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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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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2일 10시 26분 등록

고개라는 아름다운 괴물과 나눌 몇 가지 비밀

 

잊을 수 없다. 그 밤에 쏟아지던 별들이 내 심장에 콕 박혔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그곳을 써 보리라던 바램이 준비되지 않은 채 이렇게 와버렸다. 그곳을 처음 만난 지가 그러니까 벌써 14년이 되었다. 혈기 넘치던 스물한 살, 대학생 무리를 끌고 그 해 여름, 나는 대간의 마루금을 밟으려 짐을 쌌다. 험난하고 길었던 대간길에서도 그 곳은 유난히 내 마음을 잡아 끌었는데 험한 지형만큼이나 날씨 또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곳을 지날 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았고 한 여름에 서로의 체온을 체크하며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다음 날에는 거짓말처럼 내리쬐는 햇살에 걷기가 힘들었지만 그 이튿날은 이름이 아름다운 고개가 평당 천 개의 별을 품고 ‘고생했다’하며 그 하늘을 보여주었었다.

10여년이 훌쩍 지난 어느 밤, 나는 그곳을 도반들과 다시 갔다. 그곳은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고 나지막이 속삭이듯 그때와 같은 밤을 보여주었다. 나는 지금 문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비를 흠뻑 맞으며 걷던 곳은 이화령이고 내리쬐던 태양에 힘들었던 곳은 문경새재, 그리고 이름이 아름다운 고개마루는 하늘재다. 천 년을 두고 차례로 개통된 이 세 개의 고개를 3일에 걷는 사태는 3천 년, 이 땅의 이야기를 밤새 듣는 것일 터. 길은 말을 하지 않지만 말하지 않음으로 그 길을 걸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안는다. 길은 세월의 지층이 간직한 이야기로 버틴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 바람 한 줄기에 풀어내는 인간의 이야기들을 이 고개의 길은 다 들어주지 않았겠는가. 나는 고개가 좋다. 길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고개의 길은 세상의 장삼이사들의 온갖 얘기들을 다 들어주고 안아주는 품이 넓은 사람일 게다. 바람은 고갯길의 그 웅장한 매력에 푹 빠진 열성 팬이라 항상 곁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큰아이의 이름에 고개를 뜻하는 峴(현)을, 둘째 아이에게는 들어준다는 의미의 聆(령)을 새겨두었다. 글이 잠시 다녀왔다.

 

충청과 경상의 분수령인 준봉들 사이에서 경상도의 마을과 충청도의 고을을 이어주던 이 세 개의 고갯길은 모두 문경지역에 있다. 2세기 중반, 정확히는 서기 156년에 뚫려 신라와 고려시대의 주 간선도로였던 하늘재는 조선 초, 태종 14년에 문경새재가 개통되기 전까지 영남의 사람과 물자가 한강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하늘재를 경계로 고개 아래의 문경 땅의 첫 마을은 관음리이고 재 너머 충주 땅 마을은 미륵리다. 관음과 미륵을 잇는 고개의 이름을 하늘재라 명명한 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 그 의젓하고 아찔한 세계에서 살고 싶다. 관음에서 미륵으로 가는 고개에 하늘이라... 나도 모르게 손은 무릎으로 간다. 그로부터 천 년 뒤 문경새재가 뚫렸다. 길은 넓어졌고 고개는 조금 더 낮아졌다.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물자들이 교류했다. 다시 천 년이 지난 뒤 이화령이 생겼는데 문경지역의 석탄과 석회석을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일제가 만들었다 한다.

 

그러나, 3천 년을 두고 건설된 그네들의 지금의 모습은 보아주기가 민망하다. 과거 그 고개를 발품으로 지나던 사람들에게 사과라도 해야 할 만큼 면목이 없는데 문경쪽 새재길과 충주쪽 하늘재 길을 빼고 나면 모두 아스팔트 포장으로 발려버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화령은 3번 국도와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해 그 아래로 두 개의 터널이 뚫렸다. 고개는 사라졌고 그 고개의 사람도 사라졌다. 새로운 길이 옛길을 대신하지만 길이 간직한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단번에 모두 지워버린 느낌이 들어 안타깝다. 지옥에나 어울릴 법한 경쟁력이라는 가치에 사람들은 고개의 에둘러 감의 가치를 압살해 버렸다. 3천 년을 두고 두고 모은 인간의 이야기를 속도의 논리로 다시 원시의 무지로 돌려세우는 장면은 아닌가. 못할 짓이다. 그날 밤 쏟아지던 별을 보여주며 나를 잡아 끌던 문경새재의 길은 제 아픔을 알아달라는 천년 전의 메아리인지도 모르겠다.

 

하늘재에서 바라보는 포암산은 산 전체가 부처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문경새재 꼭대기를 달이 없는 가을밤에 올라보라.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지금은 없어진 이화령 고개에는 작은 휴게소 하나가 있었는데 묵밥이 아주 맛 났었다.

 

석남재, 답운치, 추령, 구룡령, 미시령이라해서 다를 것 없다. 이 땅에 상처 난 고개가 더 생기기 전에 나는 살아있는 동안 이 고개, 그리고 산이라는 '아름다운 괴물과 몇 가지 비밀을 함께 나누고 싶다.'

IP *.51.145.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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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2 13:54:21 *.210.139.5

이런 역사 속에서 오늘을 이야기하니까 , 앞 뒤가 뚫리는 것 처럼 이해가 확~  온다.

그런데 왜 (?) 괴물이라 했을까 ? 앞에는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산' 

재용이의 Trade Mark 된 느낌 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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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2 14:02:23 *.51.145.193

니체가 만약 집을 짓는다면 바다 한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 집을 세운다 했는데

이어서 말하길 '나는 바다라는 이 아름다운 괴물과 몇 가지 비밀을 함께 나누고 싶다' 고 했거든요.

니체 따라 한겁니다. ㅋㅋㅋ

올랜도 출장 잘 다녀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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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10.22 22:24:03 *.85.249.182

하늘재가 한 때는 주 간선도로였다는 것을 재용이의 글을 통해서 알았네.

거침없이 전개되는 재용이의 산이야기에 반했어.

문경새재에서 본 밤하늘, 별들의 속삭임을 들었던 그 밤을

되새겨 주어 고맙다.

아픙로 전개될 히말라야 산이야기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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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3 17:08:47 *.114.49.161

와, 저는 저 묵밥집 알아요.

 

고개가 좋아 두 아이의 이름에 새긴 이야기,

평당 천 개의 별,

거기에 서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

재용의 글은 참 선동적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좋았어요. 참 좋아요. 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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