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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6일 10시 11분 등록

,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 김용규 지음, 휴머니스트, 2010.12.06

 

1. ‘신을 말할 수 있는 사나이(저자에 대하여)

김용규.JPG

■ 김용규

 

융을 읽고 난 뒤, 한 개인의 사상과 사유가 자라온 환경이나 의식했던 사태와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그것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류 원형의 모습의 현현이라 하더라도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의 인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니크가 일반 대중에게 깊이 있는 사유의 틀 또는 사유의 전환을 가져오게 했을 때는 그 사람이 느끼고 생각한 결과에 대한 과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이라는 방대하고 복잡한 주제를 잡은 저자를 보고 저자에 대한 내 생각은 두 가지다. 그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 용감하게 펜을 들었거나 둘째, 신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류일지 모른다는 생각. 여기까지 미치자 이 사람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생을 알 길은 그의 방대한 주제와는 다르게 일천하다. 베일에 가려진 학자, 김용규 말이다.

 

그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인문학과 철학의 풍부한 재료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인문학의 연금술사로 불린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이렇게 나온다. ‘국내에지식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알도와 떠도는 사원’, ‘다니를 통해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란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지은 책으로 깊고 풍부한 철학의 맛과 문학의 향기를 절묘하게 버무려낸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서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 신’,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높이는 도구로서의 논리학을 풀어낸 설득의 논리학’, 영화를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데칼로그등이 있다.

21권의 그의 책에서는 언제나 현대인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은 인문학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런 정보들에 성이 차지 않는다. 그를 찾기 위한 과정이 거듭되고 결국 나는 www.bhgoo.com 으로 돌아왔다. 바로 우리 집으로 말이다. 가까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내가 알아본 바로는 철학자 김용규에 대한 근접 정보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은 변경연이다. 특히 7기 선배님들의 depth는 최고라 할 만하다. 가감 없이 그리고 정보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에 대한 문답을 옮겨 놓는다.

 

그가 철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계기는 우연이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본디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아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요, 대학입시에서 낙방을 하는 바람에 재수를 하면서 우연히 철학 책을 보게 되어 흥미를 느끼고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과학자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여기까지가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사실적이고 공식적인’ 대답입니다. 그런데 제 나이가 올해로 60인데요, 살면서 숱한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의 삶이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철학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내가 모르는 어떤 좋은 이유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가 철학자의 삶을 살며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는 보편적 가치 (자유, 평등, 박애, 정의 등등). 그는 러셀을 인용하며 말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가치(좌우명, 아포리즘)를 갖고 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젊은 시절에 좋아했던 글귀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의 자서전에서 읽은 그의 좌우명인데요,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적습니다.

 

사랑에 대한 갈구 (longing for love), 지식에 대한 탐구 (search for knowledge),

인간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정심 (unbearable pity for suffering of mankind)’

 

그는 책을 좋아하고 옆에 두지만 경계해야 책도 많다고 하며 저는 너무 많은 책들을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에 특별히 감명 깊은 책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책에 관해서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세상에는 약간의 책들이 있고, 그 책들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쓰레기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권하고 싶은 말은 “인생은 짧으니 책을 읽어라”입니다. 제가 말하는 책은 대개 고전을 말합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원전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자다. 이것은 의외다.

저희 집안은 4대째 기독교 신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신에 대해서는 제가 생각하는 ‘신’은 ‘제게 좀 야박하신 분’ 같습니다. 제게 좀 더 잘 대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농담입니다만, 가끔은 솔직한 심경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개인이 체험하는 신은 때로는 ‘너무나 감사한 분’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 야속한 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 주관적인 생각이고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제 책에 적힌 대로, ‘우주 만물을 포괄하는 무한자이자, 그 안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소멸시키는 자이고, 우주 만물에 낱낱이 관여하고 참여함으로써 그것들을 오직 자기 의지대로 이끌어 가는 유일자이지요.’ 라고 말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충분해졌다. 책으로 들어가자.

 

2. ‘,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 제국을 지배하던 그리스와 로마의 수많은 신들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기독교의 신이 차지했지요. 그 이후 서양 사람들은 1700년 가까이 단 하나의 신을 압도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숭배해 왔습니다. (p. 8)

 

□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타고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는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 에 대한 해법도 찾기를 기대하지요. (P. 9)

 

Ü

 

□ 디아크리베(Diatribe) 라는 수사법을 활용, ‘기분 풀이내지 환담이라는 뜻을 가진 디아트리베는 설사 심오한 철학적 변론이나 종교적 사상이라 할지라도 고상한 전문용어를 사용해서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피합니다. (p. 10)

 

1, 신이란 무엇인가

Ü 이거 처음부터 세다. 신이 무엇인지 이야기 할 수 있는 인간, 무식으로 똘똘 뭉쳐 용감하거나 신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류이거나.

 

□ 시스티나 성당, 미사를 집전하고 추기경들이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 (p. 21)

 

Ü 콘클라베라 불리는 교황 선출을 본 동시대인으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아 안도감이 든다. 역사에 동참한다는 안정감, 인류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

 

□ 인간의 육체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16세기 르네상스의 구호 (p. 21)

 

Ü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온통 벌거벗게 한 것이로구나.

 

□ 인간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이 화가의 찬미가 신에게 바치는 장엄한 미사라는 것 vs성스러워야 할 예배당을 공중목욕탕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투덜대는 사람 (p. 22)

 

□ 이렇게 뭔가를 건네주려는 능동적 손가락과 그것을 받는 수동적 손의 모습을 통해 동적인 신과 정적인 아담의 대조적 자세가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조가 전적으로 신의 능동적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데 안성맞춤인 장면이지요 (p. 26)

 

Ü 인간은 신이 지극히 프로메테우스적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목숨들이 죽어가며 채득한 문명의 발전 상을 과거를 뭉그러뜨린 다음 신의 이름으로 아우르려는 단절되고 맹목적인 신에 대한 의존 말이다.

 

20세기 미술사학자 언스트 곰브리치(E.H. Gombrich)가 이 그림(천지창조)에 대해 위대한 창조의 힘찬 동작과 신의 전능함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고안해 낸 이 방법은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 가운데 하나다’ (p. 26)

 

□ 결론부터 말할까요?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대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 pannenberg)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이란 모든 것에 침투하는 바람, 때로는 조용한 숨결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p. 27)

 

Ü 무형의 무가치의 무존재의 무공간, 무시간의 정신적 정령.

 

...아마도

밝혀지는 것이 옳지 못할 다른 세계의 비밀을

어이 말하리오. 그러나 그대에게는

가능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도록,

영적인 것을 육체적인 형태에 비유하여

묘사하겠노라. (p. 31)

 

Ü 융도 생의 근원을 찾아 가다 이를 느낀 모양이다.

밑바닥에 도달한 그 순간, 나는 학문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마지막 한계에 부딪혔다. 초월적인 것, 원형 그 자체의 본질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 그곳까지 이르게 된 인간의 감정은 어떠할까. 비트겐슈타인, , 부처, 예수

 

□ 르네상스란 재탄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뜨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p. 35~36)

 

Ü 그런 면에서 단테는 르네상스의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하데스의 기독교의 지옥을 번갈아 언급하고 유피테르와 야훼를 오고 가는 이야기 속에 르네상스의 희붐한 새벽을 걷고 있었다.

 

□ 인류 역사를 두고 인간의 육체를 이처럼 신성화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렇듯 건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미켈란젤로가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바로 그 정신으로 그는 얼마나 그리스 정신에 충실했는지는 그의 그림 천지창조가 그리스인들의 신화가 아닌, 히브리인들의 성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p. 39)

 

Ü 인간의 육체가 이토록 아름답다면 그를 창조한 신이 만약 육신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p. 41)

 

인간답게 묘사하되 동시에 이상화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이 견지한 최고의 규칙 (p. 42)

 

Ü 神人同形, 神人同感

 

□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론에서 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

라파엘로는 참으로 여성들에게는 묘사하고 싶은 미가 드물기 때문에 나는 상상 속에 있는 어떤 이념(idea)을 이용한다.’ (p. 43)

 

Ü 철학 없는 예술의 허무함, 예술 없는 철학의 맹목, 그리고 공허

 

□ 큐피드 cupid, 아모르 amor, 에로스 (p. 44)

 

□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개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이로써 에로스 자신도 신적 존재가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 러브 platonic love라고 부르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단테의 소네트 (부제,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에는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여성들 중에서도 베아트리체를 보는 이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지요.

그녀와 함께하는 사람은 그 행복 때문에

신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지요.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이상스런 힘이 깃들어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시샘하지 않지요.

우아함과 사랑과 믿음의 옷을 입고

그녀와 함께 가게 됩니다. (p. 46)

 

Ü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아주 많이 섞여 있어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이 천국에까지 지속되었던 모양이다.

 

□ 미켈란젤로는 말년의 대작 최후의 심판에서 심판을 주재하는 예수까지 아폴론의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p. 47)

 

□ 크세노파네스의 잠언

‘…그러나 가사자(可死者)들은 신들도 태어나고

자신들처럼 옷과 목소리와 형체를 갖는다고 생각한다네.

신들과 인간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하나의 신은

형제도 생각도 가사자들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네.

만일 소들, 말들 그리고 사자들이 손을 갖는다면

그래서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말들은 말들과 소들은 소들과 유사한 신의 모습을 그릴 것이고

각기 자기 모양대로 신의 형체를 만들 것이네.

신에 대해 그리고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을… (p. 49)

 

Ü 이거 어디선가 읽어 본 듯 하다. 파우스트였던가. 신화의 힘이었나. 신곡이었을까. 어쨌든 신인동형설은 왈가왈부 말이 많았던 듯 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하지요. (p. 50)

 

Ü 이 촌철살인을 보라. 빅뱅을 이미 알고 하는 말이 아닌가.

 

□ 운동이라는 말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변화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는 자기는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의 근원이 되는 자 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요. (p. 50)

 

Ü 그렇군.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며 의지하지 않고 의지하고 계획하지 않고 계획하는 자

 

□ 단테는 신곡에서

나는 오직 하나의 신을 믿습니다. 유일하고 영원한 그분은

사랑과 소망을 통해 모든 천체를 움직이시되

당신 스스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p. 51)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세상의 모든 사물 안에 깃들어 있어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게끔 하는 실체라는 매우 특별한 철학적 뜻을 갖게 된 것 (p. 54)

 

Ü 플라톤의 이데아 idea,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 eidos를 말하고 있다.

 

□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 이상 간데없이 뻗은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하는 것 같은 극적 종합이었습니다. (p. 55)

 

Ü 문명의 충돌은 영혼이 없어진 현대에나 어울리는 말이겠다. 곡절은 있었겠으나 결국 2천 년을 지배하고 있는 신의 개념은 과거 2천 년을 지배한 신의 개념에서 빌려온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문명과 그리스 문명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 omnipresence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p. 56)

 

Ü 이 책의 내용을 한 문단으로 종합한다.

 

□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과 같은 탁월한 존재론적 표현이 담긴 종교적 비유

무엇보다 구약성서의 서두부터가 그렇지요. ‘신이 곧 존재라는 가르침에서 신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상실, 곧 사망을 의미하는 것 (p. 57)

 

Ü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는 쫒겨남을 당하지만 이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융은 이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진 것 같다. 아래에 인용한다.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진지한 하느님은 인류 최초의 부모가 죄를 범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구약성서의 신처럼 공의를 내세우지도 않고 인간보다 도덕적이지도 않습니다. 애정과 증오에 대한 일정한 기준도 없어요. 그러니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지요. 마치 우리 인간의 감정이 그렇듯 말입니다. (p. 64)

 

Ü 그래서 나는 그리스 신화가 좋다. 인간에 기댄 신의 모습, 화끈한 생의 변화, 정제되지 않은 광기, 두려움, 분노, 행복, 사랑, 증오, 인내, 극복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잡스러움. 그런 게 나는 좋다.

 

2. 신은 존재다

 

□ 토마스 아퀴나스,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은 신은 있는 자 qui est’ 또는 존재자체 ipsum esse’라는 것이지요. 그는 8세기 가장 뛰어난 신학자 다마스쿠스 요한네스는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다 이 명칭, 즉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p. 75)

 

존재란 무엇인가?

 

□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은 그 이름에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 있고

그의 아내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나다니엘은 하난미이 주심이라는 의미고요.

이사야는 야훼의 구원, 예레미아는 야훼가 세우다라는 뜻이지요. (p. 80)

 

□ 신은 이름을 바꿈으로써 그가 한낱 소수 유목민의 족장에서 장차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계시한 겁니다.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의 야곱을 하나님이 싸운다. 힘을 쓴다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준 것 역시 그들에게 주어질 새로운 신분이나 삶의 목적을 나타내지요.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 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p. 81)

 

Ü 이는 동양의 사고 방식도 같다. , 연호, , 이름 등 수많은 의미로 자신을 나타내었던 동양의 자기 표현과 유사하지 않은가.

 

□ 구약성서에서 신을 가리키는 일반 명친은 엘el입니다. 히브리어 엘은 신약에서는 그리스어 테오스 theos 에 해당하는 말이지요. 우리말 가톨릭 성서에는 하느님으로 프로테스탄트 성서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p. 82)

 

Ü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왠지 모를 거부감은 현대의 이 땅에 기독교가 낳은 광신적 자본주의 상점에 불과한 교회의 이미지 때문이다.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본질과 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세상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p. 84)

 

Ü 존재와 존재물, 명징하고도 또한 희미한 구분

 

□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신은 무규정자이자 무한정자여야 하며 당연히 그에게는 그를 규정하거나 한정할 어떤 본질이 따로 없습니다. (p. 85)

 

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머리를 헝크리는 고통이 시작된다.

 

□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354~430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 분은 신이 아니다. (P. 86)

 

□ 존재는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일자 OULON MOUNOQENES 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P. 88)

 

Ü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 교설 중에서

 

□ 누가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겠소?

누가 고백할 수 있겠소.

나는 그를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느낀다고 해서

누가 감히 발설할 수 있겠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만물을 포괄하는 자,

만물을 보존하는 자,

그는 당신을, 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괄하고 보존하고 있지 않소? (P. 89)

 

Ü 신에 대한 묘사, 파우스트에서. 저자는 융과 같이 괴테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괴테는 이들이 궁금해 하는 세계, 우주, 신에 대해 일찍이 그 존재를 간파한 사람이었던가. 파우스트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왜 나는 그것을 몰랐을까.

 

□ 신이 선뜻 자기 이름을 밝힌 겁니다.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ehyeh asher ehyeh라고 말이지요. (p. 92)

 

Ü 최초의 구약성서 70인 역에서 나는 있는 자다. 라고 번역하였음. 후일 신약성서의 모태가 되는 성서다. 신은 이 말을 통해 자신이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임을 알린 것이지요. 나는 있는 자다가 아닌 나는 있음이다여야 하고요. 설사 철학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나는 존재자다 가 아닌 나는 존재다 가 되어야 합니다. 책의 내용 중 95p

 

□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맨 처음 접한 경전 (p. 93)

 

Ü 각주) 기독교 교리 Christian dogma 란 기독교를 다른 이교도들의 사상과 내부 이단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를 구별하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교리는 그 발생부터가 이미 배타적이거나 방어적인 성격을 띤다.

 

□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 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이며 신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 까닭인 것입니다. (p. 97)

 

□ 신보다는 세상을 더 믿고 의지할 수박에 없는 우리들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요. 기독교에서는 이 같은 우리의 성향을 罪性이라고 부릅니다. (p. 98)

 

나는 존재다라고 대답한 자가 진정으로 의도한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p. 98)

 

□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는 신의 대답이 가진 진정한 의미예요.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무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p. 99)

 

Ü 존재와 존재물. 인간은 존재물 신은 존재, 존재물은 존재 안의 가시적 존재, 존재는 존재물과 존재물이 아닌 것을 모두 포괄하는 불가지적 무엇.

 

□ 하나님의 실존 문제는 물어질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만일 물어진다면 그 성질상 실존을 초월한 것에 대한 물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대답은 부정이건 긍정이건 하나님의 성질을 몰래 부정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다. (p. 101)

 

Ü 바르트가 한 말이다.

 

□ 만물의 궁극적 요소 (만물의 근거가 되는 것)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피타고라스는 수와 질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

만물의 근거를 탐구하던 아르케에 대한 물음이 자연철학에서 존재론으로 도약 (p. 104)

 

Ü 관념적인 사유의 전환이 있었을 뿐인데 신에 대한 규정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렸다.

 

오직 존재가 있고 비 존재는 없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만 있는 것이고 변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p. 105)

 

Ü 깊은 통찰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말의 함의도 이와 같지 않겠는가.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p. 106)

 

Ü 나는 이런 게 재미가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겉멋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내 존재가 하도 후지다 생각해도 그런 것 같음. 책에서는 덧붙여 존재와 비존재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사유로써는 인식론과 논리학의 터전을 닦은 시원적 사유라고 칭송하고 있다.

 

□ 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지요. 따라서 플라톤에게도 존재인 이데아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이고 존재물들에 대한 인식은 진리가 아닌 사견일 뿐입니다. (p. 107)

 

Ü 이로써 이데아의 관념 철학은 어렴풋이나마 명쾌해 진다.

 

□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p. 107)

 

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가. 산도 물도 모두 변하는 것이므로 존재물이고 존재는 될 수 없고 따라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산은 산으로 실존하는 한 이 될 수 밖에 없고 그 어떤 무엇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산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에는 신이 현현하고 있다. 그 내적 영혼은 신으로 둘러싸여 있을 지 모른다. 그렇다면 산에 깃든 신의 영혼은 변하지 않을 터 산이라 명명된 산은 결국 신의 부분적 모습을 갖춘 부분존재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완전한 신은 아니기에

 

□ 플라톤이 있다는 것(영원불변하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한 반면, 우리는 그에게 현존한다는 것(세상에 가시적으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묻고 있다. (p. 108)

 

Ü 존재란 무엇인가를 답할 수 있는 핵심적인 질문이겠다.

 

□ 신곡에서 베아트리체의 영혼은 단테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물과 불과 공기와 흙을 본다.

그것들의 혼합물은 모두 썩어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들도 분명 신이 지으신 것,

이 말들이 사실이라면

그것들도 썩어서는 안 될 것이다.’ 라고

 

하지만 아니랍니다. 들으시오. 천사와 그대가 있는 이곳,

진실한 천국은 지금 그 상태대로

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었답니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말한 원소들과

그 혼합물들은 신이 창조한

힘에 의해 불완전한 존재로 형성되었지요.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는 그 출처부터 다르며 하나는 완전한 존재지만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p. 109~110)

 

□ 만일 아름다움 자체 이외에 어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 자체를 부분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어느 것 때문도 아니라네. 또한 모든 것이 다 그렇다고 나는 말하겠네. (p. 111)

 

Ü 단테는 전형적인 플라톤적 사고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

 

□ 예컨데 세상의 모든 빨간 사물들에는 빨강의 이데아가 들어 있지만 그것이 부분적으로만 들어 있어서 그 빨강이 영원히 빨갛지는 않고 일시적으로 빨간색일 뿐이고 언젠가는 퇴색된다는 말입니다. (p. 112)

 

Ü 이데아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 존재물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존재를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 더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불완전하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인식이나 언급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고 단지 불완전한 지식, 곧 플라톤이 말하는 사견 doxa 이지요 (p. 113)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우주만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P. 114)

 

Ü 단언할 수 있는가. 치사한 인간의 마음에 들어 분노하고 사랑하는 신은 또 무엇인가.

 

□ 하나님은 무로부터 창조한 사물들에게 존재를 부여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이 존재하듯 최고의 존재로서 부여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물에게는 더 큰 존재를 부여하고 어떤 사물에게는 더 작은 존재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존재들의 자연 본성을 계층으로 질서지어 놓았다. (p. 118)

 

Ü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자연의 계층적 질서(자연의 사다리)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 썼다.

 

□ 생명이 없는 물체들 위에 식물, 그 위에 이성이 없는 생물, 그 위에 이성이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 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p. 118)

 

Ü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와 불교의 접점을 어림잡을 수 있다. 융이 말하는 윤회의 매커니즘은 의식화 수준이다. 즉 불교 입장에서는 깨달음의 정도인데 기독교에서는 이를 자연의 사다리 맨 윗자리의 수준으로 상정하고 있다. 불교의 해탈, 열반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연의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윗자리에 오르기까지 삶과 죽음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윤회의 개념은 기독교의 천국과 구원 사상과 반하지 않는다 하겠다.

 

□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인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 (p. 123)

 

Ü ,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는 신이 있다는 것.

 

□ 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사회적 계층구조로, 교회에서는 평신도 → 사제 → 주교 → 교황이라는 교회제도를 확립했고 사회에서는 농노 → 기사 → 영주 → 왕이라는 봉건제도를 구축했지요. 이들 제도가 피라미드식 계층구조를 따른다는 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그 지위나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뜻합니다. (p. 125)

 

Ü 지극히 비 인간적인 구조다. 각주에서는 봉건제도 feudalism에 대해 국왕 또는 황제를 정점으로 서열제를 이루고 신분제 견지와 외적 권위 강조 또는 전통 고수라는 형태로 개인 역량 발휘와 내면적 권위 존중 등이 억업된 사회를 말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

 

□ 신곡에서 베아트리체가 제5천인 금성천에 오른 단테에게 샤를 마르텔의 영혼이 말한다.

 

스스로 완전한 신의 정신 속에

모든 자연의 다양한 유형과

그 각각의 선한 목적이 예견되어 있도다.

 

그러므로 이 왕국의 활을

당기면 화살은 미리 정해진

목표에 어김없이 날아가 박히나니

 

그렇지 않으면 지금 네가 오르는

이 하늘은 조화가 아닌

혼돈만 일으켰으리라. …

 

이 진리에 대해 더 명확히 듣고 싶은가?

아닙니다. 신의 완벽한 의도에 따라 창조되고 유지되는

자연에 어떤 결핍도 있을 수 없음을 이제 나는 알았습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자, 그가 다시 묻기를 그러므로 지상의 인간들이

사회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더욱 불행해지지 않을까?

이에 내가 대답했다. ‘물론 입증할 필요도 없이 불행해 질 것입니다. (p. 127)

 

Ü 계급에 의한 사회, 아직도 엄연히 살아있는 사회 구조다. 그 철저한 복속과 복종의 메커니즘을 단테도 극복하지는 못했던 듯 하다.

 

□ 요한 칼빈 (j. calvin 1509~1564) 의 소명의식 역시 이 같은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소명의식이란 모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이 무엇이든 설령 아무리 비천한 것일지라도 거기에 충실한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는 인식 (p. 127~128)

 

Ü 이 무슨 개 같은 소명인가.

 

□ 라이프니츠 (1646~1716)조건의 불평등이 무질서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물이 동등하게 완벽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p. 128)

 

Ü 받아 적다 열 받아서 중단한다.

 

□ 루소 (1712~1778)오 인간이여 그대의 존재를 그대 안에 한정시켜라. 그리하면 결코 더는 비참해지지 않으리라. 존재의 대연쇄에서 자연이 당신에게 할당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 그리하면 아무도 당신에게 그곳에서 떠나라고 강요하지 않으리라. (p. 129)

 

□ 부자는 최하위 노동자를 경멸하지 말지어다

그도 자연의 연쇄 속에 있는 동등한 고리이니

동일한 목적으로 노동하고 동일한 관점으로 합일되어

양자는 다 같이 신의 의지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p. 129)

 

Ü 영국 근대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에 있는 구절이다. 루소, 칼빈, 라이프니츠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계급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바꾸어 말하면 국가권력이 자본 권력을 존재의 대연쇄 중 상위층으로 묶어놓고 상하구조를 바꾸지 못한 것이 마찬가지라는 말이겠다.

 

□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일자로부터 누스 nous 곧 정신이 맨 먼저 유출됩니다.

 

그러므로 정신이 있기 위해 일자 자체는 정신이 아니라 정신의 아버지여야 하며 따라서 정신은 그의 첫 아들인 것이다.’ (p. 133)

 

□ 아는 자 (인식하는 자)와 알려지는 것(인식되는 자)의 관계가 등장하자마자 통일성은 이중성의 여지를 만들기 위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정신은 일자가 아니다. (p. 134)

 

□ 세계의 창조주라는 신 개념을 기준으로 한다면 정신이 곧 신이다 라고 주장 (p. 134)

 

□ 일반적으로 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p. 135)

 

□ 물질세계를 생산해 낼 때 영혼은 정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들이 물질 안에서 가시적 형태로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영혼이 하는 일은 ㅂ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종의 촉매 작용입니다. 이를 플로티노스는 따라서 만약 영혼이 어떤 행위가 아니고 합리적 원리라면 그것은 성찰 theoria 이다. (p. 136)

 

Ü 영혼은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그 둘의 연결고리로서 위로는 정신을 아래로는 자연계를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 (저자)

 

□ 신고에서 단테는

 

필멸하는 모든 것과 불멸하는 모든 것은

오직 성부의 사랑에서 나온 이데아의 빛을 받고 있으니

 

빛나는 본원에서 흘러나오되 그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또 삼위이면서 일체인 사랑(성령)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아

그 살아 있는 빛(성자)은 스스로 영원한 (일자)에 남아 있으면서

 

그 선의 힘(성령)으로 자신의 빛 (idea)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들에게 비추고 있소. (p. 137)

 

□ 창조와 관련해서 본다면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 그리고 그들로부터 유출된 물질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됩니다. (p. 141)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한 것인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실재입니다. 이 실재의 생성과 작용이라는 활동을 통해 모든 존재물은 그의 피조물로 창조되고 또한 그의 백성으로서 행복과 구원으로 인도되지요 그의 백성이 신에게 기원하고 순종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겁니다! (p. 146)

 

Ü 그런 것이었구나. 모두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모두인 절대자였다.

 

□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고 변화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그런데 이상하게도 히브리인들은 haya라는 한 개념 안에 존재 생성, 작용을 다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논리적 모순이 히브리인들에게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p. 147)

 

Ü 좋은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좋아한다. 답도 못하면서 좋아하기만 한다.

 

□ 놀랍게도 불변과 변화, 존재와 생성이 더는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개념쌍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도 이 말을 우리의 논점에 맞춰 다시 생각해 보면 여전히 기이합니다. 존재는 생성 작용할 때에만 존재일 수 있고 불변하는 것은 변화할 때에만 불변할 수 있다니!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듯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한 걸까요?

이러한 종합이 우리에게 기이해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사유가 가시적 또는 사물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사유가 심리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종합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지요 (p. 148~149)

 

□ 그리스인들이 공간적으로 또는 탈시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에 비해 히브리인들은 시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p. 150)

 

□ 우리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종교가 만나 형성된 기독교와 그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서양문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재적소에서 그때마다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즉 그리스적 사유를 시간화하거나 히브리적 사유를 탈시간화 하는 별도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p. 153)

 

Ü 이거 흥미롭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신은 영원히 안식하느냐 아니면 부단히 활동하느냐 라는 물음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인 신은 영원히 인식하면서 부단히 활동하신다.’ (p. 153)

 

Ü !!!! 멋진 말이다.

 

□ 즉 신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인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한다는 것 (p. 154)

 

□ 신은 성질이 없어 선하며 양이 없어 크고 결핍이 없어 창조적이며 지위가 없어 통치자이며 외관이 없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장소를 갖지 않아 어디든지 있고 시간을 갖지 않아 영원하며 변함이 없어 변화하게 하고 아무 작용을 받지 않아 모든 작용을 한다. (p. 155)

 

Ü 이 걸작의 문장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에서 한 말이다. 이중적 논법으로 세계를 설명해 버린다.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 YHWH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P. 157)

 

□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고 있으며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라고 했다. (P. 158)

 

□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 Potential.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온전한 무엇의 바탕이 되는 소립자. (p. 159)

 

□ 존재의 장은 퍼텐셜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퍼텐셜을 무조건 초월하고 우주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우주를 무한히 초월합니다. 이는 마치 신의 크기가 모든 물리적 공간의 크기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고 신의 영원성이 모든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같습니다. (p. 164)_

 

Ü (각주)다중우주모형에 따르면 퍼텐셜은 약 10 500승개로 추정되는 진공상태를 포함하는데 각각의 진공 상태가 모두 빅뱅을 통해 하나의 우주로 발전한다. 이 같은 우주들의 팽창은 마치 바다에서 물방울이 생겼다가 사라지듯이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 과정일 수 있다. (p.164)

 

□ 신은 신자들의 마음과 신학자들의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많은 사변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p. 172)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써 의미 있게 산다. 라는 특별한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기획투사entwurf 함으로써 사르트르는 앙가주망engagement 함으로써 인간은 실존한다고 했지요. (p. 178)

 

a) 신은 정의상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다.

b) 가장 완전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결핍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c) 만일 어떤 것이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한다면 이는 실제적 존재가 결핍된 것이다.

d)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 (p. 181)

 

Ü 안셀무스, 1077 베크 수도원, ‘프로슬로기온에서.

 

□ 만약 우리가 날개 달린 말인 페가수스나 아름다운 꼬리의 인어공주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p. 182)

 

Ü 인간의 관념에서만 존재할 뿐 현존하지 않는 것, 상상. 무명의 수도사 가우닐로라는 사람이 안셀무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의견에 제동을 걸었다.

 

□ 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한 신 개념은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무엇하나도 결핍될 수 없는 절대적 완전성을 갖고 있다는 것. 즉 그러한 현존은 필연적 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p. 183)

 

□ 칸트의 반박

첫번째, 개념의 영역과 현존의 영역은 다르다는 것. 따라서 가장 완전한 존재의 현존이 개념상 필연적이라 해도 실제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현존이란 사실의 문제이므로 경험으로 판단해야지 사고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번째, 신은 현존한다 라는 명제는 이 명제를 부정한 모순명제(신은 현존하지 않는다)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논증만으로는 그것의 현존을 증명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p. 185)

 

Ü 삼각형은 세 각을 갖고 있다. Vs 삼각형은 세 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경험적으로 검증해 보지 않고도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것. 분석판단. Vs ‘이 사과는 빨갛다경험적으로 검증하지 않고는 빨간지 파란지 알 수 없는 것. 종합판단

 

최고 존재자의 현존을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모든 노고와 작업은 헛된 것이다. 인간이 순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를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p. 187)

 

a) 세계에는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일반적인 특성들이 있다.

b) 그런데 세계의 모든 일반적인 특성은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이 때문에 무한소급해 가는 모든 원인의 궁극적 원인이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c) 그러므로 세계에는 궁극적 원인이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p. 189)

 

Ü 이거 멋지다. 무릎에 손이 간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누구인가?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경험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도록 한계 지어졌어요. 그럼에도 이성이 자신의 추론을 경험할 수 없는 무한한 대상에까지 확장해 나가면 이성은 하나의 길 경험적인 길에서든 또 다른 길 선험적인 길에서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단지 사변의 힘으로 감성세계를 초월하려고 그 날개를 펴지만 헛수고에 그칠 뿐이며 필연코 오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무한소급 infinite regress 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원칙이지요 (p. 191)

 

Ü 이를 두고 칸트는 우주론적 증명에는 변증법적 월권의 그물망이 감추어져 있다고 표현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존재의 사다리를 인간 이성의 한계 부분에서 무참히 잘라 끊어 버렸다 (저자)

 

a) 세상의 모든 자연적 사물은 그것을 존재하게 한 각각의 목적 때문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b) 그런데 자신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물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깨달은 어떤 존재에 의해 통치되지 않으면 각각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조정되지 않으면 과녁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c)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이 각각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질서 지어주는 어떤 지적 통치자가 존재한다. 그 존재를 우리가 신이라 한다. (p. 195)

 

Ü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제시한 다섯 번째 길을 논증의 형태로 간략히 했다.

 

□ 페일리의 주장

a) 시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어떤 지적 설계자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

b) 세계는 시계와 유사하다

c) 그러므로 세계는 어떤 지적 설계자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 그 설계자가 신이다. (p. 196)

 

Ü 이는 지적 설계론 intelligent design theory 이다. 이는 오존층의 두께가 생물 보호에 어쩌면 그리 적합한가? 이는 오직 신의 설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저자)

 

□ 그러나 흄은 우연에 의해서도 세계가 형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오만 속에 추론하는 오만 속에 우리의 오류가 있다. 라고 비판했다. (p. 198)

 

지성의 모든 종합적 원칙은 내재적으로 사용되는데 최고 존재()의 인식을 위해서는 이러한 원칙의 초월적 사용이 요구된다. 하지만 우리의 지성은 이러한 초월적 사용을 위한 아무런 장비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p. 198~199)

 

Ü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유비추론은 전제들이 참인 경우에도 결론이 확률적 참 probably true 또는 가능적 참 possibly true 일 뿐 필연적 참 necessary true 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

화성에도 생물이 살고 있을 것이다. 같은 주장이 유비추론이지요 (p. 199)

 

Ü 대부분의 관념적 합리론을 이야기하는 철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오류다.

 

□ 예증법

각주) 입구가 좁은 병 속에 팔을 집어넣고 무화과와 호두를 잔뜩 움켜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지 생각해 보라. 그 아이는 팔을 다시 빼지 못해서 울게 될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과일을 버려라. 그러면 다시 손을 빼게 될 거야 라고 말한다. 너희의 욕망도 이와 같다. (p. 201)

 

Ü 욕망이라는 것에 대한 실제적 예증법이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

 

□ 다윈은 무신론을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해 준 최초의 인물입니다. (p. 204)

 

□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 및 진리의 근거를 초이성적 계시에서 구하지 않고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에서 구하려는 자연신학을 강력하게 거부하지요. (p. 205)

 

Ü 약간의 맹목의 씨앗이 보인다. 보다 근본주의적으로 놀고 있는데 오늘날 이런 분들이 패권을 잡고 있음에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음에도 다른 종교 심지어 같은 종교 내에 다른 종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가 어두워진 이유다.

 

□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론자들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이직각인 것을 우리는 골방에서 종이와 연필만으로 증명할 수 있는데 이는 선험적 인식 능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합리론자들은 플라톤의 후예들입니다.

반면,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정신은 아무것도 씌지 않은 빈 서판과 같아서 그 안에 선천적 인식 능력이란 전혀 없고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 누구도 보지 못한 인어나 페가수스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우기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같이 경험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경험론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손들이지요 (p. 211)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p. 212)

 

Ü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말하고 있는 핵심이다.

 

□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입니다. (p. 213)

 

□ 칸트의 네 가지 이율배반

1) 시간에는 시작이 있고 공간에는 끝이 있다.

2) 세계의 물질은 그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3) 자연의 인과성을 벗어난 자유에 의한 인과성이 있다.

4) 세계에는 그것의 부분이나 원인인 하나의 필연적 존재가 있다.

이들 명제는 진위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각각 그들의 부정명제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p. 215)

 

Ü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모든 종류의 논증이 부질 없다는 이야기, 즉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 기독교에 세 가지 위대한 집단이 있고 그 각각에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의 위대한 철학자가 있다. 동방정교에는 플라톤, 가톨릭에는 아리스토텔레스, 프로테스탄트에는 칸트 (p. 217)

 

안셀무스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찾고 있는 것을 찾았느냐?

너는 하나님을 찾았고 그분이 모든 것 중에 최고의 어떤 것이며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발견했다.

그러나 네가 발견했다면 네가 발견한 것을 감각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주 하나님, 내 영혼이 당신을 발견했다면 왜 당신을 느끼지 못합니까?

왜 이렇습니까. 주님.

왜 이렇습니까? (p. 219)

 

Ü 눈물 겨운 안셀무스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그 의젓함이 대견하다. 인류가 가진 고민을 짊어지고 가는 자.

 

□ 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주된 태도가 사유였다면 히브리인들의 태도는 경험이었지요. (p. 220)

 

□ 어떤 사람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성직자가 그를 발견했지요. 그리고 그에게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신이 그 사람을 태초부터 예정했으며 그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했고 지금도 사랑하여 늪에서 건져 주려고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자기를 보냈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러자 늪에 빠진 사내가 다급히 외쳤습니다.

이 사람아, 그건 상관없으니 어서 줄이나 던져라!’ (p. 222)

 

Ü 종교, 철학이 눈 앞에 있는 삶의 가학성 앞에 무력하게 무너진다.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은 보통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물질적 세상을 잠시 잊게 함으로써 인식 전체를 채워 주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을 말하지요. 개인적으로는 환상, 마음의 소리, 괴이한 감정, 신비한 황홀경 속에서 초월적 대상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공적으로는 기적과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p. 224)

 

초월적 존재를 만났을 때 무서워 떨며 말을 잃고 신경 조직의 가장 말초에 이르기까지 내적으로 전율하게 되지요. (p. 225)

 

Ü 지구에서 최고 높은 산이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나는 그 때의 그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압도되어 그냥 엎드리고 싶은 마음을 말이다. 존재는 장엄한 위엄 앞에 한갓 먼지와 재로 보인다. 에베레스트, 그리고 산

 

□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230)

 

Ü 결국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로 귀결된다. 거참.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p. 234~235)

 

Ü 고린도 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한 말이다.

 

3부 신은 창조주다.

 

□ 태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p. 241)

 

Ü 구약성서의 맨 처음

 

창조론이 왜 고백록 안에 있나

 

□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칭찬을 받지 못할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않는 (p. 246)

 

Ü 단테가 존경했으니 오죽 했겠는가.

 

□ 마니교의 중심사상은 영혼과 물질, 선과 악, 빛의 왕국과 어둠의 왕국이 대등한 원리이자 존재론적 실체로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는 철저한 이원론 (p. 248)

 

□ 누구든 이성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야 어떻게 초이성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p. 250)

 

Ü 융은 인간의 이성이 한계를 만나야 무한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원문을 인용한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써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함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 이성의 한계가 신앙을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 (p. 252)

 

□ 신은 우리가 이성 없이 그분에 대한 신앙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p. 253)

 

□ 소녀여, 왜 나를 따라오는가.

성스러운 곳의 문 앞에 내가 이르렀으나 ,

내 결심이 흔들리고 들어가기 주저되니

돌아서서 네 얼굴을 들여다본다.

 

나는 말이 아닌 웅변을 열망하고

돌의 입맞춤 속에 충만을 찾는다. 너는,

붉은 입술과 금빛 머리로 내게 온다. 그리고,

네 발밑엔 바람에 불려온 낙엽이 하나. (p. 256)

 

Ü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원효가 어른거린다. 삼국유사에서 고운기는 원효를 아래와 같이 말한 적이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이런 면모가 보인다.

 

원효는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서간집 편지에는 이때 참석한 동료 중 한 사람이 그 열정적이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쓴 다음 시가 들어 있습니다.

 

새벽이 마차를 타고 행복이라는

과거의 바퀴를 내게로 다시 굴려 올 수 있을까,

우리가 알프스 산맥의 그림자 아래

지혜로운 은둔을 계속하던 그 때를,

서리가 내려도 굳건히 박힌

내 발을 뒤로 물러나게 하지 못했고

태풍도 바람도 앞으로 계속될

우정을 물리치지 못하리. (p. 259)

 

Ü 이 글은 연구원 동료들의 마음으로 향한다.

 

□ 화이트헤드 교수의 말처럼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듯 서구의 기독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각주라 말할 수 있다. (p. 261)

 

□ 인간 정신의 내부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여기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과 상기의 힘이 있어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할 수 있다는 것 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의 덕을 보았다. (p. 262)

 

세상에게 물어보라. 하늘의 아름다움, 별들의 빛남과 질서,

낮의 태양과 달, 밤에 내리는 서리를 가진 세상에게!

땅에게 물어보라. 나무들과 식물들을 풍요롭게 하는,

온갖 동물이 서식하여 인간을 위해 가꾸어지고 마련된 땅에게

바다에게 물어보라, 자기 안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로 충만해진 바다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나서 보라. 저마다의 것이 자신의 종류에 따라

자신의 감관을 통해 너에게 대답하고 있지 않은가.

신이 우리를 만드셨다. 드높이 숙고한 철인들이 이것을 물었고,

그들은 세계라는 예술품으로부터 신적인 예술가를 인식했다. (p. 270)

 

번개나 천둥, 그리고 폭풍 속에서

장엄한 힘으로 압도해 오는 존재를

만발한 꽃의 향기와 온화한 바람의 산들거림 속에서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존재를

우리가 느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p. 271)

 

Ü 신의 숭고미를 찬양한 괴테의 글이다. 멋지다 괴테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가 시간 속에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 라고 단언했습니다. 신이 세계를 시간 밖에서 창조했다는 의미지요 (p. 275)

 

□ 하나님은 천지를 짓기 전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런 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짓고 계셨다. (p. 276)

 

Ü , 멋지다.

 

□ 빅뱅이론 역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주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탄생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펼쳐졌다고 주장하기 때문 (p. 276)

 

Ü 이 상상, 빅뱅이전의 우주를 상상하는 일, 언제나 떨리고 막막하고 희미하다.

 

□ 우주배경복사, 정지우주, 우주상수, 도플러 효과 (p. 279)

 

Ü 이해하기 어렵지만 훗날 검색을 위해 기록한다.

 

□ 과학자들은 빅뱅이 시작되는 10 -43승 초 이전, 즉 플랑크 시기 라고 부르는 때에 양자적 요동에 의해 특이점이 형성되었으며 그 크기는 약 10 -33승 센티미터 이 값을 플랑크 길이라고 한다. (p. 283)

 

137억 년 전으로 계산되는 아주 먼 옛날, 밀도와 온도가 최대이고 크기가 초소인 특이점 singularity 이 있었습니다. (p. 282)

 

Ü 각주) 특이점이란 천체물리학에서는 중력의 세기, 밀도, 온도와 같이 물리적 측정량이 무한대가 되는 하나의 점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어떤 기준을 상정했을 때 그 기준이 적용 되지 않는 점을 뜻한다.

 

이 우주를 출범시키는 데 필요한 정밀도는 우주의 순간순간 행동을 지배하는 동역학 방정식들이 이미 우리에게 보여 준 놀라운 정밀도에 비하여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빅뱅은 어째서 그렇게 정밀하게 계획된 것일까? (p. 283)

 

□ 절대적 무,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그건 아직 모른다 라고만 대답하고 신학자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그 원인이 바로 신이다 라고 말합니다.

과학 이론도 더는 연역될 수 없는 가정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 물음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지요. (p. 286~287)

 

□ 무한대는 아무리 큰 수보다도 크고 무한소는 아무리 작은 수보다도 작지요. 이처럼 무한은 무한히 물러납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p. 287)

 

Ü 수학에서 신을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여럿 있는 것 같은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의 개념이 극한개념 이다.

 

10 -43승 초에 특이점이 폭발하면서 우주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거의 10 50승배까지 폭발적으로 인플레이션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알려지지 않았어요 (p. 288)

 

모든 일이 어찌 그리 순식간에 어찌 그리 적절히 조절될 수 있었을까요? 그 값들에 아주 미세한 변화만 있었어도 우주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테고 우리와 같은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었다니 도대체 이러한 숫자들과 물리법칙들은 모두 어디서 왔을까요? (p. 291)

 

Ü 이 눈물 겹고도 허무한 물음. 그것을 답하는 자가 신이다.

 

□ 그러나 그렇게 많은 우주와

광막한 하늘의 평원을 포함하는

이 강력한 체계는

전체를 이루는 1000분의 1일 뿐

아마도 그 전체는 역시 훌륭하고

수많은 우주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p. 294)

 

Ü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했던 리처드 블랙모어

 

우리가 우주에서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옳지만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덮어 두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우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우주에 대해 조사하고 그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현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P. 297)

 

Ü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의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에서

 

□ 바다를 가르고 태양을 멈추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신에게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P. 300)

 

Ü 이거다. 바로 이거였다. 서양을 문명을 이해하는 핵심이 아닐까 한다. 전지전능, 세계초월

 

□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발화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 역시 그 언어가 속한 존재세계로 인해 가려지게 마련이지요.

성서 텍스트의 사실은 예컨대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존재세계의 사실입니다. (P. 301)

 

Ü 홍수의 물과 오아시스의 물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양식 곧 문범은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을 제공하지요.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그 결과 이미 사용 가능한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발견을 가능하게 해 주는 진보 곧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진보를 선물합니다. (P. 303~304)

 

□ 소통을 방해하는 비무장지대를 설정함으로써 평화를 얻는다. 과학자가 신적인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할 수도 있고 또 신학자가 과학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두 진영은 이해의 공유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서로 대화를 피해야 할 수도 있다. (p. 306)

 

Ü 힘의 진공상태를 만들어 평화를 도모한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언어놀이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이야기다.

 

□ 새로운 문법(삶의 양식)을 익힐 수만 있다면 두 가지 언어놀이가 가능하다가 되겠지요. (p. 307)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고 불가공약적인 incommensurable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하자는 것이지요 (p. 308)

 

□ 신이 세계 안에 내재할 뿐 초월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는 범신론 또는 만유재신론

신은 세계를 초월할 뿐 내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는 자연신론

기독교에서는 절대적 독립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초월성과 세계 부단히 참여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도해 가는 인격적 속성을 가졌다는 의미인 세계 내재성을 동시에 지닌 유신론적 신입니다. (p. 314)

 

□ 괴테

오직 세계의 밖에서 만날 수 있는 신은 무엇이겠는가?

손가락으로 모든 것을 순환 속에서 운행하게 하는 자!

하지만 그에게는 세계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도 어울리네.

자신 안에 자연을 자연 안에 자신을 품고 있는 자!

그래서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그 무엇은

결코 그 분의 힘에서 결코 그 분의 정신에서 멀어지지 않네. (p. 315)

 

□ 시간 밖의 시간에 존재하는 시간 밖의 존재가 도대체 어떻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실험적으로 입증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시간이란 관찰자가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자와 같이 질량 없는 입자들에게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아요. 설령 그 입자들이 광원으로부터 탐지 장치까지 수십억 년을 이동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 입자들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전송 시점과 수신 시점이 동일하지요 (p. 320)

 

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일단의 뭔가가 상상이 가능하다.

 

□ 미래란 장차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어떤 시간적 과정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점차 자라나듯이 영원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시간인 역사로 순차적으로 침입해 들어옴일 뿐이지요. (p. 321)

 

우리는 있었다거나 있다 그리고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존재에는 있다 만이 참된 표현으로서 적합하지요. 있었다 와 있을 것이다 는 시간 안에서 변화하며 생성 소멸하는 존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p. 322)

 

Ü 이것이 3천년 전의 인간의 사유였다니 믿기지 않는다.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인간의 사유

 

□ 플라톤에 의하면 시간은 영원의 모상입니다. 모상이란 본떠서 만든 모형이라는 뜻인데요, 개개의 사물이 이데아의 모상이라는 것과 같은 논리지요. (p. 325)

 

Ü 플라톤의 사상은 모든 만유가 시간을 포함하여 이데아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 시간은 영혼이 잽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신의 영원성이 들어 있기에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p. 327)

 

□ 영원은 신에게 속하는 동시에 값어치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인간에게 속하는 동시에 세속적이고 부질없는 것이지요. 셰익스피어가 말합니다.

 

민첩하고 교활한 파발마, 근심의 전달자,

추한 밤의 친구이자 꼴불견인 시간이여.

너는 청춘을 좀먹는 자, 거짓 즐거움의 못된 노예이며

슬픔을 구경하는 천박한 자, 죄악을 짊어진 말이며

미덕의 올가미다. 너는 모든 것을 낳고

또한 모든 존재하는 것을 소멸시킨다. (p. 328)

 

□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하나는 하나는 한결같이 머무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둘 다 마음의 삶이라는 점에서 같지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부단히 신을 닮으려 하고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는 과정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p. 330)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로 끝없이 분산되어 흘러가면서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고 말게 하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자는 것이지요 (p. 331)

 

Ü 마음은 영원에 살게 하고 육체는 순간을 살게 하라. 자신감으로 충만해진다. 큰 산을 오르고 내려와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지만 이건 또 다른 심적 경험이다. 영원에 사는 마음이라

 

□ 베르길리우스 시간은 모든 것을 가져 간다. 심지어 마음까지도

셰익스피어 너는 모든 것을 낳고 또한 모든 존재하는 것을 소멸시킨다.’ (p. 333)

 

□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지금 기쁘거나 슬프다면 그건 대개 지금 바로 이 순간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지나간 슬픈 일이나 다가올 미래의 기쁜 일과 연관된다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처럼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여 마치 바로 눈 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진 이런 능력을 상기의 힘 vis memoriae 이라고 불렀지요 (p. 334)

 

우리의 마음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p. 337)

 

Ü 우리는 왜 세속적인가에 대한 물음의 답이다. 인간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원하는 것을 얻은들 소득이 무엇이랴

그것은 꿈이요 한순간의 입김이다.

덧없는 쾌락의 거품일 뿐

누가 일주일의 고통을 주고 한순간의 환락을 사랴.

장난감 하나를 얻고자 영원을 팔아?

달콤한 포도 한 알을 얻기 위하여

덩굴을 모두 망칠 자가 누구랴.

어떤 어리석은 거지가

당장 왕홀에 맞아 죽을 텐데 왕관을 만지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여전히 일주일의 고통을 대가로 한순간의 환락을 사지 않나요? (p. 339)

 

Ü 물리적 시간을 사는 인간의 삶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한순간의 환락이 계속되는 삶을 살고 싶으나 그 또한 고통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향한다.

 

□ 키르케고르의 반복’,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와 시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p. 340)

 

Ü 영원을 팔아 순간을 사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신의 시간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책이다. 꼭 한번 읽어보아야 할 필독서

 

무의지적 기억, 상기, (p. 341)

 

Ü 우연한 날씨에서 번쩍 떠오르는 산에서의 동시적 날씨에 대한 기억, 그것을 현학적으로 이렇게 부르는구나. 무의지적 기억이니 상기니 하는 말들로 말이다.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처럼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갈파한 대로 새로운 여러 가지 상을 지나간 것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해서 미래의 행위나 사건 희망을 구성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p. 342)

 

Ü 사무친다는 감정의 해석인가. 이 말 와 닿는다. 사무칠 때는 신이 나와 같이 하고 있는 순간임을 느끼자.

 

□ 부단히 반복되는 이러한 회상들을 통해 마르셀은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고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p. 343)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p. 343)

 

역사란 물리적 시간에 의한 단순한 자연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연쇄적 또는 인과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독일 철학자 헤겔은 말한다.

역사 기술이 시작되기 이전에 여러 민족에게 흘러가 버린 시간, 즉 여러 가지 혁명과 대이동 그리고 격변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를 시간을 우리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그들은 주관적 역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 역사도 갖고 있지 않다.’ (p. 344)

 

Ü 역사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주관은 매우 중요하다. 반대로 그 역사를 냉철하게 이어나갈 책임이 있는 역사가는 객관이 매우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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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살표형 직선이 부단히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한다면 직선의 왼쪽 끝은 시간의 시작(태초)이고 오른쪽 끝은 시간의 끝(종말)이 됩니다.

ⓑ에서 보면 선으로 보이지만 ⓐ에서 본다면 점으로 보입니다. 물론 비유이지만 시간안에서 사는 우리는 b의 위치에서 시간을 보는 것이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신은 a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으로 보이고 신에게는 시작과 종말이 고정된 영원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매순간 인식되지만 신에게는 그 모든 일이 단번에 파악되지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오직 신만이 미래의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것들을 인식한다.’ (p. 345)

 

□ 물리적 시간이 b에서 보는 것, 심리적 시간은 a에서 보는 것입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에서 심리적 시간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꾸는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지요. (p. 346)

 

Ü 그러나 심리적 시간을 자신에게 드리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되 현실에 대한 스탠스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a에서 보는 당신의 생애는 아마도 신이 보는 그대로 탈시간화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통일체로 드러나겠지요. (p. 347)

왜 우리가 매 순간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사실들이 신에게는 예정된 사실인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p. 348)

 

하늘에서 라는 말은 영구적 정의가 살고 있는 영적 궁창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p. 351)

 

Ü 아우구스티누스 주님의 산상설교중에서

 

□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쿼크와 바쿼크가 생겼고 쿼크들이 결합해서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생겨난 겁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물질적인 무엇이 아니에요. 이 소립자들은 존재하기는 하되 그 본질이 확정된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의 무에 가까운 무형적인 것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지요.

잠재된 가능성의 상태 곧 잠세태 潛勢態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려 포텐티아 potential 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p. 354)

 

이 퍼텐셜이 스스로 물질이 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른 바 이 장이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유일한 요소인 셈이지요. (p. 355)

 

Ü 나의 잠세태는 무엇인가. 이 사회의 잠세태는 무엇인가무는 아니지만 무에 가까운 지금의 내 존재가 세상으로 나갈 때의 모습은 무엇인가.

 

신은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물질세계에 대해 절대적 독립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그는 물질세계의 법칙을 초월해 신실한 자들에게 부활을 선물할 수 있는 전능한 자다 그러니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p. 363)

 

Ü 도살자를 무서워하지 말고 니 형들과 같이 죽음을 달게 받아라 하던 어느 어미의 말에서 기독교가 가진 부활신앙의 진수를 맛본다.

 

□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파생된 중요한 기독교 교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물질과 그것으로 구성된 세계가 모두 선하다는 것이지요. (p. 365)

 

Ü 전혀 다른 언어놀이의 또 하나의 시선이다. 善 그리고 부활

 

□ 피라미드식 계층구조에서는 밑으로 내려갈수록 차츰 선이 결핍되다가 맨 끝에는 악만 자리하게 된다는 겁니다. 신플라톤주의에 매료된 르네상스인 단테는 신곡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빛은 하늘과 하늘을

거치면서 점점 약해져서 마침내

우연적인 것(물질)들에까지 이르지요. (p. 366)

 

Ü 단테가 나는 지옥의 단계와 연옥, 천국의 단계는 다름아닌 존재의 사다리 사상을 충실히 반영한 문학적 바이블이었던 거다. 그것을 이해하고 읽었어야 했는데

 

신은 그가 창조하지 않은 질료 즉 마니교에서 말하는 악하고 추한 질료로부터 물질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피조물은 선한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따라서 물질도 선하고 아름다우며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와 세계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 (p. 367)

 

Ü 그렇게 생각한다면 참 좋겠다. 그러나 더럽고 추한 것도 존재물로 엄연히 존재한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두가 루저이자 패자들의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 영국 시인 마크 에이큰사이드 상상의 즐거움

 

신은 자신의 본질적 이성의

성스러운 빛 속에서 신속한 우연의

모든 형상과 가능한 존재의

모든 결합을 통해 펼쳐지는

모든 연속적 창조를 보며 그는 즉시

장구한 시간의 계열 속에서

생성의 때를 결정하고 모든 종류의

살아 있는 영혼에

행동의 범위와 휴식의 시간을 주어

모든 것을 그의 최고의 계획

보편선에 일치하도록 하였다.

그가 선택한 강력한 창조의 모델 안에

즉 그의 관념 안에 태초부터 저장해 온

무수한 우주 속의 최선의 것

가장 아름다움 것들이 이에 충분히 응했다. (p. 369)

 

Ü 이 시로 무와 선을 설명할 수 있겠다.

 

□ 인간은 기근, 전쟁, 질병 외에도 운명, 불안, 죽음, 허무, 무의미성, 죄책 같은 악마적인 것들에 속절없이 노출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엾은 인간적 상황에서 신과 세계의 선함은 언제나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던져주지요. (p. 372)

 

Ü 위로만 하고 말건가. 그것이 종교의 궁극인가. 그럴 수 밖에도 없겠다.

 

측정할 수 없는 그 거대한 하늘의 세월 (p. 375)

 

Ü 멋진 표현이다.

 

□ 빅뱅은 평평하고 균질한 최저에너지 상태의 텅 빈 우주와 또 하나의 숨은 우주 (평행우주)의 충돌로 초래된 것이며 지금과 같은 팽창을 계속하다가 암흑에너지에 의해 다시 수축해 떨어졌던 두 우주가 또다시 충돌을 겪으면서 동일한 주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p. 375)

 

Ü 불교의 억겁과 윤회, 세계, 운행, 시작, 이런 것들이 표현하려는 바가 아닐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시간이란 중력과 속도에 의해 변하는데 초기 우주 상태에서는 중력이 막대하여 시간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느렸다는 겁니다. 슈뢰더의 계산에 의하면 성서의 첫째 날은 오늘날 지구의 시간으로 약 80억년에 해당되고 우주가 좀더 팽창하여 중력이 떨어진 둘째 날은 시간이 조금 빨라져서 약 40억년에 해당, 셋째 날은 20억 년, 넷째 날은 10억 년 다섯째 날은 5억 년, 마지막 날은 2 5000만 년이 되지요. 이 계산법에 따르면 성서의 여섯 날은 우주 나이 150억 년과 대강 비슷해집니다. (p. 376)

 

Ü 구약의 모든 사실들은 불교 경전의 금강경과 매우 흡사한 듯 하다.

 

□ 기독교는 성육신과 함께 시작했고 성육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또 다른 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완연히 갈라서지요. (p. 384)

 

Ü 같은 뿌리 다른 믿음

 

□ 성육신에 담긴 의미 진리를 아는 자나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가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 (p. 388)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 신은 무슨 목적으로 만물을 창조해서 보존하고 인도해 가느냐의 문제 (p. 396)

 

□ 롱사르는 신이 어떤 결핍도 없이 오직 자족과 풍요만 있었는데도 세계를 창조했다고 읊고 있지요. 이에 반해 노리스는 그렇다면 신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자족을 향유하지 않고 굳이 창조를 했느냐고 꼬집고 있습니다. (p. 397)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의 서두에서 한 마디로 그건 일자의 자기초월적 풍요성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일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충족적 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이 급기야는 자기 바깥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p. 400)

 

Ü 한마디로 그냥 만든 것이겠다. 신이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해 만들어진 세계

 

□ 신곡에서 단테는

 

모든 시샘을 스스로 몰아낸 신의 선함은

마치 불처럼 자기 속에서 타올라 빛을 발하는 불꽃 같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외부에 퍼뜨린다. (p. 400)

 

Ü 인간의 인격도 마찬가지겠다. 충만하고 지고지순한 인격을 가진 자라면 티를 내지 않더라도 퍼지게 될 터다.

 

세상은 신을 필요로 하지만 신은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신은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만 세상은 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세상은 신에게 의존하지만 신은 세상에 의존하지 않아요. 신은 세상을 모두 알고 있지만 세상은 신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p. 401)

 

Ü 맞는 말이다. 그런데융은 신을 안다고 했는데

 

□ 시인이 노래한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유를 들어보자.

 

독일 고전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 친구에서

 

저 우주의 위대한 주인은 친구가 없다네

결핍을 느꼈고 그래서 그의 지극한 복을

반사는 복된 거울을 창조했다네

그 최고의 존재는 똑 같은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고

온 존재의 왕국이라는 잔에서 일고 있는 거품은

무한하다네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수도사 생활의 서에서

 

신이여, 시간이 공간 속에서 완성되도록

당신이 당신의 목소리를 앞에 내세웠던

그때를 나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는 무()가 상처와 같았습니다.

그때 당신은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그 상처를 달랬습니다. (p. 403)

 

Ü 역시 시인이 신을 접한다. 신의 마음을 달랜다.

 

□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하지 않는다. 만약 자연의 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눈먼 시계공이다.

 

도킨스는 무신론을 이끌어 내는데 한마디로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이끌어 가는 신은 니체의 말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지요 (p. 405)

 

Ü 새겨 볼 말이다. 신은 죽은 것은 아니고 애초에 없었다는 것. 신의 작품으로 여기는 세계는 어쩌면 누구의 작품도 아닌 우리들만의 작품이라는 것. 그래서 만들어 가기 나름이라는 것.

 

□ 라이프니츠의 진화론과 단자론의 접목, 존재의 사다리를 활용해 모든 영혼 혹은 모든 생물을 위해 유보된 영원성은 서서하게나마 우주에 대한 완성도를 부여하도록 착상된 거대한 장이다. (p. 409)

 

Ü 좋은 아이디어이긴 하다만 여전히 플라톤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이 일어난다. (p. 415)

 

Ü 다윈 진화론의 요지다.

 

□ 불과 얼마 전까지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라고 노래한 낭만적 공간이 아니라 테니슨이 표현한 대로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이 지배하는 살벌한 공간으로 변해 버렸지요. 나아가 이 용어들을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한 사회진화론과 함께 서구사회도 그렇게 살벌한 공간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이 그러하다면 인간사회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사회진화론이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중심으로 서구 각국에 들불 번지듯 퍼져 나갔기 때문이지요. (p. 417)

 

Ü 이 안타까운 장면이 사회 진보가 아니라 진화라는 담론으로 야만화 된 이유다. 이제야 비로소 그 폐해를 깨달은 서구는 다시 사회진화 이전으로 되돌아 가려 하지만 이제 막 그런 사상이 경쟁이라는 가치를 미화하기 시작하고 한참을 달려가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살벌한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탈출구는 있는가. 있다면 어디인가. 무엇으로 부터인가.

 

□ 생존과 번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세계의 법칙들이 학문, 예술, 종교와 같은 정신적 가치도 함께 추구하는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척 불편합니다. (p. 419)

 

19세기 중엽, 사회다윈주의자들은 당시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싹트던 새로운 정치체제와 손을 잡습니다.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등의 자유방임경제, 정부불간섭주의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자본주의와도 입을 맞추었지요. 우파의 과학으로 발전

 

Ü 이제 싸움 잘하는 놈은 못하는 놈을 맘껏 잡아먹고 유린할 수 있는 권리를 합법적으로 얻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길러진 우수한 개인, 계층, 계급, 국가, 인종만 살아남는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사회 전반에 강력하게 퍼뜨렸어요. 이들에게 사회란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진화를 실현해야 하는 계몽의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대내적으로는 인종, 계급, 남녀 차별주의,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로 발전. 사회다윈주의자들은 국내에서는 우생학을 근거로 단종법 등을 추진함. 1, 2차 세계대전으로 서서히 잉태됨 (p. 423~424)

 

□ 다윈의 인간 유래 중에서

항상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 부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선택이다. (p. 426)

 

Ü 인간 공동체의 메커니즘과 동식물의 집단 메커니즘은 다르다.

 

□ 프랑스대혁명 이후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함께 추구하고 있다고 규정한다면 인류는 당시 매우 나쁜 선택을 한 겁니다. (p. 427)

 

Ü 다윈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은 본질이 무사유라고 설파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또는 거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사회다윈주의자들이 바로 그렇게 행동했고 아렌트가 경악했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그 역사적 귀결이었지요. (p. 428~429)

 

□ 등산에 열광했던 토마스 헉슬리는 인간을 살아 있는 세계의 알프스 산맥;으로 비유 (p. 430)

 

□ 다윈의 아들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진화한 그 새로운 인간이 초인이라 했다.

 

그대들은 구더기에서 인간으로의 길을 걸어왔도다.

그러나 그대들 속에는 아직도 많은 것이 구더기로 남아 있구나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었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도 어떤 원숭이보다 더한 원숭이인 것이다. (p. 432)

 

19세기 말 서양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진화론을 적극 수용, 그들이 고의로 그렇게 한 데는 세족적 이익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속내는 해외 선교에 있었습니다. (p. 440)

 

Ü 폭력적 evangelism,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되기 힘들 것 같다.

 

영국과 미국의 정치제도와 사상 그리고 종교가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하므로 인류의 명백한 운명은 앵글로 색슨족에 의해 전 세계의 정치적 사상적 종교적 지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른바 앵글로 색슨 태제를 내세워 제 3세계의 식민지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하던 때였습니다. 그러자 정치적 팽창주의에 편승해 제3세계에 기독교를 포교하려는 종교적 팽창주의도 기독교 안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 (p. 440)

 

Ü 진화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는 무조건적 표면적 수용이 낳은 어처구니 없는 결과들

 

□ 무한자인 신의 사랑을 유한자인 우주가 받아들이려면 진화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 세계에 일정한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 설득하기를 원하는 신의 사랑에 합당하다는 말. (p. 444)

 

□ 자연법은 확립된 자신들의 능력과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물질적인 현세의 요소들이 얼마나 번성할 것인지를 정해 주며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생성될 수 있는지를 정해 준다. 생겨나는 만물의 이런 기원들로부터 존재하는 것처럼, 각자는 자신의 시간에 자신의 종에 따라 자신의 생성 속으로 들어오고 나가며 제한을 받아서 사멸해 간다. (p. 451)

 

□ 만약 신이 직접 창조했다면 모든 것이 필연적이겠지만 신은 제2원인에 위임해서 창조하기도 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이 우연적이다 라는 겁니다. (p. 453)

 

Ü 한 발 뺀 전지전능, 창조론, 세계설계론. 이로써 진화론은 받아들여지고 탄력을 받는 것이겠다. 

 

□ 그렇다면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진화 원리 또한 신이 만들어 지속적 창조를 위임한 현실화 원리 내지 자연법 또는 영원한 법칙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p. 454)

 

□ 자발적이고 맹목적으로 일어난 세계 vs 태초의 6일에 창조된 세계 (p. 458)

 

Ü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은 문제

 

창조의 합목적성과 진화의 맹목적성을 조화시킬 만한 이론을 기독교는 확보하고 잇는가? 있다면 그 것이 무엇인가? 바꿔 말하자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신의 필연적 계획 안에서 진화의 우연성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전통적 신학 이론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p. 462)

 

Ü 멋진 질문에 가슴 떨린다.

 

사람이 죄를 범하리라는 것을 하나님이 예지 하신다면 사람의 범죄 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범죄가 필연적이라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추론 속에서 그대는 혹시라도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될까 두려워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대는 불경스럽지만 하나님이 미래사를 예견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해야 하거나 아니면 사람이 자유의지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걱정거리가 있던가 (p. 464)

 

□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예지로 그대의 장래 행복에 관하여 오늘 확실히 아신다고 해서 장차 그대가 행복해지기를 시작할 때 행복해지려는 의지를 그대에게서 빼앗지는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대의 의지가 장차 범죄를 저지르라고 예지하신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 범죄가 자유의지가 아닌 것은 아니다.’ (p. 467)

 

설령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의 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것 (p. 469)

 

Ü 윤리학자 해리 프랑크푸르트 대안적 가능성들과 도덕적 책임중에서

 

□ 인간을 극대화한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시간의 극대화가 영원은 아니라는 말 (p. 474)

 

Ü 키르케고르가 주목한 것은 질적 차이

 

□ 수학자이자 과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누군가가 사물에 더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피조물)은 동등하다. (p. 474)

 

Ü 이거 멋진 말이다. 조금 더 안다고 재지 말고 조금 더 가졌다고 으슥하지 말자. 마찬가지로 덜 가졌다고 울지 말고 잘 모른다고 움츠려 들지 마라. 거기서 거기다.

 

□ 밀턴의 실락원에서

 

()가 제한받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서

나의 선을 나타내지 않지만 이는 하든, 안하든 자유요, 필연과 우연은 내게

접근하지 못하니 내 뜻이 곧 운명이니라. (p. 479)

 

Ü 결국 우연조차 필연조차 신의 것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모두 연이다. 연기는 신의 것이다.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구원입니다. 존재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또는 아름다움자체인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 (p. 484)

 

Ü 이거 조금 맹목적 선율이 들린다.

 

4부 신은 인격적이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 안티고네의 정당성 (p. 499)

 

Ü 소포클레스를 소개하며 안티고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이 있어 인용한다.

어떤 뜻에서 이것은 문제극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위법과 자연법, 인간이 제정한 법칙의 힘과 신이 또는 인성이 스스로 구하는 것과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는 불관용에 대한 훈계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왕에 대해 안티고네가 하는 말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도록 다같이 사랑하도록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천성은.’

 

전적인 아테네 휴머니즘의 고백이며 주장이 되고 있음은 읽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 인간의 삶과 죽음에 도사린 두려움을 제거 하는 것.

세네카는 말했다.

 

가난을 무시해라

태어날 때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을 무시해라.

고통은 사라지거나 너희와 함께 끝날 것이다.

죽음을 무시해라.

죽음 너희의 고통을 끝내 주거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p. 504)

 

□ 인간의 이성에 의한 인간구원이 신의 은총에 의한 인간구원을 다시 말해 스토아 철학이 기교를 적어도 19세기까지 부단히 위협 (p. 507)

 

Ü 위협해서는 안 되는가. 위협받는 것 조차 두려운 것이냐 위협받아서는 안 되는 신성이 아무것도 아닌 철학에 위협받아 배 아픈 것이냐

 

□ 세네카의 신은 비인격적이고 바울의 신은 인격적, 각각 아테네의 신, 예루살렘의 신으로 나누어 자세히 알아 볼 것 (p. 517)

 

Ü 이런 접근법, 맞는가. 나 지금 왜이리 삐딱하지?

 

내가 나의 큰 목적을 아직 알지 못한 채 은거하며 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은 여러 가지 전환과 변화를 통해 나를 거기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셨다. (p. 525)

 

Ü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중에서

 

□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저 무한한 우주 어딘가에서 지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신들은 인간을 괴롭히지도 않으며 신들은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고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들 지상의 피조물보다는 행복한 삶을 산다는 점에서 신들인 것이다. 신들은 쾌락 속에서 살며 더할 나위 없는 지복 속에서 쉬고 있고 다른 신이나 인간들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p. 531)

 

Ü 에피쿠로스는 신에 대한 악마적 두려움에 가득찬 당대 사람들에게 위와 같이 위로한다. (저자)

 

□ 미국의 국민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아무도 없었다중에서

 

세상의 절망에 대하여

나는 신에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나는 신이 없음을 알았다.

 

신은 내게 말하려고 했다.

(아무도 웃지 말지어다)

신은 내가 없음을 알았다….

적어도 반 이상은 없음을 (p. 534)

 

Ü 운명이라는 섭리에서는 신마저 자유롭지 못한 것 (저자), 신도 몰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 (p. 544)

 

Ü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 (저자)

여기도 조금 맹목의 선율이 흐른다.

 

그리스인들이 철저히 철학적인 데 비해 히브리인들은 지극히 종교적이었지요.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이란 무엇인가 혹은 세계는 어떤 근원물질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철학적 물음에 열중할 때 히브리 선지자들은 신이란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되는가? 하는 종교적 물음에 골몰했습니다. (p. 545)

 

Ü 매우 중요한 point. 이러한 이해가 없다면 문제 해법, 이행의 시작부터 어려워 질 터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 하나님에게는 진노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분으로서는 스스로를 우리의 무지함에 맞추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p. 555)

 

Ü 기발하다.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p. 559)

 

□ 나아가 선한 목적과 의도에서 나온 강제는 오히려 그 인격성을 강화해 줄 수도 있음을 보여 주지요. 신의 섭리와 인격성의 관계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 신의 섭리에 의한 강제는 선한 목적과 의도에 따른 것이어서 신의 인격성을 더 잘 드러낸다는 말이지요 (p. 561)

 

Ü 배타적 유일신일 경우 위의 말은 폭력성의 그림자로도 읽혀지는데

 

□ 네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까닭은

너를 해롭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

너는 그것을 내 품에서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일어나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내게로 오라. (p. 564)

 

□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p. 567)

 

□ 만일 어떤 사람이 구하는 물질적 풍요가 신이 보기에 그에게 궁극적으로 좋다면 그래서 그것이 신의 섭리 안에 예정되었다면 그에게 물질적 풍요를 차고 넘치게 내려 줄 겁니다. 설사 그가 그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만일 해롭다면 그래서 신의 섭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가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 (p. 571)

 

Ü 이건 조금 거슬리는 논거다.

 

□ 신으로부터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는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p. 576)

 

□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훈한다.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내세운다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가라. (p. 577)

 

□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성숙 단계를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어 설명. 이것을 실존의 3단계설 이라고 부름 (p. 580)

 

□ 뉘우침, 심미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로 이르게 함.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범주 아래 처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지요 (p. 583)

 

Ü 양비()론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판단의 유보가 일어나는 상황은 단계가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이 생길 것 같은데

 

□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권한다.

 

절망하라. 그러면 그대 정신은 결코 더 이상은 우울 속에서 신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비록 그대는 그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것이지만, 다시금 그대에게는 아름다워질 것이고 즐거운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의 해방된 정신은 자유의 세계로 날개 치며 솟아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p. 585)

 

□ 나는 그들 모두에게 말하리라. 비록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이제 괴로워하나니 때는 늦었고 세계는 늙었다.

거대한 희망이 대지를 통과하기에

나는 하늘로 시선을 치켜들 수밖에 없다! (p. 585)

 

□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라는 신조로 사는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스스로 갖지 못하며 따라서 그에게는 자유가 없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통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일체를 자신의 선택에 의존하지요. 그는 국토 있는 국왕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p. 586)

 

□ 당신의 발은 익숙해진 길을 따라 다시 돌아가길 원하지 않았을까? (p. 598)

 

□ 그리고 신을 굳세게 믿었지요. 신은 이삭을 원했지만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아들을 바치지만 돌려받을 것이라고 이 부조리한 것을 그는 오직 신앙의 힘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모리아 산을 향해 모진 발검음을 옮겼지요. (p. 600)

 

□ 아브라함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최후의 단계는 무한한 체념이다. 그는 거기서 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에 이르렀다. (p. 601)

 

□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바치려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아들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부였지요.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전부였지요. (p. 604)

 

Ü 의미 부여가 너무 큰 것 아닌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 이후로 제2의 인류가 생긴다는 데까지 의미부여를 한다.

 

5부 신은 유일자다

 

□ 내 영혼이 나의 육체로부터 벗어나 나의 다른 많은 것을 뒤로하고 오로지 순수한 자아만을 찾아 나갈 때 나는 경이롭고 위엄에 찬 아름다움을 발견했나니 정녕 저 숭고한 영역에 속하는 찰나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삶에 확신을 얻고 마침내 신과 하나 됨에 이르더라 (p. 615)

 

Ü 선정에 든 풍경이겠다. 그 경지가 궁금해진다. 자기 스스로를 스캔한다던 그 경지 말이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 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은 마음 안에 있고 마음과 하나지요. 그러므로 항상 흘러가는 것 같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언제나 아직은 오지 않은 것 같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지요.

죽음도 역시 다르지 않거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며 기쁘게 맞지 못하랴!’ (p. 618)

 

Ü 플로티노스의 사유다.

 

□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데아를 넘어 그것들의 근거가 되는 궁극적 실체를 선자체 또는 선의 이데아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선자체를 일자이자 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 확정했습니다. (p. 629)

 

□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신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본질은 선이라고 주장했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p. 633)

 

그의 역사적 영향에 관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유럽의 내세성에 특징적인 형식과 용어와 논법을 제공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적 경향 즉 각별히 건전한 종류의 현세성- 에도 특징적인 형식과 용어와 논법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우리가 이른바 내세적 방향으로 정점에 이르자마자 제 스스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역사상 그 어떤 철학자도 따를 수 없는 플라톤의 위대한 면모입니다. (p. 637)

 

□ 일자의 가장 두드러진 본질은 첫째가 아니라 절대적 초월이지요. (p. 640)

 

Ü 유일자와도 일맥하는 말이겠다. 일자는 유일자다.

 

□ 각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이 실현된 상태를 현실태 energeia, 잠재된 가능성으로 있는 상태를 잠세태 dynamis 라고 규정하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은 재료에서 모습을 띠고 나온 것이 재료에 대해, 그리고 가공된 것이 가공되지 않은 것에 대해 맺는 관계와 같다. (p. 651)

 

□ 마치 건축물의 벽돌처럼 용어는 사유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에 용어의 개발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요 (p. 652)

 

Ü 나는 개인적으로 언어가 가진 이러한 힘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 신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 (p. 657)

 

□ 위격이란 라틴어로는 페르소나 persona인데 당시의 법률적 용어로 어떤 것이 법률상 밖으로 드러난 지위를 말합니다. 예컨데 한 남자가 가정에서는 호주이자 사회에서는 상인이며 시의회에서는 대의원인것처럼 페르소나는 한 개인의 법률상 자격이나 지위를 말하지요. (p. 658)

 

Ü 페르소나의 원래 의미를 알았다. 페르소나는 그 자체로 매우 철학적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따라 나올 수 있는 단어다.

 

□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기보다 동정해야 한다. 그들을 저주하기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미움이나 저주가 아닌 복을 끼치기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p. 666)

 

Ü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던 예수의 절규는 사실 죽음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 자책이다.

 

□ 알렉산드리아 (p. 668)

 

Ü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알렉산드리아 풍경

이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놀이가 질펀하게 한 장소에서 제시 된 것은 훗날 여러 세기 동안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 안티오크,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케이아, 그리고 로마 제국 등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도시를 특징지어줄 혼합 문명의 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대적인 결혼식, 동방과 서방이 최초로 형제애를 맺는 예식은 기원전 324 2월에 거행되었으며 이는 여러 민족들에게 알렉산드로스가 보편적이고 지속적이기를 바랐던 화합과 우애의 징표였다

 

□ 질송이 말하길  심리적으로 말해서 혹자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철학할 수 있고 기독교인으로서 신앙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말하면 누구도 동시에 신플라톤주의자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사유할 수 없다. (p. 674)

 

□ 피조물들에게 성부는 존재를 성자는 합리성을 성령은 성결함을 부여한다. 라는 식으로 삼위일체를 교훈했습니다.

양다리 걸치기 는 비범한 오리게네스에게나 가능했던 일 (p. 677)

 

Ü 저자는 양시론을 자유를 뺏는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 샘이 시내가 아니고 시내가 샘이 아니지만 둘은 하나이고 같은 물이 샘에서 시내로 흐르는 것과 같이 신성도 구분 없이 성부에게서 성자에게로 부어진다. (p. 683)

 

□ 아리우스주의자들은 모음 하나만 덧붙인 호모이우시오스 homoiousios : 유사본질, 이라는 용어가 채택되기를 바랐지만 니케아의 결정은 호모우시오스 homo-ousiou :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를 택했어요. (p. 686)

 

Ü 또 다시 용어가 승패를 갈랐다.

 

□ 혼탁한 강물이 범람하는 땅에서 달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자라는 법 (p. 688)

 

□ 바실리우스가 동방교회에서 처음으로 삼위일체를 세 실체, 한 본질 이라고 확정한 것 (p. 690)

 

Ü 한 인간의 사유를 가지고 진리증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셰익스피어 햄릿에서 분명한 말을 써야겠어. 어정쩡한 말을 쓰다간 봉변당하겠는걸’ (p. 697)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은 언어가 우리의 지성을 사로잡는 것에 맞서는 투쟁’ (p. 697)

 

Ü 각주) 철학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가르쳐 주는 것

 

□ 프랑스 한 의사가 아픔이라는 것은 없고 오직 아픈 사람들만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쉽고 간단한 문장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 전체를 요약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요약한 것이다. (p. 699)

 

□ 오직 존재라는 신의 본질만을 나타내는 표현인 에센티아 essentia’가 더 적합하다고 주장 (p. 709)

 

□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존재는 또다시 낳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바로 그때까지는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다. (p. 713)

 

Ü 이런 논리가 횡행한 것을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없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 모든 피조물을 넘어 시간과 공간의 어떤 간격도 없이 동일하시며 진리와 사랑과 영원 그 자체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이시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나누어 표현할 수밖에 없으며 한꺼번에 이름을 댈 수도 없고 글자로 쓴다고 해도 일정한 면적을 각각 차지할 수밖에 없다. (p. 717)

 

Ü 아우구스티누스, 이 사람 통찰력이 대단한 사람이구나.

 

□ 서로가 서로 안에 있다. (p. 724)

 

Ü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너무 많은 힘을 빼고 있는 것 같다.

 

□ 조성음악,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음이 동시에 울려 화성을 이룬다는 겁니다. (p. 727)

 

Ü 음악의 화성까지 가져와야 설명이 되는 이 어려운 개념은 실상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설명에 눈물겹기까지 하다.

 

□ 누구든지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 흙덩어리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된다면

대지는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고

만일에 모래펄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땅이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여라

어느 누구의 죽음일지라도 그 역시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는 인류 속에 상호침투된 존재이기 때문이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그를 위하여 조문할 사람들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기에 (p. 731)

 

Ü 멋지다. 인류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사유.

 

□ 다시 말해 구약의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신을 기독교로부터 분리해 내려던 마르시온을 정죄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배타적 종교로 남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p. 738~739)

 

Ü 영향이 있지 않았겠는가.

 

* 만일 야훼가 유일신이라면 구약성서는 왜 야훼에 대해 다신론적 표현을 사용했는가?

* 유일신이 다른 신들을 질투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사실 야훼는 이스라엘의 부족신으로서 그 이웃 부족의 신들과 싸우는 신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토록 배타적이고 폭력적이었던 게 아닌가?

* 아니 다른 사설은 전부 집어치우자! 무엇보다 예수가 직접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 그러니 기독교는 마르시온처럼 야훼를 부정하거나 자기들 신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인정하는 게 솔직해지는 방법 아닐까? (p. 743)

 

Ü 교회사적으로 신을 풀어내는 저자의 방향에 잠시 캠벨을 생각했다. 신의 존재를 신화로 풀어내는 사람 말이다.

 

대강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까지 약 600년은 인류의 정신사에서 가장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장자 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나왔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가 완성되었고 부처가 생존해 있었으며 이란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했지요. 또한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했으며 투키디데스와 아르키메데스도 이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바로 이때 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야와 이사야, 예레미야를 거쳐 제2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p. 747)

 

Ü 놀랍고도 신기한 사실이다. 칼 야스퍼스는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 시기를 자축시대라고 했다. Die aschenzeit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스트리아, 시인) 순례자의 기도에서

 

당신을 찾는 이들은 모두 당신을 시험해 봅니다.

그리고 당신을 찾은 이들은

당신을 형상과 모습에다 결박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마치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고 있듯이

내가 성숙함에 따라

당신의 나라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허영 따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P. 749)

 

Ü 웬만한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이 시인의 촌철살인 앞에서 무릎 꿇어야

사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거북했다. Evangelism에 포섭된 기분이었는데 릴케의 시에서 편안해 진다. ‘그들의 신이 아주 친해진 느낌이다.

 

□ 오늘날 신학자들에게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종교적 다원주의 (p. 754)

 

□ 유스티누스는 소크라테스나 아브라함처럼 설사 성육신한 로고스인 역사적 예수와 그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진리를 알았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p. 765)

 

□ 단테 지옥편의 제1지옥 림보, 이곳에는 세상에서 도덕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살아서 역사적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의 영혼이 갇혀 있다. 호메로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루카누스, 헥토르, 아이네이아스, 카이사르, 브루투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모크리토스, 디오게네스, 탈레스, 오르페우스, 키케로, 세네카, 유클리드, 히포크라테스, 아비켄나, 아베로에스가 있다. (p. 766)

 

Ü 인류 지성을 편협한 교리에 모두 병신으로 만들어 놓았구나. 이해했어야 했는데

 

□ 존재한 것은 무엇이나 다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의 힘 (p. 776)

 

□ 종교들 사이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종교들 사이의 대화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있을 수 없다. (p. 781)

 

□ 궁극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화합시켜 하나의 교회로 만드는 것 (p. 792)

 

□ 그 안에 담긴 그리스적 요소를 낱낱이 지적하며 거룩한 예배당을 역겹고 이교적인 음란함으로 가득 채웠다고 힐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p. 796)

 

Ü 최후의 심판에 묘사된 체세나 추기경을 말하고 있다.

 

□ 몰트만 피조물들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801)

 

맺음말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가 공공연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었지요.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다 (p. 803~804)

 

□ 신을 배제한 이성, 사회진보, 무가치한 민중해방. 이것들은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이성, 진보, 해방은 아니지요 (p. 804)

 

Ü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신이 항상 포괄한다고 하지 않았나. 인간은 선을 추구한다고 하지 않았나. 선을 담보로 한 사회진보, 이성, 민중해방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지 않은가. 공동체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선 공공선의 진공영역을 추구하는 가치는 언제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식은 그 입장과 위치에서만 합당하고

그의 시간은 하나의 찰나이며 그의 공간은 하나의 점

어떤 차원에서든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라면

이른 들 늦은 들 이곳인 들 저곳인 들 어떠리

오늘 복 받은 자 온전히 복 받고 있느니라

천 년 전부터 복 받은 자와 다름없이. (p. 811)

 

 

3. ‘()한 도전 VS ()한 도전(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읽는 동안 감탄을 하기도 거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을 이야기한다는 그 자체로 위대한 도전이다. 그 어떤 도전보다 숭고하고 지적이다. 신이라는 주제 하나로 서양을 그리고 기독교를 파헤친다는 대담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큰 기대를 하고 들어가는 독자들에게 그는 책의 표지의 찍혀 있는 크고 명확한 신이라는 글자와 같이 자신감 있게 신의 심장까지 파고 들어간다.

 

책은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20세기 신학까지를 포괄한다. 동시에 플라톤 철학에서 시작해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키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의 현대 철학까지 아울러 논의를 전개한다. 특히 신에 대한 탐구가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현대 물리학의 빅뱅이론, 다중우주론 같은 주제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피는데 그의 지적 지평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특히, 시간도 끝도 없는 어떤 무한한 바다,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내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우주의 광대무변함을 굳이 설명하는 이유가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포교의 교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책을 읽으며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그러나 저자가 꺼내어 놓는 담론, ‘오늘날 삶에 근원적 의미를 주던 그 신이 죽어버린 뒤 가치의 몰락과 의미의 소멸로 인간이 고통 받고 있다면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오늘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때 나는 그에게 정신적 안도감을 느꼈다. 결국 기독교가 결론이 되어지지 않기를 바랬던 불안을 잠재우는 순간이었다.

 

책은 매우 연역적이자 어느 면에서는 귀납적이다. 여러 사례와 주제들을 놓고 신에 대한 논거를 많은 사실과 관념에서 출발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면에서 귀납적이지만 대부분의 논거는 결론을 미리 내어 놓는다는 점에서 연역적이다.

 

독자를 이리도 배려한 책은 드물다. 그의 성격일까. 예상 Q&A를 콕콕 집어 그에 대한 답을 성실히 그리고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독자의 간지러운 곳을 미리 알고 시원하게 긁어주는 효자손과 같은 책이다. 이것은 저자가 아마추어라면 시도하지 못할 구성이다. 신을 찾아가는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며 책을 구성한 것은 과감하다. 겸손하고도 부드러운 구성이지만 지적 자신감을 드러내는데 손색없다.

 

다만 사례를 들어 설명할 때는 모두가 적절하고 상황에 맞는 예문과 예화를 들었지만 같은 작가의 예문이 너무 자주 나오기도 한 것 같다. 예를 들면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락원, 플라톤의 국가는 각 챕터마다 거의 매번 출연했다. 아예 그렇다면 한 꼭지를 위대한 사상가들의 신의 생각을 별도 마련해 거기다 신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진 철학자, 사상가 들을 집대성 해보는 것도 좋은 시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테면 융의 신, 단테의 신, 공자의 신, 플라톤의 신 등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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