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구본형
  • 조회 수 5398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6년 9월 8일 06시 42분 등록

요즘 며칠이야 말로 한국의 가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날씨입니다. 이런 날은 도저히 방안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런 생각이 물밀듯 밀려오면, 나는 얼른 커다란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옵니다. 나에게 작은 뜰이 하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가능한 만큼 모두 옷을 벗어 버립니다. 그리고 바람이 나를 스쳐가게 만듭니다. 햇빛을 내 몸으로 담아 보려 애를 씁니다. 책을 한 권 들고 나오 긴 하지만, 내가 그 책을 찾을 때는 그 한가한 무료함에 지칠 때 뿐입니다.

언젠가 어느 성당에서 신부님을 한 분 뵌 적이 있습니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신부님인데 참 좋은 분입니다. 그 분은 이런 날에는 창문을 열고 커튼을 걷고 햇빛이 최대한 방안으로 밀려들도록 해 둔답니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고 방안을 어슬렁거립니다. 그러면 영혼이 얼마나 자유로워지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신부님 방에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쓰여진 액자가 하나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떤 외국인 신부가 한국말로 개발새발 쓴 액자랍니다. 그 액자 속의 글귀와 발가벗고, 깊게 방안을 무찔러 들어오는 가을 햇빛 속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배불뚝이 신부님을 함께 연상하는 것은 참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나도 그 기분을 압니다. 나도 가끔 해보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햇빛이 꽝꽝 쏟아져 버리는 날에는 내 영혼이 어디 있는 지 물어 봐야 합니다. 너 어떻게 살래 물어 봐야 합니다. 그러다가 ‘냅 둬. 나 이대로 살래‘ 하고 외쳐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날엔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입니다.

내 살갗 한 쪽을 스쳐가는 태양의 입자 하나와 내가 만났다는 경이로움에 취하면 됩니다. 질문도 없고 대답도 없습니다. 존재만 있습니다. 이런 날엔 갑자기 칠흑 어둠 속에서 ’응애‘하고 햇살 속으로 쑥 태어난 기분입니다.

오늘은 걸치고 있던 모든 어두운 것들 다 집어 던지고 바람과 햇빛으로 몸을 씻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IP *.189.235.11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6 아리오소 arioso, 대범하고 거리낌없이 [1] [13] 부지깽이 2011.02.18 6736
115 당신은 어떤 나무이고 싶습니까? 변화경영연구소-김용규 2006.05.04 6757
114 삶에 감탄할 줄 아는 타고난 시인 file [5] 구본형 2008.10.31 6797
113 말짱한 영혼은 가짜다 최우성 2012.07.30 6800
112 사랑, 그 다양함에 대하여 부지깽이 2013.01.24 6806
111 나는 과연 자율적인가? 문요한 2012.07.25 6832
110 심장이 뛴 날 이후 구본형 2006.05.05 6867
109 쓸모없는 나무 - 행복숲 칼럼 <12> 변화경영연구소-김용규 2006.06.14 6904
108 흔들리며 피는 꽃 변화경영연구소-김용규 2006.05.18 6915
107 성욕과 열정의 관계에 대하여 부지깽이 2012.10.05 6936
106 돈을 버는 마음의 법칙 구본형 2006.05.19 6939
105 새벽 2시의 용기 [1] 부지깽이 2011.03.11 6944
104 인터뷰:WCCF대표 대니박-리더라면 그대,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라 file [2] 소은(단경) 2009.06.23 6968
103 호박 만세 구본형 2006.05.12 6978
102 엔지니어의 가슴을 열어젖힌 숲 김용규 2014.04.17 6994
101 편지10:<SCENE PLAYBILL>정연주사장 - 내 인생에 핑계는 없다 file [2] 소은 2009.03.10 6997
100 나대로 살고 싶다! 변화경영연구소-문요한 2006.06.06 7005
99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 박승오 2008.03.17 7006
98 경박하지 않게 가벼워지는 법 구본형 2008.08.29 7011
97 끝이 아름다운 사람 문요한 2014.07.02 7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