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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6일 11시 45분 등록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김영규 지음 / Humanist

 

 

I. 저자에 대하여 / 김용규

 

김용규.jpg

 

필명 : 헤르메스 김

 

출생 : 1952

 

가족관계 : 피아니스트 (교수) 아내와 귀여운 딸

 

종교 기독교

 

저서: 국내에지식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알도와 떠도는 사원》《다니》를 통해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란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지은 책으로 깊고 풍부한 철학의 맛과 문학의 향기를 절묘하게 버무려낸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서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 신》,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높이는 도구로서의 논리학을 풀어낸 《설득의 논리학》, 영화를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데칼로그》《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데칼로그》등이 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인문학과 철학의 풍부한 재료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인문학의 연금술사로 불린다.

그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고민하고 추구해온 사람들의 이론을 살려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와 가치 잇는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 갖고 있다.

그는 전문가들과의 논담보다는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철학자이다.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폭넓은 만남이 바로 그가 책을 집필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쓸 때마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방식을 고민하며 스스로 질문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다.

 

김용규 선생님에 대해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7기 선배님들을 김용규 작가의 인터뷰 글을 보면 그분에 삶을 조금 옆보고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선생님을 조금도 알아가고 있다. 사람이 생김새로 보고 그 사람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내가 조사 하면서 느낀 선생님은 상처도 있고 외로움도 있는 속이 깊고 따뜻한 남자다.

 

삶이 글이고, 글이 곧 삶이다.

 

김용규 한마디 : 시절이 수상하다. 경제가 어렵고 정치는 어지럽다. 가슴에 어둠이 내리고 마음의 길들이 끊어졌다. 나누어가질 믿음이 말랐고 함께 간직할 소망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 궁벽한 시절이 더 깊어질 것이라 한다. 하지만 삶을

 

 

II.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지은이말

 

p8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갑니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학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 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룹니다.

 

1부 신이란 무엇인가

 

P21 〈천지창조〉라고 불리는 이 천장회를 그런 화가는 당신도 잘 아는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B Michelangelo, 1475-1564)입니다. 그는 천장화를 그리는 동안에는 그곳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천장화 작업을 막 시작한 초반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도와줄 조수도 쓰지 않았다지요. 오직 천재적 재능과 초인적 열정으로 바닥에서 무려 20미터나 높이 붙어 있는, 13.2미터 , 길이 41.2미터의 드넓은 천장에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재현했습니다.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p26 뭔가를 건네주려는 능동적 손가락과 그것을 받는 수동적 손의 모습을 통해 동적인 신과 정적인 아담의 대조적 자세가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조가 전적으로 신의 능동적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데 안성맞춤인 장면이지요.

 

미켈란젤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

 

.P35 르네상스(Renaissance)재탄생또는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 ·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에로스의 날개

 

P41 플라톤이 언급한 이데아의미곧 우리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열렬히 추구 했습니다.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 자연이 아니라 인간정신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P43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바로 이러한 정신과 규칙을 애써 물려 받았지요.

 

신인동형설

 

P51 아르스토텔레스에 의해 제우스나 아폴론 같은 유형의 그리스적 신 개념이 처음으로 부동의 운동자라는 무형의 자연 원리로 바뀐 겁니다.

 

P52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 예술가들을 통해 무형의 기독교 신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형의 신으로 다시 탈바꿈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론과 존재론 그리고 서양문명

 

P55 신이 무엇이거나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야 어떻게 그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가?

 

P57 존재론적 함축성을 지닌 비유들이 구약과 시약에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P64 이 죵교의 신이 자기 자신을 존재로 계시했고 또 신학자들도 그렇게 파악해 왔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이어지는 2부에서 우리가 기독교적 신 개념을 존재론 적으로 풀어 가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로 사용 하려는 이유입니다.

 

2부 신은 존재다

 

P71 청년이 누이가 (성경)과 아리스토켈레스의 (형이상학) 그리고 당시의 저명한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접집) 사본들을 몰래 넣어 주어 청년의 공부를 도왔지요.

 

P79 나의 원수인 것은 다만 당신의 이름뿐:

, 다른 이름이 되어 주세요.
하지만 이름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여전히 향기로운걸.
로미오는 로미오로 불리지 않아도

그가 지닌 고결함은 그대로인걸.

 

 

1장 존재란 무엇인가

P81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P87 이것을 형이상학으로 끌어올려 존재라고 이름 붙인 사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는 비물질적 무한자이자 유일자였지요.

 

P88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이후 자신의 존재로 체계 안에서 모든 이데아의 그거인 일자또는 선자체로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었고요, 그 체계를 종교화한 사람이 플로티노스였습니다.

 

P95 ‘야훼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해석은그는 있다’, ‘그는 존재한다. 또는 그는 현존한다 입니다.

 

P99 거기에는 신은 거룩한 존재이고, 인간을 포함한 그 밖의 만물은 거룩하지 않은 존재물신과 갈라서 있다는 의미 입니다.

 

P101 신은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존재합니다.

 

P102 존재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좀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편의상 그리스적인(또는 철학적인 존재 개념과 히브리적인(또는 종교적인) 존재 개념으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P104 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인들은세상 모든 존재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궁극적 근거를 아르케(arche)라고 불렀지요. 칼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아르케라고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수와 질서를, 헤라크레이토스는 로고스를 내세웠어요.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인 엘레아 출신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의 궁극적 요소가존재라고 주장했지요.

 

P116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렇게 이데아를 향해 올라가는 길을층계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층계는 위로 올라갈수록 질적으로 더욱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지요. 하지만 양적으로는 그만큼 더 적어져서 맨 나중에는 단일한 것이 됩니다.

 

P134 정신은 이러한 자기직관(self-intuition)을 통해서 플라톤이 ‘이데아(idea)’라고 부른 것, 즉 세계 창조를 위한 모든 참된 ‘형상(idea)’을 자기 안에 만듭니다. 이 말을 플로티노스는 “정신 자체에 정신이 나누어 줄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표현했지요. 한마디로 플로티노스에게는 정신이 곧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데 모범이 되는 틀(paradeigma)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질송은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들처럼 ‘세계의 창조주’라는 신() 개념을 기준으로 한다면 “정신(nous)이 곧 신이다”라고 주장했지요.

 

P131 칸트에 의하면, 이간의 이성은 경험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도록 한계 지어졌어요. 그럼에도 이성이 자신의 추론을 경험할 수 없는 무한한 대상에까지 확장해 나가면, ‘이성은 하나의 길(경험적인 길)에서든 또 다른 길(선험적인 길)에서도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단지 사변의 힘으로 강성세계를 초월하려고 그 날개를 펴지만 헛수고에 그칠 뿐 이며 필연코 오류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134 사과의 존재는 이처럼 사과의 본질을 통해 비로소 우리에게 드러나지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P136 “다라서 만약 영혼이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합리적 원리라면 그것은 성찰이다.

 

P142 초이성적 계시를 교리로 이론화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플라톤주의 철학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요한 도구였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의 존재 개념과 그리스의 존재 개념을 종합해 기독교적 신 개념을 형성한 결정적 계기지요. 그렇다면 이제 히브리인들이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P143 초이성적 계시를 교리로 이론화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플라톤주의 철학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의 존재개념과 그리스의 존재 개념을 종합해 기독교적 신 개념을 형성한 결정적 계기지요.

 

P153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시간을 매개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이 하나로 종합된 겁니다.

 

P153 “신은 영원히 안식하느냐 아니면 부단히 활동하느냐? 라는 물음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인 신은 영원히 안식하면서 부단히 활동하신다.”

 

P157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사과)을 그것(사과)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P162 그것은 언제든지 물질로 현실화된 가능성이나 경향성을 가졌으므로, 어쨌든  유뮬론적입니다.

 

P166 신에 대한 모든 상상, 모든 형상화, 모든 규정과 언급은 사실상 부질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십계명 가운데 두 번째 계명에서 신이 우리에게 우상과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금한 근원적인 이유고, 중세에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 가운데 하나인성화상 파괴 운동의 신학적 동기지요. 그렇지만 문제는 우리가 신을 형상화하는 것에 대한 강렬하고도 부단한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빨강이라는 색은 끊임없이 자기동일적 빨강을 생성할 때에만 유지되지요. 그렇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퇴색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세상 만물은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자기동일적 생성과 작용을 통해서만 불변할 수 있습니다.

 

P171 예컨대 우리는바다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선 신이 암암리에 사람처럼 생겼으리라는 끈질긴 망상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바다가 우주마저 포괄하고 초월할 만큼 무한하다는 점에서신은 없는 것이 없다.’ 는 오랜 주장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요. 이와 동시에 신이 유일하다는 교리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선포가 아니라, 존재의 바다가 무한히 광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포괄하며 그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 바다가-미치 현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처럼 그자신은 무형이지만 모든 유형적 존재물이 생성하고 소명하는 장(Field)이라는 점에서 형체가 없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교설을 이해할 수도 있지요.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P180 신을그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때 그가 말한큰 것이란 물체가 차지하는 어떤 공간적 크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가치적 크기를 뜻하는 것이지요. 신은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존재물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P187 칸트. 최고의 존재자의 현존을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모든 노고와 작업은 헛된 것이다. 인간이 순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를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P191 모든 무한소급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원칙이지요. (191)

 

P199 유비추론이란 사물이나 사건의 유사성(analogy)을 근거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입니다. 예를 들면지구에는 생물이 살고 있다. 화성과 지구의 환경은 유사하다. 그러므로 화성에도 생물이 살고 있을 것이. 같은 주장이 유비추론이지요. 이러한 추론은 비교하는 대상과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논거가 강해지고 낮을수록 논거가 약해집니다. 밀은 페일리의 논중이, 페일리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사성이 낮고 논거가 약하다고 주장했지요. 이런 경우 현대논리학에서는참의 정가 낫다고 합니다 결론이충분히거짓일 수 있다는 말이지요

 

P204~205 당시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숭배하는 인류교와 같이 기독교를 인간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자들이 온상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기독교는 언제나 외부에 있는 다른 종교들뿐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이단들과 싸워 왔는데 모든 일에서 그렇듯안에 있는 적이 더 위험한 법입니다.

 

P205 기독교는 여전히 자연신학에 대해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특히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개혁신앙의 구호를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 및 진리의 근거를 초이성적 계시에서 구하지 않고,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에서 구하려는자연신학을 강력하게 거부하지요.

 

P214 이율배반이란 서로 모순이 되는 두 명제가 진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P217 신학은 20세기에 칼 바르트가 갔던 길, 다시 말해 신의 현존에 대한 합리적 증명이나 이해보다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하는 길로 나아가는 이론적 발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칸트 자신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른바 '진리의 땅'에서 신에 관한 명제와 논증을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로' 내쫓아 버림으로써 근대신학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은 철학의 망령에서 벗어나 종교적 성격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P221 실제로 우리가 종교를 갖는 궁극적 이유 종교적 경험을 잦기 위해서지 종교적 이론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P235 신이 도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는 반면,

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3부 신은 창조주다

 

P240 서기 387 로마 인근의 항구도시 오스티아에서 이렇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경건한 여인 중 하나로 꼽히는 모니까 입니다. 그리고 그러고 그녀의 말도 탈도 많더 아들이 성 아우구 스티누스 이지요.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

 

P247 아우구스티누는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의 저작인 <호르텐시우스>를 읽게 됩니다. 이 철학서에 크게 감동한 그는 문장탐구보다는 지혜 탐구라는 '새로운 계획과 꿈'을 갖게 되지요. 중요한 것은 이때 그의 관심이 감성적 문학에서 지성적 철학으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

 

P256 "주여, 언제까지 진노를 그치지 않으시렵니까? 원하옵건대 지난날에 저지른 죄를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내일입니까? 또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안 됩니까? 왜 바로 지금 이 시간에 나의 더러움을 벗어 버릴 수 없나요?

 

P266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의 장점에서 회고록을 쓴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매개로 자기가 맡은 교구의 교인을 교육할 신상 간증서 내지 신학 교육서를 썼던 겁니다.

 

P268 죄 많았던 자신의 과거사를고백하려 한 게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기독교적 진리를 '증언'하려고 <고백론>, 아니 <증언>을 저술했다는 겁니다.

 

P271 종교개혁자 칼빈처럼 자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무대이자 하나님을 발견하는 장소로서 이해했음은 분명하지요.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P275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 졌다 라고 단언했습니다.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 이루어진 창조라는 말은 신이 세계를 시간 밖에서, 창조했다는 의미지요.

 

P276 고백론 11장에서 천지를 짓기 전에 신은 안식하셨다는 겁니다. 창조와 함께 시간이 시작되었으므로 창조 이전에 신은 시간 밖에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 밖에는 어떤 변화나 행동도 없습니다. 이 같은 논리로 그는 "하나님이 천지를 짓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라고 담대하게 답했지요. 요컨대 신은 시간 밖에서는 안식하고 시간 안에서는 활동한다는 말입니다.

 

P277 히브리적 요소와 그리스적 요소, 유신론적 성격과 유물론적 성격, 종교적 믿음과 이성적 사고고 여전히 대림 하면서 공존하는 서양문명의 이중적 성격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281 적색편이 형상이야말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믿을 만한 증거 입니다.

 

P282~283 137억년전으로 계산되는 아주 먼 옛날 밀도와 온도가 최대이고 크기가 최소인 특이점이 있었습니다. 이 특이점이 있었습니다. 이 특이 점의 존재는 로저 펜로즈와 스티븐 호킹의 ,특이점 정리로 증명되었지만, 아직은 그 누구도 상세함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아요. 과학자들은 빅뱅이 사직되는 10-43초 이전, 플랑크 시가라고 부르는 때에 양자적 요동에 의해 특이점이 형성되었으며 그 크기는 약 10-33센티미터 이 값을 플랑크 길이라고 한다 정도였으리라고 대강 짐작합니다.

 

P299 기독교 신학에서 신이 세계 이전, 곧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 창조했다는 말은 일단 신이 시간이나 공간 그 어느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 독립성을 가진 '세계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P299 기독교인들은 신의 세계초월성을 신의 전지전능성과 연결지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P303 언어와 삶의 양식 사이의 이런 관계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에서는 한 명제의 '옳음' '그름'도 당연히 '삶의 양식과의 일치 여부'로 가려집니다. 다시 말해 앞서 '미인'의 예에서 보았듯이 같은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P305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P311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P319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P325 원형(paradigm)과 이를 본뜬 모상(eikon)의 관계를 아는 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의 다양한 조장을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P326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든 존재물이 이데아의 분여에 의해 비록 한정된 것으로나마 존재하며 인식도 되고 이름도 갖게 되듯이, 영원의 분여에 의해 시간이 '비록 한정된 것으로나마' 지속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식되며, 이름-수에 따라 진행되는 시간, 주야, 연월-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모상" 또는 "영원의 변화하는 모상"이라고 규정했어요.

 

P230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는 가능성이자 과정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시간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가는 문()이자 통로지요.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찾아낸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눈물과 땀에 젖은 우리의 삶, 곧 우리의 고달픈 시간의 끝에 허무가, 악마가, 전락(轉落)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P331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로 끝없이 분산되어 흘러가면서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고 말게 하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과 파괴성을극복하자는 것이지요.

 

p336모든 존재물이 그렇듯 좋든 싫든 물리적 시간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릅니다. 물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심리적 시간을 살 수도 있어요. 존재물의 시간과 세속적 시간을 살 수도 있고, 존재의 사간과 신적 시간을 살 수도 있습니다.

p337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 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P344 역사란 물리적 시간에 의한 단순한 자연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연쇄적 또는 인과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P363 기독교인들은 오직 그들의 삶에서 체험하는, 막막한 절망과 간절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 손을 뻗어 해결해 주는 신의 무한한 능력과 연결 지어 부로부터 창조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P369 물론 인간과 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그것이 신의 선함이나 아름다움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신은 온전하게 선하게 아름답지만 인간과 세계는 불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다우며, 바로 그 때문에 언제나 타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요

 

371 구스티누스는 무로부터 창조라는 교리를 인간과 세계의 선의 근거로 해석한 동시에 타락의 가능성으로 파악했습니다.

 

P377 창조가 오직 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신비롭고 거룩한 '순서'대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여섯 날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6일과는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거이지요.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P395 초에 일어난 일회적 역사가 아니고 섭리에 의한 지속적인 보존과 인도라는 의미입니다.

 

P395 기독교인들에게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P407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로 뉴턴의 업적이 위축되었고, 공산주의 몰락으로 마르크스의 명성이 한풀 꺾였지만 다윈의 진화론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지요.

 

P431 다윈의 진화론을 자신의 사상 근저에 받아들여 "다윈의 아들"이라고도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였지요.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진화환 새로운 인간이 바로 '초인'이지요.

 

P433 신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특정한 자연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P449 신은 세계를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계영혼(또는 성령에게 세계를 현실화하는 질서와 과정을 부여해 그에 의해 창조가 차례로 일어나게 했다는 말이지요.

 

P454 요컨대 창조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그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어떤 원리-‘현실화 원리’라고 하든 ‘자연법’이라고 부르든 ‘제2원인’이라고 하든, 아니면 ‘영원한 법칙’이라 이름 짓든-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 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P455’” 만물은 우연에 의해 자발적으로 진화하지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하나는 피조물에 자유를 허락한 신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진화의 맹목적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P468 먼저, 예지는 예정과 다르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철학자들에 의하면 신이 ‘일어날 어떤 일(A)’을 예정해 놓았을 때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들어설 틈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예정이 그 일(A)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신이 어떤 일(A)이 일어날 것임을 예지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침해받지는 않습니다. 이때 신은 그 일(A)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일(A)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예지하는 것이거든요.

 

P480 기독교의 창조론을 유대교의 창조 신앙과 구분 지으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P485 불온전한 자기 자신이나 세계가 신처럼 온전해는 것은 모두 신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이지요.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P498 나눈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다음으로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이 가라않은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P502 서양문명에서 로고스는 신의 섭리로서 '영원법'이자 인간이 따라야 할 모든 법과 도덕의 근거인 '자연법'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근원적으로 자연법은 '정당하기 때문에 법'이고, 실정법은 '명령되었기 때문에 법'이라고 생각해 왔지요.

 

P505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사유를 근거로 그들 자신이 신이 되거나 또는 구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참으로 당돌하고 엉뚱하지요? 하지만 바로 이것을 이해해야만 예컨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스토아주의자들이 보여준 놀라운 절제와 용기가 솟아 나오는 근원을 마침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P517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세네카의 섭리와 바울의 섭리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은 각각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는 차이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세네카의 신은 비인격적이고 바울의 신은 인격적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뒤에서 세네카의 신과 바울의 신을 각각 '아테네의 신' '예루살렘의 신'으로 이름 지어 자세히 알아볼 것입니다.

 

P525 자기 삶을 회상하는 글에 언제나 그 삶을 바라보는 사람의 고유한 관점이나 사상이 담겨 있게 마련입니다.

 

P533 "신은 실체들을 창조하고 필요한 법칙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법칙을 그들 자체에 맡기고 그들 자체에 대한 작용 가운데서 유지되게 하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P543~544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왜내고요? 일찍이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라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인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P565 “생명의 빛을 다시 주기 위해서 죽음의 골짜기에 있게하시는 신의 배려라는 뜻이지요.

 

P566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가장 극적인 자기희생과 헌신을 우리는 예수에게서 찾을 수 있지요. 예수의 마지막 날 밤, 빌라도의 군대에 잡혀가던 바로 그날 방,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면서 세 번 기도합니다. 이때 그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P570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먹고 마시고 입을 거이 아니라. “신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것을 뜻합니다.

 

P586 “국토 없는 국왕처럼 일체를 외부에 의존합니다.

 

P586 이에 반해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을 통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일체를 자신의 선택에 의존하지요. 그는 국토 있는 국왕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을 포기 하지 않습니다.

 

P608~609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5부 신은 유일자이다

 

P617 <국가>를 쓰기도 한 플라톤은 천상세계 뿐 아니라 지상세계에도 아주 큰 관심을 보인 반면, 플로티노스의 관심은 온통 천상세계의 영혼과 영원한 시간에 쏠려 있었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는 플라톤의 개념과 사상들을 자기 취향에 맞게 변형해서 가르쳤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플라톤주의라고 부르는 사상의 핵심입니다.

 

P” 신은 유일하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뜻을 단순히 독선적 종교의 오만한 선포나 배타적 종교관에서 나온 말로만 받아들여서 안 됩니다.

 

8장 일자란 무엇인가

P630 플라톤이 일자를 선자체로 규정한 일은 학적으로 보면-사실상 해서는 안 될-무모한 곡예였다는 것이지요. 이미 살펴보았듯이, 일자란 그 정의상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면 더는 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만일 누구든 ‘일자가 선이다’라고 정의하면 일자는 곧바로 ‘선(A)’과 ‘선이 아닌 것(~A)’으로 나뉘어 둘 중 하나로 머물기 때문에 더는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가 아니게 되지요.

 

P633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신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본질은 선이라고 주장했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P636 플라톤이 논리적 오류를 고의로 범하면서까지 일자와 선자체를 동일시한 것은 ‘존재론적 목적’이 아닌, 오직 ‘도덕론적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이지요.

 

P637 플라톤은 자신의 사유를 일자라는, 더 없이 높고 신비스러운 영역으로 끌어올렸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자를 선자체라고 정의함으로써 곧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의 영역으로 발길을 되돌린 것입니다.

 

P658 위격'이란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인데, 당시의 법률적 용어로 '어떤 것이 법률상 밖으로 드러난 지위'를 말합니다. 예컨대 한 남자가 가정에서는 호주이자, 사회에서는 상인이며, 시의회에서는 대의원인 것처럼, '페르소나'는 한 개인의 법률상 자격이나 지위를 말하지요. 따라서 태르툴리아누스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페르소나는 바깥으로 나타나는 신의 지위, 곧 성부, 성자, 성렬을 의미합니다. '페르소나에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영어 단어 'persona'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 위격을 세 개체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P658 본질이란 원래 그리어로 '우시아(ousia)'라는 철학용어인데 일상용어로 풀면 '어떤 것이 그것이게끔 하는 그 어떤 것'을 말합니다.

 

P659 삼위일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셋 (성부 성자 성령)이자만 그것을 그것에게 하는 권능(사고 의지 행동)에서 하나라는 뜻이지요. 이 말을 테르툴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P667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332년경에 건설한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는 2세기 말엽부터는 로마, 안디옥과 함께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지중해 동쪽 끝으로 나일강과 홍해에 인접한 국제적 교차로였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에서 대상(大商)들이 모여들었지요. 특히 기원전 306년 프톨레미 소테르가 여기에 도서관을 세우고 많은 장서와 훌륭한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권장한 이래, 알렉산드리아는 문화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로마와 안디옥을 뛰어넘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도시였습니다.

 

P682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고 해도 그것은 오직 창조주 한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구원이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곧 우리가 상실한 불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해도-그것은 오직 불멸자나 영원자인 하나님이 한 분만이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구세주란 당연히 신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신성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신은 우리가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이 같은 주장이 ‘신의 세속화(kenosis)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theosis)’라는 동방정교 신학의 중추가 되었지요.

 

P712 당신의 손에 종이 한 장이 쥐어졌다고 생각해 볼까요? 그 종이의 앞면과 뒷면은 ‘분리할 수 없이’ 하나로 붙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어느 면이 먼저 생기고, 어느 면이 나중에 생겼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느 한 면을 ‘앞면’이라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다른 한 면이 ‘뒷면’이 되지요. 이와 마찬 가지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이’ 하나이고 누가 먼저 존재하고 누나 나중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관계적으로만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그 둘은 마치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아버지에 대해 아들로,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관계설의 핵심이지요.

 

P731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인데요.

 

p732 신의 유일성은 단일성이 곧 배타성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 그 질문 이후 지금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무엇인가요?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 아니라는 거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다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말이 신의 이름으로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상호침투적인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P738 “적게 생각하는 자는 쉽게 말한다.(Qui pauca consuderat, facile pronounciat)”라는 중세 격언

 

p741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현저하게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단지 기나긴 박해를 견디며 교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이교도, 내부의 이단과 싸우면서 처음 발생하여,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세를 구축하고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더욱 굳어진 것으로, 기독교에서 한시라도 서둘러 버려야 할 '반신앙적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P747 ‘차축시대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인류 정신사에서 거대한 수레바퀴가 움직인 시대라는 뜻이지요.

 

P753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가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P754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서 올 자가 없으니라구원을 배타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는가 하는 반박이 그것입니다.

 

P760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P761 "진리의 씨앗" "온전한 로고스"인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분여 되었다는 이야기였지요.

 

P762 유스티누스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겁니다. 즉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예수 이전에 살아서 역사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몰랐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로고스를 알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예컨대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곧 소크라테스처럼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라는 종료를 몰랐던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지요.

 

P764~765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등장하는 ''는 당연히 '선재적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유스티누의 생각이었습니다. 즉 그는 아브라함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설사 '성육신한 로고스'인 역사적 예수와 그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선재적 그리스도'인 진리를 알았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P769 그러므러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 나간다면 신이 그들의 삶에 관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P771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하나님에 관한 유신론적 관념을 초월 하려는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이 안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으로 인한 배타성의 초원을 강력히 주장하는 내용이 있지요.

 

P774 “플라톤에 의해 존재로서의 존재, 즉 존재자체의 개념은 모든 것 속에 내재하는 힘, 다시 말하면 비존 재에 저항하는 힘을 지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속에 있으며, 또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의 힘, 바꿔 말하면 존재의 무한한 힘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론에 대한 첫걸음으로서 하나님과 존재의 힘을 굳이 동일시하지 않는 신학은 군주론적 유일신교다.

 

P778 만일 기독교인들이 신을 삼위일체의 상호내주적 또는 상호침투적 사랑으로 인식하고, 그의 유일성을 삼위일체 신의 본질인 본질공동체적·영원동등적 포괄성과 통일성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에 대한 신앙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를 추구하는 비위계적·비지배적 ‘인간 공동체 원형’으로 나타난다면, 틸리히의 ‘하나님 이상 가는 하나님’과 그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전혀 필요치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그러한’ 신을 ‘그렇게’ 신앙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P780 바우만은 이처럼 낮에도 밤에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Liquid Fear)"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안과 공포마저 세계화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P782 기독교 입장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가능한 한 덜' 포기하면서 타 종교의 신앙을 '되도록 더' 인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P783 신의 유일성은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 되는 신의 속성입니다.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ㆍ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지요.

 

P791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P798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그가 유대교이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지요. 자신을 믿는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배척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동력이 사실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조건이나 이기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교묘히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이슈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이지요.

 

맺음말-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P802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함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파스칼

 

P803~804 19세기 말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선지자적 목소리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이른바 "최고의 가치의 탈 가치화"가 공공연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었지요.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최고의 가치를 대체하고 마냥 승승장구하리라고 믿었던 세속적 가치(이성, 개인의 행복, 사회진보, 민중해방, 인본주의)들도 함께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최고의 가치의 탈 가치화는 동시에 세속적 가치들의 탈 가치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불 보듯 뻔하게 드러내 보였지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따져보면 논리적 귀결이고 돌아보면 역사적 사실입니다.

 

P805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심리, 성적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에 몰두하고 있지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라캉과 푸코가 충분히 입증했고 리오타르가 적절히 언급한 대로,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들도 부지런히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큰 이야기'가 가진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우리가 '큰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신과 영웅 그리고 자기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것이라며 입을 닫고 있지요. 그리고 오직 탈 근대적인 이야기들, 즉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개인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P 810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여기서부터 희망입니다.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지만, 어둠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지요.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뤄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 입니다.

 

 

III. 내가 저자라면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다섯 개의 제목 아래 펼쳐 간다.

한 개인이 인격자로 하나님을 받아드리고, 인간이 조작한 굴레를 벗어나 살이있는 야훼 하나님을

경험 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 처럼 감미로울 수 있다.

 

이 책은 서양 문명을 1,700여년 동안 이끌어온 유일신 하나님을 알기 쉬운 방식으로 풀어 냈다.

신학을 공부 한 철학도의 결실이라 생각 한다. 

 

그 동안의 시도 된 책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창세기에서부터 설명 하기 시작하여, 아담과 이브의

탈선, 즉 죄로부터 모든 인간사의 왜곡이 시작 된 것들을 쓰고 있는데 반해, 저자는 일반 독자들에게 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야기 한 후, 존재 여부를 다음으로 말 하고 있다.

다음으로 존재한 신은 창조주 이시고 놀라운 것은 인격적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유일하신 한분을 소개 하고 있다. 아마도 일반 독자, 특히 기독교적 안목이나 인식이 없는 분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주제이나 접근은 매우 부드럽고 사람 친화적 이였다고 생각 한다.

 

1부 신이란 무엇인가

2부 신은 존재다

3부 신은 창조주다

4부 신은 인격적이다

5부 신은 유일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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