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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9일 08시 58분 등록

서양의 지혜 버트란드 러셀  (동서문화사)

A. 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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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행복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 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버트런드 러셀 * 행복의 정복 중에서 *

 

 

 

1. 러셀에 대하여

청소년기의 내적갈등을 거쳐 전통과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는 수학을 공부하고자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했고,

더 넓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당대의 천재들과 더불어 역사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분야의 기념비적 저서인 '수학 원리'(화이트헤드와 공저)와 '수학의 원리'가 완성되기까지

그의 모든 노력은 학문에 바쳐졌다. 그런데 '수학 원리'의 집필에 들어간 1901년,

스승이자 학문 동료인 화이트헤드의 부인이 병고를 치르는 것을 지켜보다 신비한 정신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순간, "발 밑에서 땅이 무너지면서 완전히 다른 영역에 들어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그는 표현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고독하며 지고지순한 사랑만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학문적 분석이 아닌 감정의 채널로 그에게 밀려왔고,

그 몇 분이 지나자 그는 "제국주의자에서 친보어파, 평화주의자, 휴머니스트로"변해 있었다.

 

 

 

이 경험이 그에게 준 의미는 간단치 않았다고 본다.

그것은 '지식의 사랑의 인도하에 천국으로'오르려던 그를 '지상으로 되돌아오게'만든 '참기 힘든 연민'의 뿌리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연민'이란 표현이 그를 고통 받는 대중 위에서 자비를 베풀려는 성인인 양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조숙했던 유년기 이후로 그의 내면을 지배했던 고통과 갈등의 근원을 이해하게 되면 그 역시 고통 받는 한 인간이었으며,

그러한 입장에서 동료 인간들에 대해 느낀 감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조실부모하고 엄격한 조부모 밑에서 성장한 러셀은

인간의 근원적 고독에 일찌감치 눈을 떴고,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어떤 확실성, '

영원한 것eternal thing'에 대한 갈구로 목말라했다. 이러한 내적 갈망이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니며,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격심한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인간들 속에서 스스로를 '외계에서 온 유령' 같은 존재로 느끼게 만들곤 했다.

 

 

 

그가 완고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고 사회주의의 언저리를 맴돌게 된 것도 인간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영원한'가치 (그는 이 세상에서 자연이 가장 여기에 가깝다고 보았다). 초월에 대한 강한 동경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것들이 바로 그가 추구한 '신God'이었다. 따라서 제도화된 종교를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신론자라기보다 불가지론자에 가깝다.

 

 

 

어쨌거나 그의 정신적 고통은 같은 이유로 혹은 여러 다른 이유들로 고통 받는 동료 인간들을 돌아보게 만들었고,

심오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원천이 되었다. 그가 전도유망한 천재적 학자의 길에서 이탈하여

인간사의 진흙탕에서 영원한 보석을 찾으려 애쓰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론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한때 정신적 반려자였던 연인 오톨라인 모렐과의 공통점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녀와 나 둘 다 인습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전통에 따르면 귀족이지만 현재의 환경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잔인한 것을 혐오했고 특권 계급의 오만과 편협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택한 세계에서 약간 이방인 취급을 당한다는 것도 똑같았다."

 

 

정치적으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고수해 온 러셀 가문의 내력을 고려하면 그가 정치를 통해 새로운 이상을 실천하고자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대를 크게 앞서가는 그의 자유주의와 휴머니즘은 번번이 장벽에 부딪혔고,

'잘하는 수학이나 하지 왜 정치판에 끼어드느냐'는 식의 조롱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죽음의 쇼show를 지켜보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고, 세상의슬픔과 고통에서 오는 연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새로운 사랑을 확인했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상심하는 젊은 세대를 생각하면 연민으로 가슴이 저리다.

그것은 내가 속한 세대의 어리석음과 탐욕 때문에 생겨난 상심이다."

그는 학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인류를 위해 새로운 책들을 쓰기로 결심한다.

 

 

2. 인간으로서의 러셀

1) 명문가의 외로운 소년 버티

1872년 5월 18일에 영국의 휘그 귀족의 명망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진보적 정치인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빅토리아 여왕 치하에서 두 차례나 총리를 지낸 러셀 백작 1세였다.

 

러셀이 태어나고 2년 뒤 동생 레이첼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상심이 큰 아버지도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마감한다.

 러셀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보호 아래 자랐다. 할머니는 청교도적 신앙심과 엄격한 도덕관념을 가졌고,

독일어와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이러한 기대에 형은 반항적으로 거부를 했지만, 러셀은 순종적이어서 할머니의 엄격성이 러셀에게 갔고,

결국은 러셀을 수줍고 융통성 없는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11세부터 16세까지 러셀은 가정교사에 의해서 초등교육을 받았는데,

가정교사에게 사적이고 감정적인 애착을 보이면 바로 해고하고 새로 가정교사를 채용하곤 했다.

그렇다 보니 러셀은 나중에 여성에게 많은 여성에게 관심을 보였으며,

사회적인 교제의 즐거움에 관한 유년기 시절의 경험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에 그는 지식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였다. 유클리드 기하학 등과 같이 수학을 좋아했으며,

교제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보다는 수학에는 윤리적인 내용이 없는지에 대해서 수상쩍게 여기는 것에 더 열중했다.

 

러셀의 유년기는 고독하고 조심스럽고 지독하게 깐깐하였고,

 모든 것을 자신의 내면에 간직하면서 깊은 속은 드러내지 않는 외롭고 고독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2) 결혼관계

러셀은 어른이 되면서 이혼과 재혼을 많이 하였고, 여성편력 또한 많이 있었다.

60세가 되던 그 날까지도 젊은 대학생을 세 번째 부인으로 두었으며,

대안학교를 세우면서 두 번째 부인인 도라 블랙이 고용한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지는 등 주변에 있는

여성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고, 사랑에 빠지다가 헤어지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종교적인 영향이나 공부로부터 압박이 가해지지 않은 그런 자유론 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비컨 힐 스쿨이라는 대안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양 부모의 자유연애로 자식들은 부모를 부모로 여기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행복보다는 소외감을 많이 갖게 되었다.

 

러셀의 여인들 : (1) 모렐 여사, 헬렌 더들리, 콘스탄스 몰레슨, (2)도라 블랙, (3)파트리시아 스펜스 (4) 에디스 핀치

 

3) 러셀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들

① 무어

20세기 영미철학의 전개에 가장 중요한 인물의 최선봉에 위치한 무어는 러셀이 대학교 3학년 때 만났다.

러셀의 자서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무어는 잘생기고 호리호리 했으며, 영감에 찬 듯한 눈길과 스피노자 못지않은

열정적인 지성으로 갖추고 있다고 했다. 무어도 맥타가르트의 영향을 받아 헤겔주의자가 되기도 했으나,

둘 간의 대화를 통해 칸트와 헤겔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무어는 러셀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러셀의 철학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② 프레게

러셀이 프레게를 알게 된 계기는 철학 스승인 제임스 워드가 프레게의 개념표기를 러셀에게 소개하게 되면서부터다.

러셀이 프레게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프레게의 수학의 기초에 관해 같은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1901년 화이트헤드와 『수학원리』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잘못 된 점을 어느 곳에서도 확인 할 수 없었으나,

프레게의 개념표기를 보고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음을 확인하면서 프레게를 따랐다.

러셀은 프레게의 추종자라 할 만큼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수학의 기초에 관한 견해,

논리학이 철학의 본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중요성까지 프레게와 같은 입장에 섰다.

 

③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제자이면서 아들처럼 아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 글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비트겐슈타인을 가장 탁월한 제자로 두었으며, 출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러셀의 자서전에 의하면 내가 너무 늙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즉 해결하는 데 신성한 정신과 젊음의 생기를 요구하는 나의 연구가 제기하는 모든 종류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풀 것이라고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러셀의 저서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애매한 글이라며 혹평을 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것이 불명료한 것을 알면서도 현재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을 것 같다는 기대를 건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란 책을 완성하고,

러셀은 그의 입장과는 달랐지만 철학적인 중요성을 인정에 출판에 도움을 주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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