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 조회 수 2406
- 댓글 수 4
- 추천 수 0
마흔살 여자의 책읽기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과 정선 아우라지
늦었다! 살에 와 닿는 까슬까슬한 여름홑이불 감촉을 느끼며 뱀처럼 뜨고 있던 길쭉한 실눈을 육식공룡처럼 화들짝 떴다. 튕겨 일어났다. 베낭 아구리를 열어서 필요한 것들을 휩쓸어 담는다. 세수만 하고서 택시를 타고 전철을 탔다.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자르련다. 기차를 놓쳐서 정선에 못가더라도 나는 워낙 나서기 어려운 사람, 어디든 다녀와야지. 아이폰으로 기차시간을 확인한다. 청량리발 정선행 무궁화호의 종착역은 아우라지다. 역 이름이 높은 벼랑 위에 늙은 소나무와 정자가 있고 둥글게 굽이쳐 흐르는 푸른 강물이 뒤에 보이는 풍경을 연상시킨다. 차 안에서 모닝페이지를 하고 108배 대신에 염불을 길게 했다. 《우리 속에 있는 남신들》아레스 편을 읽는다. 기차의 창문은 TV, 인터넷보다 볼 꺼리가 많다.
썬글라스를 쓰고 썬크림을 얼굴, 목, 팔, 다리에 듬뿍 바른다. 창 밖에서 뜨겁고 환한 여름 햇볕이 찔러든다. 커튼을 치지 않고 몸을 쪼인다. 나는 지난 열흘간 햇볕이 너무 부족했다. 비타민 D를 생성해서 뼈를 튼튼하게 할 광합성, 우울증을 말려버릴 일광욕이 필요하다. 열차 화장실에 들렀다. 수세식이다. 오물과 휴지를 버리면 물이 나와서 쫙 빨아간다. 궁금하다. 기차가 역에 정거했을 때 화장실을 쓰면 되나 안되나. 흔들리는 열차 안이 불안하다.
아침을 먹으러 열차카페로 건너갔다. 나는 늘 부러웠다. 쫒기는 출근길에 신도림역에 서서 보던 카페칸. 인천행 1호선을 기다리면서 밖을 향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지나가는 영등포에서 내려오는 열차를 보면서 부러웠다. 그걸 지금 해 본다. 노란 테이블에 선 채로 구운 계란과 깻잎참치 김밥을 사먹는다. 뒷쪽으로 노래방 부스와 동전 pc가 있다. 컴퓨터는 15분에 500원인데 터널을 지날 때 연결이 끊어졌다. 60대 초중반 친목계 회원들이 단체로 여행을 간다. 등산복 색이 화려하다. 손녀를 데리고 온 이가 한 사람 보인다. 전철이 다니는 경기도를 지나 강원도에 가까워지니까 산이 높아지고 나무의 키가 커지고 밭들이 점점 높은데까지 기어올라가 누워있다.
4시간 만에 정선에 도착했다. 여행사에서 온 사람들은 둥근뱃지를 가슴에 달고 전세버스를 타고 갔다. 그들의 다음 일정은 정선장터 자유중식일테지. 나는 도장을 찍는 젊은이들 줄에 끼어서 대합실에서 엉겁결에 구절리역과 정선역의 파란 스탬프를 찍었다. 정선에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3가지다. 메밀전병과 배추잎이 그린 듯이 들어있다는 전의 원조 맛을 보고 메밀가루를 사와서 재현해내는 것, 정선아라리 전수자에게 직접 노래를 들어보는 것, 김형경씨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 인혜와 진웅이 앉았던 아우라지 강변에 내 몸을 두고서 그 노래를 만들어낸 산천의 느낌을 몸에 적셔오는 거였다. 양산을 켜 들고 시내를 걷는다. 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뜨겁다. 식당간판과 메뉴를 읽는다. 군청청사로 들어가는 표지판, 어린이보호구역 팻말을 보면서 정선군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학교 무상급식을 실시하기로 한 기사를 떠올린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소설의 여주인공은 모두 서른일곱이었다. 나 역시 그 소설을 서른 일곱살 생일선물로 나에게 주었다. 2년여간 정신분석을 받았던 김형경씨의 경험이 녹아들어가 있었다. 소설 속 세진은 몸이 너무 아파서 결국 정신분석을 받게 되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모든 딸들이, 심지어 알콜중독자, 바람쟁이, 폭력 피해를 입은 딸조차 아버지 닮은 사람을 선택하듯 자신이 0세에서 3세 사이에 경험한 애착과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이행 양상이 이후 사랑 상대를 면밀히 결정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성 부모를 향한 사랑인데 그걸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이걸 밟고 앞으로 전진하게 하는 발판이 되는 애착이 불완전하거나 불안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해했다. 그 소설 속 세진은 1년 8개월 때 외가로 보내어져 유년을 보냈고, 다시 부모에게 돌아왔지만 5학년 때 이혼해버려서 애착을 회복할 기회를 놓쳤다. 히말라야를 비행기를 타고 지나는 게 아니라 정신과의사를 대동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 그 때의 감정을 제 몸으로 다시 경험하는 것이 정신분석인 듯 했다. 나는 그 소설에 끌렸다. 인혜와 진웅이 만났을 때부터 알아과는 전 과정의 그들의 마음 속을 대신 노래해 주는 아라리가 나온다. 노래들이 마음에 들었다. 정선아라리를 구해서 들어보았다. 처음에는 경기도 창하는 명창의 CD였고 나중에는 정선이 고향인 사람에게 홍천막걸리를 받아주고 채록한 것을 받았다. 작가의 말이 참 인상깊었다. 김형경씨는 삶이 밤송이같아서 밤껍질을 까느라 손을 찔렸고, 보니를 벗기고 떫은 맛을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자신이 소설쓰기를 사랑하게 한 소설이라고 했다. 도대체 글 쓰는 것이 업인 사람이 저런 고백을 하게 하는 책은 어떤 것인걸까?
사거리 우회전을 두 번쯤 한 후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장터로 들어간다. 촌사람인 내가 고향에서 보던 시골장터보다 좀 더 크다. 산나물 뭉텅이 파는 난전과 옥수수라기보담 강원도강냉이를 삶아 파는 가마솥이 유난히 자주 보인다. 오늘은 정선장날이다. 2일, 7일. 상인들은 목에 '신토불이' 팻말을 달았다. 정선군청에서 낸 아이디어인듯 하다. 정선 장터 안에 공연장이 있어서 마술, 정선 아라리, 발리댄스를 공연하는데 마이크 소리가 몹시 시끄럽다. 주변을 돌아가며 평상이나 테이블을 놓고 강원도 토속 음식을 파는데 하나같이 올챙이국수, 메밀전병, 감자전, 콧등치기, 수수부침, 메밀전 같은 것들과 막걸리가 적혀있다.
한참을 서서 구경을 하다가 김치를 넣어서 돌돌 만 거 이름을 물어보고 (메밀전병이라고 했다) 주문했다. 열무김치, 간장과 같이 가져다 주는데 내 입맛에는 너무 짜고 맵다. 돌돌 말린 것을 풀어서 다진 김치를 반넘게 꺼내놓고 다시 비뚜룸하게 말아서 먹었다. 간식 부침개 말고 막걸리 안주로 먹으면 간이 맞을 것 같았다. 배추가 그린 듯이 들어있는 것의 이름을 물어보고 시켜서 먹었는데 이름을 잊어먹었다. 야채가 듬뿍 든 적, 배추적을 먹었던 경상도 사람인 내 입맛에는 그게 더 친숙했다. 전은 1장에 천 원이다. 옛날 같으면 오광대가 놀고 다른 재주넘는 이들이 여기서 놀았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그래도 찢어지는 마이크는 없었을테니 귀 아프고 맛을 모를 정도는 아니겠지. 그 시끄러운데 주저 앉아 먹은 걸 후회하였다.
한쪽 테이블에 앉아 먹는데 웬 할아버지가 합석을 한다. 내 몫의 열무김치와 간장을 내 쪽으로 당겼다가 간장을 따로 주지 않으니 공용인가 하면서 그릇을 원래 자리로 슬쩍 밀어주었다. 그가 내 접시에 감자부침을 두어조각 슬며시 얹어놓으며 먹어보란다. 썬글라스 안에서 내 눈은 긴장을 했을 것이다. 아니 덜컥 겁이 났을 거다. 감사하다며 그걸 먹으면서 내 것도 집어서 그쪽 접시에 올려주니까 그가 어디서 왔냐면서 가슴포켓에서 명함을 꺼내준다. 불 앞에서 얼굴 벌개져서 전병을 부치는 60대 여자를 가리키면서 집사람이란다. '00당 태백, 정선, 영월 지구 홍보위원'이라는 첫줄만 힐끗거리고 나머지는 읽지 않았다. '외롭게 살지 말고 연애하고 재미있게 살아. 착하게 살면서 봉사하면 최고지'라는 그의 말이 경계를 풀지 않은 나에게 마치 자신하고 연애하자고 한 것처럼 불온하게 들린다. 서울 자주 가고 서울에 아는 사람 많은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요? 쳇, 작년부터 부쩍 이런 느낌의 말을 듣는다. 합법적인 간택이 종료된 이들의 입에서다. 이것도 이 나이 벨트의 풍경인가?
장터에서 심사가 상해서 나는 낮 내내 유난히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들이 깍지 낀 손을 잡고 지나갈 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화풀이를 한다. 그래 나는 연애하면서 외롭지 않게 살 생각이다만, 그리고 젊은 여자인 당신과 늙은 남자인 당신 역시 서로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아귀 맞아서 그러겠지만, 생활의 불판 앞에서 다리 땡땡 부은 채 얼굴 벌개져 있는 늙은 아내인 여자가 알게 되면 마음 아플 연애는 하지 않겠다 옛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듯 한다. 명함은 버렸다. 사회경제적인 여건과 안전망이 지금보다 허술했던 예전에는 혼자 다니는 여자가 '놀아보자'는 느낌의 말을 듣는 일이 더 많지 않을까? 성별, 나이, 결혼 여부 상관없이 사랑하면서 살고 싶긴 하다. 근데 사랑은 요상해서 방향도 지 맘대로고 유통기한이 있는데다, 세월 속에서, 결혼 안에서 변하고 증발해버리지. 뭐가 이렇게 골치 아프고 복잡하고 어려운 건지. 늙은 여자는 젊은 남자를 애인으로 삼아서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기는 어렵겠지. 연상연하 결혼 커플이 늘어난다, 매맞고 사는 남편이 늘어난다 떠들어대도 그것은 10%도 안되는 것일테지. 너무 짧은 바지를 입고 길을 나섰나? 참 나.
시장을 거닌다. 배 부르니까 시장 도는 맛이 좀 준다. 옥수수를 3통에 2천원 주고 사서 베낭에 넣었다. 등이 뜨끈뜨끈하다. 할머니들의 소두방을 구경한다. 두 개를 나란히 놓고 한 쪽 면이 익으면 다른 쪽에 넘긴다. 그래서 속도 빠르게 부쳐낼 수가 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니까 화난듯 말이 없는 할머니가 고개를 흔든다. 손과 전만 찍는다. 후라이팬을 놓고 하는 데도 있고 하나만 놓고 하는데도 있다. 어제부터 값이 올랐는데 500원씩이나 갑자기 올려받을 수 있겠냐는 할머니한테서 봉평농협에서 만든 메밀가루를 샀다. 메밀에 밀가루가 섞여서 바로 전 부치고 수제비 만들 수 있단다. 배추가 싸지면 단맛 든 배추를 절이고 정구지를 사서 전을 부쳐서 주변사람들을 불러서 먹고 마셔야겠다. 시장 가운데 문화해설사인듯한 여자가 서 있는데 아무도 말을 걸지 않더라. 나도 수줍어서 못 묻는다. 문구사에 들어가서 펜을 한 자루 사면서 아우라지 가는 길을 물었다. 정선농협 앞에서 여량 가는 버스를 타랜다.
뒤늦게 정선아라리 공연을 하는 걸 봤다. 장마당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이다. 공연도 거의 마무리 시점이다. 정선같이 살기좋은 곳 놀러들 오시라고 물밑에서도 해당화가 핀다는, 일백오십호 정선읍내 지부장네 며느리를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는 노래 속 보다는 군청이 있는 이 장터 주변 동리의 집 수는 많아 보였다. 북과 장구, 항아리에 엎어놓은 바가지, 상에 막대기 같은 걸로 장단을 맞춘다. 어느 동리에서 효도관광을 왔는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앞에 앉아 있고 타고난 흥이 없어 이장님이 의무감에 나서서 흥을 돋우려는 듯 하는 긴장된 모습이 보는 이를 민망하게 한다. 저 노래 들으러 온 건데 아쉽네.
정선농협 앞에서 여량 가는 버스를 탔다. 아까 문화해설사가 집으로 돌아가는지 같이 타고 있다. 아우라지 역 사무실은 레일바이크 회사의 사무실이 되어 있다. 플랫폼 주변에 코스모스가 피어있고 그 너머는 메밀밭이다. 다리를 건너 강가로 내려갔다. 아우라지는 두 물길이 어우러지는 곳이라 한다. 평창에서 내려오는 물길(하나는 양수, 하나는 음수라 이름 붙였는데 이것들 이름도 잊어버렸다)이 아우라지에서 만나서 영월에서 동강이 되고 더 내려가서 양수리에서 만나 한강이 된다고 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한 목재를 벌채해서 겨울, 봄내 말려서 강변에 내려놓았다가 여름에 물이 불면 뗏목으로 이어서 가지고 내려갔단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렴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는 정선아라리 애정편 노래를 불렀음직한 강가에 선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를 견디던 여자들 중 하나는 '우리 집에 낭군님은 배타고 가셨는데 황새여울 댄꼬까리 부디 잘 다녀오세요' 노래를 하고, 열닷새 물길 뗏목 위에서 노래를 하던 남자들 중에는 나무값 엽전을 짊어지고 오면서 술집갈보 치마밑으로 다 밀어넣는 사람도 있었을 거다.
민물의 비린내가 훅 끼쳐올라온다. 내 몸이 이 민물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반가운 기억들을 불러낸다. 나는 어릴 때 엄마 따라서 골뱅이 잡으러도 가고, 동생들과 친구들과 생라면 뾰샤서 풋복숭아 서리 해가며 입술이 새파래지고 손발이 쪼글쪼글 해지도록 물에서 놀았다. 생라면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엄마가 단속을 두면 몰래 옷 속에 감춰서 갔다. 차 바퀴 속의 시커먼 고무로 만든 주부를 타고 누워서 떠내려 가던 것도 즐거웠는데 우리집에 그런 튜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삭골 쯤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물은 정말로 무서웠다. 잠수를 하면서 눈을 뜰 수 있는 지 눈을 감는 지를 가지고 용기를 자랑하곤 했는데 나는 거의 눈을 뜨지 못했다. 개헤엄만 할 수 있는 나를 누군가 짖꿎은 애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들은 나는 한 번도 오빠라고 부르거나 오빠로 대접하지 않았다. 하늘 아래에서 내 오빠는 고모네 집 사촌오빠 1명 뿐이기 때문이다. - 머리를 눌러서 물을 먹일까봐 나는 설설 기었지만 장난도 오고가는 것이 있어야 재미가 있지 원체 겁 많아서 가에서 살금거리고 있는 애한테 거는 이는 없었다.
저 아래에 한 가족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빠질 염려가 없는 얕은 물에 딸냄이 둘을 풀어놓고 엄마와 아빠는 물가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재잘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물 속에 발목 아래를 담근 채 한참 걸어 올라갔다. 물 밖으로 1사람이 궁둥이 붙일만큼 등을 내민 넙적한 바위에 앉아 양산을 쓴 채로 햇볕을 쬐면서 아레스와 헤파이스투스를 읽는다. 몸으로 살았던, 무사, 춤꾼이었던 열정적인 남자, 그리고 생산을 한 유일한 남신 원형과 그 원형을 품고 사는 남성에 대해 생각한다. 내적 신화, 원형과 실제 생활이 일치될 때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그럼 여자들이 제 타고난 모습대로 살지 못하듯 가부장제가, 가족이, 문화가 박해해서 제 타고난 모습을 숨기고 잘라내며 사는 남자도 불쌍하구나. 물에 잠긴 샌달 신은 내 발 주변으로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간들간들 헤엄을 친다. 핸드폰에 있는 mp3로 개울가 큰 나무의 매미소리 섞인 정선아라리를 듣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나도 물소리와 함께 나즈막히 후렴을 따라 부른다.
나는 지금 어떤 고개를 넘고 있는가?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강물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가지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가지' 노래를 부르던 소녀는 삶의 절반을 산 중년의 초입에 서 있는데 그녀의 물길은 어디쯤을 흐르고 있을까? 그녀의 바다는 어디일까? 세상에 저 혼자서만 미끈하게 흘러가는 강은 단 1개도 없듯이 너도 네 물길을 다른 이들과 포개고 섞으며 넓어지고 깊어지리라. 뗏목을 나르고 여울로 애를 먹이면서 이야기와 노래를 품겠지. 바다로 가는 것이 지루하지 않을 거다. 아우라지로 흘러드는 음수인 골지천에 발 담그고 앉아 《우리 속의 남신들》을 읽고 있는 여름 풍경의 상징을 내 물길은 어떤 아우라지에서 역시 제 길을 흘러온 물길과 만날거라는 기대 또는 복선으로 투사한다. 양수인 송천과 음수인 골지천이 만나 어우러진다는 아우라지, 그럼 내가 만날 것은 양수인가 생각하다 좀 수줍어진다. 지나치게 기동성이 떨어지는 나는 '그 곳에 가고 싶다' '그걸 먹고 싶다' '그것이 알고싶다'와 사람에 대한 관심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건 의존심일 것이다. 나의 bliss는 그 사람일 수도 있고 그 공간, 음식, 노래일수도 있다. 사람이 지나가도 공간과 노래는 나와 인연이 있어 닿았겠지. 그걸 왜 굳이 구분하려고 하지?
인혜와 진웅을 생각한다. 나는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영화 《리빙 라스베가스》와 주제가를 공유하면서 다루고 있는 사랑불능, 성불능의 양극단을 인혜와 세진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 인혜의 너무 많은 성도 세진의 너무 경직된 성도 양 극단이라고 본다. 사랑과 성을 일상 속의 밥이나 물처럼 향유하는 건강한 형태가 아니다. 작가의 정신분석 경험이 녹아있는 세진의 경험을 따라 가는 과정은 어렵지만 유용하고 흥미로왔다. 다 이해하지 못했다. 복습을 다짐한다. 근데 아우라지에 와서 소설을 교본삼아 흉내내는 것은 퍽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쇠꼬쟁이로 배를 때려도 멀쩡하고 맨 주먹으로 돌을 깨는 차력사가 나올 때처럼 '위험할 수 있으니 흉내내지 마세요' 자막이 필요하다. 일단 나는 세진과 다르다. 나는 1년 8개월 때 외가로 보내져 학교 가면서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았고, 부모가 이혼해 초 5부터 하숙을 한 것도 아니었다. 또 나는 인혜와 다르다. 인혜는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라 결혼과 이혼, 여러 관계를 경험하면서 쿨한 사랑, 또는 섹스파트너의 내공을 갖추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소설 속에 산다. 살핌의 내용이 무엇이든 나는 소설에서 삶을 배우려 하고 있고 더불어 이런 식의 읽기를 재미있어한다걸 알게 된다. 인혜와 진웅, 소설가 역시 오래전 사람들의 노래인 정선 아라리를 교재로 나같은 공부를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닐까? 노래와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신기함, 고마움, 존경이 인다. 나는 흘러가는 강물을 본다. 아직 다른 물길과 만나지 못한 강물. 나를 여기로 밀어보내고, <우리 속의 남신들> 아레스 편을 읽게 하는 것은 내게 온 남의 세를 살라는 제안 때문이었지. 아니 그 제안에 마음이 흔들려서였지. 열흘간 두문불출을 해도 해결이 안나서 기차를 타러 간거였지. 눈물 한 방울 아직 아우라지에 가닿지 못한 나의 강물에다 섞어 흘려보낸다. 세를 살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내가 내민 게 마음이 아니었던가요? 지금 나는 화를 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화를 내야하는 상황인데 화를 낼까 말까 생각하고 있군요. 안나는 게 비정상이라고 판단하면서요. 아직 나는 좀 더 혼자 흘러야겠습니다. 당신의 방식은 두 여자를 모두 패배시키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선택한 사람이 아프고 바빠서 당신을 정서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돌보지 못할 때 내게 전화를 걸고, 내게 올 건가요? 노 땡스. 나는 자신을 더 살펴봐야겠어요.
아우라지 역에서 기차를 타고 정선까지 다시 표를 끊어야했는데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말하면 피자 배달원들이 들고 다니는 카드기같은 걸로 마트 영수증처럼 가벼운 것을 끊어준다. 저녁은 열차카페에서 레토르트 인도카레를 먹었다. 여행을 와서 입석표를 산 20대 초반의 남녀들이 열차카페 바닥에 베낭을 세워놓고 다리를 뻗고 쉬고 있었다. 마흔은 두 번째 스무살이라는 책 제목이 있던데...나도 마흔살이 되면 스무살 저 사람들처럼 이국의 어떤 열차에 몸을 태우고 싶다. 진짜 스무살이었을 때는 하지 못했던 것을 하는 좋은 핑게 하나 생겼군. 서울까지 내내 졸면서 돌아왔다. 처음 나를 이 길로 밀어낸 것이 무엇이든 일단 길 위에 서면 애초의 끌림은 백분의 오 정도이고 다른 많은 것이 길과 나를 채운다. 많은 에너지를 준다. 아우라지 강변에 가도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갈 필요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기 왔다. 오길 잘 했다. 이제 읽거나 생각하지 않고 몸으로 그것을 알아갈 것이다. 늦은 출발을 축하한다. 바쁘게 많은 것을 보고 긴 거리를 움직이는 것보다 물에 발을 담근 채 등으로 햇볕을 쬐면서 책을 읽는 식의, '머무는 여행'이라면 내가 좋아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떼거리로 몰려가던 수학여행이나 단체 패키지 여행의 소란스러움과 여행을 동일시하고 있었지. 그런 경험만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여행은 정말 싫다.
3년 전에 써둔 이 여행기를 꺼어 다시 읽어봅니다. 나는 3년이 지난 2012년 벚꽃잎 날리던 봄에 다시 아우라지에 갔습니다. 변경연 연구원 입학여행 버스가 나를 거기로 실어갔거든요. 거기서 삶의 웅덩이를 채우며 흘러 넘치고, 다투지 않으면서 자기 원칙을 지키며 흘러가라는 삶의 터닝포인트를 만드는 원리를 구본형사부님께 들었습니다. 지금 내 물길은 뭔가에 어우러지려 하고 있습니다. 인제 어디로 가려는가? 그 때 나를 길 나서게 했던 책은 나더러 마흔 즈음에는 정신분석을 받아보든 이국의 산천에 나를 놓아두는 여행을 해 보자고 했었습니다. 용기를 못 내던 나는 내게 천만원이 생긴다면 뭘 할래? 질문을 했고 연구원에 지원하든 정신분석을 받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대장들의 보호를 받아가며 꼴찌로 달랑달랑 쫒아가고 있지만 8기 연구원 원정대 안에 있습니다. 지난 10월 오프수업에서, 내면탐험을 계속 하자면 동행자가 필요하니 선생님을 찾아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전작주의 했던 엘리자베쓰퀴블러로스씨와 진시노다볼린씨는 정신과의사였습니다. 이 이들의 책을 읽어대던 마음이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찾아가 만날 수 있는 동행자가 한 분 있어야겠지요. 오늘 나는 아버지의 집을 큰 소리 치며 떠나 독립해 어딘가로 갔는데 거기가 다시 아버지 집이라는 으악하며 일어났습니다. 악몽. 이렇게 저렇게 바다를 향한 나의 물길을 계속 흘러가야겠습니다.
마흔살 여자의 책읽기라는 꼭지를 만들어 써본 것은 이런 식의 여행기 형태로 <천일간의 자기사랑>안에 책읽은 이야기를 써서 넣어보면 어떨까 싶어서입니다. 지난 오프수업 때 이야기했던 동화 형식의 자기 신화를 따라 사는 사람들 이야기는 아직 엄두를 못 내겠어요. 이번 칼럼은 이렇게 냅니다. 감사합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012 | 중이 제 머리 못 깍는다 [6] | 학이시습 | 2012.10.08 | 2648 |
2011 | 아빠는 똥쟁이 | 한젤리타 | 2012.10.16 | 3148 |
2010 | 프로필, 제목, 목차. 꼭지글...10월오프 | 서연 | 2012.10.16 | 3308 |
2009 | 출근하다 말고 산으로 간 남자 [2] | 장재용 | 2012.10.16 | 2607 |
2008 |
프리젠테이션 코칭 ![]() | 샐리올리브 | 2012.10.16 | 2487 |
2007 | 땀의 보고서 - CEO를 괴롭히는 20가지 | 학이시습 | 2012.10.16 | 2423 |
2006 | 착한수학 | 세린 | 2012.10.16 | 2277 |
2005 | 출간 계획서 [1] | ![]() | 2012.10.16 | 2192 |
2004 |
<천일간의 자기사랑> or <나를 찾아온 사람들> ![]() | 콩두 | 2012.10.16 | 2661 |
2003 | 준비된 인간이란? [4] | 학이시습 | 2012.10.21 | 2108 |
2002 | 니체와 살로메의 짧은사랑 [8] | ![]() | 2012.10.21 | 6411 |
2001 | 꿈장수 #1 [4] | 한젤리타 | 2012.10.22 | 3158 |
2000 | 쌀과자#25_네번의 만남 [5] | 서연 | 2012.10.22 | 2334 |
1999 | 고개 단상 [4] | 장재용 | 2012.10.22 | 2240 |
» |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과 정선 아우라지 [4] | 콩두 | 2012.10.22 | 2406 |
1997 |
엇갈린 운명 ![]() | 세린 | 2012.10.22 | 6395 |
1996 | 난 화끈하게 벗고 있나? [18] | 샐리올리브 | 2012.10.22 | 2420 |
1995 | 꿈장수 #2 [4] | 한젤리타 | 2012.10.29 | 2660 |
1994 | 질투는 사랑이 아니다 [5] | ![]() | 2012.10.29 | 6125 |
1993 | 성찰하지 않는 삶은 정말로 살만한 가치가 없는 거 임? [4] [2] | 학이시습 | 2012.10.29 | 27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