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는 시간을 넘어선 것이다
중년에 대해 레빈슨은 50~55세를 50대 전환기로, 55~60세를 중년 성인기의 절정으로 보았다. 그는 50대 전환기를 “자기와 세상에 대해 더 많이 탐색하기 위해, 그리고 이후시기에 형성될 구조에 대한 기초를 만들기 위해 기존 생활 구조를 재평가하는 기회”라고 했다. 그리고 55~60세는 “그 시대의 다수의 열망과 목표 실현을 위한 수단”이라고 하였다.
그 어느 연령대에나 그 형태와 방법이 다를 뿐, 자아실현에 대한 열망이 있으며 그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중년의 여성이라 하여 자신의 개발을 위한 시간과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더 적극적으로 할 나이이기도 하다.
나는 20대부터 줄곧 지적(知的) 허기와 지적 허영심에 시달렸다. 지금 오십이 되고도 그런 지적 허기와 허영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욕망 혹은 좀더 돋보이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싶다. 이런 욕망이 50대라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 30대에는 친구들에게 내보이기 위해 토론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밤새워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중년이 되면 젊었을 때의 지식을 지혜와 예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시간에 의존하지만, 예지는 시간을 넘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예지란 지식과 연륜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지는 어떻게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나는 지식보다는 지혜롭고 예지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가진 지식과 지혜에 깊이를 더하고 그 위에 예지력이 더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내가 읽은 책이 동양고전의 맛을 두루두루 볼 수 있게 한 권으로 엮은 신영복의 <강의>를 읽었다.
성공회대학교 교수인 그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풀어서 책으로 펴 낸 것이다. 그는 꼭 읽어야 하는 주요 동양고전을 선별하여 강의하였으며, 그는 특히 관계맺기에 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먼저 작가 신영복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신영복의 저서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역정까지도 존경한다. 1990년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반했다. 행복을 거창하게 생각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은 “통혁당 사건 무기수 신영복의 편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조작된 ‘통혁당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데 동양고전공부하고 서예하고 글쓰는 것에 열과 성을 다 바쳤다. 복역한지 20년 20일 만인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의 고뇌와 사색은 20년내내 이어져 완전히 '인간성이 개조'되는 내적 자기혁명을 이루어 내었다.
20년의 세월 동안 그는 좁은 감방에서 일어난 일과 생각들을 담담하게 적은 편지를 가족들에게 보냈다. 물론 검열을 거친 편지들이다. 나는 그의 글에서 행복과 삶의 의지를 느꼈다. 배움에 대한 의지는 공간이 문제가 될 수 없음도 알았다.
<강의>라는 책에는 힘들고 거친 세상을 살아온 그의 인생관과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다. <강의>는 먼저 <시경>으로 동양고전을 열고 있다. 거짓없는 생각이 시심이며 <시경>은 중국사상과 문화의 모태가 되고 있단다. 그가 소개하는 시 중 일종의 연애시라고 할 수 있는 <모과>가 마음에 든다.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뜻 깊은 만남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변함없는 우정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오얏을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라오.
그 당시에는 남녀 간의 애정표시로 과일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아름다운 풍습인 것 같다. 이 시를 읽으며 우리나라에도 이런 노골적인 연애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전이라 하면 무겁고 어려운 줄 알았는데 이런 시도 실려 있음에 무척 즐거웠다.
그 다음으로 소개한 책이 <주역>이다.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며, 한마디로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觀相)과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저자는 점을 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주역>이란 운명론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예측이며 그 변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 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한 시간보다 고통스런 시간이 많은 것은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있다. 중년이 되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육체의 변화이다. 아침저녁으로 얼굴에 로션과 크림을 열심히 발라도 늘어나는 주름살은 어떻게 할 수가 없고, 집중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 이미 겪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지만 폐경기와 마주쳐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있다. 이러한 육체적인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변화에 대해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저자는 <논어>를 소개하면서 유명한 학이(學而)편을 소개하고 있다.
“배우고 때대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저자는 배운다는 것을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 실천의 덕목 중에는 인간관계의 변화가 있다. 중년의 나이가 되고보니, 전에는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고,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부분에 대해 이해하고 자아반성을 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다음 책으로 <노자>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글 자체가 선시처럼 함축적이고 시적이라 그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 <노자>이다. 또 읽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노자>이다. 나는 <노자>의 부분을 읽으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내 인생관을 물처럼 그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자는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어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가고,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가며,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한다. 또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는가 하면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이다.
중년이 되면 물처럼 좀더 넉넉하게 많은 것을 품을 줄 아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니 어쩌면 저절로 물처럼 순해지고 넉넉해지는 것이 중년이 아닐까 싶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272 | 쌀과자#31_마음의 근력 [1] | 서연 | 2012.12.03 | 2633 |
3271 | 공자도 공부가 부족한 자로를 사랑했다네 [1] | ![]() | 2012.12.03 | 5577 |
3270 | 알려지지 않은 신 5 [1] | 레몬 | 2012.12.03 | 2576 |
3269 | 꿈쟁이 뿌꼬 #4 [4] | 한젤리타 | 2012.12.03 | 2976 |
3268 | 알려지지 않은 신 4 [1] | 레몬 | 2012.11.28 | 2439 |
3267 | 알려지지 않은 신 3 | 레몬 | 2012.11.27 | 2215 |
3266 | 내가 사랑하는 것들 100가지 [3] | 콩두 | 2012.11.26 | 5582 |
3265 | 다시 사랑한다 말 할까 | 장재용 | 2012.11.26 | 2426 |
3264 | 숫자가 신이 되는 사회 | 세린 | 2012.11.26 | 2422 |
» | 예지는 시간을 넘어선 것이다 | ![]() | 2012.11.26 | 2161 |
3262 | 쌀과자#30_선택그리고 리스크 | 서연 | 2012.11.26 | 2625 |
3261 | 국민을 향한 커뮤니케이션 : TV토론 | 샐리올리브 | 2012.11.26 | 2069 |
3260 | 진정한 자아의 발견 [1] | 학이시습 | 2012.11.26 | 3568 |
3259 | 꿈쟁이 뿌꼬 #3 [2] | 한젤리타 | 2012.11.26 | 2564 |
3258 | 완벽주의 유감 [2] | 이희석 | 2012.11.20 | 4043 |
3257 |
2013년 산소통 프로젝트 ![]() | 샐리올리브 | 2012.11.19 | 2850 |
3256 | 우산을 챙길까? 말까? (확률론) [4] [3] | 세린 | 2012.11.19 | 3342 |
3255 | 천 가지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 [1] | 콩두 | 2012.11.19 | 3198 |
3254 | 늦가을 만보 [5] | 장재용 | 2012.11.19 | 5459 |
3253 | “대화가 있는 식탁” [1] | 학이시습 | 2012.11.19 | 5002 |