인 신은 영원히 안식하면서 부단히 활동하신다라는 말을 이해할 길이 없지요. 분명 모순되는 이 대답은 사실 이런 뜻입니다. 즉 신은 시간 밖에서는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

 

154~155 기독교 신학의 초석을 다진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도 <삼위일체론>에서 신의 속성을 설명할 때 그 이중적 논법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신은 성질이 없어 선하며, 양이 없어 크고, 결핍이 없어 창조적이며, 지위가 없어 통치자이며, 외관이 없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장소를 갖지 않아 어디든지 있고, 시간을 갖지 않아 영원하며, 변함이 없어 변화하게 하고, 아무 작용을 받지 않아 모든 작용을 한다.

 

156 내 생각에는 괴테가 남긴 아래의 글에도 영원불변하는 그리스적 존재 개념과 부단히 생성 작용하는 히브리적 존재 개념이 대립의 일치를 이룬 구절이 숨어 있어요. “영원한 것은 계속해서 모든 것 안에서 생기하네같은 구절이 그것인데요, 이는 영원한 것은 불변하고 불변하는 것은 생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존재도 무로 돌아갈 수는 없다네!

   영원한 것은 계속해서 모든 것 안에서 생기하네.

   존재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행복하게 하시길!

   존재는 영원하다네, 왜냐하면 그것은 법칙들이기에.

존재하는 소중함을 보존하시길,

그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는 법이기에.

 

157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사과)을 그것(사과)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158 중세신학자들이 이해한 존재자체라는 개념은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역동하는 존재지요. 명사라기 보다 동사에 가깝습니다. 예컨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로마서 11:30)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나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고 있으며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고 묘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유에도 이러한 역동적 시 개념이 들어 있지요.

 

165 안셀무스는 신이 모든 것을 "관통하며 포괄한다"라고 표현했는데, 내 생각에는 참 탁월한 묘사입니다..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이니까요. '관통하며 포괄한다'는 말은 물 위에 떠 있는 어떤 사물(예를 들어 축구공)을 물이 포용하듯이 밖에서 포괄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물 위에 뜬 물방울을 물이 포용하듯 안팎으로 침투해서 포괄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안셀무스는 "유지하고, 뛰어넘고, 감싸 안고, 관통한다"고도 묘사했어요. 요컨대 "최고 본질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 있고, 모든 것은 최고 본질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안에 있다"는 겁니다. 이런 사유를 바탕으로 그는 신이 모든 장소에 있다고 보기보다는 (모든 공간에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으로) 신이 '어디에나'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또한 신이 모든 시간 안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시간에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한다는 뜻으로)'항상' 있다고 표현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지요.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181 안셀무스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편 14:1;53:1)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기에 반박하기 위해 대강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습니다.

 

 a) 신은 정의상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다.

 b) 가장 완전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결핍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c) 만일 어떤 것이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한다면, 이는 실제적 존재가 결핍된 것이다.

 b)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

 

196 이 같은 페일리의 주장을 논증 형식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a)     시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어떤 지적 설계자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

b)    세계는 시계와 유사하다.

c)     그러므로 세계는 어떤 지적 설계자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 그 설계자가 신이다.

 

208 이미 살펴보았듯이 플라톤은 세상의 모든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비록 부분적으로나마들어 있어서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도록, 또한 그렇게 이름 불리도록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개별적 사물 안에 그러한 형상이 들어 있어서 사물들이 그렇게 존재한 것이라는 스승의 주장에는 반대하지 않았어요. 단지 그 형상이 이데아처럼 사물들에서 독립해서 세상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따로 존재한다는 말에 반대했습니다. 형상은 우리가 볼 수도 있고 만져볼 수도 잇는 감각적이고 개별적인 사물안에 들어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정신 안에도 개념으로 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 차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는 플라톤에 있어 형상을 뜻하는 이데아라는 말 대신 에이도스라는 용어를 별도로 사용했습니다.

 

210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겁니다. 위대한 두 거인의 이러한 학문적 취향이 그들 이후의 서양 학문을 크게 두 줄기로 갈라놓았지요.

 

210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론자들은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정신에는 선천적 인식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고만으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이직각인 것을 우리는 골방에서 종이와 연필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각도기를 갖고 온 세상의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이직각(180)인것을 우리는 골방에서 종이와 연필만 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각도기를 갖고 온 세상의 모든 삼각형을 재고 다니는 경험적 방법보다 더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선험적 인식 능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합리론자들은 플라톤의 후예들입니다

 

210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정신은 아무것도 씌지 않은 빈 서판과 같아서 그 안에 선천적 인식 능력이란 전혀 없고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경험론자들에게는 신에 대한 관념이 우리의 정신 안에 있다고 해서 감각적 경험 없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누구도 보지 못한 인어나 페가수스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우기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같이 경험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경험론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이지요.

 

214~215 , 보세요. 이 명제도 그렇지만, 그것의 모순명제인 세계의 원인인 하나의 필연적 존재가 없다역시 경험적 확증과 경험적 반증이 모두 불가능하지요. 따라서 이런 명제들은 둘 모두 내용없는 사고’, 가상이라는 겁니다. 칸트의 이런 비판은 어떤 논증에 논리적 결함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서, 논증만으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일체의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이성을 신학에 단지 사변적으로만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는 전혀 무익하며 내적 성질에 비추어 보아도 아

     주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이성의 자연적 사용의 원칙들은 신

     학에는 전혀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만약 사람들이 도덕법칙을 기초에

 두지 않거나 또는 실마리로 잡지 않는다면, 이성의 신학은 도무지 불가

능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해,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모든 종류의 논증이 부질없다는 이야기지요.

 

217 결코 칸트 자신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른바 진리의 땅에서 신에 관한 명제와 논증을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로내쫓아 버림으로써 근대신학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은 철학의 망령에서 벗어나 종교적 성격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217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 학문에서는 중세에 비해 경험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강조되어 진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지요. 현대논리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진리는 타당할뿐 아니라 건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20 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주된 태도가 사유였다면, 히브리인들의 태도는 경험이었지요. 신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신의 현존에 대하 지식을 갖는다는 건 논증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어요

 

221 실제로 우리가 종교를 갖는 궁극적 이유는 경험을 갖기 위해서지 종교적 이론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221 어떤 사람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성직자가 그를 발견했지요. 그리고 그에게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신이 그 사람을 태초부터 예정했으며 그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했고 지금도 사랑하여 늪에서 건져 주려고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자기를 보냈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러자 늪에 빠진 사내가 다급히 외쳤습니다. “이 사람아, 그건 상관없으니 어서 줄이나 던져라!”

 

그렇지요! 바로 이것이 삶이라는 늪에서 매 순간 운명과 죽음, 허무성과 무의미성,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을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종교에 대해 진정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딱딱한 신학이론이나 따분한 설교보다는 생생한 종교적 경험을 원합니다. 그러니 어서 줄이나 던져라!” 라고 외칠 수밖에 없지요. 나는 그런데, 당신은 어떤가요?

 

224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은 보통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물질적 세상을 잠시 잊게 함으로써 인식 전체를 채워 주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을 말하지요. 개인적으로는 환상, 마음의 소리, 괴이한 감정, 신비한 황홀경 속에서 초월적 대상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공적으로는 기적과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24 독일의 현대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성스러운 것>에서 이러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에 형용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를 뜻하는 라틴어 누멘을 변용해 누미뇌제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굉장한 신비로서, ‘전율과 외경을 불러일으키는 굉장함’, ‘압도적 권위와 위엄’, ‘절대타자로서의 신비등을 말하지요. 어때요? 혹시 당신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지요?

 

224~225 신비적 형태의 경험들은 대부분 매우 주관적이고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오토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섬뜩하고 무시무시한어떤 초월적 존재를 만났을 때 무서워 떨며” “말을 잃고, 신경 조직의 가장 말초에 이르기까지 내적으로 전율하게되지요. 영혼은 이 신비로운 경험에 대해 맹목적 경탄, 멍하게 만드는 놀라움, 절대적 경이로 반응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는 그것에 완전히 압도당해 자신의 모든 능력은 압도하는 힘과 비교할 때 무능함이고, 총체적 무이며, 장엄한 위엄 앞에서는 한갓 먼지와 재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지요. 그런데도 이 신비로운 경험은 강력한 매력을 갖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느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지복을 주는 무엇으로 경험되기 때문이지요 이와 연관해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226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주님, 곧 존재자체에 관한 어떤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는 평생 열정을 쏟아 왔고 수많은 사람을 경탄케 했던 저술인 <신학대전>이 한갓 지푸라기처럼 또는 오토가 말하는 먼지와 재처럼 값어치 없게 느껴졌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현상, 다시 말해 한 인간의 판단 기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것이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입니다.

 

228 이처럼 하나의 패러다임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경험은 서로 엉켜 있어서 패러다임이 다르면 경험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쿤은 흔히 오리-토끼 그림이라고 불리는 자스트로 도형을 예로 들어 패러다임과 과학 지식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오리로도, 토끼로도 보이는 이 그림은 우리가 무엇을 보는 (또는 경험하는)이 아니라 무엇을 무엇으로 본다(또는 경험한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족의 해석인 것입니다.

 

229 이처럼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주만물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들 모두가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참여와 인도를 표상하는 증거들인 동시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의심할 수 없는 논거들인 것입니다.

 

230 만일 당신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될 겁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내가 명확히 아는데 그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232 우리는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되는 사건들을 통해 신비적 형태의 종교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헌 경험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의미의 중심점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쿤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235 파스칼이 그의 미완성 대작 <팡세>에 남긴 다음과 같은 말로 이번 이야기를 정리하며, 당신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이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 안에 있나?

 

246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기원전 19)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칭찬을 받지 못할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않는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복잡하고도 미묘한 인간의 감정을 간결하고 무게 있게 표현한 문장들을 철저히 외우는 교육을 받은 이 소년은 나중에 청중에게 눈물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느 구어체 언어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영탄했듯이 통이 채워진 첫 번째 포도주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통에서 그 향기를 풍기는 법이니까요.

 

248 마니교의 중심 사상은 영혼과 물질, 선과 악, 빛의 왕국과 어둠의 왕국이 대등한 원리이자 존재론적 실체로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는 철저한 이원론입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인간이란, 당연히 영혼이라는 빛이 육체라는 어둠에 갇힌 이중적 존재일 수밖에 없지요.

 

249 자신의 내면에서 들끓던 탐욕과 정욕의 문제로 고심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도처럼 어둠의 왕국과악의 세력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 내면과 세상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악에 대한, 더 타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후 9년이나 마니교에 머물렀지요.

 

255 주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종교적 테마로 시를 썼던 영국의 현대시인 클리포드 다이먼트(1974~1970)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당시 가졌으리라 짐작되는 심적 갈등을 시로 남겼습니다. 제목이 흥미로운데요, <32세의 성 어거스틴>입니다.

 

    소녀여, 왜 나를 따라오는가.

    성스러운 곳의 문 앞에 내가 이르렀으나,

    내 결심이 흔들리고, 들어가기 주저되니

    돌아서서 네 얼굴을 들여다 본다.

 

    나는 말이 아닌 웅변을 열망하고

    돌의 입맞춤 속에 충만을 찾는다. 너는,

    붉은 입술과 금빛 머리로 내게로 온다. 그리고,

    네 발밑엔 바람에 불려온 낙엽이 하나.

 

257 손에 잡히는 대로 성서를 펼쳐 읽은 것이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였지요. 이윽고 회심한 그는 386년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나이 서른 둘이었지요.

 

259 아우구스티누스의 서간집 <편지>에는 이때 참석한 동료 중 한 사람이 그 열정적이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슨 다음 시가 들어 있습니다.

 

       새벽이 마차를 타고, 행복이라는

       과거의 바퀴를 내게로 다시 굴려 올 수 있을까,

       우리가 알프스 산맥의 그림자 아래

       지혜로운 은둔을 계속하던 그때를.

      서리가 내려도 굳건히 박힌

      내 발을 뒤로 물러나게 하지 못했고,

      태풍도 바람도 앞으로 계속될  

      우정을 물리치지 못하리.

 

261 “화이트헤드 교수의 말처럼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듯 서구의 기독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각주라고 말할 수 있다

 

264~265 그는 먼저 자신이 진실로 불경건하고 이교도적이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현재가 어떤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준비되었는가를 독자들에게 알립니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때까지 경험한 크고 작은 성서나 기독교 교리로 투사해서 하나하나 해석하고는 사건들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지요.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명백합니다. 인간의 삶이란자신의 삶이 그랬듯이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 주기 위해서였지요.

 

266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의 서두에서 오 주여, 나에게 지식과 깨달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단테도 <신곡>의 서두에서 자기를 인도하려는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에게 오 시인이시여, 당신이 생전에 모르셨던/ 하느님의 이름을 간청하나니 / 이 재앙과 더 큰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방금 말씀하신 곳으로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간구하면서 작품을 시작하지요.

 

267 이처럼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단순히 그들의 사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신앙 체험을 기술하는 고백문학이 아니라, “영원의 섭리를 내가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옮음을 밝힐 수 있도록진리를 밝히는 증언으로 삼았지요.

 

268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살밍 증명하듯이,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우주의 역사 또한 어떤 우연이나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도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것이지요.

 

268~269 14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이끈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고백록>을 읽고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순례기가 아닌, 나 자신의 영적 순례기를 읽는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위대한 후계자이자 경쟁자이기도 한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지적 탁월성과 영적 경건함을 타고난 사람이 결코 아니었어요. 마치 우리들이 그렇듯이 그의 영혼도 본디 칠흑처럼 깜깜했고, 그 안에서는 세속적 욕망이 용광로처럼 들끓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그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269 <황무지>로 잘 알려진 영국 토머스 엘리엇(1888~1965) <목마른 구조>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했지만 그 의미는 놓쳤다

       그러나 그 의미에의 접근은

       경험을 회복시킨다.

       하지만 다른 형태로.

 

아우쿠스티누의 <고백록>이 바로 이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 미국의 영문학자 로이 배튼하우스의 생각이지요. 옳은 말 같습니다. 우리는 <고백록>을 읽으면서 우리가 삶에서 경험했지만 놓쳐 버린 숱한 의미를 새롭게 회복시킬 수 있지요. 물론 그 일은 다른 형태로 이뤄지지만 말입니다. 창조에 관한 이야기 역시 그렇지요.

 

270  세상에게 물어보라, 하늘의 아름다움, 별들의 빛남과 질서,

     낮의 태양과 달, 밤에 내리는 서리를 가진 세상에게!

     땅에게 물어보라, 나무들과 식물들을 풍요롭게 하는,

     온갖 동물이 서식하여, 인간을 위해 가꾸어지고, 마련된 땅에게!

     바다에게 물어보라, 자기 안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로 충만해진 바다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나서 보라, 저마다의 것이 자신의 종류에 따라

     자신의 감관을 통해 너에게 대답하고 있지 않은가:

     신이 우리를 만드셨다.” 드높이 숙고한 철인들이 이것을 물었고,

     그들은 세계라는 예술품으로부터 신적인 예술가를 인식했다.

 

이 그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술품 같은 자연으로부터 예술가적 창조주를 발견하고 감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1 그들 중 한 사람인 괴테는 다음과 같이 읊었지요.

  

      번개나 천둥, 그리고 폭풍 속에서

      장엄한 힘으로 압도해 오는 존재를,

      만발한 꽃의 향기와 온화한 바람의 산들거림 속에서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존재를

      우리가 느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왜 안되겠습니까? , 이제부터 함께 느껴 보시죠!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275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 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창조 이전에는 사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276 요컨대 신은 시간 밖에서는 안식하고 시간 안에서는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287 쿠르트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가 대변하듯이 자기 자신을 정초하는 수학 이론은 존재할 수 없지만 신은 개념상 스스로 자신을 정초함으로써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존재입니다. 다라서 당신들이 모르는 그 궁극적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는 신학자들의 대답을 영원히 몰아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297 다이슨은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지요.

 

   우리가 우주에서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옳지만,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덮어 두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우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우주에 대해 조사하고 그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현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299 기독교 신학에서 신이 세계 이전, 곧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 창조했다는 말은 일단 신은 시간이나 공간 그 어느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 독립성을 가진 세계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303 비트켄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습니다.

 

303 그래서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양식, 곧 문법은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 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을 제공하지요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그 결과 이미 사용 가능한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보곧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진보를 선물합니다. 요컨대 루벤스가 살던 시대의 풍습, 제도, 역사, 문화에 대한 이해가 미인에 대한 개념을 바꾸고 확장시켜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307 이는 마치 우리가 자신이 속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 즉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양식 를 포기하지 않고도, 다른 나라의 언어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하나의 삶의 양식을 갖고 사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자신의 언어놀이에 속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언어놀이의 문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앞서 제시한 예들에서 보았듯이 이해의 진보를 가져와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오히려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309 당신에게는 오른편에 붙은 것처럼 보이는 그 손잡이가 맞은편 사람에게는 왼편에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이때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상대의 주장과 그 주장이 나온 상대의 발화 환경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찻잔의 손잡이는 오른쪽도 왼쪽도 아닌 어느 한쪽에 붙어 있다라는 합의 내지 일치가 가능하든 말든 하지 않겠습니까?

 

313 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진리라는 생각,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기인한 만행에 불과 합니다. 그것은 학문을 하는 태도가 아니며, 리오타르의 표현대로 상이한 질서의 축첩 관계를 맺으려는 행위이고, 해묵은 전체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며, 자칫 서로가 망하는 제로섬 게임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경거망동이지요. 누구든 진리에 다가가고자 한다면 그 같은 생각과 오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근대라는 폭력적 역사를 통해 이미 배웠습니다.

 

319 주님의 연대는 불과 한 날이며 주님의 날은 되풀이되지 않고 언제나 오늘이옵니다. 주님의 오늘은 내일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어제를 뒤좇지 않나이다. 주님의 오늘은 영원하옵니다.

 

영원에느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322 일찍이 플라톤은 자신의 우주론을 펼친 <티마이오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있었다거나 있다그리고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존재에는 있다만이 참된 표현으로서 적합하지요. ‘있었다있을 것이다는 시간 안에서 변화하며 생성 . 소멸하는 존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325 플라톤에 의하면 시간은 영원한 모상입니다. 모상이란 본떠서 만든 모형이라는 뜻인데요,

개개의 사물(:사과)이 이데아 (:사과의 이데아)의 모상이라는 것과 같은 논리지요.

 

327 영원은 신에게 속하는 동시에 값어치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인간에게 속하는 동시에 세속적이

고 부질없는 것이지요.

 

330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하나

는 한결같이 머무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둘 다 마음의 삶이라는 점에 같지요 그

래서 인간의 마음은 부단히 신을 닮으려 하고,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도록 하는데요,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

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그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에

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는 것이지요.

 

331 일자, 곧 신에게로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함! 바로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발견한 영원한 삶을

얻는 구원의 방법이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종교적 언어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

셨나이다라고 고백한 의도이며, 우리 삶에 주어진 시간의 궁극적 의미이고 가치이지요!

 

333 우리의 서글픈 경험이 말해 주듯이 이러한 물리적 시간은 우리 삶이 가진 모든 것, 즉 육체

와 정신 그리고 삶 자체까지 점차 파괴합니다. 그 누구도 이를 피해 가지 못하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시간을 크로노스라고도 부르는데요,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자기 자식을 낳는대

로 잡아먹는 끔찍한 신이지요. 크로노스 안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삶은 단지 흘러가고 마는 것,

래서 값어치 없는 것,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베르길루우스가 시간은 모든 것을

가져간다. 심지어 마음까지도라고 한탄했고, 셰익스피어가 너는 모든 것을 낳고, 또한 모든 존재

하는 것을 소멸시킨다라고 불평한 것처럼 말이지요. 알고 보면 바로 여기에 우리의 불안과 절망,

모든 허무주의가 발을 딛고 있는 겁니다.

 

339 앞에서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루크리스의 겁탈>에는 물리적 시간을 사는 세속적 사람

들이 새겨들을 만한 다음 구절이 담겨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은들 소득이 무엇이랴

          그것은 꿈이요, 한순간의 입김이다.

          덧없는 쾌락의 거품일 뿐.

          누가 일주일의 고통을 주고 한순간의 환락을 사랴.

          장난감 하나를 얻고자 영원을 팔아?

          달콤한 포도 한 알을 얻기 위하여

          덩굴을 모두 망칠 자가 누구랴.

          어떤 어리석은 거지가

          당장 왕홀에 맞아 죽을 텐데 왕관을 만지겠는가?

 

345 이 직선을 에서 보면, 당연히 선으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점으로

보일 겁니다. 물론 비유지만, 시간 안에서 사는 우리는 의 위치에서 시간을 보는 것이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신은 @에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시간은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으로 보이고 신에게는 시작과 종말이 고정된 영원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매순간 인식되지만, 신에게는 그 모든 일이 단번에

파악되지요.

 

346 시간이 경과하는 전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신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영원 속에서

확실하게 인식한다. 그의 영원성은 현존하는 방식으로 시간의 전체적 경과에 관계되고 이것을 초

월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높은 망대 위에 위치한 어떤 사람이 여행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처음

부터 끝까지 전체를 동시에 직관하듯 신이 자신의 영원성에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는 것을 안

.

 

351 토마스 아퀴나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이 거처하는 하늘은 시공과 그것을 지배하는 모든

물리적 법칙을 벗어난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소망들을 허용할 수 잇는 신의 전지전능

성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67 신은 그가 창조하지 않은 질료, 즉 마니교에서 말하는 악하고 추한 질료로부터 물질을 창조

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피조물은 선한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라서 물질도 선하고 아름다우며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와 세계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 한마

디로 창조는 그 근거와 결과가 모두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었지요.

 

372 그럼에도, 신이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무로부터 창조된 인간과 세계 역시 비록 불온전하지만 선하고 아름다우며, 그 어떤 악마적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예나 지금이나 귀하고 복됩니다. 인간은 기근, 전쟁, 질병 외에도 운명, 불안, 죽음, 허무, 무의미성, 죄책 같은 악마적인 것들에 속절없이 노출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엾은 인간적 상황에서 신과 세계의 선함은 언제나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던져주지요.

 

380 사실 요한이 예수가 신의 아들인 줄 이미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신이 그에게, 어떤 사람의 머리 위에 성령이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사람임을 알라고 했을 뿐이지요.

 

388 여기서 당신이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할 게 있습니다. 말로 천지를 창조한 신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행동이 함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라고 기록된 성육신에 담긴 또 하나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요컨대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모르면 신앙심만 아니라 실천까지 요구하는 기독교는 물론, 이념 못지않게 행동도 중요시하는 서양 문명을 크게 오해하게 됩니다.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400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는 것이며, 따라서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요컨대 유한한 존재물을 생성시키는 원인은 무한한 존재의 자기초월적 풍요성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410 <자연의 전당>에는 생명의 기원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지요.

 

     다음에는 작은 바늘과 글루텐의 실이 생겨나

     끈과 끈을 묶고 직포와 직포를 엮는다.

     그리고 빠른 수축이, 에테르의 불꽃으로

     실로 짜인 것에 생명의 불을 붙인다.

 

     이렇듯 부모도 없이 탄생하여

     생명 없는 땅에 첫 흔적이 생기고

     자연의 자궁의 헤엄치는 작은 손발과 나뭇가지,

     초목에는 싹이 나고 벌레는 숨을 쉰다.

     생명의 시네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탄생해서 진화했다.

 

414 그래서 토머스 헉슬리가 진화론에 관한 다윈의 논의를 처음 접했을 때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걸 생각 못한 내가 얼마나 멍청한가!”라고 한탄했다고도 하지요. 이 이론을 한 문장으로 간략하면 이렇습니다: 자연은 동식물은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이 일어난다. 이것입니다.

 

418 그런데도 이 이론과 함께 자유평등박애라는 구호 아래 지상천국을 꿈꾸던 프랑스대혁명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인간사회 역시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원시적 공간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424 19세기 후반은 유럽만이 아니라 북미 대륙에서도 사회다윈주의가 그 위세를 맹렬히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서양 문명 전반에 걸쳐 개인주의자들은 무자비한 방임을, 자유주의자들은 무제한경쟁을 요구했고, 우생학자들은 동족 내의 신체적정신적경제적 약자들의 합법적 제거를 부르짖었으며, 인종주의자들은 자국 내의 열등한 인종이나 외국인 추방을 외쳤고,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대륙을 미개지로 몰아 계몽 또는 선교라는 미명 아래 정복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사회다윈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지요.

 

427 일찍이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교훈했듯이 나쁜 선택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는 법이지요.

 

428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의 본질이 무사유라고 설파했지요. 무사유는 일반적으로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하지만, 그녀는 이 단어를 보다 실천적 의미로—‘자신이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또는 거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사회다윈주의자들이 바로 그렇게 행동했고, 아렌트가 경악했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그 역사적 귀결이었지요.

 

431 이 작업을 실제로 시행한 것은 다윈의 진화론을 자신의 사상 근저에 받아들여 다윈의 아들이라고도 부리는 프리드리히 니체였지요.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진화한 그 새로운 인간이 바로 초인이지요. 이 일을 수행하면서 니체는 인간에 대해 다윈보다 훨씬 낮은 평가를 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도덕적 진화의 필수불가결성을 극대화했습니다.

 

43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서 그대는 무엇을 하였는가?

    원래 만물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극하여 그 무엇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위대한 밀물이 다시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인간을 초극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인간에게 저 원숭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다만 웃음거리일뿐, 아니면 비참한 굴욕?

    초인에게 인간은 이같이 웃음거리가 아니면 비참한 굴욕일 뿐이다.

    그대들은 구더기에서 인간으로의 길을 걸어왔도다.

    그러나 그대들 속에는 아직도 많은 것이 구더기로 남아 있구나.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도 어떤 원숭이보다 더한 원숭이인 것이다.

 

443 호트에 의하면, 진화가 창조의 메커니즘 가운데 일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우주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자기조직을 하느 본유적 경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51 아퀴나스는 모든 운동은 기능태를 현실태로 바꾸는 현실화이며 영혼이 생물에 내재하는 이 현실화의 원리를 성취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자신의 신학에 끌어들여 창조를 이해했지요. 그 결과 그는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세계를 숱한 인과관계 속에서 순차적으로 가능태를 현실태로 변화시키는 원리, 곧 아리스토텔레스 말한 운동의 네 가지 원인 중 하나인 능동인들과 함께 창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452 토마스 아퀴나스는 능동인을 본래적 원인우연적 원인’, 또는 1원인2원인으로 나누었지요. 그리고 신은 모든 변화와 운동의 1원인으로서 복잡한 인과관계 속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창조를 하는데, 어떤 것은 직접 창조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자신이 창조한 원리, 곧 제2원인에 위임해서 작용하게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이어 갔지요.

 

    만일 제1원인이 필연적이고, 2원인이 우연적이라고 한다면 이 원인이 우연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말하자면 하위의 물체적 사물들에서 생성의 제1원인은 천체의 운동이고 이 운동은 필연적으로 일어날지라도, 저 하위의 생성과 소멸은 우연적이다.

 

461 20세기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전체 기독교 신학의 탐구는 인간의 문명처럼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며, 항구가 아니라 항해라고 비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요.

 

467 “하나님이 예지로 그대의 장래 행복에 관하여 오늘 확실히 아신다고 해서, 장차 그대가 행복해지기 시작할 때 행복해지려는 의지를 그대에게서 빼앗지는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대의 의지가 장차 범죄를 저지르리라고 예지하신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 범죄가 자유의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충하지 않고 양립한다는 말로,

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에보디우스의 연언전제를 논파함으로써 딜레마를

물리칩니다.

 

467 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같은 주장을 양립주의라고 규정합니다. 양립주의란 인간이 자유의지가 신의 예지와 상충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의 주장들을 말하지요.

 

479 한마디로 필연과 우연은 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니, 신의 뜻이 곧 운명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설령 인간이 진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함께 담겨 있지요!

 

484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구원입니다. 존재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또는 아름다움자체인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지요. 바로 이것이 <고백록>전체를 꿰뚫는 주제이며, 우리가 이 장의 서두에서 던진 왜 아우구스티누스는 엉뚱하게도 <고백록>의 말미에 자서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창조에 관한 신학을 덧붙였는가?”하는 질문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나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493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피바람을 몰고 왔던 폭풍은 일단 지나간 다음 이었지요. 네로 황제의 관용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황제를 암살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었기 때문이지요. 65 4월이었습니다. 주동자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이름을 따서 피소의 음모 사건이라고 명명된 이 반역은 가담자 가운데 한 사람인 원로원의원 스카이비누스의 사소한 불찰로 탄로가 났습니다. 큰 방죽도 개미 구멍에 무너지는 법이지요.

 

498 영국의 시인 월터 새비지 랜더의 시 가운데 세네카의 죽음에 썩 어울리는 작품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소개하고 싶은데요. <죽음을 앞둔 어는 늙은 철학자의 말>이라는 시입니다.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이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세네카에게 죽음은 로고스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503 “운명이 우리를 인도하며 각자의 수명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오. 또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물의 영속적 질서가 개체와 전체를 모두 지배한다오. 만사는 우리 생각처럼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용감하게 참고 견뎌야 하오. 무엇이 그대를 기쁘게 하고 무엇이 그대를 울게 할지가 이미 오래전에 정해졌으며, 개개인의 인생이 서로 아주 달라 보여도 결과는 마찬가지라오. 우리가 받은 것은 무엇이든 사라질 것이며 우리 자신도 사라진다는 것이요. 그런데 왜 우리가 분개하며 무엇 때문에 불평해야 하는 거요?”

 

   세네카는 이렇듯 섭리를 필연적인 것, 즉 운명으로 생각했는데요, 이는 스토아 철학의 전통이

도 했습니다. 섭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불평할 수 있는

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신의 뜻이지요.

 

507 세네카는 평소 친구들에게 죽음이라는, 이른바 영혼이 육신에서 떨어져 나가는 그 시간 자체가 너무 짧아서 그 과정을 느낄 수 없다.”라고 가르쳤지요.

 

517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세네카의 섭리와 바울의 섭리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은 각각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는 차이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세네카의 신은 비인격적이고 바울의 신은 인격적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뒤에서 세네카의 신과 바울의 신을 각각 아테네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으로 이름 지어 자세히 알아볼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신의 인격성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523 1545년 발표한 <자유사상가들에 대한 논박>이라는 논문에서 칼빈은 신의 섭리를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일반섭리인 자연의 질서인데, 신은 모든 행위의 가장 우선적

    직접적 목적을 남겨 둔 채 자신이 창조할 때 부과한 법칙들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역사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미 3 <신은 창조주다>에서 바로 이것이 진화론을 창조론 안에 수용할 수 있게 하는 원리임을 확인했습니다. 둘째는 특별섭리로서, 신은 자신의 종을 돕고 악인을 응징하며 신실한 성도의 인내를 시험하거나 벌을 내려 공의의 심판을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내적 작용으로서, 신은 성령을 통해 그가 선택한 자들을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지요.

 

523 스토아 철학적 섭리는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도덕법칙으로 작용할 뿐, 우리를 돕고 응징하며 인도하고 심판하며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525 다시 말해 내가 나의 큰 목적을 아직 알지 못한 채 은거하며 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은 여러 가지 전환과 변화를 통해 나를 거기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타고난 성품에도 불구하고 내가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까지 내가 어떤 장소에 은둔하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으셨다.

 

  칼빈은 자신이 종교개혁에 뛰어든 것 역시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지요.

 

528 그들이 운명이라 했든 예정이라 했든 아니면 섭리라고 했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신의 세계 내재성또는 인격성이라고 부릅니다.

 

528 신의 인격성은 종교로서 기독교를 이루는 근간이자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우리는 신의 인격적 속성을 통해서만 신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데 – 2 <신은 존재다>에서 살펴보았듯이 신에 관한 직접적 경험 없이는, 비록 신을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종교적으로 신앙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철학자의 신과 종교인의 신, 아테네의 신과 예루살렘의 신이 판이하게 갈라서는 분기점이지요.

 

531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한 스승 플라톤이 한 권도 쓰지 않은 윤리학 책을 세 권이나 썼습니다. ‘인간 이성에 의한 인간구원의 길을 닦기 시작한 것이지요. 질송은 이 정황을 적절하고도 날카롭게 평가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그리스인들은 다툴 여지도 없이 이성적 신학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상실해 버렸다.

 

533 마치 시계공이 완벽하게 설계해서 만든 시계가 일단 작동하면 그것을 만든 시계공의 개입 없이도 정해진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신론자들의 세계는 신의 참여 없이도 충분히 조화롭게 작동합니다. 따라서 신의 개입에 의한 기적 같은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기도 하지요. 예컨대 홍해를 가른다든지, 까마귀가 음식을 나르게 한다든지, 사자의 입을 봉하는 일을, 신은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않습니다. 동정녀가 아이를 낳게 한다든지, 죽은 자를 살린다든지 하는 짓궂은 일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543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왜냐고요? 일찍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라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549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예수는 우리 아버지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모두 사용했지만, 고대 기독교 사회에서는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피하고 주로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이지요. 그것은 기독교 교회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공동체성의 강조가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었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그것이 점차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556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그 섧리는 모든 것에 미친다 라고 반복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 존재하면서 유지하며 초월하고 포괄하며 관통하는존재적 원리를, 구약성서에서 야훼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라는 단 한마디 약속으로 계시했습니다. ‘함께하리라가 바로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나타내는 탁월한 성서적 존재론적 표현이지요.

 

560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간구 또는 중보 기도에 당연이 신이 응답해 준다고 믿습니다. 그 누구보다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 낼 것이요 문들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은 7:6)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태복음 21:22),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16) 같은 교훈이 특히 그렇지요.

 

566 기독교인들은 단지 그들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는 반항하고 싸우는 가운데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신의 섭리를 자신의 삶 안에서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부단히 느끼는 것이겠지요. 마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수도사 생활의 서>에 묘사된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대 가장 온화한 법칙이시여.

     당신의 법칙과 싸우는 가운데 우리는 성숙하였습니다.

     억누를 수 없는 위대한 향수 이신 당신이여,

     우리가 끝내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대 숲이시여,

     도망가는 감정을 붙잡는

     그대 어두운 그물이시여

 

  그러나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가장 극적인 자기희생과 헌신을 우리는 예수에게서 찾을 수

있지요.

 

567 <황무지>자가가 토머스 엘리엇의 종교시 <네 개의 사중주>가운데 4부인 <리틀 기딩>에는 바로 이 같은 관점에서 기도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읊은, 다음 시구가 있습니다.

 

     그대는 지각과 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대가 이곳에 온 것은 실증하기 위함도 아니고,

     리포트를 작성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대는 기도하러 온 것이다

     ….

     (모든 것을 바친)

     하나의 완전히 순백한 상태.

     모든 것은 잘될 것이다.

     가지가지 모든 것은 잘될 것이다.

     화염의 혀들이 한데 겹쳐져서

     영광의 불 매듭이 되고

     불고 장미가 하나로 될 때.

 

시인은 뭐라고 고백하고 있나요?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즉 감각적 지각도 이성적 관념도 다 버리고 완전히 순백의 상태에서 기도할 때, 온 영혼을 불살라 기도할 때, 그제야 모든 것이 신의 섭리에 의해 잘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575 어차피 그렇게 섭리대로만 이끌어 갈 것 같으면 기도는 왜 하라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바울은 심지어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고까지 교훈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이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을 요약하면, 신의 강제적 설비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유익하다는 것이지요. 왜나고요?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원하던 응답을 받으면 받은 대로, 또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한 대로 그 결과를, 자신을 향한 신의 섭리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76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는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바로 이것이 관건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사람은 마치 욥이나 하박국 그리고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나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빌립보서 4:11~12)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의미에서 보면 신실한 기독교인이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란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향한 신의 의지를 드러내도록 하며 자족하게 하지요.

 

577 또한 칼빈도 기도의 옳고 유일한 목표는 신의 약속이 우리에게 효력 있게 된다는 한 가지 일에 있다라고 압축했지요. “하지만 그건 자족이 아니라 일종의 체념이 아닌가?”라고 당신은 반박할 수 잇습니다. 그래요, 그건 분명 체념입니다! 그것도 무한한 자기체념이지요. 알고 보면 신을 믿고 그이 섭리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디 극단적 자기체념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교훈했지요.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내세운다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가라.”

 

580 첫 번째는 <심미적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인생을 즐겨라를 신조로 삼아 돈 후안이나 네로 황제처럼 원초적 감각적 쾌락과 욕망에 종속되지요. 사람은 누구나 이 단계에서 생을 시작하기 때문에 자연적 인간은 모두 심미적 단계에 처하게 마련입니다. 심미적 단계의 인간은 순간에서 순간으로또한 향락에서 향락으로”, 그것이 육체적이든 아니면 지적이든 가리지 않고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서 여기저기를 쫓아다니지요.

 

583 인간을 다음 단계로 상승시켜 <윤리적 단계>에 이르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비로서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 아래 처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가 아니라 이것이나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지요. 한마디로 뉘우침이 인간을 천장이 과히 높지 않는 지하방으로부터 해방시켜 윤리라는 햇볕아래 서게 한다는 말인데요, 케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여기에서 뉘우침으 그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뉘우침이 나를 고립시키지만, 나의 인생이란 시간 속에서 무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면에서는 뉘우침이 나를 전 인류와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과거를 뉘우칠 수 없다고 한다면 자유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586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자기’, 곧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이 꽉 붙들 수 있는 한 점은 개별적인 자기가 아니고 보편적인 자기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이는 <윤리적 단계>의 목표가 인간의 삶이 이성에 의해 보편적인 것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591 <윤리적 단계>에서 일어나는 뉘우침은 내면에서 울리는 이성의 소리에 따르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뉘우침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탓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죄의식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오는 절망은 <심미적 단계>에서 겪는 절망보다 더 처절하고 깊을 수밖에 없지요. 종전의 절망은 외부적인 것, 순간적인 것 또는 쾌락적인 것에 대한 약함에서 오는 절망이지만, 이제부터의 절망은 내면적인 것, 영원한 것 또는 이성적인 것에 대한 약함에서 오는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601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세기 22:8)

어린 아들은 이 말을 이해했을까요? 또 늙은 아비는 자신이 한 말을 이해했을까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듭니다. 자신조차 도무지 알지 못하는 말을 마치고 아브라함은 산을 향해 초인적인 발걸음을 다시 내디뎠지요. 그럼으로써 그는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들어갔던 겁니다. 이 말을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표현했지요. “아브라함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의 정점에 서있다.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최후의 단계는 무한한 체념이다. 그는 거기서 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에 이르렀다.”

 

610 기도로 신의 섭리르 깨닫고 자기체념으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욥이나 하박국이나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자족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키르케고르가 역설한 구원, 곧 자신마저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을 신이 용납하는 구원을 경험하게 되지요. 이러한 구원을 위해 기독교인들은 신에게 기도하는 겁니다. 아니, 우리의 이야기에 맞춰 좀 바꿔 말할까요? 이러한 체념, 이러한 자족, 이렇나 지혜, 이렇나 구원을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지요..

 

610~611 이번 이야기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서의 <기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나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그러나 당신에게는 절망하지 말게 하소서.

    혼미한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소서.

    모든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부끄러움과 욕됨을 맛보게 하시고

    내가 나 자신을 가누는 것을 돕지 마옵시며

    내가 뻗어나가는 것을 보살피지 마옵소서.

    그러나 나의 모든 자아가 파괴되었을 때는

    당신이 그것을 파괴하셨고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으신 사실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왜냐하면 나는 기꺼이 멸망하고

    또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만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5부 신은 유일자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618 플로티노슨 시냇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소년처럼 명상 속에서 흘러간 시간들을 하나씩 마음에 모았습니다. 그는 항상 마음이 시간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시간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태양의 회전 운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 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은 마음 안에 있고 마음과 하나지요. 그러므로 항상 흘러가는 것 같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언제나 아직은 오지 않은 것 같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지요.

죽음도 역시 다르지 않거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며 기쁘게 맞지 못하랴!”

 

627 만물의 궁극적 근거는 오직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지요. 둘만 되어도 그 둘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이 다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638 “플라톤 철학의 최고점은 신학이며” “그 둘은 하나다라는 평을 들을 만큼 플라톤은 수 많은종교적 교설의 근간이 되는 이론을 설파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신비주의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지요. 그것이 기하학을 모르는 자, 여기 들어오지 말라!”라고 말하던 플라톤의 철학적 기준이었고 그를 종교인이 아니라 철학자로 남게 하는 버팀목이었지요. 이에 관해 질송은 플라톤은 신비주의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라고 적절한 비유를 들어 평가 했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열어 놓은 그 신비의 문으로 성큼 들어선 사람이 플로티노스였지요.

 

647 한마디로 예수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태복음 28:19)라고 교훈했습니다. 사실상 이것이 신약성서에 기록된 삼위일체 신에 관한 명시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결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알게 모르게 세 분 하나님을 모셔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구약성서의 신이 자신을 유일자로 계시했다는 점 이었습니다.

 

654 당시 팀가드라고 불리던 도시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사냥, 목욕, 연극과 웃음: , 이것이나 나의 삶이로구나!”라는 호사스런 문구가 새겨 있었습니다.

 

659 삼위일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성부성자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사고의지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663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므로 육체가 파괴될 때 비로소 영혼도 해방된다는 당시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적 가르침을 굳게 믿었던 것이었지요. 그러자 순교에 대한 소망이 소년소녀들에게도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 확산되었습니다.

 

664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와 학문에 매진했고, 성욕을 잠재우려고 밤에는 맨바닥에서 잤지요. 그래서 그에게는 강철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다만티우스라는 말까지 따라 다녔습니다.

 

672 오리게네스 이후 서양문명 안에서는 일자 정신 영혼이 성부 성자 성령과 각각 짝을 맞춰 일치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혼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676 오리게네스 자신은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동일하면서 또 어떻게 종속적인가를 설명하기보다는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했어요. 그는 상황에 따라 알맞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피조물들에게 성부는 존재를, 성자는 합리성을, 성령은 성결함을 부여한다라는 식으로 삼위일체를 교훈했습니다. 이 말은 후에 동방과 서방을 막론하고 신학자들이 삼위의 역할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요. 예컨대 칼빈은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모사요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 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을 관장하시는 분이다라고 교훈했습니다.

 

683 하나님 안에 마치 사람들처럼 서로 분리된 세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이교도들처럼 여러 신을 섬기게 된다. 오히려 마치 샘과 그것에서 흘러나온 시냇물이 비록 두 가지 형태와 이름을 지닐지라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옳다. (물론)성부는 아버지시고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샘이 시내가 아니고 시내가 샘이 아니지만, 둘은 하나이고 같은 물이 샘에서 시내로 흐르는 것같이 신성도 구분 없이 성부에게서 성자에게로 부어진다.

 

  이 같은 이유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불같이 단호하게 맞섰던 겁니다.

 

694 그것은 루블료프가 성부,성자,성령을 어쩔 수 없이 세 개체로 나누어 형상화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하고 삼위의 동등성과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오랜 번민 끝에 취한 조치였지요. 그뿐만 아니라 삼위가 각자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지만, 셋 모두 신성을 뜻하는 청색의 옷을 부가적으로 입거나 걸친 것, 왼손에 똑같이 권위의 지팡이를 하나씩 쥔 것 역시 그런 의미입니다.

 

699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완전하고 불변하며 단일한 실체로서 개별적 사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데고 반대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시아는 현실세계에 있는 개개의 사물 안에 존재함으로써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형상, 곧 에이도스지요.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를 들어 인간을 이야기할때는 플라톤이 우시아로 여긴 보편적 인간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누구라고 부를 수 있는 개별적 인간, 철수영희를 가리킬 뿐입니다. 에티엔 질송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다음과 같은 예로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프랑스의 한 의사가 아픔이라는 것은 없고 오직 아픈 사람들만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쉽고 간단한 문장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 전체를 요약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요약한 것이다.

 

703 나지안제누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잘 들으면 당신들은 곱바로 하나의 불빛과 세 개의 불빛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개별성 또는 본체로 보면 셋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위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같은 뜻이므로 더는 명칭을 놓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본질 즉 신격에서는 하나다. 언어적으로 표현하면, 나뉨이 없이 나뉘기 때문이다. 또한 나뉨 속에서도 연합해 있다.

 

712 예컨대 당신의 손에 종이 한 장이 쥐어졌다고 생각해 볼까요? 그러 종이의 앞면과 뒷면은 분리할 수 없이하나로 붙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어느 면이 먼저 생기고, 어느 면이 나중에 생겼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느 한 면을 앞면이라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다른 한 면이 뒷면이 되지요. 이와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이하나이고 누가 먼저 존재하고 누가 나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관계적으로만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그 둘은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에 대해 아들로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관계설의 핵심이지요.

 

715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것에는 일정한 법칙에 있어서 그 법칙에 의해 무수한 물방울들이 생겼다가 없어진다. 게다가 무작정 출렁이는 것이 아니고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된 자신의 의지를 이루기 위해 출렁인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물방울은 잠시 존재하는 동안에도 그 바다의 뜻과 의지에 의해서만 이끌려 간다. 이 무한하고 역동적인 바다가 바로 신이다.

  만일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 삼위일체를 이해하려 한다면, 그 내용은 이렇겠지요: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 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일자)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들을 생성,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720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사랑, 선물, 친교로 파악했고, 우리도 성령에 의해 서로 간의 친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신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이 얼마나 보배로운 사유인가요! 우리는 이 같은 사유의 가치를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진리가 단지 교훈으로 선포된 종교가 아니라, 성육신을 통해 행위로 실천된 종교이기 때문이지요.

 

728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이신 것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될 것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하느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가 되도록 결합시키는, ‘서로가 스며드는사랑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했듯이 소리가 결합될 때 하나가 되면서도 각자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대, 화음을 이루어 합창을 부르는 것이 기독교 전통에서 두드러졌다는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다.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741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753 존재이자 창조주인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760 유스티누스는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복 있는 자가 되는 것 외에 더 바라는 게 없습니다라면서 기꺼이 순교를 택했습니다.

 

768 고대 교회에 전해 오는 설화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하기 전까지 사흘 동안 지옥에 내려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인고 의인을 지옥에서 인도해 냈다고 합니다. 유스티누스의 선재적 그리스도론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되는 이 흥미로운 설화를 단테가 자신의 작품에 끌어들인 것이지요.

 

774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우리가 이미 언급한 존재자체를 말합니다.

 

781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룬다는 말이지요. 이는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라는, 내가 이 책에서 기본 강령으로 삼은 것과 깊숙이 연관된 문제의식입니다.

 

789 그래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레미야, 즉 다른 누구보다 거친 말투로 당대의 성직자들을 통렬히 꾸짖던 예레미야 선지자를 교황의 옥좌 바로 위에 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부패하고 독선적인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에게는 선지자도 화를 내며 걱정하고, 사람들은 슬퍼하며 등을 돌리고 더난다는 엄중한 메시지를 그림 안에 담아 놓았다는 것이지요.

 

796 미노스와 미다스를 결합한 악마의 얼굴에 체세나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의 분노와 저주를 노골적을 드러냈지요. 그것을 굳이 해석하자면 마땅히 이래야겠지요. “신의 뜻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들아! 미다스와도 같고 미노스와도 같은 너희는 지옥의 심판자와도 같이 될 것이다!”

 

800 이를 예수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3)라는 말씀으로 가르쳤고,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 1 4:16)라고 교훈했지요. 또한 아우구스티스는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한 그것(성령)을 통해 우리가 우리들 서로 간의 친교를 세우고, 그분들과의 천교도 세우기를 원하셨다라고 표현했고, 몰트만은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이 가진 포괄성과 통일성으로서의 유일성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유일자입니다.

 

맺은말

 

811 알렉산더 포프의 <인간론> 가운데 다음 구절을 소개하면 마칩니다.

 

인간의 지식은 그 입장과 위치에서만 합당하고

그의 시간은 하나의 찰나이며, 그의 공간은 하나의 점.

어떤 차원에서든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라면

이른들 늦은들, 이곳인들 저곳인들 어떠리.

오늘 복 받은 자 온전히 복 받고 있느리라,

천 년 전부터 복 받은 자와 다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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