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샤프란 블루
차이에비에서 게임에 이기다
지독한 눈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흰색이다. 모스크의 뾰족한 첨탑만이 하늘을 향해 그 모습을 드러낼 뿐,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마을은 눈에 쌓인 채 고요와 적요에 휩싸여 있다. 몇 날 며칠을 두고 퍼부었을 눈이다. 앙카라에서 출발하여 세 시간 넘게 달려왔건만 보이는 것은 눈쌓인 풍광이다. 생각지도 않은 뜻밖의 아름다운 풍경에 혼자서 탄성을 내질렀다.
버스는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휴게소 안에는 난로가 몇 개있건만 추위를 녹이지 못해 냉기가 감돌았다. 휴게소에는 몇몇 사람만이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음식을 먹고 있다. 왠지 그들의 얼굴이 우울해보였고, 그들의 등이 시려 보였다. 마른 꽃처럼 윤기 없는 내 얼굴도 우울해 보였을 것이다. 곽재구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퍼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나는 바게트샌드위치와 차이 한잔을 들고 한 쪽 구석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바게트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는 순간 후회했다. 이 추위 속에서 질긴 빵을 씹는다는 것이 질긴 생을 씹는 것처럼 슬퍼졌고, 삼킨다는 그 행위가 귀찮아졌다. 빵을 내려놓고 차이를 마셨다.
남자 차장은 승객들의 숫자를 확인하고 버스를 출발시켰다. 버스는 눈 속을 뚫고 달렸다. 시외버스터미널인 카라뷕에 내렸다. 여기에서 다시 코란쿄이로 가는 돌무시를 타야 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어떤 남자가 ‘코란쿄이로 가느냐’고 묻더니 저쪽에 돌무시가 있다고 했다. 겨울의 짧은 해는 벌써 꼬리를 감추고 있는데, 얼마나 더 가야 돌무시가 있는지 버럭 겁이 났다. 사람들을 따라 2, 3분을 걸었나 정차된 돌무시가 보였다. 터키는 버스노선이 잘 되어 있어 배낭여행하기에 정말 좋은 나라이다.
오렌지빛 가로등불이 켜진 도로를 돌무시는 달렸다. 다행히 돌무시 정류장이 번화한 시장에 위치하고 있어 두려움과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주었다. 낮이라면 코란쿄이에서 다시 돌무시를 타고 샤프란블루로 들어가겠는데, 코란쿄이에도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가 많다고 하니 오늘밤은 여기에서 묵기로 했다. 숙소를 어디로 잡을까 고심하다가 정류장 바로 앞에 위치한 호텔로 들어갔다. 겨울이라 손님이 없어서인지 호텔데스크가 비어있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른 숙소를 찾아볼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다. 이발소에 들어가 호텔이 영업을 하는지 물었다. 분홍빛 스웨터를 입은 잘 생긴 청년이 친절하게도 앉기를 권하면서 아마도 호텔담당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다. 얼마나 고마운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그는 차이를 한 잔 내놓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작은 사진첩을 한 권 가지고 와서 보여준다. 영화배우 빰칠 만큼 잘 생긴 청년은 다양한 인종의 여자들과 찍은 사진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는 한국아가씨와 찍은 사진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주었다’고 한 마디 덧붙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은 내가 보아도 작은 마을에 파묻혀 있기엔 아까운 인물이다. 그는 내 목에 매달린 카메라를 자꾸만 본다. 아, 이럴 때 렌즈를 들이대지 않으면 큰 실례이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자 그는 자세를 가다듬어 모델처럼 포즈를 취한다. 그는 아마도 한때 영화배우나 모델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스러진 꿈, 포기한 꿈에 대해 잠시 슬퍼진다.
더 늦어지기 전에 숙소를 잡아야 하기에 호텔로 올라갔더니 직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아침식사주고 이틀 밤 자는데 50리라를 지불하기로 했다. 이만한 호텔에 50리라면 아주 싸게 잘 잡았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배낭을 던져놓고 시장구경을 나섰다.
불 켜진 시장은 이제 막 문을 닫을 참이었다. 상인들은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과일가게도 있고 곡물가게도 있고 생선가게는 몇 개나 눈에 띄었다. 미처 다 팔지 못한 생선가게 주인은 손님을 부르고 있다.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커다란 생선을 가리키면서 사라고 한다. 주로 육식을 하는 그네들인데 생선을 먹는다는 것이 놀랍다. 터키음식은 세계 3대 음식에 들어갈 만큼 정평이 나 있는 만큼 생선 요리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겠지.
마을마다 골목마다 자리 잡고 있는 차이에비로 들어갔다. 역시 남자들과 담배연기로 가득했다. 일과를 마친 그들은 느긋한 얼굴로 카드놀이, 터키장기인 타블렛 을 두고 있다.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이 멋져 보여 사진을 찍었다. 아 여기서도 순식간에 나는 인기녀가 되어 사진찍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한 노인이 게임에 관심 있느냐고 물었다. 관심 있다고 하니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자리에 앉아 그들이 하는 게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드디어 지는 사람이 차이 값을 내기로 하고 할아버지와 결전에 들어갔다. 주위 사람들이 우리 테이블을 에워싸고 지켜보았다. 5게임 중 3게임만 이기면 된다. 첫 게임에서 내가 졌고, 두 번째 게임에서 할아버지가 졌다. 오락이긴 하지만 할아버지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어쩌다 내가 삼승을 하여 이겨버렸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에서 나를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본다. 나도 내가 어떻게 해서 이겼는지 모르지만 차이를 마셨다. 할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헤어지는데 나에게 담배를 선물로 주었다. 터키에서는 여자에게 담배를 권하거나 선물로 주는 것이 당연하며 일종의 예의이다. 그래도 좀 뜨악하다.
눈 내린 풍광을 두고 울고 싶어라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주변을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더니 천지가 눈으로 덮였다.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은 신비롭고도 아름다웠다. 눈을 치우고 들어오는 호텔 종업원이 나를 보더니 “이렇게 눈이 오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인데 넌 행운이다”이런 인사를 건넸다. 하늘이 나에게 내린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돌무시로 5분정도 걸린다는 차르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호텔주변을 벗어나니 더욱 아름다운 설경이 펼쳐졌다. 20센티미터는 족히 왔을 것 같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조심조심 걸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이런 축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두고 기쁘기도 하지만 울고도 싶었다.
저 멀리 보이는 너른 들판을 보아도 눈이요, 가지마다 눈꽃을 달고 있는 나무들, 천지간에 눈 밖에 없는 풍광이다. 하지만 두텁고도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하늘은 좀더 눈을 뿌릴 기세이다. 짙은 회색하늘이 천지간의 은빛을 누르고 있다. 내 마음 속의 기쁨과 우울함이 교차되는 것이 그 연유인 것 같다. 연암이 툭 터진 요동벌을 마주하고서 울고 싶어 한 그 심정을 알 것도 같다.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칠정(七情) 가운데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만 알았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르고 있다네. 까짓것 기쁘면 울 수 있고, 까짓것 화가 나면 울 수 있고, 까짓것 즐거우면 울 수 있고, 까짓것 사랑하면 울 수 있고, 까짓것 미우면 울 수 있고, 까짓것하고 싶으면 울 수 있으니, 맺힌 감정을 한 번 활짝 푸는 데는 소리쳐 우는 것처럼 더 빠른 방법이 없네.’라고 말한 연암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의 감정은 일곱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기쁨ㆍ분노ㆍ슬픔ㆍ즐거움ㆍ사랑ㆍ미움ㆍ두려움 등이다. 이 일곱 가지 감정 중 ‘꼭 슬플 때만 울 것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울어라’는 것이다. 마음을 치유하는데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다.
눈을 몰고 온 아침의 찬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걷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한참을 가니 돌무시 한 대가 길에 멈추어서 있다. 마을로 좀더 걸어 들어가니 출근길에 나선 처자와 아낙들이 보였다. 아마 돌무시를 기다리다 포기하고 눈길을 걸어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겹겹이 첩첩이 눈이 와도 살아야겠기에 눈길을 뚫고 출근해야 하고, 학교에 가야 한다. 이것이 축복 속의 슬픔인가?
찬바람에 온 몸이 점점 굳어가고 얼굴 근육은 눈보라에 얼어붙은 지 오래다. 사람들에게 차르쉬까지 얼마나 더 가야하느냐고 물었다. 이런 날씨에 걸어가기엔 무리라면서 고개를 흔든다. 갔던 길을 되돌아서 걸었다. 그래도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긴 마찬가지이다.
호텔에 들어서니 냉기와 배고픔이 갈기갈기 달려들어 나를 무너뜨릴 기세다. 간신히 식당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우선 커다란 잔으로 뜨거운 차이를 연거푸 마셨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탁은 풍성하였다. 터키인들의 주식인 바게트가 수북이 쌓여있다. 나는 바게트 대신에 검은 깨가 뿌려진 시미트를 먹었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올리브장아찌를 좋아하게 되었다. 올리브장아찌와 치즈와 양고기미트볼을 빵 위에 올려 먹으면 서로 맛이 어우러져서 독특한 맛을 낸다. 아 이제 웬만큼 에너지 충전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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