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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6일 11시 46분 등록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김용규지음/휴머니스트


저자에 대하여

김용규 

저자 김용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예쁜 벽돌집에서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호기심 많은 딸과 살고 있다. 요즘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서 향을 피우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문학 작품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인문학과 철학의 풍부한 재료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인문학의 연금술사로 불린다.

국내에 ‘지식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알도와 떠도는 사원》《다니》를 통해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란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에서는 독특하고 다양한 맛을 내는 지식의 조리장으로, 《영화관 옆 철학카페》《데칼로그》《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영화를 철학과 신학으로 해석하는 감독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깊고 은은한 철학의 맛과 부드러운 문학의 향기가 절묘하게 블렌딩된 다양한 메뉴를 가지고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의 바리스타로 변신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기초지식부터 인문학의 안팎을 넘나드는 풍부한 교양까지 듬뿍 들어 있는 이 책을 통해 철학의 색다른 맛과 향기를 즐기게 만든다.

지은 책으로 깊고 풍부한 철학의 맛과 문학의 향기를 절묘하게 버무려낸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서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 신》,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높이는 도구로서의 논리학을 풀어낸 《설득의 논리학》, 영화를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데칼로그》《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데칼로그》등이 있다.


김용규와의 인터뷰 ‘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의 저자 김용규씨를 12월 5일 만났다. 대중철학자로 불리는 김씨는 ‘철학카페’ 시리즈로 인문서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영화읽기’를 내놓은 바 있다. 철학소설 ‘알도와 떠도는 사원’ ‘다니’를 낸 뒤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란 이름을 얻기도 했다. 신간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를 접하고, 기자는 그의 다른 책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도 언젠가 집에 사두고 읽지 않은 걸 깨달았다. 올 초에 접했던 두툼한 책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 신’의 저자인 것도 알았다.

  

   김씨를 만나기 위해 ‘시읽기’를 낸 출판사(웅진지식하우스)를 통해 저자와 접촉했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자택에서 시간을 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터뷰에 앞서 김용규씨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으나, 그 흔한 언론 인터뷰 기사 한 건 확인할 수 없었다. 저서에 소개된 본인 자료 외에는 거의 없었다. 책은 김씨에 대해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라고만 적었고, 활동에 대해서는 ‘인문학과 철학의 풍부한 재료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인문학의 연금술사로 불린다’라고 했다. 인터뷰 당일 웅진지식하우스의 윤동희 편집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선생님은 휴대폰이 없고, 댁의 전화도 보통 내려놓고 계신다”고 말했다. 김씨에 대해 더욱 궁금증이 커졌다. 전화도 내려놓고 사는 철학자라~.

  

   청파동 주택가의 1970년대에 지은 2층 양옥집. 거실에 들어가니 베토벤의 교향곡이 들려왔다. 거실 한쪽 테이블에 찻잔과 큰 홍시가 두 개 놓여 있었다. 1952년생인 김씨는 “사람을 안 만나고 산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출판사 사람이나 가족 아니면 안 만난다”고 말했다.

 - 말씀을 들으니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생각난다. 선생님의 이전 책(‘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을 읽어보면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을 쓰면서 외부와 접촉도 안 하고, 외부 소음 차단을 위해 방을 코르크로 밀폐했다고 되어 있었다. “난 그렇게 큰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독일에서) 1992년 귀국, 시간강사 생활 5년을 했는데 적응을 잘 못했다. 집사람은 사회생활에 잘 적응해서 ‘내가 아이 키우고 살림할게 당신이 사회생활해라’라고 했다. 그런 생활이 길어야 2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자의 반 타의 반, 한번 기회를 놓치니 사회에 나아갈 기회가 없었다. 전에는 간혹 일반인에게 강의도 하고 했는데, 나이도 먹고 하니 힘들어 그것도 그만두고, 집에만 있다 보니 그렇게 됐다.”

  

  

   - 어떤 분인지 공개된 자료가 너무 없었다.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사람을 안 만나고 지내니까.”

  

  

   - 대학교는 어디. “동국대 철학과를 다녔다. 동국대 갈 때는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탄허 스님과 친분도 있고 해서 갔다. 정작 공부하게 된 건 서양철학이었다.”

  

  

   - 그리고 나서 독일로 유학갔나. “1982년 독일에 갔다. 프라이부르크대학은 신학과 철학이 강하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그 대학의 교수, 총장을 지냈다. 나치 때 총장을 하다가 잘못된 것을 알고 그만두고 산으로 들어갔다.”

  

  

   - 대중에게 철학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려 손을 내미는 사람이 별로 없다. ‘철학은 어렵다’가 일반의 생각이다. “철학자들이 일부러 어렵게 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전문용어를 사용하니까 그렇다. 전문용어는 개념을 분명히 하고 싶어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인간 대신 ‘현존재(現存在)’라는 말을 쓴다. 그는 인간이라는 말이 다의적으로 쓰이고 선입견이 있어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쓴다. 철학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오해나 오염 없이 정확히 전달하고자 한다.

  

   나처럼 철학을 대중화하고 싶은 사람들의 위험이 그거다. 전문용어를 일상용어로 풀어 전달해야 대중이 알아듣기 때문에, 그러려면 정확한 개념을 그대로는 전달 못하고 아무래도 오해의 여지, 부정확한 전달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일반인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해야 한다.

  

   철학이라는 것이 본래 시작할 때부터 지금처럼 학교 안에 학구적으로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고라나 길에서 지나가는 젊은이를 붙잡고 ‘자네 어디 가는가?’라고 말을 붙이며 철학이 시작했다고 보면, 결국 철학이라는 것은 삶에 도움을 줘야만 한다. 약간의 개념의 부정확성 또는 오해의 여지 이런 것들을 감안하고라도 철학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한다.”


 - 책은 그간 몇 권을 냈는지. “11년간 15권 냈다. 철학만 얘기하면 사람들이 딱딱하고 힘들어하니 영화를 갖고도 얘기해 보고 소설하고도 묶어 보고 이번엔 시로 냈다. 한때는 소설도 써 보고 철학을 갖고 이렇게 저렇게 버무려 봤다.”

  

  

    - 작년 12월에 낸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 신’은 어떤 책인가. “신학도 철학처럼 대중화 해보자 해서 썼다. 중세 때 라틴어 성경이 번역되기 이전에 신부들이 일반인이 성경을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서 면죄부를 만들어 판다든지 못된 짓을 많이 했다. 자기들 편리하게 이야기하고 성경에 쓰인 것처럼 말했다. 이를 막기 위해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성경을 누구나 보지만 해석은 마음대로 한다. 가톨릭은 조금 덜하지만, 개신교는 목회자 나름대로 해석하여 사실은 비성경적인, 때로는 반성경적인 일이 너무 횡행하고 있다. 앞으로 다시 한번 종교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보편적인 성경해석을 일반 신도에게 알리는 게 필요하다.

  

   우리나라 교회들이 정통신앙을 일반 신도에게 알린다면, 일부 목회자들이 편의에 따라 해석해서 이상한 짓을 못할 거라 생각한다. ‘신’을 낸 건 지난 10년 동안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노력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갖고 신학에도 시도해본 것이다. 신학을 보면 아주 전문적인 서적, 간증이나 경험담 등 가벼운 에세이는 있고, 그 중간에 정통 신학이론을 일반 신도가 볼 수 있도록 한 책은 없다. ‘신’이 800쪽인데 총 4권 분량으로 기획이 됐다. ‘신’ 다음에는 ‘이성’ ‘죄와 구원’ ‘사랑과 생명’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 출간 당시 서평이 좋았다. “거의 모든 신문이 서평을 크게 다뤘다. 서울, 지방 포함해서. 기독교계가 큰 관심을 보였다. 소망교회 김재철 목사님이 인터넷에서 구입, 부목사 20명에게 자기 돈으로 사서 돌리고 읽어보라 하고 내게 강연 해달라 해서 강연도 했다.”

  

  

   - 박사학위는 무엇을 썼나. “플라톤이 전공이다.”

  

  

   -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를 보니까, 기자처럼 철학 공부도 안 하고, 시도 안 읽던 사람들에게는 입문서랄까, 안내서로 좋다고 생각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얘기로 시작을 했는데 시의 세계로 문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참 좋았다. 시의 문을 열어준 뒤 시에 나오는 사랑 얘기, 인생, 외로움, 현대사회 소비특성 등 이런 순으로 풀어나갔다. “문학에서 시를 다루는 분들은 시 안에 들어있는 시인의 숨은 의도 같은 것을 밝히려고 한다. 이거 말고 해석이 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해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이건 젓가락이다’라고 안다. 그럼 젓가락을 이해하느냐? 젓가락이 있는데 쓸모를 안다는 것, 음식을 집어먹는 도구라는 것까지 알아야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이해한 다음에 자기 처지에 맞게 그 이해를 다시 한번 해야 한다. 만일 상인이라면 젓가락을 상품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석이란 것은 대상의 쓸모를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처지에 알맞도록 ‘다시 한번 이해’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해석을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폴 리쾨르라는 학자가 하이데거의 해석이론을 문학작품에 적용할 때 ‘우리가 문학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존재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예를 들어 입센의 ‘인형의 집’이 나왔을 때 아내, 엄마로서의 존재에 그쳤던 여성이 집을 뛰쳐나갔고, 여성도 인간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갈 길을 찾는 것이 문학의 해석이다.

  

   이번의 책 ‘시읽기’도 내 의도는 시 안에 들어있는 시인의 은밀한 의도, 시인이 정말 무슨 얘기를 하려 했을까가 아니다. 시를 읽고 그를 통해서 우리의 새로운 존재가능성, 일상용어로 하면 갈 길, 살아갈 길을 찾자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시인들은 굉장히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 마치 예민한 악기가 자신이 내는 선율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모르고도 울림을 내고 아이들이 때로는 말 배울 때 뭔지 모르는 말을 하듯이 한다. ‘시읽기’의 마지막 단원에서 시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론을 갖다가 시인이란 이런 사람들이라고 규명을 했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이 진짜 무언지 잘 모르고도 시를 쓰는, 일종의 무당이나 선지자나 예언자처럼 그냥 직관으로 받고 느끼는 것 같다. 이상의 ‘오감도’ 같은 게 한 예다.”

  

  

   - 책 속에 나오는 김수영 시인의 1967년 작품 ‘Vogue야’를 읽고 놀랐다. 그 시대에 오늘과 같은 소비시대를 예감하는 감수성이 나올 수 있었는지. “김수영 시인 대단하다. 1967년이면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막 시작할 때다. 근면, 검소 교육시키고 할 때인데, 보그 잡지를 보고 1990년대부터 한국에서 진행될 후기 자본주의의 엄청난 마성, 그 두려움을 시인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시인들이 무당 같고 선지자 같다고 했다. 자신들이 하는 얘기가 무언지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은 오늘날 사회를 전혀 예측 못했을 거다. 근데 직감적으로 느낀 거다.

  

   하이데거는 역사적인 어떤 토양, 배경,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 숨 쉬고 사는 삶의 터전을 말한다. 그것으로부터 시가 저절로 우러나온다고 했다. 그건 고요한 울림으로 들리는데 제일 먼저 예민하게 듣는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했다. 존재의 진리가 들려오는데 그것을 시인이 듣고 우리의 언어로 옮긴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말한다’, 존재의 언어가 말하고 시인이 그것을 듣고 따라 말한다고 했다. ‘말하기는 먼저 듣기다’라는 표현을 썼다. 진리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 후에 일상언어로 존재의 언어를 해석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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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와 시의 관계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얘기한 차축(車軸)시대가 있다. 카렌 암스트롱이란 분의 ‘축의 시대’라는 책도 시중에 나와있는데,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300년 사이 한 600년 정도가 인류 정신문화에 굉장히 특별한 시기다. 이때 인류는 정신문화의 거의 모든 기반을 닦았다. 중국의 제자백가, 인도의 부처, 이란의 차라투스트라, 팔레스타인의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등 선지자들이 모두 나왔다. 이후 2000년의 동서양 문명이라는 것은 이때 나온 것들의 주석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을 모두 잠언이나 경구, 다시 말해 시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일리아드’ ‘오디세이’도 극시이다. 문화의 초창기에 동양에서도 시경이 있었다. 인류문화 초창기에는 시와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다. 시와 철학이 갈라진 것은 플라톤부터다. 플라톤은 ‘국가론’이란 책에서 이상국가에서 시를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철학의 역할까지 맡고 있는 시를 퇴출하지 않고는 철학을 올바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거다.”

  

  

   - 플라톤은 왜. “그리스 사람들, 우민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철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플라톤은 시가 무언가를 부풀리고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시와 철학이 플라톤 이후로 분리되어 2000년 이상 왔지만, 다시 하이데거 이야기로 돌아가면 플라톤이 분리한 것을 하이데거가 다시 합치는 쪽으로 그의 후기 철학에서 주장했다. 존재의 진리를 시인들이 가장 먼저 안다고 했으니까. 하이데거가 계속 부르짖은 것이 소크라테스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존재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형이상학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이다. 시인들을 진리를 파악하는 사람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이 같은 맥락이다. 나는 적어도 이 책을 쓰는 동안에는 하이데거 쪽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하이데거 말대로 존재의 진리를 듣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인이라 한다면 결국 철학자들이 하는 일도 그런 것이다. 하이데거 식으로 우리 삶의 바탕, 역사적 맥락, 여기서 무언가 우러나오는 ‘이게 진리야’ 하는 걸 듣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인이라면 이 사람들이 철학자나 다름없다.”

  

  

   - 책에서 젊은 사람들 상대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핵심 메시지는 뭔가. “사람은 특히 젊은이들은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한다.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시대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가치라는 말이 매우 애매하고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모든 가치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자주 인용하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우화’가 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지옥엘 가보았더니 그곳에도 음식은 많은데 사람들이 모두 자기 팔보다 더 긴 수저를 들고 있었다. 당연히 음식을 떠서 자기 입에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모두가 굶주리고 살고 있었다. 천국엘 가 보아도 상황은 같더란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앞사람의 입에 음식을 떠 넣어주고 있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배려받는 나를 만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 같은 원리를 ‘상호주관적 매듭’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내 책에서는 포옹이 그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포옹은 다른 사람을 ‘안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안긴 나’를 만드는 형상이니까다. 이때 다른 사람은 내 가족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이웃 또는 전혀 모르는 타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행복하려고 애써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 오직 이런 방법으로만 행복해지는 거다. 또한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사회를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의미에서의 가치 있는 일, 곧 먼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라고 권한다. 그러면 그들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려받고, 사랑받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행복해진다는 거다.”

  

  

   - 이 시대의 철학자들은 무얼 하고 있나? 철학자의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나. “인터뷰 서두에 ‘학자들은 학구적인 부분에 계시고 저는 대중을 상대로 하고 두루두루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입장에서 불만을 토로하자면 오늘날 철학은 지나치게 우리 삶과 떨어져 있다. 철학을 위한 철학에 매몰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자연과학과 손잡아 인지과학 쪽으로, 뇌신경학, 뇌과학, 유기과학,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철학적 인식론과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런 곳에 몰두해 있는 사람도 있고, 오늘날에는 진화론이 대세라서 진화생물학, 모든 것을 진화로 해석하려는 쪽에서 철학적인 도움을 열중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내가 보기에는 삶과 동떨어진 이런 철학을 위한 철학들에 매몰되어 있다. 어찌 보면 20세기 초에 언어 철학이 시작되면서 그 쪽으로 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 대중들과의 만남은 어떻게 갖나. “강의를 나가는 것인데, 안 나간 지 7, 8년 됐다. 학생들이 제 강의를 별로 재미있어 하지를 않았다. 좀 재미있는 얘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 출판사 ‘푸른그대’도 운영했다. “2005년에 부엌에서 벗어나 보고 싶어서 그랬다. 대학에서 부르는 곳도 없고 다른 수가 없어서 출판사를 하나 해보자, 준비도 없이 시작했었다. 그 책이 ‘철학통조림’이다. 1년 후에 김영사에서 전화가 와서 ‘선생님 책 저희가 보기에는 참 좋은데 참 못 팔고 계신다’고 하며, 우리한테 넘기면 어떻겠냐고 했다. 아이고 하느님이 도왔다 했다. 그래서 책 판권을 넘겼다. 이게 2006년 이야기다. 손해는 안 봤다. 좋게 사줬다. 철학통조림 1권은 약 10만권 정도 나갔다. 4권까지 나와 있는데 꾸준히 나간다. 주로 중학생들이 본다.

  

   출판사는 내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책을 쉽게 쓸 수 있게 됐다. 출판사를 딱 1년 하고 내가 달라졌다. 그전에는 강의했던 것을 출판사에 원고 그대로 넘기면 그쪽에서 교정, 교열, 편집하면서 여기 좀 쉽게 써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쉽게 못 쓰겠더라. 심지어 책이 거의 완성된 상황에서 책을 더 이상 못 쓰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책을 내니까 초판, 2쇄에서 판매가 끝나곤 했다. 그런데 출판사를 차리고 딱 내 책을 내면서 보니까 못 고칠 데가 없다. 그 이전에는 고칠 데가 없었는데 아무리 봐도 더 쉽게 고칠 데가 없었는데 제가 출판사를 하니 못 고칠 데가 없었다. 완전히 달라진 거다. 그래서 2006년 이후에 나온 책 치고 3만권 이하로 나간 적도 없다. ‘문학읽기’는 9만권 나갔다. 지금 37쇄인가 나왔다.”

- 뭐가 달라졌나. “관점이 달라진 거다. 지금도 출판사 편집자들은 ‘선생님처럼 쉽게 쓰는 분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 좋아하는 시인은. “시인이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진리’를 전해주는 특별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모든 시인을 다 높이 평가한다. 개인적으로는 서정주 시인과 김수영 시인을 높이 평가하고, 최승자 시인과 장정일 시인을 특별하게 생각하며, 진은영 시인과 심보선 시인 같은 젊은 시인들을 눈여겨본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취향일 뿐이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85100012&ctcd=C04

 [출처] “시인은 존재의 진리를 가장 먼저 듣는 사람 선지자나 무당 같은 존재” (철학카페, 작가를 만나다) |작성자 로비99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말

지은이의 말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300년 가까이 혹독하게 탄압해오던 기독교를 공식 승인했다. 그럼으로써 제국을 지배하던 그리스와 로마의 수많은 신들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기독교의 신이 차지했지요. 그 이후 서양 사람들은 1700년 가까이 단 하나의 신을 압도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숭배해왔습니다. 서양문명이 곧 기독교 문명이고 그 심층에는 기독교의 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8P)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가지요.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갑니다. 신은 사회재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학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룹니다.(8P)


1부 신이란 무엇인가

***1512년 10월의 마지막 날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설레는 가슴으로 성 시스티나 성당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그가 지난 4년1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다리던 성당 천장화가 완성되어 처음으로 공개되는 날이었거든요. <천지창조>라고 불리는 이 천장화를 그린 화가는 미켈란첼로이다.(21P)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신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신의 본채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위엄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일 뿐이다.(28P)


미켈란첼로가 그린 노인은 누구인가

****미켈란첼로가 그린 신은 히브리인들으 성서에 나오는 야훼가 아닙니다. 그리스인들의 산하에 나오는 제우스지요. 이 그리스신들의 왕을 거리낌없이 야훼와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33P)

****르네상스란 재탄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문화를 깨뜨리고 인간중심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양식으로 드러내는 특징이지요.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의 야훼를 로마인들의 신인 유피테르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켰고 미켈란첼로는 성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라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를 그리스 로마인들의 정신과 기법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35~36P)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에게 신은 인간을 이상화하거나 그 능력을 극대화한 존재였습니다. 남아있는 그리스 조각품들이 증명하듯이 고대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몸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그것에 열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신에게 인간의 육체를 부여한 것은 신들을 폄하했다기보다 인간의 육체를 그만큼 신성시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36P)


엉덩이를 내다보이는 처녀들

***우선 그리스의 서정시인 핀다로스가 지은 <올림픽 경기 찬가>를 볼까요?


같은 종족이어서

인간과 신들은 하나라네.

하나의 어머니에게서 우리는 똑같이 승을 이끌어 내었지.

모든 것 중에서 단지 힘의 차이가 우리를 구분하나니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듯한데

놋쇠처럼 단단한 하늘이 영원히 정해진 인간과 신의 주거지를 갈라놓는다네

하지만 우리도 이 심성의 위대함 혹은 육체의 위대함에서

불멸하는 이들과 같을 수 있으리라.

핀다로스는 신과 인간이 크기와 힘에서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종족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지요.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엇던 것입니다. 이렇듯 대담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리스인들은 어려서부터 체조와 운동경기를 통해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운 육체를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37P)


***특히 스타르타의 청년들은 피타고라스의 계율에 따라서 몸에 군살이 붙어선 안되었지요. 그들은 열흘에 한 번식 행정감독관 앞에서 의무적으로 나체를 검사받았는데, 군살이 있는 사람은 금식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학교이자 체육관이라 할 수 있는 아테네의 김나지움에서는 모두들 나체로 체조를 해야 헸어요. 소녀들도 수치심과 연약함을 없애기 위해 집 밖을 나체로 활보하도록 허락했으며, 축제기간에는 무대에 올라 소녀들 앞에서 나체로 춤추고 노래하게 했습니다. (37P)


***그리스인들은 청소년들이 평소 입는 옷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옷이 몸의 발육이나 아름다움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이는 곳이 없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요즘의 비키니처럼 더 많이 노출되도록 디자인했지요.

또한 어떤 옷은 몸을 움직이거나 바람이 불 때면 피부에 착 달라붙어, 육체의 윤곽이 잘 드러나는 페플론(peplon)-베일처럼 얇고 하늘거리는 천-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 조각상들이 대개 치렁거리는 주름을 드리우면서도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은 그래서지요.

이는 그리스인들이 일상생활에서도 페플론을 걸치고 다니지는 않았더라도 축제일 같은 특별한 때에는 그런 옷을 즐겨 입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모든 일이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려던 그리스인들의 열망에서 비롯되었지요. 인류역사를 두고 인간의 육체를 이처럼 신성화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렇듯 건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미켈란첼로가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참고)그리스어 김노스는 나체를 의미하며 김나지움은 나체체육관이었다. 그리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기원전 5세기에는 모든 도시에 반드시 극장과 김나지움이 있었다. 그러나 용병이 출현하는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점차 체육의 중용성이 줄어 김나지움도 보통 학교처럼 되었다. (38P)


에로스의 날개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 애썻습니다. 감각의 미는 그들 작품에 자연스러움을 심어주었고 이데아의 미는 숭고함을 보탰지요. 그들은 인체를 조작할 때 수학적 비례, 조화, 균형을 지나치리만큼 엄격히 따졋습니다. 또 이마와 코를 일직선으로 만들어 우리가 보기에는 오히려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예요. 한 마리도 말해 인간답게 묘사하되 동시에 이상화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이 견지한 최고의 규칙이엇습니다. (43P)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여인의 얼굴이나 신체와 같은 감각적 대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들은 단지 매개체일뿐이지요. 아름다움은 오직 우리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 상기하게 되는 지고한 신적 형상의 아름다움, 곧 디에아의 미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일단 우리의 눈이 아름다운 여인과 같은 감각적 대상들을 통해 이데아의 미를 받아들이면 영혼에서는 “이를 가는 아이들에게 이가 나기 시작할 때처럼 열이 나고 근지러움과 불편함이 느껴지면서” 날개가 돋기 시작하지요. 이것이 이른바 영혼의 상승을 이끄는 에로스의 날개입니다.

참고)플라톤에 의하면 우리의 영혼 속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이데아가 이미 존재한다. 즉 그 모든 이데아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망각의 강을 건너며,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이데아에 대한 기억들을 잊었다. 그렇지만 그 기억들이 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면 그 사물 안에 깃든 이데아를 상기, 즉 다시 기억해냄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44P)


****에로스는 우리의 영혼을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향하게 하는 혼의 전향을 가져오고,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을 향한 등정을 하게 하지요. (44P)

****에로스는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기 위한 ‘혼의 날개짓’이고 상승자 창조자입니다. 또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천상의 이데아 세계로 연결시키는 열정이자 신엑 인도하는 안내자예요. 이로서 에로스 자신도 신적존재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러브(Platonic love)라고 부르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45~46P)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이같이 다원적이고 심층적인 이유에서 고대 그리스의 정신과 규칙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모방했습니다. 미켈란첼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탐구했고,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그리스로 보내 고대 미술품들을 모사해 오게 했지요. 그 결과 성서이야기를 다룬 이들의 작품에도 그리스문화가 자연스레 혼합되었습니다. 미켈란첼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신이 제우스의 모습을 , 아담이 아폴론의 모습을 하고 잇는 것이나 라페엘로의 ,성모자상>에서 성모가 아테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지요.(47P)


신인동형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궁극적 바탕으로서 자신은 탄생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탄생과 변화의 원인이 되는 무형의 원리를 가정해 부동의 운동자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신이라고 했지요.(51P)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구약성서의 신처럼 공의(公義)를 내세우지도 않고 인간보다 도덕적이지도 않습니다. 애정과 증오에 대한 일정한 기준도 없어요. 그러니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어요. 마치 우리 인간의 감정이 그렇듯 말입니다. (64P)


2부 신은 존재다

***아퀴나스가 내린 최종 결론은 신은 ‘있는 자’ 도는 ‘존재자체’라는 것이지요. (75P)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다. 이 명칭, 즉 ‘있는 자’다. 이 명칭 즉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75P)


1장 존재란 무엇인가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구절


나의 원수인 것은 다만 당신의 이름뿐:

아, 다른 이름이 되어 주세요.

하지만 이름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여전히 행기로운걸.

로미오는 로미오로 불리지 않아도

그가 지닌 고결함은 그대로인걸

오, 로미오

그대의 이름을 버리고

대신 내 모든 것을 가져가세요. (79P)


네가 그분을 파악하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되고 한정된 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지요.(84P)

***우리가 ‘어떤 것’을 예컨대 ‘사과’로 구정하고 그래서 사과라고 이름 붙이면 그 순간 우리는 동시에 ‘사과가 아닌 것’을 이미 전재한 것입니다. 사과 바같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것들을 이미 인정ㅇ했다는 말이지요. 우리의 사고 체계가 가진 이러한 독특한 논리적 구조 때문에 설사 ‘어떤 것’이 예컨대 우주처럼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것을 우주라고 규정하고 이름 붙이면 우주는 동시에 우주가 이닌 것과 구분되어 최소한 둘 가운데 하나일 분 만물의 궁극적 근원은 도리 수 없습니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바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85P)

***아우구스티누스는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85~86P)

***모세가 어렵게 알아낸 신의 이름이 야훼(YHWH)지요.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존재’입니다.(86P)


신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다

***‘나는 있는 자다’가 아닌 ‘나는 있음이다’여야 하고요. 설사 철학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나는 존재자다’가 아니라 ‘나는 존재다’가 되어야 합니다.

참고)신은 그 어떤 ‘무엇’으로 있지 않고 ‘그저’ 도는 ‘그저 그로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애야만 히브리어 원어에도 합당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도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신은 그 어떤 본질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무규정성, 무제약성이 드러나며 또한 신이 가진 절대적 독립성, 궁극적 포괄성, 유일성 등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95P)


그 사이에 눈얼음 계곡이 있다

***신은 강하고 전능하고 영원하지만 어떤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물 가운데 가장 강한 자이고, 가장 능력있는 자이며, 가장 지속한 자 곧 최고의 존재물은 결코 압니다.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무규정자이고 무한정자이며 원칙적으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상인 신은 그가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대로 단지 ‘존재’지요. (102P)


그리스인들과 존재

****그리스인들은 ‘세상 모든 존재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궁극적 근거를 ‘아르케’라고 불렀지요.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러스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아르케라고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수와 질서를 헤라이클레토스는 로고스를 내세웠어요.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인 엘레아 출신 파르메티데스는 만물의 궁극적 요소가 존재라고 주장햇지요.(104P)


존재는 진리의 근거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 ‘책상’으로 존재하고 그 이름이 책상인 것은 그 사물 안에 ‘책상의 이데아’가 들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플라톤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만일 아름다움 자체 이외에 어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 자체를 부분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어느 것 때문도 아니라네. 또한 모든 것이 다 그렇다고 나는 말하겠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아름다움 자체’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가리킵니다. 플라톤이 한 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며 이같은 원리가 세상의 만물에 적용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것이 둥글게 존재한다면 그 안에 ‘원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어서고, 어떤 것이 빨갛게 존재한다면 그 안에 ‘빨강의 이데아’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플라톤의 말에서 주목해서 볼 것은 “이데아를 부분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며”라는 대목입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사물들에 완전히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부분적으로만’ 들어있지요. 그래서 개개의 사물은 이데아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불변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데아론을 분여(分與)이론 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결과 개개의 사물은 그 본질에서 불완전하고 존재에서도 실재성이 적지요. 예컨대 세상의 모든 빨간 사물들에는 ‘빨강의 이데아’가 들어있지만 그것이 부분적으로만 들어 있어서 그 빨강이 영원히 빨갛지는 않고 일시적으로 빨간색일 뿐이고 언젠가는 퇴색된다는 말입니다. (111~112P)


자연의 사다리에서 존재의 사다리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고대와 중세의 신학자들이 신을 존재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아름다움 자체라고 표현했을 때 그거슨 다른 뜻이 k니라 신이 이 모든 가치의 정점(頂點)에 있다는 의미엿지요. 또한 그들이 존재물들을 존재의 결핍으로 거딧을 진리의 결핍으로 악을 선의 결핍으로 추함을 아름다움의 결핍으로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22P)

***한마디로 피조물은 선함, 평안함, 지혜, 즐거움이라는 측면에서 부족하지만 신은 그 모든 것에서 정점이라는 말이지요. (123P)


존재는 창조주다

****여기 사과가  한 알 있습니다. ‘사과’라는 존재는 크기(주먹만 하다), 형태(둥글다),색깔(빨갛다), 맛(시고 달다)과 같은 제한성과 규정성이라는 ‘안정된 조건’에서만 우리에게 사과로 인식됩니다. 그렇지요? 이때 말하는 제한성, 규정성이라는 ‘안정된 조건’이 철학에서 말하는 ‘본질’입니다. 사과의 존재는 이처럼 사과의 본질을 통해 비로소 우리에게 드러나지요.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134~135P)


***정체성이란 -자기 동일성

히브리인들은 야훼라는 한 개념 안에 존재, 생성, 작용을 다 포함시키고 있다. 보만이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야훼에 들어있는 생성, 존재, 작용의 통일성이 우리들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들의 사유가 가시적 사물들에 의해 그 방향이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의 방향이 심리적으로 정해지면 이 종합은 잘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격은 끊임없는 생성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격은 끊임없는 생성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작용하는 존재”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예를 들면 정직함이라는 인격은 그것이 부단히 자기동일적으로 정직하게 행위할 때에만 유지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더는 정직한게 아니지요. 만일 당신이 정직한 인격을 가지려면 지속적으로 정직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동안 정직하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을 한다면 그때부터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147~148P)


시간화와 탈시간화의 마술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불변하는 존재란 변화하는 존재의 ‘시간 밖에서의 모습’ 또는 탈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바로 그런 예이지요.(151P)


러브조이의 이중적 논법과 쿠사누스의 대립의 일치

****아우구스티누스도 <삼위일체론>의 신의 속성을 설명할 때 그 ‘이중적 논법’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신은 성질이 없어 선하며, 양이 없어 크고, 결핍이 없어 창조적임 지위가 없어 통치자이며, 외관이 없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장소를 갖지 않아 어디든지 있고, 시간을 갖지 않아 영원하며, 변함이 없어 변화하게 하고 아무 작용을 받지 않아 모든 작용을 한다. (155P)

☆☆☆ 신이라는 규정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과 같다. 불교에서는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고 ‘네가 바로 부처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부처성품인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성이란 무어라 한정지을 수 없는 그런 존재다.


***히브리인들은 종교생활 속에서 야훼를 존재하고 창조하며 인도하는 신으로 체험햇던 것이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인식과 체험들로 가득 차 있다. (157P)


신의 모습 상상하기

시작도 끝도 없는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습니다. 그 바다는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 안에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의해 무수한 물방울들이 생겼다가 없어지지요. 게다가 무작정 출렁이는 것만은 아니고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지혜로우며 거룩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출렁입니다. 따라서 그 안의 모든 물방울은 잠시 존재할 뿐인데도 그동안 오직 그 바다의 뜻과 의지에 의해 이끌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강력하고 지헤로우며 거룩한 존재의 바다가 바로 신이다.

인간은 물론이고 광활한 우주마저도 이 바다에 잠시 생겼다 없어지는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지요. (168~169P)


2장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마야의 찢지 못하는 베일

***플라톤에게 진리는 우리가 정신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이도스에 대한 지식입니다. (209P)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던 겁니다. (210P)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悟性)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개성화하는 일 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212P)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한마디로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지요.(213P)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나

***우리가 종교를 갖는 궁극적 이유는 종교적 경험을 갖기 위해서지 종교적 이론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늪ㅇ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성직자가 그를 발견했지요. 그리고 그에게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신이 그 사람을 태초부터 에정했으며, 그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했고 지금도 사랑하여 늪에서 건져주려고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자기를 보냇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러자 늪에 빠진 사내가 다급히 외쳤습니다. “이 사람아, 그건 상관없으니 어서 줄이나 던져라.!”


그렇지요. 바로 이것이 삶이라는 늪에서 매 순간 운명과 죽음, 허무성과 무의미성,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을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종교에 대해 진정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생생한 종교적 경험을 원합니다. 그러니 “어서 줄이나 던져라”라고 외칠 수 밖에 없지요. (221~222P)

☆☆☆‘붓다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고 했다.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어느 날 바닷가에 나란히 서서 일출을 보고 있다고 합시다. 이대도 프톨레마이오스는 ‘움직이는 해’를 보고 코페르니쿠스는 ‘움직이는 지구’를 보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예요. 왜냐하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패러다임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있고, 쿠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패러다임으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228P)


메타노이아-신비적 형태에서 일상적 형태로

***진정한 회심은 인간으로 인해 수없이 진노한 조재, 인간은 어느 대나 정당하게 멸할 수 있는 보편적 존재 앞에 인간이 스스로를 무(無)로 만드는 데 있으며, 그 존재 없이는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한 그에게서 버림받음 외에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233P)

****바울은 자신의 ‘신비적 경험’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역사를 보는 새로운 안목을 터득했고, 삶 전체가 바뀐 것이지요. 그에게는 메타노이아, 곧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고 이로서 신은 그를 통해 역사하며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233P)


3부 신은 창조주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이야기

  “얘야 나는 이제 세상이 즐거움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의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졌는데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느냐? 내가 그동안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내가 죽ㄱ 전에 네가 하느님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을 복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게 그 은총을 이미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그의 종이 된 것을 보았으니 이제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느냐?”

  기독교 역사상 가장 경건한 여인 중 하나로 꼽히는 모니카(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3장 창조론이 왜 <고백록>안에 있나

밀라노에서의 회심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에서 삼십 대 초반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마치 포도주가 포도주로,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과 같은 변혁의 시기였습니다. 위대한 학자이자 성인이 되기 위해 육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에서 금욕생활로, 영적으로는 마니교도에서 기독교도로 그 스스로 변해야만 했지요.(254P)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서양문명을 읽는 기독교 코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상당부분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263P)


고백인가 증언인가

***<고백록.으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 어머니 모니카마저 그를 말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모든 것이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주여 당신은 위대하십니다”로 시작하여 ‘모두가 당신에게 구할 일이요. 당신 안에서 찾아야 할 일이며 당신만을 두들겨야 할 일이오니 이렇게 하는 데서만 받을 것이고 찾을 것이고, 열릴 것입니다.“로 끝나는 <고백록>은 비록 회고록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눈물로 쓴 기나긴 신앙 간증(干證)이자 탁월한 신학자가 슨 성서 해석자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삶의 정점에서 회고록을 쓴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매개로 자기가 맡은 교구의 교인들을 교육할 신앙간증서 내지 신학 교육서를 썼던 겁니다. (266P)


****창조주로서의 신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총체적 시각을 다음의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세상에게 물어보라, 하늘의 아름다움, 별들의 빛남과 질서,

낮의 태양과 달, 밤에 내리는 서리를 가진 세상에게!

땅에게 물어보라, 나무들과 식물들을 풍요롭게 하는,

온갖 동물이 서식하여 인간을 위해 가꾸어지고, 마련된 땅에게!

바다에게 물어보라. 자기 안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로 충만해진 바다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나서 보라. 저마다의 것이 자신의 종류에 따라

자신의 감관을 통해 너에게 대답하고 있지 않은가:

“신이 우리를 만드셨다.”드높이 숙고한 철인들이 이것을 물렀고,

그들은 세계라는 예술품으로부터 신적인 예술가를 인식했다. (270P)


4장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무에서 유가 어떻게 나오는가?

***무한대는 아무리 큰 수보다도 크고, 무한소는 아무리 작은 수보다도 작지요. 이처럼 무한은 무한히 물러납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287P)


무수한 우주가 존재한다고?

**** 세 번째 숫자는 우주의 상대적 밀도를 나타내는 오메가 (Ω~1)입니다. 만약 초기 상탱[서 이 값이 아주 조금만 더 컸거나 작았더라면, 그래서 팽창이 아주 조금만 더 느리거나 빨랐더라면 아주는 쭈그러져 버렸거나 아니면 흩어져 버렸을 거리고 하지요. 팽창에너지와 중력에너지가 정확히 균형을 이루는 Ω의 값이 1인데 이때 우주는 고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우주가 지금처럼 게속 팽창하고 있지만 흩어져 버리지 않고 존재하게 하는 Ω의 값을 갖기 위해서는 빅뱅 후 1초가 되었을 때 Ω가 1에서 이상 차이가 나면 안도나디고 합니다. (291P)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와 의사소통

***바로크 미술의 대표화가인 파울 루벤스의 회화들이 증명하듯이 그 시대에는 미인이라는 단어가 뚱End하다 싶게 풍만한 여성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미인이라는 말에 그 시대의 풍습, 제도, 역사, 문화에 의한 삶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같은 말이 비쩍 말랐을 정도로 ‘날씬한 여성’이라는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삶의 양식이 변하자 언어놀이가 변했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의 의미가 변한 것이지요. 비트켄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습니다. (303P)


영원이란 무엇인가

****태초는 ‘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 밖’을 뜻합니다. 그런 만큼 이 말은 신이 ‘시간의 밖에서’ 우주를 창조했고, 창조와 동시에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야 하지요. (317P)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당신은 우선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성이 시간의 무한한 확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원성이 무시간성을 뜻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하지요. (319P)


****플로티노스는 <엔네아데스>3부 7장인 <영원과 시간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영원이란  마치 하나의 점 안에 모든 것이 자리하듯이 그에게는 흘러 지나가는 것이 없으며, 오히려 자기동일성 안에 머물러 항상 자기이기에 언제나 변화가 없는 존재,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라고 하겠다.”


플로티노스에게는 영원이야말로 가장 안정된 존재, 즉 미래에 변모될 것이 없고 과거에 변화된 것도 없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은 신인 일자(一者)에 속하지요.(323p)


시간이란 무엇인가

***플로티노스가 행한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의 핵심은 “시간이란 결코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태양의 회전운동이  시간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고유한 운동량에 의해 시간이 인식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공간이 연장(延長)을 재는 척도이듯 시간이란 지속(持續)을 재는 척도이며 그러한 시간을 파악하는 주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음이 없다면 지속과 운동은 있을 지라도 시간은 없다는 것이지요. 시간은 마음 밖에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마음 안에서 드러나며 마음과 하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삶이 변하면 시간도 변하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플로티노스는 시간이란 “마음의 삶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학자들이 플라톤에서 플로티노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에서 말하는 시간을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지요.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보통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는 걸? 시간은 영혼이 잽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신의 영원성이 들어있기에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영혼이 변하면 삶이 변하고 시간도 변하므로 시간은 곧 영혼의 삶입니다. (327p)


***영원은 신에게 속하는 동시에 값어치 있는 것이고, 시간은 인간에게 동시에 세속적이고 부질없는 것이지요. (327p)


***세익스피어의 역사극 <루크리스의 겁탈>에서 이처럼 세속적이고 부질없는 시간의 속겅에 대한-탁월하고 근거있는 -불평과 찬미를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민첩하고 교활한 파말마, 근심의 전달자.

추한 밤의 친구이자 꼴불견인 시간이여.

너는 청춘을 좀먹는 자, 거짓 즐거움의 못된 노예이며,

슬픔을 구경하는 천박한 자, 죄악을 짊어진 말이며,

미덕의 올가미다. 너는 모든 것을 낳고

또한 모든 존재하는 것을 소멸시킨다.

네가 맡은 일은 원수에 대한 증오심을 없애고,

세평에서 생기는 오해는 종결시키는 것이다.

너의 영광은 다투는 국왕을 화해시키는 것이고,

허위의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악을 행한 자가 뉘우칠 때까지 고통을 주는 것이고,

오만한 건축물을 네 힘으로 폐허화하고

빛나는 황금 탑을 먼지로 더럽히는 것이다.


시간이란 단지 교활한 파발마, 근심의 전달자, 청춘을 좀먹는 자, 슬픔을 구경하는 천박한 자, 미덕의 올가미일 뿐일까요? 아니면 기껏해야 증오심을 없애고 오해를 종결시키는 자, 허위의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는 자, 악을 행한 자에게 고통을 주는 자, 건축물을 폐허화하고 호아금탑을 더럽히는 자에 불과할까요?(328~329p)


시간의 끝에 영원이 있다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입니다. 하나는 한결같이 머무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둘 다 ‘마음의 삶’이라는 점에서 같지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부단히 신을 닮으려 하고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 한다는 겁니다....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잇는 것이지요.(330p)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시간이 필요한 겁니다. 시간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가는 문(門)이자 통로지요.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찾아낸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눈물과 땀에 젖은 우리의 삶, 곧 우리의 고달픈 시간의 끝에 허무가, 전락(轉落)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이, 신이, 구원이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어디 잇겠습니까?(330p)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 과거, 미래로 끝없이 분산되어 흘러가면서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게 말게 하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파괴하자는 것이지요. (331p)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운동에 속하는 어떤 수 또는 운동의 척도로 파악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시게로 재고 있는 시간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시간은 무한히 나뉘어 끊임없이 흘러가 버리는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것이에요. 물론 이 물리적 시간에도 이전9과거), 지금(현재), 이후(미래)라는 구분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이후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지요. 그나마도 그 ‘지금’에는 시간적 연장, 곧 지속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분산되는 수많은 찰나들, 즉 지금, 지금, 지금, 지금이 무한히 계속될 뿐이지요.(333p)


***물리적 시간은 우리 삶이 가진 모든 것, 즉 육체와 정신 그리고 삶 자체까지 점차 파괴합니다. 그 누구도 이를 피해 가지 못하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자기 자식을 낳는 대로 잡아먹는 끔찍한 신이지요. 크로노스 안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삶은 단지 흘러가고 마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베르길리우스가 ‘시간은 모든 것을 가져간다. 심지어 마음까지도“라고 한탄했고, 세익스피어가 ”너는 모든 것을 낳고 도한 모든 존재하는 것을 소멸시킨다“라고 불평한 것처럼 말이지요. 알고보면 바로 여기에 우리의 불안과 절망, 모든 허무주의가 발을 닫고 있는 겁니다. (333p)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우리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 시간’을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신적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오늘날에는 보통 심리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이 시간에 대해 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 세 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셋은 마음(영혼)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334p)


장난감 하나를 얻고자 영원을 팔아?

****아우구스티누스 덕분에 이제 우리에게는 사실상 두 가지 시간의 가능성이 주어졌습니다.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이지요. 분산되는 시간과 통일된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조재물의 시간과 존재의 시간 또는 세속적 시간과 신적 시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요. 우리 육체는 그것이 존재물인 한,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그렇듯 좋든 싫든 물리적 시간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336p)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9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해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337p)


****만일 당신의 마음이 모든 과거가 기억으로서 현전하고 모든 마래도 기대로서 현재 안에 있는 시간을 산다면 당신은 결코 그런 짓들을 하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결코 사라지지 않고 현전하는 수치스런 과거와 이미 다가와 함께하는 암울한 미래 때문에 평생 괴로울테니까요.(338p)


***세익스피어의 작품 <루크리스의 겁탈>에는 물리적 시간을 사는 세속적 사람들이 새겨들을 만한 구절이 담겨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은 들 소득이  무엇이랴

그것은 꿈이요 한순간의 입김이다.

덧없는 쾌락의 거품일 뿐.

누가 일주일의 고통을 주고 한 순간의 환락을 사랴.

장남감 하나를 얻고자 영우너을 팔아?

달콤한 포도 한 알을 얻기 위하여

덩굴을 모두 망칠 자가 누구랴.

어떤 어리석은 거지가

당장 왕홀에 맞아 죽을 텐데 왕관을 만지겠는가?<루크리스의 겁탈 211~217>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여전히 일주일의 고통을 대가로 한순간의 환락을 사지 않나요? 달콤한 포도 한 알을 얻기 위하여 덩굴을 모두 망치지 않나요? 영원을 팔아 순간을 사지 않나요?

왜 이럴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신을 향해 그리고 영원을 향해 살라는 플로티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훈을 의심하기 때문이지요.(339p)

***폴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에서 이 시간들을 각각 세계의 시간과 정신의 시간으로 명명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신의 시간’을 발견한 것에는 경의를 표해야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세계의 시간을 놓친 것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336p)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와 프루스트의 ‘회상’

***어느 겨울날 주인공 마르셀의어머니는 추위에 덜고 있는 그에게 따뜻한 차와 ‘마들렌’이라는 조그만 케이크 하나를 권합니다. 그는 마들렌 조각을 차에 담갔다가 차를 마셨는데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쾌감”을 경험하지요. 차에 섞인 마들렌 부스러기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느꼈던 감각이 어린 시절 아침 인사를 하러 레오니 숙모에게 갔을 때 그녀가 따뜻한 보리수 꽃차에 마들렌 한 조각을 담가 준 일과 그 당시 콩브레에서의 기억들을 연이어 떠올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회상을 ‘무의지적 기억’이라고 불렀지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마르셀을 “강렬한 쾌감”에 빠드렸을 까요? 이에 대한 답이 약 3000쪽이나 되는 이 방대한 장편소설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341p)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처럼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가지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마르셀은 결국 잃었던 정체성을 회복하고 허무에 바졌던 자기 자신을 구하게 되지요.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고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희망이 생긴 것이고 결국 그의 삶이 구원받게 된 것이지요. (342~343p)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와 다릅니다. 인간은 역사의 객관일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이요, 주체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적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 속에 기획하지요. 모든 역사의식은 사실 과거와 미래를 현전하게 하는 상기의 힘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지요.(344p)



천지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에 나오는 천지라는 말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하늘과 땅’ 즉 지구 위에서 바라본 가시적인 하늘과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시간도 공간도 없는 어느 미지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349p)


무로부터의 창조

***‘무로부터의 창조’는 기독교가 받아들인 히브리적 사고로 신이 창조주이자 곧 절대자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359p)


보시기에 좋았더라

****신플라톤주의에 매료된 르네상스인 단테는 ,신곡>에서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지요.


하느님의 살아있는 빛은 하늘과 하늘을

거치면서 점점 약해져서 마침내

우연적인 것(물질)들에까지 이르지요. (366p)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육체는 전혀 악하지 않고 ‘영혼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육체의 타락 가능성“이며 신은 오히려 ”(인간이)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육체에 영혼을 부여한다“라고 주장했지요.(367p)


5장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신의 작업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일자는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충족적이기에 풍요성을 갖게 되었고, 그 풍요성이 급기야는 자기 바깥으로 넘쳐 흘러 자연스레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400p)


***단체는 <신곡>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어요.

모든 시샘을 스스로 몰아낸 선함은

마치 불처럼 자기 속에서 타올라 빛을 발하는 불꽃같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외부에 퍼드린다.

바로 이것이 자족하는 신이 왜 세계를 창조했는가에 대한 고전적인 대답입니다. (400p)


다윈의 진화론과 그 영향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로 뉴턴의 업적이 위축되었고, 공산주의 몰락으로 마르크스의 명성이 한풀 꺾였지만 다윈의 진화론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지요.(407p)


생존경쟁과 적자생존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자연의 다산성)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생존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선택(자연선택0이 일어난다. (414~415p)


피에 물든 이빨과 발톱

****자연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는 분명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기도 하지요. 자연과는 달리 인간과 사회는 언제나 가치지향적이고 또 항상 그래야만 합니다. 따라서 역사는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을 따라 인간사회에서도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와 함께 자유, 평등, 박애를 지향하던 이성과 계몽의 역사가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425p)


다윈과 기독교

***다윈은 오히려 인간이 저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해 여기가지 올라왓다는 데 자부심과 희망이 있다고 했고, 등산에 열광했던 토머스 헉슬리는 인간을 “살아있는 세계의 알프스 산맥”으로 비유하면서 한껏 드높였습니다. (430p0

***신의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오랜 교리입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특정한 자연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433p)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

****우리는 키르케고르가 무한한 양적 차이라고 하지 않고 질적 차이라고 표현한 EEP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을 극대화한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시간의 극대화가 영원은 아니라는 말이다.(474p)


창조의 목적은 구원

***기독교가 탄생했을 때 초기 교부들이 해결해야 말 가장 큰 문제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차이점을 극복하는 것이었어요. 내용으로 보자면 창조의 신과 구속의 신,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사랑과 은총이 넘치는 보편적인 하나님 사이에 놓인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본질적 간격을 해소해야 했습니다.(483p)


****당시 교부들은 사력을 다해 마르시온과 맞서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창조의 신과 구속의 신은 하나라는 교리를 지켜냇다. (484p)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게구원입니다. 존재자체, 진리자체, 선자체 또는 아름다움자체인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지요.....불온전한 자기 자신이나 세게가 신처럼 온전해지는 것은 모두 신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진정하고 싶었던 말이지요. (485p0


4부 신은 인격적이다


6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네로는 자객을 보내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내는 간통으로 몰아서 죽인 황제이니 반역 혐의를 씌워 스승인들 죽이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타키투스가 적기를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황후는 살해당할 때 자객에게 “배를 찔러라! 네로를 낳은 여기를 !:이라고 외쳤다지요. (497p)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시승이었다. 황제의 친서에는 세네카가 즉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고 적여 있었어요.

세네카는 눈물을 흘리며 슬포하는 친구들을 오히려 꾸짖었답니다.

“그대들의 철학은 다 어디로 갔는가? 눈앞에 닥치는 불행과 맞서겠다던 그 결심은 또 어디로 갔는가?”세네카는 친구들에게 인간의 삶의 연회(宴會)에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너무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해서도 안되지만 너무 늦게 떠나 주인에게 폐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지요. 이제 그가 연회를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498p)


***영국의 시인 ‘월터 새비지 랜더’의 시 가운데 세네카의 죽음에 썩 어울리는 작품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어느 늙은 철학자의 말>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이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498p)


***세네카에게는 죽음은 로고스(LOGOS)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로고스는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의 섭리지요. 이 섭리는 세계에는 그 세계를 창조하고 움직이는 자연법칙으로, 인간에게는 도덕법칙으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스토아철학자들이 자연법이라고도 불렀던 이 도덕법칙에 대해 그러하듯이 순응함으로써만 덕스럽게 될 수 있지요. (498p)


***서양문명에서 로고스는 신의 섭리로서 ‘영원법’이자 인간이 따라야 할 모든 법과 도덕의 근거인 자연법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근원적으로 자연법은 정당하기 때문에 법이고 실정법은 명령되었기 때문에 법이라고 생각해 왔지요. (501~502p)


****로고스는 또한 인간의 이성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로고스(이성)를 자기 정신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 안에 있는 로고스, 곧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이 스토아철학자들의 생각이었다. ‘나면서부터 로고스를 나누어 가진 자에게는 올바른 이성도 법칙도 주어져 있다“라는 것이 그들의 구호였어요.(502p)


***세네카는 이런 말을 햇다.

  “운명이 우리를 인도하며 각자의 수명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오. 또 AEMS 것이 인과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물의 영속적 질서가 개체와 전체를 모두 지배한다오. 만사는 우리 생각처럼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용감하게 참고 견뎌야 하오. 무엇이 그대를 기쁘게 하고 무엇이 그대를 울게 할지가 이미 오래 전에 정해졌으며 개개인의 인생이 서로 아주 달라 보여도 결과는 마찬가지라오. 우리가 받은 것은 무엇이든 사라질 것이며, 우리 자신도 사라진다는 것이오. 그런데 왜 우리가 분개하며 무엇 때문에 불평해야 하는 거요?”


세네카는 이렇듯 섭리를 필연적인 것, 즉 운명으로 생각했는데요, 이는 스토아철학의 전총기도 했다. 섭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불평할 수 잇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신의 뜻이지요. (503p)


***세네카는 시적 운율에 맞춰 다음과 같이 교훈했습니다.


가난을 무시해라.

태어날 때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통을 무시하래.

고통은 사라지거나 너희와 함께 끝날 것이다.

죽음을 무시해라.

죽음은 너희의 고통을 끝내주거나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에 고통을 아예 모르는 신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세네카는 참된 스토아 철학자는 ‘신들 위의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505p)


***파울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러한 사유와 용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직 스토아 철학적 정신만이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 정신과 오랫동안 당당하게 대립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지요.

 “로마제국도 기독교의 적수는 아니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기독교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한 것은 네로처럼 제멋대로인 폭군도 줄리안같은 광신적 반동주의자도 아닌 도리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점잖은 스토아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507p)


아테네의 신

***** 에피쿠로스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되는 모든 악마적 두려움에 더는 당대사람들에게 이렇게 복음을 전했지요.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저 무한한 우주 어딘가에서 지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신들은 인간을 괴롭지도 않으며 신들은 인간이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고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들 지상의 피조물보다는 행복한 삶을 산다는 점에서 신들인 것이다. 신들은 쾌락 속에서 살며 더할 나위 없는 지복 속에서 쉬고 있고 다른 신이나 인간들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531p)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아무도 없었다>


세상의 절망에 대하여

나는 신에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나는 신이 없음을 알았다.


신은 내게 말하려고 했다.

(아무도 웃지 말지어다)

신은 내가 없음을 알았다......

적어도 반 이상은 없음을

(533~534p)


***세네카가 인간은 신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때 거기에는 신의 보살핌을 믿거나 그에게 의지한다는 뜻이 전혀 담겨있지 않아요. 인간은 오직 자기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로고스인 이성을 믿고 도덕법칙에 의지해야 하지요. (534~535p)


예루살렘의 신

***그리스인들이 철저히 철학적인 데 비해 히브리인들은 지극히 종교적이엇다. (545p)


7장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

****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또한 신과 만나고 신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도를 ‘신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햇다.(559p)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6)“ (560p)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 다는 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답이지요.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신의 절대적 독립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기도를 통해 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신의 절대성과 독립성이 손상되지요. (560p)


섭리와 기도

***기독교인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인격성을 믿는 것이자 곧 신의 섭리를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전능하고 신실하여 설사 내가 ‘이 눈물 골짜기에서 악한 일을 당하게 하실지라도 그것이 변해 선이 되게 하실 것’을 믿고 의심치 않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그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지요.(563p)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이자 신실하기까지 했던 욥은 모든 재산과 자녀를 하루아침에 잃고도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1:21)라며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재앙과 관계없이 신을 신뢰했지요.(565p)


***예수의 마지막 날 밤, 빌라도의 군대에 잡혀가던 바로 그날 밤, 예수는 겟세마네동산에 올라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면서 세 번 기도합니다. 이때 그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엇지요.

견딜 수 없는 공포와 전율 속에서도 신의 섭리를 믿고 따르려는 거룩한 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이렇게 기도해야 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르침을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래야만 기도는 우리가 신을 조종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이 우리를 조종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야만 기도가 우리를 자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라 신의 뜻과 의지를 따르려는 신율적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566~567p)


강한 섭리 약한 섭리

***만일 어떤 사람이 구하는 물질적 풍요가 ‘신이 보기에 그에게 궁극적으로 좋다면 그래서 그것이 신의 섭리 안에 예정되었다면, 그에게 물질적 풍요를 ’차고 넘치게“ 내려 줄 겁니다. 설사 그가 그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만일 해롭다면 그래서 신의 섭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가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571p)


****신은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대도 우리가 신의 섭리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은 지식과 선함과 의지에서 무한하지만 인간은 유한하다는 전제때문이지요. (572p)


***결론적으로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아요. 때대로 신은 인간의 기도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마저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574p)


기도는 왜 하는가

****신의 강제적 섭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유익하다는 것이지요. 왜냐고요?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원하던 응답을 받으면 받은 대로, 또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한 대로 그 결과를 자신을 향한 신의 섭리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이루어졌든 이뤄지지 않았든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섭리로 확인하는 일은 기독교인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575p)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햇다.

 “신으로부터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즉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신의 섭리는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576p)


****기도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향한 신의 의지를 드러내도록 하며 자족하게 하지요.(576p)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의 절구에 자신을 집어넣어 부서지고 빻아져서 그러나 버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이다.(577p)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성숙 단계를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나누어 설명햇다. (580p)

***키르케고르는 전능한 황제 네로를 “욕망의 지옥을 예감한 사람”으로 보고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질은 불안과 두려움’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단했습니다.

  “그는 괘락의 순간에만 안정을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쾌락의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는 다시 권태 속에서 허덕인다.....네로는 로마의 반을 불태워버리지만 그의 고뇌는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이제 더는 그의 마음을 달래 줄 것이 없다.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그 자신에 대해서 그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그리고 불안이 바로 그의 본질이다.”


세네카는 네로 같은 향락주의자들은 “살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죽을 줄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평했지요. (582p)


***키에르케고르는 “그러니 이제 그대여 절망하라”고 우리에게 오히려 권하지요.

  “절망하라. 그러면 그대 정신은 결코 더 이상은 우울 속에서 신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비록 그대는 그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것이지만 다시금 그대에게는 아름다워질 것이고, 즐거운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의 해방된 정신은 자유의 세계로 날개치며 솟아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585p)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라는 신조로 사는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아무 것도 스스로 갖지 못하며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진실로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하지요. 따라서 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끝간데 없는 병적 불안감은 여기서 기인합니다.

이에 반해 ‘이것이냐 저것이냐’ 라는 양자택일을 통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일체를 자신의 선택에 의존하지요. 그는 국토있는 국왕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순간 자신의 과업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지체없이 행동을 취하지요. (586p)


***키에르케고르는 이 두 종류의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지요.

  “심미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생활은 더욱더 많은 것이 필요하게 되고 그런 것들 중 가장 하잖은 것이라도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 그는 죽는다. 이에 반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타개책을 갖고 있다. 일체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짓누르는 폭풍우가 어둡게 그를 감싸고 있어서 그의 이웃들마저 그를 볼 수 없을 때라도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꽉 붙들 수 있는 한  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은 그의 자기인 것이다. (586p)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뉘우침이란 본디 최고의 윤리적 표현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자기부정입니다. 이 최고의 자기부정을 그는 “무한한 자기 체념‘이라고 불렀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을 <종교적 단계>로 이끈다는 겁니다. (593P)


두려움과 떨림

***부조리란 말 그대로 ‘조리에 맞지 않음’ 또는 ‘이성에 의해 파악되지 않음’, ‘비 합리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물론이고 그 후계자인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20세기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부조리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지요. (596P)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날 산에서 아브라함이 구핸 낸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백살 넘어 얻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으로 자식을 죽여야 하는 어떤 미치광이 노인을 구한 것도 아니지요. 그것은 삶에 스며드는 부조리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습니다.(604P)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룰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恩寵)의 본질이다. (609P)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성과 도덕을 통해 얻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구원과 은총이다. 그들이 신을 단순하 인간이 따라야 할 자연법칙 내지 도덕법칙으로 파악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신의 숭고한 팔을 스스로 놓아버린 겁니다. (609P)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지요. 그렇지만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글어갑니다. 그럼으로서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침해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의 기독적 의미지요. (609P)


5부 신은 유일자다

****플로티누스는 로마황제 세베루스가 13년째 다스리던 204 혹은 205년에 이집트의 나일강 상류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 리코폴리스에서 태어났지요. 어린시절부터 그는 빵보다 지혜를 원했답니다. 그래서 스물 여덟살이 되던 해에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갔지요. 그곳에서 플로티노스는 오랫동안 염원하던 스승을 만났지요. 스승은 한 때 부두 노동자였던 암모니오스입니다.

플로티노스는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없엇던 만큼 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부담을 전혀 안겨주지 않았다. 또한 지상의 어떤 것에도 별 욕망이 없어서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황제 갈리에누스와 황후 살로니나까지 그를 존경하고 좋아햇지요.

플로티누스는 시냇가에서 조약돌을 줍는 소년처럼 명상 속에서 흘러간 시간들을 하나씩 마음에 모았습니다. 그는 항상 마음이 ‘시간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시간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태양의 회전운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시간을 만들어내지요. 마음이 없으면 지소고가 운동은 있을지라도 시간은 없습니다. 시간은 마음 안에 잇고 마음과 하나지요. 그러므로 항상 흘러가는 것 같지만 전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간입니다. 언제나 아직은 오지 않은 것 같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지요.

“죽음도 역시 다르지 않거늘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며 기쁘게 맞지 못하랴.”


플로티노스가 닷새 만에 눈을 떴습니다.

“스승이시여, 그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무얼 염려했단 말인가. 우리의 영혼이 양생자임을 몰랐는가? 영혼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동시에 저 세상에서도 산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 영혼도 당연히 때마다 자리를 바꾸어 가며 이편 또는 저편에서 살아가지 않겠는가?” (615~621P)


8장 일자란 무엇인가


그리스어로 저술한 모세

****고대 사람들은 신을 선과 악, 빛과 어둠, 온기와 냉기, 행운과 불운 같은 이원적 힘의 근거로 인식햇다. 예컨대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의 가르침이 그렇지요. 그들은 선함과 악함 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때문에 자기에게 다가오는 불운, 재앙, 질병 등을 인간이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신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지요. 이때 플라톤이 나선 겁니다.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거인 신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 그 본질은 선이라고 주장했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위로한 것이다. (633P)


***헨리모어의 <영혼불멸>

만일 신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욕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단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그의 행위에 일정한 척도가 없다면

무엇을 그가 의도하는지를

이해할 도리가 있을까?

................

우리의 가엾은 혼이 이 세상에서 떠나갈 때

그 복리나 그 생존에 관해서 누구도 확신할 수 없으이라.

만일 우리가 신의 법칙을 이같이 왜곡하고

악한 의지가 신을 지배하거나 선은 신의 의지와 무관하다고

경솔하게 주장하는 기묘한 사상에 자유를 부여한다면

무한히 넘치는 신의 선성(善性)은

모든 곳에 가득 차 있도다. 신은

무한한 우주에 될 수 있는 한 즉시

그의 최선의 재주를 부려 피조물들에게

선이 받아들여지도록 행하였도다.

.....신이란 이름의 무궁한 선은

오직 선을 목적으로 하는 나에게는 전적으로 충분한 이유인 것이다.


신은 악한 게 안라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마음 편히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바로 이것이 플라톤이 서양사람들에게 준 위대한 선물입니다. (634~635P)


플라티노스의 일자

***플라톤이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였다면 프로티누스는 깊은 철학적 통찰력을 지닌 종교인이었다.

플로티누스는 먼저 일자는 어던 존재하는 사물일 수 없으며 모든 존재자에 우선한다라며 일자가 어던 것 하나 즉 그 어떤 존재물 가운데 하나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639P)


테르툴리아누스의 용어들

****반달리즘: 429년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를 침공햇다. 보니파세 장군 휘하의 로마 군대가 그들에 맞서 싸웠지만 괴멸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간신히 카르타고로 후퇴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반달족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후 반달족은 로마까지 함락시키는데 이때의 약탈과 파괴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반달족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지금까지도 신성모독이나 문명파괴 행위를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부른다. (654P)


오른발은 신학에, 왼발은 철학에

*****오리게네스는 참으로 불꽃같은 사람이었고, 진실로 격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202년 오리게네스가 열일곱살이 되었을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도 박해가 시작되어 오리게네스의 아버지 레오니다스가 순교했지요. 이 무렵 있던 일로는 오리게네스의 신앙과 품성을 잘 알려주는 일화가 전해옵니다. 오리게네스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어머니와 자신 그리고 동생들 때문에 순교를 향한 열망에 사로잡혀 스스로 로마관원을 찾아가려고 햇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옷을 감추고 아들을 말려 뜻을 이루지 못햇다고 하지요. 이처럼 오리게네스는 불같은 신앙과 칼 같은 품성으로 일흔 평생을 살았습니다.(662P)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는 미개한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고문에 대한 열정과 타인의 고통에서 환희를 느끼는 야만적 풍습을 위대한 제국으로 끌어들였지요. 어떤 기독교인들은 빨갛게 달구어진 쇠사슬에 결박되었고, 더러는 조개껍질이나 쇠갈고리로 온 몸이 토막나 죽었으며, 더러는 서서히 달아오르는 불에 몇 시간식 몸부림치다 죽었습니다. 혹은 펄펄 끓는 납물을 뒤집어쓴 채, 혹은 피를 흘리는 채로 소금과 식초에 절여져 서서히 죽어갔지요. 경건한 처녀들은 검투사나 포주에게 넘겨져 능욕을 당한 다음 또 같은 일들을 당했습니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놀랍게도 당시의 순교자들 대부분이 ‘신앙을 포기한다’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그 고통을 면할 수 있었는데도 심지어 가날픈 처녀들조차 끝내 비굴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육체는 영혼의 김옥이므로 육체가 파괴될 때 비로소 영혼도 해방된다는 당시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적 가르침을 굳게 믿었던 것이지요. (663P)


***오리게네스는 순교자들의 수난이 그리스도의 수난처럼 다른 사람들을 속죄할 능력이 있다고까지 가르쳤지요. 231년 오리게네스는 결국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자신을 호나대하는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다운 겸손으로 이런 말을 남겼지요.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기보다 동정해야 합니다. 그들을 저주하기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미움이나 저주가 아닌 복을 끼치기 위해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666P)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란 가이사랴 감독 바실리우스, 바실리우스의 동생인 그레고리우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나지안제누스의 그레고리우스를 망한다.

이들 가운데 바실리우스는 학문만이 아니라 지선에서도 뛰어나 대바실리우스라고 불릴 만큼 존경을 받았지요. 바실리우스는 부유하게 태어났으나 평생동안 제 스스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신은 한 벌의 옷, 그리고 빵과 소금만으로 지내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보살렸지요. 감독으로 봉사하던 가이사랴 외곽에 바실리아스라는 대규모 빈민보호시설을 지었는데 주로 버림받은 문둥병자들을 위한 곳이엇습니다. 여기서 바실리우스는 몸소 그들을 보살피고 대접했으며 그들에게  입맞추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매년 1월 1일을 성 대바실리우스 축일로 정하고 지금도 조과(早課, 아침기도)에 다음과 같이 그를 찬양하지요. (689~690)


삼위일체가 진정 의미하는 것

***“모든 존재물이 그 안에서 생성, 소멸하는 무한한 바다가 곧 성부이고, 그 바다에서 무수한 존재물들을 생성, 소멸하게 하는 법칙이 곧 성자(정신)이며 거스를 수 없이 강력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는 그 바다의 의지가 바로 성령(영혼)이다. ”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나눔 속에서도 연합해”있고,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분되는 셋“이라는 주장이 보다 자연스레 이해되지 않나요?(716P0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에로스와 아가페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햇다.

   “에로스를 낭만적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타인 속으로 자신을 용해한다든가 더 높은 통일속으로 타인과 함게 용해되려는 욕망 속에서 성립한다.

이와 달리 아가페는 용해를 넘어서서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존재들의 세계속에서만 자리 잡을 수 있다. 요컨대 아가페는 마치 여러 가지 악기가 서로 다른 자신들의 역할을 오히려 굳게 지킴으로써 다성성을 가진 하나의 음악을 이루어내는 교향악처럼 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 서로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함으로써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공동체를 마침내 이루어내는 사랑이지요.”


***서양조성음악에서 화성을 이루는 각 음들도 상호배타적으로 분리되지도 않지만, 상호융합적으로 혼합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화음이 만들어지지요. 교향악에서는 악기들이 각자 자기 소리를 냄으로써 또는 4부 합창에서 아름다운 다성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헨델의 <메시아>같은 합창곡이 삼위일체의 본질이자 기독교의 핵심인 이종사랑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는 이야기이다. (727P)

***소리가 결합될 때 하나가 되면서도 각자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화음을 이루어 합창을 부르는 것이 기독교 전통에서 두드러졌다는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다.(728P)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지은 존던의 <기도문>

누구든지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양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 흙덩어리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된다면

대지는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고

만일에 모래펄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땅이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여라.

어느 누구의 죽음일지라도 그 역시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는 인류 속에 상호침투된 존재이기 때문이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를 위하여 조문할 사람들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기에.(730~731P)


이 시는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지요.

☆☆☆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존던의 시 역시 우리는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9장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의 신이냐, 신약의 신이냐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매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신, 즉 전재에 능하신 야훼, 보복과 질투의 신 야훼, 이스라엘을 편애하는 야훼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너희 우너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교훈한 사랑의 하나님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지요. (735~736P)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결코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요,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엇지요.

12, 13세기에는 십자군이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끔찍한 살육과 약탈을 저질렀지요. 16세기에는 유럽의 가톨릭교도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총칼을 들고 중남미 각국에서 숱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17세기 이후에는 청교도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정복과 선교를 위해 온갖 만행을 드러냈지요. 그들은 하나같이 신의 유일성을 내세우며 신의 이르믕로 남자를 학살하고 여인을 강간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거처를 방화한 다음 제단을 쌓고 예배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렀습니다. q로 이런 인면수심(人面獸心) 의 만행들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에서 나온 베타성과 폭력성으로 비판받는  사례지요.(741P)


***신에 대한 이해와 표현의 변천은 단지 ‘인간에 의해 경험된 신이 역사일 뿐입니다. 시간 박에서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신이 역사 안에서 인간정신과 문화의 진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되었다는 뜻이지요. 곧 이스라엘의 역사 흐름에 따라 야훼가 감정이 격한 절대적 폭군에서 스스로 세운 계약에 충실한 입헌군주를 거쳐 사랑이 넘치는 민주적 짇도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던 것은 신이 그렇게 변해서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이 신을 그런 식으로 경험했다는 말일 뿐이지요.(748P)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시 <순레자의 서>에도 신에 대한 이런 관점이 잘 드러나있다.


당신을 찾는 이들은 모두 당신을 시험해 봅니다.

그리고 당신을 찾은 이들은

당신을 형상과 모습에다 결박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마치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고 있듯이.

내가 성숙함에 따라

당신의 나라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허영 따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간은 

당신과 특별한 관계라는 사실을.


나를 위해 기적을 베풀지 마소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

당신의 법칙을 바르게 따를 수 있도록.


인간이 성숙해 감에 따라 신의 나라도 성숙하고, 그래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점 선명해지는“것이 신의 법칙이라는 것이지요. (749~750P)


***존재이자 창조주인 신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불변하고 유일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되는 신은 역사 안에서 진보하는 인간정신과 문화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고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야훼의 배타성, 폭력성, 질투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753P)


유신론은 극복되어야 하나

****틸리히에 의하면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신론적 신은 “하나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자아, 너와 관계맺고 있는 나, 결과와 분리되어 있는 원인, 특정공간과 끝없는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런 신은 다른 존재자들과 나란히 있는 존재자이며, 실재세계 전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여전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는 전능하고 전지해서 나의 주체성을 빼앗아 버리고 만다. 나는 여기에 반항하고 그를 객체로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 반항은 실패로 돌아가고 절망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은 건드릴 수 없는 폭군, 그 앞에서는 다른 존재자들이 다 부자유하고 주체성도 잃은 존재로 보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하나님, 절대적 지신과 절대적 지배의 단순한 대상이 되는 것을 우리 중 아무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죽어야 한다고 한 하나님이다. (772P)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불안, 공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예리하게 갈파한 대로 이제 공포는 어두운 거리에도 있고,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안에도 있으며, 침실에도 잇고 부엌에도 잇지요. 우리의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공포가 기다리고, 그곳을 오가기 위한 지하철과 항공기에도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소화하는 것들과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에도 공포가 숨어 있지요. 바우만은 이처럼 낮에도 밤에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따에서도 하늘에서도 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피할 수 없고 에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라고 불럿다. (780P0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존재론적으로 보면 존재보다 더 큰 범주는 없습니다.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 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신이 존재라면 그는 유일합니다. 신이 존재인 한 유일자라는 것은 존재론적 결론이자 논리적 귀결입니다.(799P)


맺음말-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파스칼의 말이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801P)

***아우그스티누스는 인간의 탐욕, 곧 자기 사랑과 물질사랑의 끈질긴 성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모두 죄로 몰아 금하는 기존의 교리와 사뭇 다른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거이 모두 네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위에 있는 신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며,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이고, 넷째는 아래에 잇는 불질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교회가 첫째 신사랑과 셋째 이웃사랑만을 교훈하는 이유는 우리가 둘째인 자기사랑과 넷째인 물질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하고 잇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 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입니다. 이 네가지 사랑이 모두 합해져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사랑 안에서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신 사랑과 이웃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하고 신사랑과 이웃사랑이 자기 사랑과 물질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809P)


내가 저자라면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어낸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기독교사상에 대해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이 좀 풀렷다.

모든 일에 대해  ‘하느님의 뜻’이라 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용규의 책을 통해서 신학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하는 물질적 풍요가 ‘신이 보기에 그에게 궁극적으로 좋다면 그래서 그것이 신의 섭리 안에 예정되었다면, 그에게 물질적 풍요를 ’차고 넘치게“ 내려 줄 겁니다. 설사 그가 그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만일 해롭다면 그래서 신의 섭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가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571p)

****신은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대도 우리가 신의 섭리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은 지식과 선함과 의지에서 무한하지만 인간은 유한하다는 전제때문이지요. (572p)

***결론적으로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아요. 때대로 신은 인간의 기도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마저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574p)


이와 같은 글을 통해서보면 우리 인간은 자율적인 인간이 아니라 타율적이고 신에게 종속된 피조물일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내 기도를 들어주고 안들어주고는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기에 합당한지 아니한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에게 바치는 기도는 자신을 시험당하기 위한 시험대에 올려놓는 것임을 알았다. 신이 기도를 들어주어도 행복하고 들어주지 않아도 자신을 돌아보는 회심의 계기로 삼는 즉 자신을 성숙시키는 그런 수행으로 삼는것이다.

김용규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적인 것에 감탄했다. 이 책을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했을 까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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