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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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만보
부서지는 늦가을 햇살에 몸이 기뻤다. 아주 오랜만에 영남알프스 자락에 잠시 기댔다. 산이 계절을 바꿔 입는 모습은 언제나 경이롭다. 산허리까지 위로 반은 맨몸이고 아래 반은 가을이다. 맑디 맑아 속속들이 보이는 계곡물과 낙엽 주단을 깔아놓은 길들은 필사의 이 몸에 불멸하고픈 의지를 덧씌운다. 내 이런 것들을 보면 오래, 아주 오랫동안 살고 싶어진다. 그네들과 같이 흐르고 그들과 피고 짐을 영원히 같이 해야 할 것만 같다. 어쨌든 지난 한 주, 연암이 흐트려 놓은 내 정신을 가을과 산과 나무가 갈무리하였다.
사무실에 있을 때 바쁘지 않으면 불안하다. 녹 받아가며 일하는 자의 어찌할 수 없는 강박이다. 바빠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인간의 삶은 언제부터 바빠지기 시작했을까. 수천 년 제 속도대로 살아가던 인간은 언제부터 그 속도를 배반하기 시작했을까. 몸과 감정을 무시로 감가상각시키는 것이 바쁜 것인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약속들을 벌려놓은 것이 바쁜 것인지, 몸은 그대로지만 머리 속 난삽한 생각들이 많아 바쁘다는 것인지 도무지 바쁘다는 말의 진의를 알 수가 없다. 토요일 오후 3시, 바쁘다는 계통 없는 개념에 매여 칙칙한 사무실 모니터를 노려보며 쓸데없는 생각들이 쌓여간다. 내년도 경영계획의 최종 보고를 앞두고 주말 없는 사무실을 간도 크게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영남알프스로 악셀을 밟는다. 산으로 가는 차가 부르릉하고 기적을 울릴 때 이 자유의 감정은 맨몸을 하고 팔을 벌리며 아무도 없는 높은 산 능선에서 낙엽 밟는 순간과 맞먹는다.
아직 돌도 되지 않은 딸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야영지에 텐트를 친다.
'다섯 살 네 오빠는 6개월을 갓 넘기고 천 미터 고지에 올랐으니 너 또한 첫 야영을 무사히 잘 넘기리라 믿는다. 매정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가족 통과 의례니 어쩌겠니, 나쁜 아빠 제대로 만났다 생각하고 그럭저럭 넘겨 보아라.'
바램이 맞춤하였는지 곡절 끝에 야영은 즐겁고 무사히 마쳤다. 나는 오랜만에 몸이 무지하게 기뻐 별을 보며 비박하려 했다가 이내 그 객기를 참았다. 아침에 일어나 텐트 안에 귤이 얼어있는 것을 보고 비박을 참은 일은 참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서른 중반에도 철이 들지 않는다.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는 이 근거 없는 야생 DNA를 이제는 경계한다.
집에 오는 길에 석남사에 들렀다. 자그마한 절 툇마루에 아주 따뜻한 가을 햇살 받으며 한참을 앉아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소음들이 적막해 진다. 눈을 뜨면 주위의 소리는 커지고 다시 감으면 적막하다. 내 살아있음이 새삼 기적 같다. 편안히 비추는 햇살과 사람들의 소음, 풍경 소리, 절 마당에 신발 끄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 먼지에서 시작한 우주가 지금 이 소리와 풍광들을 목도하고 있으니 기적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조금 오버 같기도 하다. 절간에 오니 지난 주 연암의 한 말이 생각나 존재가 기적이 되었다. 좀 편히 쉬어보려 온 가을 산에도 열하일기가 따라 다닌다. 이해하시라, 연구원 공부가 그리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연암은 굉장했다. 자신이 말하는 먼지론을 과학적 기반 없이 어찌 그리 펴 놓을 수 있는가. 기절할 일이다.
…쌓이고 모이고 엉킨 것이 오늘 이 대지가 한 점 작은 먼지의 집적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먼지와 먼지는 서로 의지를 삼아 먼지가 엉키면 흙이 되고 먼지가 거친 놈은 모래가 되고 먼지가 단단한 놈은 돌이 되고, 진액은 물이 되고, 더우면 불이 되고 맺히면 쇠가 되고 자라면 나무, 움직이면 바람, 뜨거워 화하면 벌레, 우리는 벌레의 한 종족…
아이가 절간에 똥을 누러 간 사이 초 겨울 늦은 가을에 바쁜 생을 늦추어 한가한 걸음을 걸었다. 이 속도, 저 속도 맞추어가며 살아보려 한다. 잔뜩 들어간 어깨 힘이 쭈욱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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