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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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김의 기우였다.
1학기 성적으로 김은 전과목에서 올A를 받았다. 결국 이럴 거면서 괜히 쫄았었군. 김은 시험 성적을 확인하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곤 그 길로 짐머만 교수의 교수실을 찾아갔다. 김은 잘 알고 있었다. 학문의 세계는 성적만으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교수에게 얼굴 도장을 열심히 찍어두는 것은 대기표를 먼저 뽑는 것만큼이나 유리한 행위이다. 교수실의 문이 열리고 짐머만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김에게 기꺼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는 이미 김의 시험지를 채점하면서 그의 우수함을 알아본 터이다. 이제 김과 어떤 대화를 하게 될 것인지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김. 이번 시험을 아주 훌륭히 치뤄내었더군. 거의 모범답안에 가까웠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나의 랩에 연구원으로 들어오는 것은 시기상조인 것 같군. 이제 겨우 한 학기 수업을 마쳤을 뿐 아닌가?"
"그러나 교수님, 저는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바로 익혀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하하, 김. 자신감이 대단하군."
짐머만은 맞은 편 의자에 앉은 김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그레 웃었다. 수업 초반의 굳은 표정과는 상당히 다르다. 우수하고 정열적인 학생을 대하는 애정? 김은 불안하게 짐머만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김, 무엇보다도 기본이 중요하네. 펀더멘탈… 펀더멘탈… 펀더멘탈… 물리학과 같은 엄정한 학문일수록 기본 없이는 창발성이 피어나지 않지."
짐머만은 한숨을 얕게 쉬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그 나이 때의 야망가들을 많이 다루어 보았겠지. 김은 실망하였으나 짐머만의 진심어린 충고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래… 학년이 바뀌게 되면 연구원이 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네."
"그럼, 기본만큼 중요한 것이 없지. 짐머만 교수는 당연한 말을 한 거야."
오다는 김의 오른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김은 짐머만의 두드림보다 오다의 것에서 더 큰 위안을 얻는 것 같았다. 1학기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함께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고 여름의 캠퍼스에는 신록이 한창이었다.
"내가 세계적 바이올리스트가 된 것도 결국 기본이 확실하기 때문이었지. 기본기 없이 덤벼든 기교는 어느 순간 무너지게 되어 있어."
"오다, 정말 그런 이유겠지? 짐머만 교수가 나에게 좀 더 기다리라고 한건…"
"그럼! 당연하지! 너만큼 연구원으로 적합한 사람은 없다구!"
오다는 사람 좋게 웃었다. 유난히 하얀 이가 고르게 빛났다.
"재능과 노력이 합쳐지면 그야말로 천하 무적이 되는 거지. 음악의 세계를 봐도 그래. 프로 음악가들은 모두 하나같이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 할애하지만 최고의 바이올리스트가 되는 것은 극소수라구."
"그래… 누구나 하이페츠가 될 순 없겠지."
"물론 하이페츠의 연습량이 독보적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는 어릴 때 소설책을 보면서도 바이올린을 연주해야 했대."
오다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순식간에 허공의 책을 넘기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웃겨서 나는 그의 어깨를 치며 웃었다. "그렇게 살면 정말 죽을 맛이긴 하겠다."
"흠… 그래.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 격이 달라지니까. 오케스트라에는 수많은 바이올리스트들이 있지. 특히 훌륭한 오케스트라에서는! 얼마나 쟁쟁한 실력들이겠어. 그러나 그들은 결코 솔리스트는 아니야. 마치 일벌과 여왕벌처럼. 먹고 자란 것이 꿀이냐 로얄젤리냐에 따라 다르듯이 여왕벌로 태어난 벌은, 로얄젤리를 먹어야 하지."
우리는 본관으로 가는 대리석 계단 앞까지 걸어왔다. 마침 계단 앞 광장에는 한 학생이 바이올린 케이스를 앞에 둔 채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저글링 공연이나 판토마임 등을 선보이며 용돈벌이를 하는 특이한 학생들이 많았다. 이들을 구경하는 동안, 물리학과 학생 둘은 타대생들의 낭만적이고도 꽤나 이질적인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아마추어 바이올리스트는 곡 하나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에 보답하는 동안 김과 함께 서있는 오다를 발견하곤 겸연쩍게 웃었다. 그리곤 사람들에게 오다의 존재를 환기시키곤 그에게 바이올린 한 곡조를 부탁하였다. 오다는 곤란한 듯 웃었지만 결국 그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그의 과르네리 대신 받아든 평범한 바이올린으로 오다는 바흐의 샤콘느를 훌륭히 연주하였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몰려들어 이 세계적 바이올리스트의 연주를 듣기 시작하였다. 13분 여의 연주가 끝나자 광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가 이어졌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환호 속에서 오다는 카네기홀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정중하고 매너 있게 인사하였다. 그리고 약간 체념한 듯한 미소의 바이올린 주인에게 악기를 돌려주었다.
"참으로 멋진 음악이군."
누군가가 외쳤다. 계단 끝을 마감하는 기둥 위에 누워있던 한 사내는 이와 같이 말하곤 상당한 높이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도서관에서 예의 그 농구공을 튕기던 검은 머리였다. "훌륭했어. 덕분에 음악 감상 잘했다."
"고맙다."
오다는 비아냥이 섞인 듯한 남자의 말에 약간 얼굴이 굳어 예의상 대꾸하였다.
"아니 너 말고, 바흐 말이야. 정말 대단하지 않아? 그런 멋진 곡을 작곡하다니! ...신입생인가?"
"...오다 신이치로다."
"신입생이군. 반갑다."
"… …"
오다는 남자가 내미는 손을 멀거머니 바라만 보다가 마지못해 잡고 금새 던지듯이 놓았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는 듯이 구는 이 남자가 음악에 대해서도 알 턱이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 넌 이름이 뭐고 무슨 과 학생이니?"
남자는 왼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입에 대고 깊게 빨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꿰뚫듯이 오다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곤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픽 웃었다.
"진정해 친구. 그저 농담한 것뿐이니까. 연주도 훌륭했어."
"… …"
"다만 비브라토는 좀 보완할 필요가 있겠더군. 너무 변화가 없고 감정선이 메말랐어…"
"네가 제대로 비평할 수준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은데!!??"
"나는 그저 이 완벽한 곡을 훌륭히 소화한 연주를 듣고 싶을 뿐이야."
"네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미안하군. 네 것도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뭐 하긴… 연주자가 뭐가 중요하겠어. 결국 연주가들은 작곡가들의 곡을 전하는 전달자에 불과하지."
"음악에 대한 왜곡된 생각 중 이처럼 끔찍한 건 처음이네. 넌 천재적 연주를 분간할 귀가 없는 것 같군."
"진정해. 난 팩트를 말하는 것뿐이니까. 넌 결코 하이페츠나 기돈 크레머는 될 수 없어. 게다가 연주에 천재가 왜 필요하지? 그저 수준에 도달하기만 하면 그 이상은 선호의 문제일 뿐이야. 너는 다른 연주가로 대체되겠지만 바흐는 영원하지."
"… …"
"들어봐, 이 연주는 돌아온 탕아의 참회하는 느낌이 중요한데 넌… 너 아직 총각도 못땠지?"
오다는 남자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김은 그만하라고 외치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곤 오다에게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눈빛을 보내곤 그의 손을 끌었다. 그러나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거리며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연주하다간 네 이름은 곧 사라지게 될거야. 비브라토를 좀 더 연구하라구…"
기숙사로 돌아와 김은 오다를 달래려 노력하였다. 얼굴에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확실히 격앙되어 있었다. '그런 미친 작자에게 마음 쓸 필요는 없어.' 김의 말에 오다는 더욱 얼굴을 늘어뜨렸다. 그의 이상한 표정에 김은 조금 두려움을 느꼈다. 전에 없이 어두운 어조로 오다가 말하였다.
"그 자식이 내 비브라토를 혹평했어."
"…그저 아는 체 지껄인 것 뿐이야."
"…그리고 감정선이 메말랐다고 했지."
"... 오다…"
'…내가… 내가… 늘 지적받는 부분이야.' 오다는 이렇게 말하곤 머리를 감싸안았다. 김은 오다의 불운에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히 내뱉은 미치광이의 말이 오다의 콤플렉스를 정곡으로 찌른 것이다. 가여운 바이올리스트는 폐부를 찔린 듯 잔뜩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김은 오다에게도 여느 음악가들의 민감함이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짜증이 일었다. 설마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이 바이올리스트를 어르고 달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오다! 그저 미친 놈일 뿐이라구! 네가 그런 머저리 녀석의 열등감에 쩐 발언에 신경을 쓰는 게 난 이해가 안되는군?"
"… …"
"그저, 천재를 질투하는 멍청이일 뿐이야."
"천재?"
김은 오다가 "천재"라는 말에 물음표를 달고 되물어오자,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오다도 자신이 천재임을 확신시켜주기를 바라는 거지. 이런 류의 사람들은 뻔하다. 끊임없이 남들로부터 확인 받고 싶어하는 유아적 어리광.
"그래… 우리 같은 천재들 말이야!"
김은 장난스럽게 오다의 어깨를 한쪽 팔로 와락 감쌌다. 그리곤 오다의 머리를 감싼 팔에 달린 손으로 경쾌하게 흩어놓았다. 그러니, 이제 우울함은 집어치우라구.
"하… 천재라구. 김, 꿈 깨."
"… …"
"솔직히 말해줄까? 네가 천재라는 말을 남발할 때마다 솔직히 난 역겹다구."
"오다…??"
"그 새끼가 미치광이라고 했지? 그래서 그의 평가를 들을 가치도 없단 말이지? 그렇다면 넌, 넌 내 음악을 알기나 알아? 차라리 음악면에서 넌 그 미친 자식보다 하수라고 할 수 있지."
"오다…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자구."
김은 이제 조금 질린 채 룸메이트의 어깨에서 손을 툭 떨어뜨리곤 고개를 돌렸다. "그래 음악은 내가 좀 문외한이긴 하지."
"하, 그럼 네가 물리학 천재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오다, 입조심해. 너 지금 제 정신이 아니군."
"하하, 네가 나를 달래려 드는 그 어설픈 행위가 가소로워서 그래. 뭐? 짐머만 교수가 널 연구원으로 택할 거라고? 웃기지 마. 이 자식아!"
"흥! 그래도 취미로 물리학 학사를 따려는 너 같은 특례생보다는 가능성이 있겠지?"
"이미 짐머만은 연구원을 뽑았다구. 에이브러햄이라고… 너만 빼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야."
"…!!!!!!"
'그래, 이제 짐머만 교수도 미치광이일 뿐이라고 우길텐가? 네 맘대로 해보라구…' 오다는 여기까지 말해놓고는 김의 얼어버린 표정을 곁눈질로 알아버렸다. 뒤늦게 후회되었지만, 결국 내뱉을 말이었고 알게 될 사실이었다. 오다는 게워낸 감정의 결과물을 내버려 둔 채 기숙사 방을 나가버렸다. 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인지하지 못하였다. 그저 멍한 채 납덩이 같은 진공 속으로 빠져든 듯했다. 신경계가 마비되어가는 와중에 오직 두 눈알만이 빠질 것 같았다. 충격... 배신... 라이어... 김은 볼을 타고 내리는 것이 자신의 눈물인 것을 겨우 인지한 채 사포 같은 손길로 이를 훔치고 다시 그 망할 교수실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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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는 짜여져 있으나 생각보다 많이 담지는 못하네요. 다음부터는 좀더 많이 써볼게요.^^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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