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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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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9일 00시 03분 등록
바람마저 그리워해야 하는 삶

상강 지나자 단풍이 깊어졌고 서릿발 드리우자 숲도 점점 간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입동에 닿으니 기온 뚝 떨어지고 눈발 흩어지며 찬바람도 제법입니다. 절기가 참 정직하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의 황톳집에 살 때는 입동에 앞서 닥나무 문종이로 문풍지를 달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겨우내 방 안으로 밀려들 찬바람을 줄이려는 채비였지요. 아파트에 살고부터는 두터운 이불과 겨울 옷 꺼내는 일 외에 겨울을 나기 위한 별다른 준비의식을 해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겨울 바람은 육중한 유리창문이 가리웠고, 반 팔을 입어도 좋을 만큼 보일러가 빵빵 돌아가니 그저 네모난 아파트 공간이 참 편리하다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겨울이면 우리집에 이상한 현상이 반복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출은 삼가고 하루 두 번씩 청소를 하는데도 가족 전체의 기침이 잦고, 피부 가려움증도 심해지기 일쑤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몸이 훨씬 무겁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아파트에서는 황톳집에 흐르던 외풍 걱정 없이 따뜻한 겨울을 보내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무와 숲을 공부하면서야 그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란다의 두 겹 유리창을 닫고, 다시 거실의 두 겹 유리창과 방의 모든 창문을 꼭꼭 닫고 지내는 긴 겨울 동안 집안에는 음이온의 수가 감소하고 양이온의 밀도가 높아지는 거죠. 숨을 쉬되 그것은 콘크리트와 본드를 잔뜩 바른 벽지, 각종 가전기기 등이 내뿜는 양이온 덩어리가 담긴 공기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피부 가려움증과 기침이 심해지는 것은 아파트의 나쁜 환경에 갇힌 몸이 살려달라고 보내는 신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가습기나 아침 저녁 환기 정도로는 우리 몸에 필요한 음이온 밀도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닥나무 문종이 대신 두 겹의 두꺼운 유리창. 종이 문풍지 대신 스폰지 방풍 테이프. 밀가루로 쑤어 만든 풀 대신 본드 바른 벽지. 습기와 바람, 유익한 미생물을 담고 있는 황토벽 대신 양이온 덩어리의 콘크리트. 나무문 대신 튼튼한 철문… 그렇게 아파트는 편리한 생활과 프라이버시, 그리고 따뜻한 겨울을 보장하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베리아로부터 떠나온 찬바람이 들어와 양이온 덩어리를 밀어내며 순환할 통로도 함께 막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닥나무 문종이와 문풍지, 흙벽과 구들장, 아랫목을 찾아 이불 하나 덮고 앉아 있자면 방 윗 공간으로 휑하고 불던 외풍. 비록 불편했지만 바깥 공기와 섞이며 쉬지 않고 순환하던 집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한 달만 살아봐도 겨울마다 겪는 이상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또 그저 따뜻한 겨울, 편리한 겨울을 맞고 있습니다.

이 곳 창 밖으로 거센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저 바람이 묻는 듯 합니다.
당신은 왜 아주 비싼 상자 안에서 저 바람 마저 그리워하며 살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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