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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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 게이트가 열렸다.
김은 패스포드를 확인한다. 만들지 얼마 되지 않은 여권. 처음 세관 도장을 받으면서, 김은 짐짓 태연한 척 했었다. 해외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은 간혹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오감을 곤두세웠다.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그는 한국에서 책을 한 권 탈고하였다. <Never give up>이라는. 어떻게 대학 입시에 성공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영웅전기적 책이다. 김은 학벌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돈이 더 필요했다. 책은 잘 팔렸다. 김이 과감히 자신의 비루한 환경을 노출시켜준 탓이다. "나도 했으니, 너도 할 수 있어."라는! 그 불가피한 상술에 김은 수치심을 느꼈으나 성숙된 인격으로 승화된 양 연기했다. 열등감을 위로받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결코 김은 책에 쓴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천재였다. 그의 행보를 설명해 줄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의 행운은 그 뿐이었다. 김의 어머니는 행상을 하다가 최근에 식당일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늘 울었는데 이유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에게 어머니의 눈물이 무기력의 면죄부처럼 느껴졌다. 그는 점차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양을 사이에 두고 이탈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김은 진심으로 기뻤다.
김은 모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학벌드 대학을 선택한 것은 단지 학벌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대학에 있는 짐머만 교수에게 물리학을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김은 국내 유수의 의과대학에도 동시에 합격한 상태였기 때문에 순수과학을 향한 그의 열정은 매스컴에 의해 요란하게 추앙되었다. 의학에는 천재가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몽매한 인류를 대신하여 고도의 학문을 해야 한다.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상금이 십만달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종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가겠습니까? 단, 탈락하면 모든 상금은 백지화 됩니다 - 김은 도전!을 외쳤다. 멈춰 서서는 증명할 수 없다. 내가 남은 자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남다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남다른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 경쟁에는 자신이 있었다. 김은 누구라도 이길 수 있고 이겨야 했다. 특히 김이 이겨야 하는 블랙리스트들. 학벌드 대학에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 고서연은 김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서연은 예전 김과 교제했던 사이로, 김은 그녀를 위해 최고가의 명품백을 사준 적이 있다. 그녀는 그 백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며 단 한 번도 들고 다닌 적이 없었다[나쁜 년!]. 김은 서연에게 고맙다고 했다. 인사차 일부러 기대어린 목소리를 가장하여 물어보니 여자는 학벌드에 불합격 하였으며 대신 의과대학에 진학하기로 하였다고 겸연쩍어 했다. 그래서 김은 누구에게 보란 듯이 학벌드 진학을 확정지었던 것이다. 김은 인터뷰 말미에 말하였다. “제 꿈이요? 제 꿈은 인생을 살면서 단 하나의 수학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아마 인생 최고의 희열이 되겠죠.”
학벌드 대학에서의 첫날, 김은 방을 배정받고 단출한 짐을 풀었다. 여기가 바로 학벌드다. 김은 천재에게 예비된 운명 앞에 애써 태연했다. 그는 짐머만 교수의 강의를 신청하는 데 열을 올렸고 마침내 성공하였다. 김은 자신이 앉은 강의실에 짐머만의 뚜벅대는 구두 소리가 울리자 거만하게 내리깔았던 눈을 치켜떴다. 그의 걸음걸이에 강당의 먼지가 푹푹 솟아나는 것을 진동으로 느끼며 김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김은 짐머만과 자신의 나이 차이를 가늠해보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하루에 몇 초씩 단축하면 되지? 팔짱을 낀 채로. 김은 강의가 들을 만 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김은 짐머만 교수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에게 인상을 남기기 위해 대학에 도착하자 마자 교수 연구동을 찾아갔었다. 천운이었는지, 훗날 위인전기를 쓰게 된다면 꼭 삽입될만한 일화가 생겼다. 짐머만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것이다. 김은 자신의 열성적인 팬심을 숨긴 채 짐머만에게 아는 체 할 수 있었다. "이번에 짐머만 교수님의 수업을 듣게 된 신입생 김입니다." 짐머만은 우호적으로 그의 악수를 받았다. "김이라… 한국 출신인가보군. 참 한국에는 김이 많아. 축하하네." 김은 교수의 악력에 감동하며 그의 바쁜 뒷모습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이제 곧 당신은 나를 흠모하게 될거야. 김은 멀어지는 영상을 향해 주문을 걸어두었다.
첫 강의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개론 강의와 고작 열 문제를 풀어오라는 과제가 주어졌을 뿐이다. 다른 교양 강의들은 산더미 같은 독서량을 배정해 주었다. 책들을 이리저리 옮겨 나르면서 김은 학벌드의 동기들과 안면을 텄다. 챙은 중국계로 국제 경시대회에서 만난 적이 있다. 대니얼은 기부금 입학을 한 친구로 아버지는 물류유통업계의 갑부다. 오다는 일본계 바이올리스트로 학벌드에서 교양으로 물리학 학사를 딸 생각이다. 김은 오다와 룸메이트가 되었으나 오다는 바이올린 연습에 더욱 취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김은 챙과 함께 그토록 선망하던 학벌드의 도서관에서 끄적거리며 문제를 풀었다. 10문제 중 9문제를 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10번째 문제는 난이도가 있었다. 김은 대수롭지 않게 접근했다가 문제의 이해가 어렵게 되자 긴장하여 몇 시간을 매달렸다. 그러나 다른 수업의 과제를 고려하면 마냥 매달릴 수 없었다. 김은 새벽 4시의 시침을 확인하곤 마침내 문제에서 손을 놓았다. 아무래도 문제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 같았다. 짐머만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김은 문제의 오류를 증명하기 위한 몇 번의 시도만에 그럴싸한 답안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답변에 놀라워할 짐머만의 얼굴을 생각하며 기대감을 안고 수업에 들어갔다.
벌써 익숙해진 강의실 안으로 짐머만이 나타났다. 그는 첫 수업 때의 연극적인 우호성을 이미 포기한 듯 표정이 없었다. 꽤나 사무적인 표정이 되어 겨우 미소를 입 끝에 유지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학생들. 알다시피 우리 수업은 지나치게 짧아요. 보다 심도 있는 수업을 위해 1번부터 9번까지의 답은 강의 홈페이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10번 푼 학생 있나요? ]
[…… ]
[그래, 반 정도가 푼 것 같군. 에이브러험. 나와서 풀어보지. ]
호명된 학생에게 칠판 앞으로 나와달라는 교수의 말에 강의실에는 웃음이 지나갔다. "학생들, 미안합니다. 나는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이 편이 훨씬 아카데믹하고 좋지 않아요? 수식을 음미하면서 자…"
에이브러험은 천천히 칠판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수식 몇 줄을 써내었다. 김은 칠판을 바라보면서 10번 문제가 틀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증명은 애당초 틀린 것이다. 내가 너무 긴장했었나 보군. 김은 자신이 지나치게 앞쪽 줄에 앉은 것을 후회하였다.
[좋아. 잘 했어요. 그러나 혹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학생 있을까? 오, 거기. 마르타? 마르타의 수식과 한 번 비교해보지. ]
그렇게 짐머만은 오로지 10번 문제에 관한 토의로 한 시간의 강의를 이끌어갔다. 그 동안 김은 노트에 짙은 필기를 해나갔다. 꾹꾹… 펜의 짓눌려진 붉은 색 때문에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일까? 김은 입술을 깨물며 씁쓸히 웃었다.
그날 이후 김은 도서관에서 누구보다 늦게까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학벌드의 압박감이겠지. 첫 학기가 중요하다. 모든 서열이 가늠될 것이므로. 이미 김은 발표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얻지 못했다. 짐머만이 자신을 흘끗 쳐다보았다. 제기랄! 분명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 호기로운 동양인 학생을 알아보겠지. 그런데 나는 아무 발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수줍음을 가정한 천재인 양! 그건 불가능하겠지 왜냐하면, 나는 첫날 그를 찾아갈 정도로 당돌한 학생이었으니까… 김은 정신적 피로를 느꼈으나 스트레스는 그를 영원한 각성으로 내몰았다. 그 순간, 도서관 복도 끝에서부터 탕, 탕,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깔린 붉은 융단 위로 농구공? 누군가가 도서관 중앙 복도에서 드리블을 하고 있다. 책에 고개를 묻고 있던 학생들은 그가 몇 번 튕기는 농구공 소리에 저러다 말겠지 하는 곁눈질을 보내곤 다시 책으로 고개를 묻었다. 도서관의 샤킬 오닐이 중얼거렸다. 바보들… 저능들… 얼간이들… 남자는 호리한 체격의 창백한, 그리고 흑발이었다. 동양인은 아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공부를 방해하는 이 얼빠진 남자의 행동에 서서히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조용히 해야 한다는 도서관의 마법에 걸려버린 터라 어느 누구도 제지할 생각을 않는다. 남자가 홀을 나가자 학생들은 다같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뭐야 저 새끼. 돌았네 돌았어. 학벌드에 저런 인간들이 꽤 많다지? 불쌍하군… 웃긴 자식.
[아까, 그 남자. 학생일까? ]
[누구? 그 농구? ]
[응. 아이디 카드가 있는 걸 보면... ]
[그렇겠지. 이 경쟁률 높은 대학에 그런 미친놈도 다닌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알면 기절초풍할 노릇이지.]
김은 챙과 함께 새벽녘의 커피 브레이크를 위해 카페테리아로 나왔다. 챙은 함께 신입생으로 입학한 학생 치고 소문에 빨랐다. 어디 식사가 맛있는지, 어떤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교수별로 어떤 타입의 답안에 점수를 후하게 주는지에 대한 정보들을 큰 거래 없이도 잘 전해주었다. 그러나 농구공의 남자에 관해서는 별 다른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없었다.
김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초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이 밤 늦게 과제를 마치고 대학 투어를 할 겸 여학생 기숙사 근처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이 것이 그의 핑계다). 김은 순간 기숙사의 대문이 벌컥 열리고 거기서 한 남자가 나와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길을 걷는 둥 마는 둥 하며 겉옷들을 주섬 주섬 입고 있었는데 마침 김과 눈이 딱 마주치가 꼬나물고 있던 말린 잎담배를 뱉으며 나지막히 욕지꺼리를 해댔다. "뭘 꼬나봐?" 그의 목소리를 이상하게 으르렁거리는 듯 했으나 미친 사람의 것 같지는 않았다. 기숙사의 열린 창문으로 한 여자가 구두를 내던졌다. 거기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남자는 군말 없이 신발을 챙겨 신고는 여자에게 손키스를 날렸다. 쾅 - 닫히는 창문 소리에 움찔 놀라는가 싶더니 남자는 어느 새 휘파람을 불며 건물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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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제, 앞쪽 플롯은 짜였습니다. 억지스러웠던 전개가 많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퇴근이 정말 늦고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니다.ㅜㅜ 앞으로 두달은 더 힘들 예정이라 소설이 그렇게 좍좍 진도가 나가지는 못할 것 같아요. 양해 부탁 드립니다.
소설의 표현은 좀 더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은 플롯 나열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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