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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6일 11시 25분 등록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김용규 지음

 

1. 저자에 대하여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 불리는 김용규 작가를 소개해보자. 그는 독일 튀빙겐 대학교와 프라이브르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호기심 많은 딸과 살고 있다. 저자는 저자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 상에 별로 없다. 이번 조사는 선배인 7기 연구원들이 만나본 김용규 저자에 대한 인터뷰를 보고 정리해 보았다.

김용규 저자는 본디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아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과학자가 됐으면 ‘신’에 대해 어떻게 서술했을까? 이번주에 읽은 책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으로 서술할 수 있었을까? 그의 논리에 의하면 전공이 다르다고 다른 글을 썼을 것 같지 않다. 그는 재수를 하면서 우연히 철학 책을 보게 되어 흥미를 느끼고 철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가 젊은 시절에 좋아했던 글귀는 다음과 같다. ‘사랑에 대한 갈구 (longing for love), 지식에 대한 탐구(search for knowledge), 인간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정심(unbearable pity for suffering of mankind)’ 라고 한다. 이것은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의 자서전에서 읽은 그의 좌우명이라고 한다. 나도 이 문구가 맘에 든다.

 

 그는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중심으로 작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작가라면 현실에, 시대에,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목소리를 듣고 써야 한다. 파블로 네루다가 그의 시 <시>에서 ‘시가 나를 찾아왔어, 난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라고 말했듯이 존재의 진리가 작품 속으로 스스로 들어오게 해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 쓰라고 했다. 즉 시대가 그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대신 말하는 사람이 바로 작가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깊이 공감한다. 나도 존재의 진리가 작품속에 들어오길 바란다. 나의 짧은 식견 대신 글을 쓰는 또다른 인격, 또다른 자아가 내안에서 생성되기를 바란다.

 

 그는 삶이 곧 글이라고 한다. 피히테는 ‘어떤 사람이 어떤 학문을 하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쓰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 삶이 곧 글쓰기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쓰는 것이다. 삶과 글이 일치하는 작가를 존경하는 내 마음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나도 그렇게 써야겠다. 내 삶이 곧 글이 되게. 그러려면 난 우선 부지런해져야겠다.

 

 그의 저술을 소개하며 저자소개를 마친다. 그는 인문학과 철학의 풍부한 재료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인문학의 연금술사로 불린다. 국내에 ‘지식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알도와 떠도는 사원》《다니》를 통해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지은 책으로 깊고 풍부한 철학의 맛과 문학의 향기를 절묘하게 버무려낸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서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 신》,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높이는 도구로서의 논리학을 풀어낸 《설득의 논리학》, 영화를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데칼로그》《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데칼로그》등이 있다.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살해범이다!” -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김용규

정의, 진선미, 생명, 위대함의 다른 이름, ‘신’을 되살리자! (동영상)

http://ch.yes24.com/Article/View/17049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지은이의 말>

p8 어느 문며엥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가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갑니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화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룹니다. 서양문명이 특히 그렇지요. 따라서 내 생각에는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를, 그 세계가 오랫동안 숭배해온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비록 흔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썩 좋은 방법입니다. 이 방법이 서양문명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바로 보고 그 해결책을 마련할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것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가 가진 위험을 풍자한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이 귀해 식수마저 부족한 어느 나라 사람이 서구를 방문했다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시원스레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경탄했다지요. 그래서 수도꼭지를 여러 개 사서 자기 나라로 돌아와 벽에 꽂아 놓고 틀어 보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는 내용입니다. 벽 뒤에 마땅히 있어야 할 배관도, 급수 펌프도, 정수장도 없으니 물이 쏟아져 나올 리가 없겠지요. 심층적 이해 없이는 해결책도 없습니다!

 

p9 따라서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p23 ‘예술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요아킴 빙켈만이 “고대예술이 이룩한 기적”이라고 극찬한 <벨베데레의 아폴론>이 자웅을 겨룰 수 있겠지요.

 

그의 육체는 모든 현실성을 초월하여 숭고하고,

그의 자세는 내부에 흐르는 위대함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며,

그의 발걸음은 경쾌한 발마의 날개를 갖고 있다.

영원한 봄이 매력으로 가득 찬 남성의 육체에

감미로운 청춘의 옷을 입혀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다.

 

p25 이마에서 코로 흐르는 곧은 선을 보세요.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은 평화가 깃들어 있지요. 싱그러운 뺨은 또 어떻습니까? 단 한순간도 식지 않을 것 같은 정열이 자리하고 있지요. 선악을 아직 모르는 순수한 눈망울에는 그리움만 가득하고, 거짓이라곤 아예 모르는 천진한 입술에는 끝 모를 갈망이 머물고 있습니다.

 

p27 결론부터 말할까요? 신은 인간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무지 어떤 감각적 형상도 갖고 있지 않지요.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

p37 핀다로스는 신과 인간이 크기와 힘에서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종족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지요.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대담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리스인들은 어려서부터 체조와 운동경기를 통해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운 육체를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에로스의 날개

p41 이데아의 미란 가시(可視)적 자연이 아니라 가지(可知)적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그들은 인체를 조각할 때 수학적 비례, 조화, 균형을 지나치리만큼 엄격히 따졌습니다.

 

p45 이렇듯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흔히 - 알려진 것과는 달리 - 감각적이거나 육체적인 사랑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갯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에게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이로ㅆ 에로스 자신도 신적 존재가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르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신인동형설

p50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운동(kinesis)’이라는 말은 장소의 변화뿐 아니라 질적․양적․실재적 변화를 동시에 의미하지요. 오랫동안 이런 의미로 전승이 되었으므로 만일 당신이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신학자는 물론, 서양 근대철학자나 신학자의 글에서도 ‘운동’이라는 말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변화’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고나점에서 다시 풀어 보면 ‘부동의 운동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는 ‘자기는 질적․양적․실재적․장소적 변화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질적․양적․실재적․장소적 변화의 근원이 되는 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요.

 

p51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우스나 아폴론 같은 유형(有形)의 그리스적 신 개념이 처음으로 ‘부동의 운동자’라는 무형(無形)의 자연 원리로 바뀐 겁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이 별다른 설명 없이 다분히 종교적으로 설정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를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무형의 신 개념을 그리스 철학 안에 최초로 확정한 계기였지요.

 

p52 왜 구약성서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세기 1:26)라는 구절이 있는 걸까 하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분명 그 구절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사용된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형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첼렘(Selem)은 원래 ‘그림자’(시편 39:6)라는 뜻이지요. 또한 ‘모양’을 의미하는 떼무트는 보통 ‘어떤 것과 닮은 상태’(역대기 하 4:3, 이사야 40:18)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신의 ‘외적 형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적 본성’을 뜻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이지요.

 

p53 또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존엄성에까지 확대 된다. 이 말에는 아담이 창조될 때 의로운 마음을 향유하면서 스스로 감정을 잘 통제하고 자신의 감각이나 모든 내면적 사상을 잘 조절하며, 창조주의 영광을 아름답게 나타내는 완전한 순결성을 부여받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인간이 가진 신의 형상으로 ‘순결성’을 내세웠다는 의미지요.

 

신론과 존재론 그리고 서양문명

p55 성서에서 자신을 계시한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 이상 간데없이 뻗은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하는 것 같은 극적 종합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분히 종교적이면서도 분명 존재론적인 성격을 띠고, 여전히 히브리적이면서도 여실히 그리스적이지요. “성서의 종교에는 존재론적 사상이 없다. 그러나 성서의 그 어떤 상징도 그 어떤 신학 개념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 라는 독일 출신 현대신학자 파울 틸리히의 말에도 바로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omnipresence)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을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지요.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p57 아무튼 ‘신이 곧 존재’라는 가르침에서 신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存在)상실(喪失), 곧 사망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임일 뿐이지요. 신은 영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은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킨 겁니다. 이처럼 성서는 낙원추방의 서사에서부터 존재론적 함축성을 이미 내포한 것이지요.

 

p65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같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그 관계도 분명치는 않으니까요. ‘알면 믿는다’는 입장도 있고, ‘믿으면 안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후자를 견지합니다만, 이 문제는 차치해 두고 일단 알아봅시다.

안다’와 ‘믿는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원인과 결과로 연결 될 수 있나? 있을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 않을까? 안다고 해서 다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믿지만 모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전제가 분명해야 한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믿을 수 있고, 제대로 믿어야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2부 신은 존재다>

 

p75 1880년 교황 레오 13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앙과 이성의 권위를 각각 높이면서도 둘을 친밀하게 결합함으로써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불화를 일거에 해소했다”며 칭송하고 가톨릭학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 칼빈과 함께 기독교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다. 이 명칭, 즉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p79 <<로미오와 줄리엣>>

나의 원수인 것은 다만 당신의 이름뿐:

아, 다른 이름이 되어 주세요.

하지만 이름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요?

다만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여전히 향기로운걸.

로미오는 로미오로 불리지 않아도

그가 지닌 고결함은 그대로인걸.

오, 로미오,

그대의 이름을 버리고

대신 내 모든 것을 가져가세요.

 

p82 구약성서에서 신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은 ‘엘(El)'입니다. 히브리어 엘은 신약에서는 그리스어 테오스(Theos)에 해당하는 말이지요.

엘에서 엘욘(Elyon), 엘 샤다이(El Shaddai), 엘 올람(El olam), 엘로힘(Elohim)등 신을 부르는 많은 이름이 파생되었습니다. 엘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세기 14:18, 시편 7:17)이라는 뜻이고, 엘 샤다이는 ‘전능한 하나님’(창세기 17:1), 엘 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창세기 21:33), 엘로힘은 ‘신의 권능’을 가리키는 엘로아(Eloah)의 강조복수형으로, 강하고도 높은 ‘신적 권능 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지요.

 

p83 따라서 이 이름들은 인간이 신에게 붙인 이름일 뿐 신이 자신에 대해 밝힌 명칭은 아니지요. 이 때문에 그것들을 통해서는 신이 자신에 대해 밝힌 그 ‘무엇’에 관해서는 전혀 알아낼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이 자기 이름을 감춘 것은 사실 신에게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지요. “뭐라고?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고?” 아마 당신은 이렇게 되묻겠지요. 그렇습니다. 신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 말이 당신에게는 무척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플로티노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 의하면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신에게는 이름이 없고 또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p84 당신도 이미 알다시피,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있지요. 예컨대 사과는 사과로 있고 책상은 책상으로 있습니다. 이때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이 존재론에서 말하는 그것의 본질(本質)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存在)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본질과 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세상 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입니다.

 

여기 종이가 한 장 있고 그 위에 당신이 벤 다이어그램을 그린다고 생각해 볼까요? 중앙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당신이 그 한정된 동그라미를 A라고 규정하면 그와 동시에 동그라미 밖은 ~A가 됩니다. 이 경우는 A는-설사 그것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만물을 포괄하는 궁극적 근거가 될 수 없지요. 만물의 궁극적 근거란 그 어떤 것도 제외하면 안 되는데, A는 이미 ~A를 제외했기 때문입니다.

 

p85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pan)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앞에서 밝혔듯이, 어떤 것에게 본질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파악할 수도 없고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는 이야기잖아요? 결국 우리는 신을 파악할 수도,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겁니다! 안타까운가요?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지요.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p86 그럼에도 신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를 이름 지어 부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열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어렵게 알아낸 신의 이름이 ‘야훼(YHWH)'이지요. 이제 곧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존재‘입니다. 그래서 만ㅇ리 신에게 본질이 있어야 한다면-따라서 신에게도 이름이 있어야 한다면-그것은 오직 ’존재‘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가 “신을 가리키는 그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다”라고 말한 이유이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모든 피조물은 본질과 존재가 구분되지만 “신의 본질은 그의 존재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까닭입니다.

 

지성도 넘고 신비도 넘어

p89 같은 말을 독일의 현대신학자 에버하르트 윙엘은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가 그에 관하여 말하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명칭 위에 머물러 있다”라고, 보다 종교적으로 표현했지요.

<<파우스트>>

“누가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겠소?

누가 고백할 수 있겠소,

나는 그를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느낀다고 해서

누가 감히 발설할 수 있겠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만물을 포괄하는 자,

만물을 보존하는 자,

그는 당신을, 나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괄하고 보존하고 있지 않소?“

 

어쨌든 이런 이유에서 신에게는 이름이 없고 또 없어야 하지요.

 

p92 하지만 모세는 그 일이 도통 내키지 않았고, 그래서 굳이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려는 신에게 다소 불손한 의도를 감춘 채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출애굽기3:13). 신이 자기에게 맡기려는 사역을 빌미로 신의 이름을 물은 것입니다.

모세는 신이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는 속으로, 신은 어쨌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더는 이집트로 가라는 소리도 못할 것이라는 약삭빠른 계산을 했던 겁니다. 요컨대 그의 이 질문은 신에게 이름을 밝히든지 아니면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는 명을 거두든지 간에 양자택일 하라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신이 선뜻 자기 이름을 밝힌 겁니다.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ehyeh asher ehyeh)"라고 말이지요(출애굽기 3:14).

알고 보면 참으로 놀라운 뜻이 담긴 신의 대답은 그리스어로 된 최초의 구약성서 <<70인역>>에서 “나는 있는 자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탁월한 번역이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때 존재와 존재물이 혼동 될 수 있는 - 즉 존재가 곧 실체라는 - 그리스 철학적 요소가 본의 아니게 스며들어 히브리어 표현의 근본적 의미를 변질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있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에흐예’가 ‘있는 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p94 그러나 고대 히브리 사람에게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는 말이 가진 의미의 핵심은 단순히 ‘나는 있다’ 또는 ‘나는 나로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각주 : 히브리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말로, 이에 대한 해석은 학자마다 다르다. <<70인 역>>의 해석 외에도, ‘나는 나다’처럼 자신의 이름을 여전히 감추는 신을 강조하는 해석, ‘나는 창조물들을 창조하는 자다’처럼 신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해석, ‘나는 미래의 나를 보여 줄 자로서 나다’라고 신의 활동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해석, 또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처럼 신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해석이 그 대표적 예들이다. 이들은 모두 신의 자기 이름 계시가 그것이 무명성이든, 창조성이든, 영원성이든, 인격성이든 그의 어떤 성격(본질)을 나타낸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직 <<70인 역>>만이 신의 이름이 곧바로 그의 존재를 계시한다고 본 것이다.

 

p97 어쩌면 이런 현상이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로서는 영원히 뛰어넘기 어려운 벽인지도 몰라요.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p98 “에흐예 아세르 에흐에”라는 신의 대답은 그것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이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또는 아니기 때문에-신과 관련된 가장 뚜렷하고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말을 “계시 중의 계시”라고 드높입니다.

 

p99 신이 모세에게 자신을 밝힌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신이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즉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창세기 3:19) 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흐에 아세르 에흐예”라는 신의 대답이 가진 진정한 의미에요! 신을 ‘존재’로 그리고 인간을 ‘존재물’로 파악한 것, 바로 이것이 모세가 이룬 신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 선지자와 에언자들이 입을 모아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이사야 40:6)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8)라고 했던 신과 인간의 구분이 모두 여기서 나왔습니다.

 

p101 한마디로 인간과는 전혀 달라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신은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존재하지도 않지요. 신은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 존재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신에게는 우리가 사용하는 ‘……는 존재한다’라는 술어도 사용할 수 없지요. 이 술어는 우리가 ‘사과’나 ‘책상’같은 존재물들에게 사용하는 말인데, 신은 전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현대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하나님의 실존 문제는 물어질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만일 물어진다면, 그 성질상 실존을 초월한 것에 대한 물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대답은-부정이건 긍정이건- 하나님의 성질을 몰래 부정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인 것처럼 긍정하는 것도 무신론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p102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무규정자이고 무한정자이며, 원칙적으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상인 신은 그가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대로 단지 ‘존재’지요.

 

p103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여 기독교 교리를 정립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바로 이 같은 방법-즉 신을 존재로 그리고 존재를 신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존쟇나다’나 ‘존재하는’과 같이 동사나 형용사로 쓰인 경우, 그리고 문맥상 또는 관습상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 특별한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지요.

 

그리스인들과 존재

p104 당신도 알다시피, 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인들은 ‘세상 모든 존재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궁극적 근거를 ‘아르케(arche)'라고 불렀지요.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아르케라고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수와 질서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내세웠어요.

소박하게 생각하자면 다양한 모든 존재물이 근원적으로 가진 공통요소가, ‘있음’ 곧 그것의 ‘존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생각이 서양철학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지요.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본적 두 주제인 ‘본질’과 ‘존재’ 중 하나인 존재를 간파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으로 단번에 뛰어든 것입니다.

 

p105 도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에 대한 인식과 언급만이 진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존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건 무슨 뜻인가요?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지요. 만일 어떤 사물이 붉었다가 이내 푸르게 변한다면, 그것에 대해 “이것은 붉다”라고 인식하거나 언급한 것은 이제 진리가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변해 버렸으니까요. 따라서 변하는 존재물들에 대한 인식과 언급은 파르메니데스에게는 당연히 진리가 아니고 ‘거짓’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그는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인식과 존재는 동일하다”라고도 주장했지요.

 

p109 곧 플라톤에게 ‘이데아의 세계’였던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며, 그렇기에 참되다는 것이지요. 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렇기에 헛되다는 것입니다.

 

p114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우주만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대단한 것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분여이론이 서양문명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지요. 엄밀히 말하면 지난 2500년 동안 서양문명 전반에 이것보다 더 크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철학이론은 없습니다. 이 이론은 현실세계와 가치세계의 다양한 질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사다리’와 ‘존재의 사다리’라는 개념으로 발전해서 고대와 중세의 교회제도와 사회제도를 확립하는 데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서양문명을 일구고 지탱해 온 허리뼈가 된 것이지요.

 

자연의 사다리에서 존재의 사다리로

p116 플라톤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 더 많은 이데아를 분유해서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안 변한다는 것, 더 완전하다는 것, 더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당연히 그에 대한 지식도 더 많은 진리를 포함하게 됩니다. 즉 이미지 -> 사물 -> 수학적 대상 -> 이데아의 순서로 올라갈수록 더 변함이 없고 완전하며 단일하지요. 따라서 이들 각각에 대한 지식도 예술 -> 자연과학 -> 수학 -> 철학의 순서로 올라갈수록 더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p120 밀턴의 <<실낙원>>

아, 은헤로운 천사, 친절한 손님이여,

당신은 우리의 지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훌륭히

가르쳐 주셨고, 또 중심에서 주위로

자연의 사다리를 놓으셨으니, 이로써

[우리는] 창조된 사물들을 관조하면서

한 단 한 단 신에게로 올라갈 수 있겠나이다.

 

p122 밀턴은 아담의 입을 빌려 플라톤의 주장을 기독교적으로 간단하지만 탁월하게 묘사한 셈입니다.

그는 일자(신)는 참됨, 선함, 아름다움, 생명, 예지, 능력 등 모든 가치에서 최정상이지만 거기서 유출되어 나온 존재들은 게층구조의 밑으로 갈수록-마치 빛에서 멀어질수록 어두워지듯이-점차 결핍된다고 교훈했습니다.

 

p123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신을 안셀무스처럼 부를 때 그것이 단순히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바치는 ‘공허한’ 찬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신을 -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등등 - 어떠어떠한 가치들의 정점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이 바로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인간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이 같은 가치들을 추구하며, 이 같은 가치들에 의해 구원받으리라는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外延)인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頂點)”이라는 말의 시원이 바로 여기지요.

 

p124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예시한 존재론적 계층구조라는 모호한 개념은 그의 영특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자연의 사다리’라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생물학적 위게질서와 결합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로 유입되어 가장 미소한 존재물로부터, 모든 가능한 단계를 거쳐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에 이르는, 무한한 수의 고리로 연결된 ‘존재의 대연쇄’라는 신학적 개념으로 굳어졌지요. 그것이 중세를 지나 적어도 18세기 후반까지는 철학자와 신학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교육받은 일반인들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우주관이자 가치관이었습니다.

 

존재의 계층구조에서 사회적 계층구조로

p128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 <<신정론>>

“조건의 불평등이 무질서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물이 동등하게 완벽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클로시가 왜 바위가 나뭇잎들로 장식되어 있지 않으며, 왜 개미가 공작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만일 평등이 어느 곳에서나 요구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 대해, 시종은 주인에 대해 평등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 할 것이다.”

 

존재는 창조주다

p132 이에 대해 플로티노스는 유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답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유출은 마치 빛이 발광체의 주위로 번지듯이, 뜨거운 물체가 주변으로 열을 퍼뜨리듯이, 향기가 그 주변으로 퍼져 나가듯이 매우 신비롭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p137 필멸하는 모든 것과 불멸하는 모든 것은

오직 성부의 사랑에서 나온

이데야의 빛을 받고 있으니,

 

빛나는 본원에서 흘러나오되 그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또 삼위이면서 일체인 사랑[성령]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아,

그 살아 있는 빛[성자]은 스스로 영원한 <일자>에 남아 있으면서

 

그 선의 힘[성령]으로 자신의 빛[형상(idea)]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들에게 비추고 있소.

 

p138 이후 영혼을 거울에 비유하는 표현은 서양문명에서 하나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숱한 철학자와 신학자 그리고 예술가들이 이 비유를 자주 유용하게 사용했지요.

19세기 영국 시인이자 비평가 매슈 아널드가 쓴 <<에트나 산 위의 엠페도클레스>>를 한번 볼까요? 이 시에서 인간의 영혼은, 신들이 공간에 매달아 놓아서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거울로 묘사되어 있어요.

여기저기로 빙빙 도네.

바람에 흔들거리는 거울 같은 영혼은,

수천 번 눈빛을 주는데도,

결코 전체를 보지 못하네.

한번 쳐다보고 다른 곳으로 내달리고는,

최근 한 일은 뒤에 남겨두네.

 

p139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적 사유들은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척 생소합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당신에게 애써 소개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러한 사유가 기독교에 들어가서 서양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 이 독특한 사변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서양문명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뜻입니다.

 

p141 플로티노스의 세계구조에서 물질세계를 유출시킨 일자․정신․영혼은 영원불변하는 ‘신적 존재’입니다.

 

p142 하지만 모세를 비롯한 히브리 선지자들의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 철학자들의 존재와 존재물에 대한 사변과 심층적 내용에서도 꼭 맞아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대에는 물론 중세와 근대에 이르러서까지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 속에 남아 있는 그리스 철학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요. 그랬다고는 해도, 초이성적 계시를 교리로 이론화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플라톤주의 철학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의 존재 개념과 그리스의 존재 개념을 종합해 기독교적 신 개념을 형성한 결정적 계기지요.

 

히브리인들과 존재

p146 이처럼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영원불변한 것인 동시에 생성․작용하는 실재입니다.

 

p147 한마디로 말해, 존재하는 것은 변화(생성․작용)하지 않고 변화(생성․작용)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파르메니데스로부터 내려온 존재론 전통의 한결같은 생각이지요.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p153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ㅇ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시간을 매개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이 하나로 종합된겁니다.

 

p156 내 생각에는 괴테가 남긴 아래의 글에도 영원불변하는 그리스적 존재 개념과 부단히 생성․작용하는 히브리적 존재 개념이 ‘대립의 일치’를 이룬 구절이 숨어 있어요. “영원한 것은 계속해서 모든 것 안에서 생기(生起)하네” 같은 구절이 그것인데요, 이는 영원한 것은 불변하고 불변하는 것은 생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존재의 바다와 ‘퍼텐셜’

p163 사실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은 ‘존재의 장’보다는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언급한 “형상 없는 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p165 바로 이런 이유로 누군가가 퍼텐셜이 곧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스피노자와 아이슈타인이 믿는 신, 곧 우주와 신이 하나인 범신론에서의 신을 말하는 것일지언정,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요.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신의 모습 상상하기

p168 시작도 끝도 없는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습니다. 그 바다는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 안에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의해 무수한 물방울들이 생겼다가 없어지지요. 게다가 무작정 출렁이는 것만은 아니고,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지혜로우며 거룩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출렁입니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물방울은 잠시 존재할 뿐인데도 그동안 오직 그 바다의 뜻과 의지에 의해 이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시편 23:1~4 참조) 이 무한하고(열왕기상 8:27, 욥기 11:9 참조) 영원하며(시편 90:2, 디모데전서 1:17), 강력하고(시편46:1~3; 104:2~9) 지혜로우며(로마서 16:27) 거룩한(이사야 6:3, 요한계시록 4:8) 존재의 바다가 바로 신(야훼)이지요. 그리고 그에 의해, 그 안에서 생겼다가 잠시 후 없어지는 물방울들이 곧 존재물들입니다. 야고보가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4)라고 묘사한 인간은 물론이고 광활한 우주마저도 이 바다에 잠시 생겼다 없어지는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지요.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합맂거으로 증명할 수 있나

p178 실존(existence)은 어의만으로 보면 ‘실제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가 이런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나 키르케고르 이후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 의미있게 산다’라는 특별한 의미로 간략해서 사용했습니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기획투사’함으로써, 사르트르는 ‘앙가주망’함으로써 인간은 실존한다고 했지요. 기획투사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그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이고, 앙가주망은 역사적․회적 현실에 제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만 인간은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p182 무명 수도사가 내놓은 비판의 핵심은 우리의 정신에 존재하는 과념이 무엇이든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p189 자, 그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증을 훑어볼까요? 첫 번째 논증에서는 운동으로부터 모든 운동의 궁극적 근거로서 제일의 운동자인 신을 증명했고, 두 번째에서는 결과의 원인인 능동인으로부터 모든 결과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제일의 능동인인 신을 증명했으며, 세 번째로는 우연과 필연으로부터 모든 우연적 존재의 궁극적 근거로서 필연적 존재인 신을 증명했고, 네 번째로는 사물의 성질이나 가치의 단계로부터 최고의 단게로서 신을 증명했으며, 그리고 다섯 번째에서는 사물의 목적성으로부터 궁극적 설계자 또는 통치자로서 신을 증명했지요.

 

p194 그런데요, 어쩔 수 없이 예외를 하나 두고자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번째 길’이 그것이지요. 이유는 18세기에 이른바 ‘페일리의 시계 유추’라는 이름으로 한 차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이 해묵은 논증이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지적 설계 문제를 둘러싸고 - 기독교의 창조론을 공격하는 대니얼 데닛이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과 이에 맞선 알리스터 맥그래스나 필립 존스 같은 기독교 지식인들에 의해 - 또다시 논쟁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이 논쟁에 관심이 없다면 이 부분은 건너 뛰어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이 논증이 수백 년을 두고 말썽인지를 잠시 함께 살펴볼까요?

 

페일리의 시계를 망가뜨린 사람들

 

눈먼 시계공이 시계를 만드는 법

p201 예증법을 언급할 때 내가 자주 드는 예로는 후기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입구가 좁은 병 속에 팔을 집어넣고 무화과와 호두를 잔뜩 움켜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지 생각해 보라. 그 아이는 팔을 다시 빼지 못해서 울게 될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과일을 버려라. 그러면 다시 손을 빼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 너희의 욕망도 이와 같다.” 얼마나 멋있는 예증법인가. 이 글에는 욕망을 버려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스토아 철학의 심오한 지혜가 ‘너희의 욕망도 이와 같다’는 한마디로 명료하게 전해진다. 그가 든 적절한 예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p207 그러므로 어느 기독교 종파나 교단이 원하기만 한다면 - 가톨릭은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이미 받아들였지요 - 진화론을 큰 무리 없이 창조론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진화론을 근거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나, 창조론을 근거로 진화론과 싸우는 기독교 지식인들 모두에게 경고가 되는 것이지요.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p209 플라톤에게 진리는 우리가 정신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이도스에 대한 지식’입니다.

 

p210 한마디로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겁니다.

 

p212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즉 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일(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p215 칸트가 든 네 가지 이율배반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시간에는 시작이 있고 공간에는 끝이 있다. 2) 세계의 물질은 그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3) 자연의 인과성을 벗어난 자유에 의한 인과성이 있다. 4) 세계에는 그것의 부분이나 원인인 하나의 필연적 존재가 있다. 이들 명제는 진위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각각 그들의 부정명제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p217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이후 근대 학문에서는 중세에 비해 경험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강조되어 진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지요. 현대논리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진리는 타당할 뿐 아니라 건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나

p224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은 보통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물질적 세상을 잠시 잊게 함으로써 인식 전체를 채워 주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을 말하지요.

 

p227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신과 연관해서’ 살펴보고, 삶의 모든 관계와 책임의 영역에서 ‘신에게 대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의 틀이고 삶의 태도예요.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과 ‘가치체계’이자 동시에 ‘문제 해결 방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패러다임과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이 굽누되징 낳는다는 점입니다. 그 둘은 사실상 서로 뒤엉켜 있는 하나의 혼합물이지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요? 시쳇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메타노이아-신비적 형태에서 일상적 형태로

p233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상적 형태’로 이어지지 못한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는 여타 종류의 환상이나 환각과 구분할 길이 없으며, 나아가 그 자체가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무의미합니다.

 

<3부 신은 창조주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록>> 안에 있나

위대한 생애, 불멸의 학문

p246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영탄(詠歎)했듯이 “통에 채워진 첫 번째 포도주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통에서 그 향기를 풍기는 법”이니까요.

 

p253 당신에게는 조금 우습게 들리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질서의 선(善)을 동일시하는 사유는 원래 ‘현에서의 음정의 수적 비례’를 처음 발견한 피타고라스에서 비롯되었지요. 그에게 우주는 수학적으로 엄격하게 질서 지어진 완벽하고 선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이 플라톤에 의해 하나의 철학적 사상으로 체계화되면서 실플라톤주의로 흘러들었지요.

 

고백인가, 증언인가

p265 이처럼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모든 삶과,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세계의 모든 역사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예정되고 인도된다는 교리를 기독교에 처음 정립한 사람은 2세기 루그두눔의 감독이던 이레네우스였습니다. 그는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의미로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를 사용했지요.

 

p267 이처럼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단순히 그들의 사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신앙 체험을 기술하는 ‘고백문학’이 아니라, “영원의 섭리는 내가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옳음을 밝힐 수 있도록” 진리를 밝히는 ‘증언’으로 삼았지요.

 

p269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위대한 후계자이자 경쟁자이기도 한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지적 탁월성과 영적 경건함을 타고난 사람이 결코 아니었어요. 마치 우리들이 그렇듯이 그의 영혼도 본디 칠흑처럼 깜깜했고, 그 안에서는 세속적 욕망이 용광로처럼 들끓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그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태초는 언제인가?

p275 아우구스티누스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

p286 다른 모든 이론이 그렇듯이, 과학 이론도 더는 연역될 수 없는 가정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 물음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지요. 설사 언젠가 그 궁극적 가정들을 설명할 증거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 새롱누 증거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계속 되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그때마다 “그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고 답하겠지요.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인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경험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고?

p290~291 영국왕립천문대의 대장이자 블랙홀의 권위자인 마틴 리스의 설명을 들어 보기로 하지요. 그는 <<여섯 개의 수>>에서 우리가 사는 우주는 측정 가능한 여섯 개의 숫자에 지배받는데 빅뱅 후 이전에 이미 정해진 이 숫자들이 우주를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으로 세팅했다고 주장하지요.

1) 빅뱅을 통해 수소가 헬륨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관여하는 입실론( )입니다.

2) 전자기력의 세기와 중력의 세기 간의 비율을 나타내는 이지요.

3) 우주의 상대적 밀도를 나타내는 오메가 ( )입니다.

4) 우주팽창의 가속도를 좆러하는 우주상수 람다( )이다.

5) 우주배경복사의 불규칙을 나타내는 이다.

6) 공간의 차원을 나타내는 이다.

이 모든 숫자들의 값도 조금만 더 크거나 작았다면 현재의 우주와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앨런 구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p299 구약성서에 기록된 계시에 대한 고대신학자의 해석이 실험과 관찰에 의한 현대과학자들의 이론과 맞아덜어진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p301 어떤 두 사람이 똑같이 “물이다!”라고 외쳐도 홍수로 물난리를 만난 사람이 이 말을 외칠 때와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소리 칠 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과 같지요. 하나는 ‘이제 죽었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살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발화된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 역시 그 언어가 속한 존재세계로 인해 가져지게 마련이지요.

성서 텍스트의 ‘사실’은 에컨대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존재세계의 사실입니다. 즉 창조, 신의 통치, 언약, 중생, 심판, 종말, 부활, 새 세상 등 성서의 언어로 구성된 ‘성서세계’에서 그 의미가 결정되고 객관성이 보장되는 사실들이라는 이야기예요. 따라서 이 세계의 언어에 대한 해명은 당연히 자연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해명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한 각성은 오늘날 종종 논의되는 ‘과학적 주장’과 ‘종교적 주장’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결하는 데 하나의 규범이 될 수 있다느 점에서 매우 중요하지요.

 

p303 그래서 키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습니다.

 

p307 공약불가능성이라는 말은 원래 수학에서 고대 피타고라스학파가 받은 충격에서 유래한 용어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직각삼각형에 대한 피타고라스 정리를 운용하던 중 분수로서 표현 불가능ㅎ나 수, 즉 유리수가 아닌 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유리수와 무리수 사이에는 공통된 측정체계가 없다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리오타르의 다원적 이성과 상호이해

p308 당신 앞에 놓인 찻잔의 손잡이가 당신 쪽에서 볼 때 오른편에 붙어 있다고 가정하지요. 그 잔을 사이에 두고 당신 맞은편에 앉은 사람에게도 그것이 똑같이 오른편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일까요? 아니지요! 당신에게는 오른편에 붙은 것처럼 보이는 그 손잡이가 맞은편 사람에게는 왼편에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이때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상대의 주장과 그 주장이 나온 상대의 발화 환경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찻잔의 손잡이는 오른족도 왼쪽도 아닌 어느 한쪽에 붙어 있다”라는 합의내지 일치가 가능하든 말든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상대의 주장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 같은 새로운 합의나 일치를 얻어 냈다면 당신은 비로소 ‘이해의 진보’를 이룬 것이고 그로써 상대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지요.

 

p311 내 생각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p313 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진리라는 생각,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기인한 만행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학문을 하는 태도가 아니며, 리오타르의 표현대로 “상이한 질서의 축첩 관계”를 맺으려는 행위이고, 해묵은 전체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며, 자칫 서로가 망하는 제로섬 게임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경거망동이지요. 누구든 진리에 다가가고자 한다면 그 같은 생각과 오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근대라는 폭력적 역사를 통해 이미 배웠습니다.

나는 우리의 삶과 세계에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은 마치 온르날 영상기술자들이 3차원 영상을 만드는 방법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상기술자들은 서로 달느 각도에서 촬영한 두 개의 2차원 영상을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실사(實事)에 가까운 - 입체적이고 생생한 - 3차원 영상을 얻어 내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선사합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우리의 작업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같은 대상을 서로 달느 관점에서 조명하여, 단지 하나로 통합하거나 융합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진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p323 영원이란 마치 하나의 점 안에 모든 것이 자리하듯이 그에게는 흘러 지나가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자기동일성 안에 머물러 항상 자기이기에 언제나 변화가 없는 존재,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라고 하겠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p325 원형과 이를 본뜬 모상의 관계를 아는 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의 다양한 주장을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p326 플로티노스가 행한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의 핵심은 “시간이란 결코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태양의 회전운동이 시간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고유한 운동량에 의해 시간이 인식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공간이 연장을 재는 척도이듯 시간이란 지속을 재는 척도이며, 그러한 시간을 팡가하는 주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없다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다는 것이지요. 시간은 ‘마음 밖에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 드러나며, 마음과 하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삶이 변하면 시간도 변하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플로티노스는 시간이란 “마음의 삶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p327 영혼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시간도 변하므로, 시간은 곧 영혼의 삶입니다.

 

p328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루크리스의 겁탈>>에서 이처럼 세속적이고 부질없는 시간의 속성에 대한 - 탁월하고 근거 잇는 - 불평과 찬미를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민첩하고 교활한 파발마, 근심의 전달자,

추한 밤의 친구이자 꼴불견인 시간이여.

너는 청춘을 좀먹는 자, 거짓 즐거움의 못된 노예이며,

슬픔을 구경하는 천박한 자, 죄악을 ㅈ림어진 ㅁ라이며,

미덕의 ㅇ로가미다. 너는 모든 것을 낳고,

또한 모든 존재하는 것을 소멸시킨다.

네가 맡은 일은 원수에 대한 증오심을 없애고,

세평에서 생기는 오해는 종결시키는 것이다.

너의 영광은 다투는 국왕을 화해시키는 것이고,

허위의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악을 행한 자가 뉘우칠 때까지 곹오을 주는 것이고,

오만한 건축물을 네 힘으로 폐허화하고

빛나는 호아금 탑을 먼지로 더럽히는 것이다.

 

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

p330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p334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우리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 시간’을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신적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오늘날에는 보통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이 시간에 대해 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 세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셋은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는 현재의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p336~337 우리 육체는 그것이 존재물인 한,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그렇듯 좋든 싫든 물리적 시간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릅니다. 물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심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어요. 존재물의 시간과 세속적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존재의 시간과 신적 시간을 살 수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와 프루스트의 ‘회상’

p344 인간은 역사의 객관일 분 아니라 역사의 주관이요, 주체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적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 속에서 기획하지요.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식은 사실 과거와 미래를 현전하게 하는 상기의 힘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지요.

 

p345 이 직선을 ⓑ에서 보면, 당연히 선(線)으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점(點)으로 보일 겁니다. 물론 비유지만, 시간안에서 사는 우리는 ⓑ의 위치에서 식낭르 보는 것이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신은 ⓐ에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시간ㅇ느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으로 보이고 신에게는 시작과 종말이 고정된 영원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매순간 인식되지만, 신에게는 그 모든 일이 단번에 파악되지요.

 

p348앞의 도식을 이용하면 왜 우리의 관점에서는 진화로 보이는 사실들이 신의 관점에서는 창조인지, 왜 우리가 매순간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사실들이 신에게는 예정된 사실인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천지란 무엇인가

p352 왜냐하면 신학에 대해 무지한 일반 신도라면 모를까, 지난 2000년 동안 중요한 기독교 신학잗르 가운데서는 그 누구도 우주공간 어느 한 곳에 신이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무로부터의 창조

p358 ‘무로부터의 창조’는 기원전 2세기경 선지자 이사야가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펼쳤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이사야 44:24)라고 짧게 예시했고, 사도 바울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로마서 4:17)이라는 표현으로 암시했으며, 사도교부들이 “무엇보다 무에서 유를 이끌어 냄으로써”라는 표현으로 보다 분명히 주장하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가-예컨대 <<선의 본성을 논함>>에서 <로마서> 4장 17절과 <시편> 148장 5절을 인용하여 - 구체화한 교리입니다.

 

p364 기독교인들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p371 만일 피조물들이 무로부터 창조되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악에 의해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태초에 어떤 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무로부터 만드셨나이다. 이는 주님이 하늘과 땅을 주님으로부터 창조하시지 않았음이니이다. 그랬다면 그것들은 주님의 독생자와 동들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주님과도 동등할 것이기 때문이옵나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든 주님께 속하지 않은 무엇이 주님과 동등하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옵나이다.

 

p372 인간은 기근, 전쟁, 질병 외에도 운명, 불안, 죽음, 허무, 무의성, 죄책 같은 악마적인 것들에 속절없이 노출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엾은 인간적 상황에서 ‘신과 세계의 선함’은 언제나 커달나 위로와 희망을 던져주지요.

 

창조의 여섯 날이 글자 그대로 ‘6일’인가

p374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같은 해석을 근거로 - 오늘날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창조가 정확히 1만년 전에 단지 엿새 동안 이루어졌다고 줒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 서양문명은 일찍부터 창조를 태초의 어떤 신비로운 시간에 의해 여섯 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말에서 육신으로, 진리에서 행위로

p387 이 ‘말씀’은 발화와 동시에 언제나 그것이 뜻하는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는 수행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p388 말로는 천지를 창조한 신도 말만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행동이 함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풍부한 부자가 무엇이 필요하여?

p393~394 “보존은 창조로부터 구분되는 행위가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다”는 중세적 표현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p394 믿음은 창조주로서 알려진 하나님을 영원한 통치자와 인도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신의 작업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p400일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이 급기야는 자기 바깥으로 넘쳐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p414~415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상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생존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이 일어난다.

 

p416 결국 다윈은 자연과학 이론인 자신의 진화론을 떠받치는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각각 맬서스와 스펜서의 사회학적 개념들로부터 빌려 온 셈이지요.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p418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p420 씨 뿌리는 자와 수확하는 자가 항상 같으리라는 법은 없는 겁니다.

 

p424 19세기 후반은 유럽만이 아니라 북미 대륙에서도 사회다윈주의가 그 위세를 맹렬히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서양문명 전반에 걸쳐 개인주의자들은 무자비한 방임을, 자유주의자들은 무제한경쟁을 요구했고, 우생학잗르은 동족 내의 신체적․정신적․경제적 약자들의 합법적 제거를 부르짖었으며, 인종주의자들은 자국 내의 열등한 인종이나 외국인 추방을 외쳤고,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대륙을 미개지로 몰아 계몽 또는 선교라는 미명 아래 정복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사회다윈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지요.

 

다윈과 기독교

p430 다윈은 결국 그때까지는 진화 과정에서 주로 면제되었던 인간 자신을 그 속으로 과감하게 밀어 넣음으로써 신의 창조물에서 원숭이의 후손으로 만들었지요.

 

p441 “다윈은 한 인간이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가 될 수 있다고 진술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창조론은 진화론은 수용할 수 있나

p454 그렇다면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진화 원리’ 또한, 신이 만들어 지속적 창조를 위임한 ‘현실화 원리’ 내지 ‘자연법’ 또는 ‘영원한 법칙’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닌가요?

 

p456~457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기독교가 이미 오래전부터 확보했다는 것과, 약간의 장애물만 제거하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은 문제

p460 플라톤주의를 수용하여 신약성서의 정경화, 교회제도 확립, 사도신경 확정,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확립등을 이루어 냄으로써 기독교의 기반을 다진 사도교부들, 오리게네스 같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이러한 전통 안에서 형성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여 중세 가톨릭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또한 그렇지요. 또 “오직 성서로”를 외치며 성서해석에 특히 엄격했던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p461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세기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전체 기독교 신학의 탐구는 인간의 문명처럼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며, 항구가 아니라 항해”라고 비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요.

 

눈먼 시계공과 눈뜬 하나님 문제

p467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충하지 않고 양립한다는 말로,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에보디우스의 연언전제를 논파함으로써 딜레마를 물리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주장을 재차 분명하게 밝히는데요, 인간이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행한다는 말도 옳고, 신이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말도 옳다는 내용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것이다.”

 

시간와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

p473 신과 우리의 차이는 우리와 뱁새 ․개미의 차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질적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지요. 우리가 앞서 <신은 존재다>에서 보았듯이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 엄연한 차이에 대해 “신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상이성” 또는 “시간의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단호이 외쳤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구원

p484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게구원입니다. 존재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또는 아름다움자체인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지요. 바로 이것이 <<고백록>>전체를 꿰뚫는 주제이며, 우리가 이 장의 서두에서 던진 “왜 아우구스티누스는 엉뚱하게도 <<고백록>>의 말미에 자서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창조에 관한 신학을 덧붙였는가?”하는 질문에 대답이기도 합니다. 불온전한 자기 자신이나 세계가 신처럼 온전해지는 것은 모두 신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이지요. 이 모든 내용을 압축하여 그는 <<고백록>>의 끄트머리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합니다.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세네카의 ‘운명

p497 평소 세네카는 친구들에게 인간의 삶을 연회에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폐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p503 세네카는 이렇듯 섭리를 필연적인 것, 즉 운명으로 생각했는데요, 이는 스토아 학파의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섭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신의 뜻이지요. 독일의 문화철학자 오슈발트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 마지막 부분에서 인용한,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

고대철학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도사린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p504 가난을 무시해라. / 태어날 때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고통을 무시해라. / 고통은 사라지거나 너희와 함께 끝날 것이다. / 죽음을 무시해라. / 죽음은 너희의 고통을 끝내 주거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운명에 복종할 것을 권할 때, 그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운명을 제 스스로 따름으로써 우주의 섭리인 로고스와 합일하면 ‘존재론적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신들보다 더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정’

p512 스토아철학의 로고스 이론이 초기 기독교 교의학과 윤리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바울을 기독교에 그리스 철학을 끌어들인 원흉이자 시조로 규정하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칼빈의 ‘섭리’

p521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너나없이 신플라톤주의가 아니라 스토아 철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p522 그가 스토아 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인간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섭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확신했다는 점이지요.

 

p524 자신의 회심이 바울처럼 극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점진적으로 일어났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테네의 신

 

p529 그리스인들은 철학의 천재들이었지 종교의 천재들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최고의 존재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세계와 인간 삶에 관한 모든 지혜를 계시로 받고 있을 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사변적 세계 안에서 신들에게 어떤 위치를 부여할 것인가를 이성으로 사고하고 있었습니다.

 

p532 자연신론에서 신은 야훼처럼 창조주이며 세계를 초월하지요. 그러나 그는 야훼와는 달리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인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세계는 오직 그가 만든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에 의해 자동으로 운행될 뿐이지요.

 

눈얼음 계곡 건너가기

p537 존재 유비 – 신과 그 피조물이 분여에 의해 양적으로만 다를 뿐 질적으로는 같다는 전제에서 나온 매우 흥미로운 생각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존재 유비 교리에 따르면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은총에 ‘전적으로’ 맡겨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 이성에 달린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p540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창조주의 영은 피조물의 세계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창조도 일종의 계시이며, 또한 이 세계는 신과 의사소통을 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 에밀 브룬너 <자연과 은총>

 

p543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p544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예루살렘의 신

p545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이란 무엇인가?’ 혹은 ‘세계는 어떤 근원 물질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철학적 물음에 열중할 때, 히브리 선지자들은 ‘신이란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배되는가?’하는 종교적 물음에 골몰했습니다.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

p556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란 단순히 신이 피조물들에게 ‘참여와 인도’라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p559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p560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 받지 않는 신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34)

 

p561 신의 섭리에 의한 강제는 선한 목적과 의도에 따른 것이어서 신의 인격성을 더 잘 드러낸다는 말이지요.

 

p562 신이 모든 일의 결과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예정’과 신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간다는 ‘섭리’의 구별이 쉽지 않은데요, 사실상 모든 섭리는 예정적이고 모든 예정은 섭리적입니다.

 

p563 바울은 신의 섭리가 때로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지요. 하지만 그는 고통의 배후에는 언제나 신의 선한 목적과 뜻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p567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르침을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야만 기도는 우리가 신을 조종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이 우리를 조종하는 도구가 됩니다.35)

 

강한 섭리, 약한 섭리

p571 예수가 말한 신이 더해 줄 “모든 것”이란 ‘신이 보기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이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신은 오직 그의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모든 것’을 더해 준다는 뜻이지요.

 

p574 결론적으로,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지요. 때때로 신은 인간의 기도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마저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소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도 신이 예지한대로 된다”라고 교훈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칼빈은 “모든 사건은 신의 감추어진 뜻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라고 잘라 말했지요.

 

 

기도는 왜 하는가

p575 신의 강제적 섭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유익하다는 것이지요. 왜냐고요?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원하던 응답을 받으면 받은 대로, 또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한 대로 그 결과를 자신을 향한 신의 섭리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이루어졌든 이뤄지지 않았든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섭리로 확인하는 일은 기독교인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p576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를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p577 자신을 버려라. 내가 말하노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버려라. 당신이 자신을 막아라.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세운다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도망쳐라. 그리고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가라

부단한 자기 체념과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누구든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p578 구원은 오직 믿음과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성적 체념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을지 몰라도 기독교인들이 얻는 구원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자,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p582 네로의 스승이자 신하로서 그를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세네카도 키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쾌락과 불안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세네카는 네로 같은 향락주의자들은 “살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죽을 줄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평했지요. 그래서 이들은 항상 삶에 대한 불안과 절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다고도 주장했습니다.

 

p585 힘과 건강과 부와 사랑 등 욕망 속에서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비록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필경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혹시 당신은 알고 있나요? 절망의 끝자락에서야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법임을!

 

p585 그러면 그대 속에 깃들인 경솔한 마음이 그대로 하여금, 요동치는 정신처럼 그리고 망령처럼, 그대에게는 이미 상실된 세계의 폐허 속에서 헤매는 일이 다시는 없게 할 것이다. 절망하라. 그러면 그대 정신은 결코 더 이상은 우울 속에서 신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비로 그대는 그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것이지만, 다시금 그대에게는 아름다워질 것이고, 즐거운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의 해방된 정신은 자유의 날개로 날개 치며 솟아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p591 윤리적 단계에서 일어나는 뉘우침은 내면에서 울리는 이성의 소리에 따르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뉘우침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탓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죄의식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오는 절망은 <심미적 단계>에서 겪는 절망보다 더 처절하고 깊을 수밖에 없지요.

 

p593 인간은 오직 뉘우침과 죄의식이라는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게 되며, 그제야 비로소 신을 발견하게 되고,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헌신하는 <종교적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두려움과 떨림

p596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부조리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살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지요. 그런데 바로 이 ‘이해할 수 없음’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들어 있습니다.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p608 크르케고르에게 종교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는 “겉치레로 살지 말라!”라고 외쳤지요.

아브라함에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p609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지요. 그렇지만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침해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의 기독교적 의미지요.

 

<5부 신은 유일자다 >

 

 

p616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 암모니오스는 플로티노스에게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오직 구술로 플라톤 철학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 덕에 로티노스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평생을 플라톤 철학에 빠져 살았지요.

 

p618 플로티노스는 시냇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소년처럼 명상 속에서 흘러간 시간들ㅇ르 하나씩 마음에 모았습니다. 그는 항상 마음이 ‘시간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시간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태양의 회전 운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 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은 마음 안에 있고 마음과 하나지요. 그러므로 항상 흘러가는 것 같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p619 "무얼 염려했단 말인가. 우리의 영혼이 양생자임을 몰랐는가? 영혼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동시에 저 세상에서도 산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 영혼도 당연히 때마다 자리를 바꾸어 가며 이편 또는 저편에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p620 우리의 이번 이야기는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가운데 ‘일자’에 관한 교설의 근원을 살펴보며 시작하기로 할까요? 왜냐고요? ‘일자’에 대한 고대철학 이론들이 기독교에서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을 할 때 ‘유일자’가 갖는 의미와 깊게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일자

p630 일자란 그 정의상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면 더는 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만일 누구든 ‘일자가 선이다’라고 정의하면 일자는 곧바로 ‘선’과 ‘선이 아닌 것’으로 나뉘어 둘 중 하나로 머물기 때문에 더는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가 아니게 되지요.

 

p635 플라톤 사상을 기반으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본래적으로 선한 신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 사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이후 로마에 들어가 로마법의 기초가 되었고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깊이 침투해 기독교 윤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요.

 

플로티노스의 일자

p639 플라톤이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였다면 플로티노스는 깊은 철학적 통찰력을 지닌 종교인이었습니다.

 

p641 일자에 대한 이런 사유가 기독교 사상 안에서 삼위일체 신의 제일위인 성부로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플로티노스가 신적 존재로 구분한 일자, 정신, 영혼이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p649 신은 하나인데 마치 한 배우가 여러 역할을 하듯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가지 역할을 한다는 향상적 군주신론이 바로 그랬지요.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

p659 삼위 일체, 곧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성부, 성자, 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사고, 의지, 행동)에서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p663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므로 육체가 파괴될 때 비로소 영혼도 해방된다는 당시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적 가르침을 굳게 믿었던 것이지요.

 

p666 우리를 그들을 미워하기보다 동정해야 한다. 그들을 저주하기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미움이나 저주가 아닌 복을 끼치기 위해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 오리게네스

 

p669 플라톤주의 사상들의 공통 특징은 플라톤 사상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과 요구들을 대폭 수용한 탓에 신비주의 경향을 띤다는 것이지요.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p672 오리게네스에게 성부는 플라톤의 선자체, 알비누스의 제일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동일하고, 성자인 말씀은 플라톤의 창조주,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정신에 해당하며, 성령은 알비누스와 플로티노스의 영혼과 같은 것이지요.

 

p673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는 일반 신자들은 물론이고 신학자들까지 ‘성부’를 ‘삼위일체 신의 제일위’로 인식하기 보다는 ‘만유의 창조주인 야훼’로 인식했다는 점이지요.

 

p675 기독교 교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구분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동등해야 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차등적이며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677 칼빈은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모사요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을 관장하시는 분이다.”라고 교훈했습니다.

 

삼위일체 논쟁

p684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종교 문제 자문관이기도 한 코르도바의 감독 호시우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질이라는 뜻인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신조에 안에 넣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p686 니케아 신조의 핵심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 곧 일자 = 창조주라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동등성 등식이었습니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예수의 신성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었고, 사상사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 철학을 비로소 극복한 계기가 되었지요.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p691 단테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가지 빛깔을 띤 같은 크기의 세 원”이라고 형상화했고 일체를 “하나의 차원으로”라고 묘사했지만, 이런 말들은 - 단테 스스로 고백한 것같이 - 약하고 모자라서 우 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 원’과 같은 표현은 ‘분명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 삼위가 마치 분리되어 있는 것같이 왜곡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요.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

p697 “철학은 언어가 우리의 지성을 사로잡는 것에 맞서는 투쟁”(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p703 우시아는 플라톤적 의미에서 ‘본질’로, 히포스타시스는 플로티노스적 의미에서 ‘실체’, 곧 ‘본체’로 확정하여 신은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고 명백히 선포했지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가 진정 의미하는 것

p715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 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일자)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 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p718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삼위일체적 본성에서 사랑(성령)에 의한 동등한 사귐과 교제로서의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하고 주장했다는 사실이지요.

 

p719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신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p720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사랑, 선물, 친교로 파악했고, 우리도 성령에 의해 서로 간의 친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신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이 얼마나 보배로운 사유인가요! 우리는 이 같은 사유의 가치를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진리가 단지 교훈으로 선포된 종교가 아니라 성육신을 통해 행위로 실천된 종교이기 때문이지요.

진리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안에 잠재되어 부단히 내려오는 바로 이 고귀한 사유를 감안할 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지침이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일을 한 겁니다.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p725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가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 안에서”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삼위를 하나로 묶는 이 사람은 단순히 자신과 동일한 것만 받아들이는 동종사랑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까지 받아들이고 포괄하는 이종사랑이라는 겁니다.

 

p731 한마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인데요.

 

p732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의 신’이냐, ‘신약의 신’이냐

p737 애초 마르시온은 구약의 신을 ‘악의 신’이라 부르고 신약의 신을 ‘선의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영지주의자 케르도의 영향을 받아 ‘공의의 신’과 ‘사랑의 신’으로 고쳐 불렸지만, 여전히 구약의 신을 ‘율법의 신’이라며 거부한 채 신약의 신만을 ‘복음의 신’으로서 받아들였지요.

 

p739 기독교가 구약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일신 사상을 계승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안에 있는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인 요소는 모두 걷어 냈지요. 이 일은 누가 했을까요? 놀랍게도 그건 예수와 사도 바울이 직접 나서서 그 당시에 이미 한 일이지요.

 

p741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인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p742 최선인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

 

유일신이 왜 질투하나

p748 이스라엘의 역사 흐름에 따라 야훼가 감정이 격한 절대적 폭군에서, 스스로 세운 계약에 충실한 입헌군주를 거쳐, 사랑이 넘치는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던 것은 신이 그렇게 변해서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신을 그런 식으로 경험했다는 말일 뿐이지요.

 

p753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구원받았는가

p769 선재적 그리스도론을 통해 예수와 복음을 몰랐던 유대교인들이나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포용성을 보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유일신의 종교인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과 폭력성을 실천적으로 극복한 고대적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p769 이 같은 주장을 바탕으로 가톨릭교회는 1965년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선포했지요.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p777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에 대한 신앙에 관한 틸리히의 이러한 비판과 대안은 과연 정당할까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대신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을 ,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진정 필요로 할까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내 생각에 이에 대한 대답은 마땅히 아래와 같아야 한다는 겁니다.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

p781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룬다는 말이지요. 이는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라는 내가 이 책에서 기본 강령으로 삼은 것과 깊숙이 연관된 문제의식입니다.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p799 이 같은 자기 성찰을 문명의 자기 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가 이 같은 자기 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을 겁니다.

 

p783 신의 유일성에 대하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이해와 교회의 전향적 선포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p790 그렇다면 미켈란젤로가 4년 넘게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거대한 천장화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메시지는 당연히 이렇게 정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뜻을 거역하는 독선적이고 탐욕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와 교인들아! 너희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신의 가혹한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밝혔듯이 신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끼기 때문이다.”

 

p791 적어도 내 생각에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메시지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은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은 5:43~48) 라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합당합니다.

 

p800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 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맺음말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p802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 세네카 )

 

p803 근대 이후 서양문명은 애석하게도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고 있습니다. 이제 신은 사회제도에서도, 관습에서도, 생활규범에서도, 학문에서도, 또한 문학, 미술, 조각, 건축, 음악, 공연 같은 예술로부터도 점차 분리되어 잊혀 가고 있지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서양문명을 위기도 몰아가는 주된 원인입니다.

 

p803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드러내 보였지요.

 

p805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 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부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과 세계의 역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주며, 우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공포로부터 방어막이 되어 주던 모든 것이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p806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 사회적 재난들이 삽시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위험사회’로 진입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곳에서 이제 당신과 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로서 모든 당혹스러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

 

p808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되지요. 칸트의 유명한 경구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입니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거지요.

 

p809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 교회가 첫째 신 사랑과 셋째 이웃 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사랑과 넷째인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입니다. 이 네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p810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3. 내가 저자라면

일단 김용규 저자의 필력에 박수를 보낸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해 준 것을 감사한다. 무엇보다 ‘신(하나님)’께 더 다가갈 수 있게 문을 열어줘 감사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 뿐만 아니라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궁금증이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 설득이 된 부분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패러다임’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대로 세상을 보고 학문을 배우며,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이 공감한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 많은 도움이 된다. 쉬운 비유를 통해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는 부분을 많이 배우고 싶다. 일단 그가 많이 공부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자. 그가 공부한 것의 양이 엄청나다는 것을 책을 통해 볼 수 있다. 나도 나의 책을 위해 공부의 양이 아주 많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이에게 칭찬을 받는 책을 쓸 수 없음도 알았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이 동의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것은 그가 이야기 했듯이 서로 패러다임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책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겁내지 말자. 우선 내가 책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하나의 핵심을 잘 끌고 나가야 함을 잊지 말자.

방대하고 복잡하며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그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잃은 적이 없다. 그 강한 힘을 배우고 싶다.

 

이제 구조에 대한 분석을 해보자. 이 책은 전체 5부로 이루어져있고, 하위 항목은 9장이다. 그리고 각 장 아래는 작게는 2챕터 많게는 14챕터로 구성되었다. 일률적인 꼭지 개수는 아니었지만 불편함을 못느꼈다. 각 장마다 논의가 되어야 하는 부분은 알맞게 논의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 장마다 주요 학자가 등장한다. 많은 학자가 등장하지만 특히 큰 장의 내용을 대변하는 신학자, 과학자 등이 있다. 내가 쓸 책도 수학자와 철학자가 많이 등장할텐데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적절한 배치를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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