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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1일 17시 17분 등록

니체는 스펠링이 왜 저 모양인가?

 

 

 

 

 

 

 

 

저자에 대해서

 

NIETZSCHE

 

니체의 조상은 1570년부터 중부독일의 부르카우에 거주한 독일인이었다. 조상은 대부분 목수나 푸줏간 주인이었는데, 세무관리의 아들이었던 니체의 할아버지 대에 비로소 목사가 되었다. 니체의 아버지 역시 평범한 시골교회의 목사였다. 니체의 집은 프로테스탄트적 경건주의와 루터파 신앙의 집결체였다. 이 집안의 첫째 아들이 1844 10 15일에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니체였다.

 

그러나 니체의 여동생이 쓴 전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나의 오빠는 좋은 혈통에 매우 큰 가치를 부여했고 육체와 영혼에 깃들인 모든 덕과 능력이 …… 세대를 통해서 전수된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가문의 족보를 열심히 추적하여 자신이 귀족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실제로 그의 성격과 철학은 상당히 귀족 지향적이다.

 

1848년 독일에서도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보수적이던 니체의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고 다음해에 사망하였다. 직접적 사인은 뇌연화증이었다. 니체의 아버지가 정신병을 앓았고 니체도 아버지로부터 정신병이 유전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 다음해에는 니체의 남동생 요제프가 죽었다. 시련이 닥친 니체의 집은 목사사택을 후임목사에게 넘겨준 후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가야 했다. 여섯살이던 니체는 뢰켄의 같이 놀던 친구들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여섯명의 여자들과 나움부르크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니체의 포르타 학교 재학 시절, 어느 날 학생들은 스스로의 손을 불태운 로마인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일화는 불가능하다고 떠들었다. 니체는 갑자기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인 후 자신의 손바닥에 놓고 유유히 지켜보았다. 학생들은 놀랐고 상급생이 달려와 성냥불을 치웠다. 이 일화는 소학교 시적에 비를 맞고 온 것과 유사하게 고통을 극복하면서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니체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니체는 학교에서 주는 지식과 교육만으로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이상은 다양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안이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갖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니체는 경건한 기독교인인 어머니와 갈등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니체의 글을 보면 모두는 자신을 위해서만, 스스로의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 후회를 하고 스스로에게 회의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여론에 종속되어버린다. 비도덕적인 행위가 불가피한 경우 그것은 우리에게 도덕적이 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당시 니체는 자신감과 강인한 정신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사춘기의 방황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당시 그가 세상이 싫어 원시림의 나무꾼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 그리고 평생을 음악에 투신하고 싶어하기도 했으나 곧 학문이 인생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빵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겠다는 전제를 붙였다. 그가 선택한 것은 문헌학과 신학이었는데 신학은 어머니의 바램과의 타협에 의해 선택한 것이다.

 

니체는 학교 재학 시절 수학은 잘하지 못하였다. 졸업 사정회에서 이 것이 문제가 되었으나 다른 과목의 점수가 높아 졸업할 수 있었다. 1865년 부활절 휴가를 나올 때 니체는 어머니에게 신학을 완전 그만 두겠다고 선언하였고 기독교와 결별했기 때문에 부활절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으나 니체의 여동생은 지지적이었다.

 

니체는 문헉학을 삶의 목표로서가 아니라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선택하였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응할 수 있는 더 올바른 세계관이 그리스 문화에 들어 있다는 것을 니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직감하였고 그것을 밝혀낸느 일이 니체에게 인생의 목표였다.

 

라이프치히에서 니체는 학회에 <그리스의 테오그니스>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을 본 리츨 교수는 매우 놀라 곧 니체를 불렀고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함께 작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니체는 문헌학을 불과 3학기를 들은 학생일 뿐이었지만 이미 교수들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 때쯤 니체는 헌책방이 딸린 집에서 기숙하고 있었는데 이 헌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를 접하게 되었고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연구가 문헌학에서 그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68년대 말에 바젤 대학에서 문헌학 교수를 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때 리츨 교수를 포함하여 많은 교수들이 니체를 추천하여 그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바젤 대학의 문헌학 정외교수로 채용되었다.

 

1872년 니체는 자신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을 출판하였다. 평가는 양분되었다. 그의 친구였던 바그너는 이 책을 극찬하였으나, 니체를 발굴해낸 리츨 교수는 기지 넘치는 술주정이라고 혹평하였다. 이 때 마이젠부르크라는 여성은 니체의 책에 큰 감명을 받아 오랫동안 니체의 후원자로 남았다.

 

니체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1973년에 제2, 1974년에 제3편을 기술해나갔다. 그의 책은 디오니소스적 정열이 쇠퇴한 독일문화를 비판하는 것이었는데, 이 때부터는 그의 1편의 책을 옹호하던 바그너와 같은 친구들도 니체가 점점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침묵을 지켰다.

 

바이로이트의 축제에서 니체는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본 후, 바그너가 결국 기독교에 무릎을 꿇고 말았음을 알게 되었다. 실망한 니체는 이로써 바그너와 결별하였다. 니체의 눈으로 보기에 기독교적인 구원이나 내세에의 동경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원래 니체는 그리스 철학에서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인 데모크리토스나 헤라클레이토스를 기반으로 이상향을 설정하였고, 현대에서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바그너의 배신은 그에게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 축제 때부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출판되기 전에 바그너는 자신의 저서 <파르지팔>을 니체에게 보내왔다. 그 책에 바그너는 자신의 이름을 장로라고 썼고 이것이 니체에게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독교적인 것과 그리스적인 것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익명으로 출판하고 싶어했으나 출판사의 거절로 실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의 부제는 볼테르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자유로운 정신을 위해라고 쓰였으며, 과학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서서 헛된 이상에 빠진 이상주의자들을 너무나 이상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다. 즉 현세를 긍정하는 구체적인 이상이 아닌 허황되고 천박한 이상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책이 나온 후 예상대로 많은 친구들이 니체를 떠나갔다.

 

1880년 즈음, 북부 독일의 날씨로 건강을 해친 니체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 곳에서 그는 영겁회귀사상을 구상해내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 사상의 원조는 그리스의 피타고라스로 니체에게 영겁회귀란 이제까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짜라투스트라>에서 이 사상을 대부분 설파하였다.

 

1882년 니체는 살로메를 만났다. 그녀는 러시아 장군의 딸로 문학과 철학에 조예가 있는 자유를 사랑한 여성이었다. 같은 바젤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던 레는 살로메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한 후 플라토닉한 사랑을 이어가자는 제안에 따라 니체를 살로메에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니체 역시 레를 통해 살로메에게 청혼의 의사를 전하게 되었고, 살로메는 니체의 청혼 역시 거절하였다. 평소 니체를 존경하고 있던 살로메는 점차 주변의 평판이 니체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을 것을 알게 되고 레와 함께 있으면서 니체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살로메는 니체를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니체는 절망을 안고 살로메를 안 지 5개월 만에 그녀와 헤어졌다.

 

연인과 작별하고 세상과도 이별을 고한 니체에게 새롭게 나타난 친구는 바로 짜라투스트라였다. 이 용어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에서 빌려온 것으로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를 자신의 아들이자 디오니소스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짜라투스트라는 니체 자신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1883년부터 짜라투스트라의 저술 작업에서 삶의 위안을 얻었다. 그는 이 작품의 초안을 신들린 듯이 써내려 가 불과 10일 만에 완성하였는데 그 맘때 바그너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바그너의 사망과 함께 초인이 탄생한 것이다. 출판은 출판사의 사정으로 계속 미루어지다가 1892년이 되어서야 책의 전 부분이 다 들어간 출판이 가능하였다. 니체는 이 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생의 찬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책이 부분적으로 나왔을 때 이 책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니체는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이라고 자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은 점점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의 책은 나치의 이념에 수용되어 나치의 통치를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1888년 말, 니체는 바그너주의자들의 공격과 익명의 편지들에 시달리며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1889년 발작 증세를 일으켰다. 니체는 막 숙소를 나오다가 난폭한 마부 하나가 말을 심하게 다루는 것을 목격하였다. 니체는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면서 말에게로 쫓아가서 그의 목을 안고 쓰러져 버렸다. 며칠후 오버베크가 니체를 데려다 바젤의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의 여동생은 니체의 병의 원인으로 말년에 니체가 두통과 불명증 때문에 과다로 복용한 클로랄과 일본산 진정제에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의 병은 역설적으로 니체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니체의 책들이 많이 팔리기 시작하였고 인세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전혀 그를 즐겁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결국 폐렴으로 요절하였다. 56세의 나이였다.

 

니체가 평생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과제는 세 가지다.

(1)   긍정적인 세계를 연구하는 것

(2)   부정적인 세계를 비판하는 것

(3)   이상적인 세계를 제시하는 것

니체에게 가장 긍정적인 세계는 디오니소스가 중심이 되는 그리스였고 가장 부정적인 세계는 기독교가 중심이 되는 유럽이었으며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초인이 중심이 되는 인류의 미래였다.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파괴적 창조, 창조자의 강인함을 지향하였으며, 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유럽의 허무주의를 비판하였다. 그의 이상이었던 초인은 대지의 의미, 세계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권력의지를실현해가는 현세 중심의 인간이다. 니체가 말하는 대지는 내세나 초월적인 것과 상반되는, 어머니의 가슴을 연상시키는 현실세계의 상징이다. 니체는 신을 죽이고 삶을 살려내었다. 그가 남긴 삶의 찬가는 니체가 가진 이미지 반항, 죽음, 정신병 과 정확히 상반되는 것으로 반대의 것에서 유도되는살아있는 철학이다.

 

참조 문헌 : <니체 평전> 강대석

 

 

 

 

 

 

 

 

즐거운 지식Die Frohliche Wissenschaft

도서출판 청하, 권영숙 옮김

 

차례

 

11        카우프만의 초판 서문

33        2판을 위한 머리말

41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 독일적 압운의 서곡

61        1

115      2

167      3

227      4

287      5

365      프린스 보켈프라이의 노래들

 

카우프만의 초판 서문

 

1.

2. 제목

 

12 한편 게이gay란 말은 새로운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게이가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초만 해도 그런 의미는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표준 사전에는 그런 단어가 없었다. … <게이>란 말을 듣거나 읽을 때 동성애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게끔 되기까지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69us <동성애자 해방 전선>이 설립된 것이다.

 

물론 기쁨도 이 책에서 중요한 단어이기는 하나 제목에 사용될 것은 아니다. 둘째로 부제목을 볼 때 <쾌락학>이 적절한 용어임이 확실하다. 마지막으로 니체가 기쁨보다 쾌락gay을 택했다는 점뿐 아니라 동성애라는 개념의 등장도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쾌락학> <기쁨의 학>과는 달리 다소 인습을 거부하는 의미를 함축하며, 또한 니체의 <비도덕주의> <가치들의 재평가> 등의 개념을 암시한다.

 

니체 자신이 책 제목을 통해 전달하려 했던 바는 심오한 사고라고 해서 반드시 딱딱하고, 무겁고, 고리타분한, 한마디로 게르만적Teutonic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è 왜 게르만적이라고 표현했을까? 게르만족이란? 앵글로색슨과 대립하는 것은 노르만(바이킹)인 것 같고 앵글로색슨과 노르만을 합친 것이 게르만족인 듯하다. 앵글로색슨은 게르만 중에서 영국으로 들어간 계열을 의미한다(노르만이 영국을 정복하기 전). 그래서 앵글로색슨은 섬의 민족, 대비되는 것이 대륙의 유럽과 대비된다. 게르만족은 더 큰 의미로 남방계(지중해)와 대비되는 개념.

è 내가 23살 때 만났던 19세의 사회대생은 니체를 참 좋아했었다. 그의 대범한 시도들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겨우 그 대학생의 정신 수준을 따라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독일어 Wissenshaft는 오직 혹은 주로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모든 심오하고 체계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엄격한 노력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그러나 Wissenshaft는 반드시 전통적인 독일식일 필요도 없고 니체가 이 책에서 즐겨 말하듯, <북방식>일 필요도 없다. <남방식>일 수도 있다. 니체는 <남방식>이라는 용어로 지중해 지방을 표현했다.

 

14 결국 이 책의 제목이 함축하는 것들은 상당히 논쟁적이다. 반독일적, 반전문적, 반학술적이며 <좋은 유럽인>이라는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가벼운 발><><웃음> 그리고 <근엄성에 대한 조소>를 담고 있다.

 

3. 애머슨

 

쾌락적인 것은 지혜가 아니라 학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학문>은 엄숙, 규율, 엄격 등을 의미한다.

è 앞선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니체 à 에머슨

나는 그토록 영광되고 위대한 성품과 풍부한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 엄격하고, 체계적인, 진실로 과학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점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내가 얼마나 커다란 대가를 치루어야 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에머슨에 있어서 우리는 철인 한 명을 잃었다.

 

니체가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때에도

è

 

니체는 애머슨의 저작을 읽었을 뿐만 아리나 수많은 구절들을 특별히 옮겨 적었고 열심히 여백에 기록해 두었다. 1881년 그가 <쾌락학>을 쓸 당시 그는 에머슨을 읽고 있었으며 <쾌락학> 첫판은 제사로서 에머슨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시인과 철인은 만물과 친밀하고 만물을 숭배하나니, 모든 경험은 유용하고 모든 날들은 신성하며 모든 자들은 신성하다.>

 

에머슨은 자신을 가리켜 <쾌락학 교수>라고도 했다.

è 에머슨 : 미국 보스턴 출신의 시인, 사상가

에머슨은 동양 사상에 밝아 청교도의 기독교적 인생관을 비판하는데, 편협한 종교적 독단이나 형식주의를 배척하고, 자신을 신뢰하며 인간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사상을 주장하여, 자연과 신과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범신론적인 초월주의 철학 입장에 섰다. 그는 세속을 싫어하고 구애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사색을 쌓아 '문학적 철인'이라고 추앙받기도 하였으며, 그의 이상주의는 젊은 미국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 그는 에머슨이 자신의 필사본에서 승천하는 영혼에 대한 두 개의 문장을 조로아스터에게 할당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에머슨이 그런 방식으로 쾌락학과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페르시아의 예언자의 이름을 그리이스 식으로 부른 것이며 짜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식 이름이다)를 연결짓고 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è 짜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와 같은 말이었다니, 그리고 불이 아니라 예언자의 이름이다.

è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는 불을 바라보며 불이 신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때 조로아스터교가 언급된다.

è 신문에서 외국 명문 대학에 가기 위해 준비 중인 외고 학생이 조로아스터교 연구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고 읽은 적이 있다. 정말 엉뚱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독일권에서 조로아스터교는 상당히 만연하는 것 같다.

 

18 애머슨이 개발한 용어 <초 영혼>(에세이의 제목 중 하나이다)은 틀림없이 니체에게 영향을 미쳐서 니체로 하여금 <초인>이란 말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의 해석 <초인 over-man>이 정확할 것이다.

 

4. 쾌락학의 구조

다음에 나오는 것은 341항이다. : <최대의 무게> 여기에서 니체는 그의 유명한 원리를 최초로 이야기한다. 그 원리라 거대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똑 같은 일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것.

 

21 처음에 이 작품을 대하면 수많은 격언들을 무원칙적으로 늘어놓은 듯이 보이나 자세히 보면 세심한 구도 하에 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니체가 상대방에 대해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말하는 호소를 간단히 거부하고서 각 항은 자기충족적 격언이다라고 생각한 독자가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각 항이 전체 문맥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가 훨씬 더 많다. 이 작품의 구조는 지극히 중요하며, 따라서 이를 밝히고자 함이 나의 주석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다.

è 니체의 사고의 흐름대로

 

5. 영겁회귀

 

니체는 영겁회귀의 객념을 하이네로부터 받음. 하이네가 만든 정식

 

그리고 그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친구합시다.> - 그러나 친애하는 독자여, 내가 여기서 말하는 이 말은 어제 혹은 그저께 말했던 것이 아니다. 시간은 무한하나 사물은 유한하니 구체적 신체들은 유한하다. 이것들은 작은 조각들로 나뉘어져 흩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조각들, 이 원소들은 한정된 개수일 것이며 이 조각과 원소로 이루어진 형상의 수도 한정될 것이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른다 하여도 영원히 반복되는 이 놀음의 조합을 주관하는 영원한 법에 따르면, 일찍이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형상들은 다시 만나 서로 유혹하고, 거부하고, 키스하고 서로를 타락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바로 나와 같은 한 남자가 다시 태어나고, 메리와 같은 한 여자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 – 오직 이 남자의 머리에 보다 적은 양의 어리석음이 담기기를 희망할 뿐이다 보다 나은 대지 위에서 그들은 만날 것이며 서로를 한동안 응시할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여자가 남자에 손을 내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우리 친구합시다.

 

23 위의 글에 대하여

1)     니체가 보인 반응 중 주요한 것은 이것보다 더 무서운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2)     니체는 이것을 <모든 가능한 가설 중 가장 과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든 시도는 이것이 너무나 무서운 생각이므로, 유약함을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3)     니체는 이것을 참을 만할 뿐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한 것으로 만드는 어떤 순간 그리고 어떤 삶의 방식이 있음을 알았다.

4)     그는 이것이 긍정적 기능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많은 연구자들이 영겁회귀를 여러 차원에서 연구했지만, 이상의 네 가지 중 한 가지라도 빼먹은 연구라면 잘 해야 일면적일 것이요 최악의 경우 니체의 철학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일 것이다.

è 왜 무서운가? 영원성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24 니체의 노트, 특히 <권력에의 의지>에서 상당한 부분을 점하고 있다. 이제 니체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무가치함을 치유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일정한 방식으로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생각은 삶을 <백치가 중얼거리는 이야기, 아무것도 의미 있는 것은 없고 소음과 열정으로만 채워진 이야기>로 격하시킬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니힐리즘의 극단>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가 생각한 대로 니힐리즘의 자기 극복이기도 하다. 즉 과학 이외에 어떠한 존재의 의지도 요구하지 않는 자기 정복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어떤 절대적 시작, 어떤 창조, 무한한 에너지, 혹은 신 등의 존재를 부정한 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이 원칙이 어떤 다른 가설보다 과학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과학, 과학적 사고, 과학적 가설은 결코 딱딱하고 학술적이며 메마른 것일 필요가 없었다.

è 영겁회귀와 <절대성의 부정> 간의 관계

 

6. 독일인, 유태인, 그리고 여성

 

7. 번역과 주석

 

이 책은 니체의 거은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미립체이다. 풍자시, 노래들, 경구, 철학적 논쟁, 지식학과 지식의 윤리, 예술과 신의 죽음에 대한 사색, 영원한 반복 그리고 짜라투스트라까지. 여기 번역된 제2판에는 니체가 새로인 덧붙인 것들이 많은데 이것은 니체가 이 책이 <짜라투스트라> <선악을 넘어서>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해준다. 이 작품은 커다란 빌딩의 한 구석도, 한 체계 중의 일부분도 아니다. 이 작품은 니체의 사고 전체를 보여주며 니체의 다른 책들, 노트들, 편지들과 수많은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술적 작품이기 때문이다.

 

2판을 위한 머리말

33 오랜 기간의 궁핍과 무기력 후에 가지는 조그만 잔치놀이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되돌아오는 활력과 내일, 또 그 훗날들에 대한 다시 깨어난 믿음, 갑자기 생겨난 미래에 대한 감각과 기다림, 임박한 모험, 다시 열려진 바다, 그리고 다시 허락되고 믿어지는 삶의 목표들, 이러한 것들을 기뻐하기 위한 것이다. 그때 내가 이미 겪지 않았던 것이 무엇이 있었나! 한 줄기 사막, 소모, 불신, 얼어붙은 청년기, 엉뚱한 시간에 흘러나온 노년기의 간주곡, 고통의 종말을 거부하는 자존심의 독재보다 더 강한 고통의 독재, 병적으로 비상해진 인간에 대한 증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고독 속의 완전한 은신, 주의스럽지 못하고 모든 어리광을 다 받아 주는 영혼의 식이요법, 낭만주의로부터 서서히 발달된 구토증이 처방해 준, 생각해 보면 잔인하고 모질고 가슴 아픈 것들에게 자신을 제한시키려 했던 굳은 고집 , 누가 이 모든 것들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약간의 어리석음도, 약간의 감정의 풍만함도 용서해 줄 것이다.

 

37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자신의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빛과 화염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란 또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란 이런 것이다. 병에 대해서, 우리는 오히려 병이 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가? 오직 거대한 고통만이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U X, 알파벳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 진짜 X, 바꾸는 거대한 의심greast supicion의 스승이기도 하다.

è 생즉고

è 살아 있다. = 생물학적 연소 과정을 계속 해나간다.

è 거대한 고통이 올 때, 기존의 매너리즘은 파괴된다. 그저 살기 위해 살던 삶에 의문(의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일반명사 U (혹은 란 의미의 you는 아니었을까?) X가 된다. 미지수가 되는 것.

è 세린이가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중딩책이라서 니체가 먹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시기 아이들은 이상화를 추구하는 단계이므로 니체와 x값을 연관 지으면 멋있게 느낄지도?

 

38 수많은 고문을 당하고도 오직 저주로밖에 복수를 갚지 못하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처럼 우리가 병에 대한 자존심, 경멸, 이기려고 하는 의지를 포기한다 해도, 혹은 우리가 열반Nirvana이라고 하는 동양의 무, 즉 벙어리, 귀머거리와 같이 경직된 단념, 스스로 자기자신을 잊고 스스로 자신을 소화하는 것, 이러한 상태로 병으로부터 도피한다 해도, 우리는 이러한 길고 위험한 자제훈련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다. 새로운 질문들과 함께 지금까지의 그 어떤 질문보다 더 깊게, 심하게, 거칠게, 사악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더 많은 질문들을 할 새로운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삶에 대한 신뢰는 없어지고 삶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가 굳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 것이라고 쉽게 판단해 버리면 곤란하다. 실은 삶에 대한 애정이 아직도 가능한 것이다. 다만 애정에 대한 표현이 달라질 뿐이다. 그것은 곧 여성에 대한 사랑이 우리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인, 영적화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성 있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 X에 대한 환희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커서 문제성에 대한 모든 고민도, 불확실한 것에 대한 위험도,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의 질투까지도 번뜩거리는 섬광과 같이 덮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행복을 알게 된 것이다.

è 매우 중요, L의 주요한 모티프가 될 것이다.

 

38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말을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쓴다. 이러한 한없이 깊은 굴 속으로부터, 심한 병으로부터, 또한 심한 의심으로 생기는 병으로부터 돌아올 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껍데기를 탈피한 상태에서 좀더 간지럼을 잘 타고 심술궂은 사람으로 기쁨에 대한 좀더 섬세한 미각을 가진, 좋은 것들에 대해서 좀더 민감하게 감사할 줄 아는, 좀더 명랑한 감각과 기쁨 속의 두 번째 위험한 순진함을 가진, 좀더 어린애 같으면서도 그전보다도 백 번은 더 섬세해진 이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è 손튼 와일더의 희곡 [Our hometown]에서는 젊은 여성이 죽어서 자신의 생 중 단 하루를 다시 살 기회를 얻는다. 그녀는 12번째 생일을 선택한다. 그녀는 모든 순간을 음미하고 싶어했으나, 그녀의 가족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삶을 실감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깨닫는다.

 

38 그렇다면 쾌락이란 얼마나 구역질 나는 것인가?

è 윗글과 대조. 조금 실망이다. 쾌락에 대한 개방성을 드러낸 책인 줄 알았는데 고리타분한 생각을 답습하려고 한다.

 

39 이제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밤마다 신전을 위태롭게 만들며, 조상을 껴안고, 다 이유가 있어서 숨겨진 것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베일을 벗기고,

è 도대체 니체의 생각은 뭐지? 통일성이 없는 것 같다. 여기서는 신성을 신성시 하는 듯이 보인다.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

-독일적 압운의 서곡

(여기서부터는 글에 매겨진 숫자로 기록하겠습니다.)

 

3. 두려워하지 않는

네가 서 있는 곳을 깊이 파라!

아래쪽에는 샘이 있다.

몽매한 인간들은 외치게 두라.

<밑으로 가면 오직 지옥뿐이다!> 라고.

 

7 나를 따르다 너 자신을 따르다

너는 나를 따르고 나를 추종하는가.

오직 너 자신의 것을 충실히 따르라

그것이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이다 천천히, 천천히 오는 것이 좋다.

 

8 세번째의 탈피에 즈음하여

 

나의 피부는 갈라진다. 뱀처럼, è 탈피

내 안의 욕망, 마치 뱀이 갖고 있는 것 같은 è 욕망 = 뱀의 것

그것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충분히 땅을 먹지 않지만 è 땅을 먹으면 욕망이 증폭 ( = 세속)

이미 새로운 욕망을 갖고, 잎 사이에서

우리 뱀은 땅을 구한다.

공복에 그들은 굽이굽이 나아간다.

돌과 풀의 경계를 기어

항상 먹어 왔던 것을 먹는다. è 항상 먹어 왔던 것 = 영겁 회귀?

너 뱀의 식량이여! 너 땅이여!

 

9 나의 장미

 

그렇다, 나의 행복, 그것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모두의 행복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리라.

너희, 나의 장미를 따고 싶으냐?

è 만약 니체가 여자였다면, 나의 장미를 딴다는 의미는 매우 명확해진다. 나의 여성을 성적으로 취하고 싶냐는 의미이다. 김기덕의 영화 [사마리아]에서는 몸보시를 하는 보살이 나온다. 몸을 팔아 덕을 쌓는 신과 같이 굴고 있다.

è내 젊음은 남들의 사치일 뿐” - 빅뱅 [I’m still alive]의 가사 중

è 내 젊음과 매력의 결정체인 장미를 따고 싶은가? 딴다는 의미에서 암시하듯이 제공하는 자의 희생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행위.

 

바위와 가시 사이에

너희는 웅크리고 앉아, 몸을 감추고 è 니체의 사상을 따르는 것은 그리 떳떳한 취미는 아니다.

자주 손가락을 찔릴 것이다. è 받아들이기 위한 희생, 경험의 충격.

 

왜냐하면 나의 행복 그것은 조롱을 즐기기 때문에 è 비웃음은 니체의 주요 테마인 듯

왜냐하면 나의 행복 그것은 음모를 즐기기 때문에 è 음모 = 도덕성을 초월한 실험

너희는 나의 장미를 따고 싶으냐?

 

10 경멸자

 

내가 떨어뜨리고 엎지른 많은 것들이 있다.

그 때문에 너희는 나를 경멸자라고 부른다.

만일 너의 술잔이 가득 차 있다면

너도 자주 많은 것을 떨어뜨리고 엎지르겠지만

전혀 술을 깔보는 것은 아니니라.

è 내가 많이 떨어뜨리고 엎지르는 이유는 술잔에 술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 그릇보다 담은 양이 많다. 내가 시대보다 넘치게 앞서고 있기 때문에 자주 실패, 실수를 하는 것.

è 그러나 술의 가치는 그대로이다. 나의 생각이 가치로운 것처럼.

 

12 빛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è , 또는 절대적 가치를 좇는 사람. 위를 보는 사람.

 

눈과 마음이 시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è 빛에 눈이 상하듯이 마음이 상한다. 시든다는 표현은 식물성인데, 햇빛을 갈구하는 식물도 지나치게 강렬한 태양 앞에서는 시든다.

너는 태양을 쫓아도 그림자 가운데를 걸어라! è 중도를 지키라는 뜻 같다. 그런데 태양을 좇으면서 그림자 가운데로 걷는 것은 모순이다. 태양을 바라보면 항상 그림자를 등지고 서게 된다.

è 해석1 : 그림자 가운데로 걷다 = 발을 땅에 대고 걸어라. 눈과 마음이 시드는 것은, 뿌리가 땅에 닿아있지 않아 물을 섭취할 수 없기 때문.

è 해석2 : 정말로 그림자 가운데로 걷다 = 그림자의 가운데로 발을 들여놓으며 걷기. , 태양의 반대로 걷는 것. 빛의 결과물인 그림자를 느껴라.

è 해석3 : 그림자와 태양 가운데를 걸어라.라는 뜻으로 운율을 위한 일부 생략?

 

16 위로

 

산꼭대기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지 오르기만 하고, 거기에 너무 많은 생각을 주지 않는 것!

è 교수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지 년차를 오르기만 하고 거기에 너무 많은 생각을 주지 않는 것.

è 좋은 말인데, 이게 왜 위로인지 모르겠다.

 

17 호걸의 말

 

구걸하지 마라! 왜 우는 소리를 내느냐?

빼앗아라! 부탁하고나서, 자 뺏아가라!

 

18 좁은 넋

 

좁은 영혼에 나는 머물 수가 없다.

선도 악도 서 있을 만한 여울이 못 된다.

 

19 본의 아닌 유혹자

 

그는 공허한 말을 던졌다, 하나의 공처럼

허공 속으로 그것이 여자를 명중시켜 쓰러뜨렸다.

è 허세를 부리는 자에게 여자는 빠져든다. 그리곤 그 남자만이 자신의 공허를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이다. 혹은, 자신만이 오직 허무에 빠진 그 남자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33 고독자

 

나는 따르는 것도 앞장서는 것도 싫다.

복종, 아니! 지배, 그것도 아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자만이 타인을 지도할 수 있다.

è 복종과 지배는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타인을 의식한 것이다.

è 두렵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힘을 가진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의 인생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깨달을 때 두렵다. 자기 인생을 자지우지할 수 있는 운명의 신은 바로 자신이다. 책임감, 자신의 선택 하나하나가 삶에 미치는 파급력.

è 복종하거나 지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고독을 가르칠 수 있는 자만이 자기자신을 깨닫게 할 수 있다.

 

36 청년기의 저작

 

젊은날 가졌던 지혜의 알파와 오메가를

나는 여기에서 다시 듣는다. 그러나 무엇을 들어왔던가?

지혜의 말보다는 고뇌의 말 :

내 귀에 이해되는 것은

우리 청춘의 끝없는 <아아!> <오오>

 

38 신앙심 깊은 자는 말한다**************

 

신은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한다.

<허지만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우리 현명한 자들은 말한다.

인간이 창조한 것을 인간이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하물며 창조했기 때문에, 이제 그를 부인한다?

그것은 절름발이의 논리다. 거기에는 악마의 발톱소리가 들린다.

è 매우 재미있는 모순이다.

신앙심 깊은 자 : 신이 인간을 창조, 그러므로 신 à 인간 사랑

무신론자 : 신은 없으며, 인간이 을 창조. 신을 부정.

사실은 모순이 아니다. 인간이 창조한 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니체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절름발이의 논리라고 말한 것은 조소의 의도가 강하게 묻어난다.

 

39 여름에*****************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우리는 빵을 먹을 수 있는가?

è 톨스토이 식 : 일하지 않은 자, 먹을 자격도 없다.

 

현명한 의사는 먹지 못하게 한다.

땀을 흘릴 때는, 아무것도.

è 니체는 동음이의어 장난을 잘 친다. 땀 흘리는 것이 노동을 상징하는 것을 짐짓 모른체 하고, 병적인 상태로 간주하여 장을 쉬게 할 것을 권고한다.

 

시리우스()가 지금 빛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가?

저 불타는 섬광은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가?

è 객관적 사물에 징조를 입히고, 섬광이 소망한다고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마에 땀을 흘려,

술을 마셔야만 한다!

è 이마에 땀을 흘려 = 열심히

è : = 끼니를 이을 목적 : 취할 목적 = 현실긍정 : 현실부정

술로 유도될만한 무한한 상상력과 용기, 결단력, 파괴적 창조력을 통해 에게로 가자. 별을 소망하자.

 

40 질투 없이

정말, 그의 눈에는 질투가 없다 ;때문에 너는 그를 존경하는가?

너희가 존경해도, 그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의 눈은 멀리를 바라보는 독수리의 그것이다.

그는 너희조차 보지 않는다 그는 오직 별, 별만을 본다.

è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마라.

 

45 영원한 인간

 

<나는 오늘 온다.

그 길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è온다는 것은 관찰자인 내가 보는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의미. “내가나에게로 온다. ,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깨닫는다.

è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느껴진다.

 

영원히 머물려고 오는 자는 누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è영원히 머물려고” : 돌이킬 수 없는 결단력을 의미. 혹은 또다른 나인 영혼들이 모여있는 영적 차원의 세상 등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영원히라는 말을 흔히 쓸 때 결단력을 의미하는 것처럼 ( :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어요, 영원히 너와 이별이야 등등… ) 그 정도의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세상의 독설이 그를 괴롭힌다.

<너는 너무 일찍 왔다! 너는 너무 늦었다!>

è 결단을 내린 후, 그 결단에 대한 세상의 무책임한 평가들. 혹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

è 내가 독립을 하려고 할 때, 느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나는 오늘 나에게로 온다.” à 내가 정말 내가 될 수 있는 기회로서의 독립. 그런데 누군가는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해야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지금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50 두뇌유

 

왜 그녀가 최근 현명하고 세련되었는가?

그녀에게 매혹되어 한 남자가 정신을 잃었다.

이 혼란 전에 그는 매우 분별 있었다.

그의 기지는 소멸되었는가? – 아니, 틀림없이 그녀에게로 갔다.

è 양자역학적 빙의현상?

è 그녀가 현명하고 세련되어서 남자가 매혹되었는데, 이 남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반면 여자는 더욱 현명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대비 효과?

 

5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어떤 책

 

과거를 회고하는 동안은 우울하고 부끄럽지만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미래에 대한 신뢰도 있다.

너는 추구하는 데 있어 독수리의 일종인가?

아니면 미네르바의 사랑하는 부엉이인가?

 

61 회의주의자는 말한다.

 

네 인생의 반은 끝났다.

시계침은 움직이고 네 영혼은 전율하고 있다!

혼은 이미 오랜 시간 방황을 거듭하여

구하고 구했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 이 혼이 이제 무엇을 주저하리?

è 지향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막 살아도 상관없다.

 

네 인생의 반은 끝났다.

지상에서는 일각일각이 고통이요 오류이다.

너는 어찌해 아직도 구하고 있느냐?

내가 구하는 것은 바로 : 이런 것에 대한 이유이다!

è 반이 지난다는 의미 : 반이 넘어가는 순간, 전체가 된다. 50% 50%는 두개의 성질로 설명할 수 있지만, 51% 49% 51%의 주요 특질 하나로 정의될 수 있으므로.

è 생즉고

è 마지막 문단에서 상대방이 대답한다.

 

63 별의 도덕

 

별이여 가라 고정되어 있는 네 궤도를.

무엇이 암흑이냐 별 너에게는?

è 네가 가게 되어있는 바로 그 길.

 

기쁨에 차서 구르며 이 시대를 가로질러 간다.

너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이방인이 되는 별의 비참함으로

è 원래의 너로부터 멀어진다.

 

너의 광휘는 먼 세계를 위한 것.

연민은 악덕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

è 대의를 위해 현재의 사사로운 도덕률을 버려라.

 

단지 하나의 계율은 순수하게 빛나라!

è L은 매우 순수한 사람이다.

 

1

 

1 내가 늘 발견하는 것은 한결같이 인간은 하나의 사명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 모두건 혹은 특별히 개인 각각이 관심을 갖고 있던지 간에,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을 보지하기 위해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이다. 그것도,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애정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는 그 어떠한 본능보다도 뿌리깊고 강해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 이 본능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종과 모든 무리지어 살려는 군축적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è 매트 리들리, <이타적 유전자>

 

가장 유해한 인간조차도 종의 보존에 있어서는 가장 유익한 인간일런지도 모른다.

è 사이코패스의 의미. 마치 어항 속의 문어처럼.

 

그대들의 최선의, 혹은 최악의 욕망에 몸을 맡기고 오로지 파멸할 때까지 나아가 보라! 어떠한 경우라도 그대들은 필시 무언가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의 은혜자가 될 것이다.

è  L의 모토

 

완전한 <진리>에서 나오는 비웃음으로 자기자신을 비웃는 것, 그렇게 본다면 이제까지 가장 우수했던 사람들도 진리에의 충분한 감각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며 가장 은혜로왔던 사람들도 사실은 극히 미약한 천재성밖에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비웃음에도 미래가 있다! <종이 전부이며 개인은 언제나 무에 다름없다>라는 명제, 이것이 인간성 그 자체에 결합되어 각자에게 늘 이 최종적인 해방과 무책임에의 길이 열릴 때, 필이 그 때에는 <즐거운 지식gay science>만이 남게 될 것이다.

è 완전한 진리 = 인간이 <종의 보지>를 위해 사명감을 가진다는 것. , 내가 지금까지 에게 본능적으로 희생당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것(종이 전부이며, 개인은 언제나 무). 거대한 매트릭스의 원리를 깨닫는 것. 나는 굳이 본능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è 완전한 진리에서 나오는 비웃음 : 그 동안 어리석게 살았던 지난 날의 나를 비웃는다. 돈오가 즐거움이 아니므로 비웃음으로 나타난다. “비웃음은 깨달았다는 표식이다. 그러므로 비웃음은 미래지향적이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되므로.

è 깨달은 후에는 최종적 해방과 무책임에의 길이 열린다.

 

지금은 아직 그곳에까지 도달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생존의 희극이 아직 자기를 <의식함>에 이르지 않았다. 지금은 여전히 비극의 시대, 각종 도덕과 종교가 활개를 치는 시대이다.

è 생존의 희극 : 내가 그렇게 살아왔었다니깨닫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우스운 것! : 인간이 행동양태가 종의 보지를 위한 충동이자 본능이라는 법칙을 깨달았다고 하자. 이 법칙은 진리이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따라야 한다??? 이는 모순이다(아주 웃기는 일이다!). 법칙은 우리의 행동을 관찰한 후 귀납적으로 추론된 것이므로. 거기에는 어떤 의무도 없다. ,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면 된다. è 늘 생각해오던 바임.

è S K의 일화에 삽입 가능할 것이다.

è 도덕과 종교가 필요한 이유 = 종의 보지를 위해서

è , 굳이 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종교도 도덕도 필요가 없다.

 

최고의 인간도 최하의 인간도 마찬가지로 지배하고 있는 저 충동, 종의 보존의 충동은 때로 <정신>의 이법이나 정열로서 분출된다. 그 경우, 그것은 눈부시게 화려한 이성의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자기 자신이 결국은 충동이며 본능이고 질환이며 무근거인 사실을 잊도록 만든다. 생은 사랑되어야만 한다, <왜냐!> -. 인간은 자기와 이웃을 항상/촉진<시켜야만> 하기 때문에, <왜냐!> -. 모든 이들 <해야만 한다> <왜냐>라는 것이 미래에는 어떤 이름을 얻을 것인가! 장차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될지라도, 그것은 필연적, 자발적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일어나던 것이 앞으로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이성 및 궁극의 규정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 바로 그 때문에 도덕교사들이 <생존목적>의 교사로 등장하는 것이다.

è 왜냐 로 이어지는 격앙된 표현. : 오마주로 쓸 만하다.

è 생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 내가 생의 욕구를 보이지 않으면 남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고, 내가 자살을 하게 되면 그만큼 종의 보전율이 떨어진다. 인간 개인의 생존본능보다 종의 생존본능이 우선한다. 탁월한 논리다. 인간이 종을 보전하기 위해 살신성인 하기도 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도덕으로 옹호된다는 점에서 더욱 합당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è 녹색 : 매우 훌륭하다! 왜 인간은 살인을 하면 안되는가?

 

2 지적 양심 나는 사실 수없이 같은 경험을 반복하면서도 그때마다 새롭게 그것에 반발한다. 나는 그것이 명명백백함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지적 양심이 부족하다는 것. 아니, 그러한 지적 양심에의 요구를 갖게 될 때, 나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심에 있으면서도 마치 사막에 있는 듯한 착각을 한다.

è 내가 느끼는 바다!

è 니체가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 (1) 인정하기 위해서는 지적 양심이 필요한 믿기 어려운 진리또는 (2)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적양심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 혹은 관심이 없다는 것.

è 니체는 자신의 생각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군중속의 고독을 느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것을 믿으며 그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그에 대해 찬반을 논할 궁극적이고도 확실한 이유에 대한 깨달음 <없이>, 또는 그와 같은 이유를 구할 노력조차 하려 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또한 확실성에의 욕망이 그에게 가장 깊숙한 욕망, 절실한 필요로서 고급한 인간을 저급한 인간으로부터 구별짓는 것으로서 - 간주되지 않는다면……

 

나는 저 종에 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성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발견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호의를 잃지 않는다. 적어도 거기에는 지적 양심의 가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화의 조화 상태, 생존의 놀라운 불확실성과 애매함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 의문으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경멸하는 바로 그것이다.

 

3 그들과 비교하면, 고귀한 인간은 <비이성적>이다. – 왜냐하면, 고귀하고 관용적이고 희생적인 인간은 진실로 자신의 충동에 따르며, 그 순간 그의 이성은 <멈추기> 때문이다.

è L의 특성

 

비속한 인간은 복부의 정열에 굴복하는 인간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맹위를 떨치는 그 유혹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정열 때문에 건강과 명예를 위협당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è ****************

 

4 종을 보존하는 것 극히 악랄한 사람들이 지금까지의 인류를 가장 진보시켜 왔다.

 

악한 제충동은 선한 제충동과 마찬가지로 고도로 합목적적이며, 종을 보존하는 것으로 필요불가결하다. 단지 그 기능이 다를 뿐이다.

 

9 우리의 폭발 - …… 우리는 모두 숨겨진 정원이나 밭을 우리 내부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폭발할 때를 기다리며 성장해 가는 화산과도 같다. 이 폭발의 시기가 언제일까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조차도 모른다.

 

11 의식 의식은 유기체의 최후의, 가장 최종적인 발전이며, 따라서 대개는 미완성되어 있는 무력한 부분이다. 의식으로부터 무수한 실책이 생겨나고, 그것이 동물이나 인간을 필요 이상 빨리 호메로스의 소위 <운명을 넘어서> - 파멸로 도달하게 한다. 가령 본능의 보존적 유대가 그처럼 뛰어나고 우수하고 강력한 것이 아니라면, 본능은 그 조정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거싱다. 인류는 잘못된 판단과 환상, 그 천박하고 경솔한 망신, 요컨대 틀림없이 그 의식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 아니, 오히려 그러한 본능적 유대가 없었다면 인류는 벌써 존재하지 않았었겠지!

è 본능과 의식이 대결하여 본능을 생존을, 의식은 파멸을 이끈다는 해석.(의식이 파멸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파멸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왜냐하면 의식은 자발적 파괴도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 학문의 목표에 대해서 무엇인가! 학문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에게 되도록 많은 쾌와 되도록 적은 불쾌를 주는 데에 있는가? 그러나, 가령 쾌와 불쾌가 하나의 끈에 이어져 있어서, 한쪽은 되도록 많인 가지려 욕심을 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되도록 많이 못 가지게 하려 한다면, <하늘을 찌를 듯한 환호>를 가지려는 듯 욕심내는 자는, 또한 <죽을 만큼의 비애>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è 학문이 쾌락을 위한 것인가? 궁극에는?

 

13 동정은, 별다른 긍지가 없고 원대한 정복에의 희망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쾌적한 감정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손쉬운 획득물 모든 번민이 그것이다 이 매력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동정을 창녀의 덕이라 부른다.

 

14 사랑이라 불리우는 모든 것 소유욕과 사랑, 이 두 단어는, 우리들에게는 뭔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 그러나 그것들은 동일한 충동에 지나지 않고 단지 부르는 이름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쪽은 이미 소유하고 있는 자 그 소유의 충동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고 이제는 그 <소유물>을 보살피는 입장에 있는 자 측에서 사용하는 비방적인 호칭이며, 다른 한쪽은 불만족스럽고 갈망하는 자의 입장에서 당연히 <선한 것>으로 찬양되는 명칭일지도 모른다. … 우리는 낡은 것, 확실히 소유하고 있는 것에 점차 권태를 느끼며 다시 다른 것에로 손길을 뻗친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3개월 정도 생활하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들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딘가의 먼 해변이 우리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소유물은 소유함으로써 시시해진다.

è 사랑을 그리 비관적으로 소유욕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래되어서 더 사랑하는 것도 있다. 자아를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랑이 반드시 소유욕과 닮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피소유욕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독립적 개체들의 의존적 관계 형성이 관건.

 

아니, 사람들이 이러한 성애로부터 에고이즘의 반대라고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을 취한다 사랑은 분명 에고이즘의 보다 솔직한 표현인 것으로 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분명히, 소유하지 않은 채 갈망하는 자가 이러한 언어적 관용을 생기게 한 것이다. – 아마도 그들은 항상 대단한 다수였다. 이 영역에 있어서 많은 소유와 포만을 허락받은 자들은, 때때로 <거칠고 미친 듯한 공룡>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그 모든 아테네 사람들 중 보다 사랑스럽고 보다 사랑받은 자, 소포클레스처럼 - . 그러나 에로스는 늘 그와 같은 모독자들을 웃으며 죽였다 그들은 분명 늘 에로스의 최대의 총아였던 것이다.

è 주어가 일정하지 않아서 누구를 비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문맥 상 짐작하자면. 사랑이 곧 소유욕이고, 사랑이 이타적인 것이라고 찬양하는 자들에게 비판적이다. 이들은 다수를 형성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가질 수는 없으므로) 자격이 된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소유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실 모독자이면서 에로스의 최대의 총아다. 가령, 유명 아이돌 가수가 있다고 치자. 이들의 팬클럽들은 그에게 소유욕을 느끼지만 모두가 동시에 가질 수 없고 또 자신이 가지는 경우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며, 또한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는 확률적 이성 때문에 소유를 단념한다. 그러나 만약 아이돌 가수가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굳이 소유하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때로는 지상에도 일종의 사랑의 지속, 그 경우, 그 두 사람 상호의 소유욕적인 원망이 새로운 욕망과 소유욕으로, 그들을 초월한 이상에로 향하는 <공동>, 보다 높은 갈망에 따라 대행되고 있는 듯한, 그러한 사랑의 지속이 있다. 그러나 누가 이 사랑을 알고 있겠는가? 누가 이 사랑을 체험했겠는가? 그 참된 이름은 <우정>이다.

è 이 부분을 쓰면서 아마 살로메를 생각했겠지. 그렇다면 우정은 자신이 자신을 속인 소유욕이 아닐까?

è 나는 L K의 관계로 생각해보자.

 

19 최선의, 가장 생산적인 인간들의 사는 모습이나 민족의 살아 가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게 좋다, 하늘 높이 자라려는 나무들이 과연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겪지 않고 제대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인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이익과 반대, 증오, 질투, 의심, 냉혹, 탐욕, 횡포 등등. 이러한 것들이 없으면 덕의 위대한 성장은 불가능하리라는 것, 그것들이 없으면 오히려 덕을 위해서는 불리한 환경이라는 것을 약한 천성을 쓰러뜨리려 하는 독은 강자에게는 강장제이며, 강자는 또한 그것을 독이라 부르지 않는다.

 

21 그것들(근면/순종/순결/경건/정의 등)대단히 격렬하고 그칠 줄 모르는 다른 많은 충동과, 이성적 균형을 취하지 않으려는 충동에 다름아니다. 당신이 하나의 미덕, 그것도 완벽한 미덕(어떤 미덕을 추구하는 단편적인 충동이 아니라)을 갖고 있다면 반드시 당신은 그 미덕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당신의 미덕을 떠받든다. 사람들은 근면한 사람을 칭찬한다. 그가 바로 그 근면 때문에 자신의 시력을 해치고 정신의 독창성인 참신함을 상실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 사람들은 <체력을 소진할 때까지 일하는> 청년을 애석해마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 전체로 볼 때 가장 뛰어난 개인을 잃은 일은 지극히 작은 희생에 불과하다! 물론 그러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개인이 그러한 생각을 갖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발전에만 집착하면서 사회를 위한 노동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욱 슬픈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 청년을 애석해마지 않는 것은 청년 자신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순종적이고 일신의 성공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하나의 <도구> - 이른바 <부지런한 인물> - 가 그 죽음에 의해서 사회로부터 이탈된다는 점을 애석해 하는 때문인 것이다.

è 매우 마음에 든다. L일 할법한 말들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거부하는 천재의 이야기.

 

따라서 여러 미덕이 칭송되는 경우 당연히 그 칭송되는 것은 실제 미덕에 있어서의 도구적 성질이며 각 개체의 어떠한 이익에 의해서도 제약당하지 않는 맹목적인, 모든 미덕에 내포되어 있는 충동이다.

è 미덕이 미덕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미덕이 칭송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칭찬받기 위해 성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성실하며, 그 성실함에서 자신이 자부심을 느낀다면(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설사 성실함이 아둔하고 멍청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더라도 성실함이 자아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자라면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열심히 성실을 실행할 것이다.

è 그러나, 니체의 접근법을 통해 대단한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나의 부족함으로 충분히 실천하지 못하는 미덕들에 대해 항상 guilty feeling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미덕에 대한 찬미는 대부분 개인에게 유해한 것에 대한 찬미이다. 인간으로부터 그 가장 고귀한 자애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상의 자주적 능력을 앗아가는 충동에 대한 찬미인 것이다. … 예를 들면 무조건적인 근면, 그 전형적인 도구적 미덕은 부와 명예에 이르는 길로서 권태나 정열에 대한 특효약을 제시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갖는 위험성, 그것도 치명적인 위험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è 부와 명예를 얻게 되면, 그 일이 자신에게 무가치하고 의미 없는 일이어도 지속할 이유를 얻게 된다. 즉 권태의 치료. 실제로 하고픈 행위에 대한 정열을 억누르게 한다. 왜냐하면 잃을 것이 있기때문이다.

 

22 시인의 시는 시인보다 위대하지만, 국왕은 언제나 국왕의 시보다도 훨씬 커다란 가치가 있다.

è K S 또는 다른 여자와의 대화에서 사용할 수 있을 듯.

 

들어보라! 저것은 종이 아니었을까? 아차! 오늘 하루살이의 삐걱거리는 춤이 시작된다. 우리들은 돌고 도는 춤판을 알지 못한다! 때문에 즉흥적으로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은 모두 즉흥이며 우리들도 오늘은 세상과 함께 지내보자!

이쯤이면 나의 불가사의한 아침나절 꿈은 현실로 돌아온다. 놀랍게도 지금 그 독특하게 묵중한 음조로 다섯 시를 알리는 탑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늘 아침은 꿈의 신이 나의 습관을 놀려 주고 있는 듯하다. 하루를 <자기를 위해> 실속 있게 보내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매일매일을 시작하는 게 나의 습관이다. 그래서 나는 지나치리만치 형식적으로 또 지나치리만치 귀한 신분인 체 하며 그 습관을 누리고 있다.

è 왕의 꿈, 니체의 철학을 귀족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유가 무엇일까? 왜 굳이 귀족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니체가 귀한 신분(아마도 고귀한 사람이어서)을 지향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것을 귀족이라고 표현하나? 귀족이란 결국 동일한 사람인데, 단지 족벌의 형식에서 운이 좋았던 것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긴 하다.

è 나는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결코 무너지진 않는다.

 

24 말하자면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이러저러한 불편을 하는 것 일체에 대하여 언제라도 변함없는 <그건 나이다!>라고 대답할 권리가 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누구로부터도 조건지워진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몽상에도 복종하여, 내가 저렇게도 되고 이렇게도 되는 기분전환에 빠진다면, 그것 모두를 당연히 받아들이게 하고 싶다. 이것이 이미 남편으로서의 충실을 의심하고 있는 그의 부인을 향해 나폴레옹이 한 대답이었다.

è 나폴레옹과 같은 왕의 경우, 왕이 무슨 짓을 하듯 아랫 사람들은 당연하게 반응한다.

 

@ 가끔 내 앞의 인생에도 지금껏 겪은 것보다 더한 시련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는 운명적인 확신 왜냐하면 확률이 나를 비껴가는 법칙은 없으므로 때문에 나는 사는 것이 두려워진다. 그러나 미리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35 이단자와 마녀는 사악한 인간의 둑 k지 종류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그들 스스로도 자기가 사악하다고 <느낀다는 것>, 그러나 정복할 수 없는 열망이 시키는 대로 지배하는 것(그것이 인간이든 견해들이든 간에)에 해를 끼치고자 한다는 점이다.

 

40 살고 싶은 인간은 자기를 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사람은 이 궁핍을 이용하여 노동자를 <사는>사람을 경멸한다. 대체로 기묘한 일은, 강대한 위협을 부여하여 전율을 안겨 주는 듯한 인물인 폭군이나 장군에의 복종이, 산업계의 거물처럼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고 관심도 끌 수 없는 인물에의 복종에 비교하면, 비통한 느낌이 훨씬 덜 하다는 점이다.

 

@ 니체의 여성 비하에 대하여 여성을 비하하는 자들은 일종의 사디스트라고 볼 수 있다. 여자를 비하하면서 자기 만족을 얻는 것.

 

41 후회에 반대하여 사상가는 그 자신의 행동을,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에서 있을 법한 실험과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의 성공/실패는 그에 의해 무엇보다도 우선 <해답>이다. 그러나 무슨 일인가가 실패했기 때문에 화가 나던가, 더구나 후회하는 마음에 쫓긴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인종에 명령받았기 때문에 행동하고, 그의 영주가 그 결과에 만족치 않을 때 두들겨 맞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종에게 일임되어 있다.

 

46 우리들의 경탄 과학적 발견이 시험에 놓여 있고, 보다 나은 발견을 위해 계쏙적인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은 매우 근본적으로 좋은 행운이다. 결국 이것은 다른 것일 수가 없다. 사실 우리는 우리 판단의 불확실성과 환상성, 그리고 모든 인간적 법률의 영원한 변동성을 그토록 확신함으로써, 과학의 결과가 얼마나 잘 서 있는가를 정말로 경탄했었다. 이전에는 인간들이 모든 것의 이러한 변덕스러움에 관해 알지 못했다. 당시 도덕의 습속은 모든 인간의 내면세계는 영원한 걸쇠에 의해 철과 같은 필엿ㄴ성에 부착되어 있다는 신념으로 유지되었다. –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은 동화나 요정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찬가지로 관능적인 경악을 느꼈을 것이다. 기적적인 것은, 가끔 규칙과 영원성에 진저리난 사람들에게 쾌감을 주었다. 한번은 굳은 대지를 잃어 버리는 것! 둥둥 떠돌아다니는 것! 미치는 것! – 그것은 과거시대의 낙원이며 건전하지 못한 쾌락의 일부분이었다. 반명 우리들의 행복은, 파선한 자가 물에 올라가 반갑고 든든한 땅 위에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경탄하며 두 다리로 서 있는, 그 때의 행복과 유사하다.

è 나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한다.

è 니체가 말년에 정신병으로 고통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글에 대한 거리감과 회의감을 조성한다. 심지어 그의 글이 천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천재적 발상인지 광기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의 견해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이러한 개인사가 더욱 유감스럽게 여겨진다. 왜 그는 미쳐야 했던 것일까?

 

53 선이 시작되는 곳 ….. 거기에서부터, 위대한 사상가들의 암울/양심의 가책과도 비슷한 우울이 생겨난다.

 

2

 

57 리얼리스트들에게 정열이나 공상행위에 대해 갑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으로 있으며, 자기의 공허함을 아무튼 자랑하거나 꾸미거나 하고 싶어하는, 너희 냉담한 사람들아! 너희는 스스로 리얼리스트라 칭하면서, 이 세계는 너희의 눈에 비치는 꼭 그대로의 것이라고 암시한다. … 비록 완전히 껍데기를 뒤집어 썼다 해도, 너희는 역시 물고기들과 비교하면 매우 정열에 넘친 어두운 존재이며, 여전히 사랑에 빠진 예술가와 같은 형편이 아닌가? … 변함없이 너희들의 냉정함에는 억제할 수 없는, 은근한 도취가 내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너희의 <현실>에 대한 애착 오오! 그것은 오래된, 진정 오래된 <사랑>이다!

è 물고기와 비교함 : 참신

 

58 오랜 기간을 통해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명칭과 평가, 그럴 듯함을 창조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59 우리 예술가! 우리가 여성을 사랑할 때 우리는 걸핏하면 자연에 대해서 증오를 품는다. 여성을 지배하고 있는 일체의 꺼림직한 자연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 점을 생각하지 않고 때우려고 하지만, 이따금 우리의 정신이 이런 사정에 맞닥뜨리면 정신은 초조해서 경련하고 지금 말했듯이 경멸적으로 자연을 곁눈질한다. 우리는 모욕받은 것이다. 자연이 우리의 소유물에 손을, 더구나 아주 더러운 손을 댄 것처럼 보인다. 그때 우리는 모든 생리학에 대해서 귀를 막고, 또한 스스로 자신에게 은근히 명한다. <나는 인간이 영혼과 형상 이외의 또 무엇인가라는 사실에는 일체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라고. <피부 밑의 인간>은 모든 애인들에 있어서 기괴추악이며, 신과 사랑의 모독이다.

è 남성이 여성과 사랑하여 관계를 원하는 순간부터, 남성은 자연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음모, 성행위의 자연성, 아이의 잉태는 동물의 그것을 연상시키며 인간 자신도 결국 동물에 불과함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이상화하였던 여성, 더군다나 자신의 소유물인 여성의 질이 격하되었다고 여기며 (결코 자신도 동일한 동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이 곧 자신에 대한 자연의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61 나는 고고한 현자의 이 긍지를 존경한다. 하지만 만일 그의 마음 속의 친구가 그의 긍지를 이겨냈다면 그의 인간성을 더욱 존경했을텐데. 저 철학자는, 두 가지 최고의 감정 중 하나 그 중 더 높은 쪽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내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었다.

è 알렉산더가 철학자에게 달렌트를 주었는데 이 철학자가 거부. 여기에 대한 알렉산더의 말.

è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가? 극복(물욕의 극복)의 극복(청렴 < 우정)은 극복하지 못한 것(결국 돈은 받는다)과 같아보이는 아이러니.

 

67 자기위장 그년가 그를 사랑한 이래, 그녀는 암소처럼 조용한 확신을 가지고 황홀한 눈을 하고 있다. 슬프도다! 그녀가 완전히 변덕스럽고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황홀한지! 자기자신은 이미 지나치게 안정된 고지식장이라는 것을 스스로 너무 많이 발견하기 때문에.

 

68 의지와 승락 어떤 사람이 한 청년을 현자 앞에 데리고 와서 말했다. [보십시오. 이 자는 여자에 의해 타락한 자입니다.] 그러자 현자는 고개를 흔들며 미소지었다. [그것은 남자다.] 그는 말했다. [여자들은 타락시키는 것이야말로 남자이다. 여자들의 모든 결함은 남자들에 의해 씻기워지며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 왜냐하면 남자는 멋대로 여성의 상을 그리고, 여성은 그 이미지를 흉내내어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è여자 때문에 타락한 남자를 현자에게 데리고 가는 것은, 어떠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인데 현자는 오히려 타락시키는 주체가 남자라고 말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로부터 거절을 당했기 때문에 타락하였다.(, 여자를 소유하지 못하였다.) 이 남자가 원하는 도움은 그 여자를 얻는 방법을 묻거나, 혹은 그에 걸맞는 정신적 승화일 것이다. 그 여성이 남자들에 의해 본질을 상실당하는, 즉 타락하게 된다고 아무리 설파해보았자, 그 남자가 그 여자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남자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남자의 본성은 의지이다. 그러나 여성의 본성은 응락이다. – 진정 이것이 양성의 법칙이다. 물론 여성에게 있어서는 가혹한 법칙이다. 모든 인간은 그 생존에 대해 결백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이중의 의미에서 결백하다. 그들을 위해서 몇 사람이나 충분한 위로와 관대함을 갖게 될까!]

è 남자와 여자의 본성에서 차이가 있는 이유는, 여자의 질은 굴형으로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아도 취할 수 있는 반면, 남성의 성기는 정신적으로 동하여 발기가 되어야만 성적으로 준비가 된다. 그러므로 여자는 자신에게 빠져들지 않은 남자를 선택할 수 없다. 여자의 선택권은 오로지 자신에게 의지를 보이는 남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며,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라면 이 남자의 수는 1명 이상이기 힘들다. 그러므로 여자는 응락한다.

è 여성이 이중적 의미에서 결백한 이유는, (1) 생존본능, (2) 의지의 결여 , 능동적 결정권자가 아님.

 

[남자들을 더 잘 교육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젊은이에게 뒤따라오라고 신호하였다. 그러나 젊은이는 현자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70 지배자를 지배하는 여성 이 세상 어딘가에 고귀하고 영웅적이며 왕자다운 혼을 가진, 당당한 응수, 결의, 희생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여성, 남성들도 지배할 수 있는 여성이 그 여자의 내부에 남성의 가장 좋은 것이, 성별을 초월하여 체현되어 있는 하나의 이상체인 여성이 존재함을 믿을 수 있다.

è 지배자를 지배하는 자가 지배자와 동일한 덕목을 가져서야 되겠는가? 여성적인 것으로 지배해야 한다.

 

73 성스러운 잔혹 많은 사람들이 성자가 잔혹함을 가르친다고 말하며 성자를 비난했다. 성자는 아이를 죽이는 일을 권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살려 두는 일은, 더욱 잔혹하지 않을까?>라고 성자는 말했다.

 

76 최대의 위험 이와 같이,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신이야말로, 광기에의 분명한 즐거움이 왜냐하면 광기는 실로 양기어린 템포를 갖기 때문이다 발발하는 장소이다.

 

79 불완전함의 매력 마치 그가 그들을 직접 그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 구극적인 것의 직관에까지 안내해 준 것처럼 마치 그가 그 목표에 도달, 그 환영을 정말로 <보고>, 전해진 것처럼 그 목표에 사실은 달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그의 명성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82 논리란 그들(프랑스인)에게는 빵이나 물처럼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혼자서 그것만을 섭취해야 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죄수 음식이나 마찬가지로 생각되는 것이다. 상류사회에서는 사람들은 결코 마치 모든 순수한 논리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전적으로 그리고 단독으로 바름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프랑스의 에스프리에는 약간의 부조리가 있기 때문이다.

 

86 극장에 관하여 저녁, 승리의 꽃마차에 탄 승리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삶에 너무나 많이 채찍질당해 피곤한 노새와 같은 매일매일의 영혼들을 위해 고안되어진 것이다.

 

그 삶이 <행동>이 아니라 차라리 <사무>의 연속인 인간들이 무대 앞에 앉아, 사무를 초월한, 그에게 삶이 더 이상 사무가 아닌, 이질적 존재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것은 나쁘지 않다>라고 너희는 말한다. <그것은 위로다. 그것은 교양이다>라고.

 

92 산문과 시 그렇다면 대관절 당신은 왜 쓰는가?

A : 나는 잉크 묻은 펜을 손에 들고 생각하는 인간에 속해 있지 않다. 더군다나 의자에 앉아 종이를 응시하면서 열린 잉크병 앞에서 열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은 더욱 아니다. 나는 쓰는 것이 개탄스럽고 수치스럽다. 쓴다는 것은 내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유해서 그것을 말하는 것조차 혐오스럽다.

B: 그러나 그렇다면 당신은 왜 쓰는가?

A : 그런데 나의 친구여 솔직히 말한다면 여태까지 나는 나의 생각들을 제거시키는 다른 어떤 방식도 발견해내지 못하고 있다.

B : 그리고 왜 당신은 생각들을 제거하고자 하는가?

A : 왜 나는 그렇게 하고자 원하느냐고?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아아, 나는 어쩔 수 없기에 --.

B : 충분하다! 충분하다!

è 내 소설 속 L의 입장으로 사용하면 좋을 듯.

 

98 세익스피어를 찬미하며 인간 셰익스피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찬사는 이것이다. 그는 브루터스를 믿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덕에 대해 한 점의 의혹도 던지지 않았다! …… 부르터스와 그 숭고한 도덕성의 가장 두려운, 가장 순수한 정수에게. , 영혼의 독립성 그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큰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은 그것을 위해 가장 친한 친구도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è  K L을 죽일 때 사용할 법한 논리이다. K L의 논리를 체화하여 L을 죽인다. L K가 완전히 성숙하면 궁극에는 자신을 죽일 것임을 안다.

è <데미안>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플랭크를 죽이라고 한다.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è 지금 생각난 것인데, 데미안과 데미지(손상)은 같은 어원일까?

 

부르터스의 우울과 비교되어지는 햄릿적 우울의 상태는 어떠한 것인가? 필시 셰익스피어는 저 우울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 우울도 경험으로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역시 브루터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암흑의 시간과 악마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99 <정열은 스토이즘이나 점잔빼는 위선보다 낫다. 악에 있어서도 진솔한 것은 전통적인 도덕성에 열중하는 것보다 아직은 낫다. 자유로운 인간은 악할 뿐만 아니라 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자유한 인간은 자연에 대해 수치이며 천상 또는 지상의 위안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자유롭게 되고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자신의 노력으로 자유롭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자유는 초자연적인 선물로서 인간 마음대로 되어 가지는 않고 있다.

 

107 예술에 대한 우리의 궁극적인 감사 우리는 우리 인식의 정열 속에 숨어 있는 주인공이나 광대를 발견해야만 한다. … 우리의 이상이 우리로부터 요구하는 바, 어떤 사물을 초월하는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하여, 모든 화려하고, 회오리바람 같으며, 춤추고, 조롱하는, 어린애 같고 기쁨에 찬 예술을 필요로 하고 있다. … 우리는 도덕을 초월해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래서 너희가 아직 얼마간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동안은 너희는 아직 우리와 한패가 아니다!

è L K에게 하는 말.

 

3

 

108 새로운 투쟁 붓다가 죽은 후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수세기 동안 한 동굴 속에 그의 그림자를 안치시켰다 거대하고 섬뜩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세상이기에 필시 수천 년에 걸쳐 신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동굴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 그리고 우리 우리는 계속 이들 신의 그림자를 정복해야만 한다.

è 여기에서 신은 죽었다라는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다른 우회적 언급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기독교의 신을 정면으로 지칭하지 못하여 붓다를 인용한 것은 아닌지? è신은 죽었다.”라는 표현은 그는 애당초 신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109 세계가 영원히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자. 영속적인 실체는 없다. … 이 모든 신의 그림자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을 멈출 날이 언제인가. 언제 우리는 자연에 관한 비신격화를 완성할 것인가?

 

110 인식의 가장 무력한 형식으로서, 진리라는 것이 출현한 것 역시 최근에 들어와서이다. 인간은 진리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의 유기체는 그 반대를 위해 준비되었다. 모든 이 고급한 기능, 감관의 지각 및 모든 종류의 감각은, 태고 이래로 섭취, 동화되었던 근본 오류들을 가지고 활동했다. …… 따라서 인식의 <>은 그 인식의 진리성의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오래됨에, 혹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섭취, 동화되는 정도에, 그리고 삶의 조건으로서의 성격에 있다.

 

125 광인 마침 광장에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어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광인은 그들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신이 어디로 가셨느냐고.] 그는 소리쳤다.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말해 주마!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해서 우리가 대양을 마셔 말라 버리게 할 수 있었지? … 살해자 중의 살해자인 우리. … 이와 같은 행위의 위대성은 우리에게는 너무 지나친 위대성이었을까?

è K L을 죽인 후.

 

만일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이 교회들은 그럼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29 신의 조건 신 그 자신은 현명한 인간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고 합리적 이성을 가진 루터는 말하였다. 그러나 <신은 우매한 인간 없이는 더더욱 존재할 수 없다> - 우리들의 훌륭한 루터는 이 점을 말하지 않았다.

 

141 너무나 동양적인 무엇? 인간을 사랑하는 신, 그러나 오직 <만일> 그의 존재를 믿는다면 사랑하는 신.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 누구라도 적의에 찬 눈초리를 던지며 위협하는 신! 무엇이라고? <만일>이라는 가정법 안에 담긴 사랑은 전능한 신의 탓이라고? 명예와 복수의 감정조차 억제하지 못한 사랑이라고? 이 얼마나 동양적인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네가 주의를 기울일 일이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전기독교에 대한 충분한 비판이다.

 

145 채식주의자 알코올

è 알코홀릭들은 채식주의자들이다.

 

170 대중과 함께 그러나 그는 곧 알게 될 것이다. 대중은 그만큼 게으르지 않다는 것, 대중은 항상 밀고 있다는 것, 대중은 결코 누구든 정지되어 서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을 그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서 있는 것을 좋아한다.

 

173 자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석함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심각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호함을 위해 노력한다.

 

198 자존심 강한 자의 분노 자존심이 강한 자는 자기를 이끌어 주는 사람에게까지 화를 낸다. 그는 자기 마차의 말들에게도 분노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200 비웃음 비웃음이란 선한 양심을 가졌으나 남의 불행을 통쾌하여 여기는 것을 말한다.

 

210 부지런함에 있어서의 절도 사람은 그 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능가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를 병들게 한다.

 

234 한 음악가를 위로함 - <너의 삶은 인간들의 귀에 닿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너는 침묵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며, 그 인생의 뒤를 따르는, 그리고 앞서는 모든 선율의 정묘함과 자상한 결의들은 그들에게는 숨겨진 채로 남아 있다. 사실 너는 군악을 연주하며 넓은 대로를 행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의 생활에는 음악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이들 선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261 독창성 무엇이 독창성인가? 아직까지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비록 우리 모두의 눈앞에 있지만 이름이 없으므로해서 불리워질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보통의 방식, 그것은 이름이 있어 비로소 사물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독창적인 인간은 대부분 또한 명명자이다.

 

262 영원성에 관한 견해 너는 급속히 삶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곧 그들은 너의 이름을 자기들의 명부에서 말살할 것이다.

 

그것이 죽은 자의 특권에 참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무슨 특권?

 

더 이상 죽지 않을.

 

275 무엇이 자유의 징표인가? – 더 이상 자기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4부 성 자누아리우스

277 인격적 신 삶에는 어떤 최고점이 있다. 일단 그곳에 도달하기만 하면 우리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우리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부자유라는 커다란 위험에 다시 한 번 놓이게 된다. 또한 비록 우리가 존재의 아름다운 혼돈에 직면하여 모든 인격적 신이나 선의 존재를 부인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가장 고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 인격신이라는 사상이 가장 예리한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박두하여 <증명>이라고 하는 최상의 변호자를 데리고 자기가 만나는 무엇으로부터 무엇까지가 언제나 최선인가를 우리가 역력히 경험하도록 하는 때문이다. …. 우리 머리의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도 친히 알고 있는, 그리고 가장 비참한 작은 봉사에서도 혐오를 느끼지 않도록 하는 어떤 보잘것없는 신을 믿도록 하는 것, 이 이상 더 큰 위험한 유혹이 있을까?

!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요정들이나 신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è 조소, 없지만 있는 편이 낫겠지 라는.

 

278 죽음의 사상 좁은 갈림길들이 만들어 낸 어지러움, 여러 가지 욕구와 목소리들이 섞여 내는 이러한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산다는 것이 나에게 우울한 행복을 주고 있다. 얼마나 많은 향락과 초조, 그리고 열망, 얼마나 많은 목마른 인생과 삶의 도취가 매순간 빛나고 있는가! 게다가 침묵은 이 모든 시끄럽고 살아 있으며 삶에 목마른 자들에게 곧 내려올 것이다. 각자의 등뒤에는 그 그림자, 그 어두운 동반자가 서 있다!

è 동반자 = 죽음

 

285 점점 더 높게! – 그대는 이제 결코 기도하지 않으리라. 이제 결코 숭배하지 않으며 더 이상 무한한 신뢰 속에 안주하지 않으리라.

 

그대에게는 궁극의 보복자도 교정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에 생겨난 일들에서는 아무런 이성이 없고, 그대에게 일어난 일들에는 아무 사랑도 없다. … 그대는 어떤 궁극적 평화도 거부한다. 그대는 전쟁과 평화의 영겁회귀를 원하는 것이다. … 한 호수가 있어 어느날 스스로 흘러나갈 것을 거부하고, 지금까지 그가 흘러나가던 길목에 하나의 둑을 쌓았으니, 그리고 나서부터 그 호수는 자꾸 높아만 갔다. 아마 바로 저 체념은, 체념까지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는 힘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리라. 아마도 인간은 그가 이미 신에게로 흘러나가지 않을 때부터 점차 높아져 갈 것이다.

 

294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해 아무런 공포를 느끼지 않으며, 자신으로부터 불명예스렁누 어떤 것도 예기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우리 날고 싶은 곳에서 망설임없이 날 수 있다는 것은 항상 고귀함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303 행복한 두 사람 - 참으로 이 인간은, 그의 젊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예민한 관찰자들조차 감탄시키는 생활의 위대한 임기응변가, 즉흥가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끊임없이 대담한 일을 하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그들 손의 신적 무오류성을 신뢰하고자 한다.

 

여기 전혀 다른 사람이 있다. 실제 이 인간이 원하고 계획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잘못 되어 가고 있다. 그가 때때로 마음을 두었던 것이 여러 번 심연의 끝까지, 그리고 파멸의 상태로 그를 가져갔다. …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욕망과 계획들을 너무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다. 그는 자신에게 말하였다. <이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아마 다른 것이 성공하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나는 무엇인가 성공보다도 실패의 편에 감사하는 의무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완고한데다 수소처럼 뿔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è 여기 두 사람은 모두 니체 자신인데, 이 둘을 분리하여 L K로 쓸 수 있을까?

 

318 실제로, 고통 자체는 그들에게 그들의 가장 위대한 순간들을 부여한다! 이들이 영웅적 인간들이며 인간의 위대한 고통의 초래자이다. 또한 고통 자체가 필요로 하고 있는 바로 그 똑같은 변명을 필요로 하는 극히 드문 소수의 인간들이다.

 

329 우리는 이제 휴식을 부끄러이 생각하게 되었다. 오랜 명상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까지 한다. 사람들은 시계를 손에 들고 생각을 한다, 마치 정오에 주식 신문을 주시한 채 식사를 하듯이. 사람들은 마치 언제나 무엇을 <놓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산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인가를 하라.>

 

335 물리학이여 영원하라! –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관찰하는 법을 알고 있는가? 관찰법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 중 몇 사람이나 자기자신을 관찰하는가? <각자는 자기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은 신의 입으로부터 나와 인간의 언어로 된 것으로서 대부분 악의 그 자체이다. 그러나 자기관찰의 경우가 그만큼 절망적이란 사실을 무엇보다도 뛰어나게 증명하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도덕적 행위의 본질에 관해서 말하는 저 태도이다. , 저 표현, 저 미소, 들뜬 열정을 지닌 재빠르고 갈망하며 확신에 참 탐욕스러운 태도! 인간들은 너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다. <그래, 나의 친애하는 친구여, 이것이야말로 나의 영역이다. 너는 너의 질문을 확실히 그에 걸맞는 최적의 인간을 향해서 했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만약 인간이 <이것은 옳다>고 판단하고 그것으로부터 <그렇기 때문에 행해져야만 한다>고 결론맺어, 네가 필요하다고 고안하고 옳다고 인식해 온 것을 계속 진행시킨다면 그 행위의 본질은 도덕적인 것이다!>

 

그러나 왜 너는 너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가? 무엇이 너의 판단이 진실되고 기만적이지 않다고 여길 권리를 주었는가? 이 신념에 대해서는 거기에서는 아무런 양심도 존재하지 않는가? 너는 지적 양심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가? … <어떻게 하여 그것은 생겨났는가?>하고 너는 질문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네가 어떤 것을 올바르다고 느끼는 것 은 네가 일찍이 자기자신이라는 것에 관해 반성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네가 어린 시절부터 옳다고 들어왔던 것을 맹목적으로 수용해 온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또는 네가 너의 의무라고 부르던 것이 이제까지 너에게 지지와 명예를 지켜왔다는 사실에 근거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에게 너 자신의 <존재조건>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아울러 존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 너에게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 있어, 너의 도덕적 판단의 확고함은 비인격성에 대한 너의 개인적 비굴함의 증거가 될 수 있다.

 

…… 이를 위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법칙적인 것, 필연적ㅇ니 것에 대한 최상의 가르치는 자, 발견자가 되어야 하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창조자가 될 수 있기 위하여 물리학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종래의 모든 평가나 이상은 물리학의 무지에, 혹은 물리학자의 모순 위에서 구축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물리학이여 영원하여라! 또한 우리를 물리학으로 향하게끔 강요하기 위해 더욱더 영원하여라 우리의 성실, 영원하여라!

è 니체의 말은 너무 당연해서 더 덧붙일 말이 없다.

è L S 둘 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니체와 같은 깨달음을 공유한다고 설정하기.

 

336 왜 그토록 많은 인간들이 해가 뜨고 질 때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가? 이렇게 한다면 모든 인간의 일생은 얼마나 명확해질지!

 

338 대체로 자신의 길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가? 계속적으로 어떤 외침 또는 다른 외침이 우리를 꾸짖는다. 우리의 눈에 비치는 것은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우리 자신의 문제를 방기하고 도우러 달려갈 필요가 있는 것일 뿐이다. … , 이웃의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 자신의 길을 잃어버리는 것. … 현실의 비참한 광경에 자기를 내맡기는 편이 좋으며 그렇게 할 경우 자신 역시 곧 파멸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만약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가 나에게 <보라! 나는 죽어 가고 있다. 나와 함께 죽을 것을 약속해 다오. 제발>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약속할 것이라고이야기할 것이다. … 동정심을 유발하고 도움을 청하는 모든 것은 특히 은밀한 유혹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길>은 너무 어렵고 요구사항이 많으며 타인의 사랑과 감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무언가 모를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여느 때와 똑같이 민족의 가장 고귀한 인간들 속에서 비밀로 지켜지던 쾌락이 생겨난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죽음이라는 새로운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진다. 왜냐하면 조국을 위한 희생 속에는 그들이 오랫동안 구했던 허락 그들의 목적을 피할 수 있다는 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들에게 자살의 우회로를 제공한다. … <너 자신! 생존하려거든 숨어 살아라!> 너의 시대에 가장 중대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무지한 채 살아라. 너 자신과 오늘 사이에 적어도 3세기의 껍질을 입혀라. … 이들 동정의 설교자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이라는 것을.

 

342 짜라투스트라는 30세가 되었을 때 고향과 우르미 호수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스스로의 지혜를 사랑하며 고독을 즐기면서 10년 동안이나 권태를 모르며 살았다. 그러나 결국 그의 마음이 변한 순간이 다가왔다. – 어느 날 아침 짜라투스트라는 새벽에 일어나 태양을 ㅇ마주하고 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위대한 천체여! 만약 너의 빛을 흠뻑 쬐는 자들이 없다면 너는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보앙라! 지나치게 많은 꿀을 모아들인 벌처럼 나 역시 나의 저장된 지혜가 성가시게 한다. 이제 나에게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 뻗쳐 오는 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를 위해 나는 밑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나도 너처럼 몰락해야만 한다! 내가 내려가고자 하는 곳의 인간들이 말하는 몰락을 완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 이리하여 짜라투스트라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è 짜라투스트라의 몰락은 두 가지 의미에서 필연인가?

(1)   신이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는 몰락

(2)   인간의 세계에서 이해받지 못한 인간보다 못한 인간으로서의 몰락

 

5부 우리 두려움 없는 존재들

 

344 우리는 역시 아직도 얼마나 경건한가 - …… 학문적 정신의 훈련은, 자기자신에게 신념이라고 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 우리는 알고 있다. 학문 역시 하나의 신앙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 진리에 대한 이런 무조건적 의지,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의지인가? 아니면 기만하지 않으려는 의지인가? ……. 너희는 커다락 이익이 절대로 의혹적인 편에 있는지, 아니면 절대로 신뢰적인 편에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미리 생존의 성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 그러므로 바야흐로 현실에서 명백히 존재하는 학문에의 신앙이 그와 같은 공리적 타산(그 기원이 유용성이었을 것이라는)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오히려 그것은 <진리에의 의지>라든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라는 것에 대한 무익성과 위험이 끊임없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해 왔음이 분명하다. … 결국 <진리에의 의지> <나는 속임을 당하고 싶지 않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의 여지는 없다 - <나는 속이고 싶지 않다. 나 자신조차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과 함께 우리는 도덕의 지반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다. 특히 생의 외관이 결국 오류, 기만, 위장, 현혹, 자기기만에 기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때 그리고 확실히 그렇게 보이지만 또한 다른 한편 실제로 생의 위대한 형식이 어디까지나 폴리트로포이의 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는 더욱 그렇다.

 

è 진리는 속임을 당하지 않는 유용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속이는 것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스스로 속임을 생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한다.

è 학문도 신앙이라는 것에서 추론해내는 논리가 탁월하다.

 

학문에의 신앙이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이 과감하고 끝까지 철저했던 의미에서의 성실한 인간 은 도덕에 의해 생/자연/역사의 세계와는 별개의 세계를 긍정한다. … 즉 우리의 학문에의 신앙이 기초하고 있는 바는 일개의 형이상학적 신앙이라는 것을, 신은 진리이고 진리는 곧 신적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의해 점화된 거대한 불꽃으로부터 자기의 불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은 진리이며, 진리는 신적이다>는 것이 점차 믿을 수 없게 된다면, 오류/맹목/허위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더 이상 신적인 것으로 자기를 증명할 수 없다면 신 자신이 우리의 가장 오래도록 허위로 자기를 증명한 자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347 신앙은 의지가 결핍되어 있는 곳에서 항상 가장 턱없이 탐내어지며 긴급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의지는 명령의 정열로서 자주성과 힘의 결정적 특징이기 때문에. … 왜냐하면 광신은 약하고 불안정한 자조차 도달할 수 있는 유일의 <의지력>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윽고 힘을 발휘하는 유일의 시점 혹은 감정점에의 과도한 영양(이상비대)을 공급하기 때문에 전 체계의 감각적, 지적 조직에 베풀어 주는 일종의 최면술이다. 기독교인은 그것을 그의 신앙이라 부른다. 어떤 인간이 자기는 명령을 받아야만 한다는 근본 신념에 도달해 있으면 그는 <신념이 깊은 자>가 된다. 그 반대로는 자기 결정의 기쁜 힘, 의지의 자유가 생각되어지리라 즉 정신이 모든 신앙이나 확실성에 대한 바램과 작별하고, 작은 로프라든가 가능성 위에 몸을 놓고서도 심연 가까이에서조차 춤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나 정신이야말로 틀림없이 탁월한 자유의 정신이리라.

 

351 즉 인식자의 커다란 정열이 그것이다. 인식자라고 하는 것은 가장 고귀한 문제들과 가장 무거운 책임의 뇌운 속에서 살고 있으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따라서 완전히 방관적, 외면적, 냉담, 안전, 객관적이지는 않더라도.)

 

356 그들은 스스로 천직을 결정했을 때 얼마나 많은 우연과 기분, 혹은 변덕에 의해 움직여졌는가를 잊고 있다 또한 얼마나 많은 다른 역할을 그들이 연기했을지 모르는가 하는 것을 잊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더 깊게 그것을 고려한다면 역할을 실제 성격이며, 연기는 천성이 되어 있다.

 

357 우리가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이와 같이 거절하고 그 <의미>를 위조화폐로서 판결할 때 여기에 즉시 놀랄 많나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으니 바로 쇼펜하우어의 질문이다. <애당초 생존에게 의미가 있었던가> 하는 문제이다.

 

359 여기에 한 쓸모 없게 된 인간이 있다. … 상속 받은 얼마간의 재산에 의해 불행히도 최후의 위로 - <노동의 축복>이나 <일상적인 일>에 부지런히 힘써 자기망각을 얻는 것도 박탈당하고 있다. 결국 그는 자기의 생존을 부끄러워 한다. – 아마 그는 그 위에다 약간의 악덕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반면 그는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책에 의해, 또는 자기가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정신적 사교에 의해 더욱더 자신을 망치고 허영적인 흥분에 함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인간은 철두철미하게 망쳐져 왔다. – 왜냐하면 이런 쓸모 없는 인간의 경우 정신도 독이 되고, 재산도 독이 되고, 교육도 독이 되며, 이런 방식을 악하게 판명된 사람들에게 고독은 독약이 되기 때문이다. – 결국 이런 인간들은 복수가, 복수에의 의지가 습관적으로 된 상태에 함몰된다.

è 모든 것을 다 가진 K의 상태.

 

363 여성이 이해하고 있는 사랑의 의미는 분명하다. 몸과 마음의 완전한 헌신(단순한 복종이 아니다), 아무런 고려 없이 아무런 유보 없이 오히려 특별한 제한이나 조건이 따르는 헌신에 대해 수치와 공포를 느끼는 헌신인 것이다. 이렇듯 무조건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녀의 사랑은 하나의 신앙이다.

 

스스로의 권리는 무조건적으로 체념해 버리는 여자의 정열은 상대편에게는 똑 같은 파토스, 똑같은 체념에의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두 상대자들이 사랑으로서 그들 자신을 포기하도록 강요되어진다면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공허한 넒음이라는 것이 어떨지?

 

여자는 하나의 소유물로서 얻어지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365 우리가 사후에 비로소 생에 도달하고, 생명이 있는 것, 아아! 생명이 빛나는 것이란 점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죽은 후에 살아 있는 인간들이여!

è 니체의 저술들은 실제로 니체가 죽은 후에 더욱 빛을 발하였다.

 

366 청년시대를 같이 보낸 너의 친구를 그들이 전문가가 된 후 다시 재회해 보라 얼마나 반대의 결과로 되었는가. 아아, 그들은 이제야말로 학문에 의해서 영원히 물화 되어 버렸던가.

è 우리는 주로 전문가가 되는 길이 자아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태워 물화시키는 과정이다.

 

368 너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정직하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선 극장에 없어야 한다.

è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요구되는 역할들을 인식하고 신경 쓰고 있다.

 

341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첫째, 생의 과잉 때문에 고통받는 자들이다. – 이들은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원하며, 똑같이 생에 대한 비관적 견해, 비관적 통찰력을 구한다. 두번째로는 생의 빈약함 때문에, 생의 불모성 때문에 고통받는 자들이다. 이들은 안식, 정적, 고요한 바다, 예술과 인식에 의해 자기로부터의 구제를 구하든가, 혹은 도취, 경련, 마비, 광란을 구한다. 예술과 인식의 모든 낭만주의는 후자와 같은 유형의 이중적 요구에 호응하고 있다.

 

한편 최고의 풍부함으로 충일해 있는 자, 디오니소스적인 신과 인간은 공포스럽고 의심스러운 외관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끔직스러울만한 행위 자체조차도 파괴, 해체, 부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온갖 사치조차도 허락한다.

 

즉 고정되고 불멸하고자 하는 욕망,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창조의 원인인가 아니면 파괴, 변화, 새롭고 기묘함, 미래, 생성에의 욕망이 창조의 원인인가 하는 문제.

 

376 우리들의 안만한 시기 모든 예술가,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인간, 즉 모성형의 인간이 느끼는 방법은 이것이다. 그들은 항상 자기 인생의 각 장에서, 결국 하나의 작품의 한 장이라는 의미이지만, 모든 목표 자체에 도달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늘 죽음을 다음과 같은 감정을 갖고 조용하게 바라보리라. <우리는 지금 그것을 위해 성숙하고 있다. 이제 죽어도 좋다.>

è L의 죽음?

 

377 우리들 고향 잃은 자들 우리, 미래의 아들들인 우리가 어떻게 이 현재에 마음 평안할 수 있을까? 덧없고 허물어진 이 해체되고 있는 과도기에 있어서까지 아직도 그것을 바라보고 마음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이상을 우리는 혐오한다.

 

우리는 결코 <자유주의적>이지 않다. 우리는 <진보>를 위하여는 일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위험을, 전쟁을,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 타협하지 않고 구애받지 않으며, 회유되지 않고 거세당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기꺼이 맞이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복자 중에서 헤아린다. 우리는 새로운 질서의 필연성에 관해서, 또한 새로운 노예제도의 필연성에 관해서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유형을 강화시키고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또한 일종의 노예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금을 입혀서 한 병자가 자기의 쇠약을 장식한다 한들, 우리에게는 아무 흥미도 없다. 그는 자기의쇠약을 자기의 덕인 양 자랑할는지 모른다. 쇠약이 관대하게 만든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인류애>에 관해서 감히 운위하게끔 결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 우리와 같은 사람은 그렇게까지 위선자는 아니다! 또한 생 시몽 주의자도 아니다. 성실한 방법으로 정욕을 가지고 인류에게로 접근하기 위하여서는 사람들은 확실히 호색적인 민감성과 사모하는 데 있어서의 초조인 고대 프랑스 풍의 과잉병에 감염되어 있어야 한다.

 

아니다, 우리는 인류를 사랑하지 않는다.

 

è S라는 여자의 캐릭터로, 니체의 여성형을 구사하면 어떨까? 니체와 대부분의 부분에서 비슷하되, 니체의 남성비하적 발언을 여성의 것으로 옮기는 것. S는 남성을 비하하며 여러 남자를 거느리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생물학적으로 원래의 모성사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함.

 

프린스 보켈프라이의 노래들

괴테

 

세계의 유희, 이 지배적인 힘이

실제와 가상을 뒤섞어 놓는다.

끝없는 어릿광대의 힘이

우리를 역시 뒤섞어 놓는다.

 

시인이 천직을 깨닫다

 

멀리서 똑똑하는 소리가 끝없이 박자 맞추는 것처럼 들려올 때

나는 미친다, 나의 얼굴은 찡그러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마치 시인처럼

그 이상한 똑딱똑딱을 역시 말할 때까지는.

 

나는 시들을 쓰게 두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자신의 딩동을 한 후에

나는 웃음을 이겨냈다.

15분 동안이나 오래 터지는 웃음을.

네가 시인이냐? 네가?

네 머리도 그렇데 미쳤느냐?

- <물론, 친구여. 그대는 확실히 시인이다.>

딱다구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è 나는 어디선가 똑딱똑딱이라는 소리르 들었다. 그 소리는 강박적으로 나를 잠식해온다. 나는 그 똑딱똑딱을 말하고 시로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소리는 딱따구리의 소리였다. 시인은 기가 차서 웃는다. 자신의 소명의 발로는 딱다구리의 소리처럼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리를 만들어야 하는 딱다구리의 숙명처럼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남국에서

 

한 발 한 발 나가는 것 이 무거운 걸음은

독일이지 삶이 아니다 하나의 병 :

 

이성은 사업 같은 것 하나의 홍수다.

그것은 너무 빨리 우리의 목적지에 데려간다.

 

북극에서 망설이며 고백하지만,

나는 몸서리치게 늙은 여인을 사랑했었다.

그 늙은 여인의 이름은 <진리>……

 

사랑의 선언

 

다만 그가 떠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실은 높이 오르고 있는 것이다!

 

분명치 않은 영혼들

 

그들의 모든 찬양은 자기혐오와 부끄러움이다.

 

그들의 춤에 끼어들지 않은 이래

나는 <그들의> 낡은 그물에 묶이어

그들의 눈길에 쫓기게 되었다.

 

나를 목표로 한 이런 눈길의 탐색은

영원히 내 근본을 놓칠 뿐이다!

è L이 왜 은둔을 선택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시 같다.

 

절망하는 바보

 

그러나 지우는 일이 끝나거든

철인이 벽 위에다

현명한 똥을 싸는 것을 보자.

è K가 자신의 인생을 세탁한 후 L 의 산물( L 자신은 하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산물)로 대신하는 상황과 비슷.

 

북풍에게

 

도처에 있는 병든 족속이 확 붉어지도록

풀 죽은 가슴 속의 잡소리로부터

결코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려는 눈으로부터.

 

증명된 영원,

그러한 기쁨처럼, 그 유산을 취하라.

 

화한을 매달아라 별 위로.

 

 

 

 

 

 

 

 

 

 

 

 

 

 

 

 

 

 

 

 

 

 

 

내가 저자라면

(내가 니체라면 살로메랑 결혼하고 말지)

 

 

 

 

 

 

 

 

 

 

 

 

 

 

 

 

 

 

 

 

내가 저자라면

 

<즐거운 지식>의 초판이 1887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니체의 주요 저술이 다 쓰여진 시기이다. 니체는 1990년에 사망하였으므로 그의 거의 말년 저작이다. 옮긴이의 말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즐거운 지식>은 마치 니체의 주요 저작 중 빠진부분들이 다양하게 모아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책의 구조가 산발적인 것은 아니다. 책의 영문판 번역가인 니체 전문가 카우프만은 이 작품의 구조는 지극히 중요하며, 따라서 이를 밝히고자함이 나의 주석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다.”라고 썼다. 수많은 격언들을 무원칙적으로 늘어놓은 듯이 보이나 세심한 구도 하에 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한 번 읽은 입장에서 어떠한 구도적 묘미를 느끼기는 그리 쉽지 않다. 최소한의 유기성만이 느껴진다. 가령, 맨 마지막에 프린스 보켈프라이의 노래들을 모아둔 것이라거나.

 

구성은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 독일적 압운의 서곡

그리고 산발적으로 이어지는 1~5

프린스 보켈프라이의 노래들

 

이러하다. 요리로 따지자면 앞 뒤에 빵을 덧댄 스크램블드 에그 참치 샌드위치같다. 속 안은 온통 카오스지만 끈끈하게 붙어있고 샌드위치는 맛있다. 이런 구성의 책이 가지는 장단점이란?

 

1.     단점 책을 잘 사보지 않게 된다. 책이 어떠한 핵심의 방점을 찍지 않기 때문에. 책을 들쳐본 자가 단지 몇 구절에서 주옥 같은 부분을 발견했다고 치자. 그것만으로 책을 집어들 의향이 있는 자라면, 그는 책에게 굉장히 관용적인 사람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이 책 저자의 주요 저서를 재확인한 후 가장 자신과 맞다고 생각되는 핵심책을 선별해서 읽을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만약 니체를 읽으라고 과제를 내주었다면 짜라투스트라를 골랐을 것이다.

2.     장점 니체의 전부를 알 수 있다. 이는 희극적 아이러니다. 유명 영화 배우의 대표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헐리우드 저택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행위를 통해 이 영화배우의 진실에 대해 더 많이, 더 포괄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샌드위치의 속 내용물의 좋았던 점.

 

의지를 가지고 책을 관통하여 매긴 번호들, 비슷한 길이의 글들. 이들은 한 유기체를 구성하는 세포와도 같다. 일단 독자에게 자신감을 준다. 짧은 쪽글이므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사 어려운 내용이라 하더라도 반복하여 읽으면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 실패했다면, 실패의 부분은 극히 작은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준다.

쪽글마다 첫머리에 핵심 어구를 담는다. 이 것이 글을 이해하는 데 대단한 도움을 준다. 니체는 그런 의미에서 친절한 저술가다. 그는 심각한사람으로 명석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자이며, 결코 심각한 체하기 위해 모호함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다만 천재의 브레인 스토밍은 늘 장황해질 위험이 있으며 사고의 여러 단계를 건너뛴다. 그가 선택한 형용사 미사여구의 목적이 아니라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형용사 는 그 자체로 메인 내용과 비슷한 무게감의 이해를 요구하며 그래서 한 줄기의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한다. 최대한 간단하게 쓰는 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가정법, 우화, 그리고 말투가 살아있는 글쓰기. 훨씬 재미를 증가시키며 엔도르핀을 돌게 한다. 특히 니체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설파하기 위해 흥분하는 어조, 가령, 왜냐! 무엇무엇을 위해서, 왜냐! 무엇무엇을 하기 위해등등의 감정이 실린 구어체 어찌 보면 시적인 를 활용한 것이 좋았다. 니체를 철학의 동의어가 아닌 한 사람으로 느끼게 한다.

 

보다 상상력을 가미하여 임팩트가 큰 책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책 한 권을 예술의 정수로 꾸미기 위한 방법이 더 있을 것이다. 철학자의 제어할 수 없는 충동으로써의 자괴적인 저술이 아니라, 적나라하게 최상을 향해 치닫는 그 무엇이 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휘갈겨 쓴 일기장의 폭로가 아닌. 그 무엇.

 

결코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이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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