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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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인간의 산
오랜만에 신어 보는 묵직한 등산화가 이리도 좋을 수가 없다. 지난 여름, 까불며 오르다 손가락을 부러뜨린 후 바위를 오르는 일은 언감생심이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사태로 인해 낙심하여 머리를 쥐어 뜯었겠으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종종, 물건을 집어 들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이내 물건을 놓쳐 버린 후에도 더 이상 죄 없는 손가락을 노려보지 않았다. 근 일 년여 간 시대의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좀처럼 내 행동양식은 바뀌지 않았다. 그 아둔함에 답답하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중에도 약간의 변화를 굳이 감지 한다면 모든 일에 판단이 유보되는 이른 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식의 양시론兩是論적 생각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그 하나요, 다른 한편은 ‘아님 말고’ 식의 대책 없는 행동들이 잦아졌다는 것이 나머지 하나다. 이를 곡해하여 삶을 관조하는 부드러운 시선이라거나 사유가 깊어졌다는 말로 미화시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어쨌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손가락을 두고 나는 ‘아님 말고’ 하였다. 그러다 4개월 만에 다시 등산화 끈을 고쳐 매었다. 여름에 산을 간 이후 가을에 다시 올랐다는 말을 이렇게 둘러 하다니 쓸데 없는 말이 많아진 것도 변화라면 변화겠다. 나는 지난 주, 신어산을 올랐다.
바야흐로 이 땅에 가을이 왔다. 이 경남 진주와 같은 햇살을 뚫고 푹신한 산길을 걷는 일은 경북 구미 당기는 일이다. 신이 나에게 이 길을 충남 부여하지 않았겠는가 한다. 꽤나 가파른 길은 이런 말장난이 아니라면 오르기가 힘이 든다. 사나운 경사와 완만한 능선을 오락가락하며 신어산 그녀와의 밀당이 이어진다. 높은 산, 그늘 하나 내어주지 않고 발 디딜 스탠스조차 제공하지 않는 바위산 그네들에 비하면 얼마나 인간적인가. 너도나도 받아주는 밋밋한 둘레길류의 가벼움도 없다. 아폴로적이며 동시에 디오니소스적인 그리스와 같은 그녀다. 그녀가 나를 달아오르게 할 때에는 나는 땀으로 젖는다. 젖은 땀을 식혀줄 적에는 바람의 시녀들이 다녀간다. 그녀를 취하기 전, 나는 젖었다 식었다를 반복한다.
신어산은 김해의 산이다. 지리산에서 시작한 낙남정맥이 경남을 관통하다 낙동정맥과 만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신어산을 솟아 올렸다. 그 곳 정상에서는 넓은 김해 벌판과 부산의 금정을 조망할 수 있다. 시간을 만유인력으로 끌어 당겨 이천 년 전으로 간다. 가야의 수로가 위민의 높은 뜻을 꿈꿀 때 수로는 그녀에 기댔다. 백제와 신라의 사이에서 가냘픈 국가의 숨통을 이어가기 위해 군사를 키우는 대신 선택한 위민의 방식은 불교라는 종교와 예술이라는 높은 문화였다. 후대의 역사는 그 때를 삼국시대라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가야를 그 표피적 국가 체제의 면모만으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금관의 가야는 백범이 그토록 부러워마지 않는 깊고 넒은 문화의 힘이 한반도에서 진공상태를 이루던 엄연한 문화국가였다. 그 중심에 그녀, 신어산이 있었으니 벌써 그 곳에 가야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이천 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정상에 올라 후대 사람이 쌓아 올린 돌탑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고요한 절정의 순간을 나는 만끽한다.
내려오는 길, 그녀와 더 오래하지 못하는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조잘대는 나는 ‘우울한 사람의 유머’처럼 슬프다. 땅 아래 사람들은 지금, 국가의 수장을 뽑느라 정신이 없다.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단지 모두가 우려하는 것은 그 누가 대표가 되더라도 미래를 긍정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람시적 낙관으로 돌파하기엔 이미 현실이 파괴적으로 치달은 다음이다. 어쩌겠는가. 마르크스도 베르그송도 비트겐슈타인도 소크라테스 할배도 그 어떤 인간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래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은 희망으로밖에 살 수 없지 않겠는가. 다만, 붉고 노란 단풍이 땅으로 땅으로 내려와 이 땅의 현실을 보고는 실망하여 다시 돌아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제 다 내려왔다. 다시 인간의 시간에 발을 디딘다. 내 잠시 그녀와 우주적 시간에 놀다 온 것이 아찔한 황홀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행복의 pause, 또 하나 더한다.
너의 글에는 어떤 바위에 앉아 땀이 돋은 몸을 쉬고 있을 때 언듯 불어 주는 바람 같은 시원함과 아득함이 있다. 너의 강점이다.
그러나 부족하다. 바람이 부는 시간이 너무 짧고, 잡념을 다 날리지 못한다. 짧을 글 안에 많은 사고를 이리저리 겹쳐 복잡하게 하지 마라. 배낭 속에 이것저것 쑤셔넣은 듯 하다.
하나의 생각에 대한 긴 바람이 필요하다.
예를들어 신어산 이야기는 지나치게 짧다. 이 이야기가 이 칼럼의 메인이다. 시작하자 마자 끊나고 말았으니 조로다. 길게 풀어라. 조사와 채집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수로에 대해서는 삼국유사를 찾아야 하고 , 신어산 자체에 대해서는 지방의 역사를 찾아 이야기를 채집해야할 지 모른다. 신어산 자락에 대한 깊고 아득하고 흥미로운 숨어있는 이야기들이 술술 흘러 나와 주어야 한다. 그산, 그녀의 숨겨진 깊은 계곡으로 너의 손길이 어루만져 들어가야하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것저것 철학자들의 이름만 나열된 저 문장은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저항을 불러 일으킨다. 다른 사람의 위엄을 빌려올 때는 여러 놈을 불러 들이지 말고 한 놈을 불러 들여 충분히 들어라. 그래야 독자가 따라와 듣는다. 그리고 너의 사유가 더해져 공감되도록 해라. 멜랑꼴리는 있으나 사유가 없으면 노인의 처량함 밖에는 남지 않는 법이다.
- 이야기는 글을 쉽게하고, 재미있게 한다. 산 이야기는 이 산의 이야기를 품도록 해라. 산이 그녀라면 그녀의 이야기가 있어야지.
- 글 한 꼭지에 이것 저것 여러개를 담지마라. 글 한 꼭지에는 대략 한 개의 이야기, 연관된 한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너의 이야기
정도면 좋다.
-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품에 안도록 해라. 그녀의 손길을 잠시 스치고 나서 댑다 도망치며 갖가지 혼자의 생각으로 뒤죽박죽 되지 마라.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의 format은 네게 도움이 될 듯 하다. 산에 대한 '나의 산 답보기' , 여기에 너 만의 산들바람이 불게해라. 너는 유홍준 보다 훌씬 멋진 샌들을 신고 있다. 그 샌들에 날개가 달려 있으니 기쁨을 즐기도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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